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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적 창조의 관점‘들’ (1)
PCA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
by 이윤석
2023-05-06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창조에 대한 팀 켈러의 관점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자료 중 하나가 미국장로교회(PCA) 교단의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이다. 팀 켈러가 사역했던 리디머교회도 이 PCA 교단 소속이다.PCA 교단은 점증하는 다윈주의 진화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하고자 창조연구위원회(Creation Study Committee)란 명칭을 부여한 특별 위원회를 1998년에 구성했다. 이 위원회는 2년간 연구를 진행했고 2000년 제28차 PCA 교단 총회에 그 결과를 보고했으며, 총회는 이 보고서를 인준했다. 이 창조연구위원회 보고서(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1]는 창조에 대한 여러 관점을 많은 인력을 투입하여 연구하고 정리하여 교단 차원의 입장으로 정리한 최초의 사례이다. 이 PCA 보고서는 창조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상당히 철저하게 검토했으며,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작업이 진행되었으므로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개혁주의 신학 또는 보수적인 복음주의 신학을 지향하는 교단이 참조할 수 있는 매우 좋은 지침이 된다. 특히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를 따르는 교단과 교회에 유용할 것이다.먼저 PCA 창조연구위원회는 어떤 신학적 입장에서 이 작업을 할 것인지 합의하였는데, 다음과 같다.1. 우리는 성경, 그리고 창세기 1-3장이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는다. 2. 우리는 창세기 1-3장이 모세의 일관성 있는 진술임을 확언한다. 3. 우리는 신화가 아니라 역사가 이 장들을 나타내는 타당한 범주라고 믿으며, 더 나아가 그 역사도 참이라고 믿는다. 4. 이 장들에서 우리는 무로부터의 하나님의 천지창조 기록, 그리고 모든 인류의 부모이자 실제 인간 존재인 아담과 하와의 특별한 창조(따라서 그들은 낮은 형태의 생명체로부터의 진화의 산물이 아니다)를 발견한다. 5. 우리는 또한 이 장들에서 모든 인류를 죄와 비참의 상태로 만든 역사적 타락에 대한 진술, 그리고 구속자에 대한 하나님의 확실한 약속을 발견한다. 6. 성경은 창조주이자 모든 존재의 통치자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역사적 과학적 연구로 탐구되는 주제들에 대하여 권위 있게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옳다. 7. 우리는 또 비-지구중심 천문학(non-geocentric astronomy)을 수용하는 것이 성경적 권위에 대한 완전한 복종과 모순되지 않는다고 믿는다. 8. 우리는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참된 기독교 신앙과 조화되지 않음을 인정하며, 기꺼이 성경적 초자연주의 입장에 선다.[2]팀 켈러를 비판하는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이겠지만, 이 위원회가 작성한 PCA 보고서는 젊은지구론만을 타당한 창조의 관점으로 제한하지 않는다.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은 젊은지구론이 아니면 무엇이든 유신진화론인 것처럼 싸잡아 비판하는 경향이 있다. PCA 보고서는 ‘창조에 대한 네 가지 관점’을 허용할 수 있는 대표적인 관점으로 인정한다. 그 네 가지 관점은 다음과 같다.첫째, 역일 해석(the calendar-day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의 하루를 24시간으로만 보는 관점이다. 창세기 1장을 역사적 내러티브로 보며 문자적 해석만을 주장하고 역사성을 인정하는 관점이다. 이 역일 해석 관점은 부인할 수 없는 다수 견해이다. 그래서 PCA 창조연구위원회도 이 관점을 첫 번째로 언급한다. 그러나 이 역일 해석 관점의 설명에 약점이 없는 것이 아니다. 둘째, 날-시대 해석(the day-age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이 24시간 하루가 아닌 아주 긴 기간 또는 시대일 수 있다고 보는 관점이다. 그리고 각 시대는 대체로 순차적이긴 하지만 중첩되거나 포함될 수도 있다고 본다. 이 관점도 창세기 1장의 역사성은 인정한다. 날-시대 해석 관점은 역일 해석 관점이 설명하지 못하는 부분, 특히 현대 과학이 밝혀낸 사항들을 좀 더 잘 설명하는 장점이 있다. 물론 여러 가지 약점도 있다.셋째, 틀 해석(the framework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을 은유로 이해하며, 창조의 날들이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주제별로 배열된 것으로 보는 관점이다.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을 일반적인 날들이라 여기지만 24시간 하루의 특정한 기간으로 보지 않으며 비유적으로 해석한다. 그러나 기원에 대한 진화론적 설명은 일체 반대한다. 틀 해석 관점은 역일 해석 관점이나 날-시대 해석 관점과 달리 창조의 날의 길이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창의적인 해석이다. 물론 이 관점도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넷째, 유비적 날들 해석(the analogical days interpretation) 관점은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이 인간 관점에서의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관점에서의 하나님의 창조 사역의 날들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인간 기준에서의 날이 아니라 하나님 기준의 날이기 때문에 날의 길이도 24시간에 제한되지 않는 것으로 여기고, 또 초자연적이면서도 역사적이고 연속적인 것으로 여긴다. 유비적 날들 해석 관점은 젊은지구론이나 오래된지구론과는 양립할 수 있지만 유신진화론과는 양립할 수 없다. 물론 이 관점도 여러 가지 약점을 갖고 있다. PCA 창조연구위원회는 위 네 가지 관점을 교단 차원에서 수용할 수 있는 관점이라고 판단하고 총회에 보고하였다. 위원회가 이 보고서를 총회에 제출하면서 제시한 핵심적인 권고 사항은 다음과 같다. “개혁신학 안에는 신학자들 간에 역사적으로 창조의 날들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었고, PCA 교단의 시작부터 다양성을 허용해 왔으므로, 총회는 어떤 관점이 이 보고서에서 다루어진 내용대로 창조에 대한 설명이 충분한 역사성을 받아들이는 한 수용 가능한 관점이라고 확언한다.”[3] 위원회의 이런 권고는 우리도 귀담아들어야 한다.우리는 PCA 교단 소속인 팀 켈러가 일부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보다는 훨씬 유연한 관점을 가질 수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은 도무지 이해하지도 못하겠지만, 세상의 기원에 대한 성경적 해석이 젊은지구론‘만’ 가능한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주1. PCA, 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 2302.2. PCA, Report of the Creation Study Committee, 2364.
창조과학
창조연구위원회보고서
날시대해석
역일해석
유비적날들해석
틀해석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오래된지구론
팀 켈러에 대한 ‘허수아비 공격’을 우려한다
by 이윤석
2023-04-12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팀 켈러 목사는 교회 안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교회가 속해 있는 세상 안에서의 삶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통찰을 우리에게 주고 있다. 다양한 영역의 세상 사조를 심도 있게 분석하여 그에 대해 기독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 것인지를, 팀 켈러는 탁월한 방식으로 설명해 준다.팀 켈러 목사의 사역과 저작들을 좋아하는 여러 동료 목회자들과 ‘팀 켈러 천천히 읽기 모임’을 수년간 해 오면서 필자는 팀 켈러의 주요 저작 대부분을 깊이 있게 읽고 연구할 기회를 가졌다. 팀 켈러는 통상적인 복음의 내용, 교리, 목양, 목회 등에 대한 것뿐 아니라 도시 연구, 교회 개척, 세상 속에서의 그리스도인의 삶, 선교적 교회,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변증, 일과 영성, 정의의 문제, 결혼, 고통 등 여러 가지 주제에 대해 다루며 그리스도인들이 교회 안에서의 삶에만 머물지 않고 세상 속에서 세상을 변혁하는 삶을 살도록 인도한다.그런데 최근 몇몇 비판가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몰아가고 있다. 일단 젊은지구론자들 가운데 일부 몇몇 편협한 논자들이 딱지를 붙이고 나니 많은 사람이 각종 SNS를 통해 “팀 켈러=유신진화론자”라는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있다. 그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몰아붙이는 비판의 근거 자료로 삼는 것은 다음 두 가지 글이다.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제6장 과학과 기독교-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 아닌가”와 바이오로고스 웹사이트에 올려져 있는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창조, 진화, 그리고 평신도 그리스도인)이란 글 하나 정도가 이에 해당한다. 팀 켈러의 수많은 글 중에 이처럼 창조론에 대한 내용을 다룬 것은 매우 제한적이다. 팀 켈러는 창조론 전문 연구자가 아니다. 팀 켈러는 무엇보다 평생을 교회를 개척하여 목회에 전념해 온 목회자다. 위 두 가지 짧은 글 외에 세상의 기원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다룬 글도 찾아보기 어렵다. 창조에 대한 무슨 특정한 관점을 주장한 글 자체를 찾기도 쉽지 않다. 그러므로 팀 켈러가 세상의 기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지 분석하는 것은 사실상 어렵다. 따라서 정직한 학자라면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지 아닌지를 위 두 가지 글을 가지고서는 판단할 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위 두 가지 중 첫 번째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글은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볼 때 별로 흠잡을 부분이 없다. 두 번째 글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 역시 개혁주의 신학의 관점에서 세상의 기원 문제에 대해 과학적 접근을 하려는 평신도 그리스도인들에게 ‘창조’와 ‘진화’ 주제에 대해 넘지 말아야 할 경계선을 제시해주는 역할에 충실하다. 이 글에서 팀 켈러는 창조과학 진영이 주장하는 ‘젊은지구론’이나 바이오로고스 진영이 주장하는 ‘유신진화론’ 중 어느 하나를 주장하거나 지지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팀 켈러의 위 두 가지 글을 자료로 하여 그를 유신진화론 지지자로 규정하는 것은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하기’ 오류다.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 지지자라 비판하는 몇몇 사람은 대개 창조과학 골수 추종자들이다. 창조과학 진영이 펼치는 반진화론 운동은 나름대로 좋은 면이 있다. 그러나 어떤 지점에 이르면 합리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독단적 사고에 빠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은 팀 켈러의 글을 왜곡해서 이해하고 정당하지 않은 비판을 제기한다. 예를 들어 팀 켈러, 하나님을 말하다의 제6장의 부제(번역본 상)는 “과학이 기독교 신앙이 틀렸음을 증명해 낸 것 아닌가”(Science Has Disproved Christianity)인데 어떤 비판자는 이것을 마치 팀 켈러의 주장인 것처럼 말한다. 그렇지 않다. 팀 켈러는 이 부제를 세상 사조의 특징으로 적어놓은 것이고 제6장에서 이 부제에 대한 반론을 펼친다.또 팀 켈러가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에서 주장하고 있는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첫 번째는, 창세기 1-2장 본문의 해석은 젊은지구론자들이 강조하듯이 문자적으로만 해야 한다고 볼 수는 없으나 본문 기록의 역사성을 부인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젊은지구론자들이 강조하는 ‘문자적’ 해석은 성경 해석의 주요한 원리인 문예적, 문법적 해석의 원리 중에서 특수한 한 형태로 그것만 고집하는 것은 전혀 바람직하지 않다.두 번째는, 진화론을 지지하는 학자들까지도 포함해서, 과학자들의 과학적 작업 노력은 존중해야 하나 과학적 이론이나 설명 체계를 세상 모든 것을 설명하는 철학적 체계로 확장해서는 안 되며, 특히 진화론을 그런 방식으로 확장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에서 팀 켈러는 과학자들의 과학 활동을 격려하면서도 선을 넘지 말라고 충고하고 있다. 세 번째는, 진화를 받아들이면서 아담의 역사적 타락을 설명하는 것이 어느 정도 가능한 면도 있지만 그런 설명을 절대화해서는 안 되며, ‘탐색적 제안’, ‘잠정적 의견’ 정도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불변의 교리가 아니라 잠정적 작업가설 정도의 권위만 부여하라는 것이다. 이런 설명의 사례로 데렉 키드너(Derek Kidner)의 모형을 소개하는데, 이 내용은 키드너의 의견에 대한 소개일 뿐 팀 켈러가 이 내용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이걸 보고 팀 켈러가 유신진화론을 주장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은 곤란하다.팀 켈러는 이런 식으로 바이오로고스 진영의 활동에 어느 정도 유용한 경계를 설정해 주고 있다. 물론 창조과학 골수 추종자들이 보기에는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의 문자적 해석‘만’을 지지하지도 않고, 창조 주간 6일의 하루하루가 ‘24시간 하루’였다고 주장하지 않는 것에 대해 큰 불만을 가질 것이다. 팀 켈러는 창세기 1-2장의 역사성을 결코 부인하지 않지만, 이들은 계속해서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의 역사성을 부인한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들이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로 몰고 간 것은 그들이 비판의 근거로 삼은 자료를 오독한 결과로, 자료가 말하지 않는 것들을 자신들이 가진 선입견을 투사하여 공격한 전형적인 ‘허수아비 공격하기’ 행태다. 팀 켈러는 세상의 여러 사조를 진단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때 세상 사조 자체를 자세히 분석하여 언급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종 그것 자체를 팀 켈러의 입장이라고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기원 문제를 설명하는 데 있어서 아주 겸손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 팀 켈러를, 충분한 근거 없이 유신진화론자로 몰아가는 몇몇 편협한 젊은지구론자들의 행태가 심히 우려된다.편집자가 제안하는 ‘함께 읽으면’ 좋은 기사 ·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젊은 지구: 지구의 나이가 수천 년인 이유· 오래된 지구: 지구가 수십억 년 되었다는 증거· 젊은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오래된 지구 주장에 대한 응답
유신진화론
젊은지구론
창조과학
애즈베리 부흥 앞에서 진짜 던져야 할 질문
by Trevin Wax
2023-03-28
당신도 애즈베리 대학에서 일어나는 영적 각성의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평범했던 예배가 지속적인 찬양과 경배, 죄의 고백, 그리고 구원의 예배로 바뀌었고, 전국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다른 대학에서도 비슷한 강도로 영적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이번 주 초 내 아들이 다니는 시더빌 대학교(Cedarville University)의 영상을 보았을 때 나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이 대학교의 전도팀이 오하이오와 미시간의 여러 주립 대학을 다니면서 전도를 시작한다는 소식이었다. 정말로 부흥이 일어난 것인가?애즈베리 신학교 총장 티모시 테넷(Timothy Tennent)은 “부흥”이라고 부르는 걸 주저한다. 그는 이렇게 썼다. “안락함에 물든 교회의 기반을 흔들고 진정으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새롭고 더 깊은 영적 세계로 인도하는 지속적인 변화가 일어난 경우에만, 시간이 지나서 뒤를 돌아보면서, ‘아, 그때가 부흥이었구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흥인지의 여부는 시간이 판단할 것이다. 그러나 의심할 여지 없이 우리는 지금 말씀과 예배를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심령과 삶을 새롭게 하는 특별한 사건을 목격하고 있다. 하나님의 역사가 대학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건 놀랍지 않다. 1802년 예일 대학교에서 영적 운동이 시작되었고, 학생의 3분의 1 이상이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고백했다. 당시 한 신입생은 이렇게 기록했다. “학교 전체가 흔들렸다. 한동안 학생 전체가 다 하나님 나라로 밀고 들어가는 것 같았다. 그것은 실로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이었고, 모든 사람의 눈에 기이한 일이었다. 오, 얼마나 축복된 변화였던가!”대각성이 일어날 때하나님의 영이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새로운 느낌을 줄 때마다, 즉 하나님의 위엄을 경외하고 그분의 사랑에 압도되는 놀라운 조합이 발생할 때마다, 우리는 다양한 반응을 만나게 된다. 첫째, 모든 게 혼란스럽다. 하나님의 숨결이 어떤 장소에 확실하게 임할 때, 종종 비정상적인 반응이 일어난다. 기도와 찬양 기간이 급속하게 늘어나거나, (신체적 그리고 영적) 치유에 있어서 하나님의 즉각적이고 가속화된 역사가 나타나거나, 마치 영원이 현재에 영향이라도 미친 것처럼, 누구나 느끼는 평소의 시간 감각이 무너진다. 사람들이 주님의 움직이심에 성실하게 반응하기 시작하며, 하나님을 향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오는 거짓 없는 헌신을 신학적으로야 엉성해 보일지 몰라도 다양한 표현으로 반응하기도 한다.둘째, 부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시절은 없으며 그런 이들의 동기가 항상 순수했던 것은 아니다. 부흥을 조장하는 자(Hucksters)가 도착하여 권력을 확보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권력을 도구화한다.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때마다, 거기에서 이익을 챙기려는 사람은 항상 나오기 마련이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술사 시몬을 보라.셋째, 종종 세상보다 더 비판적이고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게 교인이다. 열광하는 신도의 감정 표현을 비웃기도 한다. 그들은 팔짱을 끼고 사건을 조사하는 데 더 열심이다. 말씀과 찬양의 신학적 정확성을 분석하며, 성령에 의해서 “감동받는 것”보다 사기당해서 “속아 넘어가는 것”을 더 걱정한다. (첫 번째 대각성 운동이 일어났을 때도 이런 일이 발생했다. 부흥의 근원과 결과에 대해서 “오래된 빛”과 “새 빛”으로 첨예하게 갈라졌다.) 과거에 교회 또는 영적 사기꾼으로 인해 상처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일수록 회의적인 태도를 가지기 쉽다.애즈베리에서 벌어지는 각성을 놓고 많은 질문이 생긴다.이거 진짜야? 이게 진짜로 하나님의 역사인지 어떻게 알지?참석자 중에 신학적으로 틀린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는 거야? 영적 조작이 벌어지고 있다면?현재까지 진행된 상황을 근거로 해서 어떻게 “영을 분별”할 수 있지? 그냥 소셜 미디어에 의해서 감정주의가 퍼지는 거 아니야? 내가 어디에 있든 관계없이 하나님이 함께하시잖아? 부흥이 맞는다면, 기대해야 할 열매는 어떤 건데?긴급한 질문하지만 진짜 물어야 할 시급하고 절박한 질문은 따로 있다. 요한복음 5장에서 예수님께서 베데스다 연못가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풍병자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네가 낫기를 원하느냐?”에즈배리에 관해서 물어야 할 질문은 에즈배리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건 당신에 관한 것이다. 당신의 심령, 당신의 갈망에 대한 것이다. 중풍병자에게 던진 예수님의 질문은 겉으로만 보면 기이하기 이를 데 없다. 아니, 베데스다에 온 사람들이 다 낫고 싶어서 온 것 아닌가? 당연히 낫고 싶지, 그걸 꼭 물어야 아나? 그리고 지금 예수님이 우리에게 부흥을 원하냐고 묻는다면, 우리 중 대부분은 다음과 비슷한 대답을 할 것이다. 주님, 안 보이세요?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헌신하는지, 얼마나 열심히 기도하고, 또 매주 이렇게 교회에 성실하게 출석하는지 말이에요. 우리가 부흥을 원한다고 주일마다 찬양하는 거 안 들리세요?우리가 기도하면서 이 나라를 구하고 교회를 새롭게 하는 건 부흥밖에 없다고 소리치는 거 모르세요? 그럼에도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울려 퍼지고 있다. “너희가 진정으로 부흥을 원하느냐?”부흥에 대한 모든 표면적인 이야기와 우리가 성령을 얼마나 의지하고 있는지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잊자.부흥을 원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는 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당신은 하나님의 임재가 초래할 불편함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주일마다 부흥을 달라고 찬양할 수는 있지만, 당신은 마음 깊은 곳에서 결코 벗어버리고 싶지 않은 깊은 원한과 응어리를 품고 있을 수도 있다. 교회의 분열과 신학적 부족주의(tribalism)를 은근히 즐기고,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은밀한 죄와 ‘나 정도면 괜찮지’라는 생각에 만족하는 뒤틀린 위로까지, 그리고 나날이 쇠퇴하는 교회를 보면서도 무감각하고 미래에 대해서는 무관심까지, 하나님의 영이 임하시는 곳에서 당신의 내면은 결코 안전할 수 없다. 따라서 예수님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네가 정말로 낫기를 원하느냐? 중풍병자는 치유가 불가능한 이유에 대한 온갖 변명을 늘어놓는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 내 힘으로는 물에 들어갈 수가 없다. 나는 혼자라고.이런 변명을 늘어놓는 데서는 우리도 다르지 않다. 교회가 너무 망가졌어. 하나님이 그런 곳에서 역사하실 리가 없다니까! 부흥이 일어난다면, 결코 이런 식일 수는 없는 거야. 하나님의 역사라면, 완전히 다를 거야. 따라서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우리가 정말로 부흥을 원하는가? 부흥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가슴이 뛰는가? 정말로 나는 치유 받기를 원하는가?하나님을 바라는 갈증마틴 로이드 존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부흥이라는 개념에 감격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다.”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도 그런 그리스도인을 이해할 수 없다. 애즈베리 대각성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든지, 그리고 시간이 흘러서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일어나지 않든지 간에, 앞으로 역사가 그 현장을 목격하는 우리를 판단하는 기준은 단 하나가 될 것이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고 싶은 간절한 목마름, 권능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목격하고자 하는 억누를 수 없는 열망, 오로지 하나님만이 이루시는 역사를 향한 갈망이 나와 당신 속에 있느냐의 여부이다. 정통이 주는 감격은 팔짱을 끼고 분석할 때가 아니라 두 팔을 높이 들고 찬양할 때 따라온다. 그렇기에 우리는 지금도 작은 체구의 시각장애인이었던 패니 크로스비(Fanny Crosby)와 함께 찬양한다. 인애하신 구세주여내가 비오니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원제: The Burning Question from Asbury Isn’t About Asbur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애즈베리부흥
대각성운동
평범하고도 특별했던 하루
애즈베리 부흥의 현장에서
by Doug Hankins
2023-03-25
애즈베리 각성이 시작된 목요일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이어진 주일 설교에서 목사님이 그 사건을 언급했다. 월요일이 되자마자 나는 당장 켄터키로 날아가서 진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확인하고 우리 교회 식구들에게 상세하게 알리겠다는 생각에 여행 준비를 시작했다. 부흥과 부흥운동에 관심을 가진 미국 종교사를 연구하는 역사가로서 나는 실제로 만나게 될 부흥이 과연 어떤 느낌을 줄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대됐다. 게다가 들리는 바로는 그 규모가 예사롭지 않다고 했다. 휴즈 강당의 공식 예배가 끝났다는 발표가 있었던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오전 10시 45분 이후에 벌어진 역사를, 소셜 미디어가 전하는 단순한 사실을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예배를 마친 학생들은 떠나지 않고 남아서 기도하고 찬양하고 성경을 읽고 간증하고 성령님의 말씀을 들었다고 했다. 나는 그곳에 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모든 것을 경험하고 싶었다. 하나님께서 나를 만나주시고, 그 결과 그분을 더 사랑하게 도와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깨어나는 나 자신을 체험하고 싶었다.더불어서 부흥이라는 특별함 속에 존재하는 평범함과 일상적인 삶의 모습도 궁금했다. 화장실에 가려고 중간중간 나갈까? 당연히 먹고 마시겠지? 리더는 방을 어떻게 배정할까? 청소는? 진공청소기를 쓸까? 사람들은 얼마나 오래 함께 있을까? 모임이 거의 하루 24시간 진행되는 상황에서 이런 세세한 모든 것을 제대로 파악할 사람이 있기나 할까? 자, 지금까지 내가 발견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캠퍼스애즈베리는 켄터키 렉싱턴 남쪽, 말을 키우는 농장이 주로 모인 외딴 지역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캠퍼스이다. 렉싱턴 애버뉴에서 좌회전하여 시내 중심으로 2마일 운전하면 캠퍼스 중심부에 들어선다. 메인 스트리트는 도로의 북서쪽에 있는 신학교와 남동쪽에 있는 대학교를 깔끔하게 분리한다. 두 캠퍼스에는 각각 도로 쪽으로 정문이 난 채플이 있다. 신학교 쪽에 있는 에스테스 채플(Estes Chapel)은 660석이다. 대학교 쪽에 있는 더 오래되고 더 큰 휴즈 강당(Hughes Auditorium)은 1,489석이다. 2월 15일 수요일 오전 11시 30분, 내가 도착했을 때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나는 “특별 주차장”에 이중 주차로 차를 세웠다.렉싱턴 애버뉴를 따라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보인다. 파란색 셔츠를 입은 한 청년이 줄을 선 군중을 향해 외친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청년의 말을 들은 한 여자가 그가 있는 쪽으로 걸어가더니, “예수님은 세상 모든 어린아이를 사랑하십니다”라며 크게 노래하기 시작한다. 이런 식의 대결은 대체로 평화적으로 진행되지만, 지금 일어나는 문화 현상이 가진 유쾌한 긴장감을 잘 보여준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줄을 선 사람이 이미 천여 명에 달했다. “오늘 저녁이면 네 배로 늘어날 겁니다.” 한 자매가 내게 살며시 귀띔했다. 휴즈 강당으로 들어가는 긴 줄 / Courtesy Doug Hankins바로 내 앞에 줄을 선 그룹은 오하이오 신시내티에 있는 나사렛 교회에서 차를 몰고 온 사람들이다. 며칠 전에도 왔다는데, 벌써 두 번째란다. 틱톡에서 비디오를 본 교회 청년에게서 이곳의 소식을 처음 들었다고 했다. 내게 얼마나 오래 머무를 생각인지 묻더니, 자기네는 챙겨야 할 집안일과 직장 때문에 오후 3시까지만 있을 거란다. 평범함과 비범함의 아름다운 조화이다. 이런 모임이 다른 대학으로까지 퍼지면 얼마나 좋겠냐며, 한 자매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한다. 우리는 조금씩 채플 앞으로 나아가면서 수다를 떨었다. 지금은 오후 1시이다. 채플에 들어서자 다른 자매가 내게 말했다.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시고자 하는 것을 꼭 찾길 바랍니다.” 그 일이 벌어진 바로 그곳마침내 호기심과 흥분이 최고 수준에 다다른 순간을 맞았다. 내가 지금 발걸음을 내딛는 이 부흥의 현장이 영화 레이더스(Raiders of the Lost Ark)와 비슷할까? 그러나 강당 안으로 열 걸음을 들어가도 얼굴이 녹아내리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다. 평범한 예배이다. 찬양하는 큰 소리가 있을 뿐이다. 오후 1시 5분, 자리에 앉은 나는 청중 속으로 스며든다. 대부분이 백인이고 옷을 보면 중산층이다. 그리고 거의 모든 사람이 채플 공간을 존중하고 있다. 그렇다고 획일적인 청중은 아니다. 히스패닉, 흑인,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도 있다. 누군가는 예배를 드리고, 누군가는 촬영을 하고, 누군가는 수다를 떤다. 물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촬영하는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예배에 동참하고 있다. 잡담하던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러고는 잠시 사람들을 관찰하더니 밖으로 나간다. 불현듯 1차 대각성 때에도 이런 식의 관찰자가 참석했을지 궁금하다. 한 남자가 무대 위에 올라가더니 우리에게 앉으라고 한다. 성경을 읽고는 우리가 왜 여기에 있는지 그 이유를 묵상하라고 말한다. 그리고 옆자리에 있는 서로를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다. 나는 오하이오에 있는 은사주의 교회에서 온 사람들을 향해서 돌아섰다. 다양한 예언 집회에 참석했지만, 이런 경험을 한 적은 없다는 게 그들의 고백이다. 그들의 말을 빌자면, “다른 집회만큼 강력하고 매력이 있지만, 훨씬 덜 자극적(sensational)”이란다. 내 오른쪽에 있는 인도인 부부가 함께 기도하자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에서 운전하고 왔다는데, 주님께서 확실한 사역의 길을 보여주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온 것이라고 한다. 우리는 서로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중보 기도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 서로 누군지 알 리 없는 사람들이 눈을 감고 한 마음이 되어 큰 소리로 기도한다. 이것은 특별한 경험이다. 기도를 마치자 그들은 내게 고맙다고 말하고는 방을 나간다. 기도 시간이었기에 나는 중보 기도할 사람의 목록을 핸드폰에 적었다. 주님께서 이사야 55:6을 내 마음에 주신다: “너희는, 만날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아라. 너희는, 가까이 계실 때에 주님을 불러라.” 가족과 교회 지도자, 소그룹 구성원 등등 최대한 많은 사람을 기억하고 중보하려고 노력한다. 고작 5분 지난 거 같은데, 시계를 보니 이미 한 시간 반이 넘게 기도하고 있다. 이 공간에서는 시간이 사방으로 흩어지며 아예 다르게 흐르는 것 같다. 천국이 이럴까? 부흥에도 리더가 있어야 한다지나치게 조율된 것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구잡이로 구성되지도 않은, 나름의 조율된 노력이 이 모임 뒤에 있음을 알아차렸다. 강당 앞에 스무 명 정도의 스태프가 단체 문자로 이야기를 나누며 계획을 세우는 것 같다. 함께 기도하지 않을 때 그들은 청중으로부터 조금 떨어져서 휴대폰을 보고 또 메시지를 보낸다. 그러나 그런 사람은 대부분이 아니라 일부에 불과하다. 리더들 대부분은 기도에 치중한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기 위해 사람들이 물결처럼 계속해서 앞으로 나가고 있다. 이건 마치 빌리 그레이엄 전도 집회(Billy Graham Crusades)를 담은 오래된 VHS 테이프에서 본 것과 비슷하다. “스태프”가 누군지는 알 수 없다. 무대나 복도에서도 특정 이름이 언급되는 일은 거의 없다. 갑자기 한 남자가 일어나더니 성경을 읽고는 조나단 에드워즈가 지도하던 모임을 기억하라고 한다. 그러고는 그리스도를 위해 이 세대를 전도해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는데, 그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단지 지역 교회 목사라고만 할 뿐이다. 뮤지션도 자신을 소개하지 않는다. 이름을 알리겠다는 충동이나 자아 고취 욕망은 찾아볼 수 없다. 주목받는 유일한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에즈베리에서 나를 놀라게 한 단 한 가지를 꼽으라면 바로 이 점이다. (이 모임을 세상에 알리기 시작한) 소셜 미디어 시대지만 굳이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여 이 부흥의 불길을 더 부채질하겠다는 전담 직원은 없는 것 같다. 오히려 스태프는 하나같이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오로지 예수님만이 인도자가 되실 수 있도록 말이다. 그나마 얼굴을 알리는 사람은 찬양을 인도하는 학생들이다. 에즈베리 대학교에 운집한 사람들 / Courtesy Doug Hankins아마도 학생들이 인도하기 때문이겠지만, 내 기준에서 볼 때 대부분 찬양이 최신 경배와 찬양 곡—Maverick City의 “Firm Foundation”과 “Promises”; Brandon Lake의 “Gratitude”와 “House of Miracles”; 그리고 “Waymaker” “Nothing Else” “Forever” “Tremble” “Great Are You Lord” “No Longer Slaves”—이다. 2000년 이전에 작곡된 곡은 “Jesus Loves Me” “I Love You Lord” “Sanctuary” “Agnus Dei”가 유일하다. 유일한 찬송가는 “내 영혼 평안해”(It Is Well with My Soul)이다. 가사나 이미지를 담은 스크린도 없다. 오로지 기도와 찬양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이다. 최신 워십 송을 모르지만 나는 휴대폰에서 가사를 검색해서 따라부른다. 이토록 많은 사람으로 붐비는 오래된 건물에서 휴대폰 수신이 문제가 되는 건 아닐까? 내 걱정은 기우였다. 평범한 모든 것들이 부흥을 떠받치고 있다. 원활한 휴대폰 수신, 구글 검색, 그리고 찬양 가사를 담은 웹사이트까지.각성에도 휴식이 필요하다모임 속 다양한 지점에서 스태프는 질서 유지를 위해서 청중을 섬긴다. 한 남자가 이층에 있는 사람들에게 백 년 된 발코니에서 뛰어내리면 안 된다고, 대신 일층으로 가서 예배에 참석하라고 친절하게 안내한다. 그 말을 들은 청중은 큰 소리로 웃는다. 그리고 일층에 앉아있던 청중은 이층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을 위해서 조금씩 안쪽으로 움직이며 앉을 자리를 만들어준다. 평범한 관심이 비범한 겸손과 은혜를 만날 때 피어나는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인가!이 시점에서 나는 야구 경기에서 한 이닝이 끝났을 때 화장실과 매점에 가려고 일어나는 것처럼 사람들이 움직이는 것을 보았다. 내 눈에는 청중이 자연스럽게 퇴장할 수 있도록 리더들이 의도적으로 휴식 시간을 조정하는 것 같았다. 그와 동시에 줄 서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추가 공간이 만들어진다. 정리 시간의 타이밍은 찬양 인도자 교체로 이어진다. 여러 그룹의 학생들이 찬양을 인도하는데, 정해진 시간이 아니라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동안 계속한다. 평균 45분에서 한 시간 사이이다. 한 팀이 진행하는 찬양은 45분보다 짧지 않고 또 90분을 넘지 않는다. 의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일관성이 있다. 그 정도의 지속 시간이 청중의 요구에 가장 잘 맞는 리듬인 것 같다.현실적인 질문들에 답을 얻다몇 시간 동안 기도하고 찬양하고 또 성경을 읽은 후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비로소 내 눈에 이름표가 달린 끈을 매고 있는 리더들이 보였다. 이제 몇 가지 현실적인(practical) 질문들 할 시간이 되었다. 그들은 침착함과 인내심을 잃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나는 에즈베리 스태프가 보여준 온화한 성품, 일관된 관심, 공감 능력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들은 휴즈 강당 지하에 있는 화장실로 나를 안내했고, 일정에 따라 화장실을 청소한다고 알려주었다. 화장실에는 공공장소에서 쓰는 큰 펌프 비누 용기가 걸려있다. 수건은 창턱에 쌓여 있고 쓰레기는 넘치지 않았다. 누군가 물품을 채우고 빠르게 청소하고 나간 것 같다. 애초에 이 화장실은 수천 명이 끊임없이 사용할 걸 고려해서 만든 게 아니기에 빠른 청소가 매우 중요하다. 강당 앞에 간식과 물병이 준비되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강당 주변에서 식사는 하면 안 된다. 그래도 이런저런 물병을 가져오는 사람이 있는데, 스타벅스 컵은 눈에 띄지 않는다. 재충전을 위해 몰래 빠져나와서 뭔가를 마셔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남 눈치 보지 말고 그렇게 하면 된다. 아무도 그런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잔디밭에서는 한 교회가 ‘리틀 시저스’ 피자를 나눠주고 있다. 동쪽 잔디밭에는 푸드 트럭을 끌고 온 남자가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고 또 ‘무료로’ 중보 기도를 해주고 있다. 아, 평범함과 특별함의 조화이다. 잔디밭 앞에서 무료로 음식을 나눠주는 푸드 트럭 / Courtesy Doug Hankins 다시 밖으로 휴즈 강당에서 몇 시간 더 있다가 다시 밖으로 나갔다. 방과 후에 도착한 부모와 아이들이 잔디밭에 피크닉 담요를 깐다. 미식축구공과 축구공이 여기저기에서 날아다닌다. 일부 음유시인들이 즉석 예배 콘서트를 위해서 나무 주위에 자리를 잡는다. 아직도 천 명 정도가 여전히 줄을 서 있다. 오후 6시가 되자 숫자는 두 배가 되고, 잔디밭에 모이는 사람은 무려 수천 명을 헤아린다. 기술팀이 휴즈 강당 앞에는 야외 스크린을, 그리고 길 건너 에스테스 채플에는 실내 스크린을 준비해서 휴즈 강당 안의 모습을 라이브로 송출한다. 에스테스 채플에도 이백 명이 모여있다. 캠퍼스 근처에 있는 빈야드 교회에도 사람들이 있고, 거기에서도 라이브 방송이 진행된다. 라이브 방송에서 피아노 연주자가 에베소서 3:14-21을 낭독한다. 그러므로 나는 아버지께 무릎을 꿇고 빕니다. 아버지께서는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붙여 주신 분이십니다. 아버지께서 그분의 영광의 풍성하심을 따라 그분의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속 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여 주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여러분의 마음 속에 머물러 계시게 하여 주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이 사랑 속에 뿌리를 박고 터를 잡아서, 모든 성도와 함께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여러분이 충만하여지기를 바랍니다. 우리 가운데서 일하시는 능력을 따라, 우리가 구하거나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더욱 넘치게 주실 수 있는 분에게,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도록 있기를 빕니다. 아멘.아이 하나가 나무에 올라가자, 스태프가 정중하게 내려오라고 한다. 밖에 있는 사람들은 스크린과 스피커를 통해 강당 내부 사람들을 보면서 찬양을 따라 부른다. 아이들이 태그 놀이를 하면서 놀고, 부모들은 커피를 마신다. 경찰관 몇 명이 수다를 떨고 있다. 이동식 화장실로 가는 사람들이 보인다. 기숙사로 돌아가는 학생들이 군중 사이를 지나간다. 휴대폰으로 셀카를 찍는 사람,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한 남자가 홀로 서서 조용히 기도하고 있다.현실적이고 영적이며 평범하고 특별하다. 이것이 모두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에베소에 보내는 서신에서 우리를 위해 기도했던 바울, 그의 마음도 이랬을 것이다.원제: Ordinary and Extraordinary: A Day at the Asbury Awaken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대각성운동
애즈베리부흥
이상하게도 마음이 뜨거워지다
애즈베리 대학교 부흥
by Fred Sanders‧Joe Henderson
2023-03-24
2023년 2월 8일 수요일, 애즈베리 대학교(Asbury University)의 아침 채플이 끝나고 좀 더 기도하려고 남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와 사랑이 임했다. 그리고 더 많은 학생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수백 시간이 지났는데도 모임은 여전히 계속되었고, 수천 명의 순례자가 놀랍고 지속적인 영적 갱신을 체험하기 위해서 켄터키 윌모어(Wilmore)로 모여들었다. 애즈베리 대학교는 그것을 “분출”(outpouring)이라고 표현했고, 길 건너에 있는 애즈베리 신학교는 “각성”(awakening)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접한 인터넷은 바로 “부흥”(revival)이라고 명명했다. 우리 두 사람은 윌모어와 정반대편에 있는 캘리포니아에서 가르치고 있지만 애즈베리는 우리에게 특별한 곳이다. 조는 아예 윌모어에서 자랐고 지금은 종합대학이 된 애즈베리 대학(Asbury College)을 나왔다. 우리는 애즈베리 신학교(Asbury Theological Seminary)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면서 만났다. 그래서 우리는 그 작은 마을에 있는 관계자들과 친구들이 전해주는 고무적인 이야기들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애즈베리 부흥에 관해서 사람마다 다 나름의 생각이 있겠지만, 그중 대부분이 일반적인 부흥에 대한 의견 정도이다. 전반적인 측면에서 부흥을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국 서부에서 사는 애즈베리 출신(Asburians)으로서 우리는 윌모어라는 동네의 역사와 맥락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지금 일어나는 부흥의 순간을 설명하려고 한다. 우리가 연결하는 몇 개의 지점(dots)을 통해 외부인도 이 부흥의 의미를 이해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사적 맥락애즈베리 대학교는 기존 교회에서 경험하는 영적 삶이라는 부흥의 시초가 되었던 웨슬리 전통 위에서 설립되었다. 미국인이 최초의 대각성 운동이라고 부르는 18세기의 운동은 영국에서 복음주의 부흥 운동으로 알려져 있다. 그 운동은 존과 찰스, 웨슬리 형제의 설교에 크게 힘입어 영국 교회의 갱신으로 이어졌다. 웨슬리 형제와 그 동료들의 변혁적인 설교가 시작한 곳은 지극히 평범한 어느 예배당이었다. 그들이 그 교회 예배에 참석했을 때, 존의 표현대로, 그들의 마음이 “이상하게 따뜻해졌다.” “[하나님이] 내 죄, 심지어 내 모든 죄를 제거하시고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구원하셨다는 확신이 내 속에 주어졌습니다.”존 웨슬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했으며, 그 경험은 그로 하여금 역사적으로 강력한 사역과 섬김, 선포의 삶으로 이끌었다. 그로부터 거의 3세기가 지난 후, 윌모어의 학생들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웨슬리 형제가 체험한 것과 비슷한 놀라운 체험을 간증한다. 감리교 운동이 확산해 가면서 존 웨슬리는 프랜시스 애즈베리(Francis Asbury)에게 미국 식민지의 사역을 위임했고, 그는 감리교 사역을 미국으로 확산했다. 차를 타고 윌모어로 지나면 말을 탄 프랜시스 애즈베리 동상을 지난다. 다름 아니라 두 대륙을 이은 18세기 위대한 부흥의 연결 고리이다. 애즈베리 대학교 고유의 다양한 웨슬리(Wesleyan) 영성은 미국의 성결(Holiness) 운동에 의해 더욱 더 깊어졌다. 그 운동의 슬로건은 “봉헌”(consecration)이다. 이 전통의 영향을 받은 교회는 본당 성소 앞에 제단 난간이 있다. 설교로 도전을, 또 찬송으로 감동을 받은 사람은 제단으로 올라와 자신을 하나님께 봉헌한다. 포브 파머(Phoebe Palmer)는 19세기에 제단 신학을 설명했다. 일단 개념을 어느 정도 알게 되면, 이것이 미국 복음주의에 얼마나 널리 퍼져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오래된 노래 “Trust and Obey”(바이올라의 한 교수가 작사)에는 이런 가사가 들어있다. “증명할 수는 없지/ 그의 사랑이 주는 기쁨을/ 제단 앞에 나 자신을 바치기 전까지는.”웨슬리 전통과 성결 운동에 뿌리를 둔 사실 외에도 애즈베리 대학교는 이번 주 뉴스에 나오는 동일한 예배당을 중심으로 일어났던 독특한 지역 부흥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50년, 1958년, 그리고 1970년에도 바로 그곳에서 부흥이 있었다. 그 여파는 오늘날까지도 지역 사회 속의 생생한 기억으로 남을 만큼 컸고, 그에 관한 몇 권의 책이 쓰일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었다. (다음 책을 참고하라. Halls Aflame: An Account of the Spontaneous Revivals at Asbury College in 1950 and 1958 by Henry C. James and Paul Rader, 그리고 One Divine Moment: The Account of the Asbury Revival of 1970 edited by Robert E. Coleman and David J. Gyertson).콜맨과 자이어슨(Gyertson)의 책 제목, ‘One Divine Moment’(신성한 한순간)은 1970년 부흥회 때 애즈베리 대학교 총장이었던 데니스 킨로(Dennis F. Kinlaw)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신성한 한 순간을 내게 허락하여 주십시오. 수 세기에 걸친 인간의 모든 노력보다 그 한순간이 훨씬 더 가치 있고 뛰어나기 때문입니다.” 킨로가 말하는 한순간이 언제인가? 살아계신 하나님이 자신의 시간표에 따라서 능력과 거룩함으로 스스로를 알리시는 부흥의 순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며 겸손하게 기대라는 신자의 전통을 말한다. 2월 8일부터 지금까지휴즈 기념 강당(Hughes Memorial Auditorium)이라는 캠퍼스 예배당의 모퉁이 돌에는 두 개의 모토가 새겨져 있다. “모두에게 거저 주시는 구원, 모든 죄로부터 완전하게 벗어나는 참 구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히 12:14). 예배당에서 울려 퍼지는 설교는 언제나 값없이 주시는 구원의 선물과 변화된 삶으로의 부르심으로 특징지어져야만 한다. 지금의 부흥이 시작된 2월 8일 채플 예배에서 잭 미어크리브(Zach Meerkreebs) 목사는 로마서 12장에 제시된 표준에 따라 거룩하게 살라고 강권했다. 13절 속에 담긴 서른 계명은 오염되거나 위선적인 또는 왜곡된 사랑이 아닌 온전함으로 서로를 사랑하라고 듣는 이를 초청한다. 미어크리브 목사의 결론은 명확했다. 이 구절이 요구하는 사랑은 우리의 힘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 구절이 말하는 방식으로는 사랑할 수 없습니다. … 예수님의 사랑으로 온전히 채워지기 전에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에 우리는 사랑한다 (요일 4:19). “행동으로 사랑을 드러내고 싶습니까? 그럼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해야만 합니다.”그날 그의 설교가 특별히 대단했던 것은 아니다. (나중에 미어크리브 목사는 그날 설교가 형편없었다고 자평했다.) 그러나 그 설교에는 로마서라는 깊이가 더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설교는 거저 주시는 은혜와 완전한 구원이라는 웨슬리의 성결이 강조하는 바를 정확하게 전달했다. 학생들은 초대를 들었고, 거기에 응답했다. 이어서 진행된 예배가 선정적이거나 극적이었던 것도 아니다. 라이브 스트림으로 보는 그 현장은 중간중간 지루해 보이기도 한다. 함께 기도하는 모습, 조용히 찬양하거나 성경 읽는 것 외에는 볼 게 없었다. 모두가 다 앞을 향하고 있었지만, 무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 순례자가 하나둘 도착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군중이 만들어졌다. 현장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심령을 새롭게 하는 강력한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말한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경외심과 하나님의 사랑이 주는 감미로움을 간증한다. 하지만 이 모든 드라마는 보이지 않게 진행되었다. 학생 중심지금 세대 대학생은 팬데믹의 혼란이라는 독특성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팬데믹은 그들의 계획을 방해했을 뿐 아니라 질병과 죽음에 맞서도록 강요했다. 그리고 발달이라는 측면에서 민감한 단계에 있는 그들을 고립과 혼란에 빠뜨렸다. 삶의 지평을 확장하길 바라고 들어간 대학에서 그들이 정작 만난 사회적 환경은 축소였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우울증으로 특징지어지는 것이 지금 시대의 대학생이다. 이들이 바로 켄터키에 있는 기독교 대학에 등록하고 다니던 중에 갑자기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강력한 사랑을 경험하도록 초대받은 젊은이들이다. 이들이 바로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도와 예배를 계속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대학 지도부와 협력하기 위해서 나선 학생들이다. 부흥은 학생을 중심으로 이루어지지만, 대부분 길 건너 신학교에서 건너온, 눈앞에서 벌어지는 부흥을 해석하고 싶어 하는 많은 학자들에게도 축복이다. 이전 시대 부흥의 전문가인 로버트 콜먼(Robert E. Coleman)은 말할 것도 없고, 톰 맥콜(Tom McCall), 크레그 키너(Craig Keener), 로슨 스톤(Lawson Stone), 스티브 시맨즈(Steve Seamands) 및 많은 학자가 참석했다. 이들은 현세대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목격하는 데 영적으로 열린 현명하고 비판적인 사상가이다. 1월 4일 게시된 블로그 게시물에서 애즈베리 신학교의 티모시 테넌트(Timothy Tennant) 총장은 이렇게 썼다. 2023년 1월은 “우리가 좋은 소식을 더 널리 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더 굳건히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굳건히 신뢰해야 하는 부흥의 전 단계입니다.” 이 특별한 축복의 시기에 분별력을 가지고 대응할 준비가 되어 있는 책임감 있고 다세대적인 지도력이 현재 마련된 상태이다. 할렐루야!윌모어에서 일어나고 있는 각성, 부으심, 또는 부흥의 의미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더욱 분명해질 것이다. 애즈베리에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시간표에 따라서 부흥의 물결이 높이 일었다가 다시 사그라든다는 점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 윌모어에서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는 소식이 빠르게 퍼진다. 다른 대학과 신학교에서도 그들만의 깨달음의 순간을 경험하고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켄터키의 작은 윌모어에서 시작한 부흥의 시초를 체험하기 위해서 지금도 순례의 길을 떠나고 있다. 윌모어까지 직접 오는 사람이든 멀리서 관찰하는 사람이든, 그들은 다양한 교회와 교단에 속하고 있다. 비록 지금의 각성이 웨슬리의 영향을 받은 특정한 종류의 복음주의 대학생들 사이에서, 그들의 영적 유산이 근거가 되어 일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애즈베리가 이 운동의 소유자는 아니다. 이 부흥은 애즈베리만의 것이라고 도장을 찍지도 않는다. 휴즈 강당의 좌석 수는 1,485개에 불과하지만, 수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 평범한 강당에서 일어나는 역사에 관심을 기울였다. 우리 시대에도 하나님의 사랑과 권능을 아는 것이 가능하다는 소문이 널리 퍼지고 있다.애즈베리의 부으심에서 배우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광범위한 영적 갈망이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이 갈망은 18세기와 21세기가 다르지 않다. Z세대와 그들의 부모, 조부모, 나아가서 증조부모 세대와도 다르지 않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느끼는 강렬한 배고픔이다.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갈망이 우리 마음에 영감을 주어 우리 영혼을 준비시키기를 바란다. 그래서 어디에 있든지, 우리의 심령이 “이상하게 따뜻해져서” 새로운 예배, 되살아나는 거룩함,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기 전에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분과의 더 깊은 친밀함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원제: Hearts Strangely Warmed at Asbur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에즈베리대학교
부흥
대각성운동
성결운동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by 고상섭
2023-03-23
2023년 3월 17일, 기독교학술원이 “팀 켈러의 유신진화론 비판적 성찰”을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팀 켈러가 그의 에세이 “창조, 진화, 그리고 그리스도인 평신도”(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1]에서 주장한 내용을 거론하며 그의 주장이 유신진화론적 입장이라는 비판과 함께 그 위험성과 그의 창세기 해석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세미나였다. 먼저 나는 창세기에 대해 팀 켈러와 다른 관점을 가진 개혁주의 진영의 목회자임을 밝힌다. 창조론을 믿고, 6일 창조를 믿고,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기록임을 나는 믿는다. 그러면서도 나는 나와 견해가 다른 팀 켈러의 입장을 수용할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자 한다. 팀 켈러를 통해 내가 배운 것 중 하나는 복음의 겸손이며, 이것은 다른 사람과의 연합으로 인도한다. 그러나 이런 복음의 관대함은 때때로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것 같다. 팀 켈러의 주장은 과연 비판받아 마땅할까? 아니면 견해가 다르지만 수용가능한 것일까? 팀 켈러를 존경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후자에 좀 더 무게를 두고 설명해 보려고 한다. 창세기 1-2장 해석 문제 기독학술원 원장인 김영한 교수는 팀 켈러가 창세기 1-2장을 사실이 아닌 비유로 해석한다며, 그를 타협주의자라고 비판한다. 또한 팀 켈러는 ‘24시간 6일’ 창조를 부인하고 ‘오래된지구론’을 믿기 때문에 성경의 정통 복음주의를 벗어났다고 말한다. 이는 성경의 어떤 부분도 창세기 1-2장이 비유적인 글이라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김 교수는 주장한다. 이런 비판만 들으면 마치 팀 켈러가 성경의 계시와 권위를 무시하고 과학을 받아들이는, 말하자면 성경의 무오성을 부인하는 사람처럼 들린다. 하지만 팀 켈러의 의견을 꼼꼼히 들여다보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 전체가 산문인 것은 아니라고, 즉 여기에는 시적 요소가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드 J. 영이 말하는 ‘고양된 준-시적 언어’(exalted semi-poetic language)가 창세기 1장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은 시적 언어를 말하면서도 창세기 1장이 시는 아니라고 정의하지만,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의 ‘고양된 준-시적 언어’를 차용하면서 시로 읽어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2]또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이 시적 요소로 볼 수 있는 근거를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라는 동일한 문구의 7번 반복과 “∼이 있으라” “그대로 되니라”의 반복을 통해 단순한 산문으로 볼 수 없다고 말한다. 또한 태양(큰 광명체)과 달(작은 광명체)를 묘사하는 용어도 매우 독특한, 성경 어디에도 쓰인 적이 없는 시적 언어이며, “땅의 짐승”이라는 단어도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시를 쓸 때 동물을 지칭하는 용어라고 설명한다. 팀 켈러는 커버넌트 신학교 구약학 교수인 존 콜린스의 창세기 주석을 인용하면서 창세기 1장을 산문이지만 또한 시적 언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이를 고양된 산문 서술(exalted prose narrative)이라 부를 수 있다. 이 장르의 이름은 여러 면에서 우리에게 도움이 될 것이다. 첫째,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사실 주장을 다루는 산문 서술을 포함한다. 둘째, 이를 … 문자 그대로 해석하도록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인식할 수 있다.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을 문자 그대로 이해하는 어려운 근거를 2장과 비교를 통해 설명한다. 창세기 2:5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들에는 초목이 아직 없었고 밭에는 채소가 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구절은 땅에 비가 내리지 않아서 초목과 밭에 채소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통해 대기와 비가 존재하기 전 식물이 없었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그러나 창세기 1장의 창조의 순서를 보면 비가 내리기도 전에, 사람이 창조되기 전에 식물이 있었다고 말한다. 결국 2장의 근거로 1장을 해석하게 되면 창세기 1장이 자연 질서를 무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태양이 존재하기도 전에 세 번의 ‘아침과 저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에 오류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도 팀 켈러의 창세기 1-2장 해석을 다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전혀 근거가 없는 주장이라고 말하기도 어렵다. 팀 켈러는 사사기에 나오는 드보라의 사건(4장)과 드보라의 노래(5장)처럼 창세기 1-2장을 역사적 기록과 함께 선포하는 시적인 노래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나는 창세기 1-2장이 역사적 선언이며 산문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주장을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주장이라고 단정하고 싶지는 않다. 그는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그 쓰인 장르대로 읽어야 한다는 성경해석의 원칙을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의 해석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시를 시로, 산문을 산문으로, 서신을 서신으로 읽어야 한다는 주장은 틀린 말이 아니다. 창세기 1-2장에 대한 그의 장르 이해가 다를 뿐이다. 그리고 그런 주장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와 달리 나는 창세기 1-2장을 산문으로,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지만, 그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주장 정도로 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6일 창조’ 문제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문자적 24시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가 시적인 표현이라고 이해하기 때문이다.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들은 팀 켈러의 주장을 비판하는 것이 옳은가? 나는 24시간/6일 창조를 믿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 근거는 창세기 1장에서 명확하게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일곱째 날은 네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가축이나 네 문안에 머무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출 20:8-11). 여기서 하나님은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령하시면서,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었음이라 말씀하고 있다. 만약 6일 창조가 아니고 긴 시간의 창조였다면 안식일을 말씀하시면서 7일의 패턴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근거로 우리의 안식일을 말씀하시기 때문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의 표현대로 6일 창조를 믿는다.[3]그러나 내가 6일 창조를 믿는다고 해서 팀 켈러의 주장이 무조건 잘못되었다고 주장하고 싶지 않다. 팀 켈러는 창세기 1장의 창조 순서를 통해서는 6일 창조라고 명확히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24시간으로 생각하는 히브리어 ‘욤’의 용례도 24시간이 될 수도 있지만, 더 긴 시간에서도 사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나는 팀 켈러의 주장대로 넷째 날 해와 달이 만들어지기 전에 더 긴 시간이 있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6일 창조보다 더 긴 시간 창조가 되었을 가능성을 무조건 부정하는 것도 바람직한 태도는 아닌 것 같다. 창세기 1장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긴 시간 창조를 믿을 수 있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명백한 문제라기보다 해석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영역이다. 그리고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6일 창조를 믿지만, 6일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것은 우리의 신앙에 큰 영향을 주는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6일이 훨씬 더 성경적 근거가 있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해석이 모두 오래된지구론이라는 과학을 믿기 때문에 성경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시도라는 해석은 너무 극단적이다. 6일 창조를 믿더라도, 히브리어 ‘욤’에 대해 좀 더 다양하게 해석하는 사람들의 해석을 좀 더 열린 입장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 않을까? 젊은지구론/오래된지구론 문제 나는 오래된 지구를 믿지 않는다. 그렇다고 젊은지구론을 믿는 것도 아니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기 때문에 창세기 1-2장은 지구의 나이가 중요한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지구가 오래되었건 그렇지 않건 두 가지는 성경에서 명백히 밝히는 주제가 아니라고 생각되어 유보하는 입장이다. 젊은 지구일 수도 있고, 나이 든 지구일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이 아담을 성인 아담으로 처음에 창조하셨듯이 나이 들어 보이는 지구를 창조하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관점을 ‘성숙한 지구론’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도 한다. 지구의 나이가 젊은지, 나이 들었는지, 성숙한지에 대해 창세기 1-2장으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는가? 팀 켈러는 오래된지구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그것은 그가 과학적 근거를 성경보다 더 우위에 두기 때문이 아니라, 그의 성경해석의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도출된 것이다. 나는 팀 켈러의 오래된지구론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팀 켈러의 주장은 수용가능하다. 성경은 과학책이 아니다. 오래된지구론, 젊은지구론을 창세기 1장을 가지고 너무 명확하게 말하는 것 자체가 위험하다. 유신진화론 문제 팀 켈러는 유신진화론자인가? 아마도 유신진화론을 공격하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명백한 유신진화론자일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주장하는 창세기의 해석은 진보적 유신진화론자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부분이 많다. 팀 켈러는 다른 유신진화론자들처럼 여러 아담이 동시에 존재했다고 믿지는 않는다.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을 통한 우리의 구원론을 명확히 이해하고 설교한다.[3]그럼 팀 켈러는 왜 유신진화론자라고 공격받는가? 팀 켈러는 진화에 대해서 두 가지로 나누어서 생각한다. 진화적 생물 변의 과정인 EBP(Evolutionary Biological Process)와 인간의 모든 측면을 진화로 설명하려는 진화 대이론인 GTE(The Great Theory of Evolution)로 나눈다. 팀 켈러는 EBP에 대해서는 그리스도인이 수용가능하지만, 진화론적 세계관을 주장하는 GTE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한다. 이런 팀 켈러의 주장은 단순히 팀 켈러 혼자만의 주장이 아니라 다양한 학자들로부터 지지받는 학설이다. 칼빈 대학교 석좌교수를 역임한 앨빈 플랭팅가 교수는 ‘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Science and Religion: Are They Compatible?)라는 저서에서 현대 진화론은 유신론과 양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양립할 수 없다고 선언한다.자연주의적 세계관은 실제로 진화와 양립하기 어렵다. 따라서 과학과 종교(또는 과학과 유사종교) 사이에 갈등이 있기는 하지만, 그 갈등은 자연주의와 과학 간의 갈등이지, 유신론적 종교와 과학 간의 갈등은 아니다. 진화론이 자연주의와 묶일 때는 신의 설계를 부정하게 되지만, 진화론 자체만으로는 그것을 부정하지 않는다(18).앨빈 플랜팅가와 팀 켈러의 주장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가 나누는 진화의 두 가지를 동의하지 않더라고, 그는 창세기 1장에서 진화론을 말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는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지만 현대 과학에서 EBP가 창조의 과정에 사용되었다면 성경은 그것을 포함할 수도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팀 켈러는 그의 에세이에서 명확하게 “창세기 1장은 진화 또한 가르쳐주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신 실제 과정을 다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한다. 유신진화론이라는 단어 자체를 부정적으로만 보는 시각도 있지만 유신진화론 안에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한다. 한국교회탐구센터가 주관한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에서 합동신학대학원 조직신학 교수를 역임한 송인규 교수는 유신진화론 안에서도 다섯 가지 정도의 다른 주장들이 있다고 설명한다. 그중 양극단의 두 이론을 제외한 세 가지 보수적, 중도적, 진보적 입장을 언급하면 송인규 교수 본인은 창조론을 믿고 있지만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과 중도적 입장은 수용가능하지만 진보적 입장은 수용할 수 없다고 결론 내린다.[5]나는 송인규 교수의 주장 또한 모두 다 수용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유신진화론 중에서 보수적 입장이 취하는 것 중에서 어느 정도 성경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그럴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데는 동의가 되는 점도 있다. 인류의 첫 조상인 창세기의 아담을 고생물학의 증거와 신학적 기사 사이를 구별하는 경향에 대해서는 받아들일 수 없지만, 생물학적 진화의 메커니즘을 하나님의 섭리적 다스림 가운데 병합시키는 것은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그럴 수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것 같다. 결론 나는 창조론을 믿는 사람이다. 창조론 중에서도 즉각적 창조론을 믿는다. 그래서 24시간/6일 창조를 나의 신앙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비판하며 그의 해석을 전부 거부하고 싶지는 않다. 팀 켈러는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지만 창세기 1장을 산문과 함께 시적인 요소로 이해해야 성경이 쓰인 장르대로 해석한다고 생각한다. 나와 다르기는 하지만, 그의 해석 또한 성경의 권위를 존중하는 자세에서 나온 것이라 믿는다. 우리는 좀 더 겸손하게 자신의 믿음을 지키면서도 상대방을 존중하며 연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팀 켈러는 데릭 키드너의 글을 인용하며 그의 에세이를 마무리한다: “이는 모험적인 제안이며 임시적이며 개인적인 견해이다. 더 나은 지적과 이론들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이것이야말로 이 분야에서 일하는 우리 모두가 취해야 할 바른 태도입니다.” 유신진화론을 조금이라도 인정하면 성경의 권위가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앨빈 플랭팅가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싶다.무신론을 지지해주는 과학적인 증거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는다. 유신론을 반박하는 과학적 증거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렇다고 해서 유신론이 거짓이라거나, 유신론자들의 믿음이 반박됐다거나, 유신론의 믿음이 비합리적이거나 거기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이 나오지는 않는다. 과학적이건 아니건 간에 유신론을 지지하는 증거도 있기 때문이다. … 또한 유신론적인 믿음이 정당성을 보장받기 위해서 현대 과학에 의존할 필요는 없다(과학과 종교, 양립할 수 있는가?, 43).나는 목회자이고 과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유신진화론의 다양한 스펙트럼에 대해서는 명확하게 이해하거나 정확한 주장을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 설명들 가운데 성경이 말하지 않는 부분들을 잠정적 인정한다고 해서 성경의 권위가 무너지는 것은 아니다. 창조론을 믿는다고 창조의 과정 중에 진화의 요소가 들어갈 수도 있다는 주장들에 대해 반드시 거부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팀 켈러를 ‘유신진화론자’라고 부르고 싶지 않다. 유신진화론도 다양한 스펙트럼이 있지만, 보통 유신진화론자라고 하면 부정적 프레임이 씌워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단지 창세기의 해석을 다르게 하면서 진화적 방식을 수용하는 사람 정도로 이해하고 싶다.물론 나는 팀 켈러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팀 켈러의 의견을 비판하면서 배격하기보다는 하나의 잠정적 의견으로 받아들이고 싶다. 어쩌면 우리는 천국에서 함께 만나 웃으면서 창세기의 다른 관점들을 아주 재미있게 이야기 나눌 수도 있을 것이다. [주]1. “Creation, Evolution, and Christian Laypeople”은 2009년 10월에 개최된 BioLogos Theology of Celebration Workshop에서 처음 발표되었으며, BioLogos 인터넷 홈페이지에 2012년 2월 23일 자로 올라와 있다.2. 팀 켈러에 대한 비판 중에는 그가 에드워드 영을 인용하긴 했지만 영의 결론과는 다르게 인용했기 때문에 영의 관점을 왜곡했다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이 말한 ‘고양된 준-시적 언어’만을 인용했고, 그렇기 때문에 시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에드워드 영의 단어를 인용했다고 반드시 영의 결론까지 함께 동의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에드워드 영을 왜곡한 것이 아니라 보수 신학자인 에드워드 영도 창세기 1장을 ‘고양된 준-시적 언어’로 해석했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3. 4장 창조 1항: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는(히 1:2; 요 1:2, 3; 창 1:2; 욥 26:13; 33:4) 태초에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지혜와 인자하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롬 1:20; 렘 10:12; 시 104:24; 33:5, 6), 무(無)에서부터 세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을,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6일 동안에 창조하시기를 기뻐하셨으니, 모든 것이 심히 좋았다(창 1:1-31; 히 11:3; 골 1:16; 행 17:24). 4. 팀 켈러의 로마서를 살펴보면, 그는 명확히 한 사람 아담의 타락과 한 사람 그리스도의 순종에 대한 대표성의 원리를 바르게 이해하고 설교한다. 또한 그의 논문에서도 창세기 1장은 시적 요소로 해석될 가능성이 있지만 바울서신은 그렇지 않은 명확한 서술이므로 아담과 하와가 역사적 인물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유신진화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명확하게 말한다. 그래서 바울이 명확히 말하는 역사적 아담을 부인하는 것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행위라고 경고한다. 5. 유신진화론의 다섯 가지 분류는 한국교회탐구센터 과학과 신앙 강좌, “창세기를 통해 본 과학과 신앙의 쟁점”을 참고하라.
유신진화론
젊은지구
24시간/6일창조
오래된지구
예배 참석자가 줄어들자 ‘절망사’가 늘어난 까닭은
by Joe Carter
2023-02-26
미국에서는 종교 집회 참석률이 감소하는 동시에 절망사(Deaths of Despair)가 증가 추세이다. 이 두 트렌드는 서로 연결된 걸까? 최근 발표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은 종교 안에서 지속해서 일어나던 변화 추세에 속도를 더했다. 종교 모임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미국인의 수는 지난 이 년 동안 큰 폭으로 증가했고, 현재 미국 성인 세 명 중 한 명은 종교 예배에 참석한 적이 없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젊은이, 독신자, 그리고 자칭 정치적 자유주의자는 다른 미국인보다 훨씬 더 높은 비율로 종교 집회 참석을 중단했다.2022년 봄, 종교 집회에 단 한 번도 참석하지 않은 미국인은 33퍼센트로 보고되었다. 팬데믹 이전에 그 수치는 네 명 중 한 명(25%)이었다. 이에 반해 교회에 자주 갈 정도로 종교적으로 헌신한 사람들이 팬데믹으로 받은 변화는 그보다 덜했다. 팬데믹 이전에는 26퍼센트가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은 종교 집회에 참석한다고 보고되었는데, 이는 팬데믹 이후인 2022년 봄의 수치인 24퍼센트와 비슷하다. 팬데믹과 관련 없이 여전히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동일 인구 통계에 속하는 경향을 보인다. 정치적 보수주의자, 50세 이상의 성인, 여성, 기혼 성인, 그리고 대학 학위가 있는 사람들은 팬데믹 전후 두 기간 모두에서 다른 그룹보다 교회에 더 자주 출석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에 반해, 50세 미만의 성인, 대학 학위보다 교육 수준이 낮은 성인, 히스패닉계 가톨릭 신자, 흑인 개신교인, 백인 주류 개신교인의 출석률은 매우 크게 줄었다.중요한 이유: 종교 집회 참석을 일반적 의미의 “신”에 대한 헌신을 드러내는 신뢰할 수 있는 지표로 볼 수는 없다. 하물며 그리스도에 대한 헌신을 드러내는 지표는 더더욱 아니다. 역사를 보면 예배 참석률은 상대적으로 높은 시기에 진정한 충성도는 처절할 정도로 낮았던 때가 많았다. 따라서 이 수치를 근거로 건전한 믿음의 긍정적 신호 여부를 판단할 수는 없지만,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예배 참석률 감소는 인구 내에서 발생할지도 모를 한층 더 심각한 문제의 전조일 수 있다. 이와 관련한 중요한 사례 하나가 이번 주에 발표된 또 다른 보고서에서 나왔다. 종교 집회 참여 감소와 “절망사”의 증가를 연결한 내용이다. “절망사”는 2015년 프린스턴 대학교 경제학자 앤 케이스(Anne Case)와 앵거스 디튼(Angus Deaton)이 만든 용어이다. 이 두 사람은 20세기 후반에 발생한 미국인 기대 수명 감소 원인을 찾고자 했다. 그리고 중년의 비-히스패닉계 백인 남성과 여성 사망률의 극적인 증가가 약물 과다 복용, 자살 및 알코올성 간 질환이라는 세 가지 원인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로 인한 사망이 56퍼센트에서 387퍼센트로 증가했다고 데이비드 인트로카소(David Introcaso)가 지적하는데, 그 숫자는 연간 평균 7만 명에 이른다. 케이스는 뉴스위크 인터뷰에서 “좋은 직업, 안정적인 가정생활, 지역 사회에 내는 목소리 등 삶의 의미를 부여하는 데 도움을 주던 모든 기둥이 무너졌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기둥도 확실히 중요하지만, 또 다른 요인이 훨씬 더 해로운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다. 전미경제연구소(National Bureau of Economic Research)에서 발표한 새로운 연구 보고서에 따르면,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종교 행사 참여의 감소가 절망사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요인은 종종 간과된다. 그렇지만 NBER 연구자들은 “모든 주에 걸쳐서 종교성(religiosity)과 절망사 사이에는 강한 반비례 관계가 있음”을 발견했다.종교 행사 참여가 큰 폭으로 감소한 주에서는 1985년부터 2000년 사이에 절망사가 큰 폭으로 증가했다. 종교성의 쇠퇴와 절망사의 증가는 모두 다 같은 장소에 있는 같은 집단에 의해 주도되었다. 물론 또 다른 세 번째 요인이 두 가지 현상을 다 유발할 수도 있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설명은 종교성의 감소가 절망사 증가의 주요 원인 내지 중요한 기여 요인이라는 사실이다.청교도 법(Blue law) 폐지도 비슷한 효과를 냈다. “청교도 법”은 일요일 또는 종교적 휴일에 유흥 및 상업 활동(예: 주류 판매)을 금지하거나 규제하는 지역 또는 주 조례에 사용하는 용어이다. 이 법은 미국 독립 이전 식민지 시대부터 시행되었지만, 1960년대 초부터 점차 폐지되기 시작했다.NBER 논문은 청교도 법 폐지로 종교 출석률이 다소 감소했고(주간 출석률 5-10% 포인트), 절망사가 약간 증가했음(10만 명당 2명)을 보여준다. 이 정도의 사망률 증가는 인플루엔자로 인한 연간 사망자 수와 비슷하다.종교 집회 참석자의 감소는 수십 년 동안 계속되었다. 누구나 교회에 가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오래전 이야기이다. 이건 비단 교회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의무적 참여의식을 불러일으키는 시민제도는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그러나 모든 활동이 다 선택 사항이 되는 순간, 편안함과 위안을 찾을 수 있는 기관의 범위는 상당히 좁아진다. 2010년 컨트리 가수 제이슨 알딘(Jason Aldean)은 “Church Pew or Bar Stool”(교회 장의자 또는 술집 의자)라는 노래를 발표했는데, 그는 “교회 의자 또는 술집 의자 두 가지밖에 없는 동네”에 갇혀 있는 신세를 불평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여기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이는 두 가지 구원 방법은 위스키 또는 성경, 술잔 또는 부흥뿐.” 조악한 이분법에 불과한 이런 현실이 점점 더 많은 미국인이 직면하는 선택이 되고 있다. 믿음의 공동체에서 희망을 찾거나 술과 마약이라는 파멸적 자가 치료로 유도하는 외로운 절망에 빠지거나, 많은 이들 앞에 놓인 두 가지 선택지이다. 교회 출석을 회복하고 정상화하기 위해서는 많은 일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 각자가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사람들을 교회로 초대하는 것이다. 특히 교회를 멀리하는 그룹, 즉 청년, 남성, 독신자, 그리고 대학 학위가 없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야 한다. 그러한 인구 통계에 속한 많은 사람은 아예 자발적으로 교회에 갈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그 사람들은 교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리라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언제나 환영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제대로 알려야 한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눅 19:10) 오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절망사로부터 그들을 보호하는 생명과 소망의 유일한 근원이 예수님이며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원제: Why Falling Religious Attendance Could Be Increasing Deaths of Despai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절망사
코로나19
팬데믹
교회출석
기독교 기관이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는 3단계
by Joe Carter
2023-02-18
종교 뉴스 서비스(Religion News Service)에 따르면 이스턴 대학교(Eastern University)는 기독교대학협의회(Council for Christian Colleges and Universities, CCCU)에 속한 학교 중에서 성소수자(LGBT+) 교수진 채용을 허용하고 비차별 선언문에 성적 취향에 관한 정책을 수정한 최초의 비 메노파(non-Mennonite) 기독교 학교가 되었다. 이에 대해 CCCU는 이스턴 대학의 회원 자격을 “중지”하고 온라인 목록에서 학교 이름을 지웠다. 이 대학의 역사를 살펴볼 때, 이런 정책의 변화가 크게 놀라운 건 아니다. 이스턴 대학교는 신학적으로 자유주의 역사를 가진 주류 교단, 미국 침례교(American Baptist Churches USA)에 소속되어 있다. 학교는 이전에도 LGBT+ 학생을 공개적으로 환영했으며 학생 주도 클럽이 LGBT+ 학생을 옹호하도록 허용했다. 자유주의 주류 개신교 학교가 정통 기독교를 버리고 성적 부도덕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다지 놀랍지 않다.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그런 변화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밖에 없는지에 관해서 질문해야 한다. 이스턴 대학교는 1925년에 성경과 “신앙의 근본” 수용을 기치를 내세우며, 말 그대로 보수 신학을 지지하는 기관으로 설립되었다. 그러나 채 백 년이 안 되어 기독교 역사와 함께해온 기독교 정통을 저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그런 변화를 가져온 걸까? 정통에서 이단으로 가는 방식이 어디나 다 똑같다고 암시하는 것은 주제넘은 주장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세 단계가 반드시 포함되는, 일종의 반복되는 패턴이 있는 것 같다. 1.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시작한다.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최소한 논쟁의 여지가 없는 주장부터 시작하자. 현재 성에 대한 정통 기독교의 관점을 거부하는 모든 기독교 기관은 가장 먼저 젠더에 대한 평등주의(egalitarian) 관점부터 수용한다.이런 지적이 불공평해 보일 수도 있다. 평등주의는 이차 문제에 불과하다며, 여기에 동의하지 않는 정통 그리스도인이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렇지만 평등주의는 의미심장한 경계선을 만든다. 그리스도인을 갈라놓는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여성 목사의 문제도 세례 방식과 마찬가지로 이차적인 문제이다. 똑같이 신실한 신자라도 얼마든지 서로 다른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같은 교회를 섬길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성도덕은 다르다.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진리인 일차적 문제이다. “음행을 하는 사람들이나 … 간음을 하는 사람들이나, 여성 노릇을 하는 사람들이나,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이나 …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고전 6:9). 성경이 분명히 금지하는 성적 부도덕을 범하면서도 얼마든지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은 이단을 조장하는 행위이다. 평등주의와 이 문제를 연관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평등주의라는 토대가 없이도 LGBT+와 같은 특정 유형의 성적 부도덕을 받아들이면서 동시에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러나 그건 매우 어려울 것이다. 리건 던컨(Ligon Duncan)의 말이다. 보완주의(complementarianism)의 부정은 성경의 권위를 온전히 받아들이려는 교회를 약화한다. (따라서 결국 그리고 필연적으로 복음 전파에 해를 끼친다.) 성경은 분명하게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라고 가르치는데, 실제 교회 현장을 보면, 그 구절에서 “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에게 권위를 행사하는 것을 허락하노라”라는 의미를 뽑아내고 있다. 이건 한마디로 체조 묘기와 다르지 않다. 이런 현실은 결국 하나님의 백성의 삶 속에서 성경이 실질적인 역할을 감당하는 권위(functional authority)를 갖지 못하도록 만든다. 성경의 권위가 무너졌기 때문에 LGBT+ 그룹이 기독교 기관, 특히 대학에서 쉽게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 또한 젠더 특성을 제거하는 평등주의 운동은 젠더 본질주의(gender essentialism)라는 개념까지 훼손했다. 물론 이 모든 게 다 평등주의자의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결백하지 않다는 점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점은 비난이 아닌 명백한 현실의 강조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평등주의 관점에서 구축된 모든 제도는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단적 견해를 조장하는 세력에게 쉽게 넘어갈 위기에 처해있다. LGBT+ 수용을 옹호하려는 이들은 평등주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 2. 아무런 제약이 없는 미래를 추구한다.평등주의 운동은 과거가 욕망, 특히 여성의 욕망을 제약한다면, 그런 과거를 얼마든지 무시해도 된다는 개념을 대중화했다. 성경이 여자 목사를 허용한다는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이 운동은 거의 2,000년 동안의 성찰, 가르침, 그리고 주석 및 성경적 숙고를 버리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평등주의자의 시도는 논리와 해석학과 이성에 근거한 주장을 함으로써 이미 기정사실화된 결론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그런 그들을 따라서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은 기독교 역사가 간직한 사려 깊은 접근 방식을 아예 포기했다.메리 해링튼(Mary Harrington)은 이 집단이 추진하는 많은 사상이 진실 여부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합리성 여부도 따지지 않으며 단지 욕망을 얼마나 제한하는가에 의해서만 평가된다고 지적한다. 이제 욕망의 제한은 아예 금기가 되었다. 해링튼의 지적이다. “이제 사람들 대부분이 개인 욕망의 자유로운 발산을 제한하는 모든 대상을 다 적으로 믿고 있다.” 그런데 정통보다 더 욕망을 제한하는 것도 없다. 기독교 기관의 경우 정통성은 주로 성경에 기반을 두지만, 더불어서 신조와 교리 문답 그리고 초창기 신자들의 저술에도 일정 부분 의지하고 있다. 성적 부도덕을 조장하는 자들에게 정통 교리는 적이다. 개인의 욕망이 더 완전하게 지배할 수 있도록 정통 교리는 극복되어야만 한다. 억제되지 않은 욕망에 대한 선호가 소위 말하는 “깨어난” 사람들에게만 국한된다면 기독교 조직은 크게 걱정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욕망을 제약하는 모든 것을 반대하는 DNA를 가지고 있다. 너무나 많은 그리스도인이 “아무에게도 해를 끼치지 않는 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라는 신이교적 윤리에 전적으로 충성하면서, 겉으로는 마치 그게 성경적 윤리라도 되는 양 립서비스를 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 제약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타인에게 분명하고 명백한 해를 입히지 않는 한, 그 어떤 행동도 다 허용되어야 한다고 그들은 믿는다.여자 목사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남자 친구와 결혼하려는 당신 아들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 현실을 부정하고 남자로 살겠다는 당신의 딸은 누구에게 상처를 줄까?이제는 이런 질문을 하는 것조차 스스로를 구식으로 만드는 세상이 되었다. 여전히 계몽되지 않은 채 과거(1960년대 이전)에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멍청하게 서서 “역사의 잘못된 편”에 있기를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렇기에 처음에는 누구나 다 마음에서 허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조직과 기관에서 각종 제약을 향한 도전을 허용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 결과가 어떻게 될까? 최근 역사가 보여주듯, 제약은 도전받고 이어서 정통은 양보할 것이다. 3. 새로운 정통을 금지하라.중요한 도덕적 변화는 언제나 가볍고 사소해 보이는 양보에서 시작한다. 사소한 타협 말이다. 기관은 겉보기에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한 가지를 용인함으로써 이전에는 감히 손을 댈 꿈도 꾸지 못하던 불가침의 교리나 관행에 대한 제약까지도 서서히 완화할 방법을 찾는다. 대학 캠퍼스가 취하는 방식은 비슷하다. 거의 항상 LGBT+ 지지 단체에 대한 공식적인 인정과 더불어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교수를 용인하는 수순이다. 이런 식의 제스처는 해당 학교가 포용력이 있다는 인상을 주는 동시에 그다지 큰 부분을 양보한 것 같지 않다는 느낌을 준다. 단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거니까. “우리는 당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소중합니다.”그러나 아무리 사소해보이는 양보라도 그것이 보내는 신호는 사소하지 않다. 해당 기관에게 정통성은 이제 단지 선호도의 문제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교리의 정당성은 더 이상 “주께서 말씀하셨다. 그러니 너희는 따르거라”에 달린 게 아니라, “중요한 건 우리가 무엇을 믿는가이다. 그러나 그게 주님의 명령과 일치할 수도 있다”에 의해서 결정된다. 리처드 뉴하우스(Richard John Neuhaus)가 경고한 것처럼 그런 변화의 결과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 “정통이 선택 사항인 곳에서는 조만간 정통이 금지될 것이다.” 그가 “뉴하우스 법칙”이라고 말했을 때 의미한 바는 명확하다. 정통이라는 단어가 내포하는 것은 명확한 기준이다. 그런데 정통이 선택 사항으로 전락하는 순간, 정통을 정통으로 만드는 바로 그 본질을 양보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자유주의적 관용의 법칙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이제 “옳고 그름과 참과 거짓에 대해서 편협한 사람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정통적 견해를 거부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억누를 수 있는 무모함(또는 힘)이 없는 한, 정통파는 여전히 원하는 바를 계속 믿으면서 살 수 있다.많은 기관이 이런 변화가 제도적 역학을 어떻게 뒤집어엎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이 단지 적정선에서 타협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진실은 정반대이다. 정통을 타협한 그들은 성적 부도덕을 옹호하는 사람들의 손에 자신을 맡겼다.양보가 이뤄진 기관에서 누가 진짜 권력을 쥐고 있는지에 대해서 명확하게 구분하는 게 쉽지 않다. 무제한적인 욕망의 조장자들이 자신들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뉴하우스 법칙은 종종 기독교 기관 내에서 상당한 시차를 보이기 마련이다. 그 이유는 기관에서 사역하는 그리스도인이 나이스하기(nice) 때문이다. 나이스한 그리스도인은 설교자가 되고 싶은 여자의 욕망을 억누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상호보완론에 집착하는 착한 장로들을 몰아내지도 않는다. 나이스한 그들은 LGBT+ 회원의 욕구를 제한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동성애 행위가 부도덕하다는 믿음을 고수하는 소수의 젊은이를 몰아내고 싶지도 않다. 노인들이야 오래지 않아 죽을 것이고, 젊은이들이야 사회적 압력에 굴복할 때까지 기다리면 되니까 말이다. 급한 건 하나도 없다. 물론 연합감리교회에 속했던 한 기관이 그랬던 것처럼, 상황에 따라서 결국에는 무제한적인 욕망이라는 새로운 정통을 금지해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관은 얼마든지 인내심을 갖고 기다릴 수 있다. 결국 미래는 그들의 편이기 때문이다. 쇠퇴가 불가피한 건 아니다이러한 패턴이 기독교 기관을 무너뜨리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 그러나 타락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에서 희망을 품어야 한다. 패턴을 식별할 수 있다면, 그 패턴을 중단하도록 노력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이 이단에 빠져 영혼을 지옥으로 이끄는 비극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할 수 있다. 기독교 기관의 무결성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상황에 따라서는 하나님이 버리신 현실을 인정하고 새로운 시작을 위해서 떠나야 할 수도 있다. 기독교 기관의 쇠퇴가 반드시 불가피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쇠퇴를 막기 위한 부지런한 노력과 용기가 필요하다. 더 늦기 전에 지금이라도 시작한다면, 우리는 미래의 형제자매에게 정통 교회, 정통 교파, 정통 사역, 그리고 정통 대학을 물려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원제: 3 Steps Christian Institutions Take from Orthodoxy to Sexual Immoral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동성애
LGBT+
평등주의
보완주의
정통
이단
가독교대학
교황 베네딕토 16세(1927-2022): 그의 삶과 유산
by Leonardo De Chirico
2023-01-02
요제프 라칭거(교황 베네딕토 16세)가 95세로 2022년 12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죽음은 예상치 못한 것은 아니었다. 며칠 전, 그의 후임자인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트의 임종을 앞두고 전 세계 로마가톨릭 신자들에게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베네딕토는 20세기 로마가톨릭 신학계에서 탁월한 인물에 든다. 1927년에 태어난 베네딕토의 인상 깊은 삶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신학 전문가, 뮌헨과 본, 뮌스터, 레겐스부르크(1957-1977)에서 역임한 다양한 교수직도 포함된다.그는 뮌헨 대주교(1977-1981)이자 추기경이었으며, 신앙교리성 장관(1981-2005)이었다. 마침내 그는 교황(2005~2013)이 되었고, 성 학대 추문, 불투명한 재정 운용, 바티칸 내부의 끔찍한 음모 속에서 2013년에 사임하여 명예 교황이 되었다. 그의 오페라 옴니아(Opera Omnia/전집)는 총 16권으로 이뤄져 있는데, 학문적 깊이를 겸비한 이 저작은 신학과 교회 생활의 거의 모든 측면을 다루고 있다.베네딕토의 저작은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영적인 삶베네딕토의 영적인 삶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독일 언론인 페터 제발트(Peter Seewald)와 가진 인터뷰, Light of the World: The Pope, the Church, and the Signs of the Times에서, 우리는 베네딕트의 개인적인 기도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매일 수행하는 영성 훈련과 관련하여, 그는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성인들의 이름도 부르면 호소한다고 했다. 그가 특별히 뽑은 그 성인 목록―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보나벤투라(Bonaventure),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에는 그의 신학 프로그램이 반영되어 있다. 그는 성자 하나님의 어머니에게뿐만 이들에게도 도움을 요청했다.이 인터뷰에서 제발트는 베네딕트가 (그의 전임자 요한 바오로 2세와는 달리) 마리아중심적이라보다는 더 그리스도중심적이라는 일반적인 가정(심지어 일부 복음주의자들도 이렇게 생각한다)을 되풀이했다. 하지만 베네딕토는 이 인터뷰에서 자신은 파티마의 성모(Our Lady of Fatima)와 매우 가깝다고(그녀의 발현을 믿는다고), 그리고 마리아에 대한 최고의 공경(Mary’s hyper-veneration)에 참여한다고 말했다. 2012년에 한 어느 강론에서는 “하나님이 가까이 계시고, 마리아는 더 가까이 계십니다”라고 말했다.복음주의와 성경에 대한 그의 시각베네딕토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을까? 제발트와 가진 그 인터뷰에서 베네딕토는 프로테스탄티즘을 “고전적 고백들”(classic confessions)과 “새로운 프로테스탄티즘“(new Protestantism)으로 구별했다. 베네딕트가 보기에, 복음주의자들은 개발도상국의 종교 지형을 바꾸어놓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계속해서 베네딕토는 복음주의 운동은 교회가 아니며, 교회라고 불러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그 근거로 그는 복음주의 운동에는 교회를 정의하는 몇 가지 속성―즉, 올바르게 전수된 성품 직제, 교황이 다스리는 주교 직제, 바르게 집전되는 성체성사―을 결여하고 있다고 말했다.베네딕토에 따르면, 교회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이해는 “새로운 개념”일 뿐이다. 곧 복음주의자들의 교회란 단지 말씀이 불러 모은 공동체일 뿐이라는 것이다. 베네딕트는 영적 호기심과 로마 중심의 당혹감이 뒤섞인 눈으로 복음주의자들을 바라보았다.베네딕토가 성경을 높이 평가한 것은 사실이다. 그가 마지막으로 집필한 책들은 복음서의 역사적 설명을 따르면서 예수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의 진짜 입장을 파악해야 한다. 2010년에 그가 발표한 교황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에서, 그는 하나님의 말씀이 “성경보다 앞서고 성경을 능가한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성경은 신성한 말씀을 담고 있다”(17)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성경은 말씀을 담고 있다는 의미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이다.중요한 것은 성경의 신적 영감(교황권고 ‘주님의 말씀’도 이 점은 단호하게 주장한다)이 아니라 성경의 충분성(sufficiency)과 최종성(finality)이다. 베네딕토가 보는 성경은 이렇다: 성경은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성경보다 더 크다.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성경은 “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의 중요한 표현이며 신앙 교육을 위한 확실한 규범”인 가톨릭교회 교리서(Catechism of the Catholic Church)로 보완되어야 한다.‘정통파’ 교황?베네딕토는 종종 “정통파” 교황으로 불린다. 심지어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일부 그렇게 평가한다. 베네딕트가 ‘로마가톨릭’ 정통파였음은 확실하다.그의 신학에서 성경은 항상 권위 있는 교도권(authoritative magisterium)에 비추어 읽어야 한다. 니케아 그리스도론은 항상 “객관적” 로마가톨릭 교회론과 얽혀 있었다. 사도신경도 고백했지만, 트리엔트 및 제1차 바티칸 공의회 강령도 고백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항상 성체 희생의 표상과 연계되었다. 성령은 항상 교회의 위계 구조와 연결되었다. 에큐메니즘은 로마가톨릭 밖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결함이 있고 로마 교회만이 유일한 보편 교회(the catholic)라는 관점에서 늘 논의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의 선교는 언제나 온 세상을 품겠다는 가톨릭 프로젝트를 염두에 두고 추진되었다. 로마가톨릭교회가 교회로서 가지는 태도는 본질적으로 교회의 정치적 역할과 결합해 있었다. 이처럼 모든 면에서 베네딕토는 로마가톨릭 정통의 옹호자였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신학 전문가로 재직하던 시절부터 베네딕토는 비성경적인―심지어 반성경적인―교리(예를 들어, 트리엔트 공의회의 반종교개혁 교의나 마리아 교의, 교황 무류성)를 바로잡으려는 의지는 전혀 없이 “내부로부터의” 갱신을 도모했다. 그는 로마 교회의 성례전 구조 및 위계 구조를 바꾸려는 노력도 전혀 하지 않았다.베네딕토의 “보편성”(catholicity)은 항상 로마 중심 체제에 봉사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세상의 세속화 경향과 자신이 속한 교회의 자유주의 경향에 맞서 싸웠다. 많은 사람이 그의 2013년 사임을 패배로 해석했다. 개인적인 항복이었음은 분명하다. 베네딕토의 후임자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보다는 훨씬 더 “보편교회적”(catholic)이고 훨씬 덜 “로마교회적”(Roman)이며, 여러 면에서 베네딕토와는 정반대이다. 베네딕토는 로마교회의 교리와 구조가 항상 앞장서기를 원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는 로마 교회의 체제를 중시하지 않으면서 그의 교회를 더욱 “보편적인” 교회로 (곧, 더욱 포용적인 교회로) 만들어 가려고 노력하고 있다.그렇다고 로마가 이미 베네딕토를 거부했다는 것일까? 그렇게 말하기에는 너무 이르다. 확실히 오늘날 로마가톨릭교회는 정체성의 위기를 겪고 있다. 시스템은 항상 똑같지만, 프란치스코는, 베네딕토와는 달리, “로마”(Roman)보다는 “가톨릭”(catholic)을 더 강조하려고 열심히 노력하고 있다. 이 두 가지 옵션은 (즉, 베네딕트냐, 프란치스코냐는) 성경적 개혁에 열려 있지 않은 시스템 내부에 긴장을 조성하고 있다.원제: Pope Benedict XVI (1927-2022): His Life and Legac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베네딕토16세
프란치스코
로마가톨릭교회
보편교회
가톨릭
정통
복음주의교회
트리엔트공의회
프로테스탄티즘
설교에 대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by Joe Carter
2022-12-09
401년 전 오늘, 1621년 12월 9일, 미국 땅에서 처음으로 설교가 기록되고 출판되었다. 영국 선박 포춘 호를 타고 신대륙 플리머스 식민지로 오겠다는 목사가 없었기에 로버트 쿠쉬맨(Robert Cushman)이라는 집사가 고린도전서 10:24을 본문으로 청교도들에게 설교를 전한 것이 그 시초이다. 이날을 기념하여 설교와 관련하여 알아야 할 아홉 가지를 적어보았다. 1. 설교가 무엇인지 정의하기란 의외로 어려울 수 있다.케임브리지 사전은 설교(sermon)를 “목사가 종교적 또는 도덕적 주제에 대해 연설하는 기독교 교회 의식의 한 부분이며, 종종 성경에 기록된 것에 기초한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러한 정의는 유용한 출발점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교회 역사를 통해 설교를 구성했던 많은 부분에 대한 이해를 놓친다. 오스틴 펠프스(Austin Phelps)는 1895년 The Theory of Preaching에서 유용하긴 하지만 다소 협소한 정의를 제안했다. 설교는 성경에 담긴 종교적 진리를 대중의 마음에 전달하는 구두 연설이며 정교한 설득의 방식으로 진행된다. 생스터(W. E. Sangster)는 다음과 같은 유용한 설명을 덧붙였다. “연설은 사람이 사람들에게 하고 싶은 말을 전하는 것이고, 설교는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전하는 것이다.”2. 강론은 설교가 될 수 있지만 모든 설교가 강론은 아니고, 이 둘은 설교학과 관련이 있다.설교는 설교학(homiletics)이라고 불리는 설교의 기술에 의해 창조되고 만들어지는 작품이다. 설교학은 설교의 구성과 전달, 그리고 강론자 또는 설교자라고 불리는 설교학을 실현하는 사람을 포함한다. 강론(homily)은 설교와 비슷하나 설교보다는 전형적으로 더 짧고 경건하다. 이에 비하여 설교는 역사적, 문화적, 사회적 측면을 다 탐구하고 아우르는 영역이다. 3. “설교”라는 단어는 성경에 나오지 않지만, 설교는 성경에서 볼 수 있다. 설교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 성경에서 찾아보는 것은 “설교”라는 단어가 성경에서 사용되지 않기에 더욱 어렵다. (“sermon”이라는 영어는 고전 프랑스어 “discourse”(토론)에서 유래하였다.) 성경에서 가장 잘 알려진 설교인 산상수훈은 마태복음의 기자 마태에 의해 붙여진 명칭이 아니고 교회 역사 속에서 나중에 그런 명칭이 붙여진 것이다. 성경에서 설교를 발견하려면 설교의 사례를 찾아보아야 한다. 이런 식으로 성경에서 설교의 사례를 찾아보았을 때, 가장 긴 설교 시리즈는 모세가 쓴 신명기에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설교를 가장 많이 수록한 책인데, 베드로, 스데반, 빌립, 야고보, 바울의 설교 총 19편이 들어 있다.4. 주해 설교와 주제 설교, 이 둘이 현대 설교의 지배적인 형식이다.역사를 통틀어 설교는 다양한 목적으로 사용되었고 다양한 형식으로 진행되었다.그러나 오늘날 설교의 두 가지 주된 범주라면, 하나는 주해 설교이고 또 하나는 주제 설교이다. 주제 설교는 특정 성경 본문을 토대로 한다기보다는 특정 주제를 중심으로 하는 설교이다.마크 데버(Mark Dever)의 설명처럼, 주해 설교는 설교 본문의 요점을 설교하는 것이 중심이 된다. 주제 설교 또한 설교 본문을 설명하는 주해를 넣을 수 있다. 티모시 S. 워렌(Timothy S. Warren)에 따르면 주제 설교란 공통된 주제를 공유하는 두 개 이상의 성경 본문 구절이나 장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중심으로 전하는 설교이다. 그리고 팀 켈러(Tim Keller)는 “모든 주해 설교도 부분적으로 주제를 가지고 있다”며 “성경에 충실한 주제 설교는 다양한 본문의 여러 ‘미니 주해들’로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라고 또한 지적하고 있다.5. “설교의 황금기”가 있었다.설교 연구 분야의 학자들은 1689년부터 1901년까지를 설교의 “황금기”로 보았다. 이 시기 동안 출판된 설교문은 문학의 가장 지배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18세기 내내 소설 한 페이지가 출판되는 동안 6페이지의 설교가 출판되었다. “설교 이벤트”(회중의 설교 청취 경험)는 공공 토론의 지배적인 형태 중 하나였다. Oxford Handbook of the British Sermon 1689-1901에 따르면 어림잡아도 1689년부터 1901년 사이 대영 제국 안에서 잠정적으로 일어났던 설교 이벤트는 2.5억 건이었다.6. 흑인 프로테스탄트 설교가 가장 길고, 가톨릭 설교가 가장 짧다.퓨 리서치(Pew Research)는 부활절 기간이 포함된 2019년 4월 7일부터 6월 1일 사이에 온라인에 올라온 거의 5만 건의 설교를 분석했다. 이 연구는 교회 웹사이트에서 표본으로 살펴본 설교 시간의 중앙값이 37분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중앙값이 25분인 주류 개신교 설교와 중앙값이 39분인 복음주의 개신교 설교와 비교할 때, 중앙값이 14분인 가톨릭 설교가 가장 짧다. 역사적으로 흑인 개신교 설교가 54분으로 가장 긴데, 이는 가톨릭 설교 시간 중앙값의 3배가 넘는다.7. 미국에서 복음주의 설교는 다른 전통 교단들보다 “죄”와 “영원한 지옥”을 대체로 더 많이 이야기한다. 2019년 퓨 리서치 연구에서 특정 단어와 구절이 특정 기독교 그룹에서 다른 기독교 그룹에서보다 더 자주 사용되었음이 밝혀졌다. 분석에 포함된 4대 주류 기독교 전통 교단에 속한 98퍼센트 이상의 교회의 설교에서 “안다(know)” “하나님” 그리고 “예수님” 등의 단어가 발견되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은 “영원한 지옥” “풀어주다(loose)…구원” ”범하다(trespass)…죄” 그리고 “집…천국” 같은 단어들을 다른 그룹들보다 더 사용하는 경향이었다. 역사적으로 흑인 개신교 집회에서는 “능력의 손(powerful hand)” 그리고 “할렐루야…오라(come)” 같은 단어들을 두드러지게 사용하고 있었다. 후자의 문구들은 이 조사 기간에 모든 역사적 흑인 개신교 교회들의 22퍼센트의 설교에서 어떤 형태로든 나타나는 것이 보였다.8. 미국의 흑인 개신교인들은 영감을 주는 설교가 어느 교단에 소속되느냐의 문제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미국 흑인 개신교인의 압도적 다수(77%)는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 매우 중요한 요소는 영감을 주는 설교라고 말한다. 이 77퍼센트의 비율은 새로운 교회를 찾을 때 현재 교단과 같은 교단에 남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답한 사람의 2배가 넘는 비율이고, 지도자들이 그들과 인종과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14%)이나 교인들이 그들과 인종과 민족성을 공유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13%)의 3배가 넘는 비율이다.9. 미국의 교인들은 그들이 듣는 설교에 대부분 만족한다.퓨 리서치가 2019년 조사한 결과 최소 1년에 두세 번 이상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의 90퍼센트가 자신이 듣는 설교에 만족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복음주의 개신교인 10명 중 6명(61%)이 자신들이 듣고 있는 설교에 ‘매우 만족한다’고 답해 ‘다소 만족한다’는 응답(32%)보다 2배 가까이 많았다.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Serm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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