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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과 문화

카이퍼 통신 9 : 영역 주권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가?
by 김은득2021-03-21

저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가정, 경제, 학문, 예술 등의 영역이 하나님이 창조 때 부여하신 영역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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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 영역을 중심으로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이전 카이퍼 통신 8호에서 저는 하나님께서 삶의 모든 영역에 절대 주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인간 삶의 각 영역들, 즉 정치, 경제, 학문, 예술 등은 하나님께서 영역 그 자체에 부여하신 일종의 파생된 주권을 가진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런 각 영역의 주권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각각의 영역들에 부여하신 것이기에 그 영역 자체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규정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 영역은 정의와 공공선을 실현하려는 원리, 학문 영역은 진리를 추구하려는 원리, 예술 영역은 아름다움에 기여하려는 원리를 따라 운영됩니다. 이렇게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히 따를 때 비로소 신자들은 각 영역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입니다.


신자나 불신자 모두 각각의 삶의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영역 주권을 기독교인에게만 부여하신 것으로 오해하는 분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하실 수 있습니다. 삶의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따를 때, 굳이 신자일 필요가 있겠는가? 신자든 불신자든 누구든지 각 영역의 원리와 운영방식을 충실하게 따라서 그 영역에서 주권을 행사한다면, 그 영역은 점차적으로 세속화되지 않겠는가? 모든 삶의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을 드러내라고 주장해 놓고서는, 영역 주권 원리는 정반대의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영역 주권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판이 주로 교회의 외부에서 일어난 것이라면, 영역 주권에 대한 위의 질문들은 주로 신자들에게서 생겨납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들에 대한 기독교 공동체의 대답이 무엇보다 시급합니다.


아니나 다를까 영역 주권은 각 영역의 세속화, 특히 학문의 세속화를 부추길 수 있다는 염려와 걱정들이 현실화 되었습니다. 바로 제가 1880년 네덜란드 자유대학교 설립 기념으로 영역 주권을 연설한 날에 벌어졌던 에피소드입니다. 먼저 설립식에서 자유대학교의 관계자가 들고 서 있던 홀(scepter) 위에 새겨진 미네르바(Minerva)의 동상이 뜨거운 감자가 되었습니다. 특히 1834년 국가 권력에 종속된 화란개혁교회(NHK)와 분리되었던 성도들(the Seceder)의 비난이 상당했습니다. 로마 신화에서 지혜의 여신으로 여겨지는 미네르바 (그리스 신화에선 아테네)를 기독교 대학의 홀로 사용한 것이 '이교도적(heathen)'이라는 비판이었습니다. 이에 대해 저는 그런 비판은 '광신적 성상파괴주의(iconoclastic fanatisicm)'에 불과하며, 17세기 개혁파 정통신학자인 “푸치우스(Voetius)의 작품에도 배움의 상징으로서 미네르바를 다룬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하나의 에피소드는 자유대학교 설립식 이후에 벌어진 공식 만찬에서 연회 참석자에게 포도주가 제공되었다는 것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가 상당했던 것입니다: “개혁주의자는 와인에 물 타는 그런 류가 아니야!” 즉, 술을 마심으로 기독교 진리를 훼손한다는 비판이었습니다. 와인에 물 탄다는 그런 비판에 대해 저는 동일하게 물 탄 우유의 비유로 반박했습니다: “아무 쓸데없는 초콜릿 주전자나 물 탄 우유로는 결코 담대한 칼빈주의자들을 길러낼 수가 없습니다.”


한국 교회 성도 여러분, 정말 삶의 각 영역의 주권을 영역 자체에 부여하면, 그 영역들은 세속화될까요? 여러분이 세속화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어떤 의미로 사용하십니까? 세속화라는 단어는 본래 교회나 성직자가 소유하고 관장하던 것을 평신도나 교회 이외의 기관에게 그 소유권 혹은 감독권을 양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만, 중세 교회는 교회뿐만 아니라, 우리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정치, 학문, 예술 등을 그 날개 아래 두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혁명 이후, 정교 분리의 원칙은 근대화된 국가라면 반드시 따라야 할 헌법적 명제가 되었습니다.


1848년 네덜란드 역시 국가의 주권이 더 이상 왕이 아닌 의회에 있음을 헌법을 통해 명시할 때, 정교 분리의 원칙 역시 공표되고 실행되었습니다. 기독교 대학이었던 유럽의 수많은 대학들이 국립 혹은 공립대학으로 변화되는 등 학문 영역 역시 세속화가 진행되었습니다. 기독교 수도원을 주축으로 발달한 모든 기독교 대학들이 더 이상 기독교 세계관 혹은 초월적 세계관을 통해 운영되지 않게 된 것입니다. 자연과학의 상업적 성공은 유럽의 대학들을 지식 혹은 진리를 전달하는 강의 중심에서 새로운 지식 혹은 진리를 발견하는 연구 중심으로 이끌었습니다. 모든 학문은 자연과학의 방법론을 따라 산업화된 세계에 경제적 기여를 할 수 있는 양적 연구로 진행하는 것이 유행이 되었습니다.


이런 분위기를 가장 잘 대표하고, 이런 방향으로 전환하여 가장 성공한 대학교가 독일 베를린의 자유대학교입니다. 물론 자유대학교의 슐라이어마허가 신학의 대상을 하나님에서 인간의 종교적 경험으로 제한하면서, 신학을 종교학의 일부로 격하시켰다고 부정적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연과학 방법론을 강조하는 근대화된 대학교에서 점점 학문으로서의 입지가 좁아지는 신학을 위한 일종의 제스처였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술 영역, 특히 그림의 대상이 교회와 연관된 성스러운 것들에서 평범한 인간의 일상이나 정물화로 확대되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인간 중심의 원근법이 처음으로 적용되기 시작합니다. 이런 식으로 삶의 다양한 공적 영역들이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그 자체의 독립된 영역으로 분화되는 것을 가리켜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라고 일컫습니다.


저 카이퍼는 이런 의미의 세속화 과정을 매우 찬성 했는데, 왜냐하면 칼빈주의 자체가 이런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 세속화에 엄청난 기여를 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삶의 다양한 영역들 즉 가정, 경제, 학문, 예술 등의 영역이 하나님이 창조 때 부여하신 영역 원리에 따라 운영된다고 봅니다. 삶의 각 영역은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인간에게 주어진 본성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그리고 유기적으로 각 영역으로 발달되게끔 하신 것입니다. 가정 영역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시고, 남녀 간 연합을 통해 자녀들을 출산하게 하심으로 생겨납니다. 가정은 이런 영역 원리를 통해 세상을 충만하게 합니다. 인간의 지적 본성이 학문 영역으로, 인간의 미적 감각이 예술 영역으로 발달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정교분리의 영향 아래, 삶의 영역이 이렇게 각각 세속화되는 과정을 거칠 때, 저와 동시대의 경건주의 신자들의 반응은 그런 삶의 영역들을 포기한 채 교회 생활에만 충실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가톨릭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따라 세상을 부정적으로만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런 성속을 분리하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장 능동적으로 극복한 것이 칼빈주의 세계관입니다. 무엇보다 세상 자체는 하나님이 창조하셨기에 선합니다. 아무리 죄로 얼룩진 세상이라 할지라도, 바로 그 세상을 하나님이 사랑하십니다. 이렇게 창조에 기반한 영역 주권 원리는 사회적 분화과정으로 인해 이미 교회의 영향을 벗어나 각각의 독립된 원리에 따라 운영되는 각 영역에 신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를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사회적 분화과정으로서의 세속화'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초월적 세계관을 거부하거나 아예 적대시하는 '세속주의로서의 세속화'의 양상을 띠게 됩니다. 우리가 한국 교회가 세속화되었다고 말할 때, 세속주의의 다양한 형태가 한국 교회에 만연하고 있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세속주의의 양상이 가장 두드러진 곳은 지식을 창출하는 학문의 세계입니다. 기독교적 관점을 가지고 학문에 임하는 경우,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이라는 즉각적인 평가를 받습니다. 그러나 엄밀한 순수과학이나 수학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학문에 참여하는 학자 역시 각자의 세계관이나 주관적 확신과 동떨어져 학문에 임할 수 없습니다. 특히 사회과학이나 인문학의 경우, 학자의 인격적인 요소가 학문 자체에 엄청난 영향을 끼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은 학문을 할 때 페미니스트 관점, 인종적 관점, 가난한 자를 위한 관점, 동성애자들을 위한 관점 등 다양한 관점들을 허용하지만, 기독교적 관점만 유독 반지성적 혹은 비과학적으로 치부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수많은 기독교 대학들(하버드, 예일, 프린스턴 등)이 세속화 (혹은 세속주의화)되었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이런 세속주의화 경향성은 학문의 영역을 너머 모든 삶의 영역으로 확대되어갑니다. 특히 이런 경향이 점점 심각해지면서 아예 기독교적 혹은 초월적 관점을 적대시합니다. 개인의 기독교적 신앙은 사적인 것으로만 치부되며, 결코 다양한 공적 영역들과 공론장에서 표출되어서는 안됩니다.


저는 이런 세속주의화 과정에 철저히 반대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삶의 모든 영역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는 칼빈주의적 확신 아래 살았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는 개인의 구원 영역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적용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역들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결단코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아래 회복될 수 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에 세상을 멸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세상을 구원하고 회복하기 위해 오셨습니다. 저는 이런 성경적 근거 뿐만 아니라, 근대 국가가 약속한 자유와 평등의 관점에서도 세속주의에 대해 반대했습니다. 불신앙을 토대로 생겨난 프랑스혁명은 정교가 일치된 사회로부터 정교가 분리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자유와 평등, 그리고 박애를 약속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반기독교적 가치를 띄면서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기독교적 가치를 가지고 정치 영역에 참여하면 신정주의적이라는 비난을 받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양심은 불편하며, 그들의 자유는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억압됩니다. 현대의 연구 중심 대학에서 보여지듯이 기독교적 관점과 가치는 다른 관점과 가치와는 다른 불평등한 대우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에게 공적 영역에 참여할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공적 영역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로 여겼습니다.


기독교인은 그 기독교적 신앙에 따라 사적 영역에 갇혀 있으면 안됩니다. 그 신앙을 따라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그 영역을 세속적 가치가 주도하도록 내버려 두어서는 안됩니다. 후배 신학자 바빙크가 말했듯이, “죄악이 가득한 세상을 떠나 경건한 신앙을 지켜내는 것도 소중하지만, 더욱더 값진 신앙은 이런 세상을 믿음으로 이겨내는” 신앙입니다. 우리 기독교인들은 세상에 거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거하는 이상, 하나님이 지으신 이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세속적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아갑니다. 이런 의미에서 영역 주권 원리는 기독교인들이 분화적 사회 구조 속에서 각각의 독립된 영역에 참여할 때, 그 영역의 운영 원리와 방식에 맞게끔 살아가게 만듭니다. 그러나 세속적 가치에 휘둘리는 것이 아니라, 참여한 그 삶의 영역들을 기꺼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는 삶의 모든 영역에 스며들며, 궁극적으로 그 모든 영역들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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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은득

김은득 목사(PhD., Calvin Theological Seminary)는 신칼빈주의, 특히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공공신학을 한국적 문맥에 맞게 상황화하길 원하는 신학자로서 현재 미국 애리조나 투산에서 드림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