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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정치 관련 설교를 듣고 싶은 대로 들을 때…
by 고성제2022-02-28

아무리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생각해야 할 원리’를 설교해도 교인들은 각자 정치적 자기 색깔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들을 텐데 그런데도 설교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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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로 나라 전체가 혼란하다. 너무나 혼란해서 모두들 우왕좌왕하고 있다. 나라가 얼마나 쪼개져 있는지, 어디서든 말 한마디 하기도 조심스럽다. 교회의 회중도 둘로 나뉘어 있어서 목사가 현 상황에 대해 무엇이라도 말을 꺼내면 어느 쪽에서든 곧바로 반발한다. 그래서 ‘정치에 대한 설교’는 너무 위험하다. 


하지만 사회가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데 교회는, 목사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천국’만 설교해도 되는 것일까?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주제’를 ‘아무와도 연관되지 않는 방식’으로 천연덕스럽게 설교만’ 하는 게 가능할까? 그래도 되는 걸까? —고성제,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 ‘너는 어느 편’인지 묻는 당신에게’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를 낸 이후 곳곳에서 반응이 있었다. 고맙게도 기독교 언론 매체들이 보도해 주었고, 방송 인터뷰 요청도 여러 차례 받았다. 덕분에 수십 년 만에 고교 동창이 뉴스를 봤노라고 전화해 오기도 했다. 그런 중에는 목사님들의 모임에서 책을 간략히 소개해 달라는 초대도 있었는데 그 때마다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질문은 거의 빠지지 않았다. 


• 아무리 그렇게 ‘그리스도인이 생각해야 할 원리’를 설교해도 교인들은 각자 정치적 자기 색깔에 따라 듣고 싶은 것만 들을 텐데 그런데도 설교해야 할까?

• 정치의 ‘정’(政) 자만 들어가도 성도들의 낯빛이 곧바로 변할 텐데, 과연 설교할 수 있을까?

이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나의 의견은 이렇다. 


일단 그들이 듣고 싶은 대로 듣는 것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해 설교자가 좌절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혹시 그 일로 인해 심한 좌절감이 든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혹시 내가 설교로서 회중을 지배하려 하지는 않았는지, 투표와 관련하여 자신이 회중의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려하지는 않았는지 말이다. 무엇을 기대하였기에 좌절감을 맛보게 되었을까? 만약 자신의 설교를 통해 회중의 정치적 선택에 ‘결정적 영향’을 주기를 기대했다면 그 기대 자체가 무리한 (그리고 무례한) 기대다. 


그렇다면 정치 상황 속에서 설교자는 무엇을 설교하고, 또 무엇을 기대해야 할까? 그리고 설교자의 설교 행위는 회중의 민주적 의사결정과 모순되지 않아야 할 텐데 과연 정치 관련 설교가 그것과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 


필자는 책에서 각 이데올로기에는 그것이 발생한 시대적 배경이 있고, 우리 각자가 그 중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데에도 이유와 배경이 있음을 이해해야 한다고 이미 언급했다. 그것은 엄연한 현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각 사람이 그에게 주어진 여건과 환경, 그리고 그 가운데서 겪은 일들과 상처들을 안고 사투를 벌인 끝에 지금 그 자리에 와 있음을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설교자는 그런 사람들을 대상으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성경적 가치와 원리’를 설교하는 것이다. ‘최종적인 답’을 주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원리’를 설교한다는 말이다. 그럴 때 각자는 “자신의 배경과 경험이 남긴 골 깊은 흔적” 위에서, 그 위로 내리는 “성경적 원리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자기 상황에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일지를 분별”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들의 몫으로 남겨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설교로서 그들의 최종적인 선택을 강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조차 하지 않으시는 일을 설교자가 하려는 일이 될 것이다.


필자는 설교자가 이런 마음으로 성경적 원리를 설교하고, 결과는 그들의 숙고와 선택에 맡겨두는 것이 사회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민주적 관념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개인들이 그렇게 숙고한 결과 선택한 선택의 총합을 ‘국민적 결정’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결정하든 그것은 그 때까지 그 사회가 역사적으로 겪어 온 모순이 반영된 결과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하나님이 가장 기뻐하실 결정이라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그 때까지 겪어 온 모순 속에서 그 사회가 민주적 절차를 통해 도달할 수 있는―비록 아쉬울지 몰라도―최선의 결론이라는 말이다(불만족스러울지 몰라도 어찌할 방법이 없다).


두 번째 질문은 “정치의 ‘정’ 자만 들어가도 성도들의 낯빛이 곧바로 변할 텐데, 과연 설교할 수 있을까?”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사실 그렇지 않은 현장은 어디에도 없다는 말을 하고 싶다. 필자의 현장도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설교자의 선택은 ‘그러니까 일단 피하자!’가 아니라 ‘그럴지라도 방법을 찾자!’여야 한다. 그래야 고심이 시작되고 기회를 보는 등 대책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가 채택한 대책은 솔직해지자는 것이고, 마음을 급하게 먹지 않기로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는 솔직히 필자의 부족함을 고백하고 4개월의 연구 기간을 요청했고, 그 기간 동안 성실하게 홀로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성도들은 4개월간 가족들과 떨어져 홀로 고독하게 지내는 담임목사를 보았다. 그렇기에 그들은 담임목사가 돌아와서 하는 설교에 대해 존중할 마음을 가지게 되지 않았을까? 게다가 필자는 성급하게 한 번의 설교로 끝내려 하지 않았다. 남들은 정치 관련 설교를 너무 부담스럽게 생각한 나머지 아예 피하거나, 다루어도 설교 중에 5분 정도 슬쩍 화내고 지나가지만 필자는 그런 방식은 효과도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일을 그르친다고 보고 무려 여덟 번 혹은 열 번의 연속 설교를 했다. (단순히 ‘정치 이야기’ 하는 게 아니라 성경의 원리와 가치를 설교하는 것이다! 그러니 “정치 설교를 무려 여덟 번이나!?”라고 생각하지 말기 바란다!) 서둘지 않고 조금씩 끊어서 먹이는 것이다. 성도들이 그것을 다 이해할 수준이 되는가는 염려하지 마라! 어차피 설교는 모두가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성도들 가운데 ‘와! 쉽게 이야기할 문제가 아니네!’라고 느끼는 정도만 해도 무익하지는 않다. 그들은 이제 자신의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다른 사람을 윽박지르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조금씩 끊어 먹이는 설교조차 첫 설교는 양측 모두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내용으로 설교했다. 그 설교를 통해 당신의 입장은 당신이 살아온 배경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과, 그런 의미에서 그들의 생각은 상황이 바뀌면 또 달라질 수 있음을 직시하게 했다. 그렇게 하고 나면 ‘자신들의 입장이 변할 수 없는 진리가 아님’은 저절로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이제 ‘그러면 언제나 옳은 입장은 뭘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게 되고, 자연스레 하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이라는 결론에 이르고 만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 주부터 ‘언제나 옳은 하나님의 말씀’ ‘언제나 기준이 되는 그 분의 시각’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이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방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는 것이 설교자의 역할인 것이다.


대선이 코앞이다. 대선이 끝난 후에도 각종 선거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는 그 때마다 갈등이 심각할 것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 우리는 고심해야 한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계속 피하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를 현실과 무관한 무익한 종교로 여기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고 나면 이제 그들의 마음을 붙잡는 일은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설교자의 책임은 막중하다. 텍스트를 콘텍스트와 연결 지을 책임이 설교자에게 있기 때문이다.

대선이 코앞이다. 대선이 지나더라도 각종 선거가 줄줄이 이어질 것이다. 시대의 급격한 변화는 그 때마다 더욱 더 깊은 대립과 갈등을 예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고민해야 한다. 언제까지 피할 수는 없을 테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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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고성제

고성제 목사는 부산대학교 상과대학과 총신신대원(M.Div.)을 졸업하고 현재 평촌새순교회 담임목사와 (사)복음과도시의 이사로 섬기고 있다. 정치 공간에 그리스도인으로 서기의 저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