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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트루먼과 복음적 지성
by Thomas Kidd
2021-11-11
칼 트루먼(Carl Trueman)은 우리 시대 가장 흥미로운 기독교 사상가 중 한 사람이다. 그로브시티 칼리지(Grove City College)의 교수이자, 그 탁월한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 문화적 기억상실과 표현적 개인주의(The Rise and Triumph of the Modern Self: Cultural , Expressive Individualism)’와 ‘성 혁명으로 가는 길(Road to Sexual Revolution)’을 포함한 여러 권의 책을 저술한 저자이기도 하다. 트루먼은 현재 미국에서 소용돌이치는 양 극단, 탈진실 수용주의(woke accommodationism)와 미친 트럼프주의 사이에서 고민하는 전통주의 기독교인을 위한 제3의 길을 제안한다. 그가 주창하는 세 번째 방법을 “신실한 현실주의(faithful realism)”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그러니까 신학적이고 문화적 헌신에 있어서는 엄격하게 정통의 길을 따라야 하겠지만, 예의를 갖추고(civil) 그 길을 가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불어 우리를 지켜보는 세속 세계가 정통적 가치관에 헌신하는 우리에게 박수를 보내리라 기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퍼스트 씽즈(First Things, 역자주: 미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수주의 지향의 종교 저널)에 게재한 “복음주의 엘리트의 실패”라는 제목의 긴 형식의 글을 통해서 트루먼은 이 세 번째 방법을 설명했다. 그 글에는 논의할 게 한두 가지 담긴 게 아니지만, 여기서는 가장 관련성이 높은 부분에만 초점을 맞추겠다. 바로 역사학자 마크 놀(Mark Noll)과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 내가 노터데임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을 때 나의 고문이었다)의 업적과 유산에 대해서 트루먼이 논의한 부분이다. 1990년대 중반, 정통 기독교인의 지적이고 학문적인 온전함을 회복하고 수호하기 위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이 운동에서 지도자 역할을 감당한 역사학자 마크 놀과 조지 마즈던은 기독교 정신에 대한 용감한 사례를 만들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The Scandal of the Evangelical Mind)’에서 놀은 미국 복음주의가 지적 신뢰성이 결여된, 그래서 도무지 변명의 여지가 없는 입장에만 집착함으로 심각한 장애를 입었다고 주장했다. 결과적으로 복음주의는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지성인의 경멸을 받았다. 설상가상으로 지적 표준의 결여(lack)는 교회를 다니는 지성인들마저 힘들게 만들었다. 놀이 그 책에서 초점을 맞춘 것은 세대주의와 문자적 육 일 간의 천지창조였는데, 이런 사실에 집착하는 것은 이성의 차원(canons of reason)에서 방어가 불가능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상 엄격한 정통 기독교 신앙에도 필요하지 않다는 게 놀의 주장이었다. ‘복음주의 지성의 스캔들’은 지나친 근본주의를 지양하는 동시에 정통 기독교를 옹호하는 입장을 취함으로 기독교 설파를 목적으로 삼은, 대표적 복음주의 잡지 크리스천 투데이(Christian Today)가 꼽은 베스트셀러이자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었다. 그리고 얼마 후,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이라고 부르던 구절을 그대로 제목으로 붙여서 발표한 한 연구 논문을 통해서 마즈던이 등장했다. 그의 주장이 바탕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은 미국 내 가장 중요한 고등 교육 기관의 대다수가 설립 기원을 기독교에 두고 있다는 것인데, 이 점은 사실 그가 이미 과거에 발표했던 연구이기도 하다. 마즈던이 내린 결론에 따르면, 교양을 갖춘 기독교 경멸자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다름 아니라 신앙이 지성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만든다고 그들이 주장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러 건설적인 사례를 통해서 마즈던은 기독교 학자가 자신의 믿음을 손상시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학문적 담론의 규범을 지킬 수 있을 뿐 아니라, 다른 동료들과 더불어 사려 깊고 정직한 학문적 동참까지도 배양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달리, 놀과 마즈던은 정통 기독교 신앙의 전인격적(full-blooded) 확증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고 슐라이어마허의 주장과 달리, 나는 그들의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학문적 표준이 애초에 비판 자체를 넘어선 영역으로 간주되지만 않는 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죽음과 육체적 부활에 대한 믿음은 결코 지적 엄격함을 훼손하지도 않을뿐더러 학문적 표준과 타협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1990년대 당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비정상적일 정도로까지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졌던 건, 당시 대학 교육을 받은 복음주의자들이 하나 같이 불안한 마음을 안심시켜 줄 무언가를 찾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이 다녔던 대학은 하나 같이 지성과 동떨어진 신앙이야말로 가치 없는 것(disqualifying)이라고 말했다. 그런 상황에서 놀과 마즈던은 전혀 상반되는 주장을 한 것이다. 신앙인에게도 얼마든지 자기비판이 가능할 뿐 아니라, 또한 지지할 수 없는 신념도 버릴 수 있기에, 신앙을 가지고도 현대의 지적 생활에 얼마든지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마즈던과 놀의 주장이 있은 지 채 삼십 년도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들의 주장이 마치 고대의 이야기처럼 여겨진다는 사실에 나는 충격을 받는다. 철저한 정직함과 성실함만 갖추면 학문 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대학 및 주요 기관에서 얼마든지 인정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야말로, 지금 돌이켜서 보면 순진한 생각이다. 오늘날 고등 교육은 대체로 탈진실한(woke) 이들의 영역이다. 아무리 뛰어난 생화학자이거나 또는 미노스(Minoan) 문명에 대한 깊은 지식을 가졌다고 해도, 인종과 섹슈얼리티 또는 심지어 성별에 대한 문화적 정통에서 벗어났는가 아닌가가 학문적 능력과 세심한 연구 같은 고려 사항보다 고용 및 재임 과정에서 더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대학에서 마즈던의 “기독교 학문의 터무니없는 생각”을 가르치는 중에 트루먼은 오늘날 엘리트 학계와 기업 문화의 편협한 분위기를 고려할 때, 그의 주장이 매력적이기는 하지만 다소 비현실적인 것으로 학생들이 인식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말한다. 나는 분명히 트루먼에게 어떤 의도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놀과 마즈던의 주장이 점점 더 과거 세대의 고리타분한 소리로 들린다는 것도 알고 있다. 더불어 나에게는 여전히 예리함과 역사적 방법의 황금 표준인 복음주의와 근본주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서술도 (비극적이지만) 이제는 약간 구식처럼 보인다는 점을 덧붙이고 싶다. 그들의 작품은 비판적이었지만, 그럼에도 복음주의자들에게서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지난 십 년 동안 가장 인기 있는 복음주의 역사는 활동가 중심으로, 도리어 반복음주의적 방식으로 쓰였다. 그 결과 일부 기독교 역사가들 사이에서조차 혐오는 이제 미국 복음주의자에 대한 연구에서 공감이라는 단어를 대체했다. 마즈던은 또한 트루먼이 잘 설명하지 못하는 방식으로(그럼에도 그것만으로 이미 아주 길다), 현대 아카데미에 관해 비판적이다. ‘터무니없는 생각’과 ‘미국 대학의 영혼(Soul of the American University)’에서 마즈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다양성에 대한 노골적인 맹신(commitment)에 관해서 현대 세속 아카데미에게 그 책임을 물었다. 우리 모두가 예외 없이 문화적 관점의 소산임을 인정하고, 보다 더 다양한 관점과 경험의 포함이야말로 활기찬 학문의 특징이라면, 왜 학계는 솔직한 기독교인을 배제하는지, 마즈던은 질문한다. 기독교인(또는 유대인과 같은 다른 전통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왜 학문의 테이블에 같이 앉으면 안 되는가? 마즈던은 이미 1990년대에 학문적 “다양성”이 결코 이데올로기까지 포용할 정도로 다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의 짧은 순간 동안, 이데올로기적 일관성에 대한 마즈던의 요구는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더 많은 기독교적 관점을 위한 기회를 만들어낼 것처럼 보였다. 그는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에 관한 비평적이면서 감탄을 자아내는 전기로 미국의 학술 역사가에게 수여되는 가장 권위 있는, 컬럼비아 대학교가 주관하는 미국사 부문 밴크로프트 상(Bancroft Prize)을 수상했다. 그러나 나는 오늘날 기독교 역사가가 쓴 기독교 인물에 관한 책으로 그런 상을 받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더욱이 2000년대 초반에는 베일러(Baylor)대학에서 만든 “2012 비전”이 시작되었다. 이 비전에서 베일러대학은 적어도 매우 광범위한 종류의 기독교 정통에 대한 분명한 헌신을 유지하면서 동시에 연구에 집중하는 대학이 되겠다는 비전을 밝히고 있다. 그 비전이 초래한 운명(fate)은 또 다른 이야기꺼리가 될 수 있겠지만, 2000년대 중반 이후 계속된 리더십 변화와 풋볼 팀에서 일어난 끔찍한 성폭행 스캔들은 비전이 담고 있는 내용에 대한 전반적 신뢰는 고사하고, 특히나 기독교의 명확성에 대한 헌신을 추구하는 데에 베일러대학이 제도적으로 초점을 맞추겠다는 주장의 신뢰성을 떨어뜨리기에 충분했다. 트루먼은 학계에서 엘리트를 제대로 인정하기 위해서는 신학적이고 윤리적인 타협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성경 연구, 윤리학, 심리학, 사회사업 등의 분야 전반에 걸쳐 다양한 사례를 통해 얼마든지 뒷받침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전통주의 기독교인과 엘리트 학계가 서로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상황이, 트루먼이 제안한 것처럼 흑백 논리로 설명된다고는 확신하지 못한다. (이건 내가 마즈던의 제자이기에 갖는 약간의 의구심일 수도 있다.) 아무튼 트루먼은 일반적인 세속적 학문적 지표에서조차 좋은 점수를 받는 뛰어난 기독교 대학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옥스포드 대학 출판부를 포함한 엘리트 학술 매체에서 책을 출판했다. 따라서 기독교 학자로서의 그의 부인할 수 없는 신뢰성은 이러한 사실에 의해 뒷받침된다. 학계를 신뢰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신학적 또는 문화적 문제 때문에 교수직을 얻지 못한다는 말은 믿기지 않을 것이다. (끔찍한 취업 시장이 사실은 훨씬 더 어려운 진짜 문제일 것이다.) 더욱이 트루먼, 나, 놀, 마즈던 그리고 다른 많은 학자들은 우리의 작업이 정상적인 학문적 기준을 충족하기 때문에 대학 언론에서조차 우리의 작업을 종교사라는 이름으로 기꺼이 출판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학 출판사에서 출간을 하려면 최소한 충족해야 할 학문적 기준이 있다는 건 상식이다. 물론 나도 잠재적 고용주뿐 아니라 언론 및 저널의 익명 독자로부터 미묘하면서도 공공연한 형태의 반기독교적 편협함을 접하곤 했지만, 분야를 막론하고 자신의 신앙이 학문적 성공을 가로막는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트루먼이 지적했듯이, 진짜 문제는 당신이 지배적인 세속 학계를 혐오스러운 그 무엇으로 간주하는 견해를 공개적으로 표현할 때 발생한다. 이것은 단지 전통주의 기독교인에게만 국한되는 일이 아니다. 시카고 대학의 지구 물리학자인 도리언 애벗(Dorian Abbot)은 최근 ‘다양성, 형평성, 포용성’이라는 현행 학문적 규칙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MIT 초청 강연이 취소되었다. 보장된 임기(tenure) 때문에 해고로 이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대학은 여전히 주류 이념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할 수 있다.이제 막 학계에 발을 들인 예비 학자들은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에 반하는 문제에 대해 발언할 필요가 없거나, 또는 있다고 해도 말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물론, 당신의 연구가 논란의 여지가 있는 주제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경우라면, 상황이 더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텍사스 대학교의 사회학자인 가톨릭 신자 마크 레그너러스(Mark Regnerus)는 2012년 감히 동성 부모가 키운 자녀의 번영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한 연구를 출간했다는 사실 때문에 대대적인 괴롭힘과 수치심에 이어 조사까지 받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보장된 임기가 있었기에 그런 폭풍우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러나 트루먼이 1994년에 옥스포드 대학 출판사를 통해서 발표한 ‘루터의 유산: 구원과 영국의 개혁자(Luther’s Legacy: Salvation and English Reformers, 1525-1556)처럼 신앙이나 개인의 신념이 굳이 문화 전쟁을 촉발할 필요가 없는 많은 분야와 주제가 있다. 다양한 고백적 관점에서 종교사에 대해 글을 쓰고 옥스포드나 예일(마즈던이 조나단 에드워드 전기를 출판한 곳)과 같은 최고의 세속 언론을 통해서 출구를 찾은 기독교인의 예는 다양하게 인용할 수 있다. 언론과 저널이 학계 및 언론의 이익에 반하는 견해를 가진 것으로 알려진 사람들(예를 들어, 도리언 애벗)의 출판 작업을 중단할 수 있을까? 물론이다. 경우에 따라 비록 미묘하지만 이미 그런 경우가 발생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전통주의자뿐 아니라 세속화된 사회가 결코 좋아하지 않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의 글이 가능한 한 세속 언론을 통해 계속해서 출판되어야 한다. 많은 기독교 학자가 특히 기독교 출판과 계속해서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은 필수이다. 트루먼의 ‘현대적 자아의 부상과 승리’를 출판할 세속 언론은 거의 없다(크로스웨이와 같은 일부 기독교 언론은 여전히 그런 책을 출판할 것이다. 너무도 감사하다!).기독교 학자 중 일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속 매체를 통해 지속적으로 출판함으로써 세속 엘리트 학계에서 계속해서 자리를 유지할 것이다. 가능한 한 그런 방식을 취하는 데에는 길고도 독특한 기독교 전통이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 그리고 C. S. 루이스(C. S. Lewis)와 같은 기독교 지식인 지도자는 당시 엘리트 학계에서조차 독특한 기독교적 목소리를 유지했다. 물론 당시가 지금과 비교하면 훨씬 더 기독교적 사회였다고 하더라도 말이다.본격적인 기독교적 지성의 증거는 신학적이고 문화적 타협을 하지 않는 한, 최대한 세속 학계를 통해서 일하는 기독교 학자들의 역할을 유지하는 것까지도 포함하고 있다. 탈기독교 서구에서 고전적 자유주의와 관용의 원칙에 대하여 우리 문화가 표면적으로 표현하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지배적인 학문과 문화의 구석구석에까지 기독교적 지성을 증거하는 문이 계속 열려 있기를 기도한다. 하나님은 왕국을 건설하는 데 우리의 학문적 기여는 거의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마스 힐에서 있었던 바울의 증언에서부터 오늘날까지, 학계라는 숲속에서는 복음의 진리를 옹호하는 기독교인의 목소리가 항상 있어왔다. 할 수 있는 한, 우리 세대에서도 그 증인의 역할을 계속해서 이어가도록 하자. 원제: Carl Trueman and the Evangelical Min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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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by Don Carson
2021-10-19
편집자 주: 오늘날 서구 그리스도인은 성경의 권위와 관련해 여러 가지 명백한 위협에 직면해 있다. 그러나 단지 위협이 명백하다는 사실만으로 성경에 대한 우리의 신뢰가 약해지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눈에 띄지 않게 다가오는 교묘한 위협이 회의론을 조장한다는 사실이다. TGC 전 대표인 돈 카슨(Don Carson)은 데멜리오스(Themelios)에 게재한 기고문에서 우리가 하나님 말씀의 권위를 포기하게 만드는 교묘한 수법 열 가지를 설명한다. 다음은 참으로 시의적절한 그의 에세이 발췌 내용이다. 선택적 증거에만 의존하는 위험성에 관해선택적 증거에만 호소함으로 말씀의 권위가 약해지는 표류의 가장 심각한 형태는 건강, 부, 번영의 복음을 의미하는 HWPG(Health, Wealth, Prosperity Gospel) 설교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하나님께서 이 땅에 번영을 주신다는 구절과 왕의 자녀가 되는 사실의 중요성을 반영하는 구절을 서로 연결하라. 그러면 확실한 이론(case)이 하나 만들어진다. 거기에도 조건이 하나 따라온다. 우리가 앞으로 그리스도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서 내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 아니 그런 고난이 사실상 그리스도의 자녀로서 누리는 특권이라는 등의 생각은 깨끗하게 머리에서 지워야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말씀 왜곡은 너무나 자명하기에 문제점을 지적하는 게 조금도 어렵지 않다.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더 교묘한 것이다. 교회 내 논쟁을 피하려고 논쟁의 여지가 있는 문제는 언급 자체를 거부하는 경우이다. 생각이 다른 사람들과 싸우기 싫다는 이유로 뜨거운 주제(빈곤, 인종차별, 동성애 결혼, 남녀 차별)에 관해서 진통제(anodyne) 치료법을 쓰는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런 골치 아픈 문제들이 알아서 사라지겠지라는 비참한 희망을 붙들고 사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슬프다. 아무리 어려운 주제라고 해도 우리가 성경의 권위 아래에서 올바른 사고체계를 갖추려고 하지 않는다면, 교인의 대부분이 결국에는 세상 문화가 만들어주는 사고에 빠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가장 좋은 해독제는 체계적인 강해 설교이다. 왜냐면 강해 설교는 텍스트가 말하는 그대로 설교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그에 반해 주제 설교는 얼마든지 어려운 텍스트를 피해 갈 수 있다. 물론 문화적으로 맹목적 시각에 빠진 사람들은 바른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얼마든지 괴롭힐 수 있다. 난처한 구절과 주제의 회피에 관해설교자가 이따금 특정 주제를 피하는 이유는 주제가 주는 어느 정도의 난처함 때문이다. 당혹감을 느낀다는 것은 설교자가 스스로 보기에도 설교를 통해 선포할 만큼 특정 주제(예를 들어 종말론이나 트랜스젠더와 관련한 주제)를 충분히 연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드러낸다. 또는 주제 자체에 느끼는 일반적인 불편함(예를 들어 예정론) 때문에, 교인들이 너무도 싫어하는 주제라는 것을 잘 알고 있어서, 또는 성경에 반복해서 등장하나 설교자 자신이 정말로 싫어하는 주제라서(예를 들어 지옥과 영원한 심판) 그럴 수 있다. 이런 경우에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추한 형태의 말은 이런 것이다. “오늘 아침 우리는 누가복음 16장 19절부터 31절의 말씀을 앞에 놓고 있습니다. 이 본문도 예수님의 생애를 공부하다 보면 만나는 다른 많은 구절과 마찬가지로 꽤 충격적인 방식으로 지옥을 묘사하는데요. 솔직히 저는 이 구절에 관한 설교를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런 구절은 무엇보다 저를 불편하게 만듭니다. 그렇지만 이런 구절을 완전히 무시하고 설교를 안 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면 엄연히 성경에 있는 구절이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는 설교자가 공식적으로 성경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설교자는 사실상 자신을 예수님보다 더 동정심 많고 민감한 사람으로 여기고 있다. 사악한 것 이상으로 기만적인 이러한 태도는 실제로 주변에 널리고 널렸다. 비정통적인 입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성경 남용에 관해최근에 존더반 출판사는 ‘동성애, 성경 그리고 교회에 대한 두 가지 견해(Two Views on Homosexuality, the Bible, and the Church)’를 출간했다. 이 책은 두 가지 견해를 각각 “지지(affirming)”와 “지지하지 않음(non-affirming)”으로 구분하고, 두 명의 저자가 양쪽의 견해를 대변하도록 구성되어 있다. 양쪽 다 말로는 “성경을 근거로” 논쟁을 벌인다고 한다. 한때 “지지” 쪽의 견해조차 신앙고백적 복음주의자가 견지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왔던 반면, 이 책이 주장하는 바는 지지하지 않는 견해뿐만 아니라 지지하는 쪽의 견해도 복음주의 진영 내에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책이 가져다주는 효과는 일종의 대안적 복음주의 입장이다. 그러니까 같은 복음주의 진영 안에서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금지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경이 동성애 결혼을 받아들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지금 이 내용을 읽는 독자라면 천년왕국, 선택, 지옥, 세례 등의 주제와 관련해서 세 가지 견해 또는 네 가지 견해를 표방한 책이 시중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을 것이다. 확실히 동성애에 관한 이 새 책도 다르지 않다. 이와 관련해 몇 가지 지적할 필요가 있다. (a) 이런 부류의 책이 채택하는 형식, 그러니까 “y에 대한 x의 견해(입장)”에는 본질적으로 함정(slippery)이 있다. 학생들이 단 한 권으로 복잡한 주제에 대한 다양한 입장을 접하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되겠지만, 각각의 견해가 다 “성경에 근거해서” 논의되기 때문에 마치 모든 견해가 다 동등하게 “성경적”이라는 잘못된 시각을 전달할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호와의 증인도 “성경을 근거로” 주장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그들이 “성경을 근거로” 펼치는 주해가 매우 부족한 점이 많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전혀 망설이지 않는다. “y에 대한 x의 견해”라는 형식은 이런 측면에서 본문을 바탕으로 정당한 해설을 힘들게 만들고, 그 결과 각각의 견해가 마치 이론적(성경적)으로 볼 때는 모두 다 동등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 양 세례를 베푸는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y에 대한 x의 견해”는 어떤 측면에서는 유용하지만 다소 조작적이다. 내가 언젠가 다른 곳에서 주장한 것처럼 논쟁이라는 제목이 붙었다고 해서 모든 논쟁거리가 다 제대로 논쟁이 되는 것은 아니다. (b) 또 다른 측면에서 볼 때 일반적으로 “y에 대한 x의 견해” 형식의 책이 어느 정도까지는 묵시적 신앙 고백의 틀 속에서 작동한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예수님이 과연 하나님인지에 대한 세 가지 견해’ 같은 책은 (아직까지는!) 출판되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도 철학적 자연주의에 심취한 자유주의자, 여호와의 증인 그리고 고백적 기독교인을 모두 다 한자리에 모을 수 있다. 그러나 사실상 이런 제목의 책이 출판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만약에 이 책이 출간된다면 그건 신앙 서적이 아니라 ‘비교 종교’에 관한 책으로 분류될 가능성이 크다. “y에 대한 x의 견해” 같이 분류되는 책은 대부분 주제인 y에 해당하는 구성요소를 현재까지 복음주의적 입장에서 허용하는 주제로만 제한하고 있다. 이 목록을 확장하여 십 년 전에는 그 어떤 복음주의자도 허용하지 않았을 주제(예를 들어 예수의 신성 부정 또는 동성애 행위의 합법성)를 오늘날 다양하게 포함한 이유는 성경이 언급된 주제에 관해 일반적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명확하게 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이다. 그렇게 함으로 복음주의의 경계를 다시 한번 고민하게 하고 재정의하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규범적 규범(“룰을 지배하는 룰” norma normans)으로서 성경의 목소리가 이론적으로는 여전히 온전하지만, 실제로는 미묘하게 축소되었다.동성애 결혼에 대해 “지지” 견해를 취하는 것이 구원을 위태롭게 하지 않으며, 그런 사람을 복음주의 진영 밖에 두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분명한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있어 왔다. 예를 들어 에세이 ‘성 윤리에 대한 복음주의적 접근(An Evangelical Approach to Sexual Ethics)’에서 스티브 홈즈(Steven Holmes)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오직 믿음(Sola Fide), 나는 거기에 서 있어야 한다. 내가 걷는 곳과 우리 모두가 걷는 곳에 피를 흘렸기 때문이다. 온 세상을 위하여 단번에 드리신 완전한 제사이고, 그를 믿는 모든 자를 새롭게 하시는 보혈이다. 그리고 그 구원이 나를 포함한 것이라면 나의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유효하다. 또한 동성 결혼을 긍정하는 나의 친구들, 그리고 그들이 겪는 모든 실패와 혼란 속에서도 구원은 역사한다. 신실하고 믿음이 확고한 내 친구들에게 구원의 희망이 없다면 그건 나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라 피데를 외치는 복음주의 주장의 남용이다. 나는 구원이 믿음을 고백하는 것 이외에 이성애를 긍정해야만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기독교인을 만난 적이 없다. 오직 믿음만이 은혜를 전유하는 수단이다. 그 은혜는 너무나 강력하여 인간을 변화시킨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은혜의 구원은 왕이신 예수의 주권 아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19-21).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6장 9절부터 11절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한다.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바울 사상의 맥락에서 볼 때 그가 주장하는 것은 죄 없는 완전한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게 아니라, 보혈로 씻음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그러한 죄(탐욕이나 간음, 동성애 행위 또는 그 무엇이든)를 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한 죄가 그들을 정의하고 특징지을 수 없다는 말이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솔라 피데를 외침으로 구원이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공로를 통해 얻는다는 사실을 기쁨으로 확증하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거룩함이 구원의 산물이지 결코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 분명히 죄라고 선언하신 것, 그 죄를 짓는 자는 왕국에서 배제된다고 하는 죄도 그게 죄가 아니라고(non-sinfulness) 주장하며, 솔라 피데가 어차피 다 구원할 거니까 아무런 문제가 될 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이다. 성경은 홈즈가 말했듯이 “실패와 혼란”에 빠져 미끄러진 사람들에게도 기회가 있다고 말하지만, 구원을 받는 자는 반드시 하나님이 주신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 안에 안식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분명한 말씀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죄를 짓는 자신을 부인하는 자들에게 구원의 자리는 남아 있지 않다. 오직 은혜(Sola gratia)와 오직 믿음(sola fide)은 항상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그리스도(solus Christus)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동반한다. 너무 부족한 독서가 초래하는 실패, 특히 오래된 작품의 경우에 관해책을 너무 읽지 않는 것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권위를 방해하는 경향으로 흘러가는 데에 일조한다…. 너무 적은 양의 독서, 특히 오래된 고전을 멀리하게 되면 현재 유행하는 의제에만 열광하게 되고, 그 결과 단순한 유행을 과도하게 흡수할 뿐 아니라 거기에 도취하기 쉽다. 물론 정반대가 초래하는 실패도 있다. 적지 않은 목회자가 청교도 작품에는 심취하면서 현대 작품을 읽는 데는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이 쓰는 언어, 사고 체계, 예화 또는 주제를 들으면 거의 4세기 전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다. 그러나 이건 여기서 언급할 문제가 아니다. 대부분은 고전, 특히 주석과 탁월한 신학 작품을 읽지 않는 게 훨씬 더 흔한 일이기 때문이다. 동시대 작품만 읽을 때 생기는 문제는 누구나 다 비슷한 소리를 하기에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이나 설교가 저속한 수준(kitsch)으로 떨어지기 쉽다는 점이다. 우리는 아주 유창하게 자기 정체성, 환경 문제, 관용의 중요성, 예수의 제자가 되는 것(그러나 기독교인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음) 그리고 성경이 우리의 고통에 어떻게 도움이 되는지 등에 관해서 이야기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재정 관리와 이혼 후 회복에 관한 세미나도 진행한다. 나는 성경이 이런 주제를 다루지 않는다고 말하려는 게 아니다. 이런 주제는 결코 성경의 핵심이 아니다. 예를 들어, 굳이 세 명의 요한(존)만을 선택해서, 요한 크리소스토모(John Chrysostom), 존 칼빈(John Calvin), 존 플라벨(John Flavel), 이 세 사람의 작품을 더 많이 읽는다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다음 주제에 관해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자주 이야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죄의 무서움, 복음의 본질, 복되신 삼위일체, 진리, 제자도, 기독교인들이 고난 당할 것이라는 성경의 주장, 잘 죽는 법, 새 하늘과 새 왕국에 대한 소망, 새 언약의 영광, 순전한 예수 그리스도의 아름다움, 주권자이시며 선하신 하나님에 대한 확신, 회개와 타협의 여지가 없는 믿음의 의미, 인내와 오래 참음의 중요성, 거룩한 아름다움과 지역 교회의 중요성 등등. 다른 세대를 살았던 그리스도인이 성경에서 발견했던 이런 중요한 주제를 무시하면서, 과연 우리가 성경이 우리 삶과 사역에서 가장 권위 있는 기준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우리가 잃어버린,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느껴야 할 경외감에 관해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떨어야 하는 인간의 능력을 약화하는 요소는 수도 없이 많다. 그 모두에게서 발견하는 공통점은 오만(arrogance)이다. 오만은 우리가 진정으로 그분을 따르는, 하나님에 관한 생각을 멈추지 말아야 할 자녀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태도, 계속해서 성경을 읽고, 또 읽고 다시 읽고 묵상해야 할 필요성을 깨닫지 못하게 한다. 대신 이 세상에 차고 넘치는 데이터는 우리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상상까지도 늪에 빠뜨린다. 이런 도덕적 타락은 우리를 성경에서 멀어지게 한다. 음란물에 빠져 있거나 성행위를 조장하는 사람들, 또는 심한 경쟁을 조장하는 사람들이 말씀 앞에서 경외감에 떠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성경을 읽는 데 많은 시간을 보내는 모습은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더욱이 우리의 무자비한 행동은 우리를 지켜보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성경의 실제적인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 때때로, 우리를 괴롭히는 지적인 의심을 만족스럽게 해결할 때까지 공부를 계속하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함께 줄어들 것이다. 물론 주님을 향한 두려움의 한 부분은 말씀 앞에서 떠는 경외감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에 관해“오만한 무지”는 이런저런 주제와 관련한 성경 구절이 주석적으로 혼란스럽고 불분명하기에 우리 인간은 결코 해당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만하다…. 이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오늘날 알려지지 않았거나 실행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거쉬(David Gushee)는 최근에 낸 책과 기사에서 동성애 결혼은 우리가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는 수준으로(agree to disagree), 그러니까 예전에 아디아포라(adiaphora)라고 불렀던 ‘무관심한 주제’의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보수”와 “진보”가 동성애 문제를 비롯한 몇 가지 다른 문제와 관련해서 불행한 상황으로 치닫고 있다고 예측한다. 그건 그들이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가 옳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평하게 말해서, 성적 취향이 과연 영원한 생명에 관한 결과를 초래하는가 하는 질문에 덧붙여, 동성애에 대한 성경과 전통의 통일된 목소리는 결코 진보주의 기독교인의 손을 들어주지 않는다는 점을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말해야 한다. 특히 도널들 포트슨(S. Donald Fortson III)과 롤린 그람스(Rollin G. Grams)가 쓴 ‘변하지 않는 증인: 성경과 전통 속에 드러난 동성애에 관한 기독교의 일관된 가르침(Unchanged Witness: The Consistent Christian Teaching on Homosexuality in Bible and Tradition)’을 참고하라. 트레빈 왁스(Trevin Wax)가 지적했듯이 이 주제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과 행동 자체를 혁신하여 분열을 시작하는 “진보주의자”가 도리어 “보수주의자”를 향해서 타협하지 않고 분명하게 선을 그어 분열을 조장한다며 비난하고 있는 형국이다. 젠(Jen)과 브랜든 해트메이커(Brandon Hatmaker, 역자 주: 제니퍼 해트메이커와 브랜든 헤트메이커는 미국 텍사스에서 ‘오스틴 새 교회’를 개척했다. 여러 방송 출연을 통해 전국적인 지명도가 있으며, 다섯 자녀를 둔 부부인데, 2020년 이혼했다)의 주장에서도 다소 유사한 패턴을 찾을 수 있다. 그들의 게시물 대부분은 선하고 동정심이 많으며 고통과 억압받는 사람들에 대한 존경할 만한 관심으로 가득 차 있다. 최근 들어 일부일처제 동성 결혼을 지지하는 의견(move)이 내 눈길을 끌었다. 많은 시간을 들여 그 주제를 연구한 결과 그들은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일부일처제일 경우 성경은 동성애 행위를 명백히 금지하지 않는다, 성경이 금지하는 것은 단지 난잡한 행위(이성애자이든 동성애자이든), 강간 및 기타 심각한 범죄에만 한정되어 있다. 해트메이커 부부는 동성애 커뮤니티에서 많은 고통을 목격하고 스스로 “깊은 공부와 기도의 시간”을 보낸 후에 이런 결론에 도달했다고 해명서를 통해서 주장했다. “결론은 이것입니다. 아무리 동성 결혼이라고 해도 평생 일부일처로 산다면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을 말하는 모든 성경 말씀을 조금도 위반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희망”이라는 기이한 표현은 별개로 하더라도, 브랜든의 에세이는 윤리학자 데이비드 거쉬를 지나치게 찬양한다. 게다가 그 에세이는 요한복음 13장 34절부터 35절(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서로 사랑하라”라고 명령한 새 계명)을 인용하면서 끝을 맺는다.브랜든의 글에 관한 중요한 반응 중에서 세 개를 골랐다. (a) 로자리아 버터필드(Rosaria Butterfield)는 자신의 놀라운 회심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독자들에게 진실을 숨기지 않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이웃 사랑을 실천하라고 조언한다.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서 다가올 심판을 경고하는, 그런 식의 ‘사랑’은 쉽게 감상주의로 귀결된다는 것이다. (b)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스타일로 케빈 드영(Kevin DeYoung)은 짧지만 단호하게 “해트메이커식 해석학”이라고 부르며 맞섰다. 그가 피력한 요점 중 하나를 꼽자면 다음의 내용이다. 해트메이커의 해석학에 따르면 일부일처제와 음행에 반대하는 논리가 어떻게 서로 연결된다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나는 그들이 섹스와 결혼에 관한 정통 기독교 가르침을 완전히 폐기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감사한다. 그러나 취약한 해석학은 결코 전통의 무게를 지탱할 수 없다. 자, 생식 능력(말 2:15), 남성과 여성의 적합성(창 2:18), 또는 두 개의 상보적인 성이 합쳐져서 하나의 유기적인 결합이 된다(창 2:23-24)는 점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게 아담과 하와의 창조라는 결론을 내린 상태라면, 결혼이 왜 꼭 두 사람으로 제한되어야 하는 건지, 왜 꼭 서로에게 정절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물론, 파트너 두 사람이 모두 다 서로를 향한 정절을 원한다는 데 동의할 수 있겠지만, 성적 정절이 필수라고 주장하는 결혼의 존재론과 목적성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해트메이커가 주장하는 결혼의 모습 속에서 더 이상 정절의 가치를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혼외 성관계가 왜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해트메이커가 다룬 구절들은 아마도 억압적인 상황만을 다루었을 것이다. 가장 기본적으로, 일단 어린이를 향한 생물학적 성적 지향만 제거하고 나면, 도대체 어떤 내부 논리에 근거해서 성인 간의 합의된 성관계가 잘못되었다는 것인가? 그리고 같은 측면에서 볼 때 서로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라면 생물학적 형제자매가 결혼하는 것을 도대체 어떤 기준에 근거해서 비난할 수 있다는 말인가(유전적 기형아 출생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피임약까지 사용한다면)? 결혼에 동성을 포함하도록 재정의하는 순간, 결혼이라는 제도를 확장하여 지금보다 더 포용적으로 만든다고 착각할 수 있겠지만, 실상은 결혼을 결혼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로 축소하는 것이다. (c) 마지막으로 케빈 드영이 2016년 4월 13일 T4G에서 독창적인 스타일로 발표한 “포괄적인 시대의 경계 그리기: 일부 교리는 다른 교리보다 더 근본적인가? 우리는 그 차이를 어떻게 구분하는가(Drawing Boundaries in an Inclusive Age: Are Some Doctrines More Fundamental Than Others and How Do We Know What They Are?)”에서 한 말을 소개하겠다. 우리 시대에 이 섹슈얼리티 문제보다 “오만한 무지의 기술”이 더 강력하게 호소하는 곳을 도무지 찾을 길이 없기에 나는 이 주제와 관련해서 다소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같은 이유로, 오늘날 성도들이 삶에서 전심으로 성경에 복종하려고 할 때 이 섹슈얼리티 문제만큼 그들을 성경의 권위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유혹하는 주제도 없을 것이다. 원제: How to Subtly Abandon Your Bible’s Author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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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tt Smethurst
2021-10-09
자녀들은 커가면서 다양한 종류의 영화와 영상물들을 보게 된다. 나는 자녀들에게 그런 영상들 속에서 “거짓말들을 찾아보라”고 얘기하면서 그들을 양육하였다. 사실, 이것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몇 년 전에 내 딸이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인 ‘트롤’을 보았다. 저스틴 팀버레이크(Justin Timberlake)와 안나 켄드릭(Anna Kendrick)이 목소리로 출연한 유명한 작품이었다. 내 딸은 그 만화를 보자마자 곧바로 내게 이렇게 질문을 하였다. “아빠, 행복이 정말 우리 안에 있는 거예요?” 사실 그것이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였다. 그런데, 영화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내 딸에게는 이상하게 여겨졌다. 그래서 딸은 “아빠, 행복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이 아닌가요?”라고 되묻기도 하였다.내가 그때 바로 아이스크림을 사주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대답은 아이스크림을 사줄 만한 아주 훌륭한 대답이었다.사실 모든 다른 영화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트롤’도 하나의 설교와 같다. 그 안에는 문화적인 교리가 담겨있다. 영화의 광고 문구에서부터 그 영화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분명하게 드러낸다. “이것은 행복에 관한 이야기입니다”라고 말이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 등장하는 트롤 공주인 파피와 브랜치의 대화에서도 영화의 메시지가 분명하게 제시된다.파피: 고마워요브랜치: 아니에요, 제가 고마워요.파피: 왜 제게 고마워하세요?브랜치: 왜냐하면 제게 행복해지는 법을 보여주셨으니까요.파피: 정말요? 그럼, 이제 행복하세요? 브랜치: 그런 것 같아요. 행복은 우리 안에 있는 것 같아요. 그렇죠? 그저 누군가 우리 안에 있는 행복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주면 되는 것 같아요.이 영화의 주제곡은 팀버레이크의 “느끼는 것을 멈출 수 없어요”(Can’t Stop the Feeling)이다. 이 노래는 파티에서 춤추며 부를 수 있는 아주 신나는 노래이다. 유튜브에는 이 노래의 애니메이션 버전이 있는데, 거의 6억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그 영상은 시작하자마자 파피 공주와 그리슬 왕의 대화를 보여주면서 영화의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리슬 왕: 너는 내가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파피: 당연하죠! 행복은 우리 안에 있어요. 우리 모두의 내면에 행복이 있어요. 나는 행복을 생각하지 않아요. 나는 행복을 느끼고 있죠.“나는 행복을 내 안에서 느낄 수 있어요!”잠시도 쉼을 얻을 수 없는 피곤한 삶사실 이런 현상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역사 속에서 이런 생각들은 비상식적인 생각으로 취급되었고, 심지어 위험하다고 여겨지기도 하였다. 예전에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가 스스로 발견하는 어떤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태어날 때부터 우리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우리는 어떤 공동체 안에, 무언가 역사적인 유산을 물려받으며, 상당히 많은 책임을 짊어진 채 태어났다. 어느 누구도 우리 삶의 목적을 스스로 발견하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저 태어날 때부터 우리 삶의 목적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만약 어떤 사람의 이름이 베이커(Baker)라면 화덕을 구우면 되고 스미스(Smith)라면 연장을 만지면 되었다.그런데 사실 따지고 보면 근대 이후의 사람들의 삶이나 그 이전의 사람들의 삶이나 본질적으로는 크게 다르지 않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갇혀서 살았다면, 오늘날 사람들은 자신의 욕망에 갇혀서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우리 시대가 외치는 목소리들을 들어보시라.“네 마음대로 살아라.”“네 자신에게 솔직하라.”“네 자신을 찾아라.”“네 자신을 사랑하라.”“네 자신을 표현하라.”“네 자신을 믿어라.”오늘 우리는 세속화된 사회 속에서 살아간다. 지금은 초월의 세계는 무시되고 하찮게 여겨지는 시대이다. 그 대신에 “위대한 자아”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사람들의 삶에서 진ㆍ선ㆍ미에 대한 탐구는 별 쓸모없는 것으로 이미 전락해버렸다.그런데 사실 이런 삶은 잠시도 쉼을 얻을 수 없는 피곤한 삶이다. 사실, 나는 내 운명을 깨달을 지혜도, 그것을 이루어낼 능력도 없다. 또한 내 삶의 수많은 난관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닥친 말할 수 없는 수많은 고통들을 이겨낼 자신도 없다. 나는 나의 내면을 탐구하기에도, 또한 내 삶을 스스로 이끌고 가기에도 능력이 없는 사람이다.사실 우리 시대가 외치는 이러한 주문들은 좋은 의도로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그 속에는 부분적으로 진리가 들어있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성경은 전혀 다르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성경은 놀라울 정도로 우리 시대의 이런 주문과 정반대로 가르친다.세상: “네 마음대로 살아라.”성경: “나(예수님)를 따르라”(마 10:38).세상: “네 자신을 사랑하라.”성경: “네 하나님 여호와와 네 이웃을 사랑하라”(막 12:30-31).세상: “네 자신을 발견하라.”성경: “네 자신을 부인하라”(눅 9:23).세상: “네 자신을 믿으라.”성경: “나(예수님)를 믿으라”(요 6:35).자,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 근대 이후의 모든 사상들을 거부하고 옛날 시대로 돌아가면 될까? 아니다! 사실 성경은 옛 것이든, 새 것이든, 모든 시대가 가지고 있는 악한 생각들을 다 무너뜨렸다.권위를 인정하라!우리는 개인주의의 반대말이 공동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조나단 리먼(Jonathan Leeman)이 이에 대하여 통찰력 있는 말을 하였는데, 근본적으로 개인주의의 반대말은 권위라는 것이다. 그의 책 ‘Don’t fire your church members’은 이렇게 시작한다.개인주의는 반공동체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다. 일부 은둔자들을 제외하면 모든 사람들은 공동체라는 개념을 좋아한다. 사실 개인주의는 권위에 대한 반항에 뿌리를 두고 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말하는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다.사실 모든 권위가 다 선한 것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권위는 악하게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우리는 주변에서 권위주의에 고통받는 사람들을 종종 목격하기도 한다. 심지어 교회에도 권위주의가 많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권위 그 자체는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복잡한 세상 속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건강한 권위들을 만들어놓으셨다. 다윗은 그 건강한 권위의 아름다움에 대해 이렇게 노래했다.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반석이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그는 돋는 해의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내린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삼하 23:3-4).사실 권위만큼 우리 삶을 아름답게 하고, 가치있게 하는 것도 없다.만약 우리가 프로 스포츠팀에 입단했다고 가정해보자. 우리를 뽑아준 구단주를 만나면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우리 팀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자세한 것은 감독과 대화하세요!” 스포츠팀에서 감독은 조직을 관리하는 권위를 부여받은 사람이기 때문에 선수는 감독에게 복종해야 한다. 그것이 자신을 선발한 구단주의 권위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그리스도를 만나게 될 것이다. 우리의 왕인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만약 나를 따르기 원한다면 나의 교회에 보고하세요. 당신의 삶을 교회에 헌신함으로써 나에게 헌신하세요. 교회는 내가 그리스도인들이 성장하고, 살아가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공동체입니다”교회는 우리에게 필요한 공동체와 권위를 제공한다.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서 경건한 동지들도 분명히 필요하지만, 우리에게 더욱 필요한 사람은 경건한 목사이다.영적인 지도자들은 우리의 영적인 유익을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엡 4:11-14). 하나님은 교회를 세우시며 성도들에게 말씀을 가르치고, 적용시킬 목사와 장로들을 계획하셨다. 목사들은 성도들을 모든 이단들과 잘못된 교리, 부패한 복음으로부터 보호할 책임을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았다. 바울은 감독의 자격에 대해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딛 1:9).그러므로 여러분은 건강하고, 성경적이며, 복음 위에 바로선 교회를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교회를 찾았거든, 교회에 등록을 하고, 교회를 위해 헌신해야 한다. 교회 지도자들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성도의 의무를 감당해야 한다. 이것이 초대교회로부터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성도들을 그리스도의 형상에 이르기까지 자라가게 만드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진정한 행복전통적인 사람들의 생각이 옳다면 당신은 당신에게 주어진 의무대로 살아야 한다. 만약 현대인들의 생각이 옳다면 당신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야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에게 “우리는 우리 주인의 것이다”라고 가르친다. 우리는 그분과 그분의 백성에게 속해 있다. 그러므로 자기집착에 갇혀서 살아가는 쳇바퀴 같은 삶에서 벗어나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위하여 살아가라. 우리 인생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있는 배역이 있는 것도 아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을 위해 우리는 존재한다. 이것은 속박이 아니다. 이것은 자유다. 그분을 위한 삶은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원제: Don’t Follow Your Hear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문화
세계관
개인주의
자유
진정한행복
권위
교회
목사
트롤
세속화
인간의 존엄성에 대하여
by Jerry Bridges
2021-09-01
미국 가정에서는 추수감사절이나 크리스마스 시즌이 되면 구운 햄 또는 칠면조 요리와 같은 전통 음식을 저녁 식사 때 나눈다. 이따금 스테이크를 먹거나 주말이 되면 팟 로스트를 즐기기도 한다. 지난 역사를 돌이켜 보면 사람들은 생선이나 조류, 또는 다양한 짐승을 잡아먹으며 살아왔다. 최근 동물권(the animal rights)에 대한 주장이 부상하기 전까지, 식용을 목적으로 동물을 죽인다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그러나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인간을 죽이는 일은 오래전부터 형벌을 받아 마땅한 범죄로 취급해 왔다. 왜 그렇게 취급해 왔을까? 왜 새나 동물을 죽이는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은 서로 구분되었을까? 우리는 창세기 9장 1절-6절에서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 하나님은 짐승과 새와 물고기를 사람과 구별하신다. 그리고 모든 동물을 사람에게 양식으로 주신다. 그 결과 사람은 아무런 죄의식 없이 동물을 죽이게 되었다. 바로 하나님이 동물을 양식으로 허락하셨기 때문이다.그런데 동물과 달리 사람에 대해서는 이런 말씀이 주어진다.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창 9:6). 즉 동물을 음식으로 사용하기 위해 죽이는 일은 괜찮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은 허용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왜 그러한가? 하나님이 사람 곧 남자와 여자를 자신의 형상대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창 1:27).여기까지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한 내용이다. 그런데 우리는 보통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성경 구절을 간과한다. 그 구절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주는 본문이다. 바로 야고보서 3장 9절이다. “이것으로 [곧 우리의 혀로]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약 3:9). 다른 모든 동물과 달리 인간은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왜냐하면 아담의 타락 이후로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손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형상이 인간에게 잔존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창세기 9장 6절과 야고보서 3장 9절이 타락 이후의 인류를 가리키고 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결국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사실에 근거하여 타인에게 해서는 안 될 두 가지 금기 사항이 주어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바로 살인과 저주이다). 특히 야고보서의 문맥을 살펴볼 때, 우리는 그 본문이 타인에 대한 저주나 강도 높은 비난만이 아니라 상대에게 상처나 모욕을 주기 위해 내뱉는 차갑고 거친 말까지 지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이는 정신을 번쩍 들게 하는 메시지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다는 이유로 인해 누구도 타인을 살해하면 안 될 뿐만 아니라 그에게 저주하거나 수치심도 주어서는 안 된다고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흔히 살인에 대해서는 생각하지도 않는 사람이 너무나도 자주 거친 말을 입 밖에 내며 타인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경솔하게 그런 말을 한다. 이와 같은 잘못을 저지를 때, 우리는 상대에게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파괴하는 죄를 범하는 셈이다.이처럼 살인과 거친 언사를 금하는 두 가지 경고로부터 우리는 대인 관계에 적용될 수 있는 성경의 더 큰 원리를 도출하게 된다. 바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타인을 대할 때는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원리이다. 성경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상대하는 일을 마치 하나님 자신을 상대하는 일처럼 간주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잠언에는 이런 교훈이 있다.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어 드리는 것이니 그의 선행을 그에게 갚아 주시리라”(잠 19:17). 또한 예수님도 그와 같은 원리에 근거하여 마지막 날 우리의 행위가 평가받게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마 25:40).흔히 우리는 누군가가 정직하거나 도덕적으로 바른 생활을 할 때 그에 대해 진실한 사람이라고 평가한다. 그러나 진실함이란 타인을 바라보고 대하는 태도와도 깊은 관련이 있는 개념이다. 우리 주변에는 자신의 삶에서는 정직하고 도덕적으로 바르게 행동하지만, 타인을 대하는 자세에 있어서는 거칠고 교만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재로서 그 성별이나 인종 또는 경제적 형편이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존중받아야 할 대상임을 잊고 있다. 그 결과 자신의 진실성에도 큰 타격을 입힌다.이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는 많이 있다.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우리가 타인에게 하는 말이나 타인에 관해서 하는 말은 그 사람의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는 기본 원리를 벗어나면 안 된다. 바울은 이렇게 기록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엡 4:29). 여기서 지적하는 더러운 말이란, 우리의 직접적인 대화 상대이든 혹은 우리가 대화의 소재로 삼고 있는 상대이든 그 상대를 비방하는 모든 말을 일컫는다. 일상의 다른 영역에서는 신중하게 행동하려는 사람도 대인 관계에서는 그 같은 말을 금하는 데 안타깝게도 실패하는 경우가 있다.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않고 경솔하게 다른 사람을 폄하하는 일이 쉽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 상대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인데도 말이다.노숙자에 대해서도 한번 생각해 볼 수 있다. 겨울철 시내에 있는 도서관에 가면 바깥 추위를 피해 그곳으로 찾아 들어온 노숙자를 만날 수 있다. 그런 노숙자는 흔히 도서관 이용자들에게 불편을 끼치기 쉽다. 면도도 안 하고 샤워도 하지 않은 상태로 지저분한 옷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도서관에 어울리는 단정하고 말쑥한 사람들의 분위기와는 맞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노숙자 역시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사람이다. 그렇기에 우리 자신만이 아니라 그런 사람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가진 자로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더 나아가 우리는 타인의 존엄성을 존중하는 이상의 일을 실천할 수도 있다. 이사야가 활동하던 시대에 하나님은 가난한 자의 곤경을 돌아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을 엄중히 질책하셨다. “내가 기뻐하는 금식은 흉악의 결박을 풀어 주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하게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이 아니겠느냐 또 주린 자에게 네 양식을 나누어 주며 유리하는 빈민을 집에 들이며 헐벗은 자를 보면 입히며 네 골육을 피하여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사 58:6-7). 이 질책이 오늘날 우리에게는 어떻게 적용될 수 있을지 이 글에서 다 나눌 수는 없다. 다만 여기서는 모든 성도가 가난한 자를 섬기는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만을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는 현장에 가서 도움의 손길을 주든 아니면 다른 수단을 통해 후원하든 그러한 사역에 꼭 참여해야 한다. 물론 아프리카에 있는 고아를 돕기 위해서는 관대하게 베풀면서도 정작 우리가 사는 지역에 있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일에는 무관심한 태도를 보여서는 안 될 것이다.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진리는 생명을 보호하는 문제에도 적용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태아를 보호하는 이슈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비록 낙태를 허용하는 현행법으로 인해 태아의 생명을 지키려는 운동이 큰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지만, 우리가 그에 대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행동들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된 여성을 돌보는 기관을 몸소 방문하거나 재정적으로 돕는 일이다. 또는 낙태를 쉽사리 허용하는 법률을 개정하기 위해 의회에서 또는 법정에서 싸우는 사람들을 지지할 수도 있다.미국의 경우에는 ‘로 대 웨이드 대법원 판결’(the Roe v. Wade Supreme Court decision) 이래로, 태아의 생명을 보호해야 한다는 쟁점에 대해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공론이 양분되는 현상을 보여 왔다. 그런데 그와 같은 이슈를 둘러싼 논쟁에 휘말리다 보면, 우리 역시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기본 신념을 잃어버리기 쉽다. 각각의 태아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믿음을 놓쳐 버릴 수 있는 것이다. 태아의 생명은 정당 간 대립이나 법정 싸움을 초월해서 지켜져야 할 가치이다. 우리는 그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은혜의 보좌 앞에서 기도로 싸워야 한다.이러한 낙태와 더불어 노인이나 심각한 장애를 가진 사람에 대해 안락사나 조력 자살을 허용하는 일도 위협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가족들의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요양병원에서 쇠약하게 지내는 노인의 수가 많기 때문이다. 그들 중 대부분은 정신력이 크게 손상되어 타인과의 관계를 지속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그 어려움이 얼마나 크든 간에, 그들 역시도 인간의 존엄성을 가졌기에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현재 세계에는 70억이 넘는 인구가 살고 있다.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로 인해 이제 우리는 세계에 흩어진 사람들을 이웃처럼 여기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신문이나 TV 뉴스에서 치명적인 지진 또는 태풍이 일어나 수십만의 사람들이 죽거나 거처를 잃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그런 소식을 마치 사건·사고가 끊임없이 발생하는 이 세상의 평범한 이야기처럼 들어야 할까? 아니면 이재민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라고 여기며 그 존엄성을 존중하는 마음으로 깊은 연민을 품고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야 할까?우리 가운데 누구도 사회적으로 고립된 외딴 섬에서 살지 않는다. 우리는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매일 타인과 교제한다. 어떠한 상황과 맥락에서 상대와 교제하든, 우리는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며 그 존엄성을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명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갈 6:10).원제: Designed for Dign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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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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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저주
동물권
야고보서
낙태
기독교 국가주의를 바라보는 지혜
by Tim Keller
2021-08-18
이 글은 사무엘 페리(Samuel L. Perry)와 앤드류 화이트헤드(Andrew Whitehead)가 쓴 ‘미국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Take America Back for God: Christian Nationalism in United States, 옥스포드, 2020)’에 관한 팀 켈러의 서평으로 ‘기독교 국가주의 바로 알기’에서 이어집니다.종교적 관습(practices) 대 기독교 국가주의 그러나 기독교 국가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무엇이 기독교 국가주의가 아닌지를 아는 것도 중요하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반복해서 말한다. “일부 독자들을 놀라게 하거나 또는 실망시킬 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백인 복음주의자에 관한 게 아니다. 확실히 백인 복음주의자와 기독교 국가주의 사이에는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있다. … 그러나 이 두 개념은 전혀 동의어가 아니다. … 기독교 국가주의자 중 많은 사람이 … 복음주의적 특징을 가진 개신교 신앙을 갖고 있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 비기독교인도 … 강한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갖고 있다.” 다시 말하면, 복음주의적 믿음 때문에 오히려 기독교 국가주의를 거부하는 사람도 많다는 것이다.“정치에 있어서 기독교 국가주의와 종교적 헌신은 일치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중요한 부분에서 저자들은 바로 이런 사례를 제시한다. 조사 과정에서 저자들은 다음과 같은 말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중동에서 온 난민은 테러 위협이 된다.”, “미국의 전통을 존중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물론 기독교 국가주의자들은 이런 주장에 강하게 동의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기도, 성경 읽기에서 열성을 내는 미국인일수록 이런 문제에 대해 기독교 국가주의자의 주장과 정반대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교회 공동체에서 성경과 기도에 더 시간을 쏟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에 빠지는 경우가 적다고 주장한다. “간단히 말해서 기독교 국가주의는 높은 도덕 표준을 장려하지 않으며 자기 희생, 평화, 자비, 사랑, 정의 등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는다.” 다시 말해, 종교 활동에 더 많이 참여하는 기독교인일수록 기독교 국가주의자와 달리 이민자를 환대하고 다른 인종의 사람들을 평등하게 받아들이며,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정의를 구현하려는 데에 더 열심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이유는 분명하다. 약자를 보호하라는 건 성경의 명령이고 성경에는 기독교 국가주의와 완전히 모순되는 말씀으로 가득하다. 종교 활동 수준이 높아질수록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믿음은 덜 보수적인 방향으로 움직이게 된다. 반면에,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개인의 종교성 수준이 높아지면 섹슈얼리티, 젠더, 이혼에 대해 더 보수적인 태도를 갖게 된다.”는 사실도 보여준다. 종교적 관습에 더 많이 참여하는 미국인은 “이민자를 배척할 가능성이 적고, 흑인에 대한 편견을 지지하거나 무슬림을 두려워할 가능성이 적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 반대를 발견한다. 높은 수준의 종교적 헌신을 보이는 미국인의 경우에 … 그들은 가정에서 더 전통적인 역할을 원하고, 동성 결혼 및 트랜스젠더 권리에 반대하며, 이혼에 대해 훨씬 더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가능성이 높다.”이런 사실이 저자들을 당황시킨 거 같다. 그들은 “문화적 시간 차이(lag)가 있을 수도 있다”고 말하면서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도 결국에는 성에 대한 보다 자유주의적이고 비전통적인 견해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저자들이 뭘 잘 모르는 거 같다(그게 아니라면, 알면서도 책에 쓰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성경말씀에 깊이 빠지게 될수록 경제적, 인종적 정의에 관해서는 훨씬 더 개방적이 될 수 있지만, 현대의 성 혁명에 관해서는 오히려 더 보수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왜냐하면 말씀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이다. 성경은 가난한 사람을 착취하는 것뿐 아니라 이성 간의 결혼이 아닌 다른 방식으로 성을 착취하는 것도 반대한다. 저자들이 지적했듯이, 자유주의 주류 교파들이 성과 젠더에 대한 견해를 바꾼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은 성경의 진실성에 대한 수십 년의 갈등이 있고 난 이후였다. 성경의 어떤 가르침(예를 들어 인종과 정의)은 받아들이면서 또 어떤 부분(예를 들어 성과 젠더)은 거부하는 이율배반적인 결론에 도달하기 위해서 그런 교회들은 무엇보다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으로 쓰인 오류가 없는 말씀이라는 기독교의 역사적 믿음 자체를 바꿔야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도 성장하는 많은 교회는 여전히 성경에 대해 기독교의 역사적 이해를 지키고 있다. 무너진 주류 교회들에 비교해 그런 교회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이것은 북미에서만 해당되는 사실이 아니라 복음주의 교회와 오순절 교회의 성장이 인구 성장 속도보다 몇 배나 빠른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 그리고 아프리카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페리와 화이트헤드처럼 교회가 성에 관한 문제에서 조금 늦더라도 곧 현대 문화와 발을 맞추길 바라는 사람들은 실망할 수 있다. 말씀을 믿고 실천하는 기독교인이 섹슈얼리티와 젠더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포기하려면, 그 전에 기독교의 교리와 믿음이 오로지 성경에만 근거해야 한다는 교회의 근본적인 이해 자체에 지각변동에 맞먹는 큰 변화가 있어야만 한다. 그런 경우, 그들에게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라는 호칭은 맞지 않다.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에서 “자유주의 기독교는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이다”라고 분명하게 말했다. 뭘 배울 수 있을까?시의적절하고 중요한 교훈이 있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마지막 장에서 세 가지 교훈을 제시한다.첫 번째로,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끼치는 영향력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국가주의는 권위주의적 통치를 지지하고 또한 종교의 장식물과 수사학을 사용하여 폭력까지 정당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 자신들을 도덕적, 종교적 상징주의로 은폐하기 위해 기독교 언어와 상징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반대자들에 대한 인내, 존중, 정중함, 표현의 자유, 토론 등 자유롭고 민주적인 사회에 필요한 모든 것에 대한 약속을 그들이 훼손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를 ‘복음주의’나 ‘백인 복음주의’와 동의어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저자들은 주장하며 그렇게 하는 순간 물이 흐려진다고 지적한다. 이런 그들의 주장에는 미묘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그들은 기독교 국가주의가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 모두에게서 아이디어를 끌어내고 또 사람을 모집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국가주의가 이런 다양한 원인의 산물이나 표현일 뿐’이라는 생각은 옳지 않다고 저자들은 결론짓는다. 거부자들은 종종 기독교 국가주의는 복음주의와 보수주의가 합쳐진 논리적인 결실이라고 단언하지만, 저자들은 데이터에 따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다른 운동의 요소들도 신중하게 채택하는 게 사실이지만, 기독교 국가주의는 “그 자체로서 독특한 문화적 틀을 이루고 존재한다”는 것이다. 사실 정반대 주장도 가능하다. 오늘날 복음주의와 정치적 보수주의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기독교 국가주의이다. 좌파 쪽 많은 이들의 주장처럼, 복음주의자들이 모두 다 사악한 기독교 국가주의자라고(또는 그쪽을 지향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오히려 그렇지 않은 일부까지 극단으로 몰아가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다. 이에 대한 매혹적인 예는, 1월 6일 국회 의사당에 입성한 폭도 중 한 명인 복음주의 기독교인 마이클 스파크(Michael Sparks)이다. 2020년 마지막 몇 달 동안 병적으로 소셜 미디어에 빠진 그는 시간이 갈수록 양측의 극단주의자가 서로 물어뜯는 모습에 점점 더 분노를 느꼈고, 결국 자신도 기독교 국가주의자라는 ‘미디어 거품’에 빠졌다. 기독교적 믿음은 그로 하여금 기독교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취약하게 만들었지만, 교회 목사와 친구들은 점점 더 분노를 키워가는 그를 향해 소셜 미디어를 제발 그만 하라고 충고했다. 무엇보다 분노에 찬 언어가 결코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지금 폭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된 상태이다. 워싱턴 포스트 기사는 복음주의가 어떻게 그를 국가주의자로 만들었는지를 보여주었지만, 동시에 그런 그를 정반대 방향으로 끌고가려고 했던 환경도 함께 소개했다. 복음주의 신앙이 필연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현실은 이보다 훨씬 더 복잡하다. 세 번째로,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인구 통계학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지만 (늙은 백인이 점점 더 많아지기 때문에) 또한 이렇게도 지적한다. “그 크기는 줄어들고 있지만 중요도에서는 그렇지 않다.” 저자들은 현재의 하락 추세에도 불구하고 사회 정치적 사건이 그런 추세마저도 바꿀 수 있음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911 테러 이후 4년 동안 기독교 국가주의적 견해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수가 일시적으로 증가했다. 더욱이 숫자가 줄고 있다고 인식하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더 위기감을 느낄 것이고, 따라서 그런 추세를 뒤집기 위해서라도 더 활동적이고 극단적이 될 가능성이 커진다. 기독교인을 위한 몇 가지 교훈을 더 생각해보자첫 번째로, 우리는 조국을 사랑하지만 미국을 포함한 모든 국가와 그 유산에 대한 태도와 관련해서 반드시 성경 신학을 살펴보아야 한다. 신약은 그리스도의 오심 이후로 인종적, 민족적 장벽이 제거되었음을 분명히 한다. 우리는 우리 조국을 사랑하고 이 나라가 이룬 성취를 자랑스러워한다. 그러나 이 나라의 성취를 자랑스러워할 수 있다면 우리는 또한 이 나라가 건국 이상에 부응하지 못하고 저지른 죄와 실패에 대해서는 부끄러워해야 한다. 죄인으로 구성된 모든 국가는 어디나 과거에 저지른 큰 도덕적 잘못과 악을 가지고 있다. 그런 과거를 숨기거나 최소화하는 것은 우상숭배로 나가는 큰 발걸음이고,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거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이상 특정한 한 나라나 인종을 통해 구속사를 이루지 않는다. “모든 나라는 다 같은 수준에 놓여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 모든 나라(인종)가 이웃과 형제라고 가르치셨다.” 이 가르침의 한 가지 예로 갈라디아서를 참조하라. “하나님은 종교 자체에 관심이 없다.” 예수님은 사람들에게 믿으라고 초청하지만, 단지 도덕주의와 종교성의 추구에는 비판적이었다. 예를 들어, 바리새인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을 참조하라. 기독교 국가주의는 법에 도덕을 담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예수님이 요구하는 것은 회심과 변화된 삶이다. 성경의 도덕적 비전을 반영하는 법으로 나라가 움직이는, 그런 세상이 올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현실은 기독교인뿐 아니라 일반 대중까지도 교회와 성경 가치를 반영한 법이 추구하는 것이 다름 아닌 공동의 선(common good)이라는 점에 동의할 때에만 가능하다. 성경의 하나님은 사람들이 무엇을 믿는다고 말하느냐가 아니라 실제로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사람을 심판한다. 야고보서는 예수를 믿는다고 말하지만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궁핍한 형제들을 사랑하고 돕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죽은 믿음”이라고 알려준다. 그것은 진짜 믿음이 아니다. 참된 구원의 믿음은 항상 사랑, 희생, 그리고 자비의 행위에서 나온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향한 순종으로 드러난다. 우리는 구원받기 위해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구원받았기 때문에 순종한다. 두 번째로, 가장 순수한 형태의 기독교 국가주의가 진짜 우상숭배임을 인식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정치권을 우리의 구원자로 바라본다. 특정한 사회 정책 세트를 기독교적 관점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다른 모든 것들은 단지 잘못된 게 아니라 사악한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이제는 아예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체하는 선택받은 백성이고 세계의 “구속자 국가”라고 가정한다. 이런 주장이 아주 노골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지만, 의심의 여지없이 이런 생각은 그 누구도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소리 없는 “전제 내지 기초(givens)”가 되어 기독교 국가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다 비성경적이고 우상숭배로 거부되어야 한다. 세 번째로, 교회 내부에서 기독교 국가주의를 반대할 때 우리도 힐 목사처럼 마르크스주의자나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힐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힐 목사를 향해 “진정한 애국자가 아니다”라며 부당한 낙인을 찍고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갈 때, 힐 목사는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신문이나 라디오에 나가지 않았다. 그런 자기 변호가 얼마든지 가능했음에도 말이다. 그가 세운 기독 학교가 인종을 차별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자녀를 학교에 보내지 않는 백인 기독교인을 보았을 때, 그러면서 그들이 오늘날 식으로 말해서 “그래, 너만 엄청 잘났어(super-woke)”에 해당하는 각종 욕을 쏟아놓을 때에도, 그는 그 모든 비방을 무시했다. 기독교와 백인이 하나라는 생각을 거부하는 건 단지 인기가 없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무서운 공격까지 받는 것임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그 모든 공격은 그를 아프게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구세주에게 유용한 사람이 되기 위해 치러야 할 값을 치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우리 모두도 그렇게 해야 한다. 네 번째로, 기독교 국가주의가 영향력을 키워가는 만큼, 전도의 문이 닫힌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국가주의의 기풍은 상대방을 설득하거나 또는 복음적으로 대화하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불신자들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이렇다. “그들은 악해. 그런 인간들의 의견이 뭐가 중요해? 물론 우리를 미워하겠지. 미워하는 만큼 우리도 미워하면 돼. 걔네들이 최대한 열받을 만한 말만 골라서 하라고(Own the libs).”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바라는 전도의 동기는 기독교 국가주의에서 완전히 근절되었으며, 이는 그것이 궁극적으로 종교 운동이 아니라, 단지 종교 언어의 힘을 사용할 뿐 분명한 정치적 운동임을 증명한다. 마지막으로,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 오로지 말씀에만 근거하는 한, 우리는 결코 세속적 진보주의자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과학적 분석에 의해 확인된 바와 같이, 도덕적 나침반을 위해 성경에 더 깊이 들어가는 사람들은 결국 인종, 빈곤, 정의에 대한 견해에서 더 “자유주의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섹슈얼리티와 젠더 문제에 관해서는 더 “보수적”이 된다. 그러나 진보적이다, 보수적이다 등의 용어를 사용하는 것조차 일종의 윤리적 정신분열증이라는 인상을 준다. 사실, 성경의 사회적 가르침은 매끄럽고 통일된 하나(whole)이다. 인종과 빈곤 그리고 성과 결혼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사랑에 뿌리를 두고 그 사실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다. 이 글에서 그 모든 것을 다 설명할 수는 없다. 그러나 가난하고 다른 인종과 이웃을 존중하고 오로지 이성 결혼 안에서만 성관계를 가지라고 성경이 분명하게 지시할 때, 그 모든 명령은 하나님의 본성과 그분이 우리를 어떤 사랑으로 구속하셨는가라는 윤리적 규범에 근거를 두고 있다.이런 사실은 기독교의 역사적 정통을 유지하고 기독교 국가주의에 강력하게 저항하는 신자의 경우에 오히려 더 많은 전선에서 공격받을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기독교 국가주의자보다 훨씬 더 큰 외로움과 현대 문화로 인한 더 큰 소외감을 느끼게 된다.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권고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미국인은 당분간 복음주의 기독교를 백인 우월주의 및 국가주의와 동일시할 것이다. 국회의사당 폭동에서 노골적으로 드러난 복음주의적 기독교 상징과 언어가 국민의 의식에서 사라지기까지는 앞으로도 수년이 족히 걸릴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그 아픔으로 얼룩져 있다. 그러나 복음주의적 믿음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성장하고 있고, 따라서 복음주의가 본질적으로 결코 국가주의적, 인종주의적 이데올로기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목격하고 있다. 사실, 다른 지역에서 온 대부분의 복음주의자 친구들은 왜 그렇게도 많은 미국 복음주의자가 정신을 잃은 것 같냐고 묻곤 한다. 우리는 베드로전서 2장 12절과 같은 약속의 말씀에서 위안을 얻을 수 있다. 주님께 충성하는 자는 공격적이지만 또한 매력적이고, 비방과 함께 칭찬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오로지 공격만 받거나 또는 항상 인정만 받는 기독교 단체가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말씀과 복음에 충실하지 않기 때문임을 기억하자.원제: A Book Review on the Topic of Christian Nation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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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국가주의 바로 알기
by Tim Keller
2021-08-17
이 글은 사무엘 페리(Samuel L. Perry)와 앤드류 화이트헤드(Andrew Whitehead)가 쓴 ‘미국을 다시 하나님에게로: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Take America Back for God: Christian Nationalism in United States, 옥스포드, 2020)’에 관한 팀 켈러의 서평으로 두 번에 나누어 게재합니다.하나님과 국가 올해 1월 6일 미국 국회의사당을 습격한 폭도들은 기독교 상징물을 전시하고 또 카메라 앞에서 공개 기도를 했다. 그 이후로 주류 언론을 움직이는 논리적 가설(assumption)은 이것이다. 복음주의는 이제 민주적 절차를 뒤집는 일이 있더라도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백인 우월주의 봉기 세력임이 밝혀졌다. 이제 “기독교 국가주의자(Christian nationalist)”는 백인 복음주의자를 묘사하는 용어가 되었다. 이게 과연 맞는 말인가? 기독교와 국가주의자라는 이 두 용어가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을 설명하는 두 가지 방법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최근에 들어서야 이 문제가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지만, 사실 이건 새로운 문제가 아니다.1975년 나는 버지니아 주 호프웰에 있는 웨스트 호프웰 장로교회에서 첫 목회를 시작했다. 개척 목사인 윌리암 힐(William E. Hill, Jr.)에 의해 (PCA의 창립 멤버이기도 했던) 웨스트 엔드(West End) 장로교회로 시작한 그 교회는 내가 왔을 때, 힐 목사는 이미 은퇴한 상태했고 그를 이은 담임 목사는 케네디 스마트(Kennedy Smartt) 목사였다. 그러나 힐 목사가 얼마나 많은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내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남부 지역에서는 현충일이나 독립기념일 전후에 “하나님과 나라” 축하 행사와 예배가 항상 열렸다. 종종 신도들은 예배 중에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고 애국적인 찬송가와 노래를 불렀다. 다음은 당시 보편적인 예배의 모습이다.“군대에서 나온 합창단과 관현악단이 애국가를 부르고 사회자가 엄숙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 이 나라를 인도하고 보호하셨습니다. 미국에게 주어진 모든 승리는 모두 다 하나님과 하나님에게 충성하는 신도들 때문이며, 하나님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언제나 우리 편입니다.”그러나 힐 목사가 담임이었던 동안 그런 예배는 있을 수 없었다. 교회에서 애국가를 부르거나 하나님이 항상 “우리편”이라는 식의 설교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에 성조기를 걸어두는 것조차 그는 일종의 우상숭배로 여겼다. 힐 목사(항상 검은 양복에 흰 셔츠와 끈으로 묶는 넥타이를 매는 키가 150cm가 조금 넘는 둥글고 작은 체구)는 장례식 예배 때 성조기가 드리워진 관이 교회에 들어오는 것을 막은 것으로 유명했다. 다음날 리치먼드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신문은, “힐 목사를 비애국적이고 공산주의적이며 반미적인 사람으로 낙인찍는 기사를 실었다. … 많은 참전 용사들이 그런 언론을 믿었고 … 교회는 아마도 이 사건 때문에 이삼백 명의 신도를 잃었을 것이다.”라고 실었다. 힐 목사는 1940년대에 기독교 학교를 설립할 당시 처음부터 인종 통합을 주장했다. 이것은 당시에는 전례가 없던 일이었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버지니아 그 지역 기독교 학교 대부분은 백인 학교였다. 그 이후로 몇 년 동안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교회가 어느 정도 수준까지 국기로 상징되는 애국심 그리고 미국의 백인 중심적 이익을 신앙과 결합해도 되는가를 놓고 싸워왔다. 애국심과 백인의 이익을 기독교와 결합하는 것을 우상숭배라며 반대했던 힐 목사는 그 대가를 치러야만 했다. 그러다 내 경우 운이 좋게도, 1970년대 중반 내가 그 교회에 갔을 때 여전히 보수적인 성향이 강한 교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그래도 교회 지도자들이 대체적으로 힐 목사의 경고와 모범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한 장로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하나님과 미국’이라는 기독교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런 구호는 기독교적이라고 보다는 미국적인 거니까요.” 복잡한 사회 현상에 대한 한 노동계급 기독교인의 분석이었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이었다. 기독교 국가주의가 무엇인가?이것은 사회학자 새뮤얼 L. 페리와 앤드류 화이트헤드가 쓴 중요한 새 책이 탐구한 기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풀뿌리 개신교 속에서 “하나님과 국가”라는 날개는 수십 년, 심지어는 수백 년 동안 우리와 함께했으며, 이제는 새롭고 두드러진 정치적 형태를 취하고 있다. 페리와 화이트헤드는 세심한 사회과학 연구를 통해 기독교 국가주의라는 세력을 다음과 같은 정의로 구분한다. 첫 번째, 그것은 “기독교(거의 다 개신교), 인종(백인), 그리고 출생(미국 출생) … 그리고 거기에 정치적 이념(사회 및 재정적 보수주의)”이 융합된 미국인의 정체성이다. 그러니까 간단히 말해서, 당신이 무슬림이거나 유대인인 경우, 이민자인 경우, 또 백인이 아닌 기독교인인 경우에는 진정한 미국인이 될 수 없고, 심지어 아무리 미국인이라고 해도 정치적 자유주의자라면 자격 미달이라는 것이다.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연방 정부가 미국을 기독교 국가로 선언하고 기독교 가치를 법으로 규정하고 또 기독교 상징을 전시하고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식 기도를 드리는 것을 허용해야 한다고 믿는다. 예를 들어, 기독교 국가주의자는 지역 사회에 새로운 교회가 세워지는 것은 기뻐하지만, 정부가 이슬람의 모스크 건축은 아예 금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 기독교 국가주의는 미국 역사에 대한 특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 그들의 관점에 의하면, 미국은 애초부터 명백한 기독교 국가로 설립되었으며, 따라서 하나님과 거의 (많은 사람들이 ‘거의’라는 이 단어를 빠뜨린다) 언약 관계를 맺은 수준이다. 오늘날에도 이런 식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논리고 계속되고 있다. 좌파와 불신자는 계속해서 미국을 세속적이고 상대주의적 국가로 만드려고 한다. 우리가 이들에게 밀려서 하나님에게 등을 돌리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지도자를 제대로 선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은 더 이상 미국을 축복하지 않을 것이다. 세 번째, 기독교 국가주의는 아주 오랜 상하 관계의 사회 질서를 암묵적으로 때로는 명시적으로 지지한다. 즉, 외국인보다 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 여성보다는 남성이, 유대인과 이슬람 교도보다는 기독교인이, 타 인종보다는 백인이 상위에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또 강조한다. “기독교 국가주의는 따라서 미국인이 사회와 세계를 인식하고 탐색하는 데 필요한, 우리가 ‘문화적 틀’이라고 부르는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이상과 가치 그리고 신화의 복합체를 제공한다.”기독교 국가주의자는 누구인가?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이 널리 퍼져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페리와 화이트헤드의 연구는 그리 놀라운 게 아니다. “미국의 기독교 국가주의에는 크게 네 가지 경향이 있다. 미국인은 거부자(Rejecters), 저항자(Resisters), 수용자(Accommodators) 또는 대사(Ambassadors)이다.” ‘대사’는 본격적인 기독교 국가주의자로 전체 인구의 19.8%를 차지하는 것으로 추산된다. 반면에 인구의 약 48%는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이 전혀 없는 강력한 “거절자” 또는 거의 없는 “저항자”이다. 그러나 마지막 그룹이자 32.1%를 차지하는 가장 큰 단일 그룹은 일정 부분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갖고 있고 또 거기에 전반적으로 우호적이지만, 완전히 수용하지는 않는 ‘수용자’이다. 어떤 면에서 이런 수용자가 핵심이다. 왜냐하면 인구의 거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그들이 비록 과격한 기독교 국가주의 신념을 고수하지 않는다고 해도, 극단적인 지지자를 향한 이들의 동정과 지원은 극단주의자가 활동하는데 필요한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이다. 그럼 이렇게 다양한 기독교 국가주의 그룹에 속한 사람들은 누구인가? 분명히 대사 그룹을 차지하는 대다수는 정치적 견해가 보수적인 백인 종교인이다. 그러나 누구나 예상하는 바로 이 결과 다음에 페리와 화이트헤드가 제공하는 또 다른 발견은 놀랍다.백인 미국인은 위에서 말한 네 가지 그룹이 거의 같은 비율로 나뉜다. 그러나 아프리카 계 미국인은 백인보다 기독교 국가주의를 더 지지한다. 아프리카 계 미국인의 65%가 대사 또는 수용자이며, 이건 모든 인종 그룹을 통틀어서 가장 큰 비율이다. 아시아인 및 기타 인종과 마찬가지로 히스패닉은 두 개의 중간 그룹 비율이 가장 많다. 이 사실은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견해를 표방하는 게 기독교 문화에 익숙한 백인들만의 입장이 아님을 나타낸다. 백인이 아닌 많은 사람들도 성향에 있어서 종교적, 전통적, 그리고 보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은 또한 미국의 이상과 과거 역사에 대해 매우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정치 견해를 밝히는 진보적 태도를 불편해한다. 또 다른 놀라운 사실은 기독교 국가주의자의 약 50%가 복음주의자이지만, 강력한 저항자 또는 거부자 중 거의 25%가 또한 복음주의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주의적 믿음이 자동적으로 기독교 국가주의를 유발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복음주의는 오히려 국가주의를 거절하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기독교 국가주의는 종교적이라기 보다는 훨씬 더 “인종적(ethnic)이고 정치적”인 문제이다. 국가주의는 결코 전통적이고 성경적인 믿음이 빚어내는 불가피하거나 논리적인 결과가 아니다. 그들은 입맛에 맞는 구절을 위해서 성경을 사용하는데, 주로 역대하 7장 14절 같은, 율법을 지키는 경우 이스라엘에게 번영을 약속하는 구절을 미국에 적용하는 식이다. 그들은 가난한 자와 이민자를 위한 정의를 요구하는 구약의 구절을 무시하고, 또한 원수를 사랑하고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을 대라는 신약의 명령은 결코 언급하지 않는다. 따라서 기독교 국가주의는 “특정 종교 전통 안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개신교 복음주의, 가톨릭 또는 다른 그룹이 지향하는 확고한 기독교 신앙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오히려 … (특정 신학에 대한) 종교적 헌신과 기독교 국가주의는 비판적인 방식으로 상호간에 완전히 다른 도덕적 세계관을 만들어가는 것으로 보인다.” 이 말은 결국 기독교 국가주의가 기독교 가르침의 많은 부분을 무시하고 출생주의와 백인 우월주의 등을 지향함과 동시에 지극히 편협한 방식으로 성경 구절을 골라서 결합한다는 것이다.‘기독교 국가주의를 바라보는 지혜’로 이어집니다.원제: A Book Review on the Topic of Christian Nation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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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윤리를 무력화시키는 다섯 가지 기초
by Brett Mccracken
2021-08-13
한주도 빠지지 않고 새로운 CCM 스타, 전직 기독교 유명인사 또는 기독교 대학 졸업생이 기독교에 대한 그들의 “진화하는” 믿음, 즉 신앙의 “해체(deconstruction)” 여정을 발표하는 거 같다. 즉, 그 과정이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 신앙 교리를 다시 해석하도록 했는지, 또는 아예 신앙을 포기하도록 했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여정 중 일부는 사려 깊고 궁극적으로 건설적인 고민으로 이어져 더욱 견고하고 정통적인 신앙을 갖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또 어떤 것은 냉소적이고 반동적이며 결과적으로 탈회심(deconversion)을 초래한다. 다양한 “이슈”가 이러한 해체 여정의 촉매제가 되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전체 신앙의 탑을 무너뜨릴 가능성이 가장 큰 잠재력을 가진 주제는 바로 성경적 성 윤리이다. 현대 서구 기독교의 풍경에서 정통 신앙에서 멀어지는 대부분의 길은 “LGBTQ+ 옹호자”라고 불리는, 하루가 다르게 점점 더 인기를 얻고 있는 정류장을 통과하게 된다. 이건 단순한 경로 변경을 위한 정류장이 아니다. 여기서 멈추고 앞으로 가야 할 전체 지도를 재구성한다. 우리가 성과 정체성에 대해 성경의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의문을 제기한다면, 그것은 자연스럽게 성경의 권위에 대한 의심과 흔들리는 믿음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점점 더 많은 그리스도인, 심지어 성경에 깊이 빠져 있고 어려서부터 교회에서 자란 사람조차도 이러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불안한 기초모든 길이 결국 성 윤리 라인으로 이어진다 해도, 모두가 다 같은 곳에서 시작되는 건 아니다. 처음에는 순수하고 아무런 해가 되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그러나 결국에는 타협하도록 만드는, 이 문제와 관련해서 기독교가 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미묘한 형태를 고려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성 윤리 문제 때문에 생각을 바꾼 대부분의 해체적 기독교인은 지금부터 소개하는 불안정한 토대 중 하나(또는 그 이상)를 신앙 배경으로 가지고 있다. 1. 소비주의(Consumeristic)아마도 오늘날 기독교에 대한 가장 널리 퍼진 왜곡(최소한 서구 문화에서는)은 소비주의 경향으로 접근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기독교가 나한테 무슨 소용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믿음을 이해하는 방식이다. 이것은 내 체형에 완벽하게 맞는 청바지를 찾는 것처럼 신자가 “내게 완벽한 교회”를 찾아 쇼핑하는 신앙이다. 그리고 소비주의의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믿음은 표현적 개인주의의 가정에 뿌리를 두고 있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편안함을 지향한다. 내게 도움을 주고 손해를 끼치지 않는 한, 믿음은 중요하다. 무엇보다 이익은 크지만 비용이 별로 안 드는 게 중요하다. 나의 자율성을 방해하지 않거나 나만의 방식으로 나를 표현하고 싶은 ‘진정한 나’에 한계를 두지 않는 한, 믿음은 그럴 듯한 것이다. 이런 식의 신앙은 논쟁이 실종된 믿음, 반문화적이지 않은 기독교 관습, 그리고 교회 출석이 사회적 지위에 이득(또는 중립)이 되는 상황에서 번성한다. 소비주의 신앙은 타협하는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2. 실용주의(Pragmatic)실용적인 경향은 좋은 동기에서 비롯된다. 가능한 한 효과적으로 복음을 전하자는 것이다. 오늘날 구도자 중심 운동, 대형 교회, 신흥 교회, 힙스터 기독교, 또는 기타 다양한 선교적 또는 교회 개척 전략을 낳은 믿음의 유형이기도 하다. 느낌과 여론을 중시하고, 또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모이는 것”과 같이 고도로 조정된 이런 외향 지향적이고 홍보 지향적인 믿음은 좋은 의도에서 시작하지만 종종 나쁜 결과를 초래한다.3. 정치적(Political)정치적 소속과 신학적 믿음이 합쳐질 때, 후자는 필연적으로 전자에 의해 형성되고 그 하인으로 전락하기 마련이다. 바로 이런 사실이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정치적인 이유로(정당 교체 또는 기존 정당 내 노선 변경) 어떤 문제에 대해 “기존 신앙적 입장을 바꾸게” 하고, 또는 정치적 목적에 투신하기 위해 성경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상황을 초래하는 것이다. 4. 감정적(Emotionalistic)건강한 기독교에서 감정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감정적인 경우에 믿음은 흔들릴 수 있다. 마음을 감동시키는 예배, 감동적인 설교, 영적 황홀경이 주는 “뿅 가는(mountaintop)” 느낌 등, 오로지 체험에만 중점을 두는 신앙이다. 이런 신앙은 종종 강렬함과 열정으로 평가된다. “교회에 가도 더 이상 느낌이 없어”라는 경우거나 그래서 교회가 지루해지기 시작한다면, 문제가 시작된 것이다. 이런 “좋은 느낌”이 계속될 수만 있다면 식의 믿음은 하나님의 심판을 묵상하고 싶어하지 않고, 하나님을 산타클로스나 키다리 아저씨처럼 항상 안아주는 좋은 모습으로만 생각하려고 한다. 5. 이성적(Cerebral)건강한 기독교에 교리와 성경 지식은 필수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지적인 믿음은 문제가 될 수 있다. 특히 “올바른 믿음”이 삶과 분리되어 따로 놀 때, 특히 더 문제가 된다. 교리 교육과 건전한 가르침을 올바르게 강조하는 특정 기독교가 있을 수 있겠지만, 신앙이 가시적으로 형성하는 바른 삶과 믿음이 연결되지 않는다면, 그건 재앙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너무 많은 그리스도인이 정답을 알면서도 바로 살지 못한다. 너무도 많은 교회가 믿음과 삶을 적절하게 연결하지 않는다. 이러한 단절은 변화하는 문화 속에서 지속 가능한 믿음을 갖는 데에 치명적인 악영향을 미친다. 문화적 바람내가 가진 기독교 신앙에 이 다섯 가지 구조적 결함(또는 조합된 형태) 중 어떤 것이 포함되어 있다면, 문화적 역풍이 불 때 흔들릴 것이다. 그리고 성 윤리 문제에 관한 바람은 그냥 바람이 아닌 진짜 강풍이다. 다음은 다섯 가지 왜곡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타협하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1. 소비주의“자기 발전(self-enhancement)”이라는 용어로 프레임화된 믿음은 고통을 견디지 못한다. 부수적인 혜택이 주는 만큼 견딜 뿐이다. 사회적 낙인, 문화적 주변화(marginalization), 긴장 관계의 우정과 같은 미세한 비용이 관련되어 있다. 소비자 기독교인은 예수를 따르는데 “자기 십자가를 지라”는 명령을 편리하게 제거하는 맞춤형 영성을 관리하기 위해서라도 언제라도 선회할 수 있다. 이런 믿음은 정통 기독교, 특히 성에 관해 말하는 것이 문화적으로, 관계적으로, 직업적으로 비용이 많이 드는 시대에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편견에 치우친 기독교 신앙”과 관련을 맺는 한 사회적 상승이 불가능한 산업에서 일하거나 도시에 거주하는 경우에 또는 단지 성에 관한 “압제적인” 성경의 제약에서 개인적으로 벗어나고 싶은 경우이든지 간에, 소비자 믿음은 타협하는 믿음으로 가는 지름길이다. 표현적 개인주의와 자율성 - 각 사람이 선택하는 고유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행복하고 긍정할 수 있다고 가정하는 권리 – 이 가진 우위는 성 윤리 문제에 대한 소비주의적 믿음을 희미하게 만든다. 표현을 중시하는 개인주의자의 행복이 성경의 권위보다 더 높은 선으로 여겨진다면(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기능적으로 그렇다), 성경은 당연히 자아를 위해서 배제될 것이다. 2. 실용주의성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은 점점 더 크게 여론과 충돌한다. 이건 기독교에 피해를 주는 광고이다. 또한 이 문제는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믿음이 주는 효용성을 강조함으로 전도하고 싶어하는 실용주의 신자에게 딜레마를 제시한다. 단지 성 윤리라는 한 가지 문제 때문에 믿음을 가지려는 사람이 망설일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실용주의 기독교는 성경의 성 윤리를 무시하거나 재해석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는 계산된 결정을 내린다. 이 접근 방식은 대형 교회나 많은 돈이 걸린 단체와 기독 관련 산업체(CCM 참조)에서 흔히 볼 수 있다. 생존 여부가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가가 아니라 청중(돈)이 가장 많이 가는 방향에 달려있다고 믿기에 거기에 맞춰서 교리를 “재검토”해야하는 상황에서, 많은 기독교인은 타협을 선택할 것이다. 3. 정치적정통이란 말은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 어떤 국가라도 단정하고 당파적이며 정치적인 시스템과는 깔끔하게 들어맞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성 윤리에 관해서 나는 정치적으로 좌파 성향을 가진 소수의 기독교인이 정치 프로그램에 필요한 “패키지 거래” 때문에 기꺼이 자신의 성경적 신념을 바꾸는 모습을 꾸준하게 목격하고 있다. 공개적으로 무지개 깃발을 흔들지 않고서는 오늘날 좌파가 정치적 타당성을 주장할 수 없다. 확실히 성 윤리 문제는 최근 몇 년 동안 보수 지도자들의 일탈적인 성적 행동을 경시하거나 무시하는 경향을 보이는 우파의 정치화된 기독교도 같이 괴롭히고 있다.4. 감정적“좋은 느낌만” 계속 될 수 있다면 식의 치료적 기독교는 동성에게 끌리는 여성에게 성적 욕망에 따라 살기보다 독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요구하는 하나님을 도무지 헤아릴 수 없다. 하나님이 그런 끔찍한 요구를 할 리 없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다. 하나님이 단순히 사람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진행 경향은 다음과 같다.(1) LGBTQ인 기독교인의 친구나 가족이 교회에 나온다. (2) 기독교인은 이 사람을 사랑하기 위해서 서로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해야 한다고 가정한다(또는 불확실한 용어로 그렇게 듣는다).(3) 기독교인은 이 사랑하는 사람의 성 정체성을 긍정하는 것과 그 주제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긍정하는 것은 상호 배타적임을 깨닫는다.(4) 그리스도인은 그 주제에 대한 성경의 권위를 경시하거나 “다시 생각” 함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긍정하기로 선택한다.이런 식의 변화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사실에 호소함으로써 정당화된다. 그러나 그 구절에서 “사랑”은 성경이 말하는 객관적이고 하나님이 정의한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정의하는 주관적이고 자기지시적인 사랑이다 (“사랑은 사랑이다”).5. 이성적지적이고 교리에 깊이 빠진 기독교인이라면 성 윤리에 대한 문화적 태풍이 몰아치는 현실에서도 얼마든지 흔들리지 않고 확고한 말씀의 기반 위에 설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항상 그런 건 아니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건, 믿음과 행동 사이의 치명적인 단절이다. 비밀 포르노 중독에 빠진 교회 개척자, 여자 친구와 동침하는 신학생, 혼외 정사를 하면서 동성 결혼을 반대하는 목사. 극단적인 예이지만, 성경적 진리를 깨닫는 지적인 현실과 그 진리를 삶에서 실천하는 것 사이의 연결이 단절된 사람이라면, 그 단절이 아무리 미묘하더라도 거의 필연적으로 타협하게 된다. 성경에 정통한 많은 젊은이들조차 오늘날 성 윤리에 타협하는 이유 중 하나가 너무도 많은 기독교인의 위선적인 삶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런 기독교인에게 기독교적 확신은 그들의 실제 삶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결과 시간이 갈수록, “당신 믿음이 진짜입니까?”는 점점 더 중요한 질문이 된다. 바람을 견딜 수 있을까?아마도 당신은 이 글을 읽고 하나 이상의 카테고리에서 자신을 보았을 것이다. 놀라지 않아도 된다. 21세기 성 윤리의 폭풍우를 이겨낼 수 있도록 믿음을 굳건히 하고, 또 갈라진 틈과 구멍을 메우라는 경고와 도전으로 받아들이라.성 윤리에 관한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점점 더 어려워질 것이다. 지금 타협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대신 그런 일이 내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음을 기억하자. 지금 당장 당신의 믿음을 점검하라. 그리고 마음을 살펴보라. 당신이 믿는 기독교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어떤 것에 달려 있는가? 마음에 들어서? 편안함을 줘서? 권력을 줘서? 행복해서? 옳기 때문에? 만일 그렇다면, 그 모든 기초가 움직이는 모래와 같으며, 당신은 마태복음 7장 26-27절이 말하는 어리석은 건축자와 다르지 않다. 바람이 불면 무너지는 믿음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건축자처럼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확고하게 믿음의 뿌리를 내린다면, 그래서 (오늘날 아무리 인기가 없어도) 주님의 사역과 말씀의 충분성을 확신할 뿐 아니라 그 진리에 만족한다면, 당신이 만들어가는 믿음의 집은 든든하게 설 것이다. 원제: 5 Foundations That Lead to Compromise on Sexual Ethic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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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 속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by R. C. Sproul Jr.
2021-08-09
할리우드에서 가장 큰 모순어법(oxymoron)일 법한 것이 매스컴의 안 좋은 관심일 것이다. 지금 시대의 방송은, 사람들이 당신에 관해 이야기할 때 그들이 당신에 관해 어떻게 말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다만 대중에게 얼굴을 비치는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이다. 교회도 세상의 이러한 생각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매스컴이라는 새로운 신 앞에 절을 하고, 이것이 바로 권력으로 향하는 티켓이라고 믿는다.기독교인으로서 우리의 임무는 세상의 관심 속으로 파고들어가 예수님의 빛을 전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풋볼 영웅들은 엔드 존(미식축구에서 점수를 얻는 구간 – 역주)에서 엎드려 기도함으로써 잃어버린 영혼들을 “전도하고,” 홈런을 치는 타자들은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다. 저 위의 계신 분에게 감사를 표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예수님을 마케팅하기 시작했다. 브로드웨이 처럼 분석하여 무대에 세웠다. 그것이 너무 고상해 보일 때는 팝송으로 포장하기도 했다. 이마저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을 때, 우리는 더욱 필사적인 방법을 사용했다. 문신이나 팔찌를 사용해 보기도 했다. 마침내 목표에 도달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은 우리의 물건을 몸에 걸친다. 우리는 기독교적인, 예수를 나타내는 옷을 입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렇게 할 때 기뻐한다. 즉 기독교인들은 “This Blood’s For You”(이 피는 너를 위한 거야)라고 새겨진 티셔츠를 입음으로써 자신의 입장을 밝히고, 예수님이 패션 유행의 가운데 있다는 것에 기뻐한다. 20년 전에 십자가 목걸이가 굉장히 유행했다. 이제는 모두가 마음속에는 아닐지라도 옷이나 액세서리를 통하여 예수님과 가까이 있게 되었다. 예수님의 얼굴은 유행을 이끄는 사람들의 티셔츠를 장식하고 있다. 그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것은 주목할 만한 것이라는 데 동의한다.우리는 이것을 축하하기 전에 성경적 교리와 대중문화를 구별해야 한다. 예수님이 “짧은 유명세”(Fifteen minutes of fame – 다중 매체의 시대에는 모든 것이 짧게 유명했다가 사라질 것이라고 한 앤디 워홀의 말 – 역주)를 깨뜨렸다는 것은 좋은 소식이 아니라 나쁜 소식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작을수록 더 커진다고 말한다. 반대로 대중문화는 역설적으로 커질수록 작아진다고 말한다. 사람들에게서 잊히는 것과 애처롭고 보잘것없이 되는 가장 빠른 길은 명성이라 할 수 있다. 예수님도 곧 그렇게 될 것이다.대중문화 아이콘이란 대중을 대표하는 것이다. 즉 인기를 얻기 위해서는 중요한 모든 부분을 뒤로해야 한다. 예수님이 티셔츠 위에 축소되어 이미지화 되었다. 그래서 십자가의 의미는 뒤로 감추어져 버렸다. 티셔츠는 예배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저 하나의 아이콘처럼 원래의 의미를 벗어나서 쓰인 것이다. 장식처럼 쓰이는 예수님은 관심을 끌 수 있으나 본질적인 것이 없는 그저 수단으로 전락되고 말았다. 예수님은 하나의 패션 소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괴하게 만들어서 십계명의 제2계명과 제3계명을 범하며 그 이름을 망령되게 하고 말았다.예수님의 모습은 애초에 신문 1면을 장식할 만한 뉴스는 아니었다. 무덤에서 걸어 나올 때 맞이하는 기자들은 없었다. 그 어느 누구도 속보를 전하며 우리에게 최신 소식을 전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이 사건을 충분히 전달하기 위해 신문이나 잡지의 특별한 면을 할애하지도 않았다. 부활과 승천 사이 40일 동안 그는 수백 명의 사람에게 나타나셨다. 부활의 사실을 증명할 사람들은 많이 있었지만, 그것이 예루살렘의 원형극장을 채울 만큼은 아니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결코 유명한 뉴스가 되지 않았다. 그분은 비하(humiliation, 예수님의 인성을 취함으로 낮아짐 – 역주)하셨다가, 승귀(exaltation,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심 – 역주)하셨다. 바뀐 것은 그의 인기 순위가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 앞으로 그분의 자리가 바뀐 것이다. 그는 보이지 않는 한 곳, 그 하나님의 자리로, 영광의 자리로 옮겨 가셨다.예수님의 승귀, 그 이후에 비로소 주님이 신문 1면을 장식할 것이다. 그 위대한 날에 사람들은 티셔츠의 이미지가 아닌 예수님 발아래 서기 위해 소리를 높이거나 아니면 산 아래 숨으려고 비명을 지를 것이다. 그리고 왕의 심판이 끝났을 때,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판단할 것이다. 각 사람은 이를 갈며 혹은 큰 기쁨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주님이십니다”(Jesus Christ is Lord”)라고 외칠 것이다. 요점은 대중문화가 주는 보편적인 인정을 받는 예수님이 아니라 오직 높은 곳에서만 올 수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받으실 것이라는 사실이다.우리는 지금부터 주님의 빛을 사람들에게 비추는 것과 돼지 목에 진주를 거는 것의 차이를 배워야 한다. 대중에게 널리 보급된 예수님의 티셔츠가 신앙을 기품있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워야 한다. 우리는 그의 인기를 축하하기보다는 슬퍼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오직 주님의 뜻을 알아야 한다. 오직 본질 없이 맹목적인 마케팅을 멈출 때만 바른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조용히 순종의 삶을 살려고 할 때 우리는 높아질 것이다. 그 높아짐은 제이 레노(Jay Leno, 자신의 이름을 건 토크쇼를 진행한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 – 역주)의 토크쇼에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더욱 영광스러운,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의 저택에 있는 자리로 가는 것이다. 우리의 길은 주님의 길과 같다. 단지 낮아지면 가는 길인 것이다. 갈 수 있는 다른 길은 없다. 높아지려면 낮아져야 한다. 우리가 살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풍요로운 삶을 얻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의 십자가를 매는 것뿐이다. 대중문화는 보완하고 적용할 대상이 아니라 경계해야할 대상이다.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아니라 굴복시켜야만 하는 것이다. 그의 보좌 앞에 있는 척하는 모든 자들을 낮출 때 그리스도는 비로소 완전히 높임을 받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의 영광은 온전히 주님에게만 있을 것이다.원제: Jesus Christ Superstar출처: www.ligonier.org번역: 허예송
대중문화
아이콘
패션
마케팅
옥시모론
십자가
복음
예수그리스도
모순어법
짧은유명세
그리스도인이 진화를 믿을 수 있는가?
by Gregg Allison
2021-08-07
우리는 다 진화라는 용어와 친숙하다. 대학에서 과학을 전공할 때 내가 공부하는 모든 과목, 그러니까 생물학, 식물학, 생태학, 미생물학 등은 다 진화의 관점에서 출발했다. 말 그대로 진화는 다음과 같은 정의에 딱 맞다. “모든 생명체가 생명이 아닌 물질에서 비롯되어 무작위 돌연변이가 발생하며 수십억 년 동안 어떠한 목적이나 계획 없이 자연 선택과 종에 따라서 발전했다는 이론이 진화이다”(‘베이커 신학 용어 간략 사전’[Baker Compact Dictionary of Theological Terms]). 산소, 수소, 질소 및 탄소와 같은 원소가 모여서 공기, 물 및 금속과 같은 비 생명체 뿐 아니라 나무, 잔디, 곤충, 새, 코끼리 및 인간과 같은 생물체를 형성하는 것을 생각해보자. 진화에 따르면 관찰이 불가능한 수준에서, DNA 무작위 돌연변이에 의해 조금이라도 혁신적인 면을 가진 생물의 생존에 유리한 방향으로 우연한 변화가 일어난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측면을 가진 식물이나 동물 종류, 즉 종(species)은 생존에 유리하게 발전했고 마침내 진화는 지금 존재하는 모든 비 생물체 및 생명체를 생산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과정에 어떠한 방향이나 목적이 없다는 것, 즉 하나님이 없다는 사실이다. 유신론적 진화란 무엇인가진화의 하위 단계에 있는 유신론적 진화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모든 생명체는 진화적 단계에 의해서 발전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중간중간 그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그 진화 과정에 개입했다. 이 주장은 하나님의 신적 개입과 진화, 두 가지를 다 인정한다”(베이커 신학 용어 간략 사전). 이 정의에 따르면 기존의 진화와 유신론적 진화의 가장 큰 차이는 전자가 오늘날 존재하는 생명체 및 비생명체의 발전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만, 후자는 그나마 어느 정도까지는 그 과정에 하나님의 역할을 인정해준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유신론적 진화는 이렇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물질을 창조했고 그 이후로는 모든 생명체가 순전히 자연적 과정에 의해 진화될 때까지, 물질의 자연스런 변화에 경험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변화를 일으키도록 유도하거나 개입하지 않았다는 견해이다”(‘유신론적 진화’ [Theistic Evolution]).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과 분리된 세상을 만드는 최초의 창조적 활동 이후로 그가 만든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진화 과정에 어떤 지속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바이오로고스(BioLogos)와 같은 단체가 주장하는 두 번째 견해에 따르면, 유신론적 진화는 다음과 같이 정의될 수 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창조했다. 그리고 인간을 자신의 형상을 따라서 창조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분명한 의지가 들어간 디자인에 따라 창조되었고 또 오늘날 과학자가 진화라고 부르는 자연적 과정에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활동함으로 피조 세상을 유지하고 있다”(‘문제가 있는 거울’[A Flawed Mirror]). 따라서 하나님이 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창조했을 뿐 아니라,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발전 과정에도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연 선택, 종의 분화, 무작위 변이와 같은 진화 과정을 그의 신령한 뜻에 따라 감독하고 있고 또 이 세상 모든 무생물과 생명체가 그의 신령한 뜻에 따라 생명을 이어가도록 하고 있다. 이런 유신론적 진화 주장이 그럼 성경과 일치하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 역사와 함께 역사적인 기독교 교리를 살펴보아야 한다. 진화, 교회를 만나다교회 역사 대부분에 있어서 교회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무에서부터 만들었다는, ‘엑스 니힐로’(ex nihilo)를 믿어왔다. 교회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처음 구절에 근거해서 이 교리를 확증해왔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하나님, 이 세상 밖에 존재하는 아버지, 아들, 그리고 성령인 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자신과 별개로 이 우주를 창조했다. 다른 구절들이 바로 이런 믿음에 근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시편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과 호흡이 창조를 이루었다고 말한다.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시 33:6,9). 이 구절에 대한 전통적인 해석에 따르면, 아버지 하나님이 말씀(성자 하나님)과 그의 입 기운(성령 하나님)을 통해서 이 우주가 존재하도록 했다는 것이다. 창조야말로 삼위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하심이다. 게다가 성경은 하나님이 이 세상을 창조할 때 이미 존재하고 있던 어떤 물질을 사용했다는 것을 부정한다.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 11:3). 예를 들어, 하나님은 두 개의 수소 원자와 한 개의 산소 원자를 사용해서 물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물을 만들었을 뿐 아니라, 수소 원자와 산소 원자도 만들었다. 하나님의 창조는 무에서 일어난 역사이다. 창세기 1장에 나오는 나머지 창조 서사에 따라, 교회는 또한 하나님이 지금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다 창조했다고 믿는다. 빛, 물, 공기, 흙, 야채, 그리고 태양과 달, 또한 별들, 바다생물, 날개달린 새, 육지의 생물들, 그리고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신성한 형상을 닮은 인간까지.중요한 사실은 교회는 결코 모든 무생물과 생물이 자연적으로 선택되고 종으로 분화되고, 또 무작위 돌연변이와 같은 과정에 따라 존재하고 발전했다는 생각을 인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초대 교회는 존재하는 모든 것이 원자(atoms)라는 작은 원소의 우연한 충돌로 시작되었고, 또한 우연하게 발전했다는 ‘원자 이론’(atomic theory)을 강력하게 비난했다. 무작위성(randomness)을 받아들이는 대신, 교회는 창조자를 찬양했다. 초대 교회 교부 오리겐(Origen)은 이렇게 썼다. “우리 기독교인은, 즉 이 모든 만물을 창조한 한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에 헌신하는 우리는, 세상 만물을 창조한 하나님에게 그 모든 만물 때문에 감사한다” (‘셀수스에 대항해서’[Against Celsus]). 19세기가 되자 교회는 성경의 권위와 신실함을 무너뜨리려는 수많은 공격을 접하기 시작했고, 마침내 창조 교리에서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찰스 다윈(Charles Darwin’s)의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1859)이 출간되면서, 또 그에 근거한 포괄적인 새로운 세계관이 부상하면서 세상은 무에서 세상을 창조했다는 기존의 교리,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모든 무생물과 생물이 창조되고 발전했다는 교리, 그리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인간이 창조되었다는 교리를 부정하기 시작했다. 이런 진화론적 세계관은 이제 현대 서구 사회 대부분의 분야를 지배한다. 비극적으로, 이런 세계관은 오늘날 성경적이고 역사적인 기독교에게 가장 어려운 도전을 던지고 있다. 자연선택에 의한 창조간단하게 말해서 교회는 언제나 창조 교리를 신봉해왔다. 가장 초창기 신앙고백 중 하나인 니케아-콘스탄디노폴리탄 신조(the Nicene-Constantinopolitan Creed, A.D. 381)는 이 사실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우리는 한 하나님, 전능한 아버지,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면 또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의 창조자를 믿는다.” 그 후 신학이 조금 더 발달하면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는 “창조물 자체 속에 뭔가를 창조하고 또한 발전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그는 이렇게 논지를 전개했다. “오로지 하나님 한 분만이 절대적인 존재이고 피조물이 결코 가질 수 없는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입장은 단지 자연 과정(natural processes)에 의한 창조와 발전의 능력을 물질에게 부여하는 유신론적 진화라는 관점을 분명하게 반대한다”(유신론적 진화). 이와 비슷하게 종교개혁 신학은 계속해서 전통적인 창조 교리를 고수해왔다. 결국 유신론적 진화를 받아들이는 기독교인은 성경이 말하는 창조의 원리와도 배치될 뿐 아니라, 교회가 역사를 통해서 유지해온 굳건한 입장과도 궤를 달리하는 결과가 된다. 하나님이 물질을 창조했다고 믿으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무생물 뿐 아니라 모든 보이는 것들(예를 들어, 참나무나 말),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예를 들어, 천사)을 창조했다는 사실을 믿지 못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일반적인 재료로 끝난 게 아니라 구체적인 특정 종류의 생물을 다 만든 것이다”(유신론적 진화).이런 토의를 두 번째 종류의 유신론적 진화에 적용해보자. 바이오로고스의 유신론적 진화론자 또는 그들이 불리기를 선호하는 “진화론적 창조주의자(evolutionary creationists)”는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이치(axiom)에 있어서 확실하다. 인간과 침팬지(인간의 가장 가까운 친척)의 예를 들자면, 공통 조상을 가졌다는 것은 우리가 약 30만 세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인간도 또 침팬지도 아닌 고대 인구를 만나게 되는데, 이들은 두 그룹으로 나눠진다. 그리고 각각의 그룹이 계속적으로 분리된 생식 활동을 지속하고, 그 결과 이 두 그룹은 과학자가 다른 종으로 인식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달라진다.”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에게 중요한 것은 “이 지구상에 살았던 두 가지 종의 조상 혈통에 관해서는 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라는 사실이다('진화란 무엇인가?'[What Is Evolution?]).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일반적인 특정 종의 기원과 발전은 성경의 가르침과 완전히 상충된다. 인간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무리 거기에 하나님의 방향과 목적이 있다는 식으로 주입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진화론적 창조론자들은 하나님이 구체적이고 즉각적인(자연적 과정에 전혀 좌지우지 되지 않은) 방법으로 물고기, 새, 육상 동물,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간을 창조했다는 창세기 1장의 말씀을 거부하고 대신, 하나님이 자연의 메카니즘을 통해 이 각각의 생명체를 아주 오랫동안 창조했다고 주장한다. 이런 입장 속에 숨어있는 것은 다름 아닌 성경이 분명히 말하는 타락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진화론적 과정 안에는 결코 역사적인 아담과 이브가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을 굳건하게 지켜야만 한다. 교회가 역사적으로 견지해온 입장에 신실하게 충실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무에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무생물과 생물을 창조한 하나님, 창조자를 찬양하는 것이다. 원제: Can Christians Believe in Evolution?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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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가 양극화 대신 설득을 만들어 낼 수 있을까?
by Tim Keller
2021-08-01
책 리뷰: 크리스 베일(Chris Bail)의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 플랫폼이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될까 (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최근에 나는 기자와 학계가 주도하는, 점점 더 심해지는 미국 문화의 양극화 현상에 관한 줌(zoom) 포럼에 참석했다. 포럼 중 한 남자가 이렇게 말했다. “민간 담론을 훼손하고 또 사회적 분열까지 조장하는 공개 포럼을 만들고 싶다면, 트위터 계정만큼 그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소셜 미디어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이해하기 위해 거의 일 년 동안 일해 온 존경받는 여성 저널리스트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나는 그들이 옳다고 믿는다. 그러나 소셜 미디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셜 미디어엔 엄청난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소셜 미디어는 특히 젊은이들 정신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 이젠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소셜 미디어를 무시할 수 없으며, 그럴수록 우리는 소셜 미디어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이런 목적에 도움을 주는 책이 한 권 나왔는데, 듀크 대학교의 사회학 교수 크리스 베일(Chris Bail)이 쓴 ‘소셜 미디어 프리즘 깨기: 사회의 플랫폼을 어떻게 해야 덜 양극화시킬까(Breaking the Social Media Prism: How to Make Our Platforms Less Polarizing)’이다. 이건 종교 서적이 아니라 사회 과학 책이다. 그러나 이 책의 내용은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고 또 소셜 미디어를 어떻게 소비하는 게 옳은지에 관해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게다가 저자가 제시한 최종 원칙 중 많은 부분이 기독교 윤리와 실질적으로 일치한다. 다음은 그 책에서 배울 수 있는 점이다.소셜미디어는 사상(ideas)이 아닌 정체성에 관한 것이다사회적, 정치적 양극화 문제에서 시작하여 소셜 미디어가 양극화에 어떻게 기여하는지에 관해 질문을 던짐으로 저자는 책을 시작한다. 양극화에 관한 가장 일반적인 대답은 알고리즘이 내가 원하는 진영의 뉴스와 의견만 계속 노출시킴으로 우리를 메아리실(echo chambers) 또는 거품 속에 가두고, 그 결과 점점 더 분열과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베일은 다른 연구 결과는 제시하는데, 오히려 반대되는 정치적, 문화적 견해에 매일 노출될 때 사람들이 자신의 기존 견해를 더 강하게 그리고 훨씬 더 극단적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정기적으로 반대 의견에 귀를 기울인 사람일수록 기존 견해를 전혀 조정하지도 않았고, 따라서 더 균형을 잡거나 온건해지지도 않았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소셜 미디어는 자신을 더 잘 관리하고 지키는 장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반대 견해를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인신공격으로 인식한다.찰스 호튼 쿨리(Charles Horton Cooley)는 “다양한 나의 모습을 제시할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관찰함으로써 나 자기에 관한 개념을 더 발전시키는 방법”에 관해서 설명한 적이 있다. 쿨리는 인간에게 스스로 만들어가는 자존감은 그다지 필요한 게 아니라고 주장했다. 진짜 중요한 자존감과 정체성은 사실상 다른 사람들이 내 속에서 무엇을 보는가,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나에 관해서 어떤 말을 하는가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쿨리의 “거울을 보는 자아(looking-glass self)” 개념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졌고 하나님을 반영하도록 창조되었다는 성경의 가르침과 실제로 매우 유사하다. 거울이 스스로 빛을 생성할 수 없고 반사만 하는 것처럼 우리는 외부의 검증이 필요한 존재이다. 우리는 스스로를 검증할 수 없다.과거에는 대부분의 사람이 하나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국가를 얼마나 잘 섬겼는가에 따라서 정체성을 확보했다. 정체성과 관련해서 우리는 (1) 가족과 이웃이 우리에게 기대하는 바를 발견하고, (2) 우리의 행동에 대해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고, (3) 그러한 기대에 따라 삶을 재정렬함으로써 매일 얼굴을 대하면서 사는 공동체가 인정하는 사회적 확인과 인정을 정기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그러나 오늘날 모바일, 개인주의, 치료 중심, 그리고 기술이 주도하는 문화에서 우리는 점점 더 직접 얼굴을 보며 소통하는 대면 공동체에서 멀어지고 있다. 그리고 점점 더 세속화되는 사회에서 하나님과 믿음은 더 이상 정체성의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다. 우리의 관계는 얇아지고 정체성은 이제 더 취약해졌다. 비록 현대에 만연한 치료 문화가 스스로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권고하고 있고, 스스로 정체성을 만들어 자신에 관한 확신을 키우라고 하지만, 저명한 많은 사상가(대표적으로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는 이것이 애초에 불가능하며, 우리는 사실상 환원 불가능한 수준의 관계적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연약한 자아를 가진, 게다가 사회적으로 고립된 개인들이 어떻게 스스로에게 필요한 긍정을 찾을 수 있을까? 소셜 미디어는 우리로 하여금 나 자신에 관한 포스팅(presentation)을 통제하도록 하고(굳이 사람들과 매일 직접 대면할 필요가 없음), 전례 없는 규모와 속도로 포스팅에 대한 피드백을 받도록 하며(51쪽), 그런 다음 (가능한 한 큰 규모의) 내가 속한 커뮤니티로부터 인정을 받기 위해 나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수정하고 조율하도록 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는 결코 사상 토론의 장이 아니다. 사상은 단지 자신을 정의하고 내가 속한 그룹에 신호를 보내는 방법일 뿐만 아니라, 내가 반대하는 그룹과 관련지어 다른 사람에게 정체성을 부여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는 사람의 말을 가능한 한 가장 무자비한 의미로 해석하는 악의적 글 읽기 기술(the art of bad-faith readings)이 완성되는 것을 목격한다. 논증을 논증 자체로 이해하고 그에 대응하려는 노력이 사라진다. 목표는 나와 생각이 다른 글쓴이를 어떻게 하든지 수치스러운 “외부 집단”과 연관시키는 것이다.물론 이것이 소셜 미디어에서 토론이 진행되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지만, 이 방식이 가장 빈번하게 담론을 형성하는 소셜 미디어의 역동성이라는 베일의 진단에 나는 동의한다. 따라서 소셜 미디어에서의 공개 토론은 새로운 사회의 등장과 함께 공백이 생긴 과거 사회의 역할인 정체성 형성, 지위 추구 및 사회적 유대라는 기능을 새롭게 담당하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53쪽).실질적인 결과베일은 두 가지 실질적인 결과를 관찰한다.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킨다. 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정치적 또는 문화적 극단에서 소리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증폭하고 강화하는 한편, 중간에 있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억누른다. 1.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조장한다베일은 ‘극단주의자’와 ‘온건주의자’를 객관적으로 정의한다. 사회학자는 미국 대중의 정치적, 문화적 관점에 대해 꽤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베일이 “극단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 말할 때, 그가 관찰하는 것은 숫자이다. 그가 극단주의자라고 부르는 이들은, 가장 보수적이거나 가장 진보적인 5-10퍼센트에 속한다. 베일은 모든 트위터 사용자의 6%가 모든 트윗의 20%를, 그리고 국가 정치를 언급하는 모든 트윗의 70%를 생성하며, 이 6%가 주로 극단적인 사람들이라고 말한다(76쪽). 이건 그리 놀라운 발견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책이 깨달음을 주는 중요한 지점은 인터넷에서 시끄럽고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많은 사람들에 관한 연구이다. 첫 번째로, 그의 연구에 따르면 극단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은 어빙 고프만(Erving Goffmann)이 “부패한 정체성”이라고 불렀던, 바로 그런 모습을 가지고 있다. 실제 생활에서 그들은 낙오자인 경우가 흔하다. 극단주의자들은 “종종 오프라인 생활(실제 생활)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또한 많은 경우에 소외를 경험한다 (56쪽).두 번째로, 그들이 온라인에서 보여주는 페르소나는 많은 경우에 오프라인 속 성격과는 많이 다르다. 온라인에서 그들은 훨씬 더 공격적이다(56쪽).세 번째로, 그들은 일반적으로 (5-10%에 속하는데도 불구하고) 극단주의자로 낙인 찍히는 것에 강하게 반대한다. 넓은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 위치한 작은 극단주의자나 주변부로 간주되는 것은 누구에게나 불쾌한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숫자를 과장할 뿐 아니라 다른 극단의 힘과 숫자도 같이 과장한다. 이 방법을 통해서 양 극단이라는 스펙트럼의 이미지를 제거하고, 대신 두 개의 군대가 싸우는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리고 중간에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소수의 겁쟁이들이 있다는 것이다. 이 이미지를 강화하기 위해 극단주의자들은 자기네 진영에 속한 온건파에 대한 공격을 즐긴다. 온건파를 비원칙적인 타협자나 상대방의 은밀한 구성원으로 공격함으로써 그들은 문화를 양 극단 스펙트럼이 아니라, 자신들이 속한 주류의 선과 악 사이의 다가오는 전투로 묘사한다. 그렇게 함으로 권력을 얻을 수 있다고 본다(64-65쪽).이처럼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자들이 현실과 전혀 다른 자아를 관리함으로, 심각하게 왜곡된 사회 이미지를 만드는 데 도움을 준다. 그래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를 개인과 사회에 대한 우리의 관점을 왜곡하는 “프리즘”이라고 부른 것이다. 2. 소셜 미디어는 온건한 사람들을 침묵시킨다대다수가 가진 정치적, 문화적 견해를 공유하는 사람들을 온건파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극단주의를 조장하는 것 외에도 소셜 미디어는 이런 온건파를 침묵시킨다. 어떻게 하는 걸까? 첫 번째로, 온건파는 더 큰 성공과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실질적으로 훨씬 더 많은 대면 커뮤니티를 가진, 강력한 오프라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잃을 것이 많은 사람들이다. 극단주의자들은 온라인에서만 지위와 소속감을 얻을 수 있지만, 온건주의자들은 굳이 다른 사람들을 화나게 하는 말을 해서 자신의 경력이나 관계를 위태롭게 할지도 모를 행위를 하려고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극단주의자의 취약한 정체성은 인터넷에서 오히려 많은 부분 은폐되지만, 온건주의자의 정체성은 정반대로 위협받을 수 있다. 두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왜곡된 프리즘이기 때문에 온건파는 중간층이 사라지고 있다는 인상을 받게 되고,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베일은 오히려 “잘못된 양극화”(“자신과 다른 정당의 이념적 차이를 과대평가하는 경향”)가 크게 증가했지만, 정치적 견해의 분포는 그다지 변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통계적으로, 정치적 온건파(또는 “자유주의”와 “보수적” 견해를 혼합한 사람들)는 전혀 줄어들지 않고 있다.세 번째로, 앞에서 살펴보았듯 온건파는 종종 엄청난 비판의 공격을 받는다. 자신이 선택한 정체성을 지지하는 정치적 현실의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극단주의자는 그들을 공격해야 한다. 중도파는 자신의 견해가 ‘악의적 글 읽기 기술’(가능한 한 최악의 방식으로 글을 해석하는 것)에 의해서 또는 자신이 전혀 인식하지 못하거나 전혀 소유하지도 않는 사회적 위치나 정체성을 부여받음으로써 공격받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를 들어, “당신은 정말로 백인 우월주의자 또는 문화적 마르크스주의자네요.” 또는 “지금 당신의 처지에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등등이다. 새로운 플랫폼 만들기지금까지 배운 내용을 요약해보자. 첫 번째로, 소셜 미디어는 극단주의를 주도하고 온건한 사람을 침묵시키기 때문에 결코 사상의 교환이 아닌 정체성 생성의 장소가 될 뿐이다. 두 번째로, 온라인 극단주의는 사회적 현실을 (극단적으로) 왜곡하고, 또한 온라인 페르소나는 종종 개인의 현실과 분리되기 때문에, “소셜 미디어 프리즘은 필연적으로 우리가 보는 것을 왜곡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망상적인 형태의 자기 가치를 만든다”(66쪽).오늘날 소셜 미디어가 광장 모임, 마을 모임, 신문, 그리고 인쇄 출판을 대체하는, 말 그대로 사상 교환과 토론을 위한 새로운 장소로 부상하기에 이는 심각한 문제이다. 소셜 미디어 속에서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자신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그건 언론계과 학계도 다르지 않다. 무엇보다 그들은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를 통해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가장 강력한 문화의 문지기라고 할 수 있는 언론인과 학자조차도 여러 연구를 통해 드러나는 소셜 미디어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하나같이 소셜 미디어가 사회적 그리고 개인적 현실을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할까? 마지막 두 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가 단순히 붕괴되고 그 자리를 더 건강한 무언가가 차지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비현실적이라고 조심스럽게 대답한다. 그러면서 그는 소셜 미디어를 욕하는 사람들이 결국 다시 소셜 미디어로 돌아가는 빈도를 보여준다. 베일이 제시하는 것은 대안이다. 정체성이 아닌 아이디어가 실제로 토론될 수 있는 소셜 미디어 플랫폼을 만드는 방법에 대한 잠정적인 아이디어이다(9장, “더 나은 소셜 미디어” 참조). 그의 아이디어에는 많은 장점이 있으며 우리는 베일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을 응원해야 한다. 기본 취지는 다음과 같다. “좋아요”를 없애고 대신 해당 포스트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에게도 소구하는(appealing) 가치를 계산하는, 그래서 그 가치가 큰 포스트에는 더 큰 보상이 따라가는 식의 미터기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반대 진영의 사람이 해당 포스팅에 동의하는 수준을 표시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한 플랫폼이 생긴다면, 자연스럽게 양측이 모두 다 공정하고 합리적이라고 믿는 게시물에 대해 보상과 가치가 올라갈 것이다. 그의 제안 중 일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흥미를 불러일으킨다. 오늘날 소셜 미디어의 왜곡에 영향받지 않으면서 종교적, 문화적, 그리고 정치적 견해를 토론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 수 있을까? 가능할 거 같다. 소셜 미디어 플랫폼 해킹하기8장에서 베일은 소셜 미디어에서 발견하는, 양극화라기보다는 설득을 향한 움직임이라고 믿는 몇 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그 중에서 내가 확인하기에 다섯 개는 성경에서 스쳐 지나가면서도 내가 주목했던 사실들과 기이한 유사점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다음과 같다.1. 길게 그리고 집중해서 들어라야고보서 1장 19절을 보자.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즉각적으로 토론에 참여하지 말라. 팔로우하고 잠시 들으라. 다른 사람들의 견해가 가장 잘 구성된 것을 보려고 최선을 다하고 그들이 말하는 내용에서 가치 있는 것을 찾도록 하라.2. 그들이 쓰는 단어와 권위를 활용하라사도행전 17장 23절과 28절을 참조하라. 사도행전 17장에서 스토아 학파와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자들에게 연설하는 바울이 인용하는 사상가는 다름 아니라 그들이 따르는 에피메니데스와 아라투스이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복음서 저자 또한 헬라 철학 용어인 로고스를 사용한다. 3. 비판할 때에도 그들이 가진 세계관에서 동의할 부분은 동의하라 사도행전 17장 29절과 고린도전서1장 22~24절을 참고하라. “당신이 설득하려는 사람들의 세계관을 기반으로 상대도 공감하는”(110쪽) 논쟁을 진행하라. “나는 옳고 너는 다 틀렸어”라고 말하기보다, “당신은 이것을 믿습니까? 좋아요. 근데 이런 것도 믿는다고요? 말이 되는 거 같네요.”라고 말하라. 바울이 사도행전 17장 29절에서 어떻게 말했는지 기억하라. “너희 철학자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가 만든 우상의 경배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그가 유대인과 그리스인 모두에게 복음을 어떻게 제시했는지도 살펴보라. 그들의 문화적 목표를 확인하고, 또 그들이 추구하는 우상 숭배 방식에 도전하고, 그리고 나서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 내면이 가진 가장 깊은 문화적 열망을 성취할 수 있도록 그들의 삶의 방향을 바꿨다. 4. 자기 자신에게 비판적이어야 한다마태복음 3장 2절에서 세례 요한은 “회개하라”고 말한다. 당신이나 당신이 지지하는 정당이나 집단의 모든 주장과 행동을 다 옹호하지 말라.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말라.5. 사상과 정체성 사이의 고리를 느슨하게 유지하라디모데후서 2장 24~26절을 참조하라. 당신과 다른 생각이 당신이란 존재에 대한 공격으로 느껴질 정도로 사상을 정체성에 포함시키지 말라. 우리는 지금 소셜 미디어 프리즘으로 정체성을 위조함으로써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롬 12:2)라는 성경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볼 수 있지 않을까 걱정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은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완전한 행위에 기초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과 은혜가 값없이 준 선물이다. 그래서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고전 4:3-4).바울은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때문에 화를 내지도 또 위축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것 또한 스스로가 내린 자기 평가에 근거했기 때문이 아니다. 예수님은 바울을 대신하여 심판을 받으셨고 이제 그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로마서 전체 참조).바울(예수님 포함)도 반대자를 향해 날카롭게 말하곤 했다. 그러나 그건 결코 화가 나서도 또는 위협받는 정체성 때문도 아니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종종 소셜 미디어의 집단(tribes) 의식에 빠져 왜곡된 프리즘이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도록 허용한다. 그러나 바울이 말했듯이, 우리에게는 조금도 분노나 불쾌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에게 그들의 필요를 근거로 얼마든지 엄격하고 날카롭게 때로는 부드럽게 말하도록 돕는, 굳건한 정체성과 자존감을 제공하는 자원이 있다.특별한 사랑기독교인들이 소셜 미디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주는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이 세상은 예수님이 아버지로부터 오셨음을 알게 될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셨다(요 17;1; 요한일서). 그러나 소셜 미디어라는 매체를 통해 예수님을 드러내는 특별한 사랑을 보여줌으로 세상과 전혀 다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우리 기독교인이 지금 처한 처지가 요원하기만 하다.그래도 일부 기독교인이라도 인터넷에서 그들의 사랑 때문에 유명해질 수는 없을까? 그리고 그들이 우리의 믿음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동시에 신중하고 겸손하게 비평가의 말을 듣는 공개 담론이 가능한 새로운 공간까지 재건하는 데에 과연 참여할 수 있을까? 물론 할 수 있다. 그럼 거기에 당신도 포함될까? 원제: Can Social Media Foster Persuasion (Not Polarizatio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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