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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믿음의 세 가지 요소
by Guy Richard
2021-01-17
“저는 믿어요, 믿는다고요. 그게 어리석지만, 믿는단 말이에요.” 고전적인 크리스마스 영화인 ‘34번가의 기적’(Miracle on 34th Street, 1947)에서 어린 수잔 워커가 말했던 유명한 대사다. 이는 우리가 살아가는 문화에서 흔히 믿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 잘 보여 준다. 캄캄하여 앞이 보이지 않아도 도약해 보는 일, 아무 근거도 없지만 한번 신뢰해 보는 일이 세상이 말하는 믿음이다.하지만 믿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성경이 가르치는 믿음의 개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다. 성경은 믿음을 설명할 때 비이성적이거나 어리석은 결단으로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신념이라든가 하나님과 친밀하다고 여기는 주관적인 느낌으로 말하지도 않는다. 그러한 느낌이나 신념을 믿음이라고 한다면, 그 믿음은 수많은 군중 가운데 알아보지도 않고 아무나 한 사람을 골라내 그 사람에게 심장절개술을 맡기는 일이나 다름없다. 어떤 기준으로 봐도 그건 믿음이라고 할 수 없다. 단순히 어리석은 행동일 뿐이다.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일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정통 기독교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을 구성하는 세 가지 요소를 구별함으로써 답변해 왔다. 그리고 세 요소를 설명하기 위해 세 가지 라틴어 단어를 일반적으로 사용해 왔다. 곧 지식을 의미하는 ‘노티티아’(notitia)와 동의를 의미하는 ‘아센수스’(assensus), 그리고 신뢰를 의미하는 ‘피두키아’(fiducia)다.노티티아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는 노티티아, 즉 지식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란 어떤 내용, 이를테면 지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어떤 내용을 포함한다는 의미다. 결코 공허한 대상을 맹목적으로 신뢰하는 게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믿음은 근본적인 사실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한다. 우리는 이 요소를 성경의 여러 본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러한 본문은 흔히 ‘~을 믿나이다’라는 문형으로 표현되며, 이어서 특정 종류의 교리적 진술을 제시한다. 이에 대한 좋은 예문으로 로마서 10장 9절을 들 수 있다.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밝힘으로써 믿음의 내용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요한복음 20장 31절도 믿음의 내용을 이렇게 명시한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러한 예문에서 우리는 믿음에 교리적 내용이 수반되고 있음을 본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믿음은 특정 진술을 믿는 일을 우선적으로 의미한다. 앞선 예문에서 그 진술은 “하나님께서 그(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과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으로 각각 주어진다.아센수스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아센수스로 불리는 동의다. 이 요소는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 객관적으로 사실일 뿐 아니라 그로부터 개인적으로 유익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지성적인 확신을 의미한다. 어떤 내용을 단순히 아는 지식만으로는 믿음이 되기에 부족하다. 우리는 그러한 내용이 사실이며 또한 우리의 필요를 실제로 만족시킨다고 믿어야만 한다. 이러한 믿음의 요소는 요한복음 5장 46-47절, 8장 31-38절 및 45-46절, 그리고 10장 37-38절과 14장 11절 등의 본문에 묘사되어 있다.피두키아구원에 이르게 하는 믿음의 세 번째 요소는 피두키아, 바로 신뢰다. 이 요소는 지금까지 언급한 세 가지 요소 가운데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이 요소가 빠지면, 믿음은 그저 지성적인 활동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마치 예수님에 관한 사실은 알고 있어도 그 사실을 진리로 받아들이기는 싫어 결국 그분을 거절하고 마는 귀신들의 ‘믿음’과 같다(약 2:19; 마 8:29). 따라서 이 요소는 복음에 제시된 그대로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신뢰하고 자신의 구원을 위해 그분만을 전적으로 의지하는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든가(요 3:15-16; 롬 9:33; 10:11) 그분을 의지하는 믿음(시 71:5-6; 잠 3:5-6), 그분을 바라보는 믿음(요 6:40; 히 12:1-2), 또는 그분께 우리 자신을 맡기는 믿음(딤후 1:12; 마 11:28; 시 37:5) 등을 설명하는 본문에서 이 요소를 확인할 수 있다.믿음의 세 가지 요소에 대한 예화다음에 소개하는 예화를 한번 생각해 보자. 먹을 음식도 마실 물도 없이 매우 광활한 지뢰밭 한가운데 갇힌 세 사람이 있다. 이중에 한 명은 마구잡이로 한 길을 선택해 별다른 생각 없이 그 방향을 따라 나선다. 물론 이 경우는 믿음이 아니라 서두에서 언급했던 어리석은 행동을 보여 주는 예시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참된 믿음은 지식에 근거하고 있으며 결코 맹목적일 수 없다.이어서 다음 상황이 벌어진다. 곧 헬리콥터 한 대가 지뢰밭에 남겨진 두 사람 위로 날아오더니 거기에 타고 있던 조종사가 어느 길로 그 밭을 통과할 수 있는지 알려 준다. 그러자 두 사람 중 한 명이 그 조종사의 말을 따라 망설이지 않고 지뢰밭 사이를 헤쳐 나간다. 이 경우 또한 믿음의 예시가 될 수 없다. 물론 이번에는 (조종사가 알려 준 정보에 대한) 지식과 (그 정보를 사실로 간주하고 현재 상황에 도움이 되겠다고 여긴) 동의에 근거한 행동을 보여 준다. 그러나 그 행동은 (알지 못하는 조종사가 알려 준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부족한 지식에 근거하고 있기에 여전히 맹목적이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믿음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는,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대상에 대한 인격적인 신뢰가 결여되어 있다.이제는 최종적으로 남겨진 사람이 몇 가지 질문을 던지게 된다. 예를 들어 어떻게 지뢰밭의 탈출 경로를 조종사가 알게 되었는지, 왜 자신을 도와주려고 하는지, 또 얼마나 확실히 그 지뢰밭을 무사히 통과하도록 조종사가 안내할 수 있는지를 확인해 본다. 나아가 자신이 아는 지인 중에 조종사가 알고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알아본다. 심지어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으로 돌멩이를 던져서 폭발물이 정말 없는지도 테스트해 본다. 이런 모든 과정을 거친 후에야 그 사람은 충분한 지식을 확보해서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신뢰할 수 있는지를 결정하게 된다. 이처럼 지식(노티티아)과 그 지식에 대한 동의(아센수스)에 근거하고 있는 신뢰(피두키아)가 비로소 참된 믿음을 완성한다. 이러한 믿음은 전혀 어리석지 않으며, 오히려 전적으로 이치에 부합하다고 할 수 있다.행함으로 증명되는 믿음믿음의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주어졌을 때, 그 모든 요소는 필연적으로 바른 행함을 통해 드러난다. 위에서 소개한 예화를 다시 생각해 보면, 우리는 마지막에 남겨진 사람이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그 믿음이 진실하다거나 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게 된다. 만일 그 사람이 원래 서 있던 자리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하여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거부한다면, 혹은 자기 스스로 생각한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서기로 한다면, 그는 조종사의 말을 실제로 믿지 않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러나 헬리콥터 조종사의 말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그는 조종사가 알려 준 방향을 따라 길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조종사의 인도를 따라갈 것이다. 그리하여 자신이 가진 믿음의 진정성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이와 같이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가 모두 갖춰졌을 때, 참된 믿음이 이뤄진다. 그리고 참된 믿음이 형성되면, 바른 행함이 필연적으로 뒤따른다. 바른 행함은 믿음을 구성하는 부분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나오는 결과다. 즉 믿음만이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수단이지만 그 믿음은 결코 독립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반드시 바른 행함을 통해 그 존재를 드러내게 마련이다.원제: What Faith Is and Is Not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영성
신앙과소명
노티티아
아센수스
피두키아
지식
동의
신뢰
믿음
하나님을 의지하는 습관 기르기
by Arielle Wellons
2020-12-30
대학 졸업 후 나의 첫 직장은 대학 내 기숙사에서의 사역(residential ministry)이었다. 그곳에서 사역은 종종 나와 동료들에게 영적 전쟁과 피로를 겪게 했다. 우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계속되는 스트레스로 힘겨워하는 청소년들을 상담했다. 하지만 성실하게 사역을 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의 정서적 여유와 영적 포용력에 한계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런 격렬한 상황 속에서 리더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라고 권면했다. 하지만 이 말은 “그냥 하나님이 하시도록 맡겨라”라는 유명한 광고 문구처럼 쉽게 들렸다. 나는 더 많이 기도하고 모든 순간에 그분을 더 열심히 의지하려고 생각했다. 또 하나님께 충분히 집중할 수 있다면 그분을 더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러나 하루가 지나고 또 하루의 사역을 시작하면서 이를 잊어버리곤 했다. 내 마음은 두려움과 불확실성으로 헤매곤 했다. 내가 집중하지 못한 것을 알게 될 때면 때론 부끄러운 가책을 느꼈다. ‘충분히 노력하지 않은 게 틀림없어. 하나님께 집중하고 힘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을 왜 계속해서 기억하지 못할까?’하며 내 자신을 닦달했다.하나님을 의지하라고 상기시키는 리더의 말은 진실되고 좋았다. 그러나 그 당시 나는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 결과 내가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믿는 동안 종종 나 자신의 의지력을 의지하는 나를 발견하곤 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하나님을 생각하는 정도로 축소시켰다. 그러고 난 뒤 나는 그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기며 그런 나의 노력을 의지했던 것이다.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의지력의 문제가 아니다. 삶의 방식이다. 매일 그분께 집중하는 것, 마음, 몸, 그리고 영혼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변화이다.하나님을 통해 힘을 얻으려고 할 때, 우리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우리의 요구 사항을 단순히 보내는 식으로 끝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을 통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격려하신다. 우리를 친밀히 아시며 우리의 고통에 공감하신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님은 항상 존재하시는 우리의 상담자, 위로자, 동행자(친구), 그리고 변호자이시다.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사 41:10).이런 이유로 우리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을 실천하고 표현할 수 있다. 여기 4가지 방법이 있다.마음 습관우리는 고통, 상실, 그리고 희생을 경험할 때에도 하나님이 최고의 선을 이루시리라는 것을 믿음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한다. 우리의 불안은 종종 고통을 피하려는데 기인한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기꺼이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라고 부르신다(마 16:24). 어려운 상황들을 보고 원망하기보다는 그분의 계획을 이해하지 못할 지라도 그분을 신뢰하라 하신다.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며, 기도로 우리의 필요를 구함으로 하나님을 의지해 간다. 예를 들어 매일 아침에 드리는 기도 습관은 하루 종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두도록 돕는다.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하신 선물에 집중하여 우리의 필요를 인정하며 하루를 시작할 때, 우리는 그분의 변함없는 공급과 임재를 받아 누릴 수 있는 준비를 한다(시 5:3). 신체 습관우리는 “오묘하고 놀랍게 지어졌다”(시 139:14).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모시는 성전이라고 말씀하셨다(고전 6:19). 이 소명을 신실하게 살아내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이 채워주시는 필요에 만족하며 더 이상 죄된 행위에 우리 몸을 맡기지 않음으로써 신체 건강을 지켜야 한다.창세기 2장 이후, 성경은 안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적절한 휴식(수면과 안식일 둘 다)이 없으면 하나님께 집중할만한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Ask Pastor John’ 팟캐스트에서 존 파이퍼는 ”수면 8시간 대 5시간으로 내 성화의 레벨이 상승하고 떨어지는 것이 분명하다”라고 언급한 바 있다. 우리는 일상생활의 일을 잠시 내려놓고, 휴식을 취함으로써 하나님이 주관하셔서 우리를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 새롭게 하고 계심을 믿어보자. 마찬가지로 영양 섭취와 적절한 운동은 우리가 하나님께 집중하도록 돕는 중요한 요소이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 설계하신 한계를 받아들이며 그 육체적 필요를 존중하기로 선택하자. 정신 습관우리 모두는 좌절된 생각과 감정, 특히 시련 속에서 힘든 시간을 보낸다. 우리가 특정한 생각이나 감정을 임의로 멈출 수는 없지만, 우리의 마음보다 하나님 말씀의 진리가 더 우선됨을 명심하자. 그 순간을 우리가 어떻게 느끼든지 그분의 약속을 믿기로 마음먹고 진리를 마음에 둠으로 “모든 생각을 사로잡자”(고후 10:5).우리 생각을 효과적으로 사로잡기 위해서는 진리를 향한 견고한 지식이 필요하다. 성경을 공부하고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통해 우리의 생각과 감정의 답을 찾아간다. 성경 공부와 설교와 같은 연속적인 헌신의 시간은 진리를 충만히 저장해 갈 것이다.공동체 습관특히 배신이나 포기를 동반한 어려운 상황에 닥치면 다른 사람들부터 멀어지려는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교회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통해 그분의 사랑과 선하심을 나타내신다(요일 4:12).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 헌신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완벽함을 즐거워하면서 불완전하게 서로 함께 살아간다. 완벽한 가면을 지켜내기보다 우리는 깨지기 쉬우며 은혜가 필요한 존재임을 인정해간다. 그곳에서 우리는 책임감, 성숙함, 그리고 성도의 교제를 발견하게 된다(히 10:24-25). 교회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에 서로 기댐으로 하나님을 의지한다. 우리는 관계, 책임감, 그리고 제자도를 위해 디자인되었다. 그래서 목사나 상담가 또는 멘토에게 도움을 구하는 것을 부끄러워할 이유가 없다. 관계의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서로 상호 의존하는 것을 기뻐하신다.이 모든 것이 “좋은 기독교인”이 되려면 필수적이어야 할 항목처럼 벅차고 힘들어 보일지 모르겠다. 가당치 않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지 못할 때조차 그분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후 12:9).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정도가 점차 깊어져 가는 과정 가운데 찾아오는 실패 또한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하는 또 다른 기회를 가져다준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마음, 육체, 정신 또는 공동체에서 고군분투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은 날마다 그분의 과분한 은혜와 다함없는 사랑을 받아들이면서 더 깊어질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Relying on God Isn’t a Mind Game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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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변화가 나를 압도할 때
by Kristen Wetherell
2020-12-21
삶을 단숨에 바꾸려고 너무 큰 변화를 한꺼번에 하지 말라고들 말한다. 조만간 아이를 가질 예정인가? 그럼 당장 새로운 직업을 갖지 마라. 이제 막 결혼했는가? 그럼 새로운 곳에 정착하기 전에 잠시 시간을 가져라. 변화는 좋은 것이 될 수도 있지만 또한 동시에 스트레스를 주기도 한다. 그러니까 한꺼번에 너무 많은 변화를 만들지는 말란다. 이거, 옳은 말 아닌가? 하지만 때때로 세상의 지혜는 인간의 길이 아닌 하나님의 길에 굴복해야 한다. 올해 3월 이후 우리 가족은 지속해서 변화에 따른 변화를 탐색하고 있는 중인데, 다른 모든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적인 유행병을 견디면서, 새 아기를 맞이하고, 또 남편의 새로운 목회 사역을 위해 교회를 옮겼다. 그 정도의 변화가 충분하지 않은 것 같다면, 우리는 집을 팔기 위해서 내어 놓았고, 그러는 와중에서도 나는 신생아까지 돌봐야 했다(그건 같이 하는 게 아주 좋지 않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팔았고 또 물건을 챙겨 이사까지 했다. 그리고 나는 울었다.몇 달간 단단하게 버티던 생존이라는 댐이 어느 순간 갑자기 무너졌고, 무너진 댐을 통해서 나의 내면으로 홍수가 범람했다.힘에 겨운 짐에 억눌려서압도당할 때(많은 변화 또는 거의 지진 효과가 있는 한 가지 큰 변화에 의해) 고린도후서 1장 8절에 나오는 바울의 말,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라는 말에 우리는 공감하게 된다. 이 얼마나 큰 짐과 무거운 마음에 대한 적절한 묘사인가? 상황과 책임이 마구 복합되어 압도할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게 된다. 고난과 시험, 완전히 새로운 상황 및 변화가 주는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내할 수 있을까? 단지 참고 견디는 수준, 더 나쁜 경우에는 상황에 휩쓸리거나 압력에 짓눌림을 당하는 게 아니라 어떻게 해야 오히려 기쁨과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어떻게 해야 변화를 단지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기쁨과 희망으로 이겨낼 수 있을까?바울의 편지는 압도된 정신과 마음을 붙잡아주는 몇 가지 진리를 알려준다. 매일 공급되는 하나님의 도우심“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고후 1:3–4).하나님은 우리 삶의 모든 부분에서 관여하시며 가장 기본적인 방식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자비로운 아버지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에게 너무 사소한 도움이란 없다. 우리는 결코 무관심하고 멀리 떨어진 신을 숭배하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은 “자비의 아버지,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라고 표현했다.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 선물을 가득 안고 있는 하나님은 지극히 인간적이며 개인적으로 만나는 신이시다. 압도당할 때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을 압도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의 지혜와 또 우리의 필요에 따라 가장 좋은 선물을 가장 완벽한 때에 공급하신다. 이 사실을 기억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싶은 열망을 느낀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그에게 간청하고(그는 하나님이시다), 또 그가 약속한 것을 주실 것을 믿게 된다(그는 선하시다). 우리는 그럼 이런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로마서 8장에서, 자신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이 아들과는 차마 비교도 안 되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냐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공급은 종종 인간을 통해서 주어진다. 도움의 손길, 격려의 말, 또는 혼란 속에서 누리는 고요한 순간 등이 바로 그런 것이고,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다음 내용이기도 하다. 하나님이 주시는 관계를 통한 도움“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1:8, 11).스트레스와 불안은 우리가 내면만을 향하면서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그 결과 오로지 자신만을 의존하도록 유혹할 수 있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처리하지 못한 것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게 되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투자할 시간이나 에너지가 없다고 생각하거나 또는 그들에게 부담 주고 싶지 않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바울은 교회가 그에게 자비의 수단, 공급의 통로(portal), 그리고 위로의 연장이라고 주장한다. 사람들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싶은 때가 바로 그들과 더 가까이 있어야 할 바로 그 때이다!우리가 힘에 부치는 압도감에 고통할 때 교회가 주는 두 가지 도움이 있다. 위로와 기도이다. 지금 혼자라고 생각하는가? 당신보다 그 길을 먼저 걸어간 성도들로부터 후원과 공감 그리고 지혜를 얻도록 하라. 바로 위로를 받으라는 것이다.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기도하기도 벅차다고 느끼는가? 교회를 향해 “기도로 도와달라고” 외치라.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주고 교인들이 기도로 당신을 돕도록 하라. 하나님이 그의 임재와 도움을 통해서 당신에게 축복을 내리실 것이다(약 5:15 참조).하나님이 주시는 초월적인 도움“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난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 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 1:8–10).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을 통한 매일의 자비와 보살핌과 같은 수단을 통해 종종 우리를 붙드신다. 그러나 여기에서 바울은 초자연적인 도움을 통해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또 다른 방법에 대해 쓰고 있다. 때때로 우리가 힘에 부치는 짐에 힘들어할 때,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다고 느낄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바로 내 곁에 계시고 또 나를 안고 계신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종종 이런 느낌은 시간이 지나 나중에 깨닫곤 한다. 우리 가족은 바울의 말이 참되다는 사실, 우리의 절망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사용하시는 도구이며 또한 우리의 소망이 가진 위대함을 드러내는 것임을 증언할 수 있다. 2020년에 느끼는 변화의 물결이 너무도 거대해 보이는 지금이야 말로 우리는 일하시는 하나님을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부활이라는 소망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사실에 가장 감사하게 된다. 지금 우리 가족은 소위 말하는 “격변의 계절” 그 반대편에 와 있다. 파도가 가라앉았고 우리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극복했는지 생각하는 중이다. 그리고 우리의 결론은 언제나 하나님이 우리를 인도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시종일관 하나님이 주시는 공급을 받으면서 이겨낼 수 있었다.원제: When Change Overwhelms You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변화
유행병
생존
로마서8장
수치심
고립
자비의아버지
위로의하나님
신앙과 일, 뗄 수 없는 하나
by 김돈영
2020-11-11
직장 사역을 하다 보니 신앙과 일에 관한 이야기를 나눌 때가 종종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이나 현재 직장에 다니는 이들, 사업을 하는 이들까지 다양한 사람들과 다양한 이야기를 나누곤 한다. “직장을 다니는 이유, 일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이러한 질문에 가장 많이 답하는 것은 경제적인 부분을 충당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 직업을 가지고 일한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돈을 벌어야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일하는 것과 먹는 것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은 분명하다. 어떤 장로님은 이런 말을 한다.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일합니다.” 사업을 위해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며 했던 말이다. 지금 벌여 놓은 사업이 잘되어야 하는 이유는 선교를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회사가 커지고, 많은 수익을 내면 선교 헌금을 더 많이 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교 헌금을 통하여 믿지 않는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오지에 교회를 세우는 것을 꿈꾼다. 굶주린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방법으로 선교 헌금이 사용되기도 할 것이다. 그래서 다른 회사보다 자신이 경영하는 회사의 매출이 더 많이 늘어나야 한다고, 그렇게 기도해야 한다고 말이다. 거기에 덧붙여서 한마디 더 말한다. 이런 일을 하고 있기에 자신의 회사 물건을 사는 것만으로도 선교에 동참하는 것이다. 그러니 많이 사용하고 널리 홍보해 달라고 말이다. 참으로 멋진 비전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복음을 전하기 위해 큰 꿈을 가지고 사업을 하는 대단히 열정적인 분으로 보였다.‘나’는 둘인가? 하나인가?일은 생활을 위한 수단이고 도구일 뿐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은 다른 곳에 있다. 일과 자신의 목적, 즉 신앙과 성도의 삶을 일과 철저하게 구별하는 것이다. 회사에서 성도로서 드러내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오직 한 사람의 직장인으로 생활하는 것이다. 한 사람이 일하지만,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두 인격이 존재하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는 교회에서 아침부터 저녁까지 많은 활동을 한다. 아이들을 가르치기도 하고, 예배당 청소나 화장실을 청소하기도 한다. 대형 현수막을 걸기 위해 지붕에 오르기도 하고, 깨진 바닥을 보수하기 위해 시멘트 바르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다. 교회 재정을 생각하여 내 돈을 쓰는 경우도 허다하다. 몸으로 일하고, 돈도 쓰지만 불평하지 않는다. 성도로서 마땅한 일이라 생각하기에 오히려 기쁨이 가득하다.그렇다면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어떠한가? 회사에 출근하면 인사를 나누고 익숙한 자리에 앉는다. 주어진 업무를 확인하고 급한 일을 처리한다. 하지만 같은 월급을 받으면서 남보다 더 많이 더 힘들게 일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일이 넘어오면 적당한 핑계를 대고 다른 이에게 넘기는 것이 경험에서 오는 노하우라 생각한다.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는 것이 지혜로운 행동이다. 문제가 발생하면 책임을 회피하는 데 익숙하고, 높은 인사고과를 위해서는 나에게 유리한 말과 행동을 서슴없이 한다. 승진을 위해 ‘슬쩍’ 청탁을 하거나, 적은 금액이지만 눈먼 돈을 – 야근비, 부서의 공금, 회사 카드의 포인트, 남는 행사 진행비, 물건 반품으로 환불받은 비용 등 - 내 주머니에 넣기 위해 머리를 쓰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담당자가 창고에 쌓인 재고 물품을 한두 개쯤 가지고 가지 못하는 것은 바보 같다고 여긴다. 그리고 이러한 모든 것을 하면서도 튀지 않고, 윗사람에게 들키지 않는 것이 진정으로 회사 생활을 잘하는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라고 여긴다. 설마 그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가? 안타깝지만 회사에서 실제로 많이 보는 모습이다. 이런 모습을 지혜롭고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라고 말했던 선배가 생각난다. 특별하게 알려주는 것이니 잘 배우라는 충고도 아끼지 않았다. 문제는 그 선배가 주일에는 열심히 예배하고 봉사하며 나름대로 철저한 신앙생활을 한다고 자처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왜 이렇게 다른 모습으로 생활하는가? 이유는 한 가지다. 하나님을 오해하기 때문이다. 모든 만물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말하지만, 사실은 교회당에만 계신 하나님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내가 있는 회사는 하나님의 통치가 미치지 않는 영역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그곳에서는 남들과 같은 모습으로, 남들과 같은 목적을 가기고, 남들과 같은 곳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하는 직장 생활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으로 행하지만,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는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는 목적이 없는 것이다. 단지 나를 위하여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에베소서 6장의 말씀처럼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인 것이다. ‘기쁜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지 않는 것이며, ‘너희의 상전이 하늘에 계시’다는 것을 믿지 않는 사람인 것이다.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두 개의 인격이 하나가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도로서의 나’와 ‘회사 구성원으로서의 나’라는 두 인격이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만물을 통치하는 하나님을 온전하게 믿어야만 하는 것이다. 예배당에만 계신 하나님이 아닌 내가 있는 직장도 하나님의 통치권에 있다는 사실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막연하게 믿는 것이 아니다. 교회에서 온종일 일을 해도 힘들지 않고 오히려 기쁘게 느껴졌던 것처럼 회사에서도 이러한 기쁨을 느낄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 내가 있는 직장 역시도 하나님의 다스림과 통치 안에 있다는 것을 온전히 믿는 것이다.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골 3:24)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 두 가지 일을 하는가?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매출이 많아져야 하고, 선교 헌금을 많이 한다고 말한 장로님의 회사에는 여러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있다. 매출이 떨어지자 회사의 숙소에서 생활하는 그들에게 지급하던 것을 줄였다고 한다. 일을 위해 지급하던 의복과 소모품의 공급량을 줄였고, 생필품과 식비를 줄였다. 물론 회사의 존폐가 걸린 상황이라면 고통을 분담하는 차원에서 비용을 줄이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문제는 다른 곳은 그대로 두고 그들에게 가는 것만 줄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 문제는 그렇게 줄인 비용을 해외 선교 헌금으로 보낸다는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나라를 위한 선교 헌금이라고 한다.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그분에게서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상황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다는 것일 것이다. 그렇기에 자랑삼아 이야기하는 것이다. 자신이 얼마나 선교에 열정적이고 헌신적이며, 지혜로운 방법으로 회사를 운영하며 헌금하고 있는지 당신들은 알아야 한다는 듯이 말한다는 것이다.무엇이 문제인가? 신앙과 일을 분리하고 있다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을 위한 ‘하나님의 일’과 직업을 가지고 하는 일인 ‘세상의 일’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예배하고, 전도하는 일, 선교하고, 성경 가르치는 일 등 일일이 열거하지 않아도 아는 일이다. 그렇다면 ‘세상의 일’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일’을 뺀 나머지 일은 ‘세상의 일’인가? 그렇다면 ‘세상의 일’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나님이 아닌 나를 위한 것인가?일하는 성도로서 세상을 사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분명하게 해야만 한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창 1:28)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인 인간에게 다른 피조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다. 다만 그것을 허락하신 이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만 하는 것이다. 마음대로 사용하고 다스리되 창조주 하나님을 향한 방향성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 것이다.우리가 사는 세상도 마찬가지다. 예배와 전도,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애쓰는 일만 하나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회사에 출근하고, 일하고, 먹고, 쉬는 것까지 하나님의 통치를 인식하고, 하나님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면 모두가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물론 인간은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이 마땅하다. 모든 일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일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그 방향을 돌려놓았다. 하나님이 아닌 자신에게로 향하게 한 것이다. 자신을 위해서 일하고, 자신의 만족을 위해 일하는 것이다.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자신의 방식대로 일하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그 목적이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닐 것이다. 외형적인 모습이 전도와 선교라고 해도, 그 이유와 목적이 자신의 무엇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 아닌 ‘죄’인 것이다. 이것은 목회 사역에도 마찬가지다. 보이는 모습으로 알 수는 없지만, 그 내면의 모습은 하나님과 자신만 알 것이다. 무엇을 위해 하는지 말이다.우리는 결국 무슨 일을 하더라도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해야 한다. 앞에서 말한 장로님의 경우를 이야기해 본다. 회사가 번창하여 많은 수익을 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리고 그 수익으로 자신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교지에 보내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일인지 모르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그 마음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근본적인 것이 빠져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하나님을 온전하게 사랑한다고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는 없다.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말씀을 따르는 것이고,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일’은 이웃을 사랑하는 일이기도 하다. 선교지에 헌금을 많이 보내는 것과 자신의 공장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여 좀 더 편안한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모두가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회사의 수익을 극대화하여 오지에 예배당을 짓는 것과 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잘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는 것 역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먼 곳에 있는 이들을 위해 선교 헌금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옆에 있는 이들에게 먼저 선교 헌금을 사용하는 것이 더 옳은 일일 것이다.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이 하나가 될 때 우리는 온전하게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다. 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신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며, 맡겨주신 청지기로서 바르게 사는 것이다.신앙과 일, 뗄 수 없는 하나그리스도인에게 일과 신앙은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일과 세상의 일도 구별할 수 없다.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이며,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것이며, 그 통치가 미치지 않는 곳은 없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단지 하나님께서 스스로 돌아서기를 보고 계시는 것이다. 기다려 주시는 것뿐이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조금 더 빨리 깨달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우리의 일터에서 올바른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조금 더 누리며 살 수 있기 때문이다.우리의 시야는 참으로 좁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고 품는다고 하지만 언제나 나를 중심으로 한다. 이러한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뜻을 살피고, 따르기 위해 애쓰는 방법밖에는 없다.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여 지혜를 구하는 수밖에는 없는 것이다.“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골 4:23)
신앙
소명
직장
하나님나라
성도
선교헌금
신잉과일
청지기
이십대를 위한 인생 교훈 여섯 가지
by Marshall Segal
2020-10-10
이십대는 좋던 나쁘던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는지를 결정하는 시기이다.지금 당신이 이십대라면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지금 한번 되돌아보라. 중요한 고비 때마다 당신이 취한 선택으로 인해 기뻤던 때와 슬펐던 때를 기억하는가? 성공과 실패를 경험하면서 감사와 후회의 감정을 느꼈던 순간들도 생각해보라. 친구들과의 우정은 또 어떤가? 시간과 돈을 주로 투자한 대상은 무엇이었는가? 사귀던 이성과 일했던 직장은?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당신이 지금까지 예수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왔는가이다. 물론 나머지 인생이 이십대 때문에 결정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그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는 어떤 인생을 사는가에 너무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하나님의 인내, 자비 그리고 능력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우리 중 누구나 다 예외없이 인생의 어떤 순간에서라도(서른다섯, 쉰다섯, 심지어 일흔다섯에라도) 급작스럽게 회개하고 완전히 새로운 인생을 살 수도 있다. 그때까지 어떤 결정을 하면서 살아왔든지 관계없이 성령님은 여전히 각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너희가 그의 음성을 듣거든….너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지 말라”(히 3:7-8). 마침내 죄를 내려놓고, 영적 교만과 나태까지 옆으로 밀어놓고, 미래 삶의 방향을 바꾸는 데에 가장 최선의 날은 언제는 오늘이라는 사실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가 젊을 때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신다면,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수십 년을 살아가는데 가장 필요한 그리스도를 위한 기초를 젊을 때 더 든든하게 쌓을 수 있게 된다면, 그것이야말로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인가? 기초가 무너질 때이십 대는 기초를 쌓는 시간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단지 몇 년 정도만 정신차리고 진지하게 노력하면 충분하다고 간주하거나, 또는 젊은 시절의 몇 년 정도는 임대한 시간처럼 편하게 살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적 생활은 변화가 필요할 때마다 바꿀 수 있는 아파트가 아니다. 젊은 시절을 포함해 매순간 우리는 미래의 나 자신으로 만들어지고 있다(롬 6:19; 잠 4:18-19). 나이를 먹을수록 바뀌는 게 힘들기에, 젊은 시절은 나 자신을 만들어가는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오늘 나의 행동 하나가 내 인생이 디디고 살아가야할 초석을 더 단단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그 초석을 갉아먹어 흔들리게 만든다. 집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다. 집을 고칠 때 가장 힘든 부분이 초석을 다시 손보는 일이라는 것을. 예수님은 좋은 초석을 만드는 게 얼마나 힘든지에 대해서 경고를 하셨다. 굳건한 초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와도 같이 약한 지반 위에 지은 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셨다. 두 집 다 하나하나 쌓아올린 벽돌로 만들었다. 그 벽돌은 다름 아니라 우리가 하루하루 만드는 결정과 선택이다. 두 집 다 자신감을 갖고 만들었고, 앞으로 오랫동안 튼튼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비가 내렸다.모래 위에 지은 집은 무슨 일이 생겼는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마 7:26-27). 이십 대는 인생을 튼튼하게 만드는 길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인생을 망칠 수 있는 수많은 길로 넘치는 시간이다. 넓은 길이 앞에 뚫려있기에 누구나 쉽게 길을 잃는 시간이다. 그러나 경고 뿐 아니라 예수님은 신실한 자를 향해 약속의 말씀도 주셨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 7:24-25). 기초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바람이 불고 비가 들이닥쳐서 집을 흔들릴 때가 되어야 제대로 알 수 있다. 이십 대에 기초를 잘 쌓은 사람은 나중에 고난의 바람, 실망의 빗줄기, 그리고 현실의 천둥이 쳐도 하나님 안에 뿌리내린 희망으로 인해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이십 대에 필요한 여섯 가지 교훈그럼 어떻게 해야 이십 대에 좋은 기초를 쌓을까? 여러 해에 걸친 카운셀링과 내 자신의 부끄러운 경험 그리고 멘토들의 조언 등을 통해서 나는 몇 가지 소중하고 열매맺도록 하는 교훈을 발견하게 되었다.1. 헌신으로 너의 기초를 확실하게 하라다른 어떤 것과도 나눌 수 없는 절대적인 헌신을 그리스도께 바쳐라. 이십 대에 결혼하고 자녀를 낳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이 결국에는 나눠진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 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까 하여 마음이 갈라지며 시집 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 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까 하느니라”(고전 7:32–34).하나님은 지금 당신을 위한 배우자와 자녀를 준비하고 계시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신의 마음과 시간 그리고 헌신은 필연적으로 나눠지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바울은 믿는 자들에게 혼자 있을 때의 기회를 놓치지 말라고 강권하는 것이다. “흐트러짐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35). 독신의 삶은 독특한 슬픔과 더불어 많은 도전거리를 던진다. 그렇기에 독신은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에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독신이 주는 어려움이 독신만이 주는 기회마저 박탈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것은 집중하는 힘, 사역에 열중하는 힘, 오로지 예수님만을 즐거워하는 것, 그럼으로 기초를 더 단단히 쌓는 것이다. 결혼하지 않았을 때에도 그리스도에게 전적으로 헌신하지 못한 사람이라면, 나중에 인생이 훨씬 더 복잡해지고 감당할 책임이 더 많아졌을 때 어떻게 그리스도에게 제대로 헌신하겠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지금은 우리의 마음판과 우선순위 그리고 계획 속에 우리가 창조되고 구원받은 목적이라는 올바른 닻을 단단히 내려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하나님을 오늘, 내일 그리고 영원히 누림(enjoying)으로 그에게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이십 대에 가장 중요한 이 소명을 놓치고 살고, 그 결과 그런 기회를 다시는 제대로 회복하지 못하고 만다.2. 성경 읽는 법을 배우라학교 다니면서 읽는 법이야 다 배웠다고 생각하겠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것은 세상 글을 읽는 것과 전혀 다른 차원이다. 그리고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이 정말 제대로 성경을 읽는 법을 아예 모르고 사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교회에서 성경을 빨리 읽거나 몇몇 중요한 구절을 암송하도록 하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은 그냥 글을 읽는 것과는 전적으로 다른 일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에 성경을 읽으려고 시도한 많은 젊은이들이 성경 읽기를 힘들고 혼란스럽고 종종 아무런 유익이 없는 일이라고 결론내리는 것은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많은 이십 대가 성경 읽기를 포기하고 결국 다른 이들이 내게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에만 의존하는 신앙생활을 하게 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6-17). 그렇기에 선한 일을 하고 싶다면 이십 대, 삼십 대 그리고 더 나이를 먹어서도 성경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혼란스럽고 맥이 빠지고 또 무엇을 해야할지 알 수 없을 때, 바울의 약속을 기억하라. “내가 말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딤후 2:7). 성경에 당신 자신을 온통 투자한다면, 매일매일 그리고 수년에 걸쳐서 기도하면서 도움을 청하고 성경을 읽는다면 하나님은 계속해서 새로운 깨달음으로 당신을 인도하실 것이다. 성경을 읽는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이미 말씀을 사랑하고 잘 아는 누군가와 함께 소리내서 함께 읽는 것이다.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말씀을 바라보는 것은 내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하루에 한 장씩 성경을 읽는 것으로 시작하는 게 좋다. 예를 들어 요한복음에서 시작해서 에베소서까지 한번 읽고 그 다음은 신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는 것이다. 그리고 나서는 비로소 구약과 신약을 모두 다 포함하는 성경읽기를 하는 게 좋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읽는 중에도 한 달에 며칠은 집중 읽기 시간을 가짐으로 뒤쳐진 부분을 따라잡거나 또는 암송을 하는 것도 병행하면 좋다.)3. 무릎 꿇는 게 자연스러워져야 한다신앙생활에 필요한 다른 모든 것처럼 기도는 결코 쉽지 않다. 기도하는 게 어렵다는 사람이 성경 읽는 게 어렵다는 사람보다 두 배는 더 많다. 기도가 개인 기도이든 그룹 기도이든 관계없이 그렇다. 만약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고 그리스도가 부활하지 않았다면 기독교인이 하는 다른 모든 것들과 더불어 기도도 정말로 이상하고 한심한 일이다(고전 15:19). 그러나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우리의 모든 기도를 들으신다면, 기도야말로 우리가 매일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하고 생산적인 활동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지속적으로 또 자신감을 가지고 기도하기를 원하시지 결코 띄엄 띄엄 기도하거나 주저하면서 기도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기도는 완벽하고, 자격이 있으며 또한 말 잘하는 사람이 쓰는 왕관이 아니다. 보좌에 앉아계신 아버지는 아버지를 향한 믿음으로 충만해서 기도하는 자들을 오래 참으심과 자비함 그리고 은혜로 돌보신다. 그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없이 우리에게는 그 어떤 것도 진짜가 될 수 없고 영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요 15:5). 다른 말로 하면 기도가 없이는 우리에게 그 어떤 것도 진짜가 될 수 없고 영속적인 가치를 가질 수 없다는 의미이다. 예수님께 어떻게 기도하는지 물어보라(눅 11:1-4).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간단한 기도를 연습하고 깊이 기도하기 위한 시간을 따로 확보하도록 하라. 기도하는 시간이 잦아질수록 우리는 점점 더 무릎 꿇는 것이 편안해질 것이다. 4. 죄와의 싸움을 준비하라우리의 이십 대를 망치는 수백 가지의 길들은 다 가장 큰 적이라는 하나의 길로 통한다. 바로 나 자신의 죄이다. 물론 우리를 유혹하고 협박하고 공격하는 것은 사탄이다. 또 다른 이들의 죄가 내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도 있을 뿐 아니라, 고난 때문에 우리가 좌초하기도 한다. 그러나 결국 우리를 파멸시키는 것은 나의 죄이다. 바울은 이렇게 썼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많은 기독교인에게 이십 대는 죄와 싸우는 본격적인 길에 들어서는 시기이다. 또 많은 이들은 죄와의 전투를 회피하고 시간이 흘러 그 댓가를 치르기도 한다. 지혜로운 사람은 죄를 분별하고 바로 죄를 회개하거나 또는 죄와 맞선다. 그 결과 그리스도가 주시는 용서와 의롭게 하시는 능력 안에서 안식을 누린다. 그리고 그 은혜의 힘 안에서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쏟는다.죄와의 전투와 관련해 기억해야 할 첫 번째 사실은 그 누구도 이 싸움을 혼자 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여전히 우리 속에 거하는 이 완악하고 위험한 죄를 다룰 때, 우리는 함께 싸우면서 도와줄 다른 이들이 필요하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 죄는 가장 그럴듯한 거짓말을 가지고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공격 목표로 삼는다. 그렇기에 우리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라도 내가 가진 약함을 가지지 않은 다른 기독교인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5. 지역교회에 헌신하라만약에 이십 대를 위한 딱 하나의 교훈만을 선택해야 한다면 그게 무엇일까? 아마도 놀라겠지만 이것이다. 건강한 지역교회에 등록하고 그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신앙생활을 유지하라. 그리스도를 높이고, 성경을 믿으며, 복음을 설교하고, 죄를 증오하며, 바른 권징을 실천하며, 제자를 만드는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교회를 당신의 몸처럼 아껴야 한다(마 12:50). 교회는 지금 너무나 많은 기독교인에게는 별로 중요한 고려 대상이 아니며, 그건 아직까지 어딘가에 매이지 않았고 헌신되지 않은 이십 대에게는 더욱 그렇다. 모든 게 더 확실해질 때까지 교회에 헌신하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대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동시에 당신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순종하고, 누리도록 영감을 주는 사람들 안에서 당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하늘과 땅의 주님은 이 세상이 만들어지기도 전에 교회를 선택할 정도로 교회를 사랑하셨다. 교회를 위해 고난을 받고 죽음을 맛보았으며 당신의 성령을 통해서 교회를 세우고 이끌고 계신다. 또한 주님은 교회와 영원히 함께 하신다. 그런데 우리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고 미성숙하면 이런 교회를 경멸하고 무시하며 또 소홀히 한단 말인가? 교회가 필요로 하는 게 많다는 사실 때문에 불편함을 느낄 수도 있고 또 교회의 약점 때문에 마음을 상하기도 하다. 또 어떤 이들은 교회의 단점과 실수 때문에 쉽게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교회를 향해 악한 감정을 품는다. 그들은 교회가 그들에게 기쁨과 충만함과 위로를 주기를 기대하면서도 동시에 교회를 위해 희생하려는 마음은 없다. 이십 대는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 교회라는 신부가 너무 소중하기에 목숨까지 버리신 그 예수님의 사랑을 배우는 좋은 기회이다. 교회가 당신 인생에서 단지 주일 오전 한두 시간만을 차지하도록 해서는 안 된다. 교회에 당신의 삶을 다 쏟아 넣어야 한다. 그리고 교회가 없어도 얼마든지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다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고전 12:21). 또한 교회의 지체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도 말라. 당신의 지금 인생과 남은 모든 인생을 교회에 헌신하라. 6. 고난을 준비하라한때 신앙고백을 하던 이삼십 대 중에 믿음에서 떠나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을까? 진정한 복음을 이해한 적이 없기 때문에 또는 세상과 죄가 주는 즐거움이 결국은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믿음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는 예수님이 그토록 경고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고난받을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기독교는 삶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이지 고통을 주는 게 아니다. 그렇기에 고난이 찾아왔을 때 그들은 신앙을 버린다.준비되지 않는 위험에 대해서 예수님은 이미 경고했다.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에 배반하는 자요”(눅 8:13). 뿌리가 없기에, 즉 “믿음”이 약하기에 그들은 떨어져 나간다. 그들은 이런 말씀을 들은 적이 없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 고난 속에서도 기뻐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약 1:3-4). 그 대신 고난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질문을 던지게 하다가 곧 하나님에 대해서 원한을 갖게 만들며 결국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된다. 고난을 잘 받기 위해서 우리는 믿음의 뿌리를 더 깊이 내리고 영적인 눈을 바로 떠야 한다. 하나님이 고난 중에서도 얼마나 좋으신 분인지를 배워야 한다. 나 자신을 의지하지 말고, 나의 교만을 벗어던지고, 인내하면서 소망과 기쁨의 모습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궁극적으로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 4:17)라는 말씀을 붙잡아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고난이 올 것을 알 뿐만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을 더 잘 섬기게 되고 또 더 강해지고 성숙해진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많은 이에게 이십 대는 처음으로 고난의 맛을 보는 시기이다. 그렇기에 이십 대는 불속에서도 하나님 앞으로 더 가까이 나아갈 지 아니면 천천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될 지, 우리의 운명을 결정하는 첫 번째 기로가 된다.신실함(Faithfulness)을 기초로 삼으라지금까지 소개한 교훈을 하나로 꿰는 메시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이십 대에 신실함을 배우라. 그리스도를 향한 신실함, 그분의 말씀을 향한 신실함, 그리고 그분이 당신을 어디에 두더라고 동일한 신실함을 잃지 않도록 하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눅 16:10). 미래의 신실함과 많은 열매를 맺는 비밀은 바로 작은 일에도 충성하는 데에 있다. 오늘 우리가 그 신실함을 지키도록 부름받았다는 사실조차 잊을 정도로 너무 사소한 일, 바로 그런 일에도 신실한가 아닌가 여부에 달려있다. 마찬가지로 미래의 신실함과 열매 맺음을 망치는 가장 확실한 길은 바로 오늘 부주의하고 안일하게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당신의 삶에서 이루시고자 하는 소명이 무엇인지 알려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그 소명을 통해서 어떻게 하나님을 이 세상에 더 드러낼 수 있을지 알려달라고 기도하라. 또한 무엇보다 당신을 신실한 종으로 만들어달라고 기도하라. 그렇게 앞으로 몇 년 아니 몇 십 년을 살았을 때 당신은 다음과 같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 25:21).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Where Will Your Twenties Take You? Six Lessons for Beginning Well번역: 무제
영성
신실함
신앙훈련
신앙과소명
이십대
신실한자
지역교회
소명
은혜 없이 맞닥뜨린 미지근함과 탈진 사이
by Marshall Segal
2020-09-28
평범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놀라운 기적의 연속, 실제로 매일매일 하나님의 개입이 없이는 말 그대로 불가능한 삶이다. 그 기적은 다름 아니라 진실된 마음과 함께 삶 속에서 영적으로 만들어지는 예수 그리스도, 그분과의 연합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경험하지 않은 채 그리스도를 따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다음 두 가지 길 중 하나로 들어서게 된다. 첫 번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하나님과의 거리감과 미지근함을 느끼게 하는 값싼 은총 그리고 순종을 선결 조건으로 하는 값싼 믿음의 길로 들어서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외부에서 오는 명령에 스스로를 노예화함으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지치고 수치심만을 느끼다가 결국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두 번째 길이다. 랜킨 윌본(Rankin Wilbourne)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오늘날 우리가 반드시 회복해서 복음의 핵심으로 들어야 할 노래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은혜의 노래는 비인격적이며 당신 안에 냉소적인 차가움만을 남길 것입니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는 제자도의 노래는 기쁨 없는 의무가 되고, 당신을 지치게 만드는 끝없는 과제의 연속이 될 뿐입니다”(Union with Christ, 78).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분리된 냉소주의와 영혼을 부수는 율법주의 사이에 흐르는 따뜻한 멜로디이다. 그리스도가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이 무엇인지 바로 배우지 않는 한, 우리는 결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감당조차 하지 못할 것이다. ‘은혜’의 위험인간의 마음, 가족 또는 교회에 관계없이, 은혜가 진정으로 지배하는 곳이면 죄가 달아나고 거기에는 의가 피어난다. 불행히도 우리 중 일부는 은혜를 왕으로 삼으려고 하면서도 은혜가 우리 삶에 진정한 권위를 가지도록 허락하지 않는다. 우리는 용서, 자유, 받아들임, 그리고 깨끗한 양심을 원하지만, 그렇게 할 때 결코 쉽거나 만만하지 않을 어떤 조건 또는 명령이 따라오는 것은 아닐까 두려워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은혜가 단지 용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배하기 위해서 오는 것임을 분명하게 했다(롬 5:21).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냐”(롬 6:1). 은혜가 내 삶을 지배하고 있다면 나는 이미 용서받았다, 그렇지 않은가? 왜 성경 말씀을 놓고 스트레스를 받거나 고민하는가? 왜 죄책감이 우리 맘 한켠을 차지하도록 만드는가? 바울은 자신이 물었던 질문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엄한 경고를 답으로 준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너희 자신을 종으로 내주어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롬 6:15-16). “은혜”가 더 이상 죄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의미라고 생각하는 순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죄에 대해 두 배로 얽매인 노예로 삼는 게 된다. 순종하고 있지만 사실상 우리가 순종하는 대상은 우리 안에 있는 잔인하고 억압적인 주인이다(롬 6:12).죄에 굴복하면서도 은혜라는 말을 운운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을 향해 차갑게 될 수 밖에 없다. 그는 단지 우리에게 무죄 판결을 주는 판사,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는 집사, 우리의 빚을 처리해주는 은행가에 불과하다. 하나님은 반드시 우리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사랑해야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냉소주의가 싹트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정말로 우리를 돌보지 않고 우리를 원하지도 않으면 또한 우리를 기뻐하지도 않는 게 분명하다. 은혜가 신이 될 때, 하나님은 둔감하고 무관심하며 멀리 떨어진 존재가 되고 자연스럽게 우리 속에서 기쁨은 사라지고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 된다.‘순종’의 위험불량한 순종은 값싼 은혜만큼이나 위험하다. 어떤 사람들은 죄책감과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순종하지만 또 어떤 이들은 자신감과 자부심에 대한 근거를 위해서 순종을 필요로 한다. 그리고 잘못된 손에 들린 성경은 우리에게 순종이 자기를 높이는데 필요한 충분한 근거로 제공된다. 단지 성경말씀을 잘 아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얼마든지 교만해질 수 있다(고전 8:1).은혜의 함정에 대해 경고한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 3:10). 지나치게 용서에 의존하면 우리는 죄의 노예가 될 뿐 아니라 과도하게 자아에 의존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의로움에 감명을 받으셔야 한다는 은근한 생각이 우리 속에 들어오고, 따라서 순종 잘 하는 나의 경우에 사실상 십자가의 죽음은 너무 지나친 방법이라는 생각까지 하게 되면서, 우리는 순종을 통해 하늘의 마음을 사로잡아야 한다는 미묘한 생각에까지 빠지게 된다. 그 결과는 다름 아니라 뒷문에 숨어있는 사탄이다. 누가 봐도 명백한 죄로 우리를 유혹할 수 없게 되는 경우, 사탄은 훨씬 더 교묘하고, 더 자아도취에 빠지게 만들며, 더 종교적인 방법으로 위장해서 우리를 유혹할 것이다. 교만이 주는 초기의 스릴이 잠시 만족감을 줄 수는 있다. 자신감과 성취가 주는 따뜻한 느낌, 나를 인정하는 타인의 시선, 조금씩 사라지는 의존감 등등이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들은 결국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에 직면하게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는커녕 먼지만 날리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지치고 기쁨은 사라진다. 우리 스스로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고통스럽게 느낄 뿐 아니라,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정작 하나님을 조금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절망하게 된다. 나 자신을 끌어내리기우리가 은혜를 오용하든, 또는 삶의 여러 다른 시기에서 우리 자신의 교만을 더 키우든 관계없이, 하나님께서는 미지근한 방탕함과 낡은 율법주의 사이에 길을 하나 열어놓으셨다. 그러나 그 길을 걸으려면 내가 중심이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 윌본은 이렇게 썼다.“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나 자신을 삶의 중심에서 끌어내립니다. 그 연합은 하나님이 인간은 그의 아들과 함께 살아가는 삶을 통해서만 존재의 의미가 있도록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그 연합은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사역이 우리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분리될 수 없음을 알려줍니다. …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면 모든 삶이 더 나아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리스도가 여러분이 행하고 말하는 모든 삶에서 살아있는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와의 연합입니다”.은혜를 사용하여 죄를 정당화하는 사람과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순종하는 사람은 하나의 큰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중심에 그리스도가 아니라 자신이 있다는 사실이다. 은혜와 율법, 신앙, 직장, 교회, 그리스도와 그 밖의 모든 사람들이 오로지 나를 중심으로 돌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타오르는 태양, 도무지 저항할 수 없는 무게 중심이 되시면, 자연스럽게 은혜가 우리를 다스리고 참된 의의 열매를 맺게 된다. 팀 켈러(Tim Keller)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주님이다. 당신이 예수님을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예수님은 당신을 완전하게 만드신다. 설혹 당신이 그를 실망시켰다고 해도, 예수님은 영원히 당신을 용서하신다”(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 Reason for God).그렇다면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은혜를 남용하고 자아를 신뢰하는 것을 어떻게 막는가? 첫 번째 편지에서 사도 요한은 양방향에서 동시에 정화의 역할을 하는 연합의 힘을 보여줍니다.당신 안에 계신 그리스도첫째,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은혜를 남용하는 것을 어떻게 막는가? 요한은 은혜를 당연하게 간주하고 계속 죄를 지을 수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썼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6). 죄 안에서 계속 거하는 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정말로 알지 못하고, 그분이 실제로 우리 안에 살지 않는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계속해서 죄를 짓는 모습은 우리가 쓴 가면을 벗겨내고 우리가 사실은 은혜를 모를 뿐 아니라 사실상 은혜의 적이라는 사실을 드러낸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요일 1:7). 이것은 은혜를 남용하는 사람들을 위한 놀라운 치료법이다. 그리스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에 점점 더 순종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며 빛 가운데 걷는 모습은 우리가 예수님과 그분의 은혜를 얼마나 깊이 알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순종이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주는 것은 아니다. 오로지 죄없는 아들의 피만이 우리의 죄값을 갚고 우리를 자유롭게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자유의 증거는 어둠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빛 가운데 걷는 것이다. 순종이야말로 우리가 은혜의 통치를 받고 있음을 드러내는 증거이다. 용서만 하는 은혜는 변화시키는 은혜만큼 크지 않다. 죄를 가지고 하나님의 보좌에 가까이 다가갈 때, 우리가 기대하는 값싼 은혜보다 더 큰 것을 기대하라. 당신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없애는 은혜 뿐 아니라 당신 안에 하나님의 거룩함을 창조하는 놀라운 은혜를 기대하라.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 사실 것을 기대하라(갈 2:20).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당신그러나 “빛 가운데 걷는 것”이 우리 자신의 힘과 지혜와 결의를 보여주는 것이 되지 않도록, 요한은 자기의에 관한 경고를 잊지 않는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요일 1:8). 만약에 기독교가 그리스도를 떠나서 우리의 의를 확인하는 식으로 바뀐다면, 그건 결코 기독교가 아니다. 어떻게든 노력을 기반으로 한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얻는다고 생각한다면,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은혜에 대해서, 심지어 순종에 대해서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가장 비극적인 사실은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우리는 깨끗하기 위해 고백해야 한다. 빛 가운데 걸으려면 남아있는 죄를 인식하고 인정하고 또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살기 때문에 우리가 지은 모든 죄의 무게를 다 짊어지거나 의로움을 향해 가혹한 산을 올라갈 필요가 없다. 믿음을 통해 예수님은 우리가 배울 수 없는 지혜, 우리가 얻을 수 없는 의, 우리가 만들 수 없는 성화, 우리가 이룰 수 없는 구속이 되셨다(고전 1:30). 더 이상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의 은혜를 증명하기만 하면 된다. 요한은 몇 구절이 더 지나서 이 좁은 길을 다시 언급한다. 요한일서 2장 1절이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은혜의 남용을 주의하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자기의를 조심하라).” 이것이야말로 자유와 기쁨, 거룩함과 겸손, 확신과 고백, 그리고 노력과 의존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이 모든 길은 다 은혜로 채워지고 은혜로 연료가 공급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과 연합되었다는 증거가 된다. 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e Path Between Lukewarm and Worn Out번역: 무제
영성
그리스도와의연합
신앙
미지근한신앙
값싼은혜
불량순종
영적탈진
팀켈러
실직했지만
by Laura Baxter
2020-09-14
코로나19 여파로 직장을 잃었습니다. 실직했지만 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런데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뻔해서인지 점점 더 게으름이 주는 권태감에 지쳐가는 느낌입니다. 직장이 없는 상태에서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오히려 격려가 된다. 먼저 ‘어떻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까’라는 질문은 믿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평생에 걸쳐 이뤄야 할 최고의 목표이자 최상의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 10:31).게다가 게으름이 주는 무게감을 점점 더 느낀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다. 전자기기가 넘치는 지금과 같은 세상에서 게으름을 느끼는 대신 그냥 시간의 흐름 속에서 멍하니 지내는 것이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게으름과 친해져서는 안 된다(잠 16:26; 살전 5:14). 우리 삶은 생산적이고 열매 맺는 삶이어야 한다. 당신은 지금 게으름이라는 죄와 맞서서 싸우고 있고, 그것은 성령님이 당신 안에서 일하신다는 증거이다.동시에 당신은 지금 영적 침체기를 맞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할 일이 없기에” 스스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다고 느끼기 시작하고 있다. 나 역시 어떤 일도 하지 못하는 상황을 맞았을 때를 생각해 본다. 임신해서 침대에 누워만 있었을 때, 몇 년을 공들인 사업이 물거품이 되었을 때가 기억난다. 용기 내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특별한 뜻을 가지고 지금 그 자리에 당신이 있도록 하신 것이다. 이런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은 당신을 성장시킨다.지금처럼 별난 시기에 생각해야 할 네 가지 교훈이 여기 있다.1. 실직 상태인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일이 있음을 믿어야 한다.네 번째 계명은 우리에게 일을 하라고 명하고(출 20:9), 하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는 힘을 주신다고 약속하신다. 이 세상에 있는 수많은 열매 맺는 일이 보수를 받는 일이 아님을 기억하라. 가정에서, 교회에서, 그리고 동네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라. 그게 뭔지 모르겠으면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을 보내 물어 보라. 교회가 운영하는 여러 봉사단체도 알아보라. 이웃에, 양로원에, 그리고 커뮤니티 센터에도 알아보라. 이런 기관도 코로나 때문에 달라졌을지 몰라도, 그럼에도 당신을 필요로 하는 영역이 있을 것이다.2. 영성 훈련―기도와 말씀 읽기와 다른 성도들과 대화(이를 위해서는 전자기기가 도움이 된다)―을 쌓으라. 한 시간 또는 그 이상을 따로 떼어 놓고 기도하라. 도움이 되는 말씀을 골라서 암송하거나 묵상의 소재로 삼으라. 참여할 수 있는 성경공부를 찾아서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라. 은혜의 보편적인 방식에 의지하며 당신의 영적 귀를 활짝 열라. 이를 통해 지금 같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 게 좋은지에 대한 하나님의 음성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3. 꿈꾸는 시간을 가지라.코로나바이러스가 닥치기 전, 한참 정신없이 바쁘던 시절에 아마 당신은 개인적인 성장을 위한 몇 가지 꿈을 뒤로 미뤄놨을 것이다. 운동을 한다거나, 취미를 갖는다거나, 집을 고친다거나 하는 계획 말이다. 어쩌면 꼭 읽고 싶은 책이 있었는데도 바빠서 시간을 못 냈을지도 모른다. 지금이야말로 전에 미뤄두었던 그런 목표를 성취할 시간이다. 시작하는 데 동기부여가 필요하다면, 친구들에게 결심을 먼저 이야기하고 시작하도록 하라.4.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안식하라.당신의 가치는 직장이나 생산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진정한 결실은 그리스도 안에 거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경험하고 또 그 은혜가 당신을 통해 흘러넘치게 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예수님은 나무이고 우리는 가지다(요 15:4)). 모든 상황이 느리게 흘러갈 때 스스로 뭔가 더 활발히 움직여서 빈 공간을 채우고 싶은 유혹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이보다 더 나은 대안이 있을까? 주님을 기다리는 것이다(시 130:5-6). 당신의 초조함과 공허함을 모두 다 주님께 맡기라.침대에 누워서 지낼 때 하나님은 나를 엄마라는 바쁜 시간을 위해서 준비시키셨다. 그리고 사업이 암담했던 그 시절, 비록 고통스러웠지만 하나님은 내게 기도를 훈련시키셨다. 많은 시간이 지나고 지금 그때를 되돌아볼 때, 나는 어떻게 하나님이 그토록 정확하게 시간에 맞춰서 나를 준비시키셨는지 놀랄 정도다. 하나님이 이와 동일한 역사를 당신의 삶에서도 이루실 것이다.원제: How Can I Glorify God When I Have No Wor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실직
코로나바이러스
영적침체기
영성훈련
게으름
그리스도인이 오해하고 있는 말 다섯 가지
이런 상투어, 이제 그만!
by Matt Smethurst
2020-08-30
존 파이퍼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책은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그러나 한 문단은 사람을 바꿀 수 있다. 아니, 심지어 몇 문장이 사람을 변화시키기도 한다.”좋은 문장은 선물이다. 간결하고 명확할 뿐 아니라 외울 수 있을 정도의 문장 속에서 깊고 심오한 진리를 만나는 것은 기쁨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찰스 스펄전이나 C. S. 루이스의 훌륭한 문장이 당신이 받는 뉴스피드에서 주류를 이루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께서도 책 전체의 내용을 다 담아서 표현할 수 있는 정도로 속이 꽉 찬 문장을 좋아하신다.그렇다고 짧은 문장이 언제나 도움이 되는 건 아니다. 종종 진리를 간결하게 하고 싶다는 욕망이 진리를 사소하게 만들기도 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진리를 가리기도 한다. 결국 진리를 가리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여기 그리스도인이 자주 쓰는 다섯 개의 상투적 어구가 있다. 이것들은 전혀 성경적이지 않기에 특별한 주의가 요구된다.1. “하나님은 문을 닫으실 때면 대신 창문을 여신다.”이 말 뒤에 숨은 의도를 충분히 이해한다. 물론 하나님이 스스로 기뻐하시는 일을 하신다는 것은 진리이다(렘 32:27). 그렇기에 하나님은 종종 우리가 가는 길을 바꾸시더라도(잠 16:9) 당신의 뜻을 버리지 않으신다(히 13:5).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서 문을 하나 닫았다고 반드시 창문을 여신다는 보장은 없다. 어떤 문도 아예 열지 않으실 수도 있다. 하나님이 지금 원하는 것은 우리가 완전히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는 깨달음일 수도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의 자녀가 잘못된 때에 잘못된 길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성령님이 문만이 아니라 창문까지 전부 다 닫아버리시는 이야기로 가득하다(예, 잠 16:9; 19:21; 행 16:6-7).나는 언젠가 “소명”을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의 삼중 현상으로 묘사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은 그걸 좋아하는가, 그걸 할 능력이 있고 또 문이 열려 있는가? 그런데 아주 드물게는 세 번째 조건에 해당하는 기회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가 문을 부숴서라도 결단하기를 원하실 때가 있다는 것이다. 순교한 선교사 짐 엘리엇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그냥 앉아서 막연하게 “소명”을 기다리고만 있다. 그러나 정작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가 그들의 엉덩이를 차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완전히 다른 경우는 어떨까? 누군가 어떤 도시로 가서 직장을 얻는 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면, 또는 그 사람과의 관계를 갖는 게 아니라면? 그게 문이든 창문이든 관계없이 말이다. 어쩌면 하나님은 우리가 친근감과 능력과 기회라는 측면에서 스스로를 다시 재점검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의 내적 갈망과 확인된 은사와 실질적 가능성을 다시 확인하기를 원하실지도 모른다. 2. “하나님의 뜻 안에 있을 때보다 더 안전할 때는 없다.”여기서 말하는 안전이 영원을 의미한다면 또는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을 의미한다면 이 말은 영광스러울 정도로 진리이다. 그러나 이 말을 하는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이 의미하는 바는 육체적 안전을 말한다. 몇 년 전 내가 어느 폐쇄적인 국가에 선교사로 가기 위해 준비하고 있을 때, 믿음 좋은 몇 사람이 내게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이 당신을 부르셨으니까 어떤 피해로부터도 당신을 지켜주실 겁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여기에 동의하지 않을 거 같다.“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이 너희를 넘겨주어 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또 너희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눅 21:16-18).“너희 중의 몇을 죽이게 하겠고.” 그런데 완벽하게 안전할 거라고?이 약속은 모순처럼 들리지만 그렇지 않다. 저스틴 마터(Justin Martyr, AD 100-165)가 다음과 같이 말했을 때 그는 분명히 이 구절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죽일 지 모르지만, 결코 우리에게 그 어떤 해도 입힐 수는 없다.”나는 이 말을 너무 좋아한다. 오로지 기독교인만이 이런 미친 소리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너무도 많은 좋은 것들을 약속하셨다. 그러나 육체적 안전은 그 중 하나가 아니다. 타락한 세상에서 맞는 끔찍한 삶의 환경은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게 오히려 더 큰 육체적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당신은 영적으로 언제나 살아 있고 영원히 안전하다. 3.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아주 좋게 봐서 이 말은 항복의 가치를 강조한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너는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에 너의 이력서, 변명, 두려움을 다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이 말은 마치 기독교의 상징이 십자가가 아니라 안락한 소파라는 것을 의미하기 위해서 사용된다. 이 말은 아주 교묘하게도 싸우고 노력하고 또 인내하는 것에 브레이크를 거는 용도로 사용된다.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 이 말이 오로지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다 하 심’(justification)을 의미할 때만 쓰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상 성화 과정을 묘사하는 데 쓰이면서 결과적으로 수동적 자세를 변명하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녹녹치 않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바울은 석양과 낮잠 대신 군인과 운동선수, 농부를 생각했다(딤후 2:3-6). 그는 달리기 트랙과 권투 링을 생각했다(고전 9:24-27).하나님이 이미 우리 속에서 이뤄놓으신 것을 열매로 드러내는 삶을 살도록, 또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구원받은 결과를 드러내면서 살도록 우리는 부름 받았다(빌 2:12-13). 평안 중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역동성(마 11:28-30; 16:24)은 청교도들이 “거룩한 땀”이라고 부르던 것인데, 바로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삶의 중심에 자리 잡아야 하는 덕목이다. J. I. 패커는 이렇게 표현했다. “그리스도인의 모토는 ‘여기까지만 하자. 나머지는 이제 하나님이 알아서 하시겠지’가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끝까지 밀고 나가자’가 되어야 한다.”4. “당신이 감당 못할 일을 하나님은 허락하지 않으신다.”바라는 것은 모두 다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문화 속에서 이런 동기부여 슬로건은 우리를 격려하고 또 인생이 사실상 그렇게 힘든 게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물론 도전이 되는 일들도 있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은 우리의 한계를 알고 결코 그 한계를 넘는 일까지 시키지는 않는다는 의미이다. 문제는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하지 못 할 일을 주신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함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하시고, 또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기를 원하신다. 지난 몇 년간 전직 노예 상인이었고 그 유명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지은 존 뉴턴(John Newton, 1725-1807)의 편지보다 내 영혼에 더 큰 힘이 되었던 것은 없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과부에게 보낸 편지에서 뉴턴은 이렇게 썼다.우리가 생각하는 틀과 인식이 다를 수 있지만 [죽음의 시간]에 관한 믿음이 알려주는 바는 동일합니다. 주님은 대개 죽어가는 시간에 꼭 필요로 하는 힘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 그러다가 주님이 정한 시간에 따라 죽음을 맞았을 때 주님은 당신이 가진 모든 두려움을 압도하고, 당신의 모든 적을 침묵시키며, 그의 왕국으로 들어가는 편안한 승리의 길을 열어 주십니다.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수께서는 직접 죽으심으로 죽음의 쏘는 것을 이기셨고 무덤을 정복하셨고 또한 믿는 사람들을 위해 영광의 문을 여셨습니다. 복음이란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가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께서 감당하지 못할 일을 허락하지 않으신다’이다. 5.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성경 구절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보다 더 자주 성경 구절로 오해받는 말이 또 있을까? 이 말이 성경에 나오는 게 아니라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말이라는 사실보다 더 좋은 뉴스는 오늘날 없을 것이다. 하나님이 스스로 돕는 사람만을 돕는다면 우리는 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뛰어난 사람만을 위해서 오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도덕적으로 실패한 사람들, 우리를 위해서 오셨다(마 9:12-13; 눅 19:10).이 말로 다른 종교의 가르침은 요약이 가능할지 몰라도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메시지는 찰스 스펄전이 언젠가 말했듯이 바로 여기에 달려있다. “하나님은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사람들을 도우신다.” 참으로 하나님은 스스로 겸손해지는 사람들, 회개하고 예수님만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도우신다.진리는 사랑하는 것이다지금까지 살펴본 이 다섯 가지 말에 숨은 의미가 진실함에도 불구하고 다음 한 가지 사실 때문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바로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적으로 말하는 것은 단지 진리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랑의 문제가 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단지 진리일 뿐 아니라 이 세상을 이롭게 한다. 오로지 진리만을 선포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지킬 수 있고, 또 말씀을 바로 지킴으로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다. 사랑은 오로지 진리와 함께 기뻐하기 때문이다(고전 13:6).원제: 5 Christian Cliches that Need to Di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소명
변명
상투어
진리
거짓말
의롭다하심
칭의
성화
복음을 품은 기업 정신
by Katherine Leary Alsdorf
2020-08-18
창업하고자 하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탁월한 아이디어를 가지고 조직 내에서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려는 시도가 현실 안주에 만족하는 상황 속에서 번번이 무산되고 있거나, 지금까지 본 적 없는 새로운 필요에 착안하여 그것과 관련된 사업을 시작해 보고자 하는 충동에 사로잡혔을 수도 있다. 또는 자금력은 충분한데 그것을 좀 더 잘 관리하기를 원하는 경우일 수도 있고, 아니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일 수도 있을 것이다. 현재 많은 대학에서는 졸업생들이 어려운 취업 시장에 대비할 수 있도록 기업관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는 과정들을 추가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뉴욕시의 리디머장로교회에서는 지역 사회에 정의와 복음에 대한 사랑의 영향력을 넓혀 줄 수 있는 새로운 회사나 기관을 창업하고자 하는 개인들을 지원하고 그들에게 투자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투자란 창업 자본을 제공하는 정도 이상으로, 신제품을 시험하거나 법률, 마케팅, 전략 부문에 대해 조언해 주며, 영적 멘토링을 제공하기 위해서 교인 중 그 분야의 경험자들이 창업자들을 돕기 위해 모여 머리를 맞대고 도움을 줄 방법을 모색한다. 뭔가 생소한 조합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것을 우리는 “복음적 기업 정신을 위한 협력”이라 부른다.복음+기업관+지역사회 기여 및 문화 변혁=복음적 기업 정신주의 권능 아래에서 복음이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 우리는 뉴욕이나 다른 도시에서도 도시의 평안과 번영을 증가시킬 수 있는 복음의 영향력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바벨론 땅에 포로로 보내신 것과 같이(렘 29:4-7) 그분을 알지 못하거나 섬겨야 할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고 있는 땅에 우리를 이민자로 부르신다. 복음의 영향력은 우리의 마음을 변화시켜 우리 자신을 위해 자신의 몸을 희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기억하며 우리도 남을 섬길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팀 켈러는 이러한 영향력을 그의 저서 일과 영성(Every Good Endeavor)에서 잘 설명하고 있다.어찌 보면 우리의 현대 문화는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나오는) 힘을 가진 반지처럼 힘이 있으며, 죄가 가지고 있는 이기적 성향을 모든 인간의 마음에 확산시키고 있다. 그것은 매일 그 누구도 우리에게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 말해 줄 권한이 없다는 점을 다양한 방법으로 심어주기 위해 속삭인다. 결국 선택권을 가진 나 자신보다 더 높은 기준이나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우리 내면의 의식과 욕구는 우리 외부의 그 어떤 것보다도 더 현실적이다. 즉, 우리가 머리를 숙여야 할 대상은 존재하지 않고, 우리의 허락 없이 그 어떤 것도 우리의 행복에 간섭할 수 없으며, 우리가 우리의 자유를 희생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우리가 쏟아야 할 열정(passion)에 대한 정의—그리스도의 고난(Passion)을 묵상하라—는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의 자유를 희생하는 것이다.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을 통한 장래의 모든 것에 대한 완전한 회복이라는 우리가 가진 하나님 안에서의 희망으로 인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희생할 수 있도록 변화시킨다. 복음은 지역사회에서 행복하고 윤택한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우리에게 동기와 비전과 힘이 된다.복음은 어떠한 변화를 만드는가? 복음을 중심에 품은 기업관의 특징은 무엇일까? 물론 그리스도인만이 사심 없는 훌륭한 방법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만이 이런 역할을 감당해야 했다면 우리가 사는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더 잘못된 모습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일반 은총을 통해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함께 이 타락한 세상을 지킬 수 있도록 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을 더 깊이 이해한다면 우리 자신의 마음과 하는 일에는 변화가 생긴다.복음의 진리와 사랑은 하나님의 무한하신 창조력에 의해 우리의 기업관을 다양한 기업들만큼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화시킨다. 리디머장로교회에서 우리는 새로운 사업에 영향을 미치는 복음의 다음 네 가지 영역에 관심을 가지고 고민한다.• 제품 및 서비스: 어떻게 혁신을 촉진하고 사회와 인간의 번영에 기여할 수 있을까?• 조직 문화: 벤처의 가치와 실천이 팀워크와 상호 신뢰, 정의와 진실함, 서비스와 친절함, 기쁨과 탁월함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을까?• 운영: 벤처의 리더십, 전략, 시스템, 구조 및 활동이 그 임무와 자원을 어떻게 관리할까?• 광범위한 이해 관계자로서의 관점: 투자자, 고객, 직원, 공급자, 산업 및 지역사회의 이익이 공동의 이익을 위해 어떻게 일관성을 가질 수 있을까?우리는 교회의 성도 중 가난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새로운 영리사업, 학교, 화랑, 공연기획사, 변호사 사무소, 기관을 창업하려 하거나 하나님께서 주신 창조물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신(창세기 1-2장) 성경적 명령 때문에 지역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비영리 기업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을 지원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연합된 공동체는 다른 사람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고 모든 이들을 위한 보편적 복지에 기여할 것이다.확장된 비전교회에서의 이러한 지원 프로그램(Entrepreneurship Initiative)을 통해 창업자들을 격려하고 훈련하기 시작한지 7년, 우리는 30개 이상의 새로운 벤처 사업을 시작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것은 우리 지역사회의 필요를 해결하는 데 아주 기초적인 부분에 불과하였으나, 이는 우리에게 희망을 품게 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벤처기업 중 일부는 아직도 살아남기 위해 애쓰고 있으나, 몇몇은 그 영향력을 미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고 있다. 모든 사람은 자신들의 믿음과 그 믿음이 어떻게 모든 결정과 활동에 대해 동기를 부여하고 형성하는지에 대해 더 깊이 생각해 보도록 도전을 받아 왔다.복음적 기업관이 가장 크게 기여한 부분은 그것이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통해 이룰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확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복음적 기업관은 성도들이 자신들의 필요를 채우는 데만 집중하기보다는 눈을 밖으로 돌려 지역사회가 무엇을 필요로 하는지, 그 사회의 망가진 부분은 없는지 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이러한 새로운 관점의 기업 정신은 새롭고 가치 있는 벤처 기업의 시작과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투자자, 멘토, 경험 많은 기업가, 마케터, 변호사 등 이해관계자들을 끌어 모았다. 이것은 엉망이 되어 버린 사회에 희망과 그리스도의 사랑을 가져다줄 수 있는 복음 중심 생태계(교회, 기관, 예술, 서비스 단체, 기업, 그리고 기관)를 형성하기 위한 작은 시발점이다.복음은 모든 것을 바꾼다성도들은 복음의 힘에 의해 변화되기 때문에, 그것은 모든 것에 영향을 미친다. 마음도 변하고, 관계도 변하고, 우리가 세상과 관계를 맺는 방식 역시 변한다.오늘날, 복음 중심적인 교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믿음을 훈련시켜 세상을 사는 방법에 대해 영향력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의 창조적인 에너지를 우리 지역사회의 직장, 사업체, 문화 속에서 평화와 번영을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전환시킨다.원제: Gospel Entrepreneurship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장명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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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는 뉘우침 없는 사과가 아닙니다
by Sam Allberry
2020-07-12
거의 매일 뉴스에서 보는 것이 있다. 공인 한 사람이 많은 이들의 윤리 기준을 넘는 말이나 행동을 한다. 그러고는 고통받은 이들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자 유감 성명을 발표하지만 실제로는 어떠한 잘못도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공적인 신용을 계속 유지하곤 한다. 나는 이런 류의 태도를 “미안, 그런데 별로 안 미안해” 식의 뉘우침 없는 사과(non-apology apology) 또는 모조 사죄(faux-pology)라 부르고자 한다. 이런 사람들은 “내가 한 일로 인해 분노했을 사람들에 대해 유감을 표명합니다” 또는 “내가 실수를 했네요”라고 말한다. 어느 정도 회개하는 것 같은 면은 있지만 이는 구체적으로 잘못을 시인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태도는 잘못을 지적당했을 때 우리가 보이는 일반적인 반응이다. 우리의 본능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누군가 우리에게 불만을 표하면 우리는 반사적으로 그렇게 반응하는데, 우리는 하나님께도 그렇게 대할 수 있다. 성경을 묵상해보면 회개를 촉구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분명히 배우게 된다. 예수님도 자신이 이 땅에 온 것에 대한 우리의 가장 합당한 태도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는 것”(막 1:15)임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뉘우침 없는 사과가 때로 사람들에게는 먹혀드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도 그럴까?유감을 표명한다고 하면서도 우리 마음으로 방어적인 자세를 취한다면 우리는 사실 진정으로 회개하지 않는 것이다. 그저 흉내만 낼 뿐이어서 진정한 변화를 이끌어내지 못하는 유감은 진정한 회개가 아니다. 진정한 회개는 깊은 애통을 동반한다. 뉘우침 없는 사과는 사람들과 관련된 급한 불은 끌 수 있겠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다윗왕이 좋은 예다. 그는 밧세바와 동침하는 큰 죄를 저지른 것도 모자라 밧세바의 남편까지 죽게 하는 죄를 저지른다.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자신의 죄를 인정한다.진정으로 회개하지 않고 뉘우침 없는 사과 뒤에 숨고자 한다면 다윗이 시편 51편에서 했던 것과 반대로 하면 되는데, 필자는 네 가지 정도의 방법을 소개하고자 한다.1. 죄를 죄라고 부르지 말라다윗은 그가 죄를 범했음을 인정한다. 최선의 것이 아니었다거나 불완전했다고 얼버무리지 않았다. 윤리의 기준선은 엄연히 실재한다. 다윗은 자기가 그 선을 넘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무릇 나는 내 죄과를 아오니 내 죄가 항상 내 앞에 있나이다”(시 51:3). 사탕발림 같은 말이 아니다. “실수”였다거나 잠깐 “넘어진 것”이라 부르지 않는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행한 것은 “악”이다(4절). 다윗은 “죄가 범하여졌습니다”라거나 “범죄가 발생했습니다”와 같은 애매한 수동적 표현을 하지 않았다. 다윗은 회피하지도 않고 빠져나가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가 스스로 행한 일이었고 그의 잘못이었다. 2. 그저 표면적인 문제일 뿐이라고 주장하라자기 잘못이 드러나면 사람들은 보통 “내가 무슨 정신으로 그런 일을 했는지 모르겠네요. 저는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에요”라고 한다. 다윗의 태도는 정반대다.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5). 다윗의 요점은 분명하다. 그가 한 일은 그 자신 깊숙한 곳에 도사린 것이 드러났다는 것이다. 그가 간음의 죄를 범한 것은 다윗 자신이 그 마음으로 이미 간음을 범한 자이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말을 한 것은 그가 그 마음으로 거짓말하는 자이기 때문이고, 그가 살인한 것은 마음으로 이미 살인자이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것이 마음의 문제지 일회적인 일탈 문제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 그가 범죄한 것은 그가 마음으로 이미 죄인이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우리의 깊은 속사람이 기본적으로 선하다 여기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모든 일을 다 완벽하게 잘 해내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 자신의 깊은 속사람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고 인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우리가 이를 직면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의 진단은 우리를 불편케 하는 것이 사실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둑질과 거짓 증언과 비방이니 이런 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요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느니라”(마 15:19–20).예수님은 우리의 문제가 무엇인지 진단을 내리시는데, 바로 우리 마음이 문제라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악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우리 마음이 악하기 때문에 우리는 훔치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자신과 다른 이들의 성(sexuality)을 오용하는 것 역시 우리 마음이 그렇기 때문이다. 이를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결코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이해할 수 없다.성령이 내주하시는 그리스도인인 우리들은 우리의 마음이 예전과 같은 상태가 아님을 알고 즐거워한다(롬 8:9). 우리에게 새로운 본성을 주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우리가 죄인 된 본성을 완전히 포기한 것이 아님을 깨닫고 우리 마음 안에 아직 죄가 잔존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범한 죄만 아니라 우리 마음의 죄악된 상태에 대해서도 고백해야 마땅하다.3. 죄의 인간적인 결과에 대해서만 인정하라우리가 다른 사람들에 대해 행한 잘못을 마지못해 인정하는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럴 때도 그저 몇몇 사람에게만 잘못을 범했다고 주장하면서 우리의 과실을 최소화하려고 할 수 있다. 내가 한 잘못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극소수고 다른 이들은 괜찮다는 것이다. 내 잘못이 무슨 대수냐는 뜻이고 오히려 그 사람들이 잘못이라는 말이다. 이런 태도는 내가 행한 잘못보다 오히려 그 사람들에 대해 초점을 두게 만든다.다윗은 다시금 다른 태도를 보여준다. 자기 죄의 심각성을 깨달은 후 그는 이렇게 쓴다.“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주께서 심판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얼핏 보기에 다윗이 자신의 죄가 타인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간과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밧세바에게 행한 다윗의 악행은 가벼운 것이 아니며 매우 심각한 것들이다. 그는 정욕을 절제하지 못하고 밧세바를 범했다. 그녀를 과부로 만들었고 밧세바의 행복한 삶을 망가뜨렸다. 밧세바에 대해 행해진 이 악행이 심각한 이유는 이 악행이 다른 누구보다도 하나님께 대해 행해진 악행이기 때문이다. 모든 죄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죄다. 밧세바는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으로 만든 사람이었다. 그녀를 범한 것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였다. 다른 이에게 악을 행하는 것은 그들을 창조하신 하나님께 대한 범죄다. 4. 하나님을 멀리 하라진정성 있고 깊은 회개를 회피하고 싶다면 하나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우리 자신의 참모습이 드러나 버리기 때문이다. 우리가 결국 옳다는 착각 속에 계속 살고 싶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윗은 만약 죄를 시인한다면, 하나님께 가는 것이 ‘안전한’ 길임을 확신하게 되었다.“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1).다윗은 하나님이 자기 자신과 자기 백성들을 다루시는 방법들을 보며 여호와께서는 ‘진실로’ 은혜와 자비가 풍성하시고 신실함과 사랑으로 가득한 분임을 목도했다. 이 사실은 바로 예수님의 삶을 통해서 가장 분명히 드러났다. 사복음서 중 어디를 읽더라도 예수님이 드러내 보여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우리가 그저 마냥 좋은 사람들인것처럼 이야기하시지도 않고 우리의 현재 모습에 근거하여 우리를 징계하시지도 않는다. 놀라운 방식으로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오셔서 우리의 모든 죄악을 자신에게로 옮겨 가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다. 예수께서 하신 일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것이 가능해진 것이다. 숨을 필요가 없다. 장황하게 변명을 늘어놓을 필요도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를 용서하기 원하신다. 그래서, 우리 마음 속 최악의 죄들을 진실되고도 자유롭게 고백할 수 있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ow to Turn Repentance Into a Non-Apology Apology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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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용서
영성
사죄
sexual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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