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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으로 자녀에게 감정의 소중함을 가르치라
by Courtney Reissig
2023-12-12
벤 사스는 The Vanishing American Adult(사라지고 있는 미국 어른)에서 회복력이 뛰어난 아이들로 키우는 사례를 제시한다. 그는 인내, 노력, 고난을 배우는 게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지 이야기한다. 이 책은 대학 총장으로 재직하는 내내 장기간 관찰한 연장된 사춘기에 대한 대응과 함께 미국에 필요한 다음 세대의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려는 노력의 일환이다. 아이들이 회복력을 키우도록 돕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스의 말에 동의하지만,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회복력을 목표로 하는 순간,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탐색하도록 어떻게 도울까에 관한 질문이 필연적으로 제기되며, 거기에는 우리가 쉽게 빠지는 두 가지 함정이 있다.하나는 어려운 일로부터 아이들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예 아이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아이들이 무너진 이 세상 때문에 상처받기를 바라지 않는 부모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힘들 일로부터 자녀를 보호하려고 한다. 반면에, 자녀가 부서진 내면을 가지고 살기를 원치 않는 부모는 무심코 자녀들이 감정을 꾹꾹 채우게 만든다. 그러나 정서적 회복력을 가진 자녀를 키우는 보다 나은 방법은 성경에 있다. 우리는 좋은 때나 나쁜 때나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치는 데 시편을 활용할 수 있다.감정은 좋은 것이다하나님은 감정을 지닌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셨다. 우리는 기쁨을 느낀다. 고통과 슬픔, 설렘을 느낀다. 이 모든 감정은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에 대해 뭔가를 말해 준다. 때때로 감정은 무언가를 하라고 지시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큰 개에게 겁을 먹고 도망가기도 한다.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에 대한 사랑처럼, 감정이 소망을 드러내기도 한다. 불안감이나 압도감과 같은 감정은 우리의 한계를 상기시켜 준다. 우리는 자녀로 하여금 느낄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신 하나님을 알게 함으로써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좋은 것임을 인식하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슬프다”라고 말하는 자녀에게 그 즉시 등을 두드리며 입에 발린 말로 격려하지 말고, 시편을 가르치라. 너와 똑같이 슬퍼했던 다른 그리스도인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슬픔에 신실하게 귀를 기울여 주셨다는 사실을 시편으로 가르치라. 시편에는 구약성서의 서사와 평행을 이루는 내용이 많으며, 따라서 성경 속 인물들의 영혼을 엿볼 수 있는 창을 제공한다. 우리는 배반을 말하는 다윗을 시편에서 만난다(55편). 짧은 인생의 허무함을 알려 주는 모세의 글도 있다(90편). 그리고 의심과 환멸을 겪는 에스라 사람 헤만을 본다(88편). 시편은 한 마디로 구약의 신자들이 자신의 어려움, 감정, 시련, 의심을 하나님께 드러내고 기도한 내용을 모은 것이다. 다양한 상황에서 부모는 주님 앞에서 자신의 감정을 처리하는 방법을 보여 주는 모델로서 시편 앞으로 자녀를 데려갈 수 있다.감정이 반드시 죄로 이어지는 건 아니다감정을 무시해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탐닉해서도 안 된다. 때때로 감정은 우리의 죄를 드러내는 지표가 된다. 예를 들어, 자녀가 친구의 새 장난감이나 운동 경기의 성공을 보면서 질투심을 느낄 수 있다. 느낌이 존재하지 않는 척하지 말라. 감정을 인정하고 그것이 어떻게 우리 삶에서 죄(탐심)로 이어질 수 있는지 보여 주라. 질투심을 결코 슬프거나 행복한 감정과 똑같이 간주해서는 안 된다. 시편 4:4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는 분노하여도 죄짓지 말아라. 잠자리에 누워 마음 깊이 반성하면서, 눈물을 흘려라.” 시편 시인은 우리에게 아예 화를 내지 말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대신 분노하더라도 죄를 짓지 말라고 한다. 죄에 굴복하지 않으며 화를 내는 방법, 곧 온전히 느끼면서도 죄를 짓지 않는 방법이 있다. 시편 시인은 감정이 죄에 대한 변명이 될 수 없다고 말한다. 자녀가 분노든 또는 비슷한 과도한 감정을 느낄 때, 그 감정이 자신을 죄로 이끄는지 물어 보고, 그렇다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도록 가르치라. 시편 51편은 회개의 모델을 제시한다. 감정은 나눌 수 있다시편 4:4이 분노를 마음에 담더라도 잠잠하라고 말하지만, 다른 시편에서는 주님께 마음을 쏟아붓는 것에 관해서 이야기한다. 대부분의 시편이 고난 중에 도움을 구하는 부르짖음이다. 시편에는 하나님께 드리는 개인 기도도 있지만, 적지 않은 내용이 집단이 부르짖는 기도이다. 시편은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여 울부짖으며 회중으로서 겪는 고통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좌절감을 느낄 때마다 감정을 마음껏 표현하는 것이 항상 현명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 자제심을 발휘하는 한도 내에서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고 싶은 충동은 얼마든지 성경적이다. 자녀에게 감정을 가르칠 때, 그들의 감정을 듣고 싶어 하며 또 믿을 수 있는 친구와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성경적이라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인은 감정을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어야 하며 또한 모든 감정을 주님 앞으로 가져가야 한다. 감정을 항상 믿어서는 안 된다 시편 73편에서 우리는 악인의 형통 앞에서 하나님의 선하심과 돌보심을 의심하려는 유혹을 받는 시인을 만난다. 그는 시기와 탐욕에 자신을 내맡기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강렬한 느낌이다(22절). 그는 거의 미끄러질 뻔하였다(2절). 내내 신실하게 행하던 그가 거의 실족할 뻔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자신의 감정을 주님께 가져갔을 때 그의 마음과 관점이 바뀌는 것을 본다. 자신의 감정을 믿고 싶은 유혹을 받는 자녀에게 시편 73편 같은 시편을 읽게 하라. 자녀가 이 부서진 세상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착각을 하지 않도록 가르침과 동시에 오로지 감정만이 삶의 원동력이라는 개념에 당당히 맞서도록 가르치라. 우리는 종종 사람들이 “자신만의 진실”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듣는다. “어쩔 수 없었어요. 그게 내 솔직한 기분이었거든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 잘 알고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감정을 존중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패한 게 마음이라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예. 17:9-10). 감정을 믿는 순간 우리는 감정에 속아 잘못된 길로 들어설 것이다. 진리의 표준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가르치라. 우리의 모든 감정까지도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복종해야 한다. 감정이 우리를 배신할 때가 있다. 행여라도 감정이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닌지 우리는 수시로 감정을 성경과 비교해야 한다. 감정이 하나님의 말씀을 배반한다면, 그건 결국 우리를 배반한다는 말이다. 자녀에게 더 나은 길을 보여 주라감정이 고조되는 순간에는 자녀의 눈에 마치 감정만이 유일한 실제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감정을 신뢰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으로 그들을 이끌 수는 없다. 그들이 감정을 지닌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장점을 가르침과 동시에 그 감정이 얼마든지 틀릴 수 있는 타락한 감정을 지닌 존재로 존재하는 현실까지 모두 인정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우리가 먼저 내가 느끼는 감정에 대해서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삶에서 감정의 위치를 인정하고, 더불어서 죄에 대한 충동과 어떻게 싸우는지를 이야기해야 한다. 그러고 나면 얼마든지 자녀의 마음을 살피고 그들이 느끼는 감정의 타당성을 분별할 자격을 가진다. 우리 문화는 감정에 대해 두 가지 옵션을 제공하는 것 같다. 감정을 항상 신뢰하거나, 아니면 아예 감정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다. 둘 중 어느 쪽도 진짜 회복력을 가진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인식하고 감정을 표현하는 건전한 방법을 찾도록 도와야 한다. 시편을 지침으로 삼아서 그들에게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더 나은 방법을 보여 주라. 그것은 감정을 느끼는 존재로 우리를 창조하시고 올바르게 느끼도록 가르치기 위해 성경 전체를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는 길이다. 원제: Use the Psalms to Teach Kids About Feeling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손편지의 온기
by 양혜원
2023-12-11
예쁜 카드나 엽서를 보면 사는 것도 좋아하지만, 거기에 몇 자를 적어 누군가에게 보내는 것도 좋아한다. 간단한 안부든, 감사의 표현이든, 생일 축하든, 크리스마스나 신년 축하든, 비록 글씨는 잘 못 쓰지만, 그래도 직접 손으로 써서 봉투에 담아 어울리는 스티커 하나 장식으로 붙이고, 주소를 적어 우체국의 손을 거쳐 상대에게 보내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고 나면 제법 마음이 훈훈해진다. 지난가을에는 처음으로 일본어로 그런 감사 엽서를 교토 어느 카페의 여사장에게 적어 보냈다. 교토의 가을을 노래하는 친구의 꼬임에 짬을 내어 조금 긴 주말의 형식으로 짧게 여행을 다녀온 후였다. 그때 교토의 어느 절 근처에서 다리를 쉬기 위해 들어간 카페의 사장은 마실 것도 몇 개 없는 메뉴가 전혀 허전하지 않게, 카페라테의 거품을 직접 내와 풍성하게 얹어 주고 교토의 다과라며 서비스도 주고, 지도를 펼쳐 보이며 근처에 가볼 만한 곳들을 소개해 주었다. 볼펜으로 경로를 표시해 주면서, 다리는 튼튼하냐, 튼튼하다면 여기까지 한 50분 걷는데 가 볼 만하다는 둥, 상대의 연령대를 감안하는 듯한 세심한 안내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별다른 간섭없이 편하게 커피를 마시고 경치를 감상하다 가게 해 주었다. 적절하게 다가가고 적절하게 물러나는 그 주인의 손님 접대에 마음이 따뜻해졌고, 그 여운 또한 길었다. 받아온 지도에 마침 그 카페의 이름과 주소가 도장으로 찍혀 있기에, 나중에 기억할 요량으로 보통은 현지 여행이 끝나면 버리고 오는 지도를 한국까지 챙겨서 왔는데, 아, 주소가 있으니, 카드도 보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마침 교토에서 산 가을에 어울리는 엽서가 있었고, 새로 산 잉크 펜도 있었다. 일본에서 알게 된 지인들과 말은 짧은 일어로 해도, 편지나 카드를 보낼 때는 영어 아니면 한국어로 썼었기에, 일본어 편지는 처음이었는데, 볼펜과는 다르게 새로 산 잉크 펜으로 일본어를 쓰니 글씨가 제법 그럴듯하게 써졌다. 그때 참 고마웠다, 당신이 안내해 준 곳도 가 보았는데 좋았다, 기회가 된다면 다시 거품 폭신한 카페라테 마시러 가겠다는 내용의 글을 쓰고는, 봉투를 봉하고, 스티커를 붙이고, 우체국에서 떠나보냈다. 그 여사장이 이 엽서를 제대로 받았을지 어땠을지, 받고는 무슨 생각을 했을지는 모르지만, 그의 환대에 이렇게 반응함으로써 내 나름으로는 한편의 마음이 아니라 주고받는 마음이 되고 싶었다. 카드를 쓰는 즐거움은 일찍이 십대 시절에 터득했다. 크리스마스를 유난히 좋아해 11월 말부터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누구에게 카드를 보낼 것인지 리스트를 만들고 선물은 누구에게 무엇을 할지 고민했다. 십대 초반을 영국에서 보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크리스마스 장식부터 선물 아이템까지 일찍이 가게와 거리를 장식하는 통에 그 분위기에 휩쓸리기도 쉬웠지만, 우편물이 몰리기 때문에 크리스마스 전에 카드가 한국에 도착하게 하기 위해서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이유로 나의 크리스마스는 일찍 시작되었다. 크리스마스 안에 우편물이 도착하려면 언제까지 발송해야 하는지 날짜를 확인하고 거기에 맞추어서 카드를 부치기 위해서 일찍부터 리스트를 만들고 카드를 준비하고 카드 메시지를 썼다. 나의 카드 쓰기는 크리스마스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누군가의 생일에는 생일 카드를 썼고, 그 외에 편지도 수시로 썼다. 사실 핸드폰도 없고, 전화기도 한 가정이 하나를 쓰던 시절을 살았던 우리 세대에게 편지로 그간의 일을 전하고 상대에게 하고픈 말을 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은 아니다. 처음 대학에 입학했을 때는 자기가 다니는 학교의 학보를 보내는 것으로 안부를 전하는 풍습도 있었다. 중학교 이후 소식이 끊긴 친구로부터 어느 날 대학교 과사무실로 그가 보내온 학보를 받았을 때 얼마나 반가웠던지. 학보를 감싼 하얀 띠지는 편지지와 봉투의 역할을 다하여 겉에는 주소가 적히고 뜯어서 펼치면 안에 편지글이 있었다. 대개는 간단한 인사말 정도였지만, 그래도 이런 우편물을 받으면 누군가가 나를 기억해 주었다는 기분이 들어 하루 종일 마음이 따뜻할 수 있었다. 내 또래의 사람들도 더는 편지도 카드도 쓰지 않은 시절이 오고 나서도 나는 제법 꾸준히 카드도 쓰고 편지도 썼다. 물론 그 대상의 수는 급격히 줄었다. 문자와 이메일이 주된 소통 수단이 되고 나서는 손으로 쓴 카드나 편지는 아무래도 좀 특별한 계기나 대상에 국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 또한 40대로 들어서면서는 그나마도 거의 하지 않게 되었고, 크리스마스카드를 미리 챙겨 해외로 대량 발송하는 일도 없어졌다.그러다가 카드를 보낼 사람의 리스트를 다시 짜게 된 것은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일본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지낼 때였다. 카드라기보다는 사실 연하장이었는데, 일본의 큰 명절은 크리스마스가 아니라 신년이었고, 그때 일본 사람들은 카드가 아닌 엽서 형태의 연하장을 인사로 주고받았다. 일본에서 산 지 1년 정도 지나면서 나에게도 친구와 지인들이 생겼기에 그곳에서 생긴 인연들을 챙기면서 나는 연하장을 준비해 보냈고, 그들도 내게 연하장을 보내주었다. 비단 연하장만이 아니었다. 일본에서 내가 다니는 길목에 우체국이 있어서도 그랬지만, 일본 문화 전반에 아직도 편지 쓰는 관습이 남아 어딜 가나 쉽게 이쁜 편지지와 엽서 등을 접할 수 있어서 일본 사는 동안 한동안 잊었던 편지 보내는 습관을 다시 붙여 부지런히 이 나라 저 나라의 지인에게 우편물을 보냈다. 이제 긴 편지는 쓰기 어렵게 되었어도, 이쁜 카드나 엽서에 제법 빽빽이 적어 보냈다. 이 재미가 쏠쏠했는데, 귀국하자마자 맞닥뜨린 코로나 기간 아주 비싼 특급 우편 외에 일반 우편물을 해외로 보낼 수 없다는 게 내게는 매우 답답하고 힘든 일이었다.그런데 희한하게도 한국에서는 해외로 비싼 특급 아니면 일반 우편은 아예 부쳐주지를 않았는데, 일본에서는 우편물이 왔다. 연하장을 보내준 은퇴하신 여교수님도 있었고, 엽서와 기념품을 정기적으로 챙겨서 보내주는 친구도 있었다. 나는 받기만 하고 보내지를 못해, 문자로, 이메일로 고맙다, 아직 한국에서는 우편물을 부칠 수가 없어 안타깝다 메시지를 보내며 정말로 안타까워했다. 문자도 보낼 수 있고, 이메일도 할 수 있고, 심지어 줌으로 얼굴도 볼 수 있었지만, 인간 대 인간의 접촉을 최대한 자제해야 했던 시절에 손으로 쓴 편지를 받는 일은 좋은 기분이 며칠간 이어질 만큼 훈훈한 일이었다. 편지 쓰기를 자제해야 했던 그 시절에 딱 한 번 특급 우편을 보낸 일이 있다. 그리고 그 편지는 내가 유일하게 반송을 받은 편지가 되었다. 수신인은 작고한 유진 피터슨의 아내 잰 피터슨이었다. 2018년 10월, 일본에서 유진 피터슨이 작고한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의 책을 열두 권 번역했고, 2012년에 몬태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방문하여 하룻밤을 머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유진과는 인터뷰를 진행했지만, 사적인 대화는 잰과 더 많이 했던 거 같다. 둘째 아들이 막 이혼의 아픔을 지나고 새로운 출발을 했을 무렵이라 그런지 나에게 이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냐고도 물었고, 나의 스스럼 없음이 편했던지 너라면 언제든 환영이라는 말도 해 주었다. 혹시 잰은 글을 쓰지 않냐고 물었더니, 꾸준히 써온 일기가 있다며 주변에서 출판하라는 말도 한다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나 또한 꼭 출판해 달라고 부탁했다. 미국을 떠나기 마지막까지 유진과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나는 늘 유진과 잰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었다. 그리고 일본으로 와서 어느 정도 정착이 된 후에 그에게 편지를 보냈는데 처음으로 답장이 없었고, 그로부터 1년 후 그의 사망 소식을 접했다. 그 소식을 들었을 때 나의 마음은 당장 잰에게로 향했다. 그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무슨 말을 어떻게 써야 할지 잘 정리가 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일본 생활을 마치고 귀국했는데, 코로나 기간을 지나면서, 아, 더는 미룰 수 없다, 그를 기억하는 내 마음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에 큰마음 먹고 몇만 원짜리 특급 우편으로 그에게 편지를 보냈던 것이다.남편이 작고했으니, 여전히 몬태나의 그 집에 그가 살고 있는지 확신은 없었지만, 그 집의 내력을 생각할 때 어떻게든 편지가 전달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후 편지가 반송되었을 때, 한편으로는, 그래 내가 너무 늦었지, 생각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어쩐지 내 마음을 거절당한 것 같아 조금 슬프기도 했다. 내가 그 편지를 보냈을 때 그는 이미 사망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였다. 내가 만났을 때의 잰은 유진과 달리 여전히 힘이 있어 보였기에 나는 그가 이디스 쉐퍼처럼 남편을 먼저 보내고도 그 후로 오래 살면서 책도 쓰고 할 줄 알았다. 그런데 남편이 가고 불과 8개월 만에 그도 갔다는 것이다. 수취인불명이라더니,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분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정말로 수취인불명인 채로 발신인에게로 돌아와 버렸다. 나의 편지쓰기가 조금 이례적으로 보일지 모르나, 그리스도인에게 편지는 사실 매우 친숙한 매체이다. 알다시피 신약 성경의 태반이 편지이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날의 편지처럼 개인 대 개인 사이의 글은 아니지만, 불특정 다수를 위해 쓰는 소설과 같은 장르의 글과 달리, 편지는 수신인이 있고, 그 수신인을 염두에 두고 쓰는 글이다. 하지만 분명한 수신인이 있다고 해서 의도대로 전달된다는 보장이 없는 것 또한 편지의 특징이다. 편지는 우편 사고로, 혹은 나의 경우처럼 상대가 사망해서, 수신인에게 전달되지 못할 수 있다. 제대로 전달된다고 해도 내가 전하고자 한 마음 그대로 수신인이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는 보장도 사실은 없는 게 편지이다. 자기 나름으로는 정성스레 쓴 편지가 상대의 손에서 찢겨버릴 가능성도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자신이 만난 적이 없는 로마의 교회에 편지를 쓰면서 바울은 자신과 자신의 메시지가 제대로 그들에게 전달되고 받아들여질 것이라고 얼마나 확신할 수 있었을까. 다른 서신서보다 훨씬 더 개인적인 빌레몬에게 쓴 편지의 경우도, 감정적으로 제법 복잡하게 얽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오네시모와 빌레몬과 바울의 관계에서 과연 이 편지는 그 필자가 의도한 대로 전달자와 수신자 사이를 화해시킬 것인지, 그것은 제법 권위 있게 비치는 바울조차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자신의 선의처럼 빌레몬의 선의도 기대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그 편지를 쓰지 않았을까.달력이 12월을 넘기니 제일 먼저 머리에 떠오르는 것이, 아,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 이다. 그와 동시에 몇 명의 얼굴들이 떠오른다. 직장을 옮기면서 7월부터 유례 없이 바쁜 날들을 보내고 있지만, 그래도 너무 늦기 전에 짬을 내어 새로 산 잉크 펜을 들고 ○○에게, 혹은 ○○께와 함께 시작하는 카드 편지를 몇 장을 써야 할 것 같다. 지금도 서랍에는 수취인불명으로 돌아온 카드 편지가 봉해진 그대로 남아 있다. 제대로 도착할지 받은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내 손을 떠난 보낸 편지의 운명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그 온기를 전하는 한쪽 편의 일은 하고 싶다. 원래 크리스마스는 하나님의 선의(good will)가 당신과 함께한다는 좋은 소식(good tidings)을 전하는 시즌으로 오랫동안 교회는 지켜 왔다. 이 소식을 받는 사람의 반응과 상관 없이 전하는 사명을 받은 것도 교회이다. 여러분에게도 하나님의 선의가 함께하시기를, 그리고 그 선의의 온기도 계속 전해 나가시길 빈다.
문화 참여에 필요한 네 가지 ‘R’
by Trevin Wax
2023-12-07
Mere Orthodoxy에 실린 브래드 이스트(Brad East)의 에세이 “한 번 더, 교회와 문화”는 올해 나온 글 중에서 가장 통찰력이 번뜩인다. 이 글은 기독교왕국(Christendom, “사회, 문화, 법률, 예술, 가족, 정치 및 예배가 교회의 영향력으로 포화되고 교회의 권위에 의해 정의될 때 기독교 문명에 부여하는 이름”)의 흥망성쇠에 대한 고찰로 시작한다. 그리고 1951년에 처음 출판된 리처드 니버의 고전 ‘그리스도와 문화’를 다시 살펴본다. 그리스도와 문화니버는 그리스도인이 주변 문화와 관련하여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에 관한 하나의 기준을 개신교인에게 제시했다. • 문화에 반대하는 그리스도 • 문화의 그리스도 • 문화 위의 그리스도 • 역설 속의 그리스도와 문화 • 문화를 변화시키는 그리스도(니버의 분류법에 대한 개요는 내가 쓴 요약 및 비평을 참조하라.)이스트는 미국 상황을 표준 규범으로 가정하는 한 교회와 관련해서 이런 식의 복음주의적 개신교의 사고방식은 힘들다고 생각한다. 바로 여기에서 그의 비판은 돈 카슨이 니버의 작업을 재검토한 지점과 일치한다. “모든 것에 다 들어맞는 하나의” 사고방식을 반대하는 카슨은 성경이 각기 상황에 따라서 서로 다른 요소를 옹호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사면초가에 시달리고 억압받는 북한의 신도들에게 “문화를 변혁하는” 자세를 취하라고 말하는 게 말이 되는가?”)신실한 존재? 이스트는 계속해서 교회와 문화의 관계에 대한 다른 유형을 찾아낸다. 제임스 데이비슨 헌터(James Davison Hunter)의 To Change the World도 그중 하나다. 헌터는 (1)방어력(Defensive Against), (2)적실성(Relevance To), (3 순결성(Purity From)이라는 세 가지 용납할 수 없는 접근 방식을 설명한 다음에 대안으로 (4)내부의 신실한 존재(Faithful Presence Within)라는 방식을 제시한다. 헌터는 신실한 존재가 대사명에 대한 순종일 뿐 아니라, 긍정과 대조를 모두 포함하여 문화에서 선하고 진실하며 아름다운 것은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우상 숭배적인 것은 무엇이든 전복시키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 이스트는 헌터의 작업을 인정하지만, 거기에는 네 가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1. 충분히 글로벌하지 않다. 미국이라는 맥락에 너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2. 충분히 역사적이지 않다. 오늘날의 세속성 정착을 교회 역사에서 만나는 예외가 아니라 표준이라고 가정한다. 3. 충분히 폭넓지 않다. 중상류층과 관련된 전문직에 거의 전적으로 초점을 맞추므로 전체 기독교 공동체에 대한 적용을 회피한다. 4. 충분히 경계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에게 금지된 기관과 직업에 대한 경계선을 제대로 긋지 않으므로 예리한 모순이 요구되는 미묘한 삶의 영역을 놓치고 있다. 앞에 놓인 더 나은 길이스트는 우리가 니버와 헌터 및 다른 사람들의 작업을 확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건 오로지 하나의 “올바른” 유형, 자세 또는 모델을 찾아야 한다는 고집을 포기할 때만 가능하다. 그는 이렇게 썼다. “교회가 문화에 충실하게 참여하는 네 가지 주요 방식이 있다. 그것들은 필연적으로 중복되고 본질적으로 서로 비경쟁적이다. 어떤 방식이 필요한가는 전적으로 콘텍스트와 콘텐츠에 달려있다. 교회가 그것들 가운데 어떤 것도 포기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반적으로 그것들은 같은 공동체에 있든, 다른 공동체에 있든, 더 큰 교회의 개별 구성원에 있든, 모두가 동시에 작동한다.”이스트의 작업이 가진 장점은 폭이다. 우리는 전근대와 포스트모던, 확립된 것과 해체된 것, 특권을 가진 것과 박해받는 것 등 가능한 모든 역사적, 정치적 맥락에서 각각의 방식을 적용할 수 있다. 그는 네 가지 방식을 네 개의 R로 요약한다. 1. Resistance(저항)“언제 어디서나 불의와 우상 숭배가 발견되는 곳에서 교회는 저항하도록 부름받았다. 교회가 목소리를 높일 사회적 권력이나 정치적 명성이 있든 없든 그렇게 해야 한다. 교회는 현존하는 권력에 ‘반대’하거나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방식으로 존재한다. … 정권이 그리스도인에게 우호적일 때에도, 심지어 정권이 공식적으로 기독교적이라고 할 때도, 저항이라는 과업은 필요하다. 저항은 다년생이다. 필요한 것은 오로지 순전한 인내뿐이다. 때로는 그것으로 충분하다.”2. Repentance(회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교회가 저지르는 죄와 범죄, 실패를 회개하라는 부름을 받는다. 즉, 교회가 보편적으로 저항해야 하는 불의와 우상숭배는 무엇보다도 교회 외부가 아니라 교회 내부에서 확실하게 발견된다. 심판은 하나님 집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여기서 만나는 그리스도의 명령은 그리스도 자신의 몸에서 발견되는 부패와 사악함을 ‘거스르며’ 또는 ‘그러함에도 불구하고’의 상태로 살라는 뜻이다. … 복음의 신뢰성이 교회의 실패 때문에 위협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도리어 실패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 더 끔찍한 경우는 그 부패를 은폐하려는 태도로 인해서 복음의 신뢰성이 위협받는다.” 3. Reception(수용)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세상으로부터 하나님이 주신 많은 축복을 받도록 부름 받았다. 하나님은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창조한 세상은 선하다. 그리고 오로지 그분만이 모든 민족과 모든 문화의 주인이시다. … 간단히 말해, 세상은 결코 기독교 신앙에서 근원을 찾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과 귀중한 유물로 가득하다. (물론 궁극적인 근원은 바울의 말 대로 그리스도이다.) 신자들은 결코 순진하거나 무비판적이 되어서는 안 되며, 그러한 경우에도 해야 할 유일한 일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전에 겸손히 손을 내밀어 받아들이는 것이다.”4. Reform(개혁)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말씀인 복음을 전파하도록 부름을 받았다. …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은 포괄적이다. 그것은 마음과 지성, 몸, 영혼에 다 전달된다. 말씀은 농민과 하인의 문제뿐 아니라 상인과 치안판사의 문제도 다룬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정의를, 민족들 가운데 정의를 명령한다. 거기에는 분리의 벽이 없다. 삶이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곳에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있다. 복음은 한 마디로 개혁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나라에서 무엇이 될 것인지에 대한 관점에서 사물이 있는 방식 안에 새로운 조정을 생성한다. … 때와 장소가 적절할 때, 그리고 성령이 역사하시는 때와 장소에서 이뤄지는 복음 선포는 문화를 뼛골까지 잘라낸다. 그럴 때 문화는 결코 더 이상 동일할 수 없다. 심지어 그 후로도 문화는 절뚝거리며 걷는다.”이스트의 제안은 니버 및 헌터의 분류법을 단일 모델로 축소하지 않고 가능한 모든 강점을 취한다. 그는 문화적 조건이나 역사적 상황과 상관 없이 실행 가능한 한도 내에서 모든 적절한 방법을 다 고려하라고 촉구한다. 나는 특히 오늘날 전 세계 교회에 적용이 가능한 방법을 찾도록 격려하고 또한 역사를 통틀어 교회가 했던 다양한 선택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 이스트에게 감사한다. 그의 에세이 전체를 읽기 바란다. 시간이 들어도 충분히 가치가 있다. 이스트의 분석과 주장에 대한 나의 요약이 당신의 호기심을 자극하길 바란다. 원제: The 4 Rs of Cultural Engage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일부다처 이단에서 나를 구하신 하나님
by Jared Larson
2023-12-05
우리 부부가 어떻게 만났는지 묻는 사람들을 만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맺어주셨는지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글쎄요, 우리는 사실 일부다처 모르몬교에서 만났어요”라고 말하는 순간부터, 그 이야기는 피할 수 없다.그럼 사람들의 눈이 커지면서 말을 더듬거린다. “뭐라고요? 잠깐만요…. 지금 뭐라고 하셨지요?” 당황한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를 무한한 은혜에 대한 간증으로 인도한다. 그건 의심, 하나님의 신실한 사랑, 몇몇 죽은 친구들, 그리고 팀 켈러의 책에 관한 이야기이다. 컬트나는 주류 모르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내 조상의 모든 줄기는 모르몬교 설립과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내가 열네 살이었을 때 우리 부모는 주류였던 예수 그리스도 후기 성도 교회를 떠나 컬트 집단인 모르몬 근본주의에 가입했다. 그들은 현대 모르몬교를 비판하고 조셉 스미스 시대 이후로 이루어진 모든 변화를 비난했다. 순종적인 아이로서 나는 부모를 따랐고 종말 시나리오로 가득 찬 세상에 몰입했다. 나의 전 생애는 온통 그리스도의 재림을 준비하는 데 쓰였다. 우리는 음식과 탄약을 비축했다. 외부 교육은 비난받았고, 젊은 결혼이 장려되었다. 열여섯 번째 생일을 맞고 나흘째 되던 날 아내는 나와 결혼했다.우리가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 것인가는 오로지 하나님의 오른팔이라고 믿었던 컬트 지도자인 예언자에 의해 결정되었다. 그의 말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게 가치있는 존재인가의 여부는 그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 여부에 달려있었다. 내가 속한 컬트는 우리가 지상에서 하나님의 유일한 선택받은 백성이며 그리스도의 재림이 우리의 의로움에 달려있다고 가르쳤다. 우리는 재림 예수가 가장 먼저 우리에게 오셔서 세상을 심판할 신성한 능력을 우리 각자에게 부여할 것이라고 믿었다. 우리는 가장 먼저 조셉 스미스가 세운 교리를 마음대로 변경한 주류 모르몬 교회를 제거할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끝나면 우리가 제시한 “복음”을 거부한 나머지 세상도 심판할 것이다. 의심모든 게 의심스럽기 시작한 건 내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였다. 우리 공동체에는 그리스도께서 오실 특정한 날에 관한 예언이 있었다. 수석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라며 그 진리를 확증했었다. 그러나 바로 그날 그리스도는 재림하지 않았고, 내 속에는 의심이 생겼다. 의심은 숨 막히게 만드는 두려움을 동반했다. 행여라도 선지자의 예언을 의심하는 내가 틀렸다면, 그것은 영원한 저주를 의미했다. 차마 그 위험을 감수할 수 없었기에, 나는 의심을 억누르며 계속 버텼다.그러나 의심과 두려움은 손가락에 붙는 송진 수액처럼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고, 씻어내려 할수록 더 끈적거렸다. 그리고 마침내 절망감으로 바뀌어 서서히 겉으로 드러났다. 나는 갇혀버렸다.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는구나…. 이런 생각을 품기 시작한 건 의심이 시작하고 약 육 년쯤 지났을 즈음이었다. 내가 하나님을 합리화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내 두려움이 비합리적이라는 걸 의미했다. 나는 은밀히 무신론을 즐겼지만, 아무리 하나님을 내 속에서 없애려고 애써도 내가 창조주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그분이 나를 본향으로 데려가길 원하신다는 생각을 차마 떨칠 수는 없었다.그렇다면 타고난 그런 사랑의 감각이 나를 달래줬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도리어 나를 화나게 했다.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하나님이 왜 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내버려 두는 걸까? 나는 컬트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떠날 것인지에 대한 확신을 줄 명확한 대답이 필요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이 없이 사 년이 더 흘렀고, 두려움은 계속해서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신앙어느 날 밤, 지혜로운 아내의 권유로 나는 무릎을 꿇었다. “하나님, 저는 더 이상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한 걸음도 더 나아갈 수 없습니다. 당신이 원하시는 일을 하시에는 내가 너무 부족합니다. 제발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저를 데려다주세요. 더는 못하겠습니다. 나는 당신 것입니다.”이 모든 기도가 내 입술을 떠나는 순간, 깨달음이 나를 덮쳤다. 하나님이 누구시며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서 그때까지 내가 알던 모든 건 다 종교와 행위의 기초 위에 세워졌다. 그러나 이것들은 불안정하고 신뢰할 수 없는, 움직이는 모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진짜로 믿을 수 있는 유일한 분은 예수님뿐이었다. 그것이 내가 성경에서 확인한 사실이었다. 하나님을 알려면 그리스도 위에 나의 기초를 세워야만 했다. 오로지 그리스도 한 분만이 합당했다.그날 밤 나는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고, 그렇게 했을 때 모든 게 바뀌었다. 그리고 찰스 디킨스의 소설에 나오는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하나님은 나를 다시 인도하기 위해 세 명의 죽은 영을 보내셨다. C. S. 루이스, 디트리히 본회퍼, 그리고 마르틴 루터였다. 물론 진짜로 그들의 영이 나를 찾았다는 말이 아니다. 내가 만난 건 그들의 글이었다. 톨킨의 환상에 매료된 나는 루이스를 찾았다. 본회퍼를 알게 된 건 텔레비전을 보던 아내 덕분이었다. 그리고 성경 주석을 찾기 위해서 킨들 무료 책을 뒤지다가 루터를 만났다. 이 세 사람의 삶과 글은 나를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으로 잇는 새로운 관계로 이끌었고, 은혜에 대한 아름답고 새로운 이해로 나를 제자 삼았다.컬트를 떠나고 몇 주 지났을 때 하나님은 내게 살아 있는 작가를 보내 주셨다. 그때까지 나는 팀 켈러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내가 접한 최초의 생존 그리스도인 중 한 명이었다. 컬트에서 살았던 내 이전의 삶을 처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에 나는 팀 켈러의 탕부 하나님을 읽었다. 친숙한 비유에 대한 그의 생소한 접근에 나는 크게 놀랐다. 하나님은 나를 그의 나라에서 탕자 동생으로 이끄셨을 뿐 아니라, 화를 내는 형으로도 이끄셨다. 그동안 나는 나 자신의 안전과 구원을 위해 필요한 모든 “올바른”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나는 자기중심적인 종교인에 불과했다. 켈러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참된 자유와 용납은 오로지 사랑으로 충만한 구주의 의로우심 안에서만 찾을 수 있음을 발견했다.이 모든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무한하신 사랑으로 나의 작은 가족을 어두운 곳에서 끌어내어 그의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하는 새로운 정체성을 주셨다. 이 모든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원제: God Saved Me from a Polygamist Cul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인간의 가치
by 전재훈
2023-12-01
인류 역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글입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고,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지요. 역사시대의 시작은 문명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합니다.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문명은 크게 넷으로 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 황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도문명입니다. 이들 문명을 확인하는 것이 문자입니다. 즉 문자는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죠.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합니다. 그리스 신화, 바벨론 신화, 구약의 원역사 같은 일들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선사시대는 돌을 들고 뛰어다니던 구석기, 신석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석기는 돌을 깨서 날카로운 돌을 사용한 타제석기 시대이고,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사용한 마제석기 문화였지요.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그냥 짐승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또 다른 짐승이었지요. 이들이 불을 발견하고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익은 고기는 씹는 힘을 줄여주어서 머리뼈를 가늘게 만들었고, 소화 에너지를 뇌로 보내 뇌가 발달하는 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이들이 농사에 눈을 뜨면서 정착된 삶을 살게 됩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소유가 생기게 되지요.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게 되고 재산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레 재산은 친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이로써 혈연의 개념이 생깁니다. 혈연이 생기기 전에는 모계 사회였습니다. 남자들은 사냥을 다녔고,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며 채집하고 살았지요. 남자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냥하던 습관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사나운 짐승과 눈싸움을 하고 절호의 순간을 잡아야 하기에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나무의 열매를 따면서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므로 여자들은 통화를 하면서 설거지하고, 거실에서 하는 수다에 끼어드는 게 가능한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가 되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농사지을 땅과 농기계 및 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졌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큰아들이 누군가 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 응당 리더를 결정해야 합니다. 추장이 되었건, 족장이 되었건, 마을 이장이 되었건, 그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요. 당연히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그의 장남계열이 승계하게 됩니다.씨족이나 부족이 여럿 모여 국가를 이루면 그 국가의 왕을 누가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힘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무리들은 하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그 하늘에 있는 신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리더를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신의 뜻에 따라 나라가 세워지고 신의 아들은 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사회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늘의 뜻을 점치는 제사장과 무녀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권력을 형성한 이들은 이런 하늘의 뜻을 독점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것이지요. 이런 문명이 시작될 때의 문헌들에는 신의 뜻을 묻는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황하문명의 오래된 갑골문에도 대부분이 신의 뜻을 구하는 질문과 그 뜻을 찾기 위해 점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문헌은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시대 이전 선사시대의 내용들에 대해 신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차용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가 불을 사용하면서 짐승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임을 자각했고, 나중에는 선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혈연관계로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은 그저 한 시대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던 이들이 신정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보편적 절대자인 하늘의 백성으로 승격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소속되기를 원하지요. 소속은 진영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영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런 갈등이 부딪치는 것이 전쟁이지요. 전쟁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대개 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하는 테스트를 전쟁을 통해 하게 됩니다. 또한 누가 진짜 신의 아들인가 하는 것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지요. 때로는 신의 뜻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는가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신이 없다는 생각을 못 하던 시대이니만큼 이해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뜻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옮겨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까지 성장했지요.하지만 실제로 그런 신이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가문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진짜 신의 아들인 예수님은 왕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요. 나머지는 다 가짜 아들들입니다. 즉 신이라는 것과 그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걸 깨달은 이들이 신화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최초라고 알려진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굉장히 강한 신화이지요. 그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은 모두 신이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철학자의 아버지가 됩니다. 만물에서 신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인간의 노력으로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했던 유명한 말인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은 탈레스가 한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엄청난 주장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출현합니다. 공자의 사상은 후에 유교로 집대성되었는데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들을 인간의 예(禮)로써 살게 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노자는 신이 아닌 자연의 뜻을 따라 살자고 주장했지요. 결국 둘 다 신의 뜻을 찾기보다 인간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함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들은 서서히 신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과 동양에서 각각 인간의 길을 모색한 철학이 태동하고 인간 스스로의 가치가 증대되어 갈 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며 절대적 인간관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지요. 요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열심히 하면서 불교는 철학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서양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화를 배제해 나가고, 동양에서는 공자와 노자, 맹자 등 철학자들이 신의 뜻을 지워나갈 때, 인도에서는 부처가 나타나 인간을 계몽시켜 갈 때, 유대교에서도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진짜 신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가짜 신을 섬기는 나라들에서는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가짜 신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진짜 신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신의 피조물 중에서 택함 받아 선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방향으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켰습니다. 더불어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신의 은총에서 소외되던 사람들까지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했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신의 아들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대상이며, 성령을 부어 주어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여전히 신화 속에 갇혀 점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 독립하여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무신론자들과, 여전히 신을 독점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여 권력을 누리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사랑을 입어 살아가는 신의 자녀들이 있지요. 신이 가짜라면 철학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되겠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지성소를 덮어 두던 휘장은 찢겨나갔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았고, 성령은 이미 각 사람 안에 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예수의 사람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며,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신을 배격하고 철학자의 뒤를 따를 것이 아니라면 신의 뜻을 독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
by Joanna Kimbrel
2023-11-24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중학교 때 가족용 데스크탑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화 접속 인터넷의 친숙한 소리를 기다렸다가 Internet Explorer를 두 번 클릭하고 MySpace로 이동하곤 했다. 종종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내 순위를 확인하고 완벽한 프로필 노래를 내 페이지에 삽입할 수준이 되도록 HTML을 배우고, 작은 빨간색 알림이 주는 반복되는 도파민 자극을 느끼기 위해 브라우저를 계속해서 누르며 페이지를 새 화면으로 바꾸곤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소셜 미디어는 크게 발전했다. 중독성은 여전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다. 불쾌한 트위터 싸움과 열띤 댓글 싸움을 볼 때면,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인간의 타락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필터를 통한 이미지 조작과 핏스포(fitspo: fitness inspiration)는 우리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는 동시에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왜? 나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까지도 얼마든지 구속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위험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소셜 미디어에 로그인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연결을 이루는 장소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온라인은 내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온라인 연결을 맺었다. 그 일부는 나중에 콘퍼런스나 커피숍에서 만났고, 또 수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은 내게 일종의 가상 지원 시스템이다. 소셜 미디어는 내가 일자리를 찾을 때 통로 역할도 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자원과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만났다. 내가 Gospel Coalition을 알게 된 것도 사실상 소셜 미디어 덕분이었다. 성장을 위한 기회요리법과 생활 꿀팁부터 육아와 영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내가 팔로우하는 수많은 계정의 포스팅을 통해서 나는 격려를 받고 성장을 체험한다. 긍정적인 성장을 장려하는 피드만을 골라서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내가 얻은 리소스를 생각할 때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이다. 명확한 의도성과 분별력을 갖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전에는 고려하지 전혀 않았던 관점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포함하여 모든 걸 다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공감이 커진다. 복음 전파의 통로틱톡이 전도에 필수도 아니고,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대면 사역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러한 앱을 사용하고 또 듣고 있는 게 현실이다.온라인 플랫폼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더불어서 성경 공부 도구와 영성 훈련을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 그리고 지역 교회 공동체를 향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다양한 기회까지 제공한다. 경계 설정이처럼 소셜 미디어에는 잠재적인 이점이 많이 있지만, 심각한 위험도 따라온다. 중요한 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로 제대로 탐색하는 자세이다. 경계를 설정하지 않거나 내 삶과 영혼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셜 미디어는 시간 낭비, 불안 고조, 탐심이라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나는 건강한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했다.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시간을 제한해 둘 것무의식중에 휴대폰 소셜 미디어 앱에 빠져 있는 나를 보며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소셜 미디어의 중독성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에베소서 5:15-16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지혜 없는 자처럼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때가 악하니 시간을 활용하라”고 권고한다.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에 대한 시간제한을 설정했다. “15분 추가”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하다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해당 앱을 잠그도록 하는 비밀번호 설정을 고려하라. 2. 시간을 정해 두고 휴식을 취할 것나는 주말에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을 완전히 삭제한다. 또 일 년에 몇 번 장기간 소셜 미디어 방학을 가진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며칠이라도 앱을 제거하면 다시 앱을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휴대폰을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3. 포스팅을 잘 선별할 것스크롤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사고 싶고, 외모에 더 집중하게 되는가? 유혹에 빠지는가? 아니면 괴로움과 불안을 느끼는가? “팔로잉” 목록 조사에 시간을 투자하라. 당신이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과연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하고, 탁월하고, 칭찬할 만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빌 4:8). 대답이 ‘아니요’라면, 당장 ‘팔로우 취소’ 버튼을 클릭하라. 4. 게시물 올리기 전에 생각할 것내가 게시하는 내용은 내가 먹는 음식만큼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게시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 보라. 내가 이 게시물을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게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만심에서 포스팅하는가, 아니면 겸손함이 동기인가? 내 게시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가?5. 정기적으로 재점검하기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 항상 같을지도 확신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 소셜 미디어가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직도 내가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변경해야 할 사항은 없는가? MySpace에 처음 가입했을 때, 위험한 개인 정보를 낯선 사람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나는 딱히 무엇이 현명한 사용법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들과 연결하는 재미있는 방법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몇 년 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소셜 미디어가 가진 선과 악의 잠재력을 점점 더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도한다. 그건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원제: Why I’m Staying on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11-23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9개월 전, 소셜 미디어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하던 중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다.계정을 삭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슬플지, 외로울지, 아니면 사람들과 연락이 끊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과연 소셜 미디어를 안 하고 살 수 있을지 자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직업 면에서 소셜 미디어는 내가 활용하는 자료가 온라인에서 뒤떨어지지 않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또 온라인에도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가? 상호 연결이 있고, 다양한 성경 해석을 접할 수 있으면 기쁨이 공유되고 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등 아름다운 활동이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이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영구히 차단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여기에 솔직한 진실 하나가 있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고 40주가 흘렀는데 한 번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름 방학, 생일, 그리고 이런저런 휴일을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사진을 게시하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또 오랜 친구가 올린 인생 전환 스토리도 보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나 욕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기 이전의 내 삶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왜 소셜 미디어를 시작했는가나는 스물일곱 살 때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젊은 엄마로서 소셜 미디어는 (말 그대로)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과 공유하고, 또 나와 같이 홈스쿨링하는 다른 엄마들과 서로 기뻐하거나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성경 말씀(롬 12:15)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소셜 미디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이들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게 어색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중단했다. 또 내가 하는 일을 이리저리 떠드는 것도 내 자랑 같아서 점점 줄여나갔다(잠 27:2). 게다가 어떤 이슈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도 전혀 쓰지 않았다(잠 17:28).그 시점에 이르자 나는 사실상 잠수를 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내가 올린 게시물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도파민의 흥분 호르몬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둘 수 없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행여라도 내가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왜 그만두었는가나름 조사한 결과, 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폐쇄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반대하는 내부 충동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작은 시작은 에밀리 젠센이 쓴 통찰력 있는 Social Sanity in an Insta World를 읽으면서였다. 그녀는 내가 소셜 미디어를 하면서 일찍이 느꼈던 여러 증상을 하나씩 나열했다.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소셜 미디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 긴 독서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느끼는 낮은 수준의 불안감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통찰력 있고 경건한 Z세대 여자아이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을 얽매고 있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셜 미디어를 떠나는 데에는 겸손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리즘에 맞설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소셜 미디어에 접속할 때마다 느끼는 도파민이 주는 기대감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페이지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의 표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복하기 불가능한 일종의 무한 고리이다. 나라고 소셜 미디어를 적절하게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아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친구 로라의 경우에는, 소셜 미디어에 며칠 내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거기에 조금도 매여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도구를 통해서도 그녀의 사역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축복하고 계신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관대하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로그인하려고 해도, 다른 글들을 읽을 때면 조급해지거나 지루해졌다. 흥미로운 글이 내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도록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분노나 좌절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을 때, 나는 결코 그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거나, 주님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다 없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그리고 트위터까지.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여전히 하지 않는가에밀리가 옳았다. 소셜 미디어는 그녀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손을 떼고 난 이후 나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더 명확하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내 삶을 조절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눈에 띄게 효율성이 높아졌다. 이제 나는 지루함 없이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을 수 있다.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사랑한다. 사라지지 않던 낮은 수준의 불안감이 없어졌다. 더 편안하고 더 잘 참는 사람이 되었다. 선택을 내릴 때도 훨씬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무언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점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 더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팟캐스트 Gospelbound에서 내가 Collin Hansen과 나눈 이야기를 권한다.)이제 나는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덕에 나는 트위터에서 벌어졌을 수백 번의 싸움과 험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진짜 생활과 다른 사람이 온라인에 올린 인스타 생활을 비교하는 일도 내 삶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물론, 분명히 몇 가지는 놓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 즉 순전한 기쁨, 향상된 집중력, 주님의 인도에 대한 민감성이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소셜 미디어 사용 여부의 장단점을 결정하는 저울의 추는 하지 않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고 있다. 내게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통 미국인이 하루에 소셜 미디어에서 쓰는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신도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 하지? 이게 그럴 가치가 있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원제: Why I Left Social Media—and Won’t Go B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소셜미디어
소셜 미디어가 우리 영혼을 뒤틀고 있다
by Ian Harber
2023-11-13
“소셜 미디어는 중립 지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짓말이다. 온 나라가 정신 건강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소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이 기술이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여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몬태나는 틱톡을 완전히 금지한 최초의 주가 되었다. 아칸소는 미성년자가 특정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계정을 만들려면 부모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유사 법률을 제정했다.소셜 미디어의 해로움이 영성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다.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같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가르치는 핵심 스승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의 패턴(불안, 분노, 두려움, 무감각)에 맞춰서 우리의 마음을 재설계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드리는 예배 관행(열기, 스크롤, 스와이프, 좋아요, 댓글)에 따라서 우리의 습관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게시하고 광고주를 통해 기업이 이익을 얻게 하라)고 요구한다.소셜 미디어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꿈으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인지적 왜곡 기계 역할을 한다. 이는 로마서 12:1-2을 체계적으로 뒤바꾼, 그리고 기업적으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뒤바꾼 버전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화되지 않은 욕망에 가장 잘 맞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선별된 세상의 특정 패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도록 손짓한다.소셜 미디어는 결코 성화에 있어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활동적 행위자이다. 그렇다고 소셜 미디어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디어 섭취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게 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알고리즘이 소셜 미디어를 되살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갈망할수록, 그리고 그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돕는 콘텐츠를 더 많이 추구할수록, 알고리즘은 제자도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중심 콘텐츠 쪽으로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바로 그 도구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재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소셜 미디어 사용자의 새로운 카테고리소셜 미디어의 영적 왜곡 영역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현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예 소셜 미디어 자체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바빌론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번영하도록 돕는 운영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고려해야 할 네 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1. 콘텐츠 개발을 통한 제자도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여 떨어지는 콘텐츠 소비의 형성력을 낮잡아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콘텐츠를 만들고 모범 사례를 사용하여 의도한 청중에게 다가가는 충실하고 의도적이며 지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특정 청중을 향해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점점 더 목회자가 팟캐스트로 대체되고 평균 교회 출석률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지역 교회와 연결하는 지역별 디지털 미디어를 제작하여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우리에게는 이미 몇 가지 초기 사례가 있다. Immanuel Nashville은 Substack을 사용하여 교인들을 위한 짧은 매일 묵상집을 제공한다. 애리조나에 교회를 개척한 Trey VanCamp는 수년 전부터 그의 유튜브 채널을 사용하여 사역을 공개하고 있다. 다양한 책을 추천하고, 경건의 시간을 독려하고, 자신의 교회에서 인도한 워크숍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rossing Church는 성경의 여러 권을 소개하는 Ten Minute Bible Talks라는 주간 묵상 팟캐스트를 제작한다. 2. 인플루언서 대신 선교사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플랫폼을 만드는 대신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특정 청중을 위한 틈새 기반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을 그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여기면 어떨까? 소수의 유명 인사가 장악하는 기독교 미디어 환경 대신에 지역 교회에 뿌리를 둔 중소 규모의 기독교 콘텐츠 제작자들이 틈새 시장을 향해서 목소리를 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아니라 오로지 플랫폼 자체에만 쏟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까? 한 가지 예가 Gavin Ortlund와 그의 유튜브 채널 Truth Unites이다. 개빈은 기독교(특히 개신교)를 옹호하는 명확하고 도움이 되는 냉철한 동영상을 만든다. 또 다른 예는 젊은 그리스도인 틱토커 Elijah Lamb(@doctrinewithlamb)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보다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더 친근한 플랫폼에서 7만 명이 넘는 청중을 대상으로 꾸준히 어려운 교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두 제작자는 자신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각각 고유한 형식으로 변증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콘텐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청중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그들은 다 디지털 선교사이다. 3. 좋은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큐레이팅하자모든 사람에게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콘텐츠 제작은 시간과 정신의 노력이 들어가는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콘텐츠 큐레이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성장하는 데에 유익한 자원을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목회자라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필요한 추가 자료가 담긴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설교 시리즈와 함께 게재할 수도 있다. John Houmes 목사는 ‘몸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관한 설교 시리즈와 관련해서 바로 이 작업을 했다. 나는 누군가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백 시간이 넘는 음악과 팟캐스트를 담은 Spotify 재생 목록을 만든 적이 있고 또 헌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을 바라는 교인들을 위해서 교회 역사 문서를 큐레이팅한 웹 사이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4. 떠남으로 저항하라아예 소셜 미디어 삭제가 답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는 종종 행복과 영적 건강의 증가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영적, 문화적 저항의 한 형태로도 기능한다. 때때로 기독교 진리의 증거는 참여보다는 금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느 그리스도인과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서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도 있지만, 동시에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사람도 있다. 떠난다는 목표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소셜 미디어를 당신의 삶에서 제거함으로써 당신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역 사회에 긴밀하게 밀착된 친밀한 관계를 세우려는 목표를 포기하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소셜 미디어라는 새로운 선교 분야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콘텐츠 제작자이자 전달자를 교회가 어떻게 식별하고 지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교인 중에서 콘텐츠 제작자를 찾아서 서로 연결하고, 협력하고, 격려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서 다른 선교사들을 돕는 방식과 유사하게 “디지털 선교사”가 소프트웨어나 광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소액의 급여를 준비할 수도 있다. 특정 상황에서 제작자가 장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교회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또한 소셜 미디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영적 왜곡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공동체를 찾아 지역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두 팔 벌려서 그들을 환영해 줄 건강하고, 눈이 맑고, 적응력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디지털 플랫폼을 주요 사역으로 삼은 교회라면, 소셜 미디어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라면 가정 교회, 성경 공부, 심방과 같이 오프라인 참여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대면 사역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네 가지 범주가 겹칠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를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 모두 소셜 미디어를 변형시키는 기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셜 미디어 환경이 가져다주는 어두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을 점점 더 타락시킬 것이다. 이 뒤틀린 공간에 어떻게 해야 복음의 소망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원제: Social Media Is a Spiritual Distortion Z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가 쏟아 놓은 판도라의 항아리
by 필립 정
2023-11-11
요즘 한국 사회가 빈대 출몰로 매우 시끄럽다. 내년에 올림픽이 열릴 프랑스 곳곳에서 빈대가 퍼진다는 소식을 듣고 온 세계가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한국인들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작은 벌레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다 인천의 한 찜질방과 대구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가 발견되고, 10월 한 달에만 서울의 18개 구에서 빈대가 출몰하자 코로나 이후 잠자고 있던 혐오 정서들이 빈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나는 빈대를 잡으러 다니는 직업 때문에 빈대를 흔하게 본다. 그래서 빈대를 보아도 개미나 거미 같은 벌레 보는 것처럼 별다른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 내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신중치 못하게 빈대를 퍼뜨린 사람들을 속단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며 날 선 혀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유행기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노려보던 미국인들의 눈길이 아직도 선하고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코로나 한풀이 하던 한국인들의 냉소도 여전히 끔찍하다. 그런데 요즘 빈대 출현과 함께 온라인의 댓글과 소셜미디어로 실어 나르는 혐오의 바이러스들이 다시 퍼져 나가고 있어 내 불안을 붙들어 맬 수가 없다.교회도 혐오, 편견, 인종 차별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역사가 있다. 흑사병으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14세기 로마 교회의 모습은 코로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 로마 교회는 종말론 교리를 앞세워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페스트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이 과오로 이전까지 수백 년간 쌓아 온 영적 권위를 실추시켜 버렸다. 이 얼룩진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추어 보면 온전치 못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써 본다.페스트, 종말의 공포를 부르다14세기의 소 빙하기로 인한 대기근(1315-1322)과 페스트 전염병(1348)으로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죽어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전부를 교회와 함께했던 유럽인들은 전쟁, 아사, 전염병을 겪으며 이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징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하며 회개하여 재앙을 피하려 하였지만 페스트는 교회를 통해 더 번져 갈 뿐이었다.당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건강을 살피고 공포를 극복하게 도울 곳은 교회가 유일했다. 교황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체계화된 조직력으로 유럽의 곳곳에 명령 전달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속 권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방만 관할하는 영주들의 분산된 힘으로는 범 인류적 재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영주들의 세력에 비해 아직 중앙집권적 왕권은 충분히 무르익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일한 희망이었던 로마 교회는 이미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의 여파와 패배로 그 단단하던 조직력이 붕괴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오자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 제도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페스트 전염병으로 농도가 절대 부족하자 교회 재정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 권력의 와해는 곧 사회적 불안과 공포에 불을 지폈다.미국의 역사가 바바라 터크만(Babara W. Tuchman, 1912-1989)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된 시기였으며 사탄이 승리한 시기였다”고 정의하였다. 결국 교회가 무너져 가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세상이 불행해지는 것은 악마의 탓이라며 악마와 결탁한 마녀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기근과 전염병의 공포에 눌려 있던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도 현실을 잊고 광분하여 폭력의 불길에 휩쓸려 버렸다.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황령으로 단죄를 지시하였다. 곧 교황의 지시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에는 마녀와 악마와의 계약, 마녀들의 범죄, 마녀를 가려내는 방법, 재판과 처형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이후로 100년이 넘도록 28판이나 인쇄되었고 수십만 명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안내서가 되었다.교황이 처음에 마녀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지금의 독일 지역의 주술사들이었다. 성경(출애굽기 22:18)에 근거하여 마녀재판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이들 다수는 전통적 의학을 시전하거나 신앙의 힘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교황은 이들이 교회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전염병은 몇 년이 더 지속되었고 교회는 계속 희생자를 찾아야 했다. 갈수록 걸인, 외국인 이주민, 저소득 여성, 어린아이, 특히 유대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마녀로 몰려 희생되었다. 철저한 정결 의식 때문에 전염병이 잘 안 걸리는 유대인들을 우물에 독을 타 질병을 퍼뜨렸다고 모함하여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수십만 명을 처형하였다.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절망에 젖은 농민들이나 배고픈 도시 빈민들은 종말론의 교리를 만나자 곧 자신들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았다. 지금 사탄이 잠시 승리해 재앙이 임하였지만 곧 그리스도가 이를 제압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져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탄과 손잡은 마녀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폭력 사태를 행하며 천년왕국을 도래시킬 하나님의 전사로 자처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초법적인 그들의 행태는 더 큰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코로나인류는 언제나 재앙이 닥치면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 삼아 혐오와 분노를 분출하며 사회적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행태들을 계속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천연두가 번지자 아시아인 이민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괴롭히고 추방법까지 만들 정도였다. 페스트 유행이 7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마치 페스트 유행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유사한 일이 코로나 시기에 일어났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검은 머리를 한 아시아인들은 언제 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코로나 유행 이후 미국에서 아시아인 증오 범죄는 급증하여 1년간 4,000건이나 된다고 인종차별 혐오범죄를 연구하는 AAPI가 발표하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인의 중국 유학생,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코로나19를 일부러 중국 바이러스 또는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국내 중국인들을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런데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이후 잠잠하던 혐오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빈대가 나타나 증오와 혐오가 가득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빈대가 나타나자 매체마다 학자들의 입을 빌어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편을 읽어 보았는데 한결같이 그 기사들의 행간들에 숨겨진 의도들은 불순하기 짝이 없다.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그 기사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최근에 발견되는 빈대들은 예전에 있던 종들과 다르게 주로 열대 지방에 사는 종인데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외국 이민자, 또는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이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빈대 종이 발견된 곳이 주로 외국 유학생 기숙사, 고시원, 찜질방 같은 곳이다.” 이 글을 쓴 기자들은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편집하여 독자들의 혐오 정서를 자극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많은 사람이 기사를 구독하고 읽게 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14세기에 ‘마녀들을 잡는 망치’를 쓴 학자들을 대신해 지금 21세기의 각종 매체가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돈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조금만 더 알면 속지 않는다빈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면 우리는 매체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빈대는 원래 박쥐의 몸에 붙어 있던 박쥐벌레(Batbug)였다. 석기 시대에 수렵 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주로 떠돌며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동굴에서 박쥐와 함께 기거하면서 사람들의 몸에도 박쥐벌레가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수렵 생활을 끝내고 농작물 경작을 하며 주거 생활을 하면서 박쥐벌레도 사람들의 주거지에 같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벌레를 침대벌레(Bedbug)라 부른다.한국에 빈대가 급격히 퍼지게 된 계기는 미군정 시기에 들어온 미군 때문인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이후 빈대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렸는데 제일 극심한 곳은 미군 진영이었다. 미군을 따라 상륙한 빈대들은 1970년대까지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DDT를 사용하면서 그 이후 빈대의 출현이 더 이상보고 되지 않았다. 빈대가 다시 나타난 시기는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화의 진행과 더불어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 정서상 빈대가 얼마나 번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이에 관한 어떤 연구나 조사도 이루어진 질 수 없었다. 최근에 발견되는 열대성 빈대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들여왔는지 공식적인 보고조차 없다. 빈대에 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찜질방에서 기거하는 가난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빈대 유입자로 낙인을 찍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것처럼 분노를 표출한다. 이제 한국 교회가 과연 코로나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달래 주고 위로가 되었는지 반성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코로나19가 번져 가자 정부에서 모이는 예배를 당분간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코로나19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까지 하며 예배를 강행하였다. 그러다 여러 교회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이 되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되자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사에서 언제나 교회는 자기 생존 유지에 급급하였다. 교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해서 페스트를 퍼뜨렸던 14세기의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유사하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누그러뜨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인간은 습관적으로 자기 죄를 부정하고 합리화한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누구에게서 옮았을까에만 집중한다. 머릿속에서 작동되는 원인과 결과의 계산기에 언제나 나는 피해자로만 남는다. 나는 절대 가해자일 수 없어 가해자는 언제나 남이 된다. 가해자를 찾아 징벌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덤벼들지만, 대상은 항상 자기를 대변할 수 없는 만만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힘든 뇌구조를 갖고 있다는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말이 맞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각종 방어기제와 거짓으로 무장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를 보면서 결국 아담의 후손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체계는 계속 죄를 합리화할 수밖에 우리의 영혼이 쉴 자리가 없다. 오늘도 이 글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돌발적인 은혜가 이 폐쇄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 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자기가 만든 여자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하나 선물한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혐오, 증오, 거짓 같은 죄악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막아 버리자, 그 안에 담겨 있던 희망은 끝내 세상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이야기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과 다른 것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빈대 때문에 쏟아져 나온 이 혐오와 폭력의 세상,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 희망이 있겠는가!
‘디지털 영’에 우리 아이들이 사로잡혔다
by Isaac Serrano
2023-11-07
“휴대폰 때문에 우리 애를 잃었어요. 애가 아예 딴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한탄하는 부모의 말을 듣곤 한다. 이건 마치 “병으로 남편을 잃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과 비슷하다.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사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까? 영향 아래에서 술과 휴대폰, 둘 다 개인에게 작용하는 외부 영향이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의 경우, 그 물질을 흔히 ‘영’(spirit)이라고 부르곤 한다. 사람들이 증류주에 이 용어를 붙이기 시작한 데에는 신비한 역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이 도무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이다. 술은 과음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적당하게 마셨다면, 술기운은 빨리 사라지고 몇 시간 내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술이라는 영이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초대받으면 어떻게 될까? 술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영주권을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바꿔버린다. 술을 남용하는 주체가 처음에는 당신이다. 그러다가 불길한 교환 속에서 학대하는 주체가 서서히 술로 바뀐다.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는 당신이 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악한 영처럼, 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왜곡시켜 결국에는 아예 달라진 성격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중독에서 발견된다.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순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슬그머니 위험이 들어오다디지털 시대는 잠재적으로 유해한 각종 장치를 우리 집에 공개적으로 초대하는 세상을 가져왔다. 좋은 부모는 중독성 있고 유해한 물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그럼에도 디지털이라는 기술 자체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많은 위험이 생겼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자명하다. 부모들 대부분이 디지털 기기를 자녀가 새로운 기술 세계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만 해도 잘 몰랐지만, 이제 연구 결과는 분명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화면과 소셜 미디어는 중독성이 강하고 행동을 바꾼다.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단절되고, 더 비참하고, 외롭다. 대부분의 중독성 물질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장치는 기쁨을 약속하지만 불행을 더 많이 가져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을 통제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이라면 술과 같은 전통적인 유해 물질에 관해서 절제하고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부모와 법률이 접근 자체를 제한한다. 중독성을 가진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 디지털 소비를 규제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기술이 아이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조치는 뭐가 있을까? 미국의 법적 음주 연령은 21세이다. 아동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법(COPPA)은 13세 미만 어린이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지만, 법 시행 메커니즘은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지혜롭게 자녀를 위해서 결정해야 한다. 나는 16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소셜 미디어의 금지를 제안한다. 책임감 있는 성인이 포도주 두 잔을 음주 제한으로 설정하듯, 어린이와 성인 모두 화면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하루 최대 한두 시간을 제안한다. 앤디 크로우치의 The Tech-Wise Family 같은 지침서를 활용해서 다양한 방안(예를 들자면, 집의 열린 공간에서만 화면을 보는 것)을 구현한다면,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는 자녀로 교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강한 습관이 하루아침에 들지는 않는다. 중독성 있는 디지털 기술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도록 다양한 예방 아이디어를 한 번에 하나씩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구현해야 한다.절박한 시대에어쩌면 당신은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중독으로 자녀들이 학교, 스포츠, 가족 관계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능력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게 현재 당신의 현실이라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녀를 위한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하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화면 시청 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않도록 하라.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30일간의 청정 식습관 도전으로 생각하라. Screen Strong은 가족이 디지털 기술로부터 완전한 해독을 구현하도록 돕는 훌륭한 30일 계획을 제공한다. 핵심은 디지털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담한 시도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을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녀를 지배하는 디지털 영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성령으로 충만하여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8)라고 경고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중독이 우리 가족을 사로잡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우리 몸은 성전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현재의 디지털 시대에도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디지털을 제한하고 대체하는 패턴을 개발하라. 생명을 빼앗는 디지털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바꾸라.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롬 13:14).휴대폰을 내려놓고, 소셜 미디어에서 로그아웃하고, TV를 꺼라.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라. 식사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픽셀의 빛에 취해서 잠자리에 들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주는 빛의 인도함을 받아 잠자리에 들라. 자녀가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자녀는 당신을 보고 그대로 본받는다. 기술이 나쁜가? 당연히 아니다. 기술의 성취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성경은 포도주를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남용에 관해서만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나 자신과 아이들이 디지털 중독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지혜와 신실함으로 이 위험한 디지털 시대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원제: What If Our Kids Are Addicted to the Spirit of the 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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