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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바울처럼 고난을 당할 수 있을까?
by John Piper
2020-11-28
투덜거리지 않고 고난을 겪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끌린다. 특히 하나님을 신뢰하면서도 그분에게 화를 내거나 불평하지 않는 사람을 볼 때 더욱 그러하다. 내가 보기에 투덜거리지 않는 자세란, 세상에서 가장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 아닌가 싶다. 그 자세가 현재의 고통스러운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는데도 그렇게 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모습으로 나타날 때, 그러한 모습은 그분을 영화롭게 하는 아름다운 신앙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기에 내 마음을 더욱 사로잡게 된다. 바울이 꼭 그런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죽음의 언저리까지 끌려가다바울은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밀어붙이며 절망에 빠뜨렸던 신앙의 위기를 회고한다.“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여기서 세 가지 사실을 주목해야 한다. 첫 번째는 바울이 당한 고난이 극심했다는 사실이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두 번째는 그 고난에 어떤 목적이 있었다는 사실이다(“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세 번째는 하나님 자신이 그 목적을 의도하셨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게 되는 일은 사탄은 결코 의도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결국 바울이 고난을 당하며 확신하게 된 진리는 이렇다. 즉 자신이 당하는 고난이 얼마나 극심하든 거기에는 하나님의 목적이 자리하고 있으며, 그 목적이란 인생의 모든 순간에서 자신을 덜 신뢰하고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이 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죽음이 코앞에 닥칠지라도 말이다.고난 가운데 투덜거리지 않을 수 있는 이유바울은 그러한 진리를 붙들었기에 고난 중에도 투덜거리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이 그 고난을 다스리고 계시며 그분의 목적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확신했다. 그래서 다른 성경 본문을 통해서도 그러한 깨달음을 곧잘 드러냈다.“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결국 바울이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평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바꿔 말해서 고난 중에도 그렇게 기뻐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하나님이 자신을 변화시키는 중대한 일을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인내하며 그분께만 소망을 두는 사람으로 변화되고 있음을 확신했던 것이다.인생의 끝자락에서 경험하는 고난하지만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성품도 다져지며 마음속으로 깊은 소망을 품게 되는 인생을 경험해 보지 못하고 오히려 죽음에만 다가서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겠는가? 바울은 이와 같은 문제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답변을 다음과 같이 제시했다.“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 4:16-18).여기서 바울은 어떤 고통이나 질병 또는 노화로 인해 우리의 겉사람이 서서히 낡아지는 문제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런데 그와 같은 고난에 이어지는 과정을 언급할 때, 그는 이 땅에서 더 훌륭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묘사하지 않는다. 오히려 천국의 영광을 들어 그 과정을 그려 낸다.그러므로 고난이 가중되어 죽음에까지 이른다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혹 묻는다면, 다시 말해 아픔이나 괴로움 또는 죽음과 같은 고통 속에서도 불평하지 않고 그 시간을 감수하지만 결국에는 얼마 살지 못하게 될 경우에는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고 혹 묻는다면, 바울은 이렇게 답변할 것이다. 곧 우리가 그리스도를 신뢰함으로 그 고난을 견뎌 낸다면, 인생의 모든 고난은 결국 천국에서의 더 큰 영광을 이루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자족의 비결이처럼 바울의 인생에는 여러 가지 고난이 수그러들 기세를 보이지 않았지만(고후 11:23-33), 그는 조금이라도 투덜거리거나 하나님께 불평하는 모습을 갖지 않았다. 물론 교회를 파괴시키는 교리나 그런 가르침을 전달하는 거짓 교사들에게는 화를 내기도 했고(갈 1:8-9; 5:12), 또 자신이 느끼는 압박감이나 부담감을 고백하기도 했지만(고후 11:28), 그 모든 상황에서 그는 놀랍게도 자족하는 비결을 배웠다.“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1-13).바울은 어떻게 그런 ‘비결’을 배우게 되었을까? 그것은 자신에게 진정한 만족을 주시는 분이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며 그분을 아는 지식만이 가장 고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빌 3:8). 또한 더 나아가 모든 일로 선이 되도록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운 주권을 신뢰했기 때문이다(롬 8:28; 빌 1:12). 이처럼 온갖 고난 속에서도 겸손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며 그리스도의 존귀함으로 자족했던 바울의 모습을 바라볼 때, 나는 그저 경이로운 마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How to Suffer Without Grumbling: Why I Love the Apostle Paul번역: 장성우
영성
영적성장
고난
목적
의도
바울
자족
비결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질 때
by Matt Smethurst
2020-11-25
오늘 아침 아이들을 학교에 내려주고 기도를 하려고 했다. 차에 혼자 있었으니까 기도하는 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도무지 기도에 집중할 수도 없었고 기도하고 싶은 마음도 느낄 수 없었다. 내 영혼은 산만하고 무기력하기만 했다.무기력한 영혼의 구름은 감사하게도 금방 걷혔다. 나는 거리를 달리면서 어느새 나의 왕과 대화를 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항상 찬양받으셔야 하는 분이라는 것을 고백했다. 손에 잡힐 것만 같은 그분의 존재를 느끼면서 말이다. 내가 오늘 아침 그랬던 것처럼 혹시 하나님이 멀리 있다고 느낀 적이 있는가? 만약에 그렇다면 여기 그런 느낌을 단숨에 되돌리는 비결이 있다.아, 정말로 단숨에 마음을 바꾸는 비결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당신도 그걸 알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비결을 그렇게 쉽게 알 수 있는 건 아니다. 진리는 언제나 더 복잡하다.운전하고 가던 길에서 뭔가 마술과 같은 기적이 일어난 게 전혀 아니다. 커피집으로 가서 앉아있는 내내,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도 나는 여전히 영적으로 멍한 상태였다. 하나님은 오늘 너무도 멀게만 느껴졌다. 왜 그런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제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오늘 아침에 아내와 싸운 것도 아니고 집에서나 직장에서, 또 교회에서도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물론 오늘과 같은 이런 느낌이 충격적일 정도로 드물게 일어나면야 좋겠지만, 이런 기분은 화요일이면 으레 겪고 있어서 자연스러운 느낌마저 든다.주님이 너무도 멀게만 느껴질 때, 그게 하루든 몇 달이든 또는 몇 년이든,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마술과 같은 처방은 없다. 단지 하나님이 실존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냥 관념 또는 개념으로만 느껴질 때, 그의 임재를 느끼게 하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하려고 한다.1. 찾으라기도하겠다는 나약한 노력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했어야만 할까? 나는 계속 기도하려고 노력했어야 했다. 도무지 기도가 나오지 않는 바로 그때야말로 더 간절히 기도하려고 발버둥 칠 때이다. 만약에 아무 능력도 없는 관념의 신을 섬긴다면, 계속 기도하라는 제안이 무익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실망스러울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지 않다. 예레미야애가 3장 31-33절의 약속을 살펴보라.“이는 주께서 영원하도록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며 그가 비록 근심하게 하시나 그의 풍부한 인자하심에 따라 긍휼히 여기실 것임이라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본심이 아니다”라는 말은 참으로 아름답다. 그건 하나님이 모든 주권을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에 그렇다면 그건 너무도 끔찍한 일이다. 다른 번역을 살펴보자.“우리를 괴롭히거나 근심하게 하는 것은, 그분의 본심이 아니다.” (새번역)“주는 사람을 고생시키고 근심하게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현대인의 성경)핵심은 이것이다. 지금 힘든 시간을 겪고 있다면,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렇게 만든 게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지금 무슨 잔혹한 우주적 게임을 벌이고 있지 않다. 하나님은 결코 고통당하는 당신을 보면서 기뻐하는 분이 아니다. 그러니 계속해서 그분께 부르짖으라. 기도가 천정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것 같더라도 하나님은 당신의 기도를 다 듣고 계시며 또 당신을 사랑하신다.2. 점검하라자복하지 않은 죄는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없도록 한다고 성경은 반복해서 경고한다. 지금 하나님이 멀게만 느껴진다면 자신을 점검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대놓고 반항하는 어떤 부분이 당신 삶 속에 있는 건 아닌가? 어떤 숨겨진 죄를 계속해서 변명으로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가? 죄는 단지 천국에서 주는 주차위반 딱지가 아니다. 죄는 거룩한 하나님을 향한 개인적인 모욕이다. 그렇기에 불순종은 언제나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이어진다. 그런데도 성경은 좋은 소식을 알려준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거룩하신 주님은 놀랍게도 자비의 주님이다. 하나님은 용서하시기를 기뻐하고 또한 회개함으로 겸손해진 자녀를 품어주시길 좋아한다. 요한일서 1장 5-10절을 마지막으로 묵상한 게 언제인가? 그 구절을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읽어보라. 빛 가운데로 드러내야 할 어둠이 행여 당신 속에 존재하는 건 아닌가? 이런 질문은 무서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건 사실상 자유를 위한 것이다. 어둠은 죄가 자라나고 믿는 자들이 황폐해지는 곳이다. 그와 반대로 빛은 죄가 그 위력을 잃고 믿는 자들이 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자가 검사로 끝나서는 안 된다. 그림자에서 벗어나 성경적 공동체의 빛으로 들어가라. 세상의 빛을 따르기 시작한 사람에게 더 이상 고립된 어둠은 적합하지 않다(요 8:12). 그러므로 다른 빛의 자녀들과 교제하라(요 12:36; 엡 5:8; 빌 2:15). 건강한 교회에 몸을 담그고 목회자들의 감독, 다른 지체들의 보살핌 및 상호 책임에 삶을 복종시키라. 하나님을 가까이 느끼고 싶은가? 그럼 하나님의 자녀들을 가까이하라.3. 주목하라하나님께 가까이 가기 위한 최고의 방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가까이 오기 위해서 무슨 일을 하셨는지 묵상하는 것이다.자격이 없는 인간을 그분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감수하셨는가? 2천 년 전에 예루살렘 외곽의 작은 언덕에서 그의 사랑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그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주셨다. 로마의 십자가에 매달린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무한한 간격을 메웠다.그러므로 사탄이 절망감을 주거나 하나님께서 당신을 잊거나 버리셨다는 생각에 두려움이 밀려올 때는 갈보리가 메꾼 영원한 틈새를 묵상하라.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엡 2:13). 신자의 정체성은 하나님과 얼마나 멀리 떨어졌는가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는다.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운가에 달려있다. 종종 하나님이 멀리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당신의 느낌은 진실이 아니다. 당신을 가까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을 확증하며 피를 쏟으신 그 절정의 장소를 주목하라. 안아주심나는 이 글을 다소 부끄러운 나의 고백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면서 종종 느낄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물론 더 슬픈 이유로 인해 그런 느낌을 느끼는 많은 기독교인이 있다. 엄청난 고난이 밀려올 때면 그 고난은 삶에 혼란을 일으키고 그 여파로 반갑지 않은 질문과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남기기 마련이다. 조니 에릭슨 타다(Joni Eareckson Tada)가 생각난다. 그녀가 다이빙 사고로 목 아래로 마비된 지 벌써 반세기가 넘는 시간이 흘렀다. 휠체어에 앉아서 그녀는 하나님의 신실한 성품에 대해 이렇게 간증했다. “그는 나를 고치는 대신 안아주기로 하셨습니다. 고통이 심할수록 그의 안아주심은 더 따스합니다.”당신의 상황이 사소하게 느껴지든 또는 압도적으로 느껴지든 간에, 당신에게 안아주심의 따뜻한 사랑을 주시는 아버지가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기 바란다. 그는 좋으신 하나님이고 전능하신 하나님이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믿는 모든 자여, 지금까지 내가 말한 모든 것이 사실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결코 잊으시거나 버리시지 않는다. 원제: What to Do When God Seems Far A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하나님의임재
회개
기도
용서
예레미야애가
공동체
조니에릭슨타다
이웃 사랑, 선택이 아니다
by Will Anderson
2020-11-23
이웃은 내가 고를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어떤 이웃은 기쁨이 될 수도 있고, 어떤 이웃은 악몽이 될 수도 있다.하지만 끔찍한 이웃조차도 사랑하라고 예수님은 명령하신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하지만 … [여기에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를 적어보자]. 고대 힐렐 학교에서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웃이 내 이웃으로서 적합하지 않다는 서류를 작성해야 할지도 모른다. 문제 해결 없이 불만만 쌓이다 보면 어느새 이웃과는 점점 더 멀어지기 마련이다. 다음과 같은 상상을 해보자. “네, 주님, 이웃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 또 복음이 필요한 존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 개가 새벽 2시만 되면 어김없이 짖지만 미안한 기색도 전혀 없는 그 이웃을 아예 없는 셈 치고 살았습니다.”기독교인이라면 이웃이 얼마나 사랑할 만한지, 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얼마나 많은지 또 도덕적으로 얼마나 괜찮은지를 이웃 사랑의 출발점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어떤 차이든지 간에 복음이 우리에게 명령하는 것은 명확하다. 뒤로 물러서는 대신 한 발 더 가까이 가라고 말한다. 로사리오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이렇게 말했다.“한 가지 옵션은 벽을 더 높이 세우고, 우리 집이 우리를 지키는 성이라고 더 격렬하게 선언하는 것이다. 세상은 조만간 지옥에 떨어질 것이니까 최대한 집안에 틀어박혀서 우리를 세상과 구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한 성이 된 우리 집과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는 항상 접어놓아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나름대로 이 세상과 전쟁을 일으키는 셈이다. 하지만 그 전쟁은 결코 어둠을 몰아내고 그 자리에 복음의 빛을 비추게 하는 영적인 전쟁은 아니다.” 지금부터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지 않아도 된다고 스스로 정당화하는 다섯 가지 이유를 살펴보도록 하자. 그렇게 함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시 떠올리기 바란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마음이 생기기를 바란다(시139:23–24; 약 1:22–25).1. 배려심이 없는 이웃때때로 무례한 이웃이라는 이유로 우리는 그들과 관계를 단절한다. 시끄러운 음악, 엉터리 주차, 아이들이 있는 옆에서 하는 흡연, 잔디에서 변을 보는 애완견, 버릇없는 자녀 방치, 극단적인 구호를 적은 정치 포스터 또는 스티커를 붙이는 경우 등 이유는 다양하다.취소 문화(Cancel culture)는 누군가가 당신을 괴롭히면 그냥 그들과의 관계를 버리라고 말한다. 반대로, 예수님의 길은 기꺼이 죄를 용서하고(요 8:1-11), 순결을 본받으며(벧전 2:12), 죄인과 관계를 맺는 것이다(요 4:1-42). 십자가에 달려서도 사형 집행자들을 위해서 기도했던 예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소심함은 사라지게 된다. 실로 엄청난 죄를 짓고도 매일 매일 용서받는 죄인인 주제에(딤전 1:15), 어떻게 감히 우리가 완고한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용서하지 않을 수 있을까(엡 4:32; 마 18:21-35)?2. 이웃 사랑은 내 사역의 핵심이 아니라는 이유사역 때문에 많이 바쁠 수도 있다. 그래서 집에 왔을 때 당신에게 필요한 건 또 다른 관계의 연장이 아니라 휴식일 수도 있다.가정은 안식처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가 사는 곳은 하나님의 주권(하나님이 행하신 사람과 장소의 현명한 배열)과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은 지금 그곳에 당신을 두셨다(행 17:26). 그리고 당신 곁에는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복음을 들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에게는 우연이 없기에 우리 곁에 누가 사는가는 너무도 중요한 사역의 원천이 된다.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항하는 은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 3. 나와는 너무도 다른 이웃차이는 관계를 갈라놓는다. 사람들은 종교, 배경, 생활습관, 취미, 성격, 인종, 정치 그리고 사회적 지위에 따라 끼리끼리 모이기 마련이다. 그럴 때 대화가 잘 통하고 안정되며 이해받는 느낌을 받는다.많은 사람이 차이(differences)를 근거로 이웃 회피를 정당화하지만, 서로 간에 건널 수 없는 양립 불가(incompatibility)라는 틈(chasm)을 메우려는 시도는 애초에 생각하지도 않는다. 진짜 문제는 우리 자신이 가진 불편함, 교만 그리고 두려움이다. 오로지 친숙한 사람들하고만 모이는 경우, 우리는 외모 또는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기회 자체를 내버리게 된다. 예수님은 종교 엘리트(눅 14:1)뿐 아니라 문제 많은 죄인들(막 2:15)과도 함께 식사하면서 당시 만연하던 ‘동질성 우선(homogeneous)’이라는 사회적 규칙을 깨셨다. 그의 제자 중에는 셀롯파(열심당, 전통적으로 로마에 대해 폭력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세리(전통적으로 로마와 동맹을 맺은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당신을 매우 혼란스럽게 만들 수도 있는 사람들과 함께 식탁에 앉는 것을 의미한다. 4. 간섭을 받기 싫어하는 이웃현대 사회에서 사생활은 불가침의 권리이다. 그러다 보니 사랑은 이제 상대를 가만히 내버려 두는 것, 방해하지 않는 것 그리고 개인의 공간에 허락 없이 들어가지 않는 수준으로 격하되었다. 방해받는 것을 싫어하는 이웃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있다. 그런 개인이나 가족에게 접근할 때에는 용기를 가지고 민감하고 신중하게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새로운 이웃에게 쿠키를 전달한 후 아무런 답이 없다거나 또는 저녁 식사 초대에 답이 없다고 해도 당황하거나 실망하고 포기해서는 안 된다. 인내를 가져라.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작지만 소중한 접근 기회를 잡도록 하라. 그리고 계속해서 초대하라.5. 적대적인 이웃최근 동네 길거리에서 행인들에게 피해를 주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을 한 사람들에 대해 몇몇 이웃들이 모여서 심정을 토로했다. 행여 그들이 다시 주거 지역에 들어오면 어떻게 할지를 논의하고 감정 섞인 대응을 준비하는 이웃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궁금해졌다. 이웃이 신체적으로나 감정적으로 그들의 안전에 위협을 가할 때 하나님의 백성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은 가장 잘 알려졌지만 가장 무시되는 명령이기도 하다. “원수”와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것이 더는 지혜롭지 않다고 판단될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그 대답은 결코 가볍게 말할 수 없다. 진지하고 깊은 기도에 있다고 나는 확신한다. 만약에 이웃이 우리를 위협하는 경우 경찰에 신고하여 고소장을 내거나, 경보 시스템을 구축하거나, 최악의 경우 이사를 해야 할 수도 있다. 이것이 냉정한 현실이다. 하지만 적대적인 이웃을 위한 기도와 자기 보호를 위한 행동 모두를 생각해야 한다.무엇을 기도해야 할까? 하나님이 이웃의 마음을 변하게 하여 남에게 피해를 주는 행동을 멈추게 해달라고 해야 한다. 정의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으로 인해 그들이 악에서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골 1:13).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의 말처럼, 우리와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가치가 다른 이웃들이라도 그리스도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사랑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이웃이 누구이든 간에 내가 그들과 나란히 걸을 수 있는 곳으로 나를 이끄셨다. 나는 그들 위에 있지 않다. 나는 그들 곁에 있다. 나는 그들과 함께 살고 있다. 지역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사건들을 함께 겪으면서 동행하고 있다. 나는 그들을 심판하라고 부름을 받은 게 아니라 내가 가진 빛으로 겸손하고 참을성 있게, 또 내가 가진 힘과 하나님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최선을 다해 그들을 섬기도록 부름을 받았다. 내가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언제나 내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성품과 능력이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삶이 영원을 향한다는 것을 믿는다면, 그들을 더 사랑할 것이다. 문자 그대로 말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도대체 누구를 사랑해야 할까?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씨름할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시며(마 28:20), 은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필요한 말과 지혜를 공급하신다. 원제: Loving Difficult Neighbors Isn’t Option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이웃
이웃사랑
생활전도
달라스윌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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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소문화
양립불가
종교엘리트
마취된 세상에서 깨어있다는 것의 의미
by Justin Dillehay
2020-11-22
졸음과 술 취함을 함께 묶는 게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그 둘을 도덕적으로 동등한 대상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5장 6절에서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정신을 차릴지라.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라고 말했다.바울이 지금 여기서 집단 불면증을 옹호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그는 성경이 자주 사용하는 은유 방식, 졸음과 무감각함으로 상징되는 죄와 깨어있음과 금주로 상징되는 의를 사용하고 있다. 낮과 밤, 그리고 빛과 어둠과 같은 이미지를 통해서 우리는 어두움으로 상징되는 악한 시대에 순응하기보다는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상상력이 던지는 강력한 호소를 접하게 된다(롬 12:1-2).이 구절의 배경은 예수님이 적들에게 갑작스런 멸망을 가져다줄 그의 재림날이다(살전 4:13-5:3). 바울의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깨어나서 그날을 준비하게 하는 것이다. 깨었다는 건 무슨 의미인가바울이 쓴 또 다른 은유를 살펴보자. “깨어서 술 취하지 말라.” 도덕적으로 다름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여기서 또 자는 것과 술 취한 것을 하나로 묶고 있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첫 번째로 이 두 가지 일은 다 밤에 일어난다.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살전 5:7). 두 번째로 자거나 취할 때 우리는 방어에 허술하게 되어 적의 공격에 취약해진다. 누군가가 당신의 지갑을 훔치려고 한다면, 가장 좋은 때는 당신이 자거나 술 취했을 때이다. 방비가 가장 허술한 그 때 말이다. 그러나 깨어있고 또 정신이 말짱하다면 당신은 언제나 경계심을 갖고 주변을 살피게 된다.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당신은 정상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말한다. 언제라도 행동할 준비를 하고 현실에 단단히 발을 딛고 있으라고 한다.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꿈속에서처럼 또는 취했을 때처럼 착각하지 말라는 것이다.그는 단지 마약이나 폭음을 피하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런 것들도 그의 경고에 확실히 포함되어 있다(롬 13:13; 엡 5:18). 실수하면 안 된다. 술에 취하거나 마약에 취할 때 우리의 이성은 사라지고 다른 사람까지 위험에 빠뜨리게 된다. 우리는 마치 총을 든 사냥꾼 마귀 앞에서 멍청하게 앉아있는 오리 꼴이 되는 수치스런 상태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마치 전염병을 피하듯이 그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동시에 우리의 정신을 혼미하게 하는 것은 대마초 외에도 얼마든지 많다는 사실도 깨달아야 한다. 세속화라는 죽음과도 같은 잠이 세상은 영적인 마약으로 넘쳐난다. 사탄은 그런 것들을 통해 이 세상을 오염시켰다. 현존하는 악한 시대의 공기는 우리가 죽거나 화물열차와 같이 급박하게 임할 주님의 날을 만나기 전까지는 영혼을 혼미하게 하는 영적 미로 속에서 우리를 꼼짝 못하게 할 만큼 취하도록 만든다(살전 5:3). 이게 바로 사탄이 원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잠드는 것을 구식 용어로 말하자면 “세속화”에 빠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게 바로 사도 요한이 경고한 것이다(요일 2:15-17).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좋은 선물을 대리 구원자로 바꾸는 것이다.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다 당신이 하는 거야’, ‘당신은 얼마든지 행복할 자격이 있어’와 같이 대중문화가 주입하는 잘못된 생각을 빠져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영적 현실을 잊게 만드는 사탄의 방법이다. 사탄은 우리의 마음을 거짓된 생각으로 채우거나 또는 우리로 하여금 진짜 중요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 쓸데없는 잡생각으로 마음을 가득 채우길 원한다. C. S. 루이스(C. S. Lewis)의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이렇게 말했다. “너의 임무는 그가 (보고 만지고 또 들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즉시) 발생하는 것에만 관심을 집중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오로지 그런 것들만을 “진짜 인생”이라고 부르도록 가르치고, “진짜”가 사실상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 이상 묻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여러분 중 일부가 지금 말하는 방식을 보면, 그렇게 가르치는 게 우리 악마의 역할이라는 것은 누구라도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이것이다. “심각한 생각은 하지 말도록 하고, 보이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생각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해야 깨어나지 않고 계속 잠든 상태로 있을 테니까.”영원한 날을 위해서 깨어나기‘잠들었다는 것’은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언젠가 당신의 인생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는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잠들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전부인 것처럼 시간과 돈을 사용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이 세상은 이슬과도 같고 진짜로 중요한 건 영원한 삶인데, 그 삶은 아직 제대로 시작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딤전 6:19).‘잠들었다는 것’은 당신을 이 우주의 중심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당신 자신보다 하나님과 이웃을 더 소중하게 여긴다는 것이다(빌 2:3).‘잠들었다는 것’은 비록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해도 당신이 스스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최선을 다해 살았다면 그 하나님은 당신을 받아주는 인내심 많은 신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하나님은 차마 당신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거룩하시고, 당신은 차마 바라보지 못할 정도로 더러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무리 최선을 다해도 당신의 최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가 없음을 아는 것이다. ‘잠들었다는 것’은 주님의 날이 당신에게는 도적처럼 임한다는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주님의 날이 언제 임할지는 몰라도 그 날이 당신에게 가장 기쁜 축제의 날이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악한 세상은 마치 길고 긴 밤과 같다. 그러나 아무리 길어도 이 밤은 지나가고 반드시 영원한 낮으로 바뀔 것이다(계 21:25).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미래는 밝다. 심지어 지금에도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요일 2:8). 샘 올베리(Sam Allberry)는 성화(sanctification)를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사는 문화적 충격을 얼마나 줄이는가의 문제’라고 표현하기를 좋아했다. 그가 쓴 이 은유를 조금 수정해 표현하자면, 성화란 믿음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바라봄으로 다가올 시대가 주는 눈부심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고후 3:18). 그 날이 오고 있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롬 13:12).이제 깨어날 때가 되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Stay Awake in a World of Spiritual Tranquilizers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성화
깨어남
영적나태
말세
C.S.루이스
스크루테이프의편지
샘올베리
욕망을 죄로 바꾸는 가십 머신을 아십니까?
by Joe Carter
2020-11-16
성경에서 가장 무서운 구절이 무엇일까? 누군가에게는 신명기 7장 2절에 나오는 가나안 민족의 진멸에 관한 구절일 수도 있고, 또 누군가에게는 요한계시록 13장 1절에 나오는 짐승의 등장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내 경우는 마태복음 12장 36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특히 가십(잡담)이란 형태를 띠고 생각없이 내뱉는 말처럼 내가 인생을 살면서 자주 지은 죄가 없기 때문이다. 가십이란 말은 옥스포드 영어 사전에 일반적으로 사실로 확인되지 않은 일들과 다른 사람에 대해 확인되지 않은 내용을 그 어떤 제한도 받지 않고 하는 대화라고 정의된다. 가십을 성경적으로 정의해달라는 요청을 받은 존 파이퍼(John Piper)는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가십은 누군가에 관해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경멸적인 정보가 선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동기로 인해 비밀이라는 허울을 쓰고 다른 사람들과 공유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과정에서 조금의 겸손도 찾을 수 없는 당신의 마음을 보면서도 당신은 그런 행위를 즐기는 것이다.”가십은 성경이 정죄하는 심각한 죄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 29절에서 가십을 살인, 비방(중상모략)과 같은 선상에 놓았다. 바울은 또한 고린도후서 12장 20절에서도 가십을 비방과 연결시켰고, 디모데전서 5장 13절에서는 게으름 및 마당발(busybodies)과 연관 지었다. 그럼 우리는 왜 가십을 즐길까? 그건 가십이 일종의 사회적 지배의 형태, 그러니까 당신이 생각하기에 누군가를 마땅히 있어야 할 제자리에 있게 하는 것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즉, 가십과 비방에 참여하는 목적은 경쟁자가 가진 상대적인 사회적 지위를 낮추기 위해서이다. 왜 가십을 좋아할까사회적 통제의 한 형태로서 가십의 장점은 저렴하고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단점으로는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가십은 크게 확장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가십은 직장, 교회, 마을과 같은 직접적인 커뮤니티 내에서 확산될 수 있었지만, 더 넓은 형태로 가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은 종종 기술적으로 불가능하거나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인류 역사의 대부분, 가십의 대량 보급은 오로지 대중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통제하는 정부나 언론 매체로 제한되었다.경제학자 타일러 코웬(Tyler Cowen)은 가십의 확장이야말로 사실상 명시되지 않은 미디어의 목적이라고 주장한다. “미디어가 명시적으로 주장하는 역할과 관계없이 실제로 시청자의 관심을 끄는 미디어의 특징은 스토리를 통해서 미디어가 어떻게 특정 개인의 지위를 높이거나 낮추는가 하는 방법이다.” 그는 또한 다음과 같이 덧붙였다.특정 미디어 소스가 암시하는 개인의 순위는 당신의 생각과 같지 않을 뿐 아니라 때로는 그 차이가 심하게 난다. 당신의 상태에 관해서 미디어가 통 크고 긍정적이고 또 기억에 남을 만큼 칭찬해줄 때보다 아주 작은 차이지만 당신을 다른 누군가보다 떨어지게 평가할 때 더 큰 원한을 품기 마련이다. 본질적으로 (일부) 미디어는 항상 누군가의 개인적 순위를 모욕한다. 그런 경우 당신은 언론으로부터 모욕을 받는다고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바로 그런 점 때문에 다른 사람들은 미디어를 즐긴다. 왜냐하면 당신이 낮아지는 경우 다른 누군가가 올라가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 미디어야 말로 상대방의 얼굴을 향해 던지는 파이가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 누군가는 미디어를 향해 더 큰 반감을 품게 된다.이런 상황이 미디어와 관련해서 항상 옳았는지는 모르겠지만, 1990년대 이후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적 변화는 “미디어”라는 것에 대한 근본적인 인식을 바꾸었고, 결과적으로 더 넓고 민주화된 미디어 세상을 열었다. 경제학자인 아놀드 클링(Arnold Kling)은 이렇게 말한다.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ISS)는 인간의 의사 소통 수준을 약 이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는 오래 전 작은 부족민으로 살았을 때보다 더 심하게 가십에 의존하면서 살고 있다.”클링이 ISS(Internet, Smart phones, and Social media)라고 부르는 세 가지, 인터넷, 스마트폰 및 소셜 미디어는 이제 하나로 결합해서 우리가 가십 머신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개체가 되었다. ‘가십 머신이 출현했다’라고 까지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그 속에 포함된 부분 부분이 상호 작용을 통해서 더 큰 하나의 개체가 만들어 가십 머신 고유한 속성 또는 행동 양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기에 따라서 가십 머신을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에 의존하는 어떤 실체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가십 머신이 인터넷, 스마트 폰 및 소셜 미디어 그 자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ISS는 가십 이외의 목적으로도 사용되기 때문이다. 가십 머신이 ISS와 다른 점은 가십 머신이 우리가 생산하는 가십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십을 생산하도록 우리를 더 자극하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친구, 가족, 적 등 다른 사람들의 사회적 지위를 낮추고 싶어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런 욕망은 우리 속 깊숙이 잠복해 있다. 그런데 가십 머신은 잠자고 있던 이런 욕망이 죄로 발현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욕망이 죄로 변하는 세 단계어거스틴(Augustine)에 따르면 욕망이 죄로 바뀌기 위해서는 다음 세 단계를 거친다고 한다. 암시, 쾌락, 그리고 동의이다. 암시는 기억이나 감각 지각을 통해 우리가 욕망의 유혹을 받을 때 시작된다. 즐거움은 금지된 것을 갖는 것이 즐겁다는 사실을 인식할 때 온다(어거스틴은 이 두 가지가 다 이성에 의해서 통제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동의는 우리가 이성을 통해 앞선 두 가지를 제어하지 않고 그 대신 금지된 갈망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발생한다. 가십 머신은 이 세 단계 각각에 다 영향을 미친다. 암시의 첫 번째 부분은 할 말이 없는데도 굳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자극하는 가십 머신 때문에 시작한다. 예를 들어, 페이스북은 “조, 지금 무슨 생각을 하세요?”라고, 트위터는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죠?”라고 끊임없이 묻는다. 그 결과 사람들은 최소한 소셜 미디어 안에서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뭔가를 써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암시의 두 번째 부분은 소셜 미디어를 스크롤하여 다른 사람이 쓴 글을 읽을 때 나온다. 종종 라이벌의 지위를 낮추기 위해 댓글을 통해 가십과 비방을 하게 되는 것이다. 내가 지금 과장하는 것 같다면, 지금 당장 소셜 미디어 속 글을 살펴보고 얼마나 많은 게시물과 댓글이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비방하기 위해서 쓰여졌는지 확인하면 된다. 가십 머신은 선동적인 메시지(“라이벌이 지금 귀하의 지위를 낮추려고 합니다!”)를 표시한 다음 당신으로 하여금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할 수 있는 수단까지 제공한다. 그러나 이 기계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즐거움까지 제공한다. 가십을 게시한 후에 따라오는 ‘좋아요’와 ‘공유’, 그리고 ‘리트윗’을 통해서 당신의 편견이 공개적으로 입증되는 것을 확인할 때, 뇌 속에서 퍼지는 도파민은 엄청난 희열을 안겨준다. 신경 과학의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사회적 보상과 금전적 보상을 꼭 닮은 온라인 환경의 고유한 기능인 ‘좋아요’를 주고받는 것은 다른 보상 작업에 관련된 두뇌 회로까지 강력하게 끌어들인다.” 이제 우리는 마지막 단계인 금지된 갈망에 동의하는 데에까지 쉽게 도달하게 되는데, 죄에 대한 유혹을 피하는 것보다 가십 머신이 가져다주는 쾌락은 육체적으로나 정서적으로 훨씬 더 크기 때문이다.기계에 대항하는 분노그럼 이런 가십 머신에 대항해서 우리는 어떻게 싸워야 할까? 사실상 신생 매체 ISS와 매우 밀접한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포르노 머신을 상대로 어떻게 싸워서 이겼는지를 살펴보는 게 도움이 될 수 있다. ISS 가 연관된 음란물에 맞서 싸우는 가장 효과적인 도구 중 두 가지는 회피와 책임이다. 먼저 유혹의 근원을 피해야 한다. 그런데도 유혹에 넘어졌을 경우,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당신에게 책임을 묻도록 만들어야 한다.(이 두 가지가 다 어렵겠지만, 특히 책임 부분이 더 어려울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적의 지위를 낮추려고 펼치는 고귀한 목적의 비방과 험담까지도 죄로 간주한다는 생각에 불쾌감을 느끼기 때문이다.)가십 머신과 효과적으로 싸우기 위해 우리는 가십과 비방을 지옥으로 인도하는 심각한 죄로 인식해야 할 뿐 아니라, 평소에도 사람들이 생각없이 내뱉는 부주의한 말을 깊이 고찰해야 한다. 마태복음 5장 22절을 본문으로 한 설교에서 청교도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지옥에 떨어진 사람들은 그 어떤 것을 바쳐서라도 이생에서 지은 죄를 단 한 번이라도 줄이고 싶어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생각해보자. 지금 지옥에 있는 죄인들이 세상에서 했던 가십을 한 번이라도 덜 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것을 희생해도 아깝지 않다고 여기고 있다면, 우리에게 이것보다 더 가십이라는 죄를 버리도록 동기부여하는 게 무엇이 있을까?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he Gossip Machine Turns Desire into Sin번역: 무제
생활
관계
미디어
험담
가십머신
ISS
인터넷
스마트폰
소셜미디어
나 자신 찾기, 그거 생각보다 힘드네!
by Trevin Wax
2020-11-10
“내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관찰하라”는 말에 91%의 미국인이 찬성했다는 최근 어느 연구보고서를 본 적이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내 자신이 누구이고 나의 목적이 뭔지 알고 싶을 때, 그 답이 있는 곳은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면을 들여다봄으로 해답을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당신의 마음을 믿고 무엇보다 직감을 따르라. 다른 사람은 그 누구라도 당신이 누구인지 정의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부터 바로 삶을 “깊이 성찰하는” 길이 시작된다.이런 식으로 인생을 볼 때 느끼는 자유가 매혹적일 수도 있다. 당신 스스로 당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원하는 대로 나 자신을 정의할 수 있게 된다. 이름을 바꾸고 얼마든지 새 인생을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경력이나 취미 또는 재능으로 내 자신을 정의할 수도 있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궁극적으로 내가 누구이며 어떻게 내 자신을 표현할 것인지를 결정한다. 오로지 나 자신만이 나를 나답게 만드는 독특함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고 있기에, 이 세상을 향해 나의 특별함을 어떻게 드러낼지를 결정하는 주체도 당연히 나 자신이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내면을 살펴보다 보면 반드시 좋은 점을 찾게 되기 마련이다. 당신이 찾은 게 무엇이 되었든, 그것은 아름답다. 그 누구도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자기 정의(self-definition)가 틀렸다거나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스스로를 정의하는 것은 말 그대로 궁극적인 모험이 된다. 하지만 이런 식의 사고방식에는 심각한 단점이 있는데,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내는 전체 프로젝트가 온전히 나 자신에게만 달려있다는 점이다. 스스로 운명을 결정하려고 하다가 모든 게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꿈을 쫓아가다가 도달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어떻게 할까? 이런 식의 실패가 당신이 정의내린 삶의 목적과 정체성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지는 않을까? 이런 실패가 나 자신을 바라보는 감각을 위협하지는 않을까? 더욱이, 당신이 스스로에게 내린 정의가 현실과 아예 동떨어졌거나,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바라보는 생각과 전혀 다른 경우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한 처음에는 모험심을 느끼지만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점 더 외로움으로 이어질 뿐이라면 어떻게 될까? 공동체 속에서 느끼는 만족감을 상실하게 되는 경우라면? 당신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정의를 향해 박수치는 허수아비들과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의미있는 공동체 속에서 뭔가를 기여하면서 사는 게 더 의미있고 보람되지 않을까?상호 모순되는 정체성나 자신을 찾기 위해 내면을 들여다보는 전체 프로젝트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를 생각해 보자. 과연 다른 사람과 전혀 비교하지 않고도 나 자신의 독특함(uniqueness)을 발견할 수 있을까? 외부에서 미치는 힘이 당신이 가진 진정한 개성에 그 어떤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확신하면서, 온전히 내면만을 성찰한다는 게 애초에 가능이나 한 이야기일까? 교사라는 직업으로 스스로를 정의하는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이해하기 쉽게 가르치는 데에 능숙할 뿐 아니라 학생들을 좋아하는 그 사람은 교사라는 일에서 만족과 가치를 발견한다. 그가 자신만이 가진 고유한 특징을 가진 지금의 교사가 된 데에는 어렸을 때 그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 두 명의 선생님 때문이다. 첫 번째 선생님은 아주 훌륭했다. 학생들에게 교육 과정을 안내하고 그들 속에서 배움에 대한 갈증과 갈망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두 번째 선생님은 끔찍했다. 창의력을 억제했을 뿐 아니라 특정 주제에 대한 경멸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권위적인 방식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당연히 이 두 명의 선생님을 비교하면서 그는 좋은 선생님을 모방하고 싶어했고, 나쁜 선생님과 비슷해지는 그 어떤 방법도 피하고 싶어했다. 물론 이 교사는 자신의 열정과 은사를 발견하기 위해 내면을 성찰했으며, 그 결과 교사라는 직업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을 정의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오로지 혼자서 그런 과정을 거쳤을까? 그건 전혀 아니다. 그는 과거 만났던 좋은 선생님이 보여준 길을 따라가고 있는 동시에 나쁜 선생님이 보였던 부정적인 영향에도 반응하고 있다. 결국 이 교사는 자기 스스로 내면을 성찰하고 오로지 혼자의 힘으로 인생의 길을 계획했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의 과거는 여전히 그가 내린 자기 정의에 큰 영향을 미친다. 그에게는 닮고 싶은 한 사람과 닮고 싶지 않은 또 한 사람이 있다. 달리 말해, 그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물론 당신은 이렇게 반박할 수 있다. “나는 내가 아는 누구처럼 되려고 하지 않아요. 나는 의식적으로라도 그 누구와도 똑같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아마도 그럴 것이다. 그런데 그런 경우라면 당신은 어쩌면 오로지 끔찍한 선생님만을 만났던 어느 청년과 비슷할 것이다. 해마다 그는 끔찍한 선생님들이 일으키는 문제와 씨름해야만 했다. 학생을 조롱하고 권위를 남용하고 게으름을 피우고 가르치는 능력은 부족한 그런 끔찍한 선생들 말이다. 그래서 그 청년은 결국 이렇게 선언했다. “나는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모든 끔찍한 선생님들과는 전혀 다른, 아주 좋은 선생님이 될 거야.” 하지만 누구라도 지금 예로든 이야기에서 깨달을 수 있다시피, 그 청년이 스스로에 대해서 내린 정의는 결코 고립된 상태에서 이뤄진 게 아니다. 그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주변을 둘러보고 있다. 비록 그가 참조하는 그 모든 선생님들이 하나같이 그가 닮고 싶지 않은 대상이라고 해도 말이다. 당신 자신을 발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삶에 대한 “내면 성찰(look in)” 방식은 개인의 개성과 공동체가 서로 등을 지도록 만드는데, 마치 공동체는 언제나 개인을 억압함으로 공동체에 순응하도록 위협한다고 생각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나 자신을 제대로 발견하고 또 정의하기 위해서라도 일단 내 자신의 가장 깊은 자아를 격리해야 한다고 가정하는데, 그 결과 우리의 배경, 가족의 영향력, 또는 긍정적이던 부정적이던 관계없이 우리 주변의 모든 공동체를 배제하는 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이런 식의 고립된 계획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신화에 불과하다.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다른 사람을 참조하지 않고는 결코 자신을 발견할 수도 또는 정의할 수도 없다. 그건 될 수가 없는 일이다. 그런 식의 자아 발견이 가진 가장 아이러니 한 점은 당신이 가장 자유롭다고 느낄 때,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아 부어서 누가 봐도 당신이 아주 많이 다른 사람처럼 보일 때 조차도, 당신은 여전히 다른 사람들이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관심과 반응을 바탕으로 스스로를 정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동체가 기대하는 특정한 기대 또는 제한을 벗어나겠다는 선택조차도 결국은 당신이 가장 신경쓰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다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타인을 완전히 배제한 상태에서 오로지 내면 성찰만을 통해서 자신을 찾는 것은 그렇기에 불가능하다. 더욱이, 당신이 스스로 정한 자기 정의에 따라 살기 위해 아무리 노력하더라도, 즉 당신이 바라는 어떤 사람이 되려고 아무리 애를 쓰더라도, 인간이기에 누구나 진실되지 않은 삶의 패턴과 나쁜 습관에 빠지기 마련이다. 좋은 선생님처럼 되고 싶은 그 교사가 너무 지친 나머지 어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가장 혐오하는 나쁜 선생님의 모습을 보이게 되면 어떻게 될까? 우리 중 많은 부모들이 어린 시절 나의 부모님이 했던 나쁜 행동을 우리 아이들에게만은 결코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지만, 어떤 순간 내 속에서 경멸했던 내 부모의 모습을 발견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어린 시절 부모가 내 속에 만들어놓은 나쁜 영향력에서 벗어난다는 게 생각만큼 쉬운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절망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이처럼 우리가 스스로 정해놓은 정의를 따르지 못할 때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스스로 정한 이상적인 삶을 살아가는, 바로 그 최고의 순간에 만나는 자신이 진정한 당신 자신인가? 아니면 행여나 당신 자신을 실망시키는 말과 행동이 터져 나오는 바로 그 최악의 순간에 만나는 당신이 “진짜 당신”인가? 진짜 당신은 당신이 되고 싶은 그 사람인가, 아니면 지금의 당신 자신인가? 더 나은 길내면 성찰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는 것은 중대한 도전 과제를 동반할 뿐 아니라, 결국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데에도 결코 충분한 방식이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만들 뿐이다. 그러나 더 나은 방법이 있다. 그리고 이 방법은 당신으로 하여금 자신을 어떻게 인식하는게 맞는지 다시 생각하도록 만들 것이다. 이 방법은 내 자신을 정의하고 찾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다. 이 방법은 나 자신의 외부를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위를 바라본다. 바로 나 자신을 창조하신 분을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한다는 것이다. 위를 바라봄으로 당신은 더 크고 위대한 무엇인가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Finding Yourself’ Is Harder Than You Think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자아성찰
내면성찰
자기정의
자기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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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 그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
by Sammy Rhodes
2020-11-08
지난 몇 주간처럼 종잡을 수 없는 때를 말할 때 보통 하늘이 파랗다고 한다.내겐 그것이 어린 시절부터 친한 친구의 40살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그와 함께 뉴올리언즈로 떠난 여행으로 시작되었다. 우리는 함께 가고 싶은 도시를 다니며 최고의 음식을 먹고 마시며 즐겼다. 적어도 그 48시간은 더할 수 없이 신나는 시간들이었다.하지만 그 시간이 힘든 시간이기도 했다. 내 친구는 가슴 아프게도 지난 해에 중풍으로 마비가 왔고, 지난 반년 이상 긴 회복 기간을 갖고 있었다. 그의 몸은 어느 정도 회복되고 있기는 하지만, 말하는 것은 아직 회복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 그는 “내 말이 아직은 어눌한 거 알아”라고 말하곤 한다. 그의 말 중에서 “내 말”이라는 말은 내 마음을 매우 아프게 한다. 하지만 “아직은”이라는 말은 큰 소망이 된다.미시시피 해티스버그에 있는 그의 집에 돌아가서 그를 내려놓은 후에, 나는 그와 포옹을 하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삼키며 렌터카로 향했다. 온 세상이 바꿔져 버린 느낌이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우리 안에 낯선 향수병이 슬며시 고개를 들고 모든 것들이 예전의 상태로 되돌려지기를 갈망한다. 내 친구가 예전에 건강하던 상태로 다시 돌아가기 원하는 갈망. 그와 함께 완전히 자유롭게 웃고 떠들며 이야기하기를 원하는 갈망 말이다.사우스캐롤라이나주 콜롬비아로 돌아가고 있는데, 친구가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에 대한 생각이 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얼마나 달라졌고 그의 삶이 지금 얼마나 더 힘들지에 대한 생각 말이다.그러고는 검은 구멍이 점차로 커지는 것처럼, 전 세계는 다른 세계가 되어버렸다. COVID-19가 세계 안으로 밀고 들어와 우리를 두려움에 떨게 하고 우리가 알고 있던 삶은 온통 바꿔져 버렸다. 모든 것들이 다시 예전과 같아질까? 얼마나 달라질까? 우리는 괜찮아질까?힘든 세상에서 예수님은 어디 계신가?우리 삶의 곳곳에서 그런 혹독함의 무게가 느껴진다. 그것이 중풍으로 마비된 몸이든지 혹은 치명적 바이러스이든지, 이 세계는 예전 같지 않다. 모든 것이 온전하지 않다. 모든 것이 제 위치에 있지 않다. 외적인 면을 통제함으로 이러한 것들을 감당하고자 최선을 다해 보지만 어느 순간 우리는 그 모든 것들이 터무니없었음을 알게 된다.삶의 모든 영역은 선물이다. 그렇다 그리고 그렇다고 믿는다. 하지만 영원히 바꿔져 버린 삶의 영역들 그리고 좋지 않게 바뀐 부분들은 어디에서 되찾을 수 있을까?여러 해 전에 나는 우울증으로 상담사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는 내게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했다. 그것은 이제 내가 학생들과 만나서 목회적 조언을 찾을 때 하는 질문이 되었다. 이것은 단순한 질문이지만 영적 현실을 꿰뚫어보는 질문이다. 이번 주에 나는 나 자신에게 이 질문을 많이 해보았다. 이는 시편에도 자주 등장하는 질문이다. 시편 기자가 “주여 깨소서 어찌하여 주무시나이까?”(시 44:23) 그리고 “여호와여 어찌하여 나의 영혼을 버리시며 어찌하여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시나이까?”(시 88:14)라고 쓴 것처럼 말이다.욥의 “상담자들”처럼 되지 않고자, 마치 모든 것이 안정된 것처럼 들리도록 내가 씨름한 것에 대해서 너무 많은 말을 하지는 않으려 한다. 이러한 고통의 상황에서 그저 배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적어도 때로 삶이 말할 수 없을 만큼 힘들고, 모든 것에 대한 답변을 다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때로 우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고대의 대답에서 해답을 얻으려고 씨름하지만, 그것들은 너무 무미건조하거나 상투적이거나 현실성이 떨어질 때가 많다.예수님은 눈물을 흘리며 일하고 계신다내 스스로 ‘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라는 질문에 해답을 찾으려고 하자, 위로가 되는 두 가지 진리가 계속 떠올랐다. 첫째로, 예수님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그분은 이 세상의 고통과 멀리 있어 그것에 대한 느낌이 없는 것이 아니다. 고통으로 인한 모든 굳은살과 흉터와 자기방어기제들로 우리의 마음은 지금 감각이 없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로 인해 이 땅에 생긴 모든 질병과 상실과 고통과 죽음을 아파하고 계신다. 그분이 거룩하심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거룩하심 때문이다. 모든 것이 아직 올바르지 않기 때문에 모든 것이 건강하지 않은 것이다.요한복음 11장에 나오는 예수님을 살펴보면, 그분의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시는 걸 볼 수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분노와 깊은 슬픔에 눈물을 흘리셨다. 예수님이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가 아니다. 그분의 친구들을 깊이 사랑하시고 그들에게 공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 예수님은 여전히 같은 분 아니신가? 그분은 여전히 사랑하시는 이들로 인해 눈물을 흘리시는 분 아니신가?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셔서 이제 마음에 감동이 없으신 건가 아니면 여전히 그분의 사랑하는 형상들로 인해 가슴이 뛰고 계신가?프레드릭 데일 브루너가 아마도 이를 가장 잘 표현한 것 같다. “우리는 ‘놀라워라 주 사랑이, 날 위해 죽은 그 사랑’이라고 찬양한다. 하지만 ‘놀라워라 주 사랑이, 날 위해 우는 그 사랑’이라고 찬양할 수도 있다”고 말이다.이 모든 상황에서 예수님이 어디에 계신가? 그분은 눈물을 흘리고 계신다. 하지만 두 번째로, 그분은 또한 일하고 계신다.예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분은 우리가 홀로 모든 걸 다스릴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리시고, 우리가 서로에게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를 기억하게 하시는 것 같다. 발코니에서 함께 음악을 연주하는 다른 나라 이웃들의 비디오에서 이것을 매우 아름답게 보았다. 우리는 늘 서로가 서로에게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이제는 더 확실해졌다. 우리 홀로는 이 어려움을 이겨낼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사이에 있는 미세한 다름이나 잡담을 나누는 정도의 관계의 장벽을 뛰어 넘어 진정한 공동체로 살아가도록 지음 받았다.일에 묶여 있던 사람들에게는 지금의 혼돈과 어려움이 아마도 그분이 강제로 휴식을 주고 낯설지만 안식을 취하게 하시는 것일 수 있다. 우리의 삶에 리셋 버튼이 눌러졌다. 온라인상에서는 일과 휴식의 복잡한 관계가 어떻게 다르게 보일까? Lynn Ungar는 그녀의 시 “팬데믹”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을 유대인이 안식일을 생각하는 것처럼 생각해보면 어떨까가장 성스러운 시간으로?이동을 중단하라. 사고 파는 것도 중단해 보라.그냥 지금 당장 내려놓아 보라.현재와는 다른 세상을 만들어보라.노래하라.기도하라.꼭 접촉해야 할 이들만 만나라.중요한 문제에만 전념하라.”하나님이 일하고 계시므로, 우리는 중요한 문제에만 전념하면 된다.눈물 흘리는 이들과 함께 (논쟁하지 말고) 울라그 다음엔 좀 더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내 친구와 프랑스 거리에 있는 한 음식점 테라스에 앉아 있을 때, 그는 조심스럽게 “하나님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도록 하셨을까?”라고 물었다.팀 켈러의 저서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가 아무리 도움을 줄 수 있는 책이라 하더라도 그가 그 순간에 필요한 것은 내가 그것을 불쑥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필요한 건 그러한 어려운 질문을 하는 그의 옆에 그냥 아무 말 없이 앉아 있어 주는 것이다. 아마도 언택트 시대에 (적어도 잠시지만), 이러한 것은 창조적으로 무언가를 제공할 수 있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치고자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고통스럽게 삶의 활동이 중단된 상태에서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시 46:10).Ungar는 그녀의 아름다운 시를 이렇게 마친다.“우리 몸이 가만히 있으면,우리 마음으로 다가가게 된다.두렵지만 아름다운 방식으로우리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지금은 그것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우리의 생명이 서로의 손에 달려 있다는 걸 알게 된다.(분명히 이제는 명백해졌을 것이다)도움을 주려고 하지 말라.마음으로 다가가라.말로 위로하라.우리가 접촉할 수 없을 때감동을 주는 보이지 않는 긍휼의 덩굴손을 내밀라.당신의 사랑을 약속하라좋을 때나 나쁠 때나아플 때나 건강할 때나우리 목숨이 다할 때까지”이 모든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건강할 때와 똑같이 아플 때도 우리를 사랑하고 계신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Jesus Is Here, in Sickness and in Healt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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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외감과 친밀감에 관하여
by 노승수
2020-11-07
연인의 이별과 부부의 권태에 결여된 것은 친밀감이 아니다. 친밀감의 결여로 연인이 이별을 경험하거나 부부가 권태에 빠지지 않는다는 말이다. 오히려 존경심의 결여가 이별의 원인이 된다. 사람들은 관계를 위해 친밀감에 몰두한다. 그러나 친밀감의 탐구가 끝나면 곧 권태를 경험하게 된다. 친밀감은 관계를 유지하는 진정한 원천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를 친밀감으로 정의하지 않는다. ‘경외’로 요약되는 존경심을 요구한다.유교적 덕목에서 부부간을 구별이 있는 것으로 부자간을 친한 것으로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부부 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존경심이고 부자간에 결여되기 쉬운 것이 친밀감이기 때문이다. 지나친 친밀감은 중독이거나 폭력이 결과다. 관계 중독이고 이 중독은 더 강한 자극을 요구하고 그 요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권태를 경험하고 다른 대상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현대는 친밀감을 기본적으로 결여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그래서 신앙의 영역에서도 친밀감이 목회와 신앙의 중심 이슈를 등장하지만, 이는 관계를 망치는 원천이 된다. 그런가 하면, 친밀감은 폭력의 결과이기도 하다. 스톡홀름 증후군은 납치 피해자가 납치 가해자를 동정하거나 지지하게 되는 증후군을 일컫는 말이다. 이 현상은 언뜻 잘 이해가 안 되지만 사실은 우리 주변에 아주 흔한 증후군이다. 예들 들어, 가정 폭력의 피해자들의 심리상태는 거반 이런 상태에 놓여 있다. 한 쪽은 위력을 가지고 있고 다른 한 쪽은 마치 부모 손에 놓인 갓난아기처럼 무기력하게 자신의 모든 것을 상대방이 결정하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 대한 일종의 병리적 적응이다. 납치나 가정 폭력에서 한쪽의 위력이 피해자의 인격적 자기 결정을 붕괴시켰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이런 상황에 놓인 피해자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가해자를 이해하려는 심리 내적 노력을 보이게 된다. 그런 중에 가해자의 상황과 성장 배경, 트라우마에 대한 일종의 공감이 형성되면서 생기는 심리 현상이다. 가해자의 과도한 폭력과 강요된 친밀감과 이해는 한 인격이 자율적으로 사랑하는 일을 방해한다. 이처럼 인간관계에서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는 정상적인 인격적인 반응을 어렵게 하거나 쉽게 권태로 관계가 허물어지게 한다.그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무엇이 결여되어 있을까? 오늘날 우리 신앙에 있어서 결코 친밀감이 모자라지 않다. 오히려 과하다. 신앙적 방종은 바로 이런 의식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다. 얼마 전 작고한 J. I. 패커(J. I. Packer)는 현대 복음주의에 대해 일컫기를 “하나님을 편안한 이웃집 할아버지로 만들어 버렸다”고 정의한 적이 있다. 현대적 친밀감의 요구가 오히려 하나님과의 진정한 관계를 방해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신앙에 턱없이 부족한 것은 ‘친밀’이 아니라 ‘존경’이다. ‘경외심을 결여한 신앙’은 오늘날 신앙의 보편적 행태이다. 그래서 이 친밀감을 증진할 여러 ‘신앙적 프로그램’이 요구된다. 이 프로그램들은 신자들의 영적인 만족 특별히 친밀감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이것은 현대 신앙을 제대로 진단한 것이 아니다. 잠언이 증언하듯이, 경외함은 지식의 근본이 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경외라는 태도로부터 유래하는 것이다.이 경외감을 더 적극적 형태로 표현한다면 그것은 ‘경건’이다. 칼뱅에 의하면, 경건이란 ‘말씀을 어기기를 죽기보다 싫어하는 감정’으로 요약된다. 경외감은 그래서 성경에 천착할 수밖에 없다. 성경을 아는 지식과 열정이 우리를 신앙적 성숙으로 이끈다. ‘신앙적 프로그램’들은 뭔가 성숙한 느낌, 친밀감 등등의 자기만족적 감정을 가져다주지만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것이 아무런 성과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백화점 쇼핑이 만족을 주지 못하는 것처럼, 그것은 일종의 영적 쇼핑에 불과하다. 진정한 만족과 성숙은 성경을 아는 지식의 성장에서부터 자라는 것이다. 영적이며 심리적인 건강은 우리 감정이 상황에 맞고 우리 이성과 의지가 상황과 관계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되는 데 있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은 우리가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위엄과 권능을 가진 분이시다. 그에 비해, 우리는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는 데서 한 없이 무기력한 존재이다. 하나님과 교제에서 친밀감만 구한다면 우리는 정말 제대로 사귈 수 있을까?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격이 완전히 다름에도 폭력적이거나 병리적이지 않은 것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한 없이 자비하시며 우리가 그분과 교제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주셨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친밀감이 아니라 경외감을 갖고 하나님이 정하신 법도를 따라 적정과 절도의 원리로 하나님과 교제하는 데로 나아가는 것이다. 지나친 친밀감의 추구가 남녀의 관계에서 권태를 만들 듯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분을 경솔히 대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많은 경우 기독교 내에서 행해지고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훈련들과 행위들은 이런 문제를 안고 있다. 친밀감의 추구가 거짓 예언과 음성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관계에서 강요가 만들어내는 폭력은 힘 있는 자가 없는 자를 향해서만 일어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는 것으로 우리가 듣거나 그것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다른 의미의 폭력이다. 자기 마음의 거짓으로 너희에게 예언하는도다(렘 14:14)그들이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렘 23:16)자기 마음대로 예언하는 여자들에게 경고하며 예언하여(겔 13:17)
관계
친밀감
경외감
관계중독
스톡홀름증후군
JI패커
하나님을아는지식
존경
칼뱅
경건
반대를 아름답게 하는 질문 여덟 가지
by Bobby Jamieson
2020-10-31
당신이 지금 전반적으로 반대하는 어떤 주제와 관련하여 같은 교회 교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음식과 환경 윤리 사이의 관계, 얼마 전 대통령이 지명한 대법원 법관이 다가올 대선 투표에 미칠 영향, 이번 가을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할 지에 대한 문제 등등.어떻게 해야 이런 쉽지 않은 대화를 잘 할 수 있을까? 대화 전과 대화 중에도, 그리고 그 대화를 끝내고도 내가 중점을 뒤야 할 핵심은 어디에 두어야 할까?여기 고려해야 할 여덟 개의 질문이 있다. 1. 이 주제가 내게 얼마나 중요한가?로마서 14장에는 음식과 관련해 과거의 관습에 여전히 매여있는 사람들과 또 거기에서 자유로운 사람들에게 주는 바울의 메시지가 나온다. 바울은 물론 이 문제와 관련해서 정확한 입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에게는 훨씬 더 시급한 과제가 있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뭘 먹느냐 안 먹느냐가 핵심이 아니라 사실상 여기에는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문제가 걸려있다는 사실을 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바울은 양 쪽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고려한 후, 거기에 따른 합당한 방식으로 대화와 행동의 틀을 잡도록 요청했다.따라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야한다. 이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가? 이게 복음의 문제까지 관련시킬 정도로 중요한가? 별로 중요하지도 않은 주제를 가지고 내가 행여나 복음의 중요성이 달린 것처럼 너무 심각하게 대하고 있는 건 아닌가? 누가 봐도 내게 가장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메시지가 희석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하게 나는 지금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가? 2. 내 입장에 대해 얼마나 확고한가?당신이 틀리지 않았다고 얼마나 확신하는가? 당신이 판단의 근거로 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 증거 중 몇 개가 과연 성경 안에 있고 또 몇 개가 성경 밖에서 찾은 것인가? 증거에 대한 당신의 평가는 얼마나 포괄적인가? 당신이 가진 증거와 관련해 당신만큼 또는 당신 이상으로 연구한 사람들 중 당신과 정반대의 결론에 도달한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예를 들어 삼위일체 교리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지금 다루는 주제에 관해 확신하고 있는가? 믿음만으로 받는 구원에 대해서 확신하는 만큼이나 미국 외교 정책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는가? 그리스도의 배타성에 대해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인종차별이란 불의를 바로잡는 데에 필요한 수단에 대해 확신하는가? 첫 번째 단계는 신념의 종류에 따라서 확신의 단계(levels of certainty)도 얼마든지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종류에 따라 틀렸다고 판명될 가능성이 더 높은 게 있고, 따라서 그런 경우에는 더 쉽게 마음을 바꿀 가능성이 커진다. 다시 말하지만, 이처럼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향해 가진 확고함과는 달리 당신의 입장이 얼마든지 유동적일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한다. 3. 상식을 가진 기독교인이라면 얼마든지 반대할 수도 있는 문제 아닌가?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데에 도움이 된다. 이것은 다른 말로 우리가 서로를 단지 형제자매로 인식하는 것을 넘어서 합리적 사고 능력을 가진 형제자매로 인식한다는 의미이다. 여전히 서로 동의하지 않더라도, 이 질문을 던짐으로 우리는 여전히 형제자매로 남을 수 있다.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하게 행하며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사람이라도 얼마든지 세례와 관련해서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질 수 있다. 유아 세례에 관해서 또 세례는 오로지 신자에게만 해당된다는 입장에 대해서도. 그런 사람을 이해할 수 없는가? 나는 할 수 있다. 물론 세례는 세 번째가 아닌 두 번째로 중요한 문제이다. 지역 교회가 제대로 운영되기 위해서는 세례에 관해서 합의가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점은 이것이다. 당신이 가진 지적 공감 능력(intellectual sympathy)은 어느 정도인가? 손에 든 확성기를 잠시 내려놓고 당신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 찬찬히 그의 생각을 둘러볼 생각이 있는가? 4. 서로 동의하지 않고도 같은 교회를 다닐 수 있을까?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기독교인은 복음 교리와 복음적 정치 형태(gospel polity)라는 두 가지에 동의해야 한다. 건전한 신앙고백의 대부분은 사실상 다 이 두 가지 범주 중 하나에 해당한다. 마찬가지로, 건전한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은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와 서로에게 필수적인 윤리적 의무를 수행하도록 한다. 이것이 왜 중요한가? 교회가 원칙적으로 교인을 출교하는 데에 근거가 되는 회개하지 않은 죄 또는 회개하지 않는 신학적 오류는 함축적으로나마 신앙고백과 교회 언약을 위반한 것이기에 그 잘못의 근거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두 범주 외에도 광범위한 신학적 입장, 정치적 신념, 실질적 선호 등 다양한 이슈가 있다. 그렇다면 서로 동의하지 않음에도 불구하도 여전히 같은 교회의 지체로 있을 수 있는 주제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여기에 해당하는 사항을 더 많이 넣으면 넣을수록 우리는 서로간의 하나됨을 더 촉진시키고 유지하기 쉬워질 것이다. 이 질문을 이렇게 바꿔보자. “이 주제와 관련해 다른 사람이 나와 동의하지 않아도 나는 기쁜 마음으로 이 교회를 계속 다닐 것인가?”5. 내가 다른 사람보다 논쟁하기를 더 좋아하는 건 아닐까? 논쟁에서는 이겼지만 사람을 잃는 경우는 허다하다. 그건 또한 하나됨을 무너뜨린다. 달리 말해 그건 논쟁에서 이겨서 얻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큰 것을 잃은 것이다. 다른 형제의 영혼에 상처를 주고 말싸움에서 점수를 딴 게 무슨 이득이 된단 말인가? 다른 자매의 사랑이 줄어든 대가로 무엇을 얻을 수 있었단 말인가? 잠언은 말을 할 때 어떻게 해야 타인의 상태와 필요를 맞춰주는 것인지에 대한 조언으로 가득 차 있다.“사람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잠 15:23).“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잠 25:11).“오래 참으면 관원도 설득할 수 있나니 부드러운 혀는 뼈를 꺾느니라”(잠 25:15).당신의 목소리가 전달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한정된 팔로워가 있는 소셜 미디어 계정도, 또 지금 대화를 나누는 파트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진리는 당신과 달리 실로 많은 자원을 가지고 있다. 논쟁을 하더라도 상대편이 마지막 말을 하게 하라. 상대가 가진 한계(threshold)가 어디쯤인지 알아내고 거기에 도달하기 훨씬 전에 논쟁을 멈추라. 논쟁에서 이기지는 못했을지 몰라도 당신은 진리의 씨를 뿌리고 거기에 우정의 물을 줄 수 있을지 모른다. 설혹 우정이 깨지게 된다고 해도, 그 우정을 깨는 장본인이 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사랑하기 위해서 오늘 하루를 살아야 한다. 6. 행여 교회의 하나됨보다 어떤 특정 주제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가? 때때로 침묵은 웅변이고 귀가 멍해질 정도로 큰 소리이다. 셜록 홈즈는 개가 짖지 않은 이유를 알아낸 것으로 유명하다. 개가 짖지 않았다면, 한밤중에 마당에 들어왔던 사람을 그 개가 잘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홈즈는 수수께끼를 풀었다. 로마서 14-15장에는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설득력 넘치는 침묵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이 장은 음식 규정과 같은 옛 언약의 의식법이 새 언약 신자들에게도 구속력이 있는지 여부를 다룬다. 여기에 대한 바울의 입장은 이것이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롬 14:14).물론 바울의 입장이 있지만 여기에는 침묵이 있을 뿐이다. 한 장 반에 걸친 토론에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지지하는 단 한 번의 주장도 하지 않는다.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을 설득하려고 쓴 단어는 단 하나도 없다. 그는 각자 다른 양심을 가진 신자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조화롭게 살기를 바란다. 그의 목표는 논쟁적 설득이 아니라 목회적 평화를 만드는 것이다. 바울에게서 배워야 한다. 애완동물 문제 보다 교회의 하나됨을 더 중요시하라. 바울처럼 서로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불일치를 통해 오히려 더 사랑하도록 도우라. 당신과 동의하지 않고 또 앞으로도 동의하지 않을 그리스도인들을 위해서도 당신 마음속에 애정의 공간을 만들라. 7. 이 대화를 하기에 지금 여기가 적합한 시간과 장소인가? 딱 하나 실질적인 적용을 해보도록 하자, 바로 소셜 미디어 이야기다.“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이것은 한 문장으로 정리된 성경적 커뮤니케이션 원칙이다. 바른 이유를 가지고 바른 시간에 바른 방법으로 바른 단어를 사용해서 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에베소서 4장 29절을 소셜 미디어에서 지키기는 너무도 힘들다. 소셜 미디어는 사실상 중립적인 커뮤니케이션 공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거기에서는 모든 대화가 너무도 쉽게 갈등으로 바뀐다. 왜 이 말씀을 소셜 미디어에서는 지키기가 어려울까? 다음 네 가지 요소 때문이다.(a) 소셜 미디어에는 비대면이 주는 “온라인 무례 부작용(online disinhibition effect)”이 있다.온라인에서는 얼굴을 맞대고 나눌 때보다 훨씬 더 심하게 말한다. 서로 얼굴을 마주보고 있을 때면 자연스럽게 생기는 모든 종류의 상식적인 조심과 절제(reserve), 감수성과 동정심은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인간의 얼굴 대신 스크린 속 대화 상자를 쳐다보고 있다 보면 어느 새 우리 머리에서 사라져버린다. (b) 소셜 미디어에는 “친밀함의 수위 조절(gradients of intimacy)”이 힘들다.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구에게 말하고 있는지 또 누가 듣고 있는지 알지 못할 때가 많다. 즉, 누가 듣고 응답하는지에 대한 당신의 통제력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상황에 맞게(소용되는 대로)” 말하라고 촉구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선 그런 기회가 아예 주어지지 않는다. 게시물은 군중 속으로 발사하는 불꽃놀이와 같다. 누구에게도 일부러 불을 붙이고 싶진 않겠지만, 그럼에도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누군가가 당신의 글 때문에 심각한 화상을 입을지도 모른다. 거실에서 친구와 일대일로 있을 때와 백 명이 모여 있는 거실에서 말할 때가 같은 방식일 수 없다. 소셜 미디어를 사람들이 많이 모인 거실로 생각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가장 큰 목소리를 내는 사람을 중심으로 그때그때 방향을 바꿔가며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폭도들이 모인 거실과 같은 곳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c) 소셜 미디어는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가득하다. 당신과 내가 함께 커피를 마시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만약에 내가 무슨 말을 했는데 당신이 불쾌감을 느낀다면, 나는 바로 그 자리에서 당신으로부터 실시간 피드백을 받을 것이다. 설혹 당신이 마스크를 쓰고 있다고 해도, 나는 당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마든지 눈치 챌 수 있다.그러나 소셜 미디어에서는 내가 하는 말을 누가 보고 있는지 또 누가 반대하고 또 누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는지 알 길이 없다. 한 마디로 귀한 도자기를 깨부수고 있는데도 전혀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과 비슷하다. 아무런 단서도 없이 자본금을 날리고 있는 것과도 비슷하다. 당신도 모르는 사이에 신뢰를 잃어버린 우정은 급격히 고도를 잃고 추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그런 사실을 알았을 때에는 거의 항상 이미 너무 늦었다는 것이다. (d) 소셜 미디어는 교육 받지 않은 선생, 책임 지지 않는 선생을 만들어낸다. 소셜 미디어 세상에서는 모든 사람의 손에 확성기가 들려있다. 보다 전통적인 미디어(예: 설교, 강의실 강의, 서적, 잡지 또는 신문)에서 무슨 말을 하려면 최소한 어느 정도 수준이 되는지 검증을 받아야 한다. 장로와 교인은 목사를 검증한다. 교장 또는 학장은 교사를 인터뷰한다. 편집자와 사실 확인 담당자는 기사가 인쇄되기 전에 그 기사의 진위를 검토하다. 하지만 소셜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손짓하는 무료 초대에 대답만 하면 된다. “바비, 지금 무슨 생각 하고 있어?”그렇기에 소셜 미디어는 야고보 사도가 가장 엄중하게 던진 다음 두 가지 경고를 싸그리 무시하도록 만든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약 1:19–20).“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약 3:1–2).따라서 게시물을 올리기 전에 물어야 한다. 이런 대화를 나누기에 지금이 바른 시간이고 또 여기가 바른 장소인가? 8. 서로가 더 하나되는 방향으로 반대의견을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누군가 반대할 때 당신은 오히려 기뻐하는가? 황당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아주 잘 아는 사람 중에서 최소한 한 명 이상은 반대할 때에도 오히려 기뻐하는 사람이 있다.어떻게 이게 가능할까? 그건 당신에게 반대하는 그들이 적이 아니라 부드럽고 자비롭고 또 친절한 형제자매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불일치는 당신에 대한 그들의 사랑의 깊이를 표현할 뿐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고백하는 그리스도를 향한 헌신의 깊이를 보여주는 지표일 뿐이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반대하기 쉬운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그의 학생 중 한 명이었던 조지 왓슨(George Watson)은 루이스가 죽고 몇 십 년이 흐른 후에 그에 관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게 있어서 최고의 선생님이자 최고의 동료인 그는 자신의 신념을 내가 공유하기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 그의 태도는 공손하지만 보기에 따라서 무자비하다고도 묘사될 수 있습니다. … 당시 그가 가진 두 가지 열정은 문학 자체와는 별개로 사람과 논쟁이었지만, 그는 그 둘을 혼동하는 실수를 자주 범하진 않았습니다. … 그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는 독이 전혀 없는 활력을 가졌고, 그는 또 관대했습니다. … 내가 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이냐고 누가 묻는다면, 내 대답은 이것입니다. 반대하는 방식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린 것(the art of disagreement)이라고.”하나님께서 우리에게도 이런 경지를 허락하시길 간구한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o Master the Art of Disagreement—in the Church and on Social Media번역: 무제
생활
관계
로마서14장
C.S.루이스
소셜미디어
교회언약
복음적정치형태
비대면
지적공감능력
자녀를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훈육 방법
by Tilly Dillehay
2020-10-26
올해 들어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평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아이들과 함께 보내고 있다. 2020년이 주는 여러 가지 압력 외에도 어린 자녀를 가진 부모라면 육아에 대해 늘어난 중압감으로 쉽지 않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 많은 시간을 자녀와 보낸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자녀에게 더 많은 죄를 짓고, 또 부모를 향한 자녀의 죄도 같이 늘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시간을 더 많이 함께 보낸다는 것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가족과 생활하는 게 과연 장기적으로 옳은지 여부에 대해 질문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왜냐하면 더 많아진 시간은 더 많은 균열을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균열은 2020년에 새롭게 나타난 게 아니다.얼마 전 예쁜 딸을 낳은 젊은 크리스천 엄마는 지금 시대를 지배하는 육아 철학을 초조하게 탐색하는 중이다. 딸과 같이 있는 게 너무 힘들어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두렵다고 털어놓은 세 살짜리 아이를 가진 자기 친구에 대해, 그 엄마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이 엄마가 ‘율법 기반 육아(law-based parenting)’를 믿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끊임없는 아이의 울화와 반항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이 이야기를 했던 젊은 엄마도 “율법 기반 육아”가 무엇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도 엄격하게 대하는 것 또는 뭔가 잘못하면 벌을 받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정도로만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 젊은 엄마도 불순종하는 경우에 엉덩이를 맞으면서 자랐고, 또 부모가 때리는 게 다름 아닌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의 친구 중 그 누구도 잠언에서 “회초리(막대기)”라고 부르는 것을 자녀에게 사용하는 거 같지는 않다고 내게 고백했다. 나는 같은 현상을 발견했다. 우리 세대의 많은 부모들은 우리가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용어(공포 기반 양육 또는 율법 기반 양육 등)의 영향을 받아왔는데, 문제는 그런 그들이 어린 자녀를 훈육해야 하는 방법과 이유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외적인 행동에 초점을 맞추는 대신 복음적 대화에 초점을 맞추어 아이들과 대화를 하도록 인도하는, 아주 훌륭한 기독교 양육책을 얼마든지 이용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책을 쓴 저자는 지금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전혀 쓰지 않는 몇 가지 기본 도구를 당연히 써야 한다고 가정했던 것 같다. 실생활에서 훈육 메커니즘을 습득하지 못한 상태라면, 우리는 그게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를 수 있다. 복음을 전하는 출발점을 제공하는 일종의 관계적 신뢰를 확립하는 데에 회초리를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또한 아이들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훈련시키는 데에 회초리가 어떤 역할을 하는지 우리는 전혀 모를 수 있다. 훈육을 통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보여줄 수 있다밀레니엄 세대의 어느 부모가 지금 내 또래들이 가장 힘들어하는 점이 무엇인지 물으면 나는 서슴없이 “권위”라는 한 단어로 대답할 것이다. 아마도 그동안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아는 젊은 부모들 사이에서는 ‘은혜 기반 육아’ 대 ‘율법 기반 육아’라는, 잘못된 이분법이 설정되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최근 방청소를 하라는 말을 무시하는 아들에 관해서 말한 적이 있다. 그 때 아들을 대신해서 청소를 하는 “은혜를 보여야” 하는지, 아니면 아들로 하여금 강제로 청소를 하도록 하는 “율법을 적용”해야 하는지 물었다. 온라인에서 아이들에게 억지로 저녁을 먹도록 하는 것을 꺼리는 엄마들의 댓글을 본다. 왜냐하면 그게 아이들로 하여금 하기 싫은데도 억지로 하도록 함으로, 아이들을 어떤 의미에서 작은 바리새인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과 나는 우리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하는 말은 절대 믿을 게 못된다. “노”가 노의 의미가 아니고, 또 “예스”가 항상 예스를 의미하지도 않는다(마 5:37). 우리는 끊임없는 논쟁, 속임수, 잔소리를 통해서 어떻게 하든지 가정 속에 기본적인 질서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리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전한다 해도, 우리가 하는 명령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라면, 우리는 오히려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을 감수하게 된다. 아이들 눈에 반복해서 부모가 하는 말과 실제 의미가 다르게 보이는 경우, 아이들은 하나님도 부모처럼 얼마든지 말씀과 실제 의도가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현실 속에서 많은 사람들이 신봉하는 다음과 같은 격언이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당신에게 은혜를 보여주신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를 처벌하지 않음으로써 자녀에게 은혜를 보여줄 수 있다.”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비교이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가 없는 것을 부모와 자식의 관계와 비교해서는 안 된다. 구원받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적이다. 그러나 아이들은 이미 가족의 일부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구원을 얻고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방법을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가족의 일원이라는 게 어떤 것인지를 가르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을 때에도 여전히 필요한 권위, 순종, 관계, 축복이라는 자질을 자녀들이 항상 기억할 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다. 육아가 주는 의무감에도 불구하고 자녀들은 우리와 함께 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차원에서 이미 그들과 교제하고 있으며, 교제가 어떤 느낌인지 보여줄 수 있는 모든 기회를 갖고 있다. 그건 웃음소리 같은 거다. 그건 좋은 음식 같은 거다. 그건 명령 같은 느낌이다. 또 축복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리고 때로는 훈육이 주는 고통스러운 결과처럼 느껴진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또 아들들에게 권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권면하신 말씀도 잊었도다 일렀으되 내 아들아 주의 징계하심을 경히 여기지 말며 그에게 꾸지람을 받을 때에 낙심하지 말라.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가 받아들이시는 아들마다 채찍질하심이라 하였으니 너희가 참음은 징계를 받기 위함이라 하나님이 아들과 같이 너희를 대우하시나니 어찌 아버지가 징계하지 않는 아들이 있으리요.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또 우리 육신의 아버지가 우리를 징계하여도 공경하였거든 하물며 모든 영의 아버지께 더욱 복종하며 살려 하지 않겠느냐”(히 12:5–9, 잠 3:11–12 인용)이 구절은 형벌을 받을 운명인 하나님의 적들에 관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이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을 징계하고 계시고, 또 하나님이 보시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만들어진 아빠가 사랑하는 자녀를 징계하는 것이 옳다면, 우리는 그 의미를 면밀히 살펴봐야한다. 하나님의 징계는 분노에서 비롯된 변덕스러운 채찍질이 아니라, 이미 그분에게 속한 자녀들을 사랑과 인내로 바꾸는 것이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이런 종류의 훈육을 모델로 삼아야 한다. 잠언 속 회초리가정에서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성경적 단어를 찾고자 한다면 잠언은 우리에게 많은 근거를 제시한다.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잠 22:15)“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 23:13). “네 자식을 징계하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평안하게 하겠고 또 네 마음에 기쁨을 주리라”(잠 29:17)분명히 이 구절들은 회초리를 쓰는 방법과 이유, 그리고 예외에 대한 다른 많은 질문을 제기한다. 그러나 여기서 내가 주장하고 싶은 것은 단순하고 논란의 여지를 거의 찾을 수 없는, 확실한 진술이다. 잠언이 회초리의 사용을 칭찬한다는 것은 확실하다. 잠언은 회초리의 원리가 우리 아이들을 사랑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라고 간주하고 있다. 잠언을 규범적으로 읽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이런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잠언은 규범집이 아니라고요. 이건 지혜 문학입니다!”). 그런 시각에도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도 여전히 묻고 싶다. 우리는 지혜롭게 되기를 원할까 아닐까? 성경 저자는 지혜롭게 되는 게 좋다고 생각했을까?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성경이 회초리를 사용하는 육체적 규율을 왜 그토록 강력하게 지지하는지, 또 다른 설득력 있는 이유를 찾을 수 있을까?회초리에 대한 반대집에서 사용하는 육체적인 훈육에 관해 이야기할 때, 몇 가지 상식적인 회초리 반대 이유가 떠오를 수 있다. 특별한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동은 어떤가? 입양된 자녀, 학대 경력이 있는 자녀는 어떤가? 또한 회초리가 합법적인가? 그 점에 대해서도 걱정해야 하나? 그리고 신체적 학대로까지 상황을 악화시킬 가능성이 큰 문제 많은 부모는 또 어떤가? 이러한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필요하다. 회초리는 단순히 육체에 가해지는 사건이 아니라, 하나의 원리이다. 회초리 속에 담긴 원리는 이것이다. 죄를 억제하려는 목적으로 사랑을 바탕으로 가해지는 현재 약간의 고통은 장기적인 열매를 거둘 것이다. 따라서 자녀 또는 부모가 육체적 훈육을 현명한 방법이 되지 않도록 만드는 병력이나 질병이 있는 경우에도 이런 회초리의 원리가 관계적인 상황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이 세상에는 질서(structure)가 있음을 아이들은 알아야 한다. 옳은 것은 옳고, 그른 것은 그르며, 부모는 사랑과 함께 권위를 가진 위치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부모는 아이들 마음속에 있는 죄가 어떤 유치한 형태로든 겉으로 드러날 때 그것을 죄라고 부르고 올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부모는 아이들 스스로 죄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을 때라도 죄를 똑바로 해결하기를 원한다. 그들은 사랑의 권위가 어떻게 생겼는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혼돈의 상황에서조차도 죄를 제대로 처리하기를 원한다. 회초리 없이도 그런 부모의 권위를 전달하는 방법을 찾는 데에는 큰 지혜가 필요하다. 그렇기에 이것은 우리와 비슷한 길을 걸어온 경험 많은 부모들에게 겸손하게 의견을 구해야 하는 또 다른 이유가 된다. 그리고 자녀가 앞에서 말한 소수에 해당하는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라면, 결코 예외가 성경의 명령을 무시하는 변명으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 법적인 질문은 질문할 가치가 있다. 현재 미국 50개 주와 컬럼비아 특별구 모두에서 가정에서 행해지는 신체적 징계는 합법이다. 게다가 거의 절반에 가까운 주(주로 남부 및 중서부)에서는 학교에서 쓰는 회초리도 합법이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다. 서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이미 회초리 사용이 완전히 금지되었으며, 스코틀랜드는 모든 종류의 신체적 규율을 금지하는 몇 안 되는 국가들 중에서도 가장 최근에 거기에 동조한 국가가 되었다. 즉, 여기에는 시민 불복종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것 역시 지혜, 특히 인간의 지혜에 반대하는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믿음(allegiance)이 필요하다. 권위와 세속 선각자들지난 몇 년 사이에 양육의 권위에 대한 가장 명확하고 가장 도움이 되는 단어 중 일부는 세상의 연구 결과에서 나왔다.‘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 신드롬’이라고 불릴 수도 있는 이 현상은 오늘날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방식에 대한 명백한 진술에 대해 사람들이 얼마나 굶주려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 그가 쓴 ‘12가지 인생의 법칙(12 Rules For Life)’에서 임상 심리학자이자 토론토 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피터슨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는 원죄를 설명하기 위해 세상적인 언어를 사용한다. 많은 부모와 아이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그는 기독교 공동체의 많은 사람들이 강조하지 않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자신의 세계에서만 노는 아이는 “작은 괴물”이 될 수 있다(125). 자치가 허용된 아이는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이다. 피터슨은 어른이 위치에 상응하는 책임을 질 때 아이들은 안도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회초리도 거기에 필요한 한 가지 방법이라고 말한다(141).‘부모 양육의 붕괴(The Collapse of Parenting)’를 쓴 레오나르드 색스(Leonard Sax)는 어린 아이들이 스스로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을지 또 뭘 하고 놀지, 가고 싶은 학교까지 결정하도록 허용한 어느 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지난 30년 동안 권위는 엄청난 속도로 부모로부터 자녀에게로 옮겨졌다”(7). 그는 이러한 권위 이전에 관한 사항을 과다 치료를 받은 아이들, 미국 학교의 학업 성취도 저조, 취약한 학부생 등 다양한 문제와 연결시킨다. 피터슨과 색스는 우리를 당황하게 만드는 말까지 기꺼이 한다. 피터슨의 책 중 한 챕터는 “당신이 자녀가 싫어지도록 만드는 일을 아이들이 하지 않도록 하라”이다. 기독교인 부모라면 자녀가 하는 어떤 행동 때문에 부모인 내가 그 자녀를 싫어하게 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몸서리를 칠지도 모르겠다. 색스는 우리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12살짜리 소년이 엄마에게 했다는 말이다. “차 돌리라니까, 입 닥쳐. 넌, 그냥 운전이나 해”(6). 우리는 아이들이 이 정도까지 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러나 이 정도로 강한 경고는 지혜서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더 강한 표현도 나온다. “네가 네 아들에게 희망이 있은즉 그를 징계하되 죽일 마음은 두지 말지니라”(잠 19:18). 다음처럼 이 구절을 번역한 성경도 있다. “네 아들을 훈육하라 … 매맞는 우는 소리에 마음이 약해져서는 안 된다.” 찰스 브리지(Charles Bridges)는 1847년에 이렇게 썼다.“거짓된 부드러움보다 겉으로는 가혹해 보이지만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자비가 있다. 아이에게 우리가 결심한 것을 보게 하라. 약함에서 나오는 울음소리 때문에 우리가 부모의 의무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자녀들이 알도록 하라. 자녀가 건강한 교정을 받으면서 우는 게 훨씬 낫다. 자녀가 맞으면서 흘리는 눈물이 나중에 자신과 자녀들을 소홀히 훈육한 결과 맺은 쓴 열매 앞에서 후회하며 흘리는 부모의 눈물보다는 훨씬 더 낫다.”(271)이런 식의 언어는 자녀가 아주 어린 부모의 눈에는 좀 심하게 느껴질 수 있다. 우리는 어린 아이의 죄가 나중에 그 애가 중년이 되었을 때 짓는 죄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때때로 육아에 대해 교훈적이고 감성적인 언어를 사용하는 것을 선호한다. 그러나 이런 식의 냉정한 언어는 성서 속 지혜서를 쓴 저자들에게는 전혀 지나친 게 아니다. 게다가 색스와 피터슨과 같은 세속적인 선각자들에게도 지나친 게 아니다. 그렇기에 교회를 다니는 우리에게도 지나친 게 되어서는 안 된다. 멘토링과 회초리경건한 양육은 권위를 확립하는 것 이상이다. 그리고 권위를 확립하는 것은 회초리를 사용하는 것 이상이지 결코 그 이하는 아니다. 그리고 회초리 사용에 대해서 성경이 비중있게 다루는 말씀을 통해 우리 젊은 부모는 회초리를 왜, 그리고 어떻게 사용하는지 잘 배워야 한다. 일부 기독교 자녀교육 책에는 회초리에 대한 유용한 언급이 있다. 레이첼 젠코비치(Rachel Jankovic)는 ‘어린 시절을 사랑하라(Love the Little Years)’에서 훈련을 위한 즐거운 비전을 제시한다. 진저 허바드(Ginger Hubbard)가 쓴 ‘셋까지 세게 하지 마(Don’t Make Me Count to Three)’는 매우 실용적인 책이다. 그리고 테드 트립(Tedd Tripp)은 ‘자녀의 마음을 목양하기(Shepherding a Child ’s Heart)’에서 한 장에 걸쳐서 회초리에 대해서 쓰고 있다. 나는 밀레니엄 세대의 부모가 이 일을 잘한 이전 세대의 부모에게 다가가 가장 기본적이고 또 실용적인 질문을 던지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떻게 사랑으로 징계합니까? 언제 징계합니까? 회초리로 무엇을 사용합니까? 징계하고 나서 자녀들과 어떻게 기도하나요? 이런 종류의 질문에 대한 답을 책에서 찾기는 어렵다. 존경하고 신뢰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좋은 모범 답안을 듣도록 하라. 물론 가장 이상적인 경우는 당신이 바로 그런 집에서 자란 경우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훈육을 받지 못했고, 또 밀레니엄 세대 중 상당수도 당신과 비슷한 처지라면, 개인적인 영향과 지원 없이는 자녀 교육을 위한 좋은 비전을 가지기는 쉽지 않다. 나는 또한 도움을 청할 수 있을 만큼 겸손한 교회의 젊은 부모들의 이야기를 듣고 싶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들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기꺼이 엄한 모습을 보여줄 경험 많은 부모들도 만나고 싶다. 부모는 아이들에게 파견된 대사이다. 은혜, 사랑, 기쁨, 질서의 대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대사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이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처럼 아이들을 사랑해야 한다. 자녀를 징계할 때 자녀의 마음이 어떨지에 대한 확실한 보장은 없지만,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분명한 약속이 있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 받은 자들은 의와 평강의 열매를 맺느니라” (히 12:11). 이것이 바로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다. 즐겁고도 복잡하며 또 믿을 수 없을 만큼 가치있는 육아라는 책임을 믿음으로 감당하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the Rod Can Point Children to God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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