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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힙합 가수 샤이 린의 ‘인종화합’ 명언 20선
by Matt Smethurst • Shai Linne2021-12-09

인종 다양성은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은 아니다. 다양성 면에서야 지옥도 뒤지지 않는다.…일치도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이 아니다. 지옥도 못지않게 일치를 이룬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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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에 인용한 샤이 린(Shai Linne)의 글들은 그의 책 <새로운 개혁: 인종화합을 위한 싸움 속에서 희망 찾기>(The New Reformation: Find Hope in the Fight for Ethnic Unity(Moody, 2021)를 읽는 중에 내 눈을 사로잡은 것들이다.  


교회 안에서 인종화합(ethnic unity)을 성공적으로 추구하는 데 필요한 모든 도구를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15-16). 


마르틴 루터가 이와 같은[반유대인 증오 발언] 죄를 범했을 때, 그는 자신이 신봉하는 교리를 고수하면서 그랬던 것이 아니다. 그는 그 교리를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그리했다. 우리 모두가 저마다 죄를 지을 때도 이와 다르지 않다. 마르틴 루터나 조나단 에드워즈가 죄를 지었다고 해서 나는 종교개혁의 가르침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거역하면서 신약성경의 가르침에 문제가 있다고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96). 


“인종”(race)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르게 방향을 잡으려면, 우리는 문화가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이러한 논의에서 진전을 이루려면, 오직 성경만이 이 주제에 답할 수 있는 처음이요 끝이 되어야 한다(104-105). 


어떤 문제가 가하는 영향을 가장 크게 받는 사람들에게서 의도적으로 멀어져 있으면, 그 문제의 긴급성은 고사하고 그것이 중요한 문제라고 느끼지도 못하게 된다(106).


[증오, 우월감, 편애/편파, 억압, 그리고 맹목적 신념]은 인종 문제가 있는 곳에서 유독 그 본색을 드러내는 유별난 죄들이다(113).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일치(unity)는 어떤 것이든 결국 하나님께서 좌절시키실 것이다. 하나님께 속한 일치에는 하나님의 복이 임할 것이다.…사탄의 속임수 중 하나는 인간 본성에 기인한 일치를 기독교라는 가면으로 위장하는 것이다(120). 


바벨탑 이야기 바로 직후에 바로 그 다음 장에서 아브라함이 나오는 건 우연이 아니다. 바벨탑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사람들을 여러 민족으로 온 땅에 흩으셨다. 그러나 이것은 희망도, 하나님도 없는 세상에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후손을 통해 그 흩으신 사람들을 다시 불러 모아 모든 민족을 하나 되게 하시는 계획을 세우셨으며, 이로써 바벨이 품은 악과 하나님이 계획하신 선이 밝히 드러나게 하신다.…하나님의 목적은 바벨탑의 불순종으로 말미암아 형성된 민족들이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하나가 되는 것이다(121, 125). 


바울의 생각에 [베드로가 이방인과 함께 먹기를 거절한 것(갈 2:11-14)]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복음의 문제였다. 과거의 민족적 또는 문화적 분열로 회귀한 것은 곧 복음의 진리를 범한  것이다. 복음은 어떻게 말하는가? 복음은 예수님이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모든 인종 집단을 위해 죽으셨다고 선포한다. 예수님은 그 어떤 인종 구분도 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런데 왜 예수님의 사람이라고 하는 우리는 인종을 구별하여 친교를 나눌 사람을 고르는가?(130). 


민족정체성(ethnicity)에 대해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합당한 반응은 이것을 무시하지 않는 것이다. 또 은근히 뻐기지 않는 것이다. 또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또 죄책감을 갖지 않는 것이다. 합당한 반응은 나에게 민족정체성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것을 지렛대 삼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백인 형제자매들에게 말씀 드린다. ‘피부색을 봐서는 안 됩니다.’ 나에게 이렇게 말하지 않길 바란다. 무슨 뜻인지는 나도 안다. 여러분은 모든 사람을 동등하게 대하고 있다는 것을, 또 피부색이 아니라 내면으로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을 알리려고 노력하고 있다. 멋진 일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나에게 갈색 피부를 주신 데는 분명한 뜻이 있다. 하나님은 무시당할 수도 있는 이 피부색을 굳이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이 피부색에 내가 감사하길 바라셨다. 다양한 피부색을 만드신 지극히 비범하신 당신이 찬양받으시길 바라셨다. 그러니 피부색을 무시하여 하나님께 마땅히 받으셔야 할 찬양을 가로채서는 안 된다!(133).


전적 타락 교리를 받아들이는 우리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이 영역[인종문제]에서 우리가 죄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데 힘들어 한다. 이 사실이 나를 매우 당황스럽게 만든다. 죄의 교리를 바르게 이해하면서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인종과 관련한 죄를 이겨 내려는 최소한의 투쟁조차도 하지 않는다면, 이것이야말로 정말 놀랄 일이다(147).


논쟁의 “반대편”에 예수님과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있을 때, 올바르게 예수님을 따르는 쪽은 우리라고 단정해서는 안 된다. 사실, 우리 둘 다 틀릴 수도 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사역 중에 모든 사람을 다 꾸짖고 기분 상하게 하시기도 했다. 과연 우리는 예수님이 모든 점에서 다 공감해 주신 그런 특별한 사람들일까?(155).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의 일치는 결코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주신 가르침은 분명하다. 십자가의 대속으로 얻으신 교회가 하나 되어 걸어갈 때, 비로소 교회는 교회를 바라보는 세상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는 증인이 된다.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경의 하나님이 실재하신다는 것을 확신시키기 위해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수단 중 하나가 바로 교회의 일치이다(162). 


오늘 교회에서 인종 문제를 두고 많은 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는 그 가운데서 적지 않은 분노를 목격한다. 적지 않은 냉소도 보인다. 용서하지 못하고 서로 조롱하는 모습도 많다. 그런데 내가 보지 못하는 모습이 있다. 겸손과 온유, 오래 참음, 사랑 안에서 서로 용납하는 모습이다(164). 


집단 신음(Collective Groan)이라고밖에 부를 수 없는 현상이 있다. 일부 독자는 이 말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는데, 특히 개인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데 익숙하다면 더욱 그럴 것이다. 다른 많은 미국 흑인들과 더불어 나는 지금까지 미국에서 일어난 여러 살인사건들이 진공 상태에서 발생한 별개의 사건들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 흑인들은 이 사건들을 한 민족으로서 우리의 역사적 서사의 맥락에서 발생한 비극으로 바라본다. 노예제의 참상; 짐 크로우(Jim Crow) 시대의 린치(lynchings, 법을 벗어나 흑인들에게 자행된 백인들의 사사로운 처벌 행위); 소방호스와 개를 무기 삼았던 민권운동 시대; 흑인에 대하 부당한 주택 대출 제한; 에밋 틸(Emmitt Till)·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마틴 루터 킹 살해; 흑인 여자아이 넷이 희생된 버밍엄에서 일어난 교회 폭탄 테러;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한 흑인 교인들이 희생된 찰스턴 학살; 전국의 헤드라인 뉴스들을 장식한, 뜨거운 다리미가 노예의 살을 지지는 것처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정신을 그을린 각종 사건들과 그럼에도 뉴스에 나오지 않는 일상의 모든 굴욕과 모욕, 잔인함과 결합된 조부모 시대의 노골적인 차별로부터 아버지와 삼촌을 절망에 빠트린 유리천장; 경찰과 마주쳤을 때는 이렇게 “대화”해야 한다고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많은 흑인 가정에게 뿌리 내린 일종의 통과의례; 그리고 미국에서 흑인으로 존재하는 것 자체가 완전한 인간으로 대우받기 위해 평생 매일같이 치러야 하는 온갖 투쟁이 된 이 현실, 이 모든 것이 백인 경찰이 비무장 흑인을 죽이는 것을 본 많은 흑인들로 하여금 “또 시작이다” 토로하며 집단 신음하게 하고 있다(173-174).


누군가를 “인종차별주의자”라고 무시하는 것이, 그들이 가진 진정한 관심사가 무엇인지 관심을 가져 주는 것보다 훨씬 쉽다. 누군가를 마르크스주의자로 치부하는 글을 써 재끼는 것이,  비록 그들을 이해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도탄에 빠진 그들을 위로해 달라고 마음을 다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보다 훨씬 힘이 덜 드는 일이다(180-181).


유오디아와 순두게(빌 4:2-3)는 무슨 문제로 의견 차이를 빚었으면서도, 영원을 함께 보낼 사이였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갈등의 한가운데서 우리가 마주하게 되는 유혹이 있다. 서로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그 차이점을 벽돌과 모르타르 삼아 분리의 장벽을 세우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지 않았다.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하늘 아버지, 동일한 구주, 동일한 성령, 동일한 믿음, 동일한 소망, 동일한 보편 교회, 동일한 언약, 동일한 약속, 그리고 동일한 영원을 공유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의 민족적 정체성, 우리의 문화적 배경, 그리고 우리가 속한 정당보다 훨씬 더 우리의 존재에 본질적으로 중요하다. 나와 생각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타자”로 만들고 싶은 유혹을 받을 때, 꼭 이것을 기억하자(182-183).


회심한 후에 “우리”라고 말하는 그리스도인은 주님께 나아오기 전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실로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이 단어를 내뱉는 것이다. 옛 “우리”는 기껏해야 우리 가족, 우리 국적, 우리 민족, 우리 하위문화 그룹, 우리 정당, 우리 성별, 우리 출신 학교, 우리 동료, 우리 스포츠 팬 따위에 제한된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는 새로운 “우리”가 있다. 이 “우리”는 우리가 한때 동일시했던 이전의 모든 그룹을 대체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우리”는 매우 다양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다양하다. 이 새로운 “우리”는 흑인과 백인, 남성과 여성, 청년과 노인, 공화당과 민주당, 대도시와 농촌이다. 교육 많은 받은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이다.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이다. 상류층과 하류층이다. 이 새로운 “우리”는 국제적이다. 여러 언어를 사용하는 우리다. 여러 피부색이 함께하는 우리다. 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하나 된 우리다. 그리고 영광된 우리다. 새로운 “우리”는 이렇다(189).


나는 내가 흑인이라는 사실을 좋아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나를 이렇게 만드신 것에 정말 감사한다. 또한 나는 내가 태어난 때와 태어난 곳에도 감사한다. 힙합 문화의 발상지인 뉴욕에, 그리고 힙합이라는 문화가 다섯 자치구를 넘어 발전하고 확장하기 시작한 바로 그 때, 하나님은 나를 세상에 보내셨다. 나는 흑인 문화, 흑인 여성, 흑인 설교, 흑인 음악, 흑인 유머, 그리고 흑인 음식과 그 양념을 좋아한다. 내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경험 중 하나는 처음으로 아내와 함께 워싱턴 D.C.에 있는 ‘국립 아프리카계 미국인 역사 문화 박물관’에 갔을 때이다. 내 조상들의 끈기, 결단력, 창의성, 그리고 저 노예선의 어두운 선창에서 시작하여 미국 대통령에 선출되기까지, 비상하는 흑인의 역사 앞에서 나는 겸손과 영감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첫째 되는 “우리”는 흑인이 아니다. 나의 첫 째 되는 “우리”는 교회다. 하나님의 백성이다. “존귀한 이들…그 안에 나의 모든 즐거움이 있는, 땅에 있는 성도들”이다(시 16:3). 과격한 생각이기는 하지만, 웨스트 필라델피아 출신의 겁이 많은 흑인 힙합 가수인 나는 웨스트버지니아 산맥의 백인 광부, 사우스다코타 출신 주부, 그리고 베이 지역 의 중국계 미국인 의사와 근본적으로 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남부 필라델피아 출신의 흑인 힙합 가수 사촌보다 더 그렇다는 말이다! 이것이 바로 새로운 인류의 영광이요 아름다움이다(190, 191).


진리 편에 선다는 미명하에 성령의 열매를 버릴 권리는 우리에게 없다(193-194).


인종 다양성은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은 아니다. 다양성 면에서야 지옥도 뒤지지 않는다.…일치도 그 자체로 고결한 것이 아니다. 지옥도 못지않게 일치를 이룬 곳이다(210, 211).


원제: 20 Quotes from Shai Linne on Ethnic Unity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인종’ 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생각이 바르게 방향을 잡으려면, 우리는 문화가 아니라 성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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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Matt Smethurst • Shai Linne

맷 스맷서스트는 미국 TGC의 총괄 에디터이며  <Before You Open Your Bible>의 저자이다. 켄터키주 루이스빌에 위치한 Third Avenue Baptist Church에서 장로로 섬기고 있다.  


샤이 린은 그리스도인 힙합 아티스트이다. 최근 새 앨범 <Jesus Kids>를 내놓았다. 워싱턴 D.C.에 위치한 Capitol Hill Baptist Church에서 목회 인턴을 마치고, 고향인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Risen Christ Fellowship을 개척했다.

Matt Smethurst • Shai Linne 작가 최근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