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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신학

패커에게서 배우다: 시련이 주는 놀라운 축복

J. I. 패커를 기리며

by Jeremy Linneman2022-07-17

고난은 우리를 빚어내고, 연단하고, 준비시키고, 정화하며, 나아가 아름답게 한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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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 이넬 패커(James Innell Packer, 1926년 7월 22일 - 2020년 7월 17일)



나는 신학자 고 J. I. 패커가 쓴 이 글을 읽었던 순간을, 그때 내 상태가 어땠는지를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다. “어떤 형태의 복음 사역은 잔인하다. 그럴 의도야 없었겠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다.”


패커가 염두에 두었던 잔인한 사역이란 무엇일까? 그의 대답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당시 우울증으로 특히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고 또 만성 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었다. 너무나도 오래 지속된 시련과 낙담의 계절이었다. 나는 기도했다. 또 여러 상담자와 이야기도 나눴다. 그리도 또 기도했다. 그러나 그 어려운 시절은 정말 무자비했고, 내 영혼의 상태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한 친구가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권했다. 내가 이미 읽었던 책이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강조한 부분은 이 책 후반부에 나오는 “내적 시련”이었다. 나는 이 고전을 다시 펴서 해당 부분을 읽었다. 그리고 바로 그날 밤, 고통과 아픔에 대한 나의 모든 사고방식이 바뀌기 시작했다. (어떤 영적 수업은 아무리 머리로는 알아도 영적으로 준비가 되기 전까지는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다.) 


그 잔인한 가르침과 그 놀라운 해독제에 대한 패커의 성찰은 내가 고난의 시기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내적 시련


그렇다면 이 잔인한 복음 사역이란 무엇일까? 패커에 따르면, 교회 안에는 그리스도인이 되면 삶이 더 쉬워진다는 잔인한 가르침이 있다. 그러니까 신자가 되면 죄를 덜 짓게 되고, 진정한 자아와 가장 깊은 소명을 찾을 수 있게 되며,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까지 갖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 전반적인 고통이 덜해진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이런 비성경적인 가르침을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의 힘(Your Best Life Now)!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을 문제 없는 삶으로 묘사하는 편향된 인상은 조만간 우리를 쓰라린 환멸로 이끌 것이다.”


지난 십 년 반 동안 목회를 하며 지나온 나의 20-30대 영적 상태를 한마디로 표현하면 쓰라린 환멸이다.


영화 ‘파이트 클럽’(Fight Club)에서 타일러 더든(Tyler Durden)의 말처럼 우리는 평생 속아왔다. 나는 내 또래를 미국 중산층에서 자란 밀레니엄 Z세대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꾸준히 자존감을 높여주는 양식을 먹으며 자랐다. 우리는 게다가 꽤 괜찮은 시대를 살아왔다. 또한 어떤 꿈이든 이룰 수 있다는 말을 들으면서 자랐다. “너희가 세상을 바꿀 거야.” 그렇게 자란 우리는 성인이 되어 알게 되었다. 삶은 고단하고, 우리는 그리 특별하지도 않으며, 무엇보다 이 세상은 잔인한 곳이라는 것을. 


디트리히 본회퍼는 이것을 “헛꿈 꾸기”(wish-dream)이라고 불렀다. 그는 성도의 공동생활을 독일어로 썼고, 더 나은 단어가 없어서 영어 번역가가 생각해 낸 문구가 바로 “헛꿈 꾸기”였다. 헛꿈 꾸기는 우리가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상적인 삶, 곧 행복과 의미와 만족이 있는 삶이다. 아픔과 좌절, 갈등과 고통이 없는 삶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이러한 헛꿈 꾸기를 다른 사람들에게서 찾으려고 한다. 다른 사람들이 왜 영적인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직접 고난에 직면하면 우리는 충격을 받는다. 다른 사람을 비난하거나,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또는 그게 그렇게까지 나쁜 건 아니라며 자기최면을 건다. 실패하기 마련인 헛꿈 꾸기는 자기연민의 온상이 된다. 이런 헛꿈 꾸기가 특히 위험한 이유는 우애와 교회 성장이라는 면에서 그 꿈이 실현되지 않을 때 느끼는 환멸이 기독교 공동체까지 무너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꾸는 헛꿈을 빠르게 산산조각 내어 우리가 현실에 바탕을 두고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한다. 하나님은 은혜로, 그의 순전한 은혜로 우리가 깨어진 세상 속에서도 예수님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하신다. 


참으로 성도들에게 예수님과 교회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라고 가르치는, 달리 말해 헛꿈을 꾸게 하는 것은 참으로 잔인한 사역이다.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바꾸시지만, 그건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었다고 해서) 우리의 상황을 훨씬 더 쉽게 만들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아내, 남편, 부모, 시댁, 자녀, 동료, 이웃에 대한 불만이 되풀이된다. 중생 체험과 더불어 영원히 추방된 것처럼 보였던 유혹과 나쁜 습관이 다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고맙게도 이런 고난에 직면한 우리를 말씀은 홀로 두지 않는다. 


헛꿈 꾸기를 십자가에 못 박기


십자가에 못 박는 것과 관련하여 구약의 전도서는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이 …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전 3:11).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선하고 완전한 삶이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실제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할 수 없다.


팀 켈러가 고통에 답하다에서 보여주듯이, 고난은 성경의 주요 주제이다. 창세기는 악과 죽음이 어떻게 세상에 들어왔는지를 설명하면서 시작한다. 출애굽기는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겪은 압제와 40년간 광야에서의 겪은 시련과 시험의 시간을 묘사한다. 시편은 삶의 모든 상황에 대한 기도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빈번한 기도는 궁핍 중에 찾는 도움과 고통 중에 갈구하는 위안이다. 시편이 보여주는 정직한 기도는 삶의 잔혹함과 고통의 부당함을 묘사한다. 구약의 세 책―욥기, 예레미야 애가, 전도서―은 고난을 주요 주제로 다룬다. 신약성경의 두 권―히브리서와 베드로전서―은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만난 그리스도인을 돕는 것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중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슬픔의 사람(Man of Sorrows)이라고 불린다[사 53:3]. 


고통은 성경의 중요한 주제이며, 성경은 고통과 고난에 대한 포괄적인 견해를 제공한다. 장례식에서 서로를 위로하는 데 쓸 수 있는 간단하고 진부한 몇 마디 수준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해피엔딩만을 주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전에 풀 해상도로 제공되는 22분짜리 TV 에피소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깨진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결코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맛볼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켈러는 다니엘 3장에 나오는 풀무불을 예로 활용하여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어떻게 고통을 사용하시는지 설명한다. 불은 위험하다. 불은 모든 것을 다 태워버린다. 건물과 숲을 잿더미로 만들고 순식간에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잘 통제하고 현명하게 사용하면 불이야말로 삶의 위대한 선물이 된다. 추운 겨울날 집을 따뜻하게 하고, 쇠붙이를 제련하고, 도자기를 굽기도 한다. 음식을 요리하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불이 없으면 바비큐도 없다. 제대로만 사용하면 불은 태워버리지 않는다. 불은 모양을 만들고, 정제하고, 준비하고, 정화하고, 나아가서 아름답게 한다. 한마디로, 불은 사물을 성숙시킨다. 


마찬가지로 고통은 절대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다. 죽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고통도 있다. 그러나 믿음으로 하나님과 함께 고통을 견딜 때, 고난은 우리를 빚고, 연단하고, 준비시키고, 정화하며, 나아가 아름답게 한다. 고통은 사람을 성숙시킨다. 


복음 안에서 고통은 악과 아픔을 바꾸어 놓는다. 곧 고통을 통해서 우리는 악과 아픔을 극복한다. 어두움에서 빛이 나오고, 죽음에서 새 생명이 태어난다. 


내 인생 이야기를 잠깐 하자면, 나는 세 형제 중 두 명을 잃었다. 동생의 죽음 이후 불면증과 우울증과 만성 통증이 생겼고, 수년간의 기도와 상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다양한 증상이 남아 있다. 하나님은 깊은 치유와 평화를 가져다주셨지만, 상처는 여전하다. 


다시 패커로 돌아가자. 이런 고난의 목적이 무엇일까? 왜 우리는 오랫동안 코로나로 고통받고 있는 걸까?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나의 상처,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은 헛된 꿈을 아버지 앞에 가져갈 수 있을까? 


고난의 목적


패커는 이렇게 표현한다: 좋은 아버지는 자녀가 자신의 길을 가도록 그냥 두지 않는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자비와 지혜로 자녀를 인도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세상의 고통 중 일부를 경험하도록 하시지만 그 모든 과정 내내 자녀와 함께하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부서진 세상에서 (하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 때문에 부서진 세상에서) 고통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의 성품을 키우고 신앙을 강화하시며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봉사하고 돕도록 우리를 준비시키신다. 하나님의 강함은 우리의 약함에서 드러난다. 패커는 이렇게 말한다. 


은혜 가운데 하나님은 (우리를 성숙시키는) 이 목적을 어떻게 이루시는가? 세상과 육신과 마귀의 습격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하심도 아니요, 힘들고 답답한 상황에서 우리를 보호하심도 아니요… 오히려 우리를 이 모든 것에 노출시켜 나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절실히 느끼도록 하신다. 그 결과 그분께 더 간절히 매달리도록 우리를 강력하게 이끄신다. 성경은 반복해서 강조한다. 하나님이 견고한 반석이시고 견고한 방패이시며 약한 사람들에게는 확실한 피난처이시며 도움이시다. 그렇기에 자신의 연약함을 더 알면 알수록 우리가 주님을 갈망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도록) 말이다. 


C. S. 루이스는 이런 유명한 말을 했다. “하나님은 쾌락을 통해 속삭이시고, 양심을 통해서는 들릴 정도로 말씀하시지만, 고통 중에서는 크게 소리치신다.”


이것이 바로 내 경험이었다. 매일 주님과 함께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을 빼고, 고통보다 나를 더 변화시킨 것은 없다. 동시에 고통만큼 나를 절망에 빠뜨리고 자신감을 뿌리 뽑은 것도 없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교훈을 주시려고 하나님은 나에게 고통을 강요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의 생명을 앗아가시는 걸까? 결코 아니다. 이 세상은 잔인하지만, 하나님은 선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고통과 아픔으로부터 우리를 면제시키지 않으시고, 이 부서진 세상에서 살도록 하셨다. 웃음과 평화 속에서 만난 하나님보다 눈물과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게 더 생생했다. 고난을 통해 인내와 연단을, 신뢰와 소망을 배운다. 이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이는 만날 수 없는 미덕이다.


부서진 영혼을 위한 복음


우리의 세상은 죄로 인해 망가졌고, 깨어짐은 우리의 관계와 일, 우리 몸의 기본 조건이다. 그의 백성을 향한 예수님의 구속은 이 부서진 세상에서 우리를 아예 탈출시키는 게 아니다. 그는 이 부서진 세상 속으로 들어와 가난과 고난 속에서 태어나셨고 십자가를 향해 걸어가셨기에 슬픔의 사람이라고 불린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회복은 이 우주의 왕이신 예수님의 잔인한 육체적 죽음과 영광스러운 육체적 부활에 달려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우리는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약속하지 않은 것은 고통과 괴로움이 없는 삶이다. 그럼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은 무엇인가?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 때에 보좌에 앉으신 분이 말씀하셨습니다. “보아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또 말씀하셨습니다. “기록하여라. 이 말은 신실하고 참되다.” 요한계시록 21:4-5.


보라, 우리는 고통과 아픔이 없는 영생을 위해 지음받았기에 우리 가슴에는 영원이 새겨져 있다. 그래서 이 잔인한 세상은 우리에게 너무 낯설다. 우리는 고통이 없는 세상을 위해 만들어졌기에 그 세상은 언젠가 우리의 것이 될 것이다.


예수님의 고난을 통해 우리가 겪는 상실, 슬픔, 배신, 버림받음, 육체적 고통, 심지어 죽음까지도 미리 다 겪으셨다. 따라서 예수님은 우리의 모든 사정을 속속들이 다 알고 계신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궁극적인 고통을 짊어지셨다고 말한다. 우리의 죄와 그에 따른 형벌인 죽음과 하나님과의 분리를 예수님이 대신 짊어지시고 겪은 것이다. 왜 그렇게 하셨을까? 우리가 그런 궁극적인 고통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우리는 수천 번의 내적 시련을 직면한다. 예수님이 재림하셔서 모든 것을 새롭게 할 때까지 우리는 이 답답하고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희망 없는 백성이 아니다. 우리의 부활하신 주님은 지금도 그의 임재를 우리가 느끼도록 하신다. 그리고 나중에 반드시 부활과 새 창조의 약속을 지키실 것이다. 우리가 겪는 시련은 계속되겠지만, 결코 우리의 끝은 시련이 아니다. 스코티 스미스(Scotty Smith)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죽음, 모든 악, 모든 눈물, 모든 고통에는 만료일이 있다.” 이 덧없는 고통은 헛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를 성숙시켜 그리스도를 닮게 한다. 이 모든 고통은 우리가 영원한 영광에 합당한 자가 되도록 우리를 준비시키는 재료이다. 




원제: J. I. Packer on the Surprise Blessing of Trial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웃음과 평화 속에서 만난 하나님보다 눈물과 고통 속에서 만난 하나님은 내게 더 생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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