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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GC Advent Concert
by TGC
2023-12-01
TGC Advent Concert '소망의 찬양'은 세계적으로 유명한 찬양사역자들의 출연으로 크리스마스 찬양과 성구들이 매우 잘 구성된 콘서트입니다. 찬양과 시와 말씀을 통해 평안을 누리고 소망을 얻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Songs of Hope: A TGC Advent Concert].1. 오 거룩한 밤(쉐인 앤 쉐인)2. 황량한 한 겨울에(키스 & 크리스틴 게티)3. 엘리사벳의 기쁨(푸어 비숍 후퍼)_말씀(누가복음 1:39-42)4. 임마누엘(테니엘 네다, 존 구에라)_말씀(이사야 7:14)5. 마침표!(퀴나 아라곤)_말씀(이사야 11:1)6. 엘리사벳을 위로하는 마리아(산드라 맥크라켄)_말씀(마태복음 1:21)7. 저 들 밖에 한밤중에(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누가복음 2:10-12)8. 누우실 곳 없는 왕(리즈 바이스, 매디슨 커닝햄)_말씀(마태복음 2:13-14)9. 그날이 오면(캐롤라인 콥)_말씀(이사야 2:4)10. 어두운 곳의 크리스마스(글렌 스크리브너)_말씀(이사야 9:2)11. 참 반가운 신도여(솔버린 그레이스 뮤직)_말씀(갈라디아서 4:4-5)12. 그리스도(푸어 비숍 후퍼)_말씀(마태복음 1:17)13. 얼마나 아름다운지(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히브리서 2:14-15)14. 마리아의 송가(블레어 린)_말씀(누가복음 1:46-19)15. 산 위에 올라가서(쉐인 앤 쉐인)_말씀(이사야 52:7)16. 기쁘다 구주 오셨네(산드라 맥크라켄)_말씀(시편 98:2-4)17. 곧 오소서 임마누엘(조쉬 게럴스)_말씀(이사야 35:10)18. 깨어 있으라(캐롤라인 콥)_말씀(마태복음 25:13)19. 기쁨이 충만하기를(키스 & 크리스틴 게티)_말씀(요한복음 1:9)20. 오 거룩한 밤(퓨처 오브 포레스트리)_말씀(요한복음 1:14)
그는 현대판 ‘하나님의 도성’을 쓰고 싶을 것이다
by Chris Watkin
2023-10-30
기독교 고전 재발견C. S. 루이스의 조언에 따라 우리는 “수 세기 동안 불고 있는 깨끗한 바닷바람이 여러분의 마음을 스쳐 지나갈 수 있도록” 돕고 싶습니다. 그리고 루이스에 따르면 그건 오로지 “오래된 책을 읽어야만 가능합니다.” 그 목표를 위해서 우리가 잊고 지낸 기독교 고전을 재발견하는 시리즈(Rediscovering Forgotten Classics series)를 시작한다. 우리는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교회에 도움을 주는, 그러나 우리가 잊고 있는 기독교 고전을 하나씩 찾아나갈 것이다. 이와 닮은 주제를 크리스 왓킨은 그의 신간 Biblical Critical Theory: How the Bible’s Unfolding Story Makes Sense of Modern Life and Culture(성서 비평 이론: 성서 속 이야기를 통해 현대 생활과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에서 탐구한다. TGC 편집장 콜린 핸슨은 이 책을 “내가 읽은 최고의 책 중 하나”라고 극찬했다. 자, 다음과 같은 사회를 만난다면 어떤 느낌일까? 아무런 논리도 없이 오로지 상대를 향해 소리만 지르는 완강한 파벌로 쪼개진 사회. 자유와 개방성에 대한 자축에 가까운 수사학으로 시대가 숭상하는 우상을 향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압박을 교묘하게 가리는 사회. 엘리트만의 라이프 스타일을 유지하기 위한 정치 및 경제 세력의 공모가 판을 치는 사회. 그리고 미신을 따르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역사의 올바른 편”에서 살고 있다고 확신하지만 정작 수많은 기괴한 미신과 오래된 편견으로 가득한 사회. 이런 사회, 우리에게 너무나도 친숙하지 않은가?5세기 로마에 온 것을 환영한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 유명한 사회 및 정치 이론서 하나님의 도성을 집필할 당시의 로마는 말 그대로 복잡하고, 비틀거리고, 분열되고, 자기모순에 가득 찬 사회였다. 히포의 주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이 책은 당시 로마 상황을 반영하는 현대 사회를 향한 문화적 비평에 필요한 강력한 틀을 제공한다. 다음은 아우구스티누스의 걸작에서 뽑은, 그리스도인이 현대 문화에 참여하는 방식을 심화하고 개발하는 데 도움을 주는 여섯 가지 도구이다. 1. 안에 머무는 아웃사이더가 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단지 후기 로마 문화에 대한 이런저런 목록을 나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는 로마 문화를 속속들이 알고 있었고, 그의 글은 그 점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카르타고와 로마에서 수사학을 강의했고, 진심을 담은 경외감으로 키케로를 인용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이 책을 쓴 건 단지 당시 쇠퇴하던 로마 문화를 부당하게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는 로마 문화를 자기네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그 문화가 왜 그토록 찬란했던 건지, 그 이유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동시에 아웃사이더이기도 했다. 현대 알제리에 해당하는 북아프리카 타가스테 출신인 그는 그리스도인 어머니와 이교도 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무엇보다 그를 로마 문화의 외부에 두는 요소는 바로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충성을 맹세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참여라고 할 때 보통 “민감한 인사이더” 또는 “용감한 아웃사이더” 중에서 선택하는 식으로 접근하는 게 일반이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두 가지를 결합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보여준다. 2. 문화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후기 로마 문화 내에서도 고립된 경향만을 따로 떼어내서 평가하지 않았다. 그는 문화 전체를 관통하는 심오한 구조와 근본적인 가정을 탐구했다. 즉 문화의 악덕만 아니라 미덕까지, 철학만 아니라 경건까지, 그리고 대중적 오락만이 아니라 정치적 환경까지 고찰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어떤 특정한 문화 도깨비를 박멸하기 위해서 뛰어든 특수기동대가 아니다. 이 책은 로마 사회 전체의 길이와 폭을 다 아우르는 경찰 전체의 감시망이다. 아우구스티누스 이전까지 그 누구도 이런 작업을 한 사람이 없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아우구스티누스 연구자 찰스 매튜스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도성은 특정 사회 환경 속 모든 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성찰하지 않는 현실을 대상으로 누군가 오늘날 비판적 사고방식이라고 부를 수 있는 개념을 발전시켰다는 점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포괄적인 모든 사회이론과 비판이론의 뿌리는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3. 성경 전체를 다루라아우구스티누스는 성경 몇 구절과 애용하는 기독교 교리 몇 가지를 가지고 로마 문화를 다루지 않았다. 하나님의 도성 11-20권에서 그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 전체를 개관한다. 그리고 성경이 어떻게 로마가 가진 각종 해괴망측한 믿음을 대체할 수 있는 일관되고 설득력 있는 대안을 제시하는지 보여준다. 성경은 문화적 범주에 끼어들지 않고 성경만의 방식으로, 성경만의 강조점을 제시하며 독창성 있게 스스로를 제시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접근 방식은 일부 현대 패러다임과는 달리 창조, 죄, 심지어 구속에 관한 것도 아니다. 그의 문화 비평은 일관되게 성경적 균형을 유지한다. 4. 표면 아래를 살펴보라아우구스티누스의 문화 비평은 전혀 얄팍하지 않다. 그는 문화가 스스로에 대해 말하는 것을 분석하는 데 만족하지 않는다. 표면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밝히기 위해 지각판을 파헤친다. 아우구스티누스에게서 구조 분석의 핵심은 사랑이다. 두 도시가 두 가지 사랑으로 만들어졌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자신에 대한 사랑이다. 실제로 사랑은 사상보다 더 깊다. 그는 이렇게 썼다. “영혼을 움직이는 건 사랑이고, 몸을 움직이는 건 무게이다.” 문화 사상과 행동 또는 태도를 접할 때 그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것이 드러내는 건 어떤 사랑인가?”라는 질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현대 문화를 고찰할 때 여전히 사용할 수 있는 예리한 질문이다!5. 대립과 성취 사이의 잘못된 선택을 거부하라아우구스티누스는 두 도시 사이의 대립만을 보는 그리고 하나님의 도시가 지상 도시의 가장 깊은 갈망을 어떻게 충족시키는지만 보는, 쌍둥이처럼 닮은 두 가지 함정을 피한다. 더불어서 대립과 성취 차이를 애매하게 가로지르는 미지근한 타협도 피한다.그의 독특한 전략은 책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단어를 통해서 놀랍도록 분명하게 드러난다. “가장 영광스러운 것은 하나님의 도성이다….” “영광”은 로마를 특징짓는 가치였다. 로마가 적을 어떻게 정복하고 멸망시켰는지를 보면 로마의 영광이 분명해진다. 따라서 로마의 영광은 결코 기독교의 미덕이 아니었다. 만약에 아우구스티누스가 오늘날 책을 쓴다면, 그 책은 현대인에게 가장 감각적으로 다가갈 단어를 써서 이런 식으로 시작할 것이다. “모든 사람 중에서 가장 해방된 이가 그리스도인이다.” 또는 “나의 하나님은 당신보다 더 깨어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에게 이런 식의 언어는 선을 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 당신은 지금 현대 문화의 상징인 Kool-Aid를 마신 거요[Drink the Kool-Aid: 무언가를 심각할 정도로 믿는다는 뜻의 은어_편주]. 그런 단어를 사용하면 안 됩니다. 불필요하게 도발적이고 잠재적으로 오해의 소지가 있습니다. 로마인과 어울리다가 같이 망하지 말고 그들로부터 탈출하세요!”그러나 이런 식으로 반대하는 사람은 영광에 대한 아우구스티누스의 정의가 로마가 말하는 영광의 정의와 정반대라는 사실을 잊고 있다. 그가 말하는 영광은 자신을 높이고 노예를 거느리는 가이사의 영광이 아니다. 자신을 비우고 남을 섬기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영광에 대한 호소는 두 가지를 동시에 달성하는 화려한 시발점으로도 볼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도성을 로마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영광을 가장 깊고 진실하게 실현하는 형태로서 설정한다. 그러나 동시에 영광에 대한 로마의 이해는 한낱 뒤틀린 환상에 불과하며 로마 안에는 진짜 영광이 없다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도성은 성경의 패턴을 따른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미련함을 세상 지혜와 철저한 대조(20-23절)인 동시에 세상 지혜가 추구하는 모든 것의 완전한 성취(25, 30-31절)로 제시한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 선포를 대조 또는 성취 중에서 선택할 이유가 없다. 복음은 이 두 가지를 다 포함한다. 6. 교회와 문화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하라아우구스티누스가 주는 마지막 교훈은 하나님의 도시와 지상의 도시가 현시대에는 서로 얽혀서 뗄 수 없는 관계이지만, 최종 심판의 날 완전히 분리될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지나치게 대조를 강조하는 문화 비평의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완전히 별개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그래서 문화가 형성하는 여러 방식에 무지하기 쉽다. 반대로 지나치게 성취를 강조하는 접근 방식은 두 도시를 근본 가치에서 동일한 대안의 표현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회가 받아들일 수 있는 적절한 수준의 복음 외에는 세상을 향해 그 어떤 것도 제대로 선포할 수 없게 된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가 보여주는 성경의 틀은 우리가 굳이 감당하기 힘든 두 가지 선택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필요가 없음을 보여준다. 이 시대에도 두 도시는 여전히 얽혀 있다. 세상 “문화”는 결코 문밖에 서서 교회가 문을 열어주기만 얌전히 기다리고 있지 않는다. 좋든 싫든 세상 문화는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형성한다. 동시에 전혀 다른 운명을 가진 두 도시의 운명은 후기 현대적 사고방식이 아무리 편안하게 느껴지더라도 이 세상은 결코 본향이 아니고 우리는 세상을 비판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행여라도 우리가 후기 현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우리가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성은 우리 시대에 성경에 충실하면서 동시에 민감함을 잃지 않고 현대 문화 속에 참여하려는 그리스도인에게 청사진을 제공한다. 지난 세월, 이 책이 가진 광채를 모방하려는 작가가 적지 않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능가하지는 못했다. 하나님의 도성아우구스티누스히포의 주교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기독교 역사의 중심인물의 한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의 도성은 가장 위대한 신학 저서 중 하나이다. 로마제국이 무너지기 직전에 신앙을 변호하기 위해 쓴 이 책은 로마의 고대 이교, 그리스 철학자의 주장, 그리고 성경의 계시를 고찰한다. 로마라는 당시 세계 최고의 정치 경험을 뛰어넘어 영원히 지속될 시민권을 제공하는 하나님 나라 시민이 걸어야 할 길을 제시하는 하나님의 도성은 기독교 발전에 가장 막대한 영향을 끼친 저작 중 하나이다. 원제: Augustine Could’ve Written ‘City of God’ in 2022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도성
아우구스티누스
음악, 또 하나의 복음 언어
by 서나영
2023-10-11
우리 그리스도인이 세상에 진리를 알리고자 한다면 우리가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활용해야 한다. 바울은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고전 9:22)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대문화 속에서 복음전도에 관한 언어적 고민은 결코 쉬운 문제가 아니다. 특히 다음 세대가 시각적, 청각적, 문학적 언어를 선택하는 양상이 짙어지고 있는 오늘날, 제프 밴더스텔트(Jeff Vanderstelt)가 말했던 “복음의 언어”는 단순히 언어의 개념을 넘어 유창해질 필요가 있다. 음악은 바울이 고백했던 “여러 모양” 중 하나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주의 백성들은 언제나 음악의 아름다움을 가장 숭고한 사명인 복음에 옷 입히길 원했다. 문학신학자 리랜드 라이켄(Leland Ryken)은 “예술의 유용함이란 언제나 진리와 연관되어 있다”고 말했는데,[1] 이는 예술이 진리를 전달할 때 가장 숭고한 역할을 수행하게 됨을 뜻한다. 특별히 ‘음악’은 ‘시’라는 거대한 문학 장르와 합쳐져서 진리를 함양할 수 있는 광대한 세계다. 세계적 베스트셀러 작가 타라 웨스트오버(Tara Westoiver)는 자신이 겪은 삶의 이야기를 엮어 2018년에 출간한 배움의 발견(Educated)에서 16년간 학교에 다녀본 적 없는 한 소녀가 배움에 대한 갈망이 생기게 된 계기를 정확하게 나타낸다. 그것은 음악이었다. 그녀는 처음 정교한 합창음악 음반을 들으며 질서 없는 모든 공기가 조화롭고 균형을 잡으며 질서가 생기는 환상을 보았다. 매일 음악을 들으며 그녀는 꿈을 키웠다. 당시에는 그 꿈이 무엇인지 몰랐으나, 후에 그 꿈은 한 인간으로 정돈되고 교육되고 꿈꾸는 삶 그 자체였다. 후에 음악이 아닌 지성사에 대한 연구로 케임브리지 대학 박사가 되지만, 그녀가 이룬 결과는 음악의 세계와 다르지 않다. 음악은 혼돈 속에 떠다니는 공기 중의 파장을 모으고, 적합하고 아름답게 재배열하고, 비례와 균형과 조화를 만들어 낸다. 피타고라스에서 플라톤을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 서양에서는 음악과 우주의 원리에 대한 밀접한 관계에 주목했다. 이들의 음악적 소리, 특히 화성과 리듬의 조화가 우주의 질서와 일치함을 보고, 우주의 질서를 표현하고 반영하여 어떤 방식으로든 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당시 음악은 교양 과목 중 하나로 소리들 사이의 측정 된 관계(특히 시적인 음)와 관련된 지적 분야였고, 지금 시대의 음악의 실용성보다 훨씬 뛰어난 개념이었다. 당시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음악신학적 연구를 보면 인간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통해 일시적인 타락한 영혼이 잃어버린 하나님과의 관계의 조화를 회복할 수 있다고 믿었다.[2] 유진 피터슨 목사 또한 그의 저서 다윗: 현실에 뿌리박은 영성에서 성경 속 다윗이 연주한 수금 음악이 사울의 영혼을 정돈하는 역할을 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음악의 신학적 아우라는 시문학과 결합하여 놀랍도록 아름다운 언어로 변신한다.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의 Letters and Papers from Prison에 들어 있는, 그가 사형집행 직전 쓴 음악들은 진정한 기독교의 언어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진리를 나르는 아름다운 시, 선율, 그리고 운율의 언어다. 때로는 ‘복음’의 비유로, 때로는 ‘계시’의 비유로, 진리의 증인의 역할을 진귀한 예들은 역사 속에 넘치도록 충만하다. 특히 시라는 문학예술 장르를 생각해 보면 복음 언어로의 음악의 가치를 이해할 수 있다. 만일 어떤 복음의 텍스트의 ‘의미’가 필요한 것이라면, 만일 그 복음의 자세한 내용만이 중요하다면, 복음을 나타나는 텍스트 이외의 다른 요소는 불필요하지 않겠는가? 시는 일반 텍스트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특별히 음악에 포함되어 있는 시(운율)의 텍스트는 일반 에세이나 연설문에 비해서는 턱없이 그 양이 적다. 그렇지만 시는 일반 텍스트가 가지지 않은 놀라운 설득의 힘을 가지고 있다. 클랜스 브룩스(Cleanth Brooks)와 로버트 워렌(Robert Penn Warren)은 그들의 저서 Understanding Poetry에서 롱펠로(Longfellow)의 시 “인생의 시편(a Psalm of Life)”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시가 우리에게 제공해야 하는 것이 단지 ‘말의 조언’이라면, 이 좋은 조언에 대한 짧은 산문 진술이 시 자체만큼 좋지 않거나 그보다 더 나은 이유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메시지’ 때문에 시를 좋아한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대개, 평범한 산문 진술보다 시를 선호할 것이다.”[3] 즉, 인간은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이나 시, 또는 스토리 기반의 영화나 드라마 장르를 “일반 설명”으로 바꾼 것으로 대체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예술은 인간에게 실제로 경험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또 하나의 매력적인 언어이기 때문이다.성경 또한 그 자체로 예술적 문학의 방법이 다양하게 구사되어 있다. 특별히 시편과 애가, 아가서와 묵시들은 인간의 오감을 자극하는 놀라운 진리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눅 24:44). 예수 그리스도는 직접 “시편”이라는 책이 궁극적으로 자신에게 대한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각 성경의 책들은 하나님의 구속 사역을 역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의 인격과 역할을 통해 이루셨다는 것을 나타내는데, 시편은 다른 어떤 책보다 독특한 방식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낸다. 예를 들면, 시편 2편에서는 메시아의 나라에 대한 예언을 직관적으로 표현한다. 22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를 예표하는 통탄의 표현이 있으며(1절), 특히 25편에서는 사무엘하 7장에 기록된 다윗의 영원한 통치의 약속을 강조한다(6절). 시편이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한두 구절 때문에 복음과 관련된 것이라 보기에는 훨씬 더 “그리스도 중심적”(Christ-centered)이다.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내면과 감정을 통한 마음의 소리는 (1)그들의 사하심을 구하며(시 32, 51, 130), (2)애통하며(시 12, 13), (3)감사하며(시 9, 106, 138), (4) 하나님의 법에 감탄하며(시 19, 119), 구속을 확신한다(시 23).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정하시고 선포하신 시편의 복음성은 복음의 시와 합쳐진 음악이 복음을 전하는 독특하고 신비한 언어가 될 수 있음을 지지한다. 요한계시록도 마찬가지다. 총 404구절 중에 계시록을 제외한 다양한 성경책들의 내용을 인용하는데 그 내용이 518번이 언급된다. 유진 피터슨 목사는 그의 저서 요한계시록: 현실을 새롭게 하는 상상력에서 사도 요한의 묵시 속의 성경 언급은 인용이 아니라 “성경에 완전히 동화되어 … 성경의 이미지들과 개념들이 살아 있는 몸 안에 얽히고설켜 살아 있는 조직이 되었음”을 강조한다. 이 시들은 성경의 내용들과 분리할 수 없는 새로운 개체가 되었다는 뜻이다. 계시록은 그 자체로 복음을 노래하며 어린양을 찬양하는 놀라운 시다.플래너리 오코너(Flannery O’Connor)는 “음악이나 시, 한 예술 작품을 진지하게 깊이 본다면, 그 안에 있는 세상을 더 많이 볼 수 있다”고 말했다.[4] 특히 음악은, 시와 함께 경험적 진실뿐 아니라 그 진실에 대한 인간 감정의 내면을 그리고 표현하고 이끄는 데 능숙하다. 그리고 복음은 비유의 스토리와 시와 다양한 표현을 포함한다. 오늘날 교회와 신학은 음악에 대해 충분히 관대하다.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k)가 말했던 “신학의 시녀”로 말이다.[5] 음악은 복음전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도구다. ‘메시지를 떠난 음악(악기 음악)’ 또한 감정과 경험을 전달하는 데 매우 강력한 도구로 사람의 마음을 열고, 진리의 따뜻함을 선사하고, 복음의 능력을 기대하게 하는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촉매제의 역할을 할 수 있다. 동시에 음악은 ‘복음의 또 다른 언어’다. 음악은 때로 예술의 한 분야에 갇혀 있는 것이 어울리지 않을 때가 많다. 음악은 우주적 조화와 질서를 가지고 ‘시’라는 문학을 장착해 복음과 진리의 스토리를 전달할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음악은 복음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만들어졌으며, 교회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복음의 언어’로의 역할을 감당하는 또 하나의 ‘목소리’다. 음악이 ‘오직 말씀’을 돕는 시녀가 아니라, ‘오직 말씀’을 울려 퍼트리는 ‘아름다운 언어’로 승격됨을 고대하며, Sola deo gloria!1. Ryken, The Liberated Imagination, 125.2. Harrison, “Augustine and the Art of Music,” 40-45.3. Cleanth Brooks and Robert Penn Warren, Understanding Poetry, 3d ed. (New York: Holt, Rinehart and Winston, 1960), 10.4. Flannery O’Connor, Mystery and Manners, ed. Sally and Robert Fitzgerald (New York: Farrar, Straus and Girroux, 1957), 73.5. Bavink, Gereformeerde Dogmatiek, 1:787.
음악
톨킨이 팀 켈러에게 끼친 영향
by Collin Hansen
2023-10-03
J. R. R. 톨킨에게 깊은 애정이 있었던 팀 켈러는 ‘반지의 제왕’ ‘실마릴리온’이든 또는 톨킨 사후에 출판된 13권의 전집이든, 그가 쓴 책을 쉬지 않고 읽었다. 어떻게 해야 소설가가 복음주의 목사에게 그토록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건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렇다고 1937년에 ‘호빗’을 출판한 톨킨이 미국의 중산층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당장 영웅으로 등극한 건 아니었다. 그건 1954년에 ‘반지 원정대’가 나오고도 마찬가지였다. 1970년대에 들어서도 톨킨은 단지 환경 파괴, 전쟁으로 파괴된 풍경, 그리고 샤이어에서 살면서 파이프 담배에 만족하는 작은 호빗에 대한 비전 정도로 대표되는, 반문화의 목소리를 내는 작가 정도로만 알려졌고 전 세계의 기차역에는 “간달프를 대통령으로”와 “프로도는 살아있다” 등의 낙서가 보이기 시작했다. 1970년 한 해에만 해도 밴드 Black Sabbath, Led Zeppelin, 그리고 Genesis 모두가 다 톨킨의 작업에 근거를 둔 노래로 차트에 올랐다.제인 치아바타리(Jane Ciabattari)는 BBC에 이렇게 썼다. “오늘날 우리는 톨킨의 작업이 코믹콘(Comic-Con)의 괴짜 세트와 일치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때는 우드스탁(Woodstock)에 모이는 군중에 더 가까웠다.”팀 켈러의 여동생 샤론 존슨은 1972년을 톨킨의 여름으로 기억한다. 버크넬 대학을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 들어가기 전에 팀은 펜실베이니아 존스타운에 있는 부모님 집으로 돌아갔다. 첫째이자 선생 그리고 열정가인 팀은 여동생에게 C. S. 루이스, 특히 톨킨의 책을 읽도록 했다. 팀은 계속해서 동생을 다그쳤다. “아직 다 안 읽었어? 아직도 안 읽었다고?” 그는 동생이 자신이 배운 모든 것을 따라하기를 기대했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다 동생과 공유하고 싶어 했다.팀의 사망 전에 샤론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팀은 직관력이 있어요. 그는 다양한 도약과 연결을 만드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팀의 이야기를 좋아했어요. 우리는 성경 공부를 했고 또 같이 북 스터디도 했어요. 이런저런 모든 비교와 대조를 했는데, 무엇보다 톨킨의 작품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찾곤 했어요.”켈러가 우상 숭배의 위험성을 알리고 싶었을 때 의지한 대상이 바로 톨킨이었다. 소설 ‘반지의 제왕’은 사우론에 있는 권력의 반지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지가 가진 모든 힘을 내 것으로 만들어서 영원히 휘두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나 필연적으로 반지가 주는 매혹적인 주문에 빠질 수밖에 없다. 노예 해방, 왕국의 보호, 죄인 처벌 등 당신이 추구하는 대의가 아무리 훌륭하더라도 반지는 결코 길들일 수 없다. 대의로 치장된 좋은 것들은 윤리를 단순한 방해물로 만드는 절대적 욕구가 된다. 톨킨은 로마서 12:18-21에서 악으로 결코 악을 이길 수 없다는 바울의 경고를 예시로 반지를 사용한다. 오직 좋은 것만이 폭발력을 가진다. 켈러는 이렇게 말한다. “반지를 낀 사람은 점점 더 반지에 예속되고 중독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상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떻게든 반지를 가져야만 한다. 그리고 반지는 우리가 한때 존중했던 규칙을 어기게 만들고 반지를 얻기 위해서라면 다른 사람은 물론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도 해를 끼치게 만든다. 톨킨의 소설과 실제 삶에서 우상은 끔찍한 악으로 이어지는 영적 중독이다.”켈러는 Every Good Endeavour에서 약간 다른 적용 방식으로 동일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소명에 관해서 쓴 이 책에서 켈러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톨킨의 또 다른 이야기인 “Leaf by Niggle”에 내용의 대부분을 의존했다. 그는 또한 일에 관한 2004년, 2008년, 2009년 그리고 2010년에 설교에서도 같은 이야기를 사용했다. 켈러는 1995년 공개 포럼에서도 그 이야기를 언급했다. 켈러에게 “Leaf by Niggle”은 우상 숭배에 관한 교훈을 주는 반지 이야기와 함께 Tribeca에서 일하는 Makoto Fujimura와 같은 예술가뿐 아니라 월스트리트에서 일하는 뉴욕의 여피들에게까지도 매력적일 수 있는 소재였다.톨킨의 ‘반지의 제왕’ 3부작은 단지 사랑받는 작품으로만 끝나지 않는다. ‘호빗’ 및 다른 저작물을 통해서 그는 언어와 배경 이야기가 가득한 하나의 완전한 우주를 창조했다. 그는 이 작품에 수십 년을 매달렸다. 사실 톨킨은 죽기 전에 작품을 완성하지 못할까 봐 걱정했다. 행여라도 중간계가 꼭대기가 잘려버린 나무가 될까 봐 걱정했다. 창의력이 한계에 도달했다고 걱정할 때 문득 떠오른 게 바로 한 화가에 대한 짧은 이야기였다. 톨킨은 그것을 “Leaf by Niggle”이라고 불렀다.니글이라는 이름 자체가 이야기의 기원을 알려준다. 톨킨은 혼자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었다. 또한 완벽주의 경향도 생산성에는 방해가 되었다. 꼭 가야 하는데 니글이 미루고 있는 여행을 통해서 톨킨은 죽음을 말하고 싶어 했다. 여행을 떠나기 전에 니글은 적어도 그림 하나를 꼭 완성하고 싶어 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건 숲과 평야, 눈 덮인 산으로 가득한 나라 전체였다. 하지만 그는 외로운 나무에 달린 나뭇잎 하나에 먼저 집중해야만 했다. 완벽주의와 이웃의 도움 요청 사이에서 그는 결코 그림을 완성하지 못했다. 이웃을 도우던 중에 니글은 병에 걸렸고, 더 이상 여행을 연기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죽었다. 그가 살던 집을 산 사람들은 니글의 그림이 담긴 캔버스를 발견했고, 그들이 거기에서 본 것은 오로지 나뭇잎 하나가 전부였다. 그들은 그 그림을 박물관에 기증했고, 그곳에서 몇몇이 그 그림을 보았다.정의와 자비의 목소리를 듣는 니글을 통해서 톨킨의 이야기는 영원까지 계속된다. 정의는 나뭇잎 한 장만 그린 니글을 비난한다. 자비는 이웃을 돕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니글에게 박수를 보낸다. 기쁘게도 니글은 나무 한 그루를 발견했다. 그가 미처 완성하지 못했던 나무가 이제는 복잡하고 절묘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이건 선물이에요!”하고 니글이 소리친다.니글은 단지 자신이 작은 나뭇잎 하나만을 현실 세계에 남겨둔 채 떠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제야 그는 자신이 결코 잎사귀를 잃거나 시들지 않는 나무가 있는 진짜 현실에 들어섰음을 알았다.켈러에게 이 이야기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기억될 것이라는 보편적인 희망에 관한 것이다. 누구라도 성취의 기록을 남기고 싶어한다. 그러나 우리는 필연적으로 부족하다. 아무리 최선을 다한 노력도 세대가 오고 세대가 가면서 잊혀지기 마련이다. 켈러는 말한다. “모든 사람은 잊혀질 것이다. 우리가 하는 어떤 일도 아무런 변화를 가져오지 않을 것이며, 모든 노력, 심지어 최선을 다한 헌신도 결국에는 다 물거품이 될 뿐이다.” 단, 하나님이 없다면 말이다. 성경의 하나님이 존재하시고, 지금의 삶 아래와 뒤에 참된 실재가 있다면, 그래서 이 삶이 유일한 삶이 아니라면, 모든 게 달라진다. 모든 선한 노력, 심지어 가장 단순한 노력이라도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추구한다면 영원한 가치를 가질 수 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이 약속하는 것이다. 바울은 “여러분의 수고가 주님 안에서 헛되지 않습니다”라고 썼다(고전 15:58). 바울이 말한 건 기독교 사역에 관해서였지만, 톨킨의 이야기는 바울의 말이 궁극적으로 어떻게 모든 일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톨킨은 목회자로서 켈러가 단지 교회 사역뿐만이 아니라 모든 일에 담긴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이 글은 콜린 핸슨이 쓴 ‘하나님의 사람, 팀 켈러’의 보너스 장(bonus chapter)이다. 이 장은 무료 PDF로 볼 수 있다.원제: How J. R. R. Tolkien Influenced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영성의 세계
by 이춘성
2023-09-26
이 글을 쓰는 오늘은 주일이다. 난 오전 9시에 시작하는 2부 예배를 드리고 아이들의 교회학교가 끝나는 시간까지 기다리기 위해 근처 한 카페에 와 있다. 카페 2층에는 몇몇 무리가 모여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다. 아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엄마, 잠시 커피 마시고 있는 아저씨, 컴퓨터로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는 중고생들, 그리고 직장인들로 보이는 젊은 남녀 여럿이 어떤 주제를 가지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귀를 기울이고 이들의 대화에 집중해 보았다. 이들은 어떤 외국인 저자의 소설책을 가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서로의 생각을 묻고, 자기 경험을 나누면서, 위로의 말과 격려의 감정을 주고받고 있었다. 때로는 누군가를 같이 욕해주면서 웃고 울면서 지친 일상을 달래는 듯 보였다. 그런데 이들의 입에서 익숙한 단어가 나왔다. ‘설교.’ 어떤 사람이 직장 상사나 주변의 꼰대 같은 사람의 잔소리가 꼭 설교 같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이구동성으로 그렇다고 공감하였다. 공교롭게도 지금 옆 건물에는 내가 다니는 교회 3부(오전 11시) 예배에서 목사님이 설교하고 계셨다. 옆 건물에서는 설교가 행해지고, 여기에서는 설교를 자기 삶에는 아주 쓸데없는 잔소리라고 말하면서 자신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나누고 서로 공감해 주면서 힘을 얻고 있었다. 이들의 모임은 마치 예배 같았다. 이들이 읽고 나누고 있는 소설책은 성경이나 신앙 서적 같았고, 이들이 이 책을 해석해서 자기 경험을 말하고 서로를 격려하는 모습은 또 다른 형태의 설교 같았다. 그렇다면 이들이 모인 카페는 이들의 예배당이며, 먹고 마시는 음료와 빵은 성찬일까?작년 초 불교계에서는 한국의 4대 종교(개신교, 천주교, 불교, 원불교)의 연구자들을 모아 포럼을 열었다. 이 연구는 각각의 종교학자들이 약 2년 이상 모여 연구한 결과를 발표하는 자리였다. 이 자리에 모인 종교학자들은 한목소리로 코로나19 이후의 가장 주목 받을 종교는 불교라고 말하였다. 이것은 올해 1월에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한목협)에서 실시한 ‘한국인의 종교생활과 신앙의식 조사’에서 사실로 밝혀졌다. 직전 2017년 조사에 의하면 종교 인구 비율이 개신교가 1위(20.3%)였는데, 5년이 지난 이번 조사에서는 5퍼센트 가까이 떨어져 15.0퍼센트가 되어 불교가 1위(16.3%)가 된 것이다. 또한 무종교인의 호감도는 불교가 29.5퍼센트, 개신교는 4.7퍼센트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차이를 보였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은 무종교인의 급격한 증가세다. 종교인의 비율이 2017년 조사보다 10퍼센트나 줄어 역대 최저치인 36.6퍼센트로 주저앉았다. 무종교인이 60퍼센트가 넘은 것이다. 그리고 무종교인의 약 3분의 1이 과거에 종교인이었으며, 그중의 3분의 2가 개신교인이었다. 이 조사의 결과는 여러 시사점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에서 기성 종교의 역할이 축소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소위 마음 수행 종교의 특성을 가진 불교는 이를 이들의 새로운 기회로 포착하고 템플스테이나 개인화된 영성을 추구할 수 있는 명상 등의 프로그램을 더 개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이러한 탈 기성 종교 현상에 대해서 그 원인을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종교 모임 때문이라고 평가하면서, 대면 모임이 활성화되면 곧 회복할 것이라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그러나 코로나의 영향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지만, 지금 일어나는 탈 기성 종교 현상은 코로나 이전부터 이미 있는 한국 사회의 세속화 현상이었다는 것이 대부분 종교학자의 분석이다. 한국 사회의 세속화로 인하여 기성 종교의 공적 영향력이 감소하고, 종교가 더욱 개인화되면서, 모임의 형태에서도 종교가 기관이나 제도화된 집단이 아닌 개인화된 영성의 형태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와 그 기간은 이를 더욱 가속하는 계기였을 뿐이다.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성해영 교수는 2016년 어느 모임에서 “종교를 넘어선 종교와 새로운 영성”이란 제목의 주제 발표를 하였다. 이듬해 그는 이 발표문을 “무종교의 종교 개념과 새로운 종교성”이란 논문으로 발전시켰다. 성해영 교수는 이 발표문과 논문에서 한국 사회에서 출현한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주목하였다. 이는 ‘종교적 신비주의’에 대응하는 개념으로 기성 종교에서 경험하는 종교적 체험을 종교 활동이 아닌 여러 다른 방식과 활동을 통해 경험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약물이나 뇌의 특정 부위를 자극하는 것을 통해서도 예배 시간에 경험한 감동과 신비적 체험을 동일하게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사실 약물이나 뇌 자극과 같은 방법은 실험실에서나 있을 법한, 위험한 일이기에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러한 가능성은 다른 사회적 움직임과 결합하여 뜻밖의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이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Spiritual But Not Religious/SBNR)이라는 형태의 새로운 영성의 출현이었다. 이 표현은 2000년에 미국에서 일어나고 있는 종교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 얼랜스(Sven Erlandson)가 그의 책 제목으로 처음 사용하였고, 다음 해인 2001년에 로버트 풀러(Robert C. Fuller)가 “영적이지만 종교적이지 않은: 교회 밖으로 나간 미국 이해하기”(Spiritual, but not Religious: Understanding unchurched America)라는 책을 통해 학문적으로 더 자세히 다루면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 두 저자의 주장은 미국의 종교인들, 특히 그리스도인들이 제도적 교회 밖에서 영적인 갈망을 채우려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시작하였고, 이 현상은 종교적(Religious)이란 단어보다는 영적(Spiritual)이란 단어로 포착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인은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를 교회라는 공동체적인 의미보다는 제도나 공동체 밖의 개인 영역을 더 강조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달리 말해 공동체와 제도를 떠올리는 종교와 연관된 것이 교리, 전통이라면, 개인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영성과 연관된 것은 개인의 체험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이미 우리 생활 속에 깊숙이 들어와 ‘단월드’ ‘마음 수련’ ‘선 수행’ ‘요가’ ‘템플스테이’ ‘타로 카페’ 등의 다양한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또한 교회에서 가장 많이 논의되고 있는 ‘가나안 성도’ 현상도 SBNR 영성의 흐름 속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단순히 교회에 대한 윤리적 실망 때문에 신자들이 교회를 이탈하는 탈 교회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째로 종교의 공적인 역할과 영역을 사적인 역할과 개인의 영역으로 축소한 세속화 영향으로 인하여, 현대인의 종교에 대한 역할과 인식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둘째 이유는 이전의 종교가 제공했던 신비적 체험에 대한 개인적 필요가 여전히 존재하며,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등장한 SBNR식의 영성이 종교를 대체하고 있기 때문이다. 끝으로, 교회가 SBNR 영성에 대해서 시급하게 성찰해야 할 점을 하나 언급하고 이 글을 마치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설교 시간이나 신앙 상담 중에 하물며 신학교의 강의실에서 목사와 신학자들이 쓰는 ‘영성’이란 말을 성도들과 신학생들은 전혀 다른 맥락과 의미로 이해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교회가 처한 여러 위기 중 하나는 기독교 신앙과 믿음의 내용, 교리와 신앙 지식, 예배와 삶의 전통을 신자 개인의 신비적 체험과 깊숙하게 잇지 못하고 이것들이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속의 흐름 속에서 개인화된 영성, 세속적인 영성이 아닌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이 통합되고 신비와 합리성이 결합한 진정한 기독교 영성을 회복하는 길을 찾는 것, 이것이 현대 교회의 또 다른 과제이다. 다음에는 ‘세속적 신비주의’에 대해서 더 깊숙이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려 한다.
기독교, 경계를 넘어 영화로 소통하다
서울국제사랑영화제 9월 14일 개막
by 복음과도시
2023-09-14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선’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기독교 영화 축제, 서울국제사랑영화제가 9월 14일 개막한다. 2023년 제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지난 20년의 역사(History)의 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도 영화를 통해 전할 그 분의 이야기(His story)를 소망하며 올해의 주제를 ‘History’로 정했다. 2003년 ‘기독교, 영화와 만나다’를 기치로 출범한 서울국제사랑영화제는 해마다 기독교적 시선을 지닌 영화들을 세상에 알리는 교두보 역할을 해왔다. 올해는 <지저스 레볼루션>으로 축제의 문을 연다. 이 영화는 1970년대 미국 캘리포니아 전역을 휩쓸었던 기독교 부흥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10대 히피 공동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 미국 기독교 영화계 선두 주자인 어윈 브라더스가 메가폰을 잡았고, 올 초 미국에서 개봉하여 5천만 달러의 흥행 수입도 기록했다. 이번 영화제에서 2회 상영된다. 폐막작은 일본 영화 <마이 대디>. 작은 교회의 목사인 카즈오는 생계를 위해 주유소 아르바이트를 하며 중학생 딸 히카리를 홀로 키우고 있다. 어느 날 히카리가 불치병에 걸리게 되면서 카즈오는 오랜 시간 감춰져 왔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며 목사로서의 정체성이 뒤흔들릴 위기에 처한다.영화제 기간 엿새 동안 상영되는 영화는 3개 섹션(아가페 초이스, 미션 초이스, 필름포럼 초이스)으로 구성되고, 영화 상영 후에는 시네토크가 진행된다. 아가페 초이스는 주님이 빚은 세상의 다양한 모습과 삶을 영화를 통해 조망해보는 섹션이다. 올해 선정된 작품들은 소외된 인간들이 내가 속한 세상에서 나의 존재는 무엇인지를 묻는다. <커밍 홈 어게인>은 암으로 죽음을 앞둔 엄마의 집에 머무르기로 결정한 뉴요커 창래가 잃어버린 엄마의 정체성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이야기이다. 재미작가 이창래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창래 역을 맡은 <파친코>의 저스틴 전 감독의 연기가 돋보인다. 매년 한반도평화연구원(KPI)이 함께하는 ‘KPI 시네토크’에 올해에는 <커밍 홈 어게인>으로 이무영 감독과 심혜영 교수, 성현 부집행위원장이 관객과 만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이끄는 영상 제작집단 <분부> 소속 카와와다 엠마 감독의 상업 영화 장편 데뷔작 <나의 작은 나라>는 쿠르드 난민 고등학생 사랴의 성장 이야기이다. 사랴는 어릴 때 일본으로 이주하여 평범한 일본인으로 살아왔으나 가족의 난민 신청이 거부되고 사랴의 아버지마저 수용소에 감금되면서 사랴의 일상은 크게 흔들린다. 영화 상영 후 문화선교연구원 백광훈 원장과 올해의 영화제 홍보대사 리키김이 내가 속한 세상에서의 정체성에 대해서 말한다.<조용한 이주>는 덴마크 시골에서 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한국인 입양아 칼의 이야기이다. 양부모는 그가 언젠가 가족의 농장을 물려받아 가업을 이어 가기를 바라지만, 칼은 자신의 ‘집’인 덴마크와 더불어 자신이 태어난 나라인 ‘한국’이라는 두 세계 모두에 끌리기 시작하고 선택을 해야 하는 시간이 빠르게 다가온다. 영화 상영 후, KBS 라디오 ‘강유정의 영화관 정여울의 도서관’을 진행하며, 인문학, 심리학, 글쓰기 등 여러 면에서 글을 쓰며 활발하게 목소리를 내고 있는 정여울 작가와 함께 하는 시네토크가 있다. 마지막으로 <파편들의 집>은 러시아와 전쟁 중인 우크라이나 동쪽에 이혼을 앞둔 부모들의 아이들을 머무르는 보육원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영화이다. 이곳에 있는 아이들은 대부분 결국 부모를 다시 만나지 못하고 입양기관으로 보내지기 때문에 늘 불안하고 사랑에 목말라 있다. 영화 상영 후에는 폴란드로 보내진 한국 전쟁 고아들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폴란드로 간 아이들>을 연출한 추상미 감독과 재난 전문 다큐멘터리 연출가인 이승구 PD가 이야기를 나눈다. 선교 영화, 전통적인 의미의 기독교 영화를 상영하는 섹션인 미션 초이스는 신앙의 비전을 고취하고 복음의 가치를 영화를 통해 돌아보는 전통적 취지에서 만들어졌다. <시몬 김성수 : 우리는 최고다>는 1930년 출생인 성공회 시몬 김성수 주교의 이야기이다. 김성수 주교는 1970년대 국내 첫 발달장애인 학교 성베드로학교를 설립하고 평생을 장애인들의 아버지로 살아 온 인물. 이 영화는 사제, 수녀, 신자, 가족, 지인 등 그의 주변 인물들의 인터뷰를 통해 주교이면서 누군가의 가족이기도 한 인물의 삶의 역사를 입체적으로 살펴본다. 영화 상영 후에는 김성수 주교, 영화를 연출한 남승석 감독,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배혜화 집행위원장과 함께하는 시네토크가 있다. 충무로 시대로 대변되는 한국 영화 전성기의 기독교 영화 <사랑의 원자탄>은 <마부>로 1961년 베를린영화제 특별은곰상을 수상한 강대진 감독이 연출했다. 나병환자촌 애양원에서 나환자를 돌보던 손양원 목사는 1948년 여순 사건으로 두 아들을 모두 잃게 되나 아들을 죽인 안재선을 양자로 삼아 친자식처럼 보살피며 살다가 순교한다. 한국 기독교 근현대사에서 잊지 못할 사랑의 정신을 실천한 인물의 이야기가 40년 만에 디지털 리마스터링 복원되어 특별 상영된다. 기독교 영화 평론가 강진구 교수의 사회로 1980년대 한국 영화 성장에 크게 이바지한 이장호 감독이 그 시절 함께 활동했던 강대진 감독의 작품세계와 기독교 영화관을 주제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마지막으로, 필름포럼 초이스는 필름포럼이 최근 소개된 작품들 가운데 다시금 주목할 만한 영화와 하반기 국내 배급 예정 신작을 선공개하는 새로운 프로그램이다. 올해는 특별히 2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국제사랑영화제의 모체가 된 단편영화경선을 거쳤던 이경미 감독, 최진영 감독의 작품을 상영한다. 제2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출품작인 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과 장편 대표작 <미쓰 홍당무>를 함께 상영하고 이경미 감독과 단편 출연배우 최희진 배우, 서영주 배우가 함께 관객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진다. 제13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단편경선 출품작인 최진영 감독의 <반차>와 최진영 감독의 장편 대표작 <태어나길 잘했어>의 상영 이후에는 <반차>의 주인공인 윤경호 배우, 이안나 배우와 최진영 감독이 관객과의 만남을 이어갈 예정이다. 또한 서울국제사랑영화제에서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영화인 <드롭박스>도 재상영한다. 이종락 목사는 교회 대문 앞에서 한 아기를 발견한 이후 다른 아기들도 구하기 위해 교회에 베이비 박스를 설치한다. 영화는 이종락 목사의 삶의 여정과 베이비 박스 사역을 통해 공동체의 삶에 대해 그린다. 영화 상영 후에는 <드롭박스>의 주인공 이종락 목사가 관객들과 만남의 시간을 갖는다. 폐막식에는 (재)통일과나눔이 후원하고 서울국제사랑영화제를 주관하는 (사)필레마가 진행하는 “통일의 빛, 평화의 다리 프로젝트”의 2022년 사전 제작 지원 당선작 <백두대간>이 <마이 대디>와 함께 상영되며 축제의 막을 내린다.제20회 서울국제사랑영화제 영화 예매는 디트릭스(www.dtryx.com)에서 할 수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서울국제사랑영화제 공식 홈페이지(www.siaff.kr)에서 볼 수 있다.
‘해체’가 만든 이상한 신세계
by 이춘성
2023-09-12
중학생 딸아이가 수학여행 준비에 바쁘다. 지난 3년 동안 코로나로 인하여, 초등학교 고학년 때 이미 경험했어야 할 수학여행을 이제야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런 딸아이의 생의 첫 수학여행을 위한 가장 큰 숙제는 다이어트다. 평생 남게 될 첫 수학여행의 사진이 조금 더 예쁘게 나와야 할 것 아니냐는 게 딸아이의 생각이다. 그래서 나와 딸은 저녁 늦게 함께 집 앞 초등학교 운동장을 뛰기로 했다. 러닝을 시작한 두 번째 날, 늦은 저녁 시간인데도 중학생 여자아이들이 여럿 모여 축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웃으면서 욕설을 주고받고 있었다. 이 아이들은 자기들 입에서 나오는 욕들이 무슨 의미인지 알고 있을까?내가 대학에 다닐 때, 그러니까 1990년대 중후반에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충격이었다. “돼지가 우물이 빠진 날”(1996년), “강원도의 힘”(1998년)으로 이전의 연극적으로 과장된 연출과 연기가 주류였던 영화계에 힘을 뺀 연출과 연기, 일상을 자연스럽게 담아낸 그의 영화는 대중과 평론가들에게 매우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영화들은 2002년 “생활의 발견”과 이후에 나온 그의 극사실주의적 영화들을 위한 준비작업이었다. “생활의 발견” 이후의 홍상수의 영화는 자연스럽다 못해, 인간 내면의 욕망을 아무런 여과 없이 찢어발겼다. 사람들은 그의 영화를 보면서 목욕탕 탈의실을 몰래 엿보는 것과 같은 긴장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결국 자기가 본 그 훔쳐보기와 그 살덩이가 자기 자신과 욕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순간, 사람들은 수치를 느끼며 당황해했다. 홍상수의 영화는 지식인들의 가식과 숨겨진 원초적 욕구에 어떤 포장이나 옷도 허락하지 않았다. 철저하게 이들이 입고 있는 옷과 포장을 벗기고, 더 나아가 뼈와 장기를 덮고 있는 몸을 해부하여, 장기 속 소화하다 남은 음식 찌꺼기가 ‘너’라고 말하고 있었다. 프랑스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kie Elie Derrida, 1930~2004)는 세계에 대한 이와 같은 해부학적 접근을 ‘해체’(deconstruction)라 불렀다. ‘해체’란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모든 가치와 윤리 체계에 의문을 제기하고, 이것들이 당연하다고 믿게 했던 절대 기준이란 없다는 것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 사람들은 해체를 통해서 결국 인간이 만들고 믿었던 가치와 종교, 사상은 인간의 욕망과 욕구의 투사일 뿐, 공통되고 절대적인 기준은 없음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수용하면, 사회를 이끄는 유일한 힘은 개인의 욕망과 욕구이며, 이를 종교나 윤리라는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은 위선과 가식이 된다. 더 나아가 이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표현하는 것, 노골적인 언어(욕설)와 섹스, 식욕, 탐욕을 가감 없이 표현하는 것이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행동으로 인정받게 된다. 찌꺼기는 찌꺼기답게 냄새나고 더러울 때 가장 윤리적이라는 것이 해체의 윤리가 지향하는 이상(ideal)이다.이제 홍상수는 흘러간 인물이 되었지만, 그가 시작한 해체의 대중문화는 여전히 ‘먹방’과 ‘SNL’이 되어 MZ세대와 현대인의 아이콘이 되고 있다. 인간이 먹는 욕구 그 자체, 말하는 입이 아닌 음식이 들어가는 입, 그 자체에 지금처럼 주목했던 때가 있었을까? 음식과 먹는 입은 중요한 것이지만, 이는 생명을 위한 영양소, 대화를 위한 도구였다. 하지만 지금 사람들은 음식을 마구잡이로 쌓아 두고 말없이 먹는 그 입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먹고 있는 사람을 보는 것을 더 이상 예의 없는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음식과 먹는 행위에 집중하는 것, 그것은 순수하고 진정성(authenticity) 있는 행위이다. 이것에 불편함을 느끼고, 예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오히려 가식과 위선에 사로잡힌 예의 없는 사람으로 취급받는다. 이제는 홍상수 영화를 보면서 느꼈을 불편한 감정조차 허용하지 않는다. 여전히 음식에 대한 예절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이는 해체 이후에 남은 일종의 흔적일 뿐이다.또한 ‘19세 관람가’라는 도장이 찍힌 SNL**식의 코미디는 어떤가? 과거에는 술자리나 군대의 음침한 창고에서나 오갈 성행위에 대한 노골적인 표현, 사람을 향해 쏟아내는 상상하기도 끔찍한 뜻의 욕설들, 그리고 이러한 표현에 ‘맛깔나다’라는 먹방식 표현과 이에 대한 찬사와 ‘슈퍼챗’ 형태의 돈으로 상을 주는 대중, 그리고 이를 따라 하면서 웃고 떠드는 사춘기 아이들의 일상의 모습, 우리는 지금 어떤 세상에 살고 있는 걸까?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교수였던 칼 트루먼(Carl R. Trueman)은 이런 현대 세계를 “이상한 신세계”(Strange New World)라고 이름하였다.우리는 절대적인 존재에 대한 기대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믿음에 기초한 세계가 해체되어 버린, 모든 가치와 윤리가 의심받으며 오직 순수하고 진정성 있는 것은 인간의 욕구와 욕망이라는, 이전에 경험하지 못했던 이상한 신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인과 교회는 이런 이상한 세계 속에서 절대적인 존재와 기준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욕구와 욕망이 지배하는 사회가 창조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 이것이 현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마주한 위기요 과제이다. “초월의 위대함과 그 아름다움을 선전하는 것”이 현대 기독교의 사명이라는 것이다. 이 사명을 위한 고민을 이어질 짧은 글들로 담아내고자 한다.**SNL: Saturday Night Live의 머리글자로 미국 NBC에서 방송하는 코미디 프로그램의 포맷을 가져와 성적인 농담과 노골적인 욕설을 여과 없이 표현하는 성인 코미디 프로그램이다.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도 예술가로 성공할 수 있을까?
by Andrew Voigt
2023-08-25
정통 교리와 전통 기독교 윤리를 옹호하는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인이 과연 기독교 신앙을 점점 더 적대시하는 예술 분야에 발을 들일 수 있을까? 지난 이천 년 동안 그리스도인은 후원자 또는 예술인으로서 예술 분야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이런 상황은 지난 세기 정도에 들어서 바뀌기 시작했다. 음악, 문학, 미술, 미디어 분야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구현하는 성공한 그리스도인을 만나는 건 이제 당연한 게 아니라 큰 놀라움이 되었다. 그리스도인이 과감하게 예술 분야에 투자하기에는 예술이 너무나도 세속적이고 정통 신앙에 적대적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번 생각해보자.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형성하는 잠재력을 지닌 가장 강력한 영역이 바로 예술이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 분야를 마냥 무시하는 게 맞을까? 놀랍게도 예술 분야에 관한 한 교회의 입장은 무관심 내지 완전한 포기이다. 세상 속에 그리스도의 영광을 불어넣는 예술을 창조하는 대신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영역에서 멀어졌고, 그럴수록 예술은 점점 더 세속화되었다. 우리 주변에 널린 예술의 풍경에서 그리스도를 거의 볼 수 없는 건 이제 놀랍지 않다. 예술과 아름다움처럼 강력한 대상은 초월적인 진리와 분리될 때 도덕적으로 잘못된 방향으로 갈 수밖에 없다. 이에 대응하여, 그리스도인은 예술계에 만연한 도덕적 타락을 비난하고 항의하면서 더 멀리 후퇴할 수 있다. 아니면 아예 다시 그 무대에 뛰어들어 변명이 필요하지 않은 진리 선포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예술의 아름다움을 다시 회복하겠다고 다짐할 수도 있다.그러나 이건 말처럼 쉽지 않다. 왜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신앙 해체를 겪는가지난 수십 년 동안 CCM 장르를 접해본 사람이라면 케빈 맥스(DC 토크), 데릭 웹(캐드먼스 콜), 조너선 스타인가드(호크 넬슨)의 신앙 해체 이야기를 알고 있을 것이다. 굳이 언급하자면, 내게 맥스의 해체는 특히 고통스럽다. 왜냐하면 그는 한때 인터뷰를 즐겼던 내가 지금도 가장 좋아하는 보컬리스트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그는 창의성과 상상력, 흔히 기독교 예술에 결핍되었다는 이 두 가지를 구현한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모범이었다. 그리스도인 예술가들 사이에서 해체주의가 그토록 흔한 이유는 무엇일까? 예술적으로 뛰어난 많은 그리스도인일수록 경력 초기에 아무리 신앙이 신실해 보일지라도 현대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라는 고도로 세속적인 영역에 오래 머물수록 점차 믿음을 잃을 수밖에 없다는 현실은 거의 불가피한 게 아닐까 싶다. 특히 음악 산업에서는 여행과 투어가 중요하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다니면서 많은 시간을 보내는 그들이 주변 사람 대부분에 반하는 신앙을 유지하기는 쉽지 않다.또 다른 도전은 CCM이 고도로 수익을 창출하는 산업이 되었다는 점이다. 정통 신앙을 제대로 표현하는 진짜 기독교 노래보다는 신학적으로 모호하고, 공격적이지 않으며, 영감을 주는 노래일수록 많은 돈이 들어올 가능성이 더 크다. 따라서 CCM에는 정말로 잘 봐줘서 “기독교적 음악”이지 문화나 시장의 압력이 조금만 가해지면 당장이라도 무너질 취약한 신앙을 가진 예술가로 넘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 기독교 예술가는 각종 논쟁에 침묵으로 일관할까? 기독교 예술가라고 공언하는 인기 있는 예술가들의 또 다른 경향은 낙태나 LGBT+ 문제와 같은 논란이 되는 문제에 관해서 회피한다는 것이다. 비록 신앙 해체까지 가지는 않았을지 몰라도, 이들은 일부 청중이 외면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철저하게 안전한 신앙만을 추구한다. 그들의 두려움 중에는 근거를 가진 것도 있다. 기독교 신앙의 점점 더 많은 부분이 오늘날 세속 문화에서 옹호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신앙과 공공연하게 연관되는 것은 온라인 분노, 팬들의 반발, 취소 가능성까지 불러일으킨다. (비신자까지 포함해서) 대중의 지지를 받는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도덕성과 윤리에 대한 모든 견해를 공유해야만 할까? 아니다. 하지만 공인이라는 위치를 단지 부담(“내가 행여라도 틀린 소리를 하면 어쩌지?”)으로만 여기는 대신에 은혜롭게 진실을 말함으로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될 수 있는 기회로 받아들여야 한다. 예술 분야의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동기가 청중을 잃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 어떤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그들의 신실함을 높이실 거라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동기가 되어야 한다. 신앙을 포기하지 않은 건 말할 것도 없고, 기독교의 정통 견해를 타협하거나 숨기라는 압력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신앙을 지킨 그리스도인 예술가의 좋은 사례가 바로 존 쿠퍼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스킬렛(Skillet)은 몇몇 멤버들의 굴복하지 않는 입장으로 인해 의심할 여지 없이 양극화 밴드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대규모 군중 앞에서 연주하고 주류 공연과 함께 투어를 진행 중이다. 그들은 침묵하지 않았다. 신실하게 기독교 신앙을 지키기에 미움받을 거라는 사실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필요한 것: 변명하지 않는 더 많은 그리스도인 예술가 모든 가수가 스킬렛만큼 큰 관객층을 확보하는 건 아니다. 쿠퍼는 수십 년 동안 이 일을 해왔다. 쿠퍼와 같이 충실한 제자를 키우는 건 결코 쉽지 않고, 그리스도인이라면 결코 명성이나 인기에 연연해서는 안 된다. 쿠퍼처럼 한다는 건 결코 쉽지 않다. 그러함에도 그리스도인 예술가가 두려움과 흔들림 없이 자신의 신앙을 좀 더 담대하게 말한다면, 그들이 추구하는 창작 활동에 대한 지지가 더 늘어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사회의 다른 영역에는 명백한 보수 기업 그리고 미디어 기업을 위한 큰 시장이 존재한다.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그리스도들은 같은 생각을 가진 조직과 사역, 예술가들의 지원을 갈망한다. 그들은 또한 “C” 레이블(Christian)을 부끄러워하거나 그로부터 거리를 두려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보다는, 신앙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 세상에도 좋은 것이라며 당당하게 믿음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지원하고 싶어 한다. 단순히 낙태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데 그치지 않고 창의적인 노력으로 생명의 기적과 기쁨, 생명의 신성함을 아름답게 찬양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들을 상상해보자. 이혼과 불신앙으로 인해 분열되지 않은, 온전하고 건강한 가족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그리스도인 예술가를 상상해보자. LGBT+의 자존심에 맞서 단순히 전통적인 기독교 성 윤리를 옹호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결혼이라는 유대 안에서 거룩한 성의 아름다움을 강조하는 기독교 예술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멀리 보기그리스도인은 멀리 보아야 한다. 예술의 포기는 하루아침에 되돌릴 수 없다. 기독교가 다시 한번 예술의 중추적인 역할을 하려면 수 세기가 걸릴 수도 있다. 그러함에도 기독교가 예술 분야에서 한 번 더 영향력 있는 위치를 되찾기 위해서 신앙 예술가가 취할 몇 가지 조치가 있다. 1. 좋은 예술을 더 가치 있게 만들자.현대 기독교 예술은 대부분이 기껏해야 평균 수준이다. 그중에서도 대부분이 수준 이하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종종 세속적인 상대를 복음화하겠다는 욕심으로 세속 예술을 모방하려 애를 쓴다. 그 결과 우리가 전달하려는 “메시지”와는 별개로 아름다운 예술이 가진 힘의 가치, 그 자체를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술이라는 언어 자체에 더 능숙해야 한다. 우리는 세속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복제하기보다는 관객이 잠시 멈춰서 생각하고 영원을 엿볼 수 있도록 하는, 독창적이고 창의적인 작품을 만들어야 한다. 2. 인기와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을 목표로 하자. 뛰어나기 위해서 시간을 투자하라. 하룻밤 사이에 성공하지 못하더라도 부지런히 인내하라. 좋은 예술을 창조하는 데 충실하고, 교회에 뿌리를 내리는 데 충실하며, 모든 부분에서 그리스도께 충실하라. 플랫폼의 크고 작고와 관계없이 성공은 그 자체로 이뤄질 것이다. 세상의 성공이 아니라 신실함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의 핵심이다. 3. 도구를 맘껏 활용하라. 기독교 예술가들에게 좋은 소식은 그들이 상상하는 작품을 관객의 손에 전달하기 위해 더 이상 음반사, 에이전트, 미술 큐레이터 및 기타 문지기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소셜 미디어, 스트리밍 플랫폼 및 기타 다양한 도구로 인해 진입 장벽이 낮아졌다.당신은 화가인가? 아니면 스케치 아티스트인가? 업무용 인스타그램을 만들어보라. 혹시 작곡가인가? 집에서 노래를 녹음하고 스트리밍 플랫폼에 바로 출시하라. 당장 일을 시작하라. 그리고 당연히 받아야 한다고 여기는 세상의 관심이 오지 않는다고 낙심하지 마라. 사람의 박수를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라. 최고가 될 때까지 당신 자신을 채찍질하라.원제: Can Theologically Conservative Christians Flourish in the Art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는 AI를 내칠 것인가 끌어안을 것인가?
by Patrick Miller
2023-07-25
지난 5일 사이에 AI는 보통 사람들의 의식에까지 침투했다. 처음으로 ChatGPT의 언어 슬롯 머신이 가동되었고, 어려운 질문에 놀라울 정도로 좋은 답변을 내놓았다. 수십 년 전 생산직 근로자가 겪은 일을 지금 사무직 근로자가 그대로 경험하고 있다. 자, 진짜 적은 비용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그대로 해내는 기계가 등장했다. 패닉에 가까울 정도로 격렬한 경고음이 전 세계 문화에 걸쳐서 울렸다. ChatGPT 이전에 AI에 대해 전혀 몰랐던 직업 사상가들도 너도나도 앞다투어 소셜 미디어와 팟캐스트에서 최신 정보를 공유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그러나 또 다른 부류의 사상가들은 전혀 다른 방식을 취했다. 그들은 AI가 만들어갈 생성 가능성을 즐기며 세상을 바꾼다고 약속하는 새로운 AI 제품의 가내 산업을 시작했다.고작 몇 달 사이에 AI와 관련해서 그리스도인은 크게 두 진영으로 나뉘었다. (1) 생성 AI가 일자리를 빼앗고 영적 성장을 방해할 것이라고 두려워하는 비판적 입장. (2) AI가 목회자에게 더 많은 도움을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실용주의 입장이다. 급속한 기술 양극화는 하나도 놀라운 게 아니다. 그러나 그건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지난 몇 년 동안 나는 AI에 관해서 계속해서 글을 썼다. 대부분이 신중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윤리적으로만 사용할 수 있다면, 생성 AI가 하나님 나라의 목적에 이바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점점 더 커졌다. 그렇다고 내 속에 두려움이 전혀 없다는 것은 아니다. 지금은 생소하기만 한 기술 전쟁에서 한 쪽 편을 선택하는 대신에 잠시 멈추고 대화하고 또 생각할 때이다. 잠언 저자의 말이 옳다. “지식이 없는 열심은 좋은 것이라 할 수 없고, 너무 서둘러도 발을 헛디딘다”(잠 19:2). 오로지 비판만 하는 것도, 오로지 실용주의 입장으로만 보는 것도 다 위험하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 입장 다 비윤리적인 AI 사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를 훨씬 더 취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든지 그런 위험에 빠지지 않을 수 있다. AI 비판의 위험두려운 것부터 시작하자. 생성 AI는 (말하자면, 텍스트, 이미지, 코드, 비디오 등을 생성할 수 있는 알고리즘은) 설교 연구, 설교 그래픽 생성, 소그룹 질문 생성에 도움을 줄 수 있다. 더불어서 설교, 블로그 및 팟캐스트 스크립트 작성도 수행할 수 있다. 영적 질문이 있는 평신도가 목사와 멘토를 찾는 대신에 얼마든지 AI에 의존할 수도 있다. AI가 기꺼이 그들에게 “지혜”를 제공할 것이다. 모르는 게 없는 이 컴퓨터는 도대체 어디에서 정보를 얻고 지식을 만들어내는가? 모든 대규모 언어 모델(LLM)은 특정 데이터 세트를 사용하여 학습한다. 예를 들어 ChatGPT는 2021년 이전 버전의 인터넷에서 교육을 받았다. 질문마다 질문의 매개 변수와 만족스러운 답으로 간주되는 자체 교육을 바탕으로 해서 나름의 만족스러운 답변을 예측한다. LLM은 크라우드 소싱된 답변을 제공하며 모두를 만족시키는 답을 제공하도록 조금씩 수정된다. ChatGPT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대한 조언을 요청하면 지극히 개인주의적이고 자기 표현적이며 뻔한 답을 제공한다. 그러나 ChatGPT의 답이 뻔하다는 게 유일한 문제는 아니다.무한해 보이는 정보에 빠르고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제자도를 얼마든지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봇(bot)을 통해서 쉽게 할 수 있는데, 뭐 하러 시간을 들여서 성경을 배우고 또 열심히 지혜를 키우려고 노력하겠는가? ChatGPT 같은 LLM이 주는 약속이 무엇인가? 노력 없이도 얼마든지 숙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아주 틀린 건 아니다. 광범위한 인터넷 세계마저도 장난처럼 보이게 만들 정도로 AI는 엄청난 기술 변화이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지고 있다고 경고하는 사람들 대부분이 인정하지 않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하늘이 무너진 건 이미 한참 전이다. 우리는 이미 안개 속에서 살고 있다. ChatGPT가 AI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일깨운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AI를 일상생활로 도입한 게 ChatGPT는 아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맞춤법 검사, Google 검색, 내비게이션 앱, 차량 공유 앱, Siri, Alexa, 음성 텍스트 변환, 소셜 미디어 피드, 비디오 게임, 얼굴 인식, 스팸 필터, AI 코딩 앱, AI 자동화 배송 및 물류, AI 지원 의료 스캔, 나아가서 AI 전쟁에 이르기까지, AI는 이미 우리 주변에서 존재했다. 온라인에서 지금 당신이 보는 내용 대부분은 AI가 당신의 취향을 분석해서 내어놓은 내용이다. AI가 위험하다며 당신이 온라인에 분노를 표출할 때 정작 그 분노를 중재하는 것도 다 AI이다. 누가 무엇을 보는지 결정하는 것도, 어디에 참여하고 또 어떤 식으로 현실을 보도록 할지를 조종하는 것도 이미 AI이다. 더욱이 이러한 예 가운데 그 어느 것도 기술 자체를 다루지 않는다. 아무것도 아는 게 없는 우리가 기계 학습, 신경망 또는 알고리즘 계산에 분노할 수 있는가? AI에 대한 신학적 논의를 활발하게 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이 기술 자체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춰야 한다. 고맙게도 목회자, 신학자, 윤리학자에게 다양한 분야에 걸친 AI 적용을 소개할 수 있는 쉬운 글과 팟캐스트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이 정도의 학습으로는 보다 세분화된 수준에서 AI를 이해할 수 있는 실무자(AI 엔지니어, 개발자 및 연구원)와의 대화를 대체할 수는 없다.AI에 대한 신학적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지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 기술에 대한 기본적인 역량을 갖추어야 한다. AI가 미칠지도 모르는 기형적 영향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싶다면서 새로운 변종 기술이 나타날 때마다 두더지 잡기 게임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AI라는 기술 상자를 열고 내부를 살펴보고 모든 소비자가 만날 수 있는 사용 사례를 숙지하고, 이 문제에 관해서 윤리적으로 대응할 제자를 준비시켜야 한다. AI 실용주의의 위험모두가 “하늘이 무너진다!”라고 외치는 건 아니다. 주변의 구름을 의식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AI가 몰고 오는 안개에 대해서는 알지만, 심각한 윤리적 질문 없이 무작정 AI를 받아들이는 그리스도인도 있다. 유용성이 사용을 정당화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는 실용주의자이다. 그들은 단지 관리적인 질문만 던진다. 시간 절약이 가능할까? 돈을 아낄 수 있을까? 더 많은 사람에게 다가가는 데 도움이 될까?교회와 같은 기관을 이끄는 누구에게나 실용적인 질문은 중요하기에 무시해서는 안 된다. 문제는 그런 질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행동은 효율성의 규범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규범에 부합해야 한다. 생성 AI는 얼마든지 (단조롭고 관습적인) 설교를 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설교는 목회자의 성경적 의무이다. 이 책임을 소홀히 하는 것은 비윤리적일 뿐만 아니라 현명하지 않다. 아무리 발전된 기계라도 예배에 참석한 교인들의 마음을 알 수는 없다. 따라서 그들은 결코 살아 움직이는 진리로 교인들을 인도하기 위해 그때그때 설교를 조율할 수 없다. AI는 결코 설교 내내 우리가 의지하고 또 우리를 인도하는 성령님에게 맞춰질 수 없다는 것이다. 윤리적 신념 없이 AI를 받아들인다면, 윤리적 실책을 범하게 될 것이다. 왜? 윤리적 원칙이 y라는 목표 달성에 x의 수행이 가장 효율적이라면 x를 수행하는 것이 옳다는 식의 공리주의로 그칠 것이기 때문이다. 더 나은 길사도행전 17:26에서 바울은 아덴 사람들에게 말한다. “그분은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셔서, 온 땅 위에 살게 하셨으며, 그들이 살 시기와 거주할 지역의 경계를 정해 놓으셨습니다.” 국가 질서를 주권적으로 정하시는 하나님을 믿는다면, 우리가 지금 초기 AI 시대에 사는 게 우연이 아니라는 사실도 함께 믿어야 한다. 다윗이 “사는 동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긴”(행 13:36) 것처럼 우리도 이 세대에서 하나님의 뜻을 섬기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지금 우리가 AI를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에 관한 내용은 우리 자녀들이 물려받은 윤리적 규범에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대를 초월하여 AI를 깊이 숙고해야 한다.실용주의자들은 미래의 결과에 대해 궁금해하지 않는다. 지금 당장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에만 집중하기에 멀리 바라보지 않는 경향이 있다. 두려워하는 사람도 현재에 갇혀있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AI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그리고 AI가 우리의 삶을 어떻게 보이지 않게 통합하고 있는지 더 깊이 알려고 하지 않기에, AI에 관한 속보에 단지 반사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진짜 눈을 크게 뜨고 감시해야 할, 보이지는 않지만 진짜로 우리에게 해를 끼치는 사악한 AI의 운영 방식에는 둔감하면서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다양한 역량(신학, 윤리 및 기술)을 가진 사람들을 모아 일상생활에 미치는 AI의 윤리적 파급 효과를 탐구해야 한다. 윤리적으로 허용되는 용도가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연구함으로써 평신도가 자신의 AI 사용을 스스로 평가할 수 있는 간단한 규범을 만들 필요가 있다. 두려움에 빠진 비판주의자와 실용주의자 사이의 논쟁에 에너지를 계속 낭비한다면 우리는 AI의 발전 단계에서 어쩌면 중간 단계에 살고 있는 독특한 우리 세대의 책임을 간과할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마음을 연 대화이다. 다양한 전문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를 교육함으로써 우리가 원해서 시작하지 않은 이 새로운 세상에 필요한 윤리적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이 보시기에 꼭 필요해서 AI 세상 속에 우리를 두셨다는 것을 나는 믿는다. 원제: Should We Embrace or Evict AI in Church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하나님의 선물, ‘예술’이 우상이 될 때
by 서나영
2023-04-20
기독교 세계관 운동 2.0 위하여서울기독교세계관연구원(SIEW)과 함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섭니다.한 사람의 여가는 그의 가치체계와 마음 상태를 파악할 수 있는 좋은 소재다. 현대인 대부분이 맡겨진 여러 종류의 일과 삶의 무게에서 오는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저마다의 “가상현실” 또는 “기분전환 장치”를 찾는다. 그리고 음악, 소설, 영화, 드라마, 게임 같은 갖가지 예술 장르들이 현실도피의 세계로 그들을 유혹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하면서 여가를 보내야 할까? 쉬어야 할까? 어색한 질문이다. 여가의 내용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의 구분이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은 이 여가와 ‘쉼’을 민감하게 생각해야 한다. 쉼은 하나님께서 창조 때부터 정해 놓으신 “우주적 리듬”이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신 백성도, 여종과 남종도, 머무는 손님도, 심지어 가축도 일곱째 날마다 쉬라고 명하셨다(출 20:10). 십계명에 포함된 이 명령은 수많은 율법 조항 중에서도 최고의, 헌법과도 같은 강령이다. 주님께서 제정하신 이 안식일에는 모든 처소에 불도 피우지 말아야 했고(출 35:3), 심지어 땅도 안식했다. 땅은 7년이 되는 해에 안식하고, 그렇게 7번의 안식년을 지난 다음 해, 곧 50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 희년으로 지켜야 했다. 이 희년에는 땅이 파종 없이 완전한 휴식을 취해야 했고, 더 나아가 담보 잡힌 땅도 “해방”되어 돌아올 수 있었다(레 25:8-13). 하나님이 제정하신 안식일 법의 목적은 쉼이요, ‘노예살이로부터 해방’에 대한 기념이었다. 그리고 이 ‘쉼’은 ‘아름다움’을 동반한다. 하나님께서는 아름다운 피조물을 보시며 “심히 좋아”하셨다(창 1:31). 심미적으로도 감정적으로도, 그 아름다움에 대한 감상과 즐거움 속에서 ‘쉼’을 누리셨다는 뜻이다. 출애굽 이후의 안식일에는 ‘죄로부터의 해방’을 기념하는 감격과 기쁨의 아름다움이 더해졌다. 즉, ‘쉼’과 함께 그림자처럼 ‘아름다움’이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예술의 ‘아름다움’은 이 세상의 고난과 압제에서 벗어나는, “쉼의 유사 기능”을 한다. 저명한 독일 철학가 쇼펜하우어는 미학적 경험을 묘사할 때, 익시온(Ixion)이라는 그리스 신화의 등장인물을 예로 들었다. 익시온은 존속살인을 하고 헤라를 강간하려고 했다가 제우스로부터 지옥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회전 바퀴에 매달리는 노역 형벌을 받았다. 쇼펜하우어는 익시온의 이 고된 노역 형벌을 인용하며 “예술은 ‘익시온의 멈추지 않는 바퀴’에 달려 돌아가는 세상의 고통 속 안식일”이라고 결론을 내린다.[1] 이 말의 정확한 의미는 “예술이란 고통의 세계에서 잠시나마 안식을 경험하게 해주는 신으로부터의 선물”이라는 것이다.죄로 타락한 세상은 하나님을 떠나, 남겨진 아름다움의 흔적의 조각을 맞추며 거짓된 쉼을 누린다. 그 영광의 자리에 대신 앉는 단골 주인공은 단연코 “예술”이다. 때로는 추앙할 만큼 고귀하고 탁월하며, 찬양할 만큼 아름답고, ‘의미’라는 것도 전달해 준다. 때로는 심각할 정도로 마음의 파장을 일으키고, 마음 깊은 중심에 담을 만큼 심장을 뛰게 한다. 존 파이퍼는 “하나님의 가장 큰 적은 그분의 선물”이라고 말했다.[2]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의 씨앗과 마음의 밭’ 비유를 들려주시면서 “기타 욕심이 들어와 말씀을 막아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자”(막 4:19)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기타 욕심”은 악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특히 예술의 아름다움이 그렇다. 안식 대신 안식의 유사 기능인 “마취제”로 쓰이는 예술의 놀라운 기능을 보라. 우리는 일상에서 (1) 심미적이고 감정적인 아름다움을 누리며 (2) 고된 노역과 같은 삶으로부터 해방감을 느낀다. 실제로 현대에는 절망에 빠진 그리스도인이 도피할 수 있는 예술적 장치들이 많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 소설, 음악 같은, 스토리를 가진 장르 속으로 도피한다. 마음이 내려앉아 절망 가운데 거할 때 베토벤과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곡을 밤새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깊은 감정을 건드리는 선율에서 위로를 얻고, 그 화성의 진행에 상상력을 펼쳤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었고, 세상 그 어떤 행복감과도 비교할 수 없을 감정적 만족감을 느꼈다. 가사가 없는 아름다운 악기 소리는 더없이 맑았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었다. 주님 앞에 거리낌 없는 ‘쉼’이며 ‘마음의 여행’이라고 믿었다. 며칠 동안 그 아름다움에 빠져 멈출 수도 없었고, 잠도 오지 않을 만큼 몰입했다. 그리고 현실로 돌아왔을 때, 그 행복은 그 어떤 선한 열매도 맺지 못했음을 봤다. 하나님과 깊이 대화하며 그분께 모든 염려를 맡긴 후와 음악으로 마취시킨 나의 감정의 결과를 비교해보았다. 그 후로 다시는 밤새 음악에 심취하지 않았다. 아름다움에 늘 민감하고 누구보다 깊이 누렸던 습관이 “하나님의 적”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던 기억이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예술의 아름다움을 주 안에서 누리는 법, 그리고 우선순위에 주님과의 관계를 먼저 놓는 법, 예술로 참된 안식을 얻는 법을 꾸준히 연습해야 했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자리에 우상을 올려놓는 것이 인간 마음의 속성이다. 칼뱅은 “마음은 우상의 아비요, 손은 우상의 어미다”라고 했다.[3] 마음에 품은 것이 선하더라도, 그것이 인간 마음속 어느 한구석에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되어버리고, 반드시 말과 행동으로 우상이라는 쓴 열매를 맺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그리스도인이 어떤 영화를 감상하고,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대서사시를 찬양할 수 있다. 그 영화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 그 영화가 영원한 소망을 품게 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은혜의 경험을 취하여, 어느 순간 그 영화에 몰입하게 되고, 결국 하나님 자리에 그 영화를 대신 앉힐 수도 있다. 영적 분별력과 예민함이 없다면 인간의 마음은 거짓된 아름다움에 내어주기가 너무 쉽다. 이유가 무엇일까? 참 아름다움과 거짓 아름다움이 너무나 비슷하기 때문이다. 처절한 노력과 깊은 말씀 묵상, 쉬지 않는 기도 없이는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둘은 비슷하다.그리스도인은 복음의 은혜 아래 있지만, “이미 그러나 아직” 이 땅에서 푯대를 향하여 달음질해야 한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온갖 아름다운 예술 활동이 잘못된 우선순위를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을 대적하는 “우상”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우리는 매일의 문화예술 감상에 끊임없이 질문해야 한다. 나는 그 작품을 통해 “창조주 삼위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찬양하고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음악에서 “복음”을 누리고 있는가? 나는 그 드라마 시청보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더 기뻐하고 있는가? 기도보다 그림 감상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지는 않은가? 시의 아름다움보다 말씀의 진리를 사랑하고 있는가? 나는 쉬는 시간에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들으며, 무엇을 손에 쥐고 있는가?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우리를 승리로 이끄시고자 우리에게 꾸준히 안식을 경험하게 하신다. 안식일은 ‘이미 그러나 아직’의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계속되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과 ‘아름다움의 경험’은 완전하고 영원한 안식을 바라보는 종말론적 소망을 낳게 한다. 그 소망은 천국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며 고통을 견딜 힘을 가져다주는 즐거움과 기쁨으로 나타난다. 즉, 그리스도인에게 아름다움의 경험은 이 땅에서 누리는 평화와 앞으로 임할 천국을 통해 오는 것으로, 단순하게 고통을 줄여줄 마취제로서의 예술이 아니라, 평화와 안식이 있는 미적 경험을 소망하는 것이다.푯대를 향해 걷지 않고 늘 달음박질했던 사도 바울도 예외 없이 이 땅에서 규칙적인 안식을 누렸다. 그리고 그 쉼은 죄로부터의 해방감에 감사와 최후 영광의 아름다움을 잠시 맛보는 것이었고, 그 안식의 경험을 통해 그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다”(롬 8:18)고 선포했다. 예레미야 또한 “말과 함께 달리는” 주의 전사였다(렘 12:5). 하지만 그도 영원한 영광의 안식을 맛보는 “이 땅의 안식”이 있었기에 멈추지 않고 달렸다. 마음에 새긴 “만개한 살구꽃의 환상”(렘 1:11)이 마음의 영원한 안식을 향한 그의 표지가 되었다. 스가랴는 성령의 기름으로 꺼지지 않는 아름다움 순금 등잔대의 환상(스가랴 4장)을, 제사장이 왕의 면류관을 받는(스가랴 6장) 영원한 나라에서 누리는 진정한 화목의 안식을 마음에 새겼다. 아름다움의 ‘안식’의 목적을 아는 것은, 어쩌면 삶을 예배로 드려야 하는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중요한 인식들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안식일의 신학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의 중심에 있듯이, 매일의 삶에서 아름다운 예술을 즐기는 그리스도인은 (1)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세상이 하나님 나라에서 더 빛나게 펼쳐질 것과 (2) 죄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이라는 진리를 기억해야 한다. 주1. Arthur Schopenhauer, World as Will and Representation I, trans. E. F. J. Payne (New York: Dover Publications, 2000), 220. 2. John Piper, A Hunger For God, 23.3. “The mind begets an idol: the hand gives it birth.” John Calvin,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 ed. John T. McNeil, trans.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1960), 1.1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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