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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카운트다운을 무시하지 말라
지옥 교리를 선포해야 하는 이유
by Bradley Bell
2023-10-25
어렵지만 아름다운 교리(Difficult but Beautiful Doctrines)탈 기독교 시대에 접어든 현대인이 받아들이기 어려워하는 신학적 진리의 깊은 의미와 필요성을 느끼고자 하는 시리즈입니다. “죽기 30초 전.”이것은 판타지 작가 브랜던 샌더슨이 피할 수 없는 일을 불길하게 예시하는, 등장인물이 죽기 전의 생각과 감정에 대해서 통찰력을 제공하는 방식이다. 당신은 어쩌면 판타지 소설이 주는 불멸의 매력을 찾는 독자에게 이런 식의 표현이 너무 끔찍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샌더스의 Stormlight Archive 시리즈에 매혹된 수백만 명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말을 바라보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인간 영혼에 깊은 의미를 던진다. 나는 누구라도 이와 비슷하게 죽음 직전의 글을 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마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그 사람의 남은 수명에 대해 당신의 귀에 속삭인다고 상상해 보라. 정말로 기이하고 끔찍한 지식이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당신이 그 사람과 맺으려는 관계의 방식을 근본부터 바꿀 것이다. 엄중한 현실은 차원이 다른 긴급성을 불러일으킨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환상 그 이상이다. 우리는 모두 죽음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역사적기독교 신앙을 고수하는 사람들로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과는 별개로 지옥, 즉 악인들이 의식적으로 영원히 고통당하는 실제 장소가 무자비한 입을 벌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음을 알고 있다. 시간이 없다. 지금이 소중하다. 그들이 모르는 지식을 안다는 이 짐은 얼마나 무거운 책임감을 주는가? 선교사의 짐아마도 선교사만큼 그 무게를 감당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요삼 1:7) 나가는 사람들이다. 예수라는 이름은 “천하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할 만한 유일한 이름” (행 4:12)이다. 그들의 목적은 “다른 사람들을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는 것이다(유 1:23). 많은 선교사가 그들의 부르심 뒤에 숨은 중심 동기가 다른 게 아니라 복음을 모르는 사람들이 지옥에 가는 비극을 막기 위해서라는 사실을 즉시 인정한다. 선교사의 삶과 소명이 가진 부담은 지옥이라는 엄연한 현실을 바라보는 것, 다시 말해서 죽음이 얼마 남았는지 알려주는 내레이터의 차가운 목소리를 듣는 것이다. 나는 이 모든 과정을 겪어봐서 잘 안다. 동아프리카 선교사로서 우리는 종종 먼 거리를 운전하며 가는 길에 보이는 마을을 위해서 기도하곤 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장소에 멈췄는지, 우리로 인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동안 수백 곳에서 수천 명을 만났다. 그렇다. 나는 새로운 신자들을 보고 기뻐한다. 그러나 그럴 때조차도 아직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에 대한 뼈아픈 인식이 내 머리를 떠난 적이 없다. 저녁에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동네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누군가가 막 죽었다는 의미였다. 죽은 사람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 봤을까? 최근에 내가 시장에서 대화를 나눈 사람일까? 내가 복음을 전한 사람일까? 이것은 마치 비명을 지르듯 세레나데를 부르는 청년처럼 내게 쏟아지는 나 자신을 정죄하는 질문이다. 그러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죽음이라는 장막 바로 너머에 영원히 기다리고 있음을 한 번 더 나로 하여금 깨닫게 한다. 선교사가 받는 유혹이런 부담과 함께 따라오는 유혹이 있다. 지옥의 교리를 잠시 제쳐두면 어떨까? 그건 전혀 어렵지 않다. 쉬운 방법이 여러 가지 있으니까. 하나님의 구원이 궁극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확장될 것이라고 믿는 보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영원한 저주는 불필요하며 성경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믿지 않는 사람은 죽는 즉시 바로 사라지거나 지옥에서 잠시 고통은 받겠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아예 없어진다는 영혼 소멸론(annihilationism)도 나름 좋은 방식이다. 이 견해에 따르면 불신자는 아예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기에 영원한 심판의 장소인 지옥도 함께 사라진다. 그러나 지옥을 제쳐두는 가장 쉬운 방법은 아예 거기에 관해서 생각 자체를 하지 않는 것이다. 믿음이 남았다고 해도 부담은 없다. 영혼에 대한 긴급성은 함께 줄어든다. 한때 선교사를 감동시켰던 지옥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이제 무관심을 불러일으킬 뿐이다. 밤에 들리는 통곡 소리, 사방에 쌓인 장작더미, 죽음이 31초 남았던 이웃을 보면서 느꼈던 감정은 동정이 부른 피로감 또는 문화 충격이라고 치부하면 된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에 관한 걱정과 부담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이런 식의 포기를 어떤 사람은 “사랑이 이긴다”라고 표현한다. 밀라드 에릭슨이 관찰한 바와 같이, “영원한 형벌의 교리는 일부 사람들에게는 시대에 뒤떨어지거나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보이며 종종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먼저 비신화화되는 주제의 하나이다.” 그러면 왜 선교사는 그 주제가 가져다주는 끊임없는 고뇌를 고집해야 하는 걸까? 에릭슨이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지옥의 교리를 고려해야 한다. … 왜냐하면 그건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지적으로나 감정적으로 지옥의 교리를 포기한 선교사가 갑자기 더 자유로워지고 더 도덕적인 선교사가 되는 건 아니다. 교리의 상실은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온다. 더욱더 제한된 신앙과 협소한 사역이다. 선교사의 확신성경 속 지옥에 관한 가장 분명한 말씀은 예수님에게서 직접 나온다.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님은 세상 종말에 관한 긴 설교를 한다. 물론 사역 내내 그의 가르침 대부분이 의인의 구원과 악인의 정죄를 암시한다. 하지만 이 장에서 그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울며 이를 갈며”(마 24:51; 25:30)라는 문구를 반복한 후, 그는 그러한 고통이 일어나는 최후의 심판을 묘사한다. 의로운 “양”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해 예비하신 나라로 맞아들일 것이며, 저주받은 “염소”는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갈 것이다 (마25:33, 41). 이런 심판의 범위를 반복하면서 예수님은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마 25:46)라고 결론 내린다. 마태복음 25장이 그리는 지옥의 모습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지옥이라는 이 중요한 교리가 단지 한 장의 성경 말씀에 기초해서 세워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마가복음에서 지옥이 “꺼지지 않는 불”(막 9:43)이며 “그들의 벌레가 죽지 않는 곳”(막 9:48)으로 묘사된 것을 본다. 누가는 부자와 나사로에 관한 예수의 비유를 인용하는데, 여기서 예수님은 죽은 다음에 부자가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이렇게 외치고 있다고 분명하게 말씀했다. “나는 이 불 속에서 몹시 고통을 당하고 있습니다”(눅 16:23-24). 요한계시록은 또한 끝없는 고통의 연기가 나고 유황이 많고 바닥이 없는 구덩이에 대해 반복해서 언급한다(계 9:1-2, 11; 14:9-11; 19:3; 21:8).우리는 이 모든 사실을 고려할 때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지옥에 관해서 성경은 그 어떤 여지도 주지 않을 정도로 분명하다. 카운트다운을 향한 위로지옥에 관한 너무나도 분명한 성경의 가르침 때문에 선교사는 이 교리가 가진 진리뿐 아니라 그 선함에 대해서도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의식적으로 영원한 고통을 겪는다는 이 교리의 어떤 점이 좋을 수 있을까? 이 교리가 영혼의 교화에 도움을 주는가? 사역에 어떤 열매를 맺게 하는가?다음부터 밤에 통곡 소리가 들리거나 내레이터가 속삭일 때 이 교리가 주는 다음과 같은 아름다운 유익을 기억하라. 3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유대 민족 가운데 잃어버린 그의 친족을 생각하며 바울이 “나에게는 큰 슬픔이 있고, 내 마음에는 끊임없는 고통이 있습니다”(롬 9:2)라고 썼을 때, 그가 지옥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바가 없다. 그러나 지옥이 사실이고 영원한 심판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이 신뢰할 만하다면, 그분의 자비에 대한 말씀도 우리는 얼마든지 신뢰할 수 있다.성경의 신뢰성을 확신하는 것보다 선교사의 사역에 유익을 주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합니다”(고후 4:5).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가? 기록된 말씀을 통한 살아 있는 말씀이다. 지옥의 짐이 엄습할 때, 선교사는 지옥이 실제로 존재하며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는 데에 이르기를 바라십니다”(벧후 3:9)라는 말씀 안에서 안식을 취할 수 있다.2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 지옥 교리에 반대하는 가장 강력한 주장의 하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훼손한다는 점이다. 사랑이 많으신 하나님께서 일시적인 인간의 악에 대해서 어떻게 영원한 심판을 행하실 수 있다는 건가? 선교사는 웨인 그루뎀의 말을 기억해야 한다. “처벌받지 않은 채 남아 있는 악은 하나님의 영광을 훼손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이 악을 징벌하시고 악을 이기실 때 그의 공의와 의와 모든 대적을 이기시는 능력의 영광이 나타난다.” 겸손하게 복음을 전하고 또 겸손하게 지옥에 대해서 경고하는 선교사는 하나님이 영광스러우시며 공의로우시고 또 전능하신 분이심을 선포하는 것이다. 아무리 복음을 전한다고 해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영광이 드러나지 않는다면, 그건 듣는 이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런 복음은 지옥 불의 위험에 처한 사람을 조금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 20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신뢰를 키운다.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개혁주의에 대한 나의 확신은 선교 현장에서 탄생했다. 어느 날, 우리 팀장이 나를 산꼭대기의 탁 트인 전망 앞으로 데려갔다. 접근할 수 없는 마을이 수 마일에 걸쳐 수천 개의 양철 지붕의 모습으로 반짝였다. 그날 밤, 나는 그만 모든 걸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비행기 표를 살 뻔했다. 그렇게 먼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일이 오로지 나의 힘에 달려 있었다면, 나는 절망에 빠져 그만두었을 것이다.감사하게도 나는 당시 로마서를 읽고 있었고,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긍휼히 여기시고자 하는 사람을 긍휼히 여기시고, 완악하게 하시고자 하는 사람을 완악하게 하십니다”(롬 9:18)라는 바울의 선언을 접했다. 하나님의 주권적인 영혼의 선택이 나를 선교 현장에 머물게 한 위로가 되었다. 나는 하나님의 작업에 참여하고 있었던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었다. 그 자유로움은 지금까지도 나에게 안식을 준다. 15초 전… 지옥은 전도에 동기를 부여한다.내가 말하는 안식은 선도 활동에서 한 발 떨어진 안식이 아니라 내 영혼을 위한 안식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이 주는 힘으로 우리는 더욱더 노력한다(히 4:11). 이것이 어쩌면 지옥 교리가 주는 가장 분명한 이로움일 수도 있다. 지옥이 실재하고 당신이 만나는 모든 사람이 몇 초 후에 죽는다면, 선교사는 복음을 가지고 나가야 한다. 바울의 긴박감을 들어보자.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믿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부를 수 있겠습니까? 또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보내심을 받지 않았는데,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걸음이 얼마나 아름다우냐!” 한 것과 같습니다. (롬 10:14-15)이 얼마나 대단한 동기 부여인가!10 초 전…. 지옥은 우리로 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숨이 막히게 한다.나는 목회자로서 누군가에게 지옥 교리를 묵상하라고 권한 적이 없다. 그러나 나는 지옥의 중요성과 분명히 일치하는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교리만은 깊이 성찰할 것을 촉구했다. 구약과 신약은 하나 같이 하늘의 휘장이 열렸을 때,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여호와여” (사 6:3, 계 4:8) 외치는 피조물을 묘사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모든 악으로부터 완전히 구별되셨다는 뜻이다. 오로지 자신의 영광을 추구하고 그 영광을 훼손하는 모든 것에 반대하시는 하나님은 옳으시다. 의식적인 고통을 영원히 겪는 지옥을 항상 생각하는 선교사는 당연히 무서울 수밖에 없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는 곳에서(살후 1:9) 오로지 하나님의 진노만이 있는 지옥에서(계 14:10) 영혼이 영원히 슬퍼하는 것이 정말로 필요한가?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서 그렇다. 지옥은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척도일 수 있다. 시편 기자와 함께 선교사도 얼마든지 감동에 차서 “우리 하나님은 거룩하시도다!” 소리쳐야 한다(시 99:9).5초 전… 지옥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한다. 선교사로 사역하는 것은 힘들다. 수백만 명의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가운데 소수의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특권이지만, 동시에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있음을 의미한다. 선교사가 인내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 잠기는 것이다. 지옥이 우리에게 하나님의 거룩함의 높이를 드러낸다면, 그것은 또한 그분의 자비의 깊이에 대한 기념비도 제공한다. 감사는 어려운 시기에 위안이 된다.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길 바라신다(요 15:11). 우리가 지옥(자비)을 피하고 영생(은혜)을 상속받도록, 실로 놀라운 사랑으로 선택되었음을 기억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 마음에 얼마나 큰 감사와 기쁨을 주시는가.결국, 선교사 자신도 몇 초 후면 죽는다. 차가운 내레이터가 언제 내가 죽을지 내 귀에 속삭이게 하라.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로 선교사의 미래는 지옥이 아니다. 오직 천국만이 있고 그다음에는 새로운 창조가 있을 뿐이다. 이것이야말로 왕의 길이다. 오로지 하나님께 감사한다!원제: Don’t Ignore the Countdown to Damnation: Why Missionaries Need a Doctrine of Hel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어린이 질문: 하늘에 계신 예수님이 어떻게 우리와 여기 함...
by Brandon D. Smith
2023-10-20
어린이 질문(Kids Ask): 목사, 성경 교사 및 신학자가 성경에 관한 어린이들의 질문에 답하다 질문이 많은 어린이는 때때로 하나님에 관해서 중요한 질문을 한다. 최근에 나온 질문 중 하나이다. “하나님은 어떻게 모든 곳에 동시에 계실 수 있지요?” “하나님이 어디에나 계신다면, 그럼 지금 제 코와 입 안에도 계시나요? 많은 사람과 동시에 함께 계시는 게 어떻게 가능하죠? 그러기에는 세상에 사람들이 무척 많은데요!”어떻게 답변하면 좋을까? 아이들에게는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우리에게는 함께하시는 예수님이 필요하다누구나 예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사실을 알고 싶어 한다. 천둥 번개로 무섭거나 멀리 이사 간 친구로 슬퍼할 때, 우리는 예수님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싶어 한다. 우리는 예수님이 나를 돌봐주길 원한다. 이건 좋은 바램이다. 예수님은 누구보다 우리를 사랑하며, 누구보다 우리를 잘 돌봐주실 능력이 있으시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믿는 것은 어려울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신 다음에 하늘로 올라갔기 때문이다. 성경은 예수님이 지금 하늘에 계시며 그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또 그의 백성을 위해 기도하고 계신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늘에 계신 분이 동시에 땅에서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오랜 옛날, 예수님의 제자들도 같은 질문을 던졌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하늘로 가실 것이라고 말했다. 제자들은 하나같이 성인이었지만, 예수님이 함께 있지 않을 때 만날 어려운 일을 어떻게 견뎌야 할지 걱정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떠날 것을 생각하면 그들이 슬퍼했다고 기록되어 있다(요 16:6). 그들은 예수님이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고 돌봐주시며 심지어 하늘에 올라가시고도 그들 가까이에 계실 것을 확신하길 원했다.예수님은 제자들이 걱정하는 걸 원하지 않으셨고, 그래서 “돕는 자” 곧 예수님을 돕는 이를 그들에게 보내시겠다고 말씀하셨다(7절).예수님은 누구인가? 돕는 자가 누구인지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사람이다. 두 명의 예수님이 아니라 한 명의 예수님이다. 그 한 명이 하나님이면서 또 사람이다. 어떻게 동시에 하나님과 인간이 될 수 있을까? 불가능하게 들리겠지만, 하나님에게는 불가능이 없다!성경은 하나님은 세 가지 형태로, 즉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아들(예수라고 불림), 그리고 하나님 성령으로 존재한다고 가르친다. 세 분의 하나님인가? 아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그는 세 가지 형태로 존재하신다. 이것은 혼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이해하지 못해도 우리는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믿을 수 있다.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처럼 우리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 그리고 인간이기도 하기에 우리가 용서받을 수 있도록 완벽한 삶을 살고 완벽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그리고 예수님은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이기 때문에 이 큰 질문에 답할 수 있도록 우리를 도와줄 수 있다. 예수님은 어떻게 하늘에 계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을까? 이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우리와 함께하실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넘치시는예수님은 하나님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성경은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더 크고 강력하다고 말한다. 그 무엇도 하나님을 한곳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강아지처럼 줄에 묶어둘 수 없다. 하나님을 물고기처럼 어항에 가둘 수 없다. 하나님을 레슬링 경기에서 상대에게 하듯 매트에 누르고 못 움직이게 할 수 없다. 심지어 세계에서 가장 큰 바다조차도 하나님을 가두지 못한다!하나님은 너무나 강력하시기에 어디서든 언제든 원하는 곳에 계실 수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이 그의 백성과 함께 있었던 많은 이야기가 있다. 그분은 불타는 덤불에서 모세를 만났다. 그분은 또한 모세와 산에서 만났다. 하나님은 이집트에서 해방시킨 그의 백성을 광야에서 길고 긴 유랑 생활을 하도록 했다. 그분은 심지어 그들과 성전(구약의 하나님 백성들이 예배를 드리러 오던 건물)에서도 함께 계신다.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그 무엇도 그를 억제할 수 없다.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곳은 우주 전체를 통틀어서도 찾을 수 없다. 그분은 너무나 강력해서 언제 어디서든 우리와 함께 계실 수 있다.돕는 자를 보내주시기에 충분할 정도로 친절하신예수님은 인간인가? 그렇다, 예수님은 인간이다.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한 완벽한 인간이다.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서 십자가에서 완벽한 속죄의 죽음을 치르셨다. 그런 다음에 그분은 죄와 사망을 이기기 위해 무덤에서 다시 일어났다. 그리고 성경은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주의 왕으로서 하나님과 함께하기 위해서 하늘로 올라가셨다고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이제 우리로부터 멀리 떠난 걸까? 아니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시며 하나님은 항상 성령을 통해 우리와 함께 계신다. 바로 하나님 성령이 바로 예수님이 약속한 돕는 자이다. 이것이 처음에는 좋은 소식처럼 느껴지지 않을 수도 있다. 우리는 예수님이 여전히 지구에 계시면서 우리가 아프거나 슬플 때 곁에 오시길 바란다. 우리 집에서 얼굴을 마주 보며 얘기하기를 원한다. 그게 바로 제자들이 바랬던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가 하늘로 가시고 성령이 오시는 게 그들에게 더 나을 것이라고 말했다(요 16:7).왜냐하면 예수님이 지구에 계실 때는 한 번에 단지 몇몇 사람들하고만 가깝게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의 영을 보내준 뒤로, 예수님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과 가까이 계신다. 성령님이 오셨기에, 예수님은 이제 사람들에게 그들의 죄를 보여주고, 그들의 영을 살려서 예수님을 믿도록 돕는다(8-11절). 그리고 성령님을 소유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모든 것을 기억하고 이해하며 나아가서 우리가 어떻게 해야 예수님을 더 사랑하고 따를 수 있는지까지도 알 수 있다(13-15절).성경은 또한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이 우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를 대신해서 하나님 아버지에게 기도한다고 말한다(롬 8:26-27).그렇다! 예수님은 우리와 함께하신다.또 다른 예수님의 제자인 마리아 막달라는 예수님이 부활한 직후에 예수님을 보았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본 그녀는 무척 행복했고 그를 감싸 안아서 다시는 떠나지 못 하게 하려고 했다.그러나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자신을 그녀 곁에 두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그것은 이기적이고, 마리아 막달라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었다. 대신에 예수님은 앞으로 그가 전보다 더 그녀와 또 예수님을 믿는 모든 이와 가까이 있을 것이라고, 그리고 세상 모든 사람이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예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을 알 것이라고 말했다(요 20:17).예수님은 돕는 자를 보내셨기에 하나님은 이제 항상 그의 백성과 함께하신다. 이것은 좋은 소식이다! 예수님이 바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너무 멀리 있어서 당신을 못 보거나 기도를 듣지 못할까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예수님이 다른 사람과 대화를 끝날 때까지 기다릴 필요도 없이 당신은 언제나 예수님께 대화를 요청할 수 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예수님은 성령님을 돕는 자로 보내셨다. 예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하신다! 예수님은 재림하는 그날까지 우리와 함께하실 것을 약속하셨다(요 17:24; 마 28:20).원제: Kids Ask: How Can Jesus Be in Heaven and with U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믿음의 출현
by 박혜영
2023-10-06
“만일 너희가 굳게 믿지 아니하면 너희는 굳게 서지 못하리라”(사 7:9). 믿는 자란 서 있는 자이며, 흔들리지 않는 자입니다. 믿음은 계속 서 있는 것입니다. 여기선 믿는 자의 의지와 태도를 강조하는 느낌입니다. 분명 그렇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의지와 버티는 태도가 ‘믿음’의 전부는 아닙니다. 처음에 서 있게 된 이유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지만, ‘당신은 처음 어떻게 서 있게 되었습니까?’ 그 질문도 중요합니다.“아브람[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창 15:6)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본문의 중요성은 “믿음에 대하여 성경이 명백하게 언급하는 최초의 것”(게할더스 보스)이라는 사실에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서 11장은 아브라함 전에 이미 아벨, 에녹, 노아를 믿음의 인물로 소개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창세기는 그들이 등장하는 본문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키지 않다가, 15장 6절에서 비로소 처음 등장시켰습니다. 아브라함을 통해서 믿음의 출현을 “명백하게” 소개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게 된 이유입니다.그렇다면 아브라함의 믿음은 어떻게 시작된 것일까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그냥 믿은 것일까요? 무조건 믿었을까요? “믿으니”라는 말은 히브리어 ‘아만’ 동사의 ‘히필’ 형태입니다. 히브리어 ‘아만’에는 ‘충성, 성실, 진실’이라는 기본 의미가 있으며, 우리가 교회에서 많이 쓰는 ‘아멘’이 바로 이 히브리어 동사 ‘아만’의 파생어입니다. 그런데 이 ‘아만’ 동사가 ‘히필’ 형태로 되어 있다는 게 중요합니다. 이는 ‘능동사역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원인이 제공되었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아만’의 히필 형태가 두 번 더 나오는데 이렇습니다. “너희 말째 아우를 데리고 오라. 그리하면 너희 말이 진실함이 되고”(창 42:20), “야곱이 그들을 믿지 아니하므로 기색하더니”(창 45:26). 믿기 위해서는 저쪽에서 뭔가 신실함을 제공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평소에 믿음직스럽지 못했기 때문에 아비 야곱을 믿게 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중요한 특징은 무조건 믿는 게 아니라, 어떤 소식이 나에게 와서 ‘진실함’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이 점은 히브리어 문법 형태로 한 번 더 강조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보여주기 위하여 히브리어 “여호와”에 ‘어디에서’라는 의미를 담은 히브리어 전치사 ‘베’가 붙어 있습니다. “그 전치사는 이 확신이 생겨난 곳이 다름 아닌 인격적 여호와임을 가르치는 것”이라고 게할더스 보스는 설명합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 믿거나 열심히 믿기 전에 이 믿음을 촉발하는 어떤 인물이나 사건이 먼저 있어야 한다고. 아브라함의 경우 “아브람이 하나님을 믿으니”라는 말이 나오기 전, 먼저 하나님에게서 ‘믿음’이 아브라함에게 와야 했습니다. 이것이 ‘믿음’이란 말이 아브라함이 처음 등장하는 창세기 12장이 아니라, 15장에 가서야 나오는 이유입니다. 하나님은 12-14장까지 아브라함에게 ‘믿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믿기 전에 먼저 ‘믿음’이 와야 합니다(참고. 갈 3:23, 25).이렇게 성경이 말하는 믿음에는 하나님이 먼저 주도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그걸 알았습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인자와 성실을 끊이지 아니하셨사오니…”(창 24:27).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성실하게 대하셨기 때문에, 그걸 보는 종에게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생긴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본 것을 말하였지, 그저 믿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또한 야곱도 이런 말을 합니다. “나는 주께서 주의 종에게 베푸신 모든 은총과 모든 진리[성실]를 조금이라도 감당할 수 없사오니…”(창 32:10). 아브라함의 믿음이 등장하기 전,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믿음직스러운 분임을 보이셔야 했습니다. 이에 대해 아브라함은 ‘아멘’으로 응답하였으며, ‘믿음직스러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우리에게 그러한 ‘아멘’의 반응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성실과 진정으로 그를 섬길 것이라”(수 24:14). 그렇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자기가 믿는 대상을 향한 “성실과 진정”이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모든 사람은 다 그렇게 합니다.
전능자에 대한 좌절과 감격
by 전재훈
2023-10-02
출애굽기 6:3에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그런데 이 단어에는 관주가 붙어있어요. 히브리어로 ‘엘샤다이’라는 설명입니다. 즉 전능의 하나님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던 ‘엘로힘’이 아니라는 거예요. ‘엘로힘’의 뜻은 전능자입니다. 이는 하나님을 지칭하는 용어이지요. 하지만 이 용어는 하나님이 자기 계시로 주시기보다 하나님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은 엘로힘이시다’라고 부른 것이지요. ‘엘’은 강한 자, 능력 있는 자를 뜻하는 말이고, ‘엘로힘’은 ‘엘’의 장엄복수형으로 ‘가장 강한 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부른 것은 당시는 신들이 각자의 고유영역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다신론이 지배적이던 때였습니다. 신들은 자신의 지역이 있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특정 영역이 있습니다. 풍요를 다스리는 ‘바알’과 다산을 상징하는 ‘아세라’가 대표적이지요. 우리 개념으로 하면 바다에는 ‘용왕’이 다스리고, 산에는 ‘산신령’이 임신과 출산에는 ‘삼신할매’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역을 넘어서서 어디에나 계시고 전쟁에도 능하시고 양식도 주시며 자녀의 복도 주시는 그야말로 멀티플레이어 신이었기에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신’의 개념으로 ‘엘로힘’이라 불렀던 것입니다. ‘엘샤다이’도 전능의 하나님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지만, 이 말은 ‘엘로힘’과 뜻이 조금 다릅니다. ‘엘샤다이’는 ‘뜻을 정하면 그 뜻을 100퍼센트 이룰 능력과 의지가 있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즉 무엇인가를 하고자 마음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그 일을 이루신다는 신의 주권적 의지가 강조된 표현입니다. 출애굽기 6장에서 ‘전능의 하나님’이라고 번역하고 관주에 ‘엘샤다이’라고 토를 달아 둔 것은 ‘전능의 하나님’을 ‘엘로힘’으로 알까 봐 더 정확하게 해 주느라고 관주를 단 것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속성상 3무(無)의 하나님이라고 합니다. ‘실수, 실패, 포기’가 없으신 하나님이라는 말이지요. 이 말은 ‘전지전능한 하나님’의 속성에 가장 잘 부합합니다. 왜냐하면 ‘실수, 실패, 포기’는 일을 할 때 생길 수 있는 변수를 알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일인데 반해, ‘전지’하신 하나님은 모든 변수까지도 알고 계시며 심지어 그 변수마저 통제하시는 ‘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엘로힘’과 달리 계시적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자신을 ‘엘샤다이’로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에게 ‘여호와’로 계시하신 것과 같습니다. ‘엘로힘’은 대부분 하나님을 지칭하기는 하나 부분적으로 다른 신을 의미할 때도 있습니다. 즉 고유명사가 아닌 일반명사로도 쓰인다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했던 말 중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라고 했었는데, 이때 사용된 단어가 엘로힘입니다. 하지만 ‘엘샤다이’는 고유명사로서 오직 ‘여호와’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전능하신 하나님이 다른 어떤 신이든 능력만 있으면 되는 신일 때는 ‘엘로힘’이지만 우리가 믿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의미할 때는 ‘엘샤다이’라는 것입니다. ‘엘샤다이’의 전능자는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제가 전능자에게 느끼는 좌절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자신이 뜻을 정하시면 그 어떤 경우에도 변치 않으시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기도한다 해도 하나님의 뜻이 바뀌지 않습니다. 제가 저를 포함 우리 가족 모두를 번제로 드린다 해도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바뀌지 않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께 드릴 수 있는 기도는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입니다. 혹은 그분의 뜻을 이루는데 저를 사용하실 수 있도록 내어 드리는 형태의 기도로 ‘제가 여기 있사오니 저를 써 주옵소서’ ‘주여 당신의 뜻을 내게 알리소서. 저를 통해 이 땅에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정도입니다. ‘엘로힘’은 기도할 때 참 편한 신입니다. 무엇이든 하실 수 있으니까 무엇이든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룰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매달리면 됩니다. 일천번제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든지, 40일 금식기도나 절벽에서 기도하듯이 하나님을 적당히 위협하면 됩니다. ‘엘로힘’은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우리의 정서와도 딱 맞아떨어집니다.‘엘로힘’에게는 예배도 무당의 굿판과 비슷하게 할 수 있습니다. 정성껏 굿을 준비하여 무당으로 하여금 춤추게 하고 나는 그 앞에서 손을 싹싹 빌기만 하면 귀신의 능력을 빌려와 다른 귀신도 내쫓고 질병도 고치고 액운도 다스릴 수 있게 됩니다. 예배도 정성껏 준비하여 바른 자세로 예물을 힘껏 준비하여 드리고 손을 모아 기도하면 목사님의 설교를 통해, 축복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을 수 있게 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은 모든 면에서 참 불편한 하나님입니다. 예배를 아무리 잘 드리고 헌금을 아무리 많이 하고 기도를 아무리 세게 해도 꿈쩍도 안 하시기 때문입니다. 이런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이 정해진 이상, 나는 아무리 애써도 질병과 가난과 고통과 시련과 아픔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는 ‘대중적 인기’ 혹은 ‘유명세’에서 엘로힘에게 엄첨 밀렸습니다. 교회가 섬기는 하나님은 엘샤다이가 아닌 엘로힘인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한국식 기도원에는 ‘엘샤다이’가 들어설 자리가 없습니다. 무조건 ‘엘로힘’이어야 합니다. ‘엘샤다이’는 수도원에서만 간간히 만날 수 있습니다. 한국은 수도원보다 기도원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라입니다. 신앙생활을 말할 때 ‘믿음으로 모든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엘로힘입니다. 걸핏하면 ‘예수의 이름으로 명하노니’ ‘주의 보혈을 뿌리노라’ ‘믿는 대로 될지어다’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 ‘주여 믿습니다. 주여 주시옵소서’ 등의 말을 자주 하는 사람들은 엘로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나의 ‘원함’은 내려놓고 하나님의 ‘원하심’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는 사람들은 ‘엘샤다이’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질병 앞에 치유를 구하지 않고 겸손과 지혜와 깨달음을 구합니다. 자신의 고통을 통해 주님의 수난을 묵상합니다. 고난 앞에 해결을 기도하지 않고 견딜 수 있는 믿음을 구하거나 고난이나 환란이 나를 연단하시는 하나님의 뜻으로 깨닫게 되면 도리어 고난 앞에 즐거워합니다. 이들은 종종 ‘엘로힘’을 섬기시는 분들에게는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보여지기도 합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앞에 감격하게 되는 것은 구원의 문제에 대면했을 때입니다. 뜻을 정하기만 하셔도 그 뜻을 이루실 능력이 100퍼센트이신데 뜻을 정하시고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아들의 목숨까지 걸었다면 이는 절대로 실수하지 않으시며 실패하지 않으시고 도중에 포기하지도 않으십니다. 이 일이 이루어지지 못할 요소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그 어떤 변수도 없고 어떤 훼방도 받지 않으십니다. 이런 엘샤다이께서 나를 구원하시고자 뜻을 정하셨다면 나는 그 앞에서 항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기차에서 뒤돌아 앉아도 천국까지 가고 전봇대를 붙잡고 늘어져도 전봇대 채 뽑아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엘샤다이’ 하나님 때문에 기독교를 계시 종교라 부르고 타력 종교라 부르며 고등 종교라 부릅니다. ‘엘로힘’은 이 세 가지 모두를 흐릿하게 만드는 묘한 능력이 있습니다. ‘엘샤다이’ 하나님의 뜻은 구원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이 구원의 선포에 끝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는 수단입니다. 다시 말해, 엘샤다이께서 나를 사랑하시기로 뜻을 정하셨으며 그 뜻을 이루기 위해 생명까지 거셨으니 나는 어떠하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고 그 앞에서 엎드려지게 될 것입니다.‘엘샤다이’ 하나님은 나로 하여금 예배할 수밖에 없도록 이끄시며 내 입술에서 감사와 찬양이 저절로 흘러넘치게 하십니다. 내가 비록 사는 것이 초라하고 보잘것없어 보여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평안이 있는 것은 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기로 작정하신 ‘엘샤다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 주님께 즐거이 예배하고 싶다
시편 95편 묵상: 진정한 예배
by 고명환
2023-09-25
1 미국 보스턴 지역에는 이름난 두 교회가 있다. 시내 중심가에 자리 잡은 파크스트릿 교회와 외곽에 자리한 그레이스 채플이다. 파크스트릿 교회는 관광객이 끊이지 않는 유서 깊은 보스턴 다운타운에 있다. 그래서 그런지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려는 방문객이 끊이지 않는다. 지역적 특성과 함께 교회가 지닌 역사적 유산 역시 만만치 않아서 보스턴을 방문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번쯤 들러 예배하고 싶어 하는 교회이다. 젊은이들이 많은 교회라는 인상을 그 교회의 예배에 참석할 때마다 받는다. 미국의 교회들이 점점 젊은이들을 잃어가고 노령화되는 추세에,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오래된 긴 나무 의자의 곳곳을 차지하고 진지하게 예배하는 모습을 볼 때면 속으로 그 이유를 묻게 된다. 물론 보스턴은 젊은이들이 많이 사는 곳이다. 명문대학들이 즐비해선지 인구의 상당 부분은 학생들이 차지하는 젊은 도시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전통적인 파크스트릿 교회에 젊은이들이 많은 것은 궁금증을 자아낸다. 보스턴 시내에는 그들이 찾을 만한 교회가 즐비하기 때문이다. 마음만 먹으면 주변에서 쉽게 다닐 교회를 찾아낼 수 있다. 예배의 형식이 젊은이들을 불러들이는 것 같지도 않다. 그 교회는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을 듯한 전통 예배를 드린다. 사회자 한 사람이 인도하는 긴 예배 순서는 말할 것도 없고, 고풍스러운 오르간 반주가 젊은이들에게 어필할 것 같지도 않다. 전통 성가를 부르는 찬양대나, 가운을 입고 성경을 한 줄 한 줄 풀이해 나가는 설교 방식도 요즘 젊은이들이 선호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찾는 이유는 그들이 기대하는 바를 채워 주기 때문일 것이다. 또 다른 교회인 그레이스 채플은 보스턴 시내를 한참 벗어나 한적한 타운에 있다. 담임 목사가 주장하듯 현시대의 사람들이 교회에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모든 것을 바꾼 교회이다. 교회가 변화하는 세상에서 전통만을 고수하면 문을 닫게 된다는 철학을 가진 목사 아래 여전히 그 교회는 끊임없이 참신한 시도를 한다. 다른 많은 뉴잉글랜드의 교회들처럼 이 교회 또한 설립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전통 교회의 흔적을 찾기는 쉽지 않다. 종탑이 뾰족하게 올라간 전형적인 외관은 해체되었고, 내부는 요즘 흔히 볼 수 있는 전면에 무대가 배치된 극장식 예배실을 비롯한, 카페, 체육관, 기도실 등 여러 부대 시설을 갖춘 현대적인 건물로 탈바꿈하였다. 주일 예배를 드리러 나오는 성도는, 정장을 차려입은 이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대부분은 캐주얼 복장이다.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사람들이나 찬양단, 설교자까지 티셔츠나 스포츠 셔츠를 입고 각자의 역할을 담당한다. 웅장한 오르간 대신 일렉트릭 밴드의 리드미컬한 연주에 맞춰 최근의 찬양 메들리를 부르는 것으로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를 위해 주보가 제작되지도 않는다. 찬양, 광고, 기도, 설교가 전부인 단순한 순서의 예배를 드리기 때문이다.아이러니하게도, 현시대의 조류에 맞게 새로운 형태로 전환한 이 교회에서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년들을 많이 볼 수 있다. 오히려 젊은이들을 찾기 어렵다. 일어선 채 컨템포러리 찬양을 행복한 얼굴로 부르는 지긋한 나이의 성도들에게 드럼 소리는 전혀 거슬리지 않는 것 같다. 간략하지만 마음을 담아 참여할 수 있는 예배 순서, 삶과 밀착된 설교, 종교적인 엄숙함이 줄 수 없는 인도자와 참여자의 역동적인 상호작용에서 오는 에너지가 연령을 막론하고 성도들의 기대를 충족해 주는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2시편 95편1오너라,우리가 주님께즐거이 노래하자.우리를 구원하시는 반석을 보고,소리 높여 외치자.2찬송을 부르며그의 앞으로 나아가서,노래 가락에 맞추어,그분께 즐겁게 소리 높여 외치자.3주님은 크신 하나님이시요,모든 신들 위에 뛰어나신 왕이시다.4땅의 깊은 곳도 그 손 안에 있고,산의 높은 꼭대기도 그의 것이다.5바다도 그의 것이며,그가 지으신 것이다.마른 땅도그가 손으로 빚으신 것이다.6오너라,우리가 엎드려 경배하자.우리를 지으신 주님 앞에무릎을 꿇자.7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시요,우리는 그가 기르시는 백성이며,그가 손수 이끄시는 양 떼다.오늘,너희는 그의 음성을 들어 보아라.8므리바에서처럼,맛사 광야에 있을 때처럼,너희의 마음을완고하게 하지 말아라.9너희의 조상들은 그 때에,내가 한 일을 보고서도,나를 시험하고 또 시험하였다.10사십 년을 지나면서,나는 그 세대를 보고 싫증이 나서‘그들은 마음이 빗나간 백성이요,나의 길을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구나’ 하였고,11내가 화가 나서‘그들은 나의 안식에들어오지 못할 것이다’하고 맹세까지 하였다.”시편 95편은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하는지 가르쳐 준다. 예배는 오직 만물의 창조주이며 소유주이신 하나님만을 높이는 최상의 표현이어야 한다. 그분은 땅과 바다를 지으셨고 해 아래 하나님의 소유가 아닌 것은 없다(4, 5절). 세상에서 권력을 가진 왕들 혹은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과 비교할 수 없는 위대한 하나님이다(3절). 이 위대한 분은 우리의 하나님이다. 우리를 그분의 양 떼로 삼으셨고 손수 기르시고 이끌어 주신다(7절). 더욱이 죽음의 위험에서 건져 주시는 구원의 반석이다(1절). 그러므로, 주님의 백성인 우리는 마땅히 최고의 경배를 올려야 한다. 여기에는 합당한 마음가짐이 우선되어야 한다. 경외와 감사의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능력과 권세를 가진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과 함께, 구원하시고 인도하시는 사랑과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분께 나아가야 한다. 복종과 헌신의 마음으로 무릎을 꿇고 경의를 표하며 엎드려 경배함이 마땅하다(6절). 믿음이 없이 나아가는 참된 예배란 없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이시고 우리는 그의 기르시는 백성임을 조금도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현재의 삶을 주관하실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여정도 부족함 없이 인도하실 것이라는 단순한 믿음이 필요하다. 시는 므리바에서 믿음에 실패했던 선조들의 완고한 마음이 얼마나 하나님을 분노케 하였는지 들려준다(8-11절). 양인 우리가 목자를 신뢰하지 않는 마음으로 드리는 예배, 즉 믿음 없는 예배는 그분을 크게 실망시키는 일이다. 무의미한 요식행위 이상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 예배로 나아가는 사람은 반드시 크신 하나님의 실존과 찾는 사람에게 보응하시는 인격임을 믿어야 한다(히브리서 11:6).예배에 합당한 마음가짐이 먼저 준비되고, 이 바탕 위에 그분을 높여 드리는 예배 행위가 얹어져야 한다. 음악은 예배자의 마음을 잘 담아내어 주님을 기쁘게 하는 오래된 매체이다. 목소리로 찬양하며 악기로 연주하여 주님을 높여 드릴 수 있다(1, 2절). 춤 역시 주님의 백성으로 왕께 기쁨을 표현하고 영광 돌리는 예배 행위이다(사무엘하 6:13-14; 시편 149:3). 이외에도, 오늘날에는 미술, 연극, 영화 등 다양한 매체를 통해 주님을 찬양할 수 있다. 예배는 즐거운 일이다(1, 2절). 들뜨고 떠들썩한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그렇다 하더라도 문제될 건 없다). 자유와 절제와 완급이 있어 모자라거나 넘치지 않는 즐거운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할 것이다. 즐거운 마음 그 자체만으로도 주님께서 받으시며 기뻐하시는 믿음의 모습이다. 사랑하는 대상에게 경의를 표하는 일이 우울하거나 무덤덤한 일이 될 수 없다. 자신을 잊은 채 밝고 적극적인 마음으로 기뻐하며 경배해야 한다. 3다니던 신학교에선 일주일에 세 번, 열한 시에 공식적인 예배가 열렸다. 주중의 가운데 날인 수요일에는 화려한 오르간 반주가 울려 퍼지고 전통적인 예배 순서에 따라 드리는 격식을 갖춘 채플이었고, 다른 두 번은 일렉트릭 밴드를 따라 찬양하는 시간과 말씀을 듣는 시간으로 간결하게 짜인 자유로운 형식의 예배였다. 보통 총장과 교직원들이 참석하는 수요일 전통 예배에는 학생들이 채플실의 좌석을 채워서 성황을 이루었지만, 월요일과 금요일의 약식 예배에는 빈자리가 눈에 띄게 많아 다소 썰렁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시험 기간이 다가오면 자주 참석하던 학생들마저 그 시간에 도서관에 머물렀다. 좋은 학점을 받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었던 나는 예배의 형태가 어떠하든 또 시험 기간이건 아니건 상관하지 않고, 오전 열한 시 채플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늘 앉는 자리를 찾았다. 그 시간만큼은 가정사나 힘겨운 공부, 낯선 나라에서 받는 압박감을 뒤로하고 주님께 마음을 집중하며 힘을 얻는 소중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귀에 익숙지 않았던 전자 기타 소리에 따라하던 컨템포러리 찬양이나 오르간 반주에 섞여 힘차게 부르던 전통 찬양은 언제나 마음에 감동으로 다가왔다. 성황을 이룬 자리에서 듣던 설교는 물론, 듬성듬성 학생들이 앉아 있는 한적한 공간에서 경청한 교수님들의 설교는 한 번도 지루하게 느껴진 적이 없다. 세월이 한참 흐른 지금도 그때 4년간 참석했던 채플 시간은 고스란히 좋은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나와 나를 둘러싼 문제를 모두 잊고 갈망하는 마음으로 진실하게 주님께 다가갔던 그 시간들은 몇몇 단편적인 기억밖에 떠오르지 않는 여러 과목의 강의보다도 오래 남을 가르침의 시간들이었다. 귀국 후, 주일이면 고민이 생겼다. 예배를 드리러 오늘은 어느 교회를 방문할지 고민이다. 목사로 섬기는 교회가 없으니 어디든 찾아가 회중 속에 섞여 예배해야 하는데, 마땅히 갈 만한 교회가 없다. 주변에 교회가 없어서가 아니다. 군중 속에 앉아 있다가 떠날 때 붙잡히지 않을 커다란 교회들이 즐비하건만 마음 편하게 다음에 또 찾을 만한 교회가 없는 것이다. 기대를 안고 찾는 교회마다 실망하게 되고 주일이면 다른 교회를 찾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예배를 드리고 난 뒤 찾아오는 영혼의 뿌듯함이나 감격보다는 고민과 회의를 떨쳐낼 수 없기 때문이다. 주일에 찾은 굵직한 교단의 큰 교회들은 형식은 조금씩 다르지만 내용은 크게 차이가 없는 예배를 드린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찬양하는 시간을 많이 할애하는 순서가 단출한 예배를 하건, 교독문과 사도신경을 넣은 긴 순서의 예배를 하건 상관없이 생동감을 느끼지 못한다. 예배의 순서를 이끄는 사회자나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앞에 도열한 찬양팀, 또 말씀을 전하는 담임목사는 심각한 얼굴로 주어진 순서를 능숙하게 수행한다. 여기에, 대표기도를 맡은 분은 한참 시간을 들여 작성한 듯한 기도문을 들고 올라와 또박또박 읽어 내려간다. 회중석의 성도들은 이런 의식의 진행에 익숙해서 어느 부분에서 앉고 일어서야 하는지를 잘 분별하여 움직이면서 동요 없이 예배의 흐름에 자신들을 맡기는 것 같다. 그러다가, 목사가 두 손을 올리고 엄숙하게 기도하는 의식이 끝나기 무섭게 주섬주섬 물건을 챙긴 후 흘러나오는 음악과 함께 자리를 뜬다. 좋게 말하면 물 흐르듯 진행되는 의식이고, 반대로 말하면 기계적으로 치르는 제사인 것이다. (실제로 그들은 ‘제단을 쌓는다’는 표현을 쓴다.) 기계적이고 의례적인 예배를 드리는 것보다 더 큰 문제는 주님이 예배의 주제와 중심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주님보다 교회가 때로는 더 강조되고 마음을 빼앗아 가고 있다. 예배 중 교회의 다채로운 행사가 대형 스크린에 뜨고 화려한 미디어로 제작된 각 부서의 활동이나 앞으로 이루어질 프로그램에 대한 선전이 예배자의 마음에 적잖은 잔상을 남긴다. 한술 더 떠서 설교자가 앞서 광고한 내용을 부연하기도 한다. 최악의 경우는 말씀을 전해야 할 시간에 설교자가 교회의 사업을 위해 재단한 선동적인 내용의 설교를 하는 것이다. 두말할 필요 없이 청중의 마음을 빼앗아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다. 물론 설교자는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라는 명분도 잊지 않고 주입한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이 성령을 통해 회중의 영혼에 역사해야 할 귀중한 시간에 주님의 이름을 빌린 사업 설명회가 회중의 마음을 번민케 하는 것이다. 늘 찾던 교회가 코로나 시기에 한시적으로 문을 닫은 탓에 가족과 함께 한국의 이름난 교회의 온라인 예배에 참석한 적이 있다. 아직 믿음이 성숙하지 않은 아들과 함께 화면 앞에 앉아 들은 유명한 목사님의 말씀은 중간에 끄고 싶은 내용이었다. 그분은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을 위해 교육관을 지을 자금이 필요하다며 설교의 처음과 끝을 일관되게 헌금을 유도하는 내용으로 시간을 채웠다. 내용 중에는 어려운 형편에서도 헌금을 많이 했다는 어떤 성도의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교회를 크게 만들고 말씀을 잘한다고 소문난 그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청년인 아들이 도전을 받았으면 하는 바램으로 같이 예배를 드리는 자리였는데, 기대와 달리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평소 교회에 대해 비판적인 마음을 가진 아들이 그분의 설교로 인해 불신의 마음을 더 갖는 데 일조하는 꼴이 되고 말았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미래의 어린이 청소년이 좋은 환경에서 기독교 교육을 받고 양질의 콘텐츠를 통해 좋은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첨단 건물이 필요하고 마음을 써서 헌금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 시간에 하면 틀린 말이 된다. 좋은 꼴인 주님의 말씀 대신 양들에게 영혼의 양식이 될 수 없는 것들을 공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일이면 교회를 뒤로하고 돌아가는 예배자들에게 자주 묻고 싶어진다. 당신은 진정 예수님을 예배하고 왔는지, 예배를 통해 예수님으로 마음이 채워졌는지, 좋으신 그분에 대해 들을 수 있었는지. 당신이 드린 찬양은 나를 잊고 주님만을 높여 드린 찬양이었는지. 아니면 나에게 몰입했던 찬양이었는지. 4‘참으로 예배하고 싶다.’ 예배학을 공부한 어떤 목사님이 쓴 책의 제목이다. 이 제목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그분을 참으로 예배하고 싶어 한다. 예배의 자리에 가기를 기뻐하고, 예배하는 사람들 속에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한다. 예배는 그분의 백성과 하나님이 만나 상호 교류하는 더없이 소중한 의식이다. 주님은 그들을 지으신 창조주이고 사망에서 건져 주신 구원자이다. 그분은 예배를 통해 자기를 찾는 영혼들을 기뻐하시며 사랑과 은혜를 부어 주기 원하시는 분이다. 그분의 사람들에게 주님은 삶의 목적이고 의미이며 일관된 추구의 대상이다. 당연히, 마음을 다해 감사와 찬양으로 높여 드리고 싶어 한다. 예배는 이런 주님을 향한 헌신의 마음과 주님이 주시는 자비와 은총이 교류하는 복되고 아름다운 시간인 것이다. 여기서, 이 땅에서 예배라는 이름으로 다양하게 행해지고 있는 집회들은 그 의미에 부합하고 있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 본다. 주님께서 기대하시는 참 마음으로 예배자가 나아가고 있으며 주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예배인지…. 그렇지 않다면, 속히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할 것이다. 정형화된 형식을 되찾고, 모범적인 예배를 만들어 내자는 뜻은 아니다. 이미, 예배의 틀은 세대의 흐름과 함께 중요성을 상실했고 지금 와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그럴 필요도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잃어버리지 말아야 할 예배의 정신이 있다. 혹 우리가 그것을 잃어버렸거나 경시했다면 원래의 모습을 찾아 위치를 회복시켜야 한다.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예배자)는 절대자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마음을 가지고 예배의 자리를 찾아야 한다. 형식은 갖추었으나 온전한 마음이 없는 예배는 예배라 할 수 없을 것이다. 경배를 받아야 할 대상인 하나님께서 그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이다. 주님은 우리 자신을 산 제물로 드리기를 원하시고(로마서 12:1),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해 그분을 추구하기 기대하신다(마가복음 12:30). 그렇기에 예배자는 최상의 심령을 가지고 와야 한다. 주님을 향한 간절한 사랑과 열망을 준비해야 한다. 세상의 어떤 권력자보다 권세가 많으신 하나님께 나아가는데, 늘 만나는 사람을 대면하러 가듯 성의 없이 예배의 자리로 향할 수는 없다. 예배를 돕기 위해 일하는 사회자, 찬양팀, 기도자, 설교자 역시 예배자들이며, 그들도 예외 없이, 준비된 최상의 마음으로 임해야 한다. 창조주이시며 인생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깊이 인식하고 겸손하고 기쁜 마음으로 참여해야 한다. 하나님을 향한 최상의 심령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은 모든 예배자가 흠 없는 완전한 상태여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 모습 그대로 나아가되, 오로지 주님을 향하는 열망과 그분의 은총을 기대하는 가난한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예배는 완벽한 사람들만이 모여 하나님을 높이는 배타적인 의식이 아니다. 그런 예배는 변화된 몸을 입은 성도들이 드릴 천상의 예배에서나 실현될 것이다. 지상의 예배는 여전히 불완전하고 흠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며 자신을 드리는 헌신의 시간이다. 예배에 모인 성도 중에는 큰 죄를 범해 가책을 느끼는 성도가 있는가 하면, 복잡한 생활의 문제로 고민하는 성도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육체나 정신의 연약함으로 지친 성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짐이나 복잡한 심령을 가졌든지 최상의 심령으로 예배하고자 하는 동기로 참여해야 한다. 그럴 때 예배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총을 경험하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용서와 사랑을 확신하게 되고, 소원해졌던 주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며, 영혼이 힘을 얻고 살아나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육체와 정신의 치유를 얻는 놀라운 일도 일어날 수 있다. “주님은, 마음 상한 사람에게 가까이 계시고, 낙심한 사람을 구원해 주신다”(시편 34:18). 사랑의 주님은 상하고 찢긴 마음이나 애통하는 마음으로 다가오는 자녀들을 가엽게 여기시어 일으켜 주시고 회복시켜 주신다. 다음으로,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기 위해 예배를 기획하고 담당하는 일꾼들의 인식과 역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그들에게는 참여자들의 마음이 온전히 하나님께 모아지도록 최선으로 섬기는 한편, 각자의 역할을 통해 하나님께서 예배 중에 일하시도록 자신들을 드려야 할 책임이 있다. 이 중요한 임무를 차질 없이 수행할 수 있기 위해 가져야 할 인식과 마음의 자세를 늘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무엇보다, 예배를 꾸미고 준비하는 일꾼들이 예배의 본질을 간과하지 않기를 바란다. 예배가 예배되기 위해 근본적인 질문을 스스로 던질 필요가 있다. 예배의 대상이 누구이며, 누구를 기쁘게 해드려야 하는가? 초보 신자라도 답할 수 있는 쉬운 물음이지만, 예배의 현장에서 종종 놓치는 것이기도 하다. 예배의 대상에 사람이 혹은 교회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고, 참석한 사람들의 만족이 목표인 듯한 예배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하나님께 서비스하기보다 무언가를 얻으려 예배의 자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서비스하려는 듯한 예배도 있는 것이 현실이다. 주님이 예배의 대상이며 목적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소비자가 된 듯한 참여자들을 만족시키고 교회에 계속 붙들어 놓기 위한 방편으로 예배를 이용하지 말아야 한다. 예배 중에 사람을 칭송하거나 교회 행사를 선전하는 일을 멈추어야 한다. 예배는 주님께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예배는 주님께 집중하는 것이라고 정의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 주님만을 높이고, 기뻐하며, 그분만이 전해지고, 성령님만이 활동하실 수 있도록 모든 순서와 활동이 그 분께 모아져야 한다. 하여, 교회가 참여자에게 감동을 주기 위한 프로그램이나 예배의 형식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란다. 더 이상 예배를 위한 콘텐츠 개발에 몰두하는 데 에너지를 쏟아붓지 않았으면 좋겠다. 화려한 콘서트 같은 예배를 통해 참석자들을 감동시키려는 노력을 그만두기를 바란다. 그것들이 주는 감동은 진정 영혼이나 삶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이 없다. 세상의 잘된 공연에 취할 때 얻는 생명이 짧은 가벼운 감동 정도를 줄 뿐이다. 진정, 예배자가 주님을 경험하고 영혼의 빛을 얻는 것은 화려한 예배 음악이나 잘 짜인 순서 때문이 아니다. 기도할 때 크게 연주되는 반주나 설교의 말미에 은은하게 곁들이는 음악 효과에 달려있지 않다. 예배 과정 하나하나가 각자에게 의미로 다가오고 거기에 영혼이 실려질 때 성령에 의한 감동은 주어진다. 이는 자리를 떠나면 곧 사라지는 좋은 감정과 달리 잘 박힌 못과 같이 심령에 오래 살아 삶의 변화를 이끌어 줄 것이다.그러므로, 인위적인 분위기 조성으로 예배자에게 감동을 주입하려 하기보다 오롯이 성령님께서 일하시게 맡겨 드렸으면 좋겠다. 참여자의 눈과 귀를 만족시키기 위한 분위기 조성에 골몰하는 대신, 어떻게 하면 그들의 마음이 주님께 이끌릴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돕는 일을 찾아야 할 것이다. 5예배를 강조하지 않는 한국 교회는 없어 보인다. 교회를 소개하는 홈페이지마다 크게 장식된 “살아 있는 예배” 혹은 “감동이 있는 예배” 등의 문구가 말해 준다. 여전히 사람들은 좋은 예배를 찾고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손짓하는 교회들은 뭔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예배 콘텐츠를 가진 것처럼 어필하고 있다. 바라기는, 예배를 자랑하고 최고의 예배를 추구한다는 교회들이 그곳을 찾는 사람들의 목마름을 충분히 해결해 주었으면 좋겠다. 행여라도, 사람들의 기호에 맞춘, 사람을 위한 서비스는 아닐까 하는 우려가 쓸데없는 기우가 되기를 바란다.주님은 우리의 하나님이시고 우리는 그분이 기르시는 양이다. 우리는 피조물이고 그분은 창조주이시다. 이런 엄연한 관계를 잊은 채, 스스로의 만족과 감동을 얻기 위해 예배가 연출된다면 실로 무례한 불경이 아닐 수 없다. 예배자로서 가져야 할 합당한 마음가짐 위에 다채로운 내용이 실려야 할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예배의 주인이심을 인식하면서, 소박하더라도 기쁨으로 찬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 속에 기도하며, 주님이 증거되는 생생한 능력의 말씀이 선포될 때, 진정한 예배는 드려질 수 있다고 믿는다.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by John Piper
2023-09-09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시편 135:1-6 1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여라. 주님의 종들아, 찬송하여라.2주님의 집 안에, 우리 하나님의 집 뜰 안에 서 있는 사람들아,3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그가 은혜를 베푸시니, 그의 이름 찬송하여라.4주님께서는 야곱을 당신의 것으로 택하시며, 이스라엘을 가장 소중한 보물로 택하셨다.5나는 알고 있다. 주님은 위대하신 분이며, 어느 신보다 더 위대하신 분이시다.6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이 시편은 우리에게 주님을 찬양하라며 시작합니다. 주님을 찬송하라! 주님의 이름을 찬송하라! 그다음에 시편 기자는 3절부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향한 찬양이 솟아올라야 하는 이유를 제시합니다. 예를 들어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주님은 선하시니, 주님을 찬송하여라.” 찬양해야 할 이유의 목록은 6절까지 이어지는데, 여기서 내가 집중하고 싶은 구절이 바로 이 6절입니다.주님은,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바다에서도 바다 밑 깊고 깊은 곳에서도, 어디에서나, 뜻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하시는 분이다.시편 115:3도 같은 말을 합니다.늘 자유롭게 이 구절은 무슨 일을 하시든지 하나님은 기쁘시게 그 일을 하신다고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은 결코 억지로 일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하기 싫은 일을 어쩔 수 없이 궁지에 몰려서 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무엇이든 원하는 것을 하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하나님은 자신이 하는 모든 일에 즐거워하십니다.이 본문과 다른 많은 본문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바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고 그가 주권자로서 행하시는 자유를 찬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주권자로서 행하시는 자유란 하나님은 당신의 “선한 뜻”에 따라, 당신의 기쁨의 지시에 따라, 항상 자유롭게 행동하신다는 의미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하나님은 결코 상황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기뻐할 수 없는 일을 해야 하는 그런 상황에 결코 끌려다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조롱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갇히거나 궁지에 몰리거나 강요당하지 않으십니다.향기로운 제물어떤 의미에서 하나님께서 하시기에 가장 어려우셨던 그 일, 곧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으[신] ”(로마서 8:32) 그 일을 하신 바로 그 시점에서도, 하나님은 자유로우셨고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셨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죽음은 “하나님 앞에 향기로운 예물과 제물”이었다고 말합니다(에베소서 5:2). 그의 죽음조차도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었습니다.그리고 갈보리로 가시는 그 길에 예수님은 당신 뜻대로 할 수 있는 권세를 갖고 계셨습니다. “아무도 내게서 내 목숨을 빼앗아 가지 못한다. 나는 스스로 원해서 내 목숨을 버린다”[요한복음 10:18]. 당신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하나님의 기쁘신 뜻대로 하신 것입니다. 우주의 역사에서 단 한 번 예수께서 함정에 빠지신 것처럼 보이던 그 시점에서도,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일, 곧 여러분과 나 같은 죄인들을 의롭다 하시기 위해 죽는 일을 정확하게 수행하는 책임을 맡으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경외와 경이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실 앞에서 떨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우리의 찬양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한 우리의 구원도 바로 이 사실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 이루신다.”원제: Psalm 135 and the Pleasure of God in All He Doe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종말론, 시간의 이해
by Chris Watkin
2023-09-07
성경의 종말론(끝, 마지막 일에 관한 연구)은 그리스도인은 시간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 분명하게 말해준다. 분명하기는 하지만, 이것은 마지막 일에 관한 성경의 설명에서 끌어내는 가장 복잡한 결과의 하나를 제시한다. 종말론은 끝이자 시작이다. 발전에 관한 현대의 생각이지만, 가장 그렇지 않은 생각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이루어 낸 업적을 하찮게 만들기도 하지만 그 가치를 인정하기도 한다. 과거와 깨지지 않는 연속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급격한 단절을 말하기도 한다. 종말론과 시간성(temporality) 사이의 관계는 이렇게 복잡하다.이 세상에 대한 모든 견해가 다 “마지막 것(들)”에 관한 개념을 포함하고 있지는 않다. 예를 들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에서 로마의 원자론자 철학자 루크레티우스는 세상은 붕괴하여 우주 먼지로 변하고 끝없는 순환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우주가 영원하다고 믿었다. 세상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의 첫 번째 질문은 이것이다. 다양한 종말론이 있지만, 성경의 종말론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끼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시간의 형태종말론은 성경의 이야기에 분명한 방향을 부여하며, 따라서 이 세상에서 우리 존재의 지평에도 그렇게 한다. 종말론은 이러한 삶에 뚜렷한 의미를 불어넣는다. 우리가 현재 상태를 개선할 수 있는 그런 무한한 시간이나 무한한 환생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생에 사전 연습이 없다. 그리스도인에게 역사는 썼다가 지울 수 있는 게 아니다. 역사는 앞으로 나아가는 선과 같다.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 누구도 지나온 길을 되돌아갈 수 없다.끝은 전 인생의 의미를 반추하게 한다.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누구나 알고 있듯이, 마지막 장이나 마지막 장면은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 끝 장면이 없이 어떤 스토리의 전체적인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끝이 없다면, “역사에서 의미를 찾는 것은 구름에서 패턴을 찾는 것과 같다”라고 존 레녹스는 말한다. 구름에서도 이런저런 형태 또는 얼룩을 볼 수도 있겠지만, 우리가 거기에 부여하려는 감각은 단지 지나친 상상력의 산물일 뿐이며 전날 저녁에 먹은 치즈의 영향에 불과하다. 끝이 없이 불투명한 현실을 이야기하면서, 존 리스트는 아우구스티누스의 하나님의 도성에 나오는 구절을 이렇게 풀어썼다. 삶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서 땅 위의 평화를 찾는 단조롭고 쓸데없는 탐색이 될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마치 그다지 품질이 좋지 않은 1970년대 코미디 쇼를 몇 시간 동안 계속 반복해서 보면서 머리가 마비되는 경험을 하는 것과 비슷할 것이다. (그렇다고 내가 그런 경험을 직접 했다는 것은 아니다.)기계적 오류그러나 기독교의 시간관에는 결말이 있기에 역사에는 의미가 담긴다. 역사는 단순한 사건의 연속이 아니라 하나의 줄거리(플롯)로 거듭난다. C. S. 루이스가 말하듯이, 역사는 이제 “우주적인 이야기, 즉 다른 모든 이야기가 에피소드로 존재하는 궁극적인 줄거리”가 된다. 헤르만 바빙크는 기계적 세계관에는 역사는 없고 단지 병렬(juxtaposition)만 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구체적 사건들(Things)은 영원하고 연속적인 사건들(events)의 흐름 속에서 차례로 발생하는데, 그 사건들을 일관된 내러티브로 모아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건지 추정할 수 없다고 기계적 세계관은 말한다. 이러한 기계적 세계관과는 달리 기독교 시간관은 “만물의 발전과 온 세상에 관하여 말할 권리가 우리에게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시간이 지나오면서 실현되어야 하는 하나님의 생각이 들어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영광을 위하여 만물을 창조하시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함께 모으시겠다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엡 1:10).루이스는 이러한 성경의 시간관이 문학에 끼친 영향을 추적한다. 그는 호메로스의 주요 서사시에는 “거대한 주제가 없으며, 애초를 있을 수도 없다”라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런 종류의 위대함은 어떤 사건이 역사에 심오하고 다소 영구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때만 발생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건이 의미를 갖기 위해서라도 역사에는 패턴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패턴도 없는 고대 영웅의 시대에는 오로지 “목적 없이 이뤄지는 영광과 비참함의 끊임없는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승리, 패배, 잔치, 금식, “‘멈춰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순간 이후에는 그 어떤 것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 시대에 들어서서야 역사를 구체적이고 되돌릴 수 없으며 존엄한 것으로 보는 관점이 완전히 뿌리를 내린다. 선형 연대기선형 역사(linear history)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깊이 이해한 사람이 아우구스티누스이다. 그는 또한 선형 역사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도 통찰력 있게 끌어냈다. 이 히포의 주교는 하나님의 도성에서 성경을 토대로 최초의 기독교 역사 철학(또는 기독교 신학)의 공식을 도출한다.하나님의 도성이 서구 세계에 준 것은 시간을 이해하고 경험하는 새로운 방식이다. 마이클 멘델슨(Michael Mendelson)에 따르면, 그리스-로마 세계에서 “역사의 중요성은 주로 과거, 현재, 미래를 연속적인 전체로 만드는 순환 패턴에 있었다. 따라서 독특하고 특이한 사건이 아니라 반복되고 공통적인 사건을 강조했다.”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야기를 할 때, 그가 말하고자 한 바는 그 사건이 단일한 에피소드가 아니라 “미래에도 반복될 사건의 패턴”이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역사는 “반복될 수 없는 일련의 도덕적으로 결정적인 사건들의 극적인 전개”였다는 게 멘델슨의 주장이다. 그렇다고 성경의 역사관에서 순환성의 여지를 아예 부정하는 건 아니다. 바벨탑은 아담의 죄를 반영하고 선지자들은 끊임없이 출애굽을 언급한다. 하지만 그러함에도 이 모든 사건은 결코 돌아오지 않을 단 하나의 시작과 단 하나의 끝으로 펼쳐지는 단 하나의 이야기라는 틀 안에서만 발생한다. 절대로 같은 사건이 다시 생기지는 않는다. 오로지 시작자, 이게 우리가 아는 역사이다. 모든 것에는 다 끝이 있다. 다만, 그렇다고 다 끝나는 건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그리스도는 “영원히” 살아 있다(계 1:18). 우리는 “영원무궁” 하나님께 찬양을 드린다(계 7:12). 짐승에게 경배하는 자들에게는 “그 고통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온다”(계 14:11). 하나님의 메시아는 “영원히” 다스리신다(계 11:15). 멸망된 바벨론의 연기가 “영원히 올라간다”(계 19:3). 마귀와 짐승과 거짓 선지자는 “영원히” 고통을 당할 것이다(계 20:10). 새 예루살렘의 시민들은 “영원무궁하도록” 다스릴 것이다(계 22:5).이 영광스러운 후렴이 들려주는 커다란 북소리는 다른 그 어떤 구절보다도 종말적 현실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더 뚜렷하게 보여준다. 나니아 시리즈의 마지막 권인 최후의 전투에서 C. S. 루이스의 주인공들은 과수원이 있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는 것보다 더 높은” 산과 “영원히 솟아오르는” 폭포를 생각한다. 루이스는 이렇게 썼다. “이제 그들은 지구상의 누구도 읽지 못한 위대한 이야기의 제1장을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영원히 계속되며 모든 장은 이전의 것보다 낫다.” 파루시아는 기독교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파루시아는 “그 자리에 있으라”는 명령이 아니라 “더 높이 올라가라, 더 깊이 들어가라!”는 명령이다.종말은 결코 끝없는 정체도, 무의미한 병치도 아니다. 단지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이 글은 Christopher Watkin, Biblical Critical Theory(Zondervan Academic, 2022)에서 간추린 것이다. 원제: Eschatology Makes Sense of Time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시편 2편과 복음전도
by Johnathon Bowers
2023-09-02
시편의 하나님· 시편 1편: 분주한 일상을 극복하는 묵상의 즐거움· 시편 2편과 복음전도· 시편 135편: 기쁨으로 모든 일을 하시는 하나님 세 가지 관점에서 시편 2편을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 먼저,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둘째, 신약성경이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러한 시편이 땅끝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임무에 대해서 어떻게 말하는지 질문해 보겠습니다.시편 2편의 메시지시편 2편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합니다: “어찌하여 뭇 나라가 술렁거리며, 어찌하여 뭇 민족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절). 2-3절은 그 헛된 일이 무엇인지 명시합니다. 세상의 임금들이 메시아의 통치권을 거부합니다. 이에 대해 하나님은 그 나라들을 하늘 보좌에서 내려다보시면 그 교만을 비웃으시고, 시온산에 왕을 세우셨다고 하십니다(5-6절). 7-9절에서 시편 기자는 이 대관식을 회상합니다. 특히 열방을 당신의 기업으로 삼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에 주목합니다. 이러한 확신으로 무장한 시편 기자는 세상의 통치자들을 꾸짖으며,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왕에게 무릎을 꿇고 여호와께로 피신하라고 말합니다(10-12절).그러므로 시편 2편의 메시지를 요약한다면, 하나님이 왕을 보좌에 앉히셨으므로 땅의 나라들은 그들의 반역을 회개하고 메시아에게로 피신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신약의 시편 2편우리가 신약성경에 이르면, 다윗의 자손 예수께서 시편 2편에서 이야기하는 바로 그 저항에 부닥치시는 것을 봅니다(참조. 사도행전 4:24-28). 이 저항은 예수께서 당하신 십자가 처형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편 2편의 방식대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당신의 오른편에 앉히심으로써 그의 권위를 입증하십니다.바울은 사도행전 13:32-33에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조상들에게 하신 그 약속을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으로 전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일으키셔서, [조상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 기록한 바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한 것과 같습니다.” 이러한 입증으로 인해 예수님은 모든 민족의 정당한 상속자가 되셨습니다(마태복음 28:18-20).시편 2편과 복음전도그러면 시편 2편은 우리를 어디로 떠나게 합니까? 예수님이 왕의 보좌에 앉으셨다는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우선 에베소서 2:6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게 하셨다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우리는 왕실의 이미지를 봅니다. 신자들은 이 땅의 사람들을 다스리시는 왕이신 예수님의 통치에 참여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 앞에서 담대히 말해야 합니다. 이 말은 우리가 고집스럽고 무례하고 복음을 전해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부드럽게 말하고, 귀를 열어 두고, 인내하며 씨를 뿌려야 합니다. 다만 소심해지지 맙시다.세상 나라는 우리 주님의 나라가 되고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주님께서 영원히 다스릴 것이다(요한계시록 11:15). 그러므로 우리는 그날이 이를 때까지 전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우리가 전하고 행동하는 방식은 각자 다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시아의 영원한 통치를 확신케 하셔서, 우리가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열방을 향해서 그리스도께 피난하라고 담대히 말할 수 있게 하실 것입니다.원제: Psalm 2 and World Evangeliza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김은홍
디도서 3장이 가르치는 선한 일
by Justin Dillehay
2023-08-28
성경에는 “행위” 특히 “율법의 행위”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이 많다. 바울은 우리가 율법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반복해서 강조한다. “이것은 여러분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그러나 “선한 일”은 전혀 다른 문제이다. ESV 검색에 따르면 복수 명사 “선한 일”이라는 문구는 신약성경에서 13회 사용되었으며 목회서신에만 8번 나온다. 이 표현은 예외 없이 모범이 되는 그리스도인의 활동을 묘사하기 위해 긍정적이며 또한 전혀 아이러니하지 않은 방식으로 사용된다. 선한 일을 디도서 3장만큼 엄격하게 강조하는 장도 없다. 행여 주변에 선한 일의 필요성에 관해 바울과 야고보가 서로 의견이 다르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디도서 3장을 알려주라. 여기서 우리는 선한 일의 세 가지 측면, 곧 그 기초와 중요성과 정의를 확인할 수 있다.선한 일의 기초윌리엄 윌버포스처럼 선한 일에 평생을 매진한 사람도 한때 기독교를 “기획”(scheme)이라고 정의했다. 왜냐하면 그의 눈에 “거룩함의 열매가 우리를 의롭게 하고 화목하게 하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렇다. 선한 일은 뿌리가 아니라 열매이다. 이 비유를 조금 비틀면, 선한 일이 집에서 일어나는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집의 기초는 아니다.바로 이것이 바울이 디도서 3:8에서 말한 요지이다. “이 말은 참됩니다. 나는 그대가,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해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 바랍니다.”선한 일에 힘쓰라는 말씀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임에 주목하라. 구원받는 믿음과 선한 일은 따로 노는 게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야말로 선행의 기초가 된다.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믿음이 아니다. 그는 지금 복음을 통해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관한 구체적인 믿음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8절을 어떻게 시작하는지 주목하라. 선한 일은 디도가 “이러한 것을 힘있게 주장”한 결과이다. 우리는 신자들이 선한 일을 하도록 이러한 것을 강조한다. 그러면 “이러한 것”은 무엇인가? “참된 말”은 또 무엇인가? 대답은 바로 앞 구절에 나온다. 그러나 우리의 구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인자하심과 사랑하심을 나타내셔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분이 그렇게 하신 것은, 우리가 행한 의로운 일 때문이 아니라, 그분의 자비하심을 따라 거듭나게 씻어주심과 성령으로 새롭게 해 주심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성령을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하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은혜로 의롭게 되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디도서 3:4-7).선한 일이 가능하다고 믿도록 하는 유일한 메시지는 우리가 공로로는 결코 구원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이다. 인간의 직관에 반하는 말처럼 들리는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선한 일이 가득한 집을 원하는 사람은 먼저 그 일을 위한 견고한 기초부터 닦아야 한다. 선한 일의 중요성때때로 복음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선행에 소극적일 때가 있다. 일단 복음만 전하면, 선한 일은 저절로 일어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디도서 3장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바울은 “좋은 일을 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14절)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하여금 선한 일에 전념하게 하기 바랍니다”(8절)라고도 한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설교에서는 도통 만나기 힘든 긴급성을 목격한다. 선행에는 헌신이 필요하다. 결국 우리는 선한 일을 하기 위해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창조함을 받은” 존재이다(엡 2:10). 따라서 이를 수행하기 위해 우리는 적극적으로 “학습”해야 한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는 순간 주입된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잠재력이 담겨있다. 그러함에도 실제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자전거를 배우는 것처럼 학습된 기술이 필요하다. 대사명으로 드러난 제자도의 내용 중 일부가 다름 아니라 사람들에게 선한 일을 하도록 가르치는 것이다(마 28:20).진보 또는 사회 구원을 중시하는 복음이 종종 복음 자체를 제외하고 오로지 선행만을 강조하는 것과 비슷하게 복음을 중시하는 개혁주의는 복음은 강조하지만 사람들에게 선한 일에 헌신하도록 촉구하지 않는다. 전자는 기초를 놓지 않고 집을 짓는 것이고, 후자는 기초만 쌓고 아무것도 세울 마음이 없는 것과 같다. 둘 다 디도서 3장에 반하며, 어느 쪽도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리를 빛나게 하려는 바울의 의도를 반영하지 못한다. 선한 일의 정의이 시점에서 누군가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알겠어요. 선한 일이 중요하지요. 그런데 그게 정확하게 뭡니까?” 감사하게도 디도서 3장은 우리에게 기본적인 정의를 제공한다. 선행은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실천적인 사랑의 행위이다. 나는 이 정의를 디도서 3장 속 몇 군데에서 찾아냈다. 8절에서 바울은 선한 일에 관해 말하면서 “선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에게 유익합니다”라고 말한다. “어리석은 논쟁”이나 “율법에 관한 싸움”(9절)과 달리 선행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다. 그리고 14절에서 바울은 “우리의 교우들도 절실히 필요한 것을 마련하여 줄 수 있도록, 좋은 일을 하는 데에 전념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라고 말한다. 당신은 필요를 알고 사랑으로 그것을 충족시키려고 노력한다. 그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행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워줌으로써 드러내는 그리스도를 향한 넘치는 사랑이다.우리는 13절에서 구체적인 예를 본다. “서둘러 주선하여 율법교사인 세나와 아볼로를 떠나 보내 주고, 그들에게 조금도 부족한 것이 없게 해 주십시오.” 복음을 위해 교회에서 누군가를 파송할 때, 그들의 모든 필요가 충족되는지 확인하라. 이것이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위해 행한 일이며(빌 4:15-18), 또한 바울이 세나와 아볼로를 위해 그레데 교회가 행하기를 바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한 일이다. 선한 일은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다. 물질적인 일일 수도 또는 영적일 일일 수도 있다. 그리고 받는 사람은 누구라도 가능하다. 다음은 몇 가지 예이다. •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복음을 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나쁜 꿈을 꾸고 새벽 두 시에 깬 네 살 아이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침대에서 일어나 아이를 안아주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자기네 말로 쓰인 성경이 필요한 종족은 여전히 많다. 언어학을 공부하거나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배워 그들에게 성경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상처받은 사람들에게는 기도와 긍휼이 필요하다. 그들을 안고 기도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아기들은 기저귀를 갈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싼 오물 속에 누워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긴급한 필요이다. 부모라면 아동 센터에 가서 방치당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번 확인해보라. 그러면 앞으로 기저귀를 갈고 저녁 식사를 준비할 때 그리고 아이의 잠자리를 봐주며 이야기를 읽어주는 것이 얼마나 선한 일인지 알게 될 것이다. •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일자리가 필요한 사람이 많다. 따라서 사업의 재능을 활용하여 회사를 세우고 의미 있는 노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선한 일이다. • 회사에는 믿을 수 있는 직원이 필요하다. 술에 취하지 않고 제시간에 출근하고, 또 상사의 지시를 따르는 것은 선한 일이다. • 시민은 폭력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따라서 총격범을 사살하는 경찰관은 선한 일을 하는 것이고, 경찰관, 군인, 변호사, 사회복지사가 되어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법과 질서를 유지하는 것도 모두 다 선한 일이다.선한 일을 향한 열정을 갖는 것“선한 일”은 결코 눈을 가늘게 뜨고 힘들게 찾아야 하는 게 아니다. 밭은 무르익었고, 필요는 넘치며, 기회는 어디에나 있다. 윌리엄 윌버포스는 “누구도 게으르게 놀 권리가 없다”라고 했다. 세상에는 항상 “깨뜨려야 할 무지, 고쳐야 할 잘못, 공급할 부분, 완화해야 할 불행”이 넘친다. 선한 일을 한다고 당신이 꼭 유명해지는 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윌버포스가 되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은 이 땅에서 전혀 기억되지 않을 것이다. 소설가 조지 엘리엇이 말했다. “이 세상에서 일어난 좋은 일은 부분적으로 역사에 전혀 남지 않은 행위로 인해 가능했다. 당신과 내가 지금 사는 세상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것은 다 숨겨진 삶을 신실하게 살았고 아무도 방문하지 않은 무덤에서 쉬고 있는 수많은 이름 없는 사람들 덕분이다.”그러나 복음은 언젠가 그 무덤에 누워 있던 사람들이 부활하고 이름 없던 그들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에 의해서 온 우주 앞에서 인정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것이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내가 배고플 때 네가 나를 먹였다. 내가 벌거벗었을 때 네가 나를 입혔다.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찾아주었다. 내가 무서울 때 네가 나를 위로했다. 내가 더러워졌을 때 네가 나를 씻어주었다. 내가 무지할 때 네가 나를 가르쳐주었다. 내가 위협받을 때 네가 나를 지켜주었다. 내가 고아였을 때 네가 나를 입양했다. 내가 목적을 모를 때 네가 나를 인도했다. 내가 실직했을 때 네가 나를 고용했다. 내가 길을 잃었을 때 네가 복음을 전했다. 나는 인기가 없었지만, 너는 기꺼이 나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날이 오면 당신은 삶이 헛되지 않았고 수고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바로 우리를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고대하는”(딛 2:14) 사람으로 창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선한 일에 더 헌신하는 방법을 배우자. 원제: Good Works According to Titus 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이 온전한 사랑이다
by 최창국
2023-08-26
12세기의 영성가 성 버나드(St. Bernard of Clairvaux)는 신자의 영적 성숙에 따라 경험하는 하나님 사랑을 네 단계로 설명하였다. 제1 단계는 자기를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원초적이고 본성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기적인 사랑의 단계다. 이 사랑의 단계를 극복하기 위해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따라서 성경은 온 인격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고 말한다(마 22:37-40). 제2 단계는 자기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복을 얻기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선물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믿으면 구원받고, 복을 받고, 환난 중에 도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나님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해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러한 사랑은 타산적 사랑이다. 이 단계의 신앙은 기복신앙에 머무르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전환기이기도 하다.제3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단계다. 나의 영적인 필요에 의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교제하다 보면, 하나님의 선하심을 깨닫게 되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영적으로 성숙해지면 하나님은 위대하시며 그 자체로 우리의 경배를 받기에 합당하신 분인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단계의 사랑은 하나님이 나에게 선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이타적 사랑이다. 제4 단계는 하나님을 위해 자기를 사랑하는 단계다. 하나님이 나를 얼마나 귀하게 여기시며 사랑하시는지 알아 나를 사랑하는 단계다. 여기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은 제2 단계에서 자기를 사랑하는 것과 목적과 이유가 다르다. 여기서 자기를 위한 사랑이 둘째 단계와 유사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차원의 사랑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신이란 창조주의 사랑에 의해 압도된 자신을 의미한다. 성령을 통해 자신의 가장 깊은 곳에 언제나 계시며, 우리 자신보다 우리를 더 잘 알고 더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충만한 자신을 의미한다. 제2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 때문이지만, 제4 단계에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의 성숙한 자녀로서 살기 위해서이다. 특히 이 단계에서는 내가 가진 소유나 명예 때문에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인 나의 존재 자체를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나의 자랑할 만한 것이 내 자존감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존귀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나를 사랑한다. 이 단계의 사랑은 온전한 사랑이다.버나드가 제시한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우리의 정체성에 대해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 준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우리가 하는 일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 자신에 가리켜 하는 말이나 우리가 소유한 것이 우리의 정체성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도 모르게 왜곡된 정체성의 덫에 빠진다. 헨리 나우웬(Henri Nouwen)은 “너는 내 사랑하는 자라”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 모든 인간에 대한 가장 깊은 진리가 계시된다고 이해하고, 모든 영적 유혹은 이 근본 진리를 의심하고, 그 밖의 다른 정체들을 믿게 하는 것과 관련된다고 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정체성은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실 때, 하나님이 예수님을 행해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눅 3:21-22)는 말씀 안에 있다고 하였다. 그에 따르면, 예수님은 이 체험을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깊은 방식으로 체득하게 된다. 나우웬에 따르면, 광야에서 예수님에 대한 사탄의 시험(눅 4:1-13)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말씀하신 진정한 정체성을 앗아가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이 예수님의 진짜 자기(true self)를 가짜 자기(false self)로 대체하려고 하려는 유혹이었다. 사탄은 “너는 돌로 떡을 만들 수 있는 자다. 성전에서 뛰어내릴 수 있는 자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네 권세에 절하게 만들 수 있는 자다”라고 유혹하였다. ‘네가 하는 것이 곧 너다. 네가 가진 것이 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이 너다’라는 사탄의 유혹에 예수님은 “아니다”라는 선언과 함께, “나는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다”라고 선언하신다. 나우웬은 영적 삶의 가장 큰 적은 자기 거부라고 진술한다. “삶의 가장 큰 덫은 성공이나 인기나 권세가 아니라 자기 거부, 자신의 참 존재를 회의하는 것이다. 성공과 인기와 권세도 과연 큰 유혹일 수 있으나 그 유혹의 질은 자기 거부라는 훨씬 큰 유혹의 일부라는 데에 있다. 우리를 무익하고 사랑받지 못할 존재라고 부르는 소리를 믿게 되면, 성공과 인기와 권세가 어느새 매력 있는 해답으로 다가온다”(헨리 나우웬, 영성 수업, 51).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라는 것을 망각할 때, 수많은 형태의 자기 부정에 빠지게 된다. 자기 거부나 부정의 유혹은 때로는 교만의 형태로 때로는 열등감의 형태로 나타난다. 자기 부정은 자신감 부족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지나친 자만심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자기 거부는 영적인 삶의 가장 큰 적이다.버나드가 설명한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기복적인 경향이 있으므로 진짜 자기를 가짜 자기로 대체하기 쉽다. 본성적 사랑과 타산적 사랑은 자기 존재 자체를 사랑하기보다는 감각적인 소유와 성과와 인기에 목적을 두기 때문에 자기를 가짜 자기로 쉽게 대체한다. 물론 우리에게 소유와 성과와 인기가 필요하지만, 이러한 것들에 사로잡힐 때 우리는 자기 부정의 덫에 빠지게 된다. 우리의 정체성이 진짜 자기가 아니라 가짜 자기로 대체 될 때 무엇보다도 낮은 자존감에 노출되기 쉽다. 가짜 자기는 우리를 끊임없는 욕망과 비교의 터널로 끌고 가는 특성이 있기 때문이다.버나드가 제시한 제4 단계의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하나님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시듯이, 우리도 우리를 사랑하는 단계다. 이 사랑은 건강한 자존감을 형성하게 된다. 우리의 행위나 소유에 따라 우리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 없는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 사랑에 이를 수 없고, 감각적인 우상에 빠지기 쉽다. 하지만 하나님을 위한 자기 사랑은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게 되므로 가장 복된 자기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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