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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드라마에서 ‘진리의 조각’ 찾기
by 서나영
2023-03-04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오직 성경”에 익숙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언어 기반의 “말씀” 외에 다른 장르가 전달하는 진리에 어색하다. 그런데 사실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데 있어 수많은 진실은 문자 외에 이미지, 기호, 스토리에도 표현되어 있다. 사람들은 이성의 존재인 동시에 이미지를 인식하는 존재이며, 심지어 이미지가 눈에 보이지 않아도 마음속의 이미지를 따라 움직이는 존재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것은 절대로 철학적 아이디어나 명제에 가둘 수 없지 않겠는가? 진정한 기독교 세계관은 보이는 교회의 벽 안에 가둬져 있는 진리만 사유할 것이 아니라 일상에서 진리의 조각을 찾아야 한다.코로나19라는 3년가량의 긴 팬데믹을 겪으며, 이른바 “K-드라마”가 우울감에 빠진 전 세계인을 위로해주었다. OTT 서비스와 플랫폼의 경제적 구조는 점점 더 많은 K-드라마에 투자하게 했고, 전문가들은 향후 몇 년간은 K-드라마가 더 확장되고 발전되어 K-컬처의 선두 주자로 달릴 것이라고 말한다. 연속된 디지털 이미지와 스토리가 음악과 사운드가 만난 ‘영상’이라는 장르는 그 자체로도 영향력 있는 종합예술의 반열에 오르는데, 드라마는 거기에 장시간의 스토리가 주는 언어의 힘까지 장착했다. 흥행과 작품성을 검증받은 드라마 작가들의 특징은 그들만의 확실한 주제를 잘 살린다는 데 있다. 작가는 자신이 믿고 있는 진실을 주제로 선택해서 가치의 개념을 주제에 맞게 배열한다. 그리고 말하고자 하는 주제의 구체적인 관점을 제시하여 그 관점으로 세상을 보도록 설득한다. 한마디로, 눈과 귀와 사고와 감정을 장시간 몰입하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의지의 영역에 영향을 줄 만큼 재미있는 것이 K-드라마다.이렇게 일반적 진실을 궁극적인 진리라고 이끌게 하는 생각의 통로, 그 통로의 전제를 우리는 “세계관”이라고 한다. 누군가가 현실을 바라볼 때 만드는 기본 신념이나 전제라는 뜻이다. 영국의 신학자이자 문학자인 C. S. 루이스는 “이 세계관과 저 세계관 사이에서 판단하려면 두 세계관 모두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신이 어떤 세계관을 가지고 살아가는지도 모르는 채, 혹은 정확히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모든 대중이 동일한 작품을 공유한다는 엄청난 의미가 있다. 기독교 세계관이 아닌 다른 대안의 세계관들이 펼치는 현실을, 즉 그들이 믿고 있는 진실을 이해하는 것은 당연히 중요하지 않겠는가? 드라마 작가들은 저마다 자기 작품 안에 다양한 세계관을 녹여 넣는다. 이 첫 번째 단계는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세계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아무리 판타지의 주제라도, 인간은 그들의 현실과 동떨어져 있으면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삶 속에 존재하는 진실들로 소재로 쓰기 마련이다. 두 번째 단계는 그 모습 속에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을 구성하는 도덕이라는 기준점을 제시한다. 이를 바탕으로 마치 경험하는 것 같은 지식을 제공함으로 시청자들이 정말로 인간의 삶에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느끼게 한다. 예를 들면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은 K-드라마 ‘도깨비’는 판타지 장르로, 인간의 영혼과 환생, 신이 내리는 죄와 벌, 그리고 신의 세계의 선과 악과 질서에 대해 그렸다. 김은숙 작가가 이 드라마에서 전제한 주된 세계관은 불교에서 말하는 환생과 부활, 곧 윤회사상이다. 그 전제는 영의 존재에 대한 확신으로, 선한 행실과 악한 행실의 기준으로 내세의 삶이 결정된다. 그러므로 불교의 세계관 안에서 인간의 삶에서 선하게 사는 것과 용서와 사랑, 죽음과 생명의 의미에 중요한 가치를 둔다. 작가는 재치 있는 대사와 인간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수많은 사람에게 삶에 대한 깊은 사유를 던졌다. 이 탄탄한 스토리에 배우들의 연기력과 섬세한 촬영 기술로 전 세계의 시청자들에게 드라마가 가진 세계관을 적극적으로 엿보게 하는 것에 성공했다. 같은 작가의 또 다른 흥행한 K-드라마 ‘더 글로리’는 바로 그 타이틀(“영광”)이 돋보인다. 작가는 학교폭력을 당한 여주인공이, 육체에 폭력이 가해지면서 보이지 않는 “영혼의 무언가가 손상되었음”을 말했다. 그것이 인간의 “영광”이며, 일종의 복수를 통해 이 “영광”을 회복하여 더 나은 삶이 아닌 인간의 원점에서 시작할 수 있다는 의미로 작품을 그려냈다. 작가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사실적 감정을 파헤치고, 인간의 “영광”이라고 표현되는 그 개념을 얻기까지 수많은 피해자의 글들을 읽으며 분석하고 연구했다고 한다. 그 결과, 이 드라마는 피해자들이 말하는 인간에 관한 진실을 보여주고 성공적으로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며 “인간답게 사는 것”이 무엇인지 질문한다. 다른 K-드라마들에서도 세계관은 다르나 공통적인 주제가 있다. 곧 인생의 의미를 깊이 파헤친다: “인생에서 가장 높고 핵심적인 가치가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 “어떤 요소들이 좀 더 나은 삶을 만드는가?” “사람에게 있어 좋은 행동과 나쁜 행동의 기준은 무엇인가?” 또한 인간을 중심으로 “사회적 유대의 가치” “인간에게 있어 자연의 가치” “신의 존재와 인간과의 관계성” 등을 파고든다. 스토리에 등장하는 인물이 어떤 현실 속에 살며, 어떤 것을 가장 높은 가치로 여기는지, 그래서 어떤 결말을 맞이하는지를 그리며 세계관의 문제를 강하게 드러낸다. 드라마에서 만나는 다양한 세계관에 대한 지식은 여러 가지 이유로 가치 있는 지식이 될 수 있다. 역사적 관점과 우리의 문명과 문화, 각 세대와 자신의 세계관을 돌아볼 수 있는 관점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은 이 관점과 지식을 통해 자신의 세계를 강화해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세계관에서 가장 높은 가치는 무엇인가? 하나님이다. 삼위 하나님은 궁극적인 실재이시며 창조주이시자 존재하는 모든 것 위의 주관자다. 그리고 그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영적이며 동시에 육적인 존재인 사람, 다음에는 더 넓혀서 그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정과 교회와 국가라는 사회, 그리고 창조하신 자연과 보이지는 않으나 중요한 가치인 사랑, 도덕, 아름다움, 질서, 감정, 이성, 믿음, 희생 등이 그 중심에 자리 잡고 있다. 즉 기독교 세계관은 하나님이 모든 경험의 기준점이자, 삶의 모든 측면에 의미와 정체성을 부여하시는 분이라는 관점에서 모든 것을 보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방향을 점검하고 강화하는 수단으로 K드라마를 대해야 한다. 앞으로 우리의 삶에 더 깊숙이 자리할 드라마라는 장르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의 임무는 진리를 따르는 순례자로서 진리의 조각을 모으는 것이다. ‘도깨비’나 ‘더 글로리’에서 확실하게 보여주는 영혼의 존재를 바로 일깨우고, 환생이 아닌 주님과 영원한 생명의 삶이라는 진리로 인도하자. 사람의 영광이 아닌 주님의 영광을 보게 하자.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전파할 세상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경험적 지식을 얻어가며, 성도로서의 구별된 삶의 질서를 정할 수 있는 가치들에 대한 지식의 조각을 가져오자. 세상 사람들이 믿고 있는 진실은 무엇인지, 그것들을 어떻게 기독교의 진리로 끌어올 수 있는지 깊이 상고하자. 칼뱅이 디도서 주석에서 말했듯, “모든 진리는 하나님에게서 온다. 따라서 악인이 참되고 의로운 말을 했다면 우리는 그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하나님에게서 왔기 때문이다.”
K드라마
드라마
세계관
진리의조각
그리스도인의 슬기로운 ‘K-드라마’ 문화생활
by 서나영
2023-01-2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바야흐로 ‘K-드라마’ 열풍의 시대다. 한국 드라마는 이제 더 이상 우리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전 세계인의 주요 문화 코드로 자리를 잡았다. ‘오징어게임’을 시작으로 최근의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까지 다양한 장르의 한국 드라마가 흥행에 성공했다. 작품성이 높다고 평가받은 K-드라마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몰입감이다. 이 말은 곧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신앙과는 관계없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면 누구나 몰입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 순간에도 한국의 수많은 그리스도인이 드라마에 몰입하고 있다. 그렇다면 성경은 K-드라마를 보는 주님의 백성에게 어떤 말씀을 하고 계실까? 교회는 그들에게 어떤 가이드를 주어야 할까?대중예술은 신앙인이 일상에서 영향을 받는 가장 큰 문화의 또 다른 이름이다. 그런데 교회에서는 드라마와 관계된 신앙의 삶에 대해 거의 들을 수 없다. 이러한 상황은 현대의 기독교가 그토록 피하고 싶어 하는 ‘이원론’에 빠진 사고가 더욱더 팽배하도록 방치한다. 그 무서운 결과는 신앙인의 삶을 교묘하게 ‘세속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아직도 한국의 교계는 이 문제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는 둔감증을 앓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문화예술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활발하게 참여하는 (적어도 내가 만난) 다음세대들은 이 영역에서도 성경적 진리를 갈구한다. 교회에는 더 지혜롭고 구체적인 복음의 언어로 “그리스도인의 문화생활”에 대해 가르쳐주어야 할 책임이 있다. 그렇다면 왜 교회는 이 영역에 무관심한 것일까? 문화와 개혁주의 기독교 사이에 오간 오랜 담론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몇 가지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지만, 여기서는 수많은 신학적 이유는 뒤로 하고 현재의 예술의 도드라지는 특성을 생각해 보자. 고전 시대부터 지금까지 예술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리얼리즘(realism)이다. 특별히 이 시대의 K-드라마는 인간과 사회의 추한 모습들까지 자세하고도 생생하게 그리는 데서 탁월하다. 몰입감을 극대화하는 것이 높은 예술성의 기준이 되어 버린 지금, 표현 방법에서 도덕과 윤리 등의 선한 가치를 생각하는 것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옛 전통의 인간이 지켜왔던 가치들을 더 이상 소중히 여기지 않으며, 자연스럽게 적나라한 부분까지 자세히 볼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교회는 당연히 이러한 예술 장르와의 담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면 세계적인 신드롬을 일으킨 ‘오징어게임’은 한국의 다양한 사회문제를 들추어낸다. 이 드라마는 자본주의가 낳은 빈부격차, 또 그로 인한 생명 경시 풍조를 중심으로 인간의 각종 추함과 잔인함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그뿐 아니라 기독교의 위선적 타락을 비중 있게 그린다. 이 드라마에는 세 가지 유형의 사람이 등장하는데, ‘살인과 친자 강간을 일삼는 목사,’ ‘불우한 이웃을 돌보지 않는 전도자,’ ‘쉬지 않고 주님께 기도하지만 이기적이고 파렴치한 자’이다. 그리고 교회들은 이 문제에 침묵했다. 일부는 “보지 말라”고 간단히 권고했고, 일부 기독교 언론은 반기독교 사상을 언급하며 비판하기 바빴다. 일부 젊은 목사들은 양육하는 교인들에게 ‘비판 글’ 링크를 돌리며 “얼마나 나쁜 드라마인지” 다급하게 알렸다. 이러한 대책들이 절대로 틀렸거나 부적절한 반응이라는 말은 아니다. 또한 대부분 교회 강단에서 이 문제를 언급하지 않았던 이유는, 피하는 게 가장 지혜롭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이런 권고나 무시와 상관없이 성도들은 이 드라마를 시청하고 있다! ‘오징어게임’을 보지 말라는 교회의 권고는 특히 젊은 세대에게는 전혀 영향력을 끼치지 못한다. 미디어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더 크고 강하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는 교회에서 더 정교한 대화가 이루어져야 한다.한국 기독교 역사를 볼 때, 대중문화예술의 분석에는 일관된 접근 방식이 있다. 첫 번째 접근은 드라마의 스토리나 대사에서 ‘기독교 교리와 사상을 침해하는 부분이 있는가’라는 검열에서 시작한다. 어린 시절 교회로 초청된 특별강사가 당시 흥행하고 있는 영화 ‘사랑과 영혼’을 보지 말아야 할 수많은 이유를 나열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지만 그때도 그 영화를 보지 않은 거의 사람은 없었다. 모두가 이미 본 영화를 보지 말라고 비판하는 걸 보면서 어린 나이에도 의문점이 있었다. 현재도 영화가 흥행하면 무엇이 반(反)기독교적인지 예리하게 찾아 비판하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각성을 촉구한다. 최근 “수리남은 반기독교적 드라마”라는 제목으로 한국기독언론회에서 기사를 낸 바 있다. 예나 지금이나 일관된 접근 방식이다. 두 번째 접근은 비교적 최근 시도되고 있는 접근 방식인데, 스토리에 녹아 있는 기독교적 메시지를 찾는 것이다. 예를 들면, 2021년 한 기독교 일간지에서 어느 신학자는 K-드라마 ‘힘쎈 여자 도봉순’의 대사를 인용하면서 ‘사랑과 용서’라는 기독교적 원리를 끄집어냈다. 일반은총 교리에 입각해 모든 콘텐츠에서 기독교적 메세지를 찾아내는 것은 어렵지 않다. 보통 드라마나 영화에는 다중세계관이 섞여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한 작품 안에서 반기독교적 세계관도, 기독교적 메시지도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에는 인간의 존엄성, 희생과 사랑 등 사회적 선함을 추구하는 기독교적 메시지가 있지만, 레즈비언의 사랑과 결혼을 옹호하는 입장도 볼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 세계 청중의 “마음의 방향”이 그리스도를 향해 순례의 길을 걷는 같은 방향이라 해도, 같은 작품 속에 나쁘고 위험한 것이 더 보이기도 하고, 좋은 것이 더 커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읽어내는 작업은 복잡하고 생각할 것이 많아서 많은 인내가 필요한 작업이다. 개개인의 주관성과 작품의 개별적 특성이 만나 보편적 결론에 이르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그러함에도 K-드라마를 보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원초적인 성경적 접근 방식을 소개하려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감동으로 쓰인 성경이 그 자체로 엄청난 수준의 문학예술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가? 수많은 장르의 아름다운 문학 기법과 시와 노래와 판타지와 비유가 등장한다. 한 접근 방식의 예로, 리얼리즘을 생각해 보자. 그리스도인의 드라마 시청에서 주목하여 생각해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스토리보다는 내용을 표현하는 사실주의적 방식이다. 분명히 ‘인간의 전적 타락’은 성경적 사실이다. 그런데 일부 드라마에서는 모든 추한 형태의 인간 타락과 악을 명시적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악의 전체 범위를 돋보기로 확대하여 스펙터클하게 묘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우리는 성경에 나타난 묘사의 방식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리얼리즘은 성경도 사용하고 있는 중요한 예술적 방법이다. 성경은 인간 타락의 전체적인 범위를 다양하게 묘사하고 있으며 리얼리즘이라는 방법론을 지지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겠다. 예를 들면, 성경은 성적 부도덕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소돔의 동성애 이야기(창세기 19장); 디나 강간 사건(창세기 34장); 다말과 오난의 부적절한 성교(창세기 38:1-10); 삼손의 행위(사사기 16장); 기브아의 첩 집단강간 사건(사사기 19장); 다윗과 밧세바의 간음(사무엘하 11장); 암논과 다말의 근친상간(사무엘하 13장) 등등이 묘사된다. 또한 성경은 폭력의 장면도 사실적으로 묘사된다. 사사기 3장의 에훗의 에글론 암살사건을 비롯해 구약 신약에 다수의 스토리가 있다. 성경은 사실주의 기법을 사용하여 우리가 알아야 할 것, 곧 인간 상태의 죄성과 타락한 세상의 비참함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리얼리즘을 지지하는 성경과 드라마라는 예술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그 목적이다. 성경은 악에 대한 고발을 보여주기 위해 묘사하는데, 반면 일부 드라마는 악을 묘사하여 몰입감을 높이는 데 더 큰 목적을 둘 때가 많다. 성경은 인간의 삶과 경험에 대한 설명에서 타락의 모습을 우세하게 표현하지 않는다. 즉, 성경은 인간의 타락이 삶의 전부이거나 추함과 악에 대한 대안이 없다는 인상을 청중에게 남기지 않는다. 또한 성경은 성적 부도덕에 대해 따라오는 추악한 세부 묘사를 하지 않는다. 성적 부도덕을 표현할 때, 그 내용을 예술적으로 축약하여 악함이 돋보이거나 선정적으로 비치게 하지 않는다. 성적인 부분을 묘사하는 수많은 K-드라마와는 접근 방식이 완전히 다르다는 의미다. 제일 중요한 것은, 성경은 묘사하고 있는 악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반면 대부분의 현대 K-드라마는 부도덕이나 부분적 악을 인간 행동의 정상적이고 불가피한 부분으로 묘사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직접 보여주신 예술 작품의 가장 좋은 예다. 인간의 모든 삶을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하며 아름답고 의미와 장르와 기법이 충만하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성경의 예술적 방식을 인식하고 K-드라마를 볼 때,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정욕적인 생각과 행동을 불러일으키는 외설적 표현이 보이고, 욕설과 주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언어들이 들리길 바란다. 또한 노골적이고 절제되지 않은 폭력과 모든 악의 묘사방식이, 성경의 방식과 비교되어 감상 되길 바란다. 이러한 작은 사고의 전환이 시작되기를 교회가 적극적으로 돕기를 바란다. K-드라마를 피할 수 없게 된 젊은 세대들이 영적으로 무장하고 지혜로워지기를 바라며, For His Gl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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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계 신학
오스틴 프리먼의 ‘톨킨 교의학’
by Louis Markos
2023-01-23
J. R. R. 톨킨은 자신과 개인적 특성을 공유하는 모든 독자를 끌어들인다. 그중 하나가 다름 아니라 그가 그토록 사랑했던 중세인과 공유했던 특성이다. 폐기된 이미지의 첫 번째 장에서 C. S. 루이스는 중세인의 특성이 무엇인지 루이스답게 정확하게 정의한다. “중세인은 몽상가도 방랑자도 아니었다. 그는 조직자, 성문화자, 그리고 시스템 구축자였다. 그가 원한 것은 ‘모든 것을 위한 장소, 그리고 모든 것이 올바른 장소에 있는 것’이었다. 구별, 정의, 그리고 도표화는 그의 기쁨이었다.”크리스토퍼 톨킨의 열두 권 분량의 방대한 Middle-Earth History(중간계 역사)부터 험프리 카펜터가 정리한 사랑스럽긴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군데군데 삭제된 Letters of J.R.R.Tolkien(톨킨의 편지)에 이르기까지, 스컬 앤 해머드(Scull and Hammond) 출판사에서 나온 백과사전 분량의 세 권으로 구성된 J. R. R. Tolkien Companion and Guide(톨킨 동반자와 가이드)에서 카렌 폰스태드가 구성한 Atlas of Middle-Earth(중간계 지도)에 이르기까지, 피터 크리프트가 쓴 포괄적인 Philosophy of Tolkien(톨킨 철학)에서 홀리 오드웨이가 세심하게 문서화한 Tolkien’s Modern Reading(톨킨의 현대 읽기)에 이르기까지, 톨킨 학자들도 톨킨이 추구했던 철저함, 세부 사항에 대한 사랑, 그리고 일차 세계(primary world)만큼이나 풍부하고 다층적인 이차 세계를 하위 창조하려는 열정을 그대로 모방한다. 바로 이런 정신을 바탕으로 해서 오스틴 프리먼(Austin Freeman)은 내가 생각할 때 결코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책, 톨킨 학자와 애호가 모두를 만족시키고도 남을 선물을 마련했다. Tolkien Dogmatics: Theology Through Mythology with the Maker of Middle-Earth(톨킨 교의학: 중간계 창조자가 등장하는 신화를 통한 신학)은 조직신학을 구축하기 위해 톨킨의 전설, 학술 에세이, 그리고 서신까지 힘들게 수집해서 대조 및 상호 참조한다. 톨킨에 대한 풍부한 2차 자료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고 있지만, 프리먼의 작업이 가지는 가치는 1차 자료 수준의 깊이와 폭에 확고하고 충실하게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이다. Tolkien Dogmatics: Theology through Mythology with the Maker of Middle-earthAUSTIN M. FREEMANJ. R. R. 톨킨은 다양한 면을 지닌 인물이다. 영국 가톨릭 신자, 아버지와 남편, 두 번의 세계 대전 생존자, 옥스퍼드 교수, 그리고 작가이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이기도 했다. 톨킨의 글은 하나님과 그의 작품에 흐르는 일관된 신학을 보여주지만, 체계적인 논증을 통해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이야기를 통해 신학을 표현했다.톨킨 교의학에서 오스틴 프리먼은 톨킨의 전체 자료(호빗, 반지의 제왕 등등)를 조사한다. 그리고 그 작품을 통해서 그의 신학을 들여다본다. 이야기, 강의 및 편지에서 톨킨은 실로 창의적이고 또 신중하게 기독교 신앙에 발을 들이고 있다. 하나님, 계시, 창조, 악, 그리스도와 구원, 교회, 마지막 날에 대한 섹션 등, 톨킨 교의학은 전통적인 조직신학의 목차에 따라서 정리되었다. 말 그대로 톨킨의 신학 사상에 대한 포괄적인 매뉴얼 역할을 감당한다. 톨킨의 상상력을 통해 우리는 내가 믿는 믿음이 무엇인지 다시 만날 수 있다. LEXHAM PRESS. 432 PP.하나님, 계시, 창조, 인류, 천사, 타락, 악과 죄, 사탄과 악마, 그리스도와 구원, 교회, 기독교인의 삶, 마지막 날에 대한 톨킨의 견해를 설명하는 열두 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톨킨 교의학은 중간계 창조자에게 근거가 되었고 또한 영감을 주고 인도까지 한 신학적 확신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든다. 프리먼은 “서설”(Prolegomena)이라는 적절한 제목이 붙은 서문에서 자신의 목표를 다음과 같이 분명히 밝혔다. “나 또는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문제에 개입하지 않도록 하면서, 톨킨이 생각한 바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설명하는 것이다”(17). 그리고 그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냈다. 프리먼은 휴스턴 기독교 대학(Houston Christian, 이전 이름은 Houston Baptist)의 강사이자 트리니티 신학교(Trinity Evangelical Divinity School)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고전 과목 선생이다. 개혁파 복음주의자의 입장에서 글을 썼지만, 프리먼은 톨킨의 강력한 가톨릭 신앙과 실천을 비판 내지 패러디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아부하지도 않는 자세로 최대한 자세하고 명확하게 설명했다. 이번 글은 열두 개 챕터 전체에 대한 개요를 제공하기보다는 톨킨이 애용한 전설(legendarium)과 관련해 내 생각을 추가한 세 개의 챕터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1. 인류인류에 관한 장에서 프리먼은 인간과 엘프의 차이점에 대한 중요한 사고를 제공한다. 그건 수년에 걸쳐서 톨킨이 전설관에 적용했던 일부 변경 사항에 고려되었던 사항이다. 예를 들어, 프리먼의 설명에 따르면, 인간의 자유라는 신성한 선물이 항상 톨킨의 중심 주제이기는 했지만,죽음이라는 선물은 가장 초창기 이야기 초안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영원으로의 탈출로 죽음을 바라보기 시작한 톨킨의 시각은 중기에 들어서이다. 죽음에 관한 톨킨의 가장 원숙한 입장은 죽음도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선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이다. (101)실마릴리온, 호빗, 그리고 반지의 제왕에서 인간(men)은 중심 인물은 아니지만 스토리의 핵심이라는 점은 확실하다. 프리먼은 여러 지점에서 아르다(Arda, 지구)가 회복되고 새로워지는 것은 인간을 통해서임을 상기시킨다. 톨킨이 그리는 엘프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엘프는 우울한 존재로 그려진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아름답게 하는 것, 그리고 결코 세상을 떠나지 않는 것, 또한 인간을 위한 길을 만드는 것. 그러다가 늘어난 인간이 엘프가 준비한 세계를 즐기게 되면, 거기에 따라서 소멸하는 것”(106).엘프는 인간을 능가하는 수준에서 예술과 아름다움을 자유롭게 창조할 수 있지만, 그러함에도 그들의 삶은 여전히 아르다의 운명에 묶여 있다. 엘프의 눈을 통해서 인간이라는 수수께끼를 볼 수 있도록 톨킨이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나가는지를 설명하는 프리먼의 솜씨는 매우 뛰어나다. 인간 스스로는 보지 못하지만, 엘프가 파악하는 인간의 숨겨진 면모는 다름 아니라 “세상에 대한 피로감 또는 세상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가고 싶은 갈망이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 땅에 손님이자 낯선 사람이기에 그렇다. 그렇기에 필멸성은 인간에게 단지 선물로 끝나지 않는다. 운명으로 인한 자유뿐 아니라 이 세상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라는 의미도 가진다”(107). 인류의 본질에 대한 톨킨의 신학적 견해를 묘사하기 위해 프리먼은 생색내기와는 아주 거리가 먼, 젠더에 대한 짧지만 예리한 섹션을 포함했다. 그는 조금의 주저함과 제한도 없이 명확하게 표현했다. 톨킨에게 “젠더는 단지 육체만이 아니라 영혼의 일부이다. 영혼은 젠더화되어 있을 뿐 아니라 가족이라는 측면에서도 관련된다”(116). 톨킨에게 있어서 남성과 여성은 그의 삶 뿐에서만 아니라 전설 이야기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을 동등하게 공유하지만 서로 다른 역할을 수행하는”(116) 존재이다. 프리먼은 이렇게 썼다. 현대 사회라는 측면에서 볼 때 톨킨이 시대에 뒤떨어진 성 역할을 고수한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그건 이전 세대의 가치관과 일맥상통한다. 전반적으로 말해서 그는 전통주의자이자 보완주의자이다. 그러나 톨킨은 신선한 현실주의를 제공한다. 여자가 단지 수동적이고 비현실적인 애정의 대상이 아니라는 데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단순히 남자와 동일시되어야 하는 존재도 아니라는 것이다. 남자와 마찬가지로 여자도 위험에 처한 영혼을 가진 또 다른 타락한 인간이며, 그 자체로 존중과 관심의 대상으로 여겨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116)자랑스럽고 또 가족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는 남편과 아버지로서의 톨킨의 면모가 잘 드러나는 편지에서 우리는 이 진리에 관한 그의 공정하고 간결한 요약을 만날 수 있다. 2. 타락톨킨에게 타락이 빠진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타락은 역사의 줄거리를 촉발하는 원초적인 평형 붕괴이며, 타락은 단지 일회성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는 패턴이다”(155). 전설 이야기에서 인간, 엘프, 천사는 모두 다 여러 번 타락한다. 중간계에서 악은 패배할 때마다 “환생하고 타락은 반복된다. 세 번째 시대가 끝날 즈음에 발생한 사우론의 멸망은 악이 물리적으로 구현되는 마지막 시간이지만, 악은 계속해서 다시 발현하고 악의 부재 속에서조차 끊임없이 커지는 평화를 무너뜨리곤 한다”(156).프리먼은 톨킨이 오랫동안 전설 이야기에 가상의 타락 이야기를 포함하길 주저했다고 말한다. 행여라도 “작품을 기독교의 패러디로 만들지 않을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162). 톨킨이 마침내 그 모든 부담감을 떨쳐버렸다는 사실은 1993년 ‘중간계 역사’의 열 번째 책인 ‘모고스의 반지’가 출판될 때까지 팬들은 모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독자를 위해 프리먼은 안드레스라는 현명한 여자와 나중에 인간 베랜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갈다드리엘의 엘프 형제 핀로드 사이에서 있었던, 깨달음을 주는 대화의 시놉시스를 포함했다. 실라릴리온에는 누메노르(“Akallabeth”)의 몰락에 대한 섹션이 포함되어 있다. 이 섹션은 어둠의 군주 사우론이 오래 살기는 하지만 죽는 존재인 누메노르인에게 일부러 포로도 잡힌 이유를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누메노르인의 마음을 현혹하여 영적 존재 발라뿐 아니라 심지어 유일신 에루에게 반역하도록 스스로 잡힌 것이다. 누메노르인이 에루가 아닌 사탄 멜코를 진정한 은인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하려는 것이다. 사우론은 그들을 충동질해 발라에게 반역하도록 함으로, 애초에 이 세상의 순환에서 해방하기 위한 에루의 선물인 필멸성에 반항한다. 핀로드와의 대화에서 안드레스는 엘프에게 사우론이 누메노르인을 타락시킨 것이 타락한 천사가 인간을 유혹하여 참 하나님을 버리도록 유혹한 최초의 사건이 아님을 밝힌다. 태초에 하나님은 1세대 인간에게 “그들을 땅에 살게 하시고 때가 되면 땅을 상속하고 다스리도록” 약속하셨지만, 멜코는 인간의 성급함을 악용했다.멜코는 인간이 자신을 선생으로 삼는다면, 그들은 스스로 만들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통해 부와 영광과 안락함을 가질 수 있다고 말한다. … 그는 새로운 욕망을 일깨우지만 욕망의 성취를 돕는 데에는 더디다. 그는 큰 선물을 주지만, 천천히 창조주에 대해 거짓말을 시작하며, 하나님을 인간을 멸망시키려는 적으로 묘사한다. (163)두 경우 모두, 하나님은 인간에게 살 수 있는 낙원을 주셨지만, 그들은 반역하는 천사의 거짓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 결과 “에루를 부인함, 사탄 숭배, 추방, 그리고 남아있는 의로운 자의 회개”(165)를 가져왔다. 대부분의 스토리 전개에서 톨킨이 자연 및 인간의 선함과 타락, 그리고 타락이 가져다주는 길고도 쓰라린 결과에 대해서 정통적이고 성경적인 설명을 따르고 있음을 프리먼은 정확하게 보여준다. 타락에 대한 허구적 설명 가운데 오직 한 영역만이 성경과 다르다. 창세기에 의하면, 아담과 하와가 금단의 열매를 먹기 전까지 지구는 완전한 상태였다. 그러나 톨킨에 의하면 창조 순간에도 지구는 이미 오염된 상태이다. 왜냐하면 에루와 그의 충실한 종 발라의 창조 노래에 멜코가 불일치를 주입했기 때문이다. “인류의 원죄가 발생하기 이전부터 톨킨의 우주는 이미 불완전했다”(157).3. 그리스도와 구원프리먼은 그리스도와 구원으로 관심을 돌리며 독자에게 중간계에서 기독교의 서사와 직접적인 유사점을 찾지 말라고 계속해서 경고한다. C. S. 루이스에게 아슬란은 삼위일체의 두 번째 위격인 아들이신 하나님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슬란을 말하는 동물과 걷는 나무가 있는 마법의 세계로 성육신한 존재로 보았다면 말이다. 석상에서 있었던 그의 죽음과 다음날 아침 부활은 성금요일과 부활절 주일의 복음을 재현한다. 이와 대조적으로 톨킨은 굳이 그리스도를 그가 만든 가상의 세계로 데려오는 것도, 구원 이야기를 재생하는 것도 피한다. 그럼에도 독자는 얼마든지 연결할 수 있다.톨킨은 듣기에 따라서 성육신의 신비처럼 들리는 기독교 교리의 가장 독특한 부분을 제공한다. 이전에 영적 존재였던 마법사들은 중간계를 치유하는 임무 달성을 위해서 진짜 몸을 덧입는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성에도 적용되는 성육신(embodiment)의 본질에 대한 톨킨의 논평을 주의 깊게 읽을 수 있다. 예를 들어, 마법사는 고통, 두려움, 피로, 그리고 배고픔을 느끼도록 하는 진짜 몸을 입고 있다. 이것은 발라가 덧입은 게 단순한 아바타 수준이 아니라 진정한 성육신임을 드러낸다. (238)이러한 연관성을 감안할 때, 혹시라도 프리먼은 문자 그대로 죽은 후에 다시 육화된 삶으로 돌아가는 ‘반지의 제왕’ 속 간달프를 주요한 메시아 인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게 아닐까 추측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실상 그는 톨킨이 아라곤을 “앵글로색슨 신학의 이상적인 신령한 왕”(240)으로 구현한다고 주장한다. 톨킨은 이미 The Fall of Arthur(아서의 몰락)과 The Legend of Sigurd and Gudrun(시구르드와 구드룬의 전설)에서 아서와 시구르드에게 신성한 왕권을 부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아라곤의 경우, 그를 창조할 때부터 톨킨이 “이미 존재하는 플롯에 의해서 조금도 제약받지 않았기 때문에”(241), 그는 아예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었다. 아라곤은 위엄, 영적 힘, 추종자로부터 받는 절대적인 사랑, 충성심, 그리고 복종을 끌어내는 능력에 이르기까지 아서와 시구르드를 능가한다. 그리스도처럼 아라곤은 명령하고, 치유하고, 또 새롭게 한다. 아라곤은 또한 그가 성취한 두 번의 승리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낸다. 프리먼의 설명이다. “앵글로색슨 시대와 실제로 교회의 첫 천 년 동안 가장 광범위하고 영향력 있는 속죄 이론은 형벌 대속이 아니라 악마를 이긴 그리스도, 즉 승리자 그리스도(Christus Victor)였다. 의미심장하게도 톨킨은 거의 전적으로 이런 방식으로 구원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249). 간달프와 프로도도 사우론의 악과 싸워서 승리한 게 사실이지만, 악에 대한 진정한 승리는 아라곤이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능력으로 몰도(Mordor)의 검은 문(Black Gates)에 대항하여 서부의 사람들을 이끌어냄으로 구현한 것이다. 맹세를 어긴 자(Oathbreakers)를 깨우고 풀어주기 위해 죽은 자의 길(Paths of the Dead)을 걷는 아라곤의 모습은 말 그대로 승리자 그리스도를 구현한다. 그리스도께서 지옥의 참혹함을 겪으시면서도 “성육신 이전에 태어난 성도들을 구출하기 위해 지옥으로 내려가신 것처럼 아라곤도 저주받고 버림받은 죽은 자들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한다”(251-252). 두 경우 다 사로잡힌 자를 이끌어내는 행위를 통해서 자유케 하시는 분의 메시아 직분을 가리킨다(cf., 엡 4:8). 아라곤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저주받은 망자들이 사는 무덤과 지옥에서 나올 때… 뿔 나팔을 불고 왕의 깃발을 펼친다.” 또한 “옥스퍼드에 있는 올 소울즈 대학(All Souls College)의 예배당 위의 조각과 마찬가지로, 지옥에서 죽은 자를 인도하는 내내 예수는 배너를 높이 들고 있는 모습으로 자주 묘사된다”(252).톨킨 교의학은 이와 같은 다양한 통찰로 넘쳐나며 진지하게 톨킨을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반드시 읽어야 한다. 톨킨의 전설 이야기에 대한 확고한 이해가 없는 사람들은 때때로 프리먼이 별다른 설명도 없이 픽션에서 논픽션 또는 편지로 갑자기 이동하기에 헷갈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강한 마음을 가진, 또한 톨킨과 기독교의 교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프리먼의 체계적인 설명을 들으며 톨킨이 그려내는 중간계를 넘나드는 신학적 여정에 동참하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원제: Theology of Middle-Ear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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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단지 물질이 아닌 아홉 가지 증거
by Thaddeus Williams
2023-01-17
만약에 당신이 생각하는 신이 고안한 기계 같은 존재라면, 지금 당신 머릿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역사상 가장 유명하고 많이 패러디된 그림 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를 떠올려보라. 하나님의 손이 아담의 손을 향해 뻗어있다. 그들의 손끝은 1인치 정도 떨어져 있다. 이것은 창세기 1:26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을 따라서, ‘우리의 모양대로 사람을 만들자….’”가 있기 바로 몇 초 전의 순간을 미켈란젤로가 창의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무기력하고 멍한 표정으로 손을 뻗고 있는 무심한 아담, 그의 얼굴에 하나님의 얼굴에 드러난 불꽃, 영감, 또는 결의는 찾아볼 수 없다. 하나님은 거대한 뇌를 닮은, 해부학적 정밀함으로 인상 깊게 채색된 적갈색 싸개를 두르고 공중에 떠 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생각의 힘을 불어넣기 위해서 손가락을 뻗는다.미켈란젤로의 가장 유명한 이 벽화에는 신학적 진리가 담겨있다. 하나님은 합리적 구조로 이루어진 우주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그 우주를 자신의 형상을 닮은 사람들로 채우겠다는 기발한 아이디어도 갖고 계셨다. 하나님이 생각해 낸 대상은 (나는 지금 의인화해서 말하고 있다) 자신의 합리적 의식을 이식시킨 존재, 즉 의미 있는 생각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한 종(species)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것은 중력의 법칙, 열역학, 그리고 주기율표를 고안해 내신 분의 형상을 지닌 자가 된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죽은 눈을 가진 자동화 기계(automatons)가 아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 놀라운 선물을 받은, 하나님의 손가락 터치 이후에 태어난 존재이다. 당신이 이성적 창조자에 의해서 창조된 아홉 가지 증거바로 이 순간에도 당신은 인간이 단지 생각 없는 물질 덩어리 이상임을 증명하는, 최소한 아홉 가지를 하고 있다. 1. 선택우리는 매일 수많은 선택을 한다. 당신이 선택하는 절대 지성(Mind)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면, 이건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의미 있는 선택이 기계 같은 결정론에 의해 (또는 무작위 양자 비결정론에 의해) 작동하는 자연 세계로 환원될 수 있을까? 우리가 자유를 그런 식으로 환원한다면, 아무도 하나님을 믿거나 믿지 않겠다는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며, 세상의 모든 논쟁은 단지 생물학적 기계가 때는 비자발적 윙윙거림으로 축소될 것이다. 2. 도덕성의식은 사실(있는 그대로의 것)만이 아니라 가치(되어야 하는 것)도 다룬다. 선과 악과 같은 규범적 가치들이 단순한 서술적 사실로만 채워진 물질세계에서 나올 수 있을까? 되어야 함(ought-ness) 같은 비물질적 실재가 물질적 있음(is-ness)의 토양에서 생겨날 수 있는가? 돈 드릴로(Don Delillo)는 소설 화이트 노이즈(White Noise)에서 이렇게 묻는다. 특정 지역에서 그들은 당신이 말하고 행동하고 느끼는 모든 것을 분자 단위로까지 추적할 수 있다. … 이런 시스템 아래에서 선과 악은 어떻게 되는 걸까? 열정, 시기, 증오? 그거 다 그냥 뉴런의 엉킴에 불과한 거 아닌가? … 살인을 부르는 분노는 또 어떤가? 살인마라면 무시무시한 분노가 있겠지. 범죄도 엄청났을 거고. 그런데 그 분노를 세포와 분자로 환원시키면 어떻게 될까? 3. 비물리적 법칙물질적인 것은 물리 법칙을 따른다. 그러나 마음은 비물질적 논법에 따라 작동한다. 예를 들어 추이적 논법을 생각해보라: A = B이고 B = C이면 A = C이다. 이 법칙이 물리적인가? 그렇다면, 이것의 화학적 구성은 무엇인가? 도대체 어떤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거 진화 과정 어느 지점에서 추이 법칙, 비모순율 또는 여타 논리적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는 말인가? 4. 의미체계 물리적 세계는 구문 세계이다. 예를 들어, 지금 당신이 화면에서 읽고 있는, 물리적 구문으로 로드된 이 글을 살펴보라. 여기에는 화학적 구성과 더불어 공간적 위치, 그리고 반짝이는 화면에 구불구불한 특정 모양으로 배열된 검은색 픽셀로 가득하다. 그러나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단순한 구문 이상이다. 이 글은 철학자가 “의미체계”(semantics)라고 부르는, 즉 물리적 구문을 통해 전달되지만 환원될 수 없는 의미들로 가득 차 있다.5. 창의성반 고흐의 작품, ‘별이 빛나는 밤’에서 볼 수 있는 어두운 아름다움이든 어린아이가 크레용으로 그린 주황색 태양이든, 의식은 창의력을 드러낸다. 캔버스나 도화지 위의 모든 걸작, 모든 노래, 시, 연극, 춤 또는 저녁 식사까지, 이 모든 것을 단지 움직이는 물질의 기계적인 부산물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예술가가 단지 휘몰아치는 화학 물질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인가?6. 지향성시스티나 성당 천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미켈란젤로의 걸작이 당신의 뇌 속에서 물리적인 통증을 일으키지 않고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 당신은 시스티나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시스티나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의식은 어떤 것에 관한 힘을 가지고 있다. (철학자들은 이것을 “지향성”이라고 부른다.) 구체적인 물질세계의 유전적 돌연변이가 과연 추상적 사고 같은 비물질적인 것을 생산할 수 있을까?7. 주체성물리적 세계는 과학의 객관적인 범주 “그것”(It) 안에서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의식에는 객체성(it-ness)뿐 아니라 결코 환원할 수 없는 나(I-ness), 즉 주체성, 일인칭 관점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날개 달린 생물, 박쥐에 대해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설명하는 과학책이 한 권 있다고 가정해보자. 그렇지만 그 책이 결코 대답할 수 없는 한 가지 질문이 있다면, 과연 무엇일까?토마스 네이글(Thomas Nagel)의 유명한 질문, “박쥐로 산다는 것은 어떤 느낌인가?”에는 결코 답을 주지 못할 것이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면서 어둠 속을 날아가는 느낌은 과연 어떨까? 저녁 식사로 선택된 불쌍한 곤충을 잡으러 전속력으로 급습하는 건 또 어떤 느낌일까? 물리적 세계의 의식 없는 “객체성”에 근거해서 어떻게 ‘주체성’과 ‘주관성’을 탐구할 수 있겠는가? 8. 목적성물리적 세계의 “그것”을 철학자들은 비목적론적(nonteleological)이라고 말한다. 물리적인 것은 근본적인 목적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수은을 담아놓은 비커는 ‘내 목표는 574도에서 끓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그 온도에서 끓을 뿐이다. 그러나 의식은 목적을 가진다. 우리는 목표를 향해 의식적으로 생각하고, 모든 행동에는 이유가 있다. (비록 매우 비합리적인 이유인 경우도 많지만 말이다.) 물리적 세계의 목적 없는 ‘그것’(it-ness)이 과연 의식 세계의 목적성(for-ness)을 생성할 수 있을까?9. 유의미성의식은 실제 의미와 접촉하고 그것을 생각한다. 서로 주고받는 사랑에는 정말 중요한 무언가가 있다. 거기에는 단지 입자나 생존을 위한 생물학적 탐구로 환원될 수 없는 초월적인 가치가 담겨있다. 의식 세계의 유의성의 차원, 즉 우리의 존재 이유(why-ness)가 그냥 있음(mere is-ness)의 물리적 세계에서 어떻게 드러나겠는가? “우주에는 설계도, 목적도, 악도, 선도 없고, 무자비한 무관심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도킨스의 말은 맞을까?믿음은 다윈의 의심을 뛰어넘는다 인간이 단지 물리적인 존재에 불과하다는 말을 믿기 위해서는 엄청난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물질세계의 의식 없는 “그것”이 선택 능력(this-or-that-ness), 도덕적 가치(ought-ness), 논리적 법칙(therefore-ness), 의미체계(what-ness), 지향성(about-ness), 창의성(awe-ness), 주체성(I-ness), 추상성(what-it’s-like-ness), 목적성(for-ness), 유의미성(Why-ness)까지 다 낳았다고 믿어야 하는데, 이거야말로 실로 대단한 믿음이 필요한 것 아닌가? 정작 다윈도 이 문제로 괴로워했던 것 같다.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하등 동물의 마음에서 발전한 인간의 마음이 가지는 확신이라는 게 과연 어떤 가치가 있는지, 믿을 수나 있는 건지에 관한 끔찍한 의심이 항상 일어납니다. 원숭이 마음에 든 확신을 누가 믿겠습니까? 설혹 어떤 확신이 원숭이한테 들었다고 해도 말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본질적인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으로 볼 때, 인간의 기원은 생각 없는 물질이 아니라 생각하는 창조주이다. 그러므로 이성은 신뢰할 수 없는 물리적인 생존 메커니즘으로 무시될 게 아니라, 초월적인 진리의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를 아는 메커니즘으로 존중되어야 한다. 자신이 만든 물질세계와 구분되는 창조주의 타자성 안에, 우리가 사유하는 근거가 있다. 우리의 자유, 도덕성, 논리, 의미, 창의성, 개성, 경험, 목적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더 이상 그렇게 설명해서는 안 된다. 이것들은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할 때 더 깊어지고 더 넓어진다(신 6:4-9).당신의 사고하는 능력은 멍청한 의식 없는 힘의 산물이 아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왔다. 낭비하지 말라.원제: 9 Proofs You’re More Than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창조론
진화론
존재론
지향성
목적론
무신론
물질주의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놀라운 사실들
노예상이 만든 노예들의 영가
by Bruce Hindmarsh
2023-01-04
1773년 1월 1월, 250년 전 새해 첫날, 잉글랜드 소읍 올니(Olney)의 한 교회에서 최초로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불렸다.곧장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점차 이 찬송은 아메리카에서 교파를 넘어 모든 교회로 널리 퍼져나갔다. 이 찬송은 서부 개척자들에게는 부흥 성가가, 흑인 교회에서는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가, 그리고 20세기에는 찬송가의 표준이 되었다. 그다음에는 1947년에는 머헤이리어잭슨(Mahalia Jackson)이, 그리고 1970년에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가 음반으로 내는 등 라디오 시대와 함께 음반 시장으로 확대되었다.그 이래로 이 찬송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고 인지도 높은 찬송이 되었다. 그리고 이 찬송은 널리 퍼져나가기만 한 것이 아니라, 깊숙이 파고들기도 했다. 극심한 불행이 닥쳤을 때 사람들이 찾는 노래가 바로 이것이다. 희망을 잃어버렸을 때, 우리는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부른다.그렇지만, 다들 익숙한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어메이징 그레이스”에 대해서 우리가 잘 모르는 것이 적지 않다.1. 미국 의회 도서관에 ‘어메이징 그레이스’ 컬렉션이 있다.미국 의회 도서관은 3,000편이 넘는 “어메이징 그레이스” 연주곡을 소장하고 있다. 이 소장 곡들은 1930년대부터 2000년 사이에 LP, 카세트테이프, CD 및 기타 형태로 녹음된 것들이다. 이 컬렉션에는 클래식에서 컨트리 음악, 가스펠에서 랩, “월드 뮤직”에 이르기까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장르가 포함되어 있다.2.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한 구절은 사라졌다.‘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오리지널 버전은 여섯 절이 있었지만, 1910년에 에드윈 오셀로 엑셀(Edwin Othello Excell)이라는 진취력 넘치는 찬송가 발행인이 마지막 세 절을 “When we’ve been there ten thousand years(거기서 우리 영원히)로 시작하는 절로 대체했다. 그는 이 절을 70절이 넘는 “예루살렘, 행복한 우리 집”(Jerusalem, Our Happy Home)이라는 찬송가에서 가져왔다. 그는 아무도 이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 하리라 생각했던 것 같다. (또한 예민한 사람들의 눈에는 문법에도 오류가 있다. “We’ve no less days to sing God’s praise”(더 많은 날을 하나님을 찬양하며 노래하리라)에서 “less days”는 “fewer days”가 되어야 한다.)3.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백파이프 연주는 최근에 이루어진 혁신이다.엄숙한 국가 행사나 장례식에서 백파이프 연주곡으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들을 때마다 우리는 자연스레 이것이 오랜 전통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Royal Scots Dragoon Guards(영국육군기병대)가 이 노래를 백파이프 연주곡으로 녹음하여 인기를 얻게 된 것은 1972년이었다. 이 군악대의 “Amazing Grace” 연주곡은 빌보드 탑 40에 8주나 올랐다.4. 원래 제목은 ‘어메이징 그레이스’가 아니었다.첫 제목은 “Faith’s Review and Expectation”(신앙의 회고와 기대)였다. 새해를 맞이하여 지나온 날을 돌아보고(회고) 앞날을 내다보면서(기대) 지은 노랫말이기 때문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가 수많은 위험과 노고와 유혹 가운데 있을 때 우리를 붙잡아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의 눈으로 돌아본다. 또한 우리가 견디며 살아가는 여정에 항상 하나님의 은혜가 있을 것임을 알기에, 용기와 확신으로 앞날을 내다본다.5.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원곡은 미상이다.널리 불리고 있는 현재의 곡은 1829년에 처음 출판된 “뉴브리튼”(New Britain)이라는 곡이다. 그러나 이 가사가 250년 전에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악곡 모음집이 따로 있어서, “Amazing Grace” 같은 “보통 운율”(common meter) 찬송가를 거기에 맞추어 불렀을 것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의 노랫말을 붙여 부른 초기 가락의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곡조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뉴브리튼”은 대중적인 5음 음계(피아노의 검은 건반)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이 폭넓은 호소력을 얻는 데 이바지했다.6.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노예 무역상이었던 사람이 썼음에도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영가가 되었다.“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오랫동안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에서 흑인 복음성가로 애창되고 있으며, 머헤이리어 잭슨, 어리서 프랭클린(Aretha Franklin), 제시 노먼(Jessye Norman), 윈틀리 핍스(Wintley Phipps) 등 많은 사람이 인상 깊고 인기 있는 공연을 펼쳤다. 그러나 그 노랫말을 지은 이는 전직 노예무역선 선장 존 뉴턴이다. 그는 노예무역업에서 떠나 20년이 지난 후, 잉글랜드의 미들랜드에서 성공회 목사로 있을 때 이 노랫말을 지었다. 그는 나중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노예무역을 폐지하는 데 크게 공헌했다. 윈틀리 핍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노래가 이렇게 지어진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흑인이든 백인이든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잊지 않으시길 바라셨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7.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다윗의 시를 의역한 것이다.존 뉴턴은 1773년 새해 첫날 역대상 17:16-17을 본문으로 설교하였는데, 그는 이 설교에 맞춘 시로 “어메이징 그레이스”를 지었다. 그리고 6년 후에 이 성경 구절을 그대로 달아서 이 노래를 발표했다. 이 성경 본문에서 다윗 왕은 다윗의 후손과 그의 왕국을 영원히 이어가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전한 예언자 나단의 예언에 놀라움으로 응답한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기도했다. “주 하나님, 내가 누구이며 내 집안이 무엇이기에, 주님께서 나를 이러한 자리에까지 오르게 해주셨습니까?” 달리 말하면, 다윗은 이렇게 말씀드린 것이다.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다윗은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를 알게 된 살인자요 간음한 자였다. 그러한 다윗에게 하나님께서는 그의 후손을 통해 은혜를 베푸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은혜는 다윗의 위대한 자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마침내 성취될 것이었다.8.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혼의 훈련이다.존 뉴턴이 이 찬송 시를 지었을 때, 이 노래는 그 자신을 꾸준히 점검하는 단련의 한 부분이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지은 죄와 하나님이 베푸신 자비를 되새기기 위해서, 오늘의 죄를 고백하고 용서받기 위해서, 그리고 장차 이루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온전히 드리기 위해서 시간을 따로 떼어 놓고 훈련했다. 그는 1773년 1월 1일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마흔아홉 살이 되었다. 길게 잡아도 몇 년 후에는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갈 것이다. … 당신이 정하신 대로 제가 변화될 그날을 주님의 은혜로 항상 기다릴 수 있게 하소서.” 이러한 점에서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하나님의 은혜가 지금까지 우리를 어떻게 구원해 주셨는지, 또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어떻게 본향으로 인도하실 것인지를 기도하며 묵상하는 영혼의 훈련이었다.뉴턴의 회중이 처음 이 찬송을 부른 지 250년이 지난 오늘에도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우리가 부르고 또 그 노랫말을 되새기면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 나가야 하는 일상의 수련이다.‘어메이징 그레이스’에 관하여 더 많이 알고 싶은 이들에게 곧 나올 Bruce Hindmarsh와 Craig Borlase가 함께 쓴 다음 책을 권합니다: Amazing Grace: The Life of John Newton and the Surprising Story Behind His Song원제: 250 Years Ago Today: John Newton’s ‘Amazing Grace’ First Su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어메이징그레이스
나같은죄인살리신
존뉴턴
회심
죽도록 ‘밈’하기
by Peter Biles
2022-10-10
인스타그램을 별 생각 없이 스크롤하고 ‘반지의 제왕’(The Lord of the Rings, LOTR) 게시물 몇 개에 “좋아요”를 눌러놓고 무슨 일이 생기는지 한번 보라. 이제 내 피드에는 자연스럽게 LOTR 밈(memes)으로 넘칠 것이다. 되돌릴 방법은 없다. “재미있거나 흥미로운 항목(예: 캡션이 있는 사진 또는 비디오) 또는 특히 소셜 미디어를 통해 온라인에 널리 퍼진 장르”라고 밈을 정의할 수 있다. 밈이라는 하위문화는 이상하고 종종 무섭기까지 하다. 단지 만화 캐릭터로 시작했던 눈이 튀어나온 녹색 개구리 페페(Pepe the Frog)는 결국 백인 우월주의의 상징으로 변했다. 그 어떤 사진도 어떻게 편집하는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하나의 원본 이미지 또는 비디오는 얼마든지 수천 개의 메시지를 위한 사료가 될 수 있다.밈 소재는 단지 영화와 쇼에 국한되지 않는다. 구글에 “칼뱅주의 밈”(Calvinism memes) 또는 “침례교 밈”(Baptist memes)라고 쳐보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 수 있을 것이다. 심지어 성경과 예수님조차도 밈을 통해 얼마든지 모자라고 나사 하나가 빠진 존재로 만들 수 있다.대부분 사람에게 밈은 순수하고 재미있다. 그러나 밈을 지나치게 섭취하면 문제가 있다. 개구리 페페와 같이 사악한 예가 명백한 예이다. 그러나 내가 더 관심을 가지는 부분은 밈이 되어버린 삶(meme-ification)에 의해 조금씩 달라지는 미묘한 변화이다. 아이러니와 유머에 너무 중독되어 우리 눈에 세상이 마냥 농담으로밖에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될까? 밈의 제왕LOTR에서 찾는 밈 구절(The LOTR meme-verse)은 한동안 내 일상에서 단골 유머가 되었다. 인스타그램에서 “The Meme Havens”라는 LOTR 밈 계정도 시작했다. 다행히도 내 팔로워는 아직 12명을 넘지 않는다. 그 정도면 문제될 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반지의 제왕을 다시 보니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반지의 제왕 속 모든 장면이 인스타그램 속 밈의 추억을 불러일으켰다. 온라인에서 본 기발한 말을 생각하지 않고서는 채 10분을 보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프로도가 반지 원정대에서 처음 간달프를 보았을 때, 소년 같고 천진난만한 그의 표정을 기억하는가? 그의 표정은 참으로 풍부한 밈의 소재가 되었다. 그 표정과 필적할 만한 것으로는 그리버스 장군을 향해서 오비완케노비(Obi-Wan Kenobi)가 던진 상징적인 인사, “거기, 안녕하신가?” 정도가 될 것이다. 일단 밈의 관점에서 파악하게 되면, 이제는 아무리 같은 장면을 봐도 결코 진지하게 대할 수 없게 된다. LOTR은 놀라운 영화적 성취이다. 반지의 제왕을 보면서 울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나 이제는 경외감, 기쁨과 즐거움이 그만 밈으로 물들고 말았다. 이 걸작 영화가 그만 천 개의 밈이 만들어내는 거대한 하나의 농담이라는, 위기에 봉착했다. 우리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로 밈을 만드는 것은 지금까지 별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밈이라는 아이러니로 덮어버리는 건, 아름다움과 선함이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좋은 영향까지도 약화시킨다. 모든 것을 밈으로 만드는 세상오피스(Office) 및 팍스앤레크리에이션(Parks and Recreation)과 같은 TV 프로그램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시청자는 서로의 관계 때문에 드라마를 시청한다. 짐과 팸. 레슬리와 벤. 앤디와 에이프릴. 마이클과 토비(농담이다). 이런 드라마는 유머와 인간미의 균형을 보여준다. 진지한 관계와 진실한 순간은 시시껄렁한 농담이 침범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드라마 속 인물과 연결한다. “사실 모든 게 항상 농담이야”라는 유머가 재미있을지는 몰라도, 그런 식의 대화는 결코 우리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한다. 내 아버지는 LOTR을 읽는 것을 추운 곳에서 몇 시간을 보낸 후 뜨거운 목욕을 하는 것에 비유하곤 했다. 그건 휴식, 회복, 그리고 치유의 행위이다. 책과 영화에서 내가 느껴온 것이 바로 그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야기와 등장인물이 밈으로 바뀌는 순간, 뜨겁던 물이 미지근해진다. 여러 층의 아이러니는 쾌락보다 아름다움이, 패러디보다 진실이, 그리고 만족보다 선함이 필요하다는 사실마저 잊게 한다. C. S. 루이스는 친구이기도 했던 톨킨의 이 걸작을 놓고 이렇게 말했다. “여기 칼처럼 찌르거나 차가운 쇠처럼 타오르는 아름다움이 있다. 여기 당신의 마음을 부숴버릴 놀라운 책이 있다.”아름다움이 없으면 마음은 굳어진다. 즐거울지는 몰라도, 더 이상 “깨지기 쉬운” 상태는 아니며, 더 이상 톨킨의 날카로운 말에도 녹지 않을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그런 마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빈 웅덩이모든 것의 밈화(meme-ification)의 기저에 있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의 상실이다. 우리는 굳이 더 이상 객관적인 의미가 존재하는지 찾으려고 하지 않을지 모른다. 의미가 부과하는 무게에도, 또 서서히 드러나는 진실의 느린 복잡성에도 시간을 들이지 싶어하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모든 것을 무의미한 오락으로 축소한다. 그것을 성경의 용어로 표현하자면(렘 2:13), 우리는 물을 저장하지 않는 웅덩이를 파고 있으며 또한 내 영혼에 물주기를 거부하고 있다. 영국 철학자 고 로저 스크러튼(Roger Scruton)은 아름다움에 관한 책에서 이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아름다움이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살고 있다. 그렇게 사는 이유는 우리가 희생의 습관을 잃어버렸고 항상 희생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치기 때문이다. 키치와 신성 모독에 빠진 우리 시대의 거짓 예술은 그런 우리의 현실을 드러내는 표시 중 하나이다.”누구나 모든 것을 농담으로 바꾸는 사람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집을 떠난 이후 처음으도 다시 집에 갔을 때 나는 많이 우울한 상태였지만, 가족과 친구들 앞에서 농담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나는 소란스러웠고 또 다른 사람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나는 모든 것이 괜찮다는 식으로 형들과 함께 계속해서 유머를 지껄였다. 그것은 상실감과 부서진 마음 그리고 향수병에 대처하는 나의 방법이었다. 또한 무의미함을 만회하려는 나의 방식이기도 했다. 대학에서 보낸 4년 중 3년 동안 진짜로 웃은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얕은 유머에 빠진 나는 울고, 애도하고, 또 희생해야 할 때를 소홀히 했기 때문이다. 유머가 나 자신과 사물 속 진실 사이를 갈라놓는 완충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경험을 통해 너무도 잘 안다. 그러나 세계 최고의 문학과 예술 작품을 심도 있게 접한 후, 나는 인간이 인간답기 위해서 꼭 필요한 것은 밈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소셜미디어 피드에서 웃을 수 있는 일회용 농담이 아니라, 인생을 걸고 추구할 초월적인 목적(telos)이다. 스크롤할 사진(GIF)과 리트윗할 밈뿐 아니라, 우리에게는 지켜내야 할 곤도르뿐 아니라 싸워야 할 적, 모르도르까지 필요하다. 아이러니가 경외감을 무디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밈을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하는 게 아니다. 제대로만 사용되면, 밈은 최고의 풍자와 진정한 창의성이라는 긍정적인 출구를 제공한다. 내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은 Obi-Wan Memobi라는 스타워즈 밈 계정을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솔직히 말해서, Angry Anakin 밈은 조롱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우리는 밈이 세상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어떻게 바꾸는지, 그래서 하나님의 활기찬 창조 세계와의 만남을 어떻게 둔감하게 만드는지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톨킨처럼 가톨릭 신자였던 체스터턴(G. K. Chesterton)은 “감사는 경이로움 때문에 두 배가 되는 행복”이라고 썼다. 성경을 읽고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우리 안에서 경이로움과 감사가 자라는 것처럼, LOTR을 읽은 후 우리 안에 남아야 하는 것도 경이로움과 감사가 되어야 한다. 지나친 아이러니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드라마 안에서 살고 있다는, 이 삶의 중대함에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다. 풍자는 신성함을 보는 우리의 눈을 멀게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물을 보다 명확하고 덜 냉소적으로 보는 눈을 가질 때, “왕의 귀환” 마지막 장면 속 프로도처럼 우리도 우리를 기다리는 천국의 끝자락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회색 장막이 온통 은빛 유리로 변하더니 뒤로 젖혀졌다. 그는 하얀 해안과 빠른 일출 아래로 멀리 푸른 나라를 보았다.”원제: Meme-ing Ourselves to Dea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반지의제왕
밈
세속문화
온라인문화
의미
미디어
진지함
농담
“절제된” 아름다움인가? 예술-공포증인가?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을 위하여
by 서나영
2022-10-05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미학에 대한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많은 이론과 담론과 논란이 존재한다. 그리고 시대와 출신을 불문하고 미학에 대한 연구자들이 내리는 공통된 결론이 있다. “아름다움은 어렵다는 것”이다. 아름다움의 종류가 많고, 느끼는 통로가 다양하며, 주된 통로인 예술 자체도 정의 내리기가 쉽지 않다. 아름다움이라는 것은, 그것에 대한 생각과 관점이 역사와 문화에 따라 끊임없이 변화하며, 같은 사회라도 개개인의 취향과 맞물려 그 누구도 쉽게 표현하거나 단정 지을 수 없는 개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사는 아름다움의 의미를 찾는 것을 포기한 적이 없다. 아름다움을 의도적으로 멀리했던 시대에도 아름다움을 찾고자 하는 갈급함은 오히려 커져만 갔다. 그것은 아마도 마일즈(Margaret R. Miles)의 경고처럼 “아름다움을 인식하는 것이 바로 인간의 행복을 결정하기 때문에, 무엇이 아름다운가를 잘못 판단하는 것은 인간에게 가장 위험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수많은 철학적 글들을 볼 때마다, 또 예술작품이나 비평을 대할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 “개혁주의 교회와 성도들은 이런 글들을 읽고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적용을 할까?” 또 예술작품을 대하고 대중 문화예술을 접할 때마다 그림자처럼 따라오는 한 생각이 있다. “개신교회와 성도들은 이 작품을 경험할 때 어떤 아름다움을 느꼈고 어떤 결론을 얻었을까?”개혁주의 기독교 세계관으로 미(美)를 연구한다는 것은 단언컨대 그 어렵다는 미학보다 더 답답하고 어려운 일이다. 개신교 신앙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모두가 예술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 사유의 개인차와 미적 취향이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구원론을 믿고 같은 교리 아래 같은 신앙의 문화 속에 걸어간다고 해서 미적 수준이나 기준이 맞추어져야 한다는 법은 없으며, 자본과 연결되어 있는 예술의 필요에 대한 우선순위가 다르다.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이 개혁주의 기독교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에 대한 연구가 높은 수준으로 발전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칸트가 말한 순수이성, 실천이성, 판단력 비판의 구분으로 인한 미의 독립을 인정함과 동시에, 기독교 신학과 세계관 안에 재통합하는 복잡하고 광대한 범위의 작업이 쉽게 이루어질 리 없다.대부분의 한국 개혁주의 신자들은 ‘예술’과 ‘아름다움’의 중요성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실제로 개신교인들의 교회 현장과 삶에서 미적 영역들을 적용해볼 때, 종교개혁 전통 아래 몇 가지 공통된 현상이 나타난다. 그중 하나가 그들이 무의식중에 가지고 있는 “이미지 공포증”(Iconofobia)이다. 종교개혁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결과가 ‘성화상 파괴’였듯이, 그들에게는 “이미지의 사용은 우상숭배로 변질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국 한국의 개신교인들도 교회의 장식과 예술적 장치를 모조리 없앤 칼뱅과 청교도의 후예가 아닌가!이로 인해 흔히 나타나는 현상은 “절제된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이다. 더 솔직히 표현하자면, “예술의 힘을 두려워한다”고 말해도 무방할 듯하다. 개신교 신학과 교리는 말씀 이외에 더 큰 영향을 끼치는 통로에 대해 우호적이지 않으며, 예술의 강력한 영향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는 것에 걱정이 많다. 그리고 개혁신학자들은 말한다. 종교개혁 이후, 네덜란드 중심으로 “예술가들은 일반은총의 개념을 이해하고 종교운동에 동참했으며, 세상 가운데 그들의 소명을 되찾았다”고 말이다. 정형화된 기독교의 이미지와 신비로운 “천상의 예술 언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베푸신 세상과 일터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예술가를 향한 더 넓은 비전과 사역을 제시함을 주장했다. 이것은 신앙생활 가운에 예술의 힘을 견제하면서, 동시에 예술인들의 소명에 대해 지혜로운 대답이고 논리적인 권유였다. 그러나 19세기 이후 예술사조는 급격하고 분명하게 아름다움과는 상관없는 미학으로 흘렀다. 세상의 문화예술을 여과 없이 공유하는 그리스도인들과 예술가들 또한, 같은 양식과 재료와 내용을 가지고 예술을 표현하고 감상하는 세상이 되었다. 예술과 문화의 영향력은 예술적 감각이 있고 사유가 가능한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인식하고 있건 아니건, 사회에 속한 인간이라면 그리스도인-비그리스도인 구분 없이 그 시대 예술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고 있다. 한스 로크마커가 말했듯, 보이지는 않지만 어느 집에나 존재하는 “수도관”처럼, 예술은 어느 인생에게나 “보이지 않는 메시지”를 끊임없이 나른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 교회는 문화와 예술을 세상과 공유한다. 기독교 신자들이 현실과 가상을 넘나드는 추하고 파괴적인 예술, 가짜와 패러디와 대량으로 쏟아내는 대중문화예술에 발맞추어 걷게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한국은 해방 이후 급격한 기독교의 부흥이 일어났고, 양적으로 성장한 교회들은 “자유로운 상상”에 근거하여 성화상의 이미지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예술 양식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세상과 이질감 없는 디자인으로 교회 분위기를 만들기 시작했다. 대중음악 언어로, 대중의 안목과 디자인으로, 모던 스타일의 건축물로,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영상물로 예배와 교회를 채워왔다. 그리고 이러한 개방적 움직임에는 개혁주의 세계관 운동이 배후에 있었다. 프란시스 쉐퍼와 아브라함 카이퍼의 일반은총에 대한 개념과 영역주권에 대한 이해를 넓혀감과 동시에, 리처드 니부어의 다섯 가지 “그리스도와 문화” 관계 모형” 중 “기독교는 세상 문화를 변혁해야 한다”는 사명을 비전으로 채택했다. 일명 이러한 “세계관 운동”으로 신자들은 기독교 세계관의 렌즈로 바라볼 때 예술을 수용할 수 있는 방법들을 배우기 시작했다. 비록 예술이 파괴적이고 추한 모습일지라도, 성도가 순례길의 과정 중 겪는 큰 스토리 안의 성화의 “과정 중”의 추함의 표현이라고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또한 대중의 안목에 맞춰 세련되면서도 기독교적 의미를 담으려는 노력이 일어났고, 순수예술가들은 모던 재료로 하나님의 심정을 표현하려고 애쓰기도 했다. 결과가 어떻든, 현재 개혁주의 교회의 모습은 문화의 기독교적 변혁을 목표로 움직이는 중이고, 그 내용은 대중이 추구하는 미의 기준과 굉장히 많이 닮아있다. 최근 한 기독교 설치미술가와 개신교의 대중적 미적 기준과 취향에 대해 담론을 나눈 적이 있다. 그녀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미적 감각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는 감각에 대해 언급했다. 그리고 교회의 성도들이 경험하는 아름다움의 정도와 기준이 안타깝다고 탄식했다. 나는 그 외로움의 감정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다. 고 이어령 박사가 그렇게 반복해서 강조했듯이, 탁월한 예술가는 특권계층이 아니라 어떤 면에서 특별한 감각적 장애를 가진 불쌍한 사람들이다. 평범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며, 남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초월한 세상을 표현하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인지, 경험해본 사람만 아는 깊은 슬픔일 것이다. 칸트가 말한 숭고미는 “너에게는 아름답지 않지만 나에게는 아름다운” 그런 종류의 미가 아니다. 모두가 인정하는 절대적인 아름다움은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일은 외로운 길이다. 과연 기독교는 문화를, 특히 아름다움에 관계된 예술 문화를 성공적으로 변혁해 나가고 있는가? 혹시 진정한 아름다움은 절제하고, 아름다움의 그림자들로 교회와 삶 속에 채워나가고 있지는 않은가? 진정한 아름다움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현시대를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중요한 과제가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의 문화와 예술을 기독교 세계관으로 변혁하는 일은,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 아름다움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시작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영이 한국 교회에 충만하게 부어지는 역사를 기대하며, 삼위일체 하나님의 아름다움이 교회와 세상에 충만한 날을 그려본다.
아름다움
미학
예술
성화상
대영박물관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을 배우다
by Daniel K. Eng
2022-07-27
2019년, 대영박물관에서 성경 속 사건들과 연관성이 있는 유물들을 볼 수 있는 전시회가 열렸다. 성경이 기록하고 있는 사건들과 관련 있는 물건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흑백 사진처럼 단조롭던 성경 이야기가 총천연색으로 생생하게 다가왔다. 예후 왕을 묘사하고 있는 6피트(1.8m)짜리 검은 오벨리스크와 느헤미야가 다루었을 수도 있는 대형 은그릇 같은 다양한 아이템을 모아놓은 컬렉션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양하고 풍부한 유물과 정보 속에서 특별히 내 눈을 사로잡은 전시물이 있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호화로운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났을 때 얼마나 큰 희생을 치렀는지, 얼마나 큰 믿음이 있어야 그리할 수 있는지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 소형 조각상은 우르(현 이라크)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여러 쌍의 형상 중 하나이다. 학자들은 이 조각상이 제작된 시기를 기원전 2500년, 그러니까 아브라함 시대 이전으로 추정한다. 높이가 18인치(45.72cm)에 불과한 이 조각상은 뒷발로 선 채 작은 나무 꼭대기를 들여다보고 있는 뿔이 있는 염소를 묘사하고 있다. 탁자나 받침대를 지지하는 용도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물품이다. The Ram in the Thicket © The Trustees of the British Museum 고고학자 레너드 울리(Leonard Woolley)는 우르의 원주민이었던 아브라함이 이삭을 희생제물로 바치려 했던 이야기(창 22:1-9)를 바탕으로 이 조각상에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러나 이 뿔 달린 동물이 묘사하고 있는 것이 창세기 22:13에 기술되어 있는 그 족장이나 그 숫양과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는 분명치 않다. 설사 그렇더라도 나는 이 조각상의 복잡한 세부 묘사와 그 재료의 다양성에 매료되었다. 조그마한 받침대에는 자잘한 붉은 석회암과 조개껍데기로 된 모자이크 장식이 있다. 그 동물이 앞발을 올려놓고 있는 관목의 이파리와 염소의 얼굴과 다리는 순금으로 덮여 있다. 염소 몸통을 덮고 있는 털은 나무 뼈대에 조개껍데기를 붙여 표현했고, 귀는 구리 합금으로, 눈과 뿔, 어깨 털은 청금석으로 만들었다. 상상컨대, 훨씬 더 호사스러운 무언가를 받쳐두려고 만들었을 이 작은 조각에 길고 고된 수고의 시간이 들어갔을 것이다. 희귀한 재료와 세심한 요소들은 고대 우르 문명에서 가능했던 풍요와 장인 정신을 보여준다.주께서 짐을 꾸려 떠나라고 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우르에 살았다. 낯선 땅을 향해 출발하면서 그는 익숙한 모든 것을 남겨두었다. 창세기의 설명을 너무 서둘러 읽다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르면서 포기한 것이 무엇인지 대충 넘겨버릴 때가 있다. “너는, 네가 살고 있는 땅과, 네가 난 곳과, 너의 아버지의 집을 떠나서, 내가 보여주는 땅으로 가거라”(창 12:1). ‘수풀에 걸려 있는 숫양’은 이스라엘의 조상이요 우리에게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그저 새집으로 이사한 것이 아니었음을 새삼 생각하게 한다. 그는 크나큰 희생을 치렀다. 아브라함의 본토는 원시적인 촌락이 아니었다. 우르는 숙련된 장인과 선진 시설을 갖추고 있던 빼어난 대도시였다. 아브라함은 선진 문명과 기술, 특권이 넘쳐나던 사회를 남겨두고 떠났다. 미지의 땅으로 떠나는 그의 행동은 정말 어리석어 보였다.히브리서는 아브라함이 우르를 떠나 장막에 살았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이 족장은 자식과 손자에게 준 것이라고는 고작 나그네의 거처뿐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거류민의 삶을 살면서도 아브라함은 그 무엇보다도 안정된 삶을 고대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믿음으로 그는, 약속하신 땅에서 타국에 몸 붙여 사는 나그네처럼 거류하였으며, 같은 약속을 함께 물려받을 이삭과 야곱과 함께 장막에서 살았습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도시를 바랐던 것입니다. 히브리서 11:8-10.우르에는 숙련된 장인들이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더 위대한 설계자요 건축자이신 강력하고 미쁘신 하나님을 바라보았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신뢰했고, 순종으로 그의 믿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눈이 훨씬 더 안전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기에, 아브라함은 우르의 보물들을 포기했다. 그는 호사와 학식보다 더 큰 것을 보았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을 보았다.우리가 교회에서 믿음을 토론할 때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우리의 믿음은 그 대상만큼만 가치가 있다. 우리의 믿음을 부와 기술과 학식과 재능에 두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회의 가치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선택할 때, 우리의 그 결정은 아브라함의 결정처럼 어리석어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약속을 지키셨고, 그것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입증되었다. 우리의 순종하는 믿음 또한 그러할 것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대상은 그의 믿음을 귀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그는 히브리서 11장이 소개하는 성도의 모범에 들어갔다. 이 족장의 믿음이 히브리서 저자가 청중에게 바라는 바로 그 믿음, 곧 하나님의 약속에 굳건히 서고 행동하는 믿음, 이 세상의 덧없는 가치보다 미쁘신 우리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을 귀하게 여기는 지혜로운 믿음이다.원제: What I Learned About Faith at the British Museum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믿음
믿음의조상
아브라함
순종
‘The’ 배트맨과 재부팅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욕망
by Brett Mccracken
2022-04-09
망토를 두른 고담 시 십자군에 관한 매트 리브즈의 새 영화는 제목에 정관사 “the”를 포함하는 대담한 선택을 했다. 이 영화의 더 적절한 제목은 ‘더 배트맨’이 아니라, ‘더’가 빠진 그냥 ‘배트맨’(A Batman)일 것이다. 수익성 있는 프랜차이즈가 계속 쏟아지는 상황에서 이 최신 재부팅은 고작해야 만화 속 주인공의 수많은 반복 중 하나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로버트 패티슨이 배트맨을 연기하는 이번 영화를 ‘더 배트맨’이라고 선언하는 것이 대담한 시도인 이유는 이미 만들어진 다른 배트맨 영화들, 크리스토퍼 놀란이 만든 매우 진지한 다크 나이트 3부작(2005-2012) 외에도 1980년대와 1990년대에 팀 버튼 및 조엘 슈마허가 만든 다소 과장된 버전, 그리고 DC 확장 유니버스 영화(2016-2021)였던 벤 애플렉의 배트맨과 경쟁해서 당당히 최고의 배트맨 영화 자리를 다투겠다는 의도가 다분히 들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대담함이야말로 내가 ‘더 배트맨’을 정말 좋아하는 이유이다. 리브즈는 고담이란 세계를 완전히 새롭게 만들었다. 그 많은 다채로운 캐릭터와 다양한 질감 및 하위 플롯을 재구성함으로써 그는 프랜차이즈 스토리를 리부팅하는 게 왜 여전히 매력적인지, 그 이유를 제대로 보여주었다. 이전 고담 시에 대한 우리의 기억이 아무리 생생하더라도, 자꾸 반복될수록 어느 정도 익숙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차원과 창의력으로 기대를 뒤집는 완벽한 리메이크 작품을 보는 것은 실로 매혹적이다. 주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음. ‘더 배트맨’이 만든 세계 속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세 시간이 그렇게 순식간에 흘러간 적이 없을 정도였다. 나는 감정적 하드 코어이자 감수성 강하고 예민한 내성적 성격(에니어그램 4)의 배트맨, ‘반지의 제왕’ 속 골롬CGI 수트에서 해방된 앤디 세르키스가 연기한 알프레드, 조디악 킬러에서 영감을 받은 정말 무서운 사이코패스인 리들러, 조만간 HBO Max에서 스핀오프 시리즈가 나올 미드 ‘보드워크 엠파이어’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온 지하세계의 갱 두목인 펭귄 외에도 이 영화 속 인물 하나하나에서 놀라운 재미를 느꼈다. 그룹 너바나(Nirvana)와 베토벤의 음악이 둘 다 자연스럽게 느껴지는 이 고담 시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앞으로 나올 속편에서 이 도시 속 캐릭터를 더 풍부하게 발전시킬 태세를 갖추고 있다고도 느꼈다. 이 영화는 외형과 느낌, 얼굴에 이르기까지 배트맨을 새롭게 그려내는 데에 실로 모든 힘을 다 쏟았다. 가히 내가 본 최고의 재부팅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가장 안 좋은 경우에 재부팅된 영화는 친숙한 미학과 플롯을 창의적으로 역류하며 이미 형성된 고객으로부터 돈을 더 뽑아내려는 프랜차이즈 목적에서 만들어진다. 그러나 ‘더 배트맨’과 같이 최선의 경우에는 재부팅은 창조적 비전의 아름다움을 새롭게 그려낸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세계 건설과 갱신이라는 인간의 소명까지도 제대로 포착한다. 제대로 된 재부팅을 통해서 사람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 만들어졌음을 상기할 수 있다. 메타 vs. 미티‘더 배트맨’을 보면서 생각한 또 다른 슈퍼히어로 영화는 작년 12월의 메가 히트인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었다.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영화 팬이 그 영화를 즐겼던 이유 중 하나는 영화 산업이 동일한 프랜차이즈를 지속적으로 재부팅할 때 발생하는 다중 “우주”의 현실에 너무도 장난스럽게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스파이더맨인 톰 홀랜드와 앤드류 가필드, 토비 맥과이어가 팀을 이루어 함께 농담을 하고 악당들과 싸우는 것을 보는 것은 순수하고 완전한 기쁨이었다. 그러나 ‘노 웨이 홈’이 드러내는 어떤 측면이 나와 잘 어울리지 않았는데, 나는 ‘더 배트맨’을 보고 나서야 그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다.“세 명의 스파이더맨”이라는 모티브가 재미있는 만큼, ‘노 웨이 홈’은 생각할 거리가 많은 저 예산 독립 영화 이상의 뭔가를 보여주어야 하는 주류 영화에게 큰(meta) 반성거리를 던진다. 스파이더맨을 연기한 이전 배우들에게 의존하는 주류 영화다움의 특징이 주는 효과는 사실상 관객을 영화의 더 깊은 세계 속으로 빠지게 하기보다는 영화 밖으로 끌어내는 느낌이었다. ‘노 웨이 홈’의 세계에서 나는 도무지 ‘더 배트맨’의 세계에서 느낀 그 어떤 몰입감과 실체감을 찾을 수 없었다. 확실히 리브즈의 영화는 나름의 방식으로(주로 느와르, 갱스터 영화, 데이비드 핀처 스타일) 영화적 분위기를 풍기지만, 여전히 독립 영화가 추구하는 진지한 전념의 느낌을 주면서 영화를 위해 건설된 매우 구체적인 장소에서 충실하게 만들어졌다. 리메이크나 리부트라는 영화 세계의 구축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그렇게 창조된 세계가 그 자체로서의 독특함을 담보한다는 신뢰를 줄 때이다. 그러나 리부트 영화가 다른 영화적 세계에 대한 이런 저런 짜집기(metareferences)로 파열될 때, 리부트를 통한 새로운 세계 구축은 단지 허구적 기교를 강조함으로써 창조 행위를 값싸게 만들 뿐이다. 드니 빌뇌브가 만든 영화 ‘듄’(2021)에 폴 아트레이드를 연기한 티모시 샬라메(Timothee Chalamet)가 데이비드 린치의 1984년 버전 듄에서 아트레이드를 연기한 카일 맥라클란을 만나 팀을 이루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상상해 보라. 만약에 그런 장면이 들어있었다면, 최근 몇 년 동안 만들어진 영화 중 가장 놀랍고 몰입도 높은 세계관 중 하나가 바로 망작의 반열에 올랐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맥베스의 비극’(2021)에서 셰익스피어에 대한 조엘 코엔의 완전히 독특한 버전인 덴젤 워싱턴 판 맥베스 속에 과거에 나온 다른 맥베스, 예를 들어 멜 깁슨, 마이클 패스밴더 또는 오손 웰즈 같은 유령이 나오는 꿈의 시퀀스가 포함되어 있다면, 과연 어떨까? 영화 전체가 망가질 것이다. 아무리 소재가 같아도 우리는 각색된 내러티브의 예술성이 신선하고 놀랍기를 갈망한다. 누구나 오래된 이야기를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새로운 설정은 아무도 모른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성경 시편을 소재로 한 훌륭한 음악적 표지와 신선한 음악적 설정을 좋아한다. 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다음 제임스 본드가 누구인지, 그리고 007의 최신 영화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 알고 싶어 한다. 셰익스피어의 새로운 연극 각색이나 오스틴의 영화 각색이 결코 늙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양한 시간과 장소에서 이야기꾼에 의해 다시 이야기되고, 재창조되고, 재해석되는 훌륭한 이야기와 등장인물에 끌린다. 가상의 인물이 등장하는 한, ‘더’ 007, ‘더’ 레이디 맥베스, 또는 ‘더’ 엘리자베스 베넷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오로지 한 명뿐인 ‘더’ 배트맨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새로운 버전이 나올 때마다 관객은 이것이 최고의 주인공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아마도 그것이 ‘더 배트맨’ 속에 담긴 ‘더’라는 정관사의 대담한 시도에도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는 이유일 것이다. 즉, 이전보다 더 나은 새로운 창조물에 대한 우리의 본능적인 갈망이 반영된 셈이다. 어떤 귀중한 작품의 새로운 각색을 보기 위해 극장에 앉아 있는 스릴은 아마도 우리가 언젠가 경험할 새롭고 궁극적이며 최고의 창조물에 대한 우리의 갈망을 반영하거나, 심지어 우리 자신 안에서 새로운 창조물을 보고 싶어 하는 열망의 반영일 수도 있다(고후 5:17). 질서 창조를 통해 창조주를 형상화하려는 우리에게 내재된 소명(창 1:26-28)에는 더 나은 상황을 만들려는 직관적 열망이 내포되어 있다. 혼돈이 점차 질서를 잡아가고, 문제가 해결되며, 슬픈 일이 현실이 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누구나 가지는 갈망이다. 그러나 우리가 에덴동산 이후 타락한 인류 역사를 통해 너무나 잘 알고 있듯이, 갱신의 역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이 아니라 자기를 섬기는 방식으로 세상을 만들고 질서를 세우려는 인간의 경향에 의해 추악하게 타협되었다. ‘갱신’이라는 경쟁적 비전아마도 배트맨의 중심 테마는 부서지고 부패한 세상에서 새롭게 시도되는 갱신의 방식일 것이다. 패티슨의 배트맨/브루스 웨인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을 나타내고, 폴 다노의 에드워드 내쉬톤/리들러는 또 다른 쪽의 끝을 나타낸다. 둘 다 고통과 정의(justice)에 의해 동기가 부여된 고아이며, 둘 다 더 나은 방식의 복수를 주장한다. 영화의 여러 지점에서 배트맨은 아예 “복수”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그러나 리들러의 부하 중 한 명이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나는 복수다”라고 말한다. 배트맨의 접근 방식은 고담에서 범죄와 부패를 제거하는 데 있어 당국(주로 제프리 라이트가 연기한 제임스 고든 역할을 통해서)을 지원하여 취약한 사람들을 대신하여 악과 싸우는 데 분노를 쏟아 붓는 것이다. 리들러 또한 악과 싸우고 고담의 부패를 제거하기를 원하지만, 그는 폭력적이고 “모든 것을 불태우는” (또는 “모든 것을 쓸어버리는”) 방식을 추구함으로 도덕적 순수성을 추구하면서도 그 과정에서 사실상 도덕적으로 타협된 악당이 된다. 이러한 양극단 사이 어딘가에 조이 크래비츠가 연기한 셀리나 카일이 있다. 이 영화에서 세 번째 중심이 되는 이 고아가 추구하는 복수는 타인 중심의 배트맨과 자기 연민에 불타는 리들러 사이에서 갈등하는 개인적인 탐구의 성격이 짙다.개인적인 트라우마와 희생이 갱신을 향한 우리의 비전을 어떻게 형성할까?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우리의 도덕적 비전에서 불만은 과연 어떤 역할을 하는가? 이것은 대부분의 만화책 영화나 서사에서와 마찬가지로 배트맨이 묻는 핵심 질문이다. 모두가 다 망가졌지만 영웅과 악당을 구별 짓는 것은 개인적인 상처가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길에서 창조로 이어지는가 아니면 파괴로 이어지는가의 여부이다. 매트 리브즈의 ‘더 배트맨’은 리부트 영화가 일반적으로 형식에서 암시적으로 보여주는 것을 플롯을 통해 명시적으로 탐구한다. “리뉴얼”의 모든 작업은 특정 사람의 성격과 창의적인 비전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따라서 타락한 인간의 갱신 프로젝트에는 항상 광채와 부서짐, 명료함과 혼란이 어지럽게 뒤섞인다. 불가피하게 불완전하고 또한 다소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새롭게 나오는 배트맨의 세계가 아무리 훌륭하다 해도, 언젠가 만날 최종 걸작 버전을 향한 우리의 호기심과 희망을 만족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모든 재부팅 및 재출시(재건된 교회든 전쟁 후 재건된 국가 이든)가 “더 나은” 희망을 위한 단기적인 원천이 될 수는 있어도, 필연적으로 바라는 “최고”에 대한 우리의 갈망에 부응할 수는 없다. 오직 하나님이 행하시는 마지막 갱신만이 모든 갈망을 만족시킬 것이다. 모든 눈물이 사라지고,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갈 것이다”(계 21:4). 그때까지 우리가 사는 세계는 ‘더 배트맨’의 끝 장면에 나오는 침수되어 폐허가 된 고담과도 같다. 갱신은 그 자체로 큰 잠재력을 지닌, 여전히 진행 중인 프로젝트이지만 항상 서로 다른 주장을 하는 여러 주장이 다투는 전쟁터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은혜로 결국은 사라질 왕국(a kingdom)을 차례차례 제거하시고, 유일하고 영원한 왕국을 통해서 “진짜 평화”(the peace)를 이루실 것이다. 원제: ‘The’ Batman and Our Desire for Rebooted World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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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건강하게 하는 미디어를 선택하라
by Brett McCracken
2022-04-08
오늘날 나이와 관계없이 모든 종류의 제자도에서 당신이 바로 깨달을 수 있는 사실 중 하나는 “교회라는 터치포인트”(church touchpoints)가 영성 형성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작다는 점이다. 일요일 아침, 주중 모임, 소그룹―이것들은 필수적이며 필수불가결하다. 그러나 그 모든 시간을 다 합쳐도 그리스도인의 일주일 중 서너 시간에 해당할 뿐이다. 한편, 젊은 그리스도인은 일주일에 평균 40-50시간 이상을 각종 스크린 및 소셜미디어를 보며 보낸다. 그들은 거의 끊임없이 틱톡을 한다. 그리고 젊은 그리스도인을 만들어 가는 건 교회가 아니라 사실상 바로 그런 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 부모, 목사, 청년 사역자가 학생들의 삶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이 영역에 관여해야 하는 중요한 이유이다. 젊은 그리스도인은 어디에서 주로 시간을 보낼까? 주로 무엇을 보고, 듣고, 또 읽고 있을까? 그들은 거기에 시간을 쏟기로 결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스도인 젊은이라면 성경적 지혜를 바탕으로 어떤 매체가 그들의 영혼에 영양을 공급할 것인지 아니면 독이 될 것인지를 평가하기 위해 나름의 기준을 가지고 있을까? 당신이 부모, 목사, 청소년 지도자 또는 멘토라면 미디어와 관련해서 다음 다섯 가지를 놓고 젊은이와 진지하게 토론하라. 1. 당신은 극단으로 오가고 있는가?많은 그리스도인 젊은이가 “진자 과제”(pendulum problem)[1]에 취약하다. 어쩌면 그들은 자라는 동안 적합한 미디어가 무엇인지에 관해서 어느 정도 보호받거나 또는 제한받으면서 자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은 이런 식의 제한에 반감을 가지고 있다. 종종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당연한 조심”을 율법주의나 단순한 잔소리라고 여긴다. 아마도 그들은 대학에서 복잡하고 거친 세상이 주는 경이로움으로 인해 “눈이 밝아졌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그저 친구들과 어울리는 게 중요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표면 아래에 숨은 의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는 젊은이라면 반대편 극단으로 휩쓸리는 건 시간문제다. [1] 진자 과제: 피아제가 개발한 인지발달 측정 방법. 추의 운동을 결정하는 변수들(줄의 길이, 추의 무게, 높이, 힘의 양)을 얼마나 체계적이고 종합적으로 고려하는지를 관찰하여 인지발달 단계를 측정한다. 나는 이러한 경로를 잘 알고 있다. 나도 한때 그랬기 때문이다. 내가 받은 복음주의 양육은 감사하게도 지나치게 간섭하거나 율법주의적이지 않았지만, 이십대에 나는 지금은 본 것을 후회하는 수많은 R등급 영화를 포함하여 다양한 미디어를 접하고 즐겼다. 그러니까 나의 진자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너무나 극단적으로 움직였다. 한 때는 지나치게 조심했고, 어느 순간에는 아예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무비판적인 반대 방향으로 말이다. 하지만 삼십대 후반이 된 지금 나는 이러한 양극단의 중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전히 글을 쓸 때 다양한 영화와 TV 프로그램을 사용하지만, 무엇을 볼 것인지, 무엇을 추천할 것인지에 더 신중을 기한다. 이것이 내 책 ‘회색지대가 중요하다’(Gray Matters)의 핵심이다. 나는 율법주의와 자유의 경계를 넘나드는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한다.그리스도인 젊은이의 삶에서 극단으로 향하는 진자 문제가 발생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라. 그건 정상이다. 사실 그 문제는 모든 세대에서 발생한다. 때때로 하나님의 은혜로 스스로 문제를 깨닫는 젊은이도 나오기 마련이다. 자신이 너무 지나쳤고, 그게 좋지 않았다고, 또 부모가 대중매체에 대해 좀 더 조심했더라면 하고 자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때때로 이러한 깨달음으로 가기 위해서는 더 면밀한 조사가 필요할 때도 있다. 바로 다음 질문이 그런 조사를 하기 위한 방법이다. 2. 영적으로 건강한 미디어 식단인가? 나는 미디어 습관이 알게 모르게 영혼을 어떻게 형성하는지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더 깊은 성찰을 하도록 돕기 위해 최근에 ‘지혜 피라미드’(The Wisdom Pyramid)를 썼다. 우리 몸에 들어오는 것 곧 음식이 몸을 건강하게 또는 아프게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 영혼에 들어오는 것(사상, 이미지, 목소리, 논쟁)도 우리를 영적으로 건강하고 현명하게 만들기도 하고 반대로 병들고 어리석게 만들기도 한다. ‘지혜 피라미드’의 전제는 미디어 식단이 나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내가 보는 영화, 팟캐스트, 음악, 책을 비롯해서 기본적으로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고 시간을 많이 보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고 또한 사랑이 무엇인지에 관한 사고까지도 형성한다.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들은 우리의 사랑마저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향으로 이끌어 갈 것이다. 따라서 학생들에게 그들의 “영혼을 공급하는” 미디어 및 엔터테인먼트 식단을 살펴보라고 요청하라. 학생의 영적 건강에 변화가 생겼거나, 또는 탈기독교의 시작이 되는 “해체” 방향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면, 그가 섭취하는 영적 음식에 뭔가 변화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그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3. 미디어에 지나치게 많은 시간을 쓰는가? 나쁜 미디어 습관으로 인해 영적 건강에 심각한 해가 미치는 게 분명하다면, 그때 던져야 할 중요한 질문은 바로 미디어 섭취의 양에 관한 것이다. 이것은 섭취 내용과는 관계없는 독립된 질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오늘날 우리 대부분은 미디어 폭식가이다. 그게 바로 알고리즘이 원하는 것이다. 넷플릭스 시리즈에서 한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바로 “다음 회 보기” 버튼이 뜨고, 자연스럽게 이어서 보게 된다. 우리가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는다면 스마트폰 시대의 자연스러운 삶의 리듬은 끊임없이 미디어에서 미디어로 연결된다. 어디 가서 줄을 섰을 때, 또는 신호등 앞에서 멈춘 옆 차의 운전자를 바라보라. 잠시라도 틈이 생기는 순간 우리 손은 바로 스마트폰을 집어 스크롤을 시작한다. 우리는 거의 그렇게 습관이 들어 있다. 그 결과는? 우리 삶의 모든 마지막 흔적이 디지털 콘텐츠에 지배당하고 있다. 이건 영혼에 결코 좋은 게 아니다. 삶의 모든 영역이 다 디지털 콘텐츠로 가득 차 있을 때, 영혼에 좋은 영양가 있는 것으로 전환할 공간의 여지가 우리에게는 거의 없다. 우리가 폭식하는 모든 게 다 정크 푸드일 뿐이다. 중국에서 개발한 인공지능이 제공하는 틱톡 사탕이다. 마크 저커버그의 급여에 관해 행동심리학자가 우리의 취향에 맞게 만든 달콤한 인스타그램 사탕이다. 우리 삶에는 더 이상 생각하고, 연결하고, 종합하고, 분별하고, 고려하고, 또한 평가할 공간이 없다. 우리는 그저 소비할 뿐이다. 끊임없이 지배하려는 미디어에 저항하도록 학생들과 자신에게 도전하라. 처음에는 작게 시작하라. 5분 동안 버스 정류장에 혼자 앉아 있을 때, 휴대폰을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다음 조금 더 더 크게 가라. 스마트폰으로 뭔가를 하는 대신에 책을 읽거나 자연 속에서 조용히 앉아 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가? 두 시간은? 고요함과 쉼, 명상과 기도를 위한 공간을 회복해야 한다. 이건 절실한 문제다. 스마트폰을 내려놓는 능력은 이제 새로운 영적 훈련에 필수적인 항목이 되었다. 4. 미디어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가? 방해받지 않는 침묵을 그토록 어렵게 만드는 오락과 미디어의 과잉을 고려할 때, 그리스도인으로서 내려야 할 최선의 결정이 무엇일까? 쇼나 영화를 한 편으로 제한하기로 한다면(내가 보기에 이건 아주 현명한 결정이다), 이런 결정에 영향을 끼쳐야 하는 고려 사항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내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성경적으로 이 질문을 고찰하는 것이다. 가장 좋은 방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가장 중요한 두 가지 계명을 고려하는 것이다(마 22:35-40, 막 12:28-31, 눅 10:25-28).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나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데 무려 수년을 보냈고, 여전히 이런 단순한 생각을 계속해서 되새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대부분의 선택은 가장 큰 이 계명을 통해 걸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돕는가 아니면 방해하는가? 우리가 하나님을 더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되는 미디어나 오락은 어떤 것인가? 나는 내 삶에서 셀 수 없이 많은 예를 들 수 있다. 전혀 지루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영화나 콘서트, 심지어 스포츠 경기를 보면서 소름이 돋는 순간을 경험할 것이다. 내게는 풋볼 팀 캔자스시티 치프스와 농구 팀 캔자스 제이호크스가 그런 경험을 주는 팀이다. 세속적인 사람의 경우 이런 막연한 영적 경험은 그 자체로 끝난다. 순간적인 쾌락은 우리의 감정과 영혼을 뒤흔들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몸에 돋는 소름은 이 세상이 무작위적이고 무의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것은 창조주께서 질서 있게 이루신 창조의 결과이다(시 24:1). 세상의 아름답고 의미 있는 모든 것이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하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이끈다. 이야기와 아름다움이 다름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비롯한다는 사실을 학생들에게 상기시키라. 하나님은 성경의 2,000쪽 분량을 단지 요점 정리가 아니라 아름다움과 이야기, 즉 영웅과 악당, 긴장과 결의, 시와 비유, 그리고 은유와 노래로 채우기로 결정하셨다. 그리고 바로 그런 성경을 통해 당신을 계시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그분은 우리를 막대기에 꽂힌 두뇌가 아니라 감각과 감정을 지닌 온전한 육체를 가진 피조물로 만드셨다.바로 이런 점 때문에 예술과 아름다움과 오락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사랑하도록 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5. 미디어가 이웃을 더 사랑하도록 돕는가?“이웃 사랑”이라는 고려가 오락 선택에 영향을 미치는 방식 속에는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하나는 단순히 엔터테인먼트의 내용을 보는 것이다. 화면 속 인물들이 인간답고 존귀하게 대우받는가? 아니면 단지 내 쾌락을 위해 착취당하고 모욕당하는가? 내가 보고 있는 영화나 쇼는 진실에 가까운 방식으로 인간 존재가 가진 많은 질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가? 또는 왜곡된 방식으로 인간 존재를 단순하고 하찮게 표현하는가? 틱톡 스타든 뮤직비디오 댄서든, 그들을 향한 나의 공감과 사랑이 자라고 있는가, 아니면 그들을 단지 소비를 위한 산물로 보고 있는가? 인간을 존엄하게 만드는 미디어를 선택하라. 또한 당신으로 하여금 사람들이 진정한 투쟁, 진정한 재능, 그리고 진정한 삶을 가진 소중한 하나님 형상을 담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감사하고 이해하고 더불어 사랑하도록 돕는 미디어를 선택하라. 공동체 양육을 염두에 두고 미디어 선택을 하는 데에 “이웃 사랑”은 핵심 사항이 되어야 한다. 단지 나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는 영향 때문에 어떤 특정 프로를 시청하지 않기로 결정할 수 있다(고전 8장 참조). 긍정적으로, 우리는 엔터테인먼트를 사유화된 “단지 나의 즐거움과 나 혼자 쓰는 기계”라는 수준을 뛰어넘어 공동체가 함께 경험하는 대상으로 볼 수 있다. 친구와 함께 콘서트에 가라. 영화 토론 동아리를 시작하라. 나라는 개인만 중시하는 이기적인 세상에 저항하라. 세상의 아름다움을 이웃과 함께 즐기라. 마지막으로, “이웃 사랑”은 우리의 오락 습관을 선교의 렌즈로 바라보도록 자극한다. 우리의 선택이 전도를 위태롭게 하고 “구별된” 사람들로서 우리의 신뢰를 손상시키는가? 어떻게 해야 오락을 전도의 기회로 활용할 수 있을까? 대중문화에 대한 사려 깊고 비판적인 그리스도인 관찰자라는 위치가 주는 한 가지 가치는 세속 시대의 질문, 갈망, 혼란, 우상에 대해 많이 배운다는 사실이다. 그런 배움을 통해 믿지 않는 이웃과 유익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된다.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 애초에 무시했을 영적인 질문을 그들이 던지도록 도울 수 있다. 즉시 교회에 나가지는 않을 사람이라도 테런스 맬릭(Terrence Malick)의 영화를 보거나 당신과 함께 반지의 제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 이런 기회를 통해 결코 불가능했을지도 모를 신학적 대화를 이웃과 나눌 수 있게 될 것이다. 원제: 5 Questions for Young Christians About Their Media Choic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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