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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겠다며 내세우는 다섯 가지 잘못된 이유
by Joe Carter
2023-10-14
Forbes Advisor가 결혼이 실패하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 이혼했거나 이혼 과정에 있는 미국인 천 명을 대상으로 설문 조사를 했다. 조사에 따르면 이혼자 63퍼센트가 결혼 서약을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이혼을 막을 수도 있었을 거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56퍼센트는 배우자의 도덕성과 가치관을 더 잘 이해했더라면 결과가 달랐을 거라고 말했다. 어떤 방법을 썼더라고 이혼을 막을 길은 없었다고 대답한 사람은 놀랍게도 불과 5퍼센트 미만이었다. 결혼의 신성함이 점점 더 위협받는 세상에서 이혼의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사항을 재평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유기, 학대, 또는 외도와 같이 성경에서도 허락하는 이혼의 사유가 없는 건 아니다. 그러나 설문 조사에서 알 수 있듯이 헌신과 가치에 대한 더 나은 이해만으로도 얼마든지 더 유지될 수 있었을 관계도 퍽 많다. 다음은 결혼을 끝내는 합법적인 근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자주 이혼의 이유로 인용되는 다섯 가지이다. 1. 사랑이 식었다: 감정적 오류가장 자주 인용되는 이혼 사유 중 하나가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모두가 “사랑이 식었다”라는 생각이다. 문학, 영화, 대중문화의 영향을 받은 현대의 사랑 개념은 낭만적이고 감정적으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 관점은 사랑을 주로 감정적 경험으로 오해하는 데 뿌리를 두며, 그 결과 성경이 말하는 헌신과 행동에 기반을 둔 사랑과는 극명한 대조를 보인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사랑에 대해 가장 자주 사용되는 용어는 아가페인데, 이는 이타적이고 희생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전서 13:4-7에서 사랑을 오래 참고, 친절하고, 모든 것을 견디는 것이라고 묘사한다. 그리스도인에게 결혼의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아가페의 사랑이다. 사랑에는 선택의 의미가 있다고 가정할 수도 있다. 진정한 사랑은 감정보다는 결정의 문제인 게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게 단순한 선택이란 의미는 아니다. 존 파이퍼의 말이다. “우리의 사랑이 단지 선택에 불과하다면, 그것은 아직 사랑이 갖춰야 할 모습을 제대로 드러낸 게 아니다.” 파이퍼의 지적대로,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라고 부르셨고, 그 부르심을 실천하는 것은 주님에 대한 의존 없이는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라는 선물을 통해서만 우리는 결혼의 유대를 유지하는 바른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다.2. 불일치: 완벽한 짝에 대한 신화현대 시대가 제공하는 가장 파괴적인 개념 중 하나가 ‘소울메이트’ 또는 ‘완벽한 짝’이라는 환상이다. 일치가 중요하기는 하지만, 완벽하게 일치하는 두 개인이란 있을 수 없다. 모든 남자와 여자는 죄인이므로 다 각자의 몫에서 결함이 있고 부서진 상태이다. 성경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라고 선언한다. 따라서 불완전성과 불일치는 당연히 예상되는 결과이다. 우리는 소울메이트가 아닌 희생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우리가 어떻게 사랑하고 희생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극적인 모델이다. 결혼생활에서 부부는 예수님의 사랑을 본받아서 서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섬기라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의 욕망과 선호,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 필요한 유익까지도 내려놓아야 한다. 상대방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고난과 불편까지 기꺼이 감수하는 사랑이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5:25은 남편들에게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희생하신 것처럼 하라고 교훈하고 있다. 이러한 수준의 희생적인 사랑은 불일치가 이혼의 근거가 되어서는 안 됨을 말한다. 도리어 불일치야말로 얼마든지 해결될 수 있고 또 해결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직관에 반하는 현실이 알려주는 사실은 종종 필요한 희생을 치른 후에야 진정한 일치가 찾아온다는 것이다. 일치란 갈등 없이 함께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다. 그건 발견하는 게 아니다. 도리어 당신이 끊임없이 노력해서 이뤄야 하는 목표이다. 바로 로마서 12:18에 나오는 바울의 이 권면을 따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다. “여러분 쪽에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십시오.” 결혼했다면 이 권고의 수행 여부는 전적으로 당신에게 달려 있으며 배우자와 평화롭게 지내기 위해, 즉 조화를 이루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한다. 3. 경제적 갈등: 일시적인 관점과 영원한 관점결혼생활 스트레스의 원인으로 흔히 거론되는 게 재정의 어려움이다.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문제임은 사실이지만, 이혼의 구실로 성급하게 사용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리는 이 문제를 현세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초점을 전환하도록 돕는 기회로 보아야 한다. 금전의 어려움은 대부분 일시적이고 그 뿌리는 부패하기 쉬운 물질의 부에 초점을 맞추는 데에 있다. 예수님은 땅에 보물을 모으는 어리석은 짓에 대해서 친히 경고하셨다.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다가 쌓아 두지 말아라. 땅에서는 좀이 먹고 녹이 슬어서 망가지며, 도둑들이 뚫고 들어와서 훔쳐간다”(마 6:19). 결혼생활의 초점이 물질의 축적에 있어서는 안 되며, 사랑, 충실함, 영적 성숙과 같이 관계가 함양해야 할 영원한 가치에 맞춰져야 한다. 부부가 직면하는 재정적 어려움은 우선순위를 재평가하고 이를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더욱 밀접하게 맞추는 기회를 제공한다. 재정의 어려움은 또한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만족과 믿음을 키우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 바울은 빌립보서 4:11-13에서 모든 상황에 풍부하든지 궁핍하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고 썼다. 이는 바로 그리스도에 뿌리를 둔 만족이다. 마찬가지로 재정적으로 어려운 부부도 얼마든지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만족하고 신뢰하는 법을 배울 수 있다.이 충고를 하나 마나 한 순진한 소리라고 너무 성급하게 일축하지 말라. 우리 주변에는 재정에 대한 성경적 관점을 채택하고 현세적 관점을 영원한 관점으로 전환함으로써 결혼의 유대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하는 방식으로 재정적 어려움을 헤쳐 나간 수많은 그리스도인 부부가 있다. 4. 개인적 행복: 나 중심의 접근 방식1970년대 이후로 개인의 행복과 자기실현 추구를 중심으로 하는 서사가 미국 문화를 지배해 왔다. 이러한 관점은 개인의 행복이 삶의 궁극적인 목표임을 시사하는 미디어, 문학, 심지어 많은 세속 심리학 이론에 의해 강화되었다. 이러한 접근 방식이 가진 문제점은 더 큰 행복으로 이어지지 않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나아가서 결혼생활에서 요구되는 상호의존성까지 적극적으로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성경은 삶과 관계에 대해서 자기중심적 접근 방식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서사를 제공한다. 빌립보서 2:3-4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친다. “무슨 일을 하든지, 경쟁심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십시오. 또한 여러분은 자기 일만 돌보지 말고, 서로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보아 주십시오.” 상호 복종과 자기희생이 참된 번영의 비결인 결혼생활에서 이 원칙은 특히 더 잘 적용된다(엡 5:21).세상이 주는 행복은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것에 불과하지만,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진정한 기쁨을 찾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느헤미야 8:10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라고 말씀한다. 이 기쁨은 일시적인 감정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고 섬기는 데서 오는 깊고 지속적인 만족이다. 5. 지루함: 안주가 주는 위험결혼생활에서 느끼는 안주는 종종 서로를 향한 관심과 열정의 부족으로 드러난다. 그것은 건강한 결혼생활에 필수적인 친밀감과 신뢰의 유대를 점차 약화시킨다. 안주는 지속적인 양육과 소중히 여기며 의도적인 노력을 요구하는 성경적인 결혼 모델과 정반대이다(엡 5:29).그리스도인의 결혼생활에서 지루함을 극복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는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성장하는 데에 집중하는 것이다. 이 영적인 여정에 참여하는 부부는 평범한 일상을 초월하는 목적의식과 방향을 발견할 것이다. 영적 성장을 촉진하는 공동 활동에 참여하는 부부는 시간이 지날수록 각각 그리스도를 닮아가면서 서로를 향한 관심도 함께 커질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작가 새뮤얼 존슨의 말이다. “런던에 사는 게 지친 사람은 인생에도 지치게 된다. 왜냐하면 런던에는 삶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다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에도 마찬가지이다. 배우자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살았던 인물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사람과 점점 더 닮아간다고 생각해 보라. 어떻게 그 사람에게서 지루함을 느끼겠는가? 결혼을 유지해야 하는 한 가지 중요한 이유각종 결점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결혼생활을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단지 인간의 행복이 아니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기 때문이다. 복음 중심의 결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에 대한 살아있는 은유 역할을 한다. 일시적인 만족과 피상적인 약속에 빠져 있는 세상에서 복음에 기반을 둔 결혼은 소망의 등불이다. 결혼은 단지 사회 계약이 아니라 신성한 계약이며, 무엇보다 그 계약에 가장 많이 투자하신 분이 하나님이다. 부부가 하나님께 가까이 다가갈 때, 그들은 감정적 거리, 재정적 스트레스, 불완전함 등 자신에게 닥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힘을 얻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기쁨, 공동 희생의 만족, 그리고 믿음으로 관계를 맺을 때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평화를 발견한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부부에게 복음은 더 나은 이야기를 제공한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우리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에 깊이 뿌리를 내림으로 변화를 일으키는 선택이다. 그 사랑이 기초가 될 때, 하나님과 함께라면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당신도 이해할 것이다. 가능한 모든 것 안에는 세상이라면 일찌기 포기했을 수도 있는 결혼의 갱신과 회복, 심지어 제2의 신혼까지도 포함된다. 세상 표준에 기초한 결혼생활의 활력에 대해서 의문이 드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면 결혼을 만든 분이 하나님이고 결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길 원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께 의지하고 성경에 설명된 원칙을 받아들이라. 그렇게만 한다면, 다시 뜨거워지는 사랑, 새롭게 구축되는 신뢰, 그리고 잃었다고 생각했던 깊은 친밀감까지 회복하는 게 가능하다. 아니, 가능한 정도가 아니라 당연하다. 이것이 복음 중심의 결혼에 대한 소망이자 약속이다. 원제: 5 Bad Reasons to Get a Divor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갈 때
by 양혜원
2023-10-13
학교 앞에 짧게는 넉 달 길게는 여섯 달에 한 번 가는 미용실이 있다. 오래전부터 내 머리는 파마도 염색도 하지 않고 그냥 단발 정도의 길이로 자르기만 하는데, 어떻게 손질해도 추레해 보인다 싶으면 한 번씩 가는 주기가 넉 달에서 여섯 달이다. 주문하는 스타일은 늘 같다. 이전에 머리를 자르고 찍은 셀카를 보여주면서, 이렇게 해주세요, 하는 한마디가 끝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석 달 만에 미용실을 찾게 되었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머리 형태가 망가져 손질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기르면 손질이 쉬울까 하는 생각에, 이번에는 지금 상태의 머리를 다듬고 조금 기르는 방향으로 해달라고 추가 주문을 했다. 일하던 연구소 직원에게 소개받은 이 미용사는 만지는 손이 거칠고 말이 투박하다. 게다가 커트비도 비싸게 받는다. 하지만 머리를 잘 자른다. 반곱슬인 내 머리를 단발로 자르면서 삼각김밥 모양이 안되게 자르는 사람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터였다. 그래서 그날도 그의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고 예쁜 머리로 거듭나길 가만히 참고 기다렸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머리 손질이 끝나면 휙 하니 가버리던 미용사가 평소와 달리 내 머리 형태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이가 들면 두상이 변하는데,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기 때문이란다. “예에? 머리에서도 콜라겐이 빠져나간다고요?” 처음 듣는 말에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그의 말인즉슨, 두피에 콜라겐이 빠지면서 뼈의 울퉁불퉁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그래서 나이 들면 머리 손질이 쉽지 않다는 것이다. “이십 대 머리 만지는 사람은 쉽지요. 그냥 웬만큼 해도 이쁘게 나오니까.” 그는 덧붙였다. 아, 그러고 보니 이 미용실에 올 때마다 있었던 손님들이 최소한 내 또래 혹은 그 이상이었더랬다. 그러니까 이 미용사는 나이 든 손님의 머리를 만지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사람이고, 그래서 나처럼 그 거친 손에 머리를 맡기러 꾸역꾸역 찾아들 왔나 보다. 하지만 두피에서까지 콜라겐이 빠진다니…. 관절이 뻣뻣해지고, 주름이 늘고, 머리카락이 빠지고, 심지어 키가 줄어드는 신체 변화까지도 익히 알고 있는 노화의 현상이었고, 그런 신체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어느 정도 마음의 노력이 필요했다. 하지만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 머리 모양을 잡기가 힘들다니, 이건 뭐 머리카락 빠지는 거에만 신경 쓸 일이 아니지 않은가. 아니, 신경을 쓰긴 어떻게 쓰는가. 머리카락이야 빠지는 게 눈에 보이기라고 하지, 속절없이 빠져나가는 콜라겐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다. 그런 콜라겐을 잡아둘 방법은 없고, 있다 한들 나 같은 서민이 감당할 수 있는 비용의 기술은 아닐 것이다. 혹 감당할 수 있다 해도 그렇게까지 시간의 흐름에 저항해 본들 어차피 죽는 건 마찬가지인데 큰 의미가 있을까. 물론, 이건 내가 돈이 있어 보질 않아서 하는 소리겠지만. 개인적 감상이야 그렇다 치고, 한 가지 분명하게 이해되는 게 있었다. 왜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이 다들 비슷한지. 한때는 아줌마들의 머리 스타일도 비슷했지만, 우리 세대가 아줌마가 되면서는 그래도 조금 다양해졌다. 그러나 할머니들의 머리 스타일은 여전히 거기서 거기였는데, 그것은 제한된 신체적 자원 안에서 그나마 택할 수 있는 스타일의 폭이 정말 좁기 때문이구나, 했다. 흔히 노인이 되면 다들 비슷비슷해진다고 한다. 한때 똑똑했던 사람, 이뻤던 사람, 잘생겼던 사람, 모두 개성을 상실하고 비슷해진다. 심지어 남자와 여자의 구분도 어려워진다는 우스갯소리까지 있다. 그저 노인 혹은 늙은이로 통칭되는 이 그룹의 사람들이 어떤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생각이 있는지조차도 때로는 의심한다. 가까이에서 나의 부모님만 보아도, 동생과 둘이 앉아 왜 저러시는지 모르겠다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간혹 그런 내색을 엄마에게 직접 내비치면, 너도 늙어봐라, 하는 말이 되돌아온다. 상대의 말문을 막는 것 같은 이런 반응을 접하면 내심 울컥하지만, 두피에서 빠지는 콜라겐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는 살짝 수긍한다. 어느 순간 나도 저 자리에 앉아, 도대체 노인들은 왜 그런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을 날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하는 것이다. 우리가 노인에 대해서 아는 것은 많은 부분 그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젊은 세대로부터 나온다. 한때 여성에 대한 지식도 여성들 자신에게서 나오지 않고 그들을 관찰하고 기록한 남성에게서 나왔던 적이 있다. 이에 대해 맹렬하게 저항하며 2백년이 넘게 여성 운동이 이어지고 있지만, 젊은이들이 노인에 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에 저항하는 노인 운동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다. 여성에 대한 집단적 대상화에 민감한 여성학자들도 노인 연구에는 관심이 없다. 오히려 젊은이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노인들의 고루함만 뭐라 할 뿐. 하지만 이 말을 하는 나는 내심 두렵다. 왜냐하면, 노인을 변호하는 듯한 이 말이 마치 이미 누릴 거 다 누린 세대의 사람 사정 봐주자는 말처럼 들릴 것 같기 때문이다. 그만큼 이 시대는 노인을 미워하고, 노인들 자신도 그것을 감지한다. 일본의 10년 후를 상상한 영화를 며칠 전에 보았다. 몇 개의 단편을 모은 영화였는데, 제일 첫 편이 노인에 대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기업체를 내세워 75세 이상이 된 노인들로부터 사망 신청서를 받기 시작했다. 돈이 있는 노인들은 괜찮았다. 그들은 계속 소비를 하기 때문에 나라 경제에 도움이 되었다. 하지만 돈도 없고, 병들었고, 돌봐줄 가족도 마땅치 않은, 단지 가족이 없어서가 아니라 있어도 부양에 부담을 느끼는 경우가 주 고객이었다. 신청을 내고 서명하면, 약 백만원에 달하는 돈을 주었다. 그 돈으로 남은 기간 하고 싶은 일을 하라는 배려였다. 큰돈이 아닌데도, 그 돈을 받은 노인은 이렇게 큰돈을 주냐며 기뻐한다. 그동안 생활의 곤궁함을 짐작하게 하는 대사이다. 자신이 죽기로 한 날 2주 전부터 먹을 약이라며 직원은 돈과 함께 그 약을 노인에게 내민다. 그리고 죽기로 한 날 시설에 찾아오면 작은 패치 하나를 목 부근에 부쳐주며 누워있으라고 한다. 고통이 전혀 없다고 했지만, 꼭 그렇지는 않은지 옆 칸에서는 빨리 죽여달라며 신음하는 소리가 들리는 가운데, 그는 눈을 감는다. 그리고 얼마 후 마스크를 낀 간호사가 와서 그의 시신을 내간다. 도대체 인류는 무슨 생각으로 대책 없이 수명을 늘려온 것일까….새삼스레 노인 공경하자고, 부모님께 효도하자고, 끝까지 부양 잘하자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사회의 짐이라고, 나라의 정책에서부터 개념 있는 청년에 이르기까지 생각하는 집단의 일원이 되었을 때, 그 시선에 대응하며 살아갈 나의 자세를 고민할 따름이다. 알다시피 이런 데에 역할 모델이 우리 세대에게는 없기 때문이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려운 마냥 흰머리로 다니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는 과연 어떻게 늙어야 하는 것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데, 떠오르는 성경의 한 장면이 있다. 바로,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이다. 아들 요셉의 손에 이끌려 파라오 앞에 선 야곱은 자신이 조상에 비하면 길게 산 게 아닌데도 “험악한 세월”을 보내어 지금 신세가 이렇다고 말한다(창 47:9). 어쩌면 그는 제국의 왕 앞에서 예를 갖추느라 불편한 몸을 다잡으며 힘겹게 서서 이 말을 하지 않았을까. 걸음걸이도 편치 않아 요셉의 손을 붙잡고 겨우 그 앞까지 나왔을 것 같다. 형의 축복을 가로채서 내뺀 후에 원하는 아내를 얻을 때까지 남의 집 살이를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힘겹게 다시 형과 화해하고, 제일 이뻐했던 아내를 제일 먼저 보내고, 자식들의 불화로 아들 하나가 죽은 줄 알고 살았던 그는 분명 험악한 세월을 보냈다. 험악한 세월. 그 어떤 고난도 주를 위해 이겨냈다는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내 인생 돌아보니 참 험난했다고 스산하게 말하는 이 한마디에 묘한 울림이 있다. 지금까지 내가 만난 연로하신 분 중에서 자신이 산 세월이 험악하지 않았다고 말한 사람은 없었다. 별 어려움 없이 살았을 것 같은 분들도 나름의 맺힌 마디와 울분, 어두운 골짜기들이 하나씩은 다 있다. 그리고 나 또한 이제 오십 초반인데도, 그리고 이 나라가 풍요로워지기 시작한 시대에 성장했음에도, 살아온 세월을 돌아보며 힘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러고 보니 나보다도 풍족한 시절에 태어나 먹고 싶은 거 갖고 싶은 거 크게 참지 않고 자란 이십 대의 아들도 사는 게 힘들다고 한다. 그래도 그때가 좋은 때라고 말하면, 분명 상처받겠지. 윗세대가 우리 세대를 보고 고생을 모른다고 하면 화가 나는 것처럼. 결국 우리는 다 나름대로 험악한 세월을 살았고, 또한 살고 있는 셈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그렇다면 뭐, 굳이 늙는다는 것에 대해 특별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마치 늙는 것에 바른 길이라도 있는 것처럼 애써 고민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젊은이에게 젊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게 꼰대 짓이라면, 늙은이에게 늙은이의 자세를 요구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꼰대 짓 아니겠는가? 지나간 시대의 경험으로 젊은 세대의 경험을 넘겨짚으려는 것이 주제넘은 일이라면, 두피에 콜라겐도 안 빠져 본 세대의 경험으로 아직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개척해가는 세대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하는 것도 주제넘은 일 아니겠는가? 매뉴얼도 없이 아직 인류가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제일 앞에서 가고 있는 그들의 시행착오는, 이번 생은 처음인 다른 모든 세대의 경험처럼 적당히 개성적이고 적당히 보편적일 것이다. 다만 기력 달린 그들의 소리가 워낙 희미하여 잘 들리지 않을 뿐. 자신의 경험을 글로 남긴 노인이 많지 않기에 최근에 읽은 사노 요코라는 일본 작가의 책은 보물 같았다. 1938년에 태어나 미술을 전공하고 그림책 작가가 되어 큰 상도 받은 그는 2010년 72세에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내가 읽은 책은 그가 암 투병을 시작하던 무렵인 60대 중반에서 후반의 기록이다. 이 책을 읽으며, 아, 바르게 늙으려 애쓸 필요 없이 그냥 자기 생긴 대로 늙어도 괜찮은 거구나, 생각하며 위로를 받았다. 그는 자신이 결코 착한 할머니가 되지 못해 친구를 자꾸 잃는다고 하면서도 별로 착해질 생각이 없고, 반항할 때 가장 생기가 돈다. 암에 걸리니 지인들이 비싸고 맛있는 거 사 들고 찾아와줘서 좋고, 암보다 더 힘든 게 우울증이라고 한다. 암은 그냥 덤 같은 것이라고 하는 그는 어떤 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문방구 할아버지가 친절할 때보다 꼬장꼬장할 때가 더 마음에 든다고 하니 개성 넘치게 산 만큼 개성 넘치게 늙어갔던 것으로 보인다.결국 다 그런 것 아닐까. 자기 생긴 대로 살고 자기 생긴 대로 늙는 것 말이다. 그러니 나이 들면 누구나 두피에서 콜라겐이 빠져나가겠지만, 어떤 사람은 기를 쓰고 그것을 붙잡아 두려 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잠시 아쉬워하다가 포기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그냥 그런가 보다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글을 쓰면서도 아직 마음으로는 노인이 되고 싶지 않은 나는, 3개월이 되어갈 무렵 손이 거친 그 미용사를 또 찾아가 삼각김밥 머리가 되지 않게 잘라달라고 주문을 할 것이다.
거룩한 습관을 지닌 젊은이가 되라
by Bobby Scott
2023-10-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나는 목사이고 직업상 책을 읽는다. 그래서 지난 35년 동안 말 그대로 수 많은 책을 구입했다. 사무실과 집, 심지어 침실에도 책으로 가득하다. 산 것도 있고 선물로 받은 것도 적지 않다. 내가 J. C. 라일이 쓴 Thoughts for Young Men(하나님의 청년에게)를 샀는지 선물 받았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하나님께서 그 책을 사용하여 나를 영원히 변화시켰다는 사실만은 확실하다. 나는 라일의 이 책을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계속해서 공유했다. 책 내용 전부를 좋아하지만, 특히 “젊은 남자들이 어떻게 성장하느냐는 그들의 현재 모습에 크게 좌우된다”라는 제목이 붙은 장을 좋아한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이십 대의 나는 그 내용을 읽고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젊은이가 장차 어떤 사람이 될지는 현재 어떤 사람인지에 달려 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잊고 사는 젊은이가 너무 많다. … 내가 지금 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습관은 고치기 어렵기 때문이다. … 습관의 뿌리는 깊다. 죄가 일단 당신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면, 그것은 결코 당신이 명령한다고 쉽게 제거되지 않는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다. 습관이라는 사슬은 마치 “쉽게 끊어지지 않는 삼겹줄”과 같다. … 나무와 마찬가지로 습관도 나이가 들면서 강화된다. 어린 참나무는 어린아이는 쉽게 구부리지만, 다 큰 참나무는 장정 백 명이 달라붙어도 못 뽑는다. … 선한 습관이나 악한 습관이 매일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다. 당신은 매일 하나님께 더 가까워지거나 멀어지고 있다. 회개하지 않는 시간을 점점 더 많이 보낼 때, 당신과 천국 사이의 벽은 더 높아지고 두꺼워진다. 건너야 할 물은 더 깊고 넓어진다. 날마다 죄에 머물러 굳어지는 것을 두려워하라! 이제 죄에 관해서 뭔가를 해야 할 때이다. (Thoughts for Young Men, 15, 17-18)라일의 펜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데에 꼭 필요한 두 가지 거룩한 습관을 기르고자 하는 마음에 불을 붙이셨다. 하나는 죄에 대한 건강한 두려움이었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갈망이었다.죄성에 찬 습관에서 도망치라삶은 방향이 정해져 있으며, 잘못된 길을 걷게 되면 점점 더 죄에 얽매이기 마련이다. 길을 잃을까 두려워하는 어린아이처럼, 나는 행여라도 아버지의 손을 놓치고 죄에 빠질까 두려웠다. 라일의 이 책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리석음을 피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오는 지혜를 구하는 습관을 기르라는 강한 동기를 부여하셨다.하나님의 은혜로 나는 책임과 실천이 밑바탕이 되는 진정 투명한 관계와 우정을 발전시켰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이전의 죄악된 습관과 타협하기보다는 피하도록 내 마음을 움직여 주셨다. 하나님은 내가 나이 많고 지혜로운 신자들로부터 조언을 찾아서 듣도록 선하게 인도하셨다.이 글을 읽는 당신이 꽤 나이를 먹은 사람이라면, 당장이라도 주변에서 젊은이들을 찾아 이 진리를 가르치라. 우리의 영혼이 살고 죽는가는 죄에 굴복한 후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매달리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를 붙잡고 치열하게 죄와 싸우는 데에 달렸다(롬 6:1-2; 살전 4:1-8). 사탄은 지금도 하나님의 율법은 너무 가혹하다고, 또 거부하기에 죄는 너무 달콤하다는 거짓말을 젊은이의 귀에 속삭이고 있다. 젊은이들에게 진실을 알려주라! 죄는 우리를 종으로 삼고 죽음으로 이끌지만,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아는 기쁨은 세상의 어떤 이득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만족시킬 것이다(빌 3:8). 그러므로 죄로 이끄는 죽음의 습관을 버리는 데 있어서 만큼은 그 누구도 너무 급진적이라는 말을 할 수 없다(마 5:29-30; 골 3:5).거룩한 습관을 들이라하나님은 또한 거룩한 습관이 가진 성결케 하는 힘을 내게 가르치기 위해서 라일을 사용하셨다. 우리는 모든 관계에서 성결함이 가진 역동성을 경험한다. 어떤 습관을 실천하는가에 따라서 가까워지거나 멀어지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다. 거룩한 습관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의 불꽃에 부채질하고 당신을 향한 그분의 사랑을 바로 눈앞에 두는 은혜의 수단이다. 간단히 말해서, 성화시키는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은 그분을 체험하려는 내 속에 타오르는 열망을 불어넣으셨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자마자 기도하는 습관을 들였다. 아무리 바빠도 성경을 읽었다. 그 결과 아무리 중요한 학교 프로젝트의 마감이 눈앞에 있어도, 중간고사와 기말고사가 다가와도, 나는 점심시간이면 도서관에서 성경을 읽었다. 몇 주가 몇 달이 되고, 몇 달이 몇 년이 되고, 지금은 몇 년이 수십 년이 되었지만, 이 결심은 바뀌지 않았고 평생의 습관으로 굳어졌다. 경건의 습관에 힘입어 나는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을 아는 지식과 나를 향한 그분의 사랑 안에서 무럭무럭 성장했다. 주일 오전 예배 외에 나는 주일학교와 주중 성경공부에도 참석하기로 결심했다. 거기서 나는 성경 연구 방법을 배웠다. 나는 신학을 공부했다. 그리고 성경 속 핵심 책에 관해서 배웠다. 복음을 전하는 방법, 제자 삼는 방법, 소그룹을 이끄는 방법 등 실용적인 신학까지 섭렵했다. 나는 성도의 교제를 삶의 주요 습관으로 삼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너무도 많다는 사실에 새삼 놀란다. 디모데후서 2:22을 보라. “그대는 젊음의 정욕을 피하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평화를 좇으십시오.” 바울은 청년 디모데에게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경건한 덕을 추구하라고 명령한다. 그리고 그는 그 일을 혼자 하지 말고 “깨끗한 마음으로 주님을 찾는 사람들 함께” 하라고 격려한다. 요점은 명확하다. 경건한 신자들과의 교제를 타협하지 않는 습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은 죄와 싸우고 경건을 추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강력한 은혜의 수단을 상실하는 것이다. 젊은이들이여, 라일의 권고에 더불어 덧붙이는 내 간증에 여러분이 현명하게 귀를 기울이길 기도한다. 죽은 사람으로부터 배우라지금까지 말한 습관들이 대단히 심오한 통찰력은 전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누구나 다 어린아이에 불과한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는 은혜의 수단을 복잡하게 만드실 리가 없지 않은가?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로 다루시며 우리가 성장하도록 때에 맞게 먹이신다. 라일이 젊은 독자들에게 권면하는 것은 초대 교회 신자들이 행한 것과 다르지 않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하며, 서로 사귀는 일과 빵을 떼는 일과 기도에 힘썼다”(행 2:42).내 인생을 변화시킨 라일의 이 책을 처음 읽었던 때는 그가 죽은 지 백 년이 훨씬 넘었을 시점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UCLA의 세속 교실에 앉아있는, 막 구원받은 도시에서 자란 한 소년을 제자로 만드는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라일이 쓴 정교한 글을 통해서 나를 빚으셨다. 만약에 그리스도께서 앞으로 백 년 더 재림하지 않으신다면, 이 세상은 당시의 나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고 권면 받아야 하는 수많은 젊은이로 여전히 넘칠 것이다. 여러분과 내가 힘을 합쳐 귀한 젊은이들을 거룩한 습관으로 부르는 일에 함께 충성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Young Men with Holy Habit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근원적 우상까지 드러내라
by 고상섭
2023-10-04
팀 켈러는 뉴욕에서 리디머 교회를 시작했을 때 단순히 죄를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우상숭배라는 형식을 통해 죄를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이것이 포스트모던 시대의 젊은 세속적인 사람들에게 효과적이었다고 고백했다. 혹자는 팀 켈러가 죄에 대해서 선명하게 말하지 않는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그러나 팀 켈러가 죄에 대해 선명하게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죄를 드러내는 그의 방식이 달랐던 것이다. 내가 처음 맨해튼에서 사역을 시작했을 때, 그곳에서 기독교의 죄 개념에 대한 문화적 알레르기 반응을 접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우상숭배에 관한 성경의 광범위한 가르침을 전했을 때 사람들을 가장 많이 이끌어 낼 수 있었다. 나는 죄를 ‘여러분의 삶의 의미를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 위에, 비록 그것이 아주 좋은 것일지라도 세우는 것’이라고 설명했다.[1] 마음의 죄를 드러내라 폴 워셔로 대변되는 설교자들의 특징은 신자의 죄에 대해 강하게 선포한다. 폴 워셔 목사는 음란에 대해서 매우 강하게 죄를 지적한다. 음행으로부터 자신을 스스로 지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고 필수적인 것들 중 하나입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것을 지배하지 못했다면 신앙의 기초조차 달성하지 못한 것입니다. … 여러분, 맥 빠진 채로 있지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능력 안에서 음란의 문제를 처리하십시오! 여러분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강력한 도전이 있지만 두 가지 문제를 양산하는데,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을 통해 죄를 이길 수 없다는 것과 죄를 거룩하지 못한 행위로만 바라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죄란 단순히 잘못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지만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이라고 정의한다. C. S. 루이스도 사람의 행위를 통해 죄를 구분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모성애, 애국심은 선하지만 성 충동이나 싸우려는 충동 등은 나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단지 싸우려는 충동이나 성 충동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가 모성애나 애국심을 억제해야 하는 경우보다 더 많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결혼한 남자나 군인처럼 의무적으로 성적 충동을 북돋우거나 싸우려는 충동을 북돋워야 하는 상황도 있습니다. 또 자녀를 향한 모성애나 조국을 향한 사랑을 억누르지 않으면 다른 이들의 자녀나 나라에 부당한 결과를 초래하는 상황도 있을 수 있습니다.[2]폴 워셔 목사로 대변되는 죄의 선포는 행위에 초점이 맞춰있고 그 행위도 악한 행동을 죄라고 지적하기 때문에 그 행위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 메시지가 될 수 있다. 그래서 자신과 상관없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행동하는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팀 켈러는 단순히 악한 행동이 죄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대상’ 곧 그것이 비로 좋은 것일지라도 죄가 된다고 선포함으로 단순한 행위가 아니라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을 죄로 드러낸다. 자녀를 사랑하고, 일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보다 더 큰 사랑의 대상이 될 때 그 좋은 것은 우리를 노예로 삼게 되고 죄로 변질되게 된다. 팀 켈러가 행위의 죄를 강하게 선포하지 않는 이유는 적극적 사고방식의 선두주자였던 로버트 슐러 목사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들지 않기 때문에 죄를 선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은 마음의 죄를 드러내 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팀 켈러는 이런 방식이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한다. 이 접근법은 젊고 세속적인 직장인들에게 아주 효과적이었다. … 우상숭배의 개념은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진 집착이나 두려움, 중독, 도덕적 결여, 타인에 대한 시기심, 그리고 분노 등을 적절하게 이해하게 한다. 그들이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찾을 수 있는 구원을 그들의 직업과 로맨스에서 추구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해 주는 것이다.[3]팀 켈러의 우상숭배로서의 죄의 선포는 로버트 슐러식의 죄를 선포하지 않는 소비자 중심주의적 설교도 아니고, 폴 워셔 식의 행위의 죄만을 강하게 강조하는 것도 아닌 인간 마음속의 숨어있는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좀 더 균형 있고 설득력 있는 방식의 죄의 선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의 우상을 드러내라 팀 켈러가 죄의 문제를 우상숭배라는 관점으로 볼 수 있었던 이유는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 덕분이었다.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과 함께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교수로 지냈는데 당시 미국 교회의 분위기는 죄에 대해 언급할 때 개인적인 죄의 문제를 중심으로 다루었고 개인의 행위적 노력을 통해 죄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설명이 주류를 이루던 시기였다. 데이비드 폴리슨은 죄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죄와 악, 사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구조적인 악의 문제까지 언급했는데, 그 중심에는 인간 마음의 기만성이 있다고 보았고, 이를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이라는 논문으로 발표했다.[4] 팀 켈러는 데이비드 폴리슨을 추모하면서 쓴 기사에서 내가 만든 신도 데이비드 폴리슨의 논문에서 발전시킨 개념이라 말하면서, 단순히 개인의 우상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화에서 심어지는 우상이 있음을 언급한다.영국의 문화 비평가인 테리 이글턴은 18세기 합리주의를 거치면서 신이 사라지고, 비록 그 역할을 잘 감당하지는 않았지만, 이 시대에 신의 대리 역할로 등장한 것이 바로 예술, 이성, 문화라고 말한다.[5]데이비드 폴리슨도 ‘마음의 우상과 허영의 시장’에서 인간을 우상숭배로 몰아가는 세 가지를 육신과 마귀와 세상이라고 말한다. 육신은 인간 안에 있는 욕망을 다루기 때문에 개인적 차원의 죄라고 할 수 있지만, 세상의 영향을 받는 것은 단순히 개인의 문제가 아닌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라 할 수 있다. 폴리슨이 언급한 ‘허영의 시장’이라는 말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에 나오는 장소를 비유한 말이다. 주인공 ‘크리스천’이 사망의 골짜기를 빠져나와 ‘믿음’을 만나 서로 간증을 나누면서 도착한 곳이 ‘허영의 시장’이다. 그곳은 온갖 욕망을 사고파는 장소였고, 거기서 ‘믿음’은 순교하고 ‘크리스천’은 감옥에 갇히게 된다. 이 내용에서 착안하여 데이비드 폴리슨은 우상이 한 개인의 욕망만이 아니라 허영의 시장이라는 문화가 주는 영향력이 있음을 말한다. 팀 켈러의 설교와 가르침이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진행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문화 속에 있는 우상을 드러내지 못하면 청중은 교회 안에 있지만 다른 하나님 즉 자신이 만든 가짜 신을 섬기기 때문이다. 우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목상 앞에 절하는 원시인을 떠올리지만 … 현대도 동일한 우상을 섬기고 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와 경기장 같은 신전에서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고 거기서 제사를 드린다. 미모와 권력, 돈과 성취의 신이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하고 있다.[6]콜롬비아 대학 인문학 교수 마크 릴라(Mark Lilla)는 요한복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의 이야기를 언급하면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거듭나야’ 한다는 말은 ‘자신의 불충분성을 인식한다’는 말과 동일하다고 말한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자율적인 삶을 버리고 자신이 더 큰 무언가에 의존적인 존재임을 이해하는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라는 것이다. 팀 켈러는 이것을 오늘날 현대적 문화에 속한 자율성(autonomy)에 대한 도전이라 분석한다. 오늘날과 같은 포스트모던 시대에 많은 사람은 개인의 자율성이라는 희망을 둔다. 팀 켈러는 이 자율성이 많은 사람들이 오늘날 종교를 지긋지긋하게 생각하는 이유라고 말한다.[7] 이런 문화의 저변에 흐르는 내러티브의 영향을 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단순한 개인의 우상만을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 문화 저변에 있는 문화 내러티브의 모순을 드러내고 평가하고 도전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에게서 이런 고백이 흘러나오도록 해야 한다. “오, 그래서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느낀 거였구나.” 이런 고백이야말로 한 사람이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에 이르는 여정에서 가장 해방적이고 촉매적인 단계 가운데 하나라고 팀 켈러는 말한다. 바울처럼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문화 이야기가 복음과 충돌하는 지점에서 도전하고 궁극적으로 문화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다시 들려줌으로써 선을 향한 그들의 깊은 열망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채워질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8]근원적 우상을 드러내라 자신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하기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개인의 차원을 넘어 문화적 내러티브 안에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한 우상이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부분과 내면 깊은 곳에 숨겨진 부분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상의 문제를 다루려면 겉으로 드러난 부분만이 아닌 내면의 뿌리까지 파고 들어가야 한다. 자기 내면 안에 있는 우상을 발견할 때, 돈, 성공, 사랑 같은 겉으로 드러나는 부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우상숭배의 심리는 이보다 더 복잡하다. ‘표면적 우상’은 더 구체적이고 눈에 잘 띄지만, 숨겨진 마음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 ‘근원적 우상’이 도사리고 있다.돈을 사랑하는 표면적 우상도 근원적으로는 돈을 통해 인정을 원하는 우월감이 내면에 작용할 수도 있고, 돈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통제하고 싶은 욕구가 있을 수도 있다. 또 돈을 가지고 있으면서 느끼는 안정감이 우상이 되기도 한다. 같은 돈이라는 표면으로 드러나지만, 통제, 안정, 우월감 등의 다양한 근원적 우상이 존재할 수 있다.[9]근원적 우상이 ‘힘’인 사람은 자신이 굴욕당하고 창피당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은 이용당한다는 느낌을 받기도 하고,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가 단순히 분노하는 문제만을 생각하지 말고 자신 안에 힘을 추구하려는 근원적 우상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정을 원하는 사람은 거절의 감정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계속 인정을 갈구하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숨 막힐 정도가 된다. 또 타인의 인정을 위해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동을 맞추기 때문에 일관성이 없어지고 비겁해지는 감정을 해결하지 못한다. 안정을 추구하는 사람은 모험을 하거나 도전하는 상황들을 두려워한다. 요구사항이나 스트레스의 상황을 극도로 불안해하기 때문에 일을 하지 않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은 방치당하는 느낌을 받게 된다. 그리고 무기력과 권태의 감정들을 해결하지 못한다. 근원적 우상이 ‘통제’인 사람은 매사에 모든 상황을 통제해야 직성이 풀린다. 그래서 불확실한 상황에 극도의 불안을 느낀다. 일정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돌발상황을 힘들어한다. 그리고 모든 사람과 일을 통제해야 하므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경우가 많고, 걱정과 염려의 감정을 극복하지 못한다. 표면적 우상만을 다루어서는 근원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표면적인 방식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돈과 권력에 대해서도 너무 사랑하는 모습으로 우상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지만, 돈과 권력을 미워하고 그것을 가진 사람들도 미워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렇게 돈과 권력을 멀리하면서 고결한 사람이 된 것만 같다. 하지만 이것도 스스로를 구원하려는 태도이다.[10]내가 만든 신에 리디머 교회의 한 목회자가 부부를 상담한 내용이 나온다. 돈 관리 문제로 심한 갈등을 겪고 있는 부부였다. 아내는 남편을 구두쇠로 여겼고 남편은 아내가 낭비벽이 심하다고 생각했다. 남편이 목회자와 상담하던 중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이기적입니다. 옷과 외모 단장에 돈을 엄청나게 쓰거든요!” 남에게 예뻐 보이려는 욕구가 아내의 돈 씀씀이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게 남편의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러나 목회자는 남편에게 표면적 우상과 근원적 우상의 개념을 알려주고 이렇게 답했다. “당신이 전혀 쓰거나 베풀지 않고 동전 한 푼까지 다 쌓아두는 것도 똑같이 이기적인 일임을 아십니까? 당신은 지금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 욕구를 채우는 데 무조건 전액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11]아내는 돈을 많이 사용함으로 무엇을 얻고 싶었다면, 남편은 돈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안전과 보호와 통제라는 자기욕구를 채우고 있었다. 그래서 우상은 돈, 섹스 같은 표면적 우상만 없애서는 해결될 수 없다. 그 일을 행하는 마음속 근원적 우상이 해결되어야 한다. 내가 만든 신에서도 제임스라는 한 목회자의 이야기가 나온다. 제임스는 예수님을 믿기 전에 매번 다른 여자들을 유혹해 잠자리를 갖고 그 후에 흥미를 잃어버리는 사람이었다. 그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성적 일탈을 끊고 기독교 사역에 매진했지만 근원적 우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수업이나 토론 때마다 그는 논쟁을 일삼으며 이기려 했고 자신이 회장이 아닌 모임에서도 늘 회장 행세를 하려고 했다. 자신의 새로운 신앙 주제로 대화할 때도 회의론자들을 거칠게 해서 마찰을 일으켰다. 결국 그의 의미와 가치는 그리스도께로 옮겨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타인에게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기초해 있음이 분명해졌다. 그건 권력을 통해 그는 자신이 살아있음을 느꼈다. 제임스가 여러 여자와 잠자리를 한 것은 그들에게 매력을 느껴서가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동침할 수 있다는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만 얻으면 여자는 더 이상 흥밋거리가 못 되었다. 기독교 사역도 사람을 섬기고 싶어서가 아니라 권력을 얻기 위해서였다. 권력의 우상이 성적인 형태에서 종교적 형태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그렇게 우상은 꼭꼭 숨어있다.[12]1. 팀 켈러, 센터처치, 271.2. C. S. 루이스, 순전한 기독교, 37. 3. 팀 켈러, 센터처치, 272.4. “Idols of the Heart and ‘Vanity Fair’“ 5. 테리 이글턴,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 6.6.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5.7. 팀 켈러, 설교, 166.8. 팀 켈러, 설교, 35.9. 팀 켈러, 설교, 116.10. 팀 켈러, 왕의 십자가, 283.11. 팀 켈러, 일과 영성, 117.12 팀 켈러, 내가 만든 신, 175.
은혜의 반대는 노력이 아니다
by 최창국
2023-09-27
그리스도인에게 ‘은혜’는 매우 중요한 언어이다. 은혜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 언어이다. 기독교 복음의 정수를 알기 위해서는 은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은혜(grace)라는 용어의 원래 의미는 첫째는 형태, 몸가짐, 동작, 행동의 우아함 혹은 아름다움을 의미하고, 둘째는 호의나 선의와 관계되고, 셋째는 호의의 표현과 관계된다. 그리고 넷째는 사람의 마음에 아무 공로 없이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해롤드 엘런스(Harold Ellens)는 인간의 죄와 하나님 은혜의 관계를 매우 의미 있게 묘사한다. 그는 인간의 상태인 죄를 인간의 용어로는 ‘완전한 절망’이지만, 하나님의 용어로는 ‘완전한 소망’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인 인간을 소망으로 변혁하는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삶에 소망의 시금석으로 작용한다. 성경에서 죄의 문제를 다루는 것도 인간의 죄를 심판하는 데 목적이 있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을 치유하고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물론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말하는 것은 인간의 정체성과 한계를 말하기 위한 차원도 있지만, 죄는 인간의 한계성만을 말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희망의 근원을 말하기 위한 역설이 있다. 인간의 희망의 근원과 원동력은 은혜의 복음이다. 은혜는 인간을 절망에서 희망으로 변혁하는 힘이다.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에게 나타나는 첫 번째 열매는 하나님께 사랑받는다는 기쁨이다. 영적으로 건강한 그리스도인은 공기를 들이마시듯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느끼며 호흡한다. 하나님의 넘치는 은혜와 사랑을 흠뻑 누리면, 그것이 우리 마음에서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낸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한일서 4:18).나아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는 역할을 할 뿐 아니라 인류의 공공선을 위한 원동력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원의 은혜와 관계된 특별 은혜와 삶의 진선미와 관계된 보통 은혜로 구분할 수 있다. 특별 은혜는 초자연적이지만, 보통 은혜는 자연적이다. 특별 은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를 통해 주어지지만, 보통 은혜도 구원의 일부와 관련이 있지만 죄를 제거하거나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지 못한다. 특별 은혜는 우리의 죄와 죄의 부패를 제거하고, 정죄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은혜다. 보통 은혜는 도덕적 삶과 사회 안의 선한 질서, 시민적 공동선, 과학과 예술의 발전 등을 증진한다. 보통 은혜는 죄인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새로운 구원의 삶으로 인도할 수 없다.보통 은혜와 특별 은혜, 둘 중 어느 것도 다른 것에 시간적으로 우선한다고 할 수 없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이 세상 안에서 작용할 때 특별 은혜를 보조하기 때문에 논리적 우선성은 특별 은혜에 두어야 한다.특별 은혜는 기본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과 관계가 있지만, 보통 은혜는 인류의 공동선을 위해 모든 사람에게 주어지기 때문에 교회 안에서도 세계 안에서도 역사한다고 할 수 있다. 특별 은혜와 보통 은혜는 모두 이 세계 안에서 역사한다. 하지만 보통 은혜가 보다 일상과 자연계와 관계된다고 하면, 특별 은혜는 새 창조의 일들과 관계된다. 이 두 은혜는 서로에게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다. 특별 은혜뿐 아니라 보통 은혜도 교회를 풍요롭게 한다. 교회는 보통 은혜의 은사들과 열매들을 중생한 삶의 영향 아래 둠으로써 구원의 은혜를 더 풍요롭게 할 수 있다.은혜는 우리의 공로와 상관없이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은혜는 단지 받는 데만 목적이 있지 않고 아래로 흘려보내는 데 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과 동시에 은혜에 합당한 행동을 하도록 강권한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공로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값없이 주어진 선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의 행동하는 삶과 노력을 강화하는 것이지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은혜의 반대는 공로이지 노력이 아니다. 하나님 나라의 열쇠이자 고요하면서도 능력 있는 삶과 사역의 열쇠는 방향을 잘 맞춘 과단성 있고 지속적인 우리의 노력이다”(브루스 데머레스트, 영혼의 계절들, 132). 따라서 행동을 통해 은혜를 쟁취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가 건강한 행동을 낳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도 일찍이 하나님 없이는 우리가 아무것도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도 우리 없이는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지 않으신다고 하였다. 은혜는 정직하고 책임을 지려는 노력에 능력을 부어 줌으로써 우리 안에 존엄성을 심어 준다. 은혜는 우리의 노력으로만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해줌으로써 우리 안에 겸손을 심어 준다. 은혜는 믿음의 위험을 감수하려는 자발성과 신뢰를 자라나게 함으로써 우리 안에 수용 능력과 민감성을 심어 준다. 이 모든 은혜는 우리 안에서 부드럽게 활동하시는 하나님, 그리고 빛나는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하나님에게서 온다.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의 탁월한 사회 과학적 연구에 따르면, 1세기에 변방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로마에서 성장하게 된 주요인은 그리스도인들의 건전한 삶의 방식이었다. 로마에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다르게 살아가는 모습,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단지 좋은 교인이 아니라 좋은 사람과 시민으로 성장하는 데 있어야 한다. 좋은 남편, 좋은 아내, 좋은 부모, 좋은 자녀, 건강한 시민 됨에 두어야 한다. 좋은 부모, 좋은 아내, 좋은 자녀, 좋은 시민 됨 없이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좋은 아버지가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는 있지만, 나쁜 아버지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이는 성경의 원리이기도 하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될 수 없는 유기적 관계에 있듯이, 좋은 사람과 좋은 그리스도인의 관계도 유기적인 관계다. 물론 과거에 나쁜 아버지였다고 해서 좋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사람은 얼마든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삶의 이벤트를 점처럼 이으면
by 필립 정
2023-09-21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 시대에 유행하던 퀼트라는 수예 기법이 있다. 여인들이 옷을 만들고 남은 천을 조각조각 이어 붙여 그 위에 실로 인상적인 말들을 새겨 넣는 수공예이다. 당시 미국의 여인들은 이런 퀼트 공예품을 지인들에게 선물하고 서부로 먼 길을 떠났다. 그런데 종종 그 퀼트에 성경 구절들을 새겨 선물하기도 하였다. 이어 붙인 천 조각에 새겨 넣은 성경 구절은 떠나간 이의 삶에 새겨진 은혜를 추억하게 하고 험한 길에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다는 위로를 심어 주었다.반복되지 않고 일회적이어서 머물러 있지 않은 시간을 우리 인간들도 퀼트처럼 이어 붙여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그 형형색색 삶의 조각들을 이어 붙이다 보면 누군가에게 보여 줄 만한 소품 하나가 나올까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부터 내 삶에서 일어나는 이벤트들을 하나둘 이어 붙여 보았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난 후 특별하지 않아 너무 특별한, 반박할 수 없는 라이프 퀼트 소품 하나가 나왔다. 인간의 삶은 지으신 이의 디자인을 버리고 욕심의 천 조각을 끊임없이 이어 붙여가는 탐욕의 퀼트라고… 그리고 주님의 디자인은 그 탐욕의 반대편 그림이라고….몇 년 전 어느 날, 일하다 너무 피곤해 중간에 돌아와 잠을 청했다. 그 극심한 피곤 증세는 몇 주 동안 이어졌고 하루는 거울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간 없었던 주름과 피부의 노화가 그 몇 주 사이에 얼굴에 내려앉아 버렸다. 왜 그런지 알아보기로 하였다. 혈압, 당뇨, 혈중 콜레스테롤이 평균보다 조금 높았다. 하루 세끼를 잡곡으로 꼬박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 온 나에게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 생각이 들어 더 자세히 원인을 찾아 나갔다.내가 얼마나 탐욕스럽게 먹고 살았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간 하루 밥 두세 공기 거기에 과일, 과자까지 합쳐 내 나이 필요 탄수화물 기준치 2배 이상을 훨씬 초과해 섭취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0년 한국 보건복지부와 한국 영양학회에서 발표한 ‘2020년 한국인 영양 섭취 기준 자료’에 의하면 한국 성인의 하루 탄수화물 일일 평균 섭취량은 307.8그램으로 하루 기본 탄수화물 100그램의 3배를 초과하는 수치라고 한다. 그래서 식사를 하루 두 끼니로 줄이고 탄수화물의 양도 줄이며 조금씩 건강이 개선되기 시작하였다.그리고 당과, 혈압, 고지혈증을 개선할 수 있는 자연 치유법을 찾다가 식초의 효능을 알고 매일 식초를 물에 타서 섭취하기 시작했다. 소화가 촉진되고 피로도 개선이 되고 피부도 확연히 좋아지는 것을 느끼게 되며 둘 사이에 뭔가 있을 것 같아 탄수화물과 식초의 두 조각을 이어 붙여 보았다. 식초는 곡물이나 과일로 술을 빚어 만드는 과정에서 알코올을 발효시켜 만드는 조미료이다. 과다한 탄수화물 섭취로 생긴 병을 먹다 남은 탄수화물을 버리지 않고 식초를 만들어 치유하는 것이다. 이런 인간의 지혜는 어디서 왔을까? 적게 먹어야 하고 남은 것까지 발효시켜 먹어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욕심 많은 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원래 탄수화물 창조자의 디자인이 아니라면 나올 수 없는 아이디어다. 그런데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나 같은 사람은 과잉 섭취로 병이 드는데, 다른 한쪽에서는 기아로 죽어 가는 어이없는 일이 일어나지 않는가. 이런 간극은 왜 생겨났을까?” 이런 문제를 발렌틴 투른과 슈테판 크로이츠베르거가 그들의 책 왜 음식의 절반이 버려지는데 누군가는 굶어 죽는가(2011) 에서 고민하고 있다. 그들의 책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바로 식량 부족의 원인은 인간의 탐욕에서 시작된다는 것이다. 그 원인은 산업화한 농업의 대량 생산 방식 때문에 물이 부족하고, 휴경 없이 계속된 농사로 땅이 황폐되어 소출이 줄어들었고, 농업의 산업화로 온실가스의 40퍼센트를 배출하여 기후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과유불급을 해결하려면 적게 생산하고 적게 소비하고 공정한 분배를 해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또 시스템을 바꾸어 대량 생산 농법을 포기하고 자연 친화 농업을 하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대량 생산 기술을 무기로 만들어버린 욕심 많은 농업 강대국들이 포기할 수 있을까? 전혀 설득력이 없어 보인다.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이후 바로 찾아온 것은 결핍이었다. 해가 질 때까지 일해도 풍족할 수 없었다. 그 결핍을 메우기 위해 지치도록 일해야 하고 그래도 모자라면 서로 속이고 싸워 착취해왔다. 보다 건설적인 대안이 농업혁명, 산업혁명이었다. 홍윤철이 지은 질병의 탄생을 보면 인간이 수렵 생활을 그만두고 농업혁명으로 곡물을 섭취하면서 면역체계가 부실해졌고 가축을 키우기 시작하면서 가축의 병균이 인간에게 전염되었다고 한다. 이후 고도로 도시화가 진행되면서 급격히 그 전염병이 퍼져 나갔다고 말한다. 또 산업혁명 이후 수질과 토질, 대기가 오염이 되어 질병이 폭발적으로 늘어갔다고 한다. 인류의 유전자가 환경의 변화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지금 인간의 몸은 환경을 버텨낼 수 없는 사망의 지경에 이르게 되어 버렸다.그러나 성경 말씀대로 욕심을 버리고 땅을 7년마다 쉬어 가며 적게 생산하고 적게 먹고 나누어 먹으면 땅도 살아나고 수확도 늘어날 것이고 결국은 병도 사라지도록 하나님이 디자인해 놓으신 것을 보면 삶의 길과 사망의 길이 확연히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있다나는 이런 교훈을 얻으며 먹는 것을 조절해 나가면서 조금씩 건강을 회복해 갔지만 더 노력이 필요했다. 책상에 한 번 앉으면 잘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다리에 부종도 생기고 혈전도 생겨 약도 복용하면서 운동의 강도를 높여갔다. 어느 날, 가끔 가던 식당에 가 점심 식사로 콩국수 한 그릇을 시켰다. 그런데 평소와 다르게 쓴맛이 나 먹다 말고 그냥 나와 버렸다. 가리지 않고 잘 먹기 때문에 그 식당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런 내 생각은 얼마 안 가 깨져 버렸다. 쓴맛을 느끼는 그 빈도수가 점점 늘어나 내 건강에 또 다른 문제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원인은 이랬다. 시간이 부족해 항상 쪼개어 쓰기 때문에 식후에 쉬지 않고 바로 운동을 하던 습관이 있었다. 심지어는 복근 운동까지 격하게 했으니 위산이 역류하여 쓴 물이 계속 올라왔던 것이다. 뭘 먹어도 쓴맛이 났던 이유가 거기 있었다. 음식 탓할 것 없구나 싶었다. 그 결과 위산이 성대를 상하여 예전의 힘차게 뽑아내던 테너 소리를 잃어 버렸다게다가 과한 운동은 또 하나의 안 좋은 결과를 내고 말았다. 왼쪽 어깨의 힘줄이 찢어져 팔을 전혀 쓸 수 없게 된 것이었다. 병원을 다니며 회복하는 데 2년 가까이 걸리고 말았다. 과식이 건강을 무너뜨리는 주범인 것처럼 과로 역시 그보다 덜하지 않았다. 욕심을 따라 절제 없이 살다가 삶이 조금씩 무너져갔고 추락하기 전에서 겨우 멈추어 설 수 있었다. 그때 멈추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하는 생각에 지금도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다. 어느 날 스티브 잡스의 연설을 듣다가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다. 이후 아침에 차를 타고 일을 하러 나가면서 차 속에서 습관처럼 이 연설문을 수천 번 듣다 보니 다 외워 버리게 되었다. 그 연설문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내 첫 번째 이야기는 점을 잇는 것에 관한 것이다”라는 구절이다. 스티브 잡스는 그의 삶에 일어난 일들을 점처럼 하나씩 이어가며 스탠퍼드 졸업생들에게 연설한다. 태어나서 입양된 이유와 돈이 없어서 콜라 캔을 팔아 밥을 사 먹어야 했고, 기숙사 방이 없어서 친구의 방 바닥에서 자고 심지어는 결국 대학 생활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사건들이 다 연결이 되어 지금의 자신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대학의 필수 과목에 흥미를 느끼지 못해 대학을 그만두고 손으로 쓴 서체 수업을 청강으로 들었는데 그때는 몰랐지만 10년이 지나보니 맥킨토시 컴퓨터 폰트 디자인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만약 그 대학에서 다른 수업을 듣고, 그 서체 수업을 안 들었다면 현재의 맥킨토시의 아름다운 서체는 없었다고 말을 한다. 시간이 지나 과거의 점들을 선처럼 이어보면 순간들은 결국 이어진다고 그 연설에서 강조한다. 불교 신자인 스티브 잡스의 연설에서 ‘점 잇기’는 불교의 용어인 인연을 말하고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물이 흩어지면 아무런 의미가 없지만 서로 이어지고 맺어져 존재로 형성되는 것을 인연이라고 한다. 사물이 존재로 형성이 되기 위해서는 사물의 내부에 원인이 되는 씨앗이 외부의 물과 햇빛 같은 조건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인연의 교리다. 인연 교리는 기독교의 섭리 교리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독교에서는 인간이란 존재를 형성할 수 있는 씨앗이 내 속에는 없고 외부의 창조주에게서 온다고 한다. 하나님의 계획 속에 우리의 존재가 디자인되어 있고 사람이 그 디자인을 따라야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어 가는 것을 말한다. 올해 2023년 한국에 가서 몇 가지 건강 검진을 해 보았다. 안과, 이비인후과, 치과, 피부과까지 가서 내 망가진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었다. 미국의 병원비가 비싸기도 하지만 비교적 잔병 없이 살아 병원에 갈 필요를 느껴보지 못하다가 감당 못 할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을 찾게 되었다. 결과는 그랬다.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태어났는데 관리를 엉망으로 하셨습니다.” 닥터들의 말이 동일했다. 안과 의사는 심하게 나무라기까지 했다. 나는 그분들의 말을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얼마나 회개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얼마나 큰 감동이 오던지. 마치 내가 열네 살 때 여의도 광장에서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회개 하라는 설교를 들었던 그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나는 지금까지 일어났던 이벤트의 점들을 하나로 이어보는 습관이 있다. 그리고 하나님이 내 삶에 디자인한 것들을 감상하곤 한다. 그럼 너무 신기한 것이 있다. 나는 내 삶에서 나 스스로 나를 위해서 스케치하거나 채색해 본 적이 전혀 없다. 그저 주어진 삶이라는 공간에서 주어진 일을 하며 살아왔다. 지나고 보니 대부분의 일에 대한 열심은 탐욕이었고 게으름은 그 욕망이 이루어지지 못함에 대한 포기에 가까웠다. 그래서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런 나에게 소망을 심고 믿어지게 하고 이루어 가시는 분이 있었다. 그 자리엔 내 욕심이 끼어들 수 없었고 그 길은 결코 실패하거나 이루어지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렇게 삶의 조각들을 잇다 보면 주의 은혜와 설계가 있고 그 끝에는 주님이 있었다. 또 지금까지 이어온 점들을 지금 일어나고 있는 점에 이어보면 그럼 앞으로 주님이 내 삶을 어떻게 이끌어 가시는지도 짐작하게 된다. 그 길을 따라가면 과거처럼 앞으로도 소망이 현실이 될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없다. 이렇게 살다 보면 하나의 호흡도 의미가 있고 일도 쉼도 그분의 것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된다. 믿어지는 것은 오늘도 날마다 색다른 선물이라는 고백을 하고 글을 마치고 싶다.
온라인 빵으로만은 살 수 없다
by Trevin Wax
2023-09-19
2020년 3월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봉쇄 조치가 시행되자 많은 교회가 발 빠르게 라이브 스트리밍과 비디오로 전환했다. 팬데믹 이전까지 실시간 스트리밍을 하는 교회는 22퍼센트였다. 그러나 몇 주 만에 그 수치는 66퍼센트로 급증했고, 개신교 목사의 92퍼센트가 영상 설교나 예배를 제공했다.팬데믹이 사그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예배를 실시간으로 스트리밍하는 교회의 수가 늘어났으며, 이를 중단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목소리가 있지만 온라인 예배라는 관행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게 거의 분명하다. (Pew Research의 새로운 설문 조사는 라이브 스트리밍에 대한 교인들의 관점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시각을 제공한다.)한 세대 이전에 대형 교회들은 이미 찬란한 일요일 아침의 텔레비전 방송에 필적할 만큼 응집력 있고 매력적인 예배 방송에 능숙했다. 텔레비전이나 라디오 사역을 하는 모든 교회가 주장하듯, 전문적으로 잘 포장한 교회 콘텐츠는 지역 교회의 영향력을 넓힐 뿐 아니라 설교자와 성경 교사의 영향력까지 확장한다. 보충제는 대체물이 아니다하지만 온라인 예배에는 단점이 있다. 우리는 오늘날 미국인들을 괴롭히는 문화적 질병인 “대체주의”(substitutism)에 취약하다. 이는 조슈아 미첼이 쓴 American Awakening에 나오는 용어이다. 그는 쉬지 않고 쉬운 대안과 지름길을 찾아 헤매는 우리의 열망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다. 이는 또한 보충제를 아예 대체물로 만들기 좋아하는 우리의 경향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미첼의 책에 온라인 교회나 라이브 스트리밍 예배에 관한 언급이 등장하지는 않는다. 그는 소셜 미디어와 우정과 같은 다른 영역에서 ‘대체주의’가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이 분야에서 대체주의에 대한 그의 진단을 살펴보고, 그의 통찰을 예배에 적용해보자. 소셜 미디어는 고작해야 실생활에서 이미 알고 있는 관계를 향상할 뿐이다. 미첼은 이렇게 설명한다. 소셜 미디어는 우리의 기존 우정에 보충제가 될 수 있다. 악수, 등 토닥이기, 포옹 등을 통해 우리가 진정한 친구인지 확인할 수 없을 때, 오랜 친구와 연락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자극제 역할을 한다. 이 보충제를 통해서 우리는 친구라는 존재감을 느낀다. 그러나 기존에 만들어진 우정이라는 역량이 없이 단지 보충물만으로는 결코 존재감을 만들어낼 수 없다.(xxiii)즉, 우정은 진짜이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보충제에 불과하다. 그러함에도 소셜 미디어가 우정이라는 느낌을 주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이미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단지 온라인에서만 아는 존재를 향해서 “친구”라는 말을 쓰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한다.)비타민은 정기적인 식사가 반드시 함께 할 때만 필수 영양소를 제공하는 보충제이다. 사람이 비타민만으로는 살 수 없다. 비타민이 식사를 좋게 만들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식사 그 자체이다. 식사가 핵심이다. 비타민이 도움을 줄 뿐이다. 용기가 넘치는 경험 많은 전사를 상상해보라. 무기를 손에 쥐는 순간, 그의 전투 능력이 향상되고 승리에 대한 열정도 커질 것이다. 그렇다고 무기가 그 사람을 전사로 만드는 건 아니다. 무기가 용기를 주는 것도 아니다. 훈련받지 않은 사람이나 비겁한 사람이라면, 똑같은 무기를 손에 쥔다고 해도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다.우리의 능력을 갉아먹는 지름길이게 문제이다. 진짜를 보충제로 대체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우리는 진짜로 좋은 것을 제공하는 “역량” 그 자체를 잃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래서 미첼은 이렇게 경고한다. 오늘날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방대하고 겉보기에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일련의 유혹들이다. 살면서 당연히 치러야 하는 노력 없이 지름길로도 얼마든지 성취할 수 있다는, 전혀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한다는 것이 이 유혹 속에 숨은 위험성이다. (xxv)비타민이 식사를 대체할수록, 우리는 점차 훌륭한 음식을 요리하고 잔치를 벌이는 능력을 잃을 것이다. 소셜 미디어가 단순한 보충제가 아니라 진짜 우정을 대체하게 된다면, 우리는 결국 얼굴을 보면서 우정을 쌓아가는 능력 자체를 잃을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친구”와 더 많이 “연결”된 소셜 미디어 시대에 왜 외롭다는 사람의 비율이 증가했는지 궁금한 적이 없는가? 바로 대체주의 때문이다. 보충제에 너무 매료된 우리는 진짜 식사를 하지 못한 지 너무나 오래되었다. 우리는 앞으로 점점 더 이상 미덕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풍부하고 깊은 우정을 쌓는 데에 어려움을 느낄 것이다. 진짜 우정이 어떤 것인지도 아예 모르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온라인 예배나 텔레비전 설교 시청이 언약 공동체로 모인 신자들의 물리적인 모임을 대체할 수 있는 진짜 대안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렇다. 아프거나 출장 중일 때야 온라인 예배라는 보충제에 감사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유익은 오로지 진짜로부터만 나온다. 온라인 예배는 진짜 예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진짜 경험의 맛을 보게 할 뿐이다. 진짜 식사에 대한 보충제일 뿐이다. 지름길의 유혹삶의 다른 영역과 마찬가지로 지름길이 주는 매력은 신앙의 문제에서도 항상 존재하는 유혹이다. 우정을 만드는 건 쉽지 않다. 교회 생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함께 풍요롭고 의미 있는 삶을 누리려면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교회 생활의 어려운 수고를 피하도록 돕기 위해 고안된 보충제에 달려가는 사람에게서 거룩함과 의로움 속에서 성장하는 모습을 기대할 수는 없다. 영적인 성장은 오로지 합당한 수고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수준 높은 온라인 예배 제공이라는 선한 일에 종사하는 교회들에게 진심으로 찬사를 보낸다. 단, 이것이 보충제라는 점만은 꼭 기억하자. 단지 보충제일 뿐이다. 교회마저 대체주의에 빠지는 순간, 다음 세대는 영적으로 빈곤하게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교회 생활” 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조차 남지 않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원제: Man Shall Not Live by Online Bread Alon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율법주의 저장 장애
by 김정우
2023-09-08
저장 장애(Hoarding Disorder)라는 게 있다. 물건에 강박적으로 집착하여 쌓아 놓은 물건들이 생활공간을 침범해 불편함을 겪으면서도 버리지 못하고 끊임없이 무엇인가를 수집하고 저장하는 성향이다. 왜 끝없이 쌓을까?그렇게 함으로써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불편함이나 불쾌감을 줄 수 있다는 걸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러한 성향에 ‘장애’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에게는 모두 율법주의 성향이 있다. 자기 힘으로, 아니면 스스로 만들어 낸 방식에 따라 ‘자기 의’를 이루려는 성향 말이다. 이런 율법주의 신앙을 과감하게 버리지 못하면, 복음의 은혜와 능력에 대해 늘 듣기는 하지만, 결코 누리지는 못한다.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의 영적 위기가 복음의 진리에서 떠나 인간의 의와 행위를 강조하는 율법주의 신앙에 빠졌기 때문임을 알았다. 따라서 교회의 영적 위기를 극복하고 교회를 다시 건강하게 세우기 위해서는 그러한 율법주의 신앙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 밝힐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직접 이렇게 큰 글자로 적습니다”(갈 6:11)는 말까지 한다. 이 서신의 처음부터 지금까지는 대필자의 도움을 받아서 썼지만, 마지막 부분만큼은 본인이 직접 쓰겠다는 의지가 담긴 표현이다.이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영적 혼란과 갈등 가운데로 빠뜨린 거짓 교사들이 왜 그토록 할례를 강조하는지 잘 드러낸다(갈 6:11-13). 거짓 교사들의 진짜 관심은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아니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도 아니었다. 그들의 관심은 오로지 자신들의 의와 공로를 드러내는 것, 또 사람들로부터 인정과 영광을 얻는 것이었다. 그래서 할례를 육체의 자랑거리로 삼은 것이었다.오늘날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게 바로 이러한 율법주의 신앙이다. 때로 교회 밖으로부터 오는 박해와 유혹보다 더 극복하기 힘든 게 율법주의 신앙이다. 이 율법주의 신앙은 바로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내부의 적이라고 할 수 있다. 잠시라도 영적 경계심을 늦추게 되면 우리는 언제든지 율법주의 신앙의 늪에 빠지게 된다. 김정우, 갈라디아서를 처방합니다(두란노)에서 간추린 글입니다.
바벨론이라는 대학을 이겨내는 다니엘의 세 가지 지혜
by Catie Robertson·Andrew M. Selby
2023-09-06
하나뿐인 지구를 위해 삼백 명의 학부생이 있는 강의실에서 아이를 낳지 말라고 말한 교수에게 문제가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진짜 문제는 이어진 웃음 없는 침묵이었다. 수백 명이 일제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는 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올해 가을, 전국에 걸쳐서 부모들은 자녀를 세상으로 보낼 준비를 하며 미니 냉장고와 기숙사 액세서리를 차에 싣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대학에 진학하는 젊은이들을 향한 기독교 공동체의 불안은 커졌고, 그건 당연하다. 새내기 대학생이 지금 바빌론으로 들어가고 있다. 비록 다니엘이 바빌론으로 들어간 게 자발적인 건 아니었지만(그는 강제로 유배당했다), 그러함에도 그가 거기서 보여준 성경적 신실함의 모범은 학생과 부모 모두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바빌론에 있던 다니엘과 그의 친구들은 철저한 순종을 요구하는 정치권력 아래에서 세속 동료들과 함께 엄격한 세속 교육을 받았다. 다니엘의 이야기는 그리스도인 대학생에게 바빌론에서 살아남는 방법만이 아니라 번영을 누리는 데에도 도움이 된다. 지금부터 살펴보자. 1. ‘왕의 식탁’을 피하라.바벨론의 사상은 다니엘을 흔들지 못했다. 오늘날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갈데아 문학을 공부할 때 점성술, 점술, 부도덕한 신화 등 기존 이스라엘 신앙에 적대적인 많은 사상을 접했다. 그러나 지혜로운 그들은 사회적 압력이야말로 강단에 선 교수의 이념적 호언장담보다 훨씬 더 빠르고 효과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향한 충성심을 허문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로 그 이유로 다니엘과 친구들이 왕의 음식을 먹지 않고 또 왕의 포도주도 마시지 않겠다고 선택했다(단 1:8). 왕이 제공하는 교실은 공유했지만, 그들은 결코 왕의 식사를 공유하지 않았다.후자의 행위는 그들을 같이 훈련받는 다른 현자들로부터 분리했다. 맛있는 음식을 거부하겠다는 대담하고 즉각적인 선택은 그들을 하나로 묶었고,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향하는 반문화적 정체성을 구현했다. 왕의 술을 피함으로 그들의 머리는 맑았고 언제라도 지성의 싸움에 돌입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 대학생도 왕의 고기와 포도주를 피해야 한다. 그렇다. 이 말은 다름 아니라 신입생 파티에 참석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서 가장 친밀한 사회적 접촉 지점(예를 들어 정기적인 식사)과 가장 뿌리 깊은 우정의 통로를 오로지 같은 신자들로 제한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회적 통합을 포기하는 희생은 상처를 초래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니엘과 친구들은 하나님에게 충성하기 위해서 기꺼이 대가를 치렀다. 동료 신자들과 함께하는 저항적 교제가 처음부터 우리의 기본 태도가 되어야 한다. 2. 믿는 자들과 함께 식사하라.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가 큰 일에도 충성한다는 게 성경의 가르침이다. 하나냐와 미사엘, 아사랴는 어떻게 왕의 맹렬한 진노를 감당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다니엘은 어떻게 죽음의 굴로 당당히 발을 들일 수 있었을까? 그들의 강한 결의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수천 번의 평범한 식사가 밑바탕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다른 신자들과 함께하는 정기적인 식사를 소홀히 하는 그리스도인 학생은 용기 있는 생활 방식에 꼭 필요한 양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정기적 식사를 위해서 가장 이상적인 환경은 지역 교회이다. 그리스도인은 주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의 함께 식사하는 자리, 세상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이름이 일상적으로 모독받는 현장이기도 한 바로 그 시간에 하나님이 이루시는 역사하심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식사 자리야말로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서 영적 전쟁에 필요한 전투력을 쌓는 시간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 내가 누구인지 정기적으로 상기하지 않는 학생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잊어버릴 것이다. 나(케이티)의 대학 시절, 화요일 밤은 자매들과 함께 모여서 저녁으로 수프를 먹는 날이었다. 우리는 그날 겪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세상의 거짓말을 비웃으며, 공허하고 파괴적인 파티의 짠 칼로리를 실질적인 영적 대화와 친교를 제공하는 따뜻하고 풍부한 사우어도우 빵으로 대체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다음 날 아침이면 친구들이 떠들어대는 세상의 해로운 이데올로기에 도전하고 싶어졌다. 진실을 옹호하며 싸우는 나의 이야기가 다음 화요일 밤 저녁에 좋은 화젯거리가 될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3. 바벨론을 축복하라.대학의 “식탁”을 피하는 것이 분리주의적이고, 전투적이며, 또 불신자들에 대해 냉담한 태도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하면 그렇지 않다. 세상과 적절하게 전략적 거리를 둘 때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백성은 바벨론을 축복할 수 있다. 느부갓네살 왕은 꿈을 해석하지 못하는 학자를 모두 죽이려고 했다(단 2:12). 지식과 인간 생명을 향한 체계적인 파괴는 현대 바빌론에도 반영되고 있는데, 인문학에서 발생하는 지적 자살과 학생들 사이에서 실제로 목숨을 끊는 비극이 바로 그 현장이다. 다니엘과 친구들에게 해결의 시작은 교제와 기도였다(단 2:17-19). 끊임없는 하나님과의 연결은 제국에까지 생명을 가져왔다. 하나님께서는 다니엘로 하여금 느부갓네살의 꿈을 해석하게 하셨고 그렇게 함으로써 바벨론의 지식을 보존하셨다.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강한 확신을 가진 명철한 그리스도인은 어둠 속에서도 빛을 발한다. 그들은 강의실을 포함해서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적절한 순간을 만나면 생명의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굳건한 토대와 명확성을 갖고 있다. 그리고 언제라도 불신자들을 신앙의 우리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불신자를 변화시키는 선포를 제대로 하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준비는 바로 일상적인 캠퍼스 생활 습관에 대한 쉬지 않는 저항과 매일 쌓아가는 깊이 있는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에서 시작한다. 믿지 않는 학우들과 진리를 나누기 열망하는 캠퍼스의 그리스도인은 본능적으로 그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세상의 공간에서 어울리고, 그들의 문화적 일상에 동참하고, 또 일종의 전도 이전 활동으로 그들과 함께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다니엘의 사례가 보여주는 것은 문화적으로 적대적인 바벨론에서 필요한 것은 정반대라는 사실이다. 이교도들을 확고한 믿음의 교리로 이끌기 위해 그리스도인은 이교도들이 즐기는 의식을 단호하게 거부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침식하는 문화에 동화되어서는 안 된다. 불신자들이 달려갈 수 있는 등대가 되어야 한다. 저항의 공동체를 만들자나 자신 그리고 우리가 사랑하는 학생들을 생각할 때, 대학을 바라보면서 불안을 느끼는 건 당연하다. 의심할 바 없이 오늘날 대학은 바벨론의 짐승이 날뛰는 최첨단의 전선이다. 현대 캠퍼스에서 그리스도인이 직면하는 선택은 간단하다. 바벨론의 방식에 동화되거나 아니면 저항하며 신앙을 지키는 것이다. 저항의 길을 선택한다면 전략적이고 결단력이 있어야 한다. 단지 막연하게 하나님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하고 또 불신자와 친해지려고 나름 노력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 자신의 믿음은 말할 것도 없고 전도라는 장기적인 전략으로서도 효과적이지 않다. 다니엘은 우리에게 제대로 된 전략을 보여준다. 왕에게 맞서고, 정기적으로 신자들과 함께 식사하며 대화하고 기도함으로써 그는 어떻게 해야 바벨론에서 생존할 수 있는지를 알려준다. 신자들과 함께 저항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만 있다면, 대학 전체를 구원할 수도 있다. 형제자매가 모여서 함께 기도하고, 신실한 정통을 공부하고 그 정통을 실천하기 위해서 서로 격려한다면, 대학의 지혜가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에 마음을 두는 식탁 교제를 즐겨야 한다. 그렇게 할 때 풀무불이나 사자굴 앞에서도 굳게 설 수 있는 힘을 얻을 것이다. 시련과 환난, 사회적 칼날이 닥쳐도 두려워하지 말라. 다니엘을 바벨론에 두신 하나님, 그를 사자굴에서 구원하신 하나님, 그리고 그의 친구들과 함께 풀무불 속에 서신 하나님이 당신과 함께 하신다. 그들을 바벨론에서 지키신 하나님이 여러분을 인도하시며 캠퍼스 생활이라는 바벨론에서도 언제까지나 함께 하실 것이다.원제: Daniel’s 3 Tips for Surviving the University of Babyl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짧은 인생이 최선의 인생이 되려면
by John Ensor
2023-09-05
한 문장이 삶을 바꾸기도 한다“한 문장이 우리 마음에 너무 강력하게 박혀 다른 모든 것을 잊게 만들 때, 바로 그 한 문장이 끼친 효과는 엄청날 수 있다.” ―존 파이퍼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장모 조니는 우리 부부와 함께 산다. 백 살인데도 꽤 건강하다. 그녀가 잘 웃는다. 또 잘 운다. 그리고 종종 농담도 하는데 손자와 증손자들은 그런 그녀를 즐겨 방문한다. 그들은 할머니의 어린 시절 이야기에 흥미를 느낀다. 지난주에 조니가 지나가며 한 달이 걸린 다니엘서 연구를 마쳤다고 말했다. “다니엘서를요!” 나는 깜짝 놀랐다. 과연 백 살이 된 내가 그 예언적이고 묵시적인 책을 다루고 싶어 할지, 나는 차마 감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래야 할 것 같다.그러나 조니에게는 그녀를 괴롭히는 한 가지 특별한 질문이 있다. 특히 시력이 좋지 않거나 혈압이 높은 날에는 더 그렇다. 왜 아직도 나는 살아 있는 걸까?당신은 왜 사는가? 조니의 남편은 죽었다. 맏아들도 죽었다. 108살까지 살았던 언니가 작년 12월에 우리 곁을 떠났다. 그녀는 관절이 안 좋다. 그녀는 또한 우리 사회가 겪고 있는 극적인 도덕적 붕괴를 슬퍼한다. 그녀는 이제 천국에 갈 준비가 되었다. 그래서 쉬지 않고 묻는다. “왜 아직도 내가 여기에 있는 거지?”아마도 항상 숨겨진 이유를 가지고 계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의 마음에 동참하는 게 내가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대답이 될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비록 부분적이지만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있다. 1975년, 스무 살 대학생이던 나는 조니의 질문에 답이 되는 소중한 한 문장을 발견했다. 나는 디트리히 본회퍼가 쓴 감옥에서 보낸 옥중서신, 그리고 그의 친구 에버하르트 베트게가 쓴 그의 전기를 읽었다. 감옥에서 일 년을 보낸 뒤, 그리고 나치에 의해 처형되기 약 일 년 전, 그는 에버하르트에게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 때때로 살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고 털어놓았다(136).나는 이 말이 본회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조니에게도 적용된다고 믿는다. 나는 그 말을 믿는다. 나는 본회퍼의 신앙 선언문에 너무나 놀랐고, 처음 읽은 지 47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의 말은 여전히 내게 영감을 준다. “당신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가, 존? 당신에게는 지금도 계속해서 발전하고 펼쳐지는 복음의 위대한 사업에 일조할 시간이 많이 남아있다.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라!”악한 날을 잘 사용하기본회퍼는 히틀러 살해 음모 혐의로 체포된 게 아니었다. 체포 당시만 해도 사건의 줄거리와 그의 역할이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음모는 실패했고, 핵심 선동자인 클라우스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다음날 처형되었다. 고문 끝에 동지를 배반할 것이 두려웠던 사람들은 자살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저항 활동 속 본회퍼의 역할은 사실상 숨겨져 있었는데, 그건 그가 조국을 사랑하고 정부를 지지하는 다소 순진한 목사인 척 위장했기 때문이었다. 정치 문제에 대해 모르는 척하며 자신이 부당하게 체포되었다고 주장했다. 히틀러의 죽음과 함께 석방될 것이라고 나름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음모에 가담한 그의 역할은 발견은커녕 조사도 되지 않았다. 그러나 히틀러가 살아있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 그는 자신의 계략이 먹히지 않을 것이며 죽게 될 것을 직감했다. 주요 음모자 중 한 사람의 일기에서 본회퍼의 이름이 발견되었다. 러시아가 베를린으로 몰려들었고, 본회퍼는 그의 형제, 그리고 다른 공모자 다섯과 나란히 교수형을 당했다.본회퍼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는 한”이라며 삶에 관해서 말했을 때, 전체 문맥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에베소서 5:15-16을 묵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를 살피십시오. 지혜롭지 못한 사람처럼 살지 말고, 지혜로운 사람답게 살아야 합니다. 세월을 아끼십시오. 때가 악합니다.” 그에게 시대가 악했다는 사실은 자명했다. 그는 감옥에 있는 시간을 최대한 활용하여 윤리학을 완성하려고 했다. 그것이 그가 생각한 시간을 아끼는 길이었다. 당신에게 주어진 일본회퍼의 신앙 선언이 나에게 그토록 큰 영향을 미친 이유는 무엇일까?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본회퍼의 선언은 우리 모두 에베소서 2:10을 믿고 거기에 따라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 선한 일을 하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미리 준비하신 것은, 우리가 선한 일을 하며 살아가게 하시려는 것입니다.”우리 각자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남겨두신 선한 일을 갖고 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는 그분의 위대한 사업에 기여하고 하나님의 나라를 발전시킬 수 있다. 그분의 계획은 창조부터 완성까지 쉬지 않고 전개된다. 본회퍼와 조니, 그리고 당신과 나, 우리 모두 다 하나님의 글로벌하고 거침없는 사역 안에서 맡겨진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본회퍼는 하나님이 수많은 경험과 수년간의 성경 묵상을 통해 자신으로 하여금 윤리에 관한 책을 쓰도록 준비시키셨다고 생각했다. 악과 죽음이 그를 둘러싸고 또 감방에 갇힌 상황에서 책을 쓰는 것이 그가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시대의 악함을 감안할 때, 그는 우리 모두 오늘날 마땅히 느껴야 하는 것처럼 가능한 한 최대한으로 기회를 활용해야 한다는 긴급함을 느꼈다.사는 것은 그리스도이다본회퍼는 하나님께서 성취하기를 원하신다고 생각했던 일을 마치기도 전에 처형당했다. 조니의 경우,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선행을 하고도 남을 긴 생애를 살고 있다. 바로 이 점이 내가 본회퍼의 구절을 좋아하는 두 번째 이유로 이어진다.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은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하면서 사는 바로 그 길이다. 성경은 “나에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이시니, 죽는 것도 유익합니다”(빌 1:21)라 말한다.본회퍼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일을 할 만큼 오래 살았다. 조니는 심지어 백 살에도 할 수 있는 훌륭한 일을 가지고 있다. 다름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육신이 너무 약해지고 이 세상에 지쳐도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바로 그 일이다. 솔직히 나는 본회퍼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그가 미완성으로 마친 윤리학을 읽는 데 적잖은 어려움을 느꼈다. 나는 또 제자도의 대가를 읽었다. 나는 그 책이 필요하다고는 느끼지만, 실제로 그리스도를 위해 공개적으로, 매일, 그리고 지속적으로 살았으며, 무엇보다 삶과 죽음을 통해 “제자도의 대가”가 무엇인지 온몸으로 보여준 본회퍼가 저자라는 특징이 없는데도 과연 이 책이 오늘날에도 인쇄되어 팔릴 수 있을까에 관해서 의문을 가진다. 그러나 본회퍼의 책처럼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건 책 뒤에 있는 사람이다. 악한 시대와 환경 속에서도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하필이면 나치즘이 사라지는 상황 속에서 죽임을 당하는 것도,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 있어서 사는 것이다. 걷는 자 옆에서 달리기백 살이 된 조니가 여전히 곁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그의 나라를 발전시키는 위대한 일이기 때문이다. 단지 방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또 기도하고 성경을 읽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그녀는 거의 알지 못한다. 아마도 그녀는 지금 내가 아무것도 아닌 일을 떠들고 다닌다고 비난할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백 살에 다니엘서 공부를 마친다는 것이 하나님 나라를 구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날을 사모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매력적인 그림이라고 말하고 싶다. 조니의 몸은 여행을 할 수 없지만, 그녀의 간증은 얼마든지 세계를 돌아다닐 수 있다. 나는 중국, 우간다, 쿠바 등지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보행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녀의 간증은 뛰어다닌다. 조니를 보면서 나는 그녀가 다음 세대가 그리스도를 위해 살도록 권유하는 데 꼭 필요한 만큼 살고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낀다. 그것이야말로 뭔가 할 만한 좋은 일이다. 원제: The Best Use of Your Short Lif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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