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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구조적 죄’도 있다
by Trevin Wax2022-02-10

죄를 지나치게 개인화하면 사회에 스며드는 죄의 침투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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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몇 년 동안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제도적” 또는 “구조적” 죄의 존재를 두고 열띤 토론과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특별히 노예제를 예로 들어 설명되곤 하는데, 과연 죄를 사회 구조에 ‘떠넘기는 것’은 합당할까? 아니면, 죄는 순전히 개인의 영역일까? 


제도적 죄가 존재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제도적 불의의 예로 과거 노예제와 인종차별을 들며 자신들의 입장을 옹호한다. 그러나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 시절은 이미 지나갔고 지금은 사회의 법이 바뀌었으므로 “제도적 인종차별”을 거론하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반기를 든다. 인종편견과 싸우기 위해서는 개인의 마음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이는 제도적 불의에 대해 말하는 것은 자유주의 신학이나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따르는 것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들은 “사회 정의”라는 말만 들어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개인의 불순종은 삭제된 채 죄를 재정의하게 될 위험이 있다며 주의를 준다. 제도가 개인을 압도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냐 하면, “억압받는” 사람들(소수)은 그들이 받은 억압 때문에 당연히 의인이 되고, “억압하는” 사람들(다수)은 그들의 특권 때문에 당연히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신학이 속한 환원주의 이론에 반대하는 입장(정당한 반대)에 선 오늘날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개인의 죄와 회개 이외의 개념에 대해서까지 논쟁을 펼치고 있다.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국가적인 죄, 제도적인 죄, 집단적인 회개 같은 것은 없다. 죄는 언제나 오로지 개인적인 것이다. 집단적인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문제를 생각할 때, 다른 사안을 검토함으로써 특정 원칙의 타당성을 시험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제도적 인종차별”에 대한 논의는 잠시 접어 두고, 다른 영역의 사례를 통해 구조적 죄의 적용이 가능한지 알아보도록 하자.


“제도적 불의” 논쟁: 사례 


죄가 조직의 구조와 문화, 일의 동기, 분위기에 어떻게 스며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 패트릭 래든 키프(Patrick Radden Keefe)의 ‘고통의 제국’(Empire of Pain)보다 더 잘 묘사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은 2차 세계대전 이래 미국이 치른 모든 전쟁으로 죽은 미국인보다 오피오이드(opioid, 아편(opium)에서 유래한 용어로, 마약성 진통제를 통틀어 일컫는 말-역주)로 죽어간 미국인이 어떻게 그리고 왜 더 많을 수 있는지에 대해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다.


오피오이드 남용에 대한 책임 부과를 위해 어디에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고통의 제국’은 새클러 집안의 아서, 모티머, 레이몬드 형제가 어떻게 뉴욕 상위 사회의 계급에 진입하게 되었으며, 이후 미국의 주요 오피오이드 공급 업체인 퍼듀를 어떻게 소유하게 되었는지를 그려내고 있다.


새클러 집안은 수년에 걸쳐 자신들의 약물을 임상 테스트할 수 있는 특정 시스템을 구축했다. 먼저 그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는 의사와 병원으로부터 자신들에게 유리한 보고서를 확보하고, 에이전시에서는 광고 캠페인을 고안한다. 그리고 자신들의 의학 저널에 그 임상 기사와 광고를 개제하는 것이다. 자신들의 기사가 뉴스와 잡지에 실릴 수 있도록 이들은 관련 기관에 모든 섭외력을 동원하였다. 


의를 가장한 변명


오피오이드 옥시콘틴(OxiContin, 중등도 및 중증 통증의 조절에 사용되는 확장형 마약성 진통제-역주)이 세상에 들어올 때 그들이 명시한 동기는 연민과 자비였다. 그들은 암 환자의 고통뿐 아니라 모든 고통을 경감시키는 약을 제공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고 내세웠다. 키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업계에서는 퍼듀의 업적을 치켜세우며 사람들도 돕고 돈도 쓸어 모을 혁신적인 제품을 제공하였다는 인식이 있었다.” 


한 직원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옳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수많은 사람이 통증에 시달리고 있었고, 우리는 그 해결책을 가지고 있었으니까요.”


그럴듯한 말로 FDA의 승인을 받고서, 무료 샘플로 환자들이 옥시콘틴에 “길들게” 함으로써 새클러 일가는 그들의 약이 새로운 환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만들었다. 그들은 이렇게 시장을 장악했다.


추락


결과는 대재앙이었다. 키프는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이러한 현상이 시민들을 차례로 사로잡으면서, 일부 지역사회는 좀비 영화를 연상케 했다. 이전에 잘 적응하고 활동하던 성인들을 의존과 중독의 소용돌이로 몰아넣고 말았다.

옥시콘틴의 중독성이 명백해지자, 퍼듀의 임원진은 피해자들을 비난하기 시작했다. 오피오이드 중독자는 피해자이면서 범죄자라며, “의사들이 언론 보도로 인해 겁을 먹은 것인지, 협박을 받은 것인지 우리의 판매 실적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로 완벽하게 좋은 자신들의 제품을 그릇되게 사용한 이들이 회사에 오명을 안기고 있다고 했다.


몇 년 동안 새클러 집안은 그 약의 중독성을 부인했다. 그러나 결국 옥시콘틴의 위험성을 인정했고, 기다렸다는 듯이 “남용 억제”라는 새 버전으로 약을 출시해 특허를 독점했다. 그러고 나서 퍼듀 회사는 대담하게도 FDA에 원래 팔던 옥시콘틴의 복제약 승인을 거부해 줄 것을 요청했다. 새로운 버전의 약을 팔기 위해서 이전 버전의 약은 이제 “안전하지 않은 것”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공범


‘고통의 제국’은 읽기에 매우 곤혹스럽다. 정의감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 회사가 어떻게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 다니며 개인적인 인맥을 동원했는지, 또한 어떻게 자신들의 주요 제품에 대한 거짓된 토대 위에 조직의 문화를 세웠는지를 보면서 비통함과 분노를 동시에 느낄 것이다. 퍼듀 사는 회사와 가까운 의사들에게 영업 사원을 파견하여 불필요한 처방전을 남발하도록 요청하면서 약 공장과 같은 의사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오피오이드 사태의 탓을 어떤 한 개인에게 돌릴 수는 없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매출을 올릴 목적으로 고안된 몇몇 조직들에 만연해 있는 죄성과 이기심(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더욱 강화된다)이다. 처방전을 건네는 부패한 의사들, 황폐한 지역사회를 오피오이드의 홍수로 뒤덮은 영업 사원들과 실무진, 불어나는 법적 문제에 눈을 감아버린 정부 관료들. 회사 안팎의 사람들이 다 연루되었다. 당신은 어쩌면 이 모든 일을 기업의 최고위층에 속한 개인들의 어떤 음모나 결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제도의 구조(정부의 승인과 여러 조직 간의 관계 역학 포함)와 동기는 모두 불의에 기울어져 있었다.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과실이 있지만, 그 과실의 무게가 같지는 않다. 퍼듀 사의 서류작업을 하는 비서에게 새클러 가족 구성원 중 한 명과 같은 정도의 죄를 물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죄책을 면할 수는 없다.


죄의 침투성


‘고통의 제국’은 구조적 죄의 좋은 예를 보여준다. 이는 잘못된 동기, 좋지 못한 습관, 거짓된 신념에 굴복한 조직의 부패를 폭로하고 있기 때문이다. 퍼듀 사의 상황은 단순히 악한 개인들의 음모를 넘어, 어떻게 사업 자체나 시스템, 프로그램, 법, 선의를 가진 개인들도 그들의 의도 이상으로 악을 수행하는 데 휘말릴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죄는 만연해 있다. 우리 모두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불의에 연루되어 있다. 잘못된 점(크고 작게)이 정기적으로 발생하는 세계 경제에 참여하는 것 자체로도 말이다. 잠재적으로 얽혀있는 모든 악에서 벗어나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사도 바울이 어떤 경우에 죄를 단순히 개인의 영역으로만 보지 않고 세력으로 이야기하면서, ‘죄’를 죄인들이 하는 행위의 합보다 더 큰 것으로 표현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렇지 않다면, 국가적 위대함을 위시한 히틀러의 부패한 요구에 문명화된 독일 루터교인들이 먹잇감이 된 일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르완다의 그리스도인들이 서로에게 인종적인 폭력을 휘두른 충격적인 만행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죄를 지나치게 개인화하면 사회에 스며드는 죄의 침투성을 축소하는 결과를 낳는다. 자유주의 신학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구조적인 죄성에 대한 견해의 문제는 그들이 너무 멀리까지 간다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멀리 가지 않는 데에 있다. 구조적 죄의 현현은 죄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이다. 인간의 마음은 ‘억압자’ 편이든 ‘희생자’ 편이든 절대적으로 악하므로 이를 축소할 것이 아니라 늘 전경에 위치시켜야 한다.


우리는 의에 주리고 목이 마른 사람들이며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비록 우리의 시도가 늘 금방 사그라지고 우리가 시도하는 개혁조차도 죄의 영향을 받기 쉽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의 제도적 불의를 제거하는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마땅하다. 이것이 우리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만들어 훗날 개혁자들의 기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감사하게도 우리에게는 모든 죄를 덮고 정복하신 구주가 계신다.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속죄하기 위해 흘리신 예수님의 보혈을 믿는 믿음으로 우리는 의롭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죄의 세력을 무력화하시고, 의로 충만한 새 하늘과 새 땅을 허락하시겠다고 약속하신 주님을 증언하는 화해의 대사이다. 복음은 개인적인 죄와 제도적인 죄 모두의 해결책이다.



원제: What OxyContin Reveals About Structural Sin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염영란

사회의 제도적 불의를 제거하는 일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지 하는 것이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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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Trevin Wax

트레빈 왁스는 LifeWay Christian Resources의 신학과 커뮤니케이션학과의 부학장이며 Wheaton College의 외래 교수이고, The Gospel Project의 편집자이다. '디스 이즈 아워 타임', '일그러진 복음', '우리시대의 6가지 우상', 'Gospel Centered Teaching'을 다수의 책을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