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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세우기

‘오직 믿음’에 대한 묵상
by Thomas Schreiner2019-02-04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 중 하나는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른다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다. 이 표어가 선포하는 내용은, 구원이란 우리 자신이 행한 의로운 일들을 바라보는 데서 비롯되지 않고, 우리 밖에 있는 다른 이, 즉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을 바라보는 데서 주어진다는 것이다. 성경과 초기 교부들의 가르침으로 돌아가기 위한 갈망에서 시작된 이 구호는 교회를 개혁하고 성경의 정통성을 회복하려는 외침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5세기가 지난 지금, 우리는 다음과 같이 질문할지도 모른다. 오늘날도 여전히 ‘오직 믿음’의 교리가 중요한 문제인가? 이신칭의 개념은 단지 지나간 시대의 향수만을 불러 일으키는 오래된 유물에 불과한 것인가? 나는 오늘날에도 ‘오직 믿음’이라는 종교개혁 시대의 부르짖음을 끊임없이 교육하고 또 소중하게 다루어야 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외침은 성경의 가르침을 요약해 주고 있으며, 더불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결코 변화시키는 능력을 상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시대와 장소에서 전파된다.


누군가는 단순히 전통을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오직 믿음’의 교리를 고수하고 있지만, 우리는 그 교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기 때문에 지켜 내야만 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은 경직되고 까다로운 정통의 산물이 아니다. 이신칭의는 역사 전반에 걸쳐서 우리의 사고와 마음에 호소하는데, 이는 인간 상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들 가운데 ‘어떻게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옳다고 인정될 수 있는가?’라는 문제와 씨름하고 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 1623–1678)은 이신칭의가 갖는 목회적인 연관성을 입증한 바가 있다. 튜레틴은 우리가 거룩하고 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생각해 볼 때에만, 칭의 문제에 대한 ‘논란’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하늘의 법정에 이르러 눈앞에 계신 재판장의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의 광명함은 별들도 어둡게 하며, 그 능력은 산을 녹이고, 그 진노하심은 땅을 진동케 한다. 그의 공의하심은 그 어떤 천사도 나타낼 수 없고 유죄인 자를 무죄라 판결하지도 않으며, 죄에 대한 그의 형벌은 지옥의 가장 깊은 곳까지도 이른다. 그리고 즉시, 인간의 헛된 믿음은 소멸하고 멸망하며, 인간의 양심은 하나님 앞에서 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다윗처럼 ‘여호와여 주께서 죄악을 지켜보실진대 주여 누가 서리이까’라며 울부짖는다. 죄 의식과 하나님의 진노로 말미암아 인간의 마음이 전적으로 두려움에 휩싸이게 될 때, 한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무죄 판결을 받고 의로운 사람으로 간주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안에 내재하는 의와 불완전한 거룩 때문인가? 아니면 우리에게 전가된 그리스도의 의와 순종 때문인가?”


여전히 상관 있다


우리는 왜 이와 같은 성경의 진리가 오늘날에도 중요한 문제인지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는 신학적인 논쟁이 좋아서 신학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튜레틴이 지적하는 바 문제의 핵심은 개인적인 차원에 있다. 우리는 마지막 때, 즉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고 이야기하는데, ‘오직 믿음’의 교리는 ‘우리가 과연 어떠한 모습으로 거룩하신 분 앞에 서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답한다.


그런데 우리가 최후 심판 때 어떠한 모습으로 서게 될 것인지는 중요한 문제라고 동의하면서도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교리는 폐기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보다도 ‘오직 믿음’이 쉽게 오해 받기 때문에, 이를 버려야 한다고 믿는 것이다. 그렇다면 잘못된 사용을 피하기 위해 반드시 검증되고 설명되어야 하는 이 슬로건에 매달려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러한 반대의 목소리는 사실 모든 신학적 진리에 적용된다. 우리는 ‘삼위일체’라는 용어가 자주 오해된다는 이유 때문에 그 용어를 포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삼위일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반드시 신중하게 설명해야 한다. 이때 그 단어가 의미하는 바와 의미하지 않는 바가 무엇인지에 주의해서 설명해야 그 설명을 듣는 이들이 크리스천은 삼신론자(tritheist)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용어가 때때로 잘못 해석된다는 이유만으로 그 단어 자체를 폐기하지는 않는다.


지키기만 해서는 안 된다


간혹 개혁주의 크리스천들은 이신칭의와 같은 교리나 전통을 지키고 보호하는 데 과도한 힘을 들인다는 비난을 받는다. 아마도 우리는 우리 자신이 고백하는 진리를 소중히 여기지 않는 상황에서 교리적 충성만 강조하는 일에 죄책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하지만 믿음을 수호하는 일은 고귀하면서도 성경적인 노력이다. 유다서 3절은 우리가 그렇게 할 것을 분명히 요구한다. 또한 갈라디아서나 디모데후서 둘 다 강조하는 바는 심지어 다른 이들이 복음을 거부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복음을 수호하며 보존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을 지키려는 노력 자체보다 그 복음을 통해 얻게 되는 생명의 자유와 기쁨을 소중히 여기는 일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지키는 이유는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기 때문이며, 우리가 그 진리를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우리의 생명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홀로 고요하게 있을 때, 우리의 수많은 죄와 무가치함을 떠올리고는 한다.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오직 믿음’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빈손 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통합 찬송가 188장)라는 고백을 드린다.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로 담대히 들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요, 오직 그리스도의 의를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오직 믿음’의 교리는 필수적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구원이 전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하나님의 구원을 성취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직 믿음’은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림으로써, 그 누구도 사람을 자랑할 수 없도록 하며(고전 1:31),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이 선물이요 은혜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만든다(고전 4:7).


종교개혁의 다섯 가지 오직 교리(the five solas)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그중 ‘오직 믿음’은 특별히도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에 긴밀히 연결된다. 믿음은 구원을 위해 내 행위가 아닌 다른 대상을 바라보는 일이며, 그 구원은 ‘오직 은혜’에 의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수학(math)이 아니라, 지도(maps)와 같다


종교개혁의 5대 슬로건과 교리 사용에 대한 마지막 말을 전하고자 한다. 안토니 레인(Antony Lane)은 교리란 지도요 본보기이지, 수학적 공식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우리는 ‘오직 믿음’이라는 단순한 구호 사용에 의존하거나, 혹은 이 용어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대화 가운데 이해하려는 노력도 없이 비난만 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오직 믿음’ 교리를 거절하는 자들이 이 교리의 타당성에 의구심을 갖게 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물어야 한다. 이 교리를 거부하는 자들과 인정하는 자들은 서로 상대방에 대한 과거의 판단만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중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때 ‘오직 믿음’을 거부하는 자들의 염려가 오히려 이 교리에 대한 오해가 무엇인지를 드러내어 그에 대한 정당한 반박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다.


물론 나는 모든 의견의 불일치가 단순한 오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뜻하는 바는, 우리가 속단해서 서로 의견이 맞지 않는다고 가정하지 않도록 대화에 열려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오직 믿음’과 같은 슬로건은 유익하다. 왜냐하면 그런 슬로건은 우리의 신학을 명료하게 요약해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혹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서로 다른 정의와 개념을 가지고 대화 속에 참여하기 때문에, 슬로건은 또한 위험 요소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다른 누군가를 비난하기 전에, 그들이 진정으로 말하는 내용을 알아들었는지 확인하도록 하자.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Justification = Faith + Nothing

번역: 정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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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homas Schreiner

토마스 스크리너는 켄터기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의 부학장이며, 성경 해석학을 가르치는 교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