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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자에서 그리스도까지, 단편에서 빅 스토리까지
성경을 읽는 깊이
by Kathleen Nielson
2022-06-28
남편과 나는 돈 카슨의 For the Love of God에 있는 성경읽기표로 성경을 묵상한다. For the Love of God는 성경을 통독할 수 있는 유익한 일정표인데, 온 세계에 있는 사람들을, 하는 일이 저마다 다른 사람들을, 가까이 있건 멀리 있건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을 연결해 주는 멋진 통로가 되기도 한다. 이 사이트에서 매일 전자우편을 받아보길 추천한다. 이 우편에는 성경묵상 목록과 함께 그날의 본문 넷 중 하나를 간결하면서도 힘 있게 설명하는 돈 카슨의 글도 들어 있다. 말씀을 따라가면서 카슨이 던지는 한마디는 하루를 바르게 시작하는 좋은 길잡이가 된다. 최근에 우리는 열왕기상 13장을 묵상했다. 전에도 읽은 본문임이 분명한데도 다시 읽으니 내러티브가 낯설게 다가왔다. 이 본문도 카슨이 설명했는데 도전적인 에스겔서의 몇 장을 제시할 뿐, 이 본문에 나와 있는 이상한 사건들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남 유다로부터 북 이스라엘 베델로 온 선지자가 돌아가는 길에 사자에게 물려 죽은 이상한 사건 말이다. 이 초현실적인 사건은 북 이스라엘 초기에 이곳 베델에서 일어났다. 이 본문을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우리는 이 본문이 다양한 단계에서 풍부한 의미를 담고 있는 내러티브임을 알게 되었다. 게으른 단계열왕기상 13장을 읽으면서도 사자가 눈에 안 들어올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이 사자는 이 길에서 뭘 하고 있는 거지? 어디 보자. 성경 어디에 또 사자와 나오더라? 가령 잠언에서 게으름뱅이는 이렇게 말한다. “길에 사자가 있다. 거리에 사자가 있다”(26:13). 그런데 열왕기상 13장의 이야기에는 사자가 실제로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자에게 물려 죽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애쓴 사람이다. 하지만 이런 종잡을 수 없는 막연한 관찰로는 멀리 가지 못한다. 이런 게으른 수준에서 멈추면 안 된다. 도덕주의 단계열왕기상 13장은 하나님께 순종하라는 요구와 순종하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결과에 관하여 이야기한다.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어느 지점까지는 말이다. 그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북 이스라엘 여로보암 왕에게 심판의 메시지를 전한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왔던 길이 아니라 다른 길로 돌아간다. 또 하나님이 도중에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고 명하셨다고 자기 입으로 말한다. 여로보암 앞에 서 있는 이 선지자를 보면서 우리는 응원을 보낸다. 그가 타락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에 넘어가서 잠깐 쉬면서 먹고 마시려고 할 때, 우리는 그가 말려들었다는 걸 안다. 우리는 이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경각심과 순종을 중도에 그만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운다. 시험을 통과하고 좋은 일을 한 직후에 따라오기 마련인 취약하고 독선적인 순간에는 더욱 그렇다. 그런데 고의적으로 또 고집스럽게 불순종한 사람은 여로보암 왕이다. 13장은 여로보암에게 시종 초점을 맞춘다. 여로보암은 백성은 하나님이 명하신 예배 장소와 절차를 보란 듯이 어긴다. 여로보암은 자신의 제사장들과 제단들을 세웠으며,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서 받은 하나님의 극적인 경고 앞에서도 계속 악행을 일삼는다. 편 손이 마르고 제단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도 여로보암은 자기 손이 낫기만을 바랄 뿐, 예배를 올바로 회복하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 13장은 여로보함이 지은 죄가 불순종의 죄라고 명시하고 그의 집이 땅에서 끊어지고 멸망할 것이라고 선언하는 끔찍한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물론 순종이 이 본문의 도덕적 요지이기는 하다. 그러면 여기서 멈추어도 될까? 이렇게 멈추면, 구원의 은총에 이르지 못하고 도덕적 비판에서 그치고 만다.하나님께 집중하는 단계순종은 인간의 관점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나 13장은 우리를 이 수준에 머물게 놔두지 않는다. 이 본문을 맨 처음 읽을 때부터 마치 국에 들어 있는 빨간 고춧가루처럼 곳곳에서 계속 반복되는 말이 눈에 확 늘어온다. “주님의 말씀”이다. 이 어구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거기에 하나님의 관점을 주입한다. “주님의 말씀”은 처음부터 여러 번 반복된다. 이 본문의 이야기에서 모든 일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일어난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북 이스라엘에 가서 여로보암에게 전했고 또 극적으로 그대로 이루어진 그 말씀에서부터, 특이하고 분명히 초자연적으로 사자를 통해 이루어진 그 특별한 이야기까지 말이다. 보통의 사자라면 사람을 물어 죽인 다음에 그 주검 옆에, 그것도 옆에 나귀를 놔두고서 그냥 그대로 서 있지 않을 것이다.벧엘의 기만적인 늙은 선지자도 이 사실을 뒤집어진 방식으로 생생히 보여준다. 그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고 말하는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에게 자기도 정반대되는 “주님의 말씀”을 받았다고 대답한다. 물론 거짓말이다. 이들 두 선지자의 불순종은 주님의 말씀을 잘못 다루는 데서 비롯된다. 하나는 경솔하게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의 말을 맞바꾼다. 다른 하나는 자기 말이 하나님의 말씀인 척한다. 안타까운 건 하나님의 말씀의 힘을 제대로 깨닫는 쪽은 가짜 선지자라는 사실이다. 유다로부터 온 선지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가짜 선지자는 이렇게 말한다. “그는 틀림없이 주님의 말씀을 어긴 그 하나님의 사람일 것이다. 주님께서는 전에 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를 사자에게 내주셔서, 사자가 그를 찢어 죽이게 하신 것이다”(왕상 13:26). 하나님에 집중하여 보면, 이 이야기의 감독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이 야야기의 디테일 하나하나를 주권적으로 지시하신다. 이 거룩하신 감독의 말씀은 최고의 말씀이며 반드시 명심해야 하는 말씀이라는 것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는 자비로운 마음으로 등장인물들에게 그의 말씀과 뜻을 알려준다는 사실도 분명히 드러난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주권적 감독과 자비로우신 계시를 인식하는 것으로 끝내도 될까? 여기서 멈추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서 그치게 된다. 불순종하는 사람들과 주 하나님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 밝히 깨닫지 못한다.빅 스토리 단계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한다. 인간의 삶에 그토록 자비롭게 개입하시는 주권적인 하나님은 분명히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악한 불순종에 대한 심판의 계획이 이 장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러나 구원을 위한 계획 역시 보인다. 그러나 매우 미미하게 보인다. 다윗의 집을 섬기겠다고 남은 충성된 무리가 크지 않으니 말이다. 열왕기하 13장의 독특한 서사는 하나님이 택하신 백성의 왕국이 분열된 후라는 더 큰 역사적 서사의 흐름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우리는 이미 다윗에게 영원한 보좌를 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들었지만, 다윗 왕국이 갈라지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윗의 아들들과 신하들은 모두 하나님이 정하신 선을 따르지 않고 자기 선을 추구했다. 여로보암은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면 열 지파와 복을 주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고서도(11:37-38) 자기 길로 행했다. 남 유다 왕국의 르호보암은 좀 나을까? 12장을 보면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택한 성읍 예루살렘에서 내 종 다윗이 항상 내 앞에 등불을 가지고 있게 하리라”(11:36)고 약속하셨다. 13장 도입부에 다윗의 집에서 태어날 요시야라는 아들에 대한 예언이 있는데, 그가 산당의 거짓 예배를 파괴할 것이다(13:2). 유다로부터 온 하나님의 사람에게서 나온 하나님의 말씀은 다윗의 집에 대한 희망을 다시 한 번 밝히고 있다.하나님의 백성이 저지른 어두운 불순종 가운데서도, 특히 13장의 불순종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더 큰 이야기와 연결되어 유일한 희망을 제시하며 그치지 않고 그 빛을 발한다. 심판 때에도 우리는 희망을 본다. 주님의 말씀이 그 심판의 말씀에서 그토록 주권적이고 참되다면, 그 희망의 말씀도 참되어야 한다. 다윗의 집에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죽이는 사자도 있지만, 심판할 뿐만 아니라 또한 ‘백성의 순종’을 이끌어 내는 유다 집안의 사자도 있을 것이다(창 49:10). 이 사자는 열왕기상 13장 첫머리에서 유다로부터 와서 주님의 말씀을 전하는 그 이름 없는 하나님의 사람이 아니다. 이 사람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을 가져오는 사람이 유다로부터 나올 것이며, 그는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마침내 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 우리 구주를 볼 때, 우리의 묵상은 온전한 빛과 희망을 주는 이야기의 수준에 이르게 된다.겹겹이 쌓여 있는 저마다 신기한 이야기들이 모두 그리스도께 가닿는 이 얼마나 풍부한 내러티브인가. 지금도 주님의 말씀이 모든 복합한 이야기를 하나로 묶어낸다는 사실을 안다는 것은 얼마나 큰 희망인가. 펴진 채 말라버린 손, 늙은 선지자의 집에서 먹고 마신 빵과 물, 나귀를 지키고 있는 사자, 이 얼마나 눈길을 사로잡는 특별한 이야기들인가. 날마다 말씀을 읽는다는 것, 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원제: Lions and Levels of Narra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묵상
사자
여로보암
르호보암
우상숭배
순종
하강과 상승, 비움과 채움
케노시스의 신비
by 최병락
2022-06-25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이신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 사이에는 위아래가 없다. 세 분은 완전히 동등하시고 본질상 하나이시며 창세전부터 존재하시며 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성자 하나님이 자기를 성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로 주장하지 않으시고 스스로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로 인간 세상의 자리까지 내려오셨다. 기독교 변증가 오스 기니스는 그의 책 인생에서 이 사건을 ‘위대한 하강’(Great Descent)이라 표현했다. 기독교는 ‘위대한 상승’의 이야기가 아니라 ‘위대한 하강’의 이야기다. 얼마나 높아졌느냐의 성공 이야기가 세상의 이야기라면, 기독교는 얼마나 낮아졌느냐의 겸손의 이야기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고 얼마나 성공했느냐”를 묻는다면, 그는 기독교를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어디까지 낮아지고 겸손해질 수 있느냐”를 물을 때, 비로소 그는 기독교를 제대로 이해한 것이다. 비울 때 예수님은 어떻게 사람으로, 죄인으로, 그리고 인간의 마지막인 십자가와 무덤 속으로까지 낮아지실 수 있었던 것일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가 깊이 묵상해야 할 중요한 구절이 바로 이것이다. “자기를 비워…”(빌 2:7). 여러분 안에 이 마음을 품으십시오. 그것은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기도 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하나님과 동등함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서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과 같이 되셨습니다. 그는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셔서,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5-8.예수님의 이러한 비움을 신학 용어로 ‘케노시스’라 부른다. 이는 성육신을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3-4세기경 기독교는 기독론을 두고 뜨겁게 논쟁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신가 아닌가를 놓고 치열하게 갑론을박했다. 성자가 성부와 동일 본질인가, 유사 본질인가를 놓고 뜨겁게 논쟁했다. 이때 논쟁을 불식시킨 성경 구절이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자기를 비워”이다. 이로써 성자는 성부와 동일 본질이신 하나님이시지만 자기를 비우시고 이 땅에 오신 분이라는 정통 기독론이 명확히 정립되고 삼위일체론이 완성된 것이다.예수님의 자기 비움은 곧 하나님보다 열등한 존재인 그리스도가 세상을 구원할 책임을 지고 보내‘지거나’ 버려‘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기를 비워 자원하여 기쁨으로 이 땅에 내려오셨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자기를 비운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영역본 성경 NIV는 자기를 비운다는 말을 “Made himself nothing”로 옮겼다. 말하자면, ‘자기를 없는 존재처럼 여긴다’는 의미를 담아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철저히 자기를 감추시고 낮추시고 비우셨다. 그 목적은 단 하나, 성부 하나님을 높이시기 위함이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선하다고 부를 때에도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눅 18:19).예수님은 철저히 자기를 비우시고 오직 하나님만 높이시는 삶을 사셨다. 사람들에게 성자는 성부보다 열등하다는 오해를 받을 정도로 자기를 낮추신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자기 비움의 마음이다. 그리고 바울은 바로 그 마음을 우리 안에 품으라고 촉구한다.나를 통해 내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철저히 비워 오직 예수님, 하나님, 성령님만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사는 삶이다. 나도 보이고 하나님도 보여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 말고, 나는 확실히 죽고 오직 하나님만 드러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다.삼위 하나님 중 그 누구도 자기를 드러내지 않으신다. 오직 서로를 드러내실 뿐입니다. 성부, 성자, 성령 삼위 하나님은 자기 영광을 취하지 않으시고 서로를 높여 주신다. 그 아름다운 모습은 잠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영원히 삼위일체의 하나됨을 유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이다. 그래서 어느 신학자는 “삼위일체를 제대로 아는 교회는 절대로 갈등이 생길 수 없다”고 했다.어느 공동체든지 나를 드러내기 시작하면 금방 깨지고 만다. 이는 자기를 비우지 않을 때 자연스럽게 생기는 결과이다. 자신이 섬기는 교회에서 원하는 직분이나 인정을 못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때문에 교회 이동이 일어나기도 한다. 조용히 이동만 하면 그나마 덜 불행이지만 분쟁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이유야 수백 가지겠지만 근원은 자기를 비우지 못한 결과이다. 내가 살아 있기에 나를 몰라주는 것 같아 속상하고, 무시를 당한 것 같고,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것 같다. 이러한 마음 때문에 전쟁이 시작된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내 마음을 걷어내고 그 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 것이다.“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8).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을 본받고 배워야 한다. 비움에는 자력의 비움과 타력의 비움이 있다. 가장 아름다운 것은 자력의 비움이다. 이는 마음을 겸손히 하여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나는 죽고 예수님을 드러내는 삶을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다. 타력의 비움은 그 사람의 욕심과 자존심과 자아가 모두 비워질 때까지 하나님이 기다리시거나, 급할 때는 강제로 비우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왜 이토록 우리가 비우기를 원하시는 것일까? 비워야 채우기 때문이다. 극한 가뭄에 피폐해진 시돈 땅에서 아들과 살고 있는 사르밧 과부는 마지막 남은 가루 한 움큼과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아들과 먹고 죽으려 했다. 그런 모자 앞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엘리야는 이제 곧 목숨과 맞바꿀 그 얼마 남지 않은 가루와 기름으로 빵을 만들어 자기에게 달라고 요구한다. 말도 안 되는 명령이다. 그런데 사르밧 과부는 엘리야를 위해 통에 남은 가루와 병에 남은 기름을 비운다. 이것이 케노시스, 비움이다. 그리고 가루와 기름을 비우고 났더니 그때부터 그 병에 기름이, 그 통에 가루가 마르지 않는 채움이 시작되었다(왕상 17:8-16). 케노시스는 케노시스로 끝나지 않는다. 채워지는 기적이 시작된다. 그래서 케노시스는 곧 케노시스의 신비이다.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나 잡은 것이 없어 빈 배와 빈 그물로 하루를 마무리하려는 참에 그들에게 예수님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은 그물을 오른편에 던지라 하셨고, 베드로는 그 명령에 따랐다. 그리고 빈 배는 만선으로 바뀌었다. 놀라운 채움이다. 예수님은 빈 배가 될 때까지 기다리셨다(요 21:1-14). 완전히 비기 전까지는 베드로에게 아무리 그물을 다시 내리라고 해도, 자기 지식과 경험을 의지하여 순종하지 않았을 것이다. 베드로는 완전히 빈 배가 되고 나니 자신의 지식과 경험이 소용없다는 것을 알았다. 배와 마음이 철저하게 케노시스가 되었을 때, 비로소 베드로는 예수님께 순종하게 되었다.사르밧 과부처럼 어려운 형편에 처했는가? 베드로처럼 평생 모아서 사 놓은 배 한 척이 빈 배가 되고, 그물은 찢어져 기능을 상실했는가? 화려한 인생의 시간이 지나고, 명성과 평판을 잃고, 축제의 포도주 통이 텅 비어 버렸는가?비움 앞에서 사르밧 과부와 베드로는 공통의 경험을 했다. 그들 모두 하나님의 사람, 예수님을 만났다. 비어버린 곳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전에 예수님으로 채워야 한다. 그 비움에서 채움이 시작된다. 케노시스는 그래서 플레로마, 곧 충만의 시작이다.낮아짐으로 예수님의 위대한 하강이 더 이상 낮아질 수 없을 때까지 낮아지자 그 다음에 위대한 상승이 일어난다.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를 지극히 높이시고,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그에게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 있는 모든 것들이 예수의 이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라고 고백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습니다. 빌립보서 2:9-11.예수님이 하늘에 계시다가 땅 위에 오시고, 땅 아래로 내려가셔서 장사되신 이유가 여기 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 그들을 하나님 아버지께로 돌려드림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위대한 자기 비움으로 하강하신 것이다. 땅 위로 오시지 않으면 땅 위의 사람을 구원할 수 없고, 땅 아래로 내려가시지 않으면 사망 권세에 놓인 자들을 해방할 수 없다.우리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비우는 것은 비굴한 것도 초라한 것도 실패도 아니다. 낮아지는 동안 그 경험으로 인해 만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과정임을 알게 된다.편집자 주_이 글은 최병락, 어둠 속에 부르는 노래(두란노)의 일부 내용을 재구성한 것입니다.
케노시스
성육신
기독론
우리의 신음이 최고의 기도가 될 때
by Donnie Berry
2022-06-23
또 그러고 말았다. 십대인 아들과 대화하다가 또 격해졌다. 아들은 화를 냈고 무례했다. “녀석이 이성마저 상실했군.” 나는 이렇게 판단했고, 흥분을 가라앉혔다. 이번에는 기필코 냉정을 유지하겠다고―부드럽게 반응하고, 상한 감정과 자존심을 드러내지 않겠다고―다짐했지만, 또 실패했다. 둘이서 내뱉은 말을 몇 번이고 복기해 보았다. 아들은 자러 제 방에 들어갔고, 너무나 사랑하는 아들과의 관계는 또 그렇게 틀어져 버렸다. 소파에 앉은 채 나는 사랑의 방식을 번번이 훼방 놓는 나의 태도를 자책했다. 그렇게 앉아서 나는 속량(redemption)을, 온전함(wholeness)을 간구했다. 정확히 말하면, 기도한 것이 아니다. 그저 신음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버지 앞에서 말없이 신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확신컨대, 하나님의 사랑의 품 안에서, 그 신음은 나의 최고의 기도가 되었다. 늘어나는 신음나이가 들수록 내 신음도 늘어난다. 그저 아픈 무릎과 등 때문에 나오는 시름이 아니다. 나이드니 이런 신음도 나오긴 하지만 말이다. 그것은 내면의 신음이다. 나의 완고한 기질을 마주할 때, 아내와 아이들에게 내가 죄를 지을 때 올라오는 신음이다. 누군가에게 수치심과 고통과 내침을 당한 아이들을 볼 때 터져 나오는 말 없는 신음이다. 배신이나 비극, 충격적인 진단 앞에서 아파하는 신음이다.근래에 신음소리가 더 깊어진 걸 느낀다.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도 느낀다. 바울은 부활의 이편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신음한다고 우리에게 말한다. “첫 열매로서 성령을 받은 우리도 속으로 신음하고 있습니다”(롬 8:23). 신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일상의 한 부분이다. 신음은 또 선물이다. 로마서 8장에서, 우리는 어떻게 신음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구속의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지를 본다. 신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온전히 누리는 영광의 몫을 깨닫는 수단이라는 것을 우리는 발견한다. 영광을 갈구하는 신음우리는 영광을 위하여 지음 받은 존재이다. 이것은 로마서에서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성품이요 본성이다. 그리고 이 영광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음 사람들에게 드러나며, 또한 그 사람들을 통하여 드러난다.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누도록, 곧 하나님의 생명과 아름다움과 기쁨을 나누도록 지음 받았다. 비록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것들과 맞바꾸어 버렸고 그래서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지만(1:23; 3:23),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을 다시 나누게 될 것이라는 확실하고 분명한 소망이 있다(5:2). 로마서 8:17-30에서, 영광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속량의 충만함을 표시하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영화롭게 될 것이다(8:17). 영광이 우리 안에서 드러날 것이다(1:18). 그리고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의 자유에 들어갈 것이다(1:21).바울은 세 가지 신음을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누리게 될 미래의 영광을 설명한다(1:22): 피조물의 신음(22절), 하나님의 자녀들의 신음(23절), 그리고 “성령께서 친히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을 하신다(26절). 이 모든 탄식이 우리를 30절의 바울의 결론으로 이끌어 간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정하신 사람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바라보는 신음―피조물의 신음, 성령의 신음, 그리고 우리의 신음―은 영광을 위한 신음이다. 우리가 죄와 망가짐을 마주할 때, 우리는 신음한다. 우리가 육신의 병과 약함과 죽음을 마주할 때, 우리는 신음한다. 관계가 틀어지거나 깨질 때, 사랑하는 사람들이 힘들어 하는 걸 보면서, 우리는 신음한다. 우리는 고통이 끝나기를 갈망한다. 우리는 온전해지고 죄의 종살이에서 해방되기를 고대한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함께 나누고, 그리고 그 안에서 함께 빛나게 될 그날을 고대하고 있다. 어떻게 그 영광에 이를 것인가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신음에서 영광으로 이르게 되는 것일까? 바울은 성령이라고 답한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성령께서도 우리의 약함을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도 알지 못하지만…”(8:26).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약함”은 로마서 7장과 8장에서 내내 설명하고 있는 그 씨름을 의미한다. 우리는 은혜 아래 있고, 그리스도와 더불어 살아났고, 그리고 하나님의 양자되었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부패에 굴복하고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영향 아래 있다. 우리는 두 세계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다. 구속 받은, 그러나 여전히 우리의 구원의 충만함을 기다리고 있는 우리이다.이러한 약함이 우리가 신음하는 이유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현재의 약함과 고뇌에서 벗어나 우리의 영광의 상속을 누리게 될지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아신다. 첫 열매―장차 우리가 받을 영광의 보증―이신 성령께서는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의 영광을 위해 기도하신다(26절). 우리의 고통을 통해 어떻게 선한 일이 일어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성령께서는 아신다. 성령께서는 하나님의 성품과 본성과 목적에 따라 간구하신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일하신다. 모든 것이 영광으로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하시는지 설명하고 나서 바로 바울은 우리에게 로마서 8:28의 놀라운 약속을 들려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나님의 뜻대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협력해서 선을 이룬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성령의 간구는 적극적이고 적절하다. 그는 우리가 겪는 “모든 것”을―심지어 우리의 상처, 낙심, 좌절, 그리고 실패조차도―취하신다. 그의 손에서 이것들은 하나님의 선하시고 사랑을 베푸시는 계획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아들의 형상을 본받고(29절) 우리가 영원한 영광과 생명과 기쁨을 누리도록 시련을 사용하신다(30절).세월이 갈수록 우리의 신음도 커진다. 그러나 그러한 신음과 함께 소망도 자란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영광을 우리와 나누시겠다고 결심하신 그 소망이다. 성령께서 그 영광을 우리에게 건네주시려고 우리 삶 가운데서 일하시는 그 소망이다. 성령께서 영광을 갈망하는 우리 모두의 신음을 들으시고 그 신음소리 하나하나를 확실하고 분명한 간구로, 우리의 최고의 기도로 바꾸신다. 원제: When Groaning Is Our Best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로마서8장
피조물의신음
성령의간구
하나님의영광
하나님자녀의영광
기독교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
by C. S. 루이스
2022-06-22
‘기독교 고전으로의 초대’ 연재를 시작하며이 글은 아타나시우스의 말씀의 성육신의 관하여의 영역판에 부친 C. S. 루이스의 서문을 출판사 죠이북스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입니다(소제목은 편집자가 임의로 단 것임). 기독교 고전 읽기를 독려하는 C. S. 루이스의 이 글과 함께 앞으로 수회에 걸쳐 매주 주요 기독교 고전을 한 권씩 소개할 예정입니다. 복음과도시 편집자앞으로 소개할 기독교 고전• 요한 칼뱅_기독교강요• 아우구스티누스_고백록• 조나단 에드워즈_신앙감정론• C. S. 루이스_순전한 기독교• J. C. 라일_거룩• 존 오웬_죄 죽이기• 존 밀턴_실낙원• 아타나시우스_말씀의 성육신에 관하여• J. I. 패커_하나님을 아는 지식• 리처드 십스_상한 갈대 (글 싣는 순서는 바뀔 수 있습니다.)어떤 주제를 다루든 옛날 책은 전문가들만 읽어야 하고 아마추어들은 최신 서적들에 만족해야 한다는 이상한 개념이 널리 퍼져 있다. 영문학 교수로서 내가 알게 된 사실이 있는데, 어떤 평범한 학생이 플라톤주의에 관해 무언가를 알고 싶을 경우 도서관 서가에서 플라톤의 향연(Symposium) 역본을 찾아 읽어 볼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오히려 그보다 열 배는 더 두꺼운 요즘 책을 읽으려 한다. 온통 “주의”(ism)가 어떻고 그 영향력은 어떻다는 말만 할 뿐 플라톤이 실제 무슨 말을 했는지는 겨우 열두 페이지에 한 번 정도 나오는 지루한 책을 말이다. 그러나 이 정도의 오류는 겸손에서 비롯되는 오류이기 때문에 다소 귀엽다고 할 만하다. 이 학생은 위대한 철학자로 손꼽히는 사람을 정면으로 마주할 용기가 없다. 자신은 그럴 만한 자격이 없으며 그 철학자의 책을 읽어도 이해하지 못할 거라 생각한다. 그러나 위대한 사람은 바로 그 위대함 때문에 현대 주석가들의 글보다 훨씬 이해하기 쉽다는 사실을 이 학생이 안다면 좋았을 것이다. 아주 평범한 학생도 플라톤의 말을 다는 아니더라도 상당 부분 이해할 수 있을 테지만, 플라톤주의를 다루는 요즘 책들 중에는 누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책들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내가 지금까지 힘써 온 일 한 가지는, 직접적 지식은 간접적 지식에 비해 더 애써서 획득할 만한 가치가 있을 뿐만 아니라 대개 더 쉽고 더 기분 좋게 습득할 수도 있다고 젊은이들을 설득하는 것이다.근래 나온 책들을 더 좋아하고, 옛날 책은 선뜻 집어 들지 못하는 이 잘못된 태도가 가장 만연한 곳은 다름 아닌 신학 영역이다. 목회자나 신학생이 아닌 일반 그리스도인들의 소규모 공부 모임에서는 누가나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혹은 리차드 후커(Richard Hooker, 1554-1600, 잉글랜드 국교회 성직자)나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 더럼의 주교)가 아니라 니콜라이 베르쟈예프(Nikolai Aleksandrovich Berdyaev, 1874-1948, 러시아의 철학자이자 작가), 자크 마리탱(Jacques Maritain, 1882-1973, 프랑스의 아퀴나스파 철학자), 라인홀드 니부어(Reinhold Niebuhr, 1892-1971),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 1893-1957), 심지어 필자 같은 사람들의 책을 공부할 것이 거의 확실하다.내가 보기에 이는 본말이 바뀌었다. 물론 나 자신도 글을 쓰는 사람이기에 일반 독자가 현대 서적을 전혀 읽지 않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하지만 요즘 나오는 책과 옛날 책 중 한 가지만 읽어야 한다면, 나는 옛날 책을 읽으라고 독자에게 권할 것이다. 내가 독자에게 이런 조언을 하는 이유는, 그 독자가 아마추어이고 따라서 최신 책들만 읽는 데 따르는 위험에서 보호받을 가능성이 전문가에 비해 훨씬 적기 때문이다. 최신 서적은 아직 검증이 안 된 상태이고, 아마추어는 그 책이 읽어도 될 만한 책인지 판단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요즘 나오는 책들은 긴 세월에 걸쳐 확립된 기독교 사상의 대계(大系)를 기준으로 검증되어야 하며, 책 속에 감춰진 모든 함축적 의미(그런 의미가 있는지 대개 저자 자신도 생각해 보지 않은)가 밝혀져야 한다. 현대 서적은 다수의 다른 최신 책에 대한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여덟 시에 시작된 대화에 열한 시쯤 끼어들면 대개 대화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중간에 끼어든 사람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던진 몇 마디 말이 폭소를 낳기도 하고 짜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할 것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이유를 몰라 어리둥절할 것이다. 물론 좌중이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 사람이 끼어들기 전에 나눈 대화가 그 사람의 그 말 몇 마디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최신 서적 속의 특이할 것 없어 보이는 문장들이 사실은 다른 어떤 책을 겨냥한 말일 수 있다. 그래서 그 말의 진짜 의미를 알았다면 격분해서 거부했을 말을 자기도 모르게 받아들일 수도 있다. 유일한 안전장치는 당대의 논쟁들을 올바른 관점에서 보게 해주는 명백하고 기본적인 기독교 신앙의 표준(리차드 백스터는 이를 가리켜 ‘순전한 기독교’[Mere Christianity)라고 했다)을 아는 것이다. 그런 표준은 오직 오래된 책들에서만 얻을 수 있다. 바람직한 규칙이라면, 최신 서적을 읽고 나서는 옛날 책을 한 권 읽고, 그런 다음에야 최신 서적을 또 한 권 읽는 것이다. 이것이 너무 버겁다면, 최신 서적을 세 권 읽을 때 오래된 책을 적어도 한 권은 읽어야 한다.각 시대마다 나름의 관점이 있다. 이 관점은 어떤 진리를 특히 잘 파악하기도 하고 어떤 오류를 특히 잘 저지르기도 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 시대의 특징적 오류를 바로잡아 줄 책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런 책은 곧 오래된 책들을 뜻한다. 당대의 저자들은 당대의 관점을 어느 정도 공유한다. 필자처럼 그 관점에 심히 반대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과거에 벌어진 논쟁들을 읽을 때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논쟁을 벌이는 양측 모두 지금의 우리라면 절대적으로 부인할 내용들을 상당 부분 아무 이의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였다는 사실이다. 양측은 자신들이 더할 수 없이 상반되는 입장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이들은 상당히 많은 공통의 가설로써 은밀히 내내 결속되어 있었다. 이 가설로써 이들은 자기들끼리는 연합했고, 전후(前後) 시대의 이론들과는 맞서 싸웠다. 최신 서적들만으로는 당대의 맹점을 바로 잡을 수 없다 20세기의 특징적 맹점(후대 사람들은 이 맹점에 관해 이렇게 물을 것이다. “옛 사람들은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었지요?”)은 우리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지점에 있으며, 이 맹점과 관련해서는 히틀러와 루즈벨트 대통령 간에도, H. G. 웰스와 칼 바르트 사이에서도 아무 문제없이 의견이 일치된다. 누구도 이 맹점을 완전히 피해 갈 수 없으며, 최신 서적만 읽을 경우 이 맹점이 강화될 것이 확실하고, 이에 대한 경계심도 약화될 것이다. 최신 서적이 맞는 말을 할 경우, 이는 우리가 이미 반쯤은 알고 있는 진리를 말해 주는 것일 뿐이다. 반대로 틀린 말을 할 경우, 이는 이미 위험할 정도로 잘못되어 있는 우리의 오류를 심화시킬 것이다. 이를 완화할 유일한 대책은 우리의 지성을 통해 수세기의 깨끗한 해풍(風)이 계속 불어오게 하는 것뿐이며, 이는 오래된 책들을 읽음으로써만 가능하다. 물론 과거에 어떤 마법 같은 게 있지는 않다. 옛날 사람들이 지금 사람들에 비해 더 똑똑하지도 않았다. 옛 사람들도 우리처럼 실수를 저질렀다. 하지만 우리와 같은 실수는 아니었다. 우리도 이미 오류를 저지르고 있으므로 우리가 옛 사람들보다 낫다고 우쭐할 일도 없고, 옛 사람들의 오류는 이제 다 드러나서 누구나 알 수 있기에 우리를 위험에 빠뜨리지도 않는다. 하나보다 둘이 낫다고 하는 것은 어느 한쪽이 무오(無)하기 때문이 아니라 둘 다 한 방향으로 잘못 갈 리는 없기 때문이다. 확신컨대, 미래에 나올 책들이 과거에 나온 책들만큼 탁월하게 우리의 오류를 바로잡아 줄 수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미래에 나올 책들은 우리 손에 넣을 수 없다.내 경우, 영문학을 연구하다가 거의 우연에 가깝게 기독교 고전을 읽게 되었다. 리차드 후커, 조지 허버트(George Herbert, 1593-1633), 토마스 트러헌(Thomas Traherne, 1637-1674), 에드워드 테일러(Edward Taylor, 1645-1729), 존 버니언(John Bunyan, 1628-1688)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 자체가 위대한 영문학 작가들이기 때문이고, 보이티우스(Boethius, 480-525),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 354430),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1274), 단테 (Dante, 1265-1321) 같은 사람들의 작품을 읽은 것은 이들이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조지 맥도널드 (George Macdonald, 1824-1905)는 내 나이 열여섯 살 때 알게 된 작가로, 그의 기독교 신앙을 무시하려고 오랜 세월 애쓰기는 했지만 그에 대한 내 충성심은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 알다시피, 이들은 교파도 다르고 환경과 시대도 각양각색이다. 그리고 이 사실은 이 사람들의 작품을 읽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우리에게 제공해 준다. 기독교 세계의 분열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고, 이 분열상은 이 작가 몇몇이 자신의 글로 아주 격렬히 표현했다. ‘기독교’는 아주 많은 의미를 지닌 단어여서 실제로는 아무 의미도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현대 서적만 읽는 사람이라면 그런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자신이 속한 세기에서 한 걸음 벗어 나옴으로써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모든 의심을 초월해서 깨달을 수 있다. 수 세대의 세월을 배경으로 판단해 볼 때 순전한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한 무미건조하고 명백한 명제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자기모순이 없고 다함없는 어떤 것임이 드러난다. 다양한 고전들 속에서 기독교의 놀라운 일치성을 발견할 수 있다이는 내가 겪어 봐서 아는 사실이다. 아직 기독교를 싫어하던 시절, 나는 마치 너무도 익숙한 냄새처럼 거의 불변하는 어떤 것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는데, 그것을 이제 청교도 버니언의 작품에서, 국교도 후커의 작품에서, 그리고 토마스 아퀴나스파인 단테의 작품에서 만났다. 그것은 프란치스코 살레시오(Francois de Sales, 1567-1622)의 글에도 (달콤하고 꽃 같은 형태로 존재했고, 에드먼드 스펜서(Edmund Spenser, 1552-1599)와 아이작 월튼(Izaak Walton, 1593-1683)의 작품에도(장중하고 꾸밈없는 형태로 존재했다. 그것은 파스칼과 새뮤얼 존슨(Samuel Johnson, 1709-1784)의 작품에도 (냉혹하지만 단호한 형태로) 존재했고, 시인 헨리 본(Henry Vaughan, 1622-1695)과 야콥 뵈메(Jakob Bohme, 1575-1624, 독일의 신지학 작가)와 트러헌의 작품에도 온화하고 놀랍고 낙원의 향취를 지닌 형태로 녹아들어 있었다. 18세기의 도회적이고 냉철한 풍조 가운데서도 방심할 수 없었다. 윌리엄 로(William Law, 1686-1761)와 조셉 버틀러(Joseph Butler, 1692-1752)는 그 길을 가로막고 있는 두 마리 사자였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이른바 ‘이교 신앙’(Paganism)도 이를 막지는 못했다. 이는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는 곳, 요정의 여왕(The Faerie Queene, 에드먼드 스펜서가 쓴 12권짜리 장시)과 아카디아(Arcadia, 필립 시드니가 쓴 목가풍의 연애시) 한가운데서도 숨어서 기다렸다. 물론 형태는 다양했다. 하지만 본질은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을 만큼 똑같았다. 생명이 되게끔 하지 않는 한 이 향기는 우리에게 죽음이며, 이 피할 수 없는 향기를 나는 알아볼 수 있었다.죽음의 바람이저기 먼 나라에서 불어온다(A. E. 하우스먼의 시 ‘내 맘속으로 죽음의 바람이’에서_옮긴이)기독교 세계의 분열에 대해서는 모두 슬퍼하고 부끄러워하는 게 옳다. 그리고 기독교의 틀 안에서만 살아온 사람들은 그 분열 때문에 너무 쉽게 낙심할 수도 있다. 분열은 나쁘지만, 이런 사람들은 기독교의 틀 밖에서는 분열이 어떻게 보이는지 알지 못한다. 기독교의 틀 밖에서 볼 때, 그 모든 분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온존(溫存)하는 것은 엄청나게 경이로운 일치성(unity)인 듯하다(실제로 그러하듯). 이것은 내가 틀 밖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안다. 그리고 우리의 원수들도 이 사실을 잘 안다.그 일치성은 자기가 속한 시대에서 한 걸음만 밖으로 나가 보면 누구라도 확인할 수 있다. 충분하지는 않지만, 그 일치성은 우리가 지금까지 상상해 온 것 이상이다. 일단 이 일치성을 잘 이해하고, 그런 다음 이를 과감히 말할 수 있게 될 경우, 재미있는 경험을 할 수도 있다. 사실은 버니언의 말을 풀어 옮기고 있는데 로마가톨릭교도로 여겨지기도 하고, 아퀴나스를 인용하고 있는데 범신론자로 오해받기도 하는 등 말이다. 이는 우리가 이제 시대와 시대 사이에 가로놓인 높은 수준의 구름다리 위에 올라섰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 구름다리는 골짜기에서 보면 아주 높게 보이고, 산에서 보면 아주 낮게 보이며, 늪에 비하면 아주 좁아 보이고, 양 떼가 다니는 길에 비하면 아주 넓어 보인다.
고전
기독교고전
기독교의일치성
왕과 짐승: 다니엘 4장 이해하기
by Alex Kirk
2022-06-21
다니엘서 4장은 구약성경에서도 특히 두드러지는 장인데, 인간이 동물로 변한 것처럼 보이는 장면이 들어있다. 따라서 고전적인 변신 비유, 소년들이 갑자기 돼지로 변하는 피노키오 속 이야기나 또는 신들이 인간을 치명적인 신의 결점을 나타내는 생물로 변형시키는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여러 이야기가 생각난다고 해도 크게 이상할 게 없다. 본문은 느부갓네살의 운명을 이렇게 묘사한다.바로 그 때에 이 일이 나 느부갓네살에게 응하므로 내가 사람에게 쫓겨나서 소처럼 풀을 먹으며 몸이 하늘 이슬에 젖고 머리털이 독수리 털과 같이 자랐고 손톱은 새 발톱과 같이 되었더라(단 4:33).이 묘사에 대한 그럴듯한 역사적 설명을 발견하길 희망했던 빅토리아 시대 학자들은 임상적인 라이칸스로피(lycanthropy, 사람을 늑대로 바꾸는 마법) 진단을 제안하기도 했다. 이 구절을 읽고 미녀와 야수 같은 상황이 생각나지 않는다면 이상할 것이다. 그럼 이것이 동화 속 이야기인가? 느부갓네살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이것은 동화나 정신병에 대한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이 교만한 사람에게 자신을 찬양하도록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신학적 설명이다.느부갓네살과 동물적 생각다니엘서 4장은 궁전에서 여가를 보내던 느부갓네살이 상징적인 꿈을 꾸는 것으로 시작한다. 꿈에서 왕은 하늘까지 닿아 하늘의 모든 새와 들짐승에게 먹이와 피난처를 제공하는 거대한 나무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 나무를 베어야 한다는 법령이 하늘에서 떨어진다(단 4:13-17). 나무는 강하고 자애로운 왕권의 이미지이며(겔 17:23-24; 31:4-7, 9), 꿈에 나오는 동물은 왕이 먹이고 보호하는 대상이다. 그러나 이 나무에게는 능력과 웅장함 그리고 여유라는 면에서 하나님을 무시하는 오만의 문제가 있다(단 4:30). “나무를 베다”는 왕의 형벌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16절은 형벌을 믿을 수 없을 만큼 직설적으로 묘사한다. “또 그 마음은 변하여 사람의 마음 같지 아니하고 짐승의 마음을 받아 일곱 때를 지내리라.” 교만이 느부갓네살의 마음을 가득 채웠기에 하나님은 그에게 새 마음을 주신다.느부갓네살의 몸은 이 심오한 변화를 보여주는 캔버스가 된다. 그는 노출된 생활을 하며 소처럼 초목을 먹고 산다. 그의 몸은 새가 될 때까지 정리되지 않는다. 그러나 소나 맹금류 또는 다른 종류의 동물과의 일관된 비교는 없다. 오히려 느부갓네살은 동물적이 된다. 그의 외양은 동물의 마음으로 야수처럼 집 밖에서 몇 년 동안 살았을 경우, 누구나 다 겪을 정도로만 영향을 받는다. 우리 눈에 보이는 외부 변화는 우리가 볼 수 없는 내부 변화의 질을 반영한다. 이 형벌은 우주적 공급자이자 보호자가 공급과 보호를 필요로 하는 자들 중 하나인 천한 짐승이 되기 위해 창조 질서의 위계를 거쳐서 내려오는 것이다(시 8:5-7). 새와 짐승이 큰 나무 아래서 그늘과 먹을 것을 찾은 것처럼(12절), 느부갓네살도 새와 짐승과 같이 되어 몸을 드러내고 짐승의 몫을 먹는다(33절).그러나 본문은 여기에 머물지 않는다. 잠시 동물이 된 느부갓네살에서 34절의 회복으로 빠르게 전환된다. 핵심적인 순간은 느부갓네살이 “하늘을 우러러 눈을 들 때”이다. 성경은 심오한 계시의 순간을 눈을 들어 하나님을 인정하는 몸짓과 연관시킨다(창 22:13; 수 5:13; 사 40:26; 51:6; 시 121:1; 123:1). 말 없는 그런 몸짓은 동물이 보이는 겸손의 한 형태이다. 동물은 창조 질서의 위계에서 인간보다 아래에 위치하지만, 하나님에 대한 본능적 지식은 종종 죄로 어두워진 인간의 생각보다 더 참된 것으로 묘사된다(사 1:2-3, 렘 8:7, 욥 12:7-12). 짐승으로 살았던 느부갓네살의 경험은 하나님에 대한 그의 관점을 바꾸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을 무시할 수 없고, 더 이상 자신의 자신감을 자랑스럽게 여기지 않게 되었다(단 4:17; 4:25b). 그는 이제 하나님을 의지한다. 그렇기에 위를 올려다보아야 한다. 왕을 겸손하게 만들기짐승으로 변한 느부갓네살 이야기가 동화는 아니지만, 종종 성경에서 발견하는 진리의 한 측면이 동화를 통해서 드러나기도 한다. 어떤 옛 이야기에서 한 오만한 왕자는 사심 없이 사랑하는 법을 배울 때까지 야수로 변신한다. 그리고 그의 성격도 외모에 걸맞게 바뀌게 된다. 느부갓네살의 교만은 그를 인간 이하로 만들었으므로 하나님은 그를 인류 중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나 그는 이제 동물의 마음으로 바뀌었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법을 배웠다.이런 새로운 관점은 느부갓네살에게 형벌로 강요되었지만, 여기에는 은혜가 있다.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동물적 마음은 그의 관점을 바꾸고 그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도록 회복시킨다(단 4:34-35).느부갓네살의 기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무시하는 교만을 회개하도록 초대한다. 그러나 더 심오한 차원에서 볼 때, 이 이야기는 우리를 낮추시고 올바른 정신으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고귀한 성품을 드러낸다(단 4:37). 이런 왕이 우리에게 찬양을 명령하신다.느부갓네살의 오만함과는 완전히 대조적으로, 예수께서는 겸손으로 왕좌에 오르신다. 주님은 위대한 왕이시다. 그의 왕국은 영원하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빌 2:6-7). 하나님에서 겸손한 인간으로의 이런 이동은 느부갓네살이 위대한 왕에서 낮은 짐승으로 내려온 것과 유사하다. 그러나 바벨론 왕과는 전혀 달리, 왕이신 예수님은 스스로 자진해서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기꺼이 피조물의 자리로 내려오셨다.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인간의 생각을 취하셨다. 하나님은 본인이 성취하지 않은 것을 하라고 명령하지 않으신다.예수님의 겸손은 하늘과 땅 전체에 울리는 승영의 서곡이다(빌 2:9-11). 그러나 느부갓네살의 겸손은 하늘의 왕을 향한 찬양의 서곡이다. 그러므로 지금 나 느부갓네살은 하늘의 왕을 찬양하며 칭송하며 경배하노니 그의 일이 다 진실하고 그의 행하심이 의로우시므로 교만하게 행하는 자를 그가 능히 낮추심이라(단 4:37).하나님의 선하심과 영광에 대해 이렇게 찬양하는 것이 인간이 해야 할 합당한 반응이다. 그러나 교만은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하나님을 무시하게 만들면 결국 스스로를 인간 이하로 추락시킨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구체화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인성에 대해 숙고하라고 촉구한다(빌 2:5). 겸손 속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성품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찬양으로 인도한다. 느부갓네살처럼, 또 예수님처럼 우리도 온전한 인성(full humanity)을 갖춘 자리로 올라가려면, 무엇보다 나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원제: The King and the Beast: Understanding Daniel 4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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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선하심
성경, 하나의 이야기, 예수!
by Matt Smethurst
2022-06-16
어릴 때부터 교회 다녔다면 잘 알려진 성경 이야기들에 익숙할 것이다. 노아의 수상 동물원에 감탄했을 것이고, 다윗과 같은 영웅을 당신의 삶에서 마주했으며, 아마도 감히 다니엘이 되어 보기도 했을 것이다. 구약성경만 해도 그 정도이다. 신약의 복음서에서 당신은 예수님의 기적을 배웠고, 그런 이야기들은 단지 당신을 감동시키기 위해 쓰인 것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쓰였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린 소년이 자기 도시락을 내놓았다. 얼마나 마음 넉넉한 행동인가? 가서 당신도 똑같이 하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릴 때부터 교회 다닌 사람이 아니어서 성경에 대해 잘 모른다면, 성경은 일련의 도덕적 교훈을 담은 이야기이거나 철학 사색 선집, 아니면 호텔방 서랍에 남아 있어야 할 구식 규율 책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성경은 너무나 위험하고, 연약한 사람들을 억누르며 순진한 사람들을 속아 넘어가게 하여 자신에게 진실하지 못하게 만드는 책이라고 믿고 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이든 아니든, 이러한 사실에 조금이라도 공감한다면 귀 담아 들어야 할 소식이 있다. 달리 보아야 한다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믿고 있지만, 성경은 단순히 윤리적 원칙이나 진부한 도덕, 비현실적 교훈을 모아 놓은 책이 아니다. 한 편의 스릴 넘치는 드라마를 상상해 보라. 당신이 좋아하는 동화들보다 훨씬 훌륭한 이야기이다. 왜냐면 그 이야기는 사실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들어 있는 이야기들을 제대로 보려면 먼저 성경의 ‘그 이야기’를 파악해야 한다. 그 이야기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줄곧 가로지르는 그 이야기는, 당신을 위해 쓰였지만, 최종적으로 당신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 초점은 훨씬 더 높고, 그 영웅은 훨씬 더 좋다. 성경이 놀랍도록 다양성이 풍부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줄거리의 일관성은 더더욱 놀랍다.• 다양한 장르의 책 66권• 다양한 배경과 직업을 가진 40명이 넘는 작가• 1,500년 이상의 기간• 10개의 문명• 3개 대륙• 3개 언어• 1개의 통일된 구속 이야기 성경에는 하나의 궁극적 계획, 하나의 궁극적 줄거리, 하나의 궁극적 승리자, 하나의 궁극적 왕이 있다. 누가복음 24장에서 예수님은 부활하신 직후에 길에서 당신이 누구인지 알리지도 않고 두 제자에게 나타나신다. 설명 불가능한 빈 무덤 앞에서 아연실색했던 그들은 웅성거리는 소문들만 주고받는다. 아직 사람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예수님이 그들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고 진리를 상기시켜 주신 것은 설명하기조차 어려운 부분이다.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리석은 사람들입니다.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마음이 그렇게도 무디니 말입니다. 그리스도가 마땅히 이런 고난을 겪고서, 자기 영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수께서는 모세와 모든 예언자에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서 자기에 관하여 써 놓은 일을 그들에게 설명하여 주셨다. 누가복음 24:25-27. 오래지 않아 열한 제자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은 같은 요지의 말씀을 하신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하기를,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나를 두고 기록한 모든 일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였다.” 그 때에 예수께서는 성경을 깨닫게 하시려고, 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24:44-45.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에만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돌아가시기 전에 바리새인들에게 (곧 유대 종교 그룹, 당시의 “성경 전문가들”에게) 그들의 위대한 책에서 자신이 차지하는 위치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셨다. 너희가 성경을 연구하는 것은, 영원한 생명이 그 안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나에 대하여 증언하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생명을 얻으러 나에게 오려고 하지 않는다.…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모세가 나를 두고 썼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39-40, 46. 이런 주장은 으레 환영받지 못했다. 신약이 드러난 예수 그리스도라면, 구약은 감추어진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이 있다. 정확히 맞는 말이다. 신학자 고 벤저민 워필드(B. B. Warfiled)의 말을 좀 바꾸어 표현하면, 구약은 보물로 가득 찬 방이지만 그 방은 어두침침하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예언하는 선지자들, 그리스도를 미리 보여주는 패턴들, 그리고 그를 기대하는 약속들로 가득 차 있다. 토미 넬슨(Tommy Nelson) 목사가 말하듯이, 9,000미터 상공에서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어 성경을 내려다본다면, 그 지형은 이렇게 보일 것이다. • 구약: 기대• 복음서: 현현• 사도행전: 선포• 서신서: 설명• 계시록: 완성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당신의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웅대한 이야기이다. 그리고 왜 예수님은 그 이야기의 페이지마다,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서 그토록 중심을 차지하고, 그토록 궁극적이며, 그토록 비할 데가 없는 분이신가? 참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고 완전한 삶을 사셨기 때문이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이다. 죄와 사탄과 어둠과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 이스라엘이 이루지 못한 모든 것, 우리가 이루지 못한 모든 것이 되셨다. 그는 우리가 해내지 못한 곳에서 모든 것을 해내셨다. 당신을 경배하고 즐거워하도록 우리를 지으신 분이, 우리의 반역으로 상처 입으신 분이 당신의 이야기를 완성하시려고 당신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오셨다. 무엇보다도 성경은 구원의 이야기다. 하나님이 사람이 되셔서 사람을 하나님께로 다시 데려오시는 이야기다. 우리 각자는 죄로 인해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어야 마땅하나, 예수님은 죄인들의 자리에 서셔서 죄 값을 치르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오셨다. 예수님은 새롭게 하길 원하신다. 그래서 다시 오신다. 우리는 그에게로 돌아서서 그를 믿고 의지하기만 하면 된다. 그러면 심판자가 아니라 구주요 친구이신 그를 알게 된다.그 동안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서” 성경에 다가가야 한다. 성경이 어떻게 하나님의 모든 약속의 “예”와 “아멘”이 되시는 분(고후 1:20)이신 그리스도께 온전히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보아야 한다. 도덕 이야기 모음집을 찾고 있다면, 이솝 우화를 보면 된다. 그렇지 않다면, 시간을 초월한 가장 위대한 이야기, 그 주인공이 우리를 사랑해 주시는 유일한 이야기를 펼쳐 보라. 그런데 한 가지 주의하라. 그가 당신의 삶을 바꾸어 놓을지도 모른다. 편집자 주: 이 글은 맷 스메서스트(Matt Smethurst)의 Before You Open Your Bible: Nine Heart Postures for Approaching God's Word(10Publishing, 2019)에서 간추린 것입니다.원제: Your Whole Bible Is About Jes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서은성
예수님에게 여자 제자가 있었을까?
by Rebecca McLaughlin
2022-06-14
“왜 예수님한테는 여자 제자가 없어요?” 아홉 살 엘리자는 언제나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그 아이가 던진 질문에 나는 주로 “글쎄, 잘 모르겠는데”라는 말로 시작한다. 부모의 책임 중 하나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가 여자 제자 질문을 했을 때, 나는 “예수님한테도 여자 제자가 있었어”라고 대답했다. 엘리자가 이런 질문을 던질 만도 하다. 이스라엘 열두 지파는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열두 아들로부터 시작되었고, 예수님은 유대인 열둘을 “사도”(apostles)로 택하셔서 하나님 백성의 새로운 출발을 알렸다(마 19:28, 눅 22:30). 마가는 사도를 이렇게 묘사한다. “예수께서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또한 사도라고 이름하셨다.] 이것은, 예수께서 그들을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 또 그들을 내보내어서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며, 귀신을 쫓아내는 권능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막 3:14-15). 마가가 “제자”(disciples)라고 할 때는, 바로 이 열두 사도를 보통 의미한다.예수님의 여자 제자들하지만 누가는 열두 명이 단지 예수님 제자의 일부였다고 설명한다. 밤새도록 기도하신 후, 예수님이 “제자들을 부르시고, 그 가운데서 열둘을 뽑으셨다. 그는 그들을 사도라고도 부르셨다”(눅 6:13)라고 썼다. 그렇다면 예수님과 함께 여행한 더 큰 무리의 제자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누가는 훨씬 더 큰 이 무리에 많은 여자가 포함되어 있음을 분명히 한다. 죄인이라 욕먹는 여자를 용서하신 예수님은 그녀를 자의식에 빠진 종교적인 남자보다 더 칭찬하셨다는 이야기를 한 누가는 바로 이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다. 그 뒤에 예수께서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하며 그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가 예수와 동행하였다. 그리고 악령과 질병에서 고침을 받은 몇몇 여자들도 동행하였는데, 일곱 귀신이 떨어져 나간 막달라라고 하는 마리아와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수산나와 그 밖에 여러 다른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의 일행을 섬겼다(눅 8:1-3).누가는 예수님과 함께 여행한 많은 여자가 육체적으로나 영적으로나 예수님에게서 받았으며 또한 그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재정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언급한다. 이것은 중요하다. 누가는 종종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에게 우리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에게 끌린 부유한 여인들을 엿볼 수 있다. 예수님께 너무 매료되어 아예 집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갔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본 목격자의 이야기를 쓰는 경우에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언급했다. 누가가 특히 세 여자의 이름을 언급한 건 다름 아니라 그들이 그가 누가복음을 쓰기 위해 만나서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 중 일부라는 점을 암시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가장 먼저 등장하는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여자 제자들 중에서 단연코 가장 유명하다. 남편이나 아들의 이름을 언급해 여러 마리아를 구분하는 대신에 막달라 마리아는 고향으로 구별되었다. 마치 예수님을 때때로 “나사렛 예수”라고 부르는 것처럼 말이다.우리는 이 마리아가 결혼했는지, 아이가 있는지 여부를 알지 못한다. 어떻게 생겼는지 또는 그녀의 성관계 이력에 대해서도 모른다. 그녀가 회개한 매춘부라는 생각은 그녀가 죽은 지 수 세기 후에야 생긴 것이다. 누가가 알려주는 건 단지 예수님이 그녀에게서 일곱 귀신을 쫓아내셨다는 것이다. 막달라 마리아는 악한 영적 세력에 휘둘려 완전히 황폐해진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 만든 핵심 무리에 들어오기에는 가장 거리가 멀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어울리지 않을 사람을 즐겨 선택하신다.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과 내내 함께 사역을 했을 뿐 아니라, 나중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는 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악마의 놀이터에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이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하나님의 계획에서 핵심 역할을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녀의 눈을 통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엿볼 수 있는가? 마리아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분, 악마의 구덩이에서 끌어내어 헌신적인 제자로 서게 하신 예수님을 마리아를 통해서 만날 수 있다. 요안나누가가 언급한 두 번째 이름인 “헤롯의 청지기인 구사의 아내 요안나”는 막달라 마리아보다 훨씬 덜 유명하다. 누가복음을 열 번 읽어도 기억이 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누가복음을 면밀히 읽는 사람이라면, 세례 요한을 투옥하고 참수한 사람과의 관계 때문에라도 요안나는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 헤롯은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통치했던 헤롯 대왕이 아니라 그의 아들 중 한 명인 헤롯 안티파스이다. 예수님이 사역하실 때 갈릴리를 통치한 왕이다. 누가는 예수님에 관한 소식을 들은 헤롯이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 했다고 말한다. “요한은 내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내게 이런 소문이 파다하게 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눅 9:9). 누가가 헤롯의 반응을 어떻게 알았을까? 요안나를 통해서일 가능성이 높다. 헤롯 집안의 관리인 구사는 헤롯 안티파스의 궁정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는 궁중에서 오가는 수다에 접근할 수 있었을 것이고, 결국 논쟁의 여지가 있는 랍비 예수와 함께하기 위해 궁정의 안락함을 포기한 그녀는 사람들 사이에서 큰 화젯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한 요안나의 결정은 위험한 것이다. 예수에게 흥미를 느꼈지만, 헤롯은 동시에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눅 13:31). 헤롯 궁정의 일원인 요안나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모든 것을 버렸고, 큰 위험을 감수했다. 헤롯의 생각과 행동에 대한 누가의 독특한 통찰은 아마도 그녀 덕분일 것이다.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함요안나의 높은 사회적 지위는 여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여행한 이유가 단순히 잡일을 하려는 게 아님을 분명히 한다. 리처드 보컴은 이렇게 주장한다. “[누가복음 8:1-3의] 예수의 제자 공동체 내에 있는 여자들이 단지 일반 가정에서 수행했던 성별에 따른 역할에 할당되었다고 가정하는 것은 매우 잘못된 방법이다.” 요안나 정도라면 당연히 집에 하인이 있었을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제자 중 부유한 여인들은 예수님의 사역에 자금을 지원했다.물론 그렇다고 여자들이 잡일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제자도의 본질임을 거듭해서 가르치셨다. 무릎을 꿇고 그들의 발을 씻기기까지 하셨다(요 13:1-17). 그러나 누가는 특히 요안나라는 여자를 언급함으로써 여자는 집안에서 남자들을 내조나 하면 된다는 관념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린다. 요안나의 눈을 통해 우리는 어떤 예수님을 만나는가? 적의 궁정에서조차 자기 백성을 선택하여 그의 왕국에서 섬기도록 하시는 분이다. 그를 위해서라면 우리는 세상 모든 지위도 버릴 수 있고, 높은 지위에 있는 친구도 버릴 수 있으며, 모든 돈을 다 쓰고, 모든 위험까지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예수님에게 여자 제자가 있었을까? 그렇다. 확실하다. 누가가 누가복음 8:1-3에서 이야기하는 여자들은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요 전파자가 된 이들”(눅 1:2)이었다. 그리고 이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전 세계에서 복음이 읽히는 곳마다 그들의 이야기가 들린다. TGC 편집자 주: 이 글은 레베카 맥클러플린(Rebecca McLaughlin)이 쓴 Jesus Through the Eyes of Women: How the First Female Disciples Help Us Know and Love the Lord(TGC, July 2022)여성의 눈으로 본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어떻게 주님을 더 사랑할 수 있는가)에서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Did Jesus Have Female Discipl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여자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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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안나
헤롯안티파스
자기희생
제자도
예수님의제자
열두제자
누가복음
성경 언어, 누구나 배울 수 있다
by Andrew Case
2022-06-08
새로운 문화에 젖어드는 최선의 길은 그 언어를 배우는 것이라는 말을 들어 본 적 있을 것이다. 성경의 문화에도 해당하는 말이다. 성경의 언어를 알면 성경 여행을 더욱 잘 하게 된다. 성경 언어를 앎으로써 우리는 성경이라는 텍스트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세계로 발을 들여놓고 그럼으로써 성경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개혁자들은 성경의 원어로 돌아가려는 열망을 불태웠다. 근원으로(Ad fontes)! 나는 그들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원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정말 반겼을 거라고 확신한다. 성경 언어 습득을 어려워하게 만드는 세 가지그러나 내가 수년 동안 그리스도인들에게 얘기하고 있는 바인데, 성경 언어는 보통 신자를 위한 언어가 아니라는 관념이 굳어 있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를 배우는 건 “학자들”의 몫이라고들 생각한다. 보통의 교인은 투자해 봤자 얻을 게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정서가 생긴 데는 적어도 세 가지 원인이 있다. 1. 지레 겁먹게 만드는 학습법중세부터 성경 언어 교육은 보통 사람을 겁먹게 만들었다. 성경 언어를 누구나 사용하고 즐길 수 있는 언어가 아니라 마치 해독해야 하는 암호 취급하는 학습법은 지금까지 유통되고 있다. 성경 언어의 고전적 학습법은 입문하자마자 복잡한 어형 변화와 무수히 많은 단어를 기계적으로 암기하라고 요구한다. 아이들이 모국어를 배우는 방식은 이렇지 않다. 학습법이 이렇다 보니 다들 지레 겁을 먹고 전문가나 배울 언어라고 포기하고 만다. 분명히 해 두자. 이런 학습법으로는 히브리어나 그리스어를 배우는 게 아니라 이 언어에 ‘관해서’ 배운다. 수영을 배우는 것과 수영의 물리 법칙을 책으로 읽는 것은 같은 게 아니다. 어떤 언어가 어떤 문법을 따라 작동하는지 배우는 것으로는 그 언어를 배울 수 없다. 2. 충분치 못한 기술책으로 학습을 시작하는 사람이 많다. 그렇지만 책은 비싸기고 하고 펼치는 순간 질려버리기 쉽다. 책으로 하는 언어 학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심어 주신 언어 학습법으로는 알맞지 않다. 언어를 배우는 최선의 길은 그 언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를 가르치는 사람이 직접 보여주는 것이다. 그 언어로 말하는 걸 귀로 듣고, 그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을 눈으로 보고, 그 언어에 몰입하고 연습하면서 그 언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마음으로 느낄 때, 비로소 그 언어를 배우게 되는 것이다. 더구나 책은 구술 문화보다 문어 문화에 어울린다. 이 점이 중요한 것은, 세계 기독교 인구의 대다수는 책으로 언어를 배우는 데 익숙한 문화권에 속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세계 문화의 70퍼센트는 구술 문화다. 그리고 미국도 급속도로 구술 문화로 전환하고 있다. 3. 비용몰입형 언어 학습은 평균적인 그리스도인에게는 너무 비싼 편이다. 책이나 온라인 강좌를 들을 여유가 없는 나라에 사는 이들도 많다. 이들에게 몰입형 학습은 두 말할 필요도 없다. 부유한 미국인들도 돈을 들여서까지 비싼 몰입 교육을 받는 것은 부담스러워한다. 바람직한 방식그러나 저렴한 비디오 기술과 유튜브 같은 플랫폼이 출현하면서 이제는 성경 언어를 배울 수 있는 학습 자료가 훨씬 많아졌다. Rob Plummer’s Daily Dose of Greek나 Zondervan이 제공하는 무료 성경 언어 학습 자료 같은 것을 예로 들 수 있다. 이런 학습 자료(고전적인 학습 모델을 따르는 경우가 많다)만 있는 것도 아니다, 아내와 나는 지난 2년 동안 성경 히브리어 무료 몰입형 학습 방식을 개발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우리 교육은 교과서가 필요하지 않으며, 단일 언어(히브리어)로 학습을 진행하므로 어떤 언어 배경을 가진 사람이라도 번역할 필요 없이 배울 수 있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는 학습법을 따르기 때문에 학습자들이 아이들처럼 배운다. 학습자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지 다운로드하고 공유하고 재생할 수 있는 영상 자료도 제공한다. 우리가 이런 자료를 나눠주는 건 누구나 배울 수 있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내가 ‘누구나’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를 배우는 것은, 누구에게는 있지만 누구에게는 없는 가르침의 은사와는 다르다는 뜻이다. 운동에 타고난 소질이 있는 사람과 책 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차이 같은 건 언어를 배우는 데는 적용되지 않는다. 우리 모두 어릴 때부터 언어를 배울 수 있도록 지음 받았다.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는 그냥 언어다. 성경의 언어이기 때문에 영어나 중국어보다 더 어려운 그런 언어가 아니다. 그리스어나 히브리어는 평범한 사람이 손댈 수 없는 언어라는 사고방식이 다방면에서 주입되어 있다. 이제 이런 정서를 바꿔야 할 때다. 새로운 기술, 새로운 학습법, 그리고 무료 자료를 활용하여, 우리는 경기장을 평평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지식을 민주화할 수 있다.원제: Could Learning Hebrew and Greek Be Normal for Christia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성경언어
성경원어
히브리어
그리스어
헬라어
성도의 견인: 후순위 교리인가 기초 교리인가?
by Jeff Robinson
2022-06-06
그 사람이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라고 말했을 때, 나는 의심스러웠다. 분명 그 집에 뭔가 숨기는 게 있거나 아니면 영화 ‘대부’로부터 너무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한 “제안”은 켄터키 주 루이빌의 가장 좋은 지역에 있는 집에 붙은 아주 싼 가격이었다. 이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나는 절대 이런 거래에 속지 않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왜 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가격을 제시했는지 알게 되었다. 집의 골조가 아예 깨어져 있었다. 벽이 갈라지고 결국 집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뻔한 소리지만, 이런 숨겨진 문제가 있는 집을 나는 그 즉시 거절했다. 기독교 신학도 집과 비슷하다. 삼위일체, 성육신, 성경의 권위,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등 기본적인 교리 중 어느 하나라도 제거한다면, 우리가 쌓는 믿음의 건축 전체가 무너진다. 기독교의 기본 교리는 다 같이 서거나 아니면 함께 무너진다. 기독교의 핵심에 있어야 할 중요한 교리 하나가 “착한 사람은 동의하지 않는” 교리로 격하된 현실에 관해서 이야기하려고 한다. 바로 성도의 견인 교리이다. 왜 그럴까? 종종 “영원한 보증”이라고 불리는 이 견인 교리를 거부하면 이단이 되는 걸까? 나는 성도의 견인 교리를 거부한다고 해서, 그러니까 진정한 그리스도인조차도 얼마든지 배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그 사람을 이단이라고 부를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 교리를 거부하는 건 단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엄청나게 큰 위험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거의 살 뻔했던 그 엉터리 집처럼, 견인 교리의 거부는 그 교리를 기초로 하는 다른 많은 중요한 교리까지도 불안정하게 만든다.진짜 신자가 구원을 잃고 영원히 버림받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로 인해 발생할 다음과 같은 피해까지 고려해야 한다. 선택/예정.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 백성을 택하셨는데도, 그 백성이 스스로 “그 선택을 취소”하는 게 가능할까? 선택 교리에 대한 다양한 견해와 상관없이, 결론적으로 궁극적인 배도가 가능하다면, 그건 자신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을 말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게 아닐까? 대속. 마가복음 10:45에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의 목숨을 내주셨다.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하시려고 예수님은 우리가 받아야 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짊어지셨다. 그런데 그렇게 대속한 사람을 궁극적으로 잃을 수 있다면, 예수님이 지불한 값이 영원한 구원을 이루기에는 충분하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따라서 궁극적인 배도가 가능하다면, 그건 예수님이 치르신 속죄를 약화시키는 게 아닐까? 그러니까 한때는 그리스도가 흘린 속죄의 피로 덮였던 사람이 자유 의지를 행사해서 그 피가 더 이상 자신의 죄를 덮지 않도록 하는 게 가능하다면, 그래서 다시 한 번 하나님의 정죄 아래로 떨어질 수 있다면 말이다.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음.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더 이상 하나님 앞에서 죄가 없다는 법적 선언을 받는 게 바로 칭의이다. 그런데 궁극적인 배도가 가능하다면, 하나님의 평결을 훼손하고, 이전에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면죄되었던 사람에게 판결을 번복하고 유죄를 확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견해는 오직 믿음(sola fide)이라는 종교 개혁의 근본 진리를 왜곡한다. 성령의 내주 (또는 인침). 에베소서 1:13-14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속량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 하심이라.” 궁극적 배도가 가능하다면, 구원을 보장하는 일종의 계약금과 같은 우리 속에 내재하는 성령에 대한 바울의 가르침은 약화된다. 날려버리는 계약금과 마찬가지로, 구원도 잃어버릴 수 있다면 성령의 인치심도 별 의미가 없다.하나님의 약속. 요한복음 10장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듣는다.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른다.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다. 또한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다. … 아무도 그들을 내 아버지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 또한 빌립보서 1:6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 안에서 시작하시는 일을 끝까지 이루실 것이라고 약속하고, 로마서 8:31-39의 영광스러운 구절은 그 어떤 것도 신자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에서 우리 자신을 제거하거나 또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시작하신 일을 얼마든지 피해서 갈 수 있다면, 이런 약속이 과연 무슨 위로가 되겠는가? 이 약속이 다 사실이 아니라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 자체를 훼손하는 것이 아닌가? 스스로의 선택으로 하나님의 약속마저 깰 수 있는 인간에게 아무런 능력도 행사하지 못하는 무능한 하나님을 당신은 신뢰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 히브리서와 로마서 8장이 주장하고 요한복음 17장과 누가복음 22장에서 알 수 있듯이,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열심히 중보하신다면, 그런데도 그의 기도가 아무런 힘이 없다면, 도대체 그런 예수님의 기도를 어떻게 신뢰할 수 있을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요한복음 17장에서 하신 것처럼, 우리를 지켜주시기 위해서 기도하시지만 그 기도가 좌절된다면, 그 사실은 그의 중보 사역은 말할 것도 없고 그의 무오하심마저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오늘도 열심히 기도하는 예수님은 제발 자신의 기도가 이뤄져서 우리가 계속 믿음 안에 머물기를 희망하고 있다는 말이 아닌가? 성도의 견인. 견인과 뗄 수 없는 게 바로 인내이다. 베드로전서 1:3-5에는 구속받은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보존하시는 은혜를 묘사하는 아름다운 약속이 들어 있다.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너희는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받았느니라.” 만일 하나님이 하늘에서 우리의 기업을 보호하고 계시다면, 자유 의지가 우리의 구원을 잃게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베드로가 말하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라는 약속을 공허하게 만들 뿐 아니라 인간의 능력을 높이고 하나님의 능력을 폄하하는 것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인간이 하나님의 약속을 얼마든지 훼손할 수 있다면, 베드로 사도의 이 약속은 공허하게 울리는 징과 다를 바 없다. 견인 교리를 부정할 때 따라오는 부차적인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다. 하지만 이 교리가 부정될 때 기독교 신학에 얼마나 큰 타격이 발생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 가장 파괴적인 결과를 일으키는 몇 가지만 제시했다. 지금까지의 내 추론이 완전히 성경적이라면, 성도의 견인은 결코 후순위 교리로 사소하게 다뤄져서는 안 된다. 무너진 기초 위에 어떻게 건물이 제대로 설 수 있겠는가?원제: Perseverance of the Saints: Tertiary or Foundation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성도의견인
예정
선택
대속
칭의
하나님의약속
그리스도의중보
성령의내주
영원한보증
‘아바’는 ‘아빠’가 아니다
by Justin Taylor
2022-06-03
로마서 8:15과 갈라디아서 4:6에 나오는 아람어 아바(Abba)는 성부 하나님을 공손하고 친밀하게 “아빠”(Daddy)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그런데 우리 시대 헬라어 대가인 신약학자 머레이 해리스는 그렇지 않다고 주장한다. 머레이 해리스의 책 Navigating Tough Texts: A Guide to Problem Passages in the New Testament(신약 난해 본문 탐구)의 일부를 아래와 같이 간추렸다. 탈무드를 비롯한 유대 문헌들에 “아이가 밀 죽을 먹을 때가 되면 (곧 젖을 뗄 때가 되면), 아바(’abba)와 임마(’imma)(=우리의 “아빠”(dada)와 “엄마”(mama))라는 말을 배운다”는 표현(바빌로니아 탈무드 Barakot 40a)이 나오는 건 사실이다. 그렇지만, ‘아바’가 유아어에서 시작된 말이었다 하더라도, 예수 시대에 이 말은 성인이 통상 사용하는, “아버지”를 의미하는 단어였다. 말하자면, ‘아바’는 “아빠”에 해당하는 유아 언어가 아니었다. ‘아바’는 성인 자녀가 아버지를 이를 때 통상적으로 사용한 예의바르고 진지한 용어였으며, 그러면서도 또한 입말(口語)이며 친숙한 용어였다. 어린아이의 신뢰와 순종의 의미를 담고 있는 이 가족적인 단어에는 단순함, 친밀함, 안정감, 애정의 관념이 붙어 있다. 그래서 그 단어에 들어 있는 따뜻하고 친밀한 느낌을 끌어내려면 우리는 이 말을 “사랑하는 아버지”로 의역하는 게 적절할 것이다. 바울이 “아빠”라는 의미를 전달하고 싶었다면, 틀림없이 그가 알고 있던 그리스어 파파스(papas)나 팝파스(pappas)를 사용했을 것이다. 이 단어야말로 아버지를 이르는 아이들의 언어 “파파”(papa)나 “대디”(daddy)를 의미한다. ‘아바’를 “아빠”로 번역하면 부적절한 이유는 네 가지가 더 있다. 첫째, ‘아바’는 신약 성경 세 군데(마가복음 14:36; 로마서 8:15; 갈라디아서 4:6)에 등장하는데, 여기서 이 단어는 “아버지”(헬라어 호칭 “호 파테르”)로 번역되어 있다. 둘째, 예수님이 직접 제자들에게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pater hemon)라 부르라고 가르치셨다(마 6:9). 셋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기도 17편 모두 “아버지”(모두 아람어 ‘아바’를 헬라어로 옮긴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로 시작한다. 넷째, 나이가 많든 어리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주 하나님, 창조주, 만물의 주재를 이를 때 사용하기에는 이 영어식 표현은 지나치게 가볍고 버릇없다. 하나님에게 부적절한 친밀감을 나타낸 그리스도인이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을 수도 있다. “사람을 겉모양으로 판단하지 않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여러분이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으니, 여러분은 나그네 삶을 사는 동안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가십시오”(벧전 1:17).말하자면, 주님의 기도에서 하나님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로 부른다는 것은 곧 모든 사람의 전지전능하시고 불편부당하신 대주재이신 하나님께 나아갈 때 우리는 마치 하나님이 평범한 “아빠”인양 생각해서는 안 되며 경외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원제: Why “Abba” Does Not Mean “Dadd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아바
아빠
하나님아버지
성부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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