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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심, 해체, 그리고 인내하는 신앙
by Jay Kim
2021-05-28
이 기사는 제이 킴(Jay Y. Kim)의 저서 ‘아날로그 그리스도인(Analog Christian)에서 발췌한 것이다. 킴은 또한 TGC가 최근에 해체에 관해 낸 새 책인 ‘믿음을 버리기 전에: 교회 속 의심을 해체하기(Before You Lose Your Faith: Deconstructing Doubt in the Church)’에도 글을 기고했다.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종이접기 예술가 중 한 명인 사토시 카미야(Satoshi Kamiya)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 용을 접은 종이 예술 Ryujin 3.5로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종이접기 예술가들은 때때로 완성된 작품의 접힌 선 모두를 담은 상세한 다이어그램인 주름 패턴을 공유하는데, 다음 사진이 바로 사토시가 Ryujin 3.5에 사용한 주름 패턴이다. 전통적인 종이접기에는 절개, 즉 컷이 없다. Ryujin 3.5도 마찬가지다. 전체 작품은 크고 조금도 변형되지 않은 하나의 큰 종이다. 유튜브에 있는 이 종이접기 과정을 담은 가이드 동영상은 길이가 무려 12시간이다. 아무리 고도로 숙련되고 경험이 풍부한 종이접기 예술가라고 해도 이것을 완성하는 데는 몇 주, 심지어 몇 달이 족히 걸린다. 도대체 얼마나 엄청난 인내심과 정확성이 요구되는 건지 짐작하기도 힘들 정도다. 그러나 세심한 배려, 헌신 및 기술을 적용할 때, 단지 한 장의 종이를 통해서 그 종이에 아무런 손상을 입히지 않으면서도 전달할 수 있는 모양과 이야기는 실로 상상을 초월한다. 다음은 완성된 Ryujin 3.5의 모습이다. 일반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간단하게 시작한다. 복음 이야기를 믿고 받아들이고 나서 조금씩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워간다. 신앙의 초창기는 종이 비행기처럼 가볍고 자유롭다. 그러나 삶이 진행됨에 따라 신앙 속에서 잡혀가는 주름 패턴은 점점 더 복잡해진다. 성경과 교회 그리고 우리 자신에 관한 질문이 늘어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머지않아 믿음을 탐색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고 느끼면서 좌절감으로 인해 우리는 종이를 구겨버리고 더 이상 접는 것을 중단한다. 이런 과정을 나는 공감할 수 있다. 대학 시절 초반에 나는 의심과 해체라는 과정을 지나 결국 탈회심(deconversion)까지 경험했다. 내가 어렸을 때 소중히 간직한 성경 이야기와 십대 중고등부 시절의 신앙 추억은 복잡한 내 질문을 전혀 감당하지 못했다. 주름 패턴이 내 시야를 흐리기 시작했고 나는 믿음을 완전히 구겨버리고 포기했다. 그러나 의심과 해체가 반드시 신앙의 적이 될 필요는 없다.의심 가운데 신실함우리는 예수님이 주신 대사명을 잘 알고 있다.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 28:16–20).그런데 최근까지도 나는 이 이야기 속 핵심 부분을 간과했다. 남은 열한 명의 제자들이 마지막으로 예수님 주위에 모였을 때, 그 이야기는 우리에게 “몇몇이 의심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이 여전히 의심하는 가운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대사명을 주셨다. 역사에 따르면 이 열한 명 모두가 다 복음에 헌신했고 교회 설립을 도왔다. 의심한 제자들까지 포함하여 그들 모두가 다.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난 후에도 질문은 계속되었다.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자신의 패러다임을 해체하고 무엇이 사실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그 중에서도 어떤 것이 정말로 말이 되는 것인지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세상을 바꾸셨다.마르틴 루터, 장 칼뱅, 찰스 스펄젼, 그리고 C. S. 루이스 같은 신앙의 거인들도 의심의 시간을 겪었다고 인정했다. 파커 파머(Parker Palmer)는 이렇게 말한다. “신앙이 깊어질수록, 더 심각한 의심까지 이겨내야 한다.”예수님을 의심했던 제자들과 그 이후 기독교 역사에서 의심했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은 인내다. 그들은 이전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해체했다고 해서 그 신앙을 비난하지도 하나님을 떠나지도 않았다. 교회 역사 초창기부터 우리의 신앙 선배들은 의심 속에서도 또는 의심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한 헌신을 지켜냈다. 이것은 신앙과의 불협화음이 시작되자마자 신앙을 떠나는 게 마치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오늘날 우리 시대의 전형적인 해체 이야기와는 완전히 대조적이다. 인내하는 신앙앨런 크레이더(Alan Kreider)는 그의 저서 ‘초대 교회가 보여준 인내 속 숙성의 과정’(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에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갖고 있던 제자도에 대한 느리면서도 체계적인 접근 방식을 강조한다. 신앙 공동체에 완전히 소속되는 것은 수개월 또는 수년간의 교리 교육 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인은 전도에 대한 매력적 접근보다는 의도적으로 엄격한 제자도를 강조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으로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은 서두르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은 시간이 걸리는 문제였다. 그리고 그들은 기꺼이 그 시간을 투자했다. 그렇다고 내가 갑작스럽고 급진적인 회심에 문제가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내 어머니의 신앙은 1981년에 시작되었다. 그러나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의심의 시간을 겪으면서도 인내를 가지고 충실하게 예수님께 헌신했기에, 내 어머니는 현재의 신앙을 갖게 되었다. 그녀의 회심은 즉각적이었지만 그녀 안에서 신앙이 형성되는 데는 평생이 걸렸다. 오늘날 해체 이야기에서 눈에 띄게 누락된 인내하는 신앙이 무엇인지 내 어머니가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신앙이 약한지 강한지의 여부가 아니라, 과연 우리의 신앙이 인내하는 신앙인지 아닌지의 여부가 되어야 한다. 인내하는 신앙은 기복과 변덕의 계절을 견딜 수 있지만 인내가 없는 신앙은 그 시간을 이겨내지 못한다. 오늘날 우리의 부족한 인내심은 즉각적인 만족을 유도하는 만연한 소비주의뿐 아니라 인터넷 환경이 만들어낸 감각 충족에 치중하는 미디어의 폭발적인 증가로 인한 것이기도 한다. 한때 아주 중요하던 것이 잠시 후 놀라울 정도로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는 시대다. 짧은 시간조차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오늘날 문화는 느리고 인내심 가진 사람보다는 강렬하고 화끈한 사람을 선호한다. 새로움에 중독된 우리는 오래된 것을 지겨워하고 무조건 새로운 것을 선호하며 거기에 높은 가치를 둔다. 스워보다(A. J. Swoboda)는 “이제는 새로운 것이 도착하는 순간 성숙한 것이 되고 곧 뒤처진 것이 되어버린다”라고 말했다. 다시 생각하는 것이 과거를 기억하는 것보다 중요해졌다. 그리고 혁신은 이제 과거와의 연속성보다 중요해졌다. 오랜 역사에 걸쳐 만들어진 진리는 디지털 시대가 만들어가는 연대기적 속물 세상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다. 느린 성장이 열매를 맺는다신앙에 있어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 이런 저런 조류를 따르는 대신, 인내심을 소중히 여기면 어떨까? 질문과 의심의 주름 패턴에 압도될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심호흡과 깊은 기도다. 우리를 천천히 성장시키는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이를 악물고 좀 더 이 신앙 속에 머무르겠다는 결심이 필요하다. 이런 태도는 스스로를 해체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의심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양육하도록 부름받은 사역자들에게도 동일하게 필요하다.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사물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포기하는 것이 더 쉬울 수도 있겠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그런 식으로 우리를 포기했다면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겠는가? 어려운 질문을 하는 사람을 목양하고 있다면, 인내를 가지라. 복잡한 질문에 대한 빠른 답변 또는 진지한 의심을 사소하게 치부하게 되면 나중에 더 큰 문제를 만나게 된다. 천천히 가라. 그리고 의심하고 질문하는 사람도 당신과 함께 천천히 가자고 초대하라. 우리집 뒷마당에는 작은 텃밭이 있다. 상추, 무, 파가 비교적 빠르고 쉽게 자라는 반면, 바질과 들깨의 경우는 키우는 게 쉽지 않다. 내가 식물을 키우는 데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물을 주고, 관찰하고, 그러면서 기다리는 중에 조용한 기쁨을 발견한다. 원예는 즉각적인 결과와 관련이 없다. ‘빨리빨리’는 땀을 흘려야 하는 흙에서는 설 자리가 없는 말이다. 신앙과 의심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요 15:5). 여기에서 ‘거한다’라는 단어는 ‘거주지’의 동사 형태인 그리스어 메노(menō)이다. 그것은 환대와 은혜 속에서 특정 장소에서 보내는 장기 체류를 의미한다. 심지어 해체를 통해서조차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시작하고 예수님에게서 끝난다. 그와 함께 머물며 그가 주시는 은혜 안에 거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모든 질문과 불확실성, 혼란과 의심을 처리하고도 남을 충분한 공간이 있다.원제: Doubt, Deconstruction, and Patient Fai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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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명
디지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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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너무 많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by Mary Wiley
2021-05-03
내 남편은 영업 성과에 따른 수수료에 의해 수입이 결정되는 부담이 큰 직업에 종사하고 있으며 나는 어린아이 셋을 키우는 가정주부다. 주중에 남편과 저녁 식사를 함께할 기회는 거의 없고 토요일에도 약속을 위해 외출하지 않으면 잔업을 마무리 짓기 위해 집에서 일하곤 한다. 일주일에 한두 번은 쌓인 업무를 끝내기 위해 새벽 3시까지 앉아 있기 일쑤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더라도, 남편은 예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기진맥진하여 소파에 파묻혀 버리곤 한다.우리는 생활에 여유를 갖기 원하고 좀더 많은 시간을 집에서 가족과 함께 보내기 원하지만 그것이 꽤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 돌리며 그분이 허락하신 우리의 여건을 즐기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의 일을 할 때 업무가 너무 과중한 상태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을까?우리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다. 그렇지만 스트레스가 쌓일 정도로 요구 사항이 많은 업무를 해야 하거나 일과 후에도 많은 시간을 업무에 묻혀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재앙이라 할 수 있다.하나님께서 아담이 동산을 경작하며 그곳을 지키게 하셨을 때(창 2:15) 그 땅에 가시덤불이나 엉겅퀴는 없었다. 아담이 해야 할 일은 기쁨과 축복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러나 창세기 3장 17-19절에 걸친 저주의 결과, 아담에게 부여된 땅의 경작은 그에게는 당혹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이마에 땀을 흘려가며 일해야 했고, 그것은 당연히 까다롭고 피곤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농사가 우리의 핵심 직업이 아닐 수 있겠지만, 실망스럽게도 우리가 땀 흘려야 하는 것은 영원히 변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자유의 영역 안에 경계를 세우다성경은 필수적인 노동 시간에 대하여 엄격한 규칙을 정하거나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특정 직업을 명시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충분히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 성령은 그분의 말씀을 알려 주어 우리를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합당한 방식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한다.우리가 하는 업무와 그 업무의 분량은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 동기 및 리듬을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오랜 근무 시간의 목적이 가족의 필요를 충족시키고 그 일을 주님께 하듯 하기 위한(골3:23~24) 이유에서라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우리는 허락하신 적절한 한계 안에서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그러나 그 일의 목표가 어떤 특정한 지위나 권력을 얻는 데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죄와 연결될 수밖에 없다. 오랜 시간이 소요되고 사람을 녹초가 되게 만드는 업무를 통해서도 주님 안에서 느끼는 기쁨으로 일을 끝낼 수 있는가 하면, 가벼운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에게 고통스럽고 까다로운 과정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내담자의 남편은 가족을 부양하기 위한다는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일을 해야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모든 것이 균형을 벗어나 있다는 느낌이 든다.우리는 쉬운 일, 휴가 또는 정규 근무 시간 등에 대한 보장이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삶을 관리하는 방식, 즉, 직장과 가정을 위해 시간이나 노력을 적절하게 배분할 줄 아는 책임감을 보여야 한다.현명한 청지기 직분을 위한 실질적 방법변화가 필요한지를 점검하려면 남편과 함께 앉아 영적·신체적 건강 상태, 결혼 생활, 가족과의 관계 및 교회 생활을 포함한 여러 부문에서 가정에서의 삶을 평가해 보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점들에 대해 가족의 구성원들이 견딜 수 있다고 느끼는 정도는 각각 다르겠지만, 이로 인해 결혼 생활이 소홀해지거나, 자녀들에게 정서적 불안을 초래하거나, 교회와 이웃을 사랑으로 섬기지 못하게 되면, 가족의 필요를 다른 방법으로 채워줄 방안을 고려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이다.믿음의 가정에서 위험한 상황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경고는 가족과 함께 기도하며 성경을 읽는 경건한 생활을 통해 영적으로 가정을 이끌어야 할 가장이 이런 능력을 상실하기 시작하는 경우다.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책임이 있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가족에게 있어서 경고의 징조들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건전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종종 가정이나 학교에서 나타나는 자녀들의 행동 문제는 변화가 필요한 첫 징후일 수 있고, 부족한 의사소통이나 쓴 뿌리가 늘어가는 것은 배우자로부터 나타나는 초기 징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들이 자신의 가정에 나타나기 시작하면, 수입이 줄더라도 다른 일자리를 알아볼 수 있도록 가계의 필요와 예산의 절감에 관한 내용을 다시 한번 분석해 볼 때가 된 것이다. 우리는 덜 중요한 업무의 수행을 위해 가장 소중한 임무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야가 무엇인지 파악한 다음, 아래 네 가지 사항을 고려해 보기 바란다.1. 즉각적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현명한 청지기 직분을 추구한다고 해서 반드시 새로운 직업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일하고 있는 직장 내에서 근무 조건 등을 재협상해 보거나, 예수님과 같은 태도로 어려운 시기를 견디거나,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어떤 직업을 선택해야 할 시기가 되면 거기에는 풍성한 자유가 있다. 먼저 쉽게 시행할 수 있는 조정이나 잠재적 해결책부터 시도해 보기 바란다.2. 가족의 필요를 채워 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기 바란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행하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당신을 돌보아 주실 것이다. 당신이 그렇게 될 것으로 원하지 않았던 경우라도 그리하실 것이다.3. 교회 내에서 조언을 구하라. 나의 상황,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 가족 내에서 나의 책임을 이해할 수 있는 교회의 신뢰할 만한 장로나 친구들과 이야기해 볼 것을 권한다.4. 가장 중요한 것은 가족이 함께 기도하고 말씀을 읽는 시간을 보내도록 하는 것이다. 특히 배우자가 현명한 길을 분별할 수 있도록 능력을 주실 것과 당신 자신을 위해서는 부부가 인내심을 갖고 필요로 하는 변화를 순종하며 기다릴 수 있도록 기도하라.우리의 직업으로 인한 업무, 시간 또는 스트레스 수준이 어떠하든,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모든 분야에 있어서 그분에게 순종하는 길을 찾고, 그분과 그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진리임을 근거로 현명한 결정을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다. 우리가 맞이할 인생, 사람, 기술과 허락하신 시간의 활용을 그분의 영광을 위해 지혜롭게 관리하게 되기 원한다.원제: How Can I Know If I'm Working Too Mu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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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은 신앙과 일의 통합을 말한다
by Owen Strachan
2021-05-01
The Gospel Coalition(TGC)의 사역을 위한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 for Ministry)이 신앙과 일의 통합을 지지하는 이유는 “성경의 좋은 소식은 개인의 죄 용서 뿐 아니라 모든 창조계의 새롭게 됨에 관한 것이고 … 그리스도인들은 말씀 사역을 통해서 뿐 아니라 농업, 예술, 비즈니스, 정치, 학문 등의 영역에서 자신의 직업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이 목공, 배관, 데이터 입력, 간호, 예술, 비즈니스, 정치, 언론, 연예, 그리고 학문 등에서 복음이 우리에게 도전하는 바를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지 고민할 수 있도록” 도와 그들이 “그들의 직업과 전문 분야에서 구별되고, 탁월하며, 책임감 있게 섬길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 성속 구분을 타파하고자 애쓸 때 우리는 그들을 격려한다. 사회 안에서의 공동선 진작을 위해 그리스도인들을 동원하는 학습 공동체인 Q(qideas.org)의 설립자 게이브 라이언스를 필자가 최근 뉴욕에서 만나 Q가 어떻게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돕는지, 그리고 게이브 자신은 이 사역에서 주로 어떤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지를 들었다. 지난 몇 년간 Q Ideas는 그리스도인들이 패션, 비즈니스, 연예계 등 각종 직업군에서 탁월함을 실천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도록 하는 데 기여를 해왔습니다. 이 일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은 무엇인가요? 그리스도인들이 전통적으로 종사해 온 영역들 뿐 아니라 기타 모든 분야 역시 그리스도인들이 참여하려면 어떤 고민들이 필요할까요?제가 열정적으로 이 일에 임하는 이유는 이 부분이 지난 수십 년간의 기독교 담화에 있어 뭔가 빠진 조각이라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목사, 선교사, 또는 교회 개척자 이외에 재능이나 부르심이 있는 신자들을 지지해주고 권한을 이양해주는 일을 무시해왔어요. 밥 브라이너(Bob Briner)가 90년대에 쓴 자기 책 'Roaring Lambs'에서 말했듯이 소위 일등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전임 사역에 종사하는 목사들이고 나머지 신자들은 스스로를 이등 그리스도인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는 이들을 지지하는 모습이라든지, 목사가 어떤 성도를 예배 중에 강단으로 나오게 하여 지난 주에 지역 공동체를 위해 공립 학교에서 했던 일이나 지역 공동체에 도움을 주기 위해 개발한 어떤 제품에 대해 5분 정도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 모습 같은 것들은 아마 보지 못했을 겁니다. 앤디 크라우치(Andy Crouch)가 자기 교회에서 30년간 주일학교 교사로 일한 보스턴의 어떤 여인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는데요, 이 여인은 보스턴항구의 청소 작업에도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는 시에서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만큼 고난도의 프로젝트였어요. 하지만 교회에서 처음 이 여인을 강대상 앞으로 나오게 했던 이유는 주일 학교를 30년간 섬겼다는 것 때문이었지요. 이분이 이 거대 프로젝트 담당자로서 보스턴시 전체를 섬기는 일을 하고 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았죠. 이런 일들이 이젠 놀랍지도 않습니다. 제 생각에, 목사들과 리더들은 교인들의 직업을 어떻게 지지해줄 수 있을지에 대해 별로 고민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교인들 대부분은 일반 직업에 종사하는 이들입니다. 복음이 단지 교회 출석이나 전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목사들이 깨달으면 교인들 모두가 복음과 자신의 직업에 대한 관계를 이해하는 데도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으로 들어가 우리가 손대고 일하는 모든 곳에 하나님의 왕국이 임하게 해야 한다고 할 때, 거기에는 직업이라고 하는 요소가 있는 것입니다. 제게는, 바로 이것이 교회가 현재 겪고 있는 큰 변화고 재발견입니다. 사실, 종교개혁의 핵심은 성경이 사제들만 읽고 소유하는 것이었다가 일반 성도들이 손에 지닐 수 있는 무언가가 된 것 아닐까요. 회중석에서도 이제 교인들은 성경을 직접 읽고, 하나님을 만나고 자유를 만끽하며 만인이 제사장이 됩니다.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이 다음 변화로 인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이 신자들 모두가 각기 제사장이 되도록 부르셨다는 것, 그리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교구가 각 제사장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아가고 있습니다. 제 생각에, 이러한 변화는 그리스도인들이 “전 세계 각 영역에 복음이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라고 묻기 시작하면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패션, 비즈니스, 광고 등 우리 생각에 복음과 전혀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영역들에도 해야 할 일들이 넘쳐납니다. 복음은 그러한 영역들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가르칩니다. Q는 그러한 영역에서 리더로 활동하는 이들로부터 배우는 곳입니다. 무엇을 하는지, 무엇을 꿈꾸는지, 자신들이 경영하는 사업체의 핵심 가치들을 어떻게 세워나가는지, 복음이 주는 깨달음으로 인해 사람들과 사업을 진행하는 방식을 어떻게 바꿔가려 하는지 등을 배우는 곳이지요. 그리고 그러한 리더들이 교회에 영향력을 끼치기를 기대하고 있습니다. 교회에는 이러한 류의 가르침이 부족하죠. 직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이제 많은 이들이 단순히 신학 교육이나 목회자가 되기 위한 수업을 위해서는 신학교에 가지 않으려 하는데, 신학교나 학교들은 이들을 위한 무한한 기회들을 인지하고 이들을 도와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들이 신학적 기반 위에 세워지도록요. 그래야만 하나님이 부르신 직장에서 내가 어떻게 일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으니까요. 아주 흥미진진한 일을 하시는 것 같군요. 매일 하시는 업무의 내용이 어떻게 되나요? 직업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시니, 게이브 당신의 일에 대해 듣고 싶군요.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있지요. 저희 단체 Q를 운영하는 것이 저의 주업무입니다. 여기 뉴욕 사무실에는 Q 관련 일 또는 각기 다른 행사 주관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한 번에 다 모이면 아홉 명입니다. 저는 사람들을 모으고 직업에 관해 이런 종류의 대화를 이끄는 일을 정말 즐깁니다. 다양한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또 나중에 이것을 글로 쓰죠. 몇 년 전에 비하면 저술 일이 많이 늘었습니다. 학문적인 싱크탱크에만 국한된 정보를 취합하여 학자가 아닌 저와 같은 일반인들에게 좀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늘 고민합니다. 그리고 뉴욕에 살고 있으니 당연히 제가 가장 즐기는 일은 사람들을 연결시키는 일이죠. 저와 비슷한 생각들을 하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만나보고자 하는 이들이 뉴욕에 오면, 그들과 함께 점심이든 저녁이든 늘 식사하곤 합니다. 사람들을 서로 연결시켜주고 그들이 스스로 그 관계들을 키워나가도록 해서 제가 중심에 있지 않더라도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네트워크들을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도록 하는 일이 제가 하는 일입니다. 원제: Gabe Lyons Calls the Church to Integrate Faith and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영성
신앙과소명
앤디
복음
깨달음
게이브
신앙
직업
팀 켈러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하)
by Tim Keller
2021-04-19
팀 켈러의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상)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역사적 개신교의 정통과 일치하는 공개된 나의 믿음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해 내가 실제로 갖고 있던 지식까지도 함께 살펴보아야만 했다. 내 믿음이 사실은 내가 사는 문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은 아닌가? 행여 무의식적으로나마 내가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가정에 빠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삶은 다 내 중심으로 잘 돌아가야 하고, 이 세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어느 정도까지는, “그렇다”였다. 내가 발견한 것은 하나님의 위대함을 받아들이면서,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처음에는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내 직관에 반하는 것이지만, 심오한 차원에서는 해방감을 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만큼 작고 유한하다고 가정하는 것이 맘이 편할지는 몰라도, 그것은 결코 분노에 대한 치료법이 될 수 없다. 머리가 필요한 또 하나의 영역은 예수님의 부활과 관련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이미 부활절에 관한 책을 쓰기 시작한 상태였다. 암 진단을 받기 이전까지만 해도 부활은 내게 사실상 상당 부분 이론적인 문제에 불과했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다. 나는 내세에 대한 믿음이라는 게 사실상 아무런 근거가 없는 희망 사항에 불과하다는 숱한 비난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리고 부활에 대한 믿음은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Flying Spaghetti Monster, 기독교를 패러디한 종교의 숭배 대상물 - 역자 주)을 믿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이십 년 동안 나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에 대한 역사적인 사례를 제시한 영국의 성경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의 작업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이제 나는 과거와 비교할 때 훨씬 큰 회의론적 생각을 가지고 톰 라이트가 연구한 자료를 다시 살펴보았다. 나는 쉽게 설득되고 싶진 않았지만, 그의 글을 다시 읽어 가면서 그가 내세우는 주장이 오히려 과거에 느꼈던 것보다 훨씬 더 강력하고 공정하게 보였다. 그의 책은 내가 발을 디딜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그럼에도 내게는 부활을 믿는 데 단지 정신적 동의 이상의 그 무엇이 필요했다. 추상적인 믿음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신념 사이의 틈을 메우려 애를 쓰는 과정에서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마음의 역할이다. 초기의 미국 신학자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가 주장했듯이,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다고 증거하는 꿀의 달콤함을 믿는 것과 실제로 꿀을 먹고 그 달콤함을 체험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꿀의 단맛을 혀로 느끼는 것은 꿀이 달다는 그 어떤 합리적인 추론보다 꿀에 대해 더 많은 지식을 가져다 준다. 마찬가지로 사랑과 능력 그리고 지혜와 같은 속성을 가진 하나님을 믿는 것과 마음 속에서 그런 하나님의 실재를 느끼는 것은 전혀 다르다. 성경은 감각적인 언어로 가득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어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선하심을 ‘맛보아야’ 한다고 시편 기자는 말한다. 영광스럽고 능력 있는 하나님을 믿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고 우리는 그런 하나님을 ‘마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고 에베소서는 말한다. 1273년 12월 6일,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그의 기념비적인 책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의 저술을 중단했다. 친구 레지날드가 왜 그런지 물었을 때, 아퀴나스는 그가 쓰고 있던 모든 신학을 “짚처럼 초라하게 보이게” 만드는 하나님에 관한 경이로운 체험을 했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신학 자체를 부인하려고 아퀴나스가 이 말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는 하나님에 관한 지도를 그리는 것과 하나님 자신을 경험하는 것의 심오한 차이를 경험했던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하나님에 대한 나의 체험이 “황홀했다”고 주장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과거와 비교할 때 분명히 더 깊고 더 달콤했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에서 내게는 세 가지의 훈련이 필요했다.첫 번째로 내가 만든 하나님을 더 이상 만나지 않도록 나 자신을 시편 속에 빠지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만들어낸 하나님은 당연히 더 인자하고 덜 공격적이지만, 내 마음이 너는 희망이 없다거나 또는 내가 무가치한 존재라고 말할 때 내가 만든 그런 착한 하나님과 어떻게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시편이 드러내는 하나님은 너무도 복잡하지만, 그렇기에 어려운 그 하나님은 감히 그 어떤 인간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님이 아닌 것이다. 시편을 통해 나는 점점 더 “우리와 관계를 맺는 바로 그 하나님” 앞에 내가 서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훈련은 에드워즈와 같은 초기 작가들이 영으로 ‘혼자 소리내어 말하기(soliloquy)’라고 부르던 것이다. 시편 42편과 103편에서 우리는 그런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시편 기자는 말한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느냐?”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시편 저자가 말하는 대상은 하나님도 또 독자도 아닌 자신의 영혼, 자기 자신이다. 그들은 마음이 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마음을 향해 말했다. 그들은 마음을 샅샅이 살피면서 하나님에 대하여 마음을 새롭게 했다. 그들은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진리를 받아들이고 그 진리로 인해 불이 붙을 때까지 마음을 향해 진리를 선포했다.나는 내가 가장 굳건하게 믿고 있는 믿음을, 또 가장 강렬하게 느끼는 사랑과 두려움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그것들을 다 하나님 앞으로 가져와야만 했다. 그러면 항상은 아니지만 가끔은 시인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가 쓴 것처럼 “일종의 조율 … 부드러움, 평화, 기쁨, 사랑, 행복, 고귀한 만나(manna) … 평범함 속의 천국”으로 나를 이끌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아무리 성경을 읽고, 묵상하고, 또 영적 독백을 하고 기도를 해도 이런 음악이 내 속에서 흘러나오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이라는 현실과 그분의 약속은 내 속에서 점점 더 커져갔다. 나의 상상력은 점점 더 선명하게 부활을 시각화했고, 내 마음은 그 속에서 안식을 찾았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내게 특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죽음 그리고 부활이 단지 내가 믿고 한 켠에 제껴두는 것이 아니라 하루 종일 나를 지탱하는 희망이 되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매일 다음과 같이 기도를 했다. 때로는 기도할 때 짜릿한 전기가 통하기도 하지만 그 마지막은 언제나 평안이다. “오늘 밤 잠이 들고 내일 아침 당신의 은혜로 인해 눈을 뜰 때 내게 기쁨을 주는 생생한 사실에 사로잡히게 하소서. 그 어떤 일이 생기더라도 주 예수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죽으셨고 또한 나의 의를 위해 다시 부활하셨기에 내게도 최종적인 부활이 임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이런 영적 사실이 내 안에서 커짐에 따라 내가 사는 방식에는 어떤 영향이 있을까? 설명하기 가장 어려운 것 중 하나는 바로 내가 느끼는 기쁨과 두려움에 관해서다. 암 진단을 받은 이후로 캐시와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천국을 만들려고 노력할수록, 그러니까 이 세상 속에서 우리의 편안함과 안정을 더 뿌리내리려고 노력할수록, 우리는 그 천국을 오히려 더 누릴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캐시는 우리가 휴가를 보내는 친숙하고 편안한 장소에서 깊은 위안과 휴식을 찾는다. 그중 어떤 곳은 전선에 전등만 달린 오두막이지만, 그곳은 캐시에게 일종의 향수를 부르는 곳(Sehnsucht)이고 그녀가 갈망하는 장소다. 내게 있어서 가짜 구원은 직업적인 목표와 성취, 즉 새로운 책, 또 다른 사역 프로젝트, 교회가 이루는 또 하나의 업적이다. 그러다 보니 해변에서의 휴가가 끝나갈 때가 되어서 우리가 느끼는 감정은 서로 정반대이면서도 또 이상하게도 똑같았다. 휴양지에 도착하자마자 캐시는 곧 떠나야 한다는 사실 때문에 불평을 하곤 했고, 바로 그런 생각 때문에 그녀는 휴가를 온전히 즐기지 못했다. 그녀는 오두막 현관의 난간에 자신을 수갑으로 채워서라도 그곳에서 떠나지 않는, 그런 환상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서 사역에 복귀하고 싶어 조바심을 내곤 했다. 자연스럽게 해변에 앉아서도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역에 관한 브레인스토밍 내지 계획표 작성으로 보냈다. 그렇게 온전히 휴가를 즐기는 법을 모르던 우리 두 사람은 휴가가 끝나도 재충전이 되어서 집에 돌아온 적이 없었다. 그런 우리에게 완벽하게 적용할 수 있는 말은 바로 초록색의 키 작은 제다이 마스터가 했던 말이다. “그는 평생 동안 먼 미래인 지평선만을 바라보았다. 단 한 순간도 그는 현재 있는 그 자리에 마음을 둔 적이 없었다.” 캐시와 나는 좀 더 현명했어야 했다. 아니, 사실 우리는 잘 알고 있었다. 뭔가 좋은 것을 절대적인 것으로 기대할 때, 그래서 그 속에서 가장 큰 위로와 사랑을 찾을 때, 그것이 뭐가 되었든지 결국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어거스틴(Augustine)은 이런 유명한 말을 남겼다. “당신은 당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렇기에 당신 안에서 안식을 찾기 전까지 우리의 마음은 결코 안식을 찾을 수 없습니다.” 18세기 찬송가 작가 존 뉴튼(John Newton)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모습을 묘사했다. “자존심과 자아라는 내적 시련을 통해서 내가 너를 해방시키고 이 땅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너의 모든 시도를 다 깨뜨리는 이유는 바로 네가 오로지 나를 통해서만 네 자신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다.”나와 캐시는 놀랍게도 이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려고 하지 않을수록 이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즐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더 이상 우리는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에게 내어놓으라고 요구하지 않는다. 우리는 이제 아주 단순한 것들에서 기쁨을 찾는다. 물 위에 뜬 태양과 꽃병 속의 꽃에서부터 서로를 포옹하고 섹스를 나누며 대화를 하는 것 등등. 이제는 이 모든 것이 이전보다 더 큰 기쁨을 가져다 준다. 이런 사실에 우리는 많이 놀랐다. 이런 변화가 단 하룻밤에 일어난 혁명은 아니다. 하나님이라는 실재가 내 마음을 더 많이 채울수록, 비록 느리고 고통스럽고 또 많은 눈물이 따라왔지만, 이 세상에서 누리는 가장 단순한 기쁨이 내 하루하루를 채우는 행복의 원천이 되어갔다. 더 나은 용어가 없기에 나는 이런 내가 천국의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지만, 나는 이 물질 세계 속에도 실로 놀라울 정도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넘친다는 사실을 매일 확인하고 있다. 지나친 감상에 빠져서 또는 과장해서 하는 말이 아니다. 나는 진심으로 내 인생에서 지금처럼 행복했던 적은 없었고, 지금처럼 하루하루가 위로로 가득했던 날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또한 동시에 요즘처럼 슬픔에 가득한 날을 보낸 적도 없었다. 우리 부부의 친한 친구 중 한 사람이 육 년 전에 남편을 암으로 잃었다. 평소에는 괜찮아 보이는 그녀지만 지금도 갑자기 떠오르는 어떤 기억이나 생각 하나에 그녀는 쓰러질 것처럼 휘청대고 또한 슬픔에 허우적거린다. 맞다. 그건 조금도 이상한 게 아니다. 그러나 나는 그런 휘청거림에도 감사한다. 그런 슬픔과 아픔은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방향을 조정해서 머리가 주는 확신과 마음 속 과정을 재정비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두려움에 어떻게 대처했고 또한 어떻게 기쁨을 누렸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따로 시간을 내어 묵상할 때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위안은 이제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고 달콤하다. 원제: Growing My Faith in the Face of Death출처: www.theatlantic.com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죽음과신앙
고통
머리와마음
유한성
팀 켈러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상)
by Tim Keller
2021-04-18
이 글은 지난 3월 7일 미국 The Atlantic지에 실린 팀 켈러 목사의 기고문으로서 오늘과 내일 이어서 게재됩니다. 암 진단이 닥치기 전까지, 나는 평생 동안 다른 이들을 상담하던 목사였다. 이제 내가 했던 그 조언을 내가 들어야 한다. 인생에서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나는 임박한 죽음 앞에 선 사람들에게 믿음이 어떤 의미인지에 관해 설명했다. 1975년 장로교 목사가 된 이후, 나는 수없이 많은 병상 옆에서 환자를 상담했고 때로는 그들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바로 그 순간에 함께하기도 했다. 최근 나는 죽음을 앞둔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를 기록한 소책자, ‘죽음에 관해서(On Death)’를 출간했다. 그 책을 출간하고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췌장암 진단을 받았을 때, 나는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2020년 2월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아시아 기독교인 대회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는 장에 염증이 생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스캔 검사 결과, 복부 림프절이 꽤 비대해져 있긴 했지만 별로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고, 세 달이 지난 후 점검하기 위해 다시 병원을 방문했다. 그리고 그 즈음 내 책이 출판되었고 또 당시 뉴욕에 사는 우리 모두는 다 COVID-19 때문에 한창 고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 이미 내 몸 속에는 죽음의 사자가 단단히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나는 온라인에서 췌장암의 희박한 생존 통계를 보며 몇 분 동안 끔찍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그런 나의 바로 옆에는 내가 쓴 ‘죽음에 관해서’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나는 내가 쓴 그 책을 읽을 수 없었다.갑자기 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던 나와 아내 캐시는 많은 시간을 눈물 속에서 보냈다. 우리는 둘 다 일흔을 지나고 있었지만 몸도 건강하고 정신도 말짱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오십 년간 해오던 사역을 앞으로도 계속 할 수 있을 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있었다. 캐시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여보, 난 일흔이 되면 정말로 노인처럼 느낄 줄 알았는데, 전혀 그렇지가 않네요.” 우리에게는 여전히 많은 계획이 있었고 또한 자녀와 손주라는 큰 기쁨이 있었다. 병이라는 건, ‘내가 정말로 엄청 늙었구나’라고 스스로 느낄 때나 찾아오는 불청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이라고? 아직은 아니지. 아니, 이건 말이 안 되지. 하나님, 지금 나한테 뭘 하시는 건가요? 성경 중에서도 특히 시편은 이런 우리의 감정을 잘 표현한다. “주님, 왜 멀리 떨어져 있습니까?” “오 주님, 일어나십시오. 왜 주무십니까?” “오 주님? 나를 영원히 잊으신 겁니까?”죽음 앞에서, 그것도 자기가 생각하기에 부당한 이유로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믿음이 흔들리거나 또는 아예 믿음을 잃어버리는 기독교인이 적지 않다. 암 진단을 받기 전에 나는 믿음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이런 현상을 많이 목격했다. 몇 년 전 암에 걸린 한 여성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저는 더 이상 신자가 아닙니다. 믿음은 내게 아무런 힘이 되지 않습니다. 내게 이런 병을 주는 사랑의 하나님(personal God)을 나는 더 이상 믿을 수 없습니다.” 정작 암이 죽인 것은 그녀가 믿던 하나님이었다.나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날까? 갑자기 나는 내가 수술대에 누운 외과 의사처럼 느껴졌다. 내가 환자들에게 하던 그 조언을 나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내가 가장 먼저 배운 것 중 하나는 위기를 만났을 때 신앙이 자동적인 위안을 제공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믿음이 자동적인 위로와 실존적인 능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 언젠가 죽을 것이라는 사실에 관한 합리적이고 또 의식적인 인정에도 불구하고 불치병 진단은 당장 내 속에서 무척이나 강력한 심리적 거부감을 불러일으켰다. “꺼져가는 빛을 항해 분노하고 또 분노하라”라는 딜란 토마스(Dylan Thomas)의 조언에 따르는 대신, 나는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뭐라고? 말도 안 돼, 난 죽을 수 없어. 이건 다른 사람들한테나 생기는 일이지 나한테는 아니야.” 이런 터무니 없는 말을 소리내서 말했을 때, 나는 바로 이 착각이야말로 그때까지 내 마음 속에서 나를 움직이던 실질적인 작동 원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화 인류학자 어니스트 베커(Ernest Becker)는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문화를 지배한다고 주장했다. 현대의 삶이 이러한 부정을 더욱 심화시켰다는 그의 말이 옳기는 하지만, 죽음에 대한 부정이 우리 곁을 떠난 적은 없다. 16세기 개신교 신학자 존 칼빈(John Calvin)은 이렇게 썼다. “우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영원히 머물 것처럼 일을 벌이면서 살고 있다. 죽은 시체를 볼 때면 아주 잠시 덧없는 삶의 본질에 대한 철학적 사고를 하곤 하지만, 몸을 돌리는 순간 우리 마음은 다시금 내 자신의 영속성이라는 생각으로 고정된다.” 죽음은 우리에게 추상적인 무엇일 뿐이다. 기술적인 측면에서 죽음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개인적인 현실 속에서 죽음은 여전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어떤 것이다.똑같은 이유로 하나님과 내세에 대한 우리의 믿음 또한 종종 추상적인 차원에 머문다. 죽음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굳이 믿음이 우리에게 정신적 동의 내지 수긍, 그 이상이어야 할 필요가 없다. 연극이나 영화 속 전투에는 무대 소품만 있으면 된다. 그러나 마지막 원수인 죽음이 내 마음에서 비로소 현실이 되는 순간, 나는 나의 믿음 또한 내 마음에서 현실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고서 나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다. 하나님의 사랑과 부활에 대한 이론적 생각은 이제 내 생명을 붙잡는 진리가 되거나 아니면 폐기 처분할 쓰레기 중 하나가 되어야 한다.나는 단지 종교인 뿐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죽음이라는 현실을 거부하는 가운데, 평생 가졌던 신념마저 사라지는 과정에서 고통스러워 하는 모습을 적지 않게 목격했다. 나는 또한 목사로서 단지 명목상에 불과한 신앙을 가졌던 사람들이나 또는 신앙이 전혀 없는 사람들이 병들고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많은 사람들이 비록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우주에 대한 일련의 믿음을 가지고 산다. 그들이 갖고 있는 은연 중의 믿음은 물질 세계가 저절로 생겨 났고 또한 우리가 죽은 후에 갈 초자연적인 세계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죽음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기에, 작가 줄리안 반스(Julian Barnes)가 주장했듯이 죽음은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증명할 수 없는 믿음의 항목이며, 사람들은 반스가 가졌던 생각을 활용해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차단한다. 그러나 나는 그런 세속적인 믿음이 위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던 비종교인들조차 종종 죽음이라는 현실에 직면했을 때 무너지는 것을 보았다. 그러면, 유한성과 죽음이 주는 확신이 마침내 당신이라는 존재를 관통할 때, 우리를 무너뜨리는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그 현실을 대면할 방법은 없는 것일까? 우리에게 남은 시간을 더 큰 은혜와 사랑과 지혜로 보낼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분명히 있다고 믿지만, 거기에는 지적이고 감정적인 노력이 필요하다. 즉, 머리와 마음이 함께 움직여야 한다. 내가 지금 머리와 마음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는 각각 추론과 느낌을 의미하는 이 두 단어의 기능이 상호 독립적이라는 현대적 관점을 반영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히브리성경은 마음이 생각과 의지 그리고 감정의 중심을 차지한다고 본다. 잠언은 “사람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그대로다”라고 말한다. 즉, 합리적인 신념과 경험이 내 생각을 바꿀지는 모르지만, 그것이 내 마음에 뿌리를 내리기 전까지는 결코 내 속에 일어나는 변화가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 신념을 재검토함으로써 내 신앙을 강화하기로 했다. 과연 신앙이라는 게 죽음을 상대할 수 있는지 말이다.정형외과 의사인 폴 브랜드(Paul Brand)는 의사 인생 전반부를 인도에서 그리고 나머지를 미국에서 보냈다. 최근에 낸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미국에서 … 나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고통을 피하려는 사회를 만났습니다. 환자들은 내가 이전에 치료했던 환경과 비교할 때 훨씬 더 안락한 수준에서 살고 있었지만 고통을 처리하는 그들의 능력은 훨씬 취약하고 고통으로 인한 트라우마는 훨씬 더 심각한 것처럼 보였습니다.”왜 풍족한 현대 사회를 사는 사람들은 악의 존재와 고통 그리고 죽음 때문에 더 고통받는 것처럼 보일까? 철학자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그의 책 ‘세속 시대(A Secular Age)’에서 인간은 항상 하나님의 방법과 정의라는 문제 때문에 고민했지만, 아주 최근까지도 고통이 하나님의 존재를 말이 안 되게 한다고는 결론 내리지 못했다고 썼다. 수천 년 동안 사람들은 자신의 부적절함이나 죄성에 대한 강한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렇기에 우리 모두가 다 편안한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는 식의 현대적인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 더욱이 우리 인간은 자신의 논리적인 능력에 너무도 자신감을 갖게 된 나머지 이 세상에 고통이 존재하는 타당한 이유를 찾아낼 수 없다면 아예 고통이란 없다는 식으로 가정한다고 테일러는 주장한다. 그러나 당신이 목격하거나 인내하는 고통에 대한 당신의 분노를 처리할 정도로 위대한 신이 있다면, 당신이 결코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해도 그런 고통을 허용하는 분명한 이유를 가진 위대한 신도 있기 마련이다. 무한하신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가 행하시는 선과 악의 모든 이유를 다 알 수 있다고 확신하거나 또는 그 하나님이 항상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사물을 대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것은 전혀 논리적이지 않다. 테일러의 요점은 이것이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받는 고통 때문에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게 불가능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그들이 자기 자신과 스스로의 능력에 대해 갖고 있는 지나친 확신이 그들로 하여금 분노와 두려움 그리고 혼란을 자아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아티클은 ‘죽음 앞에서 더 깊어지는 신앙’(하)로 이어집니다. 원제: Growing My Faith in the Face of Death출처: www.theatlantic.com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부활신앙
죽음
하나님의위로
암진단
믿는 자는 어리석어 보인다 최소한 지금은…
by Jon Bloom
2021-03-28
하나님의 지혜는 종종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에야 제대로 보인다. 인간의 지혜는 일시적인 유행으로 지나가도, 하나님의 지혜는 마치 오래된 산처럼 여전히 그 자리에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상의 지혜는 거짓임이 드러나지만, 그와 반대로 시간은 하나님의 지혜가 진실임을 증거할 뿐 아니라, 신실하게 그 진리를 세상에 전파하는 사람들의 참됨을 증거한다. 만약 지금 교회가 세상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 궁금하다면, 본디오 빌라도 앞에 선 예수를 생각하길 바란다. 그날 아침 로마 총독의 관저에서 있었던 두 사람 사이의 대화를 지금 당신이 목격하고 있다고 상상해보라. 누가 약자고 누가 강자로 보이는가? 누가 어리석어 보이고 누가 상식을 가진 것 같은가? 두 사람 중에 누가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결과가 나오도록 노력하는 것 같은가? 총독과 주님“네가 유대인의 왕이냐?”(요 18:33).“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지금 농담하는 거지! 빌라도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나서 자신의 눈을 손으로 문질렀다. 본디오 빌라도에게 지금 자기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대단히 불편한 존재였다. 그날 로마 총독이 예정했던 일정에 산헤드린과 문제를 일으킨 랍비를 재판하는 것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게다가 그것도 아침에 처리해야 하는 가장 첫 번째 일정으로는 말이다! 평의회는 빌라도가 그 남자를 반역죄로 유죄 선고하기를 원했다. 그것도 바로 오늘. 그러니까 유월절 전에 말이다. 빌라도는 그런 압력이 못 마땅했다.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많은 이 인물, 예수에 대해서 과거에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굳이 그 남자를 괴롭힐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그가 받은 첩보에 의하면 예수는 그냥 또 한 명의 유대 신비주의 선생일 뿐이었다. 그가 기적을 행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예수가 로마 황제를 폄훼하거나 또는 로마에 반역한다는 보고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겉으로만 보면, 예수는 몇 명의 로마 군인에게 영적인 영향을 주기도 했지만, 로마를 향한 그 어떤 불충도 보인 적은 없다. 쉽게 빠져나오기문제를 일으키는 유대인 하나 죽이는 것은 빌라도에게 전혀 두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그렇게 좋지는 않다. 예루살렘은 유월절을 지키러 온 사람들로 들끓고 있었다. 정치적 '처형'을 하기에 좋은 시기가 아니었다. 예수 자신이 반란을 조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예수의 처형은 문제를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그는 농민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며, 유대인 과격파(zealots)는 적절한 기회를 엿보는 상황이었다.그럼에도 예수는 가만히 있었다. 아니, 예수라는 인물은 어찌 이리도 정치적인 감각이 없는 것인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라는 질문은 사실상 빌라도가 지금 본질적으로 예수에게 사형을 면할 수 있는 즉각적인 길을 알려주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예수가 할 일은 그냥 빌라도에게 빠르고도 명확하게 “아니다”라고만 대답하면 될 일이었다. 그러면 그는 로마로부터 사형당하지 않고 살아날 수 있었다. 다른 종교 문제는 산헤드린이 해결하면 될 일이고, 빌라도는 이제 자신을 기다리는 다른 중요한 일을 보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의 왕국은 이 세상에 속하지 않았다”는 예수의 대답은 이 예상치 못했던 상황을 오히려 더 어렵게 만들었다. 이게 뭐하는 거야, 지금? 지금 죽고 싶지 않다면, 상상이든 뭐든, '왕국'이라는 단어를 로마 총독 앞에서 언급하면 안 되지, 안 그래? 이제 빌라도는 한층 더 깊이 조사해야 할 상황을 맞았다. 누가 망상을 하고 있는가?“네가 왕이냐?” 빌라도가 물었다. 예수는 대답했다.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태어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려 함이로라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요 18:37).빌라도는 비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이렇게 생각했다. '정말로 딴 세상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 신비주의자군. 망상에 빠진 건가? 어쨌든 로마는 말할 것도 없고, 그 누구에게도 위협은 될 수가 없는 인물이다. 절대로 그럴 인물이 아니야.' 예수는 진리의 왕이었으며 그의 관심은 기꺼이 그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빌라도의 눈에 그들은 결코 반란을 일으킬만한 주체가 될 수 없었다. 또한 예수를 따르는 사람들은 세상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요 18:36). 이것은 반역이 아니라 단지 종교적인 광기였다. 굳이 예수를 죽일 필요가 없었다.그래서 빌라도는 한 가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이 복잡한 상황에서 빠져나가는 길, 예수를 풀어줌으로써 로마가 얼마나 자비로운지를 보여주는 길, 산헤드린도 체면을 차리고 유대 군중의 분노도 잠재울 수 있는 길. 바로 유월절 죄수를 풀어주는 것이었다. 이 생각을 말하기 위해서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빌라도는 이 진리의 왕에게 냉소적으로 말했다. “진리가 무엇이냐”(요 18:38).세상과 교회그날 아침 관저에 앉은 빌라도, 로마 제국을 등에 업은 그는 말 그대로 모든 권력을 다 가지고 있었다. 그에 비해 예수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냥 거기 서 있었다.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사 53:3).당시의 상황을 고려하면 빌라도의 말이 훨씬 더 합리적으로 들린다. 예수의 말은 망상에 빠진 것 같고 이상하기만 하다. 빌라도는 부당한 처형을 막고자 했고, 좌절감을 주었을지 모르지만 유대인 평의회와 최대한 등을 지지 않는 방법을 찾았으며 또한 예루살렘에서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매우 실용적인 방법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에 반해 예수는, 불가사의하게도 십자가 처형을 피하기 위한 그 어떤 시도도 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되돌아볼 때, 우리는 예수가 강했고 빌라도가 약했다는 것을 보게 된다. 빌라도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심으로 인해 자신의 권력을 행사했을 뿐이었다(요 19:11). 이제 우리는 지혜로운 이는 예수였고, 빌라도는 어리석었음을 안다. 빌라도는 '육체에 속한 사람'이었기에 예수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고전 2:14). 그리고 우리는 빌라도가 아닌 예수야말로 그와 관련한 모든 이에게 무엇이 가장 유익한지를 알고 있었음을 보게 된다. 단지 한 도시의 평화만을 생각하던 빌라도는 수십 억명의 평화를 위해 걸어가는 예수에 대해서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눈에 보이는 교회의 위치다. 비록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요셉'과 '다니엘' 그리고 '가이사의 집 사람들'(빌 4:22)처럼 정부의 요직에 둔다고 하더라도, 교회는 세상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다. 교회는 언제나 세상의 권력자들 눈에는 망상처럼 보이는 진리를 말하고, 오해를 받고 얼마든지 잘못 해석될 목표를 추구하는, 그런 약한 곳에 설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는 더 강하다. “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고전 1:25).나의 증인이 되리라예수가 빌라도에게 증언하듯이, 또 바울이 증언하듯이 (그리고 그가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행 26:24)"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예수는 우리에게 말한다.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우리 중 누군가에게 이것은 말 그대로, “너희가 권력자들과 임금들 앞에 서리니 이는 그들에게 증거가 되려 함이라”(막 13:9)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권력자 앞에 서든지, 아니면 직장 동료나 이웃 또는 가족 앞에 서든지, 우리가 말하는 것은 지금 현재의 맥락에서만 보면 이상하게 들릴 것이다. 우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다른 사람의 귀에 어리석은지, 또 우리가 지금 얼마나 약자의 위치에 있는지 당신은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가 빌라도 앞에 서 있던 예수를 기억해야 할 때다. 중요한 것은 어색한 상황이 아니다. 설혹 생명이 달린 심각한 상황에서라도 보이거나 들리는 게 얼마나 이상한가의 여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담대한 말이 아무리 비웃음을 사더라도 우리가 얼마나 진리를 신실하게 붙잡는가의 여부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 즉 하나님이 그 순간에 실제로 행하고 있는 역사가 무엇인지는 시간이 지나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Faithful Will Look Foolish — for Now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세상
교회
빌라도
진리
증인
유행
지혜
의사인 내가 목자의 심정이 될 때
by Scott James
2021-03-24
각종 의료 장비와 튜브, 그리고 동물 인형들이 만들어내는 만화경과 같은 병실 중앙에는 매우 아픈 아이가 누워있다. 내가 들어온 것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의 혈관으로는 진정제가 흐르고 있는데, 행여나 아이가 축축해진 폐에 산소를 집어넣고 있는 인공 호흡기를 잘못 움직여서 뽑히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침대 끝에 서서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본다.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전혀 건강에 문제가 없던 제이콥은 지금 이렇게 병실 침대에 누워있다. 우리 아들은 언제 완쾌되나요?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병실 한편에 앉아있는 부모는 아직까지도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란에 빠져 힘들어하는 게 역력하다. 부모의 마음속에 제이콥은 여전히 건강한 아이다. 그들의 삶에 침입한, 생각지도 못한 이 병을 놓고 그들은 지금 “왜?”라는 질문 대신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이겨낼 수 있을지를 놓고 발버둥치고 있을 뿐이다. 내 아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건가요? 그리고 이 상황이 얼마나 오래 갈까요? 나는 의사 경력 내내 부모가 자녀에게 발생한 상황을 바로 이해하도록 도우려 했지만, 두 번째 질문인 이 상황이 얼마나 지속될 지에 관한 의문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는 꽤나 오랜 시간이 걸렸다. 무슨 일이 생긴지를 이해하게 된 부모라고 해도, 내 아이를 언제 다시 되찾을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이 그들이 정말로 듣고 싶은 것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부모에게로 다가가자 그들은 희망과 걱정이 섞인 눈으로 나를 바라본다. “안녕하세요? 전 제임스 박사고, 이 병원 감염내과 의사입니다.”그나마 상황이 좀 좋을 때면, “난 부모님이 만나고 싶어하는 의사가 아니랍니다”라는 식의 농담을 건네곤 한다. 사실 나를 만난다는 것은 뭔가가 심각하게 잘못된 경우이기 때문이다. 제이콥의 경우가 그런 경우인데, 그 부모는 지금 그들이 느끼는 긴장을 얼굴 표정만으로도 내게 충분히 전달하고 있다. 도움을 주는 게 나의 목적이지만 그럼에도 때로는 부모가 힘들게 붙잡고 있는 정서적 안정 마저 파괴하는 소식을 전해야 하는 게 나의 입장이다. 병실에 들어갈 때면, 제발 나쁜 소식만은 전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부모들의 표정을 자주 접한다. 그러나 나는 나쁜 소식의 잠재적 전달자고, 나의 한마디가 부모를 더 큰 절망에 빠뜨리기도 한다. 나는 일단 제이콥의 발병 원인과 최선의 치료 방법을 찾기 위해 주치의가 내게 연락을 했다는 말로 대화를 시작한다. 아직 그 질문에 답을 찾지 못했지만, 지금 병원은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지금 어떤 치료를 진행하고 있는지, 그리고 의사인 우리도 모르는 일, 또 예상할 수 있는 상황과 그렇지 못한 돌발 변수에 관한 솔직한 전달이 제이콥과 같은 발병 초기 단계에서 부모와 나눠야 할 이야기다. 지금 제이콥의 부모를 만나는 이유가 무엇보다 그들에게 안정감과 자신감을 주기 위해서지만, 그렇다고 지킬 수 없는 지나친 약속을 해서는 안 되는데, 그것은 환자와 의사 사이에 가장 중요한 신뢰를 손상시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거짓 희망을 주는 것은 바보에게 심부름을 시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아직까지 내 의사 생활 내내 거짓 희망을 듣고 싶어하는 부모는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중요한 질문 던지기나는 일단 제이콥의 상태가 오늘 아침에 어땠는지 묻는데, 이것은 중요한 질문이다. 그들의 소중한 아이는 지금 부모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퉁퉁 부은 얼굴로 병원 침대에 누워 튜브와 전선에 연결된 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던지는 나는 무슨 대답을 기대하는 걸까? “제이콥이요? 아주 좋았지요, 선생님은 오늘 아침 어떠셨어요?”그러나 이 질문에 부모가 어떻게 반응하는지는 부모가 지금 상황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아이가 얼마나 아픈지를 제대로 인지하고 있는지, 단지 낙관적인지 아니면 심지어 희망을 갖고 있는지, 비관적인지 아니면 이미 포기한 상태인지를 알려준다. 이런 질문은 나로 하여금 지금 이 병실 상황을 좀 더 잘 이해함으로 부모에게 좀 더 나은 정보를 전달하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제이콥의 부모는 희망적이다. 현실을 잘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그들은 아들이 지금도 매우 위중한 상태고 한때는 생명이 위험한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는 것도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지금 상황이 아주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최소한 더 악화되는 방향으로 상황이 진행되고 있지는 않다. 제이콥의 부모가 이해하는 아들의 아침 상황을 들으면서 나는 병실 내부를 좀 더 자세히 관찰한다. 제이콥이 입원한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지만, 이미 이곳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보낸 카드와 메모로 가득 차 있다. 그중에는 내 딸이 연습하고 있는 초급 서예 수준의 꼬불꼬불한 글씨로 쓴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가 적힌 카드도 보인다. 병실 구석 접이 침대 위에는 이 가족이 다니는 교회에서 보낸 위로 물품도 놓여있다. 교회가 도와야 한다자녀가 중병에 걸렸을 때 가족이 받는 지원 수준과 부모가 느끼는 정서적 안녕 사이에는 분명한 상관 관계가 있다. 이때야말로 소속감이 위력을 발휘하는 순간이다. 나 역시 예수님의 제자로서, 교회가 슬픔에 잠긴 가족을 돕는 모습을 보면 말할 수 없이 기쁘다. 제이콥의 가족은 서로의 짐을 짊어지라는 명령(갈 6:2)에 순종하는 믿음의 가정이 받는 축복을 경험하고 있었다. 나는 한때 그 명령을 추상적으로 이해했었지만, 가까이에서 비극을 접하는 일을 하다보니 그 명령은 다름 아니라 나를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형제를 돕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구현되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험난한 상황 속에서도 교인들은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었고, 제이콥의 부모는 분명하게 그 사랑에 휩싸여있다. 제이콥 가족과의 대화가 계속될수록 나는 그들이 이 끔찍한 상황을 영적인 관점에서 어떻게 접근하고 있는지를 느끼게 된다. 그들의 언어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를 드러내는 단어들로 채워져 있다. 내게 있어서는 이런 영적 단서를 찾아서 그들을 가장 잘 도울 수있는 방법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육체적인 문제로 자녀를 병원에 데리고 온 많은 부모들의 경우에도, 그들이 진짜로 관심을 갖는 부분은 놀랍게도 육체적인 게 아니라 심리적이고 정서적이며 영적인 분야다. 나는 제이콥을 진찰하고 부모와의 대화를 정리하면서 지금 기다리고 있는 검사 결과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치료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검사 결과와 현재 치료에 대한 제이콥의 반응에 따라서 치료법을 수정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여전히 초조하지만 감사를 표하며 희망을 잃지 않겠다고 말한다.진짜 희망을 가진 부모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의 선물이다. 하지만 내가 상대하는 병의 심각성을 고려할 때 희망을 가질 수 없는 부모를 탓할 수도 없다. 언젠가 만난 한 아이의 어머니는 딸의 상태를 말하는 내 이야기를 잘 들었을 뿐 아니라 질문에도 제대로 대답했지만, 그녀의 눈은 나를 향해 병원의 노력이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그리고 오늘 밤이 내가 아이와 보내는 마지막이 될 것도 이미 알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었다. 무력감은 전염성이 있다. 그 어머니의 눈빛은 내게 명치를 때리는 것과 같은 충격이었다. 공감과 넘치는 열정 사이의 애매한 균형을 찾기 위해서라도 최선을 다해 나는 그런 무력감까지도 흡수하려고 노력한다. 사람들은 그들과 함께 고난의 계곡을 걸어갈 의사를 원하지만 정작 의사인 우리가 희망을 잃고 비틀거리며 그 계곡을 걸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목자이신 여호와를 기억하라제이콥의 부모는 움츠러든 마음에도 불구하고 깊은 희망의 우물에서 힘을 얻는 것 같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병실을 떠나기 전에 나는 벽에 붙은 카드를 가리킨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새로운 소식이 오는 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때까지는 우리 저 말씀을 함께 믿도록 해요.”그날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내 마음에서 제이콥이 사라지지 않는다. 기다리고 있는 검사 결과들, 가능한 발병 원인들, 최선의 치료방법, 움직이지 않는 팔 아래에 있던 동물 인형, 부모의 눈에 깃든 아픔. 이런 것들이 내게서 떠나지 않는다. 모퉁이를 돌아 차가 우리 동네에 들어가면서 나는 다른 생각을 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병원에서는 제이콥과 그의 부모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하지만, 집에서만은 내 가족에게 100퍼센트 헌신해야 한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떨쳐내며 기도한다. 집 주차장에 들어올 때면 항상 하는 기도다. 주님, 제가 오늘 만난 어둠을 집으로 들고 들어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우리는 너무도 약하다잘 시간이 되면 나는 막내 딸과 함께 책을 읽는다. 번갈아가면서 큰 소리로 읽는 동안에도 나는 제이콥에 대해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내 딸은 제이콥보다 조금 더 어리다. 지금은 너무도 건강하지만, 제이콥도 지난 주까지는 내 딸과 다르지 않았다. 보통 때에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상상하지 않는 나지만, 지금 이 순간, 내 딸이 제이콥처럼 병실에 누워있는 모습을 내 머리에서 억지로 몰아내야만 한다. 제이콥과 같은 일이 내 아이들에게도 언젠가 닥칠지 알 수 없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기도하지만, 그럼에도 지금 제이콥의 부모가 겪고 있는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것은 얼마든지 나의 일이 될 수도 있다.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단단한 땅에 바로 서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어두운 생각과 내가 씨름하는 동안에도 빛은 반짝인다. 나는 제이콥 부모의 눈에서 그 빛을 보았다. 그들이 겪는 고통 뒤에 숨은 그 빛을 보았다. 그것은 희망, 궁극적인 희망이었다. 그들을 보면서 상처가 진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또한 그 상처가 마지막이 아님도 알 수 있었다. 타락한 세상에서 사는 이상 질병과 죽음을 잊을 수는 없지만, 이런 현실이 영원한 것은 아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그는 이미 죽음을 이기고 우리를 푸른 초장으로 인도하고 계신다. 이번 주에 만날 푸른 초장은 어쩌면 시기 적절한 진단과 제이콥의 생명을 구하는 효과적인 항생제라는 형태가 될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우리의 목자는 더 오래 지속되는 초장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나는 첫 번째 초장을 위해 싸울 뿐 아니라 두 번째 초장을 위해 사람들을 준비시키는 데도 내 평생을 바치고 싶다. 원제: My Pastoral Moments as an Infectious Diseases Doctor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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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하나님이 주신 과제
by John Piper
2021-03-23
1981년 6월 14일 주일, 존 파이퍼 목사는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라는 구절로 시작하는 고린도전서 7:17-24로 설교하였다. 이 설교의 요점은 다음과 같은 선포와 기도로 요약할 수 있다.우리가 직장 생활을 통해 부딪치는 여러 가지 직무 수행의 요구 사항들을 어떻게 이행하느냐 하는 것은 제자도의 본질이다. 바꾸어 말하면, 부여된 직무 수행에 대한 우리의 자세는 예수님께 대한 순종의 척도가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아버지, 우리가 하는 일을 통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고 우리의 모든 업무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여야 한다.파이퍼는 이 선포와 기도가 어떻게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와 연관이 있는지를 설명하였고, 직업과 관련된 네 가지 유익하고 실질적인 의견을 제시함으로써 설교를 마무리하였다.첫째,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보다는 우리가 지금 하는 일을 대하는 자세에 훨씬 더 관심을 두고 계신다. 설교를 듣는 회중 에는 간호사, 교사, 목수, 예술가, 비서, 사서, 변호사, 안내원, 사회 복지사, 각종 수리공, 엔지니어, 사무 관리자, 웨이트리스, 배관공, 판매원, 경비원, 의사, 군인, 상담원, 은행원, 경찰관, 실내장식 디자이너, 음악가, 건축가, 화가, 가정부, 학교 사무직원, 주부, 선교사, 목사, 가구 제작자, 그리고 그 외에 다양한 직업군의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종사하고 있는 어떤 직종이나 직업을 다른 것으로 바꾸어야 하는지 고민하는 것을 보시는 것이 아니라, 현재 우리가 일하는 직장에서 업무를 수행하는 가운데 일을 처리하는 방식들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그분의 임재를 느끼며 기꺼이 그분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지에 관심을 두고 계시다는 사실이다.둘째, 우리가 본 바와 같이, 회심 이후에 자기의 직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는 명령을 절대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직업을 바꾸는 것은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7장(15절)에서 예외를 인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성경에서도 그러한 변화를 언급하고 있으며 또한 이를 인정하고 있다. 구약성경 중에는 노예를 해방한 일에 관한 구절이 있으며, 전도자가 된 세리와 제자가 된 어부들의 이야기도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어떤 종류의 직업은 그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를 수 없다는 것도 우리는 알고 있다. 예를 들어, 매춘이나 외설적이고 타락한 수많은 형태의 오락 관련 업종들, 그리고 사람들을 착취하도록 강요받을 수도 있는 업종들이 그런 류의 직업이다.바울은 절도범이나 고린도의 매춘부가 자기가 부르심을 받았던 그 위치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고린도서에서 보여준 ‘우리가 그리스도 앞에 섰을 때 무엇을 버려야 할까’라는 질문에 바울은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할 수 있는 직업에 종사하고 있다면 그것을 버릴 필요가 없다’고 답하였다. 바울은 이직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직업이 무엇이든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취감을 느낄 수 있겠는가’라는 내용을 자문하여 보라는 교훈을 준 것이다. 이것은 현대 서구 사회에서는 그리 환영받을 수 있는 가르침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속적인 야망에 대한 관심을 단절하도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공에 대해 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이 성경적인지 아니면 그저 세속적인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성공을 바라는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말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서 더 올라가기 위해 애쓰고 있는 우리의 야망과 추진력을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임재와 그분께서 보여주시는 가르침에 대한 순종을 즐기는 믿음의 열정에 대신 쏟아 부으라는 것이다.셋째, 스스로 ‘나의 인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를 질문해 보았을 때 ‘하나님의 뜻은 내가 그분과 긴밀한 유대관계를 유지하며 그의 계명을 따라 순종하는 데 전념하는 것이다’라고 확고부동한 답변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아직 취업의 문턱을 넘지 않은 젊은이들에게 주는 본문의 요약인 셈이다.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그분의 뜻(순종해야 할 책임이 있는 유일한 뜻)은 우리의 직업이 아니라 우리의 거룩함(살전 4:3)뿐이다. 전심을 다하여 각자가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원하는 일은 무엇이든지 맡도록 하라. 우리 젊은이들이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말씀의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 모든 정성을 쏟아 노력을 기울인다면, 하나님께서는 확실하게 그들의 영향력이 하나님을 위해 쓰일 수 있는 곳으로 보내 주시리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마지막 네 번째, 우리가 현재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 한, 그곳에서 하는 우리의 업무는 하나님께서 부여하신 임무다. 17절은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우리가 현재의 위치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만이 완전히 서리라”(잠 19:21). “제비는 사람이 뽑으나 모든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 16:33).어찌하다 보니 지금 하는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거룩한 임무 수행을 위해 그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직업은 설교자의 일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주신 선교적 과제다. ‘우리가 어떻게 그 직무상의 요구를 만족시키는가?’에 대한 답변은 우리가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만큼 삶에서 필수적이다. 이것은 우리 중 많은 사람에게 새로운 태도로 삶을 대하게 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우리 모두 일터로 나가기 전에 기도하자. “하나님, 오늘도 저와 함께하셔서 아버지의 임재를 의식하며 사는 하루가 되게 하옵소서. 제가 절망하려 할 때 제 마음을 북돋아 주시고, 우쭐대려 할 때는 저를 겸손케 하옵소서. 하나님, 제가 알고 있는 주님의 모든 계명 중 핵심이 되는 내 이웃을 나처럼 사랑하라는 주의 명령에 순종할 수 있는 은혜를 저에게 내려 주시옵소서. 아멘.”원제: Your Job is God’s Assign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생활
직업
존파이퍼
동행
순종
영향력
임재
직장생활
부르심
제자도
고통 중에 팀 켈러를 인내하게 만든 것
by Matt Mccullough
2021-03-18
이 글은 부활절을 앞두고 부활의 의미를 새로 조명해 보는 팀 켈러 목사의 신간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Hope in Times of Fear: The Resurrection and the Meaning of Easter, 두란노, 3월 출간)’를 소개하는 글이다. - 편집자 주1970년 봄, 팀 켈러는 버크넬 대학교의 학생이었다. 그는 크리스천이 된 지 얼마되지 않은 새 신자였다. 그 당시 닉슨 대통령은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을 확대하고 있었다. 버크넬 대학교 학생들이 광장에 모여 여러 날 동안 시위와 토론을 할 때, 켈러와 몇 명의 크리스천 친구들도 그들과 합류했다. 그들은 군중의 가장자리에 앉아, 시위대의 구호와는 조금 다르지만 젊은이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에 딱 맞는 문구가 써진 현수막을 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예수님의 부활은 지적으로 신뢰할 수 있고 실존적으로 수긍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써 있었다.켈러는 최근에 출간된 자신의 저서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 이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의 배경이 된 때는 우리가 최근에 경험한 것과 비슷한 불안과 양극화된 분노가 시위로 나타난 또 다른 분열이 있던 해였다. 켈러는 50년이 지난 후에도 그때 사용한 현수막 문구를 그대로 내걸고 있다. 그리고 내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그동안의 그의 사역을 잘 요약한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는 이성적 질문과 감성적 갈망에 대답을 하며, 예수님은 여러분이 찾고 있던 바로 그분이다’라고 말이다.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독자들에게 예수 부활에 담긴 의미를 풀어놓고 있다. 부활절은 크리스천들에게 가장 숙연하고 중요한 절기로 여겨진다. 영적으로 다시 태어나는 시간이며 예수님이 무덤에서 3일 만에 육체적으로 부활하신 것을 기뻐하는 시간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부활하신 그분을 만나는 순간을 대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들은 모두 그분을 눈으로는 보았지만, 진정으로 영적으로는 보지 못했다. 그들의 눈이 열린 것은 예수님이 그들에게 다가가 그분이 진정 누구인지 보라고 했을 때였다. 이 책은 팀 켈러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 메시지를 드러낸다. 이 책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날카로운 통찰력,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에 대한 심오하고 새로운 접근으로 가득 차 있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부활절의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될 것이다.(PENGUIN RANDOM HOUSE. 272 PP.)부활을 중심에 놓기어떤 면에서 이 책은 2020년의 방향감각 상실에 대해 말하고 있지만, 지난 10년 이상 그의 독자였던 이들에게는 매우 친숙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세 가지 이유로 독특하고 절실히 필요한 책이다.첫째, 켈러의 책 중에서 이보다 더 성경으로 가득한 책은 보지 못했다. 물론 그의 책들은 모두 성경으로 가득 차 있고 성경에 충실하다. 이 책에도 루이스(C.S. Lewis)와 볼프(Miroslav Volf), 톰 라이트(N.T. Wright)와 테일러(Charles Taylor) 등과 같은 저자들의 글이 많이 인용되고 있다. 하지만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에서는 한 저자에서 다른 저자로 이동하며 논리적 주장을 펼치고 있다.책 전체의 흐름은 체계적이만 정형화되지 않았고, 앞 장들은 구속에 대한 반전의 성경신학처럼 읽힌다. 켈러는 하나님께서 얼마나 지속적으로 현자의 지혜가 무색하도록 약함에서 강함을, 슬픔에서 기쁨을, 궁극적으로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대반전’이라 부르는 이 논리의 패턴은 성경 전체에서 찾을 수 있으며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까지 이어진다. 둘째, 이 책은 켈러가 수년에 걸쳐 제공한 통찰력에서 비롯되었지만 이를 활용하여 하나의 중심점을 만들고 있다.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이것은 모든 잠금 장치를 여는 마스터 키다. 또는 성경의 은유로 강조하자면 이것은 모든 것이 안착되고 결합되는 모퉁잇돌이다. 켈러는 부활에 대한 역사적 증거를 제시한 첫 번째 장 이외에 다른 장들에서는 대부분의 페이지를 부활의 현실을 일상 생활 속에 적용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부활에 대해 꼭 알아야 하지만, 부활을 개인적이고 체험적으로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말처럼 ‘부활의 능력을 아는’(빌 3:10) 것이 중요하다”(xxi).켈러는 단순히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는 걸 말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우리에게 부활이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것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를 보여주고 싶어한다. 이를 위해 그는 우상 숭배에서 정의에 이르기까지, 성 윤리에서 무아지경에 이르기까지, 영적 체험에서 회복력 있는 정체성과 크리스천을 세우는 고통의 능력에 이르기까지 빠르고도 놀랍도록 다양한 주제들을 다룬다.이것은 마치 켈러가 최근 10년 동안 우리에게 권했던 핵심적 통찰이 고린도전서 15장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하다.“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 그도 가짜 신이다.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고,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의 한없이 베푸시는 은혜를 얻지 못한다. 정의에 대한 소망이 없고 우리의 사역도 의미가 없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망각을 향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는 지적으로 신뢰할 수 없고 실존적으로 만족을 주지도 못한다.“하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는 죽음에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켈러는 매 페이지마다, 살아서 숨쉬는, 그리고 육체적이면서도 역사적인 이 실제적 진실이 어떻게 우리의 현실에서 모든 것을 하나로 묶어주는지를 보여준다.마지막으로 또한 이 책은 그리스도가 켈러를 어떻게 붙들어 주시는지에 대한 간증이다. 2020년은 대부분의 우리보다 그에게 더 격동적인 한 해였다. 69세가 되는 작년 여름 초엽에 그는 췌장암 진단을 받았다. 항암치료를 받으면서 그는 치명적인 질병을 친구로 삼으며 이 책을 저술했다.서문과 감사의 글에서 짧게 언급한 것 외에 켈러는 이 책을 써 내려갈 때 그가 직면한 질병에 대해 그다지 언급하지 않는다. 그의 초점은 끝까지 예수님께 있다. 하지만 그는 “힘든 시기에 글을 쓰는 것은 내가 부활에서 위로와 능력의 깊이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도왔다”(217)고 인정한다. 이 책의 생동감과 힘은 그가 오랫동안 알았던 것에 대해 힘겹지만 새로 얻은 지식으로부터 직접 나온 것이라고 여겨진다.체험된 진리조나단 에드워즈가 남긴 유업에 대한 학술 컨퍼런스에 참여했을 때 대학생이던 나는 팀 켈러의 강연을 처음 들었다. 켈러는 설교자 에드워즈에 대해 강연을 하도록 초대되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 전 일이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는 것은 그가 마음의 영적 감각에 대한 에드워즈의 호소에 초점을 맞추었다는 것이다. 꿀이 달다는 것을 예를 들어서 아는 것과 먹어보고 아는 것의 차이에 대해 에드워즈가 언급한 것 말이다. 켈러가 설명했듯이, 에드워즈는 새로운 정보를 주기 위해 설교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새로운 정보를 만들도록 설교했다. 그는 사람들이 그들이 확인한 진리를 진리로 경험하고 그들이 알고 있는 것을 깊이 알기를 원했다.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팀 켈러가 언급한 에드워즈에 대해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켈러가 처한 실존적 상황을 바탕으로 그가 지적으로 주장하는 내용을 해석해 보았다. 멸망하게 될 최후의 적, 우리의 대적을 마주하고 있는 한 형제가 여기 있다. 그는 수십년 동안 성경 말씀에 의지하여 다른 사람을 섬겼는데 이제 그 통찰로 무장하여 이 적을 맞이하고 있다. 이 진실의 순간에 그가 여전히 실존적으로 만족하고 있는지 궁금해하는 것은 당연하다. 꿀은 달콤한가? 이 책은 그 질문에 대한 켈러의 대답이다. ‘그렇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달콤하다. 모퉁잇돌은 지금도 그를 지탱하고 있으며 특히 지금 더 그러하다.’그래서 ‘팀 켈러의 부활을 입다’는 더 귀중한 선물이며, 대반전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깊은 고통을 통해 우리가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생명을 주는 소망을 얻게 하신다.원제: The Hope That Sustained Tim Keller Through 20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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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는 삶이 진짜 신앙이다
by Kent Butterfield
2021-02-07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회개의 한 측면은 스스로 죽어야 한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죄로 충만한 이기심으로 채워진 곳이다. 죄와 엮인 삶은 이기적일 뿐만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스스로 파멸에 이르게 한다. 그러나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삶의 모습과는 정반대다. 그것은 고통을 나타내며, 고통은 믿음의 일부분이 된다. 여기에 예외는 없다.주인을 닮는 종예수님께서는 무리를 제자들과 함께 부르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막 8:34–35).십자가를 지라는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기로 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말이다. 결신한 성도들은 새로운 삶, 새로운 우선순위, 새로운 품성, 그리고 이 새로운 명령을 따라 살아간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의 주인 되신 예수님으로부터 배우며 그의 본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예배하며 영광 돌리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 우리도 그분처럼 살아야 한다. “사람이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나 있는 곳에 나를 섬기는 자도 거기 있으리니 사람이 나를 섬기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요 12:26).그리스도께서 왕의 왕이심을 고백하며 사는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그의 나라에서 그분을 위한 종으로 살아간다. 우리는 세상과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위대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르는 삶을 사는 성도들은 이를 부담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은 남을 위해 매일 자신을 부인하는 삶을 사셨다. 봉사와 희생의 삶을 살아야 하는 임무를 가진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을 부인하며 왕 되신 주님을 섬겨야 한다.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신을 부인한다. 우리는 자신만을 위해 살던 삶을 버리고, 죄의 쾌락에서 벗어나 그리스도를 따라야 한다. 우리의 일터가 주님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곳으로부터 벗어나야 할 것이다. 우리와 관계를 맺고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런 관계는 끊어야 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을 전심으로 기리기 위해 필요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지위나 남들이 부러워하는 그 어떤 것일지라도 과감히 포기하여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라면 부딪히는 여러 가지 고난도 감당하여야 한다.베드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이방인, 곧 방황하는 나그네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영원한 본향은 현재 살고 있는 이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상급은 이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배하는 우리의 영광스러운 하나님께 속해 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 우리의 죗값을 치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우리의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고 자신은 죽는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거듭난 삶“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우리는 매일 스스로 죽어야 한다. 우리는 더이상 죄를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원하시고, 사랑하시고, 우리를 변화시키시는 우리 하나님을 위해 사는 것이다.우리가 죽기 위해서는 지금까지 살아왔던 이전 삶의 모습에서의 죄악과 허물을 모두 떨쳐 버려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모든 것을 드린다. 우리는 제사를 위해 준비된 양과 같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이 그들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들의 몸 또한 그들 자신의 것이 아니다.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은 우리의 몸을 창조하시고 영적으로 거듭나게 하신 주님의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우리의 보물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그리스도의 제자들은 단순히 복음을 전하며 사는 것이 아니라, 그들 삶에서 복음이 미치는 효과의 실체를 실행하며 살아간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욕망을 회개하면서 매일 죽으며 살아간다. 우리는 결코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 회개할 수 없다. 행복한 제자의 삶은 자신의 죄가 무엇인지를 깨달으며, 거룩하신 하나님을 거역하는 죄를 거부하며 사는 것이다.그리스도인들은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하는 우리의 적인, 죄악과 싸우며 살아간다. 참된 믿음은 우리가 죄와 전투를 벌이는 상황에서도 늘 주님 안에서 평안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해준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수밖에 없었던 이유인 죄 가운데 있었던 우리 이전 삶의 방식을 멀리하는 것은 우리가 십자가를 져야 하는 또 다른 이유다. 우리가 믿음 가운데 거하며 회개를 구하고 있다면, 우리는 이미 죄에 대하여 완전히 죽은 것이다. 죄를 지을 틈을 허용하지 말라. 죄에 대하여 우리는 몇 번이고 죽어야 한다.하늘에 쌓여 있는 우리의 상급“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4–26).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거부하였던 삶을 청산하고 새로운 삶, 새로운 목적,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 살아가려는 새로운 의지를 얻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있던 죄인을 구원하여 하나님을 경배할 새로운 마음을 갖도록 하는 복음의 전파를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일에 참여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기쁨을 위해 산다. 우리의 기쁨은 그분께서 즐거워하시는 거룩하고, 올바르며, 선하고, 다른 사람에게 축복이 되는 일이다. 온유한 자는 실로 세상을 물려받는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추종자로서 왕 같은 제사장이며, 우리의 상급은 하늘에 마련되어 있다. 이제 우리는 죄를 회개하며 큰 기쁨 가운데 그의 계명에 복종하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충실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죄인들이 예수님께 가시관을 씌웠을지 모르지만, 지금 하나님께 속한 회심한 바로 그 죄인들이 영광의 왕좌 위에 서 있다. 그리스도는 그의 백성들에게 관을 씌워 주신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시 103:4).출처: www.ligonier.org원제: What Does It Mean to Bear Our Cross?번역: 장명근
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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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싸움
복음
십자가
영성
신앙과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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