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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

목사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만들 수 있다고?
by 김형익2022-07-10

제레미 토드가 목회자 초년생일 때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 ’는 조언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지금도 젊은 목회자들에게 그렇게 조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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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레미 토드의 글 두 개를 읽었다. “그렇다. 목회자도 교회 안에 친구가 있어야 한다”와 “목회자는 꼭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하는가? 정말로?”이다.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동의할 수 없는 부분도 많았다. 그리고 나도 이 주제에 대해서 쓸 생각이 있었기에 “마침 잘 됐군” 싶었다.


나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목회자가 기본적으로 공감하겠지만, “목회자는 친구가 필요하다.” 목회자의 자리는 외롭고 고립되기 쉬운 위험을 안고 있는 자리이다. 아무리 종의 리더십을 강조한다고 하더라도, 목회자는 지도자의 자리이고 그 직분은 맡겨진 양무리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끌어야 하는 지도자 직분임은 부인할 수 없다. 회사의 CEO이든, 목회자이든, 지도자의 고립은 자연스럽게 은밀한 범죄로 흘러가기 십상이다. 목회자들의 탈선과 범죄는 상당 부분 이 고립과 무관하지 않다. 고립은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셨던 인간의 본래 삶의 모습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인간을 공동체로 존재하도록 창조하셨지만, 죄가 하나님과의 단절뿐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단절과 소외와 고립을 초래했다. 커트 톰슨이 말하듯이, 이 고립의 끝은 지옥이다. 


이 점에서 목회자가 자신도 교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은 중요하다. 목회자 자신이 자신의 정체성 문제를 혼동할 때 스스로를 고립시키는 위험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라든지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유교적 전통 문화와 질서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않은 우리나라 목회자들의 경우에 이 현상은 더욱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목회자 자신이 스스로가 본래 양이었으며 언제나 양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중요하다. 자신의 영적, 정서적 건강을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창조하신 인간은 관계 속에서 건강과 샬롬을 유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명시적으로 언급하신 것이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잊지 말라(창 2:18).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을 교회라는 공동체로 부르셨고 거기서 당신의 구원과 구속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기를 기뻐하셨다(엡 1:23; 2:22). 친구가 없어도 되는 사람은 없다.


교회는 하나님의 가족이다(엡 2:19). 타락한 세상에서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경험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가족은 세상에서 가장 친밀한 공동체다. 일반적으로 가족은 누구보다도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다. 고독과 고립이 대세인 세상에서도 많은 사람은 가족이 있어서 안전함을 느낀다. 그렇다고 해서 가족 구성원들이 서로를 모든 점에서 알고 공유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가족 구성원이 혈연을 넘어 정신적이고 영적인 결속과 유대를 경험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상적이겠지만, 언제나 현실이 그런 것만은 아니다. 그리고 자녀들이 부모에게 자신들의 어려움을 가감 없이 그리고 안전하게 쏟아낼 수는 있지만, 부모가 자녀에게 그렇게 하기는 쉽지도 않고 안전하지도 않다. 부모가 가진 삶의 무게와 근심을 어떤 자녀들이 오롯이 감당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부부 사이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때로는 그조차 제한적이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가족은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물론 가족이라면 가족 구성원이 가지고 있는 연약함을 알고 이해한다. 자녀들이 성숙해지면서 때로는 부모의 연약함을 알고 보듬어 주는 자리에 이르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완전히 알고 서로의 짐을 동등하게 져줄 수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회라는 가족은 어떤가? 목회자를 포함하여 교인들은 가족 구성원인 서로를 친밀하게 알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 가족들은 서로를 돌본다. 목회자 역시 교인들의 돌봄을 받는 존재이다. 교회라는 가족은 목회자와 그 가정이 정상적으로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생계를 돌보고 책임진다. 이뿐 아니라 목회자는 교인들의 환대도 경험한다. 일반적으로 목회자는 자신이 교인들에게 베푸는 환대 이상으로 교인들의 환대를 경험한다.  


그리고 가족 구성원은 서로를 안다. 가족 구성원 중에 공인이 있을지라도, 가족들은 그를 공인으로만 알고 공인으로 대하지 않는다. 목회자는 집에서도 목회자는 아니다. 이것을 교회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목회자가 강단에서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로서만 교인들을 만나고 교인들과 관계 맺음을 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게 내 판단이다. 목회자는 한 사람의 경건한 어른으로서, 좋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교인들을 만날 수 있고 얼마든지 그런 관계 맺음 속으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또 가족으로 정말 중요한 것은 서로가 서로의 연약함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으로 가족 구성원의 일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세세히 알고 그가 느끼는 연약함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교인들은 목회자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깨어지기 쉬운 질그릇 같은 존재임을 알아야 한다. 그렇다고 목회자가 겪는 모든 어려움을 일일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목회자의 연약함을 아는 교인들은 목회자를 위해서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은 영적 가족으로서 교인들이 마땅히 감당해야 하는 그들 몫의 사랑이다. 


자, 그럼 목회자가 교회 안에 친구를 가져야 한다는 말인가, 가져서는 안 된다는 말인가? 나의 대답은 교회 안에서 목회자가 친구를 가질 수 있지만, 이 일은 매우 조심스럽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제레미 토드가 목회자 초년생일 때 “교인과는 친한 친구로 지내지 말라”는 조언을 들었다고 말했는데, 나는 지금도 젊은 목회자들에게 그렇게 조언하고 있다. 게다가 젊은 목회자의 아내들에게도 “교인들 중에서 친구를 맺으려고 하지 말라”고 말한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속 깊은 이야기를 소화하고 감당할 수 있는 교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에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마음을 열고 나눠주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들을 수 있겠지만, 계속 그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부모가 부모로서 가지는 무게와 근심을 자녀들과 다 나눌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사랑하는 자녀들이 감당할 수 있을 만큼 나눌 뿐이다. 그리고 이 나눔은 자녀들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일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시지 않았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눅 12:4; 요 15:14). 그러나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서로 동등하게 그리고 허물없이 편안하게 모든 속 이야기를 다 나눌 수 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또 하나,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가지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교인 중 어떤 사람들이 목회자의 ‘특별한’ 친구가 될 때, 목회자는 목회적 돌봄을 모두에게 공평하게 줄 수 있겠는가? 목회자가 교인들과 가지는 관계에서의 친소(親疏)의 요소는 전체 교인들에게는 여러 가지로 시험 거리가 되고 교회의 잠재적인 어려움의 요소가 될 것이다. 교인들 중에는 목회자와 친한 관계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고, 교인들 안에 목회자와의 관계에서 시샘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으며, 목회자는 특정한 친구들을 편애함으로써 목회자로서 자신의 직무를 놓칠 수도 있다. 교인들은 누가 목사의 친구인지 알 때, 그 사람과 편안하게 그리고 사심 없이 편안한 관계 맺음을 할 수 있을까? 목회자를 꼭 아버지에 비유할 수는 없겠지만, 아버지가 특정한 자녀와 친한 것이 그렇지 않은 다른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은 좋기만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목회자가 교회 안에서 친구를 가지는 것은 불가능한 일만은 아니다. 사도 요한은 교회 안에 아비와 청년과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요일 2:14). 아비에 해당하는 경건한 어른들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교회의 장로들일 수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목회자가 자신들의 마음을 소통할 수 있는 친구가 되어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장로 혹은 경건한 어른들은 목회자의 친구가 되어줌으로써 목회자가 자신의 육체적, 정서적, 영적 건강을 유지하면서 교회를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는 일은 장로 직분이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이다. 존 스토트는 자신이 사역을 마치기까지 크게 넘어짐 없이 목회와 저술과 강연의 그 많은 사역을 감당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섬겼던 교회의 장로들 덕분이었다고 말한 적이 있다. 올소울즈교회의 장로들은 평생 독신 목회자였던 존 스토트에게 건강한 책무(accountability)의 관계 속에서 좋은 친구의 역할을 감당해 준 것인데, 이것은 한국 교회의 당회 현실(?)에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교회 공동체에서는 누구든지 자신의 연약함을 노출할 수 있어야 한다. 래리 크랩이 말한 대로, 교회는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이다. 그러나 이 말은 목회자가 여느 교인들과 동일하게 교회 안에서 친구들을 가져야만 한다는 의미는 아닐 수 있다. 


목회자는 외로운 자리이고 그래서 위험하다. 그는 친구가 필요하다. 교회 안의 경건한 어른들은 그 역할을 능히 그리고 기꺼이 감당할 사명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런 환경이 언제나 주어지지는 않는 게 우리 현실 아닌가! 그래서 목회자 부부의(그가 독신이 아니라면) 건강한 관계는 너무나 중요하다. 목회자 부부야말로 서로에게 “베프”가 되어야 한다. 조금 더 나아가서, 목회자는 동료 목회자들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고 그런 친구를 만들어야만 한다. 교회 안에 있을 수도 있지만, 홀로 목회를 하는 작은 교회라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목회자와 목회자의 아내들이 좋은 친구들과 공동체를 경험할 때, 그들은 육체적으로, 정서적으로. 영적으로 더 건강하게 목회자에게 맡겨진 소명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우리 교회에 등록하는 사람들을 심방할 때 이런 말을 하곤 한다. 교회에서 당신이 평생 누릴 영혼의 친구를 만났으면 좋겠다고. 그러려면 작은 모임에 참여해야 하고 본인이 자신을 알려주려는 노력을 기꺼이 해야 한다고. 비록 제한적일 수는 있겠지만, 나 자신도 목회자이자 한 사람의 교인으로서 교인들에게 그렇게 하려고 애를 쓰고 있다.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목회자나 그 아내가 목회자로서 경험하는 어려움과 속 깊은 이야기를 소화하고 감당할 수 있는 교인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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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형익

김형익 목사는 건국대에서 역사와 철학을, 총신신학대학원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인도네시아 선교사, GP(Global Partners)선교회 한국 대표 등을 거쳐 지금은 광주의 벧샬롬교회의 담임목사로 섬기고 있다. 저서로는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율법과 복음’, ‘참신앙과 거짓신앙’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