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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비 재커라이어스와 그의 유산
by Alister McGrath
2020-05-22
라비 재커라이어스(1946-2020)는 기독교 변증학 분야에서 기념비적 공헌을 했다. 특히, 삶 속에서 복음과 지성을 연결시키는 일에 혼신을 기울여 왔기에 오래 기억될 것이다.재커라이어스는 암으로 2020년 5월 19일 주님 곁으로 떠났다.재커라이어스의 생애예전에 만드라스(Mandras)라고 알려졌던 인도의 도시 첸나이(Chennai)에서 태어난 재커라이어스는 '그리스도를 위한 청년'(Youth for Christ) 사역을 통해 그리스도를 믿게 되면서 전도에 대한 열정을 품게 된다. 1960년대 후반에 캐나다 온타리오로 이주한 재커라이어스는 복음 전도자 훈련을 받기 위해 ‘온타리오성경대학’(Ontario Bible College)에서 수학했다. 온타리오 남부 ‘캐나다기독교선교연맹’(The Christian and Missionary Alliance in Canada)의 지역 전도자로서 활동하며, 트리니티복음주의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와 존 워윅 몽고메리(John Warwick Montgomery) 밑에서 목회학 석사과정을 이수했다.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그는 미국 복음주의가 회의론자들과 지적 논쟁을 벌여 그들을 믿음으로 나아오게 할 만한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고 확신하게 되었다.기독교선교연맹에서 안수를 받은 재커라이어스는 1980년부터 뉴욕 냑(Nyack)에 있는 ‘얼라이언스신학교’(Alliance Theological Seminary)에서 복음 전도와 현대사상 분야의 부교수로 섬기게 되었는데, 이 교단 신학교가 그를 임용한 일은 신학교로서는 큰 결정이었고, 재커라이어스 입장에서도 그것은 다음 세대를 책임질 목회자들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맡은 직책은 많은 일을 해야 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전도 실습이나 회의적인 청중들에 대항하여 복음을 논증하는 데 필요한 변증 전략을 개발하는데 소홀하게 되어 그것이 늘 그를 무겁게 했다.1983년 암스테르담에서 개최된 전도자 집회에서 재커라이어스는 지적 변증가들, 특히 여론과 정책을 형성할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이 부르심을 향한 구체적이고 분명한 방법이 없어 안타까워하던 그에게 1984년 사업가 데이비드 데일(David Dale)을 통해 기대치 않던 상당한 재정이 지원된다. 그때 재커라이어스는 자신의 사역 비전을 실현할 ‘라비재커라이어스국제사역센터’(Ravi Zacharias International Ministries, RZIM)을 설립하게 된다. 현재 조지아 애틀랜타에 본부를 두고 있는 RZIM은 처음부터 사역의 핵심 목표를 신앙의 지적인 문제들, 곧 신자들을 괴롭히고 회의론자들이 복음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문제들을 다루게 된다. RZIM의 표어는 몇 번 수정되었지만, 그 기본 원리는 동일하게 다음과 같다. “생각하는 자가 믿도록, 믿는 자가 생각하도록 돕는 것!”재커라이어스의 유산오늘날 많은 사람들에게 이러한 생각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1980년대 주류 복음주의 접근법에서의 복음 전도 방법은 때때로 반지성주의로 보여졌으며, 이는 재커라이어스의 생각과는 거리가 있었다. 재커라이어스는 노만 가이슬러(Norman Geisler), C. S. 루이스(C. S. Lewis),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와 같은 작가들의 책을 읽고, 삶 속에서 복음과 지성을 연결시키는 노력의 중요성 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청중들에 맞는 다양한 변증적 접근법을 개발하는 중요성에 대해서도 확신하게 되었다.이러한 그의 열정이 RZIM 사무소를 인도, 싱가폴, 남아프리카, 영국 등 세계 여러 지역에 세우는 배경이 되었다. 각 지역 활동은 일반적인 변증적 접근법과 목표를 공유하지만, 각 문화와 그것이 생성하는 독특한 도전과 기회에 민감하게 대응하고 있다.복음주의가 점차 복음의 공공성을 재발견하고 증명하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면서, 재커라이어스는 문화적, 정치적 여론 조성가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새로운 관심사의 대표적 주창자로 떠올랐다. 많은 사람들이 1992년 하버드대학교에서 열린 제1회 베리타스 포럼(Veritas Forum)을 변증학적 지형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온 지표로 꼽을 것이다. 재커라이어스를 포함한 기독교 작가들이 공개 토론 현장에서 복음의 합리성과 상관성을 변증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RZIM은 지성적인 불신자들이 믿음에 관하여 제기하는 질문을 다루는 일련의 출판물을 내기 시작했는데, 그중 대다수는 재커라이어스 본인이 쓴 것이다. 초기 작업에는 ‘사람이 하나님이 없이 살 수 있는가’(Can Man Live Without God, 1994), ‘우리를 악에서 구하여 주옵소서: 붕괴하는 문화에 있는 영혼을 회복시키기’(Deliver Us From Evil: Restoring the Soul in a Disintegrating Culture, 1996) 등이 있다. 재커라이어스의 접근법이 가지는 의미는, 기독교가 한편으로는 이성적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삶의 중대한 질문에 대해 깊이 만족할 만한 실존적 대답을 제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그 접근법의 성공으로 재커라이어스는 대화 형식을 탐구하게 되었고, 독자들은 그리스도와 고전 인물 또는 현대 문화의 인물과의 상상의 토론에 초대되었다. ‘인생: 예수와 부처의 위대한 대화'(The Lotus and the Cross: Jesus Talks with Buddha, 2001)와 ‘이성과 감성: 예수께서 오스카 와일드와 말씀하시다’(Sense and Sensuality: Jesus Talks with Oscar Wilde, 2002)가 그러한 시도들이다. 또 재커라이어스는 2004년에 ‘옥스포드 기독교변증센터’(The Oxford Centre for Christian Apologetics, OCCA)를 설립하고, 이 사역에 소명을 느낀 사람들을 위한 변증학 1년 과정을 제공했다. 이 기관의 주요 인사들로는 오스 기니스(Os Guinness)와 존 레녹스(John Lennox) 등이 있다. 2017년에는 대서양 기반의 변증학 훈련소인 ‘재커라이어스연구소’(The Zacharias Institute)를 시작했다. 왕성한 연설과 저작 사역에 더하여 라디오, TV, 인터넷 프로그램을 개발했으며, 특히 ‘내 백성이여 생각하라’(Let My People Think)는 라디오 프로그램은 전 세계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재커라이어스는 다양한 변증적 접근법을 사용해 왔다. 앞서 가이슬러, 루이스, 쉐퍼의 중요성을 언급했는데, 여기에 G. K. 체스터턴(G. K. Chesterton)과 표도르 도스토옙스키(Fyodor Dostoyevsky)와 같은 작가들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 때문에 재커라이어스를 단지 모방하는, 독창성이 없는 사람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의 ‘3-4-5 격자(Grid)’는 그의 독특한 접근법의 좋은 예인데, 이것은 세계관의 합리적 중요성을 강조하면서도 그 실존적 중요성 또한 간과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단순히 세계관이 합리적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 낼 수 있느냐가 더 중요한 것이다.논쟁 가운데의 신실한 유산대부분의 다른 공인들처럼 재커라이어스도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청중들과 공통점을 찾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2004년 11월에는 솔트레이크시티(Salt Lake City)로 날아가 ‘누가 진리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심을 변호하기’(Who Is the Truth? Defending Jesus Christ as The Way, The Truth and The Life)라는 주제로 몰몬교 교회에서 강의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그러나 이 일로 몇몇 그의 지지자들로부터 비난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재커라이어스는 그것이 복음을 위하여 틈을 만드는 일이라고 굳게 믿었다. 결국 그는 2014년 1월 그 몰몬교 교회에서 두 번째 강의를 진행했다.재커라이어스의 유산은 상당한데, 그것은 그의 영향을 전환점으로 지목하는 많은 여론 형성가들과 정책 입안자들, 그리고 RZIM의 광범위한 사역의 현장에서 가장 잘 나타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avi Zacharias(1946–2020) and His Legacy번역: 강경원
목회
리더십
변증
RZIM
CS루이스
프란시스쉐퍼
노먼가이슬러
체스터턴
오스구니스
목회에 영적 아버지가 필요한 이유
by Bill Riedel
2020-05-20
나는 식당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잔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우울했고, 내 자신이 무가치하고 더이상 소망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맞은 편에는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빌(Bill) 목사님이 앉아 있었다. 나는 그에게 “목사님이 사용하는 차를 제게 빌려주셨는데, 제가 그 차를 몰다가 벽에 충돌해버린 것 같은 그런 기분이에요”라고 했다. 빌 카인스(Bill Kynes)는 내가 섬겼던 모교회의 담임 목회자다. 그에 대한 내 존경은 가히 절대적이다. 차가운 두뇌와 따뜻한 가슴으로, 빌 목사님은 그 교회를 30년 이상 신실하게 섬겨 왔다. 교회 개척에 대한 그의 비전, 젊은 목사인 나를 훈련시키고자 했던 그의 의지, 그리고 우리 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헌신이 없었다면 우린 결코 개척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날 아침 식당에서 나는 빌 목사님에게 내가 목회에서 얼마나 많은 잘못을 했는지, 또한 그로 인해 내 자신이 얼마나 큰 수치심으로 힘들어하고 있는지를 다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그는 사랑으로 나를 돌아보며 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물었다. 내가 고쳐야 할 부분에 대해 어물쩍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빌 목사님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나의 정체성과 그리스도께서 내게 주신 은사에 대해 상기시켜 주었다. 그 순간 그는 내게 단순한 멘토 이상이 되었다. 나의 영적 아버지가 된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고전 4:15). 교회 개척의 외로움목사나 교회 개척자는 사역에 있어 나 혼자뿐이라고 느낄 때가 많고, 영적 아버지와 아들 같은 깊은 관계를 이루어 가기에는 시간이나 여유가 없다고 느낀다. 그렇기에 이 고린도전서 말씀만큼 우리가 처한 상황을 잘 설명하는 것은 없다. 새로 개척된 교회를 섬기는 일은 신나는 일이지만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이 과정에 있어 교회 개척자는 많은 안내자와 멘토를 찾아야 한다.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신학, 교회론, 선교 전략, 예배, 재정 관리, 설교 등 수많은 분야에 있어 성장해 가는 것은 옳은 일이다. 하지만 많은 면에서 성장하고자 애쓰고, 안내자와 멘토를 찾으러 다닌다고 해도, 목회자는 여전히 외로움을 느낄 수 있다. 역경을 순전한 자기 의지와 능력으로만 극복하려 애쓰는 영적 고아처럼 느낄 수가 있다는 뜻이다. 당신의 원(原)가족이 얼마나 건강했는지 또는 얼마나 엉망이었는지는 중요치 않다. 우리 모두에게는 영적인 아버지가 필요하다. 우리가 읽은 책이나 우리가 좋아하는 유명 목회자는 영적 아버지가 줄 수 있는 것들을 선사할 수 없다. 팟캐스트로 아이들을 키울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영적인 아버지는 다른 안내자나 멘토와 무엇이 다른가?본받을 만하다어떤 기술적인 면에서 멘토를 본받을 수 있을 것이다. 설교자는 자신의 능력과 목소리가 적절한지 판별하기 위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봐야 한다. 교회 개척자도 조직의 리더십을 이해하고 교회의 구조를 세우는 일에 있어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영적인 아버지에게는 한 인간으로서 우리가 본받을 만한 것이 있다. 그러므로 그의 영적인 아들은 그의 신실함과 인격을 가까이에서 보아야 한다. 디모데는 바울의 삶, 행실, 인내, 오래 참음을 보았다(딤후 3:10–15). 나와 빌의 관계는 단순한 멘토링 이상이었기에 나는 빌의 결혼 생활, 자녀 양육, 연구 습관, 건강 관리, 그리고 그의 신실함과 인격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고 배우는 특권을 누렸다. 빌은 신실한 남자, 남편, 아버지, 그리고 목회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아버지는 아들을 훈육한다바울은 그가 쓴 편지들을 통해 자신을 아버지로 자리매김했다. 그는 사람들을 불필요하게 자극하거나 쓴뿌리가 생기지 않게 하면서도, 그들의 삶을 바꿀 수 있도록 일관된 영향력을 행사했다. 사도 바울은 사랑을 통해, 그리고 상대방을 수치스럽게 만들지 않는 훈육을 통해 사람들이 삶의 경로를 바꾸고 행동을 고치도록 촉구했다. 결국, 복음은 머리로만 이해하는 신학이 아니다. 복음은 우리 매일의 삶을 변화시킨다. 안내자의 경우, 의견이 맞지 않으면 우리는 그의 의견을 무시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영적인 아버지에게는 권위가 있다. 우리 삶에서 고쳐야 할 것이 무엇인지 듣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영적 아버지를 찾는다. 그날 아침 빌 목사님과 식사를 함께 했지만 문제들이 실제적으로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겪고 있던 문제들의 대부분은 사실 쉽게 풀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하지만 내 삶의 경로 수정을 위해 내가 그에게 기꺼이 권위를 주었고 그가 그것을 수락했기에 우리의 관계가 깊어졌다. 빌 목사님과 나의 관계가 지금껏 지속되고 있다는 것이 감사하다. 빌은 사랑과 인내로 나에게 도전을 주고, 폐부를 찌르는 질문을 던져 내 삶과 목회에 있어 내 마음 깊은 곳에 있는 문제가 무엇인지 드러내며, 더 큰 회개, 훈육, 그리고 신실함으로 이끌어준다.아버지는 아들에게 용기를 준다바울이 디모데를 상기시켰던 이유는 그의 말처럼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 하게 하기 위하여”(딤후 1:6)였다. 이처럼 영적인 아버지는 어려움의 시기를 통과하는 그의 영적 아들에게 용기를 불어넣는다. 빌 목사님은, 두려움과 수치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이 주시는 능력을 받아 사랑, 절제, 그리고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의지를 가지라고 정기적으로 내게 도전했다. 이는 내게 엄청난 격려가 되었다. 교회 개척자와 젊은 목회자여, 경험 많은 영적 아버지를 찾아 그의 말을 경청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많은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나이 많고 현명한 목회자여, 목회에 있어 당신을 따라 성장할 수 있는 젊은 목회자의 삶에 투자하라.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 11:1)고 말할 수 있는 이들이 필요하다.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멘토가 필요했고, 경건한 장로의 권위 아래에 내 자신을 두어야 했다. 하지만 영적인 아버지의 은사가 있는 빌 목사님을 통해 하나님은 내게 필요한 것 이상을 주셨다. 젊은 교회 개척자여, 이같은 복을 추구하라. 나이 많은 목회자여, 당신 자신이 영적인 아버지가 되어 누군가에게 복을 줄 수 있음을 기억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Young Pastors Need Spiritual Fathers번역: 이정훈
교회
교회개척
영적아버지
외로움
훈육
용기
멘토링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by 고상섭
2020-05-14
팀 켈러는 TGC코리아 홈페이지에 있는 ‘마음에 호소하는 설교’라는 영상 설교에서 알렉 모티어의 글을 인용한다. “설교자에게 두 가지 과제가 있는데 첫 번째는 진리를 다루는 과제고 두 번째는 청중을 다루는 과제다. 어떻게 하면 그들이 진리를 가장 잘 듣게 될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진리를 그들의 마음에 와닿게, 그들이 가장 수용적으로 듣게 … 그러면서도 불필요한 상처를 피하게끔 전할 수 있을까?”팀 켈러는 이 두 가지 과제를 완수하기 위한 열쇠가 있다면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라 말한다. 그의 책 ‘팀 켈러의 설교’에서 “어떤 본문을 설교하든지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가리킬 수 없다면 …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마음의 정감을 제대로 건드리고 변화 시킬 수 없다.”라고 단언하기까지 한다. 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 두 가지 과제를 다 완수하는 열쇠가 되는 것일까? 진리 속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라 알렉 모티어의 첫 번째 과제인 진리를 다루는 것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성경의 중심 사상이 바로 그리스도이며, 성경 본문을 해석할 때 우리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고 오직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음을 그 본문에서 풀어내지 못했다면 설교의 작업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엠마오 마을로 가는 두 제자를 예수님이 만났을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눅 24:25-27)예수님은 전 구약성경이 바로 ‘자기에 관한 것’임을 알려주셨다. 그리고 구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을 질책하셨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구약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발견하고 드러내지 못하면 우리는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유대교 랍비들의 가르침을 믿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고 말했다(Edmund P. Clowney,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 11쪽). 사실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하면 결국 인간의 노력을 강조하는 윤리설교로 끝나게 된다. 설교가 그리스도의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살라는 초청이 아닌 ‘더 열심히 살라’는 도덕적 권면이 될 때 교회 안에 율법주의자들을 양산하게 된다.팀 켈러는 결국 성경을 읽는 데는 두 가지 길 뿐이라고 말한다.“‘근본적으로 나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예수님에 관한 것인가?’ 다른 말로 ‘근본적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관한 것인가 아니면 근본적으로 그분이 행하신 일에 관한 것인가?’”그러나 성경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 할 때 과도하게 본문에 그리스도를 억지로 끼워 넣으려고 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 붉은 색이 나오면 무조건 그리스도의 보혈과 연결시킨다던지, 사랑하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는 본문에서 잠은 그리스도의 죽음이고 깨어남은 부활이라고 해석하는 등 성경 본문 하나하나에 일대일로 그리스도를 대입하는 것은 잘못된 그리스도 중심적 해석의 한 형태이다.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는 말의 의미는 모든 성경 문맥을 통해서 인간이 해결할 수 없고 그리스도만이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라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플은 그의 책 ‘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에서 이 과정을 FCF(The Fallen Condition Focus)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초점 맞추기’라고 불렀다. 모든 성경 본문은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이야기 해주고 그 대안으로서 그리스도를 제시하고 있다. 인간의 타락한 상태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는 설교는 결국 복음이 아닌 율법을 설교하게 된다.“예를 들면 ‘~처럼 되라’, ‘선한 사람이 되라’, ‘영적훈련을 실천하라’를 강조하는 설교는 복음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설교다. 설교 내용 자체에는 잘못이 없지만, 영적으로는 치명적인 독을 갖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위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지기도 하고 멀어지기도 한다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그리스도 중심 설교 이렇게 하라’ 39쪽)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다양한 설교 형태 중의 하나가 아니다. 성경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 못한다면 그것은 말씀의 의미를 사실상 변질시키는 것이다. 진리를 다루는 일은 결국 성경 속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것이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선포하라알렉 모티어의 두 번째 과제는 청중을 변화시키는 것이다. 팀 켈러는 청중의 마음은 오직 ‘그리스도를 드러낼 때’ 변화된다고 말한다. 사람의 변화는 언제나 그 마음의 중심인 ‘정감’(affection)이 변화될 때 이루어진다. 단순한 감정(emotion)의 변화로는 삶이 바뀌지 않는다. 수련회에 가서 눈물 콧물을 다 쏟고 돌아오지만 여전히 삶의 변화가 없는 경우들은 대부분 정감(affection)의 변화가 아니라 감정(emotion)의 변화이기 때문이다.정감(affection)이란 사람의 마음 깊은 좌소에 있는 ‘사랑’을 말한다. 팀 켈러가 설교를 언급할 때 ‘마음을 향한 설교’ 라고 표현하는 이유도 바로 이 정감의 변화가 사람의 변화의 핵심임을 알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죄를 ‘무질서한 사랑’(disordered love)이라고 말했다. 여기에서 ‘무질서’란 ‘순서가 바뀐 사랑’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을 가장 사랑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 숭배이며 죄다. 결국 사람은 가장 사랑하는 것을 섬기게 되어 있고 그 사람이 변화되려면 반드시 사랑의 순서가 바뀌어야 한다. 그 사랑의 순서는 어떻게 바뀌는가? “물론 정감(affection)도 감정(emotions)으로 가득하지만, 감정과 동일하지는 않다. 정감은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했을 때 전인으로부터 나오는 성향이다.”(‘팀 켈러의 설교’ 216쪽)팀 켈러가 청중에 대한 과제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유가 바로 사람의 마음의 변화는 ‘어떤 대상의 아름다움과 탁월함을 감지했을 때’ 전인으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보고 감정(emotion)의 변화가 있는 사람들은 돈을 기부하거나 후원할 것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의 삶이 변화되려면 단순한 구제 사업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있는 가장 깊은 정감인 ‘물질주의’가 깨뜨려져야 한다. 그것은 단순한 의지의 결단으로 깨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아름다우심과 탁월하심 즉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때 물질주의로부터 조금씩 자유로워진다. 결국 진리에 대한 과제와 청중에 대한 과제라는 두 가지 과제를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열쇠는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해야 하고 또 청중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일에 대한 복음을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복음은 내가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무엇을 행하신 일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들이여! 진리를 바르게 알고 싶은가?또 청중들의 삶이 변화되는 현장에 함께 있고 싶은가? 그렇다면 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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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모티어
에드먼드클라우니
팀켈러
FCF
affection
설교자
온 지면에 흩으심과 사회적 거리두기
by 정요석
2020-04-30
노아의 때에 사람의 죄악은 세상에 가득하였고, 생각하는 모든 계획은 항상 악하였다. 하나님은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시며 그들을 지면에서 쓸어버리시겠다고 하셨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어 방주를 지음으로써 대홍수에서 살 수 있었다. 하나님은 살아남은 노아 가족 8명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하셨다. 그들이 충만할 수 있도록 모든 동물을 그들의 손에 붙이셨고, 먹을 것으로 주셨다. 그들에게 다시는 땅을 멸할 홍수가 없다는 무지개 언약도 약속하셨다. 이런 축복과 언약을 받은 노아는 세 아들의 출산을 통해 많은 백성을 이루었다. 그때 온 땅의 언어는 하나였다. 이들은 벽돌과 역청으로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자신들의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고자 하였다. 다시 악해진 것이다. 이들이 건설하는 성읍과 탑을 보신 여호와께서는 이들이 한 족속이고 한 언어를 사용하므로 이런 일을 시작하였고 이후로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다 하시며,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셨다. 그들은 온 지면에 흩어졌고, 도시 건설은 자연히 멈추었다.언어의 혼잡으로 이들이 온 지면에 흩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거룩하게 살 기회를 다시 주신 것이다. 사람들의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내면서 생육하고 번성할 기회를 다시금 주신 것이다. 하지만 흩어짐 이후로도 인류는 죄를 짓기에 바빴다. 하나님은 진노와 격분으로 죄악의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질병의 유행과 유황과 불 등으로 멸하시기에 이른다(신 29:23). 그러나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신지라 부분적으로만 인류를 징계하셨다.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세계가 멈춰 섰다. 각국이 국가와 도시를 봉쇄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와 자가 격리가 실천되고, 학생의 등교가 멈추고, 산업과 경제 활동의 위축으로 회사가 파산하고 개인이 실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여파로 생각지 않은 현상들이 발생하고 있다. 무엇보다 항공기와 차량과 선박의 운행 감소로 대기와 수질이 좋아지며 보이지 않던 산들과 물속이 또렷하게 보이고, 맑은 하늘에 구름은 떠다니고, 동물들이 도시에 출몰하고 있다.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인류에게 다가온 부정적 현상이 정말 심각하고, 인류의 행복에 큰 지장이 될까? 성경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라고 말한다. 대감염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람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한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지 않아도, 프로 스포츠가 열리지 않아도, 여러 모임이 열리지 않아도, 퇴근 후 바로 집으로 돌아와 시간을 보내도, 교회의 여러 모임이 취소되어도 사람의 기쁨과 행복에 큰 지장이 없음을 알게 하고 있다.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져 파멸과 멸망에 빠진다. 부하려 하고 높아지려는 자들이 서로 충돌하며 싸움과 고소와 폭력과 살인이 벌어지고, 국가 간에 전쟁이 벌어진다. 인류가 치열하게 경쟁하며 사는 바쁜 삶이 실은 행복과 평안을 쌓는 것이 아니라, 일만 악의 뿌리가 되는 돈의 사랑과 자기 높임을 쌓는 측면이 강하게 있는 것이다.전염병이 대감염의 수준에 이르면 어느 한 도시나 국가에 발병의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현상으로 허락하신 하나님의 뜻에 있을 수 있다. 언어를 혼잡하게 하심으로 사람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던 하나님께서 왜 이번에 바이러스의 퍼짐으로 사람들을 흩으시고 격리하시는지 이유를 살펴야 한다. 육신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빠져 바쁘게 돌아다니고, 쓸데없는 자원낭비와 환경오염을 일으키며 욕망의 바벨탑을 쌓는 인류가 그 행위를 스스로 절제하지 못하고, 앞으로 어떤 기형적인 일을 할지 모르기 때문에, 사회적 거리두기를 실천하게 하심으로 자신의 내면과 인생의 본질을 살피게 하시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스마트폰이 발달되어도 사람간의 소통은 오히려 줄어들고, 교통이 발달하여도 정작 중요한 사랑과 정은 전달되지 않고, 아파트는 날로 진화하여도 가족의 평안은 줄어들고 있다. 과학의 발전이란 평안이 아니라 편리를 가져온 데 지나지 않고, 잠시 즐거운 장난감에 지날 뿐이다. 처음 성을 쌓고 도시를 이룬 일도, 가축 치는 일도, 수금과 퉁소를 잡는 일도, 구리와 쇠로 여러 기구를 만드는 일도 모두 가인 계열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은 도시와 산업과 예술과 과학의 발달이 사람의 욕망과 이름을 내는 데 사용되기 쉬운 것임을 나타낸다.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을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지만, 혀는 능히 길들일 수 없다. 사람은 길들여지는 존재가 아닌 것이고, 인류는 자신의 욕망을 위해서 절제하지 않는다. 코로나19 대감염 없이 어떻게 올림픽과 각종 스포츠와 박람회와 축제가 연기 내지 폐지되겠는가? 코로나19 대감염은 외형적으로 많은 사망과 활동의 위축을 가져오지만, 내면적으로 인간 존재의 이유와 목적이 무엇인지 전 인류로 생각하게 한다. 하나님께서 언어의 혼잡을 통해 사람들을 흩으심으로 인류에게 다시 기회를 주셨듯, 코로나19 대감염으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통해 과학의 발달과 주요 언어로 다시 하나가 되어 흩어짐을 면하며 자신들의 이름을 높여온 인류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는 것일 수 있다. 특히 신자들은 하나님께 영광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가인과 같이 성을 쌓고 도시를 건설하며 자신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부르는 짓을 교회와 목회라는 이름으로 교묘하게 할 수 있다. 신자들은 코로나19 대감염이 빨리 종식되기를 기도해야 하겠지만, 동시에 무엇이 사람의 첫째 되는 목적인지를 그리고 우리가 진정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하는지를 숙고해야 한다. 하나님은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질병의 유행을(신 29:22) 통해 경고하시고 징계하시는 것이다.
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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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팬데믹
사회적거리두기
대홍수
무지개언약
바벨탑
현실을 직시하라
by Paul Tripp
2020-04-22
결혼을 앞둔 커플이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첫 아이의 출산을 앞두고, 우정과 관련해서, 또는 이직을 생각할 때 만나게 되는 문제가 있다. 그리고 목회를 생각하는 목사가 만나게 되는 문제도 있다. 이 문제는 무엇일까? 바로 그것은 현실성 없는 높은 기대이다. 왜 이런 문제가 생기는 것일까?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상에 대한 진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죄는 이 세상을 문제 속으로 던져넣었다. 성경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이 문제 많은 세상이 일으키는 먼지와 오염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여기에서 도망갈 수 있는 길은 없다. 이 세상은 애초에 창조되었던 방식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성경은 분명하게 경고한다. 지금 우리는 말 그대로 신음하면서 구원을 기다리는 바로 그 세상(롬 8:18)에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이 세상이 창조될 때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병과 죽음의 세상에서 살고 있다. 속임수와 실망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이 창조한 “좋았더라”에 포함되지 않은 반역과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과는 너무도 먼 고통과 상실로 가득한 세상에서 살고 있다. 평화의 왕자가 창조했다고 하기에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폭력과 전쟁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지금 살고 있다.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만들 때 전혀 고려하지 않았던, 음욕과 욕심이 마음을 채우는 세상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이런 모든 것들이 삶을 자극하고 또 사역까지 복잡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생각해도 완전한 만족은 없다. 기대와 다른 실상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교회를 포함한 어떤 기관도 죄로 타락한 세상 밖에서 살 수 없다.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우리의 삶, 또는 우리의 사역도 에덴동산의 타락이 끼친 영향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부족한 그리고 준비되지 않은이런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 우리는 타락한 세상에 대해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사실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는다. 종종 갈등하는 목사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내가 발견한 몇 가지가 있다. 전혀 현실적이지 않은 사역에 대한 기대 때문에 그들은 건강한 공동체, 하나님만을 높이는 믿음의 공동체를 세우는 과정에서 만나는 어려움에 대처할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 결과, 안에서는 죄가 또 밖에서는 어려움이 공격할 때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조심하고 신중하게 행동하기보다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경우가 많다. 타락한 세상에서 만나는 사역의 어려움만이 아니라, 자신이 불러온 어려움 때문에도 고통을 당한다. 여러 교회와 일하면서 사역자들이 서로의 강점을 중심으로 사역하기보다는 어떤 식으로든 서로의 약점을 자극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시는 지혜로운 원칙에 따라 스스로 준비하고, 또 하나님의 은혜가 주는 능력을 힘입는 대신 그들은 정치적인 방법을 택한다. 타인을 공격할 전략을 짜고, 자신을 방어하는 수동적인 자세가 되는 데에 더 능숙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매우 구체적으로 말한다. 성경이 이렇게 구체적으로 말하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런 세상 속에서 잘 준비되어 ‘이미 도래한 그러나 아직 임하지 않은’ 상태에서 서로 돕고 사역함으로 모든 것이 다 회복될 그 날을 고대하며 사는 것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게 다가 아니다. 현실적이지 않은 기대는 오로지 자신만을 의지하도록 한다. 목회자라면 누구나 매일 매일 구조의 손길이, 용서의 손길이, 그리고 은혜와 위로가 주는 힘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목회자도 성화의 과정에 있는 인간일 뿐이며, 죄의 굴레를 벗어나 완전하게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사실이야말로 사역 현장에 있는 우리가 매 순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동역자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앞으로 다가올 어려움약하고 실패하는 사람들, 사랑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들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거기에는 또 다른 게 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시 119:105)이다. 우리가 이 타락한 세상에서 바로 살고 또 바로 사역하는 길은 오로지 성경의 지혜가 주는 빛으로 보호받고 인도받는 길밖에는 없다. 자신은 평생 성경을 공부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조차도 우리의 필요가 얼마나 심오한지, 또 이 세상이 얼마나 타락했는지 제대로 깨닫지 못할 때가 있다. 그 사실을 잊을 때, 우리는 사역 현장에서 매일 매일 경험해야 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을 갈망하지 않게 된다. 그 결과 사역을 힘들게 하는 일이 생겼을 때 이미 혼란한 상황을 더 심각하고 복잡하게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한다. 사역자에게 반드시 힘든 날이 온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당신을 홀로 두지 않는다. 당신이 어려운 상황에 부닥쳤을 때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 자신을 주신다! 그분이 당신을 안전하게 지키는 바로 ‘그것’이다. 시편 27편 5절 위로의 말씀을 보라.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그는 가까이 계신다. 그는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 은혜와 자유롭게 하는 지혜로 무장해서 당신에게로 오신다. 그러나 핵심은 이것이다. 성경이 당신에게 그리고 믿음의 공동체에 하시는 말씀에 눈과 마음을 열고 살아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면 지금 하나님이 주기 원하는 겸손함과 갈급함, 그리고 은혜와 지혜를 갈망하면서 살고 있을 것이다. 현실적인 사람이 되어라. 그리고 당신의 삶과 사역에서 만나게 되는 모든 현실적인 일은 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깨닫는 기회가 된다는 사실을 꼭 기억하라.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Expect Trouble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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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급함
공동체
팀 켈러가 말하는 좋은 설교란?
by 고상섭
2020-04-14
“설교는 영광스러운 소명이다.”현 TGC대표 줄리어스 김의 ‘설교학’ 서문의 첫 문장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설교에 대해 무감각해지고 때로는 싫증을 내는 시대이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일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위대한 소명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는 회중을 향해 말씀을 선포하는 것과 소그룹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것 사이에는 어떤 질적 차이도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설교만의 독특한 부르심과 권위가 있다고 말했다. 아마 청중들에게 설교를 해본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설교와 성경공부 또는 설교와 강의 사이에는 무언가 질적인 차이가 있음을 경험했을 것이다. 팀 켈러는 “이는 하나님의 영이 공식적인 예배 모임에 부여하신 고유한 권위”라고 말했다. 물론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말씀 사역이 필요하다. 하지만 설교라는 특별한 사역은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다.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그 설교의 영광을 회복하는 일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설교의 영광을 회복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설교’에서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세 가지로 설명하고 있다. 1. 철저히 준비하라 먼저, 설교자의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통로이기에 철저히 말씀을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 안에 있기 때문이다. 설교자의 은사와 기술, 특정 메시지에 대한 설교자의 준비 상태가 좋은 설교와 나쁜 설교를 만들어 낸다. 철저한 주해와 적용까지 설교 전과정을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 이 과정은 고된 작업일 뿐 아니라 기술적으로 구성하는데도 수년의 걸친 연습이 필요하다. 그러나 이렇게 철저히 준비하는 것만으로는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없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나쁜 설교와 좋은 설교의 차이는 대체로 설교자의 책임이지만, 좋은 설교와 위대한 설교의 차이는 설교자와 더불어 청중의 마음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달려있다.” 사도행전 16장에서 바울은 빌립보에서 첫날을 맞아 기도할 곳을 찾다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때 루디아라는 여인이 예수님을 영접했다.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지라”(행 16:14) 빌립보에서 전한 메시지는 바울에게서 나왔지만 듣는 이들을 향한 설교의 효력은 오직 성령님으로부터 나온다. 인간이 최고의 설교 원고를 만들어도 성령님이 역사하지 않으시면 듣는 이들에게 효력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나 부족한 설교 원고 일지라도 성령님의 손에 사로잡히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된다. 이 말을 오해하게 되면 철저히 준비하기보다 오직 성령님의 역사하심에 매달리며 기도만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기계적으로 열심히 기도한다고 성령님이 기계적으로 역사하시는 것은 아니다. 2. 간절히 기도하라 성령님이 역사하시는 위대한 설교는 인간의 노력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말이 아니며 또 인간의 노력에 달려 있다는 말도 아니다. 누군가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아마도 잘못된 가르침일 것이다. 왜냐하면 위대한 설교는 누군가에게 배워서 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위대한 설교의 주체는 오직 성령님이시다. 어떤 이들은 설교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면 성령님이 역사하신다고 말하기도 한다. 부흥사로 유명한 어느 목사님은 설교 전에 2시간씩 설교만을 위해 기도하면 강대상 위에서 펄펄 날아다닌다는 말씀을 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설교 가운데 역사하시는 성령님을 마치 인간의 기도로 좌지우지할 수 있다는 잘못된 신념을 갖게 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설교자의 기도 생활이 위대한 설교의 비결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이며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물론 깊고 풍성한 기도 생활은 위대한 설교와 좋은 설교를 위한 필수요소이지만 그렇게 기도한다고 설교의 위대함이 자동적으로 보장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팀 켈러의 책에 나오는 설교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어 문화의 심장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를 벗겨내고 성령님의 역사와 함께 청중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정감(Affection)을 변화 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팀 켈러의 이 정의에 대해 앞으로 TGC코리아 아티클을 통해 하나씩 살펴볼 것이다). 이런 위대한 설교의 정의를 위해 반드시 설교자가 가져야 하는 두 가지 자질이 있다. 3.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라 존 칼빈은 고린도전서 1장 17절에서 바울이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이라는 구절을 해설하면서 이 말은 어떤 수사학도 설교에 첨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남용되어 수사학 자체가 목적이 되는 설교를 경계하라는 것이라 설명했다. 칼빈은 웅변술과 수사학 같은 인간적인 기술이 설교라는 여주인을 섬기는 여종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오늘날의 설교는 청중의 즐거움을 위해 재미와 즐거움의 요소들이 점점 강단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설교는 단지 재미를 추구하는 인위적인 공연이 아니다. 팀 켈러는 “신령한 설교는 복음 진리 자체를 향한 사랑과 그 진리를 듣는 사람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desperate love)에서 나온다. 그 진리를 받는 것이 청중에겐 곧 삶과 죽음의 문제임을 알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위대한 설교를 위해서는 두 가지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 두 가지 마음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설교자의 마음속에 불타올라야 하는 두 가지 마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간절한 열망, 즉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다. 또 한 가지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대상인 청중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향한 사랑이 있을 때 설교자는 그 말씀을 기도하며 철저히 준비하게 된다. 더욱 하나님을 알고 싶고 사랑하고 싶기 때문이다. 또한 죽어가는 영혼들을 향한 절박한 사랑이 있을 때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하고 싶어질 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위대한 설교의 주체가 되신다. 오직 성령님만이 사람을 변화 시킬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 설교자의 마음과 상관없이 단독적으로 그 일을 행하지 않으신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청중을 향한 불타는 심령을 설교자 안에 부어 주신다. 설교자는 이 두 가지 사랑을 가슴에 품고 철저히 설교를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설교 시간에 ‘죄의 고백’에 대해 설교한다면 설교자의 기도 시간에 죄의 비통함과 애통함을 먼저 경험해야 한다. 그렇게 기도시간에 경험한 것만이 설교시간에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설교 시간에 “주님은 위대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면 먼저 설교자의 기도시간에 위대한 하나님을 향한 경외와 기쁨과 감격을 경험해야 한다. 설교에 앞서 하나님은 설교자의 마음을 만지시고 거룩한 정서로 가득 채워주신다. 팀 켈러는 설교자들에게 이렇게 경고한다. “우리가 개인기도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면, 설교에서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반대로 우리가 기도할 때 그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설교에서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설교자들이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 설교자란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서 늘 자신의 부족함으로 고뇌하며 부르짖는 사람이지만, 우리가 여전히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설교가 때론 힘겨울 때도 있지만 또한 언제나 영광스러운 길이기도 하다. 설교가 무엇인가? 설교란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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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학
에드먼드클라우니
존칼빈
Affection
팀켈러
코로나 시대 교회 리더들을 위한 긴급 제언
by Justin Taylor
2020-04-07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 TGC, Christianity Today 등 에디터로 활동하며, 팀 켈러와 ‘도시를 품는 센터처치’를 공저했다_편집자 주)가 기독교인 지도자라면 모두 다 꼭 읽었으면 하는 아주 훌륭한 글을 썼다. 열 명에서 천 명 사이의 사람을 이끄는 공동체 리더에게는 지금과 같은 비정상의 시기야말로 지금껏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일 것이다. 이 글은 코로나19 바이러스라는 상황을 맞은 기독교 리더를 위한 가이드이다. 크라우치는 코로나19라는 위기를 맞은 미국에서 우리는 이제 다음의 근본적인 두 가지에 있어서 “가능성의 지평을 바꾸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첫째, 바이러스 전파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우리는 말 그대로 상호 작용하는 사회적 방식(norms)을 바꿔야 한다. 코로나19에 관해 가장 믿을 수 있는 공공 정보를 바탕으로 해서, 중요한 단계라고 생각하는 내용을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사회적 상호 작용의 방식을 바꾸는 것은 엄청난 변화라는 느낌을 주고도 남는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이런 변화를 조기에 구현해야 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굳이 생활 습관을 바꿔야 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렇기에 이를 현실화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리더십이 필요하다. 세계적인 전염병을 다룰 때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효과적인 조치는 언제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빨리 적용할 때만 가능하다. 둘째, 사회적 에너지를 불안과 공황이 아닌 사랑과 준비로 바꿔야 한다. 이 위기는 이웃을 사랑하고 돌보는 소규모 공동체를 강화하는 특별한 기회가 되기도 한다. 두려움을 줄이고 믿음을 키우며 자기 보호에서 타인에게 봉사하는 방향으로 사고를 전환할 때만 가능하다. 지난 한 달 동안 크라우치는 대중에게 공개된 코로나19에 대한 의료 및 공중 보건 정보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의 에세이는 다음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기독교 지도자라면 누구나 알아야 할 가장 중요한 코로나19에 관한 개요2.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 사람들이 들을 수 있는 가장 유용한 메시지 목록과 가장 해로운 메시지 목록3.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대규모 또는 중간 규모의 교회 예배, 그리고 가정에서의 소그룹 모임에 관한 권고4.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앞으로 몇 주 안에 내리는 우리의 결정에 따라 미국 내에서 기독교 신앙의 실천을 획기적으로 바꿀 수 있을 뿐 아니라, 자비로운 하나님을 드러냄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다시 한번 부흥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한 몇 가지 고찰지금부터 중요한 몇 가지 포인트를 정리하도록 하겠다. 그러나 나는 크라우치의 글을 전체 다 읽어 보기를 강력하게 권고한다. 1.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바이러스 확진자가 보고되지 않았다고 해도 어디에나 이 바이러스가 전파되고 있다는 가정을 해야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로 인한 질병은 일반 독감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 무엇보다 노인과 기저 질환이 있는 취약한 집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이다. 이 바이스러에 감염된 많은 사람은 경미한 증상으로 끝나거나 심지어 증상을 인식하지 못한 채 지나칠 수도 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전파하는 위험이 커진다. 감염되었는데도 증세를 전혀 느끼지 못하는 “무증상자”는 자신도 인지하지 못한 상태에서 취약한 사람에게 바이러스를 전파할 수 있다. 따라서 여기에는 바이러스가 주는 단순한 사망률을 넘어 심각한 위험이 존재한다. 건강 관리 시스템을 붕괴시킬 수도 있다. 코로나19 및 기타 원인으로 인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질병이 사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의심할 여지도 없이 우리 앞에는 광범위한 재정적 어려움과 전 세계적 경제난이 기다리고 있다. 2. 어떤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가?가능성의 지평을 움직이는 데 있어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을 할 때 무슨 말을 하는가, 어떻게 말을 하는가, 심지어는 말을 할 때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를 다 포함하고 있다. 의사소통하는 우리의 방식은 다른 사람들의 선택과 그들이 스스로 의사를 결정하는 방법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리더로서 중요한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 우리는 모두 잘 쉬고, 기도와 묵상에 전념해야 한다. 개인적인 두려움과 염려에서 벗어나야 한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친구로서, 그리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성도로서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해야 한다. 우리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두려움을 내어쫓는 진정한 영적 권위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고 지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마음과 생각, 몸에 부족한 것을 채워 주실 줄로 믿고 기도해야 한다.이런 기초가 되는 자세를 근거로 크라우치는 다음과 같은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한다.기독교 리더가 줄 수 있는 가장 해로운 메시지ㆍ “모든 게 다 잘 될 거야” 또는 “당신은 아무 문제 없을 거야.” ㆍ 특히 두려움에 빠진 사람에게 “당신, 지금 너무 과민하게 반응하는 거야.” 기독교 리더가 줄 수 있는 가장 도움이 되는 메시지ㆍ “우리가 지금 행동 방식을 바꾸는 건 다 사랑 때문이야.”ㆍ “어려움을 대비해서 미리 준비해.”ㆍ 무엇보다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해야 한다. 3.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크라우치가 보낸 업데이트를 참고하라: 2020년 3월 16일에 있었던 대통령과 연방 보건 당국의 오후 기자 회견 시점에서 볼 때, 2020년 3월 12일 또는 그 이후에 적용할 예정이었던 지도자들을 위한 조언은 쓸모없게 되었다. 그래도 그리스도인들이 기존의 제한 사항을 준수하도록 돕는 데는 여전히 하나의 모델로서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최대 열 명이 모이는 장소에 관한 조언 등). 나는 더 이상 업데이트는 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지도자는 직급을 막론하고 모든 공무원의 요구에 순종해야 한다.]위험을 최소화하면서 다음 규칙만 준수한다면 열 명 미만의 모임은 여전히 가능하다. ㆍ 아픈 사람이 없거나 코로나19에 감염되었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는 경우ㆍ 회의 전후에 모임 장소를 소독하는 경우ㆍ 모임에 도착하자마자, 그리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최소 20초 이상 철저하게 손을 씻는 경우ㆍ 음식과 음료는 개별적으로 가져오는 경우ㆍ 서로 다른 가구 구성원과 또 각자의 소지품 간에 가능한 한 먼 거리를 유지하는 경우4.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ㆍ 이 전염병은 반드시 사라질 것이라고 믿는다.ㆍ 이 전염병이 초래할 단기적 경제적 비용은 상당하겠지만, 과거의 전염병과 마찬가지로 그 피해는 궁극적으로는 제한적일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 뿌리를 둔 확신이다. 우리는 세상의 창조주가 이 우주의 구속주이자 운영자라는 믿음과 더불어 피조물 전체를 새롭게 하시려고 언젠가 다시 오실 것을 믿는다. 기독교인의 이런 소망은 단지 우주적으로 그치지 않고 개인적이기도 하다. 하이델베르크 교리 문답은 실로 놀라운 말로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사나 죽으나 당신의 단 하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나는 나의 것이 아니고,사나 죽으나 몸과 영혼이 모두 나의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입니다.주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려 나의 모든 죗값을 치러주셨고 마귀의 권세로부터 나를 자유롭게 하셨습니다.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는 나의 머리카락 하나라도나의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이 주님께서는 나를 항상 지켜주십니다.실로 모든 것이 협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룹니다.내가 주님의 것이기에주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내게 영원한 생명을 보증하시고,지금부터 나의 온 마음을 다하여 기꺼이 주를 위하여 살도록 인도하십니다.”“이 위기가 주는 가장 큰 기회 중 하나는 이 문답을 다시 배우고, 우리의 자녀들과 새로운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문답을 가르치고, 이 문답의 내용대로 살도록 하는 것이다.” 우리의 리더십에 생명을 불어넣는 중요한 소망:1. 우리는 위기와 두려움 가운데에서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전례 없는 기회를 맞고 있다.2. 우리는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금 깨달아 인간에게 주신 가장 중요한 공동체로서 가정을 회복해야 한다. 서로를 가장 잘 아는 곳, 서로를 보살피고 돌보는 곳이 가정이 되도록 해야 한다. 3. 우리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신앙과 제자도,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새롭게 되는 모습을 목격할지도 모른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A Guide for Christian Leaders in the Time of Coronavir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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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하는 당신에게
by Jonathan Landry Cruse
2020-03-29
이번 주일에 나는 그동안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려고 한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예배당에서 설교를 해보는 것이다. 교인들이 집이나 또는 소그룹을 만들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도록 하는, 기존의 예배 형태를 벗어난 온라인 예배 말이다.‘코로나19’의 팬데믹 사태 때문에 아마도 예배의 대안을 찾는, 몇 천 명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몇 백 명의 목사 또는 예배 인도자가 나처럼 예배를 드릴 것이다. 이런 온라인 예배를 가능케 하는 현대 기술에 나는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을 모이지 못하게 하는 정부의 지침에 조금도 반감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이런 정부의 정책은 우리의 건강과 안전을 위해서이고, 이 명령에 따르는 것은 우리가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두 번째 가장 큰 계명에 순종하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기쁜가?그럼에도 불구하고 텅 빈 교회에서 설교하는 것은, 솔직히 말해서 별로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예배를 드리러 가는 것, 즉 주님의 백성들과 함께 주님의 전에 거하는 것은 시편 기자에게 기쁨에 가득차게 만드는 일이었기에 말이다.“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시 122:1)그러나 이번 주,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몇 주 동안 예배를 놓고 그 기쁨을 만끽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고, 그걸 생각할 때 내 안의 기쁨도 사그라짐을 느낀다.목사로서 나의 한주간은 항상 주일을 향하고 있다. 서재에서 설교를 준비하고 또 관련한 여러 회의를 가질 뿐 아니라 성도들과 교제하는 등의 모든 과정은 결국 성도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삶의 자리에서 필요한 때에 복음의 은혜를 누리도록 만드는 일이다. 그 일련의 과정은 오로지 하나님의 도움으로만 가능한 예배 시간으로 그 정점을 이룬다. 물론 나는 이번 주에도 그 사역을 감당할 것이다. 그러나 이번 주일은 상황이 다를 것이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아주 이상할 것이다.예배 시간 내내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것이다. 함께 드려야 하는 기도를 나 혼자 하게 될 것이고, “찬송가 몇 장을 펴시지요”라는 말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말씀을 듣는 교인들의 반응에 따라서 상당 부분 그 느낌이 달라질 수 있는 나의 설교는,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어색하기만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 기운이 빠진다. 그럼에도 이런 온라인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에게 큰 은혜가 임하기를 나는 기도하고 있을 뿐이다. 이건 목사에게 정말로 영적인 도전이다.보이지 않는 교회목사라면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숫자에 무척 민감할 것이다. 다른 건 몰라도 ‘코로나19’의 위기가 목사에게 주는 한 가지 유익이 있다면, 영혼을 돌보는 것 보다 교인 숫자 세는 데에 더 바쁜 우리의 습관에 제동을 걸어준다는 사실이다. 텅 빈 예배당을 보면서, 교인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비로소 신학자들이 말하는 ‘보이지 않는 교회’에 대해서 생각하게 될 것이다.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모든 것의 머리가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이미 모인 또는 앞으로 모이게 될, 선택받은 모든 사람들”(WCF 25.1)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것은 히브리서 12장 22-23절에서 온 것으로, 우리가 예배를 드린다고 할 때, 그것은 장소와 관계없이, “천만 천사와 하늘에 기록된 장자들의 모임과 교회와 만민의 심판자이신 하나님과 및 온전하게 된 의인의 영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내가 매주 인도하는 예배에 참석하는 믿는 자들의 숫자가 우리 교회 지붕을 뚫고 나갈 정도로 많다는 것이다. 물론 이건 나의 설교 능력과 비전을 주는 리더십, 또는 나의 매력적인 그 무엇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 모든 것은 다 새 언약의 중보자 되신 예수님의 피가 뿌려졌기 때문이다(히 12:24).사랑하는 목회자들이여, 지금 당신 앞에서 당신이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교인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 위해 주일 예배 시간에 완전히 텅 빈 예배당을 내게 준비해 주신 것이 아닐까? 단 한 분의 청중앞으로 다가올 주일을 맞으며 또 하나 우리 목회자가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는, 우리가 설교하는 유일한 이유가 되시는 그 분은 언제나 우리 앞에 앉아 계신다는 사실이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설교 또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비록 교인들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하나님은 영으로 우리 앞에 앉아계신다. 그동안 수많은 교인이 예배에 참석한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우리는 얼마나 쉽게 이 사실을 잊고 살아왔던가?지난 주일에 재미있는 일이 있었다. 우리 교회는 동네에서 예배를 취소하지 않은 몇 개 안 되는 교회 중 하나였는데, 그래서 그런지 예배를 취소한 교회에 다니는 교인들이 우리 교회를 찾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날 우리 교회 역사상 가장 많은 교인이 예배에 참석했고, 나는 교인으로 꽉 찬 예배당을 보면서 예배가 궁극적으로 누구를 위한 것인지 잊어버릴 정도로 강한 유혹을 느꼈다. 참석한 숫자로 보면 이번 주는 지난주와 정 반대가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말하지만, 하나님 한 분으로 예배당이 꽉 차게 보이게끔 느끼기 위해서 내게 텅 빈 예배당이 필요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으로만 온전히 채워지기 위해서 그게 무엇이 되었든, 나는 그게 필요한 사람이다. 바로 이 메시지가 내게 필요했다. 그리고 이 글을 읽는 당신에게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내가 내 자신에게 간곡하게 요청한 것을 당신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사랑하는 목회자여, 온 마음을 쏟아서 이번 주일에 설교하라. 낙담하지 마라.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카메라를 향해 쏟아 부어라. 격리된 당신 자신을 예배의 도구로 사용하라. 하나님은 지금의 이 기이한 상황조차도 당신을 위해서 또 맡겨주신 양떼를 위해서 선하게 사용하실 것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ake Heart, Pastor. Your Church Won’t Be Empty Sunday.번역: 무제
COVID-19
온라인예배
절망
보이지않는교회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
히브리서
팬데믹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라 : ‘추방과 귀향’
by 고상섭
2020-03-19
사도바울은 복음을 전할 때 하나의 방식으로 전달하지 않았다. ‘하나님 나라’의 개념으로 또 ‘생명’, ‘칭의’, ‘양자됨’, ‘속량’ 등의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전했다. 모두 동일하지 않고 작은 차이를 보이는데 사이먼 게더콜은 “공관복음이 미래 지향적이기 때문에 ‘영생’ 보다는 ‘나라’라는 개념을 더 자주 사용했다.”라고 말한다. 설교자나 교사들이 복음을 풍성하게 전달하려면, 빛이 프리즘을 통해 다양하게 비치듯이, 다양한 주제를 통해 복음을 다채롭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D.A.카슨은 신구약 성경을 관통하고 있는 주제를 중심으로 읽는 것이 좋다고 하면서 복음을 처음부터 끝까지 20가지 정도의 주제로 설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그중에서 중요한 세 가지 주제를 언급하며 설명하였다. 추방과 귀향 (The Exile and our homecoming)성경은 집에서 추방되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로 끝을 맺는다. 이것을 단순히 하나의 스토리로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다섯 가지 패턴을 중심으로 설명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1) 창조의 목적 2) 죄의 결과 3) 이스라엘의 모습 4) 예수님의 해결책 5) 회복의 모습이다. ‘창조의 목적’은 샬롬과 평강의 장소이다. ‘죄의 결과’는 평강이 파괴되고, 자기중심적이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애굽과 바벨론으로 추방되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인간의 추방을 대신 경험하셨으며, 그리스도의 속죄로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회복의 모습’은 새 하늘과 새 땅인 하나님의 나라이다. 팀 켈러는 ‘설교’에서 자신의 설교 개요를 위의 다섯 가지 주제와 비슷하게 설명한다. 위에서 언급한 다섯 가지 성경의 패턴에서 초기대지와 도입이 설교의 집중을 위해 바뀌었다. 마지막 하나님 나라의 회복은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우리가 해야 할 적용이 되었다. 이것 외에는 비슷한 패턴으로 구성되어 있다. 팀 켈러는 성경을 관통하는 주제를 설교의 틀로 삼은 것이다. 1. 도입 : 문제가 무엇인가? 우리 시대의 문화적 상황사람들이 만족함 없이 계속해서 무언가를 추구하며 쫓아가는 이유는 평화와 안식이 없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에서도 죄가 들어온 후 아담과 하와는 부끄러워하여 자신을 숨겼고, 또 하나님이 두려워 숨어버렸다. 인간 안에 있는 수치심과 두려움은 인간을 안식하지 못하게 한다.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은 자기 자신의 속박으로 이어지고 다른 사람과의 갈등으로 표출된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죄로 인해 생긴 결과이다. 우리는 죽음과 질병, 노화, 부패와 같은 것을 보면서 이 세상은 영원한 집이 아님을 알게 된다. 온 인류가 하나님을 등지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가 있는 그 집으로부터 추방된 존재이다. 2. 초기대지 : 성경은 무엇이라 말하는가? 성경에 따르면 최초의 집은 에덴동산이었고 영적, 육체적, 사회적으로 충만한 장소였다. 가장 친밀한 사랑의 관계들로 구성된 곳이었고, 그 사랑 안에서 양육되는 곳이었다. 쉼과 평강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삼위일체의 연합으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의 충만한 사랑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사랑의 연합 안에 인간을 초대하셨다. 하나님의 영광을 아름답게 나타내셨다.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과 자기 자신과의 회복, 또한 다른 사람들과 하나가 되는 사랑의 공동체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집이다. 그 집을 위해서는 하나님과 완전한 회복, 하나님의 계명에 대한 완전한 순종, 그리고 죄를 해결하는 것이 필요하다. 3. 중간대지 : 우리를 막아서는 것은 무엇인가?인간의 노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다. 그리고 이 세상이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할 수도 없다. 부패한 삶의 본성이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인간의 노력은 늘 한계를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과의 관계도 인간의 노력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무리 결심해도 자기 자신의 속박으로부터도 자유 할 수 없다. 이웃과 하나 됨도 마찬가지다. 누가복음 15장의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고 후회하면서 집으로 돌아간다. 그가 다시 집으로 돌아가서 아들의 신분으로 잔치에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돌아감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버지의 긍휼하심, 즉 하나님의 용서에 근거하는 것이다. 인간의 노력으로는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존재이다. 4. 말미대지 : 예수님은 어떻게 성경의 주제를 완성하고 이 핵심문제를 해결하시는가?“인간이 스스로 돌아갈 수 없다면 우리는 어떻게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죄로 물든 이 피조세계가 다시 회복될 수 있을까? 우리를 다시 집으로 돌아오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하늘의 집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또한 예수님은 머리 둘 곳 없이 집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셨다(마 8:20). 마지막엔 도시 바깥에 있는 예루살렘의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이 십자가의 죽음은 그분이 추방을 당하고 거절을 당하신 표지이다.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라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하게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 13:11-12)예수님은 우리가 받아 마땅한 추방(소외된 상태)을 우리 대신 경험하셨다. 결국 그리스도의 추방으로 인해 우리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예수님은 변화산에서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셨다. 그리고 “영광중에 나타나서 장차 예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것”(눅 9:31)을 말씀하셨다. ‘별세’라는 단어는 출애굽을 의미하는 Exodus로 표시되어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은 가장 궁극적인 출애굽이며, 죄로부터 우리를 건지시고 또한 추방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기쁜 소식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5. 적용 :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예수님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우리가 돌아갈 영원한 집인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미 맛보게 하셨다. 그분은 마지막 날에 완전한 회복을 주실 것이며,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집이 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은 이 땅의 없어질 것들에 집착하지 않는다. 잘못된 사랑으로 우상을 만들지 않고, 영원한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나그네임을 알고 살게 된다. 복음은 ‘미래를 앞서 경험하는’(Forward-Back) 속성을 통해 우리의 삶은 가시덤불과 엉겅퀴 가운데 있지만 낙심하지 않고 선을 행할 수 있도록 해준다. 왜냐하면 확실한 장래의 은혜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갈 6:9)팀 켈러의 설교 방식은 신구약 전체의 복음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런 구성이 좀 특별한 이유는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우리가 행해야 한다’라는 인간 중심의 적용이 아니다. 우리는 할 수 없다는 철저한 무기력과 회개를 경험하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할 수 있다는 은혜의 반응으로서의 적용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추방과 귀향’의 메시지를 공부해보라. 복음을 더욱 풍성하게 전달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복음
설교와교육
추방
귀향
팀켈러
센터처치
DA카슨
별세
Exodus
우리는 진정한 신학자가 되어야 한다
by Kevin DeYoung
2020-03-17
우리 교회는 이 지역에서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로 알려져 있다. 자랑하고자 함이 아니다. 신학을 강조해도 영적으로 열매 맺지 못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성숙함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믿음, 소망, 사랑이 있는 교회로 알려지는 것이 신학적 박식함으로 명성을 얻는 것보다 더 안전할 수 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나는 여전히 “환경 운동에 힘쓰는 교회”나 “최신 유행을 잘 수용해 중고등부 아이들에게 인기가 많은 교회,” 또는 “화려한 무대 장치로 유명한 교회”보다는 “신학을 강조하는 교회”를 택할 것이다.건강한 신학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한 신학을 추구하는 교회를 세우는 일은 강단에서 시작된다. 2004년에 유니버시티개혁교회(University Reformed Church)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나는 그곳에서 강해 설교라는 확실하고 견고한 유산을 받았다. 이 전통을 지키기 위해 현재까지 긴 시리즈로 설교를 해왔다. 지금까지 해온 주요 시리즈를 소개하자면, 창세기, 레위기, 역대하, 에스라, 전도서, 소선지서, 마가복음, 사도행전 고린도후서, 에베소서, 디모데후서, 베드로후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이다. 주일 오전에 드리는 예배처럼 얕은 물에서만 수영한다면, 교회는 깊은 하나님의 말씀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내가 초점을 맞추는 대상은 대학 신입생들이다. 이들 중에는 스스로 사고할 줄 알고 진지한 가르침에 대해 열려있는 이들도 있지만, 새로운 용어, 이름, 개념들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도 있다. 다시 말해 회중에게 학습 능력이 있을 것이라 가정하지만, 그들이 내가 말하는 것을 이미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좋은 내용이 전부가 아니다우리 교회 성도들에게 물어보면 내 설교가 신학적이라 말할 것이다. 그 말은 곧 주중에 본문을 열심히 연구했다는 게 느껴진다는 뜻이고, 내가 깊이 생각하는 사람이 되고자 노력한다는 뜻이다. 교회사와 조직신학을 통합한 설교문 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의미이고, 이따금 설교에서 아주 학문적인 용어를 쓴다는 뜻이기도 하다. 하지만 설교자가 자신의 신학 지식을 뽐내는 설교를 좋은 설교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세계 수준의 신학자가 세계 수준의 신학을 설교하면서도, 회중에게 세계 수준의 지루함을 선사해 신학적 성찰을 어렵게 만드는 일은 충분히 가능하다. 좋은 내용이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신학적으로 사고하는 성도를 길러내기 위한 신학적 설교에는 다음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다.첫째, 열정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은 설교자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는 것은 아니다. 설교자가 열정적으로 전하는 말만 듣는다. 칼케톤 신조(The Chalcedon Definition)에 대해 전할 때도 “지적인 분들에게는 이 내용이 중요하겠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은 별 관심이 없으시겠죠”라는 식으로 말하는 방법이 있는가 하면, “오늘 정말 엄청난 걸 다룬다는 거 모르셨죠? 오늘 예배에 정말 잘 오신 겁니다”처럼 말할 수도 있다. 벤 프랭클린(Ben Franklin)과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의 이야기가 그런 것이다. 복음을 거부했던 프랭클린이 휫필드의 설교를 한 마디도 믿지 않으면서 왜 자꾸 그의 집회에 가서 설교를 듣는 것인지 누군가 물었다. 프랭클린은 “알아요. 근데 휫필드 저 사람은 믿잖아요”라고 답했다. 설교자 자신을 움직이지 못하는 신학적 성찰은 성도들을 결코 움직일 수 없다.둘째, 우리는 최고의 신학을 먼저 우리의 가슴으로 가지고 가야 하고, 다시 그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끌어올려야 한다. 만일 내가 요한복음 10장으로 확실한 속죄에 대해 매우 상세하고도 학구적인 설교를 하면, 헌신된 칼빈주의자들은 좋아하고 나머지는 거부감으로 몸을 뒤틀 것이다. 하지만 내 설교에서 그리스도께서 택자들을 위해서만 죽으셨다는 것이 자신의 양 떼에 대한 그의 특별한 사랑과 자기 신부를 향한 멈출 수 없는 사랑의 표현임을 보여줄 수 있다면, 하나님은 십자가를 통해 우리를 구원받을만한 존재로 만드실 뿐 아니라 끝까지 구원하심으로써 그 자신이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면, 죽음이라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어떻게 완전히 종식되는지를 아름답게 표현해낼 수 있다면, 그리고 이 난해한 교리가 우리의 마음에 호소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까지 이어지게 할 수 있다면, 비로소 나는 성경의 풍부한 가르침을 주는 것이다. 성경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엄밀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성도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설교 이상의 것교회 사역에 있어 설교 이외에도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신학 교육과 신학적 반성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것에 스며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우리의 모든 삶, 우리가 함께하는 교회 생활을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하는 찬송, 우리가 드리는 기도, 예배의 순서, 심지어 광고를 어디에 넣느냐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신학적으로 사고하고자 노력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자신의 사역에 신학적으로 묵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성도들이 자신들의 직업에 신학적으로 사고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신학적으로 사고하는 교회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백성들이 신학적 식별력과 소양을 기를 수 있겠는가? 하나님 말씀의 부요함에 대한 그들의 사랑이 어찌 자랄 수 있겠는가? 어찌 하나님의 사고를 좇아 생각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며, 어떻게 신학적인 백성이 될 수 있겠는가? 개혁주의를 고백하는 우리 상황에서는 새신자 교육 내용을 벨직 신앙고백서,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그리고 도르트 신경으로 구성할 필요가 있다. 우리 교회 대부분의 새신자들은 개혁교회의 일치를 위한 세 신조(The Three Forms of Unity)를 들어본 적이 없지만, 수 세기 동안 세계 각처에서 하나님 백성들의 신앙을 살찌게 했던 이 신학 문서들을 스스로 읽어보는 것을 항상 새신자 교육의 하이라이트로 생각한다. 최근 우리 교회에서는 1년간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을 52회에 걸쳐 매 주일 저녁 예배 때 설교했다.우리는 모두 신학자들이다내가 위에서 말한 내용은 리더십 훈련, 장로와 집사를 세우기 위한 검증 과정, 대학부 사역, 소그룹, 주일학교 등에도 적용된다. 우리는 비정상적인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말씀에 초점을 맞추지 않으면, 신앙고백 전통에 뿌리를 내리는 것, 성도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치는 것, 그리고 전적으로 신학을 강조하는 것 모두 비정상적인 일이 된다.피상적인 것만 좇는 이 세상에는 뭔가를 줄 수 있는 교회가 필요하다. 얕디얕은 문화 속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의 예배는 깊이가 있어야 한다. 세속적인 우리 사회에는 선하고 거룩한 사고가 더욱 많이 필요하다. 목사로서 내 사역, 교회로서 사역은 우리 모두 신학자라는 전제, 그 전제가 맞는다면, 우리 모두 좋은 신학자가 되도록 애써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e Need Theologians, Not Smarty-Pants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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