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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가치
by 전재훈
2023-12-01
인류 역사를 선사시대와 역사시대로 구분할 때 기준이 되는 것이 글입니다. 문헌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역사시대라 하고, 고고학으로 확인할 수 있는 시대를 선사시대라고 하지요. 역사시대의 시작은 문명의 시작과 맥을 같이 합니다.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진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바로 그 예입니다. 문명은 크게 넷으로 봅니다.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사이에서 발생한 메소포타미아 문명, 나일강을 중심으로 이집트 문명, 황하강을 중심으로 황하문명, 인더스강을 중심으로 인도문명입니다. 이들 문명을 확인하는 것이 문자입니다. 즉 문자는 문명을 만들었다는 이야기죠.역사시대 이전의 선사시대에 대해서는 수많은 신화가 존재합니다. 그리스 신화, 바벨론 신화, 구약의 원역사 같은 일들이 전해져 옵니다. 하지만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선사시대는 돌을 들고 뛰어다니던 구석기, 신석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구석기는 돌을 깨서 날카로운 돌을 사용한 타제석기 시대이고, 신석기는 돌을 갈아서 원하는 모양을 만들어 사용한 마제석기 문화였지요.석기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존재가 그냥 짐승이었을 것입니다. 다른 짐승을 잡아먹고 사는 또 다른 짐승이었지요. 이들이 불을 발견하고 고기를 익혀 먹기 시작하면서 인간은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익은 고기는 씹는 힘을 줄여주어서 머리뼈를 가늘게 만들었고, 소화 에너지를 뇌로 보내 뇌가 발달하는 데 영향을 받게 됩니다. 사냥과 채집에 의존하던 이들이 농사에 눈을 뜨면서 정착된 삶을 살게 됩니다. 농사를 짓다 보면 소유가 생기게 되지요. 농사에 필요한 도구를 만들게 되고 재산이 생기게 됩니다. 자연스레 재산은 친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욕망을 만들어 냅니다. 이로써 혈연의 개념이 생깁니다. 혈연이 생기기 전에는 모계 사회였습니다. 남자들은 사냥을 다녔고, 여자들은 아이를 키우며 채집하고 살았지요. 남자들이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사냥하던 습관에서 나왔다고 하지요. 사나운 짐승과 눈싸움을 하고 절호의 순간을 잡아야 하기에 하나의 목표에 집중하는 버릇이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자들은 아기를 등에 업고 나무의 열매를 따면서 사나운 짐승들의 공격을 막아내야 했습니다. 한 번에 여러 가지 일을 해야 했으므로 여자들은 통화를 하면서 설거지하고, 거실에서 하는 수다에 끼어드는 게 가능한 신비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농경사회가 되면 모계 사회에서 부계 사회로 바뀌게 됩니다. 농사지을 땅과 농기계 및 농사 기술을 가진 사람에게 힘이 몰리면서 자연스레 아버지가 누구인지가 중요해졌고, 아버지의 재산을 물려받을 큰아들이 누군가 하는 것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때부터 지역을 중심으로 한 씨족사회가 형성된 것입니다. 사회가 형성되면 응당 리더를 결정해야 합니다. 추장이 되었건, 족장이 되었건, 마을 이장이 되었건, 그 주변 사람들을 통제하고 관리할 사람이 필요하지요. 당연히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고 그의 장남계열이 승계하게 됩니다.씨족이나 부족이 여럿 모여 국가를 이루면 그 국가의 왕을 누가 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힘 있는 사람이 나서서 자신이 신의 아들임을 주장하면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는 무리들은 하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기에 그 하늘에 있는 신의 아들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리더를 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 신의 아들을 중심으로 신의 뜻에 따라 나라가 세워지고 신의 아들은 신의 지혜와 힘을 이용해 국가를 통치했습니다. 신의 아들이 다스리는 사회는 신정국가입니다. 하늘의 뜻을 점치는 제사장과 무녀들이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권력을 형성한 이들은 이런 하늘의 뜻을 독점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것이지요. 이런 문명이 시작될 때의 문헌들에는 신의 뜻을 묻는 글들이 많이 나옵니다. 황하문명의 오래된 갑골문에도 대부분이 신의 뜻을 구하는 질문과 그 뜻을 찾기 위해 점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이들 문헌은 자신들이 신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역사시대 이전 선사시대의 내용들에 대해 신화적인 요소들을 많이 차용했던 것입니다. 인간이 처음에는 한낱 짐승에 불과했다가 불을 사용하면서 짐승과는 다른 구별된 존재임을 자각했고, 나중에는 선조를 기준으로 다른 사람과 구별된 가족의 구성원으로 인식했던 것입니다. 혈연관계로 자신을 이해하면 자신은 그저 한 시대의 존재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이어진 존재임을 알게 되면서 시간 속에서 자신을 이해하게 되지요. 그러던 이들이 신정국가로 발돋움하면서 보편적 절대자인 하늘의 백성으로 승격됩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어디엔가 소속되기를 원하지요. 소속은 진영이라는 개념을 만들게 되고 그렇게 만들어진 진영들 사이에 갈등이 생겨납니다. 이런 갈등이 부딪치는 것이 전쟁이지요. 전쟁은 한 나라가 다른 나라를 점령하는 것입니다. 나라마다 대개 신을 가지고 있어서 어느 신이 진짜 신인가 하는 테스트를 전쟁을 통해 하게 됩니다. 또한 누가 진짜 신의 아들인가 하는 것도 왕조가 바뀔 때마다 등장하지요. 때로는 신의 뜻이 어디서 어디로 옮겨지는가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신이 없다는 생각을 못 하던 시대이니만큼 이해되지 않는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신의 뜻이 인간의 행동에 따라 옮겨질 수 있음을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인간은 신을 움직일 수 있는 존재로까지 성장했지요.하지만 실제로 그런 신이 있어서 어떤 특정한 가문을 통해 나라를 세우고 신의 아들이 왕이 되는 그런 일은 없습니다. 아이러니하게 진짜 신의 아들인 예수님은 왕이라는 이유로 죽임을 당했지요. 나머지는 다 가짜 아들들입니다. 즉 신이라는 것과 그의 아들이라는 개념은 백성을 통치하는 수단에 불과했습니다. 이걸 깨달은 이들이 신화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화두를 던지기 시작했는데 그 중 최초라고 알려진 사람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라는 철학자입니다.탈레스는 기원전 6세기경 그리스 사람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굉장히 강한 신화이지요. 그 신화에서 만물의 근원은 모두 신이었습니다. 환경을 변화시키려면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는 과정이 필요했지요. 하지만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이다’라고 말함으로써 철학자의 아버지가 됩니다. 만물에서 신을 제거해 버린 것입니다. 신의 뜻을 어르고 달래기보다 인간의 노력으로 환경을 바꿀 수 있음을 시사했던 것이지요. 소크라테스가 했던 유명한 말인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은 탈레스가 한 말이라는 주장도 있지요. 신을 알려고 하지 말고 자기 자신을 알려고 하라는 말입니다. 이는 엄청난 주장이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중국에서는 공자와 노자가 출현합니다. 공자의 사상은 후에 유교로 집대성되었는데 유교는 종교가 아닙니다. 신의 뜻을 따라 살던 사람들을 인간의 예(禮)로써 살게 한 사람이 공자입니다. 노자는 신이 아닌 자연의 뜻을 따라 살자고 주장했지요. 결국 둘 다 신의 뜻을 찾기보다 인간 스스로 길을 찾아가야 함을 강조했던 철학자들이었습니다. 이후로 인간들은 서서히 신에게서 독립하기 시작했습니다. 서양과 동양에서 각각 인간의 길을 모색한 철학이 태동하고 인간 스스로의 가치가 증대되어 갈 때 공교롭게도 같은 시기 인도에서는 싯다르타 고타마가 태어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 외치며 절대적 인간관의 새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에 의해 만들어진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에 더 가깝다고 하지요. 요즘 법륜스님이 즉문즉설을 열심히 하면서 불교는 철학이라는 주장을 많이 하고 계십니다.서양에서는 탈레스, 소크라테스, 아리스토텔레스가 신화를 배제해 나가고, 동양에서는 공자와 노자, 맹자 등 철학자들이 신의 뜻을 지워나갈 때, 인도에서는 부처가 나타나 인간을 계몽시켜 갈 때, 유대교에서도 한 인물이 등장하게 됩니다. 그가 바로 진짜 신의 아들 예수님이시지요.가짜 신을 섬기는 나라들에서는 진짜를 추구하기 위해 가짜 신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인간의 가치를 끌어올렸다면 진짜 신은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어 신의 피조물 중에서 택함 받아 선민으로 살아가던 이들에게 신의 아들이 되는 방향으로 인간의 가치를 상승시켰습니다. 더불어 선민이 아닌 이방인들과 신의 은총에서 소외되던 사람들까지 신과 합일의 경지에 이르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특정 계층의 사람들이 독점했던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신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은 천하보다 귀하고, 신의 아들의 목숨을 걸고 사랑하는 대상이며, 성령을 부어 주어 각 사람이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게 하는 엄청난 일을 하신 것입니다. 그로부터 2000년의 세월이 흐른 이 시대는 다양한 사람들이 혼재해 있습니다. 여전히 신화 속에 갇혀 점을 치며 살아가는 사람들과, 스스로 독립하여 인간의 가치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무신론자들과, 여전히 신을 독점하며 사람들을 현혹하여 권력을 누리는 일부 몰지각한 종교 지도자들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그의 사랑을 입어 살아가는 신의 자녀들이 있지요. 신이 가짜라면 철학자들의 뒤를 따르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참 신이 존재한다면 그 신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존귀한 삶이 되겠지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막힌 담은 허물어져 버렸습니다. 지성소를 덮어 두던 휘장은 찢겨나갔습니다. 죄는 사함을 받았고, 성령은 이미 각 사람 안에 임하셨습니다. 2,000년 전에 이미 예수의 사람들은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되었으며, ‘긍휼을 얻은 자’가 되었습니다. 신을 배격하고 철학자의 뒤를 따를 것이 아니라면 신의 뜻을 독점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믿고 그의 자녀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가장 존귀하게 살아가는 길이 될 것입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
by Joanna Kimbrel
2023-11-24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중학교 때 가족용 데스크탑 컴퓨터 앞에 앉아 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전화 접속 인터넷의 친숙한 소리를 기다렸다가 Internet Explorer를 두 번 클릭하고 MySpace로 이동하곤 했다. 종종 몇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내 순위를 확인하고 완벽한 프로필 노래를 내 페이지에 삽입할 수준이 되도록 HTML을 배우고, 작은 빨간색 알림이 주는 반복되는 도파민 자극을 느끼기 위해 브라우저를 계속해서 누르며 페이지를 새 화면으로 바꾸곤 했다. 2000년대 초반에 들어서 소셜 미디어는 크게 발전했다. 중독성은 여전하지만, 훨씬 더 복잡하다. 불쾌한 트위터 싸움과 열띤 댓글 싸움을 볼 때면, 상대에 대한 고려 없이 똑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다른 사람을 비난하는 인간의 타락성을 다시금 생각한다. 필터를 통한 이미지 조작과 핏스포(fitspo: fitness inspiration)는 우리를 불안과 불만으로 가득 채우는 동시에 불가능한 기준을 제시한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기로 결정했다. 왜? 나는 하나님이 그의 영광과 우리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까지도 얼마든지 구속하실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모든 위험과 결점에도 불구하고, 내가 여전히 소셜 미디어에 로그인하는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연결을 이루는 장소온라인 관계가 오프라인 커뮤니티를 대체할 수는 없다. 안타깝게도 온라인은 내가 다른 이들과 의미 있는 우정을 나누고 있다는 환상을 줄 수 있다. 사실상 그들은 내가 누구인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는데도 말이다. 그러함에도 나는 나름대로 의미 있는 온라인 연결을 맺었다. 그 일부는 나중에 콘퍼런스나 커피숍에서 만났고, 또 수시로 오프라인에서 만나는 사람도 있다. 나와 같은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들은 내게 일종의 가상 지원 시스템이다. 소셜 미디어는 내가 일자리를 찾을 때 통로 역할도 했다.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삶에서 성장하도록 돕는 자원과 사람들을 소셜 미디어에서 만났다. 내가 Gospel Coalition을 알게 된 것도 사실상 소셜 미디어 덕분이었다. 성장을 위한 기회요리법과 생활 꿀팁부터 육아와 영적 성장에 이르기까지, 내가 팔로우하는 수많은 계정의 포스팅을 통해서 나는 격려를 받고 성장을 체험한다. 긍정적인 성장을 장려하는 피드만을 골라서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내가 얻은 리소스를 생각할 때 그건 충분히 가치 있는 투자이다. 명확한 의도성과 분별력을 갖춘 소셜 미디어를 통해 이전에는 고려하지 전혀 않았던 관점에도 도전할 수 있게 되었다. 나와 신념이 다른 사람들의 포스팅을 보면서, 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가 신뢰하는 사람들의 주장을 포함하여 모든 걸 다 시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와 다른 경험을 하는 사람들에 대한 나의 인식과 공감이 커진다. 복음 전파의 통로틱톡이 전도에 필수도 아니고, 인스타그램 게시물이 대면 사역을 대체할 수도 없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들이 이러한 앱을 사용하고 또 듣고 있는 게 현실이다.온라인 플랫폼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새로운 방법이다. 더불어서 성경 공부 도구와 영성 훈련을 실행하는 실제적인 방법, 그리고 지역 교회 공동체를 향해 다른 사람들을 격려하는 다양한 기회까지 제공한다. 경계 설정이처럼 소셜 미디어에는 잠재적인 이점이 많이 있지만, 심각한 위험도 따라온다. 중요한 건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로 제대로 탐색하는 자세이다. 경계를 설정하지 않거나 내 삶과 영혼의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주의 깊게 고려하지 않는다면, 소셜 미디어는 시간 낭비, 불안 고조, 탐심이라는 결과를 불러올 것이다. 나는 건강한 소셜 미디어 사용을 위해서 나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호하는 가드레일을 설치했다. 내가 실천하는 몇 가지는 다음과 같다.1. 시간을 제한해 둘 것무의식중에 휴대폰 소셜 미디어 앱에 빠져 있는 나를 보며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소셜 미디어의 중독성은 시간을 잡아먹는 괴물이다. 에베소서 5:15-16은 우리에게 “그러므로 우리가 어떻게 행하는지 주의 깊게 살피고 지혜 없는 자처럼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때가 악하니 시간을 활용하라”고 권고한다. 이 명령을 따르기 위해 나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에 대한 시간제한을 설정했다. “15분 추가” 버튼을 누르고 싶은 유혹이 너무 강하다면, 시간이 다 되었을 때 다른 누군가가 해당 앱을 잠그도록 하는 비밀번호 설정을 고려하라. 2. 시간을 정해 두고 휴식을 취할 것나는 주말에는 휴대폰에서 소셜 미디어 앱을 완전히 삭제한다. 또 일 년에 몇 번 장기간 소셜 미디어 방학을 가진다. 그럴 때 내 마음은 오로지 기도하고, 성경 묵상하고, 또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것으로 자유로워진다. 그리고 며칠이라도 앱을 제거하면 다시 앱을 다시 설치한다고 하더라도 휴대폰을 사용하는 빈도가 줄어든다. 3. 포스팅을 잘 선별할 것스크롤을 하면 할수록 더 많이 사고 싶고, 외모에 더 집중하게 되는가? 유혹에 빠지는가? 아니면 괴로움과 불안을 느끼는가? “팔로잉” 목록 조사에 시간을 투자하라. 당신이 팔로우하는 계정들이 과연 참되고, 경건하고, 의롭고, 정결하고, 사랑스럽고, 칭찬할 만하고, 탁월하고, 칭찬할 만한 것인지를 확인하라(빌 4:8). 대답이 ‘아니요’라면, 당장 ‘팔로우 취소’ 버튼을 클릭하라. 4. 게시물 올리기 전에 생각할 것내가 게시하는 내용은 내가 먹는 음식만큼이 내 마음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낸다. 게시하기 전에 스스로 물어 보라. 내가 이 게시물을 성취하려는 것은 무엇인가? 이 게시물을 통해서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사랑하는가? 이기적인 야망과 헛된 자만심에서 포스팅하는가, 아니면 겸손함이 동기인가? 내 게시물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가, 아니면 나 자신을 영화롭게 하는가?5. 정기적으로 재점검하기나는 소셜 미디어를 계속 사용하기로 했지만,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장담할 수는 없다. 게다가 지금 내가 사용하는 방식이 항상 같을지도 확신할 수도 없다. 따라서 정기적으로 시간을 내어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중요한 질문을 스스로 던지라. 소셜 미디어가 내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아직도 내가 시간을 잘 활용하고 있는가? 변경해야 할 사항은 없는가? MySpace에 처음 가입했을 때, 위험한 개인 정보를 낯선 사람과 공유하지 않겠다는 것 외에 나는 딱히 무엇이 현명한 사용법인지를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친구들과 연결하는 재미있는 방법으로만 보았을 뿐이다. 몇 년 후, 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소셜 미디어가 가진 선과 악의 잠재력을 점점 더 깨달았다.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소셜 미디어 세상을 지혜롭게 헤쳐 나가기를 기도한다. 그건 당신을 위한 나의 기도이기도 하다. 원제: Why I’m Staying on Social Medi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무제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었는가?
by Sarah Eekhoff Zylstra
2023-11-23
소셜 미디어에 관한 또 다른 관점도 함께 읽기를 바랍니다: “나는 왜 소셜 미디어를 계속하는가?”9개월 전, 소셜 미디어에 관한 팟캐스트를 녹음하던 중에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다.계정을 삭제하기 전까지만 해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다. 슬플지, 외로울지, 아니면 사람들과 연락이 끊길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었다. 아니, 내가 과연 소셜 미디어를 안 하고 살 수 있을지 자체도 가늠할 수 없었다. 사실 직업 면에서 소셜 미디어는 내가 활용하는 자료가 온라인에서 뒤떨어지지 않는지 확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게다가 또 온라인에도 얼마나 좋은 일이 많은가? 상호 연결이 있고, 다양한 성경 해석을 접할 수 있으면 기쁨이 공유되고 또 서로 도움을 주고받는 등 아름다운 활동이 일어난다. 내가 정말로 이 모든 것에서 나 자신을 영구히 차단하는 게 맞을까? 하지만 여기에 솔직한 진실 하나가 있다. 소셜 미디어를 그만두고 40주가 흘렀는데 한 번도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는 여름 방학, 생일, 그리고 이런저런 휴일을 지나면서 단 한 번도 사진을 게시하지 않았고, 메시지도 읽지 않았다. 또 오랜 친구가 올린 인생 전환 스토리도 보지 않았다. 내가 뭔가를 놓치고 사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다시 돌아갈 계획이나 욕구가 없다. 왜냐하면 내가 기억하는 소셜 미디어에 가입하기 이전의 내 삶보다 지금이 훨씬 더 나아졌기 때문이다. 왜 소셜 미디어를 시작했는가나는 스물일곱 살 때 페이스북 계정을 만들었다. 홈스쿨링을 하는 젊은 엄마로서 소셜 미디어는 (말 그대로) 내가 친구들과 함께 있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건 우리 가족이 무엇을 하는지 그들과 공유하고, 또 나와 같이 홈스쿨링하는 다른 엄마들과 서로 기뻐하거나 위로하는 방법이었다. 나는 페이스북이 기뻐하는 사람들과 함께 기뻐하고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고 말한 성경 말씀(롬 12:15)을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했다.그러나 몇 년이 지나고 소셜 미디어가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훌륭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이들이 자랄수록 아이들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과 하는 게 어색했고, 나는 자연스럽게 그런 대화를 중단했다. 또 내가 하는 일을 이리저리 떠드는 것도 내 자랑 같아서 점점 줄여나갔다(잠 27:2). 게다가 어떤 이슈에 관해서 내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이유도 없고, 그래서 나는 그런 이야기도 전혀 쓰지 않았다(잠 17:28).그 시점에 이르자 나는 사실상 잠수를 타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에 따른 결과는 내가 올린 게시물에 반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느끼는 도파민의 흥분 호르몬이 더 이상 생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소셜 미디어를 그만둘 수 없었다. 무슨 중요한 일이 일어났는데 행여라도 내가 보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왜 그만두었는가나름 조사한 결과, 나는 소셜 미디어 계정을 폐쇄하는 사람의 경우에 일반적으로 중대한 사건이 계기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강하게 반대하는 내부 충동을 극복하는 데에는 어떤 자극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나의 첫 번째 작은 시작은 에밀리 젠센이 쓴 통찰력 있는 Social Sanity in an Insta World를 읽으면서였다. 그녀는 내가 소셜 미디어를 하면서 일찍이 느꼈던 여러 증상을 하나씩 나열했다. 남는 시간을 때우려고 소셜 미디어에 머리를 처박고 있는 것, 긴 독서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 그리고 지속적으로 느끼는 낮은 수준의 불안감 등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내게 결정적인 충격을 준 것은 통찰력 있고 경건한 Z세대 여자아이들과 대화하는 중에 그들을 얽매고 있는 소셜 미디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서였다. 그들을 통해서 나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얻는 것은 거의 없지만, 우리가 얼마나 많은 것을 잃고 있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도 그런 피해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셜 미디어를 떠나는 데에는 겸손이 필요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알고리즘에 맞설 만큼 강하지 않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했다. 소셜 미디어에 접속할 때마다 느끼는 도파민이 주는 기대감을 나는 저항할 수 없었다. 나는 내 페이지를 계속 업데이트하며 다른 사람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했지만 완전히 성공할 수 없었다. 데이비드 앨런(David Allen)의 표현에 따르면, 소셜 미디어는 정복하기 불가능한 일종의 무한 고리이다. 나라고 소셜 미디어를 적절하게 활용하려고 노력하지 않은 게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마침내 아예 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나와는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내 친구 로라의 경우에는, 소셜 미디어에 며칠 내내 전혀 신경 쓰지 않으면서도 살 수 있다. 나와는 달리 그녀는 거기에 조금도 매여 있지 않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그 도구를 통해서도 그녀의 사역을 아름다운 방법으로 축복하고 계신다. 하지만 내 경우는 달랐다. 아무리 관대하고 은혜로운 마음으로 로그인하려고 해도, 다른 글들을 읽을 때면 조급해지거나 지루해졌다. 흥미로운 글이 내 속에서 성령의 열매가 열리도록 한 게 아니라 오히려 날카로운 분노나 좌절감으로 인해 다른 사람들을 향해서 잘못된 판단을 하도록 만들었다. 내가 소셜 미디어를 그만뒀을 때, 나는 결코 그 이전보다 더 친절하고, 더 똑똑하고, 더 현명하거나, 주님을 더 사랑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걸 다 없앴다.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그리고 트위터까지. 왜 나는 소셜 미디어를 여전히 하지 않는가에밀리가 옳았다. 소셜 미디어는 그녀와 나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내가 손을 떼고 난 이후 나는 훨씬 더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가지게 되었다. 더 명확하게 생각하고, 더 효과적으로 내 삶을 조절하면서 집과 직장에서 눈에 띄게 효율성이 높아졌다. 이제 나는 지루함 없이 성경과 다른 책들을 읽을 수 있다. 가족에게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사랑한다. 사라지지 않던 낮은 수준의 불안감이 없어졌다. 더 편안하고 더 잘 참는 사람이 되었다. 선택을 내릴 때도 훨씬 더 깊이 생각할 수 있고, 무엇보다 내가 하는 무언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보일까 고민할 필요가 없다. (나는 장점을 계속 이야기할 수 있다. 더 듣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팟캐스트 Gospelbound에서 내가 Collin Hansen과 나눈 이야기를 권한다.)이제 나는 누군가가 소셜 미디어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할 수 없는 일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는다. 어쩌면 그 덕에 나는 트위터에서 벌어졌을 수백 번의 싸움과 험담을 피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 진짜 생활과 다른 사람이 온라인에 올린 인스타 생활을 비교하는 일도 내 삶에서 사라졌다. 나는 이렇게 사는 게 좋다. 물론, 분명히 몇 가지는 놓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얻은 것, 즉 순전한 기쁨, 향상된 집중력, 주님의 인도에 대한 민감성이 주는 장점은 분명하다. 소셜 미디어 사용 여부의 장단점을 결정하는 저울의 추는 하지 않는 쪽으로 더욱더 기울고 있다. 내게는 이게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아닐 수도 있다. 그럼에도 보통 미국인이 하루에 소셜 미디어에서 쓰는 시간이 두 시간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당신도 ‘내가 왜 이걸 계속해야 하지? 이게 그럴 가치가 있나?’ 질문을 던져야 한다. 원제: Why I Left Social Media—and Won’t Go B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소셜미디어
소셜 미디어가 우리 영혼을 뒤틀고 있다
by Ian Harber
2023-11-13
“소셜 미디어는 중립 지대에 있지 않다. 문제는 당신이 어떻게 사용하는가에 달렸다.” 이렇게 말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거짓말이다. 온 나라가 정신 건강 위기를 맞고 있는 이때 소셜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이 기술이 결코 중립을 지키지 않는다는 사실이 점점 더 분명해지고 있다. 그에 따라서 정부가 나서서 여기에 대응하기 시작했다. 지난 5월 몬태나는 틱톡을 완전히 금지한 최초의 주가 되었다. 아칸소는 미성년자가 특정 소셜 미디어 플랫폼에서 계정을 만들려면 부모의 승인을 받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유사 법률을 제정했다.소셜 미디어의 해로움이 영성 형성에도 악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은 잘 알고 있다. 크리스 마틴(Chris Martin) 같은 작가가 지적했듯이, 소셜 미디어가 우리를 가르치는 핵심 스승이 되었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가 소비하는 콘텐츠의 패턴(불안, 분노, 두려움, 무감각)에 맞춰서 우리의 마음을 재설계한다. 소셜 미디어에서 드리는 예배 관행(열기, 스크롤, 스와이프, 좋아요, 댓글)에 따라서 우리의 습관을 바꾼다. 그리고 우리 몸을 산 제물로 바치라(다른 사람이 소비할 수 있도록 콘텐츠를 게시하고 광고주를 통해 기업이 이익을 얻게 하라)고 요구한다.소셜 미디어는 현실에 대한 관점을 바꿈으로 우리의 의지가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영적, 인지적 왜곡 기계 역할을 한다. 이는 로마서 12:1-2을 체계적으로 뒤바꾼, 그리고 기업적으로는 인센티브를 부여하는 방식으로 뒤바꾼 버전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 더 이상 그리스도의 영으로 새로워지지 않는다. 대신에 성화되지 않은 욕망에 가장 잘 맞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선별된 세상의 특정 패턴에 의해서 새롭게 만들어진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에 순응하도록 손짓한다.소셜 미디어는 결코 성화에 있어서 중립적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데에 적극적으로 방해하는 활동적 행위자이다. 그렇다고 소셜 미디어가 완전히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디어 섭취는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도 하지만 동시에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게 할 가능성도 있다. 이는 알고리즘이 소셜 미디어를 되살릴 가능성이 존재하는 우리의 욕구를 반영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더 많이 갈망할수록, 그리고 그를 향한 우리의 열망을 돕는 콘텐츠를 더 많이 추구할수록, 알고리즘은 제자도에 도움이 되는 그리스도 중심 콘텐츠 쪽으로 더욱 기울어질 것이다. 우리를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만드는 바로 그 도구가 도리어 우리가 그리스도를 향해서 나아가도록 재형성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기독교 소셜 미디어 사용자의 새로운 카테고리소셜 미디어의 영적 왜곡 영역에 참여하는 방식에 대해서 우리는 현명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아예 소셜 미디어 자체의 중단을 의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동시에 디지털 바빌론에서 사는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생각할 수 있는 새로운 범주와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다른 사람들이 번영하도록 돕는 운영 방식도 함께 고민해야 한다. 고려해야 할 네 가지 범주는 다음과 같다.1. 콘텐츠 개발을 통한 제자도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하여 떨어지는 콘텐츠 소비의 형성력을 낮잡아 평가한다. 디지털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 우리를 그리스도로부터 멀어지게 할 수 있다면, 또한 그리스도를 향해 나아가도록 만들 수도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콘텐츠를 만들고 모범 사례를 사용하여 의도한 청중에게 다가가는 충실하고 의도적이며 지적인 그리스도인이다. 교회는 특정 청중을 향해서 이를 수행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갖고 있다. 점점 더 목회자가 팟캐스트로 대체되고 평균 교회 출석률이 한 달에 한 번으로 떨어지는 상황에서 교회는 사람들을 지역 교회와 연결하는 지역별 디지털 미디어를 제작하여 일주일 내내 성도들을 만날 수 있다.우리에게는 이미 몇 가지 초기 사례가 있다. Immanuel Nashville은 Substack을 사용하여 교인들을 위한 짧은 매일 묵상집을 제공한다. 애리조나에 교회를 개척한 Trey VanCamp는 수년 전부터 그의 유튜브 채널을 사용하여 사역을 공개하고 있다. 다양한 책을 추천하고, 경건의 시간을 독려하고, 자신의 교회에서 인도한 워크숍 동영상을 공개하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Crossing Church는 성경의 여러 권을 소개하는 Ten Minute Bible Talks라는 주간 묵상 팟캐스트를 제작한다. 2. 인플루언서 대신 선교사가 된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위해 대규모 플랫폼을 만드는 대신에 각각의 그리스도인이 특정 청중을 위한 틈새 기반 콘텐츠를 만들고 자신을 그들을 섬기는 선교사로 여기면 어떨까? 소수의 유명 인사가 장악하는 기독교 미디어 환경 대신에 지역 교회에 뿌리를 둔 중소 규모의 기독교 콘텐츠 제작자들이 틈새 시장을 향해서 목소리를 내는 건 어떨까?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를 대표하는 사람들의 인격이 아니라 오로지 플랫폼 자체에만 쏟는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줄일 수도 있다. 그렇게 된다면 상황이 어떻게 바뀔까? 한 가지 예가 Gavin Ortlund와 그의 유튜브 채널 Truth Unites이다. 개빈은 기독교(특히 개신교)를 옹호하는 명확하고 도움이 되는 냉철한 동영상을 만든다. 또 다른 예는 젊은 그리스도인 틱토커 Elijah Lamb(@doctrinewithlamb)이다. 그는 신앙을 지키려는 사람들보다 떠나려는 사람들에게 더 친근한 플랫폼에서 7만 명이 넘는 청중을 대상으로 꾸준히 어려운 교리적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두 제작자는 자신의 디지털 플랫폼에서 각각 고유한 형식으로 변증 작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콘텐츠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청중을 찾고 있다. 나름대로 그들은 다 디지털 선교사이다. 3. 좋은 것, 진실한 것, 아름다운 것을 큐레이팅하자모든 사람에게 독창적인 콘텐츠를 만들 능력이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콘텐츠 제작은 시간과 정신의 노력이 들어가는 부담스러운 작업이다. 그러나 콘텐츠 큐레이팅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의 길에서 성장하는 데에 유익한 자원을 제시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목회자라면 설교를 들은 교인들이 더 깊이 파고드는 데에 필요한 추가 자료가 담긴 웹페이지를 만들어서 설교 시리즈와 함께 게재할 수도 있다. John Houmes 목사는 ‘몸에 대한 기독교적 견해’에 관한 설교 시리즈와 관련해서 바로 이 작업을 했다. 나는 누군가의 신앙을 재구성하는 데 도움이 되는 백 시간이 넘는 음악과 팟캐스트를 담은 Spotify 재생 목록을 만든 적이 있고 또 헌신적이고 지적인 성장을 바라는 교인들을 위해서 교회 역사 문서를 큐레이팅한 웹 사이트를 제작하기도 했다. 4. 떠남으로 저항하라아예 소셜 미디어 삭제가 답인 사람들도 있다. 그 결과는 종종 행복과 영적 건강의 증가로 이어질 뿐만 아니라 영적, 문화적 저항의 한 형태로도 기능한다. 때때로 기독교 진리의 증거는 참여보다는 금욕을 통해 이루어진다. 여느 그리스도인과 다른 방식으로 소셜 미디어를 사용해서 눈에 띄는 그리스도인도 있지만, 동시에 전혀 사용하지 않음으로써 드러나는 사람도 있다. 떠난다는 목표가 그 자체로 부정적인 건 아니다. 다만 소셜 미디어를 당신의 삶에서 제거함으로써 당신의 정신적, 영적 건강을 도모하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지역 사회에 긴밀하게 밀착된 친밀한 관계를 세우려는 목표를 포기하는 건 아닌지 살펴봐야 한다. 교회가 해야 하는 역할소셜 미디어라는 새로운 선교 분야에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재능 있는 콘텐츠 제작자이자 전달자를 교회가 어떻게 식별하고 지원할 수 있을까? 교회는 교인 중에서 콘텐츠 제작자를 찾아서 서로 연결하고, 협력하고, 격려하는 기회를 만들 수 있다. 더불어서 다른 선교사들을 돕는 방식과 유사하게 “디지털 선교사”가 소프트웨어나 광고 비용을 충당할 수 있도록 소액의 급여를 준비할 수도 있다. 특정 상황에서 제작자가 장비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교회의 카메라나 마이크를 사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교회는 또한 소셜 미디어를 아예 사용하지 않기로 선택한 사람들을 격려하고 지원해야 한다. 영적 왜곡 지역을 떠난 피난민들이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과 공동체를 찾아 지역 교회의 문을 두드릴 때, 두 팔 벌려서 그들을 환영해 줄 건강하고, 눈이 맑고, 적응력 있고, 영적으로 성숙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디지털 플랫폼을 주요 사역으로 삼은 교회라면, 소셜 미디어 난민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따라서 교회라면 가정 교회, 성경 공부, 심방과 같이 오프라인 참여를 바라는 사람들을 위한 대면 사역을 갖춰야 한다. 그래서 오프라인을 선택한 사람들이 더 풍성하고 사랑이 넘치는 공동체를 체험하도록 도와야 한다. 네 가지 범주가 겹칠 때도 있고 완전히 다를 때도 있다. 그러나 교회와 교인 모두 소셜 미디어를 변형시키는 기계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셜 미디어 환경이 가져다주는 어두운 영향력은 더욱 커질 것이다. 그리고 알고리즘은 우리의 친구, 가족,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을 점점 더 타락시킬 것이다. 이 뒤틀린 공간에 어떻게 해야 복음의 소망과 개혁을 가져올 수 있을지 적극적으로 고민하자.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넘나들며 좋은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은 참으로 아름답다. 원제: Social Media Is a Spiritual Distortion Z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빈대가 쏟아 놓은 판도라의 항아리
by 필립 정
2023-11-11
요즘 한국 사회가 빈대 출몰로 매우 시끄럽다. 내년에 올림픽이 열릴 프랑스 곳곳에서 빈대가 퍼진다는 소식을 듣고 온 세계가 촉각을 세우기 시작했다. 북한의 미사일 발사에도 꿈쩍하지 않던 한국인들도 멀리 떨어진 나라의 작은 벌레에 민감하게 반응하였다. 그러다 인천의 한 찜질방과 대구의 한 대학 기숙사에서 빈대가 발견되고, 10월 한 달에만 서울의 18개 구에서 빈대가 출몰하자 코로나 이후 잠자고 있던 혐오 정서들이 빈대에 대한 공포와 함께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나는 빈대를 잡으러 다니는 직업 때문에 빈대를 흔하게 본다. 그래서 빈대를 보아도 개미나 거미 같은 벌레 보는 것처럼 별다른 공포심을 느끼지 않는다. 진정 내게 공포를 일으키는 것은 신중치 못하게 빈대를 퍼뜨린 사람들을 속단하고 그들에게 자신들의 공포와 불안을 투사하며 날 선 혀를 휘두르는 사람들이다. 코로나 유행기에 마스크를 쓰고 있는 나를 노려보던 미국인들의 눈길이 아직도 선하고 중국인들에게 손가락질하며 코로나 한풀이 하던 한국인들의 냉소도 여전히 끔찍하다. 그런데 요즘 빈대 출현과 함께 온라인의 댓글과 소셜미디어로 실어 나르는 혐오의 바이러스들이 다시 퍼져 나가고 있어 내 불안을 붙들어 맬 수가 없다.교회도 혐오, 편견, 인종 차별의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역사가 있다. 흑사병으로 수천만의 목숨을 앗아갔던 14세기 로마 교회의 모습은 코로나 이후를 살아가는 우리 시대와 매우 흡사하다. 로마 교회는 종말론 교리를 앞세워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을 페스트의 희생양으로 삼았고, 이 과오로 이전까지 수백 년간 쌓아 온 영적 권위를 실추시켜 버렸다. 이 얼룩진 역사의 거울에 지금의 우리 사회를 비추어 보면 온전치 못한 우리의 모습을 제대로 보고 반성할 수 있을까 싶어 이 글을 써 본다.페스트, 종말의 공포를 부르다14세기의 소 빙하기로 인한 대기근(1315-1322)과 페스트 전염병(1348)으로 유럽 인구의 30퍼센트 이상이 죽어갔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삶의 전부를 교회와 함께했던 유럽인들은 전쟁, 아사, 전염병을 겪으며 이를 요한계시록이 말하는 종말의 징조라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스스로 피투성이가 되도록 채찍질하며 회개하여 재앙을 피하려 하였지만 페스트는 교회를 통해 더 번져 갈 뿐이었다.당시 기근과 전염병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건강을 살피고 공포를 극복하게 도울 곳은 교회가 유일했다. 교황부터 사제에 이르기까지 매우 체계화된 조직력으로 유럽의 곳곳에 명령 전달이 용이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세속 권력이 없었던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자기 지방만 관할하는 영주들의 분산된 힘으로는 범 인류적 재난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또한 영주들의 세력에 비해 아직 중앙집권적 왕권은 충분히 무르익지도 못하고 있었다.그러나 유일한 희망이었던 로마 교회는 이미 스스로 무너져 가고 있었다. 오랜 십자군 전쟁의 여파와 패배로 그 단단하던 조직력이 붕괴하고 있었다. 대기근이 오자 농노를 기반으로 하는 장원 제도 역시 흔들리기 시작했고 페스트 전염병으로 농도가 절대 부족하자 교회 재정이 무너져 버렸다. 교회 권력의 와해는 곧 사회적 불안과 공포에 불을 지폈다.미국의 역사가 바바라 터크만(Babara W. Tuchman, 1912-1989)은 이 시기를 “폭력적이고, 고통스럽고, 당황스럽고, 붕괴된 시기였으며 사탄이 승리한 시기였다”고 정의하였다. 결국 교회가 무너져 가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선택한 것은 마녀사냥이었다. 세상이 불행해지는 것은 악마의 탓이라며 악마와 결탁한 마녀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시작하였다. 기근과 전염병의 공포에 눌려 있던 농민들과 도시 빈민들도 현실을 잊고 광분하여 폭력의 불길에 휩쓸려 버렸다.1484년 교황 이노켄티우스 8세는 마녀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교황령으로 단죄를 지시하였다. 곧 교황의 지시로 ‘마녀를 심판하는 망치’(Malleus Maleficarum, 1486)라는 책이 나왔는데 이 책에는 마녀와 악마와의 계약, 마녀들의 범죄, 마녀를 가려내는 방법, 재판과 처형 방법이 상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이 책은 이후로 100년이 넘도록 28판이나 인쇄되었고 수십만 명을 마녀로 몰아 처형하는 안내서가 되었다.교황이 처음에 마녀라고 불렀던 사람들은 지금의 독일 지역의 주술사들이었다. 성경(출애굽기 22:18)에 근거하여 마녀재판을 시작하였지만 사실 이들 다수는 전통적 의학을 시전하거나 신앙의 힘으로 전염병을 극복하도록 돕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교황은 이들이 교회의 권위를 침해한다고 여겼던 것 같다. 전염병은 몇 년이 더 지속되었고 교회는 계속 희생자를 찾아야 했다. 갈수록 걸인, 외국인 이주민, 저소득 여성, 어린아이, 특히 유대인 같은 사회적 약자들이 마녀로 몰려 희생되었다. 철저한 정결 의식 때문에 전염병이 잘 안 걸리는 유대인들을 우물에 독을 타 질병을 퍼뜨렸다고 모함하여 고문으로 거짓 자백을 받아내 수십만 명을 처형하였다.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절망에 젖은 농민들이나 배고픈 도시 빈민들은 종말론의 교리를 만나자 곧 자신들의 처지가 개선될 것 같았다. 지금 사탄이 잠시 승리해 재앙이 임하였지만 곧 그리스도가 이를 제압하고 천년왕국이 이루어져 살기 좋은 세상이 오리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탄과 손잡은 마녀들을 심판하기 위해 불을 지르고 폭력 사태를 행하며 천년왕국을 도래시킬 하나님의 전사로 자처했던 것이다.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위한 초법적인 그들의 행태는 더 큰 혼란을 낳을 수밖에 없었다. 포스트 코로나인류는 언제나 재앙이 닥치면 사회적 약자들을 희생양 삼아 혐오와 분노를 분출하며 사회적 낙인을 찍고 폭력을 가하는 행태들을 계속하였다. 19세기 후반 미국에서 천연두가 번지자 아시아인 이민자들을 표적으로 삼아 괴롭히고 추방법까지 만들 정도였다. 페스트 유행이 700년도 더 지난 지금까지 같은 일이 반복되고 있다.마치 페스트 유행 시대를 거울로 보는 것 같은 유사한 일이 코로나 시기에 일어났다. 내가 사는 미국에서 검은 머리를 한 아시아인들은 언제 폭력을 당할지 모르는 위기를 겪어야 했다. 코로나 유행 이후 미국에서 아시아인 증오 범죄는 급증하여 1년간 4,000건이나 된다고 인종차별 혐오범죄를 연구하는 AAPI가 발표하였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한국인의 중국 유학생, 조선족에 대한 사회적 낙인은 심각한 사회 문제로 대두되었다. 많은 한국인이 코로나19를 일부러 중국 바이러스 또는 우한 바이러스라고 부르고 국내 중국인들을 잠재적 바이러스 보균자로 낙인을 찍어버렸다. 그런데 채 2년도 지나지 않아 코로나 이후 잠잠하던 혐오의 감정들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빈대가 나타나 증오와 혐오가 가득 담긴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젖힌 것이다. 빈대가 나타나자 매체마다 학자들의 입을 빌어 기사를 쓰기 시작하였다. 여러 편을 읽어 보았는데 한결같이 그 기사들의 행간들에 숨겨진 의도들은 불순하기 짝이 없다.오프라인, 온라인 가리지 않고 그 기사 내용은 대체로 이렇다. “최근에 발견되는 빈대들은 예전에 있던 종들과 다르게 주로 열대 지방에 사는 종인데 외국인 노동자, 유학생, 외국 이민자, 또는 외국을 여행하고 돌아온 한국인들이 옮겼을 가능성이 높다. 이 빈대 종이 발견된 곳이 주로 외국 유학생 기숙사, 고시원, 찜질방 같은 곳이다.” 이 글을 쓴 기자들은 전문가의 견해를 자기들의 입맛에 맞도록 편집하여 독자들의 혐오 정서를 자극한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자극하여 많은 사람이 기사를 구독하고 읽게 하여 돈벌이를 하려는 것이 분명하다. 14세기에 ‘마녀들을 잡는 망치’를 쓴 학자들을 대신해 지금 21세기의 각종 매체가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자극하고 있는 것이다. 세월이 지나도 돈과 권력을 유지하려는 수단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조금만 더 알면 속지 않는다빈대에 대해서 조금만 더 알면 우리는 매체의 속임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빈대는 원래 박쥐의 몸에 붙어 있던 박쥐벌레(Batbug)였다. 석기 시대에 수렵 생활을 하던 조상들은 주로 떠돌며 동굴에서 생활하였다. 동굴에서 박쥐와 함께 기거하면서 사람들의 몸에도 박쥐벌레가 같이 붙어 다닐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이 수렵 생활을 끝내고 농작물 경작을 하며 주거 생활을 하면서 박쥐벌레도 사람들의 주거지에 같이 살게 되었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이 벌레를 침대벌레(Bedbug)라 부른다.한국에 빈대가 급격히 퍼지게 된 계기는 미군정 시기에 들어온 미군 때문인 것 같다. 1차 세계대전, 2차 대전 이후 빈대가 세계적으로 기승을 부렸는데 제일 극심한 곳은 미군 진영이었다. 미군을 따라 상륙한 빈대들은 1970년대까지 한국인들을 괴롭혔다. 그러다 DDT를 사용하면서 그 이후 빈대의 출현이 더 이상보고 되지 않았다. 빈대가 다시 나타난 시기는 서울 올림픽이 끝나고 세계화의 진행과 더불어 외국을 여행하는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부터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 정서상 빈대가 얼마나 번져 있는지 알 수 없었고, 이에 관한 어떤 연구나 조사도 이루어진 질 수 없었다. 최근에 발견되는 열대성 빈대 또한 언제 어디서 누가 들여왔는지 공식적인 보고조차 없다. 빈대에 관한 모든 것이 불확실한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기숙사나 고시원이나 찜질방에서 기거하는 가난한 외국인 유학생들을 빈대 유입자로 낙인을 찍어 버리고 있다. 그리고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무슨 일을 벌일지 모를 것처럼 분노를 표출한다. 이제 한국 교회가 과연 코로나로 피폐해진 사람들에게 다가가 달래 주고 위로가 되었는지 반성할 시점이 된 것 같다. 코로나19가 번져 가자 정부에서 모이는 예배를 당분간 중지해 달라고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부 교회에서는 종교 탄압이라고 주장하고 심지어는 코로나19는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이 걸리는 병이라고까지 하며 예배를 강행하였다. 그러다 여러 교회에서 오미크론 변이가 확산이 되면서 더 이상 변명할 수 없게 되자 국민들에게 사과하며 잘못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한국 교회사에서 언제나 교회는 자기 생존 유지에 급급하였다. 교회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성도들을 교회로 모이게 해서 페스트를 퍼뜨렸던 14세기의 교회와 지금의 교회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유사하다. 이렇게 되면 교회는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혐오와 폭력의 광기를 누그러뜨릴 영적 권위를 가질 수 없다.인간은 습관적으로 자기 죄를 부정하고 합리화한다. 코로나19 같은 바이러스에 감염이 되면 누구에게서 옮았을까에만 집중한다. 머릿속에서 작동되는 원인과 결과의 계산기에 언제나 나는 피해자로만 남는다. 나는 절대 가해자일 수 없어 가해자는 언제나 남이 된다. 가해자를 찾아 징벌해야 하는 당위성을 갖고 덤벼들지만, 대상은 항상 자기를 대변할 수 없는 만만한 사회적 약자일 수밖에 없다. 인간은 결국 자신의 잘못을 알면서도 인정하기 힘든 뇌구조를 갖고 있다는 뇌 과학자 정재승 교수의 말이 맞는다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각종 방어기제와 거짓으로 무장한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우리를 보면서 결국 아담의 후손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이런 원인과 결과의 체계는 계속 죄를 합리화할 수밖에 우리의 영혼이 쉴 자리가 없다. 오늘도 이 글을 마치면서 하나님의 돌발적인 은혜가 이 폐쇄적인 시스템을 파괴하고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하나님 앞에 겸허히 살아갈 수 있도록 간절히 구해 본다. 그리스 신화에서 제우스는 자기가 만든 여자 판도라에게 항아리를 하나 선물한다. 절대 열어보지 말라는 명령과 함께…. 그러나 호기심을 참지 못한 판도라가 항아리를 열자 혐오, 증오, 거짓 같은 죄악들이 세상으로 쏟아져 나왔다. 놀란 판도라가 항아리를 막아 버리자, 그 안에 담겨 있던 희망은 끝내 세상으로 나아오지 못했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의 이야기와 너무 흡사하지 않은가! 그러나 성경과 다른 것은 판도라의 항아리에서 쏟아져 나온 것 같은 이 세상에 구원의 하나님이 희망을 주시러 오셨다는 것이다. 빈대 때문에 쏟아져 나온 이 혐오와 폭력의 세상, 주의 은혜가 아니면 어디 희망이 있겠는가!
‘디지털 영’에 우리 아이들이 사로잡혔다
by Isaac Serrano
2023-11-07
“휴대폰 때문에 우리 애를 잃었어요. 애가 아예 딴사람이 되었어요.” 이렇게 한탄하는 부모의 말을 듣곤 한다. 이건 마치 “병으로 남편을 잃었어요”라고 말하는 아내의 말과 비슷하다. 이 두 가지가 그토록 유사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그 유사성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어떤 도움을 줄까? 영향 아래에서 술과 휴대폰, 둘 다 개인에게 작용하는 외부 영향이다. 도수가 높은 알코올의 경우, 그 물질을 흔히 ‘영’(spirit)이라고 부르곤 한다. 사람들이 증류주에 이 용어를 붙이기 시작한 데에는 신비한 역사가 있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이 도무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정확하다는 점이다. 술은 과음한 사람의 행동을 바꾼다. 적당하게 마셨다면, 술기운은 빨리 사라지고 몇 시간 내에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술이라는 영이 날마다 그리고 해마다 계속해서 쉬지 않고 초대받으면 어떻게 될까? 술은 이제 그 사람 안에서 영주권을 갖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그 사람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니야”라고 말할 정도로 그를 바꿔버린다. 술을 남용하는 주체가 처음에는 당신이다. 그러다가 불길한 교환 속에서 학대하는 주체가 서서히 술로 바뀐다. 그리고 학대의 피해자는 당신이 된다. 누군가를 괴롭히는 사악한 영처럼, 술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을 왜곡시켜 결국에는 아예 달라진 성격을 더 이상 알아볼 수 없게 만든다. 이와 같은 현상은 거의 모든 중독에서 발견된다. 무언가를 우리 속에 받아들이는 순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그것이 우리를 변화시킨다. 슬그머니 위험이 들어오다디지털 시대는 잠재적으로 유해한 각종 장치를 우리 집에 공개적으로 초대하는 세상을 가져왔다. 좋은 부모는 중독성 있고 유해한 물질을 주의 깊게 관찰하지만, 그럼에도 디지털이라는 기술 자체에 관해서라면 우리는 더 이상 제대로 인식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 많은 위험이 생겼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자명하다. 부모들 대부분이 디지털 기기를 자녀가 새로운 기술 세계에서 성장하는 데 도움이 되는 도구로 여겼기 때문이다. 처음만 해도 잘 몰랐지만, 이제 연구 결과는 분명하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화면과 소셜 미디어는 중독성이 강하고 행동을 바꾼다. 아이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단절되고, 더 비참하고, 외롭다. 대부분의 중독성 물질과 마찬가지로 디지털 장치는 기쁨을 약속하지만 불행을 더 많이 가져온다. 어떻게 해야 하나?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디지털 시대의 정신이 우리 자신이나 아이들을 통제하도록 놔두어서는 안 된다.현명한 사람이라면 술과 같은 전통적인 유해 물질에 관해서 절제하고 경계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부모와 법률이 접근 자체를 제한한다. 중독성을 가진 이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식을 취해야 한다. 디지털 소비를 규제하고 접근을 제한하는 명확한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리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 그건 너무 위험하고 비용도 많이 든다. 우리는 디지털 기술이 단지 도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그 기술이 아이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부모로서 할 수 있는 실제적인 조치는 뭐가 있을까? 미국의 법적 음주 연령은 21세이다. 아동 온라인 개인정보 보호법(COPPA)은 13세 미만 어린이의 소셜 미디어 사용을 제한하지만, 법 시행 메커니즘은 효과가 떨어진다. 그러므로 책임은 부모에게 있다. 부모는 지혜롭게 자녀를 위해서 결정해야 한다. 나는 16세 미만의 자녀에게는 소셜 미디어의 금지를 제안한다. 책임감 있는 성인이 포도주 두 잔을 음주 제한으로 설정하듯, 어린이와 성인 모두 화면에서 보내는 시간을 제한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아이들을 위해서 나는 하루 최대 한두 시간을 제안한다. 앤디 크로우치의 The Tech-Wise Family 같은 지침서를 활용해서 다양한 방안(예를 들자면, 집의 열린 공간에서만 화면을 보는 것)을 구현한다면, 디지털 시대에 성공하는 자녀로 교육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건강한 습관이 하루아침에 들지는 않는다. 중독성 있는 디지털 기술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완화하도록 다양한 예방 아이디어를 한 번에 하나씩 분명한 목적의식을 갖고 구현해야 한다.절박한 시대에어쩌면 당신은 ‘이젠 너무 늦었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디지털 중독으로 자녀들이 학교, 스포츠, 가족 관계에서 제대로 기능하는 능력은 이미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그게 현재 당신의 현실이라면, 더 심각해지기 전에 즉시 대책을 세워야 한다. 자녀를 위한 디지털 디톡스를 시작하라. 일정 시간을 정해서 화면 시청 시간을 크게 줄이거나 아니면 아예 보지 않도록 하라. 디지털 콘텐츠에 대한 30일간의 청정 식습관 도전으로 생각하라. Screen Strong은 가족이 디지털 기술로부터 완전한 해독을 구현하도록 돕는 훌륭한 30일 계획을 제공한다. 핵심은 디지털 소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대담한 시도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진전을 이룰 수 있음을 기억하라. 그리스도의 도움으로 자녀를 지배하는 디지털 영의 영향력이 약해질 수 있다.성령으로 충만하여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술에 취하지 마십시오. 거기에는 방탕이 따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십시오”(엡 5:18)라고 경고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는 디지털 중독이 우리 가족을 사로잡도록 놔둬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세상의 풍속을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옷 입어야 한다. 우리 몸은 성전이며, 아버지 하나님은 아들의 사역을 통해 우리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으며, 현재의 디지털 시대에도 신실하게 살 수 있도록 우리와 함께하셔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디지털을 제한하고 대체하는 패턴을 개발하라. 생명을 빼앗는 디지털을 생명을 주는 것으로 바꾸라.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고, 오히려 그리스도를 옷 입으라(롬 13:14).휴대폰을 내려놓고, 소셜 미디어에서 로그아웃하고, TV를 꺼라. 가족이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 식사하라. 식사하기 전에 찬송을 부르고, 주기도문으로 기도하라. 픽셀의 빛에 취해서 잠자리에 들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주는 빛의 인도함을 받아 잠자리에 들라. 자녀가 당신을 항상 지켜보고 있음을 기억하라. 자녀는 당신을 보고 그대로 본받는다. 기술이 나쁜가? 당연히 아니다. 기술의 성취는 많은 유익을 가져다준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많은 해를 끼칠 수도 있다. 성경은 포도주를 축복이라고 말하지만, 남용에 관해서만은 엄중하게 경고한다. 나 자신과 아이들이 디지털 중독이라는 바다에서 길을 잃지 않도록, 우리는 지혜와 신실함으로 이 위험한 디지털 시대의 바다를 항해해야 한다. 원제: What If Our Kids Are Addicted to the Spirit of the 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분노의 시대에 빠지기 쉬운 흔한 오류들
by Steve Bateman
2023-10-28
허위 정보, 당파적 조작, 조직적인 불신이 난무하는 온라인 세상에서 무엇을 믿을지 분별하라는 성령의 명령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깨어 있으라”(엡 6:18). “분별하도록 힘쓰라”(엡 5:10). “모든 것을 분간하라”(살전 5:21). 그리고 “생각하라”(딤후 2:7).무엇이 걸린 문제인가? 첫째, 교회의 평안이다. 40년 동안이나 목회를 했지만, 나는 전염병과 대통령 선거가 성도들 사이에서 얼마나 열정적인 분열을 일으키는지 제대로 몰랐다. 여느 목회자들처럼 나도 성도들로부터 “잘 연구된” 여러 기사 링크가 포함된 이메일을 받았다. 나는 이런저런 문제에 관해서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어떤 입장을 표하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그리고 자기 입장을 명확히 밝힌 다른 주에서 목회하는 유명 목회자들을 언급하며, 그들의 모범을 따르라며 충고하는 교인들도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사랑하는 교인들이 서로 모순되는 기사들을 보낸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그들 모두의 의견에 다 동의하는 건 논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중한 우정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적지 않은 교인들이 중요한 교훈을 배웠다. 우리의 연합이 진리를 분별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는 사실이다. 두 번째로 걸린 문제는 신뢰성이다. 우리가 거짓에 쉽게 설득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복음이 참되다는 우리의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고의적인 무지함 또는 눈가림은 진리의 여부를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하라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책임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모든 주제의 전문가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어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이고 공개적으로 지지하기 전에는 반드시 전략적 망설임을 가져야 한다. 진리의 분별을 위한 중요한 기술 중 하나가 성경 읽기 능력이다. 매일 뉴스 자료를 습득하는 것과 함께, 우리는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해야 한다(행 17:11). 성경 말씀을 통해서 우리는 헤드라인에 직접 언급되지는 않지만 동성 결혼을 옹호하는 현직 대통령의 다음 말 속에 숨은 실체를 파악하게 한다. “결혼은 단순한 제안일 뿐이다. 당신은 누구를 사랑하는가?” 성경적 능력은 우리를 이런 식의 속임수로부터 보호한다. 성경 읽기 능력을 키우는 것 외에도 행여 우리가 오류에 빠진 건 아닌지 자문해야 한다. 공개 토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곱 가지 오류는 다음과 같다.1. ‘성급한 결론’ 오류관련성이 있지만 불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결론을 받아들이는 경우이다. 몇 년 전, 전선 오류로 인해 애매한 상황에서 내 차의 경적이 요란하게 울렸다. 나는 내 앞에 있던 성급한 운전자들과 싸움을 벌일 뻔했다. “속보”가 난무하는 문화 속에서 얼마나 많은 가족, 교회, 국가가 감정적인 성급한 판단으로 분열되어 있는가?야고보의 조언은 여전히 유효하다. “누구든지 듣기는 빨리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고, 노하기도 더디 하십시오”(약 1:19). 천천히, 진정하고, 입을 닥치고, 곰곰이 생각하라.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성급하게 부정확한 결론을 내리고 나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일단 공개적인 입장을 취한 이상, 거기에 반대되는 사실이 드러나는 경우에 우리의 자존심이 더 크게 손상된다는 위험 요소를 똑바로 인식해야 한다. 더 많은 정보를 파악할 때까지 성급하게 결론 내리지 말고 판단을 보류하라. 2. ‘반복 논증’ 오류단지 자주 반복된다는 이유로 그 주장을 믿는 것은 반복 논증의 오류에 빠지는 것이다. 연구에 따르면, 아무리 거짓말이라고 해도 많이 들으면 들을수록 믿을 가능성이 커진다. 예수님은 사역 기간 내내 끊임없이 거짓 비난에 시달렸다(막 14:55-59).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런 식의 반복되는 거짓말을 믿었기에 “대제사장들이 예수를 여러 가지 일로 고발”(막 15:3)했다. 하지만 재판에서 예수님을 변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주장을 반복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이 되는 것은 아니다.유대인이 세계를 지배하려는 음모를 꾸몄다는 비난을 반복한 히틀러가 사용한 게 바로 이 기술이다. 나치의 선전은 거짓말을 증폭시켰고, 독일 문화에 반유대주의를 부추겨 마침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거짓말은 오늘날도 치명적인 증오를 불러일으킨다. 반복되는 내용을 받아들이기 전에 생각하라. 3. ‘인신공격’ 오류이 오류는 토론자가 논쟁보다는 사람을 공격할 때 발생한다. 논쟁에서 이긴 예수님을 사람들은 귀신 들린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렀다(요 8:48). 모욕은 더 이상 논쟁할 무기가 남지 않은 사람이 의지하는 최후의 수단이다. 욕설에 능한 정치인은 인신공격을 통해서 상대방의 정책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수고를 피하는 동시에 속기 쉬운 유권자를 효과적으로 설득한다. 복음에 충실한 목사를 단지 다른 목사가 ‘다시 깨어난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불렀다고 해서 그렇게 믿는 건 차마 변명할 수 없을 정도로 멍청한 일이다. 지적으로 게으른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인신공격에 빠지는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평판을 깎아내리고 나아가서 진리마저 훼손한다. 사람이 아닌 논쟁을 해체하라. 4. ‘이중 잣대’ 오류이중 잣대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표준을 다르게 적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리더십에서는 성품이 중요하다. 교회 지도자들은 권위를 위임받기 전에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딤전 3:2). 그들이 그 신뢰를 배반한다면 책임을 져야 한다. 부자라는 이유로, 인맥이 많거나 유명하다는 이유로 특별 대우를 받는 지도자가 있어서는 안 된다. 교회는 “편견 없이 이것들을 지키고, 어떤 일이든지 공평하게 처리해야”(딤전 5:21) 한다.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이 정치적 반대자들의 결점을 비판하면서 정치적 옹호자들의 비슷한 결점에는 변명으로 일관할 때, 믿지 않는 세상은 우리가 드러내는 불일치와 편파성을 고의적인 속임수라고 생각할 것이다. 모두에게 같은 기준을 똑같이 적용하라. 5. ‘억제된 증거’ 오류이것은 당신의 주장에 불리한 증거를 숨기는 것이다. 사법 제도에서는 진실을 판단하려는 공정한 제삼자 앞에서 두 당사자가 주장을 펼친다. 솔로몬의 말을 기억하라. “송사에서는 먼저 말하는 사람이 옳은 것 같으나, 상대방이 와 보아야 사실이 밝혀진다”(잠 18:17). 양측 모두에게 공정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 1770년 존 아담스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군중을 향해 총격을 가한 영국군을 변호했다.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고인들을 향한 배심원단의 편견을 눈치챈 아담스는 다음 사실을 상기시켰다. “사실은 완고한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바람, 성향, 열정이 가리키는 방향이 무엇이든 관계없이 사실과 증거의 상태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양측으로부터 모든 사실을 들은 배심원단은 멸시받는 군인들 가운데 살인죄를 범한 사람은 한 명도 없다고 판결했다.그리스도인은 언론의 자유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함으로써 증거를 억압할 수 있다. 수정헌법 제1조에 의해 무료로 보장된 뉴스 매체 간의 시장 경쟁은 견제와 균형을 통해 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더 많은 사실을 (그리고 팩트 체크를) 제공한다. “내가 원하는 사실”만을 보도하는 뉴스만 선택함으로 우리는 자신의 편견을 더 굳히고 나아가서 자신까지 속이는 경향을 보인다. 미국인의 80퍼센트 이상이 디지털 기기에서 뉴스를 얻는다. 디지털 기기는 독자를 편중된 정보에 가두는 알고리즘에 의해서 조작된 뉴스 제공원이다. 깊게 읽는 게 능사가 아니다. 다양하게 읽으라. 6. ‘유명인 의존’ 오류주장의 타당성보다는 유명인이라는 이유로 개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 ‘유명인 의존 오류’이다. 많은 언론인이 남다른 수사 기술을 갖고 있으며 청중이 의견을 확정된 사실로 받아들이도록 설득할 수 있다. 나중에 책임을 추궁당하면 유명인은 “농담이었어!”라고 즉시 변명한다(잠 26:18-19). 단지 재미있는 코미디, 풍자, 해설이었다는 식으로 자기 말에 책임을 회피한다. 1732년 벤저민 프랭클린은 리처드 손더스라는 가명을 만들어 자신의 경쟁자인 타이탄 리즈(Titan Leeds)의 사망일을 예측하고 발표했다. 리즈는 프랭클린이 예상한 날에 죽지 않았지만, 프랭클린-손더스는 사기를 계속 치며 엄청난 양의 연간 정보집(Poor Richard’s Almanack)을 팔고 미디어 시장 점유율을 높였다. 모든 청중이 프랭클린이 농담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 게 틀림없기에, 그는 자신의 거짓말에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저널리즘과 엔터테인먼트의 혼합은 미국의 오랜 전통이니까. 좌파 쪽에서 볼 때, 레이첼 매도우(Rachel Maddow)는 시청률을 성공적으로 끌어낸 매력적인 스타일의 미디어 유명인이다. 방송 중 명예훼손 발언으로 다른 언론사로부터 고소를 당했지만, 항소법원은 다음과 같이 사건을 기각했다. “합리적인 시청자라면 매도우가 객관적 사실을 암시했다고 결론 내렸을 리가 없다.” 우파 쪽에서는 터커 칼슨(Tucker Carlson)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당했다. 법정에서 그의 변호사들은 칼슨이 허구를 사실로 제시했다는 원고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이 선택한 변론 전략은 “칼슨이 자신이 논의하는 주제에 대해 ‘실제 사실을 진술’하는 것이 아니라 ‘과장’되고 ‘비문자적’ 논평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청중이 인식했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판사는 이에 동의하고 사건을 기각했다.두 유명인 모두 다 추종자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뉴스 소스로 인식되지만, 둘 다 언론 윤리를 제대로 준수하지 않는 것 같다. 그리고 두 법원 모두 미국인이 진실 주장을 분별하는 데 필요한 기술을 습득할 책임이 있다고 가정한다. 불행하게도 미국인 대부분이 손에 들고 있던 증거는 오로지 매도우와 칼슨의 입에서 나온 말이 전부였다. 엔터테인먼트의 이면을 꿰뚫어 보아야 한다. 그리고 증거를 제대로 파악하라. 7. ‘동기 호소’ 오류제안한 사람의 동기에 의문을 제기하며 제안 자체를 기각하는 경우이다. 바울은 어떤 사람은 나쁜 동기로 전파하고 또 어떤 사람은 좋은 동기로 전파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빌 1:18). 동기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다. 명예나 재산 축적을 위해서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책임을 질 것이다. 요점은 동기가 논쟁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설교자의 동기와 상관없이 복음은 참되다. 기소하는 주체가 단지 자신에게 불만을 품은 전직 직원, 질투심 많은 교단의 경쟁자, 필사적인 정치인, 또는 경멸받는 언론 매체라는 이유로 자신이 좋아하는 설교자나 정치인에 대한 혐의를 즉석에서 일축하는 그리스도인은 ‘동기 호소’ 오류에 빠진 것이다. 아무리 악의적인 동기라고 해도 제시하는 증거가 진짜일 수 있다. “정치적 동기가 있다”는 주장도 증거로 뒷받침되어야 하지만, 그와 관계 없이 혐의의 증거 자체가 검증될 수 있다면 고발자의 동기는 무관하다. 동기를 무시하라. 그리고 메시지를 조사하라. 합리성이라는 평판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문제에 대한 모든 진실을 아신다. 공개적으로 무언가를 지지하는 데에 있어서 내가 가진 지적 능력에 대해서 겸손한 태도를 갖는 것은 큰 도움이 된다. 특히 아무리 애를 써도 내가 하는 팩트 체크와 비판적 사고가 최신 헤드라인에 대한 진실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바울은 빌립보 신자들에게 “여러분의 관용(합리성)을 모든 사람에게 알리십시오”(빌 4:5)라고 권면했다. 합리적이라는 평판을 얻는 것이야말로 복음의 진실을 증언하는 우리를 여물지 못한 사람이 아니라 설득력 있는 주체로 만든다. 원제: Common Fallacies in an Age of Outr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기도는 우리의 뇌와 어떤 관계가 있는가?
by 최창국
2023-10-27
기도는 매우 역동적인 힘이 있다.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인격적인 관계 형성이 이루어지면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는 기도가 지닌 특성이기도 하다. 물론 기도를 통해 단지 개인의 내면의 안녕과 욕구만을 추구할 때 기도는 종교 중독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하지만 진정한 기도는 우리의 내면과 삶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기도에 관한 신학과 현상학의 통합적 연구를 처음 시도한 프레드릭 헤일러는 누구도 자신의 정신이나 내면세계와 관련이 없는 추상적인 내용으로 기도할 수 없다고 하였다.[1] 헤일러의 말처럼, 누구도 자신의 내면세계와 무관하게 기도할 수 없다. 따라서 기도가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특히 우리가 기도를 통해 신비적이고 초월적인 경험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일반은총, 즉 창조적 선물인 내면세계, 뇌 등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아는 것도 중요하다. 종교심리학의 개척자인 윌리엄 제임스는 여러 종교 행위 가운데 특별히 기도가 가져오는 효과를 강조하였다. 그는 종교 행위 가운데 기도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본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않을 때의 차이점은 마치 우리가 사람을 대할 때 사랑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과 사랑의 마음 없이 바라보는 것에서 나타나는 경험의 차이와도 같다. 우리가 아주 오래된 (진부한) 세상 속에 산다 할지라도 기도가 개입되면 우리의 정신은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맛볼 수 있다.”[2] 기도는 신학적, 영적 의미를 지닐뿐 아니라 인간 삶의 여러 차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기도하는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효과들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첫째, 기도는 성품 개선에 효과가 크다. 기도와 감사의 관계를 관찰한 흥미로운 연구가 있다. 기도를 더 많이 하는 그리스도인들의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기도와 감사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마이클 지가렐리가 그리스도인 성품 지수(Christian Character Index)에 관한 연구를 위해 미국 내의 50개 주, 전 세계 60개국을 대표하는 5,000명 이상의 그리스도인을 대상으로 한 임상적 연구에 따르면, 기도와 찬송과 예배 생활의 비율이 높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감사의 성품이 더 높게 나타났다. 또한 감사의 성품이 계발된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께 기도와 찬송과 예배하는 비율이 더 높게 나타났다.[3] 이는 기도와 감사는 상호유기적 관계 안에 있다는 것을 시사해 준다. 진정한 기도는 감사와 같은 성품을 우리 안에 형성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기도는 우리에게 수많은 성품의 특성을 계발하는 하나님의 능률적이고 효과적인 커리큘럼이기도 하다.둘째, 기도는 뇌를 치유하고 성장시킨다. 앤드류 뉴버거가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실시한 뇌 연구에 따르면, 모든 형태의 명상이 뇌의 긍정적 변화와 관계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최대의 뇌 기능의 향상은 참여자들이 구체적으로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이루어졌다. 사람들이 사랑의 하나님을 묵상하고 기도할 때, 추론하고 판단하고 하나님 같은 사랑을 경험하는 이마 바로 뒤쪽의 뇌 부위 전전두피질을 발달시키고, 그에 따라 공감과 동정과 긍휼과 이타심의 역량을 높여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가장 놀라운 부분은 그 다음이다.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타인 중심의 사랑이 커질 뿐 아니라 예리한 사고력과 기억력까지 더 좋아지는 결과가 나타났다. 즉,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하고 예배하면 실제로 뇌의 치유와 성장이 촉진되었다.[4] 따라서 우리가 기도할 때 하나님의 본질을 어떻게 믿고 기도하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실제로 사랑의 하나님을 믿고 기도할 때 우리의 신체적, 관계적, 심리적, 영적 상태가 달라졌다. 셋째, 기도는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면역체계를 강화한다. 마이애미대학교의 연구팀이 만성적인 질병을 앓고 있는 환자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서도 정기적으로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묵상하는 사람들에게서는 질병에 대항해 싸우는 주요 면역세포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스탠퍼드대학교가 100여 명의 여성 유방암 환자들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도 종교 활동 수치가 높을수록 백혈구나 림프구 같은 면역세포의 수치가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5] 기도와 묵상은 중요한 영적 삶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건강한 삶을 영위하는 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에서 1987년과 1995년 사이에 2만 1,000명이 넘는 성인을 대상으로 한 연구에서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기도와 같은 종교 생활과 행사에 참여하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예상 수명이 7년이나 연장되었다고 밝혔다.[6] 넷째, 기도는 자기 절제력을 높여준다. 정신적인 어려움을 겪기 전에 평소 기도를 해온 사람들의 경우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직면한 문제에 효과 있게 대처하는 힘을 보인다. 묵상과 기도에 사용한 시간은 자아에 병적으로 함몰될 수도 있는 삶을 극복하도록 도와 줄 수 있다.[7]다섯째, 기도는 정신세계에 큰 영향을 발휘한다. 기도는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영향을 감소시킨다. 기도하는 동안 인간의 뇌파와 심박동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결과가 나타났다.[8] 특히 평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기도해 주는 사람들의 경우 재정적으로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에서 신체적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덜 받는 것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자신의 재정적인 유익만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들은 스트레스로 인한 부정적인 정서를 잘 다스리지 못한다. 기도하는 사람이 자신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더욱 긍정적인 효과를 경험하게 된다. 나아가 기도는 스트레스로 인한 알코올 섭취량을 줄이는 결과가 나타났다. 체스터 톨슨과 헤롤드 코닝의 의하면, 가장 효과가 뛰어난 스트레스 감소요법은 기도라고 하였다.[9] 나아가 여러 연구 결과에 의하면, 예배에 참석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고, 여러 가지 형태의 종교적인 활동에 참여하면 개인의 삶과 건강에 많은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결과들이 임상연구를 통하여 밝혀지고 있다.[10] 신앙심 깊은 기도는 사람을 상대적으로 더 튼튼한 부부관계와 가정생활을 유지하게 하고, 상대적으로 더 건전한 생활방식을 가지게 하고, 상대적으로 스트레스를 더 쉽게 이겨내게 한다. 나아가 심각한 혈관 관계 질환을 막아주고, 상대적으로 더 강력한 면역체계를 형성하도록 도와주기도 한다.[11]1. Friedric Heiler, Prayer: A Study in the History and Psychology of Religion, 308. 2. 윌리엄 제임스, 종교 체험의 여러 모습들, 496.3. 마이클 지가렐리, 예수의 성품을 가진 크리스천, 81.4. Andrew Newberg·Mark Robert Waldman, How God Changes Your Brain: Breakthrough Findings from a Leading Neuroscientist, 27-32, 53.5. T. E. Woods·M. H. Antoni·G. H. Ironson·D. W. Kling, “Religiosity is Associated with Affective and Immune Status in Symptomate HIV-Infected Gay Men,” Journal of Psychosomatic Researches, 45(1999): 165-76.6. R. Hummer·R. Rogers·C. Nam·C. G. Ellison, Demography, no. 36/2(1999): 273-85. 7. 월트 래리모어, 하나님이 창조하신 건강한 사람, 258-59. 8. 필립 얀시, 기도, 456.9. Chester Tolson·Herold Koening, The Healing Power of Prayer, 48. 10. 래리 도시, 치료하는 기도 참조, 이 책은 미국의 80여 의학대학원에서 대체의학의 한 유형으로 기도치료에 관한 교재로 사용하고 있다. 11. Chester Tolson·Harold Koenig, The Healing Power of Faith 참조.
세속적 신비주의인가,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by 이춘성
2023-10-17
안정된 직장, 자랑하고 싶은 남편, 누구나 살고 싶은 뉴욕 맨해튼의 고가 아파트를 소유하고 있던 한 전문직 여성이 어느 날 인생의 의미와 행복을 찾기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이혼한 후에 1년간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여자는 미식의 나라 이탈리아에 가서 신나게 먹고, 인도에 가서 뜨겁게 기도하고, 발리에 가서는 열렬히 사랑한 후에 행복이 무엇인지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2010년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줄거리이다. 사실 이 영화의 원작은 미국의 작가 엘리자베스 길버트가 자전적 이야기를 쓴 동명 에세이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이다. 이 책에는 “난 내 안에 있는 신을 존중한다.” “‘나’만을 위한 식사를 즐긴다.” “내 안의 에너지가 응답한다.” “어느 목요일 오후 신과 하나가 되다.” 이런 신비한 영적 체험에 관한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리고 이 모든 신비적 체험과 일상의 중심에는 ‘나’라는 존재가 자리 잡고 있다. ‘나’는 우주의 중심이다.위와 같이 ‘나’를 찾기 위한 여행과 행복의 중심에 ‘나’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욕구는 이전부터 있었던 세속적 신비주의라는 영적 흐름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1976년 첫 출간된 후 3,500만 부가 넘게 팔린 웨인 다이어의 행복한 이기주의자는 세속적 신비주의의 교과서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이 책에서 웨인 다이어는 세상에서 살면서 어려움이 닥치면 외부의 도움이 아닌 내면의 힘을 통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이 내면의 힘이 영적인 힘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 영적인 힘을 끌어내는 다섯 단계의 단순한 방법을 제시한다. 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하라.둘째,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믿고 맡겨라.다섯째, 감사하라.웨인 다이어가 제안한 이 다섯 단계 명상법은 일종의 명상 매뉴얼이 되어, 지금도 각종 명상의 핵심 요소이다. 현재 이와 유사한 명상 방법은 여러 형태로 발전되어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관리하는 유용한 도구가 되었다. 구글과 아마존 등과 같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IT 업계에서는 직원 복지 차원에서 회사에서 명상 프로그램을 제공한 지 오래다. 번아웃 세대를 쓴 곽연선은 특히 MZ세대들이 이 명상 프로그램에 열심히 참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직장이나 사회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관리하고 있다가 말한다. 이제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은 현대인의 일상 안으로 들어와 뿌리를 깊이 내리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흥미로운 현상은 사람들이 세속적 신비주의의 명상과 기성 종교를 병행하면서 그 사이의 충돌이나 이질감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위의 다섯 단계의 명상법에서 주어만 바꾸면 교회에서 가르치는 내용과 유사하기 때문이다.‘나’ 중심 영성첫째, 힘든 일과 마주치면 먼저 심호흡부터 해라.둘째, 하나님께 ‘나는 괜찮다’라고 선언하라.셋째, 하나님께 기도하거나 간절히 원하라.넷째, 하나님께 믿고 맡겨라.다섯째, 하나님께 감사하라. 실제로 밑줄 친 부분에 다른 신의 이름이나 사람의 이름을 넣어도 어색하지 않다. 웨인 다이어의 명상법은 종교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게 만드는 대중적인 성격이 있다. 문제는 웨인 다이어의 세속적 신비주의가 가르치는 영성은 꼭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어도 된다는 메시지를 그가 제시하는 방식의 명상이나 영성을 접하는 사람들에게 은연중에 가르치고 있다는 것이다.결론적으로 세속적 신비주의는 종교와 유사한 신비한 체험을 경험하게 하지만, 이러한 체험을 주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관한 관심이 아니라 단지 내가 신비한 경험을 할 수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메시지를 가르치고 있다. 내가 원하는 영적 경험을 하지 못한다면, 언제든지 그 영적 경험을 위해 내가 믿는 대상을 바꿀 수도 있으며, 버릴 수도 있는 것이 세속적 신비주의 논리적 결론이다. 그러므로 신비적 경험의 주체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라 ‘나’라는 주관적 자아이다. ‘나’는 행복의 기준이며, 의미의 판단자이고, 모든 윤리의 창조자이다.‘그리스도’ 중심 영성 사도 바울은 기독교 영성의 핵심을 데살로니가 교회에 쓴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가르치고 있다(살전 5:16-18). 항상 기뻐하라.쉬지 말고 기도하라.범사에 감사하라. 이 내용은 겉으로 보기에는 웨인 다이어가 가르친 세속적 신비주의 영성과 유사하게 보인다.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기쁨과 기도, 감사는 주관적 행복과 의미를 찾기 위한 명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사도 바울이 가르친 영적 활동에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살전 5:18)이라는 분명한 이유와 목적이 있다. 바울은 극도로 가난했던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들의 행복과 실용적 유익을 얻기 위한 기쁨, 기도,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기쁨, 기도, 감사를 명령하였다. 기독교의 영성은 ‘나’와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그리스도를 기뻐하며, 그리스도에게 기도하며, 그리스도로 감사하는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 것이다. 기독교 영성은 기쁨과 감사를 찾는 여행이 아니다. 역으로 이미 받은 기쁨, 감사, 기도의 근거인 ‘그리스도’를 인생의 중심에 두고 사는 순종의 영성이다. 마지막으로 모두에게 정직하게 묻고 싶다. 지금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을 지배하고 있는 영성은 과연 ‘그리스도 중심 영성’인가?
흘러가는 시간, 흘러오는 시간
by 전재훈
2023-10-16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어느 부자의 아들이 노인으로 태어나 점점 젊어져 간다는 내용이지요. 영화로도 만들어져 꽤 인기를 얻었던 작품입니다. 시간이 거꾸로 갈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이야기이지요. 하지만 한 번쯤 상상해 볼 만한 것은 되나 봅니다.시간에 대해 사람들은 진리처럼 믿고 있는 것이 있습니다. 시간은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는 것이지요. 빅뱅에 의해서 지구가 만들어지고 수많은 시간이 흐르고 흘러 지금의 인류를 만들어 내었다고 말입니다. 사람들은 태어나서 자라고 늙고 죽어 갑니다. 지금의 내 모습은 지나간 시간이 쌓여 오늘의 모습이 된 것이지요.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이런 시간관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도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만드셨고 그들의 무한 번식으로 오늘날 저와 여러분이 있는 것입니다. 아담의 범죄로 인해 우리는 에덴을 상실한 채 살아가고 있지요.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기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고 그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들이 지은 죄로 인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오늘의 나는 과거의 행동에 의해 나타난 결과물이지요. 열심히 공부한 사람은 대학도 가고 대학원도 가고 자기 분야에서 맡겨진 소임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베짱이처럼 놀기만 한 사람들은 그 결과로 가난의 수렁에 빠지거나 방탕한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거나 화를 주시는 것도 사람들이 과거에 살아온 삶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율법을 지키고 정직하게 행한 사람에게는 복을 주시고 하나님 앞에 망령되이 행했던 사람은 저주를 받아 질병에 걸리거나 죽임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현재의 나는 과거의 나의 행동의 결과라고 믿기 때문에 미래의 나는 현재 어떻게 사느냐가 결정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은 사람은 복 받을 만한 일을 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천국에 가거나 지옥에 가거나 하는 모든 일은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가 결정한다고 보는 것이지요.이런 시간관을 가진 사람들의 관심사는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에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인생관이나 습관, 행동, 철학 등을 연구합니다. 그것이 어느 정도 공통적인 모습이 있어서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같은 책들이 만들어 지지요. 인터넷에 ‘십계명’을 쳐보면 온갖 종류의 십계명들이 검색됩니다. 건강한 습관 십계명, 웃음 십계명, 부부 십계명 등등 다양한 버전이 존재합니다. 이들은 모두 이런 십계명을 지키며 살다 보면 보다 나은 미래를 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도 동일한 주장들이 있습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는 사람들은 쓰임 받을 만한 이유가 있다고 믿습니다. 그들의 부모가 신앙으로 아이들을 길렀고, 그 사람들은 정직했으며, 그 사람들은 기도하는 사람들이었고,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 쓰임 받고자 한다면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하나님이 언제든지 쓰실 수 있게 준비된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쓰임 받고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교회는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들을 운영합니다.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사는 성도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까를 고민하며 삽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복이 내 삶에 임하거나 내 자녀에게로 흘러갈 거라고 믿지요. 아우구스티누스가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모니카의 포기하지 않는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습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지는 않지만 그래도 제법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의 어머니가 기도 열심히 하는 권사님이라면 그가 성공한 이유에는 어머니의 기도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그러나 모든 사람이 시간은 과거로부터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시간은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말이지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개념이 아닙니다. 현재의 내 모습은 과거에 내가 한 어떤 행동의 결과라고 생각하기보다 미래의 어떤 내가 되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나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미래라고 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내가 과거에 사업을 한번 실패했던 것은 그 전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오늘의 성공을 이루기 위해서 그랬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목사님들 중에서도 이런 생각을 가지신 분들이 계십니다. 모세가 80세 때 떨기나무 앞에서 하나님께 소명을 받은 이유에 대해 모세가 애굽에서 40년을 살고 광야에서 40년을 살아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모세를 출애굽의 지도자로 세우시기 위해서 애굽에서 왕자로 40년을 살게 하고 광야에서 양을 치며 40년을 살게 하셨다는 것이지요. 또 다른 예를 들면 베드로가 훌륭한 삶을 살아서 제자가 된 것이 아니라 훌륭한 삶을 살 것이라서 제자가 됐다고 하는 식입니다. 예수님이 그를 제자로 삼으신 이유가 베드로의 과거 때문이 아니라 그의 미래 때문이라는 것이지요.목사님들의 신앙고백을 들어보면 내가 목사가 되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았다고 고백하기보다 하나님이 나를 이런 일을 하는 목사로 세우시기 위해 이런저런 삶을 살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 내 현재가 과거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나의 과거가 현재의 삶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지금 내가 고난과 고통 가운데 신음하는 것은 내가 과거에 잘못된 삶을 살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예비하신 연단의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듣기에 따라선 두 가지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주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성공한 사람에게는 자신의 과거가 자기 의나 자기 공로가 됩니다. 혹은 내가 살아온 삶의 결과로 어려움을 겪는 사람에게 과거는 자기를 정죄하는 근거가 되지요. 자기 의나 자기 정죄는 둘 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죄악들입니다. 그 두 가지 경우 모두 다 하나님이 개입할 여지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대로 과거의 삶이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한 하나님의 은혜였다고 고백하는 사람들은 어려움과 고난 앞에서 원망과 불평을 하거나 자기 정죄에 빠지지 않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기대하게 됩니다. 과거에 방황하며 헤맬 때 ‘하나님은 어디 있었느냐’고, ‘하나님이 내게 해 주신 것이 무엇이냐’라고 원망하던 사람이 그 일로 인해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면 그때의 그 기도를 회개하고 도리어 그런 삶을 하신 것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시는 것 같았지만 항상 내 곁에 계셨노라고 고백하고, 하나님이 아무 일도 안 하신 것처럼 보였지만 사실은 그 일을 견딜 힘을 주시고 계셨노라고 고백하지요. 과거에 내가 행한 어떤 일로 인해 오늘의 내가 될 수 있었노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는 퇴색되거나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의 나를 만드시기 위해 과거의 어떤 일을 겪게 하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사람에게는 내 삶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가 됩니다. 오늘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내 미래가 결정된다고 보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이 없지만, 하나님이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이루기 위해 오늘 이런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소망을 품게 됩니다. 보다 신학적인 이야기를 하자면 하나님이 내 삶의 역사에 부분 개입하신 것인가 아니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신 것인가 하는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물론 내 삶의 선택의 책임이 내게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 있는가 하는 문제도 만들어 내지요. 하나님이 내 삶에 전적으로 개입하시는 것이라면 내 선택의 책임은 하나님께 있는 것 아니냐고 할 수 있습니다. 우연한 기회에 제가 하나님의 전지하심을 얻게 되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내일 제 딸이 학교에 가면 놀다가 손가락이 부러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만약 여기까지만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을 학교에 보내지 않아야 하겠지요. 하지만 온전한 지혜는 손가락이 다치는 일로 생겨나는 다음 일들도 알게 됩니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다치는 바람에 덤벙거리는 습관이 고쳐지고 조심성이 생기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면, 또는 그 손가락을 치료하러 병원에 갔다가 아이의 삶에 좋은 스승이 될 만한 의사를 만나게 될 거라는 것까지 알고 있다면 저는 제 딸이 학교에 가는 것을 막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제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은 막는 것만이 개입이 아니지요. 그냥 보내는 것도 딸아이의 삶에 개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딸아이의 손가락을 다치게 한 것은 아닙니다. 제 딸이 저에게 울면서 왜 자기가 학교에 가게 두었냐고 따질 수 있습니다. 자기 아픔이 너무 커서 제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고 무조건 원망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철이 들고 나서 그 일로 매사에 조심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또 의사의 꿈을 꾸게 된 것도 알게 되면 제게 했던 원망을 감사로 바꿀 수 있습니다. 제가 제 딸아이를 사랑하지 않아서 다치게 내버려 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너무나 사랑해서 그냥 다치게 두었고 회복할 때까지 함께 아파해 주고 함께 울어주고 함께 병원 다녀준 것을 알게 된다면 제 딸아이는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시간이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간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저렇게 될 수 있다’라고 하고,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온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저렇게 되려고 이렇게 사는 것이다’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이렇게 살아야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가르치는 사람과 ‘하나님이 복을 주시려고 이렇게 살게 하신다’고 선포하는 사람의 차이를 만들지요. 작은 생각의 차이로 느껴질 수 있겠지만 이 둘 사이의 고백은 너무나 다르고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다르며 삶의 무게도 다르게 느낍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하나님이 졸거나 주무시거나 방심하신 탓이 아닙니다. 그 선악과를 따 먹음으로써 하나님이 죄를 얼마나 싫어하시는지를 온 인류가 알게 되고, 또한 하나님이 아들을 보내어 십자가에서 그 죄를 해결하게 하시는 것을 봄으로써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크신지도 알게 하지요. 수가성 여인이 잘못된 삶을 살아서 남편 다섯을 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오지 않는 그 시간에 물 뜨러 나와서 사마리아 여인임에도 불구하고 메시아를 만나게 하시려고, 또한 자신의 삶을 통해 그 메시아를 수가성에 알리는 선교사가 되게 하시려고 남편 다섯을 두게 하신 것입니다. ‘상처 입은 치유자’라는 개념은 시간이 미래에서 과거로 흘러오고 있다고 생각하기에 나올 수 있는 개념입니다. 가수 김장훈이 다들 포기한 비행 청소년들을 상담해 줄 수 있었던 것은 그 역시 비행 청소년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김장훈을 두고 하나님이 이 땅의 비행 청소년들을 돌보는 사람이 되게 하시려고 아픈 과거를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는 것이지요. 이는 잘못된 과거를 변명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픈 과거를 치료하는 것입니다. 더 이상 과거에 매여 사는 사람이 아니라 미래를 소망하는 사람이 되게 하는 데 반드시 필요한 일이지요.여러분의 시간은 ‘흘러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흘러오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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