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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주님, 맞습니다. 그러나 …
by 최원준2021-11-23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이방 여인을 ‘개’라고 하신다. 참으로 불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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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계시고자 했지만 숨길 수 없었다. 이미 명성이 두로와 시돈까지 널리 퍼졌다. 예수에 대한 소문이 한 여인에게도 미쳤다. 여인은 소문을 듣자마자 예수님을 찾는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은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출신”이다. 여인은 시리아 지역에 속해 있는 페니키아 이방인이었다(마태복음은 ‘가나안 여인’으로도 표현한다). 여인은 예수님께 자기 딸에게서 귀신을 내쫓아 달라고 애원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먼저 자녀들을 배불리 먹여야 한다. 자녀들의 빵을 취해서 개들에게 주는 것은 옳지 않다”(7:27).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온 이방 여인을 “개”라고 하신다. 인종차별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옆에서 듣고 있던 사람들은 아마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아, 예수님도 사람을 차별하시는구나. 예수님도 유대인이시니, 사랑을 베푸는 대상은 불쌍한 이스라엘 사람들이지 이방인이 아니구나.’

 

오늘 우리에게는 참으로 불편한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을까?

 

이 불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신학자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어떤 학자는 이해하기 어려운 예수님의 이 언행은 인종차별적이고 남성우월적인 예수님 당신의 것이 아니라 그 시대의 억압적 체제를 짐짓 빗대신 것, 흉내 내기(simulation) 하신 것이라고 해석한다. 예수님의 이 발언은 인간을 비극과 죽음으로 몰아가는 이 세상의 의식과 이데올로기를 자신의 몸으로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은 여인의 믿음을 시험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 당시 유대인의 식탁 문화를 배경으로 이해할 필요도 있다. 예수님과 여인의 대화에 등장하는 개는 썩은 고기를 찾아다니는 사나운 들개가 아니라 집에서 기르는 애완견이다. (여기서 사용된 헬라어 퀴나리온은 작은 개를 의미한다.) 당시에 애완견은 식탁 밑에서 주인이 주는 음식을 먹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 비유’의 한 장면을 떠올릴 수 있다. 나사로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허기를 면하려고 했을 때,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았다. 이 개들 역시 집에서 기르는 개다. 당시 유대인들은 수염을 길게 길렀는데, 식사할 때 음식이 수염에 묻으면 식후에 빵으로 털어 냈다. 그리고 그 빵을 개에게 주었다. 그러나 어떤 주인도 ‘먼저’ 자녀에게 빵을 주지 개에게 주지는 않는다. 먹고 남은 것을 줄 뿐이다.

 

예수님이 여인에게 하신 말씀은 먼저 이스라엘에게 구원이 제시되고 그 후에 이방인에게 차례가 돌아간다는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오병이어 이적 이후에 칠병이어 이적이 나오는 것도 그렇다. 오병이어 이적에서 남은 빵을 담은 바구니가 열둘이라는 사실은 이 이적이 이스라엘을 위한 것임을 암시한다. 반면에 칠병이어 이적은 이방인 지역에서 있었고, 또 일곱 광주리가 이방 세계를 상징한다는 점에서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여인은 대답한다.


“주여, 맞습니다. 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리는 부스러기를 먹습니다”(막 7:28) 


여인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이라고 부른다. 인격모독적인 발언을 듣고서도 침착함을 잃지 않고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을 인정한다. 사람은 모욕을 당하게 되면 수치심을 느끼기 마련이다. 그때 나타내는 반응은 크게 세 가지로 대별된다. 첫 번째 ‘그래, 내가 그렇지. 내 주제에. 이전보다 더 자기를 비난하고 숨어 버린다. 두 번째, 자신을 모욕한 사람에게 분노하고 그를 비난한다. 이 두 반응은 자신을 모욕하는 현실을 극복하기 어렵다. 그런데 여인은 다른 반응을 보인다. , 현실을 직면한다. 이 가나안 여인은 자신을 개 취급하는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현실에 대한 체념이나 막연한 분노가 아니라, 현실을 마주하고 인정한다. 문제 해결은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여인은 현실 직시 및 인정에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간다. 이제 여인은 불의한 현실 속에서 자신에게도 권리가 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상 아래 있는 개들도 자녀들이 먹다 떨어뜨린 부스러기들을 먹습니다. 여인은 개의 권리를 주장한다. 자녀가 우선되어야 하는 현실, 인정합니다. 그러나 개처럼 취급받는 사람들에게도 권리가 있습니다. 그것이 부스러기라도! 여인은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고,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이 수로보니게 여인은 급식 이적의 의미를 깨닫지 못하는 제자들(6:52; 8:14-21), 또 정결에 관한 예수님의 비유를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우둔함과 대조된다. 또한 여인은 자기의 요청을 사실상 거부한 예수님의 대답에 좌절하지 않고 겸손히 자비를 구하는 믿음을 가진 자라는 점에서 믿음이 없다고 책망을 받은 제자들(4:40)과 대조된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 돌아가 보아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다.”


예수님은 수로보니게 여인의 지혜와 믿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셨다(막 7:29). 같은 내용을 좀 더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마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은 여인의 지혜와 믿음에 놀라기까지 하신다. “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15:28, 개정개역 성경에는 생략되어 있지만, 헬라어 원문에는 감탄사 ‘오’가 있다).

 

예수님은 여인의 딸에게서 귀신이 “나갔다”고 말씀하신다. 여기서 쓰인 ‘나갔다’의 헬라어(엑세레뤼쎈)는 현재완료시제다. 예수님은 귀신 축출을 위한 그 어떤 말씀이나 행동도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과 여인 사이에 대화가 진행되고 있을 때, 이미 귀신은 떠나갔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을 내다보신 것이 아닐까? 이미 요청은 이뤄졌다. 그러나 여인은 모른다. 여인에게는 거쳐야 할 테스트가 있었다. 그리고 여인은 그것을 잘 통과했다.

   


이 글은 최원준 목사의 ‘마가복음(홍성사, 2021)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갈무리하여 다시 엮은 것입니다.

 


여인은 우리가 ‘부스러기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은혜를 자신에게 베풀어 달라고, 딸을 고쳐 달라고 애원한다. 놀라운 지혜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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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원준

최원준 목사는 안양제일교회 담임목사로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와 장로회신학대학원에서 공부했다(교역학석사신학석사신학박사). 정릉교회주님의교회 교육전도사, 주안장로교회 교육목사, 온누리교회 부목사, 강동온누리교회 캠퍼스담당목사로 사역했으며, 장신대서울여대횃불트리니티에서 가르쳤다. 또한 한국성서학연구소 전임연구원과 두란노 목회와신학편집장을 역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