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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다. 예수의 부활은 더더욱 ...
by Steve Bateman
2024-03-28
마크 트웨인이 믿음(faith)을 설명한 유명한 말이 있다. “당신이 알고 있는 게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믿는(believe) 것.” 그는 아마도 많은 그리스도인의 그런 모습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럼 사려 깊은 그리스도인은 어떨까? 그들은 반대되는 증거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육체의 부활을 믿는 걸까, 아니면 증거 때문에 믿는 걸까? 오늘 그 점을 살펴보자. 게다가 지금 이 시점은 부활이라는 기독교의 핵심 주장에 대한 몇 가지 증거를 고려하기에 아주 좋은 날이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3월의 이데스(Ides of March, 3월 가운뎃날—에 수십 명의 로마 원로원 의원들이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암살했다. 그날로부터 거의 77년 후인 서기 33년 4월 5일 일요일쯤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역사가가 과거에 대한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 사용하는 네 가지 관행을 따르면 우리는 두 사건 모두에 대한 믿음을 정당화할 수 있다.1. 두 가지 방법의 구분과학적 방법은 관찰을 기록하고, 가설을 세우고, 예측하고, 반복 가능한 실험을 수행하고, 결과를 분석한다. 그러나 수많은 역사적 사실은 과학적 방법을 활용한 반복 실험이 불가능하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9년 1월에 루비콘 강을 건넜다거나, 조지 워싱턴이 1776년 12월 25일에 델라웨어 강을 건넜다거나, 연합군이 1944년 6월 6일에 영국 해협을 건넜다는 과학적 증거는 없다. 그럼에도 합리적인 사람은 이러한 사건이 사실이라고 믿는다. 역사적 방법으로 검증되었기 때문이다.역사가 루이스 고트샬크(Louis Gottschalk)는 역사적 방법을 “과거의 기록과 자료를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분석하는 것”으로 정의했다. ‘양심적인 역사가’는 개인적인 편견을 버리고, 문서를 연구하고, 유물을 조사하고, 사실을 수집하고, 증거를 따른다. 귀추법(Abductive reasoning)을 통해 역사가는 사실을 가장 잘 반영하는 설명을 제시한다. 기독교의 핵심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역사적 주장이 있다. 과학에 호소하여 이 주장을 거부하는 것은 과학의 한계를 무시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지 아니하셨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다”(고전 15:14)라고 인정했다. 다른 종교와 달리 기독교의 핵심 주장은 역사적 방법을 통해 검증과 반증이 가능하다. 2. 두 간격의 조사먼저, 사건이 일어난 시점과 이를 보고하는 원본 원고 사이의 간격을 조사한다. 이 간격이 짧을수록 작성자는 실제 사건에 더 가깝다. 카이사르가 기원전 44년에 암살되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비록 우리가 그 현장에 있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과거 사건을 믿는 것과 같은 이유로 그 사실을 믿는다. 목격자들은 눈으로 본 사실을 썼고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했다.많은 사람이 카이사르의 암살을 믿는 이유는 단순히 고등학교 때 1599년에 초연된 셰익스피어의 유명한 희곡 줄리어스 시저(Julius Caesar)를 읽었기 때문이다. 셰익스피어의 출처는 토마스 노스(Thomas North)가 1579년에 영어로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Parallel Lives)이다. 하지만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암살 후 약 160년이 지난 서기 2세기 초에 가서야 그 책을 썼기 때문에 목격자가 될 수는 없다. 그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출처는 누구였을까?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의 갈리아 정복기(Gallic Wars)를 일부 자료의 출처로 사용했다. 카이사르야 당연히 당사자로서 암살의 목격자였지만, 그가 거기에 관해서 글을 쓰는 건 말이 안 된다. 아마도 키케로가 목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운명적인 날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지 않은 채 일 년 후에 죽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 사건의 살아 있는 목격자를 접할 수 없었지만, 로마 사회의 저명한 구성원으로서 아마도 지금 우리에게는 없는 여러 문서와 구전 전통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카이사르의 암살과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문서 사이의 간격은 약 160년이다. 이에 비해 신약성경은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과 그 가까운 동료들에 의해 기록되었다. 플루타르코스는 카이사르가 죽은 지 160년 후에 글을 쓴 반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빈 무덤과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출현이라는 두 가지 핵심 주장을 확인하거나 부인할 수 있는 목격자들의 생애 동안에 글을 썼다.서기 50년에 이미 바울은 예수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셨다고 기록했다(갈 1:1). 예수께서 서기 33년에 죽었다면, 부활과 이를 보고하는 최초의 원본 사본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20년 미만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고대 역사의 표준이 되는 플루타르코스나 신약성경 작가가 쓴 원본이 없다. 그래서 두 번째 간격이 중요하다. 두 번째는 원본 원고와 현존하는 원고 사이의 간격이다. 역사적 방법은 텍스트 비평을 사용하여 (손으로 쓰인) 현재의 사본을 검토하여 원본을 재구성한다. 이 간격은 짧을수록 좋다.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원본 원고와 우리 손에 들린 가장 초기 원고 사이의 간격은 무려 800년 이상이다. 거기에 비해서 요한복음의 원본 사본과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요한복음 사본 조각 사이의 간격은 고작해야 50년이다. 신약학자 대럴 복(Darrell Bock)의 결론이다. “복음서는 예수와 카이사르에 관해 출처 간격의 증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다른 어떤 고대 기록과 비교해도 뛰어나다. 고전과 카이사르 연구에 효과가 있는 연구 방식을 예수의 기록에 적용한다면, 예수의 기록은 신뢰성이 탁월하다.” 3. 두 숫자의 비교법정에서 믿을 만한 증인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사본도 많을수록 좋다. 아무리 신실한 증인이라 할지라도 자신이 보지 못한 세부 사항을 생략할 수 있고 또 봤다고 착각하는 세부 사항을 추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증언을 전체적으로 종합하면, 주변적인 세부 사항에는 사소한 차이가 있을 수 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의 요지는 분명해진다. 신약성경 사본의 수를 다른 고대 문서와 비교하면 신약성경이 가진 역사적 증거의 우월성이 명확해진다. 신약성경은 다양한 부분을 망라하는 23,986개의 사본을 가진 것에 비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경우에는 사본이 채 열 개가 되지 않는다. 이건 엄청난 숫자의 차이이다.신약성서 학자 댄 월리스(Dan Wallace)는 현존하는 신약성서 사본들을 모두 합쳐서 쌓으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4개보다 더 높을 것으로 추정한다. 대조적으로, 현존하는 모든 고대 그리스 작품의 경우에 모든 사본을 다 쌓아도 높이가 1미터를 조금 넘을 뿐이다. 4. 두 동기의 검토원본에 대한 신뢰할 수 있는 재생산 기록이 많더라도 작성자가 진실을 보고했는지 아니면 거짓말을 날조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동기는 두 가지이다.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또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플루타르코스 시대에 카이사르 암살에 관한 이야기는 널리 받아들여졌다.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평판이나 사회적 지위에 해를 끼칠지 모를 논란의 여지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위험한 글을 전혀 쓰지 않았다. 그는 글을 통해서 사회 엘리트 사이에서 자신의 지위를 높였을 뿐이다. 그는 역사적 주장을 글로 써서 당시에 오늘날의 베스트셀러 계약에 버금가는 이익을 얻었다. 그는 잃을 것이 거의 없었고 얻을 것이 많았다. 예수의 초기 제자들은 진실 아니면 거짓말을 했다. 그런데 굳이 그들이 왜 거짓말을 할까? 그들의 대담한 주장은 논란의 여지가 있었고 정치적으로 위험했다. 목격자의 증언(행 1:22)으로 인해 그들은 지위와 부, 자유를 잃었고 어떤 사람은 생명까지 잃었다.역사가는 그러한 고통을 문서의 신뢰성에 대한 논거로 간주한다. 고트샬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진술이 증인, 그의 사랑하는 사람 또는 그의 대의명분에 해를 끼치는 경우 그것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보았다고 주장함으로써 자신과 가족, 그리고 가장 가까운 친구들에게 큰 해를 끼쳤다. 일관되고 지속적인 그들의 증언을 가장 설명하는 방법은 그들이 진실을 말했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광신자가 적지 않다. 그러나 옳다고 생각해서 죽을 사람은 있어도 거짓임을 알면서 죽을 사람은 없다. 그들은 부활이 이익을 준다는 이유로 증언한 게 아니다. 부활이 사실이었기에 증언했다. 3월의 이데스를 기념하는 역사학자가 몇 명은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은행조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 부활절에 모든 대륙에서 수십억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을 축하할 것이다. 카이사르는 세상에 율리우스력을 주었지만, 1세기에 목수의 아들이 태어나면서 우리에게는 연수를 계산하는 새로운 방식이 생겼다. 그건 랍비와 크게 다르지 않은 그의 가르침 때문이 아니다. 그의 죽음 때문도 아니다. 예수 외에도 로마가 십자가에서 죽인 적의 숫자는 적지 않다. 2068년 전 3월 15일,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로마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세계는 이를 하나의 역사적 각주로 받아들일 뿐이다. 그로부터 불과 77년 후, 예수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리고 세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원제: I Believe in the Death of Julius Caesar and the Resurrection of Jesus Chris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작은 자로 살아가기
시편 131편 묵상
by 고명환
2024-03-25
1 미국의 한 주립대학에서 가르치던 젊은 한국인 체육 교수가 점심을 먹던 자리에서 각진 자세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저는 한국 체육계에 한 획을 긋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위인전의 끝을 장식할 만한 문어적 수사를 써서 밝힌 포부였다. 사람이 운집한 공식 석상에서 들을 법한 선언과도 같은 말을 몇이 둘러앉은 조촐한 식사 자리에서 듣게 되니 머릿속이 다소 혼란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말이 의미하듯 그 젊은 교수는 성공하여 큰 자가 되고 싶어 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두 나라를 오가며 인맥을 만들기에 부지런히 움직였고 자신의 이름을 여러 방면으로 알리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 젊은 교수처럼 큰 자가 되어 보겠다는 사람을 탓할 마음은 없다. 그렇다고 칭찬할 마음은 더욱 없다. 다만, 왜 큰 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는 알고 싶다. 그 동기와 목적을 알고 싶은 것이다. 사람을 지배하고 싶어서, 관심과 사랑을 받고 싶어서, 아니면 이름을 남기고 싶어서. 여기에 더해, 누구를 위해 큰 자가 되려고 하는지도 묻고 싶다. 자신인가, 아니면 그 누구인가.사람을 줄곧 영향권 아래 두어 왔던 세상은 언제나 그랬듯 이 시대에도 큰 자가 되어야 한다고 설파한다. 곧, 높은 지위에 오르거나, 많은 것을 가지거나, 유명해지라고 부추긴다. 그래야, 후회 없는 만족한 인생이라고 속삭인다. 사람들이 알아주고 대우해 준다고 강조한다. 큰 자로 살라는 세상의 가르침은 일찍이 교회의 울타리도 수월하게 뚫고 진입했다. 사람의 욕망을 숙주 삼아 성경적 가치인 양 버젓이 행세하고 있다. 머리가 될지언정 꼬리가 되지 말라고. 주님께 영광을 돌리려면 각 분야의 으뜸이 되어야 한다고. 교회 안에도 큰 자가 있으니 큰 자로 쓰임 받기를 사모하라고. 장로, 권사가 되어 권위를 가지라고. 교회를 부흥시켜 큰 목회를 하라고, 아니면 자신을 확대해서 큰 교회의 담임이 되라고. 그런데, 교회의 머리시요 심판 날의 재판장이신 주님은 우리가 이 세상의 문화와 제도가 인정하는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으시다. 그분의 나라에서 인정받는 큰 자와 다를 뿐 아니라 그분의 가르침과 상반된다. 주님은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된다’고, ‘큰 자가 되려면 작은 자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치셨다. 앞서간 진실한 성도들 역시 큰 자가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주님께서 받으실 만한 그릇이 되고자 힘썼을 뿐이다. 오히려, 큰 자가 되어 세상의 영화와 사람의 영광을 얻는 길을 경계했다. 2 다윗은 큰일을 이룬 사람이었지만, 스스로 위대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이런 겸손한 마음을 시편 131편은 잘 보여준다.시편 131다윗의 시,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1주님, 이제 내가교만한 마음을 버렸습니다.오만한 길에서 돌아섰습니다.너무 큰 것을 가지려고나서지 않으며,분에 넘치는놀라운 일을이루려고도 하지 않습니다.2오히려, 내 마음은고요하고 평온합니다.젖뗀 아이가어머니 품에 안겨 있듯이,내 영혼도 젖뗀 아이와 같습니다.3이스라엘아, 이제부터 영원히오직 주님만을 의지하여라. (새번역)1절에서 다윗은 교만한 마음, 오만한 길, 그리고 큰 것을 이루려는 욕망을 버렸다고 고백한다. 모두 마음의 평안을 빼앗는 신앙의 독소들이다. 경험에 의하면, 사람의 영혼을 쉬지 못하게 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다. 스스로를 대단하게 여기고,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며, 눈을 높은 곳에 두고 자기를 중심에 두고 살 때 영혼은 피곤하다. 즉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기준으로 살면, 영혼은 안식하지 못하고 평안은 모두 빼앗기게 된다. 더불어, 커다란 것을 계획하고 분주히 움직이는 동안 영혼은 쉴 새가 없고 피폐해져 간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위해 가지는 이기적인 마음과 행동이 오히려 자신을 해치고 망가뜨리는 꼴이 되는 것이다. 다윗은 아마도 1절에서 언급한 마음과 태도로 인해 영혼의 전쟁터를 분명히 경험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가져다준 것은 명성이나 부였지 영혼의 안식과 평화는 아님을 깨달았을 것이다. 더더욱, 안정을 보장해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것이다. 오로지, 평화와 안정은 주님 안에서만 영혼이 자리잡을 때 주어지는 것이며, 높아진 마음이나 분에 넘치는 야망과 함께 그분이 계시는 평강의 영역에 들어갈 수 없음을 잘 알게 되었을 것이다. 자기에게서 떠나 주님의 영역으로 간 다윗에게 찾아온 것은 영혼의 평화와 안정이었다. 젖 뗀 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있듯이 고요하고 평안했다(2절). 젖뗀 아이에게 여전히 어머니의 품은 필요하다. 어머니의 품은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한 곳이 아니라, 가장 안전하고 포근한 안식처이다. 다윗에게 주님의 품이야말로 진정으로 안전한 쉼의 장소였다. 그 어떤 것이 줄 수 없는 영혼의 안식과 완전한 안전을 보장해 주는 안식처인 것이다. 이 시는 여러 “성전에 올라가는 순례자의 노래” 중 하나로 불리며 사랑받았을 것이다. 주님이 계신 성전을 향해 올라가는 무리에게 참으로 적절한 찬양이 아닐 수 없다. 영광의 하나님을 뵈러 올라가는 순례자들이 정리하지 않은 부정한 마음과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안고 다가갈 수는 없다. 교만한 마음과 오만한 길로 집약되는 주님께서 대적하는 마음은 물론, 욕심과 후회 원망 분노 등의 격정을 모두 비워내야 한다. 다윗의 본 시는 순례길에 오른 성도들이 읊조리고 노래하며 올라갈 때 충분히 그들의 마음을 정화하고 주님을 향한 뜨거운 갈망을 불러일으켰으리라 짐작한다. 3열왕기하 4장에 한 부유한 여인이 등장한다. 수넴에 살고 있던 그 여인은 엘리사가 하나님의 사람인 것을 알아보고 성심껏 섬기기 시작했다. 엘리사가 그곳을 지나갈 때마다 음식을 대접했고 거처를 마련해서 머물러 편히 쉴 수 있도록 특별한 편의를 제공했다. 어느 날, 엘리사는수넴 여인의 남다른 정성에 보답하고 싶은 마음으로 그녀가 원하는 것이 있는지 물었다. 왕이나 군사령관 같은 권력자도 그의 말이라면 들어줄 수 있는 위치에 있다며 무엇이든지 필요한 것을 구하라고 했다. 그때, 그 여인은 의미심장한 대답을 한다. “나는 내 백성 중에 거주하나이다”(열왕기하 4:13, 개정개역). (새번역은 “저는 저의 백성과 한데 어울려 잘 지내고 있습니다”로 풀어서 번역했다.) 여인의 대답은 하나님의 백성의 한 사람으로 아쉬울 것 없이 만족하게 살아가고 있으니 구할 것이 없다는 뜻이다. 물론, 수넴 여인은 부유한 환경에서 남편과 함께 평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그렇다고 그녀의 삶에 허전한 구석 없이 완벽하게 채워졌기 때문에 엘리사의 호의를 에둘러 사양한 것은 아니다. 그녀는 어쩌면 가장 큰 것을 갖지 못한 불행한 여인이었을 수도 있다. 아들을 낳지 못해 대를 이어줄 수 없는 약점을 가진 여자였다. 당시의 관점에서 수넴 여인은 자식을 낳지 못하는 저주받은(복 받지 못한) 여자라는 사회적 편견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 그늘 아래 보통의 여자 같으면 될 수 있는 대로 사람의 눈을 피해 고립된 삶으로 자신을 몰아가기 쉽다. 하지만, 대답에서 보여주듯 그녀는 동족과 어울리며 부족함 없이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 오히려, 엘리사가 여인에게 아들이 없는 것을 알아내고는 딱하게 여겨 아들을 낳게 해 준다. (수넴 여인은 열왕기하 8장에 다시 등장하며, 성경은 이름을 특정하지 않은 한 여인과 관련한 이야기에 상당한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수넴 여인은 마음을 높여 백성을 분리하고 멀리하며 충분히 특권 의식 속에 살 만한 위치에 있었다. 왕의 마음까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엘리사라는 큰 인물을 통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는 유력한 여인이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마음은 백성 중에 있었다. 백성의 한 사람으로 평범하게 사는 삶을 소중하게 생각했고 또 그것 이상을 바라지 않았다. 수넴 여인의 낮고 겸손한 눈 높이가 더 가질 수 있고 더 높아질 수 있는 기회를 가져다 줄 엘리사의 호의도 정중하게 거절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실로, 평범한 여인 같으나 비범한 인물이었고, 작은 자인 것 같으나 큰 자였다. 복음서는 드문 경우이지만 제자들 사이에 빚어진 다툼을 기록했다. 다툼의 원인은 자기들 가운데 누가 가장 큰 자냐 하는 논쟁이었다. 그들이 다툰 이슈는 서열이 필요하냐 아니냐가 아니었다. ‘누가 더 크냐’였다. 예수님께서 선택하신 열두 제자들 간에 그래도 서열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아마 그들은 부름을 받은 순서나, 배운 정도, 혹은 가문, 아니면 다른 어떤 기준을 대면서 각자의 상위를 주장했을 것 같다.“제자들 사이에서는, 자기들 가운데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냐 하는 문제로 다툼이 일어났다. 예수께서 그들 마음 속의 생각을 아시고, 어린이 하나를 데려다가, 곁에 세우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 어린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누가복음 9:46-48).먼저, 제자들이 왜 서로 간의 서열 문제로 다투었는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를 찾기 위해서는 당시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고려해야 한다. 제자들이 살았던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는 한 사람의 사회적 위치나 계급이 사회생활을 하는 데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거대한 제국의 일원이었던 유대 사람들 역시 그리스-로마의 문화와 사회 질서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함께 모이거나 다른 사람을 만날 때 서로가 가지는 사회적인 위치를 묻고 거기에 맞는 예우를 해 주어야 했다. 당연히, 잘 모르는 사람에게는 우선 사회적인 위치를 물어보아야 했다. 이에 따라 상대방이 나보다 나은 위치나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는 경의를 표하고 낮은 자세를 보여야 했다. 바로 제자들의 다툼은 이런 문화 사회적인 배경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다음으로, 왜 그들이 부르심을 받은 초기에는 관심이 없었던 이슈를 부각시키고 논쟁을 벌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간단한 대답은 예수님께서 그들 사이의 서열을 정해 주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오늘날 같으면 열두 명이 효과적으로 조직되고 움직이기 위해 적어도 팀장 정도는 세웠어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웬일인지 그들 사이에 서열을 정해 주시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이 어떤 시점에 이르기 전까지는 제자들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예수님의 인기가 치솟고 그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언가 큰일이 일어날 것만 같은 분위기가 조성되자 제자들의 계산은 저마다 복잡해지기 시작했고 서열 문제는 그들 안에 크게 떠올랐다. 서열에 의해 미래에 차지할 지분이 각각 달라질 거라는 공통의 계산이 충돌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장차 세상의 권세를 정복하고, 기대하는 강력한 왕국이 세워지면 그들이 얻게 될 지위와 영예에는 분명 차등이 있을 것이다. 이때 더 큰 자리와 권세를 꿰차겠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동기가 작용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누가 더 높은 위치에 앉게 되느냐’는 단순한 논쟁 같아 보이나 그 안에는 영예와 권세와 대접을 좋아하는 이기적인 마음들이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제자들의 속된 마음을 간파하신 예수님은 기존의 관행과 질서를 뒤집는 방법으로 대처하신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 곁에 세우셨다. 예수님이 직접 어린아이를 데려와 그분 가까이에 세운 일은 그 시대의 관행으로서는 이례적인 행동이었다. 보통은 어린아이를 직접 지적하여 이리 오라 명령하면 될 일이었다. 어린아이는 신분 피라미드 구조에서 가장 아래층에 속하는 부류 중 하나였고, 종처럼 대우해도 크게 문제 될 것 없는 사회였다. 가정에서조차 소유물로 취급했고 심지어는 팔기까지 했으니 예수님께서 손수 데려다 곁에 세우신 행동은 매우 드문 일이 아닐 수 없다. 이 사건의 또 다른 저자인 마가는 그 어린아이를 껴안아 주셨다고 기록한다(마가복음 9:36). (어린아이를 어떻게 대우하셨는지 직접 본 제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에 어린아이들을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꾸짖다가 주님의 책망을 듣게 되는 잘못을 범한다(마태복음 19:13-15).) 어린아이를 곁에 세우신 뒤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보내신 분을 영접하는 것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어린아이를 귀하게 여기라는 뜻이 아니다. (물론, 어린이 주일 설교 본문의 주제로 적합하지 않다.) 어린아이처럼 세상에서 작은 자여서 무시당하고 천대받는 사람들을 주님을 영접하듯이 받아들이고 친절하게 대접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는 엄격한 신분 사회에 던지는 혁명적인 말씀이었다. 우월한 위치의 사람이 자기보다 낮은 신분의 사람을 영접하는 일은 없었다. 최소 나와 지위가 같거나 높을 경우에만 영접할 대상이었다. 어린아이들이나 천한 신분의 사람들은 오히려 손님이 오면 때론 손님의 발을 씻어 주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헌데, 주님은 작은 자가 되어 그들을 환영하여 영접하라고 가르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나를 보내신 분 곧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주님은 논쟁을 종식하는 역설로 말씀을 마무리하신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사람이 큰 사람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의 뜻이 내포된 것으로 해석하고 적용할 수 있겠다. 같은 문제를 다룬 마가의 복음서를 따라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작은 자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겨야 한다’는 예수님의 말씀과, 마태가 기록한 ‘자신을 낮추는 사람이 하늘 나라에서는 가장 큰 자’라는 말씀에 따라 이중적 의미를 갖는 가르침으로 해석할 수 있다.주님 나라의 가치와 원리를 가르쳐 주는 동시에 그것을 땅에서 어떻게 구현해야 하는지를 말씀하신 것이다. 즉, 하늘 나라의 큰 자들은 세상에서 작은 자로 사는 사람들이고(마태복음 18:4), 아울러 작은 자가 되어 자신을 낮추고 모든 사람을 영접하고 섬기는 사람들이다(마가복음 9:35). 그러므로, 유한한 세상의 가치와 제도 아래에서 권세와 영화를 얻겠다고 큰 자가 되려 하기보다,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인정받을 남을 섬기는 작은 자로 살아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사실, 제자들은 깨닫지 못했지만 예수님은 그 원리대로 사셨다. 그리고, 스스로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고 말씀하셨다. “인자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으며,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하여 치를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내주러 왔다”(마가복음 10:45).말씀처럼 예수님은 섬기러 오셨고 자신을 낮추어 작은 자로 섬기며 사셨다. 어린아이, 종, 여인들과 동등한 사회적 위치에서 그들을 영접하고 친근하게 대하셨다. 스승이 제자보다 낮을 수 없는데도 제자들보다 자신을 낮추어 그들의 발을 씻어 주기도 하셨다. 고난의 시간이 임박해 올 때, 제자들 사이에는 누가 큰 자냐는 논쟁이 재점화되었다. 이때도 주님은 그들을 꾸짖는 대신 타이르듯이 말씀하신다. “너희 가운데서 가장 큰 사람은 가장 어린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다스리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누가복음 22:26).이어서 말씀하신다. “나는 섬기는 사람으로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복음 22:27).주님은 마지막 순간까지 “섬기는 사람”으로 제자들 가운데 계셨던 것이다. 다만, 제자들이 깨닫지 못했을 뿐이었다. 그분은 나사렛의 평범한 목수로 사시다 메시아로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신 이후, 일관되게 작은 자들을 섬기는 작은 사람으로 사셨다. 4제자들의 예가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이 말씀한 작은 자로 겸손하게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주변에 적극적으로 작은 자를 영접하고 대접하며 섬기는 삶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많지 않은 것 또한 현실이다. 우리가 지닌 육신(flesh)의 속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나 큰 자가 되어 영접받고 대우받기를 원한다. 사람이 가진 본능과 의지로 체질화하고 실천할 수 있는 쉬운 덕목 정도가 아닌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처럼 실패를 거듭하다 아예 포기하는 가르침인지도 모르겠다. 여행 중 미국 남부의 한 한인교회를 방문했다. 선교관이란 이름의 조그만 숙박 시설을 갖추고 있어 하룻밤 신세를 질 요량으로 찾게 되었다. 저녁 시간에 도착했을 때 그곳의 젊은 부목사가 반갑게 맞아 주며 소소한 안내를 해 주었다. 잠시 거실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중 그 부목사는 내게 어느 나라에서 일하는 선교사인지 물어 왔다. 선교관에 묵게 되니 당연히 선교사인줄 알았나 보다. 이에 나는 선교사가 아니라 신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하는 학생이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 부목사는 기대가 무너졌는지 갑자기 태도를 바꾸기 시작했다. 겸손하고 공손한 태도에서 고압적이고 가르치려는 태도로 변해 갔다. 이후 성의 없는 몇 마디 하고는 형식적인 인사와 함께 사라졌다. 그 부목사에겐 선교사는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할 큰 사람이고 나 같이 공부하는 신학생은 별 볼 일 없는 작은 자라 그리 환대할 존재가 아니라고 여겼던 모양이다.‘나이로 따지면 내가 그 부목사보다 십년은 족히 넘을 텐데…’ 푸대접을 넘어 훈계를 받았으니 한동안 그때를 기억하면 울화가 치밀었고, 지금도 그 앙금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직도 나는 작은 자로 살아가는 데 실패하고 있나 보다. 작은 자로서 받아야 할 어쩌면 당연한 대우를 받고도 그 정도보다는 큰 자라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고 있어 그런가 보다. 그 젊은 목사 역시 작은 자가 되어 섬기는 일에 실패했다. 자신은 작은 자보다는 큰 자라고 여겼을 터이고 이로 인해 작은 자가 되어 영접하고 섬기는 일에 실패했던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잊는 길 밖에 작은 자로 살 방법은 없다. 우리의 타고난 자아를 가지고는 작은 자가 될 수도 작은 자로 살 수도 없다. 흉내를 낼 수 있지만 그도 오래 가지 못한다. 수양과 훈련이 도움이 될 수 있겠으나 한계를 가지고 있다. 그것으로 실패를 피하지 못한다. 삼 년 동안 스승을 따라 다니며 그분을 배웠던 제자들은 주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라가는 길에서도 누가 큰 자냐는 갈등으로 마음이 분열되어 있었다(마태복음 20:20-28). 여전히, 권세를 즐기고 대접받을 수 있는 세상의 큰 자가 되고자 하는 육신의 자아를 처리하지 못한 채 헛된 기대를 안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있었다. 작은 자로 살기 위해서는 시편의 다윗이 육신의 소욕을 모두 뒤로하고 주님께 오듯이, 자기를 버리고 예수님께 와서 그분의 다스림을 받아야 한다. 자신을 비우고 종의 모습을 취하여 사람으로 오셔서 평생을 그렇게 사셨던 분, 섬기던 사람들에게 버림받으셨으나 그들을 위해 끝까지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고 그분의 통치를 받기 전까지는 작은 자로 살아가기란 요원할 뿐이다. 5우리 중에 작은 자로 살겠다고 세상의 권세와 지위를 일부러 피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큰 자, 작은 자는 세상에서 일컫는 지위의 고하 혹은 성취의 많고 적음과 상관없다. 사람을 대하는 자세와 태도와 연관되어 있다. 높은 지위에 있어도 작은 자로 살 수 있고, 낮은 자리에 있어도 주님께서 인정하시는 큰 자로 살 수 있다. 나는 세상에서 힘없고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도 능력 없는 자라고 스스로 비하하며 주님을 섬기는 일에 물러나지 않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우리가 예언자로 부름받지는 않았지만 예언자를 알아주고 섬기면 예언자가 받을 상을 받는다고, 의인을 알아보고 의인으로 맞아들이면 의인이 받을 상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뿐인가? 주님의 제자라 해서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면 이를 잊지 않으시고 상을 주시겠다고 하셨다(마태복음 10:42). 작은 일이 결코 작은 일이 아닌 것이다. 주님은 하늘에서 불이 내려오는 기적을 일으켰던 대 예언자 엘리야나 그를 정성으로 섬겼던 사르밧 여인이 한 일을 동일하게 큰일로 여겨 주시고, 기적의 예언자 엘리사가 행한 일이나 그를 알아주고 섬겼던 수넴 여인이 한 일을 다 귀하게 보시는 것이다. 오늘날, 세상에는 말씀을 따라 작은 자로 살아가는 알려지거나 알려지지 않은 주님 나라의 사람들이 도처에 산재해 있다. 우리는 최고 권력의 자리에서 겸손하게 일하다 거기에서 내려온 뒤에는 작업복으로 손수 망치를 들고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집 짓는 일에 참여하고, 주일이면 주일학교 교사로 평범한 사람들을 섬겼던 하나님 나라의 큰 자를 익히 들어 안다. 어느 다른 한편에는, 자신을 잊고 사람이 닿기 힘든 오지나 음지에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작은 자로 일하는 드러나지 않은 무명의 주님 나라 일꾼들은 얼마나 많은가. 세상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도덕적 표준으로 삼으라 하고, 보편적인 종교는 넉넉하면 적선을 실천하라는 수준의 가르침에 그친다. 헌데, 예수님은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며 살라고 가르치셨다. 세상에 살지만 하늘의 도덕률로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상식과 관행을 뒤로하고 하나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가라고 하셨다. 이렇게 사는 것은 단지 높은 수준의 도덕을 실천하는 것을 지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교훈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이 곳곳에 많아질 때 주님의 나라는 점점 확장되고 그곳에 천국의 삶이 구현될 수 있다고 본다.우리는 말씀하셨을 뿐만 아니라 직접 행하신 분을 믿고 따른다. “나를 본 받으라”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던 사도의 본에 감동하며 마음을 다진다. 주님과 사도들은 가르침대로 자신을 낮추고 작은 자가 되어 희생하고 섬기며 살았다. 진실하게 주님을 믿고 따랐던 앞서간 분들 역시 그 길을 그대로 밟았다. 이제는 우리에게 바통이 넘겨져 왔다. 주님과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본으로 가르쳐 왔던 천국 시민의 도덕률을 우리가 실천해야 할 때이다. 낮은 자가 되어 다른 사람을 높이고 섬기는 작은 자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세상과 사람이 알아주고 말고에 상관없이 자신을 잊고 묵묵히 그 길을 가야 한다. 그러면, 그날에, 자신은 몰랐지만 작은 섬김 하나라도 기억해 주시는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분이 반드시 고마워하시고 칭찬하실 것이다(마태복음 25:31-46).
로마서 8:28이 없다면
by Tim Challies
2024-03-21
나는 슬픔에 잠긴 사람에게 제시하기에 로마서 8:28이 적절하지 않다는, 그 구절이 진리이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기 전까지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러나 나와 관련해서 고백할 수 있다. 내 인생의 가장 힘든 시기에 나는 로마서 8:28을 먹고 살았다. 마치 굶주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듯, 목마른 사람이 오아시스를 만난 듯, 나는 이 구절을 의지해서 살았다는 게 나의 분명한 고백이다. 나에게는 로마서 8:28이 필요했고 그 말씀은 내 영혼을 위로하고 슬픔을 덜어주었다.“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친숙한 구절 가운데 하나이고 많은 사람이 암기하는 데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나는 당신이 혹시라도 로마서 8:28이 없는 세상이 어떨지 잠시 멈춰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궁금하다. 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의 경험을 놓고 “선을 이룬다”고 확신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우리의 경험 중 일부가 해를 끼치며, 사탄과 하나님이 우주적으로 내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고 믿을 수도 있다. 또 우리의 경험 중 어떤 건 아예 아무 소용이 없으며 삶에는 그 어떤 목적도, 의미도, 또 구원도 없는 마구 일어나는 자의적인 요소로만 가득하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을 수도 있다. 슬픔과 고통을 바라보며 “여기에는 그 어떤 선함도 없어. 여기서는 아예 선함이 나올 수도 없구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모든” 일이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확신을 갖지 못할 것이다.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의 경험 중 어떤 것은 결국 선을 이룰 것이지만, 또 어떤 것은 결국 해를 끼칠 것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 혹은 어떤 건 선을 이루지만, 어떤 건 공허하고 무의미한, 하나님 섭리의 블랙홀이라고 믿을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우리는 고난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수 없을 것이다.“협력하여 선을 이루는” 곳에는 그 일을 이루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일하려면 일꾼이 필요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이 그러하듯 우리도 우주와 같은 비인격적인 힘이 궁극적으로 모든 상황의 배후라고 가정할 수 있다. 이 우주에 자신의 섭리를 수행하는 신이나 지적인 존재는 없고 단지 냉담하고 비인격적인 운명이 있을 뿐이라고 가정할 수도 있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목적이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가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닫지 못할 것이다. 이 구절이 없다면, 우리가 시련을 겪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면 그건 하나님께 그런 시련을 통하여 성취하실 목적이 있기 때문이라는 진리를, 그리고 우리가 모든 시련을 강하고 온전한 믿음으로 통과한다면 우리가 그분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는 진리를 우리는 제대로 숙고하지 못할 것이다.로마서 8:28이 없다면, 고통은 참을 수 없고 모든 슬픔이 무의미하다고 내리는 결론은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로마서 8:28이 있다.하나님은 은혜의 선물로 우리에게 이 구절을 주셨다. 고통을 겪는 하나님의 백성을 위로하려면 올바른 판단력을 발휘해야 한다. 상황에 맞는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과거 많은 이들이 범했던 오류, 이 구절에 대해 가혹하거나 부정확한 해석을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내게 이 구절보다 더 위안이 되고 격려가 되는 말씀은 거의 없다. 로마서 8:28이 있기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은 그분이 삶의 모든 환경을 통해 일하셔서 악에서 선을, 어둠에서 빛을, 슬픔에서 기쁨을 가져오신다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하나님이 상황을 조종하는 데 능숙한 일종의 우주 PR맨처럼 특별히 민첩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목적만큼이나 수단을 중시하는 계획자, 엔지니어, 그리고 설계자이시다. 하나님은 고요와 폭풍, 어둠과 새벽, 기근과 절기를 정하신다. 그러므로 의미 없는 사건은 없고, 목적 없는 상황은 없고, 궁극적으로 절망적인 조건은 있을 수 없다. 어두운 날, 어려운 시련, 상한 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선한 뜻을 이루시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오히려 그것들을 ‘통해서’ 이루신다. 그렇기에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모든 상황은 그분이 자신의 좋은 계획, 즉 완전한 목적을 형성하고 구체화하는 데 사용하시는 원재료일 뿐이다. 하나님의 특기는 선에서 선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악에서 선을 가져오는 것이다. 로마서 8:28은 내가 눈물 가운데에서도 그를 신뢰하면 내게 반드시 웃을 이유를 주실 것이라고 부드럽게 속삭인다. 고통 속에서도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은 내 입술에 찬양을 가져다주실 것이다. 슬픔 중에도 그분을 신뢰한다면, 그분은 나중에 그 슬픔과 괴로움을 통해서 얻은 게 결국에는 얼마나 좋은 것이었는지를 보여 주실 것이다. 그분은 메마른 사막에 핀 귀한 꽃, 날카로운 가시에 맞서 피어나는 아름다운 꽃, 그리고 폭풍우 속에서도 건재한 부드러운 꽃잎을 보여 주실 것이다. 모든 검은 구름 뒤에는 노란 해가 있고, 모든 어두운 밤 뒤에는 밝은 낮이 있으며, 눈살을 찌푸리는 모든 섭리 뒤에는 웃는 얼굴이 숨어있다. 누구일까? 자기를 사랑하고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모든 것을 선을 이루시는 우리 하나님의 웃는 얼굴이다. 원제: Life Without Romans 8:28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진정한 ‘내 소유’는 무엇인가
by 박혜영
2024-03-08
시편 119를 읽는 데 아주 익숙한 표현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내 소유는…”(56절). 사유재산, 소유권, 소유주… 경제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 세상 역사는 ‘소유의 역사’ 아니겠습니까? 아시다시피 ‘소유한다’는 말에는 단지 ‘필요가 있기에 갖고 있다’라는 뜻 그 이상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가 많을수록 존재감을 얻으며, 소유가 많을수록 대접받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많은 것을 소지하고 저울에 올라서면 무게가 더 나가는 것처럼, 많이 소유할수록 무게 있는 사람이 될 것이라 여겨, 우리는 ‘내 소유’라는 말에서 안심, 안전, 보호라는 말을 동시에 생각하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것은 겉모습일 뿐입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 앞에서 남을 수 있는 것만 무게 있는 실체가 됩니다. “네가 부르짖을 때에 네가 모은 (우상으로) 너를 구원하게 하라. 그것은 다 바람에 떠가겠고 기운에 불려갈 것이로되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사 57:13). 이사야 본문에 나온 자들은 위기에 대비하여 의지가 될 만한 우상을 착실히 모아 둔 듯합니다. 재물의 우상, 학업의 우상, 연애의 우상을 모아왔습니다. 우상은 돌이나 나무, 또는 청동으로 만들었을 테니 제법 묵직합니다. 안심이 됩니다. 그러나 실상은 바람에 떠가고, 기운에도 날아가는 연기와 같았습니다. 무게가 나갈 만한 그 어떤 실체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런 것을 “내 소유”라 할 수 있을까요? 진정 “내 소유”라면 내 손에 끝까지 남아 나에게 존재감을 부여해야 할 텐데, 사라진 걸 보면 “내 소유”가 아니었단 말입니다. 평생 모으고, 평생 애쓴 것이 아무것도 아니라니,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충격일까요?사도 바울도 그렇게 말했습니다.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 만일 누구든지 그 위에 세운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상을 받고, 누구든지 공력이 불타면 해를 받으리니”(고전 3:12-15). 사람들은 다 자신이 쌓은 공력을 갖고 하나님 앞에 섭니다. 자신의 공력이 불에 타 없어질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만든 것이라 여길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런데 다 타버렸다면, 그 순간 얼마나 당황하겠습니까? 자신의 인생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충격! 반면 “그 날 … 공력이 그대로 있으면”, 바람이 불어도 그대로 남아 있고, 불에 태워도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 공력만이 “내 소유”입니다.여기서 시편 119:56이 중요해집니다. 그대로 남을 만한 진짜 “내 소유”가 무엇인지 귀띔해 주고 있으니까요. 무엇입니까?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를 지킨 것이니이다.” 진정한 “내 소유”란 재산이나 부동산이 아닙니다. 책에서 얻은 지식도 아니고, 인생 경험도 “내 소유”는 아닙니다. 그런 것에는 하나님 앞에 남을 수 있는 무게가 없기 때문입니다. “내 소유”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한 그것만입니다. 그것만 내 이름으로 남습니다. 이는 위에 인용한 “나를 의뢰하는 자는 땅을 차지하겠고, 나의 거룩한 산을 기업으로 얻으리라”는 말과 통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의뢰하는 자만 하나님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 사람만 ‘하나님의 산’을 얻고, ‘하나님의 산’에만 요동치 않을 무게가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점에서 이 본문을 “…하면서 내 삶을 보냈으니”라고 번역한 영어성경(NLT)은 “내 소유”라는 말에 함축된 의미를 간파한 것 같습니다. 무엇을 소유하기 위해 한평생 보냈는지 묻기 위한 번역처럼 보였습니다.사람이 죽으면 갖고 가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말은 사실 피상적입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면서 재산보다는 자신의 이름이나 명예를 중히 여기는 인생을 살라는 조언도 최고의 지혜는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은 죽을 때 갖고 가는 게 있노라고. 죽을 때 다 두고 가는 건 아니라고. “내 소유”라 할 만한 것은 갖고 간다고. 사람이 이 세상을 떠날 때 재산도 명예도 다 두고 가지만, 진정한 “내 소유”는 갖고 갑니다. 하나님 말씀을 지킨 것, 곧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무게를 순종을 통해 내 무게로 전환시킨 그것은 진정한 “내 소유”가 되어 우리에게 존재감을 부여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존재는 참을 수 없이 가벼울 뿐’입니다.
인권의 자리는 어디인가
피터슨, 하라리, 홀랜드의 ‘인권’
by Derek Rishmawy
2024-03-05
THE KELLER CENTER 학부 때 수강한 인권의 도덕성에 관한 강좌는 큰 깨달음을 주었다. 대부분의 철학 강좌와 마찬가지로 그 강좌도 명백하고 복잡한 문제를 논리적으로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강좌 전반부는 인권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공하기 위해서라도 왜 인권이 규범적이고 구속력 있는 것으로 간주되어야 하는 이유를 칸트, 공리주의, 실증주의, 사회적 구성주의 등으로 설명한다. (신학적 이유는 언급조차 되지 않는다. 그것은 아예 시작점으로 간주되지 않기 때문이다.)21세기에 들어서 더 이상해진 서구인 대부분이 인권이라는 개념을 당연하게 여긴다. 독립선언서에 명시되어 있듯이 권리는 “양도할 수 없으며” “자명”하다. 하지만 인권에 관한 공부가 다 끝나고도 내가 확신할 수 있었던 사실은 딱 하나에 불과했다. 그 어떤 세속 철학도 인권의 근거에 관해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모든 주장은 서로를 향해서 치명적인 약점을 들이밀었다. 내가 아는 한 그 어떤 세속적이고 합리적인 근거도 현대 도덕 담론과 국제법에서 인권이라는 중요한 개념의 엄청난 무게를 감당할 수 없다.철학 수업에서야 설명이 충분하지 않아도 어깨를 으쓱하고 얼마든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누구나 당연시하는 국제 도덕 질서 전체의 기초가 사실은 벌거벗은 임금님에 불과하다는 게 알려진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거기에 실상은 “거기”가 없다는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 될까?이 질문은 대학 강의실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공개 포럼에서도 논의된다. 공공 지식인이자 예루살렘 히브리 대학교의 역사 교수이자 베스트셀러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의 저자인 유발 하라리의 인권 논평을 둘러싼 최근 논란을 한번 살펴보자. X(과거 트위터)를 통해서 유포되는 영상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인권은 천국, 신이랑 비슷하다. 인권도 우리가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주 좋은 이야기이기는 하다. 믿고 싶은 매력적인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현실이 아니다. 그것은 생물학적 현실이 아니다. 해파리, 딱따구리, 타조에게 권리가 없듯이 호모 사피엔스에게도 인권이란 없다. 인간의 배를 가르고 속을 살펴보라. 거기에 피, 심장, 폐와 신장은 있겠지만, 인권은 없다. 인권은 단지 인간이 만들어 내고 퍼뜨린 허구의 이야기에만 존재한다. 정치 분야에서도 마찬가지다. 국가라는 것도 인권, 신, 그리고 천국처럼 이야기일 뿐이다. 진짜는 무엇인가? 산이다.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고, 심지어 냄새도 맡을 수 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은 그저 이야기일 뿐이다. 매우 강력한 이야기. 그래서 믿고 싶지만, 여전히 이야기일 뿐이다. 미국은 실제로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다.이런 주장과 관련한 논란을 살펴보는 건 의미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탈 기독교 문화의 도덕적 의식에 발생하는 몇 가지 중요한 균열을 만난다. 그 속에는 창조의 하나님을 모르기에 구원의 하나님은 아예 알 수조차 없는 사람들을 위한 교훈이 들어있다. 그냥 이야기라고? 하라리가 무신론자이자 자연주의자인 점을 감안할 때, 그가 비교적 표준적이고 철학적으로 정교하지 않은 형태의 과학주의, 즉 그 자체가 과학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비과학적 신념을 표현하는 것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에게 유일한 “실제”는 산, 벌레, 피와 같은 생물학적 현실이다. 즉, 테스트하고, 맛보고, 냄새 맡고, 물리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것이다.그러므로 하나님, 천국, 지옥, 국가, 심지어 ‘인권’조차도 진짜가 아니다. 그냥 세상과 잘 지내기 위해 우리가 스스로에게 말하는 멋진 이야기에 불과하다. 그것들은 결코 사물을 만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췌장 왼쪽이나 DNA나 염색체 구조와 같은 물리적 존재에는 인권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일관된 자연주의 형이상학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세계를 관찰할 뿐이다. 세상은 거기 있으니까 있을 뿐이다. 아무리 있기를 바란다고 해도, 인간이 존재하는 방식에 관한 어떤 절대적인 의무가 기록된 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식의 주장이 마치 만화 속 악당이 자신의 마스터플랜(기후 변화 등을 피하기 위해 지구의 많은 부분을 제거하려는 계획)을 폭로하기 위한 전주곡처럼 들린다는 사실이 하라리에게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거 같다. 상황이 그렇다. 우리가 세상을 합리적으로 대하려면 이런 주장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거기’에 있는 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이야기는 진실이다다른 각도에서 보면, 이는 역사가 톰 홀랜드의 획기적인 책, 도미니언에서 언급한 요점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인권의 개념은 특정 시대와 장소(12세기 이탈리아), 특정 인물(교회법 변호사), 특정 교리(하나님의 형상) 그리고 특정 이야기(창조와 구원에 관한 기독교 서사)를 기반으로 생겼다. 어떤 의미에서 인권은 뼛속까지 파고드는 기독교 개념이 세속화한 결과이다. 홀랜드가 단언했듯이, 인권은 “가령 삼위일체보다도 객관적인 실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다 이 두 가지 다 기독교 신학의 작용에서 파생되었다. 이 둘을 다 믿기 위해서는 믿음의 도약이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홀랜드는 인권과 그 원천이 진리임을 확인함으로 그 “도약”을 이룬 것 같다.)어떤 측면에서 홀랜드와 하라리는 서로 동의한다. 예를 들어서, 인권에 관해서는 준수해야 할 목표가 없다. 그냥 단순히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나 차이점이 있다. 홀랜드가 기꺼이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반면에 하라리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홀랜드는 하라리의 경험론적 전제, 즉 “객관적”으로 간주되는 유일한 것은 맛보고, 보고, 냄새 맡을 수 있는 것뿐이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하지만, 동시에 인권과 관련해서는 진짜로 ‘그게’ 있다고, 인권이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는다.이야기와 관계없이 거기에는 ‘그게’ 있다주목할 만한 답변이 하나 더 있다. 홀랜드와의 부분적인 의견 차이를 보이는 심리학자 조던 피터슨(Jordan Peterson)은 인권에 관한 한 거기에는 “객관성”이 없다는 공유된 전제에 이의를 제기했다.인권에 관한 교리는 의미 네트워크가 파생시킨 의미론적 냉혹한 결과임이 곧 드러날 것이다. 즉 인권은 단지 단어와 언어적 개념뿐만 아니라 이야기와 행동 패턴 사이의 관계에 걸쳐서 암묵적으로 인코딩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건 어쩌면 인간 존재의 구조 아니, 인간의 존재 자체에도 내장되어 있는지 모른다. 즉, “인권”은 지속 가능하고 상향 지향적이며 상호 이타적인 인간 상호 작용을 특징짓는 전형적인 현실의 의미론적 표현이다. 전혀 임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피터슨의 언어는 확실히 비잔틴적이고 복잡하다. 그러나 그는 인간 고유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감각이 사물, 존재 또는 존재 자체의 본질에 뿌리를 두고 있음을 확인하기 위해 노력한다. 존재는 결코 자의적이지 않다. 나아가서 아무런 사회적 구성이나 뿌리도 없이 서구의 양심에 의해서 만들어진 사회-이데올로기적 괴물이 아니다.물론, 피터슨이 지향하는 형이상학과 신학의 모호함을 고려할 때(그의 견해는 발전하는 진화 심리학 분야의 일부 발견에 깊이를 더하기 위해서 추가한 융 심리학의 영향을 받은 비유신론적 그리고 준종교적 혼합처럼 보인다), 그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또 그것이 어떻게 존재하는지에 대해서 아무런 설명을 하지 않는 건 별로 놀랍지 않다. 단지 이 진실이 실제로 어떤 방식으로든 검증이 가능해지고, 정량화가 될 거라는 일종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나 할까?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도 있다. 그러나 현시점에서는 합리적인 정당성이나 설명이 없는 단순한 신념으로 보인다.자연법, 자연권, 양심: 억압인가, 지지인가?이런 사상가들과의 대화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기독교 교리와 기독교 “이야기”는 지금과 같은 혼란에 어떤 빛을 비출 수 있을까? 기독교 인류학의 기본 형태를 이해하면 옳고 그름의 다양한 방식을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이웃 및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앞으로 나아갈 길도 제시할 수 있다.우리 마음에 새겨진 법로마서 1-2장에서 바울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에 대한 자연스러운 지식과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을 갖도록 창조되었다고 말한다(1:18-23). ‘자연신학’과 ‘자연법’이다. 우리의 도덕적, 인지적 특성이 올바르게 기능할 때, 우리는 모든 것을 초월하고 모든 숭배와 존경을 받을 가치가 있는 창조주가 계시다는 것과 그분이 우리라는 피조물에 적합한 요구를 하신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구 중 하나가 다른 피조물을 존엄성과 존경심으로 대하라는 것이다. 즉, 학대하거나, 부자연스러운 성관계를 가지거나 살해하거나 비방하는 등의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24-32절).더 나아가서, 존중해야 할 대상이 단지 유대인이나 그리스도인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바울은 이방인, 즉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하거나 초자연적인 계시를 모르고 받지도 못한 비유대인도 포함한다는 점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이 이방인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은 율법이 없어도 그들 자신에게 율법처럼 행하며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말한다(2:14). 왜냐하면 “율법의 행위가 그들의 마음에 새겨져 있기 때문이다”(15절). 옳고 그름에 대한 보편적인 인간의 감각, 즉 모든 시대, 문화, 장소를 초월하여 우리 존재에는 법의 개념이 심겨 있다. 이것이 바로 C. S. 루이스가 “도”(Tao)라고 불렀던 것인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어떤 식으로든 준수해야 하는 명령이 있음을 안다. 따라서 비록 창세기 1장에 주어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명확한 교리를 제대로 설명하지 못할 수는 있어도, 성경은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제대로 볼 수 있어야 하며 도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올바로 대하지 않는 경우에 거기에 대한 적절한 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타락한 이성과 이데올로기사회 내부와 사회 간의 도덕적 차이를 설명하는 것은 무엇일까? 어떻게 한 사회에서는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정의롭고 영웅적이라고 생각하는 반면 다른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무질서하고 부당하다고 반대할 수 있을까?비도덕적인 사회란 존재하지 않는다. 각각의 사회는 자신이 가르치고 뿌리내리고 질서를 정하는 포괄적인 규범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이 사실은 세상에 타고난 보편적 의미가 있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성경은 인류의 자연적 지식이 죄로 인해 왜곡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창조질서의 특징을 분별하는 인간이 능력이 하나님과의 소외된 관계로 인해 깨졌다. 인간의 도덕적 나침반은 더 이상 정북을 가리키지 않는다. 도리어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그분의 율법에 대한 지식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향이 있다.우리는 다양한 방법으로 이런 점을 드러낸다. 거짓 신을 만들어 창조의 특징을 우상화하고 도덕법을 우리 자신의 왜곡된 형상으로 개조한다. 하라리의 말을 인용하자면, 자연주의는 우리가 이웃을 대하는 방식으로 인해서 받을지도 모르는 하나님의 심판이 두려워서 만들어 낸, 스스로를 속이는 멋진 이야기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이 보유한 진실 억압 무기고에서도 이데올로기는 가장 정교한 도구 중 하나이다. 일관성, 물질주의, 진리 파악이것이 바로 합리화되고 진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인 하라리의 기술생물학적 자연주의의 정체이다. 그래도 거기에는 최소한 일관성이라는 가치는 있다. 실제로 이 문제를 연구하는 사회생물학자, 진화 심리학자, 자연주의 철학자는 도덕성에 대해서 모두가 동의하는 규범적 설명을 만들어낼 방법이 없다는 데에는 다 동의한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와 폴 네델리스키가 쓴 Science and the Good’을 참고하라.)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과 이웃의 진정한 가치를 부인하는 죄로 물든 인간의 자연스러운 경향을 점점 악화시키는 현실에 대해서 일관되게 잘못된 해석만을 계속해서 내어놓을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반면에 피터슨은 한동안 공개적으로 하나님과 복음의 진리에 대한 질문을 놓고 씨름했다. 자연법과 자연권의 진리를 확증하기 위해서 노력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에게는 권리를 명령하고 부여하는 하나님, “원형적 현실”을 저술하여 인간으로 하여금 존엄성과 존경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도록 만드는 하나님이 없었다. 그래서 그가 내놓은 결과 또한 타락하고 어둠 속을 헤매는 모순 덩어리일 뿐이다. 신앙의 도약?홀랜드의 반응은 무엇인가? 역사적으로 인권 교리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아 탄생했지만, 자연 계시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의 견해는 매우 신앙주의(fideistic)와 역사주의에 치우쳐 있다. 홀랜드에게 있어서 “인권”에 대한 논의가 복음 이야기의 영향을 받아 특별한 방식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은 “인권”이 “객관적인” 현실로서 자연에 내재할 수 없다는 증거이다. 대부분의 윤리가 올바른 이야기를 믿기로 선택하는 문제에 불과하다는 생각에 맞서 신학자 올리버 오도노반(Oliver O’Donovan)은 다음과 같이 썼다.역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생각에 반대할 수 없다. 역사주의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은 정반대의 점을 지적하기 마련이다. 역사가 모든 의미와 가치에 대한 범주적 매트릭스로 만들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역사로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야기는 언제나 무언가에 관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것이 다 이야기라면, 더 이상 무언가를 말하는 이야기란 있을 수 없다. 오도노반의 주장은 복음이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이야기 바깥쪽에 있는 현실에 관한 서사라는 것이다. 현실과 존재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 하나님이 특정한 방식에 의거해 특정한 모양으로 만든 세계에 대한 이야기이고 우리는 얼마든지 그것을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자연법과 자연권은 자연의 현실에 종속되거나 부과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 내재한다고 보아야 한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한 인간의 이성에도 불구하고 확증하고, 명확히 하고, 정화하고, 또 중요한 경우에 확인시키는 어떤 메시지를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초자연적 계시는 자연계시에 대한 인간의 타락하고 죄악된 인식을 바로잡는다. 타락에도 불구하고 그 너머에 있는 진리를 제공함으로써 계시를 완성시킨다.자연적 도덕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라고 말한 피터슨은 옳다. 그 부분을 자연 너머로부터 오는 확증과 명확한 계시가 필요하다는 점으로 인식한 홀랜드로 마찬가지로 옳다. 세상을 창조한 하나님의 이야기가 이런 측면에서 사실일 때에만 그 이야기는 인간 존엄성을 확증함으로 우리가 그토록 간절히 바라는 도덕적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결국, 오직 하나님의 말씀, 즉 하나님의 이야기만이 우리가 뼈속 깊이 알고 있는 것을 믿고, 이해하고, 확증하는 데 도움을 준다. 현실의 이야기에 대한 자신감자, 그럼 우리는 이제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도 없고 복음도 없다면 하라리가 어느 정도 옳은지를 먼저 인식해야 한다. 인간은 단지 고기이며, 그 속에 인간 본성의 존엄성을 주장할 합리적 근거는 없다. 이것은 도스토예프스키와 니체 만큼이나 오래된 주장이지만, 아무리 하라리가 이 문제에 관해서 틀렸고 대부분의 사람이 더 잘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주장을 지금 현실과 관련이 없고 또 고민할 가치가 없다는 식으로 치부해서는 안 된다. 대부분의 사람은 인간 본성의 존엄성에 대한 진실을 공개적으로 억압하는 것을 꺼려한다. 극도로 세속적인 사람이라도 피터슨과 같은 본능을 갖고 있다. 자신의 존엄성과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라도 인간의 존엄성과 권리를 확인하고 싶어한다. 기독교는 그 어떤 사람이 형이상학적, 이성적 힘으로 생각해 낼 수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명확한 그에 관한 정당화를 제공한다. 성경의 진리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은 모든 족속과 방언과 나라의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기에 비교할 수 없는 가치와 존엄성을 갖고 있음을 확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은 복음과 함께 오는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다. 인간은 너무나 소중한 존재이다. 그래서 하나님 자신이 예수라는 인격 안에서 하나가 되어 죽으시고, 같은 형상을 지닌 사람들이 저지른 모든 범죄와 죄, 불의의 대가까지 치르시고, 그들을 예정된 영광으로 회복시키셨다. 할렐루야!둘째, 이 결과에는 반직관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날 기독교 교리와 진리가 당면한 가장 큰 도전은 기적이 진짜냐의 여부가 아니라 도덕성과 관련이 있다. 즉 초자연적인 것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자연 질서에 대한 우리의 이해, 특히 결혼과 남성과 여성의 본성에 대해서 갖고 있는 기독교의 믿음과 이해에 관한 반대 때문이다. 여기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은 뒷걸음질 치며 후방을 보호하는 데에만 급급해서 기독교의 관점이 사랑과 정의라며 스스로를 옹호하기에만 바쁜 모습처럼 보인다.이런 태도는 바람직하지 않다. 도덕적 질서야말로 그리스도인이 신앙의 진리를 위해 변증적 이점을 강조할 수 있는 최적의 현장이다. 세속적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고 인권을 침해하는 폭력적인 이데올로기에 맞서기에 점점 더 부족함을 드러내고 있다. 그럴수록 기독교는 세상과 비교해서 더 확고하게 대조를 이루며 다른 이데올로기가 고작해야 희미하게 제시하는 소망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짜를 보여주어야 한다. 이 모든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기독교는 우리가 항상 믿어왔던 것을 단순히 확증하는 역할로만 그쳐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 이야기를 우리 양심의 진실을 억압해 온 모든 세상의 방식에 대한 시정으로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만 한다. 위로와 격려를 주는 말씀뿐만 아니라 심판을 약속하는 말씀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대량 학살, 강간, 인종 차별, 편견 등 이웃에 대한 인류의 폭력적인 범죄와 죄악, 잔학 행위를 고려할 때 우리는 인간의 이성이 다른 영역의 진실까지도 억압했음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오늘날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의 성생활, 성적 취향, 성 정체성에 관해서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시작하신다고 생각해보자. 우리의 반응은 어떨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충격에 빠뜨릴 것이다. 셋째, 우리가 이러한 점들을 강조할 때, 우리 자신부터 돌아보지 않고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우리는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로서 다른 창조되고 타락한 형상을 지닌 자들에게 말한다. 그렇기에 겸손하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 한다. 불의로 진리를 억압하는 모든 방식에 대해 정기적으로 말씀으로부터 교정 받는 사람으로서 우리는 그들에게 나아간다. 그렇다고 겸손이 나태함이나 절망에 대한 변명이 될 수는 없다. 우리에게는 복음의 진리와 성령의 능력만이 있는 게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접근하려는 사람들의 마음에 이미 증거를 남겨 두셨다. 율법은 그들의 마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들도 지금 양심을 누르고 있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뜻을 사모한다.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심판으로 해방되기를 갈구하고 있다(롬 2:16).원제: Is There a ‘There’ There? Peterson, Harari, and Holland on Human Righ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그리스도인이 가장 힘써야 할 일
시편 84편 묵상
by 고명환
2024-02-26
1 꾸준하게 기독 모임에 참여하여 조용히 여러 일로 섬기는 한 대학생과 대화할 기회가 있었다. 늘 잔잔한 웃음을 잃지 않고 필요한 역할을 해내는 그 친구가 기특해서 격려라도 해 주고 싶던 터에, 서로 기도해 주는 순서의 짝으로 맺어져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된 것이다. 평소 학교생활과 기독 활동에 성실한 모습을 보아 왔기에 주님과 보내는 시간을 견실하게 지켜왔을 거라는 믿음 아래, 기도하고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경건의 시간을 어떻게 가지는지 물어보았다. 헌데, 형제에게서 들려온 응답은 기대와는 달랐다. 당황한 듯 머뭇머뭇하며, 그 친구는 그런 시간을 갖지 못한다고 힘겹게 대답했다. 아마도 주님과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가르침을 받았지만 생활화하지 못하는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그 형제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우선해야 할 일에 드려지지 못하고 있었다. 열심과 성실함으로 일하고 있었지만, 주님을 알고, 주님이 주시는 힘으로, 주님과 함께 움직이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한 모임의 워크숍 시간에 어떤 선교단체의 스태프들과 자리를 함께한 적이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부르신 사명을 따라 묵묵히 헌신하는 전임 사역자들이었다. 그 헌신의 삶을 익히 알던 차라, 한 분 한 분의 입에서 나오는 진지하고 순수한 열정의 증거들이 기대되는 자리였다. 그런데, 기도와 경건 생활에 대한 나눔의 시간에 들려온 그분들의 힘없는 고백은 마음을 무겁게 했다. 이구동성으로, 기도해야 한다는 마음은 가져 보지만 실제로 기도 생활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고백이 쏟아져 나왔다. 바쁘다 보니 기도 생활이 부실하다는 것이었다. 무엇에 바쁜지 알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사역이 바쁜 시간의 많은 부분을 차지할 것은 자명했다. 주님을 위한 일로 인해 주님을 만나는 시간이 뒷전으로 물러나게 된 것이다. ‘아무리 바빠도 그러지는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목까지 나오는 이 말을 눌러야 했다. 2시편 84편은 총 150편으로 편집된 시편의 중앙부에 자리 잡은 아름다운 시이다. 수사나 기교가 뛰어나거나 짜임새가 완벽해서가 아니다. 소박한 언어로 주님을 향한 애절한 사랑의 마음을 잘 드러내어 시인과 같은 마음을 가진 성도의 공감을 쉽게 끌어내기 때문일 것이다. 시편 84고라 자손의 시, 지휘자를 따라 깃딧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1만군의 주님,주님이 계신 곳이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2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내 마음도 이 몸도,살아 계신 하나님께기쁨의 노래 부릅니다.3만군의 주님,나의 왕, 나의 하나님,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제 집을 짓고,제비도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4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복됩니다.그들은 영원토록주님을 찬양합니다. (셀라)5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마음이 이미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복이 있습니다.6그들이‘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가을비도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7그들은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시온에서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8주 만군의 하나님,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야곱의 하나님,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셀라)9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돌보아 주십시오.10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다른 곳에서 지내는천 날보다 낫기에,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더 좋습니다.11주 하나님은태양과 방패이시기에,주님께서는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정직한 사람에게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12만군의 주님,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복이 있습니다. (새번역)시인은 복 있는 사람으로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4절),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5절), 그리고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12절)을 언급한다. 그들 모두 주님을 가까이하고 싶은 시인의 마음을 대변해 주는 사람들이다. 주님 계신 성전에서 살며 수종 드는 선별된 사람들이나, 주님을 가까이하겠다는 열망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성전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그리고 주님께 나아가는 데 아무런 장애가 없는 의인들은 복 있는 사람들이다(시편 15편). 언제나 주님을 향한 그리움과 사모함으로 사는 시인의 관점에서 이들은 진정 복 받은 사람들이 분명하다(1-2절). 성전에서 일하며 “영원토록 찬양하는” 레위인들은 복된 사람들이다(4절). 시인의 눈에 “만군의 주님”이 계신 곳에 살며, 섬기고, 항상 찬양하는 특권을 가진 그들이 누구보다 복 받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지성소에 들어갈 자격을 갖춘 대제사장으로부터 문지기에 이르기까지 주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는 그들이야말로 복과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다. 성전에 둥지를 튼 새들도 주님을 곁에서 뵙고 싶은 시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이다(3절). 이에, 성전을 자유롭게 드나들며 주님의 제단 곁에 집을 지을 수 있고 새끼 칠 보금자리를 마련한 참새와 제비조차 흠모함으로 바라본다. 그토록 주님을 바라고 곁에 가까이 있고 싶어 했기 때문이다. 성전이 자리 잡은 주님의 영광이 머무는 곳, 시온을 향해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역시 복 있는 사람들이다(5절). 그들이 원하는 것은 오로지 만군의 주님을 가까이에서 뵙고 경배하고 싶을 따름이다. 주님을 뵙겠다는 일념으로 발을 뗀 순례자들에게 앞길의 장애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5-7절). 주님께서 모든 위험에서 보호해 주시기 때문이다. 샘을 내어 갈증을 해결해 주시며, 먼 길에 기진하지 않도록 힘을 주신다. 결국,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올라가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이다.” 놀랍게도 “만군의 주님”은 그분을 찾는 그 어떤 사람이라도 거절치 않는다(“만군의 주님”은 네 번 반복 사용되었다). 여기에는 아무런 차별이 없다. 빈부귀천, 유대인과 이방인을 상관하지 않으시고 그 사람을 기뻐하신다. 누구든지, 주님을 향한 진실한 마음으로 다가올 때 그 길의 모든 장애물을 없애 주실 뿐만 아니라 힘을 주셔서 반드시 만나게 하신다(5-7절). 주님을 신뢰하고 사랑하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12절). 그는 은혜와 영예를 주님으로부터 받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얻는다(11절). 이런 사람에게 주님을 떠나 행복이란 없다. 주님과 떨어진 먼 세상에서 천 일의 영화를 누린다 해도 주님 계신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만 못하며, 악인과 함께하는 편안한 장막의 삶이 주님 집의 말단 문지기의 생활만 못하다(10절). 제사장이 아니었던 시인이 들어가 지낼 수 있었던 성전의 장소는 지성소도 성소도 아닌 ‘주님의 궁전 뜰’(the court of the Lord)이었다. 그렇지만 그곳이면 어떠한가. 주님의 장중이고 동일한 영광이 머무는 곳인데 주님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찾는 그곳은 시인에게 지성소와 다름없는 장소이다. 주님의 성전 뜰에 머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날보다 행복하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복을 누리고 있기 때문이다(시편 73:28).3주님께서 자녀들의 삶에서 보고 싶어 하시는 것은 무엇인가. 스스로 만든 열심과 충성심으로 그분의 명령에 따라 많은 업적을 만들어 내는 것 아닐까. 아니면, 그분이 기뻐하실 거라 배우고 공부한 것을 곱씹고, 고민하며, 전력으로 성취해 내는 삶은 아닐까. 그럴듯하나, 주님을 오해한 빗나간 대답들이다. 주님은 편안한 의자에 앉아 사원들이 최대한의 실적을 올리기를 바라는 회사의 CEO가 아니다. 알아서 각자 매뉴얼 대로 움직여서 그분이 고대하는 목표를 이루기를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다. 큰 업적을 들고 오는 것을 반기는 세상의 경영자와는 다른 분이다. 사람의 도움 없이, 뜻하시면 언제라도 능력으로 그분의 목표를 이루실 수 있는 전능한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분은 자녀가 해낸 일이나 업적보다 자녀 한 명 한 명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신다. 참다운 부모가 자녀의 성공이나 그들에게서 받는 혜택보다도 그들 자체에 더 관심을 갖듯이, 주님은 자녀라는 대상에 마음을 집중하신다. 그들은 생명의 대가를 지불하고서 찾은 사랑의 대상이다.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다. 아무런 조건 없는 사랑으로, 그들이 목적이고 이유인 존재로 부르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은 자녀들과의 교제를 기뻐하신다. 교제를 통해 그분의 심오한 사랑을 알려 주기 원하신다. 그래서, 자녀들이 사랑을 깨닫고 성장하여 그분을 투영하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가기를 바라신다. 신비로운 사랑의 수혜자였던 사도 바울도 성도들이 무엇보다 주님께 다가가 이런 주님의 사랑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을 수 있게 되고, 지식을 초월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되기를 빕니다”(에베소서 3:18-19). 사도가 표현했듯 그리스도의 사랑은 입체적일 뿐만 아니라 사람으로서 온전히 헤아릴 수도, 정확하게 정의할 수도 없는 지식을 초월하는 사랑이다. 그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이 신앙생활이며, 그분을 생각의 영역과 시간의 영역 속에 모시고 살 때 그 사랑의 힘은 삶에 작용하게 되고, 비로소 그분을 나타내는 새로운 창조물로 살아갈 수 있다. 이를 도외시하거나 소홀히 한 채 본인의 원함과 스스로 만들어 낸 열심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동분서주한다면 어쩌면 그날에 자취 없이 타버릴 공력을 쌓고 있는지도 모른다(고린도전서 3:13-15). 그것이 십자가를 높게 들어 올린 기념비적인 예배당을 지어 봉헌했든지, 선교지에 교회와 학교, 병원을 설립했든지, 수많은 병자를 고친 기적을 행했던 일이 될 수도 있다. 주님의 이름으로 시작하고 끝냈지만 정작 주님을 빌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한 결과물들일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가지인 자녀가 주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 15:5).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문자 그대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도 많은 일을 할 수 있고 엄청난 일도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주님을 떠나서 이룬 일들은 받으실 만한 “열매”가 될 수 없고, 오히려 “불법”의 산물이 될 수 있다. 마태복음 7:22-23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등장할 저주받은 사람들을 언급하신다. 그들은 주님을 거듭 부르면서(“주님, 주님”), 자신들이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을 적법자들임을 주장한다.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실로 이들은 능력을 행한 사람들이다. 예언, 축사, 여기에 많은 기적을 일으켰다. 그것도 주님의 이름으로. 그야말로 ‘능력의 종들’인 것이다. 그들이 행한 일들과 방법은 칭찬받고 보상받아야 마땅한 선한 일이다. 어떤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선한 일들이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행한 일을 “불법”으로, 그들을 “불법을 행하는 자”로 규정하셨다.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분명히 말할 것이다.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라’”(23절). 덧붙여,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절망적인 선언을 들려주신다. 실제로, 전지의 능력이 있으신 주님이 그들이나 그들이 한 일을 모를 리 없다. 그들이 주님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행한 업적이 아무리 성스럽고 선한 일일지라도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심판의 날에 인정받지 못할 허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몰랐다. 주님을 떠나서 자신들의 마음을 따라 불순한 동기와 목적으로 쌓은 어떤 업적도 받으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하고 귀신을 쫓아내고 많은 기적을 일으켰으나 주님께서 그들을 통해 하신 일이 아니라 어두움의 영이 역사하고 있었음도 몰랐다. (주님이 불의한 자들의 일을 위해 조종당하실 리 없다.) 계시록의 서두에 기록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는 각 교회를 향한 주님의 칭찬과 격려, 그리고 책망의 내용을 담고 있다. 그중 책망을 받은 교회들의 문제는 주님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데 기인한다. 그들이 사명을 잊고 일하지 아니하거나 가시적인 선교적 성과를 내지 못해 책망받은 것이 아니다. 주님을 향한 열정이 식고, 그리스도의 신부로서 간직해야 할 순수성을 지키지 못하고, 불신앙의 요소들을 용납하는 등, 교회의 정체성을 잃어가는 것으로 인해 책망을 받았다. 주님과의 관계가 느슨해질 때 파생하는 결과로 책망을 받은 것이다. 4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주님의 일(ministry)이 중요하지 않다거나, 일을 적당히 하라, 혹은 주님은 일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는 중이 아니다. 삶에서 우선순위의 문제와 더 역점을 두어야 할 과제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고 실천하자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을 방문하셨을 때, 마르다는 잘 대접해 드리기 위한 준비로 정신이 없었다. 예수님 홀로 오신 것도 아니고 일행이 들이닥쳤으니 그녀의 마음이 얼마나 조급하고 부산했을지 충분히 이해된다. 손이 열 개라도 마음을 따라잡지 못할 형편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긴급상황에서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앞에 앉아 꿈쩍할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침내, 마르다는 예수님께 불만을 터뜨렸다. “주님, 내 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십니까? 가서 거들어 주라고 내 동생에게 말씀해 주십시오”(누가복음 10:40). 마르다는 자신이 하고 있는 중대사에 마리아가 동참하지 않고 있는 것은 마치 예수님께도 문제가 있는 것 같은 톤으로 불평을 늘어놓았다. (물론, 자신이 직접 마리아를 책망하고 일어서게 한다면 무례한 일일 수 있지만, 마르다의 언사는 부탁이 아닌 불평이었고 주님을 향한 원망이 묻어 있다.)의당, 마리아를 일으켜 부엌으로 보낼 줄 알았던 마르다의 불평은 효과는커녕, 가르침으로 바뀌어 돌아왔다. “마르다야, 마르다야,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 그러나 주님의 일은 많지 않거나 하나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 그러니 아무도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Martha, Martha, the Lord answered, 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but few things are needed or indeed only one. Mary has chosen what is better, and it will not be taken away from her. 41, 42절, NIV) 주님은 마르다가 하는 일이 잘못되었다거나, 무가치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다. 또, 그녀가 하는 일을 중단하라고 하시지도 않았다. 다만, 마르다를 두 번이나 부르신 뒤(개인의 이름을 두 번 부른 예는 드물다), “너는 많은 일로 염려하며 들떠 있다(you are worried and upset about many things, NIV)”라고 말씀하시며 그녀의 안정되지 못한 영혼을 지적하셨다. 여기서, “마리아가 ‘좋은 몫(what is better)’을 선택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유의하고 싶다. 마르다가 주님을 위한 일에 최선으로 종사하는 것은 좋지 않은 선택이 아니다. 하지만, 마리아가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이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사모하는 마음으로 집중하는 일이 더 좋은 선택(the better choice)이었다.혹여, 강단에서 이 본문이 여전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는 마르다 같은 사람이 필요하다’는 외침을 위해 인용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장을 목표로 하는 교회에 많은 충성스런 일꾼이 필요한 것은 이해되나 다른 본문으로도 목적에 부합한 설교를 풍부하게 해낼 수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편이셨다. 주님께서 친히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마르다의 열심을 부각하는 것은 주제를 비껴간 주관적 해석 이상이 될 수 없다. 최선보다 차선이 더 좋다고 강변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기록은 마리아를 조명하고 있다. 명백히, 주님은 그분을 위한 일에 바쁜 사람보다도 사랑하고 사모하는 마음으로 다가와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을 더 기뻐하신다. 마태복음 11장에는 죄와 인생의 무게 아래 지친 세상의 모든 영혼을 향한 예수님의 아름다운 초청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수고하며 무거운 짐을 진 사람은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한테 배워라. 그리하면 너희는 마음에 쉼을 얻을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복음 11:28-30).“내게로 오너라”는 초청은 오직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있으신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세상에 존재했던 그 누구도 죄와 사망으로 대표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며, ‘오라’고 인생들을 부른 적이 없었다. 아니, 부를 수 없었다. 모하메드도, 공자도, 석가도. 모두 죄의 저주 아래 놓였던 사람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오신 그리스도, 사람의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실 수 있는 구주 예수님께서 죄인인 사람에게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야말로 엄청난 복음이 아닐 수 없다. 거룩하신 하나님 편에서 죄인을 향한 정당한 표현은 ‘가라’가 되어야 한다. ‘가까이 오지 말라’가 되어야 한다.(출애굽기 3:5, 19:12을 참조하기 바란다.) 그러나, 사랑의 화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분의 경계를 모두 허물어 버리셨다. 무거운 짐을 벗고 그분을 안식처로 삼고자 하는 어떤 사람이든지 ‘오라’고 적극적으로 손짓하신다. 이것이야말로 지치고 마음이 병든 영혼들을 일깨우는 빅뉴스가 아니겠는가?그분의 초청은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라는 선언을 통해 더욱 적극성을 띤다. 지친 영혼을 부르는 호스트는 마음이 온유하고(gentle)하고 겸손하다(humble). 어떤 형편의 사람이라도 환대할 준비가 되어 있고 편안한 쉼을 보장해 줄 수 있는 너그러운 인격을 가지신 분이다. 바로 그분이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고 쉬러 오라고 부르시는 것이다. 잠시 쉬게 한 다음 목적을 위해 사용할 일꾼을 모집하는 초청이 아니다. 단지,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 지치고 억눌린 영혼을 가엽게 여겨 쉬게 하시려는 사랑의 초대이다. 와서 할 일은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한테 배우는 것이다. 그분의 멍에는 편하고 그분의 짐은 가볍다. 인생에 부과된 멍에는 구속을, 짐은 고통을 던져 줄 뿐이지만, 주님의 것은 마음의 쉼(rest)을 가져다준다. ‘오라’는 초청에 응하여 배우고 충분히 그분과 함께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할 일이 있다면, 함께 메어 주시는 편한 멍에를 메는 것이다. (주님의 “내게 오라”는 초청은 원어의 뉘앙스 상 한 번으로 끝나는 일회의 행동이 아니라 계속해서 실천해야 할 반복 행동이다.) 주님께 다가가서도 주님의 멍에를 메고 배우는 대신 자신이 만든 멍에를 메고 짐을 지는 생활에 의미와 목적을 두고 수고한다면, 그 멍에와 짐은 또다시 영혼을 피곤하게 하고 종래는 탈진해 버릴 것이다. 매일 주님을 찾고, 배우고, 주목하는 일이 모든 일에 우선되어야 한다. 그리고, 편하고 가벼운 주님의 멍에를 메어야 한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이른 새벽에 갈릴리 호수의 제자들에게 나타나 아침을 잡수신 후 베드로에게 물으셨다(요한복음 21:15-17). 그것도 세 번이나 ‘나를 사랑하느냐?’는 질문이었다. 왜 예수님께서 세 번씩이나 같은 질문을 했는지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설교자들은 ‘사랑하다’는 세 가지 유형의 헬라어를 소개하며, 베드로의 대답이 최상의 사랑한다는 표현인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라는 동사를 사용하여 대답했기 때문에 세 번이나 물으셨다는 오래된 해석을 선호한다. 이와 함께 ‘내 양을 치라(먹이라)’는 주님의 부탁을 (준엄한 명령으로) 강조해서 성도들의 헌신을 촉구하기도 한다. 왜, 주님은 세 번이나 베드로의 사랑을 확인하셨을까?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대답했기 때문에 ‘아가파오’의 대답을 유도하기 위해서일까? 그러다 마지막에는 베드로의 고백에 사랑의 마음으로 눈을 낮추시어 어쩔 수 없이 예수님도 ‘아가파오’가 아닌 ‘필레오’로 물어보셨을까? (실제로 그렇게 설명하는 설교를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그렇지 않다. 용어를 가지고 의미를 두는 해석은 주님과 베드로와의 대화를 적절하게 풀어내지 못한다. 여러 고대 문서는 그 두 단어를 구별 없이 사용했다는 걸 증명한다. (예수님도 두 단어를 사용하여 베드로에게 질문하셨다.)무언가를 깊이 심어 주기 위해 주님은 같은 질문으로 세 번이나 묻고 동일한 부탁을 하셨다. 그 어떤 일보다도 그분과의 관계가 중요함을 일깨워 주시려고 베드로를 세 번이나 불러 확인하여 강조하신 것이라고 믿는다. 주님을 사랑해야 함을, 다음으로, 주님의 양을 돌봐야 함을 강조하기 위해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런데, 순서에 있어 그분을 사랑하는 일이 먼저가 되어야 한다. 주님은 ‘내 양을 치라’고 부탁하시기 위해 ‘나를 사랑하느냐’는 전제조건을 거듭 확인하셨고, 그 뒤 ‘내 양을 치라’는 사명을 부여하셨다. 주님과의 사랑의 관계는 주님의 부탁을 이루어 드리기 전에 갖추어야 할 필요조건이 된다. 그분의 양을 치는 일에 앞서 더 중요하고 선행되어야 할 일은 그분을 사랑하는 일, 그분 안에 거하는 일, 그분께 속하는 일이다. 주님과 함께하는 시간을 제쳐 두고 맡긴 사명을 좇아 열정을 불태울 수는 없는 것이다. 지금까지 든 예들 외에도, 그 어떤 일보다 주님과의 관계와 사귐에 힘써야 할 당위성을 제시하는 성경의 근거는 많다. 이를 일일이 나열하고 설명하지 않아도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 삶의 우선순위가 되어야 할 이유는 여기서 충분할 듯하다. 5한국 교회로 대표되는 우리의 기독교는 통계가 말해 주듯 여러 면에서 점점 그 힘을 잃어가고 있다. 다양한 전도 전략, 세분된 신앙 성장 프로그램, 새로운 형태의 소그룹 모임, 업그레드된 어린이 청소년 교육, 참여자를 배려한 예배, 편리한 시설 등 어느 분야 하나 빠짐없이 과거와 비교할 수 없는 변화가 있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성도 수는 줄고 있고 교회의 대외 이미지 또한 나빠지고 있다. 범부의 눈에도 과거와는 확연하게 가벼워진 우리 교회의 모습이 감지된다. 교회 건물 머리에 길게 늘인 유명 연예인 초청 전도집회 광고 현수막은 눈에 띄어도 말씀 사경회를 연다는 글귀는 자취를 감춘 것 같다. 김장 봉사, 급식 봉사 기회를 알리는 광고문은 보여도 기도회 참석을 독려하는 광고는 잘 보이지 않는다. 한껏 차려입고 공항으로 가기 위해 교회 주차장을 메운 무리는 보이지만, 침낭을 들고 기도처로 가기 위해 서성이는 성도들을 보기는 쉽지 않다. 모니터 앞에서 호기심 어린 눈으로 세상에 기웃거리는 일꾼들은 많으나, 세상의 문을 닫고 골방에 들어가 주님의 품을 파고드는 일꾼들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세상의 콘서트를 방불하게 하는 수련회 집회 중 팔을 높이 들어 열창하는 청년들은 보이지만, 치열하게 주님을 찾다 예배당의 긴 나무의자에 잠시 눈을 붙이고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들은 사라진 것 같다. 복잡하게 얽힌 소셜 네트워크를 연신 체크하며 부지런히 움직이는 손가락은 보여도, 세심하게 말씀의 장을 천천히 넘기는 손가락은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의 모습이 이렇게 가벼워지고 약해져 가는 현실에 대해, 단지, 시대의 변화로 원인을 돌리거나 내부의 한두 가지 이유로 설명해 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에 대한 기독교 전문가들의 크거나 세밀한 분석은 제쳐 두고, 내게 한 근본적인 이유를 끄집어내라 한다면, 이 땅에 진중하게 주님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라 말하고 싶다. 주님과의 개인적인 교제를 소중하게 여기며, 부단히 말씀을 공부하고 기도로 영적인 힘을 얻어 세상에 주님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다운 그리스도인이 그렇게 많지는 않은 것 같다. 말씀을 직접 읽고 연구하여 그것이 주는 감동과 교훈을 얻기보다, 수고하지 않고 인터넷을 통해 쏟아지고 있는 설교나 성경해석, 간증을 듣는 것으로 영적인 양식을 채우려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조용한 장소를 찾아 주님을 묵상하며 기도로 깊이 주님께 나아가는 시간을 갖기보다, 여러 사람 속에 섞여 급한 마음으로 대충 기도를 쏟아 내고는 서둘러 자리를 뜨는 것으로 기도 생활이라 생각하는 이들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말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충분한 주님과의 교제의 시간 없이, 듣고 배운 지식 정도에 만족하며, 주님의 뜻과 상관없이 스스로 옳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 많다는 사실이다. 이런 성도들이 늘어남과 함께, 소리는 요란해졌다. 하지만, 정작 세상을 밝히고 선도할 내면의 힘을 기르지 못해, 변화를 일으키지 못하고, 오히려 세상으로부터 지탄받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고 본다. 진정한 내면의 힘은 지속적인 주님과의 진지한 교제를 통해서 길러진다. 끊임없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기도로 주님의 세계 속에 머무는 시간이 쌓여 감에 따라 그분의 능력과 형상을 드러낼 힘이 축적되는 것이다. 이는 그 분에 대해 듣는 것으로, 그분을 위해 일하는 것으로, 그분을 믿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으로 생겨나지 않는다. 마리아처럼 주님께 주목하고 그분의 세계에 몰입하는 개인적인 경험에 의해 주어진다. 혼동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말씀을 전하기 위해 준비하는 시간, 영혼을 돌보기 위해 성도를 만나는 시간, 공식적인 기도회에 참석하는 시간, 같은 뜻을 가진 동역자와의 교제의 시간이 주님과 함께 보내는 시간이라고. 주님을 위한 일들이니 영적인 힘을 얻을 수 있다고. 그런 시간들이 주님과 개인적으로 만나는 시간을 대체할 수 없다. 주님을 앞에 모시고 귀 기울여 듣고 자비와 은혜를 구하는 시간을 갖지 않으면 영적인 양식과 힘을 공급받을 수 없다.목사로서 주일 맞이는 언제나 조심스러웠다. 특히, 말씀을 전하는 일에는 매번 긴장과 두려움이 따른다. 성격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었다. 바르게 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생각과 함께 그 시간에 성령께서 일하시는 도구로 드려져야 한다는 조바심 때문이었다. 이런 긴장과 염려는 잘 된 설교문을 준비하는 것으로 해소될 수는 없었다. 주님에게서 오는 자신감과 힘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마음에 아무런 가책이 없고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 안에 있는 가까운 관계가 준비되어야 했다. 이를 위해, 토요일은 온전히 주님과 개인적으로 함께하는 시간으로 떼어 놓았다. 그날을 사람을 만나는 일로, 행사에 참여하는 일로, 혹은 다음 날 설교문을 만드는 일로 보내지 않았다. 주일에 전할 말씀은 토요일 전에 준비했고, 한적한 장소를 찾아 묵상하고 기도하며 조용한 시간을 보냈다. 아울러, 예배를 드릴 장소에 들러 성도들이 앉을 자리 하나하나를 붙잡고 한 분 한 분을 머리에 떠올리며 기도해 드렸다. 모두가 다음날 주님 앞에 나와, 참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얻어 돌아가기를 위해 기도했다. 고백이 난무하고 표어들이 이곳저곳을 장식해도 주님과의 교제가 결핍되면 개인이나 교회는 힘을 잃어버린다. 시편 기자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라고 표현했듯이 그리스도인의 힘은 주님과의 교제에서 온다. 각자에게 주어진 성도의 길을 흔들림 없이 걸어갈 힘,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고 칭찬할 만한 생명력 있는 삶의 힘은 끈질기게 주님을 찾는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이런 그리스도인이 많아질수록 교회는 든든해질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독교도 본래의 자리를 찾아갈 수 있고 다시금 신뢰를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땅에, 주님의 발 앞에 앉아 그분만을 주목했던 마리아들이 많아지기를 소망한다.
공감과 위로의 배신
공감에서 성육신으로
by 이춘성
2024-02-15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회사를 가르쳤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최근 어느 지역에서 열린 로마 가톨릭 신부들과 개신교 목사들의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곳에는 소위 복음주의 신학을 가진 개신교 목사들도 다수 있었다. 하지만 트루먼은 그 모임에 참여한 후 자기와 같은 복음주의 목사들에게 이질감을 느꼈고, 그 소회를 한 기독교 잡지에 기고하였다. 그 내용은 그가 적어도 성자 예수님에 대한 기독론에 있어서는 복음주의 목사들보다 로마 가톨릭의 수도회 소속 신부들에게서 더 동질감을 느꼈다는 것이다. 트루먼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후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그곳에 참여한 개신교 목사들이 그리는 예수님의 모습은 인간의 고통에 공감하고 위로하는 분이지만, 베네딕트 수도회 소속 신부의 예수님은 성부와 함께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었다는 것이다. 트루먼의 지적처럼, 현대 교회의 설교단에서 선포되는 메시지와 예수님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수가 위로와 공감에 대한 것이다. 모두 괜찮고, 네 잘못이 아니니 걱정하지 말라는 위로의 메시지가 설교단을 점령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과거, 설교가 정죄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있었다. 하지만 현재는 교회 안에서 정죄의 언어는 죄악으로 거부당하고 있다. 죄를 지적하는 설교는 청중에게 배척당하고, 설교자들에게서도 이질적인 언어가 되었다. 무조건 죄악과 부정적인 말로 우울하게 하는 메시지도 문제지만, 분별 없는 공감과 위로도 큰 문제이다.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처럼 자신의 죄를 상대의 탓으로 돌리고 비난하며, 억울한 피해자 코스프레를 정당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마약에 중독된 사람들이 더 큰 쾌락과 안정을 위해 약의 용량을 늘리지만, 그것이 그를 배신하고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처럼, 답 없는 위로와 공감 또한 문제의 근원인 죄를 외면하게 만들어 상처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성경은 위로와 공감에 대해서 뭐라 말하고 있을까? 예수님의 공감 첫째로 성경은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예수님이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신다는 사실이 기록된 성경 말씀은 히브리서 4:15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영어 성경(ESV)은 이 말씀에서 ‘동정’을 ‘공감’(sympathize)로 번역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이 둘은 서로 바꿔 사용해도 의미상의 문제가 없다.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고 이해하신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공감을 이중 부정을 사용하여 강조한다. 이 말씀을 통해 성도들은 인간이 처한 죄악의 환경, 그리고 죄의 비참함에 공감하시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큰 위로를 얻을 것이다.둘째로 이 말씀은 예수님은 인간이 처한 현실에 공감하시지만, 그 공감의 한계를 명확하게 구분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다. 히브리서 4:15의 ‘시험’이란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유혹’이다. 예수님도 우리 인간과 같은 죄의 유혹을 받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 또한 그 유혹을 견디고 이기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그 갈등과 죄에 취약한 인간의 연약한 육체를 경험하셨다. 하지만 성경은 인간의 연약성에 대한 예수님의 공감은 여기까지라고, 분명한 경계선을 긋고 있다. 성경은 그 공감과 위로의 경계를 명확하게 구분하면서 “죄는 없으시니라”라고 단호하게 선언한다. 예수님의 공감은 죄에 대한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 네가 죄를 지은 것 모두 공감한다. 이런 어려운 환경에서 견디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지. 네 마음을 내가 다 알아 너무 걱정하지 마라. 나도 너와 비슷해. 그러니 난 널 깊이 공감하고 위로해.” 이런 식의 공감과 위로가 예수님이 인간이 되신 이유가 결코 아니라는 의미이다.성육신과 복음C.S. 루이스는 인간이 되신 예수님의 성육신을 “가장 위대한 기적”(the Grand Miracle)이라고 부르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였다. “하나님은 아래로 내려가십니다. … 자신이 창조하신 자연의 그 뿌리와 해저까지 내려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이렇게 내려가시는 것은 다시 올라가시기 위함입니다. 황폐된 세상 전체를 자신과 함께 위로 들어 올리시기 위함입니다.”(기적, 218) 이어서 루이스는 성육신은 힘센 사람이 커다랗고 복잡하게 생긴 짐을 들기 위해 자기 몸을 거의 보이지 않게 될 정도로 짐 밑으로 숙이는 것에 비유한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순식간에 큰 짐을 어깨에 사뿐히 짊어지고 성큼성큼 걸어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성육신의 신비는 낮아짐에 있는 것이 아니라 높이 올라가는 ‘상승’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의 상승이 인간에게 복음인 이유는 그분 홀로 상승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과 함께 상승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육신이야말로 복음 그 자체이다. 결과적으로 복음의 핵심은 공감과 위로가 아니라 해결과 상승에 있다. 위로와 공감은 전능하신 예수님의 복음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을 뿐,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높으신 하나님을 향해서 상승할 때, 위로와 공감은 그 수단으로서의 기능을 다하게 된다. 위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복음은 위로와 공감에서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장 위대한 소식’(the Grand News)이다. “우리가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나고 몸은 맑은 물로 씻음을 받았으니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 (히브리서 10:22)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른다고 하셨을까?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일까?
by Wyatt Graham
2024-02-06
마태복음 24:36을 보면, 예수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시각은 아무도 모른다. 하늘의 천사들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이 아신다” 하셨다.당연히 이런 질문이 생긴다.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은 왜 그날과 그때를 모르신다고 했을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을 아들이 모른다면, 아들은 하나님이 아니라는 뜻인가?아들은 하나님이시고 또 사람이시다성경은 아들이 하나님(요 1:1; 골 2:9)이시요, 동시에 사람(요 1:14; 히 2:14; 빌 2:7; 롬 8:3)이시라고 가르친다. 마태복음 24:36은 이러한 성경의 진리 중 어느 것과도 모순되지 않는다. 이 점에 관한 성경의 규칙은 이렇다. 보통 성경은 때때로 그리스도가 신성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다고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인성 면에서 아버지보다 낮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다”(요 10:30)라고 말씀하시면서 자신이 아버지와 동등함을 확증하셨다. 그러면서 인성에 있어서는 “내 아버지는 나보다 크신 분”(요 14:28)이시라고 기꺼이 인정하셨다.이 기본 해석 규칙은 성경만큼 오래되었다. 이 성경 원리를 완전히 설명하는 글을 보려면 여기를 보라.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진리는 두 가지이다. “아버지는 종의 형체보다 크시지만 아들은 형체에 있어서 하나님과 동등하시다.”[1] 아우구스티누스는 바울의 주장을 근거로 이렇게 주장한다. 빌립보서 2:6-8에서 바울은 아들이 본체에서는 하나님과 동등하시지만 인성에서는 종의 형체를 지녔기에 하나님보다 작다고 단언한다. 그렇다. 아들은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또한 사람이다. 이 기본 진리를 알면 마태복음 24:36을 더 쉽게 이해할 수 있다.이러한 기본 해석 규칙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인간이시기에, 우리의 구속주이신 그리스도께서는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것처럼 인간의 무지를 포함하여 우리 인간처럼 사셨다. 이런 원칙이 어떻게 작동하는지 설명하기 전에, 우리는 마태복음 24:36을 둘러싼 더 큰 성경의 맥락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마태복음 24:36의 전후 문맥 푸아티에의 힐러리(Hilary of Poitiers, 310-367)는 삼위일체론(On the Trinity)에서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 아님을 증명하기 위해 아리우스파가 마태복음 24:36을 어떤 식으로 인용하는지를 설명했다. 하나님이 아시는 것을 모르는 예수님이 본성에 있어서 아버지와 같을 수 없다는 게 그들의 주장이었다. 한 구절만을 놓고 보면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그러나 성경을 제대로 읽는다는 것은 문맥에 맞게 읽는 것을 의미한다. 마태복음 24:36과 관련해서, 힐러리는 “단어의 정확한 의미는 앞뒤의 내용을 확인할 때 제대로 드러난다”라고 언급한다(De Trinitate §9.2).힐러리의 이 말은 마태복음 24:36의 문맥을 이해하려면 본문 자체를 넘어서 마태복음 전체, 심지어 성경 전체를 읽어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원칙에 따라서 힐러리는 그의 삼위일체론에서 무려 두 장(9-10장)에 걸쳐서 성경 전체가 예수님에 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를 설명한다. 근접 문맥에서 볼 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4:36(마 22:41-46)을 말씀하시기 전에 우선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다. 마가복음의 평행 구절(막 13:32)에서도 예수님은 이 말씀에 앞서 자신의 신성을 확증하셨을 뿐만 아니라(막 12:35-37), 마가는 마가복음 11:15-19에서 예수님이 주 하나님으로 성전에 오시는 모습을 묘사한다. 이는 마가복음 서두가 암시하는 내용과 같은 맥락이다(막 1:2). 전체로 볼 때, 성경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하다. 하나님으로서 예수님은 모든 것을 다 아신다는 것이다(요 21:17; 시 44:21). 아들과 아버지는 이스라엘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다(신 6:4; 요 10:30). 바울이 말했듯, “그리스도 안에 온갖 충만한 신성이 몸이 되어 머물고 계시고”(골 2:9). 그리고 “우리는 모두 그의 충만함에서 선물을 받되, 은혜에 은혜를 더하여 받았다”(요 1:16; 골 2:10).그리고 언급한 바와 같이, 성경은 또한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 1:14)고, 그리고 “그도 역시 피와 살을 가지셨다”(히 2:14)고 분명하게 가르친다. 성자 하나님은 사람이시며 동시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그에게 두 가지 본성이 있다고, 즉 신성과 인성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예수님이 하나님이시자 동시에 사람이신 게 사실이라면, 마가복음 8:29이나 마태복음 24:36에서도 그분이 자신의 그런 존재를 멈추실 리가 없다. 마태복음 24:36을 정경의 맥락에서 읽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 인간이신 동시에 하나님이신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시선을 고정해야 한다. 이 문제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짐으로 간단하게 정리해 보자. Q: 마태복음 24:36에는 “아들”이라는 단어가 있는가? A: 그렇다.Q: 아들이 사람인 동시에 하나님이신가? A: 그렇다. 그렇다면 이 본문에도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이 함께 들어있어야 한다. 중요한 건 이 점이다. 설혹 어떤 구절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굳이 다 설명할 의도가 없다고 해서, 완전한 그리스도가 완전한 그리스도가 아니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한결같은 분이시다”(히 13:8).성경의 가르침을 따르려면 우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고 누구라는 점을 오로지 성경이 증언하는 바에 따라서만 확증해야 한다. 이 진리를 설명하려는 의도가 없는 특정 구절이 있다고 해서 그분이 신성과 인성의 연합을 멈추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그리스도는 오늘도, 어제도 그리고 영원히 하나님이시며 또한 사람이시다. 예를 들어, 칼뱅은 마태복음 24:36을 주석하면서 이렇게 단언한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2]신약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볼 때마다 우리는 이 말이 사실임을 확인한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근거로 할 때, 하나님으로서 아들은 모르는 게 없으시다. 그렇다면 마태복음 24:36에서 드러난 예수님이 모르는 게 있다는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마태복음 24:36에서 예수님의 인성은 그분의 무지를 어떻게 설명하는가? 나지안주스의 그레고리오스(Gregory Nazianzus)는 이렇게 말했다. “예수님의 무지를 그분의 하나님 되심이 아닌 인간의 본성에 귀속시킴으로, 우리는 가장 경건한 방식으로 이 구절을 이해해야 한다”(Or. 30). 그리고 그레고리도 지적했듯이, 예수님이 참된 인간으로 살아야만 했던 이유도 “내 몸으로 내가 직접 감당하지 않고서는 고칠 수 없기” 때문이었다(Epistle 101 to Cledonius).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모든 부분을 치유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철저하게 우리처럼, 즉 몸과 영혼과 정신으로 살아야만 했다. 그분은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해 시험과 슬픔과 고난이 가득한 진정한 인간으로 사셨다. 히브리서 2장에서 말하는 것처럼,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인간을 공감하기 위해 “살과 피”를 취하셨다(히 2:17-18).마찬가지로, 히브리서 5:7에서 분명하게 밝히듯이 예수님도 인간의 슬픔과 염려가 있으셨다. “예수께서 육신으로 세상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께 큰 부르짖음과 많은 눈물로써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의 경외심을 보시어서, 그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히 5:7).조금 앞서 히브리서 4:15은 이 가르침을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우리의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시험을 받으셨지만, 죄는 없으십니다”(히 4:15). “내 마음이 괴로워 죽을 지경이다”(마 26:38)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인간의 연약함이 어떤 느낌인지 아신다. 그러므로 성경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1:5-6)고 확증해야 한다. “죄 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으로 오신 인간 예수 그리스도는 “죄가 없으신”(히 4:15) 참 인간이시다. 인간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그날과 그 시를 모르셨다. 칼뱅의 설명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아시는 그리스도(요 21:17)가 인간으로서의 인식이라는 측면에서 어떤 것에 대해서 무지했다고 말하는 것은 전혀 부적절하지 않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슬픔과 불안을 겪지 않으셨을 것이고, 결코 우리와 같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히 2:17)”(Harmony, 154).칼뱅은 슬픔과 불안이 발생하는 이유 중 하나가 미래에 대한 무지 때문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되기 위해서 예수님은 그러한 시련과 유혹을 경험하셔야만 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우리를 공감할 뿐 아니라, 죄를 짓지 않고도 시험을 이기는 방법까지 가르쳐 주실 수 있다.“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당하심으로써 여러분이 자기의 발자취를 따르게 하시려고 여러분에게 본을 남겨 놓으셨습니다. 그는 죄를 지으신 일이 없고 그의 입에서는 아무런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벧전 2:21-22).예수 그리스도, 우리의 구원자,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셨다칼뱅은 마태복음 24:36이 드러내는 인간으로서의 예수님의 무지에 관해서 다음과 같이 긴 문장으로 설명한다.“중보자가 되려고 우리에게 내려오셔서 계시는 동안에 한해서, 그래서 최소한 그가 직분을 완수할 때까지는, 정확한 종말 시점에 관한 정보가 그에게 주어지지 않았다는 점을 나는 이해한다. 그건 그가 부활하신 이후에 받은 지식이다. 이 점에 관해서는 예수님이 직접 부활하시고 나서야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가 자신에게 주어졌다고 분명히 선언했기 때문이다(마 28:18절)” (Harmony, 154).중보자되신 그리스도는 참 사람으로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오셨다. 영광을 받으시기 전까지는 예수님도 인간처럼 알고 계실 뿐이다. 그러나 부활하신 후에는 구속자이신 그리스도께서 그날과 그 시간에 관한 지식을 받으셨다는 게 칼뱅의 주장이다. 칼뱅은 성경 전체를 자신만의 문맥으로 이해해서 읽었기에 이 구절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두 본성이 각각 고유한 특성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한 인격 안에서 연합되었다”(Harmony, 154).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마태복음 24:36을 읽어야 한다. 즉, 신학적으로 해석해야지 그렇지 않으면 온전한 성경적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칼뱅은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로 칼뱅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인성에서도 특별한 부분, 즉 그날과 그 시에 대한 무지를 드러내시는 동안에도 어떻게 여전히 하나님이실 수 있는가에 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하나님의 본성이 그때는 쉬는 상태(a state of repose)였다. 필요에 따라서 예수님이 중보자의 직무를 수행하는 경우에, 즉 인성이 고유한 특성에 따라 별도로 행동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신성은 전혀 그 능력을 발휘하지 않았다”(Harmony, 154).칼뱅이 의미하는 바는 때때로 그리스도의 인성이 더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있고, 또 상황에 따라서 그분의 신성이 더 드러나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와 구속주로 오셨다는 사실이다. 구속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는 데에 있어서 예수님의 무지는 그분의 참된 인성을 보여주며, 그분이 우리의 구원을 위해 어떻게 사셨는지를 보여준다. 힐러리는 그 점을 지적한다. “주님께서 그날은 아무도 모른다고 말씀하심으로 우리를 짓누르는 염려의 무게를 없애셨다” (Matthew §26.4).여기서 우리는 제자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때나 시기는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권한으로 정하신 것이니,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행 1:7).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굴욕을 당하시는 동안에도 마찬가지로 그날과 그때를 알지 못하셨고, 그 사실은 그분이 우리를 위하여 참 인간으로 사셨음을 의미한다.성경은 문맥 안에서 읽어야 한다아리우스파가 성경을 문맥에 맞게 읽지 않는다는 힐러리의 비판은 다름 아니라 그들이 마태복음 24:36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떼어내서 읽는다는 의미였다. 그들은 마치 그리스도에 관한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이 조금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 구절을 이해했다. 힐러리의 지적은 단순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에 대해 가르치도록 성경 전체에 영감을 주셨기 때문에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비록 마태복음 24장이 그리스도의 두 본성에 대해 길게 가르치지 않지만, 성경의 다른 부분에서 우리는 그 점을 배울 수 있다. 성경의 각 부분을 확실히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반드시 성경 전체의 문맥을 읽어야 한다. 마태복음 24:36 주위의 몇 구절만 읽는 것은 문맥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이다. 힐러리의 주장에 따르면, 그게 바로 아리우스파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을 속인 방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성경으로 성경을 풀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성경 전체가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자 사람이심을 가르친다. 바울은 이 사실을 “경건의 비밀”이라고 부르면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육신으로 나타나시고, 성령으로 의롭다는 인정을 받으셨습니다”(딤전 3:16). 성자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나셨기에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딤전 2:5)가 되셨다. 마태복음 24:36에서 그날과 그 시를 모른다고 하신 예수님은 우리의 대제사장, 곧 중보자가 되시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참된 인성을 나타내셨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이십니다”(딤전 2:5).1. See The Trinity, trans. Edmund Hill, ed. John E. Rotelle, 2nd ed. (New York: New City Press, 1991), 78.2. John Calvin, Commentary on a Harmony of the Evangelists: Matthew, Mark, and Luke, trans. William Pringle (Edinburgh: Calvin Translation Society, 1846), 154. 원제: Why Doesn’t Jesus Know the Day and the Hour in Matthew 24:36?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화장 또는 매장, 이 결정이 중요한 이유는
by Justin Dillehay
2024-01-31
과거에 화장할까 매장할까를 놓고 고민하는 그리스도인은 없었다. 그리스도인에게 매장은 표준이었고, 따라서 “기독교식 매장”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리스도인에게 화장은 고작해야 바이킹이 나오는 이야기에서나 만나는 먼 나라 내용이었다. 그러나 서양에서도 상황이 바뀌었다. 화장이 보다 더 일반화되었고, 이상하다는 생각도 조금씩 사라졌다. 이제는 매장보다 화장이 더 일반적인 나라가 적지 않으며, 그리스도인 중에도 아예 처음부터 화장을 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그럼에도 “화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은 목사로서 내가 종종 받기에 충분히 생각할 가치가 있다.내 주장은 “기독교식 매장”이 잘못된 명칭이 아니라 적절한 설명이라는 것이다. 시신이 화장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이 부활시킬 수 없는 것은 아니다. (그건 하나님에게 매우 쉬운 일이다.) 그리고 화장이 성경의 명확한 명령을 위반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모든 문화적 관행이 기독교 신학과 잘 맞는다는 의미도 아니다.) 단지 나는 매장이 인간의 몸과 그 미래에 관한 성경적 선례, 성경적 이미지, 그리고 성경적 신학을 더 잘 반영한다는 점에서 기독교적 행위라고 주장할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의 매장은 절망적인 문화 속에서 기독교가 주는 희망을 가시적으로 선포하는, 죽음이 주는 슬픔 안에서 기쁨을 찾는 방법으로서 회복할 가치가 있는 관행이다. 바른 질문을 하라성경에 화장에 대한 도덕적 금지 조항은 없다. 그러나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많은 예가 있으며, 하나님의 백성이 화장한 예는 거의 찾을 수 없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헬, 요셉, 미리암, 모세, 다윗, 엘리사, 세례 요한, 스데반, 그리고 가장 유명한 매장 사례로는 그리스도의 시신이다(창 25:10; 35:19, 29; 49:31; 50:14, 민 20:1, 신 34:6, 여 24:32, 왕상 2:10, 왕하 13:20, 막 6:29, 행 8:2, 고전 1:31; 15:4).왜 그런지 물어볼 가치가 있다. 얼마든지 다른 옵션도 있었다. 스테판 프로테로는 “이집트인, 중국인, 히브리인을 제외하면 화장은 고대인의 표준 관행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한다. 중요한 건 매장이 신약과 구약 모두에서 하나님 백성의 표준 관행이었다는 점이다. 도대체 왜일까?매장 패턴은 정경이 완성되었다고 끝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로마제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매장이 화장을 대체했다는 게 역사의 증명이다. 한마디로 기독교가 지배적이거나 영향력을 행사하는 모든 문화에서도 같은 현상이 일어난다. 서구 세계에서 기독교의 영향력이 쇠퇴하면서 화장이 부활했다고 주장할 수도 있다. (여기에는 인구 증가와 장례 비용 증가도 한몫했다.) 하지만 왜?반문화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매장이 역사 전반에 걸쳐 하나님의 백성 사이에서 항상 지배적인 관습이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의 몸에 대한 유대-기독교의 믿음과 유대-기독교의 매장 관습 사이에 어떤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어서가 아닐까? 대답은 ‘그렇다’이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의 몸과 미래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죽고 나서조차 그 몸을 대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 다른 종교들이 바라보는 몸한 가지 예를 들어보자. 역사적으로 힌두교도는 화장한다. 인도나 네팔과 같은 곳에서는 화장이 공개적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이것은 적어도 부분적으로 힌두교인이 환생과 몸에 대한 믿음을 반영한다. 한 힌두교 웹사이트에 따르면, “죽은 후에 인간의 외양, 즉 육체는 아무 소용이 없다. 따라서 영혼을 해방시키고 환생 과정을 돕는 가장 빠른 방법은 몸을 태우는 것이다”라고 한다. 육체와 내세에 대한 힌두교의 믿음과 죽음을 둘러싼 힌두교의 문화적 관습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 이건 놀랍지 않다. 육체를 영혼의 껍데기나 감옥으로 여기는 종교도 적지 않다. 이런 시각이 반드시 매장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건 분명하다. 탈출한 감옥에 다시 돌아가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행 17:32). 반면에, 매장을 행하는 모든 사람이 다 육체적 부활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자연스럽게 매장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기독교 역사 전체에서 드러난다.)종교는 문화의 일부이며 문화적 신념은 문화적 관행에 영향을 미친다. 기독교가 바라보는 몸기독교는 이 점에서 힌두교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영혼 불멸뿐 아니라 육체의 부활도 믿는다. 다른 많은 종교와 달리 기독교는 인간의 육체와 창조 전반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매우 좋았다”라고 선언하셨다(창 1:31; 창 1-2 참조). 이것이 기본적인 기독교의 시각이다. 물리적 창조와 인간의 몸은 선하신 하나님이 만드신 선한 결과이다. 이는 또한 인간에 대해서 기독교가 가지고 있는 기본 교리의 일부이다. 인간으로서 당신은 몸을 가진 영혼 또는 영혼이 있는 몸으로 묘사될 수 있다. 두 요소 모두 중요하다. 영혼과 육체가 분리되는 것이 죽음의 정의이다(약 2:26). 이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몸이 단지 “진짜 나”를 만드는 영혼을 싸고 있는 껍질에 불과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몸은 인간이 인간이 되도록 하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아비가일 파페일이 말했듯이, “몸은 단순한 신체가 아니다. 신체는 겉으로 드러난 사람 자체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전이 된 5세기 저서 하나님의 도성에서 이에 대해 썼고, 그는 죽은 사람을 돌보는 방법에 이를 적용했다.아버지가 입던 옷, 아버지의 반지, 그리고 그의 모든 물건이 아버지가 베푼 사랑을 고려할 때 자식에게 얼마나 소중한 의미를 가지겠는가? 그런 측면에서 볼 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육신은 얼마나 더 잘 보살펴야 하겠는가? 평생 입었던 육신을 어떻게 옷과 비교할 수 있을까? 몸은 단지 외적 장식이나 보조물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일부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몸과 영혼이 죽음으로 영원히 분리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고 몸을 부활시키겠다는 계획을 세우신 이유이다. 예수님이 매장된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의 거룩한 자를 썩음을 당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시고 제 삼일에 살리실 것을 계획하셨기 때문이다(행 2:27, 고전 15:4). 그리고 그리스도의 형제가 된 그리스도인 대부분도 부활하기 전에 부패를 겪겠지만, 우리에게도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아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참조 고전 15:51-55).힌두교 신학이 그들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친 것처럼, 초기 기독교 신학도 교회의 문화적 관습에 영향을 미쳤다고 신학자 티모시 조지는 지적한다. “로마의 카타콤이 증명하듯이 초기 그리스도인은 매장을 고집했다. 그리스도인의 묘지는 코에메테리아(coemeteria)라고 불렸는데, 문자적으로는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곧, 미래의 부활에 대한 믿음을 반영하기 때문이다.”간단히 말해서, 인체의 본질적인 선함과 미래 부활에 대한 믿음은 기독교 신앙과 세계관의 근본이다. 따라서 그것이 사후 시체를 처리하는 방법과 관련해서 문화적 관행을 형성했다는 건 조금도 놀랄 일이 아이다. 바른 신호를 보내라그리스도인이 최근까지 거의 보편적으로 매장을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현재의 문화 추세를 단순히 따르기 전에 잠시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죽음의 의식은 문화적, 신학적 공백 상태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화장하는 요즘의 추세가 과연 바람직할까? 더 중요한 것은 (성경과 그 이후 모두에서) 하나님의 백성의 역사적 관행을 고려할 때, 우리는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이 매장이라는 보편적 관행을 제대로 설명하는지 고려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러셀 무어가 말했듯이, “문제는 단지 화장이 죄인가 아닌가의 여부가 아니다, … 진짜 문제는 장례가 과연 기독교적 행위로 이뤄지는지의 여부이며, 따라서 장례가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가이다.” 무어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렇다’라고 생각한다. 장례는 그리스도인의 행위이며, 약함으로 뿌려진 것이 언젠가는 능력 있게 일어날 것이라는 믿음을 전달한다(고전 15:42-43). 부활에 관한 모든 구절 중 가장 유명한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은 땅에 심어진 씨의 이미지를 사용하여 죽은 자의 부활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러나 “죽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나며, 그들은 어떤 몸으로 옵니까?”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여! 그대가 뿌리는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뿌리는 것은 장차 생겨날 몸 그 자체가 아닙니다. 밀이든지 그 밖에 어떤 곡식이든지, 다만 씨앗을 뿌리는 것입니다. (고전 15:35-37)시신을 묻는 것은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둘 다 땅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땅에서 나오는 것이 둘 다 생물학적으로 연속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차마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은 상태로 다시 나온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음과 장사에 대해서 동일한 비유를 사용해서 이렇게 말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서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열매를 많이 맺는다”(요 12:24).이 말씀은 죽은 자를 매장하라는 명령이라기보다는 기독교 신앙으로서의 부활과 기독교 관습으로서의 매장 사이의 자연적 적합성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담긴 지침이라는 측면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농업이든 장례식이든 매장은 최종 행위가 아니라 시작 행위이다. 단순한 끝이 아니다.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도로서 우리가 갖고 있는 소망이다. 그리고 나아가서 이교 문화 속에서 우리가 활용해야 할 기회이다. 그리스도인의 매장은 단순히 주검을 처리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씨앗을 심는다. 추수를 바라며 씨를 뿌리듯, 우리는 부활을 바라며 장사를 치른다. 기독교식 매장을 다시 주장하며나는 무어의 이 말에 동의한다. “기독교 목사로서 나를 괴롭히는 것은 성도 중 일부가 화장되었다는 사실이 아니라, 대부분의 교인들이 거기에 관해서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점이다. 주변의 다른 문화처럼 우리는 죽음과 매장조차도 단지 개인 취향에 따른 문제로 보는 경향이 있다.”그러나 사람은 바다에 홀로 뜬 섬이 아니며, 결혼식과 마찬가지로 장례식은 항상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공동체의 문제이다. 장례식을 준비하는 책임이 개인적이라고 해서, 단순히 실용주의적이고, 비역사적인, 그리고 문화적 조류에 휩쓸리는 미국의 개인주의자로서 치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는 성경 말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장례라는 엄숙한 의식을 치러야 한다. 화장을 선호하는 이유 중 하나가 돈 문제라는 점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묻어주고 싶어도 그럴 여유가 없는 사람을 향해서 나는 깊은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단지 입에 발린 동정은 가치가 없다. 내가 제안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 공동체로서 우리가 여전히 장례를 기독교적 행위로 믿는다면, 우리는 중요한 곳에 투자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아야 한다. 경제적 이유로 매장을 하지 못하는 교인에게 교회가 나서서 재정적 지원을 하자고 제안하고 싶다. 앞에서 나는 몸에 대한 기독교 신앙과 역사적인 기독교 매장 사이에는 자연스러운 적합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이 글을 쓰는 이유가 화장을 선택한 사람을 비난하거나 부끄럽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서 화장한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의 소망은 미래 지향적이다. 사랑하는 사람, 특히 그리스도 안에 있는 형제자매의 장례를 논의하는 그리스도인에게 생각할 거리를 주고 싶어서이다. 매장은 성경의 사례, 성경의 비유, 그리고 몸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더 잘 표현한다는 점에서 기독교 행위이다. 그러므로 우리 문화가 점점 더 이교화될수록, 우리도 점점 더 반문화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매장 문화를 되찾자. 그리고 말만이 아니라 행동으로, 크게 외치자, “우리는 몸의 부활을 믿습니다.” 원제: Cremation or Burial: Does Our Choice Matt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만병통치약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4-01-26
교회 역사에서 형성된 중요한 경구가 있다. 바로 기도의 법이 곧 믿음의 법이다(lex orandi lex credendi)란 경구다. 이 경구는 5세기의 수도사 아퀴테인의 프로스퍼(Prosper of Aquitaine)가 남긴 말이다. 우리가 어떻게 기도하는가에 따라 우리의 믿음과 삶의 방식이 형성된다고 할 수 있다. 기도는 성경에서도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 요한계시록 8:3-5에는 성도의 기도가 세상에 미치는 효과를 묘사하고 있다. 성도의 기도는 천국의 향로와 함께 천사에 의해 하나님의 존전으로 올라간다. 그 후 “천사가 향로를 가지고 단 위의 불을 담아다가 땅에 쏟으며 뇌성과 음성과 번개와 지진이 난다”(계 8:5). 이는 기도가 우주에 미치는 생생한 묘사이다. 이처럼 기도는 우주적 영향력이 있는 영적 활동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사랑한 세상(요 3:16)에서 생명력을 지닌다. 기도는 세상을 치유하는 생명력을 지닌다. 하지만 우리는 기도의 생명력을 초월적이고 기적적 능력으로만 보려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를 만병통치약처럼 접근하는 것은 기도의 가치와 효과를 전혀 인정하지 않는 것만큼이나 주의해야 한다. 기도는 단지 기적을 낳는 방편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은 많은 특정한 사람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맺고, 이를 기적적으로 성취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자녀를 낳지 못하는 여인에게 자녀를 약속한 내용이다(창 17:15-19; 18:10-15; 30:22; 삿 13; 삼상 1:20; 눅 1:7). 하지만 이러한 내용들을 이해할 때 주의해야 한다. 왜냐하면 기적으로 출생한 아이들은 각자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데 특별한 역할을 감당했기 때문에, 자녀를 낳지 못하는 현대의 여성들이 이 내용을 자신에게 똑같이 적용하여 기도하면 아이를 허락하신다는 약속으로 간주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기적을 배제해서도 안 되지만, 사람의 영혼을 변화시키거나 기적을 일으키는 데 하나님의 능력을 우리 마음대로 이용하거나 제도화하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의 삶에서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강조가 초자연적 기적 추구의 열정으로만 이해되어서도 안 되며, 하나님의 자연법칙을 배제하는 기도 문화를 형성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치유는 초자연적일 수 있지만 창조적 설계, 즉 자연법칙을 배제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기도할 때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도 알아야 한다. 차가운 겨울에 벼를 심어놓고 눈이 오지 않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의 창조 법칙과 배치되는 기도라고 할 수 있다. 아무리 기도해도 노화 차제를 막거나 먹지 않고 살 수는 없다. 아브라함 카이퍼에 따르면, “자연법이라고 하는 용어는 자연으로부터(from Nature) 기원하는 법칙이란 뜻이 아니라 자연 위에(upon Nature) 부과된 법칙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계명은 위로는 궁창에도, 아래로는 대지에도 있으며 이 세계는 이에 의하여 유지되고 있다. 그리고 시편기자가 말한 바와 같이 이 계명들은 하나님의 종이다. 따라서 우리의 신체와 동맥과 정맥을 통하여 흐르는 피와, 호흡기관인 우리의 허파에도 하나님의 계명이 주워져 있다”(아브라함 카이퍼, 칼빈주의, 96). 우리의 기도가 자연법칙과 충돌해서는 안 된다. 특히 우리의 기도가 모두가 인정하는 인간의 기본적인 본성을 무시한다면 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 이로써 야기된 재앙은 자연법칙을 무시한 기도에 대한 창조자가 설계한 보편법의 응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이유에서 신학자들은 이런 재앙을 하나님의 심판이라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창조자의 정신, 26). 하나님은 우주가 창조 법칙에 따라 작용하도록 설계하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치유 또는 신유 역사가 일어날 가능성이 더 높은 것도 바로 그 법칙 안에서다. 우리의 기도가 하나님의 법칙과 질서 안에서 더욱 충만해질 때 하나님의 신비를 더 온전히 경험할 수 있다. 물론 우리는 하나님의 자연법칙에 순응하여 기도하는 법을 알아야 하지만, 기도의 초자연적 특성을 거부해서도 안 된다. 루돌프 오토는 서구 기독교가 신학과 신앙의 본질을 이성주의 혹은 합리주의, 즉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차원에만 종속시킴으로 기도와 같은 신앙의 생명력을 고갈시켰다고 보았다. 그는 기독교 신학과 신앙은 반이성적이거나 반지성적이어서는 안 되지만, 비이성적일 수 있는 인간 경험이라는 것을 강조하며 계몽주의 시대사조가 저지른 합리주의적 오류와 독단에 도전을 하였다. 그는 종교 경험의 비이성적 차원을 뉴미너스(numinous)라고 부르고 거룩한 존재 앞에 설 때 자기가 초라하고 보잘 것 없는 피조물임을 느끼는 의식이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비이성적 종교 체험의 신비감은 하나님이 인간의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달을 때 경험한다. 그는 종교 경험은 역설, 비약, 실존적 결단, 자기 초월의 감정, 황홀한 감성, 비매개적인 직관, 비인과적 동시성 체험 등을 동반하기 때문에 종교 경험이 반드시 논리적, 과학적, 인과론적 설명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실재의 세계가 아니라고 하였다(Rudolf Otto, The Idea of the Holy, 1-40). 바울이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요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을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라고 고백했듯이, 인간의 영적 경험은 이성적이고 감성적 표현 능력을 초월하는 특성이 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영적 경험은 은혜, 신비, 봉사, 경험 등과도 관계된다. 루이스는 “종교적 권위가 보다 확고히 수립되면 될수록 우발적 영감에 대해서는 더욱 대적하게 된다”고 하였다(C. S. Lewis, Ecstatic Religion, 34). 그것은 아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을 의심의 눈을 가지고 자기도취적 행위나 욕망의 추구로 보고, 기도를 점점 무시하는 것에 대한 예견이었는지도 모른다. 분명히 기도 경험은 자연법칙 안에서만 이해될 수 없는 신비의 미학이 있다. 특히 기도의 신비의 미학은 우리의 영적 삶을 이성의 울타리 안에 가두어 버리는 과오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때로 기도를 자연적이고 인간적인 삶과 맞바꾸려는 유혹을 받는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기도를 통한 창조 세계의 샬롬에 대한 성경적 전망은 천상적이지만, 이 땅에서 실현되는 천상적 질서에 대한 전망이다(계 21:1-2). 이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배우는 텔로스(telos), 즉 궁극적인 목적이다. 주의 기도에서 “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의 기도는 현실을 도피하는 전망이 아니라 회복하는 전망이다. 하나님은 만물을 파괴하지 않으시고 새롭게 하신다. 따라서 우리의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이 땅에서 어떻게 인간답게 살 것인가에 대한 전망이다. 기도의 성경적 전망은 자연적인 것과 초자연적인 것의 이분법을 철저히 거부한다. 앙리 드 뤼박의 말처럼, 우리는 초자연적인 것을 자연적으로 욕망하도록 창조되었으며, 은총이 초자연적으로 작용할 때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창조된 자연적인 목적을 실현할 수 있게 된다(Henri de Lubac, The Mystery of Supernatural, 130-137). 따라서 우리에게 초자연적인 은총도 결국은 자연적인 삶을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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