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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시대에 빠지기 쉬운 흔한 오류들
by Steve Bateman
2023-10-28
허위 정보, 당파적 조작, 조직적인 불신이 난무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지 분별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깨어 있으라”(엡 6:18). “분별하도록 힘쓰라”(엡 5:10). “모든 것을 분간하라”(살전 5:21). 그리고 “생각하라”(딤후 2:7).무엇이 걸린 문제인가? 첫째, 교회의 평안이다. 40년 동안이나 목회를 했지만, 나는 전염병과 대통령 선거가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분열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몰랐다. 여느 목회자들처럼 나도 성도들로부터 “잘 연구된” 여러 기사 링크가 포함된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입장을 표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힌 다른 주에서 목회하는 유명 목회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모범을 따르라며 충고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서로 모순되는 기사들을 보낸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들 모두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우정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연합이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걸린 문제는 신뢰성이다. 우리가 거짓에 쉽게 설득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이 참되다는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고의적인 무지함 또는 눈가림은 진리의 여부를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주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략적 망설임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분별을 위한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성경 읽기 능력이다. 매일 뉴스 자료를 습득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행 17:11).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헤드라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동성 결혼을 옹호하는 현직 대통령의 다음 말 속에 숨은 실체를 파악하게 한다. “결혼은 단순한 제안일 뿐이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성경적 능력은 우리를 이런 식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한다. 성경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 외에도 행여 우리가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공개 토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오류는 다음과 같다.1. ‘성급한 결론’ 오류관련성이 있지만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몇 년 전, 전선 오류로 인해 애매한 상황에서 내 차의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내 앞에 있던 성급한 운전자들과 싸움을 벌일 뻔했다. “속보”가 난무하는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족, 교회, 국가가 감정적인 성급한 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가?야고보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약 1:19). 천천히, 진정하고, 입을 닥치고, 곰곰이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급하게 부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나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일단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이상, 거기에 반대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에 우리의 자존심이 더 크게 손상된다는 위험 요소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때까지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판단을 보류하라. 2. ‘반복 논증’ 오류단지 자주 반복된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믿는 것은 반복 논증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끊임없이 거짓 비난에 시달렸다(막 14:55-59).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식의 반복되는 거짓말을 믿었기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여러 가지 일로 고발”(막 15:3)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반복한 히틀러가 사용한 게 바로 이 기술이다. 나치의 선전은 거짓말을 증폭시켰고, 독일 문화에 반유대주의를 부추겨 마침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거짓말은 오늘날도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전에 생각하라. 3. ‘인신공격’ 오류이 오류는 토론자가 논쟁보다는 사람을 공격할 때 발생한다. 논쟁에서 이긴 예수님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요 8:48). 모욕은 더 이상 논쟁할 무기가 남지 않은 사람이 의지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욕설에 능한 정치인은 인신공격을 통해서 상대방의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수고를 피하는 동시에 속기 쉬운 유권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복음에 충실한 목사를 단지 다른 목사가 ‘다시 깨어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믿는 건 차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일이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신공격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아가서 진리마저 훼손한다. 사람이 아닌 논쟁을 해체하라. 4. ‘이중 잣대’ 오류이중 잣대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표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더십에서는 성품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위임받기 전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그들이 그 신뢰를 배반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부자라는 이유로, 인맥이 많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해야”(딤전 5:21) 한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결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옹호자들의 비슷한 결점에는 변명으로 일관할 때, 믿지 않는 세상은 우리가 드러내는 불일치와 편파성을 고의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라. 5. ‘억제된 증거’ 오류이것은 당신의 주장에 불리한 증거를 숨기는 것이다. 사법 제도에서는 진실을 판단하려는 공정한 제삼자 앞에서 두 당사자가 주장을 펼친다. 솔로몬의 말을 기억하라.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1770년 존 아담스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한 영국군을 변호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향한 배심원단의 편견을 눈치챈 아담스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실은 완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 성향,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사실과 증거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양측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배심원단은 멸시받는 군인들 가운데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판결했다.그리스도인은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증거를 억압할 수 있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무료로 보장된 뉴스 매체 간의 시장 경쟁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그리고 팩트 체크를) 제공한다. “내가 원하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뉴스만 선택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편견을 더 굳히고 나아가서 자신까지 속이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디지털 기기에서 뉴스를 얻는다. 디지털 기기는 독자를 편중된 정보에 가두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조작된 뉴스 제공원이다. 깊게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라. 6. ‘유명인 의존’ 오류주장의 타당성보다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명인 의존 오류’이다. 많은 언론인이 남다른 수사 기술을 갖고 있으며 청중이 의견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하면 유명인은 “농담이었어!”라고 즉시 변명한다(잠 26:18-19). 단지 재미있는 코미디, 풍자, 해설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말에 책임을 회피한다. 173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가명을 만들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탄 리즈(Titan Leeds)의 사망일을 예측하고 발표했다. 리즈는 프랭클린이 예상한 날에 죽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손더스는 사기를 계속 치며 엄청난 양의 연간 정보집(Poor Richard’s Almanack)을 팔고 미디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모든 청중이 프랭클린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게 틀림없기에, 그는 자신의 거짓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의 혼합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니까. 좌파 쪽에서 볼 때,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는 시청률을 성공적으로 끌어낸 매력적인 스타일의 미디어 유명인이다. 방송 중 명예훼손 발언으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항소법원은 다음과 같이 사건을 기각했다. “합리적인 시청자라면 매도우가 객관적 사실을 암시했다고 결론 내렸을 리가 없다.” 우파 쪽에서는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들은 칼슨이 허구를 사실로 제시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선택한 변론 전략은 “칼슨이 자신이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 ‘실제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비문자적’ 논평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청중이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사는 이에 동의하고 사건을 기각했다.두 유명인 모두 다 추종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소스로 인식되지만, 둘 다 언론 윤리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법원 모두 미국인이 진실 주장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불행하게도 미국인 대부분이 손에 들고 있던 증거는 오로지 매도우와 칼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엔터테인먼트의 이면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라. 7. ‘동기 호소’ 오류제안한 사람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제안 자체를 기각하는 경우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나쁜 동기로 전파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동기로 전파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 1:18).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명예나 재산 축적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질 것이다. 요점은 동기가 논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동기와 상관없이 복음은 참되다. 기소하는 주체가 단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전직 직원, 질투심 많은 교단의 경쟁자, 필사적인 정치인, 또는 경멸받는 언론 매체라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나 정치인에 대한 혐의를 즉석에서 일축하는 그리스도인은 ‘동기 호소’ 오류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악의적인 동기라고 해도 제시하는 증거가 진짜일 수 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도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와 관계 없이 혐의의 증거 자체가 검증될 수 있다면 고발자의 동기는 무관하다. 동기를 무시하라. 그리고 메시지를 조사하라. 합리성이라는 평판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아신다.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지지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가진 지적 능력에 대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하는 팩트 체크와 비판적 사고가 최신 헤드라인에 대한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관용(합리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빌 4:5)라고 권면했다.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실을 증언하는 우리를 여물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주체로 만든다. 원제: Common Fallacies in an Age of Outr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우리의 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by 최창국
2023-10-27
기도는 매우 역동적인 힘이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기도가 지닌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기도를 통해 단지 개인의 내면의 안녕과 욕구만을 추구할 때 기도는 종교 중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내면과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기도에 관한 신학과 현상학의 통합적 연구를 처음 시도한 프레드릭 헤일러는 누구도 자신의 정신이나 내면세계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1] 헤일러의 말처럼, 누구도 자신의 내면세계와 무관하게 기도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기도를 통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 즉 창조적 선물인 내면세계, 뇌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종교심리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종교 행위 가운데 특별히 기도가 가져오는 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 행위 가운데 기도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차이점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랑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경험의 차이와도 같다. 우리가 아주 오래된 (진부한) 세상 속에 산다 할지라도 기도가 개입되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2] 기도는 신학적, 영적 의미를 지닐뿐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첫째, 기도는 성품 개선에 효과가 크다. 기도와 감사의 관계를 관찰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기도와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이클 지가렐리가 그리스도인 성품 지수(Christian Character Index)에 관한 연구를 위해 미국 내의 50개 주, 전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적 연구에 따르면, 기도와 찬송과 예배 생활의 비율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감사의 성품이 계발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과 예배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3] 이는 기도와 감사는 상호유기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진정한 기도는 감사와 같은 성품을 우리 안에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수많은 성품의 특성을 계발하는 하나님의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커리큘럼이기도 하다.둘째, 기도는 뇌를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 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되었다.[4]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의 신체적, 관계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 달라졌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마이애미대학교의 연구팀이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질병에 대항해 싸우는 주요 면역세포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탠퍼드대학교가 100여 명의 여성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종교 활동 수치가 높을수록 백혈구나 림프구 같은 면역세포의 수치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5] 기도와 묵상은 중요한 영적 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5년 사이에 2만 1,000명이 넘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기도와 같은 종교 생활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상 수명이 7년이나 연장되었다고 밝혔다.[6] 넷째, 기도는 자기 절제력을 높여준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기 전에 평소 기도를 해온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직면한 문제에 효과 있게 대처하는 힘을 보인다. 묵상과 기도에 사용한 시간은 자아에 병적으로 함몰될 수도 있는 삶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7]다섯째, 기도는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 기도는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킨다. 기도하는 동안 인간의 뇌파와 심박동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결과가 나타났다.[8] 특히 평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경우 재정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재정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 기도는 스트레스로 인한 알코올 섭취량을 줄이는 결과가 나타났다. 체스터 톨슨과 헤롤드 코닝의 의하면, 가장 효과가 뛰어난 스트레스 감소요법은 기도라고 하였다.[9] 나아가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삶과 건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임상연구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10] 신앙심 깊은 기도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방식을 가지게 하고,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내게 한다. 나아가 심각한 혈관 관계 질환을 막아주고,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체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11]1. Friedric Heiler, Prayer: A Study in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Religion, 308. 2. 윌리엄 제임스,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 496.3. 마이클 지가렐리, 예수의 성품을 가진 크리스천, 81.4. 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Breakthrough Findings from a Leading Neuroscientist, 27-32, 53.5. T. E. Woods·M. H. Antoni·G. H. Ironson·D. W. Kling, “Religiosity is Associated with Affective and Immune Status in Symptomate HIV-Infected Gay Men,” Journal of Psychosomatic Researches, 45(1999): 165-76.6. R. Hummer·R. Rogers·C. Nam·C. G. Ellison, Demography, no. 36/2(1999): 273-85. 7. 월트 래리모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사람, 258-59. 8. 필립 얀시, 기도, 456.9. Chester Tolson·Herold Koening, The Healing Power of Prayer, 48. 10. 래리 도시, 치료하는 기도 참조, 이 책은 미국의 80여 의학대학원에서 대체의학의 한 유형으로 기도치료에 관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11. Chester Tolson·Harold Koenig, The Healing Power of Faith 참조.
세속적 신비주의인가,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by 이춘성
2023-10-17
안정된 직장, 자랑하고 싶은 남편, 누구나 살고 싶은 뉴욕 맨해튼의 고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던 한 전문직 여성이 어느 날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한 후에 1년간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 가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 가서는 열렬히 사랑한 후에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2010년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 영화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자전적 이야기를 쓴 동명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다. 이 책에는 “난 내 안에 있는 신을 존중한다.” “‘나’만을 위한 식사를 즐긴다.” “내 안의 에너지가 응답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신과 하나가 되다.” 이런 신비한 영적 체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신비적 체험과 일상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위와 같이 ‘나’를 찾기 위한 여행과 행복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전부터 있었던 세속적 신비주의라는 영적 흐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76년 첫 출간된 후 3,500만 부가 넘게 팔린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세속적 신비주의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웨인 다이어는 세상에서 살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외부의 도움이 아닌 내면의 힘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내면의 힘이 영적인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영적인 힘을 끌어내는 다섯 단계의 단순한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하라.둘째,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믿고 맡겨라.다섯째, 감사하라.웨인 다이어가 제안한 이 다섯 단계 명상법은 일종의 명상 매뉴얼이 되어, 지금도 각종 명상의 핵심 요소이다. 현재 이와 유사한 명상 방법은 여러 형태로 발전되어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구글과 아마존 등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IT 업계에서는 직원 복지 차원에서 회사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한 지 오래다. 번아웃 세대를 쓴 곽연선은 특히 MZ세대들이 이 명상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직장이나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있다가 말한다. 이제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은 현대인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이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과 기성 종교를 병행하면서 그 사이의 충돌이나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의 다섯 단계의 명상법에서 주어만 바꾸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나’ 중심 영성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해라.둘째, 하나님께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하나님께 믿고 맡겨라.다섯째, 하나님께 감사하라. 실제로 밑줄 친 부분에 다른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웨인 다이어의 명상법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대중적인 성격이 있다. 문제는 웨인 다이어의 세속적 신비주의가 가르치는 영성은 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그가 제시하는 방식의 명상이나 영성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세속적 신비주의는 종교와 유사한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하지만, 이러한 체험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내가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그 영적 경험을 위해 내가 믿는 대상을 바꿀 수도 있으며,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세속적 신비주의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비적 경험의 주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는 주관적 자아이다. ‘나’는 행복의 기준이며, 의미의 판단자이고, 모든 윤리의 창조자이다.‘그리스도’ 중심 영성 사도 바울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범사에 감사하라. 이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는 웨인 다이어가 가르친 세속적 신비주의 영성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기쁨과 기도, 감사는 주관적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한 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영적 활동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이라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바울은 극도로 가난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들의 행복과 실용적 유익을 얻기 위한 기쁨, 기도,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기쁨, 기도, 감사를 명령하였다. 기독교의 영성은 ‘나’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며,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기쁨과 감사를 찾는 여행이 아니다. 역으로 이미 받은 기쁨, 감사, 기도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사는 순종의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정직하게 묻고 싶다. 지금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지배하고 있는 영성은 과연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흘러가는 시간, 흘러오는 시간
by 전재훈
2023-10-1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의 아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져 간다는 내용이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 인기를 얻었던 작품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한 것은 되나 봅니다.시간에 대해 사람들은 진리처럼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빅뱅에 의해서 지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어 갑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나간 시간이 쌓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의 무한 번식으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들이 지은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결과물이지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대학도 가고 대학원도 가고 자기 분야에서 맡겨진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사람들은 그 결과로 가난의 수렁에 빠지거나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거나 화를 주시는 것도 사람들이 과거에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했던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질병에 걸리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미래의 나는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복 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지요.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생관이나 습관, 행동, 철학 등을 연구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모습이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들이 만들어 지지요. 인터넷에 ‘십계명’을 쳐보면 온갖 종류의 십계명들이 검색됩니다. 건강한 습관 십계명, 웃음 십계명, 부부 십계명 등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십계명을 지키며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쓰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신앙으로 아이들을 길렀고, 그 사람들은 정직했으며, 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합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복이 내 삶에 임하거나 내 자녀에게로 흘러갈 거라고 믿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어머니가 기도 열심히 하는 권사님이라면 그가 성공한 이유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말이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에 내가 한 어떤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미래의 어떤 내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 사업을 한번 실패했던 것은 그 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80세 때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이유에 대해 모세가 애굽에서 40년을 살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왕자로 40년을 살게 하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베드로가 훌륭한 삶을 살아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서 제자가 됐다고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가 베드로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미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목사님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내가 목사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일을 하는 목사로 세우시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 현재가 과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가 현재의 삶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예비하신 연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기에 따라선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과거가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됩니다. 혹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과거는 자기를 정죄하는 근거가 되지요. 자기 의나 자기 정죄는 둘 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들입니다.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거나 자기 정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과거에 방황하며 헤맬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느냐’고,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라고 원망하던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의 그 기도를 회개하고 도리어 그런 삶을 하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것 같았지만 항상 내 곁에 계셨노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일을 견딜 힘을 주시고 계셨노라고 고백하지요. 과거에 내가 행한 어떤 일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되거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과거의 어떤 일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됩니다. 보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내 삶의 역사에 부분 개입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신 것인가 하는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물론 내 삶의 선택의 책임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만들어 내지요. 하나님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라면 내 선택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일 제 딸이 학교에 가면 놀다가 손가락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온전한 지혜는 손가락이 다치는 일로 생겨나는 다음 일들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다치는 바람에 덤벙거리는 습관이 고쳐지고 조심성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또는 그 손가락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아이의 삶에 좋은 스승이 될 만한 의사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막는 것만이 개입이 아니지요. 그냥 보내는 것도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딸아이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제 딸이 저에게 울면서 왜 자기가 학교에 가게 두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아픔이 너무 커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원망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 그 일로 매사에 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의사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알게 되면 제게 했던 원망을 감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나 사랑해서 그냥 다치게 두었고 회복할 때까지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병원 다녀준 것을 알게 된다면 제 딸아이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고,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사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는 사람과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살게 하신다’고 선포하는 사람의 차이를 만들지요. 작은 생각의 차이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둘 사이의 고백은 너무나 다르고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며 삶의 무게도 다르게 느낍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거나 방심하신 탓이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온 인류가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그 죄를 해결하게 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게 하지요. 수가성 여인이 잘못된 삶을 살아서 남편 다섯을 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간에 물 뜨러 나와서 사마리아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만나게 하시려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메시아를 수가성에 알리는 선교사가 되게 하시려고 남편 다섯을 두게 하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수 김장훈이 다들 포기한 비행 청소년들을 상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김장훈을 두고 하나님이 이 땅의 비행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아픈 과거를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는 잘못된 과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과거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여러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흘러오고’ 있습니까?
이혼하겠다며 내세우는 다섯 가지 잘못된 이유
by Joe Carter
2023-10-14
Forbes Advisor가 결혼이 실패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이혼했거나 이혼 과정에 있는 미국인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에 따르면 이혼자 63퍼센트가 결혼 서약을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이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56퍼센트는 배우자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더 잘 이해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고 말했다. 어떤 방법을 썼더라고 이혼을 막을 길은 없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놀랍게도 불과 5퍼센트 미만이었다. 결혼의 신성함이 점점 더 위협받는 세상에서 이혼의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사항을 재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기, 학대, 또는 외도와 같이 성경에서도 허락하는 이혼의 사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설문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헌신과 가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만으로도 얼마든지 더 유지될 수 있었을 관계도 퍽 많다. 다음은 결혼을 끝내는 합법적인 근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이혼의 이유로 인용되는 다섯 가지이다. 1. 사랑이 식었다: 감정적 오류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혼 사유 중 하나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사랑이 식었다”라는 생각이다. 문학, 영화,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 사랑 개념은 낭만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 관점은 사랑을 주로 감정적 경험으로 오해하는 데 뿌리를 두며, 그 결과 성경이 말하는 헌신과 행동에 기반을 둔 사랑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용어는 아가페인데, 이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서 사랑을 오래 참고, 친절하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이다. 사랑에는 선택의 의미가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결정의 문제인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한 선택이란 의미는 아니다. 존 파이퍼의 말이다. “우리의 사랑이 단지 선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 갖춰야 할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게 아니다.” 파이퍼의 지적대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라고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의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을 통해서만 우리는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는 바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2. 불일치: 완벽한 짝에 대한 신화현대 시대가 제공하는 가장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가 ‘소울메이트’ 또는 ‘완벽한 짝’이라는 환상이다. 일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죄인이므로 다 각자의 몫에서 결함이 있고 부서진 상태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불완전성과 불일치는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이다. 우리는 소울메이트가 아닌 희생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모델이다. 결혼생활에서 부부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서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선호,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유익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고난과 불편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25은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희생적인 사랑은 불일치가 이혼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도리어 불일치야말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고 또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직관에 반하는 현실이 알려주는 사실은 종종 필요한 희생을 치른 후에야 진정한 일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치란 갈등 없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건 발견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당신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뤄야 하는 목표이다. 바로 로마서 12:18에 나오는 바울의 이 권면을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결혼했다면 이 권고의 수행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으며 배우자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즉 조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경제적 갈등: 일시적인 관점과 영원한 관점결혼생활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게 재정의 어려움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임은 사실이지만, 이혼의 구실로 성급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이 문제를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초점을 전환하도록 돕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금전의 어려움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그 뿌리는 부패하기 쉬운 물질의 부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에 대해서 친히 경고하셨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마 6:19). 결혼생활의 초점이 물질의 축적에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랑, 충실함, 영적 성숙과 같이 관계가 함양해야 할 영원한 가치에 맞춰져야 한다. 부부가 직면하는 재정적 어려움은 우선순위를 재평가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더욱 밀접하게 맞추는 기회를 제공한다. 재정의 어려움은 또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만족과 믿음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에서 모든 상황에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만족이다.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부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만족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이 충고를 하나 마나 한 순진한 소리라고 너무 성급하게 일축하지 말라. 우리 주변에는 재정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채택하고 현세적 관점을 영원한 관점으로 전환함으로써 결혼의 유대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하는 방식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헤쳐 나간 수많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다. 4. 개인적 행복: 나 중심의 접근 방식1970년대 이후로 개인의 행복과 자기실현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미국 문화를 지배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의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시사하는 미디어, 문학, 심지어 많은 세속 심리학 이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결혼생활에서 요구되는 상호의존성까지 적극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성경은 삶과 관계에 대해서 자기중심적 접근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서사를 제공한다. 빌립보서 2:3-4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상호 복종과 자기희생이 참된 번영의 비결인 결혼생활에서 이 원칙은 특히 더 잘 적용된다(엡 5:21).세상이 주는 행복은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느헤미야 8:10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서 오는 깊고 지속적인 만족이다. 5. 지루함: 안주가 주는 위험결혼생활에서 느끼는 안주는 종종 서로를 향한 관심과 열정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건강한 결혼생활에 필수적인 친밀감과 신뢰의 유대를 점차 약화시킨다. 안주는 지속적인 양육과 소중히 여기며 의도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성경적인 결혼 모델과 정반대이다(엡 5:29).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여정에 참여하는 부부는 평범한 일상을 초월하는 목적의식과 방향을 발견할 것이다.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공동 활동에 참여하는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각각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서로를 향한 관심도 함께 커질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런던에 사는 게 지친 사람은 인생에도 지치게 된다. 왜냐하면 런던에는 삶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과 점점 더 닮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 사람에게서 지루함을 느끼겠는가?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각종 결점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 중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살아있는 은유 역할을 한다. 일시적인 만족과 피상적인 약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복음에 기반을 둔 결혼은 소망의 등불이다. 결혼은 단지 사회 계약이 아니라 신성한 계약이며, 무엇보다 그 계약에 가장 많이 투자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부부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들은 감정적 거리, 재정적 스트레스, 불완전함 등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 공동 희생의 만족, 그리고 믿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를 발견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복음은 더 나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이다. 그 사랑이 기초가 될 때,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도 이해할 것이다. 가능한 모든 것 안에는 세상이라면 일찌기 포기했을 수도 있는 결혼의 갱신과 회복, 심지어 제2의 신혼까지도 포함된다. 세상 표준에 기초한 결혼생활의 활력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결혼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께 의지하고 성경에 설명된 원칙을 받아들이라.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뜨거워지는 사랑, 새롭게 구축되는 신뢰, 그리고 잃었다고 생각했던 깊은 친밀감까지 회복하는 게 가능하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하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결혼에 대한 소망이자 약속이다. 원제: 5 Bad Reasons to Get a Divor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갈 때
by 양혜원
2023-10-13
학교 앞에 짧게는 넉 달 길게는 여섯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이 있다. 오래전부터 내 머리는 파마도 염색도 하지 않고 그냥 단발 정도의 길이로 자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손질해도 추레해 보인다 싶으면 한 번씩 가는 주기가 넉 달에서 여섯 달이다. 주문하는 스타일은 늘 같다. 이전에 머리를 자르고 찍은 셀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한마디가 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 달 만에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머리 형태가 망가져 손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기르면 손질이 쉬울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지금 상태의 머리를 다듬고 조금 기르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추가 주문을 했다. 일하던 연구소 직원에게 소개받은 이 미용사는 만지는 손이 거칠고 말이 투박하다. 게다가 커트비도 비싸게 받는다. 하지만 머리를 잘 자른다. 반곱슬인 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서 삼각김밥 모양이 안되게 자르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그래서 그날도 그의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고 예쁜 머리로 거듭나길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머리 손질이 끝나면 휙 하니 가버리던 미용사가 평소와 달리 내 머리 형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두상이 변하는데,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란다. “예에? 머리에서도 콜라겐이 빠져나간다고요?” 처음 듣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말인즉슨, 두피에 콜라겐이 빠지면서 뼈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서 나이 들면 머리 손질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십 대 머리 만지는 사람은 쉽지요. 그냥 웬만큼 해도 이쁘게 나오니까.” 그는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미용실에 올 때마다 있었던 손님들이 최소한 내 또래 혹은 그 이상이었더랬다. 그러니까 이 미용사는 나이 든 손님의 머리를 만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나처럼 그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러 꾸역꾸역 찾아들 왔나 보다. 하지만 두피에서까지 콜라겐이 빠진다니…. 관절이 뻣뻣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심지어 키가 줄어드는 신체 변화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노화의 현상이었고, 그런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마음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 머리 모양을 잡기가 힘들다니, 이건 뭐 머리카락 빠지는 거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신경을 쓰긴 어떻게 쓰는가. 머리카락이야 빠지는 게 눈에 보이기라고 하지,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콜라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콜라겐을 잡아둘 방법은 없고, 있다 한들 나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기술은 아닐 것이다. 혹 감당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까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본들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건 내가 돈이 있어 보질 않아서 하는 소리겠지만. 개인적 감상이야 그렇다 치고,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게 있었다. 왜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이 다들 비슷한지. 한때는 아줌마들의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지만, 우리 세대가 아줌마가 되면서는 그래도 조금 다양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은 여전히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것은 제한된 신체적 자원 안에서 그나마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의 폭이 정말 좁기 때문이구나, 했다. 흔히 노인이 되면 다들 비슷비슷해진다고 한다. 한때 똑똑했던 사람, 이뻤던 사람, 잘생겼던 사람,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비슷해진다.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어려워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그저 노인 혹은 늙은이로 통칭되는 이 그룹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생각이 있는지조차도 때로는 의심한다. 가까이에서 나의 부모님만 보아도, 동생과 둘이 앉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내색을 엄마에게 직접 내비치면, 너도 늙어봐라, 하는 말이 되돌아온다.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 같은 이런 반응을 접하면 내심 울컥하지만, 두피에서 빠지는 콜라겐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살짝 수긍한다. 어느 순간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도대체 노인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은 부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젊은 세대로부터 나온다. 한때 여성에 대한 지식도 여성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남성에게서 나왔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며 2백년이 넘게 여성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저항하는 노인 운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성에 대한 집단적 대상화에 민감한 여성학자들도 노인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노인들의 고루함만 뭐라 할 뿐.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나는 내심 두렵다. 왜냐하면, 노인을 변호하는 듯한 이 말이 마치 이미 누릴 거 다 누린 세대의 사람 사정 봐주자는 말처럼 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대는 노인을 미워하고, 노인들 자신도 그것을 감지한다. 일본의 10년 후를 상상한 영화를 며칠 전에 보았다. 몇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였는데, 제일 첫 편이 노인에 대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기업체를 내세워 75세 이상이 된 노인들로부터 사망 신청서를 받기 시작했다. 돈이 있는 노인들은 괜찮았다. 그들은 계속 소비를 하기 때문에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들었고, 돌봐줄 가족도 마땅치 않은, 단지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부양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주 고객이었다. 신청을 내고 서명하면, 약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남은 기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배려였다. 큰돈이 아닌데도, 그 돈을 받은 노인은 이렇게 큰돈을 주냐며 기뻐한다. 그동안 생활의 곤궁함을 짐작하게 하는 대사이다. 자신이 죽기로 한 날 2주 전부터 먹을 약이라며 직원은 돈과 함께 그 약을 노인에게 내민다. 그리고 죽기로 한 날 시설에 찾아오면 작은 패치 하나를 목 부근에 부쳐주며 누워있으라고 한다. 고통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지 옆 칸에서는 빨리 죽여달라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스크를 낀 간호사가 와서 그의 시신을 내간다. 도대체 인류는 무슨 생각으로 대책 없이 수명을 늘려온 것일까….새삼스레 노인 공경하자고,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끝까지 부양 잘하자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회의 짐이라고, 나라의 정책에서부터 개념 있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시선에 대응하며 살아갈 나의 자세를 고민할 따름이다. 알다시피 이런 데에 역할 모델이 우리 세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려운 마냥 흰머리로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늙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떠오르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이다. 아들 요셉의 손에 이끌려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이 조상에 비하면 길게 산 게 아닌데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어 지금 신세가 이렇다고 말한다(창 47:9). 어쩌면 그는 제국의 왕 앞에서 예를 갖추느라 불편한 몸을 다잡으며 힘겹게 서서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걸음걸이도 편치 않아 요셉의 손을 붙잡고 겨우 그 앞까지 나왔을 것 같다.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내뺀 후에 원하는 아내를 얻을 때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다시 형과 화해하고, 제일 이뻐했던 아내를 제일 먼저 보내고, 자식들의 불화로 아들 하나가 죽은 줄 알고 살았던 그는 분명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험악한 세월. 그 어떤 고난도 주를 위해 이겨냈다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내 인생 돌아보니 참 험난했다고 스산하게 말하는 이 한마디에 묘한 울림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연로하신 분 중에서 자신이 산 세월이 험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분들도 나름의 맺힌 마디와 울분, 어두운 골짜기들이 하나씩은 다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 오십 초반인데도, 그리고 이 나라가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시대에 성장했음에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풍족한 시절에 태어나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크게 참지 않고 자란 이십 대의 아들도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라고 말하면, 분명 상처받겠지. 윗세대가 우리 세대를 보고 고생을 모른다고 하면 화가 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다 나름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또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렇다면 뭐, 굳이 늙는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마치 늙는 것에 바른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젊은이에게 젊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게 꼰대 짓이라면, 늙은이에게 늙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꼰대 짓 아니겠는가? 지나간 시대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의 경험을 넘겨짚으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면, 두피에 콜라겐도 안 빠져 본 세대의 경험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개척해가는 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 아니겠는가? 매뉴얼도 없이 아직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제일 앞에서 가고 있는 그들의 시행착오는, 이번 생은 처음인 다른 모든 세대의 경험처럼 적당히 개성적이고 적당히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기력 달린 그들의 소리가 워낙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을 뿐.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긴 노인이 많지 않기에 최근에 읽은 사노 요코라는 일본 작가의 책은 보물 같았다. 1938년에 태어나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어 큰 상도 받은 그는 2010년 72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읽은 책은 그가 암 투병을 시작하던 무렵인 60대 중반에서 후반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 바르게 늙으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생긴 대로 늙어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착한 할머니가 되지 못해 친구를 자꾸 잃는다고 하면서도 별로 착해질 생각이 없고, 반항할 때 가장 생기가 돈다. 암에 걸리니 지인들이 비싸고 맛있는 거 사 들고 찾아와줘서 좋고, 암보다 더 힘든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암은 그냥 덤 같은 것이라고 하는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문방구 할아버지가 친절할 때보다 꼬장꼬장할 때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개성 넘치게 산 만큼 개성 넘치게 늙어갔던 것으로 보인다.결국 다 그런 것 아닐까. 자기 생긴 대로 살고 자기 생긴 대로 늙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 누구나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겠지만,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그것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잠시 아쉬워하다가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면서도 아직 마음으로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손이 거친 그 미용사를 또 찾아가 삼각김밥 머리가 되지 않게 잘라달라고 주문을 할 것이다.
거룩한 습관을 지닌 젊은이가 되라
by Bobby Scott
2023-10-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나는 목사이고 직업상 책을 읽는다. 그래서 지난 35년 동안 말 그대로 수 많은 책을 구입했다. 사무실과 집, 심지어 침실에도 책으로 가득하다. 산 것도 있고 선물로 받은 것도 적지 않다. 내가 J. C. 라일이 쓴 Thoughts for Young Men(하나님의 청년에게)를 샀는지 선물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책을 사용하여 나를 영원히 변화시켰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라일의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공유했다. 책 내용 전부를 좋아하지만, 특히 “젊은 남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크게 좌우된다”라는 제목이 붙은 장을 좋아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십 대의 나는 그 내용을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습관은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습관의 뿌리는 깊다. 죄가 일단 당신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결코 당신이 명령한다고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습관이라는 사슬은 마치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과 같다. … 나무와 마찬가지로 습관도 나이가 들면서 강화된다. 어린 참나무는 어린아이는 쉽게 구부리지만, 다 큰 참나무는 장정 백 명이 달라붙어도 못 뽑는다. … 선한 습관이나 악한 습관이 매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당신은 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 시간을 점점 더 많이 보낼 때, 당신과 천국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고 두꺼워진다. 건너야 할 물은 더 깊고 넓어진다. 날마다 죄에 머물러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이제 죄에 관해서 뭔가를 해야 할 때이다. (Thoughts for Young Men, 15, 17-18)라일의 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데에 꼭 필요한 두 가지 거룩한 습관을 기르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셨다. 하나는 죄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갈망이었다.죄성에 찬 습관에서 도망치라삶은 방향이 정해져 있으며, 잘못된 길을 걷게 되면 점점 더 죄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행여라도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죄에 빠질까 두려웠다. 라일의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는 지혜를 구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강한 동기를 부여하셨다.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책임과 실천이 밑바탕이 되는 진정 투명한 관계와 우정을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전의 죄악된 습관과 타협하기보다는 피하도록 내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나이 많고 지혜로운 신자들로부터 조언을 찾아서 듣도록 선하게 인도하셨다.이 글을 읽는 당신이 꽤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주변에서 젊은이들을 찾아 이 진리를 가르치라. 우리의 영혼이 살고 죽는가는 죄에 굴복한 후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데에 달렸다(롬 6:1-2; 살전 4:1-8).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 가혹하다고, 또 거부하기에 죄는 너무 달콤하다는 거짓말을 젊은이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라!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고 죽음으로 이끌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이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만족시킬 것이다(빌 3:8). 그러므로 죄로 이끄는 죽음의 습관을 버리는 데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도 너무 급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마 5:29-30; 골 3:5).거룩한 습관을 들이라하나님은 또한 거룩한 습관이 가진 성결케 하는 힘을 내게 가르치기 위해서 라일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성결함이 가진 역동성을 경험한다. 어떤 습관을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룩한 습관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에 부채질하고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바로 눈앞에 두는 은혜의 수단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화시키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을 체험하려는 내 속에 타오르는 열망을 불어넣으셨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다. 아무리 바빠도 성경을 읽었다. 그 결과 아무리 중요한 학교 프로젝트의 마감이 눈앞에 있어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나는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성경을 읽었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고, 지금은 몇 년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평생의 습관으로 굳어졌다. 경건의 습관에 힘입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을 아는 지식과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주일 오전 예배 외에 나는 주일학교와 주중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나는 성경 연구 방법을 배웠다. 나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성경 속 핵심 책에 관해서 배웠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 제자 삼는 방법, 소그룹을 이끄는 방법 등 실용적인 신학까지 섭렵했다. 나는 성도의 교제를 삶의 주요 습관으로 삼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디모데후서 2:22을 보라.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경건한 덕을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혼자 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 함께” 하라고 격려한다. 요점은 명확하다. 경건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타협하지 않는 습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죄와 싸우고 경건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라일의 권고에 더불어 덧붙이는 내 간증에 여러분이 현명하게 귀를 기울이길 기도한다. 죽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지금까지 말한 습관들이 대단히 심오한 통찰력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다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을 복잡하게 만드실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다루시며 우리가 성장하도록 때에 맞게 먹이신다. 라일이 젊은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행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내 인생을 변화시킨 라일의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넘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UCLA의 세속 교실에 앉아있는, 막 구원받은 도시에서 자란 한 소년을 제자로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라일이 쓴 정교한 글을 통해서 나를 빚으셨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백 년 더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당시의 나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권면 받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로 여전히 넘칠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힘을 합쳐 귀한 젊은이들을 거룩한 습관으로 부르는 일에 함께 충성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Young Men with Holy Habi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근원적 우상까지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3-10-04
팀 켈러는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했을 때 단순히 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통해 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팀 켈러가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마음의 죄를 드러내라 폴 워셔로 대변되는 설교자들의 특징은 신자의 죄에 대해 강하게 선포한다. 폴 워셔 목사는 음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죄를 지적한다. 음행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기초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 여러분, 맥 빠진 채로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음란의 문제를 처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강력한 도전이 있지만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죄를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란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C. S. 루이스도 사람의 행위를 통해 죄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성애,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2]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있고 그 행위도 악한 행동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단순히 악한 행동이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그것이 비로 좋은 것일지라도 죄가 된다고 선포함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낸다. 자녀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 좋은 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되고 죄로 변질되게 된다. 팀 켈러가 행위의 죄를 강하게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두주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런 방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 우상숭배의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진 집착이나 두려움, 중독, 도덕적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분노 등을 적절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을 그들의 직업과 로맨스에서 추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팀 켈러의 우상숭배로서의 죄의 선포는 로버트 슐러식의 죄를 선포하지 않는 소비자 중심주의적 설교도 아니고, 폴 워셔 식의 행위의 죄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닌 인간 마음속의 숨어있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좀 더 균형 있고 설득력 있는 방식의 죄의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우상을 드러내라 팀 켈러가 죄의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 덕분이었다.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는데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는 죄에 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개인의 행위적 노력을 통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와 악,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까지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4]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을 추모하면서 쓴 기사에서 내가 만든 신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라 말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우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심어지는 우상이 있음을 언급한다.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5]데이비드 폴리슨도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세 가지를 육신과 마귀와 세상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슨이 언급한 ‘허영의 시장’이라는 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말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다. 그곳은 온갖 욕망을 사고파는 장소였고, 거기서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내용에서 착안하여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말한다. 팀 켈러의 설교와 가르침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지 못하면 청중은 교회 안에 있지만 다른 하나님 즉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6]콜롬비아 대학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충분성을 인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오늘날 현대적 문화에 속한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도전이라 분석한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많은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희망을 둔다. 팀 켈러는 이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종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한다.[7] 이런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개인의 우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문화 저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8]근원적 우상을 드러내라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내러티브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의 문제를 다루려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9]근원적 우상이 ‘힘’인 사람은 자신이 굴욕당하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단순히 분노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에 힘을 추구하려는 근원적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을 원하는 사람은 거절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속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숨 막힐 정도가 된다. 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지는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요구사항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을 극도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과 권태의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근원적 우상이 ‘통제’인 사람은 매사에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발상황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일을 통제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걱정과 염려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표면적 우상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너무 사랑하는 모습으로 우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지만,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이다.[10]내가 만든 신에 리디머 교회의 한 목회자가 부부를 상담한 내용이 나온다.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고 남편은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목회자와 상담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목회자는 남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주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동전 한 푼까지 다 쌓아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1]아내는 돈을 많이 사용함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다면, 남편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는 마음속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만든 신에서도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그 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건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12]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37. 3. 팀 켈러, 센터처치, 272.4. “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5.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5.7. 팀 켈러, 설교, 166.8. 팀 켈러, 설교, 35.9. 팀 켈러, 설교, 116.10. 팀 켈러, 왕의 십자가, 283.11. 팀 켈러, 일과 영성, 11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75.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3-09-27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는 매우 중요한 언어이다. 은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언어이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은혜(grace)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첫째는 형태, 몸가짐, 동작, 행동의 우아함 혹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호의나 선의와 관계되고, 셋째는 호의의 표현과 관계된다. 그리고 넷째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롤드 엘런스(Harold Ellen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매우 의미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상태인 죄를 인간의 용어로는 ‘완전한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용어로는 ‘완전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인간을 소망으로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에 소망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한계를 말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죄는 인간의 한계성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근원을 말하기 위한 역설이 있다. 인간의 희망의 근원과 원동력은 은혜의 복음이다. 은혜는 인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혁하는 힘이다.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기쁨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공기를 들이마시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호흡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흠뻑 누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공공선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특별 은혜와 삶의 진선미와 관계된 보통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지만,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주어지지만, 보통 은혜도 구원의 일부와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는 우리의 죄와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혜다. 보통 은혜는 도덕적 삶과 사회 안의 선한 질서, 시민적 공동선,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한다. 보통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상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특별 은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지만, 보통 은혜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역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일상과 자연계와 관계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계된다. 이 두 은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 은혜뿐 아니라 보통 은혜도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받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강권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브루스 데머레스트, 영혼의 계절들, 132). 따라서 행동을 통해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건강한 행동을 낳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일찍이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능력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을 심어 준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겸손을 심어 준다. 은혜는 믿음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발성과 신뢰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수용 능력과 민감성을 심어 준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빛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변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장하게 된 주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 건강한 시민 됨에 두어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시민 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아버지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아버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듯이, 좋은 사람과 좋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유기적인 관계다. 물론 과거에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이벤트를 점처럼 이으면
by 필립 정
2023-09-21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유행하던 퀼트라는 수예 기법이 있다. 여인들이 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그 위에 실로 인상적인 말들을 새겨 넣는 수공예이다. 당시 미국의 여인들은 이런 퀼트 공예품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서부로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종종 그 퀼트에 성경 구절들을 새겨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어 붙인 천 조각에 새겨 넣은 성경 구절은 떠나간 이의 삶에 새겨진 은혜를 추억하게 하고 험한 길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위로를 심어 주었다.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이어서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을 우리 인간들도 퀼트처럼 이어 붙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 형형색색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누군가에게 보여 줄 만한 소품 하나가 나올까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을 하나둘 이어 붙여 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특별하지 않아 너무 특별한, 반박할 수 없는 라이프 퀼트 소품 하나가 나왔다. 인간의 삶은 지으신 이의 디자인을 버리고 욕심의 천 조각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가는 탐욕의 퀼트라고… 그리고 주님의 디자인은 그 탐욕의 반대편 그림이라고….몇 년 전 어느 날, 일하다 너무 피곤해 중간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 극심한 피곤 증세는 몇 주 동안 이어졌고 하루는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없었던 주름과 피부의 노화가 그 몇 주 사이에 얼굴에 내려앉아 버렸다. 왜 그런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혈압, 당뇨, 혈중 콜레스테롤이 평균보다 조금 높았다. 하루 세끼를 잡곡으로 꼬박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 온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더 자세히 원인을 찾아 나갔다.내가 얼마나 탐욕스럽게 먹고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간 하루 밥 두세 공기 거기에 과일, 과자까지 합쳐 내 나이 필요 탄수화물 기준치 2배 이상을 훨씬 초과해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한국 보건복지부와 한국 영양학회에서 발표한 ‘2020년 한국인 영양 섭취 기준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하루 탄수화물 일일 평균 섭취량은 307.8그램으로 하루 기본 탄수화물 100그램의 3배를 초과하는 수치라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루 두 끼니로 줄이고 탄수화물의 양도 줄이며 조금씩 건강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당과, 혈압, 고지혈증을 개선할 수 있는 자연 치유법을 찾다가 식초의 효능을 알고 매일 식초를 물에 타서 섭취하기 시작했다. 소화가 촉진되고 피로도 개선이 되고 피부도 확연히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둘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아 탄수화물과 식초의 두 조각을 이어 붙여 보았다.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로 술을 빚어 만드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발효시켜 만드는 조미료이다.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로 생긴 병을 먹다 남은 탄수화물을 버리지 않고 식초를 만들어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적게 먹어야 하고 남은 것까지 발효시켜 먹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욕심 많은 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탄수화물 창조자의 디자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과잉 섭취로 병이 드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어 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간극은 왜 생겨났을까?” 이런 문제를 발렌틴 투른과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가 그들의 책 왜 음식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2011) 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식량 부족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산업화한 농업의 대량 생산 방식 때문에 물이 부족하고, 휴경 없이 계속된 농사로 땅이 황폐되어 소출이 줄어들었고, 농업의 산업화로 온실가스의 40퍼센트를 배출하여 기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과유불급을 해결하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고 공정한 분배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시스템을 바꾸어 대량 생산 농법을 포기하고 자연 친화 농업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대량 생산 기술을 무기로 만들어버린 욕심 많은 농업 강대국들이 포기할 수 있을까?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바로 찾아온 것은 결핍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일해도 풍족할 수 없었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치도록 일해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서로 속이고 싸워 착취해왔다. 보다 건설적인 대안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이었다. 홍윤철이 지은 질병의 탄생을 보면 인간이 수렵 생활을 그만두고 농업혁명으로 곡물을 섭취하면서 면역체계가 부실해졌고 가축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축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그 전염병이 퍼져 나갔다고 말한다. 또 산업혁명 이후 수질과 토질, 대기가 오염이 되어 질병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고 한다. 인류의 유전자가 환경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지금 인간의 몸은 환경을 버텨낼 수 없는 사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버렸다.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땅을 7년마다 쉬어 가며 적게 생산하고 적게 먹고 나누어 먹으면 땅도 살아나고 수확도 늘어날 것이고 결국은 병도 사라지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해 놓으신 것을 보면 삶의 길과 사망의 길이 확연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는 이런 교훈을 얻으며 먹는 것을 조절해 나가면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갔지만 더 노력이 필요했다. 책상에 한 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리에 부종도 생기고 혈전도 생겨 약도 복용하면서 운동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날, 가끔 가던 식당에 가 점심 식사로 콩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쓴맛이 나 먹다 말고 그냥 나와 버렸다.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에 그 식당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 안 가 깨져 버렸다. 쓴맛을 느끼는 그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 내 건강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랬다. 시간이 부족해 항상 쪼개어 쓰기 때문에 식후에 쉬지 않고 바로 운동을 하던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는 복근 운동까지 격하게 했으니 위산이 역류하여 쓴 물이 계속 올라왔던 것이다. 뭘 먹어도 쓴맛이 났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음식 탓할 것 없구나 싶었다. 그 결과 위산이 성대를 상하여 예전의 힘차게 뽑아내던 테너 소리를 잃어 버렸다게다가 과한 운동은 또 하나의 안 좋은 결과를 내고 말았다. 왼쪽 어깨의 힘줄이 찢어져 팔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병원을 다니며 회복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과식이 건강을 무너뜨리는 주범인 것처럼 과로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욕심을 따라 절제 없이 살다가 삶이 조금씩 무너져갔고 추락하기 전에서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어느 날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듣다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침에 차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가면서 차 속에서 습관처럼 이 연설문을 수천 번 듣다 보니 다 외워 버리게 되었다. 그 연설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내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관한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점처럼 하나씩 이어가며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연설한다. 태어나서 입양된 이유와 돈이 없어서 콜라 캔을 팔아 밥을 사 먹어야 했고, 기숙사 방이 없어서 친구의 방 바닥에서 자고 심지어는 결국 대학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사건들이 다 연결이 되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필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학을 그만두고 손으로 쓴 서체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10년이 지나보니 맥킨토시 컴퓨터 폰트 디자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그 대학에서 다른 수업을 듣고, 그 서체 수업을 안 들었다면 현재의 맥킨토시의 아름다운 서체는 없었다고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과거의 점들을 선처럼 이어보면 순간들은 결국 이어진다고 그 연설에서 강조한다. 불교 신자인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점 잇기’는 불교의 용어인 인연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흩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이어지고 맺어져 존재로 형성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사물이 존재로 형성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부에 원인이 되는 씨앗이 외부의 물과 햇빛 같은 조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연의 교리다. 인연 교리는 기독교의 섭리 교리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씨앗이 내 속에는 없고 외부의 창조주에게서 온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의 존재가 디자인되어 있고 사람이 그 디자인을 따라야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올해 2023년 한국에 가서 몇 가지 건강 검진을 해 보았다.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피부과까지 가서 내 망가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미국의 병원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비교적 잔병 없이 살아 병원에 갈 필요를 느껴보지 못하다가 감당 못 할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게 되었다. 결과는 그랬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관리를 엉망으로 하셨습니다.” 닥터들의 말이 동일했다. 안과 의사는 심하게 나무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들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큰 감동이 오던지. 마치 내가 열네 살 때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회개 하라는 설교를 들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이벤트의 점들을 하나로 이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 디자인한 것들을 감상하곤 한다. 그럼 너무 신기한 것이 있다. 나는 내 삶에서 나 스스로 나를 위해서 스케치하거나 채색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이라는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왔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일에 대한 열심은 탐욕이었고 게으름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한 포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소망을 심고 믿어지게 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있었다. 그 자리엔 내 욕심이 끼어들 수 없었고 그 길은 결코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삶의 조각들을 잇다 보면 주의 은혜와 설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주님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 이어온 점들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점에 이어보면 그럼 앞으로 주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도 짐작하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면 과거처럼 앞으로도 소망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호흡도 의미가 있고 일도 쉼도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믿어지는 것은 오늘도 날마다 색다른 선물이라는 고백을 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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