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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 들통난 목회자는 사역에서 손을 떼야 할까?
by Ryan Williams
2022-11-12
지금 목회자에 대한 신뢰는 사실상 사상 최저에 가깝다. 목회자의 말이라면 무조건 믿던 시대는 지났다. 목회자의 거짓말이 속속 거짓으로 드러나는 현실을 너무도 많은 사람이 목격하는 게 오늘날 현실이다. 그렇다면 거짓말쟁이 목회자는 사역에서 손을 떼도록 하는 것이 옳을까? 먼저 환상의 거품을 터뜨릴 필요가 있다. 모든 목사가 거짓말을 한다. 거기에는 단 한 명의 예외도 없다. 단지 거짓말의 정도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살아 있는 동안 단 한 번도 거짓말을 하지 않은 목사는 없다. 때때로 우리는 숫자를 부풀리는 거짓말을 한다. 때로는 진실이 아니라 교인이 듣고 싶은 대답을 하는 거짓말을 한다. 또 종종 목사는 자신의 잘못 또는 다른 이의 잘못을 덮으려고 거짓말을 한다. 그럼 이런 모든 거짓말을 다 처리해야 할까? 이 중에서 과연 사역에서 손을 떼도록 만드는 거짓말은 어떤 것일까? 속임수는 죄악이다나는 지금 모든 목사가 거짓말을 하니까 거짓말이 문제 될 것 없다는 식의 변명을 하는 게 아니다. 속임수는 죄악이며 악한 마음에서 나온다, 속임수는 거짓의 아비 사탄에게서 나온다(요 8:44). 물론 여호수아 2장에 나오는 라합의 경우처럼 명예로운 거짓말도 있다. 그러나 반쪽짜리 진실을 공유하거나 과장하거나 또는 노골적으로 누군가를 속인다면, 그것은 명예로운 거짓말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예(행 5:1-5)에서 볼 수 있듯이, 교회에게 하는 거짓말은 결국 하나님께 하는 거짓말이다. 따라서 그런 거짓말은 제대로 처리되어야 한다. 교회를 속이는 거짓말은 심각한 죄이기에, 목회자는 자격이 박탈당할 수 있다. 그러나 목회자를 사역에서 손을 떼도록 해야 할지 말지를 어떻게 결정할까? 다음 두 가지를 고려해야 한다. (1) 거짓말의 심각성 (2) 진심 어린 회개. 거짓말의 심각성을 측정하라거짓말을 하다가 걸린 목사라면 감수해야 할 것이 한둘이 아니지만, 그중에서도 반드시 따라오는 결과가 하나 있다면 바로 손상된 교인과의 신뢰 관계이다. 상처받은 신뢰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 적지 않지만,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바로 거짓말의 심각성이다. 예배 출석수를 약간 부풀린 거짓말인가? 설교에서 예화를 좀 과장했는가? 논란이 되는 상황에 대한 거짓말인가? 아니면, 교회에서 돈을 훔쳤는가? 교회가 올바르게 대응하려면, 거짓말의 심각성에 따른 올바른 평가가 먼저 이뤄져야 한다. 목사의 거짓말로 인해 공적인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이름이 먹칠을 당했는가?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악을 은폐한 거짓말인가? 교인의 신뢰를 짓밟은 거짓말인가? 거짓말이 일회성이 아니라 수시로 발생하는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졌는가? 이런 경우라면 더 엄중한 결과가 따른다. 거짓말 때문에 단지 목사 혼자 바보가 되었을 뿐인가? 평소라면 결코 하지 않았을 거짓말을 순간적인 판단 착오로 내뱉은 것인가? 거짓말로 인한 파장이 미미한가? 물론 그런 거짓말에도 책임지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그렇다고 목회에서 손을 떼는 처벌을 내릴 수는 없다. 회개의 진실성을 점검하라아무리 거짓말이 심각하다 해도, 당사자는 일단 회개부터 해야 한다. 주일 출석 교인 수를 습관적으로 부풀리는 사람은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하게 신뢰를 무너뜨릴 수 있다. 작은 일에 관해서도 수시로 거짓말하는 목사라면, 큰 일에 관해서 거짓말하지 않을 거라고 어떻게 믿을 수 있을까? ‘목회자 후보생들에게’(Lectures to My Students)에서 찰스 스펄전은 존 제임스(John Angell James)의 말을 인용한다. “의를 전파하는 설교자가 죄인을 시험에 빠뜨리는 행위를 했을 때, 그의 회개가 그가 저지른 죄만큼 널리 퍼질 때까지 결코 많은 회중 앞에서 다시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제대로 물어야 한다. 과연 거짓말하는 목사가 변명과 정당화로 죄를 가중시키는가, 아니면 회개할 용기를 갖고 겸손하고 의롭게 책임을 지는가? 전자에 해당한다면, 그 목사는 사역에서 손을 떼게 해야 한다(딤전 5:20).회복의 길을 제공하라목회자가 회개하고 또 거짓말로 손상된 회중의 신뢰가 회복 가능하다고 판단된다면, 교회는 목회자가 원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있도록 회복의 절차를 제공할 수 있다. 그런 계획은 분명해야 하며, 단지 장로만이 아니라 모든 교인에게 투명하게 공개되어야 한다. 모든 거짓말 뒤에는 속임수를 유발하는 우상숭배가 숨어있다. 거짓말을 하게 만드는 것은 자아에 대한 사랑, 즉 나를 지키고 싶다는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나의 신분과 위치를 잊고, 대신 나 자신을 더 부풀리고 죄를 은폐하려고 할 때, 우리는 거짓말을 한다. 그러므로 거짓말이 들통난 모든 사람은 회복의 과정을 집행하는, 부름받고 자격을 갖춘 경건한 교회 지도자들에게 기꺼이 복종해야 한다. 무엇보다 기꺼이 빛 가운데 행함으로써 회개에서 오는 자유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정 죄에서 돌이켜 새롭게 된 순종의 자세로 돌이키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오로지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겠다는, 더 이상 나 자신을 의지하지 않겠다는 결단을 포함한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소망을목회가 주는 스트레스는 상상을 초월한다. 숫자를 가지고 성공 여부를 판단하고, 조금만 정체해도 당장 비난이 쏟아지는 문화에서 목회자라면 예외 없이 주변의 기대에 부응하는 목회의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수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예수님을 바라볼 때 목회의 압력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바라는 목회는 완벽하게 효율적이고 또 끊임없이 증가하는 사역이 아니다. 복음의 씨를 뿌리는 것은 목회자지만, 추수는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알기에, 겉으로 보이는 목회의 결과가 비록 아름답지 않아도 우리는 얼마든지 정직할 수 있다(고전 3:6-8).거짓말이 들통난 목사가 항상 목회의 자리로 복귀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구원을 앗아가는 죄는 있을 수 없지만, 죄로 인해 사역은 얼마든지 빼앗길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거짓말로 인해서 잠시 또는 영구적으로 사역에서 떠나게 된다고 해도, 그리스도의 용서는 자유롭고 충만하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용서를 갈구해야 한다. 죄를 버리고 다시 믿음으로 돌이켜 부활하신 주님의 영광스러운 약속을 붙잡는 것이 변치 않는 우리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요일 1:9).원제: Are Pastors Caught in Lies Disqualified from Minist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거짓말
목회자의스트레스
속임수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
by 고상섭
2022-10-20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P. Clowney, 1917-2005)는 Preaching Christ in All of Scripture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는 다양한 설교의 분야 중의 하나가 아니라, 설교를 해야 한다면 반드시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를 해야 한다고 못 박는다. 왜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전해야 하는가? 그 이유는 성경은 그 자체가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성경을 성경의 의도대로 읽는다면 자연스럽게 그리스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에베소서 1:9-10)성경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경륜, ‘오이코노미아’는 하나님의 경영이라고 번역해도 괜찮은 단어이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께서 계획하시는 목적이 있는데, 그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우주가 통일이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경 속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계획이 결국 그리스도 안에서 귀결된다는 것이다. 1. 나 중심이 아닌 예수님 중심으로 성경을 읽어라.엠마오 마을로 가던 제자들은 절망에 빠졌다.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라고 믿었는데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이 죽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해서 여전히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때 예수님은 절망에 빠진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누가복음 24:25-27)예수님은 제자들의 절망이 구약 성경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생긴 것이라 말씀하신다. 그들을 책망하신 이유는 구약 성경 안에 이미 있는 것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세와 선지자의 글은 구약의 율법서와 선지서를 말한다. 즉 모든 구약 성경은 메시아가 와서 고난을 받고 부활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24장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다. 거기서도 예수님은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 그리고 시편까지도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라고 말씀하신다.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누가복음 24:44)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이라 말하고 있다.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과 대화를 하는 중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5:39)라고 충격적인 선언을 하신다.성경은 영생을 얻는 책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관한 책이며,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참된 영생을 얻을 수 있음을 알게 해준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읽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리스도로 목표된 책이기 때문이다. 나의 개인적 적용이 먼저가 아니라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오늘날 포스트모던은 메타 네러티브를 거부한다. 그러나 큰 이야기에서 떨어져 나온 개인의 이야기는 시작과 끝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미궁 속으로 빠질 수밖에 없다.예수님과 하나님의 이야기는 내 인생의 이야기보다 더 크고 넓다. 창세기로부터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완성될 것이다. 내 인생은 더 큰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 안에 속해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을 때 “이 성경이 근본 나에 대한 이야기인가? 아니면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인가?”를 결정해야 한다. 나의 이야기로 읽을 때 성경을 단순히 개인적으로 적용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로 읽을 때, 내가 그리스도의 영원 전부터 계획된 하나님의 사람임을 깨닫게 되고 더 큰 이야기 속에서 내 인생의 소명을 발견하게 된다. 2. 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해석하라. 구약학자 트램퍼 롱맨은 그리스도 중심적 설교에 대해 마치 영화 ‘식스 센스’를 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식스 센스’는 앤딩이 놀라운데, 결말을 알고 나면 영화의 시작과 중간의 스토리를 모두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영화의 결말이 앞서 지나간 모든 장면에 빛을 비추어서 바르게 이해하게 해주는 것처럼, 성경도 그리스도라는 신약의 결말을 보고 나서 구약을 비추면 구약에서 희미하던 모든 것이 선명해진다. 신약의 빛으로 성경을 보게 되면 “이제, 당신은 무조건 그리스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지금 보고 있는 본문이 딱히 메시아 예언이나 그리스도를 전조하는 주요 인물 혹은 통정경적인 주제, 핵심적인 성경 이미지나 비유가 아니더라도 말이다. 이제 당신은 그분을 볼 수밖에 없다.”[1]신약의 빛으로 구약을 바라보게 되면, 율법의 요구에 대해 바른 이해를 가지게 된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율법을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그 율법을 모두 지킬 수 없는 죄인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 목사는 산상수훈을 설교하면서 “예수님은 우리를 산상수훈을 통해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산상수훈으로부터 우리를 구원하셨다”고 말했다. 우리는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죄인인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율법을 지키심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왜 우리가 왕처럼 부요할 수 있을까? 그분이 영적으로 철저히 가난해지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오직 그분이 애통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슬픔을 가누지 못 할 만큼 우시고 결국 어둠 가운데 죽으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땅을 상속하게 될까? 그분이 온유하셨기 때문에, 그분이 온전히 발가벗김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왜 우리가 채움과 만족을 누릴 수 있을까? 그분이 십자가에서 “내가 목마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2]구약에서 하나님이 언약을 맺으실 때 무조건적인 은혜인 것 같기도 하고 또 율법을 지켜야 하는 조건적인 약속인 것 같을 때가 있다. 선지서를 보면 하나님의 마음도 양갈래로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을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겠다고 선언하시다가 곧 인간의 죄악 때문에 심판을 선포하시기도 한다. 이런 하나님의 마음을 ‘하나님의 신적 정서’(Divine Pathos)라고 표현한다. 이 두 가지 딜레마를 하나님은 어떻게 해결하실 수 있는가?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신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예수님께서 울부짖으실 때, 우리는 그 답을 발견한다. 하나님과 그분의 백성 사이의 언약은 조건적인가 아니면 무조건적인가? 정답은 ‘둘 다’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그 조건을 성취하셨고,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하실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구약을 신약의 빛으로 이해할 때만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은 구약의 출애굽기를 신약의 빛으로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형제들아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바다 가운데로 지나며 모세에게 속하여 다 구름과 바다에서 세례를 받고 다 같은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그들을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 (고린도전서 10:1-4) 모세와 함께 이스라엘이 출애굽한 사건을 홍해에서 ‘세례를 받은’ 사건으로 묘사한다. 어린양의 죽음을 통한 출애굽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을 상징하는 것이다. 또 만나라는 신령한 음식과 반석에서 물을 마신 사건을 가리켜, 그리스도로 인해 먹고 마신 사건이라 설명한다. 예수님은 요한복음에서 자신을 하늘에서 내려 온 ‘생명의 떡’이라 말씀하셨다. 또 고린도전서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반석을 통해 물을 마셨다고 설명한다. 구약의 출애굽은 그리스도로 인한 구원과 오늘날의 성찬식과 연결된다. 이처럼 신약은 구약을 비추는 빛으로 작용하며, 희미했던 그리스도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 준다. 모든 성경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비추지 않으면 우리의 설교는 아마도 유대교 랍비의 설교와 차이점이 없을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모든 본문은 그리스도에게 까지 연결되어 있다. 찰스 스펄전은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께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며, 그리스도를 설교하지 않은 젊은 설교자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젊은이, 영국의 모든 자그마한 동네에도 그게 어디 있든 런던으로 통하는 길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가?” “예, 그럼요.” 젊은이가 대답했다. “성경의 모든 본문도 마찬가지로 성경의 수도로 통하는 길이 있다네. 그게 바로 그리스도일세. … 나는 아직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만난 적이 없네. 만에 하나 그리스도로 통하는 길을 품고 있지 않은 본문을 발견한다면, 나는 어떡하든 길 하나를 만들 것이네. 담벼락을 넘고 도랑물을 건너서라도 나의 주님께로 나아갈 것이네, 설교란 그 안에 그리스도의 향취가 나지 않으면 아무런 유익을 끼칠 수 없기 때문이지.”[3]모든 성경의 출발은 언제나 그리스도라는 종착점을 향하고 있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것은, 단순한 하나의 이론이 아니라, 성경을 하나님의 계시로 읽을 때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결론이다. 모든 성경은 그리스도께로 이어진다. 설교자는 그 길을 찾는 사람들이다. 모든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라!1. 팀 켈러, 채경락 옮김, 설교(두란노), 119쪽.2. 같은 책, 122쪽.3. 같은 책, 94쪽.
그리스도중심설교
복음설교
칼뱅: 고군분투하는 목회자의 가장 좋은 친구
by Leland Brown
2022-09-10
깊이 있는 성경 주석 및 확고한 개혁주의 신학과 관련해서야 많은 목회자가 장 칼뱅을 의지하겠지만, 장로들의 해임 투표 또는 주일 설교 몇 시간 후에 날아올지 모르는 무서운 내용을 담은 이메일과 관련해서도 칼뱅을 참고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신학 면에서 칼뱅을 친구 또는 영웅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조차, 칼뱅은 단지 위대한 신학자일 뿐, 사역에서 만나는 영적 전쟁과 고통에 필요한 자원을 제공하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 칼뱅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는 내내 반대에 직면했고, 죽기 고작 5년 전까지 제네바 시민도 되지 못했다. 칼뱅이 위대한 신학자였음 사실이지만, 동시에 그는 동포에게서 많은 고통을 겪으며 사역 대부분의 시간 동안 자신의 뜻을 관철하지 못하고 수많은 반대 속에서 고군분투한 목회자이다. 이런 사실을 기억하면, 목회 기간 내내 칼뱅이 사역에 필연적으로 수반되는 독특한 고난에 대해 많은 글을 썼다는 건 놀라운 일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뱅을 사역에 수반되는 다양한 시련과 현대 목회 사역에 관한 심오한 자원을 제공하는 인물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다. 가장 많은 고난을 받는 사람칼뱅에게 목회자는 핵심 훈련자(EIC. edifier-in-chief), 즉 교회를 세우는 하나님의 사역을 담당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훈련자로서 이 목회자는 또한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 사람(sufferer-in-chief)이기도 했다. C. S. 루이스가 쓴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에서 아슬란은 좋은 왕을 “전쟁에서 돌격할 때 가장 먼저 나가고, 퇴각할 때 가장 늦게 나오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칼뱅의 눈에 그리스도인은 흑암에 거하는 영적인 세력과 끊임없이 전쟁을 치르는 존재이다. 따라서 목회자는 그 전쟁에서 가장 먼저 돌격하고 가장 늦게 퇴각해야 한다. EIC로서 목회자는 당연히 가장 많은 고통을 받는다. 칼뱅이 생각하는 목회 속 영적 전쟁을 구성하는 두 가지 이미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목회자는 직분에 필요한 다양한 은사라는, 그리스도가 입혀주신 “갑옷”으로 무장되어 있다. 둘째, 목회자는 하나님의 군대의 군기를 든 “기수”의 역할을 맡는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을 앞에서 인도하는 그들은 마귀의 가장 맹렬한 공격을 받기 마련이다. ‘무장’으로서의 목회 은사 칼뱅은 사역을 위해 목회자에게 필요한 은사를 전투를 위한 무장으로 묘사했다. 그는 목사의 은사와 건전한 교리는 안수 전에 테스트를 거쳐야 한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주님께서 높은 직분을 주시기로 예비하신 사람들의 경우, 주님은 먼저 그들에게 직무를 수행하는 데 꼭 필요한 무기를 먼저 공급하신다. 결코 그들이 빈손으로, 또 준비 없이 오도록 하지 않으신다.”목사의 영적 은사는 그의 손에 들린 무기이다. 사역 준비는 바로 전쟁 준비이다. 따라서 어떤 목회 후보자도 필수 무기를 갖추지 않은 한, 결코 사역 현장에 들어서서는 안 된다. 목회 은사를 무장으로 설명한 후, 칼뱅은 이것을 주님 자신이 행하신 하나의 패턴이라고 말했다. “사도를 파송할 때 주님은 반드시 꼭 필요한 무기와 도구를 먼저 제공하셨다.”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칼뱅은 성령이 주신 말의 은사(gifts of speech)를 담고 있는 세 구절을 인용했다(눅 21:15; 24:49; 행 1:8). 즉 목사가 교회를 세우기 위해 은사를 행사하고 복음을 전할 때, 그들은 사실상 전쟁을 수행하고 있으며, 따라서 성령으로 무장해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이러한 은사는 목회 사역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필수 조건”이다. ‘기수’로서의 목회자 복음 전파를 거스르는 사탄과 싸우기에 목회자는 무장해야 한다. 고린도후서 10:3-4에 대한 칼뱅의 주석은 교화, 전쟁으로서의 사역, 그리고 목회적 고난이라는 주제를 모두 모아서 목회자라면 왜 필연적으로 고난을 겪는 수밖에 없는지, 그 이유를 보여준다. “전쟁의 무기”라는 구절에 대한 칼뱅의 주석은 길지만 인용할 가치가 있다.실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원한 전쟁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자신을 바친 사람이라면 사탄과의 휴전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며, 따라서 사탄이 가하는 끊임없는 괴롭힘을 당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보다 앞서 그리스도의 깃발을 높이 세우고 나아가는 사람은 말씀을 전하는 목사이다. 목사는 당연히 그 누구보다도 더 많은 사탄의 괴롭힘을 당하고, 더 무시무시한 공격을 받는다. 하나의 고난이 끝나면 여지없이 다른 공격이 시작하곤 한다. … 복음이 사탄으로 하여금 진노케 하는 불과 같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적 전투가 진행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주시는 무장을 의지하지 않고는 도무지 이런 싸움을 감당할 수 없다. 칼뱅은 복음 사역을 전쟁으로 묘사했다. 전쟁은 사역에 대한 “적절한 비유”이다. 구절 말미에서 그는 복음 사역이 전쟁인 이유를 설명했다. 그건 복음은 사탄의 분노에 “불을 붙이기” 때문이다. 칼뱅은 그리스도인 개개인을 향한 사탄의 활동에 대해 자주 썼지만, 여기서 그가 구체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신실한 사역자를 통해 이뤄지는 복음 전파를 향한 사탄의 분노이다. 목회라는 소명의 핵심인 복음을 통한 양육 사역은 복음 사업이 발전하는 것을 볼 때마다, 즉 신실한 목사가 제대로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볼 때마다, 새롭게 “전쟁을 위해 무장하는” 사탄을 화나게 한다. 따라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탄의 공격을 겪을지라도, 목사는 특별히 사탄의 목표물이 된다. 그건 다름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기수”이기 때문이다. 중세와 전근대 전쟁에서 기수는 군부대마다 가진 독특한 깃발을 들고 전투를 지휘하는 군인이었다. 분명히 칼뱅은 기수를 부대의 지도자이자 적의 공격에 가장 취약한 표적으로 이해했다. 부대의 깃발을 높이 들고 있기에 기수는 특히 더 적에게 쉽게 노출됐다. 더불어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불명예를 안겨준다는 데에는 적의 깃발을 뺏는 것보다 좋은 길이 없었기에, 기수는 자연스럽게 가장 중요한 공격 대상이 되었다.바로 이런 이미지를 활용해서 칼뱅은 목회자를 교회의 깃발로 복음을 높이 들고 복음 전파를 위해 신실한 마음으로 전진하는, 사탄의 눈에 가장 잘 띄는 지도자로 지정했다. 바로 이런 막중한 특권 때문에 목회자는 사탄의 공격을 가장 자주 받는 표적이 된다. 왜냐하면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고 그리스도에게 불명예를 안기는 가장 좋은 방법이 지도자를 파괴하는 것임을 사탄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고통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칼뱅이 단지 고통에 관한 경고만 주고 그친 건 아니었다. 그는 고통을 대비하고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서도 조언했다. 흥미롭게도 이 권고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만나는 시련과 관련해 그가 신자에게 준 권고와 확실하게 구분된다. 용기와 준비 고난받는 성도에게 칼뱅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라고 권고한 것에 반해서, 목회자를 향한 그의 권고는 고난에 능동적으로 대비하고 자신의 직분을 완수하는 데 필요한 용기와 과감성을 갖추고 있는지 깊이 생각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칼뱅은 지도자(elders)의 전제 조건으로 죽기까지 교리를 고수하겠다는 “변하지 않는 담대함”을 꼽았다. 앞서 인용한 고린도후서 10:3-4에 대한 칼뱅의 주석에서, 그는 또한 주장하기를 목사라면 “전쟁에서 용기와 담대함을 갖고 나아가야 하는데, 그 길 외에는 전쟁에서 싸우는 다른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했다.끊임없는 영적 싸움이 사역의 현실이기에 목회자가 되려는 사람은 모두 “그 무거운 짐을 지고 감당할 수 있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야 한다.” 사역은 항상 어려움과 고통으로 가득 차기 마련이고, 그러한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지, 자신의 능력에 대한 정직한 평가는 사역자로서의 소명의 진위를 검토하는 데에 필수적이다. 마음을 그리스도께 맞추기목회자라면 신실한 사역에 따르는 고난을 생각하는 동시에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재림과 지금 주시는 사랑에 마음과 생각을 온전히 둘 수 있어야 한다. 베드로전서 5:4에 대한 주석에서 칼뱅은 사역에 따라오는 다양한 낙담과 어려움을 열거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이 무너지지 않도록 하는, 그를 위한 유일한 치료법이 있다면, 그것은 그의 눈을 오로지 다시 오실 그리스도께 집중하는 것이다.”그리스도의 재림은 목회자에게 큰 보상을 가져다줄 것이며,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충성하는 그의 수고에 큰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칼뱅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바라보는 것이 ‘유일한 치료법’이라고 말하면서도, 또한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에도 눈을 맞추라고 권고했다. 요한복음 20장에 대한 주석에서 칼뱅은 목회자가 사람의 인정만 바란다면 결코 신실하게 섬길 수 없음을 증명한 후에 다음과 같이 주장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그의 마음을 온전히 지배하지 않는 한, 그게 어느 정도를 말하는가 하면, 그리스도의 사랑 때문에 자기를 잊어버리고 온전히 그리스도께만 헌신함으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할 수 있는 수준이다. 그러므로 그 수준에 이르지 못하는 한, 그 누구도 이 직분을 끝까지 인내하며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오로지 그리스도의 사랑을 바라보는 목회자는 사람이 주는 위안과 명성까지도 잊을 수 있다. 대신 사람이라면 누구나 갈구하는 위안과 명성을 앗아가는 목회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인내한다.칼뱅의 도움을 받자고군분투하는 목회자에게 칼뱅은 소중한 자원이다. 그가 보여주는 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아니라 인내를 가지고 앞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오늘날 복음주의 문화가 제공하는 리더십은 인기가 없다. 인기가 없거나 반대자가 많은 지도자는 뭔가 잘못하고 있거나, 또는 자리를 잘못 잡아서라고 가정하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칼뱅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옳은 일을 하는 목회자는 같은 장소에 계속 머물러야 한다고 말한다. 아무리 힘들고 인기가 없어도 신실하게 목회 현장에서 인내를 가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목회자에게 칼뱅의 목소리는 실로 듣기 힘든 칭찬의 목소리이다. 추가로, 칼뱅은 개인적인 부드러움과 확신에 찬 용기 사이의 적절한 균형을 지키는 것은 목회자가 신실함을 유지하는 데에 중요하다는 점을 지적한다. 제대로 귀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용기를 발휘하되 또한 동시에 교인을 향한 친절함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 기꺼이 고통을 겪으라는 칼뱅의 훈계는 오늘날 수많은 목회 리더십의 병을 고치는 치료제가 될 것이다. 현재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다가오는 미래의 복음주의 지도자가 직면할 상황까지 고려할 때, 고난의 길을 용감하게 또 동시에 부드럽게 견디라는 칼뱅의 균형 잡힌 권고가 지금보다 더 적절하게 다가올 수는 없을 정도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극적인 아이러니가 없다. 냉혹하고 상아탑 속 이론가로 가장 자주 희화화되는 신학자가 정작 곤경에 처하고 낙담한 목사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상담가가 될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당신에게 칼뱅이 단지 훌륭한 신학적 자료로만 남지 않도록 하라. 사방에서 조여오는 압박에 괴로울 때도 신실하고자 발버둥 치는 당신이라면, 지금 칼뱅이 내미는 손을 잡고 그의 도움과 인도를 받길 바란다. Editor’s note: 이 글은 Leland Brown, “The Standard-Bearer: Pastoral Suffering in the Theology of John Calvin,” Themelios 47, no. 2 (August 2022)을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John Calvin: The Struggling Pastor’s Best Frie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칼뱅
말씀의사역자
목회자의소명
목회자칼뱅
목사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by 김형익
2022-07-10
제레미 토드의 글 두 개를 읽었다. “그렇다. 목회자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와 “목회자는 꼭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정말로?”이다.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그리고 나도 이 주제에 대해서 쓸 생각이 있었기에 “마침 잘 됐군” 싶었다.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가 기본적으로 공감하겠지만, “목회자는 친구가 필요하다.” 목회자의 자리는 외롭고 고립되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는 자리이다. 아무리 종의 리더십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목회자는 지도자의 자리이고 그 직분은 맡겨진 양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 직분임은 부인할 수 없다. 회사의 CEO이든, 목회자이든, 지도자의 고립은 자연스럽게 은밀한 범죄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목회자들의 탈선과 범죄는 상당 부분 이 고립과 무관하지 않다. 고립은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인간의 본래 삶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죄가 하나님과의 단절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과 소외와 고립을 초래했다. 커트 톰슨이 말하듯이, 이 고립의 끝은 지옥이다. 이 점에서 목회자가 자신도 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혼동할 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든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유교적 전통 문화와 질서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우리나라 목회자들의 경우에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가 본래 양이었으며 언제나 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영적,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창조하신 인간은 관계 속에서 건강과 샬롬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신 것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창 2: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셨고 거기서 당신의 구원과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기를 기뻐하셨다(엡 1:23; 2:22). 친구가 없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엡 2:19).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경험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공동체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고독과 고립이 대세인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은 가족이 있어서 안전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모든 점에서 알고 공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이 혈연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속과 유대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상적이겠지만, 언제나 현실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가감 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쏟아낼 수는 있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하기는 쉽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 부모가 가진 삶의 무게와 근심을 어떤 자녀들이 오롯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부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때로는 그조차 제한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족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알고 이해한다. 자녀들이 성숙해지면서 때로는 부모의 연약함을 알고 보듬어 주는 자리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완전히 알고 서로의 짐을 동등하게 져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교회라는 가족은 어떤가? 목회자를 포함하여 교인들은 가족 구성원인 서로를 친밀하게 알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들은 서로를 돌본다. 목회자 역시 교인들의 돌봄을 받는 존재이다. 교회라는 가족은 목회자와 그 가정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돌보고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목회자는 교인들의 환대도 경험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자신이 교인들에게 베푸는 환대 이상으로 교인들의 환대를 경험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은 서로를 안다. 가족 구성원 중에 공인이 있을지라도, 가족들은 그를 공인으로만 알고 공인으로 대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집에서도 목회자는 아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목회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만 교인들을 만나고 교인들과 관계 맺음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목회자는 한 사람의 경건한 어른으로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인들을 만날 수 있고 얼마든지 그런 관계 맺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가족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세세히 알고 그가 느끼는 연약함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일일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의 연약함을 아는 교인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영적 가족으로서 교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그들 몫의 사랑이다. 자, 그럼 목회자가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나의 대답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친구를 가질 수 있지만, 이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레미 토드가 목회자 초년생일 때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지금도 젊은 목회자들에게 그렇게 조언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 목회자의 아내들에게도 “교인들 중에서 친구를 맺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속 깊은 이야기를 소화하고 감당할 수 있는 교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마음을 열고 나눠주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계속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가 부모로서 가지는 무게와 근심을 자녀들과 다 나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눌 뿐이다. 그리고 이 나눔은 자녀들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눅 12:4; 요 15:14).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서로 동등하게 그리고 허물없이 편안하게 모든 속 이야기를 다 나눌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가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교인 중 어떤 사람들이 목회자의 ‘특별한’ 친구가 될 때, 목회자는 목회적 돌봄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줄 수 있겠는가? 목회자가 교인들과 가지는 관계에서의 친소(親疏)의 요소는 전체 교인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시험 거리가 되고 교회의 잠재적인 어려움의 요소가 될 것이다. 교인들 중에는 목회자와 친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고, 교인들 안에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시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목회자는 특정한 친구들을 편애함으로써 목회자로서 자신의 직무를 놓칠 수도 있다. 교인들은 누가 목사의 친구인지 알 때, 그 사람과 편안하게 그리고 사심 없이 편안한 관계 맺음을 할 수 있을까? 목회자를 꼭 아버지에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가 특정한 자녀와 친한 것이 그렇지 않은 다른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좋기만 할 수는 없다.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 안에 아비와 청년과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요일 2:14). 아비에 해당하는 경건한 어른들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장로들일 수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목회자가 자신들의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장로 혹은 경건한 어른들은 목회자의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목회자가 자신의 육체적, 정서적, 영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장로 직분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사역을 마치기까지 크게 넘어짐 없이 목회와 저술과 강연의 그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장로들 덕분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올소울즈교회의 장로들은 평생 독신 목회자였던 존 스토트에게 건강한 책무(accountability)의 관계 속에서 좋은 친구의 역할을 감당해 준 것인데, 이것은 한국 교회의 당회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연약함을 노출할 수 있어야 한다. 래리 크랩이 말한 대로,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목회자가 여느 교인들과 동일하게 교회 안에서 친구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 목회자는 외로운 자리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그는 친구가 필요하다. 교회 안의 경건한 어른들은 그 역할을 능히 그리고 기꺼이 감당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언제나 주어지지는 않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래서 목회자 부부의(그가 독신이 아니라면) 건강한 관계는 너무나 중요하다. 목회자 부부야말로 서로에게 “베프”가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 목회자는 동료 목회자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런 친구를 만들어야만 한다.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홀로 목회를 하는 작은 교회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좋은 친구들과 공동체를 경험할 때, 그들은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더 건강하게 목회자에게 맡겨진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을 심방할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교회에서 당신이 평생 누릴 영혼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려면 작은 모임에 참여해야 하고 본인이 자신을 알려주려는 노력을 기꺼이 해야 한다고. 비록 제한적일 수는 있겠지만, 나 자신도 목회자이자 한 사람의 교인으로서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목회자의친구
목회자의고립감
목회자의외로움
날마다 조금씩 꾸준히 거룩
거룩에 이르는 바른 길
by Josh Moody
2022-07-06
기사 예고: 내일(목) J. C. 라일의 명저 거룩을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에서 소개할 예정입니다. 19세기 초, 복음주의 사역자들이 정기 모임을 만들어 어떻게 하면 거룩하게 성장할 수 있을지 함께 토론했다. 모임을 이어가면서 이 모임(Eclectic Society)에는 존 뉴턴과 찰스 시므온 같은 유명한 사역자들도 참여했다. 이 단체는 폭넓은 주제를 다루었는데, 그중에는 “분열의 본질, 해악, 해결책은 무엇인가?”와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교도들의 계획에 맞서기 위해 현재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도 있었다. 1812년 6월 22일, 이 단체는 이런 질문을 던졌다. “은혜 가운데 성장한다는 것에 관하여 성경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 질문에 프리체트 목사(Rev. C. R. Pritchett)는 이렇게 답한다.1. 은혜 안에서의 성장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 있다. 2. 이것은 그리스도와의 친밀하고 살아 있는 연합에서 비롯된다. 3. 이것은 성령의 지속적이고 즉각적인 주도로 만들어지고 계속된다.우리가 거룩(holiness, 성결)을 주제로 이런 비슷한 대화를 나눈 게 언제였을까? 우리 교회들이 윌리엄 로의 Serious Call To A Devout And Holy Life(경건하고 거룩한 삶으로의 진지한 부름)에 견줄 만한 거룩으로의 권면을 마지막으로 들은 것이 언제였을까? 세속 시대에 살고 있다 보니 이해할 만은 하지만, 우리가 요즘 집중하고 있는 주제는 ‘어떻게 문화에 참여할 것인가’인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우리가 성품의 온전함에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는 것만 같아 염려스럽다. 이제 우리는 다시 거룩을 이야기해야 한다.어떻게 하면 교회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을 분명하게 권면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성숙한 성품을 기를 수 있을까? 여기 다섯 가지 방법이 있다.1. 정확한 정의부터 챙겨라.거룩에 대한 사람들의 그릇된 생각에는 여러 가지 변주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은 바리새파 율법주의와 관련 있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거룩이 마치 주사 한 방 맞으면 얻게 되는 영적 경험이라고 생각한다. 거룩이란 따분하고 편협한 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히드라의 머리만큼이나 많은 거룩의 정의에 대한 혼란상을 해결하려면 거룩에 대한 바른 생각을 길러야 한다. 명확하고 성경적인 정의가 도움이 될 수 있다. 거룩은 하나님을 위하여 구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2. 복음에서 시작하라.존 오웬은 그리스도인들이 거룩에 관해 가지고 있는 가장 나쁜 생각의 하나는 우리의 출발점과 관련이 있다고 썼다. 우리는 행동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으로 우리 삶에서 하신 일과 함께 시작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떨어져서는 거룩할 수 없다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우리는 먼저 거듭나야 하고, 새로워져야 하고,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나야 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하다고 선언 받아야 한다. 반드시 거듭남이 출발점이어야 한다. 이런 이유로, 당신이 목회자나 교회 지도자라면 당신의 교회 공동체 안에 거룩의 진일보를 가져오기 위해서 내디뎌야 할 가장 중요한 단계는 복음을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거룩과 씨름하는 이유는 그들이 실제로 그리스도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구별된 삶을 살기 전에 먼저 살아남을 받아야 한다.3 생각에 집중하라.당신이 거룩에 대해 가르친다면.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생가해 보라고, 그들이 집중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집중해 보라고 격려하라. 우리의 행동은 우리가 애정을 쏟는 것들을, 우리의 감정이 가닿는 것들을, 그리고 우리의 이성이 향하는 것들을 따라가기 마련이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생활이 줄어드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며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줄어드는 것 사이에는 상관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내가 많은 시간을 거룩하지 않은 것들에 집중한다면 거룩하게 성장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우리의 관심이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서 멀어질 때 거룩은 쇠퇴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인도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것들과 복음의 경이로운 것들과 하늘의 영광스러운 것들을 묵상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도록 격려하라.4. 죄를 그 뿌리부터 도려내라. 때로는 최고의 성경 선생들도 앞의 세 가지만 말한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거룩을 기르는 네 번째 방법은 우리가 “죄 죽이기”(mortification)라 부르는 것이다. 생각과 행동으로 죄를 일삼아 틀이 되어버린 습관과 버릇을 반드시 잘라내야 한다. 마틴 로이드-존스는 뿌리까지 파 내려간다는 이미지를 사용했다. 잡초를 제거하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잡초를 잘라버리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면 잡초가 다시 나온다. 다른 방식은 잡초를 그 뿌리부터 파내는 것이다. 우리 죄를 뿌리부터 파내려면, 우리는 이 질문을 던져야 한다. “이 죄는 왜 이토록 나를 끌어당기는 것일까? 이 죄를 포기하기가 왜 이토록 힘든 것일까?” 예를 들겠다. 음욕과 중독 뒤에는 흔히 고통이 따른다. 포르노나 마약, 술로 자가 치료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 교인을 상담하고 있다면, 그가 하는 말에 귀를 기울여라. 깊이 파 내려가서 그 교인의 뿌리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찾아내라. 그냥 “왜”라고 질문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질문하면 겁을 먹는다. 당신이 찾아낸 것들을 함께 나누라. “화가 나 있는 것 같네요.” 교회 지도자로서 당신은 그 뿌리에 성경적이고 목회적인 해결책들을 적용할 수 있다. 5.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옷 입어라.바울은 이 단순한 비유를 반복해서 드는데, 그만큼 유익하기 때문이다. 새 사람이 되었으니 그에 어울리는 옷을 입으십시오. 이 말이다. 당신의 진짜 신분에 어울리는 성품의 옷을 입으십시오. 이 말이다. 거룩에 대한 한 가지 흔한 오해가 있다: 나는 거룩하지 않아. 이건 거룩한 척하는 것일 뿐이야. 이건 가짜야. 그렇다. 거룩은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빚어져 가는 것이다.그러니 그리스도를 날마다 닮아가는 옷을 입어라. 성령께서 우리의 성품이 차츰차츰 우리 구주를 더 닮아가도록 일하신다. 언젠가 우리가 주님 앞에 거룩하게 서게 될 그날까지. 온전히 그분 앞에 서게 될 그날까지. 원제: 5 Ways to Pursue Holines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거룩
성결
그리스도의성품
죄죽이기
거룩의정의
목사는 꼭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정말로?
by Jeremy Todd
2022-07-04
[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에 이은 두 번째 글입니다. 두 편의 글이 여러분의 생각을 자극하고 넓히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팟캐스트, 블로그 시대가 열리기 전에 라디오가 있었다. 폴 하비는 라디오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이었다. 60년 가까이 하비는 편안한 목소리와 분명한 전달력으로 청취자들에게 다가갔다. 그가 들려주는 에피소드에는 뉴스와 논평과 흥미로운 인간사가 섞여 있어 정보와 함께 재미도 선사했다. 내가 특별히 재미있게 청취한 그의 라디오 방송 중에는 5분짜리 방송 “나머지 이야기”도 있었다. 그가 들려주는 (주로 유명인사와 관련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소소한 역사적 사실을 듣고 놀랄 때도 자주 있었다. 그는 늘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이 말로 끝을 맺었다. “자 이제 그 이야기의 나머지를 여러분은 알게 됐습니다.”내가 전에 쓴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를 아내와 함께 다시 살펴보다가 폴 하비의 이 멘트가 떠올랐다. 앞서 쓴 글에서 내가 밝힌 입장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지만, 이제 그 나머지 이야기를 할 때가 된 것 같다. 목회는 외로울 수 있다그렇다. 목회자에게는 또 목회자 부부에게는 교회 안에 가까운 친구가 있어야 한다. 이 말은 저절로 가까운 친구가 생기는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말은 문장으로 쓰기도 어렵거니와 현실에서는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교회 안에서 우애를 나누기란 목회자와 목회자 가족에게는 매우 어려운 일일 때가 많다. 외로움은 사람을 절망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사람과 그가 하는 일을 떼어 놓고 생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구체적인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외로움은 목회자과 교인들이 사람을 그의 지위와 (종종 의도하지 않게) 떼어 생각하지 못하는 데서 비롯될 때가 많다. 이런 현실은 목회자 아내의 삶에서도 다르지 않다. 모든 우연한 만남, 점심 약속, 커피 모임 및 교회 밖 행사가 목사와 교인이라는 관계의 우산 아래에서 일어난다. 이런 만남 대부분은 필연적으로 교회 이야기로, 다시 말해 교회의 사역, 프로그램, 또는 교회 정치 관련한 이야기로 회귀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대화가 벽돌과 모르타르가 되어 결국 여리고를 둘러싼 성벽처럼 단단한 담장을 만들어 진정한 우정을 가로막는다. 교회를 화제로 나누는 대화를 하나님의 은혜를 풍성히 받고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한 사람들, 택함 받은 사람들, 그리고 양자로 입양된 사람들을 주제로 나누는 대화와 혼동하면 안 된다. 교회의 사업에 관해 토론하는 것과 예수님과 그의 신부에 대해 토론하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단지 교회라는 기관에 관해서만 논의하는 것도 때때로 필요하지만, 그런 대화는 우리 영혼을 고갈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지위라는 이분법을 설정함으로써 진정한 우정을 쌓을 수 있는 가능성을 멀어지게 할 수 있다. 교인들에게, 목사는 있는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그대로의 한 사람이 아니라 직책을 맡아 할 전문가로 보일 수 있다(친구가 훨씬 적다). 반면에, 예수님에 대한 대화와 사람들에 대한 그의 사역은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을 중심으로 하는 대화는 목회자의 전문성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진 우정의 기초를 제공한다.교인의 눈에 목사가 (꼭 친구까지는 아니더라도) 있는 그대로의 한 사람으로 보이기보다는 목회자라는 직책을 맡은 전문가로만 보일 수도 있다. 반면에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일에 대한 대화는 생명을 주는 에너지를 제공하고 영적 친밀감을 키우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나누는 일치를 돈독하게 한다. 이러한 진실들에 중점을 두고 나누는 대화는 목회자라는 직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인격 위에 세워갈 우정의 기초가 된다. 깊은 우정은 보장된 게 아니다 우정에는 다양한 수준의 친밀감이 따른다. 단지 표면에서 노는 수준이 있고, 또 어떤 우정은 공통의 이익과 바람, 상호 신뢰에 터하여 자라기도 한다. 모든 우정이 다 나름 중요하지만 우리 목회자가 바라는 깊은 수준의 우정은 매우 드물다. 목회자가 섬기도록 부름 받은 교회가 깊은 우정을 바라는 목회자 가족의 갈망을 채워주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실이 교인들이 목회자에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교회 안에 우정이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교인들이 당신이 바라는 수준의 우정에 대한 개인적인 갈망을 충족시키지 못할 수도 있다. 설혹 그렇다고 해도, 목회자로서 우리는 우리의 좌절감을 그들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우정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달라고 주님께 말씀드리되,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주께서 응답하지 않으실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아마도 하나님은 당신이 은혜로 허락하신 수준에서 우리가 자족하기를 원하실 것이다. 그럼으로 우리의 관계가 좀 더 성숙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훈련시키려는 것이다. 깊은 우정에 대한 우리의 갈망은 한두 사람을 통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교인 전체라는 집단을 통해 충족될 것이다. 예수님이 더 가까운 친구이시다잠언의 저자가 쓴 것처럼, 예수님이 이런 친구다. 주님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알고 또 채워주는 친구다. 분명하고 단순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친구 되시기에 충분하다.잠언 저자의 이 말을 기억하라. “친구를 많이 둔 사람은 해를 입기도 하지만 동기간보다 더 가까운 친구도 있다”(잠언 18:24) 예수님이 바로 그런 친구이시다. 그분은 우리의 가장 깊은 갈망을 아시고 또 채워주시는 친구이시다. 이건 분명하고 간단한 사실이다. 예수님으로 충분하다. 욕심 부리지 말라.하나님은 언제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하게 채워주신다. 하나님의 복을 받는 데 방해가 되는, 인간을 의지하는 관계의 벽을 세우고 싶은 우리의 죄성에 맞서 싸우자. 오직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친밀함과 인정을 교회가 줄 수 있다고, 교인이 줄 수 있다고 착각하지 말자. 사람과의 우정이 살고 죽는 것도 결국은 다 예수님과 맺는 수직적 관계에 달려 있다. 원제: Pastors Should Have Friends in Church. Do The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예수님과의관계
친구욕심
과욕
우정
외로움
외로움의뿌리
영적친밀감
진정한친구는예수님뿐
교인에게뒤통수맞지않기
그렇다. 목회자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
by Jeremy Todd
2022-07-01
[7월의 토론: 목회자에게 ‘친구 같은 교우’는 가능한가? 적절한 질문이기는 한가?]자신이 목회하는 교회 안에 ‘친구처럼 지낼 수 있는’ 교인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단, 전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을 교회 공동체의 성원 모두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하겠지요. 그러니 결국 목회자의 ‘친구 같은’ 교우는 특히 한국 교회의 현실에서는 불가능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그렇다.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는 미국 목회자의 글입니다. “친구”라는 말에 담겨 있는 의미 자체가 우리와 굉장히 다른 문화에서 목회하는 이의 글인 것이지요. 그래서 이 글은 말하자면 “비판적 읽기”를 더욱 요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아예 “목회자에게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로, 제목에 물음표를 달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글쓴이에게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접었습니다.) 개인주의 문화가 지배하는 미국에서 “친밀한 관계”를 갈망하는 미국 목회자의 마음에 성급하게 동화되거나 공감을 표한다면 자칫 오독에 빠지지 쉬운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오독에 기초한 잘못된 적용이나 주장은 (탱자에게는 미안한 비유지만) 귤을 탱자로 만들 것입니다. 애초에 “관계” 중심의 문화가 강한 데가 한국이라면, 이 글은 어쩌면 우리에게는 반대의 논의를 촉발하는 부싯돌의 역할만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입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목회자에게도 외로울 자유가 있어야 한다!/있어야 하지 않을까?!” “목회자에게 혼자 있는 시간을 대폭 허하라!/허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을 비판적으로 읽고, 우리 교회의 현실을 천착한 반응과 기고가 복음과도시에 쇄도하기를 기대합니다. 여러 분의 글(“우리의 글”)을 환영합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방에 있으면서도 혼자라고 느낀 적이 있는가? 고독과 외로움은 가장 외향적으로 보이는 목회자조차도 흔하게 느끼는 괴로운 감정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하나님의 양 떼를 치도록 부름 받은 사람도 돌봄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막 목사가 되었을 때 나는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한 조언이었지만, 그건 내가 느끼던 고립감과 절망감을 더 심화시켰다. 나는 가까이 지내면서 일상을 나누는 관계를 갈망했다.교회를 가족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우리는 함께 예배하고, 함께 기뻐하며 축하하고, 또 함께 어려움을 헤쳐 나간다. 교회 가족은 우리가 잘할 때에도 또 못할 때에도 다 지켜보고 있고, 그건 당연한 것이다. 목회자가 교회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꺼려한다면 어떻게 교인이 교회를 가족으로 여기기를 기대하겠는가? 이런 필요를 인정하면서 차차 사역에 대한 나의 전반적인 관점과 경험이 바뀌었다. 목회자에게 교제가 필요하다는 점에 있어서 다음 네 가지를 이해하게 되었다.1. 목회자도 교인이다당연한 말일지 모르지만, 교회에 고용되었다고 해서 교인 자격에서 벗어난 건 아니다. 직분으로는 목회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다른 교인들과 동일한 교우로서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공동체에 속한다. 누가는 교회를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쓰는” 신자들로 이루어진 한 몸이라고 말한다(행 2:42). 그리고 사도들도 그 교인에 포함된다. 사도행전 전반에 걸쳐 묘사된 친밀한 공동체는 멀리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이루어진다. 목사와 그 가족은 단순한 상담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를 더 많이 알아가고 돌보기를 진정으로 원하는 친구이다. 목사는 회중을 “나와 그들”이 아니라 “우리”로 보아야 한다. 2. 교인은 서로를 안다공동체 생활을 하려면 다른 사람이 내 삶에 들어오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이 바로 이런 본을 보여주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제자들은 그를 멀찍이서 따르지 않았다. 그들은 아예 예수님의 삶 속으로 초대되었다. 이러한 개념은 일반 교인들과 분리되어 있거나 교인들의 관찰 대상이 되고 있다는 느낌이 드는 목회자와 그 가족에게는 어려운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가족이 되려면 단지 “무대 위에 서 있는 사람”(stage persona) 또는 소셜 미디어 속 과장된 모습을 넘어 진짜 나의 모습을 알려주고 서로 알아가겠다는 진정한 노력과 열망이 있어야 한다. 알기 위해서는 알겠다는 의지가 먼저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결혼을 생각해 보자. 신혼 기간도 좋지만, 결혼생활을 몇 년 이어가면서 경험하는 친밀감과는 비교할 수 없다. 목회도 마찬가지이다. 교회에 부임하고 처음 몇 개월은 종종 이런저런 모임으로 바쁘겠지만, 그건 다 표면적인 관계일 뿐이다. 진정한 친밀감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고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하나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대답했다[눅 9:20]. 예수님과 보낸 시간이 많았기에 가능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제대로 알기에는 여전히 갈 길이 멀었다.깊은 관계를 갈망한다면, 의도적으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한다. 어떻게 그게 가능할까? 당신은 교인을 집으로 초대하고, 교인 집으로 가고, 당신의 취미에 교인을 부르고 또 다른 사람들을 당신이 즐기는 활동에 참여하도록 권유하고, 또한 그들과 진정한 대화를 나누고 있는가? 3. 공동체는 연약함마저 노출하게 한다목회자는 종종 공동체의 중요성을 설교는 하지만 실천은 못한다. 진정한 공동체는 연약함(vulnerability)의 노출까지 요구한다. 동네 카페에서 눈물 고백을 하라는 게 아니다. 그러나 누군가 당신을 위해 어떻게 기도할까 물으면, 진짜 기도제목을 나누라. 자존심 때문에 연약함을 숨겨서는 안 된다. 십자가에 못 박히기 전날 밤에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겟세마네에서 함께 기도하자고 청했다. 제자들은 결국 잠이 들었지만, 예수님은 어쨌든 가장 힘든 시간에 제자들에게 함께 기도하자고 요청하셨다. 진짜 연약함은 기도 너머로까지 확장될 수 있지만, 기도 없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진짜로 도움이 필요했을 때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진지한 요청을 한 마지막이 언제였는지 혹시 기억하는가? 4. 목회자도 돌봄을 받아야 한다 최근에 한 교인이 우리 가족을 위해 식사를 준비하겠다고 했다. 우리 집에 무슨 급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녀의 제안은 그냥 사랑에서 나온 친절이었다. 그러나 자존심 때문에 나는 그녀의 제안을 거절했다. 고맙게도 그녀는 나를 만났을 때 신속하고도 또 꼭 필요한 책망을 해주었다. 그녀는 내가 자신의 가족에게 베푼 섬김에 감사했고, 동시에 이번 일을 자신이 내게 베풀어야 할 하나의 섬김의 기회로 보았다는 말을 솔직하게 했다. 교인이 베푸는 진정한 환대를 거부함으로써, 양 떼에게야 끊이지 않는 보살핌이 필요하지만 우리는 그런 돌봄이 필요하지 않다는 메시지를 본의 아니게 전달할 수 있다. 목회자로서 우리는 교인들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만큼, 우리도 그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기꺼이 인정해야 한다. 하나님은 목회자의 필요가 믿음의 가족인 교인에 의해 충족되기를 원하신다. 예수님도 돌봄을 받으셨다예수님은 이 땅에서 다른 사람들을 섬기고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충실히 가르치셨으며 동시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친절과 환대와 격려를 받으셨다. 자신이 가르치고 보살펴 준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나누셨다.예수님의 모범이 우리로 하여금 겸손하게 다른 사람들의 돌봄을 받아들이도록 만들기 바란다. 우리의 삶을 교인에게 맡기고, 우리도 그들처럼 두렵고 불안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자. 하나님께서 오로지 은혜로 우리에게 맡겨주신 하나님의 가족과 하나 되기 위해 더욱 더 힘차게 노력하자. 원제: Yes, Pastors Should Have Friends in the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외로움
친구
목회자의외로움
공동체의중요성
연약함의노출
겸손함
깊은관계
관계의갈망
교회가족
교회개척 첫 5년에 만들 좋은 습관 열 가지
by Taylor Burgess
2022-06-19
크로스 커뮤니티 교회가 시작되고 이제 5년이 지났다. 교회개척에 참여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교회개척 5년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것이다. 목회자의 사역 보장 기간은 짧아지고 목회자가 탈진하는 시대다. 나는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는다.우리 세대는 건강한 지도자가 이끄는 건강한 교회에 대한 요구가 절박한 세대이다. 개척교회 사역 첫 5년 동안 만드는 습관이 앞으로 10년의 우리 모습을 만들 수도 있고 우리를 망가뜨릴 수도 있다. 이 중대한 요구에 따라 교회개척 첫 5년을 하나님의 은혜로 어떻게 헤쳐 나갈 수 있는지, 그 핵심 열 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1. 생명력 넘치는 경건 생활역동적이고 매력적인 성경강해 이상으로 당신이 교회에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력 넘치며 만족을 누리는 마음, 그 이름의 영광을 위한 열정으로 타오르는 마음이다.목사들이여, 날마다 주님을 찾으라. 말씀 안에서 주님을 찾으라. 기도하면서 주님을 찾으라. 금식과 침묵과 고독 속에서 주님을 찾으라. 조지 뮬러가 자신의 경건의 삶에 대해 얘기했듯이, “주 안에서 행복한” 영혼을 갖는 것을 하루 중 “가장 중요하고 우선하는 일”로 삼으라. 2. 건강한 가정교회개척 1년 차에 레이 오틀런드(Ray Ortlund) 목사가 한 이 말을 들었다. “목사의 결혼생활은 그의 복음설교만큼이나 중요하다. 그의 결혼생활이 곧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결혼생활은 움직이는 복음이다. 첫 번째 사역의 장인 가정에서 실패하면 두 번째 사역의 장인 교회에서도 온전하게 사역자의 자격을 유지하지 어렵다. 목사들이여, 당신의 가정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당신은 목사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단히 의도적인 노력이 요구되는 일이겠지만 이를 위해 당신의 가정에 최선의 시간과 에너지를 쏟으라.3. 신실한 친구들예수님에게는 친구들이 있었다. 바울도 친구들이 있었다. 찰스 스펄전도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너무나 많은 목사들에게 친구가 별로 없거나 전혀 없다.목사들이여, 당신에게는 당신을 격려하고 도전하고 책임을 지우기도 할 친구가 필요하다. 당신을 우러러보지도 않고 “사역” 이야기를 하지 않고서도 당신과 세 시간은 너끈히 보낼 수 있는 친구들이 필요하다. 교회개척은 고독과 낙담의 여정이 될 수 있다. 친구 없이는 오래 버틸 수 없다.4. 규칙적인 휴식의심의 여지없이, 교회개척에는 기꺼이 열심히 일하겠다는 의지가 필요하다. 그러나 휴식은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인간임을 일깨워 주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목사들이여, 쉬는 날을 준수하라. 휴대전화를 끄고 낮잠을 자라. 좋은 음식을 먹고 영화도 보라. 유익한 책을 읽고 취미 생활에 흠뻑 빠지기도 하라. 이렇게 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절대 죄의식을 갖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휴식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에서 얻은 힘으로 일을 한다. 안식일의 원리를 기억하라! 그리고 이를 거룩하게 지키라.5. 훈련과 경계지속가능한 생활 규칙을 설정하고 따르도록 하라. 교회개척 초반에는 예상치 못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혼란스런 상황이 발생할 수 있다. 일정을 당신이 통제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이 주도하게 될 것이다. 당신의 배우자와 핵심 리더들과 함께 일정과 해야 할 일에 대해 지속해서 의논하라. 자신의 한계를 알고 기꺼이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당신이 하기로 한 일에 마음을 쏟고, 당신이 감당할 수 없는 일은 떠맡지 말라.6. 리더십 개발“론 레인저”(Lone Ranger, 서부영화에서 홀로 서부를 누비며 사람들을 돕고 악과 싸우며 정의를 지키는 외로운 영웅_역주) 사역은 건강하지 않을뿐더러 성경적이지도 않다. 슬프게도 많은 개척교회 목사들이 장로나 리더들을 세우지 않음으로써 무의식적으로 자신을 교회의 중심으로 만들어 건강한 교회 공동체의 방해물이 된다.목사들이여, 혼자서 짐을 다 져서는 교회가 부흥할 수 없다. 리더들을 세우고 그들을 인정하고 치하하라. 중대한 책임을 그들에게 기꺼이 위임하여 중요한 결정의 부담을 함께 나누어라.7. 연구시간의 확보끝 모를 요구사항의 연속인 개척교회에서 연구 시간을 확보하기란 정말 어렵다. 연구시간을 준수하라고 요구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러니 당신 스스로 연구시간을 확보하고 지키기 위해 애써야 할 것이다.연구시간을 방해받지 않으려면 당신 일정에 표시해 놓으라. 이 시간을 교회 리더들과 회중과 가족들에게 말해 놓으라. 열매 맺는 말씀사역을 위해서는 충분한 준비 시간이 필요하다. 8. 의도적인 단순함개척교회는 즉각적인 변화에 대한 열망 때문에 정신없이 분주한 게 다반사다. 그러나 이는 이제 막 시작하는 교회의 건강을 해치는 가장 큰 위협의 하나이다. 조심하지 않으면 당신의 사역은 무르익지 못한 채 너무 과하게 확장할 수 있다. 어떤 일을 시작하기에 앞서 동역자들과 함께 그 일을 실행할 것인지 하지 않을지 명확한 틀을 세우고, 교회개척 첫 5년 동안 자를 것은 자르도록 하라. 그리고 이 원칙을 고수하라.9. 새 가족을 맞이하는 건강한 절차건강한 교회의 궤도를 걷는 최고의 방법 중 하나는 교회의 성원이 되는 절차를 탄탄하게 설계해 놓는 것이다. 이상적인 것은 모임을 단계별로 또는 그룹별로 나누어 교회의 이념, 정책, 사명, 비전, 가치, 전략을 설명해 주고, 성경의 기본 진리에 대해 가르치는 것이다. 앞으로 교회의 일원이 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복음에 대한 이해, 개인적인 간증을 들을 수 있는 만남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나중에 적절하다고 판단될 때는 다른 신실한 교회를 추천해 줌으로써 주의 백성이 다른 곳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데 쓰임 받도록 기쁨으로 보내주어야 한다.10. 견딤과 오래 참음때때로 교회개척이 불가능한 일처럼 느껴지고 무기력증이 찾아올 수도 있다. 반대자들의 가차 없는 공격이 마음을 어지럽히고 낙심하게 만든다. 사람들이 “잠수를 타더니” 떠나 버린다. 당신과 당신의 가족, 당신의 의도, 그리고 당신이 최선을 다해 섬기고자 하는 교회를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당신은 점점 지치고 싫증이 날 것이다. 어쩌면 가까운 친구들을 잃을지도 모른다. 실패하고 포기하고 싶은 날도 올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이여, 포기하지 마라. 당신을 부르신 이는 신실하시며 당신이 겪는 모든 일을 알고 계신다.언젠가 내 아버지께서 내게 써 주신 편지에 이런 글귀가 있다. “네가 홀로 있게 된 그때에도 너는 절대 혼자가 아니란다. 하나님께서 네 곁에 계신단다.” 당신은 혼자가 아니다. 그러니 그 길을 계속 가라. 나는 이제 5년이 지났고, 주님이 원하시면 35년을 더 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와 성령님의 능력을 힘입어 오래도록 사역하는 우리가 되자.원제: How to Survive the First 5 Years of Church Planting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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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실한친구
복음설교란 무엇인가?
by 고상섭
2022-06-18
복음이란 무엇이 아닌가? 복음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복음’이라는 단어에 대한 정의일 것이다. 다양한 ‘복음’에 대한 정의가 있지만, 팀 켈러는 센터처치(Center Church: Doing Balanced, Gospel-Centered Ministry in Your City)를 시작하면서 “복음은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복음을 설명한다. 왜 ‘복음은 ~이다’라는 긍정문으로 시작하지 않고, 이처럼 부정문으로 복음을 설명하는 것일까? 많은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면 ‘복음은 ~이다’로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잘못 알고 있기 때문에, 복음에 대한 잘못된 생각을 바로잡기 위해 그는 ‘복음은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것 같다. 그래서 팀 켈러는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하지 말라’라는 소제목으로 논리를 이어간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한다는 말은 복음의 결과를 복음으로 착각한다는 말이다. 결국 ’복음이 모든 것이 아니다’라는 말의 의미는 ‘복음의 결과’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복음의 결과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바로 복음을 잘못 이해할 때 생기는 두 가지 오해인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가 생겨나게 된다. 복음과 복음의 결과를 혼동한다는 말을 싱클레어 퍼거슨은 온전한 그리스도에서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말로 설명하고 있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지 말라는 말은 인간의 행위가 먼저 있고 그 행위에 따른 축복을 누린다는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고 그 은혜의 반응으로서 인간의 순종이 있다는 말이다. 칭의와 성화를 분리하게 되면, 칭의로 구원을 받았으니 이제 인간적인 노력으로 성화를 이루어가야 된다는 율법주의를 양산하게 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씀하시는 명령법 앞에는 하나님이 인간을 위해 먼저 베풀어 주신 은혜가 있다. 출애굽기에 십계명은 이렇게 시작된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3).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라](출 20:4)‘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는 명령형은 단순히 인간이 순종해야 하는 명령이 아니다. 이 명령에는 그 명령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이 먼저 행하신 은혜가 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신 은혜를 선포한 후에 십계명을 요구하신다. 즉 우리가 순종해야 하는 명령 앞에 먼저 행하신 하나님의 구원의 행위 즉 은혜가 있다. 이것은 신약에서도 동일하다. 우리의 순종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행하신 칭의와 연결되어야 한다. 칭의와 성화의 순서를 놓치게 되면, 복음을 왜곡하게 되어서 누가복음 15장에 등장하는 첫째아들처럼 아버지의 명을 어김이 없이 순종했지만 아버지에게 분노하는 율법주의자가 된다. 첫째아들이 순종한 이유는 아버지의 사랑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순종으로 인해 받을 유익 때문이었다. 칭의와 성화의 순서가 연결되지 않으면 복음이 왜곡된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너무 무거워서 도저히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반율법주의자가 되어서 자신의 마음대로 삶을 살고 싶어 하는 둘째아들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율법주의와 반율법주의는 결국 복음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 결과이며, 칭의와 성화의 관계에서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려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성품이 분리되면 율법주의자 또는 반율법주의자를 양산하게 된다.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 그렇다면 복음설교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칭의와 성화를 연결하는 설교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이 동기가 되어서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복음설교란 ‘그리스도 중심 설교’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이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대신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다. 브라이언 채플은 그리스도 중심의 설교에서 중요한 것은 FCF,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인간의 타락한 상황 드러내기(The Fallen Condition Focus)라 말한다. FCF는 설교의 진정한 주제를 결정해 준다. 왜냐하면 그 구절이 쓰인 진정한 목적이 바로 FCF에 있기 때문이다. 궁극적으로 설교란,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FCF에 대처해 나가는 방법을 성경 본문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말해 주는 것이다. … 이것이 우리가 성경본문을 타락한 인간에게 주신 하나님의 응답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이고 결국 FCF가 설교의 주제와 그 접근법을 결정하고 내용까지 구성한다(그리스도 중심의 설교, 54쪽).모든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억지로 드러내려 하다가는 자칫 성경을 왜곡할 위험에 빠칠 수 있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본문 안에서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고, 그 대안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대신해서 행한 일을 선포하는 것이다. 즉 칭의가 성화의 도구가 되도록 인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팀 켈러의 설교를 분석해 보면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는 ‘그리스도 중심 설교’가 아닌 칭의를 성화와 연결시키는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라 할 수 있다. 이 설교가 도덕주의 설교와 다른 이유는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에 있다. 인간적인 결단을 통해 “내가 ~을 하는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라는 것은 도덕주의, 율법주의로 흐를 위험이 있지만, 행위의 동기가 칭의로부터 흘러나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은혜의 동기로 순종하는 칭의와 성화가 연결되는 설교가 된다. 칭의와 성화가 분리가 되면 도덕주의 설교가 되지만, 칭의가 성화와 연결되면 ‘그리스도 중심 적용설교’가 된다. “복음은 모든 것을 변화시킨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은 복음 즉 칭의를 통해 다양한 삶의 자리에 적용되어야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팀 켈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이 적용되는 다양한 주제들을 언급한다. 낙망과 우울, 사랑과 인간관계, 성, 가정, 자기관리, 인종과 문화, 전도, 인간의 권위, 죄책감과 자아상, 기쁨과 유머, 다른 계층에 대한 태도 등이다. 이런 주제들이 모두 복음의 동기 즉 칭의와 연결되어 성화 되어야 하는 구체적인 적용점이다. D. A. 카슨도 바울의 고린도전서를 설교의 적용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고린도전서는 복음이 어떻게 태도나 정신기강, 인간관계, 그리고 문화적 상호작용들에 광범위한 변혁을 일으키는지를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을 향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작동해야 함을 반복해서 강조한 것처럼 오늘날의 우리도 동일하게 그래야한다. … 복음이 다음의 영역들에서 어떻게 삶을 바꿀 수 있는지 생각하는 것은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복음이 어떻게 사업 관행이나 그리스도인들의 상업상의 우선순위들을 바꿀 수 있는지 등을 생각해야 한다. 이 작업은 복음으로부터 사회적 원칙을 추출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선지자적 목소리를 내려는 헛된 노력으로 끊임없이 부수적인 것들에 관심을 둔다고 되는 것도 아니다. 오직 우리의 복되신 구주의 영광스러운 복음을 교회들 속에서 전파하고 가르치고 살아냄으로써 되는 것이다(센터처치, 93쪽).복음 설교와 설교자아마도 가장 탁월한 성경 설교자들의 (성경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를 설교하는) 탁월성은 본능에서 나온다. 그들의 공식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멍한 대답을 얻게 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원리들은 무의식 가운데 발전된 것이고, 타고난 능력과 은사, 청중과 설교자로서의 경험을 조합해 터득한 것이다. 성경적 설교는 그들의 모국어가 되었다. 그들은 성경신학의 문법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다. 지금 언어 체계의 어느 부분을 사용하는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고도 말이다(설교, 118쪽).팀 켈러는 설교에서 복음설교를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를 ‘본능’이라고 언급했다. 이 말은 많은 설교자들을 좌절시키는 말이다. 왜냐하면 설교를 잘하는 사람은 타고났다는 뉘앙스를 풍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여기서 말하는 ‘본능’은 단순한 타고남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설교자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복음설교는 복음 중심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삶에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그리스도 중심 설교는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사람들의 마음에서 선포되는 것이다. 설교자의 내면이 설교보다 더 중요하다. 또 팀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설교할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가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과 거의 같다. … 우리가 기도할 때 이런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면 우리가 설교할 때도 일어나지 않는다(설교, 228쪽). 설교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선포한다면, 설교 전의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절절한 감격으로 가득 차 있어야 한다.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해 주세요’라는 기도가 아닌 자신이 하나님의 사랑에 목매어 통곡하는 감격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설교자의 삶을 통해 설교가 선포되는 것이다. 결국 복음설교 즉 그리스도 중심 설교란, 단순히 본문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고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가득 차 있는 설교자의 뜨거운 가슴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다. 그리스도만을 높이고 그리스도만을 사랑하고 싶은 간절한 열망이 바로 그리스도 중심 설교의 핵심일 것이다. 복음설교를 잘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설교자인 나는 오늘 복음에 감격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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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by Jon Bloom
2022-06-15
이리가 양을 바라보는 이유가 뭘까? 잡아먹고 싶어서이다. 양을 돌보거나 위험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잡아먹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양에게 가까이 다가가려는 늑대는 기만전술로 양을 속여 이런 속셈을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거짓 교사를 양 떼를 아끼지 않는 “사나운 이리”라고 불렀다(행 20:29). 바울은 아마도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힌트를 얻어 이런 비유를 썼을 것이다. “거짓 예언자들을 살펴라. 그들은 양의 탈을 쓰고 너희에게 오지만, 속은 굶주린 이리들이다”(마 7:15). 거짓 예언자들이라는 게 단지 거짓 교리를 가르쳐서만이 아니다. 중요한 건, 잘못된 목표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짓 예언자들의 목표는 “깨끗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 없는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딤전 1:5)이 아니다. 다른 무엇이다. 자신의 목표를 철저하게 숨기는 그들에게 사실상 양 떼는 불경건한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비유를 바꾸어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그 열매를 보고 그들을 알아야 한다”(마 7:16). 바울은 양 떼 가운데로 침투하는 가면 쓴 “이리”의 “열매”를 분별할 수 있도록 돕고자 애썼다. 그가 디모데후서 3장에서 설명한 열매 중 세 가지를 살펴보자.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가 사역을 하는 중에 만날 가능성이 있는 “반대하는 사람들”(딤후 2:24-26)에 관해서 설명한다.경건한 가면바울이 묘사한 첫 번째 특징은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하는”(딤후 3:5) 사람이다. 바울의 말을 들어보자. 그대는 이것을 알아두십시오. 말세에 어려운 때가 올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뽐내며, 교만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며,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감사할 줄 모르며, 불경스러우며, 무정하며, 원한을 풀지 아니하며, 비방하며, 절제가 없으며, 난폭하며, 선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무모하며, 자만하며, 하나님보다 쾌락을 더 사랑하며, 겉으로는 경건하게 보이나, 경건함의 능력은 부인할 것입니다. 그대는 이런 사람들을 멀리하십시오. 디모데후서 3:1-5.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지도자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이리의 목적: 방종• 양의 옷: “경건의 모양”• 눈에 띄는 열매: 개인적 거룩함이 없음(“경건의 능력 부인”)바울의 조언만 잘 따르면 이런 거짓 지도자는 쉽게 구분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이리는 양에게 속내를 숨기는 데에 선수이다. 그들의 “경건한” 모습이 처음에는 설득력이 있었기에 지도자 자리까지 오른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영향력은 교회의 영적 건강을 쇠퇴시키기 시작한다. 내가 수십 년 전에 함께 일했던 지도자 중 한 명은 정체가 드러나기 전까지 오랫동안 목회자의 위치에 있었다. 명확한 증거가 나오기 전이었지만, 그의 주변에서 드러나는 몇몇 상황에서 느꼈던 어떤 직관적인 불안을 지금도 기억한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딱 꼬집어 말하기는 어려웠지만 이상하다고 느낀 건 나만이 아니었다. 영적 진정성이 부족했다. 그의 가르침과 모범에는 능력이 없었다. 마침내 가면이 벗겨지기 시작했고, 분별력 있는 여러 지도자가 비밀스럽고 이기적이고 부도덕한 목적이 드러날 때까지 그를 압박했다.직감으로 느끼는 불안함이 항상 정확하다고 말하는 게 아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열매가 익어 형태가 변하는 것처럼 조금씩 달라지는 패턴을 확인하라. 아무 곳이나 “은혜”을 갖다 붙이지는 않는지, 세속성과 방종에 쉽게 빠지지 않는지 주의 깊게 살펴보라. 돈을 다루는 방식을 잘 살펴보라. 성 윤리는 어떠한가? 느슨하지 않은가?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들이 불안을 느끼지는 않는가? 지적을 받았을 때 투명하지 않고 방어적 태도와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일관하지는 않는가? 그런 지도자를 중심으로 주변에 교묘한 조종과 두려움의 문화까지 만들어졌다면, 상황은 심각하다. 마침내 사랑은 없지만 경건하게 보이는 늑대가 등장한 것이다. 진리를 배반한다이리 같은 지도자의 또 다른 특징은 “진리를 배반하는”(딤후 3:8)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거짓 교사인 이리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그런 이리는 보는 즉시 바로 알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다. 영향력은 적을지 몰라도, 일반적으로 초창기에 늑대는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더 교활하고 모호하다. 바울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들 가운데는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서 약한[weak, 개역개정과 새번역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 여자들은 여러 가지 정욕에 이끌려 죄에 짓눌려 있고, 늘 배우기는 하지만 진리를 깨닫는 데에는 전혀 이를 수 없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배반한 것과 같이 진리를 배반합니다.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사람이요, 믿음에 실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들의 어리석음도 그 두 사람의 경우와 같이, 모든 사람 앞에 환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디모데후서 3:6-9.이런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 이리의 목적: 자기 홍보(이기적인 야망)• 양의 옷: 영적 능력이나/과 신학적으로 박식함의 갖춘 듯한 이미지• 눈에 띄는 열매: 취약한 사람들을 조종함, 인상적인 영적 능력을 드러내지만 사실상 복음을 훼손하는 교리를 옹호하고 경건한 지도자를 반대함바울이 이리 같은 지도자가 수행하는 전략적 진행을 설명하는 건 아니다. 하지만 초창기에 그들은 교활하게 고개 숙이고 있다가 시간이 흘러 영향력이 임계점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본색을 드러내고 공공연하게 진리에 대적하는 경우가 많다.‘교묘한’ 지도자 거짓 교사는 보통 교묘하게 들어온다. 그들이 “약한 여자들을 유인한다”는 바울의 말에 우리는 #MeToo를 옆에 붙이고 싶은 충동까지 들지만, 바울의 말이 반드시 성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건 아니다. (물론 일부는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경우지만 말이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이것이다. 이리는 다양한 속임수를 활용해 특히 잘 속는 취약한 사람을 골라내 그들을 충동한다. 충성스럽고 겸손하며 경건한 지도자가 지향하는 사역보다 더 강력하고 영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역사에 주역이 될 수 있다는 식으로 그들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거짓 교사에게 빠지는 이유는 어떤 형태가 되었든지 영적인 능력으로 감동적인 모습을 연출하는 능력이 그들에게 있기 때문이다. 은사지속론 측면에서 볼 때, 그들은 마치 놀라운 성령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는 것 같다. 또한 은사중단론 맥락에서 봐도 대단한 신학적이고 영적인 지식을 소유한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들이 가진 여러 은사나 지식은 처음에는 경건한 지도자들조차도 혼란스럽게 만들 수 있다. 좀 이상한 사람도 하얀 양 가죽을 걸치면 그럴 듯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빨을 드러낸다그러나 결국에 이리는 이빨을 드러내기 마련이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그런 교사를 “야네와 얌브레”라고 말한다. 모세를 대적하여 인상적인 마법의 힘을 휘두른 이집트 마술사에게 붙인 이름이다(출 7:10-12). 바울은 그들을 “부패한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들의 잘못된 가르침은 성경에 대한 단순하고 순진한 오해에서 비롯한 게 아니다. 그들은 자신의 능력을 극대화하려는 이득을 추구하기 위해서 성경을 악용한다. 참된 복음이 공개적으로나 또는 사적으로 그들이 가장 중요시하는 사회적 자본(대부분의 경우 돈)을 위협할 때, 그들은 공격적이고 무자비하게 “진리를 대적”한다. 비로소 거짓된 모습이 명백해지는 것이다. 건강하지 않은 리더십의 전형적인 패턴을 살펴보라.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게 환멸과 상처를 남기고 떠난 과거의 매력적이고 카리스마 넘쳤던 인물을 떠올려 보라. 과거에 많은 교회가 열광할 정도로 인기를 끌었던 영적 능력의 사례를 살펴보라. 그러나 특정 지도자에 대한 심각한 의존과 충성으로 이어질 때 그 모든 게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되새겨 보라. 오로지 한 사람을 중심으로 뭉치는 그룹이 있다면, 게다가 모이는 사람들이 주로 취약하고 영적으로 약한 사람이라면, 그런데 그들 중에서 서서히 경건한 교회 지도자를 향한 불신까지 노골적으로 드러난다면,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경건한 지도자를 향한 갈등과 지도자에게 순종을 거부하는 일반적인 패턴을 살펴보라. 고난을 회피한다이리 같은 지도자의 세 번째 특징은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박해와 고난”을 회피한다는 것이다(딤후 3:11). 이 특성은 디모데에게 쓴 바울의 편지에 암시되어 있다.그대는 나의 가르침과 행동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를 따르며,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내가 겪은 박해와 고난을 함께 겪었습니다. 나는 그러한 박해를 견디어냈고, 주님께서는 그 모든 박해에서 나를 건져내셨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은 모두 박해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악한 자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더 악하여져서, 남을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0-13.바울이 말하는 이러한 지도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이리의 목적: 자기 보존• 양의 옷: “주장”(딤전 1:7)과 용기를 풍기는 통제력 있는 리더십• 눈에 띄는 열매: 명성, 지위, 부, 안락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 어떤 개인적인 희생과 공개적인 박해를 피함.이리 같은 지도자는 매우 자신감 있는 이미지를 드러낼 수 있고, 횡포와 교묘한 행동을 오히려 “강한 지도자”의 특성으로 합리화할 수 있으며, 나아가서 여러 가지 황당한 행동을 오히려 “희생”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과 지도력과 “희생”을 신중하고 객관적으로 조사한다면, 그의 “헌신”이 유익을 끼친 건 교회가 아니라 오로지 자기 자신임을 알 수 있다. 그렇기에 다른 데서처럼 여기서도 바울은 박해와 고난을 그리스도를 닮은 진짜 지도자의 열매라고 말한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고후 11:23). 이렇게 바울이 인내에 대해 말할 때, 그는 자신의 위대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열매를 말한 것이다. 오늘날 미국에는 바울과 그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이 겪었던 박해와 고통을 겪는 그리스도인은 없다. 따라서 이리 같은 지도자가 훨씬 쉽게 들어올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닮은 참된 지도자는 여전히 이리 같은 지도자가 추구하는 자기 증진, 자기 부요, 방종과 같은 목적과 대비되는, 그리스도의 백성을 위해 명성과 지위와 부요함과 안락함마저 기꺼이 희생하는 열매를 맺는다. 주의를 기울여 눈을 뜨면 볼 수 있다.자세하게 살펴보라다음은 바울이 에베소 장로들에게 예수님을 위한 투옥과 죽음의 길에 들어서기 전에 작별을 고하며 한 말이다.여러분은 자기 자신을 잘 살피고 양 떼를 잘 보살피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의 피로 사신 교회를 돌보게 하셨습니다. 내가 떠난 뒤에, 사나운 이리들이 여러분 가운데로 들어와서, 양 떼를 마구 해하리라는 것을 나는 압니다. 바로 여러분 가운데서도, 제자들을 이탈시켜서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것을 말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것입니다. 사도행전 20:28-30.“사나운 이리들”이 양의 옷을 입을 것이기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의 출현은 교묘할 것이다. 심지어 (가롯 유다처럼) 장로가 되어서 들어올지도 모른다. 그들은 경건한 모습에 인상적인 영적 능력을 가진 것처럼 보일 것이다. 자신감과 용기가 넘치는 이미지를 발산할 것이다. 많은 양이 그들에게 미혹될 것이다. 장로들은 예수께서 “열매로 그들을 알아볼 것”이라고 하신 말씀을 자신과 양 떼에게 상기시켜야 한다. 정말로 눈을 뜨고 주의 깊게 살펴본다면, 열매를 통해 우리는 이리를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리 같은 지도자는 자신의 불경건한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양을 잡아먹는다. 원제: How to Watch for Wolve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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