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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삶

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에서 실천으로, 표현에서 형성으로!

제임스 K. A. 스미스의 세계관 읽기_1

by 김경호2022-11-26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을 담아내려는 열망에서 우리는 더 익숙한 동시대의 문화 형식을 찾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적 실천을 채택하여 예배를 개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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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

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

세계관에서 예배로!  


‘신념의 세계관’ 비판. 제임스 스미스James K. A. Smith는 기존의 ‘신념의 세계관’을 비판합니다. 스미스는 기독교 세계관의 인간 이해가 주지적 혹은 인지 중심적이라며 실천과 신념 사이의 관계를 재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신념의 세계관은 “교리와 신념의 원천인 성경으로부터 시작하고, 그런 다음 이를 적용하여 성경이 가르치는 바와 일치하고 이를 표현하는 예배의 실천을 만들어 낸다.” 


스미스는 이러한 신념의 세계관의 문제점을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합니다. 첫째는 교리보다 예배가 먼저였습니다. “예배가 정경의 형성보다 선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예배 참여는 교리의 공식화와 세계관의 명확한 진술보다 선행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신념과 교리보다 욕망의 실천으로서의 예배가 우선합니다. 따라서 기독교 세계관의 신념보다 더 심층적인 차원이 필요합니다. 머리가 아니라 몸,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 무엇보다 세계관이 아니라 “예배하는 인간”이 본질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미스는 무엇보다 욕망하고 사랑하는 “신체성”(몸)에 대한 기독교 세계관의 무시가 실천에 치명적이라고 강조하며 비판합니다.


스미스의 기본 주장. 스미스는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자신의 기본 주장을 설명합니다. 기독교 세계관은 기독교 신념, 사상,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마음과 욕망의 형성에 관한 문제, 즉 지성이 아니라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형성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를 위한 급진적인 제자를 형성하는 것이며, 이것이 기독교 교육과 예배의 근본 목적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스미스는 이러한 주장을 일련의 매커니즘으로 도식화합니다. 인간은 욕망하고 사랑합니다. 그리고 이 욕망과 사랑은 좋은 삶에 대한 전망을 보여주는 어떤 목적에 이끌리고, 상상력에 사로잡힙니다. 이러한 욕망과 사랑, 그리고 목적이 몸에 새겨진 습관을 통해 “자동적 무의식적 실천”이 이루어집니다. 몸의 자동성은 오랜 시간 반복되고 지속하여 실천될 때 형성됩니다. 물론 모든 습관이 자동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스미스는 여기서 실천의 자동성을 “얇은 실천”과 “두꺼운 실천”으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이를 닦는 것과 같은 얇은 실천은 평범하고,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닌 수단입니다. 따라서 이는 정체성에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두꺼운 실천은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합니다. 이 모든 매커니즘의 핵심이 예배에 있습니다. 예배에는 욕망과 사랑, 목적과 상상력(또는 정서), 그리고 몸이 필요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핵심은 형성이 아닙니다. 예배는 하나님에 관한 것이자 하나님을 위한 것입니다.


신념에서 실천으로!


형성. 스미스는 신념이 아니라 예배에 의해 욕망에서 몸을 통한 실천으로 이어지는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잘 그려줍니다. 형성, 잘못된 형성, 그리고 대항적 형성이라는 실천의 역학이 그것입니다. 먼저, 형성은 실천의 첫 번째 단계이자 시작입니다. 이 형성은 예배로부터 시작하고, 욕망에서 몸으로 이어지는 실천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형성에는 두 가지 모호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형성이 이루어지는 시간의 부족입니다. 다시 말해, 예배를 통해 형성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일주일 가운데 주일에 드리는 한 시간 반 정도의 예배 시간 안에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엿새 동안 세상 가운데서 살아가는 시간이 예배하는 시간보다 더 많으므로 절대적으로 시간이 부족합니다. 둘째, 형성이 가진 실천의 모호성입니다. 스미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주일 아침에 이웃들이 집에서 신문을 읽는 시간에 우리는 교회에 가는 것을 제외하면 우리는 그들과 그다지 달라 보이지 않는다.”


잘못된 형성. 결국 잘못된 형성의 문제점이 드러납니다. 스미스는 그의 책 하나님 나라를 욕망하라에서 이 점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 경우에 우리는 교인들이 기독교 예배에 참여함에도 불구하고 다른 세속적 예전이 기독교 예배의 실천을 효과적으로 압도하고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스미스는 그의 책 습관이 영성이다에서 잘못된 형성의 사례로 자신의 경험을 소개합니다. 그는 웬델 베리Wendell Berry온 삶을 먹다라는 책에서 동물을 학대하지 않는 환경 운동―행복한 소, 행복한 돼지―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자투리 시간을 이용하여 그 책을 탐독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열정적으로 이 책을 탐독하면서 형광펜을 칠하고 밑줄을 긋고 여백에 중요한 표시를 하고 아멘이라고 적었다. 읽다가 핵심 주장을 곰곰이 생각하려고 책에서 머리를 드는 순간, 추악한 아이러니를 깨달았다. 나는 코스트코 푸드 코트에서  웬델 베리의 이 책을 읽고 있었다.


잘못된 형성의 역학은 그것을 지적하는 책을 저술한 저자 자신에게도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평생 교회를 다니지만 잘못 형성된 채로 살아갈 수 있으며, 심지어 불의한 체제와 구조와 행동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제대로 막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경쟁하는 욕망의 교육에 동시적으로 등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내부 공간으로서의 교회.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형성을 재조정해야 합니다. 스미스는 바로 대항적 형성의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바로 몸의 올바른 습관과 실천이라고 강조합니다. 몸은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실천의 문제에 대한 답으로 제시해 왔습니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습관, 현대의 모리스 메르로-퐁티Maurice Merleau-Ponty의 신체적 앎(몸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지향성),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의 아비투스(무의식적 지향), 사이몬 로버츠Simon Roberts의 체화된 지식embodied knowledge 등입니다. 


이 가운데 사이몬 로버츠의 ‘체화된 지식’ 개념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체화된 지식은 생각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지식입니다. 이 지식은 한 경비원의 예에서 실증됩니다. 2006년 포틀랜드 공립학교에 효율성을 위해 인공지능을 도입했습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10년 이상 학교 건물을 관리해 왔던 경비원의 체화된 지식의 효율성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경비원은 창문이 닫히지 않는 이유, 어떤 수도꼭지가 더 잘 세는지, 어떤 라디에이터는 다른 라디에이터보다 좀 더 자주 공기를 빼줘야 한다는 학교 건물의 특이점을 소상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체화된 지식은 운전할 때나 타자 칠 때처럼 생각하고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않고 무의식적으로 몸이 반응합니다. 


이런 점에서, 대항적 형성은 몸이 가진 체화된 지식 또는 자동으로 반응할 수 있는 습관이 답입니다. 또한 대항적 형성은 재형성을 위한 공간인 교회가 필요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 사랑을 새롭게 하고 욕망을 재정향하도록 촉구하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성령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먹여 주시는 집, 그분의 은총으로 우리가 다른 무엇보다도 그분을 욕망하는 사람들이 되게 하는 집입니다. 하나님의 영은 바로 그 공간 그 간격에서 번개 같은 마법이 아니라 우리의 신체적 습관을 징집하는 그리스도의 몸의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우리를 만나 주십니다. 


대항적 형성과 대항적 형성을 위한 외부 공간으로서의 일반계시.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문화의 관점에서 파악하여 기독교 예배가 독특한 사람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다중요인을 분석합니다. 이 요인은 원론적으로 생각이나 지성이 아니라 실천적 형성에 대한 문제입니다. 구체적으로 이중성인가 아니면 실천 중 일부만인가의 문제입니다. 스미스는 영화 ‘대부’의 주인공 마이클 코를레오네를 통해 이 문제를 설명합니다. 우선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코를레오네는 예배의 주기와 습관에 의해 지배받은 적이 없습니다. 코를레오네는 그가 필요할 때 결혼식, 세례식, 장례식에 선택적으로 참여했을 뿐입니다. 코를레오네는 자신에게 유용한 실천 중 일부만 참여한 사람으로 보아야 합니다. 이러한 간헐적, 선택적 예배 참여를 올바른 습관화와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스미스는 교회와 목회자의 역할을 제안합니다. 특별히 스미스는 교회와 세상을 연결하여 신학자들이 놓치는 이단을 사회학자들이 발견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합니다. 교회 안에서만 아니라 밖에서도 목회자의 역할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문화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작업입니다.        


표현에서 형성으로! 


스미스는 우리가 예배의 주요 행위자라고 암묵적으로 가정할 때, 우리는 예배를 기본적으로 무언가를 표현하는 행위, 또는 헌신을 보여주는 시간이라고 생각합니다. 예배를 이런 식으로 이해할 때는 예배의 가장 중요한 가치를 진정성이라고 가정하는 셈입니다. 진정성에 대한 열망은 참신성을 추구하는 경향을 불러일으키기 쉽습니다. 그래서 흥미로운 문제가 발생합니다. 자신의 진정성을 보여주기 위해 예배하고 그런 행위를 반복한다면 스스로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렇게 위선적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우리는 우리의 헌신을 보여줄 새로운 예배 방법을 추구할 것입니다. 정리하면, 예배를 표현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예배의 진정성을 유지하기 위해 참신함을 추구합니다. 의도는 좋지만, 결과는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의 미심쩍은 구별과 결합입니다. 


예배의 형태와 실천이 취사선택할 수 있는 형식에 불과하며, 현대적이고 매력적이고 적절한 방식으로(참신성) 복음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버릴 수도 있고 버려야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현대 문화를 향해 말을 걸기 위해 우리는 교회를 개조합니다. 예배 형식과 복음 내용을 담아내려는 열망에서 우리는 더 익숙한 동시대의 문화 형식을 찾습니다. 너무나도 익숙한 현대적 실천을 채택하여 예배를 개조합니다(커피숍, 공연장, 쇼핑몰 같은 분위기에서의 예배).


문제는 이런 형식이 메시지를 담는 중립적인 용기도 아니며 폐기할 수 있는 통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이런 형식 자체가 특정한 텔로스(목적), 즉 좋은 삶의 암묵적 전망을 지향하는 실천입니다. 형식 자체가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가르치는 욕망의 교수법입니다. 이런 실천 형식 자체에 이미 세상을 이해하는 특정한 방식이 가득 차 있습니다.


또한 예배를 표현으로 생각한다면, 이는 표현을 통한 의로움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예배에서는 우리 자신을 예배의 주된 행위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역사적 기독교 예배의 실천은 예배의 본질에 대한, 행위 주체에 대한 근본적으로 다른 패러다임에 뿌리를 내리고 있습니다. 예배는 위로부터 아래로 이뤄집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무언가를 행하시는 공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하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스미스의 ‘형성의 세계관’은 모던적 특징을 모두 배제했다는 점입니다(이 점에 대해서는 다음 글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러나 몸을 통한 실천의 측면에서 매우 귀중한 유산임은 틀림없습니다. 이제는 몸의 실천이 답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이 우리 마음을 다시 훈련하시는 체육관이기에 제자도의 핵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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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김경호

김경호 목사는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M.Div.) 논문 “세 가지 유형의 개혁주의 세계관 연구”로 박사 학위(Ph.D.)를 받았다. 연구단체 Worldview & Work를 설립하여 연구소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2020년부터 목회자들을 대상으로 국내외에서 세계관 교육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