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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의 길(3-2)
by Tim Keller
2022-05-26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와 두 번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오는 여름에 마지막 네 번째 글, “갱신을 위한 능력”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3-1] 부흥과 운동의 역사 [3-2] 새로운 운동의 필요 및 성립새로운 운동의 필요미국 교회는 우리 사회를 분열시키는 동일한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것을 피할 수 없었다. 민주당의 진보-자유주의 정치 의제는 자유주의 주류 교회가 수행하던 복음 전도와 영적 형성이라는 사역을 사실상 대체했다. 그 결과 교회는 수십 년에 걸쳐 치명적이고 급격한 수준으로 쇠락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는 보수적인 공화당 정치와 지금 거의 같은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가톨릭교회와 유대교 안에도 이와 비슷한 분열이 있다.) 종교 단체는 점점 더 특정 정당의 투표 세력으로 축소되고 있다.세속 문화는 목적, 의미, 희망, 행복, 죄책감, 용서, 정체성과 같은 위대한 질문에 답하는 것을 포기했다. 따라서 사랑과 정의의 실천이라는 새로운 기독교 운동을 위한 사회적 자리는 분명하게 존재한다. 그러나 기독교는 권력을 남용해서 안 되며 또한 과거에 종교 체제로서 저질렀던 실수를 피해야 한다. 이미 이전 글에서 언급한대로, 기존의 종교 단체, 기관, 교회 중에서 미국 교회를 갱신하는 데에 필요한 모든 요소를 다 갖춘 곳은 하나도 없다. 갱신을 위한 비전과 움직임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제 다양한 전략적 주도성을 가지고 연합할 평신도 지도자, 목사, 학자로 구성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리더십은 복음주의 교회, 흑인 교회, 적지 않은 보수적 고백교회(루터교, 성공회, 개혁파, 감리교, 재세례파), 그리고 놀랍도록 다양한 새로운 민족 및 이민 교회에서 나올 것이다. 그리고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운동이 가진 기본 신학과 미래 비전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나올 것이다. 하나의 운동은 강력한 비전, 도덕적 확신, 강력한 개인적 우정, 한 개인이나 조직의 명령 및 통제 구조의 결과가 아닌 혁신적인 사고에서 나오는 내적 에너지를 가지게 된다. 그럼 운동은 어떻게 발전하는가? 여러 그룹이 모이는 경우, 하나의 운동에 불을 붙이길 바라기 마련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사람들의 상상력을 사로잡고 또한 자연스럽고 유기적으로 참여자를 끌어들일 수 있을지의 여부는 그들조차도 결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일단 동력이 붙게 되면, 운동을 일으킨 초기 조직은 기본적으로 동일한 미래 비전과 도덕적 이상에 헌신하는 또 다른 시작(initiatives)과 조직의 생성을 촉발하게 된다. 새로운 운동의 성립새로운 운동은 역사적인 개신교 신학을 중심으로 통합될 것이다. 뜨겁게 공유되는 신학적 믿음보다 응집력 있고 역동적인 기독교 운동에 꼭 필요한 요소도 없다. 역사적으로 인정받은 개신교 신학을 유지해야 하는 주된 이유는 그것이 행위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다는, 은혜의 복음이라는 기본 믿음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살펴보았듯, 마음과 삶에서 복음이 회복되어 살아 움직이는 것만이 영적 쇄신의 열쇠이다. 복음에 대한 정통적 이해를 정의하고 옹호하는 핵심적인 신학적 진리는 첫째, 에큐메니칼 신경에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즉 사도신경, 니케아 신경, 칼케돈 신경, 그리고 아타나시우스 신경을 말한다. 이러한 신조는 다음 사실을 확증한다. • 삼위일체 하나님의 교리, 즉 서로를 알고 사랑하는 세 위격으로 영원히 존재하는 한 하나님이 계시다.• 우리 몸을 포함한 물리적 피조물은 모두 실재하고 선하다. •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과 인성, 그리스도는 한 위격으로 영원히 연합하신다.둘째, 다양한 개신교 신앙고백과 교리문답의 공통 핵심인 (‘오직’으로 시작하는) ‘다섯 오직’(Five Solas)은 복음에 대한 정통적 이해를 정의하고 옹호한다. ‘다섯 오직’은 구원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성경에 따라, 오직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하여, 그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선언한다.[4] 따라서 개신교 신앙고백들은[5] 다음을 확증한다. • 성경의 필요성, 성경의 충분성, 성경의 명료성, 성경의 권위, 그리고 성경의 무오성• 인간은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와 개입 없이는 구원을 원하거나 성취할 수 없다는 죄의 교리•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받아야 할 형벌을 대신 받으셨다는 속죄의 교리• 성령을 통한 거듭남의 필요성, 칭의, 그리스도와의 연합, 양자 됨, 그리고 성화의 축복• 그리스도인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양성하기 위한 교회와 말씀 사역, 세례, 성만찬의 필수 불가결성•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인격적으로 재림하셔서 세상을 심판하시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세우심새로운 운동은 회개와 주님 찾을 것을 요구한다. 회개 없이는 영적 부흥도 없다. 회개 없이는 개인이나 집단 간에 화해는 없다. 회개 없이는 개혁도 변화도 없다. 나의 잘못을 온전히 또 진실하게 말할 수 없다면,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진정한 변화를 위한 도움과 관계 회복을 구하지 않는다면, 대신 변명하고 최소화하며 남을 비난한다면, 교회에는 희망이 없다.모든 기독교 부흥에는 몇 가지 공통 요소가 있다. 은혜의 복음, 비상한 기도, 회개, 생명이 넘치는 공동 예배, 하나님의 즉각적인 임재에 대한 감각, 그리고 새로운 지도자 등이다. 이런 요소에 대한 새로운 강조가 필요하다. 그러나 모든 갱신은 언제나 모양과 방법 및 측정 면에서 이전 갱신과 다르다.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시기에 주권자이시다. 당신이 구원 받을 자격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당신은 부흥을 일으키거나 받을 자격도 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자신의 명성이나 성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진지하게 하나님을 찾고, 나의 허물에서부터 시작하는 개인 부흥의 작은 사례가 되기를 추구할 때, 긍정적인 영적 역학이 주변 교회에서 작용하기 시작하는 것을 보았다. 하나님은 세상을 향한 그의 계획 속에 더 많은 부흥을 갖고 계시다. 마지막에 만날 궁극적인 부흥 이전에, 겨울이 지나고 궁극적인 봄을 맞기 전에, 나무들도 기뻐 노래할 것이다(시 96:12).새로운 운동은 분열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눈물과 은혜가 있다.1940년대 있었던 복음주의-근본주의의 분열과 같은 역사가 반복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어쩌면 이미 일어나고 있다). 이런 이야기에 대한 가장 좋은 설명 중 하나는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이 쓴 Reforming Fundamentalism(개혁하는 근본주의) 안에 담겨 있다.[6]1940년대에 한 그룹은 분리주의, 급진적 개인주의, 반지성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정치적 극단주의와 같은 “근본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면서도 “본질적인 복음주의 정통성을 유지”하는 동시에 세속주의에 당당하게 반발하려는 시도를 했다.[7] 이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운동을 “새로운 복음주의”라고 표현했다. 칼 헨리(Carl Henry)는 1948년에 “새 복음주의의 활력”(The Vigor of the New Evangelicalism)이라는 기사를 통해 이 새로운 운동의 비전을 설명했다. 그는 세 가지 수사학적 질문을 던졌다. 첫 번째는 자유주의에 향해서, 그리고 두 번째는 근본주의를 겨냥한 것이었다. “기독교가 오로지 초자연적인 구원의 메시지에서만 찾을 수 있는…의미의 깊이…를 다시 도입하기에는 너무 늦었는가? 오늘날 복음주의의 유일한 메시지가 파멸의 운명에 처한 세대로부터의 개별적인 구원의 선포인가? 아니면 이 복음에는 우리 시대의 가장 시급한 사회 문제까지도 함축되어 있는가?”[8]새로운 복음주의 운동은 40년 동안 번창했지만,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들어서 새로운 형태의 근본주의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불신앙에 대응하는 성경적 정통성을 조장함에 따라 예전에 한편이라고 생각했던 친구들 사이에서 과거와 비슷한 종류의 슬픈 소외가 또 다시 일어나고 있다. 분열은 현대 미국 복음주의의 한 가지 중요한 측면인 주요 순회 컨퍼런스(conference circuit)에서 만날 수 있다. 한때 같은 연단을 공유했던 연사 중에서 비공식적 또는 공식적으로 아예 초대를 받지 못하거나, 아니면 스스로 초대를 취소했다. 분열을 볼 수 있는 두 번째 장소로 들 수 있는 것이 통합된 기부자로 운영하던 복음주의 기관이다. 그러나 지금은 “비판적 인종 이론” “젠더 이데올로기” “사회 정의”를 놓고 기부자가 분열되었다. 이런 현실은 자신이 선택한 특정 진영(tribe)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내 편을 선택하고, 그에 맞는 언어까지 조정해야 한다는 측면에서 대학과 기관에 실로 엄청난 압력을 가한다. 분열은 아예 새로운 교단의 창립이라는 공식적인 분열로까지 이어질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든 보수 교단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80년 전에 많은 논쟁을 촉발했던 문제들은 그 시대를 반영한다는 면에서 독특했다. 근본주의자와 새로운 복음주의자는 술과 담배, 영화와 같은 현대 오락의 사용에 관해서 이미 ‘배교’의 길에 들어선 주류 교단과 분리할 것인지를 놓고 고민했다. 더불어 그리스도인의 사회적 또는 문화적 참여에 대해 매우 비관적인 견해를 갖게 만드는 복잡한 구약 예언 해석 방식인 ‘세대주의’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랐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여전히 울려 퍼지는 당시의 논쟁거리가 있다. 새로운 복음주의는 개인 영혼의 전도뿐 아니라 사회 문제와도 씨름했다. 근본주의자는 이것을 “자유주의적 사회복음”이라고 불평했다. 복음주의자는 또한 현대 대학에 참여했다. 근본주의자는 이것을 불신앙과의 타협이라고 불평하며 강력한 반지적성적 입장을 취했다.[9]이 글에서 나는 분열의 양면을 설명하기 위해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계속 사용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미국 대중에게 이 두 단어는 사실상 같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누군가가 이 두 용어를 다 효율적으로 포함하는 새로운 용어와 이름과 설명까지도 만들어 줄 것을 기대한다.[10]어쨌든 이런 분열 속에서조차 진리와 눈물과 은혜로 응답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주를 더 잘 반영할 것이고, 불신자의 마음을 얻고 신자를 성화시키는 데 더 효과적일 것이다. 가장 은혜롭게 행동하는 쪽이 나중에 가장 번성할 것이다. 그 의미는 이것이다. • 누군가가 우리에게 잘못했다면 용서해야 한다. 용서는 예수님에게 매우 중요했기에, 예수님은 원수를 용서하기 위해 죽으셨다(눅 23:34). 모욕과 멸시를 받았을 때 예수님은 결코 같은 방식으로 대응하지 않으셨다(벧전 2:23). 그렇다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형제자매들에게 얼마나 더 은혜롭고 관대해야 할까? • 논쟁하기보다는 전도하고 교화해야 한다. 문화와 교회에서 만나는 분열은 좌파와 우파에 의해 더 부추겨지고 있다. 양측 다 정치적 의제를 위해 가능한 한 많은 교회와 연합하고 싶어 한다. 양측은 또한 자신이야말로 도덕적으로 높은 위치에서 진실과 정의의 편에서 싸우고 있다고 주장한다. 양측은 교회 지도자를 비롯해 그들과 의견을 같이 하지 않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엄청난 수의 악성 비디오와 밈과 기사를 생산한다. 종종 논쟁이 필요할 때가 있지만, 논쟁은 어디까지나 항상 먹는 음식이 아니라 약이어야 한다. 사람이 약만 먹고는 살 수 없다. 장기적으로 끊임없는 논쟁은 우리를 지치게 하고 영적 고갈을 불러온다.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운동은 설교와 저술, 가르침과 목회로 이름을 날리는 운동이다. 그런 운동은 놀랍도록 훌륭하고 영적으로 영양을 공급하고 가르치는 그 자리에서 독자나 청중을 변화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다. 새로운 운동은 특히 불의, 섹슈얼리티, 그리고 정치 문제를 중심으로 ‘개신교 사회 교육’(Protestant Social Teaching)을 발전시킬 것이다. 성경의 교리와 윤리적 원칙이 사회 문제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실질적인 이론을 갖추지 않고서는 그 어떤 그리스도인도 사회에 제대로 참여할 수 없다. 현대 사회 및 정치 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답변을 제공하는 것 외에도, ‘개신교 사회 사상’(Protestant Social Thought)에는 다음이 필요하다. 현대 세속 문화 전반을 비판하고 그 깊은 구조적 실패를 폭로하는, 일종의 기독교 ‘고급 이론’을 제공할 것. 가톨릭은 개신교보다 이 분야에서 훨씬 더 많은 공헌을 했다(예: 알리스데어 매킨타이어(Alasdair MacIntyre)와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11]일반적인 차원에서 ‘문화적 참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고, “그리스도와 문화” 모델에 대한 분열을 다룰 것.[12] 각각의 모델이 과도하게 차용되는 것을 피해야 하고, 그렇지 못할 때에는 다음과 같은 위험이 따라온다. • 변형 위험. 이것은 문화가 끔찍한 쇠퇴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고, 그것을 바로잡기 위해 정치적인 힘을 추구하는 접근 방식이다. 위험: (심지어 가장 좋은 동기를 가지고도)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게 되고 종으로서 세상을 변화시킨 예수님과 달리 도리어 세상을 더 닮아가게 됨. • 동화 위험. 이것은 문화를 ‘더 많은 정의와 포용을 향한 역사’로, 보다 긍정적으로 파악하고 교회가 해방 운동에 참여하기를 바라는 접근 방식이다. 위험: 세상에 너무 많이 순응하는 것, 일반적으로 보수 진영보다는 진보 진영이 빠지기 쉬움.• 철수 위험. 이 접근 방식은 ‘변형’ 접근 방식만큼이나 문화에 대해서 부정적이지만, 사회와 구별된 공동체 속으로 후퇴할 때 사회의 오염을 피할 수 있다고 믿는다. 위험: 문화가 이미 그들에게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한 무지. 그 어떤 경우에도 문화가 삶에 스며드는 것을 막을 방법은 없다.• 무시 위험. 이것은 세상이 잘되고 있으며 굳이 교회까지 문화적 참여를 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이다. 그냥 교회를 개척하고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하라. 위험: ‘철수 위험’과 유사하게, 문화가 그들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인 정치 참여에 대한 지침을 제공할 것. 그리스도인은 동시에 두 개의 ‘도시’ 또는 사회 질서 속에서 살고 있다. 한편으로 그들은 하늘에 있는 하나님의 도성의 시민이다(빌 3:20-21).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사랑과 자기희생(“당신을 섬기는 게 나의 삶”)이 아니라 권력과 이기심(“나를 섬기는 게 당신의 삶”)에 사회 질서의 기반을 둔 “인간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도성을 특정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의제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지상의 모든 정치 운동이나 정당은 미덕뿐 아니라 죄에 대한 공모도 함께 포함하고 있다. 정당에 소속된 그리스도인은 좋은 당원이어야 하지만 동시에 자기 정당을 비판할 수 있어야 한다. 선의(good will)에 대한 모든 세속적 또는 비기독교적 견해는 무엇인가로부터 언제나 우상을 만들어내기 마련이다. 예를 들어, 좌파는 정부를 과신하고 우파는 시장(market)이나 자기 인종의 선을 과신한다. 결과와 방법에 있어서 이런 식의 혼합은 심지어 선을 추구하는 기독교 조직과 운동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새로운 운동은 영향력을 추구하지만, 동시에 권력에 대한 기독교적 이해가 필요하다. 특정 사회 영역에서 성장하는 새로운 운동을 형성하려면 돈과 기부자, 지지자의 숫자, 대중의 관심, 청중, 그리고 더 넓은 문화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다른 그룹과 조직 또는 개인과 치열한 경쟁을 벌여 이기는 길밖에는 없다. “새로운 운동이 가능함” 또는 “영적 갱신”과 같이 영감을 주는 그럴듯한 용어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운동을 시작하는 순간 필연적으로 권력을 놓고 경쟁하게 된다. 우리는 사회적 자본을 활용하여 더 많은 청중에게 다가갈 것이다. 우리는 다른 종교 공동체보다 이 문화가 가진 질문과 반대에 대해서 더 잘 대처할 수 있도록 우리 자신을 준비시킬 것이다. 우리는 자신을 정의하기 위해 강력한 노력을 기울일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우리의 이름을 마음대로 “정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즉, 이는 우리가 자신을 묘사할 때 다른 그룹과 대조해서 확실한 차별성을 둬야함을 의미한다. 우리가 경쟁이라는 차원을 초월하는 위치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13] 불가피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는 정반대되는 게임의 규칙을 가진 경쟁적인 사회 현장에 들어갈 수밖에 없다. “예수께서 불러다가 이르시되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그들을 임의로 주관하고 그 고관들이 그들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막 10:42-44).우리는 세상이 아닌 예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진짜 질문은 어떻게 그게 가능하냐는 것이다. 성경 말씀으로, 그러니까 주해에 근거해 결정적이고 설득력 있는 논증을 통해 “경쟁”할 것인가? 상대방의 견해를 인정하고 긍정하는 방식으로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세상의 방식에 따라서 쓰러뜨리기 쉬운 캐리커처를 하나 만들고, 두려움과 분노를 조장하여 자본을 확보하며, 동기를 전가하고 모든 반대자를 악인으로 비난하는 인신공격적(ad hominem) 논쟁에 가담할 것인가? 상대방을 설득하는 대신 단지 부끄럽게 만들거나 적대시할 것인가? 아니면 내 방식으로 상대까지 “소유”할 것인가? 이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 확실한 “아니요”가 되길 바란다. 새로운 운동은 7개의 선교 프로젝트를 수행할 것이다.제임스 헌터(James Hunter)는 “중첩된 전략적 자본 네트워크”의 효과를 주장한다. 즉, 학자, 사업가, 종교 지도자, 예술가, 과학자, 언론인, 정치인 등이 연합하여 상징적, 사회적,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본을 “공동의 목적, 공동의 세상, 그리고 모두가 원하는 변화를 향하여” 집중할 때 세상은 참으로 변화한다는 것이다.[14] 그러므로 교회 갱신 운동은 각 선교 사업에 적합한 자원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을 모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적어도 7개의 프로젝트와 8번째의 ‘메타 프로젝트’가 있어야 한다. 이 글에서는 간단히 설명하고 네 번째이자 마지막 글에서 자세히 설명하겠다.1. 교회 개척과 갱신. 미국에서 매년 개척하는 교회 숫자를 현재 3∼4000개에서 6∼8,000개로, 두 배로 늘려야 한다. 현재의 교회 개척 모델을 바꿔야 한다. 2. ‘카운터(Counter) 교리 교육’ 제자도. 기독교 교육은 대대적으로 재정비되어야 한다. 어린이, 청소년, 그리고 성인에게 기독교 교리를 설명하는 것에서 그치면 안 된다. 더불어 기독교 교리를 사용하여 신자들이 일상에서 심하게 노출되는 기본적인 문화의 내러티브들을 전복할 수 있어야 한다. 3. 포스트 기독교 전도. 오늘날 서구 교회는 역사상 최초의 포스트 기독교가 가져다준 깊은 세속 문화에 직면했다. 교회는 아직까지 세속적인 사람과 더불어 “아예 종교 없는 사람들”(none)을 믿음으로 이끄는, 그들을 제대로 전도하는 방법을 개발하지 못했다. 이 프로젝트는 그러한 전도를 위해 필요한 내용과 수단을 동시에 개발하는 것이다. 4. 공정 네트워크. 우리는 다양한 영역에서 궁핍한 사람들을 돕고 또한 지역사회 수준에서 보다 공정하고 정의로운 사회 질서를 만들기 위해,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네트워크(최소한 하나의 초교파 사역 또는 네트워크의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수십 명의 강도 피해자와 사역한 이후, 나는 선한 사마리아인 사역이 여행자를 위해 특정한 도로를 더 안전하게 만드는 데에 공헌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5. 믿음-사역 네트워크. 그리스도인이 직업과 신앙을 통합함으로 공동선에 봉사하고, 더불어 직업 현장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faithful presence)[15]을 제대로 하도록 돕기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인을 조직하고 준비시키는 네트워크(또는 새로운 사역 네트워크 또는 기존 사역을 활용한 네트워크)를 만들어야 한다. 네트워크는 교회가 공적 생활을 위해 교인을 제자화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므로, 그리스도인은 직장에서 신앙을 감추지 않을 것이며 또한 효율적인 지배를 위해 신앙을 타인에게 강요하지도 않을 것이다. 6. “기독교 지성” 프로젝트.[16] 복음주의는 대중에 대한 호소력을 잃지 않으면서도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강력한 반지성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그리스도인 교수진을 늘리고 정통 개신교를 위한 강력한 지적 문화를 구축하며 또한 기독교 공공 지식인의 수를 늘려야 한다. 7. 새로운 리더십 파이프라인. 우리는 전국의 청소년 사역과 캠퍼스 사역을 갱신하고 재창조해야 한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확장을 통해 크게 강화해야 할 뿐만 아니라, 이 사역을 신학 훈련 프로그램 및 신학교와 연결해야 한다. 이는 보다 더 잘 갖추어진 기독교 지도자를 점점 더 많이 배출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모든 7개 프로젝트 뒤에는 8번째 ‘메타’ 프로젝트가 있다. 그것을 기독교 자선이라고 부르자. 강력한 재정 지원 없이는 교회를 새롭게 하거나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부를 기부하고 관리하는 그리스도인의 사고가 더 많은 돈을 사역을 위해 내놓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한다. 궁극적으로 모든 프로젝트는 같이 서거나 아니면 같이 무너진다. 모든 프로젝트는 서로를 지원하고 활력을 준다. 모든 프로젝트가 다 성취되지 않고서는 그중 어떤 하나도 제대로 된 성취를 이룰 수 없다.마지막으로, 새로운 운동은 미래의 비전 및 운동과 관련해서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가치를 분명히 할 것이다. 효과적인 운동은 그 운동이 가져올 미래의 청사진을 정확하게 그릴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부분적으로 사역 프로젝트의 다양한 실제 결과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 너머에는 우리가 과연 어떤 교회로 부름받았는가에 대한 그림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다음 사항을 다짐한다. • 아직까지 교단이라는 큰 천막 속에 있는 개신교의 교리적 정통.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파와 전통을 사랑하지만 다른 교단과 전통도 존중하고 감사할 것이다. • 거저 주시는 은혜로 구원을 받아 성결에 이름. 우리는 도덕주의와 상대주의의 전형적인 이중 함정을 피할 것이다. • 글로벌 및 비서구 교회와의 일치. 우리는 비서구 기독교 지도자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그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운동으로 길을 찾을 것이다. • 다민족 미국 교회와 리더십. 우리는 비백인 지도자들에게 진정으로 힘을 실어주는, 다민족 팀이 이끄는 운동을 교회 전체에 걸쳐서 만들 것이다. • 말과 행동을 통합하는 사역. 우리는 정의와 자비를 행함으로 전도와 가르침을 하나로 만들 것이다. • 영적 부흥, 그러나 또한 기관의 설립. 우리는 개인의 영적 경험 뿐 아니라 지역 교회와 새로운 기관의 중요성을 소홀히 하지 않을 것이다. • 좌파 또는 우파 정치의 세속적 형태에 저항하는 개신교의 사회 가르침을 지향할 것이다. (위에서 이미 다루었다.)• 사도적이면서 동시에 종으로 섬기는 리더십. 우리는 역동적이고 기업가적인 “사도적” 지도자를 지지하지만 그러한 지도자가 섬기는 자세로 일하도록 요구할 것이다. • 세계관 그러나 일반 은총. 우리는 기독교의 근본적인 믿음과 다른 세계관 사이의 대조를 강조하면서도 불신자가 가진 일반 은총과 지혜를 인정할 것이다. • 독창적인 기독교 ‘사회 프로젝트.’ 우리는 a) 다민족, (b)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 (c) 용서와 화해, (d) ‘낙태 반대’라는 대의, (e) 하나님이 창조하신 남녀 성별 사이에서만 허용되는 결혼과 섹스를 굳건하게 지킬 것이다.• 신학적 회복(retrieval)과 교의학에 대한 새로운 연구 성과. 우리는 과거의 정통에 충실하지만, 또한 정통을 현대 문제와 연관시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비상한(Extraordinary) 기도. 우리는 기도의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 부분인 기도와 관련하여 영적 갱신과 부흥에 관한 로이드 존스의 글을 깊이 새기자. “나는 지난 수세기에 걸쳐서 교회, 특히 부흥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특별히 사용하신 사람들의 전기를 읽을 것을 권합니다. 당신은 그들에게서 동일한 수준의 거룩한 담대함, 동일한 논쟁, 동일한 추론, 동일한 차원에서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모습을 발견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기도의 모든 비밀이라고 나는 가끔 생각합니다. 토마스 굿윈(Thomas Goodwin)은 멋진 용어를 사용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괴롭히시오(sue), 하나님을 괴롭히시오.” 하나님을 혼자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하신 약속을 가지고 하나님을 괴롭히십시오. 하나님께 성경을 인용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하나님은 우리가 그렇게 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마치 자신의 말을 주의 깊게 듣고 잘 기억했다가, 나중에 그대로 하는 어린 자녀를 보면서 기뻐하는 아버지처럼 말입니다.”[17][주]4. 데이비드 베빙턴의 복음주의 네 가지 특징과 “오직들” 사이에는 흥미로운 상관관계가 있다. 베빙턴은 (a) 성경의 완전한 권위-(sola Scriptura) (b) 회심의 필요성, 거듭남-(sola gratia and sola fidei) (c) 예수의 피 속죄에 의한 구원, 그리고 역사함-(sola Christus) 그리고 (d) 선교, 세계 복음화의 필요성-(sola Deo Gloria)으로 열거했다. 5. 이런 사례는 다음을 포함한다: The Augsburg Confession (1530), The Belgic Confession (1561), The Helvetic Confession (1562), The Thirty-nine Articles of the Church of England (1571), The Heidelberg Catechism (1576), The Canons of Dordt (1619) The Westminster Confession, and Larger and Shorter Catechisms (1647), The Savoy Declaration (1658), The Baptist Confession of Faith (1689). 그들은 로잔 언약과 세계복음주의연맹(World Evangelical Alliance)과 같은 신앙 선언문에서 더 현대적인 표현을 찾는다. 이 모든 고백은 루터교, 개혁파, 성공회, 침례교, 회중 공동체에서도 통하는 것이기에 여러 면에서 매우 다르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모두가 다 개신교 정통의 핵심을 담고 있다고 믿는다.6. George Marsden, Reforming Fundamentalism: Fuller Seminary and the New Evangelicalism(Eerdmans, 1987). 19세기에 복음주의는 미국의 비공식적인 종교 기관(establishment)이었다. 복음주의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과 더불어 개인의 회심과 경험을 강조하는 ‘부흥주의’적 측면으로 구성되었으며, 전도와 선교를 위해서 교단뿐만 아니라 초교파적 조직을 통해 만들어졌다. 이 “복음주의 제국”은 대부분의 주요 개신교 교회와 대학 및 종합대학을 지배했다. 대부분의 공인은 비록 기독교의 믿음과 정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해도 최소한 그것을 존중해야 했다. 그러나 189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한 세대를 거치는 사이에 대학, 주요 개신교 교단, 연방 정부 및 기타 주요 문화 기관 등 엘리트 사회에서 복음주의 기독교의 영향력과 명성이 무너졌다. 성서의 ‘고등 비평’과 다윈의 진화론은 둘 다 유럽 대학에서 처음으로 제기된 후 미국으로 퍼졌다. 새로운 대학 중 다수는 의도적인 반종교적, 세속적 기반에서 설립되었다. (Christian Smith, ed. The Secular Revolution: Power, Influence, and Conflict in the Secularization of American Public Life, University of California, 2003 참고). 그러자 주류 교단의 많은 지도자는 전통적인 기독교 교리를 현대 과학과 감성에 비추어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보수 대 자유주의 전투는 미국 북부 (나중에 미국 전체) 침례교 대회와 북부 장로교회에서 처음 발생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서도 벌어졌다. 보수주의자는 그 전투에서 패했고 1920년대 후반까지 “미국 북부에서는 그 어떤 종류의 존경받는 교육 기관도 근본주의적 가르침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다.”(Marsden, 4)가 현실이 되었다. 1890년에서 1930년 사이에 보수적인 개신교가 엘리트 문화 기관, 특히 북부의 엘리트 문화 기관에서 쫓겨났을 때, “근본주의”라고 불리게 된 수천 개의 새로운 조직, 네트워크, 라디오 사역, 여름 캠프, 학교 및 기관, 그리고 수많은 협회가 설립되었다.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과 나단 해치(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는 분리주의, 급진적 개인주의, 반지성주의 및 정치적 극단주의를 향한 “경향” 안에 초기 미국 복음주의의 씨앗이 뿌려져 있음을 보여준다. (Marsden, 10). 이러한 경향은 사회에서 복음주의가 더 만연했을 때 오히려 잠잠해졌지만, 이제는 근본주의자가 스스로를 초교파적 조직으로 후퇴시켰다. 존 그레샴 메이천(J. Gresham Machen)과 같은 더 지성적인 근본주의 지도자의 영향력은 사라지고 있고, 새롭게 궁지에 몰리는 입장에서 근본주의의 이러한 “경향”은 도리어 크게 강화되고 있다. 7. Marsden, 10.8. Carl Henry, “The Vigor of a New Evangelicalism” Marsden, 69에서 인용.9. 오늘날 복음주의자를 갈라놓는 다른 차이점에 대해서는 내가 새롭게 급증하는 근본주의를 설명한 두 번째 글을 참조하라. 10. 칼 헨리(Carl Henry) 못지않게 복음주의라는 용어에 대해 엇갈린 복잡한 감정을 가진 사람이 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당시에도 그 단어가 채택되어 사용되고 있었다고 그는 말했다. “아무도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단어는 많은 사람들에게 19세기 기독교처럼 들렸고, 따라서 “시대에 뒤진 것(passe)”이었으니까.” (Marsden, 10).11. 출발점을 제공할 수 있는 개신교의 두 가지 예는 다음과 같다. Reinhold Niebuhr, “The Christian Church in a Secular Age” in Robert McAfee Brown,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Selected Essays and Addresses, Yale, 1986, 79-92, 및 David T. Koyzis, Political Visions and Illusion: A Survey of and Christian Critique of Contemporary Ideologies 2nd edition, IVP, 2019.12. 지금까지 나온 모델 중에서 가장 유명한 버전은 다음이다. H. Richard Niebuhr, Christ and Culture, Harper and Row, 1951.13. American Evangelicalism: Embattled and Thrivin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8에서 저자 크리스찬 스미스(Christian Smith)는 ‘종교적 힘의 하위문화적 정체성 이론’을 제안했다. 이는 일부 종교 공동체가 다원적 환경에서 더 잘 번성하는 이유에 대한 설명이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기는 하지만, 스미스는 “전투를 잘 선택하는” 종교 공동체가 가장 잘 번성한다고 주장한다. 일반 문화와 전투를 벌일 때, 너무 많은 지점에서 또는 너무 적은 지점에서 싸우는 경우 번성하기 힘들다. 스미스는 일반적으로 복음주의가 (너무 많은 불필요한 싸움을 벌이는) 근본주의 또는 (너무 적거나 아예 싸우지 않는) 자유주의 개신교보다는 더 나은 역할을 할 것이라고 믿는다. 스미스의 아이디어는 매혹적이며 미국 교회의 모든 갱신 운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여기서 함축적 의미를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전투’ 즉 비판과 반대가 필요하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우리는 전투에 관해 순진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전투’를 어떻게 벌이느냐이다. 14. James Davison Hunter, To Change the World: The Irony, Tragedy, and Possibility of Christianity in the Late Modern World, Oxford, 2010, 43.15. “faithful presence” 개념에 대한 설명은 Hunter, To Change the World 참고. 16. “기독교 지정”이라는 표현은 Mark Noll의 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Eerdmans, 1994)에서 따온 것임을 밝힌다.17. D. M. Lloyd Jones, Revival, Crossway, 1987, 209.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3-The Path to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신앙고백
다섯오직
교리문답
에큐메니칼신경
사도신경
니케아신경
칼케돈신경
아타나시우스신경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갱신의 길(3-1)
by Tim Keller
2022-05-25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와 두 번째에 이어지는 글입니다. 오는 여름에 마지막 네 번째 글, “갱신을 위한 능력”이 발표될 예정입니다. [3-1] 부흥과 운동의 역사 [3-2] 새로운 운동의 필요 및 성립미국 교회는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어떻게 해야 교회의 생명과 사역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이에 답하기 위해 나는 앞서 개신교에 국한하여 교회의 쇠퇴를 바라보는 두 편의 글을 썼다. 그러나 가톨릭교회 또한 현재 쇠퇴에 직면해 있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앞선 글에 이어서 이번 글과 다음 글에서는 갱신과 새로운 성장을 향해 어떤 길이 가능한지, 그 방향을 제시하도록 하겠다. 기본적으로 우리에게는 그 무엇보다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부흥이 필요하다. 그리고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루실 부흥의 열매를 포착하기 위한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부흥과 운동의 역사여러 부흥들부흥은 위대한 영적 각성과 성장의 기간이다. 부흥을 통해 ‘졸고 있던’ 그리고 미지근한 그리스도인이 깨어나고, 명목상 교인이 회심하며, 회의적이던 많은 비신자가 믿음의 길에 들어선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1740년대, 1830년대, 그리고 1850년대 후반에 큰 부흥이 있었다. 뉴욕 시 남쪽에서 시작한 1857년 부흥은 종종 ‘풀턴 스트리트 부흥’(Fulton Street Revival)이라고 불린다. 한 설명에 따르면 약 2년 동안 맨해튼 인구의 약 10퍼센트가 개종하여 도시 내 교회에 등록했다. 1904년 웨일스 부흥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7.5퍼센트인 15만 명이 개종하여 개신교 교회에 들어온 것으로 추산된다.[1] 부흥을 좀 더 과거로부터 찾으려는 역사가는 유럽을 변화시킨 수도원 운동과 루터교 경건주의, 모라비안 운동까지 부흥에 포함시킨다. 최근 들어서 여러 지역의 국지적 부흥 운동 외에도 특히 동아프리카와 한국에서 대규모 부흥이 있었다. 여러 운동들교회 갱신의 시기를 설명할 때 종종 ‘부흥’과 ‘운동’이라는 용어는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그러나 영적으로 새롭게 됨과 기도의 능력을 체험함과 각성의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는 부흥이 운동으로 이어진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운동은 새로운 미래를 향한 공통된 비전으로 결속되어 특정한 변화에 전념하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이뤄진 자전(自傳, self-propagating) 단체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운동은 교회나 사회, 또는 둘 다에게 중대한 변화가 될 수 있다.역사를 통해 우리는 운동을 떠받친 영적 추진력을 부흥이 어떤 방식으로 제공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기록으로 가장 잘 보존된 하나가 웨슬리 부흥으로, 새로운 세계적 주요 교단이 된 감리교(Methodism)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이 부흥은 원래 초기 각성이 일어났을 때 가정에서 가졌던 소그룹이란 체계를 기반으로 하고 있었다. 웨슬리 부흥은 또한 복음주의 성공회인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에 큰 각성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18세기 중반 영국에서 일어난 복음주의 각성으로 인해 샤프츠베리 경(Lord Shaftesbury)이 주도한 아동노동금지법과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가 이끄는 노예제 폐지 운동과 같은 많은 사회개혁이 일어날 수 있었다. 부흥의 목적은 항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누리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에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가 되는 것이 부흥이다. 그리고 그런 부흥이 일어날 때면 비록 미미하더라도 불신자와 사회까지도 언제나 부흥의 영향력 안에 놓이게 된다. 윌리엄 블레어(William Blair)는 20세기 초 한국에 주재한 미국인 선교사였다. 1907년 1월 평양에서 열린 수양회에서 일어난 대부흥회에 참석한 그는 그 여파를 이렇게 설명한다. “그리스도인은 오순절의 불을 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 뜨거움은 모든 교회로 퍼져갔다. 통곡하며 죄를 회개하는 학생들 통에 학교는 며칠 동안 수업을 취소해야만 했다. 우리 선교사들은 지난 몇 년에 걸쳐 빼앗겼던 작은 물품과 돈을 다시 돌려받고는 회개와 감동으로 몇 번이고 마음을 찢는 기도를 했다. 도시 전체에서 사람들은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잘못을 자백했고, 훔친 재산을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다시 돌려주었다. 중국 상인 한 사람은 한 그리스도인이 몇 년 전에 내지 않았던 돈까지 포함한 거액의 돈을 지불하는 것에 크게 놀랐다. 온 도시가 들썩였고, 회개의 부르짖음이 온 도시를 뒤덮었다.”[2]부흥은 어떻게 일어나는가그러므로 위대한 교회 운동은 영적 부흥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면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많은 사람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모든 건 다 하나님께 달려있다.” 이 말에도 일리가 있다. 오직 하나님만이 부흥을 주신다. 부흥과 관련해서 유명한 기도를 담고 있는 시편 80편, 85편, 126편은 영적 갱신의 능력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한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부흥을 일으키기 위해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을 뿐이다. 그러나 반대로 교회가 정해진 적절한 방법으로 사역을 수행할 때마다 부흥이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야만 한다고 가르치는 정반대의 오류에 빠진 사람들도 있다. 로이드 존스(D. M. Lloyd-Jones)를 비롯해 균형 잡힌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시편에 담긴 부흥 기도는 생기를 불어넣으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갈구하고, 또한 부흥을 일으키려는 신자의 마음 자세와 실천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매우 강력한 칼뱅주의자인 로이드 존스는 부흥에 대한 강의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부흥으로 가는 길은 단지 ‘기도하자’라고만 해서 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당연히 기도해야 하고, 나는 기도를 특히 더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전제 조건이 따라옵니다.”[3]갱신을 준비하기 위해 그리스도인으로서 해야 할 일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갱신이 일어날지 아닐지의 여부와 그 방법은 오로지 하나님의 지혜로운 주권에 달려있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갈멜산에서 엘리야 선지자가 바알 선지자들과 대면하는 열왕기상 18장의 장면에서 우리는 갱신의 개념에 대한 적절한 은유를 찾을 수 있다. 제단을 쌓는 건 선지자이지만, 거기에 불을 붙일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다. 그러므로 부흥을 찾는 그리스도인이 할 일은 “제단을 쌓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을 통해 부흥의 불을 가져오시는 일에 자신의 노력을 사용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부흥의 궁극적 원인은 성령이지만, 또한 성령이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세 가지 도구적 수단(또는 이차적 원인)이 있다.첫째, 항상 복음의 회복이 있어야 한다. 인간 마음의 기본 양식은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자기 구원이며 공로를 의지하는 자기 의이다. 그리스도인은 이론적으로 “예수님이 나를 받아주셨기에 나는 선한 삶을 살고 싶다”라고 믿지만, 그들의 본심은 정반대이다. 실제로는 “나는 선한 삶을 살고 있으므로 예수님께서 나를 받아주실 것이다”라는 원칙에 따라 움직인다. 이러한 전도된 태도 빠진 그리스도인이 많은 것은 교만함, 방어적 태도, 비판적 정신, 인종적 편견과 문화적 자민족 중심주의, 변화에 대한 알레르기 및 기타 형태의 영적 죽음 때문이다. 부흥은 항상 은혜의 경이로움과 우리를 대신해 이루신 그리스도 구원의 근본적인 본질에 대한 재발견을 중심으로 일어난다. 그 결과는 언제나 즐거운 회개이며, 시종일관 부인하고 숨겨 왔던 허물과 죄까지 인정할 정도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용서의 감격이다. 둘째, 항상 합심 기도, 즉 비상하고, 하나님 나라 중심의 압도하는 기도가 있다. 이것은 일상적인 경건의 시간과 예배의 수준을 넘어선 기도이다. 할 수 있는 대로 평소에 함께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서 합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갱신을 동반하는 기도는 외적인 면에서도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내적인 부분에서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a) 내적: 죄를 고백하고 우리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을 아는 은혜를 구하는 것, 즉 그의 얼굴과 그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깊은 확신을 경험하는 것. (b) 외적: 잃어버린 자들에게 다가가기 위한 긍휼과 열정을 간구하는 것, 교회가 새로운 개종자와 함께 번성하고 성장하기를 기도하는 것. 사도행전 4장, 출애굽기 33장, 느헤미야 1장을 읽고 부흥을 위한 기도와 그 기도가 가져온 결과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라. 셋째, 부흥에는 항상 새로운 창의성이 있다. 똑같은 두 가지 부흥은 없다. 예를 들어, 웨슬리 부흥은 야외 집회를 포함한 순회 설교를 갱신의 기반으로 했다. 그러나 1857년 부흥은 평신도가 이끄는 기도 모임에 기반을 두었다. 각 세대마다 문화적 상황에 맞는 방식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몇 가지 새로운 방법이 등장한다. 최고의 기독교 운동은 영적 각성에서 발생하는 운동이며, 이런 운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필요하다. 우리 시대의 특징 중 하나가 교회가 정치로 인해 분열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의 진리, 특히 그리스도 복음이 가진 중심성으로 인해 느끼는 열정보다 정치적, 사회적 문제를 당면했을 때 훨씬 더 강렬한 열정과 감동을 받는다. 그들은 예배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이고 문화적 문제가 표방되는 곳에서 더 활발하게 행동하고 더 큰 감정을 느낀다. 이런 현실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적 공백이, 그러니까 공허함이 있다는 표시이다. 영적 갱신의 표시 중 하나는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렬한 확신, 더 많아진 하나님과의 교통함(요일 1:3), 그리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벧전 1:8)의 체험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추상적 개념에 대한 지적 동의 대신에, 하나님의 영은 우리의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화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이 얼마나 넓고 길고 높고 깊고 또 깊은지”를 “파악”하게 한다. 이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사랑에 관하여 아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실제로 아는 것이다(엡 3:16-19).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라는 직관적인 확신이 주어진다(롬 8:15-16). 영적 체험은 해일처럼 강할 때도 있다(행 4:31). 조용히 두려움을 사라지도록 하는 부드러운 비와 같을 때도 있다. 그러나 새롭게 된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받아들이지 단순히 보스나 더 나쁜 경우에는 폭군 또는 멀리 있는 권력으로 보지 않는다. 운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그럼 운동은 어떻게 일어나는가? 새로운 기독교 운동은 다음과 같은 경우에 성장하고 번성한다. (1) 운동에 대한 필요가 강렬하고 명확할 때. (2) 더 나은 미래를 위한 구체적이고 강력한 비전이 제시될 때. (3) 다양한 능력과 자산과 자원을 가진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 네트워크가 있으며, 그들이 공통의 목적과 가치를 위해 연합하고 희생적으로 일할 때. (4) 먼저 달성한 변화와 목표가 자연스럽게 다른 변화를 촉발하고 그에 따른 권한을 부여할 때. (5) 오랫동안 운동을 유지할 수 있는 새로운 기관이 시작될 때. (6) 반대하는 세력을 향해 지혜와 사랑으로 대응할 때. (7) 영적 갱신에 그 뿌리를 내리고 성장할 때. [주]1. Kathryn Teresa Long, The Revival of 1857-58: Interpreting an American Religious Awakening, Oxford University Press, 1998 및 J. Edwin Orr, The Flaming Tongue: Impact of 20th Century Revivals, Moody, 1973 참조.2. William Blair and Bruce Hunt, The Korean Pentecost and the Sufferings Which Followed, Banner of Truth, 1977, 87-88. 참조.3. D. M. Lloyd-Jones, Revival, Crossway, 1987, 43. 참조.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3-The Path to Renewal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부흥
부흥운동
교회갱신
영적각성
영적갱신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by 정민영
2022-05-24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이 때로부터ㅤ예수ㅤ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나타내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항변하여 이르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께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ㅤ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인자가ㅤ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 마태복음 16:21-27.목적이 이끄는 교회교회란 하나님께서 부르신 공동체로서 그 자체가 목적론적 사명을 가진 공동체라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아무 이유 없이 불러내셨을 리 없기 때문에 반드시 불러내신 어떤 목적이 있기 마련이다. 목적이 이끄는 삶이란 베스트셀러로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미국의 목회자 릭 워렌은 이 책에 앞서 목적이 이끄는 교회란 책을 썼다. 워렌의 이 책 제목 자체가 교회란 하나님께서 어떤 특정 목적을 위해 부르신 공동체란 의미를 나타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앞의 글에서는 교회의 교회됨으로서의 존재론적 정체성을 다뤘다면, 오늘은 교회가 무엇을 행해야 하는지에 대한 목적론적 사명을 다루고자 한다.반복되는 개념이지만, ‘참 생명’이란 단순히 육체에 호흡이 붙어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생명’이란 한자 단어가 ‘살아있음’(生)과 ‘사명’(命)의 조합이란 사실이 흥미롭다. 목적론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사명에 부합한 삶을 ‘참 생명’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따라서 복음을 말할 때 “예수-천당”처럼 이 땅에서의 현재적 맥락과 무관하게 단순히 교회가 종말적으로 누리게 될 막연한 특권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만일 이게 맞는다면 도대체 우리는 왜 예수님을 믿는 즉시 ‘천당’으로 가지 않고 이 고해(苦海)와 같은 세상에서 불완전한 모습으로 계속 존재해야 하는 것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고통스런 세상에서 낙심하지 않고 끝까지 버티다 보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것이고, 그때 천당에 입성한다는 현실 도피적, 탈세적, 염세적, 배타적 종교로 마치 예수-천당의 도식으로 천국을 영적인 디즈니랜드 식으로 정의해서는 안 된다. 그런 관점으로는 교회의 사명을 논할 수 없다.우리는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라는 정체성에 “합당하게”(엡 4:1) 생명을 나누는 선교적 공동체로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것이다. 여기서 ‘합당하게’라는 부사는 바울이 자주 쓰는 말로, 정확하게는 하나님께서 교회에 사명을 주신 것 때문에 그에 부합하게 생명을 주셨다는 뜻이다. 현 세상에서 잠시 머무는 한시성은 기독교 시간관의 특징이다. 비기독교 세계관은 언제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세상이 막연히 한없이 지속된다는 단선적 또는 윤회적 시간관을 갖는 반면, 기독교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만물의 처음과 끝이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때가 되면 종말이 온다고 가르친다. 이생의 한시성이란 우리를 이 세상에 잠시 머무는 체류자, 거류민, 순례자 등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이생의 삶 자체가 목적 지향성을 가진 것을 드러낸다. 즉, 세상에서의 목적을 이루면 세상의 끝이 온다는 말이다. 그래서 영어의 ‘end’는 끝이란 뜻과 동시에 목적이란 의미를 갖는다. 내가 섬긴 국제위클리프(Wycliffe Global Alliance)의 정관에 “목적 선언문”이라는 게 있다. 영어로 “엔드-스테이트먼트”(End Statement)라 하여 목적을 지향한다는 의미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세계관이 가지고 있는 시간관을 이해하고 전제한 맥락이 틀림없다.이와 더불어, 우리는 교회가 단순한 종교소비자 집단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오늘날 안타깝게도 교회가 종교소비자로 비쳐지는 모습이 강하지만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주신 목적론적 사명을 깨닫는다면 결코 그런 모습으로 살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기독교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이 땅에서의 삶을 대박 나는 삶으로 보장해 주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주님을 만나 목적 있는 삶을 살게 되었다는 것 자체가 진정한 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따라서 우리는 이 땅에서 한시적으로 하나님께서 맡겨 주신 목적을 이루는 사명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다. 이 땅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삶의 전부라면 그건 기독교 복음과 매우 동떨어진 세계관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아이러니하게도 예수-천당이라는 단순한 내세 지향적 종말론의 몰역사가 만들어낸 필연적인 귀결이기도 하다. 현세적 삶의 축복을 강조하거나 내세 지향적 종말론은 모두 교회 공동체의 목적론적 사명을 망각하고 개체주의적 욕망을 강조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다.선교적 증거 공동체앞의 글에서 교회로 하여금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를 가능케 하는 것으로서 사랑을 생각했다. 바울은 사랑에 대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not self-seeking, 고전 13:5) 되레 자기를 내주는(self-giving) 이타적 삶이라 정의한다. 이기적 특혜론이 아닌 이타적 사명론으로 교회를 이해한다. 하나님이야말로 세상에 대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실 수 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세상을 위해 자기를 내주심으로 진정한 사랑의 본질을 몸소 실천하셨다. 바울은 생명 공동체로서 교회가 하나님의 이타적 사랑을 본받아 세상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고 십자가 신학과 연결해서 풀어낸다. 여기서 바울은 생명 공동체로서 교회를 선교적 증거 공동체와 연결하는데, 교회의 존재와 사명이 세상에서 생명의 증거와 관련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 공동체는 예수의 십자가 신학을 본받아 이 땅에서 사랑을 실천하는 것이 곧 교회의 선교적 사명이자 목적인 것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께서 자기 생명을 세상을 위해 내주신 사랑을 교회가 본받아 따름으로 생명 공동체로서 살아갈 뿐 아니라 세상에 대해 선교적 증거의 사명을 수행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선교적 공동체로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집단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선교적’(missional)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을 향해 이타적 사명 또는 임무를 수행하는 공동체란 의미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위해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주신 것처럼,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도 이타적 증거 공동체로 부름 받았다. 따라서 교회는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특혜 집단이 아니라, 열려 있고 수용적이며 확장되는 선교적 공동체다.오래 전 우리부부가 사역했던 인도네시아의 공용어(마인어)에는 ‘우리’란 단어가 둘이다. 하나는 배타적 우리(kami)이고, 다른 하나는 포괄적 우리(kita)다. 그에 의하면, 교회는 배타적인 내부지향적 집단(kami)이 아니라 외부로 향해 열린 공동체(kita)다. 역사적 교회가 사도신경을 통해 고백해 온 교회론 역시 “거룩한 공교회”(the holy universal church), 곧 예수님의 대제사장의 기도에 나타난 선교적 교회론과 일치한다.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요 17:20, 새번역). 선교란 교회가 하는 어떤 일이 아니라, 교회가 교회되는 여정이다.신학자 마이클 프로스트(Michael Frost)는 선교적 교회론을 문화인류학의 ‘커뮤니타스’(communitas)란 개념을 빌려 설명한다. 원래 커뮤니타스는 신성한 종교적 의례를 위해 모인 공동체에 사용된 말인데, 성년식 같은 통과의례에 등장한다. 이를 테면 미성년에서 성년으로 넘어가는 불확실하고 불안한 전환기에 공동체가 함께 모여 어깨를 맞대줌으로 넉넉히 감당하도록 도와준다는 개념이다. 고통스럽고 불안한 세상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가 어깨를 맞대주는 선교적 교회가 절실히 요청된다. 세상에서 인생이라는 긴 여정에서 위기를 경험할 때 순례길에 나서 고난의 여정을 통한 위로를 경험하는 또 다른 예로 최근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부쩍 각광을 받는 스페인의 성 야고보 순례길(el camino de Santiago)을 들 수 있다. 프랑스와 스페인의 접경지며 피레네 산맥의 고도(古都) 생장(Saint Jean)에서 시작하여 대서양 가까운 산티아고까지 약 850킬로미터의 긴 여정을 걸으며 순례자들은 자기 인생 여정의 질곡을 복기하고 반추하며 문제를 해결할 새로운 생명의 의지를 가다듬거나 위로를 경험하는 유익을 얻는다. 원래는 세상에서의 삶의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나 그 밖의 가정에서 일상의 커뮤니타스를 경험해야 하지만, 요즘은 유행에 민감한 우리나라 사람들도 마치 관광을 가듯이 줄지어 순례길로 떠나는 사람들이 많을 뿐더러 심지어 방송으로 연예인이 알베르게(숙식 장소)를 운영하기까지 하다 보니 현지인들이 왜 순례자들이 아닌 관광객들이 몰려오느냐고 푸념하기까지 한다.성경이 말하는 교회는 무엇인가? 교회는 안전지대로 도피해서 저쪽 다른 곳에서 멸망하는 세상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의 모임이 아니라, 세상과 동행하며 고난에 동참하는 순례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여기서 교회의 정체성을 확인해 주는 용어가 동행과 동참이다. 바울이 로마서의 교회론 문맥에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고 말하는 이유와 같다. 이것이 순례자가 해야 할 삶의 실천이다.정리하면, 교회는 배타적 특권을 누리는 종교 집단이 아니라, 세상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신뢰의 관계를 쌓으며 그리스도께 안내하는 선교 공동체라는 점이다. 관계가 배제된 채 길가는 사람을 붙잡고 일방통행으로 인쇄된 전도지를 나눠주며 귀찮게 하는 포교 행위를 교회의 전도와 선교의 사명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서 어긋난다. 그 대신 세상에서 함께 살면서 점점 가까워지고 교제하면서 신뢰가 형성이 됨에 따라 삶을 나누고 서로의 가치관과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공유하는 것이 적절한 교회의 자세일 것이다. 그럴 때 신앙의 본질이 관계임을 알게 된다. 상대가 무신론자이든 아니든 일단 관계가 형성된 사이가 되면 서로의 문제에 대해 방관할 수 없게 된다. 서로의 아픈 경험이나 상처받은 마음을 위로하고 어루만져 주는 참여자로 동행하는 입장이 되기 때문이다.이런 사실에만 비춰도 오늘날 우리 교회 공동체가 성도들끼리 서로 어떤 삶의 모습으로 나눠야 할지가 선명하게 떠오르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도피적이고 염세적인 종교적 게토에 은둔하지도 말고, 세상을 종교화하겠다는 극단적이고 빗나간 광신주의에 빠지지도 말아야 하는데, 이들은 모두 성경이 말하는 교회론에 깊이 들어가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부작용이다. 예수님의 중보기도에 나타난 바른 교회론(요한복음 17장)을 따라 그분이 “있게 하신 자리”인 세상 속으로 들어가되(요 17:18), 세상과 구별된 회심한 가치를 통해 세상을 구하는 선교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세상의 가치와 대조되는 회심한 가치는 본문의 십자가 신학으로 우리를 이끈다.십자가 신학세상에 있되 세상과 다른, 또는 세상에 살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은(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 가치관과 삶은 십자가 신학이라는 핵심적 가르침으로 집약된다. 500년 전 개혁자들이 회복한 십자가 신학(theologia crucis)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제자도의 정점이다. 마태복음 4장에서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제자들을 부르셨고, 이어지는 산상수훈(5-7장)은 제자도 메시지에 해당하는데, 그 이후 지속된 제자들의 학습 여정이 나오는 그 정점에 오늘 본문이 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베드로의 바른 신앙고백(16절) 위에 주님의 교회를 세우겠다 선언하시고(18절) 비로소 복음의 정수인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처음으로 말씀하신 것이다(21절).본문에 전개되는 베드로의 사례를 통해 우리는 신앙고백과 실존 사이의 큰 간격을 깨닫는다. 올바른 신앙고백을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지만, 고백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나아가야 한다. 예수님이 누구신가에 대한 정확한 신앙고백을 통해 엄청난 칭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세상 종교나 권력자와 다른 그분의 방식 곧 십자의 도를 이해하지 못하고 되레 방해하여 예수님께 극심한 질책을 받는다(22-23절). 소위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십자가의 역설성에 넘어지는 상황에 처하여 자기 생애에서 가장 극단적인 열탕과 냉탕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바로 앞에서 엄청난 신앙고백을 했다고 하여 가장 큰 칭찬을 받았던 그가 곧 바로 칭찬의 흥분이 채 가시기도 전에 “사탄아 썩 물러가라”는 가장 심각한 비난을 듣게 되었다.사실 복음이란 말뜻을 오해하면 의외로 당혹한 결과를 초래할 수가 있다. 복음이 가지는 십자가의 역설을 단순한 세상적 축복이나 물질적 이해로 접근할 때 사정없이 넘어지게 될 수가 있다. 예수님은 산상수훈의 다른 문맥에서 “좁은 문”(마 7:13-14)이란 은유로도 설명하셨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신학이 가지는 신비로운 하나님의 설계인데,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복음이 되레 우리를 넘어뜨리는 거침돌(“거리끼는 것” 고전 1:23)이 될 뿐 아니라, 베드로의 경우처럼 우리가 주님을 “넘어지게” 만들어버린다(23절). 십자가라는 죽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이 곧 생명을 얻는 길이라는 사실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어려운지는 충분히 상상할 수 있기도 하다. 복음은 진정 달콤한 것이지만, 거기까지 이르는 십자가의 여정은 쓰라리기 짝이 없다는 걸 알아야 한다. 결국 우리의 신앙과 삶의 모든 것은 십자가의 이해가 판별한다는 사실만이 중요한 기준이다. 이 점에서 오늘 우리가 속한 교회 공동체가 과연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지, 아니면 주님을 넘어지게 하는지, 십자가 신학의 기준으로 돌아봐야 할 것이다. 다만 우리가 심히 염려스러운 것은 성경 역사와 교회 역사를 볼 때 신성모독은 무신론자나 타종교인이 아닌 우리(제도 교회)가 해 왔다는 사실이다. “베드로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본문은 두 가지 다른 “목숨”을 다룬다. 생명을 말씀하신 것이다. 현세의 한시적 목숨과 영원한 참 생명(영생)이 그것이다. 두 개념을 구분해서 각각 다른 단어로 기록한 헬라어 사본도 있다. 제자도는 이생의 한시적 목숨을 영원한 참 생명에 투자하는 십자가 신학으로 정의할 수 있겠는데, 이는 회심한 가치관에 근거한 사명론인 셈이다. 이순신 장군이 한산대첩을 앞두고 외쳤다는 메시지 “죽고자 하는 자는 살 것이요 살고자 하는 자는 죽게 되리라”(必死卽生 必生卽死)를 연상시키는 십자가 신학을 예수님은 밀알의 비유(요 12:24-25)로도 설명하셨다. 이생의 생명을 가볍게 다루거나 함부로 버리라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한시적 삶에 진정한 투자가치를 부여하는 “목적이 이끄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어차피 이생은 한시적이고 모두가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후에는 이생을 무엇에 어떻게 투자했는지 주께서 심판하실 것이다(히 9:27). 본문 마지막 절의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은 행위 구원을 의미하는 게 아니라, 진정으로 자신과 세상을 위하는 선교적 삶을 살았는지 여부를 가리킨다. 따라서 제자도는 특혜 집단과 대조되는 선교적 공동체를 지향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제자도는, 그분이 자기를 비워 십자가를 지신 것처럼, 자발적으로 자기 권리를 내려놓고(“자기를 부인하고” 24절) 세상을 위해 선제적으로 위험부담을 끌어안는(“자기 십자가를 지고” 24절) 커뮤니타스의 길이다. 허세를 부리라는 게 아니라, 진짜를 가진 자의 진정한 여유를 말한다.여기서 우리는 역동적인 십자가 신학을 만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가진다. 그분이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신 대속적 은혜는 아무도 가감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고유 영역이다. 동시에, 성부께서 성자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주님은 이제 우리를 세상에 보내셔서(요 17:18; 20:21) 그분처럼 자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축복하는 선교적 사명을 감당하라고 명하신다. 초림이 아닌 재림을 대망하는 교회는 과거지향적 박물관에 십자가를 가둬두지 말고, 각각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분을 따르는 제자의 길을 뚜벅뚜벅 걸어가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영(성령)을 보내시고 그분의 몸(교회)을 통해 재림을 준비하고 계시기 때문이다.우리 교회는 과연 커뮤니타스의 공동체인가?커뮤니타스는 특히 위기상황에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코로나 시대는 현대 교회의 진정성 여부를 검증할 적절한 기회다. 역병이나 전쟁, 자연재해 등 재난에 대한 교회의 반응은 그 시대의 신학을 반영한다. 안타깝게도 역사적 교회는 재난이 발생할 때 책임을 전가할 희생양을 지목하고 근거 없는 마녀사냥을 저지르곤 했다. 코로나 팬데믹은 도대체 누구 죄 때문에 발생한 천벌일까?신학자 톰 라이트(N. T. Wright)는 하나님과 팬데믹(God and the Pandemic)에서,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이 누구 탓이냐는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요 9:1-4)을 인용한다.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고통 받는 소경을 통해 하나님의 일이 어떻게 드러날 수 있을까? 우리에게 나사렛 선언문으로 알려진 메시아의 사명선언문에 그 해답이 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코로나19 같은 전염병이 생길 때 그 원인에 대해 세상이 주목하면서 특정 집단의 잘못 때문에 세상이 고통 받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르네 지라르(Rene Girard)가 말하듯이, 전염병과 같은 사회적 격변 현상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면 누군가를 반드시 희생양으로 삼아 책임을 전가해야만 사회적으로 새로운 에너지를 집적하여 새출발을 꾀할 수 있다고 여기는 광기어린 심리적 기재가 있다. 일명 “희생양 메카니즘”이다. 그러나 그렇게 책임을 지게 만들 전염병의 원인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그런데도 일각의 교회는 이런 일이 생길 때마다 종교적 무당 역할을 자청하여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는 데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2천년 역사에서 교회가 세상의 어떤 타종교 집단을 향해 손가락질 하는 데 얼마나 익숙한지 모른다.하지만, 성경에서 예수님이 대응하신 기준에 따라 생각해 보건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바로 인간의 죄가 근본 원인이다. 타락 이후 세상은 죄의 결과로 항상 고통스러웠고 암울했다. 태어날 때부터 맹인인 이유는 그의 죄나 부모의 죄 때문이 아니라, 죄로 인해 고통 받는 세상의 질고로 인해 생긴 것이지만, 하나님의 일(역사)로 인해 영광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거기에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이유가 있다. 온갖 신음으로 고통 받고 저주받는 세상을 축복으로 바꾸시기 위한 “하나님의 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으며, 지금도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 그 일을 계속 행하기 원하신다. “때가 아직 낮이매 나를 보내신 이의 일을 우리가 하여야 하리라”(요 9:4).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세상은 모든 것을 금으로 바꾼다는 미다스의 손이 필요한 게 아니라, 저주를 축복으로 바꾸는 교회의 섬김의 손길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다. 교회가 이 일을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고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요즘 같이 전염병이 창궐하여 어려운 시절 경제적으로 무너진 수많은 사람들이 신음하고 있을 때,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로 인해 부를 축적하거나 건물을 소유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를 희생하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다면 그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될 수 있겠는가! 조물주 아래 건물주가 있다는 우스갯말이 나오는 현실에서 주변을 살피고 손을 내밀어 도움을 베푼다면 공동체적 커뮤니타스의 손길이 되어 이웃을 섬기는 진정한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나 다름없다 하겠다.많은 사람들이 좋아하고 암송하는 로마서 8:28을 선교적으로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 대부분의 성경은 교회를 수혜자로 보는 번역을 선택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당연히 우리도 하늘 복의 수혜자다. 그러나 복음은 처음부터 항상 선교적이었다. 복음의 원형인 언약은 아브람과 후손을 부르신 하나님의 의도가 그들을 포함한 열방의 축복에 있었음을 분명히 밝힌다(창 12:1-2). 문제는 유대인들뿐 아니라 현대 교회를 포함한 역사적 교회가 종종 자신들을 배타적 수혜자로 복음을 뒤튼 데 있다. 현재의 로마서 8:28 역본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 ‘모든 것’(panta)은 복수형이므로 ‘합력하여’(synergei)란 단수형 동사의 주어가 될 수 없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모든 것’이 주어로 번역돼 있다. 앞뒤 문맥으로 볼 때 주어는 하나님이시다. 둘째, ‘합력하여’(synergei)란 동사는 함께할 파트너를 요구하는데, 개역개정 성경은 협력 파트너를 적시하지 않고 ‘모든 것’이 스스로 협력한다는 어색한 번역이다. 결국 현재의 역본에서 교회, 즉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모든 것이 선하게 이뤄진 결과를 누리는 수혜자가 된다. 바울의 의도가 그랬다면, ‘함께’(syn)란 접두사를 뺀 동사(ergei)를 사용하는 게 더 자연스러웠을 것이다. 그 경우, 죄로 인해 고통 받고 뒤틀린 세상과는 달리, 하나님이 부르신 교회 공동체 즉 성도들에게는 모든 것이 선하게 작동한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협력 파트너를 요구하는 동사(synergei)를 고려하고 세상을 축복하는 선교적 사명을 생각할 때, 아무래도 하나님께서 교회와 협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해석이 더 자연스럽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합력하여 모든 것을 선하게 만드신다.” 하나님께서 우리 도움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교회를 영광스러운 그리스도의 몸으로 부르시고 그분의 위대한 일에 동참하도록 초청하신 사실이 놀랍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동역자들(synergoi)”(고전 3:9)이라고 선언한 것이다.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드러날 수 있을까? 코로나로 고통 받는 세상에 어떻게 교회가 축복의 통로가 될 수 있을까? 바로 커뮤니타스의 기능을 회복할 때 가능하다. 이 세상이라는 순례의 여정에서 교회가 세상과 ‘더불어’ 순례의 동반자임을 깨닫고,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진정한 커뮤니타스를 회복할 때 가능하다. 우리 교회가 가정과 세상의 커뮤니타스를 진정으로 회복되길 소망한다.
목적이이끄는교회
목적론적사명공동체
선교적증거공동체
십자가신학
커뮤니타스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by 정민영
2022-05-23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 안에서 갇힌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여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에베소서 4:1-3.질문이 요구하는 묵상과 성찰우리는 계속해서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라는 큰 주제를 통합적으로 다루고 있는 중이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는 우리 신앙의 본질과 맞닿아 있는 아주 중요한 주제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이 주제를 다루면서 우리는 일련의 질문들을 던져 왔다. “내 사고방식은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향하는가?” “내 삶은 교회와 세상을 어떻게 향하는가?”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질문은 묵상과 성찰을 요구하고, 그 여정을 통과해야 비로소 깨달음과 분별력에 도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런 일련의 질문들은 매우 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아쉽게도 우리 한국식 교육은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보다는 정답을 주려는 사지 (또는 오지) 선다형 문제에 너무 익숙하며. 또한 그래서 성찰을 요구하는 질문을 교육적으로나 신앙적으로 매우 위험한 접근이라 여긴다. 그러나 질문을 통한 사유와 반성의 접근 방식은 예수님의 교수법과 일치한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질문에 속 시원한 정답을 주시기보다, 되레 반문을 던지심으로 질문자의 사색과 반추를 자극하시곤 했다. 나는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란 동영상을 종종 시청한다. 나와는 다른 신앙을 가진 분이지만 그분의 해박한 지식과 예리한 통찰력에 감탄하곤 한다. 아주 어렵고 복잡한 삶의 문제를 대단한 순발력으로 즉각 답해 준다. 그런데 한 가지, 예수님은 왜 법륜스님처럼 명쾌한 정답을 주시지 않은 걸까? 권성찬 선교사가 앞서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서 설명했듯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처럼 목적어로 묻는 율법사에게 그냥 답해주시면 될 텐데, 되레 반문을 하고 계신다. 물론 예수님이 법륜스님보다 지식과 지혜가 부족해서 그러신 건 아니다. 정답을 주입하기보다 질문을 통해, 사유의 과정을 통해 스스로 깨달음을 얻으라는 그분의 교수법 때문이다.사실 불교의 가르침도 단답형 정답을 제시하는 방식은 아니다. 선불교의 가르침에 견월망지(見月忘指)라는 사자성어가 있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지 말고 달을 보라는 의미다. 그리 어려운 얘기가 아니다. 성경을 묵상한다는 것은 단순한 성경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그 지식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터득하는 일이다. 율법주의의 문제가 바로 여기 있다. 율법이란 형식이 담아내는 내용이 중요한데, 형식을 금과옥조처럼 붙드는 게 율법주의의 오류다. 율법은 궁극적으로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손가락인 셈이다.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하는 성경읽기나 성경공부라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에 대한 답은 자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율법이 우리를ㅤ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갈 3:24)라 말했고, 신약학자 스캇 맥나이트는 예수 신경(The Jesus Creed)에서 율법의 문구(letter of the law) 아닌 율법의 정신(spirit of the law)을 깨달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예수님이 왜 그토록 심하게 율법주의를 책망하셨는지 이해가 된다. “화 있을진저,ㅤ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ㅤ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마 23:23)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라는 율법의 문구가 담아내는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이란 본질을 붙들었어야 하는 거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언택트’ 시대에 공예배를 사수하는 게 마치 신앙의 본질인양 고집하다가 복음의 공공선은 고사하고 되레 세상에 피해를 주는 민폐 집단으로 전락하는 게 사랑과 공의의 하나님을 대변하고 증언하는 방식인지 되돌아봐야 할 때이다. 따라서 성경을 단순히 정답 찾기 백과사전처럼 다뤄서는 안 되고, 그 방대한 계시가 담아내는 메시지를 궁구하는 깊고 긴 사색의 여정을 떠나야 한다. 시편 기자가 “여호와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되다”고 한 이유다(시 1:2). 사색의 여정은 사라지고 즉각적 정보 검색만 남은 이 시대가 염려된다. 수(數)의 원리를 깨우치기보다, 정답 찾는 공식만 달달 외워 대입하는 입시 위주 수학 교육과 유사한 문제 때문이다.“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은 500년 전 종교개혁 시대에 회자되던 “교회 밖에 구원이 있는가?”란 질문을 뒤집은 형태지만 본질적으로 동일한 질문이다. 개혁 시대뿐 아니라 2천년 교회 역사에 반복적으로 던져진 기시감이 드는 질문이기도 하다. 요즘 소위 “가나안 교인”으로 풍자되는 무교회주의 흐름도 망가진 제도 교회에 대한 절망감이 엿보이는 슬픈 현상이다. 문제의 핵심은 제도 교회에 있지 세상에 있는 게 아니다.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의 문제인 거다. 가끔 세상이 악해져서 전도하기 힘들고 선교하기 힘들다는 얘기를 들을 때가 있다. 하지만 그건 잘못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새삼스럽게 더 악한 게 문제가 아니란 말이다. 언제 세상이 선한 때가 있었던가? 타락 이래 세상은 줄곧 악했다. 진짜 문제는 세상이 깜깜해서가 아니라 우리 교회가 소금과 빛이 아닌 데 있다. 깜깜한 세상의 빛이자 부패한 세상의 소금이어야 할 교회가 망가진 게 절망인 거다. 그러니 손가락을 밖을 향해 뻗는 것은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건강하게 풀어 가는 해법이 아니다.이 시대 교회의 모습으로부터 세상은 생명을 기대할 수 있을까? 인간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여기 언급된 ‘생명’이란 단순히 육신에 호흡이 붙어 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런 생물학적 생명이라면 굳이 교회의 역할을 논할 필요는 없다. 세상은 둘째 치고, 성경이 정의하는 ‘참 생명’을 제도 교회는 바로 이해하고 진실 되게 추구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에게 정말 생명이 있는 것일까? 생명이 생명을 낳는 법이다. 우리가 신천지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한다면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겉모양이 같다고 해서 모든 계란이 병아리를 부화시킬 수 있는 게 아닌 것과 유사하다. 무정란은 생명을 낳을 수 없고 유정란이라야 병아리의 탄생을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이번 글과 다음 글, 두 번의 메시지를 통해 (1) 교회가 참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life-abiding community)인지 자문하고, (2) 생명을 나누는 공동체(life-giving community)의 본질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것을 질문 형태로 바꿔본다면, 우리가 어떤 존재라야 생명이 있다고 말할 수 있고, 세상이 우리에게 생명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라는 선결 요건이 만족되어야 비로소 생명을 나눌 가능성을 거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 메시지는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다룬 교회의 존재론을 다룰 수밖에 없고, 내일 나누게 될 두 번째 메시지는 교회의 사명론을 다루는 셈이다.바울의 교회론: 생명 안에 거하는 공동체에베소서는 바울이 교회론을 본격적으로 다룬 서신이다. 대부분의 바울 서신은 특정 상황에 대한 반응으로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는 은혜의 복음을 떠나 율법적 종교로 후퇴하려는 공동체를 되돌리려는 의도로 썼고, 고린도서는 교회의 내분과 부도덕을 바로잡으려는 의도로 기록했다. 그런데 에베소서는 상황적 대응이 아니라, 영광스럽고 신비한 교회의 비밀을 깊이 묵상하며 서술한 바울의 대표적 교회론이라는 게 여러 신학자들의 중론이다. 다른 서신들처럼 에베소서에도 바울의 글쓰기 특징이 잘 드러난다. 바울은 전반부에서 핵심 주제를 심도 있게 설명한 후 “그러므로”라는 접속사와 함께 독자의 반응과 순종을 요청하는 적용 단계로 넘어가곤 하는데, 에베소서 4:1-3은 바로 그 후반부 초입이다. 본문이 정의하는 교회의 교회됨, 또는 교회의 교회다움을 주목해 보자. 1절의 헬라어 원문에는 일종의 언어유희가 있는데, 이는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소멸되기 쉬운 요소다. 성경을 번역하는 단체에서 일한 경험으로 볼 때, 성경 언어를 번역할 때 최선을 다하지만 어떤 때는 피할 수 없는 의미의 손실이 있을 때가 있다. 이를 테면 기름을 병에서 다른 그릇으로 옮기려 할 때 100퍼센트 다 옮기기란 불가능하다. 아무리 기름을 긁어 옮기려 해도 기름이 병에 얼마간 묻어 있을 수밖에 없다. 바로 1절 말씀이 그런 것 같다. 개역개정 성경이 “부르심을 받은 일”(1절)로 번역한 원문을 문자적으로 옮기면 “(너희를) 불러내신 부르심”인데, 소위 ‘동족목적어’(예컨대 ‘꿈을 꾸다’도 동족목적어가 사용된 표현이다)라는 기법을 사용해서 의미를 한층 강화시킨다. 교회는 부르심을 받은 백성들의 모임인데, 그 부르심을 위해 우리를 불러내셨다는 것이다. 교회와 부르심(召命)이 개념적으로 겹치고 있음을 강조한다. 교회(헬라어 ek-klesia)와 부르심(헬라어 klesis)은 동의어다. ‘부르심’에 전치사(ek)가 붙어 ‘불러내심’이란 문자적 의미를 가진 단어가 곧 교회다. 본문은 부르심이란 명사를 목적어로 하는 동사 ‘불러냈다’(eklethete)를 잇대어 사용함으로써 교회가 특정 목적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사명 공동체임을 강조한다.바울은 1절에서 교회의 교회다움은 무엇일까를 묵상하면서 이런 표현을 통해 강조한다. 그리고 그 영광스러운 부르심에 “합당하게” 존재하는 교회를 3절에서는 “성령 안에서 하나된 샬롬 공동체”로 정의한다. 그 사이의 2절에서는 하나됨을 가능케 하는 공동체의 사랑이라는 자질을 말하는데, 그가 이미 고린도전서 13장이 설명하는 사랑이라는 자질과 겹치는 공동체적 본질이다. 여기서 우리는 성경이 말하는 참 생명이란, 개체적 생명을 강조하는 신자유주의 시대정신과 대조되는 가치의 “공동체적인 생명”임을 깨닫는다. 바울이 교회의 교회다움을 말하는 내용이 얼마나 풍요로운지를 우리가 묵상하면서 이해할 때 그의 공동체적 본질의 강조를 깨닫게 되는데, 우리는 세상이 뭐라고 공격할지라도, 심지어 좌파적 사회주의라는 동떨어진 오해와 비난을 받을지라도 교회의 본질이 공동체적이라는 것만큼은 결코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만일 교회가 이 공동체성을 포기한다면 교회는 존재의 근거가 해체된 것이나 같기 때문이다.공동체 생명을 유추할 성경적 근거는 창세기의 인간 창조로 거슬러간다. 공동체이신 삼위 하나님께서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자”(창 1:26)고 합의하셨으며, 이어지는 말씀은 “하나님이 자기ㅤ형상ㅤ곧ㅤ하나님의ㅤ형상대로 사람을ㅤ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ㅤ창조”(창 1:27)하셨다고 기록한다.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것은 공동체의 유기적 다양성을 보여주는데, 신약 교회론의 기초이자 혈연 관계 이전의 원초적 공동체성을 가리키는 셈이다. 하나님 자신 역시 개체로 계시지 않고 공동체로 계신다. 공동체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음은 세상 학문도 인정하는 사실이고, 인간(人間)이란 한자 단어가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의미한다는 게 새삼 놀랍다. 하나님께서 최초의 가정을 만드신 이유도 사람이 독처하는 것이 창조 섭리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결혼 제도와 가정도 혈연보다 공동체성에 강조점이 있다. 결혼 유무를 떠나 인간은 상호의존적 공동체로 존재해야 한다는 의미다. 독신자도 괜히 의문의 일패를 당할 필요 없이 그 자체로 공동체적임을 알아야 한다. 예수님도 결혼하지 않은 독신이었지만, 항상 신앙 공동체의 유기적 일원으로 사셨다. 바울도 결혼하지 않았지만 항상 공동체 안에 있었다. 주님은 심지어 혈연보다 “누구든지ㅤ하늘에 계신 내ㅤ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ㅤ형제요 자매요 어머니”(마 12:50)라고 선언하셨다. ‘가정’에 해당하는 헬라어 단어(oikos)가 성경 문맥에 따라 가정이나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고, 때로는 상호교호적으로 사용되는 이유다. 가정이나 교회는 바울이 흡사 같은 개념으로 말하기 때문에 구분할 필요조차 없다.결혼이나 혈연 유무를 떠나 공동체로 존재하는 게 인간창조의 원리다. 인간 존재의 최소 단위는 개인이 아닌 공동체다. 마치 형질의 특성이 훼손되지 않고 보존되는 최소 단위가 원자 아닌 분자인 것과 유사한 개념이다. 분자를 깨서 원자들로 나누는 순간 고유 형질이 사라진다. 죄는 공동체를 깨뜨렸다. 신자유주의는 타락의 필연적 결과다. 교회는 개체들의 집합체가 아니라 공동체가 모인 공동체이다. 삼위 하나님이 서로를 향해 함께 하나님이신 것과 마찬가지다. 그래서 바울은 교회론을 말하면서 미스터리라는 말을 쓴다.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공동체성을 파괴한 죄의 결과를 우리는 가인과 아벨의 비극이나 바벨탑 사건을 통해 생생하게 듣는다. “예수-천당”이란 말은 이 점에서 너무 단편적이다. 구원의 대하드라마를 단순화시키고 진정한 하나님의 만유의 공동체성의 회복에 대한 오해이기 쉽기 때문에 기독교 자체를 단편화시킬 뿐 아니라 종교화하고 만다. 공동체를 해체하는 죄로부터 필연적으로 공동체의 회복하는 구원, 즉 깨어진 관계의 화해를 말하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의 본질이고, 바울이 말하는 회복된 공동체로서의 교회론이다. 세상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는데, 죄성이 만들어낸 개인주의적인 죄의 결과로 치닫는 상황이지만, 하나님은 이를 회복하기 위해 공동체적인 처방으로 교회에 공동체적 생명을 공급해 주셨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의’가 관계 개념인 이유다. 따라서 성경적 교회론은 필연적으로 공동체 회복의 구원론에 기초한다.에베소서 전반부에서 바울은 원수 되어 막혔던 인간관계의 담장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허시고 해체된 공동체를 회복하셨다고 말한다(엡 2:11-19). 따라서 교회는 회복된 공동체의 본보기여야 마땅하고, 그럴 때에야 비로소 세상에 생명의 소망을 던져줄 수 있다. 안타깝게도 교회 역사는 성경이 정의하는 교회의 모습을 자주 보여주지 못한다. “원래 팔레스타인에서 기독교는 회복된 관계로 시작되었는데, 그리스로 가서 철학이 되고, 로마로 가서 제도가 되더니, 미국으로 건너가서 사업체가 되고 말았다”는 리처드 핼버슨(Richard C. Halverson)의 탄식이 공감되는 지점이다. 삼위 하나님의 교제에 동참하는 신적 공동체본문이 가르치는 교회의 하나됨은 단순히 서로 싸우지 말고 화목하라는 윤리 도덕적 덕담 차원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공동체 수준으로 그 질을 끌어올린다. 그저 단순히 싸우지 말고 오순도순 살아가라는 그런 덕담 정도의 대상이 교회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재직들끼리 또는 가정에서 부부나 형제나 친척들끼리 사이좋게 지내라는 그런 윤리 도덕적 덕담 정도로 교회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얼마나 고귀하게 여기시고 대하시는지, 참으로 놀랍고 신비로운 교회의 영광이다. 교회는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 속으로 초청받은 신비로운 기관이기 때문이다.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가 바로 우리 교회 공동체의 수준을 말해 준다. 3절에서 바울은 성령님께서 교회를 하나 되게 하셨다고 말하며 그걸 지키라고 하는데, 여기서 성령님은 교회의 타자(他者)로 잠시 머물며 우리를 중재한 후 떠나시는 분이 아니라 내부자로 우리와 함께 거하시며 지속적 샬롬을 일궈내시는 분이다. 삼위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적으로 계시며 활동하시는데, 이것이 곧 동방 교회의 개념으로 ‘페리코레시스’ 곧 ‘상호내주’다. 거기에 우리도 함께 하는데 그 우리가 교회 공동체로 하나님의 존재 방식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의 코이노니아의 수준이 삼위 하나님의 코이노니아의 수준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성경에 가득한 성령님의 내주(內住) 개념이 그렇고, 제자들을 고아와 같이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과 함께 성령님의 도래를 설명하시는 예수님의 약속(요 14:16-18)이 그렇다. 앞에서 우리는 구원이 죄로 인해 망가진 피조 세계의 회복(엡 1:10; 골 1:20), 특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의 공동체성 회복이 핵심임을 생각했다. 그리스도는 그 회복의 방편일 뿐 아니라, 그분의 영이신 성령님의 내주를 통해, 또한 친히 교회의 머리되심을 통해 회복된 공동체의 수준을 신적 차원으로 끌어올리신다. 바울 서신이 ‘참 생명’(요 14:6)이신 그리스도 안에(in Christ) 거함을 반복적으로 강조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도 “주 안에서 갇힌 나”(1절)라는 표현을 써서 예수 안에 함께 공동체적으로 있다고 강조했다.이 점에서 교회는 정말 갈 길이 멀다 하겠다. 교회가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도 없다. 지금까지 교회가 이 정도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교회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신약 교회를 포함해서 교회사를 통해 초대 교회부터 2천여 년 동안 그런 이상향에 이른 교회는 한 번도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른 교회는 없었다. 우리는 다만 그 여정을 가는 중이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건강한 현상불만족이 필요하다. 그럴 때 우리가 진정으로 해야 할 일은 바로 주님께 붙어 있는 일이다. 이는 가지인 우리가 포도나무이신 그리스도께 붙어 있어야 비로소 생명의 열매를 맺을 가능성이 있다는 비유(요 15장)와 연결되는 개념이고, 개인적 신앙 차원이 아니라 삼위 하나님 공동체에 접목된 생명 공동체, 즉 그리스도의 몸과 연결되는 개념이다. 종교 활동을 열심히 하라는 말이 아니라 주님께 붙어 있으라는 것이다. “내 안에 거하라!” 우리가 정말 주님께 붙어 있다면, 우리의 존재와 삶의 방식과 실전이 변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뭘 해야 하고 뭘 해서는 안 되는가를 물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가 주님께 붙어 있게 되면 주님과의 공동체적 삶의 나눔을 피할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우리가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떻게 사랑을 표현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우리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신앙생활을 할 때, 때로는 힘이 들거나 우리의 헌신이 쉬운 것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것을 율법의 굴레 때문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사랑에 대한 모독이 아니겠는가. “사랑의 수고”라는 표현이 성경에 있듯이, 사랑이 준동하는 수고는 어렵지 않다. 그 수고는 기쁘다. 주님과의 깊고 친밀한 코이노니아 속으로 들어가는 교회, 그런 교회야말로 가장 자연스러운 교회의 공동체적 모습일 것이다. 바로 그런 교회의 모습은 세상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성품을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으로 세상이 진정으로 필요로 하는 생명을 기대하는 모습이기도 하다. 교회가 삼위 하나님과 마찬가지로 이타적인 삶을 보이게 될 때 바로 세상이 기대할 뿐 아니라 우리 주님 예수께서 우리를 가장 기뻐하시는 모습일 것이다.요한복음 17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내용을 잠깐 살펴보면서 마무리해 보자.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주님은 지금 제자들만을 위한 배타적 특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말로 전하여 주님을 믿게 되는 세상 사람들에 대해서도 언급하시는데, 바로 제자들을 부르신 배경에 대한 말씀이다. 제자 공동체로서 교회가 하나된 공동체로 삼위 하나님과 연합된 전제가 있을 때 세상은 비로소 그들에게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향해 복음을 전하려고 할 때 교회가 어떤 상황이 되었을 때 세상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있느냐를 분명히 말씀하신다. 21절처럼, 성부와 성자가 서로 하나된 것같이 교회 공동체도 하나가 되어 삼위 하나님과 연합될 때 세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신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교회의 공동체됨이란 곧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아버지의 뜻과 또한 주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가운데로 보내신 전도와 선교의 가장 중요한 전제라고 하는 것이 바울의 교회론이다.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2-23).여기서 ‘영광’이란 헬라어로 “그 본질이 그대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곧 삼위 하나님의 영광됨을 교회에 주셨다고 말씀하시는 이 말은 하나님의 영광된 속성이 하나된 연합의 본질로서 공동체성을 교회에 주셨다는 말인데, 교회의 교회다움(교회됨)이란 바로 공동체적인 연합과 하나됨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됨은 어떤 하나됨인가? 물리적인 하나됨만이 아니라 가장 근원적인 오이코스를 유지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는 것이며, 교회가 교회다워야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세상이 교회로부터 진정한 사랑을 본다면 소망을 가질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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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존재론
교회의사명론
교회다움
‘쿨’하지 않은 교회를 찾으라
by Brett Mccracken
2022-05-22
“한때 잘나가는 기독교의 상징 같았던 힐송, 미국에서 발판을 잃다.”슬프게도 이 헤드라인(루스 그레이엄(Ruth Graham)이 3월 29일 뉴욕 타임스에 기고한 글)을 예측하는 게 그리 어렵지 않은 세상이 되었다. 문신을 한 유명인 목사든 젊은이가 붐비는 나이트클럽 같은 교회든, 거의 모든 “잘나가는(cool) 기독교 지도자”의 열기는 지금 매우 빠른 속도로 사그라지고 있는 것 같다.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멋진 것은 일시적이다. 인기가 있다는 말, 그러니까 패션이라는 것은 패션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에 걸맞게 무척 빨리 구식으로 바뀌기 마련이다. 이것이 내가 쓴 책 Hipster Christianity: When Church and Cool Collide(유행에 앞서가는 기독교: 교회와 멋짐이 충돌할 때)에서 주장한 것처럼, 멋짐을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목회자에게 어리석은 일이 되는 많은 이유 중 하나이다. 단기적인 유행을 우선시한다면, 당신의 사역 또한 단기적으로 끝날 것이다. 특정 세대나 문화적 맥락의 변덕스러운 취향에 “맞추고” 싶어 하고, 또한 매력적으로 보이는 데에 너무 신경 쓴다면, 기독교의 초월성과 복음의 예언적 능력은 축소되고, 결국 복음은 시류(zeitgeist)의 윤곽에 맞게 왜곡될 것이다. 현실적합성에 초점을 맞춘 기독교는 그 자체로 쇠퇴의 씨앗을 뿌린다. 그것은 나쁜 생각이다. 이런 기독교가 잘 끝나는 경우는 거의 없다.통곡과 배움아무리 예측 가능하고 무분별할 정도로까지 “멋진 교회”라는 방주가 행여 있을 수 있다 하더라도, 마르스힐(Mars Hills)에서 힐송(그 외 수많은 다른 것들)에 이르기까지, 실패하는 교회를 보는 것은 비극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보며 기뻐하지 않는다. 대신 통곡하고 그 실패에서 배워야 한다. 교훈이 무엇인가? 우선, 이러한 헤드라인을 통해 우리는 현실적합성(relevance)이 존경(reverence)을 대신할 수 없으며 오히려 존경을 손상시킬 수 있음을 상기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이 호감 얻는 것에 초점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에 중심을 두어야 한다. 최신 유행을 따라 사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신실하게 사는 것이다. 시대의 수준에 맞춰 다른 사람을 따라가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변함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뿌리를 두는 것이다. 고백과 회개, 성경말씀의 온전한 권고에 매일 순종, 영적 훈련에 대한 조용한 헌신과 같은 것은 결코 최첨단이 아니며 “최신 유행 목사”(hypepriests)가 등장하는 잡지(GQ)의 모델이 되기에도 적절하지 않는 항목이다. 그러나 이것은 건강하고 지속 가능하며 “같은 방향을 지향하는 장기적인 순종”의 믿음을 구성하는 항목이다. 그리고 오늘날 하루가 다르게 문을 닫는 유행 지향의 교회와 파멸하는 유명 목사를 목격하는 그리스도인이 더 깊이 깨달아야 하는 사실이다. 지루하고, 멋지진 않지만 부끄럽지 않은 교회가 실제로 가장 좋은 교회일 수 있다. 소비자 취향에 무심하고 트위터가 주는 아이디어에 무덤덤한 기독교가 바로 내가 원하는 종류의 믿음일 것이다. 단기 성공, 장기 실패그러나 이런 교회가 바로 와닿지는 않는다. 게다가 유명 목사의 설교를 갈망하며 아레나에서 벌이는 록 예배의 열광적 찬양에 빠진 이십대로 붐비는 큰 교회는 난공불락의 승리처럼 보이기도 한다. 미국 교회에서 성공을 위한 지표로 우리는 워낙 오랫동안 시장주도 자본주의의 지표(큰 것이 항상 더 좋고 청중은 언제나 왕이다)를 반영해 왔기 때문에, 우리는 “멋진 교회”는 언제나 멋진 아이들로 교회 천장까지 가득 차 있다고 가정한다. 그런 교회야말로 통하는(working) 교회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교회가 통하는 교회라면, 이 “멋진 아이들” 중 많은 이들이 왜 고작 십 년을 채우지 못하고 해체를 겪을까? 왜 결국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날까? 나는 그런 사람을 너무 많이 봤다. 힙스터 교회 운동의 장기적 결과는 참담하다. 밀레니엄 세대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해체주의가 급증하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나는 이들을 양육한 교회, 그러니까 세상과의 “현실적합성을 중시하는” 교회가 그들에게 애초에 연약한 믿음의 기초를 심었기 때문이라고 확신한다. 그들이 다닌 교회는 변하지 않는 오래된 이야기에 확고하게 뿌리를 내리는 대신, 새로움이라는 관점에서 믿음의 틀을 잡았다. 그들의 교회는 거룩함으로 부름 받는 대신에 세상과 적합성을 갖도록 부름 받았다. 교리, 확고한 교회론, 그리고 신학적 정통주의에 뿌리를 내리는 대신 그들은 도덕주의에 뿌리를 둔 치료적 이신론에 푹 빠져 있었다. 그런 교회가 보여주는 장기 결과를 보면 그들의 정체가 여실히 드러난다. 신실함 > 멋짐이런 교회에 속해 있었다면, 지치는 건 당연하다. 당신이 해체 과정을 겪는다는 것도 놀랍지 않다. 그러나 더 좋은 길이 있다.모델 같아 보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멋진 교회가 아니라, 예수님을 닮아 가는 사람으로 가득 찬 신실한 교회를 찾으라.모든 사람이 스타일과 음악에서 같은 취향을 공유하는 교회 대신,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열정을 공유하고 거룩함을 추구하는 교회를 찾으라.(당신이 절대 만나지 못할 것 같은) 가장 카리스마 있는 유명 목사가 있는 교회 대신에 예수님이 가장 큰 스타인 교회, 그리고 겸손하고 친근하며 크게 두드러지지 않지만 삶과 사역에서 모범을 보이는 목사가 있는 교회를 찾으라. 과거와의 불연속성이 미덕인 “재창조” 또는 “신선한” 기독교를 추구하는 교회(“우리는 당신 할머니가 다니던 그런 구닥다리 교회가 아닙니다!”)대신, 기독교의 역사와 전통을 중시하고 또 기념하는 교회, 또한 과거와의 연속성을 중시하는 교회를 찾으라. 편안함을 충족시켜 주고 항상 긍정하기만 하고 결코 당신을 도전하지 않는 교회 대신, 당신을 성장하도록 밀어붙이기에 불편할 수 있는 교회, 곧 “구도자를 향한 민감성”보다 거룩함이 더 중요한 교회를 찾으라.이 마지막 부분은 특히 나 자신의 믿음에 변화를 가져왔다. 내가 쓴 책 Uncomfortable(불편한)에서 나는 여기에 관해서 썼다. 그리스도인 제자라면 결코 피할 수 없는 어색함과 불편함과 대가를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교회에서 겪는 어려움에 놀라지 않을 것이다. 힘들더라도 지역 교회 생활에 충실하면, 우리에게는 더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길 것이다. 비록 멋지지 않지만 아름다운 지역 교회의 현실을 받아들인다면, 우리의 믿음은 더 강해지고 지속 가능해질 것이다. 냉담함 이후의 교회 건강이것은 내가 “멋진 교회”에 관한 글을 썼을 때 독자들(종종 이전에 그런 교회를 다녔던 힙스터들)로부터 받은 피드백과 일치한다. 그들은 멋지지 않고 과대광고를 남발하지 않는 교회에서 그들의 믿음이 어떻게 더 깊어졌는지를 들려주었다. 지난주에 나는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슬프게도 “멋진 기독교”의 일부가 되려 했던 대부분의 내 친구들은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 나는 여태 다녔던 교회 중에서 지금 가장 “지루한” 교회를 다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 가족의 일원으로서 지금보다 더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 적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확고한 가르침을 통해 믿음이 가장 많이 성장했습니다. 또 다른 독자는 이렇게 썼다. “‘멋진 교회’에 대한 나의 열망은 복음에 무언가를 첨가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으로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교회 내 사교 생활을 통해서라도 나 자신이 근사하다고 느껴야만 했습니다.”용기를 북돋아 주는 간증이다. “멋진 교회”를 다니던 일부 베테랑들은 해체 과정을 겪거나 또는 교회를 완전히 떠나지만, 한편에서는 비록 최신 유행하는 드레스 대신 아웃렛에서 산 후진 옷을 입더라도 그리스도의 신부가 되는 것이 아름답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어지러울 정도로 쉽게 사라지는 트렌드의 세계에서 브랜드, 유명인사, 사회 운동, 제도, 사상 등 너무도 많은 것이 도착하자마자 바로 사그라드는 것 같다. 믿음을 소비주의 세상 속 수많은 유행 중 하나로 오해하는 순간, 기독교는 틱톡에서 퍼져나가는 최신 유행어처럼 깨지기 쉽고 변덕스러운 일시적인 것에 지나지 않게 된다. 기독교 신앙의 삶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공동체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충실하게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변하지 않는 순종, 천천히 불타오름, 조용한 근면 등 세상의 삶과 완전히 달라야 한다. 이런 형태의 구식 기독교가 인스타그램에서 입소문을 타거나 유명 트렌드 잡지에 소개될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오로지 그 길만이 그리스도인을 성숙하게 성장시킨다. 오로지 그 길만이 지난 2천년 동안 수많은 성도에게 그랬던 것처럼 길고 꾸준하고 또한 유익한 믿음의 경주를 하도록 도울 것이다. 나와 여러분이 그 길을 가는 성도 가운데 포함되기를 기도한다. 원제: In Praise of the Boring, Uncool Churc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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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by 권성찬
2022-05-17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복음 10:36-37.성급한 감동은 오독에서 온다앞의 글에서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살펴보았다. 에스겔의 말씀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백성,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속성을 세상에 드러낼 수 있다는 관점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그런 관점을 가지고 세상을 살다보면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것을 우리가 실천하기도 하는데, 그런 삶이 선교적 삶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떤 자세와 실천을 보여야 하는지 살펴보도록 하겠다. 물론 우리가 그런 속성을 가지고 가만히 있기만 해도 자연스레 선교가 되는 측면이 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속성을 가지고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 아주 중요한데, 우리가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지고 세상 사람들에게 나아가는 적극적인 선교도 동일하게 중요하며 또한 필요하다. 우리가 주변의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주변 세상과 교류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냥 우리끼리 우리는 좋은 사람들이라거나 우리 교회는 좋은 교회다 하는 정도를 넘어 세상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이 글에서는 이 세상과의 만남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한다. 누가복음의 짧은 본문은 대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라고 제목을 붙이는 이야기의 결론에 해당된다. 먼저 이 본문의 배경 또는 전제를 읽어 볼 필요가 있다.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눅 10:25-37).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 몇 가지 피해야 할 사안들을 생각해 보겠다.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성경 묵상에서 자주 범하게 되는 오류는 미리부터 너무 감동을 받을 준비를 하고 본문을 읽는 것이다. 그보다는 먼저 냉철한 분석을 통해 그 의미를 철저히 파악한 후에 감동과 결단과 실천이 있어야 한다. 다짜고짜 은혜 받을 준비를 하고 읽으니 본문의 이야기를 파악하기도 전에 소위 은혜부터 받아 버린다. 그런 마음의 자세는 유지하되 본문을 좀 냉철하게 질문하며 읽어야 한다.여기서 이 이야기를 듣고 있던 청중이 과연 누구인지 그 정체를 밝히는 것이 무엇보다도 우선이다. 본문의 청중은 예수님의 대화 상대인 율법교사 및 그와 같이 있던 유대인들이다. 한 가지 꼭 생각해야 할 것은 이야기의 청중이 여러분이 아니니까 여러분에게 직접 하는 이야기로 들으면 오해가 생겨난다는 점이다. 가장 큰 오해가가 “그러니까 우리도 사마리아인처럼 사랑하자!”라고 읽는 오독이다. 결과적으로 “사랑하자!”가 될 수 있지만 그렇게 직접 적용해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의 청중은 유대인이고, 우리가 아는 대로 유대인은 사마리아인과 상종을 안 한다. 유대인에게 이방인보다 못한 것이 사마리아인이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유대인이 우리처럼 감동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따라서 그 감동받지 않는 유대인에게 예수님이 이 껄끄러운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파악하는 것이 본문의 중요한 포인트다. 아무튼 지금은 “유대인은 이 이야기를 어떻게 들었을까? 기분이 나빴겠네!” “엄마가 자꾸 내가 제일 재수 없다고 여기는 아이처럼 공부하라고 잔소리하시니, 그나마 하던 공부도 하기 싫어지네.” 이런 느낌을 가지고 이야기를 듣는 것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왜 그러셨을까?두 번째, 율법학자의 질문과 예수님께서 답으로 하신 질문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율법학자는 이렇게 물었다.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내가 누구를 사랑하면 될까요?” 말하자면 그는 목적어를 물었다. 사실 우리는 늘 목적어를 묻는다. “어디를 가면 될까요?” “무엇을 사면 될까요?” “어느 나라로 선교를 가면 좋을까요?” 우리의 모든 질문은 목적어를 묻는 질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하시고 나서 이렇게 반문하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누가 사랑했느냐?” “누가 도움을 주었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주어에 대한 것이다. 율법사는 우리처럼 목적어를 물었는데 예수님은 주어를 물으셨다. 여기서 두 가지, 예수님이 이야기를 통해 청중의 짜증을 유발하고 목적어가 아닌 주어를 물었다는 중요한 포인트를 가지고 이 본문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그럴 때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세상의 사람들을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이제 이해를 위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사마리아 사람의 역할을 이야기 안에서 바꾸어 가면서 차근차근 해석해 보도록 하겠다. 시나리오 1: 사랑의 대상을 넓혀라만일 예수님께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대해 답을 주시려고 했다면, 사랑의 대상 즉 목적어를 말해 주려고 하셨다면 이야기의 등장인물을 좀 바꾸었어야 한다. 사실 유대인은 자기와 같은 클래스에 있는 사람들만 관심 있지 자기들이 볼 때 죄인이나 이방인, 게다가 사마리아인은 사랑의 대상에 있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누가 제 이웃입니까?” 바꿔 말해 “누구를 사랑하면 될까요?”라고 율법사가 물었을 때, 예수님은 “너 잘 걸렸다!” 하시면서 사마리아인을 도움을 준 사람이 아니라 강도 만난 희생자로 등장을 시켰어야 한다. “사마리아인이 여행을 하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게 되었다.”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했더라면 유대인 청중은 훨씬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들었을 것이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것을 아주 고소해 하면서 이야기에 추임새를 넣었을 것이다.그러면서 계속 “그곳을 네가, 바로 너희 유대인이, 제사장과 레위인과 네 자신이 지나간다. 그리고 그 쓰러진 사마리아 사람을 보게 되었다. 거의 죽어가는 사마리아 사람, 너희가 개만도 못하게 여기는 그 사마리아 사람이 쓰러져 있다. 어떻게 하겠니? 도와 줄 수 있겠니? 너의 사랑의 범주를 사마리아 인까지 확장할 수 있겠니?” 이렇게 물으셨더라면 도전이 되었을 것이다. 도와줄 수 없다고 말하자니 그렇게 대답하면 예수님께서 “그러면서 무슨 영생을 얻으려고 하느냐?”고 질책하실 것 같고, “가서 도와주겠다”고 하면 함께 있는 유대인이 “이런, 사마리아주의자!”라고 딱지를 붙일 것이기에 두렵다. 그 율법학자가 머뭇머뭇 할 때 예수님께서 소리를 지르신다. “그 쓰러진 사마리아 사람 하나도 도와주지 못하면서 무슨 이웃을 묻고 있고 무슨 사랑을 말하고 영생을 구하고 있느냐! 이 이기적인 사람아!” 만일 그랬다면 유대인을 향한 아주 묵직한 말씀이 될 수 있었다.시나리오 2: 누가 주어가 될 수 있는가?그런데 주님은 그렇게 하시지 않고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역할의 주인공으로 만드셨다. 그래서 유대인 청중은 불편하다. 게다가 자신들 편인 제사장과 레위인을 약간 부정적인 느낌을 주면서 한 줄로 정리했는데, 이 불편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질질 늘여가면서 이야기한다. 본문을 잘 보면, 제사장이 보고 피하여 지나간다. 레위인도 피하여 지나간다. 공정하려면 사마리아인은 보고 도와줬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렇게만 해도 불편할 것이다. 그런데 제사장과 레위인은 한 문장으로 정리하고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를 아주 길게 끌고 가신다. 사마리아인이 좋은 역할로 등장하는 순간 유대인 청중은 이미 불편한데, 예수님은 태연하게 이야기를 길게 끌고 가신다. 그 이야기에 꼭 필요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첨가하시기까지 한다. 기름, 포도주, 주막 등은 꼭 등장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그 이야기를 하루 더 끌고 가셔서 ‘다음 날’이라고 말하는 순간 아마 청중 사이에서 “에이, 정말!”이라는 신경질적 반응이 나왔을 것 같다. 정말 짜증났을 게 분명하다. 그런 다음 예수님은 “누가 도와줬지?”라고 물으셨다.더 실감나게 하기 위해서 현실적인 비유로 한번 말해 보겠다. 서울에 있는 어느 대형 교회에 설교 초청을 받아 갔다. 주일 대예배다. 그 교회는 담임목사를 거의 신과 같이 생각한다. 교회에 2개의 규칙이 있다. 1번은 “담임목사님은 항상 옳다!”이고, 2번은 “만일 담임목사님이 틀렸거든 1번을 보라!”다. 담임목사에 대해 누가 의문을 표시하면 주변에서 확 눌러 버린다. 그런 교회에 가서 설교를 하게 되었다. 지금부터는 설교 속의 설교다. 여러분, 오늘 아침에 이 교회 주차장 근처에서 뺑소니 교통사고가 있었습니다. 어떤 교인으로 보이는 분이 바로 교회 앞에서 오토바이에 치였는데, 오토바이는 그대로 달아났습니다. 사고를 당하신 분이 피를 흘리고 있는데, 교통은 막히고 저는 저 뒤쪽에서 그 광경을 우연히 보게 되었습니다. 성경책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교회 교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요. 마침 요 앞에 앉아 계신 담임 목사님이 그때 아침 예배를 오다가 그 피 흘리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분명히 보았습니다. 목사님 차의 창문이 열려 있어서 목사님이 그 광경을 보았다는 것을 제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이걸 말해야 할지…. 뭐 다음에 또 초대 안하셔도 할 수 없죠. 그냥 말씀드릴게요. 목사님이 마치 못 본 것처럼 고개를 천천히 돌리시더라구요. 저는 목사님이 예배 준비를 하러 가나보다 생각했어요. 지금 보니 부목사님이 사회를 보고 목사님은 아무것도 안하시는데 왜 그러셨나 모르겠네요. 뭐 이유가 있으셨겠죠?그럼 그 교회 교인들이 반응이 어떨까? 감히 우리 담임 목사님을…, 하면서 방송실을 막 쳐다보며 마이크를 끄라고 신호를 보낼 것이다. 그런데도 태연히 설교를 이어간다. 그런데 그 뒤에 어떤 나이 지긋한 분이 오시다가 역시 그 피 흘리는 분을 보았습니다. 그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이 분이 수석 장로님이신 것을 알았습니다. 다행이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역시 그 목사님에 그 장로님이더군요. 연로하신 장로님께서 고개를 어찌나 빨리 홱 돌리던지. 제가 장로님의 목 디스크를 다 걱정했다니까요. 어쩌나…. 제가 가기엔 좀 먼 거리였는데 그래도 가 봐야겠다 싶어 택시비를 내고 내리려는데 저 보다 앞서 어떤 교인 분이 그 사고 현장으로 막 달려가시더니 흰 옷을 입으셨는데 옷에 피 묻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막 그 분을 도와주시더군요. 성경을 가지고 계셨으니 이 교회 교인이라고 틀림없다고 생각했지요. 예배 시간에 이 분 선행을 좀 소개해야겠다 싶어 쳐다보는데 마침 흰 옷에 노란 띠를 가슴에 두르셨더군요. 무슨 여전도회인가 보다 하고 써 있는 글씨를 읽었습니다. 이렇게 적혀 있더군요. 신. 천. 지.그러고 나서 제가 그 신천지 교인이 어떻게 그 사고 당한 분에게 가서 상처에 손수건을 매었는지 그 때 어떤 매듭 방법을 사용했는지, 병원은 어디를 갔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짜증 제대로다. 그러면서 교인들에게 묻는다. “성도 여러분, 누구처럼 해야죠? 담임 목사님일까요? 아니면 수석 장로님처럼 해야 할까요? 아니면 신천지일까요?” 그러면 사람들이 “신천지! 신천지!” 그러면서 신천지를 닮자고 할까? 전혀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이야기가 청중인 유대인 설득용이나 감동용이 아니라 짜증용이라고 할 수 있다. 마찬가지 상황으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실 때 “사마리아인이요!”라고는 결코 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신천지요!”라고 할 수는 없는 것과 같다. 그래서 그 유대인들의 답은 “자비를 베푼 자요.”라고 돌려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처럼 해라!”고 하실 때, “뭐? 사마리아 사람처럼 하라고, 신천지처럼 하라고? 그게 무슨 말이야?” 이런 반응이었을 것이다. 물론 신천지 비유가 적절하지 않은 면이 있다. 하지만 당시 유대인이 사마리아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이야기에 대해 얼마나 불편했을지 생각한다면 사실 신천지 정도의 비유도 약하다.지금 예수님은 이 율법학자, 그리고 이 율법학자로 대변되는 유대인의 무엇을 건드리고 있는 것일까? 사실 그들에게는 목적어를 넓히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너희들, 더 사랑해야 해, 이 주변에 있는 사람들 부지런히 찾아가서 지역사회를 위해 더 봉사하고 어려운 사람들 도와주고 더, 더 열심히 해야 해. 비슷한 사람들만 찾아다니는 거, 그것만 가지고 사랑하고 있다고 해서는 안 돼.” 그런 메시지를 주는 것도 사실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이 이방인을, 원수를 사랑하는 그 정도를 위해서 죽으신 분이 아니다. 주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누군가를 더 사랑하는 정도를 위해 오신 분이 아니라 온 세상을 구원하러 오신 분이다. 그들을 구원하신 것은 그들만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서 온 세상까지 나아가기를 바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혀버렸다. 유대인에게 정해진 주어는 이스라엘이다. 주어를 묻지 않는 백성이다. 디폴트라서. 이미 정해져 있으니까. 선택된 백성이니까. 이스라엘의 혈통이어야만 하니까. 하지만 예수님은 그 견고한 주어벽, 주어성에 충격을 주신다. “사마리아 사람도 주어가 될 수 있어!” 단지 사마리아 사람까지 사랑하라가 아니다. 물론 그것도 실천하기는 어렵지만 그 말이 무슨 말인지 만큼은 이해가 된다. 그런데 사마리아인이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는 말은 유대인의 입장에서 아예 이해가 안 되는 말이다. “그들도, 너희들이 말하는 그 개들도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주인공이 될 수 있어!” 예수님은 이 충격적인 말씀을 하신 것이다.사랑은 상대를 대상이 아니라 주인공으로 인식하는 것이다상대방이 주인공이라는 이 인식의 전환이 없이 누군가를 대상으로만, 목적어로만 놓고 소위 우리가 정의한 사랑을 퍼붓는 것, 그것을 바울은 “울리는 꽹과리”라고 했다. 가진 모든 것을 준다고 해도 그들을 구제 대상으로만 여기는 천박한 인식 속에서 한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며,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준다고 하여도 자신이 주어이고 상대방은 목적어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니다. 그래서 그것은 아무 유익이 없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고린도전서 13장에 있는 말씀이다.어떤 사람이 누군가에게 자신의 전 재산을 팔아 주기로 했다고 하자. 그 분이 가족이든지 가족이 아니든지, 만일 여러분이 전 재산을 팔아서 줄 결심을 했다면 그 분을 사랑하지 않고 가능할까? 오히려 그 반대일 것이다. 사랑해도 전 재산은 못 준다.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는데 목숨을 아끼지 않고 대신 죽으려고 한다면, 사랑이 없이 가능할까? 사랑해도 어렵다? 그러니까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 없이 주는 것이 의미 없다”라는 말이 아니라 전 재산을 주고 목숨을 주면서 사랑하고 있는 우리의 사랑이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선교로 바꾸어서 말하면, 오늘 우리가 시간을 내고 돈을 내고 몸을 내어 하는 엄청난 헌신의 선교가 성경이 말하는 선교가 아닐 수 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을 이해하려면 고린도전서 12장의 설명을 기초로 해서 이해해야 한다. 몇 구절만 읽겠다. “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고전 12:12-14).중요한 말씀이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모두가 그리스도 몸의 지체, 즉 모두가 주어가 되었다. 물론 참 주어는 그리스도시다. 그 주어 아래에서 각 지체가 모두 각자의 역할을 하고 각자의 이야기를 쓰는 것이다. “만일 발이 이르되 나는 손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요 또 귀가 이르되 나는 눈이 아니니 몸에 붙지 아니하였다 할지라도 이로써 몸에 붙지 아니한 것이 아니니”(고전 12:15-16).그러니까 누구든지 “나는 별 쓸모가 없어!”라고 자책하거나 열등한 생각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선교지를 방문할 때마다 현지 교회에게 강조하는 게 있다. “우리는 못해, 미국 교회나 한국 교회가 와서 해주어야 해!” 그런 의존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한 선교는 일어나지 않는다. 또 이런 말씀도 있다. “만일 온 몸이 눈이면 듣는 곳은 어디며 온 몸이 듣는 곳이면 냄새 맡는 곳은 어디냐”(고전 12:16). “눈이 손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거나 또한 머리가 발더러 내가 너를 쓸 데가 없다 하지 못하리라. 그뿐 아니라 더 약하게 보이는 몸의 지체가 도리어 요긴하고”(고전 12:21-22).우리는 모두 한 몸의 지체라는 사실과 또한 각 지체의 한계를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지체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에 대한 기초다. 그런 인식의 전환 없이, 즉 자신을 항상 주인공에 넣고 다른 사람을 대상으로만 놓는다면, 다른 사람을 항상 목적어로만 인식하는 상태에서 베푸는 그런 일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그것이 내 몸을 불사르게 내주는 굉장한 헌신처럼 보일지라도,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내 소유를 다 팔아 주는 엄청난 희생처럼 보인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그런 사랑은 결코 아니라고 역설적으로 이야기한다. 옆에 있는 분에게 이렇게 인사해 보자. “몰라 뵈었습니다. 대단한 분이시군요. 주인공이셨군요.”우리는 한 몸 안에 있는 지체들이다. 그래서 주님 안에서 나도 귀하지만 남도 동일하게 귀한 것이다. 그래서 상대가 그 영역에서는 바로 하나님의 나라 이야기의 한 단원을 써 내려 갈 수 있는 사람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이 주인공이 되도록 내가 섬기되, 나 자신은 상대와 같은 눈높이가 아니라 가장 아래인 발까지 내려가서 그 발을 씻겨주는 것, 그것이 바로 선교적 삶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3장에서 바로 이런 모습을 보여주셨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돌아가시기 전에 마지막 행동을 보여주셨다. 그 전까지 예수님은 여러 표적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요한복음은 하나의 표적을 보여주고 그것을 설명(강화)하는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주님의 실제 행적도 마찬가지셨다. 주님은 제자들과 함께 다니며 표적을 행하신 후에 설명하신 것은 제자들을 선교적 공동체로 세워 가시는 일종의 교육 목적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십자가의 죽음을 앞에 두고 예수님은 소수의 제자들만 모아 놓고 가장 아껴 두었던 표적을 행하신다. 이 표적이야말로 표적 중의 표적이요 가장 핵심적인 표적이다. “너희가 이전에 여러 다른 표적들을 보았지? 허나 그것들은 이 표적에 비하면 조족지혈이다. 이 표적이야말로 너희 소수의 제자들에게만 보여주는 표적이야!” 이렇게 말씀하시듯이 마지막 표적을 보이신다. 얼마나 엄청난 표적이었을까? 하나님 나라의 핵심을, 이제 세상에 남겨질 제자 공동체가 해야 할 핵심을 드러내는 표적이다. 그것이 바로 세족식이었다. 아직도 한참 모자라 보이는 그 제자들을 이제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써 갈 주인공으로 여기시며 발을 씻기셨다. 그 제자들로 하여금 바로 그런 방식으로 선교적 삶을 살라고 요청하신다.끝으로, 이야기 하나를 더 소개하고 마무리하겠다. 국내의 유명한 장편 소설가가 인터뷰를 했다. 사회자가 물었다. “요즘은 장편 소설이 잘 안 나옵니다. 왜 그런가요?” 그러자 그 소설가는 요즘 젊은 작가들이 단편에 익숙하다고 말한다. 그러자 단편과 장편의 차이가 뭐냐고 사회자가 물었다. 그 답이 아주 명쾌했다. 단편과 장편의 차이는 사실 두께의 차이가 아니라는 거였다. 단편은 한 사람의 시각, 주로 1인칭의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소실을 단편이라고 한다. 반면 장편이란 물론 주인공의 정도 차이는 있지만 많은 3인칭들이 등장한다고 한다. 한 장에서 어떤 사람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무대도 어느 장소 혹은 어느 나라가 배경이다. 그런데 다음 장으로 넘어가면 전혀 새로운 인물이 등장하고 장소도 완전히 달라서 다른 소설을 하나 새로 보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인내하고 읽으면 좋은 장편일수록 나중에 가서 어마 어마한 감동을 준다.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는 단편이 아니라 장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1인칭의 시각으로 써 내려가는 단편 소설이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있는 말씀처럼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이 각각의 이야기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오는 장편 소설이다. 아니 그 모든 민족이 다 열심히 하나님 나라의 이야기를 써도 너무나 방대하신 하나님 이야기의 아주 일부분밖에 쓸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을 우리가 아버지로 모시기에 내가 만나는 사람의 발을 기꺼이 씻을 수 있는 것이다.우리에게 그런 인식의 전환이 먼저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제자가 되는 것이다! “저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라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자. 그리고 나아가 세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이전의 시각으로 보면 개만도 못해 보일 수 있는 그런 사람이 하나님 나라 이야기의 새로운 주인공임을 통찰하고 발을 씻겨 주자. 섬기자. 그러면 놀라운 일이 벌어질 것이다. 놀라운 공동체로 변할 것이다.
사마리아인
선한이웃
유대인과사마리아인
세속식
사랑
선한사마리아인의비유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by 권성찬
2022-05-16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에스겔 5:5-7.교회는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지금 우리는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묵상하고 있다. 교회와 세상, 이 두 단어를 연결하는 말은 ‘선교’다. 다른 말로 풀어 보면, “교회는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아주 중요하면서도 매우 오해되는 말이다. 중요하다는 뜻은 ‘선교’야말로 우리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선교가 아니라면 우리는 굳이 이 땅에서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을 이유가 없다. 예수를 영접하는 순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해 놓으신 그곳으로 “뿅!”하고 올라가야 맞다. 그래서 여의도 광장 같은 곳에서 무슨 전도집회를 하면 복음을 듣는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뿅” “뿅”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야 한다. 그럴 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정작 올라가지 못하고 계속 전하는 모습만 보여준다면 우습게도 아직 구원 얻지 못한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 있는 셈이나 마찬가지가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를 영접해도 “뿅”하고 하늘로 올라가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물론 우리의 믿음이 부족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또한 우리가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얻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하늘로 못 올라가는 것이 주님의 은혜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예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상에 남겨 두셨기 때문이다.그렇게 우리를 세상에 남겨두신 데는 이유가 있었다. 넓은 의미로 볼 때 그걸 선교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는 우리가 지금 이 땅에 살고 있는 이유이고,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이 일 때문에 우리를 세상에 남겨 놓으시고, 이 일을 통해서 주님이 세상에 더욱 드러나시길 기뻐하신다. 주님은 세상에서 아직도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주님을 주로 인정하고 고백하길 원하시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영역이 주님의 주권에 속하게 되길 원하여 우리를 세상 가운데 두셨다.또한 교회가 선교를 위해 세상에 존재한다는 말이 중요하지만 오해될 수 있다고 한 이유는 자칫 선교를 좁게 정의함으로써 마치 교회가 그 좁게 정의한 그 일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축소하고 본래의 뜻을 왜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우리는 선교라는 말을 들을 때 다소 부담스러워진다. 젊어서 선교에 헌신하고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지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뭔가 특별해 보인다. 그런 특별함 때문에 선교라는 말이 더더욱 우리와는 상관없어 보인다. 그것은 선교를 ‘특정한 지역에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혹은 좀 더 축소하면 ‘다른 나라에 가서 전도하는 것’ 정도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다른 나라도 되도록이면 오지일수록 좋다는 생각이 만연하다. 물론 복음이 없는 지역에 복음을 전할 사람들이 많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지만 문맥 없이 그것만 강조하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교 또는 성경이 말하는 선교가 아니라 그냥 교회의 활동이 될 수 있기 때문에 바르게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선교란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것을 통해 주님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사람이 사람에게그렇다면 실제로 선교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바꿔 말해서, 주님은 어떻게 우리를 통해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시며 알리실까? 무엇이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가? 요즘에는 선교를 무슨 활동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많다. 교육이 부족한 나라에 가서 학교를 세우면 선교가 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교육은 너무나 중요하다. 나 자신도 선교지에서 문해 교육을 사역의 하나로 삼았다. 하지만 한마디로 말해서 학교가 곧 선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의료가 부족한 곳에 가서 병원을 세우면 선교가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돈이 좀 있는 교회나 재단은 그런 선교 병원을 짓기도 한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병원이 곧 선교가 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카페를 열면 선교가 된다고 하거나 비즈니스를 하면 선교가 된다고 하거나 고아원을 하면 선교가 된다고 하면서, 이렇게 선교를 무엇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오늘날 선교를 생각하는 사람들 사이에 팽배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선교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그렇다면 무엇이 선교를 가능하게 할까? 그것은 사람이다. 사람이 선교를 가능하게 한다. 주님은 학교를 통해 선교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를 하는 사람을 통해, 병원이 아니라 병원에서 섬기는 사람을 통해, 카페가 아니라 카페를 하는 사람을 통해 자신을 알리신다. 선교는 사람이 사람을 찾아가는 행위다. 선교는 사람이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 행위다.그런데 이 문장 곧 “사람이 사람에게”라고 할 때, 첫 번째 사람은 자연인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람, 하나님의 백성, 신약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의 제자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에게’라는 말에서 두 번째 사람은 세상 속에 있는 자연인, 하지만 여전히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자연인이다. 그러니까 제자가 자연인을 찾아가 다시 제자 만드는 것이 선교다. 물론 거기에 성령의 역사가 필연적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버지께 간구하여 보혜사 성령을 제자들에게 보내셨다. 제자가 성령 안에서 세상에 있는 자연인을 만나는 것, 그래서 그들도 우리가 주님을 아는 일에 같이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선교다.여기서 두 가지 질문이 제기된다. 하나는 ‘사람인 우리가 과연 참 제자인가?’ 달리 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의 여부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제자라면 그 제자가 자연인을 어떻게 만나는가?”하는 점이다. 이것을 다르게 표현하면, 첫 번째는 ‘우리 스스로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고, 두 번째는 ‘우리가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줄여서 ‘되어야’와 ‘대해야’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고, 오늘은 첫 번째 부분, 즉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인가?’ 또는 ‘예수의 제자인가?’라고 하는 ‘되어야’에 대한 것을 묵상하고, 다음 글에서는 두 번째 부분, ‘그 제자가 자연인을 어떻게 만나는가?’라는 ‘대해야’를 묵상해 보겠다.우리를 통해 세상과 소통하신다앞에서 선교는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 등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는 것이라 했다. 만일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로 하는 것이라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부르는 대신에 학교나 병원이나 비즈니스를 시작하셨을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그를 통해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나가셨다. 바로 그 하나님의 사람들, 하나님의 백성을 부르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선교하는 방식이다.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다. 소통하는 창구라는 말은 그냥 스피커처럼 도구로만 쓴다는 것이 아니고, 그 백성이 하나님과 같은 성품을 지녀 하나님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속성을 그 백성이 세상에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드러내는 일종의 계시인데, 그 계시를 세상이 어떻게 읽어 내는가 하면 그 백성이 보여주는 하나님의 속성, 백성의 삶을 통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에서 읽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먼저 그 한 사람, 아브라함과 긴 시간을 보내셨고 이후에 이스라엘 백성과 긴 시간을 보내셨다. 왜냐하면 요즘 하는 것처럼 한 몇 주 정도 교육시켜서 도구처럼 선교로 내보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야 하기 때문이고, 다른 말로 신의 성품의 참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복이 될지라”(창 12:2)는 말씀은 비록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은 아니지만 단순히 복을 전하는 도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대로 하나님을 닮아 하나님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내시고 그에게 역사하시며 사귐을 통해 진리를 이해하는 자로 계속해서 가르치시고 도와주시고, 다른 말로 복을 주셨다. 마침내 귀하게 얻은 자식 이삭을 바치는 과정을 통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내어주기로 작정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과 희생을 아는 자가 되는 거다. 예수님도 스스로 증거 하시기를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요 8:56)고 하셨다.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불러내어 광야에서 그들에게 말씀하신 소위 ‘독수리 설교’에서도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부르심이 3중적임을 드러내셨다.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소유’이며 ‘제사장 나라’이고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셨다. 소유적인 부르심과 사명적 부르심, 그리고 수준적 부르심이 통합된 부르심이다. 그러니 소유적 부르심에만 취하여 “나 구원 받았네”만 부르고 있으면 안 된다. 그 부르심은 온 세상을 향한 제사장의 역할이라는 사명을 위해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명을 단순히 도구로만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리를 알고 거룩하신 하나님과 사귐이 가능한 거룩한 백성이 되도록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르심을 시작하는 원인 문장이 바로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라는 서두 문장이다. 이스라엘을 소유로, 사명으로, 수준으로 부르시는 이유는 바로 온 세상이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들을 본래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하기 위해 이스라엘을 부르셨다는 말씀이다. 배타적인 선택이 들어갈 여지가 없다.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에서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곧 선교다. 그래서 세상이 그 하나님의 속성, 하나님의 계시를 읽어내고 그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 그것이 곧 선교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온 세계에 대한 막중한 책임이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심은 그 백성에게 있다. 그들이 하나님의 속성을 닮아가고 드러내도록 최선을 다해 자신의 백성을 도우시고, 알려 주시며, 복을 주신다. 또 용서하신다. 고치신다. 수많은 노력을 기울이신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위해 열심을 내신다. 이 모두가 그 백성을 통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그 백성을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에 자신을 알리기 위함이다.기대에 어긋난 백성그런데 오늘 에스겔서의 본문에 의하면, 이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그런 기대와 목적을 완전히 저버렸다고 한다. 본래대로라면 그들은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내서 세상 사람들이 그 백성을 보면서 “와, 저게 뭐지?” “저들은 어떻게 저렇게 살 수가 있지?”하며 궁금해서 와 보고, 결국 그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나야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 안에 하나님의 계시를 새겨 넣은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반대로 그 하나님의 백성이 세상만큼도 못한 백성이 되어서 세상이 “와, 저게 뭐지?”가 아니라 “재들 왜 저래?”라는 비아냥거리는 소리를 듣게 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다시 한 번 에스겔서 본문을 읽으며 해석을 첨가하겠다. 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이르시되 이것이 곧 예루살렘이라 내가 그를 이방인 가운데에 두어 나라들이 둘러 있게 하였거늘 (이스라엘 백성들을 세상 속에 두어 세상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을 기대하며 세상이 그들을 보게 하였는데) 그가 내 규례를 거슬러서 이방인보다 악을 더 행하며 내 율례도 그리함이 그를 둘러 있는 나라들보다 더하니 이는 그들이 내 규례를 버리고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이건 뭐, 나를 닮아가기는커녕 세상 사람들도 안 하는 그런 짓들을 하고 자빠졌으니)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 요란함이 너희를 둘러싸고 있는 이방인들보다 더하여 내 율례를 행하지 아니하며 내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를 둘러 있는 이방인들의 규례대로도 행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야! 이놈들아, 세상도 그렇게는 안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만두고 세상만큼이라도 좀 해라, 제발.) 뭐 이런 말씀을 지금 하고 계신다.사회학적 불가능성기독교 역사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기대에 근접하게 살았던 것은 예수께서 제자 공동체를 만드시고 그 제자들이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복음을 나누었던 시대, 그리고 그들이 영향이 미쳤던 초대교회 시절이라고 말할 수 있다. 초대교회는 사실 로마의 박해 아래에서 지금처럼 소위 선교 혹은 전도와 같이 교회 활동을 하기에 상당히 제약을 받았던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이 박해하는 로마 제국으로 놀랍게 퍼져 나갔다.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앞서 언급한 학교, 병원, 비즈니스에 집중한 사역이 그렇게 했을까? 아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한 것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 참 제자들이 그렇게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보고 그들을 참 제자라 말할 수 있는가? 다시 말해 세상에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낸 사람들이라 말할 수 있었을까? 이것이 오늘 본문을 묵상하는 데 아주 중요한 부분인데, 그것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회학적 불가능성’ (sociological impossibility)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일반 사회가 가지고 있는 기준으로 볼 때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세상이 볼 때 “그건 불가능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의 백성이 행할 때 세상은 “저게 뭐지?”라고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그래서 하나님께서 바라시는 대로 그 분의 속성을 세상 가운데 드러내어 선교가 되게 한다는 것은, 세상의 관점에서 볼 때 “저 사람들은 어떻게 저럴 수 있지?” “저게 가능하다고?” “와 대박!” “헐!” 이런 소리가 나와야 가능하다는 거다.초대교회가 바로 그런 속성을 보여주었다. 남자와 여자가 구별을 넘어 차별이 심한 시대에 함께 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 남녀가 형제자매라고 차등 없이 부른 것과 같다. 오늘날처럼 세상은 오히려 남녀의 차등이 현저히 줄고 있는데 교단과 교회 안에는 남녀의 차별이 심한 것과는 아주 반대다. 또한 주인과 종이라는 엄격한 신분 구별 시대에 그들이 함께 했다. 말하자면 조선 시대에 양반과 천민이 형제라 부른 것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이라는 범주로 구별이 뚜렷한 시대에 함께 했다. 노예들이 잡혀서, 혹은 적군들이 잡혀서 갇혀 있을 때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가 먹을 것을 주어서 잡혀 있던 노예와 적들이 “저 사람들은 누구야?”라고 할 때, 누군가 “저들은 그리스도인이야!”라고 했다. 그런 과정을 통해 복음은 그 노예와 적들에게 깊이 침투하였다. 심지어 자신의 소유를 주장하지 않고 함께 나누어 사용하였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불가능한 일을 교회 공동체가 한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에게 매력 포인트가 되었다.서기 301년경 당시 20세 청년이던 파코미우스는 이집트 사람으로 로마 황제의 명에 따라 전쟁에 징집되었다. 나일 강에 위치한 테베라는 곳에 이르렀을 때 징집된 사람들이 도망치지 못하도록 로마 군사들은 그들을 감옥 안에 머물게 했다. 그런 그들을 밤에 찾아 가서 먹을 것과 마실 것과 필요한 물건을 전해 준 사람들이 있었다. 위험을 감수한 일이었다. 이런 일을 하는 이들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했던 파코미우스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며 누구에게든 이렇게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감동을 받았다. 그 감동으로 인해 징집에서 풀려난 후 그는 세례를 받고 성도가 되었다. 그가 수도원 제도를 시작한 성자 파코미우스다.그러니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사는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은 사실 모순어법이다.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말 자체가 세상에게 “저게 뭐지?”라는 속성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이 살아가는 방식으로 살면서 복음을 말로 전하며 전도하고 선교하는 것으로는 그들의 삶으로 침투될 리 없다. 그런데 에스겔서의 오늘 본문처럼 하물며 세상도 안 하는 그런 짓을 하면서 “재들 왜 저래?” “진짜 헐!”이라는 평을 들으면서 선교나 전도 같은 말을 우리가 사용할 수 있을까? “택도 없는” 소리다. 한번 생각해 보자. 세상은 물론이고 심지어 이단도 코로나 바이러스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사회적으로 그 정도 문제가 되면 고개를 숙인다. 해결책을 내놓고 반성하는 척이라도 한다. 그런데 소위 뜨겁다는 교회와 선교 단체들이 “이단보다 더하다!”라는 손가락질을 받는다. 또 정치인이 어떤 지역에서 국회의원을 하다가 그 같은 지역에서 그 정치인의 자식이 출마하면 지역구 세습이라고 욕을 먹고 잠시 버티다가도 철회한다. 그런데 교회는 교단이 들썩 거리고 사회에서 욕을 해도 끄떡없다. “그래, 우리 세습한다. 어쩔래?”하고 오히려 소리를 친다. 이런 예는 끝도 없다. 교수가 자신의 학생을 성추행한 것으로 징계를 받고 교수직을 내려놓게 되는 일을 자주 듣는다. 그런데 교회 지도자는 그런 일을 사회법이 나서 징계하기 전까지 교회 스스로 혹은 교단 스스로 해결하는 소위 자정 능력이 상실된 상태가 되었다. 심지어 나와서 또 교회를 개척하고 큰소리친다. 사회적으로 불법을 저지르고도 당당하다. 오히려 내부적으로는 지지가 더욱 강해진다. 그러면서 선교가 잘 안된다고 무슨 전략을 더 개발해야 한답시고 머리를 맞댄다면 그야말로 코미디가 아닐까?진실한 하나님의 사람이 요구되는 세상그래서 오늘날 선교의 복원은 선교적 삶, 이런 용어도 사실 사치다만, 그냥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진실한 삶을 복원하는 일이 시급하다. 1937년 3월, 시대를 앞서간 우리 믿음의 선진께서 “조선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발표하신 글을 읽어 보겠다. 현대어 버전이다.부흥전도가 대대적으로 일어나서 교회마다 성령의 불이 붙었다고 하는 것이 반드시 조선에 희망을 주는 일이 아니었음은 과거에 경험한 바이다. 사회 전반이 기독교적으로 변하여서 시장의 상인들까지도 예수쟁이 행세 하지 않고는 살 수 없이 되는 일도 조선에 희망을 약속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은 평안도 지방에서 벌써 경험했고 결론이 난 일이다. 또 신학을 하려는 청년이 많다든지, 홀로 전도를 하겠다는 비장한 결심으로 영혼 구원 사업에 뛰어드는 사람을 보았으니 조선에 희망이 있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종류의 일로써 희망이 생기는 것은 결코 아니다. 신학이나 전도에만 거룩함이 있고 새로운 삶의 희망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돼지나 닭을 치더라도 창조의 원리를 헤아리며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서 하는 일이라면 다 거룩한 일이요, 희망이 모든 조선 민족에게까지 미치는 큰 사업이다. 우리의 희망은 거대한 사업의 성취나 신령한 사업에 헌신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인물의 출현에 있다. 그가 아무 사업도 성취한 것 없이 그리스도와 같이 무참하게 패배하는 것으로 세상 삶을 마친다 할지라도 좋다. 참다운 의미에서 하나님을 믿고 그와 함께 걷고 함께 생각하며 함께 힘써 일하는 사람이라면 우리의 희망은 오로지 그에게 달렸다. (성서조선, 1937년 3월호, “조선의 희망”)자, 이제 분명해졌다. 학교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학교를 할 때 복음이 전해진다. 병원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병원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낼 때 복음이 증거 된다. 비즈니스가 선교를 하는 것이 아니라 진실한 하나님의 사람들이 카페나 비즈니스를 통해 하나님의 속성을 드러낼 때 복음이 증거 된다.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의 지체된 우리 모두가 그런 진실한 사람들이 되길 소망한다. 우리가 이룬 교회 공동체를 보고 세상의 사람들이 “저 사람들 뭐지?”라며 놀라는 그런 선교적 공동체를 이루길 소망한다. 우리 각자의 지역 교회가 속해 있는 지역이 기쁜 곳이 되고, 그 영향이 더 큰 지역으로 넓어지고 더 나아가 이 나라와 온 세상이 기쁘게 되는 그런 선교적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선교적공동체
교회공동체
선교의의미
성서조선
제사장나라
거룩한백성
하나님의소유
사회학적불가능성
초대교회그리스도인
교회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
by 김형익
2022-05-12
신앙의 성숙은 오래도록 내 마음을 떠나지 않은 주제이다. 지난 30여년을 선교사와 목회자로 살아오면서 나는 복음을 위한 헌신이나 신앙생활을 해 온 세월이 신앙의 성장과 성숙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누이 보아 왔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율법은 사람의 외적 태도와 행동양식은 변화시킬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변화를 가져오지는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신앙의 성숙은 안에서 밖으로의(inside out) 변화이다. 하나님의 은혜만이 사람을 안에서 밖으로 온전하게 변화시킬 수 있다. 이 은혜가 말씀과 기도와 성례(예배)라는 통상적인 은혜의 수단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하지만 이것만 말하면 충분한 것일까? 말씀과 기도와 성례(예배)는 홀로 하는 행위로만 규정되지 않는다. 이 은혜의 수단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반응이기도 하다. 신자는 함께하는 영적 공동체에 살아갈 때 건강하게 성장한다. 신자에게 영적 공동체인 교회는 물고기가 살아가는 환경이고 방식인 물과 같다. 신자가 건강하게 성장하려면 공동체가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건강하게 성장하기 위해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임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 삼위로 계시는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공동체로 존재하시기 때문이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서로 영광을 돌리는 관계로 존재하셨다(요 17:1, 5). 잠언 8:30-31은 이 관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여기서 의인화된 화자인 지혜는 성자이신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이 말씀에 의하면, 천지 창조의 때에 성자께서는 성부 곁에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성부의 기뻐하시는 대상이 되셨고 또한 성부 하나님을 즐거워하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서로를 무한히 기뻐하시고 영원토록 즐거워하심으로써 서로 영광을 돌리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이 기쁨 충만한 교제를 통해서 완전한 영광을 영원토록 누리고 계셨다. 성부와 성자 하나님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그 기쁨 충만한 완전한 교제를 가능하게 하시는 분은 사랑의 영이신 성령님이시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영원히 나오신다. 즉 성부와 성자 하나님은 성령 하나님 안에서 형언할 수 없는 교제를 통해 서로 안에서, 서로와 함께, 서로를 통해서 영원토록 영광을 누리신다. 이것이 삼위 하나님께서 영원부터 영원까지 존재하시는 방식이다. 삼위 하나님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는 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세 위격은 각각 고유하게 구별되시지만 동일한 신성의 본질을 가지신 참되고 영원하신 하나님이시며, 권능과 영광에서 조금의 차등이 없는 동등하신 하나님이시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그의 글 ‘하나님의 천지창조 목적’(A Dissertation Concerning the End for Which God Created the World)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동기는 삼위 하나님 안에서 흘러넘치는 기쁨이었다고 말한다. 삼위 하나님의 완전한 교제 속에서 영원토록 흘러넘치는 기쁨과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나누어 주실 대상, 흘려보내실 존재를 창조하기를 원하셨다는 말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조의 꽃인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만이 하나님과 쌍방으로 소통할 수 있는 존재다. 그리고 하나님은 첫 사람에게 삼위 안의 교제를 통해 흘러넘치는 기쁨을 나누어 주셨다. 인간은 그 기쁨에 겨워하고 행복을 누림으로써 하나님의 선하심과 사랑을 맛보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었다. 이것은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과 대요리문답 1문답이 각각 다룬 주제이다. 하나님은 공동체를 창조하셨다 삼위 하나님께서는 영원부터 영원까지 공동체로 존재하신다.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으로 인간을 만드셨을 때, 처음으로 ‘좋지 않다’고 하신 것은 아담이 혼자 있는 것이었다(창 2:18).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서 취하신 갈빗대로 하와를 만들어 주셨을 뿐 아니라 두 사람을 부부로 살도록 축복해 주셨다. “남자가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창 2:24) 하와 창조는 아담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창조에서 흠을 발견하셨다는 뜻이 아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은 이미 하나님의 작정이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실 것이었음을 보여준다(창 1:28). 공동체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인간을 공동체로 창조하셨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기쁨을 누리며, 성령 안에서 부부의 교제를 통해서 그 기쁨을 더 풍성히 나눌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먹기 전까지의 이야기다. 죄를 범하는 순간, 그들이 잃어버린 것은 공동체였다. 범죄한 그들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숨음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의 단절과 소외를 경험하는 존재가 되었고(창 3:8), 아담은 자신의 범죄를 하나님이 주셔서 자신과 함께 공동체로 살아가게 하신 여자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책임지지 않는 비겁하고 저열한 망가진 남성성을 드러냈으며(창 3:12), 하와는 “너는 남편을 원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라는 말씀을 통해 부부관계의 하나됨이 깨어지고 부부 사이에 갈등과 고통이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죄인이 피할 수 없는 운명적 예언을 들었다(창 3:16). 이렇게 범죄와 함께 삼위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공동체는 깨어져 버리고 말았다. 공동체를 재창조하시는 하나님많은 그리스도인은 성자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죽을 몸을 입고 세상에 오신 것은 죄로 말미암아 죽을 인생을 지옥으로부터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천국으로 인도하려는 것이었다고 믿는다.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말씀과 주님의 마지막 기도를 보면 그것들은 그 이상의 무언가를 우리에게 말해 준다. 먼저 주님께서 주신 새 계명을 생각해 보자. 주님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3:34)고 하셨다. 새 계명의 핵심은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 곧 교회다. 서로 사랑의 기준은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다. 또 요한복음 17장의 주님의 마지막 기도는 어떤가?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어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요 17:21-23). 이 기도는 주님의 마음속에 끝까지 자리하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하나된 공동체인 교회다. 하나됨의 기준이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이라고 주님은 이 기도에서 세 번이나 반복하여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우리 죄를 대속하시는 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주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함으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세우시려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다. 이 공동체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여 목숨을 주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요, 성부와 성자 하나님이 하나되심 같이 하나된 공동체이다. 교회로 살아가기이렇게 공동체로 계시는 삼위 하나님은 우리에게 죄로 잃어버린 공동체를 다시 세워 주셨다. 우리는 주님의 시각으로 교회를 다시 바라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주신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수고를 감당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이 드리신 기도로 기도할 수 있다. 비록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일과 성부와 성자 하나님의 하나되심을 반영하는 공동체가 되는 일에서 많은 실패를 경험하겠지만, 희망이 있다. 그리스도께서 사랑 안에서 목숨을 내어놓으신 일 덕분에 우리는 매일 깨어지는 실패 속에서도 하나님께 용납됨을 경험하며, 날마다 다시 형제를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갈 수 있다. 신자의 삶의 방식인 공동체를 떠난 신앙의 성숙은 결코 온전할 수 없다. 정교회 신학자 존 지지울러스의 말대로, “교회는 실존 양식(mode of existence)이고 존재 방식(a way of being)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는 오직 인격적 관계성과 인격적 사랑을 통해서 알려진다.” 그래서 우리는 교회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공동체
삼위일체
웨스트민스터소요리문답
아담과하와의창조
한몸
하나됨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을까?
by 박삼영
2022-05-10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어떻게 교회가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가게 한 모든 포로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는 집을 짓고 거기에 살며 텃밭을 만들고 그 열매를 먹으라. 아내를 맞이하여 자녀를 낳으며 너희 아들이 아내를 맞이하며 너희 딸이 남편을 맞아 그들로 자녀를 낳게 하여 너희가 거기에서 번성하고 줄어들지 아니하게 하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을 구하고 그를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 예레미야 29:4-7. 스카이캐슬큰 반향을 일으킨 드라마 ‘스카이캐슬’은 그 주제곡도 매우 인상적이다. 제목이 “우린 다 거짓말을 해”(We All Lie)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 가수가 부른 줄 알지만, 한국의 어느 무명 가수가 불렀다. “우린 모두 거짓말을 하지. 진실을 말하자면, 우린 가끔 웃으며 쉽게 거짓말을 한다는 거다.” 이런 가사다. 원래 드라마는 과장을 하는 경향이 있지만, ‘스카이캐슬’은 겉으론 아이들 공부를 줄거리로 삼으면서 막장 끼를 살짝 섞어서 만든 비현실적인 드라마로 평가할 수 있다. 제목 ‘스카이’(sky)는 하늘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선망하는 명문 대학교(서울대-고대-연대)의 약칭을 뜻하고 캐슬(castle)은 부유층이 자녀교육을 성채화하는 상징어이다. 그만큼 우리나라는 교육이 빅 이슈다. 드라마와 다른 레벨로 과장을 하자면, 우리나라의 모든 문제는 교육에 있다.우리나라 연간 사교육비는 35조나 된다고 한다. 사실, 교육이면 교육이지 공교육이 어디 있고 사교육이 어디 있는가? 솔직히 사교육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웃긴다. 우리나라에만 이런 구분이 있는데 마치 사교육이 비용이 들어간다는 인상을 준다. 하지만, 공교육은 얼마나 많은 돈이 들어가는가. 드라마를 비롯해 직접 책임 있는 당사자들이 교육의 문제를 자꾸 사교육으로 몰아가는데, 문제는 너도나도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우리나라 고등학생의 대학 진학율은 75퍼센트이고,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갈 비율은 35-40퍼센트다. 그러니까 절반 이상은 고생한 보람이 없게 되도록 미리 정해졌다. 그러면서도 정작 모두가 입시 공부에 집중하고 있다. 누군가는 진실 되게 더 이상 입시에 매달리지 말라고 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도 일부 어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모두 쉬쉬하고, 학부모를 비롯해서 대부분은 정말 몰라서 넋 놓고 당하기만 한다. 진실은 사회적으로 아이들에게 누구나 공부하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쳐야 했다. 심지어 어릴 적부터 좀 더 뛰어 놀리며 자유롭고 창의적인 시간 사용을 경험하게 했어야만 했다.하지만, 반대로 우리 사회는 어릴 적부터 무조건 열심히 공부하라고만 가르쳤다. 온 사회가 열심히 공부하면 나중에 다 한 자리씩 출세할 수 있을 거라 믿게 만들었다. 하지만 정작 얻은 것이라곤 10대 때부터 경험하는 패배의식과 경쟁 심리였고, 막상 세상 물정을 알아갈 20대 중반이 되면 사회적으로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다는 사실에 증오심으로 나라를 지옥으로 여기며 떠나니 마니 하게 된다. 모두가 대학에 들어가고 졸업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직업을 구하지 못한 채 사회로부터 도태되는 실정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일찍부터 공부를 포기해도 된다는 말을 들어야 했고 공부 말고 다른 길을 안내받아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물론 공부가 아닌 길이라고 어디 쉽기만 하겠는가? 가수나 배우나 셰프가 되는 길도 장난이 아니다. 공부 못지않게 경쟁이 심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젊은이들은 스스로가 선택할 수 있는 기회를 빼앗겨 버렸다. 그들은 유치원 때부터 마냥 공부만 강요당했고, 치맛바람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로 하여금 있도록 하신 자리가 노래나 춤일 수도 있었지만 그런 부르심은 아예 떡잎부터 기회를 박탈당했고, 모두가 획일적인 제복을 입고 살아가도록 강요되었다.공부가 어려운 게 뭐냐면, 공부의 필요를 전혀 깨닫지 못한 어릴 때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 중요성이나 가치를 깨달은 후 공부를 시작하면 이미 늦는다. 그러다 보니,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다들 어릴 때부터 같은 목표를 세우고 지지고 볶으며 같은 길을 달려가면서 경쟁 속에 사고가 끊이질 않고 사회적으로도 아주 큰 문제가 되었다. 지금 우리나라는 적어도 교육에 있어서만큼은 세상이나 교회가 아무런 차이도 없이 모두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냥 받아들이고 따라간다. 그리고 그 어떤 다른 대안을 찾으려도 않고 주어진 상황 안에서 몸부림치며 따라가기만 한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며 따라간다. 아프리카 세렝게티 평원의 누우 떼가 계절을 따라 이동할 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마냥 줄지어 강을 건너다 악어를 만나고 사자를 만나 먹히고 마는 생존 원리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희생을 자연의 원리에 내맡긴 채 잔인한 사회구조를 강화시키며 살아가다 보면 결국 모든 일의 처방이 개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가장 크고 한심한 해프닝의 하나는 우리나라에서 매년 국가적 행사처럼 치르는 수능일이다. 정말 난리도 아니다. 교회는 수능기도회를 하고, 사찰은 수능법회를 한다. 당일 뿐 아니라 거의 1년 내내 고3 패닉에 시달리다 수능일은 그 절정에 이른다. 어떤 그리스도인 엄마는 팔공산 갓 바위로 올라가고, 또 다른 불자는 몰래 교회를 방문해서 수능기도회에 울며 기도한다. 그들은 시험이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교회로 절로 돌아간다. 어떤 수험생 아버지는 아들이 수능시험 보는 날 부인에게 영화한편 보고 오자고 했다가 혼쭐이 났다고 한다. “아니, 그냥 낮 시간에 다녀오면 그놈이 엄마아빠가 영화를 보고 왔는지 모르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냐?”고 대들었다가 이혼당할 뻔 했다. 엄마는 시험 보는 아들과 같이 자기도 추운데서 고생해야한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전문용어로 말하면 일종의 심정적 동일체 의식이다. 아이와 같이 고통 받으며 기를 모아서 전달해야 1점이라도 더 받을 거라는 심리적 위안에 기대는 것이다.우리나라 사회는 모든 가정이 교육문제에 다 걸려 있다. 우리가 다 자기중심적이고 어떨 때는 부부나 형제한테도 이기적이라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문제에 대해서는 꼬리를 안 내리는 사람이 없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한다. 그게 교육으로 집중된다. 자식만 스카이에 들어간다면 엄마는 파출부가 되어도 좋다는 빗나간 모정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런 모정은 나중에 자식이 결혼하겠다고 할 때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앞장서서 반대하기도 한다. 자녀를 키우며 기대와 욕망 못지않게 두려움과 공포에 대한 우리 삶의 문제를 경험하는 거다. 여기서 교회는 자유로워야 하는데, 세속적인 행렬로부터 빠져 나오는 것이 쉽지 않아 보인다. 오히려 교회는 세상보다 한술 더 뜬다. 성도들이 교회로 모이며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신분을 확인하며 공동체가 주는 유익과 힘을 얻는 것도 사실이지만, 동시에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문제로 똑같이 힘들어 하고 똑같이 고민하며 똑같이 불안해하는 것도 사실이다.세상에서 포로가 된 성도성도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다 보면 삶의 조건이나 정체성을 일반 사람들과 특별히 구별할 수가 없다.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한,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누구나 똑같이 세상의 공기와 물을 마셔야 하고 햇빛과 비를 맞는다. 그게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인들이 세상의 질서에 젖어 살던 중에 문득 어쩔 수 없이 양다리를 걸치고 산다는 느낌이 들 때도 있다. 그들은 세상의 도시에서 오히려 일반인들과 마찬가지로 안식을 구하며 세상에서의 의무와 권리를 나누고 살면서 단지 일정한 경우와 시간만 구별해서 교회를 다닌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골프나 다른 레저를 즐기는 시간에 교회를 다닐 뿐이다. 신학적이고 영적인 차원에서 성도의 현존은 두 시민권자, 두 도시, 두 세상 소속이지만, 크게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 그런데다 우리 자녀의 학교도 대부분 세상이라는 도시에 있고, 아빠엄마의 직장도 도시라는 세상에 있다. 사실을 말하면 과격할 때도 있지만, 좀 더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우리의 교회조차도 세상 속에 있다.따라서 우리는 종종 우리 스스로조차 깜짝 놀랄 정도로 세상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데 익숙한데, 예레미야서 29장은 그것이 오히려 우리의 운명이고 현실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때때로 너무 세상에 물들고 휩쓸려 살아가는 것 때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현기증을 느끼지만 그것이 오히려 우리를 규정한 하나님의 심판의 권면이며 동시에 구원의 약속이다. 물론 우리가 세상에 휩쓸려 살기만 한다면 소망의 미래를 보장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세상에서 더불어 살아야 한다.마찬가지로 교회 역시 세상과 크게 구별된 장소나 미션을 살아가지 않는다. 예레미야서의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 잡혀간 유다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은 유다 백성이 특별히 기다리며 듣고 싶었던 말씀을 주신 게 아니다. 포로에서 곧 풀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그냥 거기 눌러 살아라!”였다. 비록 바벨론은 대도시였고 고도로 문명이 발달한 제국의 심장이었으나, 그래도 유다 백성은 예루살렘에 돌아오고 싶었다. 거기 정착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나 거기서 아예 나올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기대를 저버리고 반대로 말씀하실 때가 있는데, 바로 이 구절이 그렇게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에게 비록 친절하게 들리지 않는 이런 말씀이 우리가 기도할 때나 하나님의 뜻을 구할 때 참고해야 하는 가르침인 것만큼은 아주 분명하다.어떤가, 놀랍지 않은가? 유다가 포로로 잡혀갔는데, 1-2년 만에 구해 주겠다고 말하는 하나냐는 거짓예언자로 죽게 되고, 바벨론에서 70년이나 푹 썩게 될 것이라는 예레미야의 불길한 예언이 하나님의 진짜 뜻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한술 더 뜨기를 유다에게 아예 포로인 채로 바벨론에서 농사도 짓고, 과수원도 가꾸고, 집도 짓고, 자녀도 결혼시키며, 아주 정착하라고 한다. 제국의 수도 바벨론은 사로잡혀 온 이방 노예에게는 훨씬 폭력적이고 차갑고 비정했다. 더구나 대도시로서 바벨론은 여러 민족이 몰려들어 인종과 문화의 다양성과 다원화된 종교로 긴장과 갈등도 끊이질 않았다. 그런 만큼 유다백성은 경악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들은 오래전 출애굽을 경험했던 조상이 얼마나 본향을 사모하여 노예 살이 하던 이집트를 탈출했는지 어린 시절부터 배워왔기 때문에 새삼스레 그들의 아픈 역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유다 백성이 얼마나 구별된 삶에 익숙한 민족인가? 그들은 구별된 삶을 위해 울타리를 치고 스스로를 게토화하여 차단된 삶을 살 정도였는데, 그 땅에 주저앉아 섞여 살라는 이 말은 그야말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예언이 틀림없었다. 마치 오늘날 근본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그리스도인이 어떤 구원의 교리 같은 것을 애지중지하며 붙들고 있는데, 그걸 내려놓으라고 한다면 하나님도 용서하지 않을 태세로 덤벼드는 경우와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이 예레미야의 바벨론 정착에 대한 예언이 틀림없다.유대 백성이 정착한, 아니 더 적극적으로 정착해야 할 바벨론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서울이나 런던이나 파리뿐 아니라, 옛 도시와 새로 개발되어 신도시로 거듭나는 위성도시들과도 비슷하다. 자크 엘룰(Jacques Ellul)이 말한 것처럼,[1] 도시는 성경의 가인 이래로 인간이 스스로의 안전과 평화를 위해 정착해서 만들었지만, 그 자체의 숙명은 안전과 평화와는 거리가 먼 전쟁의 표적이요 경쟁과 투쟁의 현장이다. 한마디로 도시는 그 자체가 거대한 괴물이다. 사람들이 모여 탐욕과 이기심을 채우는 욕망의 현장이다. 하지만 오늘 예레미야는 그런 도시 중에서 가장 잔인하고 열방을 유린하는 상징적인 제국의 도시 바벨론을 괴물로 보지 말라고 했다. 괴물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뭔가 필요를 서로 나누며 돕고 기도하는 영적 공동체라 말한다. 유다를 잡아가 볼모로 잡아둔 그 도시의 평화를 마땅히 빌어 주라는 것이다.지난 2천년의 기독교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초기 박해 시절을 제외하고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교회는 세상에서 포로로 지내기보다는 지배하고 군림하는 기독교지배국가(Christendom) 또는 더 근대적 십자군 형태의 제국주의적 지배자들로 “코스프레”하며 주로 전쟁의 촉발자로 지내왔던 것도 사실이다. 교회가 오히려 세상의 지배를 더 강화시키는 것을 영광스러운 선교적 성취로 여길 때도 많았고, 지난 수십 년의 우리나라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세상과 화평을 도모하기보다 검을 던지고 화염을 일으키는 일에 분주해 왔다. 분명한 사실은 소외를 만들고 우울을 퍼트리며 빈부격차와 계층 갈등이 심화되도록 만드는 것은 예레미야의 말씀에 비춰볼 때 하나님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비록 예수님이 다른 면으로 비슷한 언급을 하셨지만, 교회는 세상에 검이나 화염을 줘선 안 된다. 세상과 도시의 번영을 위해, 오히려 그들에게 소망을 주는 공공선을 위해 삶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세상 속에 모범을 보이기 위한 침투와 정착을 명령한 것이지 정복하고 유린하라고 권하지 않았다.배제와 포용미국 예일의 신학자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는 크로아티아 출신이다. 세르비아의 폭력성을 직접 경험한 입장에서 그는 하나님의 정의가 무엇인지를 찾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조국인 발칸반도에서 세르비아의 종교적 인종적 말살 정책으로 피해를 입은 크로아티아 출신이기 때문에 마땅히 폭력의 잔인성에 대한 분노가 있었음에도 그렇다고 단지 적개심과 복수에 따른 역사적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세심한 고민을 기울여 하나님의 메시지를 찾고자 했다. 심지어 그는 자신에게 크로아티아의 고난에 대한 국수주의적 입장을 취하라고 충성 요구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떤 해결책이 진정한 신앙적 해결책이 될지를 찾던 중에 자신의 정체성과 억압하는 타자성 사이에서 십자가의 중심 주제이며 핵심 메시지인 용서에 이른다. 그의 책 ‘배제와 포용’은 그 고민의 결과다. 볼프는 공공의 신학을 발전시킨 것으로도 유명한데,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 대해 먼저 포용에 나서라고 한다. 평안과 번영을 위해 교회는 용서와 화해와 관용을 제시함으로써 갈등을 풀어 가야 한다고 한다.이는 우리가 세상에서 살아가는 삶과 관련되어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도 하루하루 세상 속에서 세상과 더불어 살아가는 생활에서 우리가 겪는 삶의 갈등은 사소한 것일 수도 있고, 용서할 수 없는 큰 것일 수도 있다. 우리가 비록 그리스도인으로서 세상에서 살지만, 나를 억압하고 화나게 하는 대상을 용서하지 못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때로는 배우자나 이웃을 용서할 수 없는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나 자신이 괴롭고 힘들 때도 있다. 실제로 우리는 온갖 종류의 억압을 피할 수 없다. 교회 역시 세상에 사로잡힌 포로처럼 억압을 경험한다. 반드시 바로의 이집트가 아니더라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자유로운 포로의 경험을 할 때가 많다. 경우에 따라서는 억압이 연속적으로 교회나 개인을 소외시킬 때가 있다. 자본주의 사회의 세상에서 교회나 개인은 가난의 억압을 경험할 수도 있다. 셋방이나 빚에 허덕이는 교회나 개인이 얼마나 많은가? 더구나 이웃이 가하는 억압도 만만치 않다. 나나 우리 가정을, 우리 교회를 작정하고 괴롭히는 못된 개인들도 있거니와, 최근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교회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적개심도 점점 위험수위를 넘나드는 것도 사실이다. 물론 이 모든 일의 원인 제공은 교회가 했다. 교회는 스스로에 대한 가십거리의 모든 빌미와 단서를 세상에 제공했다. 교회가 타락한 재정집행으로 눈 가리고 아웅 하듯 교계 정치에 뇌물과 금권선거, 초대형 교회의 세습으로 스스로를 불명예스럽게 깎아내렸다. 교회 지도자의 성적 타락과 추문도 끊이질 않는다. 교회가 땅에 떨어질 만하고, 세상으로부터 조롱을 받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큼 자성해야 할 죄악들이다.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더 이상 저 세상적인 이상향의 꿈과 비전을 현실화할 수 없거니와 메시지조차 던질 수 없다. 그럴 때 세상은 교회에 귀 기울이기는커녕 뜬구름 잡는 “관종” 취급을 할 뿐이다. 이미 세상은 교회의 실천적 삶의 모습이나 존재론적 태도에 지친 지 오래다. 유다가 화석화된 게토 공동체의 비극을 겪은 다음 멀리 바벨론의 유배지에서 배제를 내려놓고 용서의 수용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것처럼, 오늘날의 교회도 그 순서를 따라 게토화된 배제의 늪을 지나가는 중이다. 교회는 유배지의 경험을 통해 새로운 담금질의 기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일 때, 예레미야가 약속한 평화와 안전을 보전 받을 수 있다. 교회는 아무런 응답의 메아리를 기대할 수 없어도 허공에 대고 외치듯 평화의 울림을 세상에 전해야 한다. 한동안 교회가 세상처럼 똑같은 삶의 방식을 닮아 버린 것을 되돌려야 한다.교회는 언어를 달리 표현하면서 배제와 호전성을 감추지 않는다. 자기중심적 자존심과 이기성으로 상대를 정해 분노와 화풀이를 거듭하며 자기 성채를 쌓아오곤 했다. 마치 사나운 남정네들이 서로 시비를 걸며 건방지다고 화를 내며 혼내주듯이 적대감을 드러내는 것과도 같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적이며 혼내줘야 할 대상인 것처럼, 세상에 대해 포용 없는 모습이었다. 오직 배제만이 그들의 삶을 지치게 만들 뿐이었다.오늘날 우리 교회의 방식은 어떤가? 세속적인 세상 속에 교회 공동체가 놓여 있고, 다른 종교나 과학과 더불어 맞붙어 경쟁하고 다툴 때, 어떤 방식을 취하는가? 교회가 세상을 수용하고 포용하는가, 아니면 배제와 질시와 경계의 날을 세우는가? 교회는 세상을 위해 평안을 빌어 주며 함께 협력하고 동반자로 지낼 수 있을까? 때때로 교회는 세상의 세속성의 유혹과 도전을 받기도 하지만, 예레미야의 예언은 그들을 받아들일 뿐 아니라 그들 속으로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그들과 더불어 살며 평안을 나누라는 것이다.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정체성은 수용과 포용이다. 이걸 당당히 드러내야 한다. 유다 백성이 바벨론에 대해 그렇게 살 때 비로소 그들의 초월적인 신앙을 보여주듯이, 오늘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다.위기를 대하는 시선1755년 11월 1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지진이 일어나 무려 10만 명 가까이 죽었다. 도시의 모든 교회가 파괴되었고, 리스본이 다시 설계될 정도였다. 그때 지진을 보는 관점은 저마다 달랐다. 이는 요즘 코로나19의 재난 상황과 매우 비슷하다. 대체로 교회가 어떤 입장인지는 분명하진 않지만, 어떤 극단적인 종교인들은 하나님의 인과응보 심판으로 보았다. 그들은 죄악에 물든 도시가 심판받았다고 떠들어 댔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리스본의 홍등가는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부도덕하고 악당과 같은 심성을 지녔다. 리스본이 죄악에 물든 것은 사실이었지만, 당시 리스본보다는 파리나 런던이 더 타락했다.칸트나 루소,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 사상가들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하지만 겉으로는 매우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한계가 분명한 엉터리였다. 신앙적인 관점도 주로 이신론적이었다. 소위 자연을 지나치게 혹사하고 문명을 발전시켜 그 부메랑을 맞은 것이라며, 저마다의 문명비판론을 정당화하는 데 급급했다. 땅속 마그마의 폭발이 지상의 문명과 무슨 상관이 있다고!오늘날도 비슷하다. 세상이 위기에 처하면 근본주의나 이신론, 아니면 무신론이 활개를 치는 법이다. 코로나19라는 전염병 상황이 도래하자 극단적인 교회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소위 하나님의 섭리를 무슨 운명 결정론으로 보려는 부류가 맨 먼저 목청을 높인다. 제레미 다이아몬드가 쓴 ‘총-균-쇠’를 보면, 전염병이 식민개척을 막았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책은 환경 결정론을 너무 강하게 주장하고 또 틀린 주장이나 허황된 말이 많아서 문제가 많다. 16세기 제네바 문명을 이룬 종교개혁자 장 칼뱅이 제네바에서 목회할 때, 다섯 차례나 전염병이 휩쓸었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의 편집인 다니엘 하렐(Danial Harrel)은 캘빈이 제네바 교회 공동체와 더불어 전염병에 대응하면서 예정 신학을 발전시켰다고 설명한다. 어쨌든 제네바는 최초의 국제연합의 도시가 되었으니 결과를 만들긴 했다. 그렇지만 복잡한 제네바의 상황에서 신학과 목회를 드라이브하느라 칼뱅은 불면에 만성 소화불량에 위궤양으로 고통 받다가 당시에는 무서운 세균 침투로 결핵에 걸려 죽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랍게도 칼뱅은 훨씬 전에 그가 전염병과 힘든 목회 상황을 겪어 보지 못한 26살의 청년 때 쓴 ‘기독교강요’의 첫 부분에서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말했다. “인간의 삶은 마치 무수히 많은 악과 죽음의 위협과 별개로 수천수만의 질병의 용기와 같다.” 그는 그런 실존에서 위안을 얻는 길은 오직 두려움 없이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라 한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진정 우리가 동의할 주장이지 않은가! 그는 친절하게도 시편 91, 118, 56, 27, 22편 등을 인용한다.교회는 개인주의의 자기중심적 이기성도 넘어서야 하고, 세속적인 물질주의도 넘어서야 한다. 교회 공동체는 모든 인류를 우리 지체로 삼아야 한다. 유다 백성은 바로 이걸 훈련받고자 바벨론 생활을 경험했을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을 포로로 삼고 박해하는 정복자들에게 용서와 화해를 시도하고, 종교적 구별의 기준을 가직고 살아가되 타문화권에 대한 배제를 내려놓고 포용을 선보이라고 명령받았다. 그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70년의 포로생활이 필요했을 것이다. 70년은 거의 인생의 한 주기다. 그렇다면 우리 인생 자체가 유다의 포로 기간처럼 형벌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십자가의 비밀인 용서를 깨닫고 거룩한 하나님 백성의 삶의 기준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며 도전하는 특권의 기간이기도 하다. 유다 백성에게 포로는 심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분명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가 세상 한가운데서 포로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축복이라는 관점과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이다.미국의 기독교 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는 초기 기독교 교회에 대한 가장 많은 통계 자료를 가진 학자로 유명하다. 스타크는 그런 자료에 근거하여 초창기 그리스도인들이 전염병이 휩쓰는 위기의 상황에서 보였던 포용의 모습을 생생히 확인해 준다. 그에 따르면, 로마제국 시대에 초기 교회는 극심한 박해 중에 있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고 가문에서 쫓겨난 채 극심한 가난 속에서 숨죽이며 살아야 했다. 그런데도 그들이 살던 도시에 전염병이 닥치거나 지진과 같은 긴급 재난이 일어나면 언제든지 병든 사람들을 자기들의 지체로 간주하고 대응하여 인류애를 보였다고 한다. 인종도 다르고 국적도 다르지만, 오직 생명의 소중한 기준만을 가지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렸다. 그때 무슨 약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죽어가는 사람들을 물로 씻어 주고 닦아 주는 게 전부였고, 그러다가 자기도 전염되면 함께 죽기도 하는데, 어쩌다 살아나게 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받은 보살핌과 사랑을 퍼뜨렸다고 한다. “그리스도인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전염병에 걸린 나를 돌봐줬다.” “그들은 진정으로 생명을 내주는 사랑으로 나를 보살펴 줬다.” “나도 그들을 본받고 싶디.”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고, 교회는 성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제국의 권력자들에게 박해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로마제국의 도시생활이 얼마나 비정하고 잔인하며 냉혹했는가? 계급이 없는 민주적인 현대 사회의 도시 생활도 차갑고 냉정하며 몰인간적인 생활 문화가 팽배한데 전쟁으로 바람 잘날 없는 로마제국의 고대적 노예제도의 계급 사회에서 얼마나 힘의 원시성이 지배되었겠는가? 그런 사회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을 공포스럽게 박해하며 놀리던 사람들을 부둥켜안고 보살펴 줌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새로운 사회적 관계와 규범을 제시했다. 그들은 배제의 담을 쌓은 것이 아니라 포용의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전염병에 걸린 가난한 사람들부터 노숙자들까지 보살피며 기독교의 사랑을 실천하였고, 가장 절망적인 상황에 처한 세상에 소망을 제공해 주었다. 그들은 낯설고 두려운 사람들에게 나아가 그들의 필요를 제공해 줌으로써 그들과 새로운 사회적 연대를 맺었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 속에 하나님의 나라의 첫 열매인 교회를 세울 뿐 아니라 도시를 재건하여 교회와 세상을 사랑으로 결속하고 변화시켜 평안을 이루어갔다.교회는 에클레시아요 오이코스다교회는 단순한 대안 공동체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선택을 세상에 드러내는 소망과 평화와 구원의 통로 곧 초월 공동체이다. 교회는 또한 외관상 건물을 가진 고정된 조직체 정도가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하는 세상 속의 가정 공동체다. 때때로 교회는 가정과 세상이 만나는 비밀의 완충지이고, 때때로 교회는 가정과 세상을 연결하는 만남과 소통의 플랫폼이다. 낯선 이들에게 집과 같은 안정감과 소속감을 제공하며, 또한 낯선 이들에게 긴장을 녹여 주는 환대 공동체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계획을 드러내고자 하는 모든 이들이 함께 어울리는 사귐의 공동체이다.교회는 개인 신자들의 어머니로서 그들을 믿음으로 낳고 양육하여 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수행하도록 수용하여 돕는 기관이다. 어머니가 아이를 키울 때 젖만 먹일 뿐 아니라 어머니의 언어와 문화를 함께 가르치듯이 교회는 개인 신자들을 보살피며 키우는 어머니다. 그리고 교회는 신자들의 가정을 일일이 연결하고 살피는 하나님의 심부름센터와도 같다.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엇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불행한 이유가 제각기 다르다.” 불행의 이유들에 대해서 사람들이 판단할 수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떤 불행한 가정도 교회 공동체는 품어 줄 수 있다. 교회가 이런 공동체인 것을 알고 스스로 되어가야 한다.그러기 위해 교회에서는 사랑의 사귐과 논의가 유별나게 일어나야 한다. 교회는 불러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란 뜻의 에클레시아(ekklesia)라 한다. 하지만 다른 말로 일종의 집이라고도 말할 수도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지만, 집은 나무와 벽돌과 타일로 세우지만, 가정은 사랑으로 세우는 사랑 공동체다. 그래서 요즘 교회를 종종 패밀리 또는 공동체라는 개념으로 일컫는다. 헬라어로 집은 오이코스(oikos)다. 가문이나 식솔, 가족 등을 뜻한다. 마치 구약에서 다윗의 아들을 솔로몬만이 아닌 자손으로 예수를 가리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오이코스는 정확하게 집을 의미하면서도 온 가족들이 함께 모이는 거실(livingroom)의 뜻이 있다. 집 전체가 오이코스면서 그 안에 오이코스-룸이 따로 있는데, 가족들이 한자리에 다 모이는 공간을 뜻하는 거실을 말한다. 공동체성이 강하게 반영되는 단어이고 달리 말하면 교회다.다행인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족주의가 강하게 발달해 있다. 사회 전체를 한 가족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발달하기도 했다. 아마도 유교의 군사부일체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식당에 가면 일 하는 사람에게 모두가 그냥 언니라고 부른다. 나이가 많으면 이모라고 한다. 엄마 친구는 다 이모라고 한다. 가족이 사회 속으로 확장되었다.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은 직원을 자식처럼 여기고, 군대에서도 대대장은 삼촌뻘이고, 사단장은 큰아버지뻘이다. 교회에서 목사는 아버지로 생각한다. 나이든 권사님이 젊은 목사를 어버이라고 여긴다. 온 사회가 따지고 보면 오이코스로 연결되었다. 어쩌다 비합리적인 부작용도 있지만, 긍정적인 면이 없지 않다.가정이나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마주보며, 새롭고 다른 세상을 만들어가야 하는데, 종종 지나친 오이코스주의가 발목을 잡기도 한다. 지나친 가족주의 때문에 일차원적으로 우리 가족, 우리 교회만 강조하는 함정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내 자식에 대한 사랑은 편집증적이다. 하나님이 나를 양자 삼으신 것을 잊어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우리나라 교회도 우리교회주의에 빠져 있다. “우리 교회도 어려운데 어떻게 다른 교회를 돕는가?” 이런 말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교회가 뭔지 모른다. 교회만 모르는 게 아니라 십자가도 모르고 구원도 은혜도 모른다. 사랑을 말해도 개념적 사랑이기 쉽다. 어려움조차 같이 나눠야 가정 공동체라 할 수 있고 교회 공동체라 말할 수 있다. 빌립보 교회나 고린도 교회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회를 도왔다. 다른 교회나 세상을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요즘말로 찐 교회다.그리고 지나친 가족주의는 감정적인 관계성에 빠지기 때문에 부작용을 낳기도 한다. 심정주의라고도 한다. 가령 서로 가족처럼 관계 맺는 것이 마케팅에서도 적용되어서, 한때 보험회사든 통신사든 전화하면 아주 젊은 여자 목소리로 “고객님, 사랑합니다”라고 했다. 왜 고객을 사랑하는가? 아주 기상천외한 인사법은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없다. 어떤 나라에서 고객에게 “I love you”라고 하는가? 이게 진심을 다해서 가족이라는 분위기를 주려고 훈련받은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어두운 면 때문에 빗나간 인형놀이 노력이 되고 말았다. 요즘은 분위기가 금세 바뀌어 감정 노동자에 대한 갑질을 경고하는 메시지로 바뀌었다. 사랑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 ‘아이 러브 유’를 남발하다 감정이 상한 데다 졸부나 질 나쁜 사람들의 추행으로 힘든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다.우리나라는 지난 수십 년간 엄청난 발전을 거듭했다. 지금은 전 세계에 반도체를 공급하지 않으면 세계의 IT산업이 멈출 정도다. 하지만 노동자들이 여기저기서 터무니없는 사고로 죽어가는 어두운 면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구촌 위기인 코로나19 방역만 해도 우리나라는 단연 최고라는 평가를 받고, 경제성장률도 1위를 차지한다. 하지만 지난 10년간 자살률 또한 OECD에서 1위였고, 출산율과 성평등 지수는 37위로 꼴찌다. 교회도 이와 비슷하게 영욕의 경험을 동시에 겪는다. 열탕과 냉탕을 돌아가면서 첨벙거리는 기분과 무관하지 않다. 겉은 번지르르 하지만, 어느새 복음의 원리가 아닌 그럴듯한 전통을 내세우며 굳어 버린다.서울에 강남이 언제 생겼는가? 88올림픽 때만 해도 개포동은 “개도 포기한 동네”라 불렸다. 그런 강남이 가장 부자동네가 되어 보수적인 기치를 앞세우고, 교회도 그 뒤를 따라간다. 강남 소리 들을 때마다 웃음도 안 나오는 사이에 강남스타일까지 나왔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자기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세속적인 물결에 휩쓸리는 수치의 역사에 휘말려 버렸다. 어떤 교회는 담을 높이 쌓아 문을 꼭꼭 잠그고 게토로 만들어 버린다. 세상을 수용하고 포용한다는 생각과 마음이 일(1)도 없다. 교회가 가정과 세상을 연결시키는 중재의 역할을 포기하고 유료 세미나만을 위해서 문을 여는 슬픈 현실이 흔히 경험된다. 우리나라 교회는 이런 격동이 필요하다. 복음으로 막힌 담을 바라보면, 부딪쳐야 하는 긴장을 피할 수 없다. 이게 복음의 운명이다. 여러분의 마음을 가로막는 담장이 있는가? 허물어 버리라. 여러분의 가정이 교회로 세상으로 연결되는 걸 가로막는 담장이 있다면 그것도 허물어 버리라. 교회는 게토가 아니라 세상으로 활짝 열리고 동시에 세상이 하나님을 만나는 플랫폼이다. 여러분의 교회에서 섬기고 활동할 때 사람과 사람을 가로막는 담장이나 부서와 부서를 가로막는 담장이 있다면 그것도 허물어 버리라. 물리적인 담장이 있기도 하지만, 인격적인 담장도 있다. 모든 담장은 허물어 버려야 한다. 여러분 교회가 이 지역사회와 세상을 가로막는 담장을 허물고 세상을 격동하는 교회가 되길 바란다.드라마로 시작했으니 드라마로 마무리하겠다. 우리나라 드라마는 시청률이 높을수록 미리 찍지 못한다고 한다. 그때그때 촬영을 하면서 방영을 하는데, 드라마가 절정에 이르며 이야기가 숨 막히게 진행될 때면, 시청자들이 난리가 난다. 주인공을 죽이지 말라고 떼로 몰려다니며 댓글을 달고, 그래서 죽은 사람도 살리고, 멀쩡한 사람도 죽이며 드라마를 함께 만든다. 여기서 의미 있는 힌트를 얻은 건데, 댓글을 달 듯이 교회가 역동적으로 움직여서 가정을 살리고 사회에 기준을 만들어 줘야 한다. 여러분의 가정마다 경험하는 눈물과 감동의 드라마, 때로는 슬프고 때로는 기쁜 드라마를 스토리텔링하며 서로서로 연결을 만들어 가보라. 문제의 해결과 인도하심은 하나님께 맡기시고, 여기서 과수원을 가꾸라. 여기서 여러분 자녀를 시집장가 보내고 살면서 주님이 이 세상의 포로에서 건져주실 때까지 세상과 지역사회를 위해 기도하고, 여러분의 직장과 이웃의 평안을 위해 빌며 살길 바란다.[주]1. 자크 엘룰은 그의 책 ‘도시의 의미’(The Meaning of the City)에서 예언자적 통찰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연결되는 도시의 이야기를 광야에 비교하며 분석한다.
배제와포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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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포로된교회
자크엘륄
도시의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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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코스
공동체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by 박삼영
2022-05-09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하나님을 닮은 인간성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 하나님을 예로 들고, 하나님을 말할 때는 사람을 예로 든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형상(chellem)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다. 물론 겉모습보다는 속사람, 인간의 인격과 성품의 정체성과 수준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다. 라틴어 이마고(imago)가 이 형상을 번역한 말인데, 그렇다고 이미지를 닮았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굳이 돌려 말하자면 ‘이데아’라는 말이 더 가까울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수준처럼 매우 높여 주셔서 마치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듯이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이 그 정도는 아닌 줄 우리가 다 알지만, 성경은 사람을 높여도 너무 높여 하나님을 닮았다고 한다.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사람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의 모습을 하신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살 때 찾아온 방문자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대표적인 모습이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라는 표현은 결정적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말씀하신 그 인자는 곧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종래에는 이 인자를 가리켜 예수님의 인성을 말한다고 가르치는 해프닝이 있었다. 소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데 신성을 나타낼 때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 하고, 인성을 나타낼 때는 인자(Son of Man)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틀렸다.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는 것은 구약 전체를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특히 다니엘 7:13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거기에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의 인자는 부정관사(a)를 써서 “한 사람의 아들(A Son of Man) 같은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적 표현이었다. 물론 다니엘이 예언할 때만 해도 인자(키바르 에노쉬)가 정확히 누군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누군가 앞으로 나타날 “어떤(a)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그 말씀이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은 자명하다.[1]그런데, 신약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하신 것은 바로 다니엘의 인자에 대한 예언을 이어받아 인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 말씀이다. “다니엘이 말한 인자가 바로 나다!”라는 뜻으로 정관사(the)를 붙여 그 인자(The Son of Man)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신 하나님이라 말한 셈이다. 인자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냥 대충 아무나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한 예는 성경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이런 점에서 인자는 매우 특별한 용어로 성경이 말하는 인자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말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것을 소위 ‘인자 기독론’이라고 한다.비슷한 말이 또 있다. “주의 종”이란 말인데, 한국에서 목사들이 대충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사용할 때가 많다. 자기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보면, ‘주의 종’은 메시아요 구원자를 뜻한다. 이런 용어의 맥락을 모르고 자기 스스로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이 말을 사용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엄청 높인 것이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누가 자기를 메시아라고 높이려고 이 말을 사용하겠는가. 그냥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다 굳어버린 언어습관일 것이다. 특히 목사들에게 이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하나님과 인간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나란히 간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높여 주셨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교회와 신학을 주도한 장 칼뱅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제1장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가진 것의 모든 지혜, 곧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Dei cognitione et nostri)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 지식(Duplex Cognitio)은 서로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쪽이 먼저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만들어내는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다는 것인데, 피조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더더욱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스스로 자기 충족적인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삶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악을 생각할 때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고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그런 이유로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알 수 없다”고 했다.고대의 헬라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저마다 신의 형상을 문화상대성으로 묘사한다고 말한 점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은 신을 들창코에 검은 피부로 그릴 터이고, 트라키아인은 신을 푸른 눈에 빨강머리로 표현할 것이다. 어느 문화든지 신의 형상을 묘사할 때 자기네 모습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 그 손으로 인간이 하듯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말의 형상으로 소는 소의 형상으로 사자는 사자의 형상으로 각자 신들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해서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을 확대된 인간의 기능과 능력을 부여해서 묘사하는 헬라의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비판한 것 치고는 제법 맹랑한 주장이 아닐 수 없지만, 매우 음미해 볼 만하다.그러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사람을 하나님으로 나란히 표현했을까? 한마디로, 둘 사이의 인격적 소통을 위해 우리 인간을 높여 주신 것이다. 우리 피조물을 창조주와 비슷하게, 아니 나란히 고양된 위치로 높여 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여기진 않으셨다. 인격적 동질성은 있지만 인간의 피조물성은 여전히 두셨다. 인간은 하나님은 분명 아니지만, 혹시 하나님과 같은? 하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카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과 맘먹을 수 있는 동등한 수준도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고, 인격적인 피조물로 특별한 대우를 받은 증거가 분명하다.인간은 에이전트인가 왕인가?그런데 최초의 인간을 비롯해서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 인간을 높여 주신 걸 모르고 살아간다.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엇비슷한 줄 알고 스스로를 과대포장한다. 인간은 수준과 지위에서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고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든다. 그러다 종종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애쓰는 실정이다. 아담이 그랬고 이후의 모든 인간이 계속 그랬다. 빌립보서 2장의 본문을 “그리스도 찬송시”라고 하는데, 이건 단순한 예수의 칭송만이 아니라 아담의 빗나간 자기인식의 심연을 전제하고 쓰였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단순히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으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담 이래로 구약의 모든 인간이 보여준 삶을 전제로 예수의 차별성을 드높이는 말씀이다.첫 사람 아담부터 모든 세대의 인간은 자신을 불러 높여 주신 하나님을 넘어서려는 반역을 저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등한 수준의 지위와 높이를 부여하셨는데, 그래도 그는 여전히 피조물의 신분을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똑같아지길 원해서 손을 내뻗고 하나님의 소유에 해당하는 지위와 신분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고 말았는데, 바로 자기 인식의 그릇된 파행이 빚은 참사였다.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에 걸맞은 임무를 행하도록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동등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인간 피조물이 창조의 주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해 버렸다.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담의 타락을 암시하고 그 전제로 글을 썼다.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비슷하게 높여주신 그 동등됨을 취해 버린 아담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반역이 아니라 순종을,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셨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란 말은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는 ‘붉은 것’(adamah)이란 말로 땅의 흙을 가리켰으나 사람이 그 흙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아담이라 했다. 원래 지구나 땅은 에레츠(eretz)라 하지만, 표피의 흙은 아다마라고 불렀다. 라틴어 사람의 기원도 흙이라는 휴무스(humus)에서 왔다. 거기서 영어 휴먼(human)이 나왔다. 다 흙을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흙은 또 있다. 이쉬(ishi)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남성형 흙 이쉬와 또 거기에 여성형 어미가 붙은 이쉬-하(ishi-ha)가 나온다. 여자는 남자 이쉬에 여성형 어미 하(ha)를 붙여 이솨라 했다.그런데 히브리어 하(ha)는 여성형 어미뿐 아니라 방향격조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은 그 의미를 더 분명히 밝혀 주는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에서 방향격조사가 붙으면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이 되고, 그 방형의 의미로 여겨지는 남자로부터 또는 남자를 지향한다(intention)고 해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적 형태는 고대 독일어를 거쳐 오늘날까지 독일어나 영어에 남아 있다. 고대 독일어에서 방향을 뜻하는 ‘보’(wo, 영어로는 where)가 남자(Man)에 붙어 여자(Woman, 이 경우는 접두어다)로 쓰였고, 이는 영어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하여튼 사람과 관련된 모든 단어가 흙에서 나왔다는 걸 보여주는 이런 어원적 관련성은 매우 흥미롭고도 주목할 만하다. 흙이란 인간의 재질적인 기원을 보여주는데, 지구의 땅이나 우주의 별을 비롯해서 실바람에도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는 먼지까지 다양하다. 시편은 이런 흙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티끌’이라는 고상한 시적 언어로 번역했지만, 인간이 먼지와 같이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이런 먼지와 같은 피조물 사람을 하나님은 속절없이 높여 주셨다. 인간 스스로조차 정말 자기가 높은 줄 알고 살아갈 만큼 높여 주셨다. 그는 그 영광스런 고양된 위치를 감사하며 자기소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빗나가고 말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와 신분, 권한과 영광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 양 손에 움켜쥐며 살아갈 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탐욕을 발휘하여 확장하고 증대하려고 무슨 일이든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거창하게 역사나 문화속의 인류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으로서 인간 개인과 가정의 관계 속에서 양보나 배려가 아닌 갈등과 투쟁에 휘말리는 우리 모습을 말한다.빌립보서 2장은 이런 아담적 인간됨의 기원을 전제로 그 아담과는 정반대로 다른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스스로를 낮추고 내주며 겸손하게 메시아로서 임무를 수행했는가를 칭송하는 시를 소개한다. 일명 “그리스도 찬송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인데 (이 말은 그냥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여 군주처럼 군림하지 않고 종으로 성육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종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비천함까지 내려가셨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다 실패했던 아담과 다르게 예수는 자신을 다 비우시고 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셨다. 우리는 남보다 더 낮은 자리로 스스로 자청해서 내려가기가 힘들어서 못하고, 그래서 십자가를 보기는 보아도 짊어지기가 그토록 힘든데 이런 십자가를 겸손하게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품어 보라고 바울은 자신의 통찰을 나눈다.자, 보라. 예수께서 순종하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분은 주(kyrios)로 높임 받고 모든 피조세계의 모든 존재가 무릎 꿇어 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왕 중의 왕의 보좌를 회복했다. 낮아짐으로 다스리는 권위를 회복하였다. 여기 낮아짐의 비밀이 있다. 우리는 낮아지고 싶어도 낮아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그걸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부요하시기 때문에 뭘 더 채울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셔서 쉽게 낮아질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부족하고 제한적이고 결핍의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법칙적인 걸 말하기보다 바로 예수의 기독론적인 특성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꾸만 뭔가를 더 채워야 배가 부르고 만족하며 안도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인간은 물질이 더 많아져야 하고, 권세가 더 높아져야 하며, 명예가 더 커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막상 그것들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의 만족은 아주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라 계속해서 더 가지고 채우려고 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스스로를 내주며 비우실 수 있다면,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채우려고 안달을 한다. 이렇게 아담(인간)의 움켜쥠에 비교해서 비움(케노시스)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접근하는 신학을 ‘아담-기독론’이라고 한다.인간은 왜 이기적인가? 심지어 루터의 표현대로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성도의 모임 교회조차도 때때로 이기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피조물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나 교회의 이기성을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쭉 이렇게 살아 왔다. 그가 왕이나 제사장이나 장군이든지, 학자나 농부나 엔지니어든지, 누구나 이렇게 살아 왔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동기로 살아 왔다. 그가 나이가 많은 노인이든지, 청년이든지 어린애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왔다. 나를 내세우고, 나를 주장하고, 나를 채우며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는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문화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인간 이기성의 해독제로 5절을 제시한다. “너희는 먼저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인간이 개인이나 공동체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해독하려면 스스로를 비우고 내주고 희생하신 예수를 품을 때, 길이 열린다.모든 문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교육학이나 신화나 신학이 이와 관련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나!’라고 하는 자기중심성에서 시작되는데, 성경의 기원을 모르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유일한 존재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하나님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고, 자연과 세상을 맡기셨다. 온 세상과 그 안의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까 인간도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처럼 왕이다. 왕 노릇한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타락한 왕은 원래 있어야 할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이제 내려와야 한다. 바울은 그만 멈추라고 말하며, 비우라고 한다. 그냥 안 되니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빗나간 왕의 소명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왕으로 부르셨다. 인간은 모두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 맞다. 아담은 왕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권세를 주셨다. 물론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원래는 왕이라 해서 무턱대고 군림하면서 다스리는 존재가 아닌데, 아담 이래로 인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구약에서 왕이라는 말은 멜레크(melek)인데, 보냄을 받은 메신저 말레크(malek)와도 비슷하다. 왕을 뜻하는 또 다른 말 쇼페타(shopeta)는 복수 쇼페팀(shopetim)으로 구약 사사기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재판관들이란 뜻이다. 사사들은 왕처럼 재판을 하거나 재판해서 판결을 내리는 일로 백성들을 이끄는 왕이다. 그런데 재판관이나 왕은 어떻게 재판을 하냐면, 백성에게 귀 기울여 잘 듣는다. 피해자가 억울한 일이 없는지, 공평한지, 정의로운지, 이런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다. 왕은 백성이나 지배하는 대상이 억울하지 않도록 문제를 풀어 주거나 해결해 주어야 했다. 그런 왕을 올바른 왕 또는 재판관이라 했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왕의 기준은 다른 말로 의롭다거나 정의롭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째다카(tzedaqa), 미슈파트(mishpat)이다. 재판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세상의 다른 피조물의 이름도 지어 주고 보호하고 섬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를 본받아서 의롭게 다스리라는 말이다. 세상을 보호하고 가꾸며 이끌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다. 다른 말로 왕의 소명이다. 그런데 아담 이래 어떻게 되었는가? 왕으로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 세상에 대해 완력을 사용하고 유린하며 정복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실제로 모든 왕을 보면, 저마다 무력을 키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제국을 만들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가?성경이나 세상의 역사가 다 똑같다. 처음부터 빗나간 세상이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담처럼 에덴에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꾸로 세상에서 부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세계-내-존재로 살다가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는다. 낙원이라는 에덴 정원에도 뱀이 있었지만, 우리의 세상이라는 정원에도 뱀은 있다. 우리도 아담처럼 왕으로 부름을 받지만 의로운 왕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교만이라는 자기중심성의 뱀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에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소명을 순종하기엔 위험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경험을 내세우는 고집이 강하다. 자기주장이 센 편이다. 특히 이런 성향은 한국 남자들이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을 따르지 않는 걸로 나타난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따른다. “내 생각에는 이 길이 맞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가도 된다.” 때로는 교통규칙 위반도 서슴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각보다 죄의식은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 “내 판단이 신호등만 못하랴.” 적반하장에 뻔뻔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를 삼는 쪽이 깐깐하 것이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비록 교통법규 준수율이 OECD 국가에서 특히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들은 결코 법을 어기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의식이 강해서 스스로 판단할 뿐이다. 그렇다고 중앙선을 가로질러 가거나 인도로 차를 몰고 가면서 내 찻길이라고 우기는 서쪽 이웃나라에 비하면 선진 교통문화라 여기지만, 여전히 “내 생각에는 괜찮지!” 싶은 곳은 어디든지 유턴이나 파킹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내 생각에는”(In my opinion)이란 말은 토론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의견 개진의 관용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인 겸손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교회에서 회의할 때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테면, 목사나 장로가 당회나 제직회에서 이런 말투를 사용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성경이 중심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안건은 없어지고 인간중심의 모임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말할 때는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기보다 “성경을 보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인간이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이 새로운 전통은 데카르트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전통에 따르면” “교회에 의하면” 하는 말을 했지만, 데카르트는 새로운 삼단논법을 제시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가 인간의 자기 생각이 자기 존재를 결정한다는 의심의 방법론에 대한 명제다. 무엇이든지 회의를 하고 모든 것을 의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가령 2+3=5라는 수학은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맞는 답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런 수학에서도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마가 있을지 모르니 의심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큼은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한다. 결국 생각하는 자기 자신만 남더라는 이 말은, 잘 살펴보면 자기중심성을 강화시킨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주관적인 인간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만들어버렸다.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문화가 더 뿌리 깊게 정착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인간은 주객 대립의 도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이원론이 여기서 도식화하고, 하나님이 사고의 전제에서 사라졌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주체 곧 주인이 된다고 여긴다. 주관이냐 객관이냐를 따지는 것이 전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갈수록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주체성만 강화되었다.우리끼리 누구의 생각이 맞느냐고 시비하는 대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는 것은 이제 인간의 안중에서 멀어졌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의 중심을 좌우하는 위치에서 사라지는 대신 “내 생각에는”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 할 수 있을까? 자꾸만 자기중심성만 강조하고, 이기성만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말뿐이다. 이제 여기서 멈춰야 한다. 판단을 멈추고,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그걸 인정해야 한다. 나만 바꾸면 된다. 내 생각을 리셋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바로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코기토’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나의 존재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아담과 같은 존재인 우리는 “내 생각”을 주장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나 명예나 권위를 취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취하고 하나님과 겨루어 왕 노릇까지도 주장하는 삶에 익숙하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내려오시고 낮아지셨다.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끄러움의 자리까지 나아가셨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죄인이 되셔서 죄인이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치르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매우 특이한 동사를 사용한다. 바로 둘째 아담 예수를 첫째 아담에 비하여 그의 성육신을 소개하면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문장에 사용된 ‘취한다’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취한다는 동사, 하르파그모스(harpagmos)는 신약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용어로 훔친다(plunder) 또는 강탈한다(robbery)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것을 훔쳐 세상에 죄가 들어왔지만, 예수께선 아담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를 탐내고 취하고 훔친다는 점이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때로는 어리석은 이중적 신분을 가장해서 하나님의 소유인 세상을 스스로 재단하고 잘라내고 훔친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걷어가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세상을 훔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특히 한국 교회는 아담의 전형적인 후예로 자신들을 부르시고 높여준 진정한 영광의 주인에게 순종하기는커녕 창조의 주인이며 구원의 왕을 대신해서 왕 노릇하고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거나 구원의 결정권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세상의 왕처럼 군림하는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의 이기심과 탐욕을 감추기 위해 세상을 정죄하므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세상을 훔치지만, 이제 예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회개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회복하라이제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훔치는 행위를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회개다. 회개라는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문자 그대로라면, 아는 것을 넘어간다 또는 바꾼다는 뜻입니다. 명사 노에오(noeo)는 철학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는데, 정보를 안다기보다 깊이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어 슈브(shoov)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회개와 관련해서 출애굽이라는 말 엑소더스(Exodus)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말도 엑스(ex)와 호도스(hodos)가 붙은 합성어로 길을 나온다(out of way)는 뜻이다. 노예로 이집트에서 살던 중에 그 삶의 길을 나온다는 뜻이다. 이게 구원 아닌가? 살아가던 옛길을 벗어나서 돌이키는 회개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회개 한번으로 우리의 삶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해야 하고, 매일같이 해야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돌이켜야 한다. 예수와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했다. 그렇게 자기의 길로부터 벗어났다. 이는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통해 가능했다. 그걸 가능하게 도우시는 성령님은 비밀의 덤이다.보통 삼위일체 교리가 모든 교리 중에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동방 교부 다메섹의 요한이 찾아낸 헬라어 신학 용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순환(rotation)이란 말로 페리(peri, 둥근, around)와 코레인(chorein, 여지를 만드는, to make room)의 합성어다. 다메섹의 요한은 페리콜레시스를 삼위 하나님의 상호순환, 상호내재, 상호침투의 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했다.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야말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이후 삼위일체를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 좋은 접근 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치 입체를 평면에서 다루는 것과 같다. 3과 1을 평면에서 3이 1이 되고, 1이 3이 된다는 모순을 반복할 뿐이다. 모순과 비합리성은 1(하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은 숫자 하나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내재된 연합이며, 서로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다.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상호순환성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공동체적 의미를 간과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할 당시부터 공동체적 연합의 사역을 펼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적 형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 “우리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존재 속에서 이런 본성과 속성을 봐야 한다. 마치 앙리 마티스의 ‘윤무’에서 무희들이 손을 잡고 하나의 춤을 추는 모습처럼, 우리 사람에게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들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이란 그런 뜻이다.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교회나 세상도 다 공동체적 연합의 본질을 가진다.예수께서는 이를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적인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를 품으면 된다. 우리는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계획을 완성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그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연합되어야 한다. 예수를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커무니오 쿰 크리스도”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세례 때도, 성찬 때도, 예배 때마다…, 아니 우리 가정에서 공동체적 연합을 시도할 때마다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예수와 연합된 삶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억하고 확인하라는 말이다.성경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도전한다. 그런데 이 편지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이 편지를 같이 쓴 디모데(이름은 바울과 디모데로 나오지만, 디모데가 썼을 것이다)나 또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를 본받으라고 도전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일어나야 한다.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다. 바울은 회당이 없어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빨래터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 있던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교회가 생겼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원형이지만, 한 개인의 가정이 곧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가정이고 가정의 확대다. 바울은 이런 가정교회를 경험하면서 또한 가정교회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전하는데, 빌립보 교회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그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바로 환대(hospitality)하라는 것이다.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가이오에게 감사를 전하는데, 그 이유가 온 교회를 잘 돌봐줬기 때문이라 했다. 자기도 로마를 방문할 계획인데, 잠시 들러 기쁨을 나누고 후원을 얻어서 스페인에 갈 계획이니 재정적으로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염치없는 행동이 아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과 가정교회 사이의 상호의무요 거룩한 계약이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를 전제로 기록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디모데를 보냈고, 로마에 뵈뵈를 보냈고, 교회는 그들을 환대했다. 예수님은 아예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이 마을 저 마을로 보내시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져서 이집 저집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복음을 가르치도록 했다(행 5:42).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수송성, 환대다. 사도행전 16장의 간수가 바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접대했다. 우리도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와 공동체적 연합을 경험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이 교회와 연결된 것을 기억하고 연합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때,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 생각이 교회로 열려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예수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예수와의 연합이 시작이다. 한 개인이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세워 가며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이루길 소망한다.[주]1. 김세윤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Eerdmans 1985)는 이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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