홉스와 이사야: 역사를 바라보는 상반된 두 시각
by Dennis L. Sansom2022-12-05

수천 명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악으로 물든 이 땅에도 푸른 풀이 자라고 잔잔한 개울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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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과 1991년, 두 번에 걸쳐서 나는 1월 학기 동안 학생들을 그룹으로 만들어 스위스와 독일로 데려갔다. 두 번 다 우리는 악명 높은 집단 수용소 다하우(Dachau)에 갔다. 최소한 3만 5,000명의 유대인이 살해된 악이 발생한 곳에 서 있는 것은 감정적으로 힘든 경험이었다. 주유소 옆에 선 채로, 수천 명이 묻힌 곳을 바라보며 나는 악으로 물든 이 땅에도 푸른 풀이 자라고 잔잔한 개울이 흐른다는 사실에 놀랐다.


강제수용소가 있던 자리가 어떻게 회복될 수 있는가? 어떻게 독일이 번영하고 민주주의 국가로서 움직일 수 있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인간이 문명을 계속 이어가야 한다고 다시 믿을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질문 뒤에는 사실 더 큰 질문이 있다. 인류 역사의 원동력은 무엇인가? 17세기 영국 철학자 토머스 홉스와 히브리 예언자 이사야가 내놓은 전혀 다른 두 가지 대답을 대조함으로써, 역사 속에서 우리가 과연 어떤 존재인지에 관한 중요한 교훈을 배울 수 있다.


영원한 갈등에 대한 홉스의 설명


홉스는 1642-51년에 걸쳐서 지속된 격동의 시대, 파괴적인 영국 내전을 온몸으로 겪은 사람이다. 사회적 혼란을 두려워했던 그는 그 극복을 위해 리바이어던(Leviathan)을 썼다. 그는 인간의 폭력적 본성을 길들이고 정의를 보장하는 독재 통치자를 옹호했다.


홉스에게 자연 그대로의 상태는 인간과 인간을 싸우게 하는 끊임없는 전쟁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고독하고 가난하며, 추악하고 잔인하고 또 짧은” 인생이다. 우리는 밤마다 문을 꼭 잠가야 하고, 행여라도 극악무도한 적과 함께 방에 갇히면 권총을 꼭 쥐고 있어야만 한다. 이토록 무서운 세상에서 의지할 것은 두 가지 자연법칙뿐이다. 첫째, 평화롭게 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좋다. 둘째, 인류의 갈등 성향을 고려할 때, 자기방어는 자연스러운 권리이다. 따라서 정부는 순응을 강요해야 하고, 거친 반대자를 진압할 권한을 가진다. 


홉스의 주장에는 일리가 있다. 인류의 역사는 갈등과 폭력으로 가득하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인과 민간인 2,200만 명이 사망했고, 2,300만 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많은 이들이 제1차 세계대전은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해서 꼭 필요했던 전쟁이었다고 자위했다. 그러나 고작 한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또 한 번의 전쟁이 더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발발했다. 6년간 이어진 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8,500만 명이 죽었다.


전쟁이 가져다준 참상을 겪은 인류는 이제 대량 학살을 중단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을까? 그건 착각이었다. 또 한 번의 세대가 지나기도 전에 소비에트 연방, 중국, 그리고 캄보디아의 마르크스 공산주의 정권의 폭정 아래 무려 6,000만 명이 정치적 이유로 죽었다.


이제 우리는 다시 우크라이나 전쟁과 아시아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직면했다. 20세기만 봐도 인류는 끊임없는 갈등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으며, 역사를 움직이는 힘은 전쟁을 도발하려 하거나 전쟁 도발에 맞서 자기방어를 하려는 사람들의 집단 의지라는 홉스의 설명이 맞는 것 같다. 많은 사람이 평화와 문명 개선을 위해 노력하지만, 한편으로 일부 사람들에게는 홉스가 옳다. 인류 역사를 정의하는 것은 파괴하는 세력인 것이다. 


이사야의 긴 이야기


또 다른 기록은 역사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이사야의 위대한 환상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글은 인류 역사에 대한 하나의 예언적 해석으로 읽힌다. 이사야서가 기록된 시대는 기원전 722년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이어서 바빌론이 기원전 586년에 유다와 예루살렘을 황폐하게 만들고, 유대 민족이 전쟁으로 파괴된 혼란의 시기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사야는 홉스의 세계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는 시대가 가져다준 분노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며 정의를 위해 여전히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사야는 더 긴 줄거리를 바라본다. 칼과 창이 변하여 괭이와 낫이 되는 날, 세상의 모든 은혜가 예루살렘에 이르고 사람들이 더 이상 울부짖지 않고 함께 나누는 재물, 서로를 향한 존경,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주를 향한 사랑을 모두가 누리게 되는 날을 향해서, 지금도 여호와는 한 발 한 발 인간 역사를 심판하고, 움직이고, 또 인도하신다. 


이사야 58장61장의 환상에서 이사야는 폐허가 된 성읍을 재건하고 무너진 성벽을 수리하며 거리를 복구하는 특별한 무리의 활동을 설명한다. 그들은 주님의 주권적 섭리 사역에 동참하여 역사의 상처를 회복함으로써 주님이 주시는 은혜의 해가 드러나도록 하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증오와 폭력의 잔해를 극복하고, 세대의 슬픔과 아픔을 치유하며, 만인이 참 주님을 올바르게 영접할 수 있도록 사회를 준비시킨다. 


전쟁은 최종 결론이 될 수 없다


이사야에게 전쟁은 현실적이고 끔찍하지만, 그것은 결코 마지막 결론이 아니다. 인류 역사와 민족의 운명이 품고 있는 진짜 주제는 하나님의 손이 멸망의 세력을 이기고 인간을 본래 창조된 목적으로 회복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신다. 오케스트라를 이끄는 위대한 지휘자처럼, 하나님은 인간이 만들어내는 각종 파괴로 얼룩진 불협화음의 악보 너머로 그의 백성이 공동체 생활을 축하하는 장대한 크레센도의 화음을 내는 그날을 향해 움직이게 하신다. 폭력적인 세상에서 주님의 섭리가 역사하는 것을 보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멸망의 세력 가운데서도 정의와 공의, 그리고 화평과 인간의 성취를 위해 씨름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고 또 그 사역에 참여하는 것이다. 


인류 역사의 또 다른 힘을 이사야가 예언했다. 회복의 힘은 폐허를 수리하고, 성벽을 재건하고, 무너진 곳을 고치고, 나아가서 새 하늘과 새 땅의 기초를 놓는다. 


그러나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이사야의 믿음은 단순한 희망 사항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 절망하는 사람들을 잠재우기 위한 아편이 아닌가? 아니다.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회복의 원리에 대한 이사야의 믿음은 홉스가 주창하는 파괴의 원리만큼이나 역사 속에서 우리에게 경험으로 생생하게 다가온다. 


역사하는 하나님의 신학


자연과 인류 역사가 통합하는 과정에서 볼 수 있는 하나님의 목적(teleology)은 지금도 작동하고 있다. 다하우 밖에서 다시 자라기 시작하는 풀밭에서도 우리는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적은 거기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다.


2007년, 나는 노르망디 해변에 갔다. 오마하 해변에서 우리는 1944년 6월 6일, 거의 2,400명의 미군이 죽거나 다친 곳에 서 있었다. 이 얼마나 끔찍한 비극이고 손실인가? 하지만 끊임없이 부서지는 파도 소리와 함께 해변은 조용하기만 했다. 그날 늦게 우리는 세계에서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매력적인 풍경의 하나인 미국인 묘지에 갔다. 죽음이라는 공포에서 어떻게 그런 아름다움이 나올 수 있을까? 어떻게 노르망디와 다하우 같은 곳이 (그리고 인류 역사의 다른 수천 곳이) 회복되고 재건되고 또 치유될 수 있는 걸까? 


두려움과 파괴와 전쟁이 우리 곁에 있다는 것도 사실이지만, 하나님과 그의 회복이 동일하게 역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인간 경험에서 희망이 완전히 증발한 적은 없었다. 문명은 계속된다. 아이들은 태어나고 자란다. 아름다움은 지속되고, 하나님과 선하심에 대한 믿음은 여전히 자리를 지킨다. 파괴는 회복을 가져올 수 없다. 악은 선을 만들어낼 수 없다. 그러나 주님은 이사야가 예언한 대로 혼돈 속에서도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지금도 씨름하고 계신다. 이제 한 가지 질문만이 남는다. 당신과 나는 지금 어느 쪽에 기여하고 있는가? 



원제: 2 Competing Visions of Histor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이사야는 시대가 가져다준 분노와 혼란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가 모든 민족의 주님이시며 정의를 위해 여전히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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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Dennis L. Sansom

데니스 L. 샌솜. Samford University(Birmingham, Alabama) 철학과 은퇴 교수. 기독교 윤리, 기업 윤리, 환경 및 의료 윤리 등에 주로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