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란 무엇인가?

용서의 지평

by 최창국2022-11-29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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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어떻게 해석하느냐’는 상처의 황무지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의 에토스 함양에도 중요한 문제다. 용서는 단지 신학적 문제만이 아니라 인간의 영적, 심리적, 관계적 차원과도 관계된 문제이기 때문에 단순하지 않다. 실제로 피해자의 피해가 크면 클수록 상처는 깊을 수밖에 없고 용서의 의미를 파악하고 실천하는 일도 어렵다. 용서는 단지 개념적인 문제가 아니라 현실적인 것이며 피해자의 고통스런 감정을 수반하는 프락시스(praxis)다. 하지만 용서는 가치 있는 일이며 어느 면에서는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용서를 말하고 베푸는 방식과 그리스도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용서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예수님이 말한 용서를 무슨 일이 있더라도 반드시 용서해야 한다는 윤리적 당위성으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인간으로서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서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용서를 통하여 단지 윤리적인 의무만을 강조하게 될 때 많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이중의 고통이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의 역동을 간과할 때 흔히 발생한다. 또한 하나님의 용서와 인간의 용서를 분별하지 못할 때 발생할 수 있다. 성경에서 가르치는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지평만이 아니라 사법적(judicial), 심리적(psychological), 그리고 관계적(relational) 지평까지 포함하는 매우 역동적 주제이다. 사법적 용서는 하나님이 주체로서 신만이 할 수 있는 용서이다. 심리적 용서는 피해자가 주체이며, 피해자의 부정적 긍정적 감정인 분노와 분개와 자비 등과 관계된 용서이다. 관계적 용서는 가해자의 회개, 즉 가해자의 마음과 행동의 변화를 통해 일어나는 용서이다.


일반적으로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를 단순하게 윤리적 프락시스로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성경에서 가르치는 인간의 용서는 단순히 의무와 책임만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영적, 심리적, 관계적 치유의 역동이 내포되어 있다.


용서에 관한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익숙한 이야기다. 베드로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그에게 “일곱 번이 아니라일흔 번을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고 했다(마 18:22).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이 말씀한 “일흔 번씩 일곱 번 용서하라”의 의미를 깊이 이해하지 못하고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피해자에게 용서의 당위성과 윤리적 실천만을 강요하고, 피해자의 심리적 차원을 간과하게 되면, 피해자에게 이중의 고통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게다가 피해자가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식적으로 용서하기로 결단하고 다짐해도 미움과 정죄와 분노가 떠올 수 있다. 인간은 상처나 피해를 받으면 분노하도록 지음을 받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피해자의 마음의 치유 없이 용서의 실천만을 강요하게 되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인간의 마음을 돌보는 일을 간과하는 실수를 범하게 된다. 예수님의 용서의 가르침은 윤리적 차원이나 관계적 차원과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심리적, 상황적 차원과도 관계된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된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말한 용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고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처럼 완전한 용서자가 되라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하는 마음과 용서의 정신과 용서하는 자세를 함양하라는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 본문에서 용서가 등장하는 맥락은 주인으로부터 엄청난 빚을 탕감받고 용서받은 종이 자신에게 빚진 동료의 애절한 청은 거부하고 자신의 빚을 갚을 때까지 동료를 감옥에 가둔 내용이다. 이 이야기에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비가 베풀어진 방식이 뚜렷하게 명시되어 있다.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마 18:33). 하지만 이 질문은 수사적으로 표현된 질문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 메시지는 어떤 한 사람이 누려야 할 보상이나 이익이 아니라 그 보상이나 이익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되는 ‘치유’의 기쁨을 말하고 있다. 광의적인 맥락에서 보면, 이 메시지는 더욱 명확하게 드러난다. 베드로는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마 18:21)라며 얼마나 자주 용서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반면, 예수님은 이에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고 대답함으로 베드로의 질문을 어색하게 만들었다. 베드로는 용서에 대한 양적 질문을 하였지만, 예수님은 용서가 마음과 자세의 문제라고 답하셨기 때문이다. 즉 마음으로부터 용서하는 사람이 되라는 뜻이다. 


만약에 이 이야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경우에도 용서해야 한다는 도덕적 당위의 뜻으로 이해하게 되면, 용서의 상황성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상황적 문제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서술하면, 용서가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에 놓이게 될 때, 용서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부당하게 상처를 준 사람을 어떤 경우에도 아무 조건 없이 용서해야 하는가? 피해자가 다른 사람으로부터 상처를 받았을 때, 그 상처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용서는 매우 복잡하고 미묘한 것이다. 


베드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용서의 미묘하고 복잡한 차원을 모두 무시하고 단지 용서하라는 의미로만 해석해서는 안 된다. 용서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도덕 기준과 양심, 그리고 정의감을 모두 무시하고 ‘하나님이 너를 용서하셨으므로 너도 너에게 상처를 준 사람의 죄를 묻지 말고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의 의미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 할 수 없을 때도 무조건 용서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악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용서의 강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악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의미다. 물론 예수님의 가르침은 가해자에 대한 보복의 논리와 증오의 마음을 품고 살라는 뜻은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용서하는 마음을 갖도록 힘써야 한다는 뜻이다. 


진정한 용서는 틀에 박힌 정형화된 공식이 아니다. 용서는 피해자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자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용서는 자유로움의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다. 용서는 그 특성상 일회적 사건이 아닌 역동성을 지닌다. 용서는 마음의 문제이자 관계적이고, 개인적 문제이자 공동체적이며, 역사적 문제이자 상황적이다. 따라서 모든 용서는 역사적, 사회적, 상황적 맥락 안에서 일어난다. 동시에 용서는 정도는 다르더라도 다 그 맥락에 영향을 미친다. 용서를 개인의 분노와 분개의 차원이나 특정 상황에서 취하는 행동으로만 보면, 가해자와 이를 둘러싼 전체적인 맥락을 바르게 파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실제 용서는 복잡한 맥락, 즉 일종의 영적, 윤리적, 관계적, 생태계 안에서 이뤄지게 마련이다. 이 말은 용서가 무조건 상황에 좌우된다는 의미이기보다는 용서가 상황을 전환시킬 힘을 지닌다는 의미다”(스티븐 체리, 용서라는 고통, 243).


용서는 단지 피해자의 의지적 결단에 따른 선택의 문제를 넘어선다. 즉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다.


용서의 여정은 보편적으로 피해자의 분노와 분개와 같은 감정의 정도에 따라 다르게 진행된다. 즉 피해자의 자기 분화 수준과 피해의 상황에 따라 그 형태가 달라질 수 있다. 용서의 여정에 대한 다양한 관점이 있지만 용서는 피해자의 분노가 해소될 때 발생하며, 그 여정은 고통스럽고도 긴 여정이다. 따라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발생 원인과 분노 해소 과정을 알아야 한다. 또한 용서의 여정에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무의식적인 방어기제이며 생명력의 표현이다. 가해자에 의해 발생한 피해자의 분노 감정은 자신을 지키는 방어기제이다. 


용서와 분노 같은 감정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고 양극단 사이에 치유 공간이 열려 있다는 희망을 버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류다. 오히려 용서는 감정적 차원과 윤리적 차원 양쪽을 통합하고, 나아가 초월하는 일이다. 또한 피해자의 분노나 상처가 완화되고 치유될 때까지 혹시라도 발생할지 모를 여러 개인적, 상황적 문제들을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는 일이다. 질 스코트(Jill Scott)는 용서를 “정당한 복수에 대한 회의에서 용서에 대한 중립적 수용을 거쳐 가해자에 대한 충일한 인간애”로 전진하는 일종의 연속체로 보았다. 그녀는 이어 “그러므로 용서의 실천은 끊임없는 소소한 제스처와 의도들을 포함한다”고 하였다. 또한 그녀는 “그 외에도 용서의 스펙트럼 안에는 분개심과 복수심 같은 감정들도 같이 들어 있는 까닭에 용서 과정을 거치면서 이러한 감정들이 종종 터져 나오기도 하고, 심지어 수년이 지난 후에 불쑥 올라오기도 한다”고 하였다(Jill Scott, A Poetics of Forgiveness, 199).      


용서는 단지 윤리적인 언어이기보다는 역동적인 용어이다. 인간의 용서는 의지적인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차원의 문제와도 직결된다. 인간은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가해자를 의지적으로 용서하겠다는 결단을 해도, 상처로 인해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분노와 같은 감정은 의지적 결단을 통해서 해결되지 않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정서적 상처가 완화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따라서 진정한 용서는 의지적 결단의 문제만이 아니라 정서적 문제를 포함하기 때문에 피해자의 정서의 부정적 긍정적 반응에 대한 우호적 환경을 조성해 주는 것이 필요하다.


용서를 개인의 의지적 결단과만 관련시킬 때 정서적 상처로 인하여 용서가 쉽지 않은 사람을 도덕주의적 관점에서 평가하여 상처 입은 피해자에게 심적 부담을 안겨주는 이중적 고통을 겪게 할 수 있다. 따라서 용서의 과정에서 반드시 고려해야 할 것은 피해자의 정서적 여정과 상태를 부정적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나아가 광의적인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문제와만 관계된 것이 아니라 공동체성의 실현의 문제와도 관계된다. 데이비드 아우그스버거(David Augsburger)는 참된 용서는 단지 개인의 화해(reconciliation)의 과정에 이르는 단계로만 보아서는 안 되고, 공동체의 생명력과도 관계된다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용서의 참된 초점은 개인의 죄책감으로부터의 해소나 착함의 증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공동체 안에서 대인 관계의 화해, 온전함과 생명을 함께하는 것에 있다”(David Augsburger, Caring Enough to Forgive, 6-7). 그가 보는 참된 용서의 의미는 용서를 하는 사람의 도덕적 우위성에 있기보다는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공동체가 상처 입은 사람에 대한 격려와 용서의 가능성에로의 상황을 조성하는 데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용서는 개인의 의지적 결단의 문제이기보다는 그가 속한 공동체가 복음을 실현해내는 여정과도 관계된다. 

용서는 피해자의 의지적 여정과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적 차원과도 관련된 매우 복잡하고 역동적인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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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최창국

최창국 교수는 영국 University of Birmingham에서 학위(MA, PhD)를 받았다. 개신대학원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제자들교회 담임목사로 섬겼다. 현재는 백석대학교 기독교학부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는 『삶의 기술』, 『실천적 목회학』, 『영혼 돌봄을 위한 멘토링』, 『해결중심 크리스천 카운슬링』, 『영성과 상담』, 『기독교 영성신학』, 『기독교 영성』, 『중보기도 특강』, 『영성과 설교』, 『예배와 영성』, 『해석과 분별』, 『설교와 상담』,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 『영혼 돌봄을 위한 영성과 목회』 등이 있다. 역서는 『기독교교육학 사전』(공역), 『공동체 돌봄과 상담』(공역), 『기독교 영성 연구』(공역)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