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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창조 신앙으로 몸과 성을 바라보기
by 이춘성2020-08-11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성'과 '생명 번영'이라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생명 없는 성','성 없는 생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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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7–28).


인류가 창조된 이후로 성(性)은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부분들 중의 하나다. 그 이유는 성은 인간의 생명과 가장 직접적으로 연결된 영역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선언(창1:27)은 인간은 성적인 존재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또한, 이후에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명령은 인간의 성이 지향해야 하는 것이 생명의 번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이유로 교회는 성의 사용을 생명의 탄생을 위한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


하지만 죄로 인한 인간의 타락은 ‘성’과 ‘생명 번영’이라는 둘 사이의 자연스러운 연결 고리를 끊어버렸다. 결국, 인간들은 '생명 없는 성', '성 없는 생명'을 추구하기에 이르렀다. '성 없는 생명'이란 남자와 여자의 성적인 관계 밖에서도 인간이 생명을 창조할 수 있다는 교만과 착각에 빠진 상태를 의미한다. 현대 의학과 생물학은 인간이 유전자 복제를 통해 생명을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와 달리 '생명 없는 성'이란 성을 단지 남녀 사이의 쾌락만을 위한 놀이로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요즘 단지 감정적인 측면으로만 이해하는 책임감 없는 사랑과 같다. 책임을 제거하고 직감적인 사랑을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성은 단지 감각적인 즐거움을 선사하는 도구에 불과하다.


성을 쾌락의 수단으로만 생각하고 남용하는 세속 문화는 20세기에 들어와 과학의 발전과 함께 가속되었다. 생물학과 의학의 발전으로 인간은 난자와 정자가 어떤 방식으로 수정되어 아이가 되는지 그 과정을 자세히 알 수 있었다. 긍정적인 면에서 이것은 불임의 원인을 찾아 치료할 수 있게 해 주었지만, 부정적인 면에서는 임신 걱정 없이 순전히 섹스만을 즐길 수 있도록 각종 피임 방법을 고안해 내게 하였다. 결국, 피임법의 발달은 사람들로 하여금 성과 생명의 신성하고도 거룩한 연결 고리를 제거하고, 성을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들의 재미있는 성인 놀이로 격하시켰다. 이러한 현대인들의 모습에 대해서 신학자 칼 투르먼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시하였던 과거 사람들과 달리, 현대 사람들은 성을 경시하고, 개인화시켰다고 말하였다.


유튜브, 트위터 등의 다양한 인터넷 매체들과 텔레비전, 신문 등의 대중 매체들은 성을 성인들의 놀이 정도로 취급한다.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이런 매체를 자연스럽게 접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약 100여 년 전 1880년대에 미국에서는 YMCA, YWCA 등의 기독교 단체에서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성교육을 시행하였다(Carrera). 당시의 성교육은 일종의 순결 서약 운동에 가까웠다. 하지만 대중 매체는 청소년들의 호기심을 더욱 자극하였고, 10대 임신율이 오르고, 불법 낙태로 여성들의 건강이 위험해지자 성교육은 방향성을 새롭게 갖췄다. 절제와 인내의 미덕보다는 호기심으로 인해 발생하는 나쁜 결과를 최소화하는 쪽으로 성교육을 시행한 것이다. 예를 들어, 청소년들에게 피임법을 가르쳐 안전한 성관계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현재 미국 청소년들의 약 40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고 있다. 또한, 질병관리본부의 2018년 “청소년 건강행태조사”에 의하면 한국의 청소년들의 5.7퍼센트 이상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고, 최초 성경험은 만 13.6세로 나타났다. 최근 소셜 벤처 EVE의 “2019 청소년 성(性)문조사”에 의하면 약 54.7% 이상의 청소년들이 성관계를 경험하였다고 답하였다. 비록 임신율은 낮아졌을지 모르지만, 현대의 성교육은 성을 거룩하고 신성한 것이 아닌 개인의 만족을 위한 도구라는 비뚤어진 인식으로 굳어지게 만들었다. 이것은 성과 생명을 하나로 창조하신 하나님의 창조 원리에 어긋난 것이다. 결국 성의 경시와 도구화는, 나의 생명을 위해 타인의 생명을 취하는 장기매매와 같은 생명 경시와 생명의 도구화를 가속 시킬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현대의 성교육이란 성에서 책임을 제거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는 교육이다. 그 결과 성은 일종의 성인 놀이로 폄하되고 있다. 그리고 어른을 흉내 내고자 하는 호기심 많은 10대 청소년들에게 성교육이 오히려 성적 호기심을 더 조장하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또한, 성에 관한 관심이 없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할 수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일부 성교육 전문가들과 교회에서는 조기 성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성교육을 전면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신자와 비신자가 어울려 살아가는 공적인 영역에서 현대적 성교육을 제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며, 그 과정에서 교회가 입을 피해도 만만치 않다. 또한 현대의 성교육 중에서 몸에 대한 설명은 단순히 무시할 부분이 아니다.


초기와 중세 기독교는 신플라톤주의에 영향을 받아 영과 몸을 분리하고 이를 차등하는 영육 이원론이 지배하였다. 즉, 영혼은 거룩하고 육체는 더럽다는 생각이다. 더러운 육체 때문에 인간이 죄를 짓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육체를 제거하기 위해 사람들은 몸을 학대하는 금욕주의에 빠지거나, 몸을 가치 없는 것으로 생각해 쾌락으로 탕진하는 쾌락주의에 빠졌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이러한 영육 이원론에 정면으로 반대하여 몸도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한 것이라고 주장했다(정정숙).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의 영혼만 창조하시고 이를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창1:27). 하나님은 자신의 형상으로 몸과 영혼이 유기적으로 연합된 사람을 창조하셨다. 이러한 이유로 사람이 몸에 대해서 아는 것은 간접적이지만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다. 그리고 몸을 통해 느낄 수 있는 다양한 욕구들(식욕, 수면욕, 성욕 등)을 이해하고 이를 균형 있게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번영하게 하고자 하신 문화명령을 시행하는 창조자의 대리 통치자인 인간의 기본적인 통치 자질이다. 비록 이 자질이 타락으로 어그러지고 무너졌지만, 이 기능은 여전히 인간만이 지닌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한 이유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 신자는 타락 이전의 원래의 모습을 회복하고자 하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창조의 세계관을 회복하고 이에 따른 교육을 통해 자신과 가족, 새로이 태어날 아이들을 양육하고 언약의 자녀들로 키워야 하는 것은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신자의 기쁨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자들이 자신의 몸을 이해하고 자라는 자녀들에게 신체가 얼마나 소중하며 가치 있는지 가르쳐야 한다. 그러려면 어른들과 부모부터 신체의 여러 부위가 어떤 기능을 하며, 왜 창조되었는지 바로 알아야 한다. 몸의 창조 질서를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성교육도 이러한 맥락 가운데 이해하고 가르쳐야 한다. 단순히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것이라 답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사춘기의 이차 성징이 일어나는 아이들이 신체 변화를 무방비로 맞이하게 해서도 안 된다. 하나님의 창조 신앙 안에서 이것들을 설명해 주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몸, 특별히 성과 관련된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구체적인 교육은 아이들이 질문하거나 의문을 해소하기 위해 다른 방법들(인터넷, 잡지, 동영상, 친구, 책 등)을 찾지 않는 한 일부러 가르칠 필요는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호기심이 생겼을 때, 그때 구체적인 지식을 가르치고 답하는 것이 좋다. 솔로몬이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남녀의 사랑을 통해 은유적으로 표현한 아가서에는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아 2:7;3:5;8:4)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성적인 욕망은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을 만났을 때 자연스럽게 깨어나는 것이라는 의미다(Thomas). 참된 사랑을 배우지도 알지도 못한 상태에서 사랑의 감정만을 깨운다면 이것은 욕정으로 흐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성교육에 있어 신체와 성관계에 대한 지식이 오히려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 아이들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각종 자극에 노출되어 있고, 아직 깨우지 말아야 할 성적 호기심이 조기에 발달하고 있다. 그런 아이들의 성과 신체에 대한 질문 앞에서 교회의 교사들과 부모들은 과거와 달리 적극적으로 성에 대한 창조신앙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가지고 신체의 의미를 가르치고, 함께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 아이들이 성과 몸에 대한 성경적인 세계관을 형성하는 것 외에 현대의 타락한 성문화에 대항할 방법은 없다. 그러한 이유로 기독교 성교육은 이 시대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며, 몸에 대한 바른 지식과 신학은 모든 신자가 알아야 할 신앙을 위한 지식이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거룩하고 신성한 하나님의 작품이다. 그렇기에 사람의 몸을 잘 알고 이해하는 것은 영혼에 대해서 아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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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이춘성

이춘성 목사는 20-30대 대부분을 한국 라브리(L'Abri) 간사와 국제 라브리 회원으로 공동체를 찾은 손님들을 대접하는 환대 사역과 기독교 세계관을 가르쳤다. 현재 분당우리교회 협동목사, 한국기독교윤리연구원(KICE) 사무국장으로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