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 나의 여정
by Scott Hubbard2022-12-03

의심은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다. 특히 수치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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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컴퓨터 파일 중에는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작은 문서 하나가 숨겨져 있다. 아, 내 어두운 시절의 잔재여.


그 문서는 나 자신에 관한 메모,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시편 기자처럼 영혼의 대화를 연습한 노력이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의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분열하느냐?


문서 속 내용은 예측할 만한 제안들로 시작한다. “하나님을 찾아라”는 첫 번째 구절이 나오고 이어서 여러 구절이 따라온다. 네 번째에 가서는, “너 자신을 믿지 말라.” 그리고 끝을 향해서 나아간다. 열여섯째와 열아홉째는 “예수께서 성취하신 예언을 생각하라”와 “위대한 성도들을 기억하라”라고 되어 있다. 어둠 속을 걷는 사람은 그 어떤 별빛에도 기뻐한다. 


이런 문서는 하나님, 성경, 복음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진지한 의심을 한 적이 없는 사람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일 것이다. 또한 그들은 경험이 없기에 의심이 들 때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한 적도 없다. 그러나 세상에는 의심하는 도마가 적지 않다. 그들은 어떤 사람인가? 성격과 환경, 내재하고 있는 죄가 만들어낸 슬픈 혼합으로 인해 “내 눈으로 보지 않으면…”(요 20:25) 도무지 못 믿겠다고 하는 이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이다. 그러함에도 때때로 믿음이 곤경에 빠지고 영혼이 분열된 것처럼 느낄 때가 있다. 


내가 믿습니다. 믿음 없는 나를 도와주십시오(막 9:24).


두 마음


이상하게도 형식상 그리스도인으로 살아온 거의 이십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한 적이 없다. 진정한 믿음이 주는 첫 기쁨, 첫 번째 구원이 가져다준 격정,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이 주는 첫 감격을 맛본 후에야 나는 의심의 첫 그림자를 느꼈다. 그건 마치 강도가 불시에 습격한 것과 같았다. 결과는 똑같았다. 잠시 땅에 쓰러져 피를 흘리면서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의심이 어디에서 온 걸까? 왜 하필이면 나일까? 내게는 단서가 없었다. 대학을 다니던 어느 날, 갑자기 도무지 통제할 수 없는 것처럼 이전의 확실성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그건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질문들이, 결코 하고 싶지도 않은 질문들이 어떻게든 내 마음을 뚫고 들어왔고, 나는 방어 자세로 발버둥하고 있었다. 네가 믿는 성경이 과연 철저한 조사를 이겨낼 수 있을까? 이상한 목소리가 물었다. 그리고 더 어두운 순간에 이런 목소리까지 들렸다. 하나님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아? 수없이 많은 밤을 어둠과 논쟁하다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같은 질문이 나를 찾았다. 


의심과 관련해서 오스 기니스(Os Guinness)가 1976년에 쓴 책 제목은 의심의 실체를 정확하게 짚고 있다: 두 마음(InTwo Minds). 의심은 당신을 분열시켜 두 개로 만든다. 당신을 지킬과 하이드로 만든다. 가장 불편한 곳에서 당신을 둘로 쪼갠다. 나의 한 마음은 “[나의]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나의] 명철을 의지하지”(잠 3:5) 않기를 원했다. 그러나 나의 다른 마음은 그것을 지적 도피라고 불렀다. 한 마음으로 나는 내가 사랑하는 주님의 모습을 찾아 성경을 읽었고, 또 다른 마음으로 나는 회의적인 시선으로 주님을 보았다. 한 마음으로 나는 믿었다. 그러나 다른 마음으로 나는 의심했다. 야고보가 말한 것처럼 나는 “두 마음을 품은 사람”(약 1:8)이었다.


두 마음이 되는 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린다. 의심이 바로 그 일을 한다. 거의 2년 동안 나는 그동안 메모한 공책을 샅샅이 뒤지고, 고민에 빠진 생각을 기록하고 또 간구하는 기도를 쉬지 않았다. 나는 강박적으로 설교를 들었고, 악마를 쫓아낼 수 있는 음성을 찾아 헤매기도 했다. 변증 기관에 여러 차례 전화했으며, 그중 한 번은 자정에 전화를 걸었다. 은사를 추구하는 분위기에 빠져있던 시기에는, 어느 비참한 밤에 잠언 전체를 읽고 제발 구원해 달라고 기도하고 싶은 충동까지도 느꼈다(그때 잠언 중간 정도까지는 읽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미 말했다시피, “의심 처리 방법”이라는 문서를 만들었다.


어둠에 빠진 절망적인 사람은 뭐든지 잡으려고 하고 또 비틀거린다. 그리고 때로는 하나님의 인자하신 섭리로 길을 찾게 되기도 한다.


의심 너머의 길


의심으로 가는 길이 많고 신비로운 것처럼, 의심에서 벗어나는 길도 마찬가지이다. 예를 들어, 존 블룸(Jon Bloom)이 관찰한 것처럼, 예수님은 다양한 의심에 대해 다양한 자비로 응답하셨다. 세례 요한에게는 부드럽게 상기시켜 주셨고(마 11:2-6), 베드로에게는 책망의 질문(마 14:28-33)으로, 또 도마에게는 고통스러운 지체함(요 20:24-29)으로 그들의 의심을 처리하셨다. 언제나 그렇듯, 예수님은 의심의 여지 없이 가장 훌륭하고 유일하며 오류 없는 안내자이시다. 


의심이 가진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의심에는 공통 요소가 있다. 그래서 과거에 의심했던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몇 마디 정도는 조언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다음은 내가 어둠 속에서 우연히 발견한 몇 가지 경로이다. 그 누구도 나를 즉시 어둠 밖으로 빼내지 못했다(의심으로부터의 해방이 한순간에 일어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고 보면, 여러 사람이 힘을 합쳐 “동틀 때의 햇살”처럼 “의인의 길”이 되어 “대낮이 될 때까지” 나의 길을 “점 더 빛나게” 비추었다(잠 4:18).


1. 의심을 믿음의 시련으로, 정상적인 과정으로 이해하라. 


앞에서 말했듯, 의심은 마치 강도처럼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닥쳐서 감각을 잃게 만든다. 내 경우에는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년 동안과 진짜 그리스도인으로 살았던 몇 달 동안, 아무도 내게 의심에 관해서 이야기한 사람이 없었기에, 더 예상하지 못했던 면이 있다. 정욕, 교만, 탐욕, 자립, 분노, 조바심 등등, 이것들은 이미 알려진 적이기에, 충분히 계획을 짜고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의심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마치 총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총상을 입은 군인이 된 것 같았다. 


의심이 가진 힘 대부분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니까 우리를 당황하게 하고 방향 감각을 잃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경험의 한계를 넘어서는 느낌을 주는 능력 말이다. 느리지만 진리를 이해한다는 것은 실로 가슴 벅찬 일이다. 의심은 어떤 면에서 독특하긴 하지만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성도가 직면했던 정상적인 믿음의 시련이다. 악마의 첫 번째 유혹(창 3:1) 중 하나인 의심은 여전히 가장 인기 있는 유혹으로 남아 있다.


의심 속에서 방황하던 중에 읽었던 기독교 철학자 앨빈 플랜팅가(Alvin Plantinga)의 글이 생각난다. 그는 의심을 단순히 옛 자아가 끼치는 지속적인 영향력의 또 다른 표현(엡 4:22)으로 묘사했다. 옛 자아는 본성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의 말을 더 신뢰한다. 그러므로 여전히 “이 사망의 몸”을 소유한 우리가 때때로 여전히 의심과 불신앙을 다뤄야 한다는 사실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롬 7:24).


사실, 하나님의 백성 중 일부는 항상 의심한다. 의심이 성도들 사이에서 가장 널리 퍼진 죄는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세(출 3:13), 아삽(시 77:7-9), 하박국(합 1:2-4), 사가랴(눅 1:18), 세례 요한(마 11:2-3), 베드로(마 14:31), 도마(요 20:25) 같은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든 이 의심이라는 두려운 원수와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의심은 결코 우리를 한계 너머로 보내지 않는다. 의심은 우리를 자동적으로 불신자로 만들지 않는다. 그 대신 의심은 각종 유혹과 죄에 저항하는 동시에 의심과도 싸웠던 믿음의 선배가 걸어갔던 대열에 우리도 막 합류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2. 털어놓을 친구를 찾아라. 고인도 괜찮다.


의심을 변칙으로 취급하는 것은 여러 면에서 나에게 상처를 주었다. 태양이 비추지 않는 어두운 세상에 혼자라는 느낌이 들었을 뿐만 아니라 누구와도 얘기 나누는 걸 주저했다. 오해와 어리둥절한 눈빛, “아니, 난 너를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앞으로 그런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와 같은 조심스러운 반응이 나올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마침내 내 생각을 나눴을 때, 내가 만난 건 긍휼이었다(유 1:22).


모든 사람이 다 이런 경험을 공유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안다. 모두가 다 공감하는 친구를 만나 털어놓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나 지금 행여나 혼자 끙끙대며 의심의 터널을 지나고 있다면, 친구를 찾아 속을 털어놓아라. 친구가 보이는 긍정적인 반응에 당신은 분명히 놀랄 것이다. 무거운 짐을 지기 위해 창조된 성도들의 어깨(갈 6:2)가 의심을 짊어지지 못할 만큼 약하지 않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누군가에게 털어놓는다는 건 위험하지만 충분히 시도할 만한 가치가 있다. 그 정도로 의심은 나 혼자 힘으로 이겨내기에는 너무도 강력하다. 방향을 잃게 하고, 기만하며, 또 정신을 어둡게 하기 때문이다. 


살아서 가까이에 있는 성도뿐 아니라 고인이 되었거나 멀리 떨어져 있는 성도에게서도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내게는 레드 마운틴 교회(Red Mountain Church) 찬송, 앤드류 피터슨(Andrew Peterson)의 음악,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의 시, 그리고 C. S. 루이스의 책이 다른 사람들이 시간을 낼 수 없을 때, 내 곁에서 나를 지켜주었다.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이들은 의심이 초래한 들리지 않는 고뇌를 언어로 표현할 줄 아는 사람들이다. 또한 감히 나는 할 수 없었지만, 의심의 바다 한 가운데에서조차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은혜를 적용하는 방법까지 알았던 뜨거운 영혼이었다. 그들은 내가 의심의 수준을 뛰어넘는 삶을 상상하도록 도와주었다.


(소셜 미디어 시대이기에, 간단한 경고가 필요하다. 얼굴을 맞대고 친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 온라인에서 무분별하게 게시물을 올리는 것보다 훨씬 낫다. 의심은 숨겨야 할 대상도 아니지만, 또한 실시간으로 광고할 대상도 아니다.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글로만 판단하기에는 우리의 시각은 너무도 왜곡되어 있다. 게다가 소셜 미디어의 조언은 신뢰하기 힘들다. 따라서 공개적으로 내 속을 털어놓는 것으로는 열매를 맺기 힘들다.)


의심은 고립시키는 속성이 있다. 특히 수치감을 줄 수 있으며, 때로는 설명 자체가 불가능하기도 하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은둔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으며, 교제는 천천히 기적을 일으킨다.


3. 의심에서 벗어난 시간을 가지라.


의심의 손아귀는 믿음의 목구멍을 조여 믿음의 호흡을 막는다. 따라서 숨이 막힌 우리는 자연스럽게 의심에 관심을 가진다. 목이 졸리고 있는 사람이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있을 리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악의 일 중 하나가 바로 거의 강박증 수준으로 의심에만 온통 집중하는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저지른 가장 최악의 일 중 하나이다. 의심도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냥 놔두면 혼자 알아서 죽기도 한다. 


물론 가장 성가신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답을 찾는 것은 안도감을, 그것도 궁극적인 안도감을 줄 수 있다. 나는 책과 설교, 친구와의 대화에서 의심에 대한 몇 가지 해결책을 찾아서 내 목을 짓누르던 손가락 몇 개를 떼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직접적인 답변은 의심에 대한 해결책의 일부에 불과했으며, 그리고 감히 말하건대, 결코 가장 중요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돌이켜보면, 의심을 극복하려고 내가 했던 많은 시도는 마치 거울을 많이 쳐다봄으로써 더 잘생긴 얼굴을 만들려는 것과 같았다. 그런 노력은 단지 나를 더 나 자신 속으로 파고들도록 만들었을 뿐이다. 내게 필요했던 것은 의심하는 시간보다 더 많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변증 자료에서 벗어나 더 많은 것을 읽고 봐야 했다. 내면의 고통을 뛰어넘는 더 많은 것에 관하여 일기를 써야 했다. 의심은 온전하고 깨끗한 햇빛이 필요하다. 그러나 의심과의 씨름은 종종 나를 햇볕이 들지 않는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그렇다면 의심하는 사람이 답을 찾는 것 외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것인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하늘 아래에 오래 앉아서 피조물로서 영혼의 산소를 깊이 호흡하라(시 19:1; 시 104:24).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울고 또 기뻐함으로써 자아에서 벗어나라(롬 12:15). 모임에 참석해서 당신 그리고 당신의 문제보다 훨씬 높은 영광을 바라보고 찬양하라(골 3:16). 합당한 직업이 주는 고된 노동 속에서 마음의 휴식을 찾으라(골 3:23). 그리고 무엇보다 천천히, 기도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라(히 3:1).


4. 하나님을 계속 찾아라.


오랫동안 의심에서 허덕이다 보면, 어쩌면 결코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 같다는 절망감에 빠질 수도 있다. 그게 바로 나였다. 그런 식으로 나는 빠졌다. 뼛속까지 파고든 일종의 숙명론에 사로잡혔던, 가장 깊은 의심의 계절이었던 그 며칠 또는 그 몇 주를 나는 기억한다. 싸움은 아예 쓸모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내부의 깊은 분열은 손을 쓸 수 없을 지경이었다. 나는 결국 의심의 관점에서 미래를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자비롭게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은 언제나처럼 나를 깨우셨다. 하나님은 의심이나 긴 투쟁을 쉽게 간과하도록 만드는 단순한 진리를 일깨워 주셨다. 그건 다름 아니라 하나님은 구원하신다는 진리이다. 살아계신 하나님은 우리를 구하시고,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밖에서부터 들어오셔서 우리가 기대하는 수준을 훨씬 뛰어넘는 하나님이시다. 파라오를 무너뜨리고 바다를 가르신 하나님이시다. 하늘을 가르고 땅을 뒤흔드시는 하나님, 그리스도를 보내고 무덤을 비우시는 하나님, 하나님의 선은 결코 제자리에서 멈추지 않는다. 하나님에게 불가능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단지 우리가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마태복음 7:7-8의 예수님 말씀은 모든 숙명론에 마침표를 찍는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다 파헤치기에 의심은 너무 깊다는 느낌이 들 수 있다. 영혼을 덮고 있는 의심의 그림자가 너무 짙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함에도 어두움에 맞서서 구하고 계속 구하고, 찾고 계속 찾고, 또 두드리고, 계속 두드려야 한다. 그러다 보면, 어떤 시간에 또 어떤 장소에서, 한 단어로 또는 다른 말로 삼중 약속이 이루어질 것이다. “얻을 것이요 … 찾을 것이요 … 열어 주실 것이다.”


5. 인내를 가지고 구원을 기다리라.


그러나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구하여라, 그리하면 주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간구와 응답 사이에 얼마나 긴 시간이 걸리는지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시간이 길 수도 있다. 


도마 이야기는 그래서 도움이 된다. 


“나는 내 눈으로 그의 손에 있는 못자국을 보고,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어 보고, 또 내 손을 그의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서는 믿지 못하겠소!” 여드레 뒤에…(요 20:25-26).


여드레가 지나서. 왜 여드레인가? 잠긴 문이 도마에게 다가가시는 예수님을 막을 수 없다면(요 20:26), 기다리는 시간도 방해물이 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부활하신 주님은 방해받지 않으셨다. 그는 일부러 지체하셨다. 도마가 한 시간이나 그날 오후에 답을 얻도록 하지 않고, 그가 고뇌에 찬 여드레를 보내도록 내버려 두었다.


예수님에게는 언제나처럼 나름의 이유가 있다. 우리는 그 이유를 다 알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구원하기 위해 기다리실 때, 그 기다림을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주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우리는 안다. 의심은 우리를 유혹하고 고문할 뿐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침을 준다.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도마와 함께 배운다. 하나님께서 지키지 않으시면 우리의 믿음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깨닫게 된다. 자기 불신이라는 필수 덕목을 배운다(잠 3:5). 다른 사람의 약점을 동정하는 법을 배운다. 그리고 “너는 결코 하나님을 찾아내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는 절망 앞에서조차, 우리는 하나님을 찾는 법을 배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


자기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더딤은 언제나 자비로운 지체이다. 그리고 때가 되면, 신실하게 주님을 기다린 모든 성도는 다 윌리암 쿠퍼(William Cowper)의 찬송 “여호와이레, 주님이 공급하신다”(Jehovah Jireh, The Lord Will Provide)에서 진리를 느낄 것이다.


기다려라, 그의 알맞은 도우심을

늦더라도, 기다려라. 

그 약속 지체되더라도 

너무 늦지 않으리니. 


기다리는 내내 예수님을 떠나지 않는 이들을 위해 말하고 싶다. 마침내 우리도 도마처럼 외칠 것이다. 무릎 꿇고서, 경외의 마음으로, 의심을 걷어버리고, 큰소리로 고백할 것이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 


그러니 의심이 가져다주는 모든 질문 속에서도 무엇보다 귀를 기울여 예수님의 음성을 듣자. 두 눈에 힘을 주어 그를 보자. 그가 친히 오셔서 화평을 말씀하시고 모든 흑암과 의심을 넘어 빛의 땅으로 인도하시길 간절히 기도하자. 



원제: Doubt: A Personal History

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무제

어두움에 맞서서 구하고 계속 구하고, 찾고 계속 찾고, 또 두드리고, 계속 두드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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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Scott Hubbard

스콧 허바드는 Desiring God의 에디터, All Peoples Church의 목사이다. Bethlehem College & Seminary를 졸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