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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추구하기, 나의 모든 만족
진짜 보물에 관한 토저의 가르침
by Dieudonne Tamfu
2023-08-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로다. 하나님을 통한 영혼의 만족을 아는 사람은 만족의 근원이 되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한때 텅텅 비어서 갈망으로 가득하던 영혼이 참된 기쁨을 맛보면, 결코 다시는 빈 수조 같았던 과거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만족을 동시에 느끼면서 산다. 예수님의 약속대로, 그들은 더 이상 주리고 목마르지 않다(요 6:35). 대신 더 간절히 하나님을 갈망하고 목말라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만족을 구하며 평생을 보낸다. 하나님으로 충만한 사람은 오로지 하나님 안에서만 충만함을 구한다.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결코 하나님 찾기를 멈추지 않는다. 신자라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추구하는 존재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을 더 많이 찾기 위해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 하나님을 더 알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하나님을 더 알기 위해 성경 구절을 암송한다. 우리의 갈망은 단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가졌던 기쁨을 다시 경험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아는 더 큰 지식으로 날마다 새로운 기쁨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똑같은 복용량으로는 처음에 느꼈던 즐거움을 맛볼 수 없기에 점점 더 양을 늘리는 마약 중독자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산의 아름다움을 더 맛보기 위해 매 순간 더 높이 오르는 등산가이다. 토저와 함께 하나님 추구하기내가 막 신학 공부를 시작한 2002년, 1963년에 죽은 A. W. 토저가 나를 제자 삼기 위해서 다시 살아났다. 어릴 때 나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공부는 어쩔 수 없을 때만 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를 회심시키셨고, 그때부터 나는 성경을 폭넓게 읽기 시작했다. 나의 첫 성경 NIV 검은색 양장본은 수도 없이 많은 밑줄과 하이라이트 별표로 가득하다. 그 후 나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하나님을 더 잘 알기 위한 여정에 푹 빠졌다. 특히 하나님을 나의 아버지로 알아가는 여정은 황홀했다. 아버지 없이 자란 내가 누군가를 아버지라고 부르고,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사랑하고, 또 누군가를 아버지처럼 대할 수 있었던 건 그때가 처음이었다.2002년, 성경 외에 나는 다른 책을 거의 읽지 않았던 나는 우연히 A. W. 토저가 쓴 하나님을 추구함을 만났다. 얼마 읽지 않아서 다음 구절을 만났다. 현대 과학자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의 경이로움 속에서 오히려 하나님을 잃고 말았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 말씀의 경이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잃을 위험에 처했다. 지금 우리는 하나님이 인격이시라는 사실을 거의 잊고 있다. … 한 인격을 제대로 아는 게 단지 한 번의 만남으로 가능하지 않다. 상대를 안다는 것은 두 존재의 모든 가능성을 탐구하는, 길고도 사랑스러운 정신의 교제를 거친 후에야 가능하다. (23)나는 인생이란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는 과정임을 깨달았다. 하나님을 한 번 만난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하나님을 계속 찾아야만 한다. 그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나의 모든 갈망을 온전히 채워 주신다. 신학 과정에서 하나님 추구하기토저 덕분에 신학을 하는 내내 내 목포는 오로지 하나, 하나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었다. 단지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하나님 안에서 만족하고 싶었다. 하나님을 연구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누리고 싶었다. 하나님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 결과로 하나님을 위해서 불타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성경을 연구하면 할수록, 구약에서 신약에 이르기까지 등장하는 성도들을 통해서 토저의 생각이 옳다는 게 점점 더 분명해졌다. 세상은 기쁨과 즐거움과 만족을 주는 다양한 출처를 제시하지만, 성도는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만족의 근원이심을 선포한다. 모세처럼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사람은 “저에게 주님을 영광을 보여 주십시오”(출 33:18)라고 끊임없이 부르짖는다. 다윗처럼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오로지 “한 가지”만 구한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 27:4). 바울처럼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을 삶의 유일한 과제로 삼는다(빌 3:10). 영생을 정의하는 건 길이가 아니라 내용이다. “영생은 오직 한 분이신 참 하나님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요 17:3).“그리스도가 그 무엇보다 소중한 존재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그는 사실상 아무런 가치가 없다는 의미다”라고 쓴 아우구스티누스도 바울과 같은 심정이었다. 그리스도가 우리 삶에서 가장 추구하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아직 그리스도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아직도 그리스도를 만난 적 없다는 의미이다. 주님을 향한 굶주림을 모르는 영혼은 아직 생명의 떡을 맛보지 못한 사람이다. 선교로 하나님을 추구하기하나님께서 나를 카메룬에서 미네소타로 옮겨서 공부하게 하셨을 때, 나는 더 부유한 나라가 가져다주는 유혹을 예리하게 느꼈다. 그래서 일기에 기도를 기록했다.주님, 제가 주님을 더 잘 볼 수 있는 정도까지만 이 도시와 미국의 아름다움을 감사하게 하소서. 성령이시여 저를 도우소서. 미국의 아름다움에 취하여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 영광의 아름다움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하소서. 제 눈을 세상에서 돌려 온전히 주님께만 향하게 하소서. … 오로지 예수님만이 나의 모든 의미가 되게 하소서! 주님, 제가 미국에 머무는 동안 더 그리스도를 닮게 하소서. 미국인 같이 되는 일이 없도록 보호하소서. 미국은 그냥 미국일 뿐입니다. 주여, 예수님만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영원히 나의 모든 만족이요 기쁨의 원천이 되십니다. 하나님은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유학 전보다 더 하나님을 기뻐하고 만족하게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교회 개척과 신학 훈련을 위해 나를 카메룬으로 옮기셨고, 다른 사람들도 오로지 그리스도로만 만족하는 똑같은 경험을 돕는 데에 도구가 되게 하셨다. 하나님의 은혜로 미국의 그 어떤 보물도 그리스도만이 주시는 기쁨을 전하는 나를 막지 못했다. 하나님은 나를 오로지 하나님만으로 만족하게 하셨다. 나는 하나님만으로 만족했다. 하나님은 내가 미국의 쾌락을 버릴 수 있도록 나를 자유롭게 하셨다.모든 만족, 모든 기쁨, 모든 즐거움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맛본 자유를 토저도 맛보았다. 하나님을 보물로 모신 사람, 그분 하나로 온 세상을 다 가진 자이다. 세상의 수많은 평범한 보물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설혹 그것들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로 인한 기쁨은 너무도 소소해서 그의 행복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것들이 하나씩 사라진다고 해도, 그는 거의 상실감 자체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 한 분으로 모든 것을 다 가졌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잃더라도, 실제로 아무것도 잃지 않는다. 순전히 합법적으로 그리고 영원히 모든 것을 하나님 한 분으로 다 가진 사람이기에. (28)이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가? 당신에게 이런 만족을 바라는 갈망이 있는가? 어떤 어려움도 빼앗을 수 없는, 하나님이라는 보물이 주시는 기쁨을 아직도 모르고 있다면, 계속해서 그분을 추구하라. 당신이 현재 하나님을 갈망하지 않는다고 가정해보자. 그런데도 희망이 있을까? 그렇다. 언제나 희망은 있다. 하나님을 향한 사랑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을 향한 열정은 오로지 하나님으로부터만 나온다. 이렇게 기도하자. 아침에는 주님의 사랑으로 우리를 채워 주시고, 평생토록 우리가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해주십시오. (시편 90:14)주님의 백성이 주님을 기뻐하도록 우리를 되살려 주시지 않겠습니까? (시편 85:6)당신은 확신을 품고서 기도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지극히 높으신 분, 영원히 살아 계시며, 거룩한 이름을 가지신 분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비록 높고 거룩한 곳에 있으나, 겸손한 사람과도 함께 있고, 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사람과도 함께 있다. 겸손한 사람과 함께 있으면서 그들에게 용기를 북돋우어 주고, 회개하는 사람과 같이 있으면서 그들의 상한 마음을 아물게 하여 준다.” (이사야 57:15)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러면 그 어떤 상실도 맛보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을 가장 큰 보물로 삼자.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무엇이든 버리는 능력을 얻을 것이다. 소유물은 더 이상 사슬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궁극의 보물을 즐기게 하는 통로로 바뀐다. 꿈과 사랑하는 이의 상실이라는 고통조차도 소망의 상실로 이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되신다. 이제 모든 즐거움, 모든 만족, 그리고 모든 욕망까지도 오로지 하나님 한 분 안에서 온전하게 소유하게 된다. 원제: My Satisfied Seeking of God: What Tozer Taught Me About Treasur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디모데전서 2:12은 정확히 무엇을 가르치는가?
by Robert W. Yarbrough
2023-08-03
편집자 주: 교회 안에서 자주 오해되는 성 역할이라는 주제를 기사 하나로 제대로 다루는 건 불가능합니다. 유익한 “성경 전체”의 설명이 궁금하다면, “아름다운 차이: (성경 전체에 걸친)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자가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을 나는 허락하지 않습니다. 여자는 조용해야 합니다.” 디모데전서 2:12을 지역 교회에 적용하기란 정말 까다롭다. 바울이 허락하지 않는 것은 정확히 무엇일까?물론 바울이 디모데전서를 쓰지 않았다고 보는 사람들은 이 말에 사도의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또 이 말이 갈라디아서 3:28(“남자와 여자가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기 때문입니다.”)과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며, 교회 봉사와 성별은 무관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남성과 여성의 상보성을 견지하는 교회(complementarian church), 즉 자격을 갖춘 남자에게만 목사 안수를 주는 교회에 출석하는 경건한 여성이 디모데전서 2:12을 보고서 이런 궁금증을 갖는다고 가정해 보자.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이 나에게 허락되지 않았다는 건 도대체 무슨 뜻이지?” 그녀는 과연 어떤 결론을 무엇을 근거로 내려야 할까? 이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10절)가 배워야 하는 것들(11절)의 맥락에서 좋은 질문이다. 이 질문에는 성경이 가르치는 바를 실천에 옮긴다는 뜻이 들어 있다. 내가 제안하고 싶은 건 “가르치거나 남자를 지배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바울이 오랜 동료인 디모데에게 목사의 중요한 책임들을 요약하는 것으로 보자는 것이다: (1) 예수님이 제자들을 양육한 것처럼, 충실한 성경 해석을 통한 가르침, (2) 예수님이 추종자들을 돌보고 또 초기 기독교 지도자들이 모방한 것처럼, 자비로운 감독과 목양(예: 벧전 5:1-5).디모데전서 2:12의 적용을 간략하게 다루는 정도로는 전체 문맥에 비춰서 바라봐야 하는 이 구절에 대한 완전한 설명에 이를 수 없다. 나도 이 주제를 다루었고(‘The Letters to Timothy and Titus’ 137-89), 이 사이트에서도 평등주의에 기반하여 비판하는 사람들의 글을 포함해서 여러 관련 내용을 찾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설명조차도 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만족스러운 대답이 되지 못할 수 있다. 성경의 난해 구절을 그 구절만으로 완전하게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한 구절이 주장하는 바는 그 구절에 빛을 비추는 구절들로 이루어진 더 큰 집합의 일부이다. 성경 전체라는 맥락에서 우리가 디모데전서 2:12에서 만나는 것은 경건한 여인에게 주는 교훈이다. 경건한 여인, 곧 그리스도를 믿으라는 복음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는 데 헌신하는 여인이다. 그녀에게 추구하라고, 그리고 피하라고 권하는 몇 가지가 있다.경건한 여인이 추구해야 하는 것“추구”라는 측면에서 다음 것들이 있다. 1. 여성은 남성과 나란히 완전한 존엄성을 확보해야 한다(창 1:27).2. 여성은 남자의 특징을 보완하고(창 2:18) 출산을 통해 인류 발전을 가능하게 하는(창 1:28) 성적 특징을 확증해야 한다. 3. 여성은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징벌적 (그러나 궁극적으로는 구속적) 영향을 미치는 죄가 세상에 들어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창 3:14-19).4. 여성은 개인적 죄와 공동의 죄를 의식하면서 엘리사벳과 마리아, 여선지자 안나와 같은 믿음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오심에 담긴 기쁜 소식을 보아야 한다(눅 1-2장).5. 죄를 회개하고 복음을 믿은 후(막 1:15), 여성은 예수님과 열두 제자를 재정적으로 지원하고(눅 8:3),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목격하고(막 15:40-41), 제자들이 믿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간증하고(눅 24:10-11), 그 이후로도 초대교회를 헌신적으로 섬긴 많은 다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예수님을 열정적으로 추종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당당하게 한 자리를 차지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장은 뵈베, 브리스가, 마리아, 루포의 어머니, 드루배나, 드루보사, 유니아 같은 이름으로 채워져 있다.)신약 전체에서 성도에게 확신을 주고 그들을 인도하는 데에 대한 통찰은 결코 여자로부터 고립된 남자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예수님과 바울과 같은 지도자들은 여성들과 함께 땀을 흘렸다. 여성의 은사를 확인했으며, 그 은사를 활용해서 교회와 세상에서 복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구조를 세워나갔다. 6. 마지막으로, 여성의 위치는 열두 제자를 오로지 남자로만 뽑은 예수님의 선택, 그리고 오로지 경건한 남자만 목회 교사와 감독의 위치에 임명하는 사도적 정책(신약 전체에 걸쳐서 통일되게 진술되는 사실) 속에 반영된 회중 질서 속에서 확인해야 한다. 이 점은 우리를 다시 디모데전서 2:12로 돌아가게 한다. 경건한 여인(2:10)은 예배 현장에서 배움에 헌신하라는 권면을 받았다(2:11). 그녀에게는 목회 교육(“가르치다”)과 감독(“권위를 행사하다”)의 역할이 부여되지 않는다. 그러나 경건한 여인과 아내라면 자연스럽게 목양에 참여하는 자연스러운 방법이 생기기 마련이다. 아니, 최소한 그래야 한다. 안수받은 남자들은 교인들을 향한 특정한 책임을 맡으며 교인 가운데 있는 여인들의 지혜로부터 유익을 얻는다. 목회자와 여성 사이에 건전한 관계가 있다면, 목회자가 자매들의 관심과 의견을 그들의 기도와 봉사와 지도력 측정에 반영할 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들은 분명히 그 모든 내용을 마음에 간직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운영되지 않는다면, 교회에는 기능 장애가 발생하고 그에 따른 조정이 필요하다. 더 나은 목회 관행과 영적 갱신, 남편과 아내가 결혼 생활에서 경건한 역동성을 추구하도록 준비시키는 것, 교회 전체에서 남성과 여성 사이의 앙금을 해소하고 유대를 강화하는 등의 변화가 이뤄져야 한다. 경건한 여인이 피해야 하는 것 디모데전서 2:12은 경건한 여자에게 무엇을 피하라고 권고하는가? 노골적으로 말해서, 오늘날 서구 환경에서 남자에게만 주어진 특정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분개심을 피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예외 없이 수행해야 하는 제자 양육의 명령에는 여성도 최선을 다해서 충성해야 하지만(마 28:19-20), 성경을 가르치고 또 권면하는 목회 교육에 해당하는 의무는 교회에서 맡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여자는 설교해서는 안 된다. 더불어서 교회의 구조와 관계없이 남자를 목회 감독해서도 안 된다. 제자 사역에 은사를 받고 부르심을 받은 여자는 (믿는 모든 여자가 다 그렇겠지만) 얼마든지 그들의 보살핌과 영향력이 필요한 다른 여자들을 찾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런 원칙이 교인 전체의 행정에서 여성의 지도력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종종 전체 목회자가 전체 교인 구조라는 틀 안에서 천재성을 가진 여성 행정가의 영향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교회 행정가는 목회자가 아니다. 역할이 서로 얽혀 있을 수 있지만 병합되거나 역전되어서는 안 된다. 겹칠 수는 있으나 같지 않은 사역의 영역짧은 글에서 너무 구체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을 다루기란 어렵고 또 현명하지도 않다. 교단 관행과 회중 역학은 매우 다양하며 다양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적용 범위에 따라서 주의 깊게 보완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그러나 예수님으로부터 시작해 사도를 거쳐 초대교회들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여성이 아닌 남성(비록 과분한 역할이기는 하나)이 목회자로 임명받은 사실을 확인한다. 여성들은 사생활에서부터 회중의 모든 활동과 이웃사랑,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의 협력에 이르기까지 경건한 봉사라는 측면에서 남자와 여러 영역에서 중복된다. 그러나 여자의 사명은 남성과 동일하지 않다. 개인 생활과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그분을 누리는 것은 무엇보다도 여성과 남성이 함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달콤한 시너지 효과에 달려있다. 여자와 남자의 상생 효과를 일으키는 목회 지도력은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서 상호 증진과 상호 헌신 그리고 무엇보다 자기희생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축복이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세우려는 교회에 임하시길 기도한다. 디모데전서 2:12이 교회가 나아가는 길에 선한 빛을 비추시기를 기도한다. 원제: What Exactly Does 1 Timothy 2:12 Tea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몇 명이었을까?
by Philip Ryken
2023-07-29
성경은 이집트 탈출을 상세하게 기술한다. 그런데도 출애굽 사건의 역사적 근거는 자주 도전 받는다. 출애굽기 12장 내용을 놓고 가장 흔히 맞닥뜨리는 반론은 출애굽의 규모이다. 이건 대답할 가치가 있는 문제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한다. “마침내 이스라엘 자손이 라암셋을 떠나서 숙곳으로 갔는데, 딸린 아이들 외에, 장정만 해도 육십만 가량이 되었다. 그 밖에도 다른 여러 민족들이 많이 그들을 따라 나섰고, 양과 소 등 수많은 집짐승 떼가 그들을 따랐다”(출 12:37-38). 이 기록에는 훌륭한 역사가라면 누구라도 빠트리지 않을 육하원칙에 입각하는 정보가 제대로 들어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건 ‘몇 명인가?’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인도해 내셨다는 것을 정말로 믿을 수 있는가?좋은 질문이다. 선택할 수 있는 세 가지 일반적인 답변이 있다.답 1: 부풀려진 숫자다남자가 600,000명이라면 이스라엘 사람은 모두 200만 정도였을 거다. 이 숫자는 쉽지 않은 문제이다. 그렇게 많은 이스라엘 사람이 빠져나갔는데, 왜 이집트 역사에는 전혀 거기에 관한 언급이 없을까? 게다가 이만하면, 이스라엘은 당대의 세계에서 가장 큰 인구를 자랑하는 민족 중 하나였을 것이다. 고센 땅이 과연 이 정도 인구를 먹어 살릴 수 있었을까? 게다가 왜 우리는 시나이반도에서 그들의 흔적을 전혀 찾을 수 없는 걸까?출애굽은 세계 역사에서 발생한 최대 인구이동 중 하나였다. 이동하고 있을 그들은 15킬로미터가 넘는 긴 줄을 형성했을 것이다. 적지 않은 학자들이 이런 문제점들을 제기하면서, 성경 저자가 숫자를 부풀렸다고 결론을 내린다. 드라이버(S. R. Driver)는 “출애굽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규모가 크게 과장되는 전통이 세월이 흐르면서 형성되었다”라고 썼다. 스나이드(N. H. Snaith)는 전체 숫자를 놓고 “환상적이고 또 믿을 수 없다”라고 말한다. 답 2: 글자 그대로부풀려진 숫자라는 이의 제기를 처리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성경이 참으로 600,000명이라는 숫자의 이스라엘 사람(여성과 어린이 포함)이 이집트를 빠져나왔다고 말한다는 사실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런 주장에 어려움을 느끼는 학자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세상에 불가능은 없다.이집트 역사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거의 언급되지 않는 건, 그들이 단지 노예였고 또 그들의 탈출 방식이 이집트인들에게 워낙 당혹스러웠기 때문이다. 시나이반도에 증거가 별로 없다고 해도 그리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단지 유목민이었고, 그 유해는 3,000년 동안 모래로 덮여 있었다. 또한 600,000을 숫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 가지 타당한 이유는, 이것이 출애굽기 다른 내용(출 38:26) 및 민수기의 내용(민 1:46; 2:32; 26:51)과도 일치하기 때문이다. 답 3: 천이라는 숫자는 ‘씨족’을 의미성경 본문에 충실한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히브리어 엘레프(eleph)는 “천”을 의미한다. 그러나 구약 초기에는 상당한 규모의 무리를 가리키는 부정확한 용어로도 사용되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단어가 ‘씨족’(clan)의 의미라고 생각한다. 또는 소대와 같은 전투 부대를 가리키는 군사 용어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출애굽기 12:37은 이렇게 읽어도 된다. “600개의 씨족이 있었다.” 또는 “600개 정도의 군사 단위가 있었다.” 이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의 전체 인구는 수백만이 아니라 수만 정도였을 것이다. 제임스 호프마이어도 이런 해석을 받아들이는데, 그는 이렇게 말한다. 출애굽기 12:37의 쟁점은 해석의 문제이다. 엘레프라는 단어는 “천”으로 번역될 수 있지만 성경에서는 “씨족” 또는 “군대 단위”로도 번역된다. 이집트 학자로서 이 질문을 볼 때, 이집트 제국의 전성기에 이집트 군대의 총인원은 20,000명 정도였다. 그리고 여호수아 7장을 보면 아이성 전투에서 전사한 36명은 이스라엘로서는 심각한 군사적 실패였다. 정말로 600,000명의 군대가 있었다면, 그 정도 숫자가 죽는 건 별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건 성경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관한 문제가 아니다. 핵심은 성경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그 의미를 찾는 것이다. 확실한 것은 하나님께서 많은 사람을 이집트에서 이끌어 내셨다는 사실이다. 참으로 성경에 기록된 바와 같이 말이다. “주님의 모든 군대가 이집트 땅에서 나왔다”(출 12:41).원제: How Many Israelites Exited Egyp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출애굽
바른 신학 없이는 온전한 제자 될 수 없다
by Jen Wilkin·J. T. English
2023-07-27
마태복음 28장의 가서 제자 삼으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우리는 보통 전도의 관점에서 받아들인다. 이 본문을 읽으면서 자연스럽게 복음을 담은 소책자를 들고 세상에 흩어져서 전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상상한다. 복음을 받아들여 기쁨에 넘치는 회심자들이 희열에 차서 세례를 받는 장면도 떠오른다. 그다음은 뭘까? 제자들의 전도를 받아 전도자가 된 그들이 여러 도시를 이동한다. 말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시작해서 유대를 거쳐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대사명에 대한 이해가 단지 전도에 대한 부르심에서 그친다면, 우리는 정작 중요한 부분을 잊고 있다. 바로 신학이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은 회심하라는 부르심이 아니라 제자 삼으라는 부르심이다. 이 부분에 대한 대사명의 내용은 분명하다. 개종자들에게 “예수께서 명하신 모든 것을 지키도록"(마 28:20) 가르치라고 요구한다. 제자도라는 측면에서, 믿음의 선배로부터 물려받은 좋은 교리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우리는 새삼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지금 교리를 가지고 무엇을 하고 있는가?회심은 순식간에 벌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교리를 실천하는 제자도는 평생에 걸친 과정이다. 그것은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전통 신앙을 포함한다. 그럼 우리는 지금 이 사명을 제대로 완수하고 있는가? 대부분의 통계 지표에 따르면 전혀 그렇지 않다. 2022년, Lifeway Research와 Ligonier Ministries는 “신학 현황”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들은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를 대상으로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 즉 그리스도인을 정의하는 본질적인 믿음에 대한 이해도를 조사했다. 비그리스도인들의 결과는 예상대로 암울했지만, 정작 놀라운 건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사람들이 내어놓은 답변이었다. • 복음주의자의 48퍼센트가 “하나님은 다양한 상황을 접하면 거기에 맞게 학습하고 적응한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65퍼센트가 “모든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게 태어났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56퍼센트가 “하나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의 예배를 받아들이신다”에 동의했다. • 복음주의자의 43퍼센트가 “예수님이 훌륭한 선생이기는 하지만 하나님은 아니었다”에 동의했다. 이 통계를 한번 곰곰이 숙고해보라. 자신을 그리스도인이라고 공언하는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정작 자신의 생명을 걸고 있다고 주장하는 신앙의 핵심 신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신념에 자신의 생명을 걸지도 않는다. 한마디로 그들은 기본적인 신학적 이해가 부족하다. 그리고 시간이 갈수록 신학 지식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벌어지고 있다는 게 조사 결과이다. 한 세대는 다음 세대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개종자는 만들고 있는지 몰라도 제자는 기르지 못하고 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가?제자가 배우는 사람이라면 제자 삼는 사람은 선생이다. 그러나 배우지 않은 것을 가르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전달받지 않은 것을 다음 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나 자신을 먼저 신학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상황에서 결코 다른 누구에게 신앙의 기본 신념을 가르치려는 열망을 가질 수는 없다. 그럼 우리는 왜 그러지 않는 걸까? 교리 학습을 기피하는 사람들이 많은 이유가 뭘까? 다음 거짓말 중 하나를 믿기 때문이다. 거짓말 1. 신학은 학문의 영역이다.때때로 신학은 지나치게 학문적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말이 접근 불가라는 의미는 아니다. 학자들 가운데는 평신도라면 결코 하지 않을 수준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그게 우리 모두가 신학을 기피해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우리 중 응용 수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기초 수준 이상으로 수학을 학습하면 일상생활에 큰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신학도 마찬가지여야 한다. 교리는 모두가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 어린이, 부모,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박사 학위를 가진 사람 또는 검정 고시를 친 사람을 구분하지 않아야 한다. 거짓말 2.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 모두가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 누구라도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삶을 바치고 싶어 한다. 지지하는 명분, 정치 신념, 심지어 좋아하는 스포츠팀에 사람들이 얼마나 열정적인지 살펴보라. 우리는 모두 나 자신보다 더 큰 무언가의 일부가 되기를 원한다. 신학이 하나님을 설명하는 말이고, 하나님은 진정으로 가장 중요한 존재, 즉 궁극의 실재라면, 이 세상에 이보다 더 중요한 주제가 또 있을까? 그리고 이보다 더 실용적인 게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이해하고 우리의 삶을 그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신학이라면,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있을 수 없다. 이 세상에 제대로 사는 삶보다 더 실용적인 것은 없다. 신학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바로 그 목적을 달성하도록 하나님이 준비시킨 수단이다.거짓말 3. 신학에는 감정이 없다.신학이 감정이 아니라 지성을 강조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그러나 마음에서 시작하여 마음으로 움직이는 게 신학이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 신학을 한다는 것은 마음의 변화를 목적으로, 마음을 새롭게 하는 일이다(롬 12:2). 기독교는 마음의 종교이다. 결코 차갑게 죽어서 먼지투성이로 남는 지식 유희가 아니다. 그렇다고 감정과 열정만 남아서 이성적인 믿음이라고는 찾을 수 없는 마음만의 종교도 아니다.제대로 된 성경적인 신학은 지성을 숭배하지 않는다. 오히려 “지성이 깨닫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사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지식 활동에만 머무르는 신학은 실패한 신학이다. 활기찬 지성의 활동으로 마음에 뜨거운 연료를 공급하는 신학이 바른 신학이다. 이성의 아름다움을 인식하고 이성에 어휘와 비전을 부여하는 신앙생활을 추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깊은 생각은 항상 하나님에 대한 깊은 느낌이라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송영(예배)으로 이어지지 않는 신학은 헛된 지식 추구에 불과하다. 살아 숨 쉬는 신학: 제자도의 열쇠그렇다면 신학은 학문의 영역인가?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신학은 모든 제자가 접근할 수 있도록 열려 있다. 신학은 실생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전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을 잘 알고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삶에서 가장 실제적인 일이다. 신학은 감정이 부족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이다. 참된 신학은 항상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배하도록 인도한다. 신학은 지적 수준뿐 아니라 정서적이고 실제적 수준에서 우리를 형성하기에 중요하다. 신학은 우리 삶에 총체적인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지식에서 수준이 높아갈수록 우리는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느끼고, 또 다르게 행동한다. 신학은 무엇인가?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이다. 신학은 누가 해야 하는가? 모든 사람이다. 설교하고, 기도하고, 또 찬양할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직장에 가고, 휴가를 떠나고, 연로한 부모를 돌보고, 죄와 싸우고, 자녀를 키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애도할 때도, 돈을 쓰고 늙어갈 때도 우리는 신학을 한다. 신학이 왜 중요한가? 잘 사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잘 사는 것이야말로 제자도의 핵심이다. 원제: Theology: The Missing Piece in Disciple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대사명
지상명령
제자도
전도
신학
팀 켈러의 당부: 당신의 세계관을 재점검하라
by Tim Keller
2023-07-22
기독교 신앙이 독특한 세계관을 구성한다는 생각, 그 세계관을 통해서 모든 현실을 바라보고 또 그 세계관 때문에 우리가 삶의 모든 영역에서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움직인다는 생각은 적어도 한 세기 동안 미국에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런 기독교 세계관의 개념은 이제 대부분의 미국 교회에서 사라졌다. 나는 기독교 세계관을 무시하고 싶어 하는 수많은 젊은 그리스도인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들은 왜 그럴까? 기독교 세계관에 대한 다음 비판을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 너무 합리주의적이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를 교실에서 논증을 통해 전달되는 일련의 명제나 요점으로 간주한다. 세계관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사역이 단지 지적 또는 학문적 프로젝트라는 인상을 준다. 그러다 보면 세계관과 관련해서 상상력과 이야기가 끼치는 역할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세계관 자체의 기능도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 • 너무 단순하다: 세계관의 일관성에 대한 강조(“이러한 믿음은 항상 이러한 결과로 이어져야 한다”)는 일관성이 없어도 행복한 사람들이 넘치는 현실을 전혀 설명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일관성 없는 믿음과 이런저런 세상에 관한 관점들을 대충 엮어놓은 결과처럼 보인다. • 너무 개인주의적이다: 적어도 현재 존재하는 “세계관 사고”는 공동체와 문화가 우리에게 미치는 심오한 영향을 무시하는 것 같다. 이런 현상은 우리가 주로 나 개인의 생각과 선택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는 현실을 반영한다. 이런 점에서 현재의 세계관 개념은 성경적이라기보다는 미국적이다. 우리는 더 이상 세계관이 공동체 형성의 산물이며 공동체가 삶을 이해하기 위해 사용하는 공통된 이야기의 산물이라고 보지 않는다. • 너무 승리주의적이다: 믿음과 불신앙의 시작점이 가진 대립을 강조하고 근본적인 믿음 내지 전제를 강조하는 경향은 오로지 그리스도인만 모든 진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사람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는 느낌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리고 최악의 경우 다양한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화적, 정치적 견해까지도 “성경적 세계관”의 일부로 간주하고 아예 토론의 여지조차 없다고 주장하는 상황에 이른다. 세계관 대안J. H. 바빙크가 쓴 Personality and Worldview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고 내 생각에 지금 제기한 비판을 거의 다 피할 수 있는 세계관에 대한 훨씬 더 의미 있는 이해를 제공한다. Personality and WorldviewJ. H. BAVINCK네덜란드 개혁주의 신학자 헤르만 바빙크의 조카이자 제자인 J. H. 바빙크가 쓴 Personality and Worldview는 누구에게나 있는 세계비전(worldvision)과 성숙하고 현명한 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세계관(worldview)을 구분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작품에 깊은 영향을 받은 바빙크는 독자들에게 경건한 지혜를 추구함으로써 복음이 그들의 세계관과 성격을 재구성하게 하라고 도전한다. 제임스 에글린턴이 처음으로 영어로 번역한 이 책은 바빙크의 쉬운 산문 덕분에 얼마든지 개인 적용이 가능하다. 목회자와 학생과 평신도 모두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CROSSWAY. 208 PP.세계관이 개인의 성격(personality)에 끼치는 영향에 관한 바빙크의 강조는 세계관이 단지 칠판에 적힌 일련의 중요 항목 이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이 접근법은 세계관을 지적 수단에 의해 전달되는 단순한 지적 틀로 보는 시각을 방지한다. 이 책은 단지 세계관 형성뿐 아니라 개인의 성장이라는 측면에서도 사려 깊고 “객관적”이 되기 위해서 세계관이 꼭 필요하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세계비전”과 “세계관”을 구별하는 그의 독특한 공헌을 통해서 우리는 왜 이 세상에는 일관되고 일치하는 세계관으로 사는 사람이 이처럼 극소수인지를 알 수 있다. 세계비전(또는 세계에 관한 “사고방식” 또는 “정신상태”(mentality)는 오늘날 환경이 만들어낸 일련의 기본적인 직관인데, 단순하고 환원주의적 사고라는 안경을 쓰고 현실을 바라보게 한다. 이에 반해서 세계관은 삶의 모든 영역에 영향을 미치는 기독교의 의미를 찾아가며 하루하루 기록하는, 이생에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는 일종의 지도와 비슷하다. 심리학에 대한 바빙크의 강조는 공동체 형성을 수반한다. (그는 종종 그 사실을 암묵적으로 남겨둔다.)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이전 시대의 심리학을 반영하지만, 에글린턴이 서론에서 설명하듯 바빙크는 “성격”이 단지 “타고난 기질의 특이성”의 결과가 아니라, “가족과 가정 환경, 교사와 교육, 그리고 광범위한 문화가 모든 개인 속에 형성한 세계에 대한 일련의 직관”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12). 따라서 이 책은 “사회적 상상”—세상을 상상하는 법을 익히는 공동체—이라는 찰스 테일러의 세계관 개념을 예고하고 있다. 지도 만들기로서의 세계관지도 만들기로서의 세계관을 강조하는 J. H. 바빙크와 그의 삼촌 헤르만 바빙크의 포인트는 중요하다. 세계관을 만드는 것은 세계비전의 한계와 환원주의를 초월하려는 노력이다. 세계관이 정말로 우리가 평생에 걸쳐서 힘들게 만들어내야 하는 무엇이라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사항이 따라온다. • 이 은유에 따르면 세계관은 결코 상대에게 휘두르는 완성된 무기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세계관은 승리주의를 방지한다. • 세계관은 항상 미완성이며 성장한다. 그렇기에 겸손하다. • 인도네시아의 그리스도인과 스코틀랜드의 그리스도인이 만든 지도가 같을 리 없다. 그리스도인의 교리를 삶 전체에 적용한다면, 장소에 따라서 직면하는 질문과 문제는 달라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Personality and Worldview’가 이 점을 명시적으로 말하지는 않지만, 서로 다른 문화에서는 중복되고 모순되지는 않지만, 다소 다른 기독교 세계관이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의 근거를 제시한다. 이 점 또한 승리주의를 허문다. 나는 요한 헤르만 바빙크의 Personality and Worldview가 영어로 나와서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다. 이 책은 우리가 소위 말하는 “게임 체인저”라고 불러도 될 정도로 중요한 작업이다. 나는 이 책을 번역하고 서문을 쓴 에글린턴에게 감사한다. 이 책을 주의 깊게 읽고, 오늘날 세상에서 당신의 믿음을 이해하고 실천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길 바란다. 이 글은 제임스 에글린턴이 영어로 번역한 Personality and Worldview에 실린 팀 켈러의 머리글(forward)을 간추린 것이다. 원제: Tim Keller on How to Reexamine Your Worldview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세계관
바빙크
성전
by Stephen Witmer
2023-07-15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아일랜드 시인 셰이머스 히니는 어떤 시인과 시를 시장 노점에 전시된, 다른 가게로 발걸음을 옮기기 전 당신의 눈을 즐겁게 하는 신선한 농산물에 비유한 적이 있다. 반면에 어떤 시인과 시는 당신 안에서 자라는 식물과 비슷하다. “농산물을 검사하기도 전에 이미 생명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통과하는 것 같이 느끼는 경우이다”(Stepping Stones, 50).많은 독자에게 조지 허버트는 두 번째에 해당하는 변혁적 시인이었다. 세상에 대한 관점을 바꾸는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독자의 가슴을 떠나지 않았다. 고뇌에 찬 윌리엄 쿠퍼는 허버트의 시에서 위안을 찾았다. C. S. 루이스는 가장 큰 영향을 준 열 권의 책에 성전을 넣었다. 철학자 시몬 베유는 허버트의 시 “사랑(III)”을 낭송하는 동안 그리스도가 직접 내려와서 자신을 사로잡았다고 고백했다 허버트를 사랑한 다른 작가로는 리처드 백스터, 찰스 스펄전, 사무엘 테일러 콜리지, W. H. 오든, 그리고 T. S. 엘리엇이 있다.허버트의 시가 거의 다 종교적이지만, 그의 시가 단지 그리스도인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T. S. 엘리엇은 허버트의 시가 종교적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도 가치가 있다고 주장했다. 몇 년 전, 팟캐스트에서 토론하고 싶은 시를 선택하라는 요청을 받은 영국 배우이자 자칭 타락한 가톨릭 신자인 앤드류 스콧이 꼽은 것도 허버트의 시였다. 연설가, 목사, 시인조지 허버트는 누구이며 무엇을 썼는가? 허버트는 1593년 부유한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생애 초기에 학문으로나 직업으로도 상당한 성공을 거둔 그는 학자로서도 두각을 나타내어 케임브리지 대학의 펠로우가 되었고, 1620년에는 대학의 권위 있는 연설가로 선출되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그의 삶은 예상치 못한 변화를 겪었다. 그에게 딱 맞을 거 같았던 법정 경력이 제대로 풀리지 않았다. 그 후 몇 년 동안 부유한 친척과 친구들과 함께 살면서 이런저런 진로를 타진하던 중에 결국 솔즈베리 근처의 베머턴 마을에서 성공회 교구 목사가 되었다. 거의 무명의 목사로 삼 년을 사역한 그는 마흔 살 생일 직전인 1633년에 병으로 사망했다.그 시대에 허버트는 세련된 라틴어 연설로 존경받았다. 그의 유일한 산문집인 시골 목사들을 위한 짧은 지침서, The Country Parson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 글은 수백 년 동안 널리 영향력을 미쳤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읽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의 연설도, The Country Parson도, 잠언집(천 개 이상)도, 또 라틴어 시도 그가 동시대 독자들에게 미친 놀라운 영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그가 끼친 영향력을 제대로 알려면 사망 당시에는 출판되지 않은 약 160편의 영시(숫자는 당신이 어떻게 계산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를 담은 얇은 책에 주목해야 한다. 임종 당시 그는 친구인 니콜라스 페라에게 모든 시를 넘기면서 태워버리거나. 아니면 페라가 보기에 괜찮다면 인쇄해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시를 읽은 페라는 깊이 감동되었고, 즉시 성전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은 즉각적인 성공을 가져왔다. 왜 성전은 여전히 영향력이 있는가성전은 세 부분으로 이뤄졌다. 첫 번째 “The Church-porch”는 다소 교훈적이고 도덕적인 시로 구성된 77개의 연으로 구성되었다. 때로는 기발하고 재미있고 또 기억에 남는 이 부분은 중심 내용으로 이어지는 도입 역할도 하지만, 이 책의 주요 매력은 아니다. 교회의 역사와 미래 심판의 비전에 관한 긴 시로 이뤄진 마지막 부분, “The Church Militant”도 핵심 매력은 아니다. 허버트가 미친 거대하고도 지속적인 영향력은 중심 섹션, “The Church”로 설명된다. 비그리스도인을 포함한 모든 독자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종교 시인으로 그를 꼽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실린 시 때문이다. 다섯 가지 이유가 있다.1. 허버트는 하나님께 직접 말한다아우구스티누스는 허버트가 가장 좋아한 신학자였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저작물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죽음을 앞두고 큐레이트에게 물려주었다). 허버트의 전기 작가 존 드루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속 자전적 특성이 허버트의 시가 자전적 느낌을 띠는 데에 영감을 주었다고 말한다. 고백록과 마찬가지로 허버트의 시도 상당수가 하나님에게 직접 말하는 형태이다. 이 점은 그의 시에 매력 넘치는 진지함과 더불어 절박함을 가져다준다. 모든 시가 신선하고 생생하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흥미롭다. 기도로 이뤄진 모든 시는 결코 사소하거나 가볍지 않다. 리처드 백스터가 말했다. “허버트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처럼 하나님께 말한다. … 마음으로 쓴 시이자 동시에 하늘의 시가 바로 그의 작품이다”(The English Poems of George Herbert, xxi). 많은 독자가 여기에 동의했다.2. 허버트는 참으로 정직하다안전하고 감상적인 시를 쓴 경건한 시인이라는 오해와 달리, 허버트의 시는 매우 정직하고 심지어 날것에 가까운 감정까지 드러낸다. “The Collar”에서 그는 요나와 같은 반항심을 보여준다. “denial”은 “나의 헌신이 당신의 침묵하는 귀를 뚫을 수 없을 때, 내 시처럼 내 마음이 상하였으니, 내 가슴은 두려움과 무질서로 가득하나이다”라는 구절로 시작한다. 그의 초기 전기 작가 아이작 왈튼에 따르면, 허버트는 성전 속 시를 “주인 되신 예수님의 뜻에 나를 온전히 복종시키기 전까지, 하나님과 내 영혼 사이에 있었던 많은 영적 갈등의 그림”이라고 묘사했다(George Herbert: The Complete English Works, 380). 약함과 영적 투쟁 그리고 육체적 질병 및 수많은 실망 가운데서 쓴 시가 성전이다. 허버트의 약함이야말로 독자를 그의 시에 깊이 빠져들게 한다. 3. 허버트는 다가가기 쉽다시라는 장르는 단순하거나 얕지 않다. 그러나 허버트는 일상적인 이미지(창문, 꽃, 폭풍, 도르래, 화환)와 쉬운 단어를 주로 사용한다. 그의 시를 어떤 학자는 “평범함의 미학”으로, 또 어떤 학자는 “뛰어난 명확성”으로 평가하는 이유이다. 명료함 덕분에 그의 시를 읽는 일반 독자는 좌절감에 빠져 혼란스러워하기보다는 새로운 깊이를 발견한다. 읽을수록 깊이 숙고하면서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4. 허버트는 언어의 장인이다허버트는 끝없이 창의적이며 주로 형태시(“The Altar” 및 “Easter Wings”에서와 같이 주제가 특정한 모양을 가진 사물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를 썼고, 그 속에 기도와 우화, 소네트와 찬송뿐 아니라 성경 구절(“골로새서 3:3”)도 곳곳에 숨겨놓았다. 같은 연으로 반복하는 시는 성전에서 찾기 힘들다. 그의 시가 가진 형태의 신선함은 놀라운 적합성뿐 아니라 단어 및 구문의 아름다움과도 결합한다. 그림을 떠오르게 하고 기억에 남는 언어의 몇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 “하루 종일 내 심장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위를 향할 때마다 당신을 높이는 손”• “당신을 넘치도록 찬양하나이다”• “나의 기쁨은 울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제 나의 슬픔은 노래하기 위함입니다.” • “그 심장 속 맥박까지도 당신을 찬양하나이다.” • “눈에 가득 찬 당신의 사랑”• “당신은 고통 속에서도 우리를 보나이다.”이런 단어와 문구는 시를 낭독하는 혀에 생기를 일으키고 우리 마음에 불을 붙인다. 5. 허버트는 크신 하나님을 믿었다허버트는 하나님의 크심에 매료되었다. 헬렌 윌콕스는 “성전 속 모든 시의 주제는 어떤 식으로든 하나님이다”(The English Poems of George Herbert, xxi)라고 썼다. 그게 다가 아니다. 허버트는 시 자체를 하나님을 위한 것이자 동시에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선물로 보았다. 봉헌 시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주님, 첫 열매를 당신께 드리나이다. 그러나 이 시는 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시는 당신에게서 왔기에 다시금 당신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허버트의 하나님은 주권자였다. 허버트의 신학과 시가 근본적으로 하나님 중심의 칼뱅주의라고 진 에드워즈 비쓰는 주장한다. 허버트는 하나님의 능력과 임재를 심히 좋은 소식으로 찬양했다. 다음은 “Providence”의 한 연이다.우리 모두는 당신의 권능과 사랑을 기뻐합니다 정확하고 초월적이며 신성하신 권능과 사랑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이시는 분, 세상 만물이 당신의 뜻을 가지고 있지만 또한 당신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나이다.그의 시에서 하나님이 강하면서도 부드럽게 움직인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그분의 뜻은 최고이며 또한 좋은 소식이다. 중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선택과 불가항력적 부르심의 교리를 받아들인 허버트가 그의 시 전반에 흐르는 보편적 호소라는 특징을 전혀 약화시키지 않는다는 점이다. 오히려 비쓰가 주장하듯, 종교개혁 전통에 뿌리를 둔 허버트의 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에 대한 긍정적인 비전을 “내부로부터” 전달하여 모든 종류의 독자와 연결한다. 성전 제대로 읽기허버트를 처음 접하는 독자가 성전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세 가지를 제안하겠다. 먼저 내용, 형식, 언어 또는 기타 이유에 관계없이 마음에 드는 시를 찾아라. 그리고 그 시와 함께 어느 정도의 시간을 보내라. T. S. 엘리엇의 말이다. “모든 시가 다 그렇듯, 허버트의 시를 감상할 때도 시작에서 즐거움을 찾아야 한다. 시인의 마음을 꿰뚫기 전에 시를 즐겨야 한다. 이해하려는 수고가 헛되지 않을 정도로 좋은 시라면 이해하기 전에 먼저 즐길 수 있어야 한다”(George Herbert, 28-29). 허버트의 시를 충분히 많이 읽음으로 마음에 드는 시를 먼저 만나도록 하라. 둘째, 전후 맥락에서 성전과 연결된 시를 읽고, 이어서 더 큰 맥락에서 이어진 시를 읽어라. 허버트의 시는 순서가 중요하다. 예를 들어, 허버트의 고통과 고군분투를 다루는 “Grief”와 “The Crosse”가 “many deaths”를 통해 그를 “once more smell the dew and rain”으로 인도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을 드러내는 “the Flower” 바로 앞에 온다는 점은 중요하다. 성전에는 주제별로 시를 모아놓은 부분도 있다. 예를 들어 한 시퀀스에는 예배당의 여러 부분에 대한 시가 담겨있다 (“Church-lock and key” “The Church-floore” “The Windows”). 특정 문맥 내에서 개별 시를 읽는 것은 새로운 울림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신선한 빛을 비춰준다. 또한 허버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가 주요하게 다루는 주제(corpus)와(성전과 The Country Parson 사이에는 중요한 연관성이 있다) 삶(존 드루리의 Music at Midnight는 이 점을 이해하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그리고 성경이라는 맥락 내에서 읽는 것이 중요하다. 허버트는 성경을 사랑했고(“O Book! Infinite sweetness!”), 그의 시는 성경에 대한 인용과 암시로 가득하다. 이런 다양하고 넓은 맥락에서 시를 읽는 것이 유익하다. 세 번째로, 하나님과 당신 자신을 더 깊이 이해하는 데에 허버트의 도움을 받아라. 그의 간절함과 통찰력, 그리고 열정과 정직 및 경건이 큰 도전과 감동을 줄 것이다.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신선함과 아름다움은 당신의 가슴과 마음에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그의 시는 당신이 생각하고 느끼는 방식을 바꿀 것이다. 셰이머스 히니의 말을 빌리자면, 허버트의 시가 당신 안에서 무럭무럭 자라도록 하라.원제: The Temple: A Reader’s Guide to a Christian Classic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성전
조지허버트
기독교고전으로의초대
하나의 복음, 두 각도, 그리고 네 ‘움직임’
by Matt Smethurst
2023-07-13
현실을 직시하자. “복음”이라는 단어는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끼리 나누는 대화에서조차 제대로 사용되지 않는다. 정작 복음 속 중요한 의미가 사라지거나 억제되기도 한다. 복음 속 좋은 소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소식”(news)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결국에는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하는 원천이다. 기독교는, 그 본질을 말하자면, 좋은 ‘조언’이 아니다. 기독교는 좋은 소식의 선포이다. 복음을 이해하려고 신학교까지 갈 필요는 없다. 사역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에게 제대로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을 이해하는 데는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 그리스도인이 되고서 5분도 기다릴 필요 없다. 꼭 알아야 하는 건 2,000년 전에 어떤 침략이 일어났다는 사실이다. 천국이 예수라는 인간이 되어 이 땅에 내려왔고, 예수님은 새 나라를 열었다. 33년 동안 그는 아버지 하나님을 향해서 확고하고 완벽하게 충실한 삶을 살았다. 당신과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결코 살 수 없는 삶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사랑했기에 마땅히 우리가 죽어야 할 죽음을 대신 죽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내가 믿는 사실은 이것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죄 많은 삶을 산 나처럼 취급받았고, 그래서 이제 나는 예수님의 의로운 삶을 내가 살았던 것처럼 대우받는다. 예수님은 묻혔다. 그러나 사흘 뒤에 벌떡 일어나 무덤에서 걸어 나왔다. 명백하게 사악한 삶이건 교묘한 “종교적” 다양성이건 관계없이, 지금까지 살아온 반역의 삶에서 돌이켜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제 누구도 예외 없이 이생과 다음 생에서 그와 연합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처럼 새 땅에 적합한 새 몸을 입고 부활할 것이다. 우리는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주님의 기쁨에 동참할 것이며, 그분 아래서 영원히 우주의 왕이 되어서 다스릴 것이다. 할렐루야!회의적인 시대에 이런 이야기는 속기 쉬운 아이들에게나 통할 억지스러운 동화처럼 들릴 수도 있다. 사실이기에는 너무 좋은 이야기가 아닌가? 그러나 이 소식은 온전히 사실이다. 우리가 이런 축복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찬양 가사처럼 말이다. “내가 뭘 했다고 이런 놀라운 상급을 받습니까? 아, 나는 알 수 없습니다.”그러나 자비란 원래 공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자비라고 불린다. 하나의 복음, 두 각도나는 버지니아 리치먼드에서 사역하는 목사이다. 내가 사는 이 도시에 관해서 말하자면, 비행기를 타면 더 잘 보이는 것들—우리 도시만의 크기, 윤곽, 인구 밀도 등등—이 있다. 또한 이 도시의 대로를 걸으면 더 잘 배울 수 있는 것들도 있다. 하늘에서 보는 것과 걸으면서 느끼는 것, 두 가지 관점 모두 리치먼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전체 조감도가 없는 거리 수준의 관찰에도, 거리의 관점이 생략된 조감도에도 허점이 있을 수밖에 없다. 이건 물론 단지 지리학적인 이야기이다. (예를 들어, 리치먼드의 역사와 문화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배워야 한다.) 요는 한 도시를 관찰할 때도 다양한 각도에서 보지 못하면 일차원적이고 왜곡된 시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매트 챈들러가 지적한 것처럼 복음은 두 가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더 잘 관찰할 수 있다. “공중에서” 보는 관점과 “땅에서”에서 보는 관점이다. 버지니아에 수도가 하나인 것처럼, 복음도 하나이다. 하나의 복음을 두 각도에서 바라보며 우리는 감탄한다. “공중에” 있는 복음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몇 가지 줄거리로 요약될 수 있는 포괄적인 이야기이다(예: 창조, 타락, 구속, 새 창조). 한편, “땅에서” 보는 복음은 이 장대한 내러티브가 어떻게 우리와 같은 죄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되는지를 구체화한다(예를 들어, 하나님, 인류, 그리스도, 그리고 우리의 반응).나는 이 글을 시작하면서 복음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간략한 요약을 제시했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 훨씬 더 많은 내용을 채울 수 있다. “공중”과 “지상”, “와이드 렌즈”와 “줌 렌즈” 같은 상호보완의 관점을 가장 잘 종합하는 한 가지 방법은 복음 이야기를 네 가지 움직임(movements)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통치자(Ruler), 반역(Revolt), 구원(Rescue), 응답(Response)이 그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복음을 보다 더 풍부한 맥락에서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앞으로 누군가와 믿음을 나눌 때 훨씬 더 제대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통치자“태초에 하나님이…”(창 1:1). 성경은 현실에 관한 역사의 가장 기본적인 진술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유지하시고 또 다스리신다. 현대 문화가 흔히 범하는 잘못된 개념과 달리, 하나님은 하늘의 산타도, 우주의 자판기도, 짜증만 내는 교관도, 그리고 아이 앞에서 꼼짝 못 하는 아빠도 아니다. 하나님은 영광의 왕이시며 사랑의 주님이시다. 영원한 백성의 공동체이시며, 성령의 기쁨 안에서 아들을 사랑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사랑과 기쁨에 넘치는 하나님은 삼위로 영원히 존재하신다.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우주의 중심에 있다.다름 아니라 바로 이 삼위일체 하나님이 당신과 나라는 인간을 만드셨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누리기 위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이 만드셨고(그분만이 우리를 소유하신다는 의미), 하나님만을 섬기며 살도록(그분만이 우리를 만족시키신다는 의미) 창조되었다. 인간은 성공과 인기, 오락과 로맨스, 자기 자신이 아니라 오로지 창조주 안에서만 제대로 된 의미와 성취감을 추구하도록 맞춤 설계되었다.자, 당신은 어떤가? 당신의 삶이 창조주 안에서 온전히 만족하고 그를 모든 것 위에 소중히 여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가? 나는 확실히 아니다.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반역우리 마음에서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사랑을 찾는다. 우리의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등을 돌리고 엉뚱한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창조세계를 망가뜨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들을 죄의 바다에 빠뜨렸다. 지금 우리의 상태는 그 두 사람으이 일으킨 비극의 여파이다. 창조주를 위해 살지 않고 나 자신을 위해 산다. 죄의 촉수는 우리의 마음을 변형시키고 우리의 사랑을 무질서하게 만든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죄로 물든 본성과 자의로 사랑의 주님에게 반역했다. 죄를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간주하는 건 쉽다. 겉으로 드러나는 고약함 또는 하늘나라에서 범하는 주차 위반 딱지 정도로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이야기하는 죄는 심각하다. “우주적 반역” 곧 하나님 나라 자체에 대한 반란이다. 죄의 본질과 관련해서 두 가지 진리를 바로 아는 것이 중요하다. 1. 죄는 행동이 아니라 관계와 더 깊은 관련이 있다.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반역했을 때, 그것은 단지 행위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존재의 중심에서 시작한 배신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창조주를 속였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죄는 종종 영적 간음으로 표현된다. 우리는 필사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다른 무엇을 중심으로 삶을 구축하려고 발버둥질한다. 창조주께 받은 좋은 선물을 우리는 오히려 창조주를 대신하는 우상으로 만들어 숭배한다. 2. 죄는 수평적이라기보다는 수직적인 문제이다. 죄가 미치는 수평적 영향도 파괴적이지만, 죄는 근본적으로 수직적 문제이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삼상 13:14)인 다윗은 우리 모두가 처한 곤경을 고백한다. “나의 반역을 내가 잘 알고 있으며, 내가 지은 죄가 언제나 나를 고발합니다. 주님께만, 오직 주님께만, 나는 죄를 지었습니다. 주님의 눈 앞에서, 내가 악한 짓을 저질렀으니”(시 51:3-4; cf. 창 39:9; 눅 15:21).여기에 흥미로운 사실이 있다. “sin”(죄)은 단수형이지만 의미는 단지 단수에 머무르지 않는 유일한 영어 명사이다. “Sin”은 “sins”보다 더 포괄적이다. 깊은 수준에서 고찰할 때, 우리는 죄를 지었기에 죄인인 게 아니라,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는 말이 옳다. 하지만 상황은 더 나쁘다. 이것을 숙고하라. ‘나-주의’(me-ism)와 우상숭배의 결과는 다름 아닌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파멸적 갈라짐이다.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들어보자.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의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고, 너희의 죄 때문에 주님께서 너희에게서 얼굴을 돌리셔서, 너희의 말을 듣지 않으실 뿐이다”(사 59:2). 우리는 하나님 형상의 소유자로서 우리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계획을 저버렸고, 그 결과 생명과 사랑의 궁극적인 근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우리가 죽는다는 것은 공의의 심판을 맞는다는 의미이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죄의 결과로 우리는 너무도 당연하게 하나님의 진노, 곧 악에 대한 하나님의 거룩하고 확고한 반대 아래 놓이게 되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롬 8:31). 바울은 신자들에게 묻는다. 이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이 당신을 반대하시는데, 누가 감히 당신 편을 들겠는가? 복음을 알고 싶다는 측면에서 볼 때, 그러면 얼마나 선해야 천국에 갈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이다. 하나님만큼 선해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 하나님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사람만이 하나님과 영원히 함께할 수 있다. 하나님과 똑같은 수준을 요구하는 도덕적 완전성은 실로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쁜 소식이다. 한마디로 나 자신의 의로움에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우리는 지옥이라는 절망적인 미래를 앞에 두고 있다. 지옥이 어떤 곳인가? 하나님이 안 계신 곳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과 공의로움도 없는 곳이다. 여기 에베소 교회에 바울이 한 설명이 있다.여러분도 전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그 때에 여러분은 허물과 죄 가운데서, 이 세상의 풍조를 따라 살고, 공중의 권세를 잡은 통치자, 곧 지금 불순종의 자식들 가운데서 작용하는 영을 따라 살았습니다. 우리도 모두 전에는, 그들 가운데에서 육신의 정욕대로 살고, 육신과 마음이 원하는 대로 행했으며, 나머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날 때부터 진노의 자식이었습니다. (에베소서 2:1-3)그런데 이렇게 계속 우리의 죄와 허물을 나열해 나가는 대신에, 바울은 “그러나”라며 말을 돌린다. 당신의 영원 여부가 이 작은 한 단어 “그러나”에 달려 있다는 사실을 생각한 적이 있는가? 구원그런데 역사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다. 구원을 위해 예수님을 의지하는 사람들의 궤적을 바꾸는 사건이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인 “그러나”가 있는 이유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가 넘치는 분이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크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범죄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려 주셨습니다. 여러분은 은혜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에베소서 2:4-5)수 세기에 걸친 하나님 백성의 반역이 있고 나서, 영원한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배아, 아기, 청년, 그리고 성인이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갈 수 없기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오셨다(히 2:14-15). 나사렛 목수는 33년 동안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 끊임없는 헌신과 순종의 삶을 살았다. 그는 쉬지 않고 기도했지만, 고백할 죄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는 한 번도 참회의 기도를 하지 않았다. 예수님은 아담이 살지 못한, 이스라엘이 살지 못한, 그리고 당신과 내가 살지 못한 도덕적으로 완전한 삶을 사셨다.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려온 메시아는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빌 2:8). 율법을 만드신 이가 율법을 지키다가 율법을 어긴 이들을 위해서 죽었다. 법을 만든 사람이 법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법을 어긴 이들을 대신해서 죽었다. 우리는 이제 기독교 신앙의 뜨거운 중심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이르렀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아들에게 벌을 내렸다. 온전하지 않은 사람들을 대신해서 온전한 그의 아들에게 형벌을 내렸다. 그러나 유일한 사건은 단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목적이 단지 우리의 죄를 없애는 것뿐이었다면, 십자가의 결과는 다시 우리를 원점으로 되돌리는 것에 그쳤을 것이다. NBA 정규 시즌에 모든 팀은 여든두 경기를 치른다. 그 어떤 팀도 무패의 완벽한 시즌을 달성한 적이 없다. 이런 반론이 있을 수도 있다. “잠깐만요. 우리 팀 기록은 지금 0-0이거든요? 완벽한 시즌입니다. 한 경기도 진 적이 없습니다!”누구라도 황당한 소리 하지 말라고 반응할 것이다. “당신 팀은 경기를 하나도 안 했잖아요? 모든 경기를 치르고 다 이겨야 진짜 완벽한 시즌입니다.”에덴에서 아담과 하와의 도덕 기록은 말하자면 0-0이었다. 죄를 짓지 않았기에 “무패”라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살아가면서 의로움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결코 “완벽한 시즌”을 보낸 게 아니었다. 하나님에게서 돌아섰을 때 그들은 영적으로 파산했다. 그들의 기록은 0-82로 급락했다. 그게 바로 우리가 물려받은 도덕 기록이다. 그러나 역사의 한가운데서 한 남자가 82-0이라는 전례 없는 기록을 세웠다. 농구의 예를 계속하자면, 요점은 이것이다. 예수님이 단지 죗값만 치렀다면 우리의 도덕 기록은 0-0일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단지 82패라는 손실만 흡수한 게 아니다. 그는 또한 빈 무덤으로 증명된 여든두 번의 승리를 신자에게 안겨주었다(롬 4:23-25). 우리의 기록은 순식간에 0-82에서 82-0, 그러니까 전패에서 전승이 되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한 번도 그분을 화나게 한 일을 한 적이 없는 존재가 되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단지 그분을 기쁘게 할 뿐이다. 할렐루야!바울은 그리스도를 가리켜 이렇게 표현한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모르시는 분에게 우리 대신으로 죄를 씌우셨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고후 5:21). 십자가에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죄로 가득한 죄인으로 대하셨고, 우리를 흠 없는 삶을 산 그리스도처럼 대하셨다. 신학자들이 이것을 “달콤한 교환”이라고 부르는데, 전혀 이상하지 않다.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위해 복음을 이해한다고 할 때, 이 모든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청교도 리처드 십스의 말을 들어보자.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 당신이 누구든, 당신이 무엇을 했는지에 관계없이 이 놀라운 소식을 들어라. 우리 안에 있는 죄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가 훨씬 더 크다.요즘 같은 문화 환경에서 예수님이 단지 우리의 자존감을 높이거나 도덕 모범을 보이기 위해 죽은 게 아니라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아무리 선한 의도에서 나왔다고 해도, 그런 식의 관점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인간의 수준으로 왜곡한다. 인간이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려고 건방지게 날뛰었기에, 하나님이 몸이 구부려 인간의 모습을 취하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내가 좋아하는 존 스토트의 설명이다. 대속의 개념은 죄와 구원 두 가지 모두의 핵심이다. 죄의 본질은 인간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고 구원의 본질은 하나님이 인간을 대신하는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에게 맞서 자신의 우월함을 주장하고 오직 하나님만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을 둔다. 하나님은 인간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인간만이 있어야 할 곳에 자신을 두셨다. 인간은 오로지 하나님께만 속한 특권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속한 형벌을 기꺼이 받으신다. 아멘. 그러나 복음을 전할 때 예수님이 계속 십자가에 매달려 있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해야 한다. 잔인한 죽음 후, 그의 시체는 “안전한” 무덤에 안치되었고(마 27:65-66), 다시는 그 무덤으로부터 전해진 소식은 없었다. 죽음의 세력이 생명의 주를 막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행 2:24; cf. 3:15). 그는 약속한 대로 셋째 날 무덤에서 나왔다. 믿음을 나눌 때, 부활이 단지 복음의 “추가 사항”으로 취급되어서는 안 된다. 부활이 없으면 복음도 없다.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으로 하나님은 십자가에서 그의 희생이 받아들여졌음을, 죄에 대한 공정하고 완전한 대가를 치러졌음을 공개적으로 확언하셨다. 하나님이 구원 수표에 서명한 날이 성금요일이라면, 수표가 현금으로 바뀐 날이 부활 주일이다. 죽고 부활해서 승천하고 자기 백성을 위해 지금 중보기도 하는 예수님은 어느 날 재림하실 것이다. 그를 믿지 않은 정의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믿음을 가진 자는 자비의 대상이 될 것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은 이 땅에서 도망가는 게 아니라 이 땅을 회복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속받은 백성은 죄가 일으킨 재앙이 훼손하지 않은, 새롭게 창조된 세상을 상속받을 것이다. 성경은 그 현실을 구체적이고 물질적인 용어인 “새 하늘과 새 땅”(사 65:17; cf. 벧후 3:13; 계 21:1-4)이라는 미래의 집으로 묘사한다. 일반적인 통념과는 달리 우리는 통통한 천사들과 황금 하프를 연주하며 떠돌아다니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달리고, 일하고, 놀고, 노래하고, 웃고, 쉬면서 선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이 베푸는 끝없는 경이로움을 즐길 것이다. 당신의 응답고속도로 통행료 부스에서 돈을 받는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누는 게 의미 있는 경험인가? 꼭 그렇지는 않다. 그건 단지 비즈니스 거래이다. 당신이 돈을 내면 그 사람은 차단막을 올린다. 당신은 당신 할 일을 하고 상대도 자기 할 일을 할 뿐이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이런 식의 관계가 아니다. 무감각한 거래 관계가 아니다. 결혼하는 것과 비슷하다. 아주 개인적인 결합이다. 당신은 그리스도의 자비에 당신 전부를 던진다. 그는 당신을 붙잡고 절대 놓지 않는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고 싶은 이 복음을 우리가 이해하려고 할 때, 우리는 이제 가장 중요한 질문에 대답할 준비 되었다. 하나님과 평화를 이루려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1. 돌아서라첫째, 죄에서 돌아서야 한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악을 고백하는 데에는 하나같이 능숙하다. 하지만 중요한 건 나 자신의 죄 때문에 내가 가장 황폐해져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의미이다. 마음을 바꾸고 180도 돌아서라. 자신을 위해 살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2. 믿으라둘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 우리는 죄에 대해 “아니요”라고 말하고 예수님을 향해서는 “예”라고 한다. 그가 우리를 위해 성취하신 일과 무조건 용서하시겠다는 변하지 않는 약속을 받아들인다. 회개와 믿음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3. 보물로 받아들이라우리는 예수님을 소중히 여긴다. 기술적으로 이것은 세 번째 단계가 아니라 두 번째 단계의 결과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치아 임플란트 뿌리를 박는 것처럼 단계적인 차원에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가 있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님을 주님과 구주, 보물로 받아들이는 것을 수반한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 예수 그리스도가 단지 지옥행에서 나를 구해주는 무료 승차권 이상이라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따르고, 경배하고, 또 소중히 여기고, 즐길 수 있는 살아있는 사람이다. 그분을 아는 것만이,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과 우리가 올바른 관계로 회복되는 유일한 길이다(요 14:6; 17:3). 그를 통해 우리는 용서의 기쁨과 성령의 도우심, 나아가서 내세의 소망까지 경험할 수 있다.세례를 받거나, 교회에 가거나, 기독교 정서가 담긴 글을 올리거나, 기도하거나, 카드에 서명하거나, 교회 복도를 걷거나, 여름 캠프에서 솔방울을 불에 던진다고 구원받지 않는다. 우리 각자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질문은 이런 식의 모든 외양적 요소와 조금도 관계가 없다. 진짜 질문은 당신의 심장을 겨냥한다. 바로 지금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생명을 걸고 오로지 예수님만을 의지하고 있는가?복음은 응답을 요구한다. “지금은 구원의 날”이라고 바울은 주장한다(고후 6:2). 우리의 믿음을 나누면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요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자. 무엇보다 영원을 결정하는 중대한 결정의 지점으로 그들을 인도하자. 복음이야말로 지금까지 전해진 최고의 위대한 소식이다. 그리고 누구라도 그 소식으로 생명을 얻을 수 있다.Matt Smethurst의 Before You Share Your Faith: Five Ways to Be Evangelism Ready 에서 간추린 글입니다.원제: The Gospel Explained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복음
복음전도
구원
대속
회개
반역
죄
성경 전체를 어떻게 통합적으로 이해할 것인가
by Phil Thompson·Andreas Koestenberger
2023-07-06
최근 남자 성경 공부에서 한 대학생이 “성경의 메타 내러티브”가 우리가 검토하고 있는 구절을 이해하는 데 어떻게 도움을 주는지 설명했다. 불과 이십 년 전,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교수를 제외하고 이런 식의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평신도도 성경 속 각각의 책을 연구하고 그게 성경이라는 전체 이야기를 통해서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에 어떤 역할을 하는지 조사하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 무엇이 바뀐 걸까? 차세대 지도자들이 성경의 상호 연결성이라고 가정하는 지점에까지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었던 걸까? 수십 명의 저자가 수천 년에 걸쳐 여러 언어로 기록한 방대한 책 성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가정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오늘날 젊은 지도자들은 수십 년간 축적된 성경신학 연구로부터 많은 유익을 얻고 있다. 성경신학이라는 학문은 복음주의 교회와 특히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의 사역으로 드러나는 개혁신학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성경신학이 널리 보급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분야는 여전히 새로운 연구를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그리고 모두가 간절히 바라던 새로운 작품이 약 1,000쪽 분량의 방대한 책으로 탄생했다. 안드레아스 J. 쾨스텐버거와 그레고리 고스웰이 쓴 BibIical Theology: A Canonical, Thematic, and Ethical Approach이다 쾨스텐버거는 성경 연구자에게 낯선 이름이 아니다. 그는 성경 입문서, 주석, 해석학 안내서, 사역 자료 등 수십 권을 썼다. 의심할 여지 없이, Biblical Theology는 수십 년에 걸친 쾨스텐버거의 목회와 저술 속 많은 내용이 함축된 초석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해서 공동 저자인 시드니 크라이스트 칼리지 출신의 그레고리 고스웰은 구약에 대한 더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제공한다. 두 명의 구약과 신약 학자는 우리가 성경의 음성을 더 잘 들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 나는 이 새 책과 관련해서 쾨스텐버거와 서신을 주고받았고 그는 새로운 접근 방식이 어떻게 성경 속 66권의 모든 책에 다 나름의 역할을 부여하는지 설명했다. 성경신학이란 무엇이며 조직신학과 같은 다른 학문이나 신학적 성경 해석(Theological Interpretation of Scripture/TIS) 같은 운동과는 어떻게 다른가? 성경신학은 다양한 성경 본문을 지속적으로 경청함으로써 성경 저자의 신학이 무엇인지를 추구한다.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설명하자면, 성경신학이 연결에 관한 학문이라면 조직신학은 구성에 관한 학문이다. 성경신학에서 우리는 정경 속 다른 목소리를 서로 연결한다. 같은 구약이지만 오래된 책과 상대적으로 후기에 기록된 책들 사이의 연결,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연결 등등이다. 그러다 보면 더 오래된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구약 본문을 인용하는 신약의 저자를 만나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6:35; 8:12; 10:7, 11; 11:25; 14:6; 15:1) 속 예수님의 “나는 ∼이다”라는 말씀은 이사야서 40-66장 속 여호와에 대한 이사야의 언어를 반영하는 것 같다. 이사야서의 내용은 또한 출애굽기에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있는 자”(출 3:14)라고 스스로 밝히신 내용을 상기시킨다. 성경신학은 역사적, 귀납적, 서술적 학문이기에, 우리는 본문 자체의 용어로 본문을 이해하고 본문 사이의 연결 또는 “텍스트 간 연결”을 섬세하고 주의 깊게 그리려고 노력한다. 더불어서 성경 용어, 원래의 역사적 배경, 그리고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다루신 역사에서 그들의 위치와 시간이 갖는 의미 등을 존중하면서 본문을 파악하려고 한다. 이상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조직신학은 성경신학에 바탕을 두고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 성령, 교회 같은 중요 주제별 분류에 기초해서 신학적 구성에 관여하는 학문이다. 따라서 조직신학은 성경 자료를 주제별로, 논리적으로, 그리고 현대적 맥락에서 배열함으로 오늘날에도 인간에게 성경이 없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TIS에 관해서 물어야 할 핵심은 사람들이 “신학적”이라는 말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이다. 신학적이라는 말이 하나님을 성경의 저자로 인정하는 것이라면, 즉 성경은 하나님의 계시이며 하나님, 그리고 그분의 성품과 길을 계시하기 위해 쓰였다고 받아들이는 의미라면, 성경신학과 TIS 사이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다.그러나 TIS가 성경의 신학적 해석을 발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전혀 그렇지 않다. 최고의 주석가들은 항상 본문에 대한 신학적 질문을 던진다. TIS의 경우에 성경 접근과 관련해서 하나님으로 시작하는 것 자체가 광범위하고 연역적 전제이지만, 성경 신학에서는 본문을 귀납적으로 해석하고 성경 저자들이 지닌 신념과 확신에 따라서 관련된 성경 구절 사이의 연결을 그린다. 우리는 성경 언어와 석의에 대한 능력을 갖춘 성경학자들이 크게 이바지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최고의 모델은 실무자들이 관련한 전문 지식을 테이블에 가져와 함께 작업하는, 다양한 분야 간의 진정한 파트너십 구축이라고 믿는다. Kaiser, Schreiner, Thielman, Guthrie 또는 Marshall의 작품을 보면서 바득바득 이를 가는 신학교 사람들에게 당신의 접근 방식은 그들과 어떻게 다르다고 말할 수 있을까? 성경 66권 각각의 책에 담긴 ‘정경’ 및 ‘윤리’ 섹션이 당신의 고유한 접근 방식에 어떤 역할을 하는가?당신이 언급한 학자들은 신약신학 또는 구약신학만을 저술한 반면에 우리는 성경 전체를 아우르는 성경신학이다. 사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복음주의 영어권에서 성경신학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나는 여기서 특히 Beale, Schreiner, Thielman, Witherington을 말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그중에서도 딱 한 사람(이 사람의 전문 분야는 신약인데)만이 전체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우리 두 사람의 경우, 우리는 각자의 전문 분야를 꺼내놓고 논의함으로 진정한 협업 프로젝트를 이뤄냈다. 나와 그레고리는 성경신학을 중요한 윤리적 의미를 지닌 귀납적, 역사적, 그리고 서술적 학문으로 이해하는 공통된 방법으로 이 작업을 완성했다. 66권으로 이뤄진 하나의 도서관을 구성하는 다양한 저술들 사이의 연관성을 끌어내기 위해서는 정경이 매우 중요하다는 믿음에서도 우리는 하나가 되었다. 우리는 66권 각각의 책이 나름의 위치를 차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으며, 우리가 한 권 한 권 책 별로 접근해서 이번 책을 완성한 이유이다. 각각의 책에 대해서 우리는 주요 주제, 윤리적 가르침, 그리고 정경적 공헌을 다뤘다. 정경적 공헌은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전체의 줄거리에서 그 책이 차지하는 위치에 관한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발견한 내용을 종합하고 모세 오경의 윤리나 복음서의 주요 주제에 대한 토론을 포함시켰다. 마지막 장에서는 왕국, 언약, 십자가, 사명,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과 같이 12가지의 중심이 되는 구약과 신약 주제를 논의함으로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통합된 시각을 제공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가 그 사랑에 보답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바람이야말로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 중 하나임을 확인했다. 이런 방식으로 성경 속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을 확인하는 것이야말로 성경신학 분야가 이루어내는 독특한 공헌이라고 믿는다. 우리가 아는 한, 주류 성경신학 학계에서 지금까지 우리가 다룬 식으로 이 주제를 연구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돈 카슨과 함께 당신은 성경신학의 총체화(totalizing) 경향을 일축했다. 거기에 무슨 문제가 있다고 보는가? 성경신학의 단일 센터 추구에 관해서는, 단일 센터라는 “성배”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돈 카슨의 회의론은 충분히 근거가 있으며 또한 그런 식의 노력이 필연적으로 환원주의적이라는 데에도 동의한다. 우리는 또한 성경신학의 척도는 성경의 다양성을 얼마나 잘 다루는가에 달려있다는 카슨의 현명한 조언에도 동의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의 통일성과 다양성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맞추는 성경신학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 우리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아서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절제된 가족 대화라는 은유를 사용한다. 이 은유를 성경신학에 적용할 때, 우리가 추구하는 바는 명확하다. 성경적 자료를 연결하고 종합함으로 우리는 모든 성경이 자기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정경 간 대화를 조정하는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경에 크게 기여하는 약 12개의 구약과 신약 주제를 찾아냈다. 동시에 우리는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의 핵심이라고 믿는다. 예수님은 우리가 마음과 영혼과 생각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약 전체의 요약이라고 가르쳤다.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미덕은 사랑이라고 했으며 요한의 사랑 윤리는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따라서 약 750쪽에 걸쳐서 우리는 여러 주제와 윤리적 가르침을 논의함으로 성경신학이 스스로 목소리를 내도록 한 것이다. 책 전체에서 당신은 정경 속 책 순서의 중요성과 또한 순서가 텍스트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형성하는 방식을 강조했다. 정경 순서가 성경 이해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예는 무엇이 있을까? 정경 순서에 대한 다양한 방식(schemas)이 성경에 접근하는 데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책의 위치가 그 책을 이해하는 데에 어떻게 영향을 끼치는가, 그리고 다른 책과 관련해서까지 어떤 역할을 하는가에 관해서 구약과 신약에서 각각 하나씩 예를 들겠다.헬라어 성경에서 예레미야 애가가 예레미야서 다음에 배치된 것은 예레미야서를 제대로 읽는 데 필요한 기본적 연결고리를 만든다. 애통하는 목소리 중 하나가 예레미야라면, 이것은 심판의 선지자와 고통받는 백성 사이의 화해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백성을 정죄한 선지자가 그들의 고통을 인정하고 고통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히브리 정경 속 위치로 볼 때, 애가는 전례(liturgical)에 필요한 다섯 개의 축제 두루마리(메길로트) 중 하나였다. 이런 식의 배치는 그 책이 역사적 위기라는 맥락 속에 포함되지 않으며 도리어 미래에 만날 위기에 필요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으로 시선을 돌려보자. 이 책은 그 어떤 고대 사본이나 정경 목록에서도 누가복음 다음에 나오지 않는다. 저자가 같고 둘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사도행전 1:1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은 신약 정경이라는 삶 속에서 사실상 별개로 살았고, 그들의 근접성 부족은 각 권이 전혀 다른 맥락에서 읽어졌음에 관한 진술이다. 정경적 관계에 있어서 사도행전은 특히 누가복음보다는 정경적 블록으로서 다른 복음서와 고리를 맺고 사복음서와 서신서를 연결함으로 신약의 증언에 통일성을 주는 데에 도움을 준다. 왜냐하면 사도행전은 이후에 많은 편지를 쓰고 또 많은 교회를 설립한 바울의 사명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바쁜 목회자가 성경신학을 설교 준비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건전한 성경신학에 의해 만들어진 설교는 그렇지 않은 설교와 어떻게 다른가?목사는 강해설교뿐 아니라 성경신학적 설교도 해야 한다. 따라서 어떤 본문을 설교하건 간에, 전체 정경의 틀에서 보아야 한다. 이 말은 설교 본문을 성경 속 관련된 다른 내용과 연결하려고 시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창세기에 나오는 요셉의 이야기를 설교할 때, 목사는 그 이야기를 창세기 앞부분에 나오는 아브라함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과 관련시켜야 한다. 동시에 뒤에 나오는 성경 내용과도 연결해야 한다. 특히 요셉의 이야기가 예수님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탐구해야 한다. 수많은 연결 지점을 찾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설교자가 이런 식으로 연구하고 설교 준비를 한다면, 그는 영적 풍요를 경험하고 더불어 시야가 넓어질 것이다. 더불어서 그는 교인들을 성경적 메타 내러티브로 끌어들이고, 그들 스스로 성경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능력을 크게 향상시킬 수 있도록 총체적이고 정경적인 접근 방식을 모델로 제시하게 된다. 어떻게 이런 설교가 가능할까? 목사가 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본문을 면밀히 읽고, 그 이해에 기초하여 본문의 신학적 메시지와 교인들 사이의 진정한 연결점을 분별함으로 가능하다.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원한다. 또한 삶의 도전과 실존적 상황 속에서 그들은 성경의 음성을 갈망하고 있다. 당신이 가장 기대하는 성경신학의 새로운 경향은 무엇인가? 향후 20년 동안 미래의 학자들이 탐구할 새롭고 유익한 방향은 무엇인가? 혹시 몇 년 안에 우려해야 하는 성경신학의 어떤 경향이 있는가? 급성장하는 분야 중 하나인 성경신학은 교회와 학계에 엄청난 양을 제공하는 활기찬 학문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성경 각 권 또는 성경 전체를 다루는 다양한 책과 여러 시리즈가 출간되어 있다. 그중에는 내가 편집하는 Biblical Theology of the New Testament Series도 있는데, 조만간 마태복음, 히브리서, 그리고 요한계시록의 완결을 기다리고 있다. 40권으로 예정된 Evangelical Biblical Theology Commentary 시리즈는 현재까지 몇 권만 인쇄되었다. 다른 유용한 시리즈로는 New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Essential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그리고 Short Studies in Biblical Theology 등이 있다. 단언컨대 성경신학은 많을수록 더 즐거운, 실로 광할한 분야이다!한 가지 우려는 “성경신학”이라는 용어가 가지는 다양한 정의와 방법이다. 그렇기에 성경신학을 연구할 때 우리는 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정확하게 정의해야 하고 또한 연구 방법에도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레고리와 나는 처음부터 정의와 방법의 문제를 명확히 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성경신학과 조직신학의 구분을 무너뜨리는, 우리가 볼 때 일종의 혼합적 접근을 실천한다. 그들은 특정 신학적 체계를 전제로 하고, 거기에다가 성경적-신학적 내용을 쏟아붓는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할 때, 그러한 접근 방식에서 성경신학은 더 이상 순수 귀납적일 수 없다. 물론 순수한 귀납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우리는 신학 체계의 전제를 막는 노력과 더불어 여전히 귀납법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지금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주의하길 바란다. 성경신학의 기치 아래 판매되는 모든 것이 반드시 동일한 정의와 방법에 기초한 것은 아니다.Biblical Theology 마지막 부분에서 그레고리와 나는 성경신학의 미래를 다뤘다. 우리가 미래를 안다고 주장한 게 아니라, 우리가 원하는 미래를 논했다. 우리는 성경신학이 밝은 미래를 가지고 있다고 믿으며 노력해야 할 것과 피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새로운 세대의 학자들이 이론적으로 책임 있고, 방법론적으로는 미묘한 차이를 일으키며 동시에 신학적으로 정제된 성경신학을 만들길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다음 영역에서 더 많은 작업이 수행되어야 한다. · 성경신학의 명확한 정의와 조직신학과의 적절한 구분.· 다른 학자의 발견에 대한 더 큰 협력 정신과 개방성, 반대로 해당 분야의 학자들 사이에서 덜 경쟁적 관계.· 마스터(만능) 열쇠 탐색을 포기하고 대신 다중 접근 방식 채택.· 이번 책에서 모델링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성경 신학과 윤리 간의 더 큰 통합.· 주요 주제, 성경의 줄거리, 정경 구조와 관련해서 성경 속 각 책이 추구하는 신학에 대한 적절한 관심.· 예수와 관련해서 구약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의 폭이 더 커지는 것. 구원이 아닌 창조로 성경신학을 시작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선교가 마땅히 받아야 할 관심을 받는, 진정한 글로벌 접근을 이루는 것.· 성경신학을 사용하여 성경을 읽는 신선하고 흥미진진한 방법으로 새로운 세대의 설교자를 양성하고 또 전체 회중을 양육함으로써 학계뿐 아니라 교회를 섬기는 것.원제: How to Make Sense of the Whole Bibl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경신학
조직신학
신학적성경해석
하나님이 기뻐하시니
by Sam Crabtree
2023-07-04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한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세상이 엉망진창이라면(사실 그렇다), 또 이 난장판의 책임자가 하나님이라면(사실 그렇다), 이성적인 사람이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게 과연 가능할까? 정말로 이 모든 일에 궁극적인 책임이 하나님에게 있다면, 어떻게 그를 신뢰하고 또 그로 인해서 기뻐할 수 있을까? 여러 가지 대답이 떠오른다. 하나님으로 인해서 내가 느끼는 만족의 근원은 여러 곳이다. •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의 변함없는 사랑.• 그가 멀리 있는 대신 내게 가까이 다가오신다.• 나의 슬픔과 아픔을 개인적으로 알고 계신다. 모든 면에서 나와 같은 시험을 받으셨으나 죄는 없으시다. • 아침마다 새로운 긍휼로 심판을 이기시고 나와 같은 죄인에게 내려질 진노를 거두신다. • 모든 약속을 이행할 수 있는 그의 능력과 의지, 하등의 약속 받을 자격이 없는 나인데도 불구하고 즐겁게 약속을 주시는 그의 마음. 지금까지 열거한 내용을 바탕으로 하나님 안에서 기쁨을 누리라고 한다면 실로 형언할 수 없이 달콤한 이유가 되겠지만, 조금 전 살펴본 첫 문장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들어있지 않다. 한 문장으로 우주를 바라보기수년 전에 이미 나는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보는 법을 배웠다. 즉 그분이 자신의 영광을 위해 모든 일을 하신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행복은 나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한 문장을 제대로 읽을 때까지는 말이다. 물론 삼십 년 전에도 나는 그 문장을 읽었고, 그 이후로 성경은 내게 전혀 다르게 다가왔다. 하나님이 자기 자신 안에서 가장 만족하는 이유를 알 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수 있다. (존 파이퍼, 하나님의 기쁨)이게 과연 사실일까? 내가 그동안 믿었던 하나님, 그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을까? 그리고 그냥 기쁘신 게 아니라 가장 기쁘다고? 내가 막 읽은 것과 비슷한 문장은 “기쁨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좀 더 진지하게 던지도록 만든다. 정신 못 차릴 정도로 어지러운 게 기쁨이 아니다. 하나님은 술에, 마약에 취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기쁨까지도 포함하는 기쁨은 바람직한 웰빙이고 적절함에서 만족하는 기쁨이다. 그리고 순결함, 더럽지 않음, 흠 없음, 오염되지 않음, 바래지 않음, 제한 없음, 그리고 억누를 수 없는 즐거움을 추구함으로 누리는 기쁨이다. 파이퍼의 주장처럼 하나님에 대한 나의 만족이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 자신의 만족에 달려 있다면, “하나님이 정말 기뻐하시는가?”보다 더 중요한 질문은 없을 것이다. 이 문장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함으로써 성경 읽는 방식뿐 아니라 우주를 관찰하는 방식까지도 바꿔놓았다. 우주에는 관찰할 것이 많다.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많이 있고, 하나님의 기쁨은 그분 안에서 내가 누리는 만족의 원동력이 된다. 무엇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가? 성경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기쁨을 보여준다. 아래에 열거한 건 단지 몇 가지 보기일 뿐이다. • 공의를 기뻐하신다(잠언 11:1).• 정직한 자의 기도를 기뻐하신다(잠언 15:8).•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기뻐하신다(시편 147:11).• 백성을 택하기를 기뻐하신다(신명기 10:14-15).• 그가 행하시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시편 115:9).• 자기 아들을 기뻐하신다(마태복음 17:5).최고로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하는 것은 가장 합리적이다. 하나님은 이 점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다. 그는 또한 최고로 가치 있다. 따라서 자신을 최고로 평가하는 하나님은 완벽하게 합리적이다(그는 항상 합리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만족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을 가장 가치 있게 평가함으로써 완벽하게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최고의 가치가 없는 것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그게 바로 우상숭배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상 숭배자가 아니다. 또한 미치지도 않았다. 헨리 스쿠걸은 다음과 같이 유명한 말을 남겼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사랑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통해서 측정할 수 있다.”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대상, 즉 자기 자신은 가장 가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다음 질문을 던지게 한다. “어떤 것을 다른 것보다 더 가치 있게 만드는 요인은 무엇인가? 가장 가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깊은 곳에서 우리는 이미 좋은 답을 알고 있다. 견고함과 변하지 않는 내구성을 가진 것, 증발하지 않는 것, 통제할 수 없는 요인과 힘에 굴복하지 않고 모두를 이기는 것,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 실질적이고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 다른 모두를 파생시키는 것, 매우 희귀해서 어디에서도 유사품을 찾을 수 없는 것, 상황과 관계없이 언제나 심오하고 결정적으로 유용한 것, 그리고 끝없이 스스로를 다시 채우는 것이 가치 있다. 하나님은 이처럼 귀하고 영광스럽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럽기에 가장 기쁘시다. 자신의 영광 안에서 그는 가장 기쁘시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시면전능한 하나님이 불평만 한다면? 유명한 기도, “하나님은 위대하시다, 하나님은 선하시다”가 “하나님은 위대하시지만 선하시지는 않다.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을걸”로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전능한 힘을 사용하여 그는 언제라도 우리 모두를 가루로 만들어 날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은 놀라운 분이기에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 투덜거리거나 화를 내기보다는 기뻐하신다.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그의 가장 높고 깊은 기쁨은 자신이 하나님이시라는 데에 있으며, 따라서 그는 자신이 하는 모든 일을 기뻐하신다. 잘못하는 일이 있을 수 없다. 결코 실수가 없기에, 하나님은 언제나 일을 마치고는 한발 물러서서 이렇게 말하실 수 있다. “정말 좋다. 참 좋다. 이렇게 훌륭한 일을 행하는 나 자신으로 인해 당연한 말 같지만 참으로 행복하다.” 심지어 그의 진노조차도 결국에는 그를 기쁘시게 한다. 그 결과 그분의 모든 일은 궁극적으로 완전한 공의를 이루며 그를 영화롭게 만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기쁨이 내게 무슨 의미일까? 무한히 지혜로우시고 변함없으시며 항상 기뻐하시는 하나님은 결코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나는 그가 행하신 일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아야 한다. 대신 그가 하시는 모든 일이 예외 없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선을 위한 것임을 믿어야 한다. 믿는 데서 그치지 말고, 그 이상으로 감사하고, 사랑하고, 높이고, 또 즐거워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신으로 인해 기뻐하듯, 나도 하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로 인해서 또 그가 행하신 일들로 인해서 기뻐한다. 그의 기쁨은 부차적인 것이 아니라 일차적이다. 하나님이 자신 때문에 기뻐신 것처럼, 나도 매일 하나님 때문에 더 기뻐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엉망진창 속 하나님의 기쁨길고 더운 날을 끝낸 농부가 어떻게 쟁기질로 다 파헤친 잔디를 보면서 만족할 수 있을까? 그 밭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당장은 엉망진창처럼 보이는 밭이지만, 농부는 앞으로 다가올 영광스러운 수확을 기대하며 쟁기질을 즐긴다.우리 부부는 자식 둘을 먼저 떠나보냈다. 당신은 실패했다며 하나님을 향해 주먹을 흔드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 아이들, 우리 부부와 완전히 관계를 끝났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오산이다. 하나님은 우리와 끝내지 않았다. 결코 그런 일은 없다.나는 중학교 딸과 함께 도예 수업을 들었다. 작업실과 옷을 먼지투성이 진흙탕으로 만들어가면 몇 시간이나 프로젝트에 열중했다. 이 모든 수고에 어떻게 만족할 수 있을까? 아직 가마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우리의 수고가 지금 매력적이고 유용한 작품으로 변해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된다. 하나님은 아직 진행 중인 프로젝트를 기뻐하신다. 경작 중인 들판, 육체의 질병, 완전히 침수된 행성, 그리고 이 부서지고 신음하는 우주는 지금도 영광스러운 결과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헤아릴 수 없는 선을 이루시기에,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만족하신다. 결코 어깨를 으쓱하며, “더 잘할 수도 있었는데”라고 중얼거리는 법이 없으시다. 그의 기쁨과 나의 존재하나님이 하나님이기에, 또 자신이 하는 일로 인해 기뻐하신다는 사실이 내게 가져다준 변화는 무엇일까? 하나님의 기쁨은 인간이 만든 신들과 하나님을 구별시킨다. 그런 신은 인간을 닮아서 하나 같이 괴팍하고 변덕스럽다. 제우스의 변덕스럽고 잔인한 벼락부터 예측할 수 없는 포세이돈의 분노, 트로이 전쟁 때 인신 제물을 요구하는 아르테미스, 오늘날 유행하는 취소 문화 속에서 낙태를 조장하는 자기신격화한 도덕 경찰 닮은 신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만든 신들은 기뻐 만족하시는 하나님과 너무 다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그는 영원한 즐거움을 확실하게 약속하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모든 역사에 목적의식을 불어넣었다. 기쁘신 하나님은 단 한 번의 역사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으신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그를 사랑하는 자들의 선을 이룬다. 이 사실은 나로 하여금 현실 이해의 방식을 바꾸도록 만들었다.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을 통해서 하나님은 나를 좋은 곳, 아주 좋은 곳으로 데려가신다. 하나님의 기쁨은 나의 성경 읽는 방식도 바꾸었다. 하나님의 존재와 그의 작품에 대한 그의 기쁨은 행과 행간 곳곳에 들어있다. 삶을 바꾸는 하나님의 기쁨은 후회가 없는, 일종의 깊은 기쁨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후회하신다고 말할 때(예를 들어, 창세기 6:6과 사무엘상 15:10), 그것은 축소된 영광이라는 슬픈 현실에 대한 한탄의 의미이다. 하지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한다고 해도, 하나님은 여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행동할 것이다. 왜일까? 하나님의 모든 행동은 결국 그의 아들에게 최대의 영광을, 그의 백성에게 최대의 즐거움을 가져다주려는 그의 깊은 계획에 따라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으로 인해서 기쁘시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원제: What If God Were Happ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하나님의기쁨
하나님의만족
하나님의 본질에 충실한 제자훈련과 자연법
by 최창국
2023-06-29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신체적, 심리적, 관계적, 영적 상태가 달라진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는 사람은 사랑이 더 많아지고, 독재자와 권위주의적인 신을 숭배하는 사람은 학대가 더 심해진다(티머시 제닝스, 마음, 하나님 설계의 비밀, 164. 이하 제닝스의 같은 책에서 인용). 따라서 ‘어떤 하나님 개념을 품는가’는 중요한 문제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 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진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된다(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27-32, 53). 그러나 사랑의 하나님이 아닌 권위주의적이거나 엄한 존재와 같은 신으로 믿고 예배하면 두려움의 회로가 활성화된다. 이런 신을 계속 믿고 예배하게 되면, 결국 만성적으로 신경이 예민해지고 뇌와 몸이 손상된다. 수많은 뇌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어떤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뇌가 달라진다. 권력으로 다스리는 신, 인간이 달래야만 용서를 베푸는 신을 믿게 되면 사랑이 파괴되고, 반항심이 싹트고, 개성이 말살된다. 전전두피질이 손상된다. 하지만 사랑의 하나님으로 믿고 예배하면 치유가 찾아온다. 전전두피질이 활성화된다. 전전두피질은 사랑과 공감과 이타심을 경험하는 뇌 부위다(제닝스, 99-100). 바울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딤후 3:5)이라고 한 대상은 불가지론자와 무신론자가 아니다.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인 사랑의 진리를 부인하는 자들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치고 하나님에 관한 교리와 율법적 신학, 종교 제도와 같은 실정법에 얽매인 채 쌓는 제자훈련이라면 오히려 삶을 파편화하거나 파괴하기 쉽다. 특히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놓치고 권위주의적인 하나님 관을 견지하면 파멸이 뒤따르게 된다는 것을 기독교 역사가 증명해 준다. 그 대표적인 예가 1994년 르완다에서 발생했다. 4개월 만에 무려 백만 명 이상이 살상되었는데, 그 장소는 주로 교회였다. 당시 르완다는 인구의 56퍼센트가 천주교, 26퍼센트가 각종 개신교단으로 기독교 국가였다. 무려 백만 명이 죽임을 당한 그 절망적인 시기에 사람들은 교회로 피신했다. 이때 교회 지도자들은 도피 중인 사람들을 교회 건물 안에 들인 뒤 민병대에 알렸고, 민병대가 교회에 들어와 숨어있는 사람들을 살육했다. 성직자가 자기 교인을 죽였고, 교인이 자기가 다니던 교회 성직자를 죽였다. 대학살의 광란이 끝난 뒤 교회와 교단을 불문하고 많은 개신교와 천주교 성직자뿐 아니라 교회의 장로와 집사와 교인이 재판에서 전범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제닝스, 111). 티머시 롱맨은 이 전쟁의 참상을 고증한 책에 이렇게 보고했다. “자기 행동이 소속 교회의 가르침에 부합한다고 믿었기에 일부 종파의 암살단은 죽이러 나가기 전에 미사를 드렸다. … 사람들은 날마다 미사에 와서 기도한 뒤 출동해 살해했다. 민병대원이 광란의 살육을 잠시 멈추고 보란 듯이 재단에 무릎 꿇어 기도하는 경우도 있었다”(Timothy Longman, Christianity and Genocide in Rwanda, 6-7). 연구진이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살상에 가담했고, 어떤 유형의 사람들이 교회에 피신한 사람들을 보호했는지를 조사해 본 결과, 그 요인은 하나로 귀결되었다. 교단과 상관없이 하나님을 독재자나 권위주의적인 존재로 생각한 사람들은 살상에 가담했고, 사랑의 하나님으로 생각하고 믿는 사람들은 피난민을 보호했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세례를 어떤 방법으로 베푸는지, 예배를 무슨 요일과 어떤 방식으로 드리는지, 죄를 사제에게 고해하는지 아니면 하나님께 직접 자백하는지, 성찬식을 어떻게 하는지, 기도를 어떤 방식으로 하는지 등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어떤 하나님으로 믿느냐였다. 기독교의 바른 교리와 바른 신념에만 몰두하고, 하나님의 본질인 사랑을 놓친 그리스도인은 다르게 믿는 사람들을 용납하지 않고 그들을 살상하는 데 가담했다(Longman, 같은 책, 7-8).넓은 의미에서 제자훈련은 영혼 돌봄과 치유와 관계된다. 물론 영적 성장과도 관계된다. 제자훈련이 치유가 필요한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보지 못하고 실정법인 교리와 율법적 신학의 지적 습득에만 몰두하게 될 때, 사람들의 병이나 죄를 볼 때도 처벌 대상으로만 여기게 된다. 사람들에게 실정법 개념만을 가르치면 하나님의 사랑이 막힌다. 실정법의 핵심 요소 중 하나인 율법적 신학은 마음을 변화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완고하게 만든다(제닝스, 114). 이러한 특성은 많은 연구를 통해 밝혀지고 있다. 실정법에만 치중한 공동체는 사람들을 더 이기적이고 비판적인 사람들로 이끌 수 있다. 미국, 캐나다, 중국, 요르단, 남아공, 투르키예 등지의 어린이 1,170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 결과, 종교적인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종교가 없는 가정에서 자란 아이보다 더 나눠 가질 줄 모르며 남을 더 벌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 연구의 저자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번 연구를 보면 무신론과 무종교 가정의 아이일수록 오히려 더 너그러웠습니다. … 이런 결과를 종합해 보면 어느 나라든 다 비슷하게 종교는 아이의 이타심에 부정적 영향을 미칩니다. 이는 종교심이 친사회적 행동을 촉진한다는 견해에 반할 뿐 아니라 종교가 도덕적 발달에 꼭 필요한지 의문을 품게 합니다. 도덕적 담론의 세속화가 인간의 친절성을 떨어뜨리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사실 그 반대입니다”(제닝스, 156-57).티머시 제닝스는 하나님의 설계의 비밀, 즉 인간의 마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질서와 비밀을 무시하고, 교리와 같은 실정법에만 몰두하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초래되었다고 강조한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인류가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창조하셨는데, 종교적인 사람일수록 이 하나님의 법을 놓치고 율법적으로만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더 이기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의 제자훈련은 조직의 교리나 이해관계를 보호하려던 내용을 버리고, 사람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공급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제자훈련이 인간이 만든 실정법 위에 서 있는 한,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아래 연합할 수 없다. 실정법의 전염병은 항상 기독교에 비참한 분열을 초래했다. 성경의 교리나 해석이 어느 쪽에 옳으냐를 두고 경쟁하며 싸우게 된다. 하나님의 법이 실정법에 불과하다는 거짓말을 받아들임에 따라 사람들은 그분의 법을 서로 다르게 해석하는 것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착각에 빠진다(제닝스, 182). 기독교가 수만 갈래의 분파로 갈라지고 분열한 현상과 교회 공동체 사람들이 더 이기적인 현실은 하나님의 자연법을 인간의 실정법으로 대체한 데 따른 결과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이제라도 실정법에만 충실한 제자훈련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연법,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에도 충실한 제자훈련을 실천할 필요가 있다. 자연법은 하나님이 설계한 인간의 뇌, 마음, 몸, 자연 질서 등과 관계되고, 실정법은 인간이 만든 교리, 제도 등과 관계된다. 물론 교리와 같은 실정법과 하나님의 창조적 설계인 마음과 몸 등과 같은 자연법은 나선형 관계 안에서 소통할 때 보다 더 효과적인 제자훈련을 할 수 있음은 자명하다. 하지만 폴 트립의 말처럼, 교리는 삶을 위한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폴 트립, 교리와 삶은 하나입니다 참조).
제자훈련
자연법
실정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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