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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신정주의의 불편한 목소리
by Andrew T. Walker
2022-06-27
공공의 장에서 울려 퍼지는, 자신감을 넘어 심지어 뻔뻔스러운 태도로 승리주의자처럼 행세하는 기독교 비전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러한 승리주의 기독교 비전은 문화 전쟁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기독교의 패배에 진절머리를 친다. 세속주의의 타락, 변태, 비합리적 규범을 정당하게 비판하는 이 기독교 비전은 “중립”을 가장한 세속주의가 사실상 이 시대의 실질적인 신이 되었다고 본다. 따라서 문화적 온전함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이 비전이 생각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을 제대로 제대로 파악하고 삶의 모든 부분에, 심지어 정부에까지 주님의 권위를 굳건히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기독교 비전이 미국의 사십 세 미만에게는 생소할지 모르지만, 이건 사실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지금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이런 현상은 기독교 재건의 재탄생 또는 기독교 재건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용시킨 신정(Theonomy)이다. 기독교 재건 또는 신정?T . 데이비드 고든(T. David Gordon)이 1994년에 쓴 에세이에서 지적했듯이 기독교 재건과 신정은 상당히 겹치는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 둘의 차이는 분명하다. 기독교 재건은 문화를 기독교의 도덕적 토대에 보다 더 명시적으로 결합시키는, 광범위한 신학적이고 문화적인 프로그램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모세 언약 속에 있는 민법적 요소를 현대 시민 정부에 적용하는 것이다. 신정주의자는 따라서 시민 정부가 단지 기독교적 지향점을 가지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구약 속 이스라엘을 모델로 삼아 구체적인 법을 제정할 것을 요구한다. 또 재건주의가 광범위한 문화 운동을 의미하는 반면, 신정은 특정한 해석학적 접근 방식을 드러낸다. 사실상 모든 신정주의자가 암묵적으로는 다 재건주의자이기 때문에, 기독교 재건과 신정에 대한 비판은 신정이라는 범주 아래에서 동일하게 적용할 수 있다. 주로 1970-80년대 장로교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신정 운동은 정치 참여와 홈 스쿨링 같은 주제가 급부상함에 따라 보수적 복음주의 전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 운동은 엄격한 성경적 정통주의, 정부 권한의 제한, 친밀한 가족 관계, 자유시장 경제를 옹호했다.신정과 관련 있는 여러 인물들 중에는 루사스 존 러쉬두니(Rousas John Rushdoony)와 그레그 반센(Greg Bahnsen)이 있다. 러쉬두니가 쓴 세 권으로 구성된 ‘성경적 법률 강요’(The Institutes of Biblical Law)와 반센이 쓴 ‘기독교 윤리 속 신정’(Theonomy in Christian Ethics)은 이런 신정 운동을 태동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책이다. 데이비드 칠튼(David Chilton)과 게리 노스(Gary North)도 신정 운동의 주요 지지자이다. 신정 운동을 홍보하는 조직은 지금도 여전히 존재하지만 오늘날 이 운동은 분위기와 참여 방식에 있어서 과거에 비해 덜 두드러진다. 단순하게 정의할 때 “하나님의 법”을 의미하는 신정은 반드시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가닥과 논쟁이 존재하며 신정을 지지하는 사람들도 각자 다 취하는 입장이 다르다. 물론 기독교를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법이 가장 위대하며 그 외 다른 모든 법은 다 하나님의 법에 비추어서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냐 여부와 관계없이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이 정한 궁극적인 권위에 따라 살고 있다. 그런 면에서 권위의 불가피함에 대한 주장과 더불어 “중립의 신화”라는 허울을 쓰고 세속주의를 정부와 법률 속에 포함시킨 것에 대한 신정주의자들의 비판은 매우 타당하다. 바로 이런 점이야말로 신정주의자들의 다양한 항변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공통된 주장이라고 볼 수 있다. 신학 프로그램으로서 신정은 오늘날 민법이 모세 언약에 따른 이스라엘 민사법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고 믿는다. 신정주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이 표준에 따라”(By This Standard)라는 말은 사회 생활의 모든 측면을 구성하는 가장 높은 권위로서 하나님의 말씀만을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다시 말하지만, 성경의 권위를 버리는 순간 사회가 도덕적 무정부 상태로 퇴보할 것이라는 신정주의자의 비판 속에는 오늘날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중요한 점이 많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할 때 인간은 결국 하나님의 자리에 인간 자신을 놓기 마련이다. 일반 형평 신정(General Equity Theonomy)은 모든 사람과 기관이 다 하나님의 법의 지배를 받는다고 믿는다. 러쉬두니 신정(Rushdoonian Theonomy)은 모든 민사적 법률 시스템이 모세 언약에 기반한 사법 형태를 구체적으로 따를 것을 주장한다. 종말론에 대한 신정적 이해와 교회와 시민 질서 사이의 관계와 관련해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성경 말씀의 적용이다. 역사를 전형적인 후-천년왕국 시각으로 보는 경우에는 삶의 모든 영역을 지배할 주님의 주권을 이 세상 속으로 가져오는 예수님의 제자들의 결실이 점차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주님의 왕국은 서서히 임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성경은 모든 의의 표준을 측정하는 기준이 된다. 통치자들은 자연법칙의 원칙뿐 아니라 이스라엘 민법의 특수성을 현실 속에 적용해야 한다. “완전한 세부사항에까지 이르는 법의 존속 타당성”은 신정에 있어서 필요한 법률 사용을 설명한 반센의 책에서 한 장을 차지하고 있는 제목이다. 그는 ‘기독교 윤리 속 신정’ 개정판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구약의 민법(확실하게 드러나는 ‘사법적’ 법칙들)은 범죄자의 처벌에 이르기까지 모든 문화를 다 아우를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한 사회 정의의 모델이다.”비록 교회와 정부의 관할권은 신정 아래에서도 분리되지만, 그 둘 다 시민의 의(civil righteousness)라는 측면에서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 있고, 이 사실은 구약에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따라서 구약은 오늘날에도 도덕적 죄 및 사법적 범죄를 해결하는 데에 있어서는 특히 더 깊은 연관성을 가진다.이런 적용을 하기 위한 성경해석학은 무엇보다 모세 율법이 가진 지속적인 권위를 인정해야만 하고, 그에 따라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죄와 사법적 범죄에 대한 성경 속 처벌이 오늘날 현대적 맥락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신정은 해결책이 아니다이런 신정 운동과 관련해서, 교회의 사명과 시민권과 신성함뿐 아니라 영원한 권위와 영적 권위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복음주의적 틀로서 신정은 거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진지한 비판이 있다. 요약하면 신정의 오류는 다름 아니라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성경 자체의 이해를 뛰어넘는 해석학에 있다. 이 잘못된 해석학에서 심각한 왜곡이 발생하고 그 결과는 타락한 정치 질서에서 교회의 역할에까지 큰 영향을 미친다. 신정은 승리의 종말론을 전달하기 위한 손쉬운 해석학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신정은 종교를 도구화하고 교회와 국가 관계를 흐리게 하며 또한 종교적 반대까지도 위태롭게 만든다. 게다가 다른 언약이 드러낸 일반은총과 자연법칙의 혜택으로 인해 이제 굳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은 주장이 신정이라는 사실도 이미 증명되었다.적지 않은 보수 학자들에 의해 충분히 입증된 복잡한 해석적 문제를 분석하는 대신, 해석학으로서 신정이 가진 문제점에 대한 가장 간단한 검증은 그것이 옛 언약과 새 언약 사이의 관계를 오해함으로 잘못된 적용을 도출한다는 점을 관찰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신정은 이스라엘 민법의 배경이 되는 도덕적 힘의 연속성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매우 타당하다. 그러나 신정은 신권으로 통치되던 이스라엘 시대가 끝난 후 이스라엘 민법의 세부 사항을 적용하고 집행하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고찰해야 하는 언약적 단절(covenantal discontinuity)이라는 측면을 간과하고 있다.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은 하나님이 다른 나라와 맺은 관계와 비교할 때 모든 면에서 매우 독특했다.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법은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가진 관계의 독점성을 강화하고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런 이스라엘의 사법 제도는 애초에 다른 나라가 복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의 민법이 현대 시민 정부의 모델이 된다고 믿고 있는 신정은 이스라엘과 십계명 이전부터 있었던 도덕법의 존재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살인은 제6계명이 금지하기 전부터 해서는 안 되는 행위였다.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인간을 파괴하는 살인은 태초부터 금지된 것이었다(창 1; 4; 9). 살인 금지는 창세부터 계시된 바와 같이 하나님이 누구이며 창조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그 뿌리를 두고있다.자연법칙을 통해서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영원한 법은 신성한 법으로 표현된다. 십계명은 자연법칙을 드러내는, 시대를 초월한 표현이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공식적으로 성문화되기 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신정이 집착하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이 신권으로 다스려지던 이스라엘에서 어떻게 기능했고 또한 오늘날 그것을 어떻게 적용할지에 대한 형태와 실행 방식이다. 그러나 이런 접근 방식은 이스라엘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던 율법의 도덕적 실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그 결과 율법 준수의 의무를 단지 특정 시간과 장소에만 부여하는 오류를 범하게 된다. 십계명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효력이 있으며, 특히 신약성경은 그 중 아홉 개가 그러하다고 확증하고 있다. 더욱이 신정은 오늘날에도 민사 처벌을 적용하려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 말은 이스라엘의 형벌 체계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신정이 신권 통치를 받던 이스라엘의 고유 시스템을 현대에 잘못 적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런 해석학은 정태적(static)이며, 구속사 전체를 통해 성경이 분명히 일시적이라고 결론을 내린 한 시대의 법을 오늘날에 적용하려는 오류이다. 잘못된 신학적 태도다른 문제는 신학적 자세와 관련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영광의 신학”과 “십자가의 신학”의 차이점에 대해 설명했다. 전자가 즉위와 승리의 신학이라면, 후자는 고통과 상실의 신학이다. 신정은 근본적으로 영광의 신학이다.명시적이든 아니든 교회가 얼마나 제 역할을 하는가의 여부는 문화가 기독교 규범을 얼마나 채택하고 있는가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고 신정은 주장한다. 그렇게 주장함으로써 교회가 가장자리로 밀려난 현실에 대해 일시적인 위로를 받을지는 몰라도, 전체적으로 볼 때 이런 주장은 결코 주변으로 밀려난 교회를 향해 외칠 신학이 아니다. 신정은 그럼 지금 중국이나 이란에 있는 교회에게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신정이 하는 주장은 믿는 이들을 실망시키고 문화에 대한 원한까지 갖도록 만드는, 문화에 대한 정적인 견해를 바탕으로 한 극단적 종말론(over-realized eschatology)에 불과하다. 역사에 대한 보다 정확한 평가는 문화가 승리와 패배, 양쪽 모두의 영향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교회의 선교 사명을 놓고 오로지 승리 아니면 패배라는 이분법으로만 보게 될 때 결과는 언제나 유토피아 아니면 절망일 수밖에 없다.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자세는 영광과 십자가를 동시에 포용해야 한다. 이런 패러독스 안에서 사는 것은 당연히 복잡하지만, 이런 시각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교회의 사명을 깨닫게 함으로 보다 더 균형잡힌 시각을 갖도록 한다. 신정이 교회와 국가 사이에 공식적인 통합을 원하는지 여부는 여전히 논쟁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의심할 바 없이 교회와 국가는 서로의 이익을 증진하기 위해 협력해야 한다. 의도적으로라도 서로의 권위를 강화시켜야 한다. 그 결과가 좋을 수도 있고 또 나쁠 수도 있다. 종교가 정부의 하녀가 되거나 또는 그 반대가 되는 것은 나쁜 결과이다. 그러나 복음을 자유롭게 선포되도록 정부가 적극적으로 돕는 것은 좋은 결과이다(딤전 2:1-2).유럽의 중세 시대를 엄밀히 신정 시대였다고 부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을 통해서 교회와 국가 사이의 강력한 연합에 대해 한 가지 확실히 배울 수 있는 것은 그런 연합이 얼마나 좋지 않은가이다. “기독교 국가”(Christendom)를 갈망하는 그리움에 가까운 짙은 향수를 가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이 교회와 국가가 한통속이 될 때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어느 역사를 통틀어 살펴봐도 결코 찾을 수 없는 게 있다면, 그건 교회와 국가가 연합했을 때 교회의 순수함이나 종교적 반대(religious dissent)가 고양된 사례이다.도덕적, 종교적, 그리고 문화적 통일성의 매력은 종교의 자유가 희생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가치이다. 종교의 자유라는 하한선은 필수적이다. 모든 종교가 법에 따라 동등하게 인정받지 않는 한, 특정한 종교 단체는 반드시 회원 가입과 사회 참여의 기초로 원하는 엄격한 기준을 설정할 것이다.가톨릭 대 개신교이든 아니면 개신교 대 다른 개신교이든, 어떤 한 그룹은 언제나 종교적 기준에 따라 상대방을 배제하고 싶은 유혹을 받기 마련이다. 개신교인으로서 나는 종교와 관련해서 국가가 간섭하도록 허용했던 장 칼뱅과 마르틴 루터의 태도를 생각하면 몸서리를 친다. 당시 소수에 불과했던 침례교도들은 교회와 국가가 연합해서 통치하는 세상에서 제대로 생활할 수 없었고, 나는 결코 그 당시의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신정이 우리 사회의 무법(lawlessness)을 비판하는 것은 옳은 일이다. 그러나 신정이 제시하는 대안은 한때 존재했지만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기독교 사회를 전제로 하고 있고, 또한 그 대안이 영속적이기 위해서라도 꼭 필요한 신학적 일관성이 빠져 있다. 그리고 정말로 신정이 옳아서 역사가 그들의 주장대로 기독교 사회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면, 왜 세상은 지금 정반대를 향해서 달려가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서구 문화가 점점 더 이교적이 되어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교회가 점점 더 믿음을 잃어 가는 걸까? 아니면 주님께서는 이런 어려운 시대를 사용하여 알곡을 가리고 있는 걸까? 그러나 교회와 국가가 상호 호환적 관계를 유지함으로 가져다주는 결과는 시민종교의 바탕이 될 뿐 아니라 문화적 결속을 위해서 쓰임받는 구원 신앙의 핵심이다. 신정은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수 없다그럼 사회에 대한 도덕적 표준은 어떠한가? 하나님의 말씀이 정당한 존경을 받지 않는 사회가 어떻게 지속할 수 있을까? 한편으로, 모든 사회가 말세를 살고 있으며 또한 머지 않아 심판을 받기 때문에 그 어떤 사회도 이러한 수준의 재생성(regeneracy)을 가질 수는 없다. 하나님의 나라를 제외하고는 하나님 말씀이 제시하는 기준에 맞는 문화란 있을 수 없다.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그럼 입법을 하는 데에 있어서 오로지 자율성과 인간의 이성만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인간이 만든 법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자연법칙과 영원한 법칙이 담겨 있기 마련이고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건전한 원리도 찾을 수 있다. 신정을 거부한다고 제대로 만들어진 세속법 속에 얼마든지 신성한 법칙이 들어있을 수 있다는 사실까지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J. 버드지스제위스키(J. Budziszewski)는 이렇게 썼다. “살인 금지와 같이 자연법칙 속에 포함된 신성한 법의 일부는 정부가 제정한 법 속에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도덕적 불법을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은 신정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창조 패턴에 더 잘 부합하고 노아 언약, 자연법칙, 그리고 성경(딤후 3:15-17)에서 강조하는 원칙과 더 잘 어울린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참으로 최고이다. 모든 사람과 문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궁극적인 충성을 바쳐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선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직접적인 관할권 밖의 시민 영역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좀 더 현실적인 정치적 성찰을 위한 더 나은 출발점은 모세의 언약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확증하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이다. 그리고 이러한 언약이 제공하는 내용을 바탕으로 해서, 성경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계의 구조와 설계를 이해하고 그 안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인정하는 데에 있어서는 자연의 이해와 더불어 이성의 역할을 강조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반드시 도덕법이 포함된다(시 19:1-3; 롬 1:32; 2:15).그러나 타락한 이성은 도덕법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모호하게 하고 하나님이 창조 세계 속에 심어 놓은 원리를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이 사회에서 진정한 도덕적 의가 드러나기 위해서는 계시가 필요한 것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모세 언약의 적용이 아니라 창조 속에 담긴 원리와 법칙을 이해하도록 돕는 특별한 계시이다. 계시는 참으로 탁월하지만, 여러 규범이 선포되는 분야와 선포되는 방법에 관해서는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지도자들이 신성한 명령을 드러내길 기대하는 것은 문화적 동질성이 있는 곳에서는 좋게 들리겠지만, 신정은 종교적 소수를 이등 시민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사법 표준의 원천으로 설명하는 임무를 맡은 정부 당국이 등장하는 예는 없다.도덕적 반란 속에서 오래 지속할 수 있는 국가도 없지만, 그렇다고 신약성경이 말하는 국가가 그 국가의 정당성을 특별 계시에만 의존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런 불편한 긴장 속에서 사는 존재이다. 정부는 특별 계시에 복종하는 지도자와는 별개로 정의로운 결정을 할 수 있는 합법적인 존재이다. 로마서 13장에서 바울은 이 점을 말했고, 그는 또한 그런 주장을 할 때 조금도 모세의 언약에 의존하지 않았다. 성경적으로 그리고 심지어 역사적으로 말하면, 이교도 통치자들도 얼마든지 정의롭게 통치하는 게 가능하다(비록 정의에 대한 그들의 이해가 완전한 일관성이라는 면에서는 부족하더라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곳에서 사는 우리는 감사해야 하며 또한 이것을 세상에 허락하신 하나님의 일반은총의 증거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자연법 내에서는 신정이 불필요하게 된다. 왜? 성경 어디에서도 종교적 합의가 확보된 사회에서 정의가 보장된다고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종교적 합의가 있다면 좋겠지만, 정의의 표준을 정확하게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 것은 정의라는 것 자체가 항상 애매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우리는 타락했고, 지금은 종말을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 언약에 앞서서, 언약의 특수성 없이도 더 나은 도덕성의 기초를 제공하는 자연법칙을 주신 이유이다. 살인이나 수간과 같은 일이 잘못되었음을 알리기 위해 굳이 이스라엘의 민법이 필요하지 않다. 자연계시를 통해 드러난 창조 언약이 우리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있다. 다시 말하지만, 신정은 구약의 형법을 오늘날에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 이야기를 좀 더 잘 활용한다면, 현대 국가는 무엇보다 정당한 명령과 신중하고 현명한 형사적 제재를 통해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는 사실을 성경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금지하는 범죄를 저지른 범죄자를 처형하지 않고 수감하는 것이 좋다. 우리는 창조 언약과 노아 언약과 같은 약속을 통해, 굳이 이스라엘과 똑같은 형태를 갖추지 않더라도 사회에 꼭 필요한 도덕 체계에 얼마든지 도달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노아 언약에 대한 데이비드 벤드루넨(David VanDrunen)의 연구가 보여주듯이, 하나님은 “땅이 있을 동안”(창 8:22) 창조세계를 유지하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비록 모호하더라도 자연법칙과 일반 은총을 통해 이 땅을 운영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이런 약속이 비록 우리에게 문화적 지배에 대한 보장을 제공하지는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그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기독교 국가의 목사가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교회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불일치, 고통, 문화적 갈등은 종교적 제약을 벗어난 국가들로 인해 발생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이 종교적 합의를 공유했는지 여부에 따라 국가의 정당성을 결정하지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사회가 기독교 이상을 중심으로 연합하고 정부가 그러한 약속을 반영하는 것은 좋지만, 신약성경 그 어디에도 정부의 정통성을 기독교의 인정 여부와 연결하지 않는다. 복음의 능력을 선포하라성경적 충분함을 지키겠다는 선의의 노력 때문이기는 하지만 신정은 성경이 드러내는 것 이상으로 그 개념을 확장했다. 신정은 구속 드라마가 아닌 결의론에(역자 주: 보편적인 규범을 정확하게 적용하기 어려운 특정 경우에까지 굳이 옳고 그른 것을 명확하게 결정하려는 기술) 더 집중하고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신정주의자라면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다. “그러나 국가 전체가 갑자기 또 다른 대부흥을 체험하고 기독교 국가로 변모하게 된다면, 그건 어떻게 이해할 건데?” 거기에 대한 대답은 신정적 의제를 제정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속한 교단의 고백을 인용하자면 대답은 이것이다. “자유로운 사회 속 자유로운 교회가 기독교적 이상이며,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자유롭고 방해받지 않고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 어떤 시민 권력의 방해가 없이 진리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전파할 권리가 있음을 의미한다.”우리는 정치적 패권을 지향하는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십자가의 가치를 능가할 수만 있다면 사탄은 기꺼이 시민종교의 가치에 의해 움직이는 도덕적 국가까지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사람으로 넘치는 국가를 보기 원한다. 거기에는 공무원도 포함한다. 그러나 단지 정부가 우리 사명의 대상이 아니다. 변화된 정부는 모세 율법에 복종하지 않으면서도 자연법칙을 고수하는 변화된 양심을 가진 사람들이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하나의 부산물일 뿐이다. 미국 문화는 이제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깨어지고 비뚤어진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말씀에 대해 도덕적으로 반항하는 나라에 살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신정이 매력적으로 들리는 것은 당연하다. 신정은 미국의 문제를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만병통치약 같이 느껴지기도 한다. 그러나 정의로운 사회로 향하는 게 단순히 지붕에 난간을 설치하는 것에서 시작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신 22:8). 우리는 구속받을 문화를 찾는 것이 아니라, 오직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을 통해 이 타락한 문화를 향해 예언적으로 선포하는 구속받은 개인을 찾고 있다. 신정의 아이러니는 이론적으로 볼 때 그 주창자들이 엄격한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장려한다는 데에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신정은 국가 지원의 보조금에 의존한다. 신정은 또한 국가에 의존한 복지 지원을 실행한다. 국가의 허락이 없이 별개로 존재할 수 없는 신학적 시스템은 결코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구조와 사명과 일치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신정이 얼마든지 자유시장 경제학을 요구할 수도 있지만 그 결과는 통계주의 신학에 그칠 뿐이다. 성경과 문화에 대한 신정적 접근 방식을 거부하는 게 성경의 영감성과 권위 및 충분성에 대한 경외심을 덜 갖는다는 의미일까? 결코 아니다. 논쟁의 핵심은 무신앙(unbelief)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현재의 구속-역사적 시대에 신정이라는 개념을 어떻게 적용하는가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모든 위조품에 대한 최종적인 권한이며 참으로 충분하다. 하지만 진짜 고민해야 할 문제는 이런 성경 자체가 거부되는 사회 속에서 우리가 문화 변증이라는 임무를 과연 어떻게 이해하는가이다. 원제: American Culture Is Broken. Is Theonomy the Answ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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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함마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by A.S.Ibrahim
2022-06-17
나는 이집트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했다. 이웃이나 학교 친구 중에 “무함마드”라는 이름이 많았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내 주변에 있는 무슬림들에게 이 이름―그들의 예언자의 이름―이 특별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고, 존경한다. 그들은 또한 이 이름이 그들에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믿는다. 난 지금 미국에서 살고 있다. 많은 무슬림들이 이 나라로 오고 있는 이때, 이 나라 그리스도인은 무슬림들이 그들의 예언자를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더 자세히 알아야 한다. 무함마드에 관해 그리스도인이 알아두어야 할 아홉 가지를 여기 소개한다. 1. 무함마드는 거의 확실히 실존 인물이었다. 무함마드는 AD 570년에 메카에서 태어났고, AD 632년에 메디나에서 죽은 것으로 전해진다. 그의 삶에 관한 정보를 의심하는 사람이 많은데, 이는 그가 죽고 두 세기가 지난 다음에야 그의 삶이 문서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실제 목격자 진술은 없다. 그래서 그에 관한 기록들을 완전히 신뢰할 수 없다는 문제가 발생한다. 그렇더라도. 무함마드가 실존 인물이었다고 믿을 만한 근거가 있다. 7세기에 몇몇 그리스도인이 아랍인들에게 나타난 한 설교자에 관하여 기록했다. 그런데 그들은 그 사람을 거짓 예언자로 규정했다. 그가 칼과 전차를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 2.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무슬림들은 무함마드가 40세에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서 알라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고서 예언자가 되었다고 믿는다. 이렇게 계시를 받는 과정에 어떤 인간적인 개입도 없었다고 무슬림들은 주장한다. 그렇지만 무슬림 내러티브 자체가 무함마드가 9-12세 사이에 시리아에서 그리스도인 수도사를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 수도사는 그에게 기독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더하여, 무함마드가 첫 번째 계시를 받았다는 바로 그때, 그는 그의 아내의 사촌을 찾아갔다. 그런데 그 사촌은 그리스도인이었고 히브리 성경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따라서 무슬림들이 무함마드는 그리스도인들에게서 어떠한 영향도 받지 않았다고 주장하지만, 그들의 역사 자체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 3. 무슬림들은 무함마드를 완벽한 인간이었다고 믿는다. 무슬림들에게 무하마드는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 (성경의 예언자들의 포함하여) 수많은 예언자들 중에서 최후의 그리고 최고의 예언자이다. 무슬림들은 그를 역사상 유일하게 완전한 인간으로 여긴다. 역사의 기록은 이러한 이상적인 인물상에 의심을 보내지만(누구든 그의 의심스러운 행동과 문제가 많은 가르침을 찾을 수 있다), 무슬림들은 여전히 무함마드를 공경하고 그가 오류가 없는 인간이었다고 믿는다. 4. 무함마드는 메카와 메디나에서 살았다. 무함마드는 53년간 메카에서 살았고, 그 뒤에 10년간 메디나에서 살았다. 메디나에서 예언자가 되었다고 하는 바로 그때부터, 그는 약 13년간 거기서 살면서 종교 메시지를 전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와 그를 따르는 소수의 무리를 조롱하고 박해했다. 수년간의 실패와 가센 압박 끝에, 그는 소수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메디나로 이주하여 거기서 마지막 10년의 삶을 살았다. 메디나에서 그는 세력을 다지고 자원을 모을 수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군사령관이자 정치가가 되었다. 5. 무함마드는 많은 비무슬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메카에서는 미약했고 쉽게 공격받은 그였지만, 무함마드는 메디나에서는 막강한 군사 지도자가 되었다, 무슬림 자료들은 그가 다양한 집단에게 십여 차례 군사공격을 감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의 공격을 받은 무리에는 다신론자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런 공격들을 통해 무함마드는 강력한 아랍 부족 지도자가 되었고, 이로써 많은 부족들이 그에게 복종하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슬람이라는 말 자체가 “복종”과 “항복”을 의미한다. . 6. 무함마드는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꾸란은 무함마드의 유일한 기적은 꾸란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알라가 무함마드를 보낸 것은 경고하기 위해서라고 주장한다. 과거 세대의 사람들이 기적을 통해서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무함마드에게 준 유일한 기적은 꾸란이라고, 그리고 이걸로 충분하다고 알라는 말한다. 그러나 후대의 무슬림들은 유대인들이나 그리스도인들과 교류하면서 무함마드가 행한 기적들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낼 필요성을 느꼈다. 모세도 예수도 기적을 행했다면,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 무함마드도 똑같이 기적을 행했어야 했다. 이슬람 경전과는 모순된다 하더라도 말이다.7. 무함마드는 여러 아내와 첩을 두었다.무함마드는 여러 여자와 결혼했다. 그 정확한 숫자에는 이견이 있지만, 9-12명과 결혼했다. 그에게는 많은 첩과 여종도 있었다. 무슬림들은 그가 여러 여자와 결혼한 것은 남편을 잃은 여자들을 돌보기 위해서였다고 말한다. 이렇게 여러 여자와 결혼한 데는 경제적, 정치적 이유가 있었다고 믿는 사람들도 있다. 무함마드의 아내들 중에는 눈에 있는 여자도 여럿 된다. 카디쟈는 무함마드의 아내들 중 가장 부자였다. 사우다는 나이가 가장 많았다. 아이샤는 가장 어렸는데, 무함마드는 사우다가 여섯 살 때 혼인했고 아홉 살 때 신방을 차렸다. 자이납은 무함마드 양자의 아내였다. 알라가 그 입양을 파기하고 무함마드에게 자이납을 아내로 맞으라고 했다. 사피야는 유대인인데, 무함마드가 그녀의 부족을 공격하고 그녀의 남편을 죽인 다음에 그녀를 아내로 취했다. 8. 그는 독살되었다.무슬림 자료들은 무함마드가 자연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는 독살되었다. 수니 무슬림들은 한 유대인 여성이 무함마드를 독살했다고 규정한다. 한편, 일부 시아파 무슬림들은 무함마드의 아내 두 명이 공모하여 그를 살해하고 그들의 아버지들이 무함마드를 계승하여 아랍인들을 통치하게 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주장한다. 예언자가 독살됐다는 이야기는 알라가 그를 보호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에, 많은 무슬림들은 무슬림 자료들에 있는 독살설은 꾸며낸 것이라고, 무함마드는 자연사했다고 주장한다. 9. 무함마드의 무덤은 메디나에 있다. 무슬림 자료들은 또한 무함마드가 고향 메디나에서 죽었고 거기에 매장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현재까지 무슬림들은 그의 무덤 때문에 메디나가 복을 받았다고 믿는다. 그들은 복을 받기 위해 이 도시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 “메디나”라는 이름은 “그 도시”(곧 무함마드의 복 받은 도시)라는 뜻이다. 물론, 무함마드의 삶과 가르침에 관하여 할 이야기는 훨씬 더 많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무슬림 친구나 이웃이나 직장동료와 교류할 때 이러한 기본 사실은 알고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걸 알고 싶은 이들은 내가 쓴 A Concise Guide to the Life of Muhammad(무함마드의 삶에 관한 간결한 가이드)가 도움이 될 것이다. 이슬람의 이 예언자에 관하여 배움으로써,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위의 소망을 우리 주변의 무슬림들에게 더 잘 들려줄 수 있을 것이다. 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Muhamma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홍
교회 떠난 이들을 어떻게 다시 돌아오게 할까?
교회의 재발견
by Stephen Witmer
2022-06-11
꽤 오래 전 일이다. 한동안 보지 못했던 교인에게 전화를 건 적이 있다. 내가 담임하던 교회를 다니던 그는 그리스도인으로 착실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통화하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자기는 지금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다고, 아무렇지도 많게 말했다. 아, 이건 그 후로도 내가 여러 번 겪은 경험이다. 당신에게 그토록 소중한 무엇(우정, 사역, 파트너십, 교회 가족)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럴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는데, 알고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기에 느끼는 아픔 말이다. 그 몇 년 뒤 또 다른 한 통화는 좀 웃기다. 사실 본심은 참 착한 사람인데도 인생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다보니 다른 사람과 소통할 때에는 속과는 다르게 거칠게 말을 하는 습관이 들어버린 한 여자와의 통화였다. “누구세요?” 그녀는 내 전화에 거칠게 물었다. 그녀가 내게 건 전화를 못 받아서 리턴콜을 하는 거였기에, “나 스티븐인데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거칠게 “스티븐 누구요?”라고 했고, 나는 “스티븐 위트머요”라고 대답했다. 바로 그때 그녀는 내가 아직까지 생생하게 기억하는 한 문장을 내뱉었다. “ㅈㄱㄹ, 스티븐 위트머가 누구야?” 어쩔 수 없이 당신이 전화해서 리턴콜을 하는 목사라고 말하자, 그녀는 몹시 당황해 했다. 지난 18개월을 돌이켜보면, 지금 말한 두 대화가 생각난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 안에 굳건히 서서 다른 사람을 돕고 희생하며 또 교회에 충성하는 모습을 보면서 나는 끊임없이 힘을 얻는다. 그러나 한편에서는 교회를 떠나고 관계를 끊으며 아예 사라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교인이 교회와 관계를 끊고 성경 읽기와 기도를 중단하려면, 코로나 전염병보다는 더 긴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가 다 신앙을 소중하게 여긴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확신하지 못하겠다. “아, 위트머 목사님이시군요”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내가 “ㅈㄱㄹ, 스티븐 위트머가 누구야?”라는 말에 놀랐던 것처럼, 나는 교회를 떠나는 교인들을 보며 그때와 비슷한 거리감을 느끼고 충격에 빠진다. 교회 재발견을 위한 가이드오늘날 많은 목회자의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 질문이 있다. “이곳저곳 떠도는 교인을 어떻게 다시 신앙의 교제 속으로 다시 끌어들일까?” 나는 기독교 저자이자 지도자, 또 장로이기도 한 두 사람이 훨씬 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진 것을 고맙게 생각한다. 단지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데에 그치는 게 아니라,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그뿐 아니라 방황했던 이유까지도 정확하게 드러냄으로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하지 않도록 말이다. 교회를 위해 이 주제를 다룬 이 책, 교회의 재발견: 그리스도의 몸이 필수적인 이유를 쓴 두 사람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전염병, 정치·인종 갈등, 백신 및 마스크 분쟁 등을 겪은 후 사람들이 교회에 다시 나오도록 하기 위해서는 교회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저자 콜린 핸슨과 조너선 리만은 말한다. 사실,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가 당신의 인생과 삶을 만든다(23).이 책은 당신이 교회를 재발견하여 교회가 무엇인지 이해하고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형제자매로 사는 삶의 풍요로움을 발견하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이루는 한 지체로 다른 지체와 결합하여 사는 기쁨; 오늘날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 속 하나의 벽돌이 되어 세상 문화에 거스르며 사는 능력 있는 삶(24).이 책은 교회를 재발견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 그리스도의 몸이 왜 중요한지 깨닫도록 할 것이다(147).고작 150쪽의 책을 가지고 핸슨과 리만은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탁월한 교회론을 제공한다. 책을 드는 순간 빠져들게 만드는 뛰어난 글 솜씨와 더불어 개인적인 이야기와 경험까지 담긴 이 책은 매력적이고 훌륭한 자료로서도 부족함이 없다. 배척과 추방이라는 주제가 교회 권징의 방편으로 제시될 때, 교회와 성경 신학이라는 깊은 주제는 소홀하게 처리된다(96). 아주 훌륭한 지적이다. 이 책은 다양한 인용이 가능하다. “최악의 상황을 맞은 당신에게 도전을 주지 못하는 관계라면, 그런 관계는 당신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144). (당신의 구미에 맞을 20가지 추가 인용문은 여기를 참고하라.)단순한 구성도 이 책의 장점이다. 교회에 대한 신학적 정의로 각 장이 구성되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임이다(2장) • 그 모임은 그리스도의 하늘 왕국의 대사관이다(3장) • 그들은 기쁜 소식과 왕이신 그리스도의 명령을 선포하며(4장) • 지정하신 규례를 통해 서로를 그 나라의 시민으로 확언하며(5장) •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사랑을 드러낸다(6장) • 하나로 연합된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7장) • 온 세상 가운데(8장) • 장로들의 가르침과 모범을 따라(9장) 개요가 명확하다는 것은 독자가 책을 읽으면서 저자의 논지를 따라가는 데에 어렵지 않다는 의미이다. 이미 교회에 관한 리먼의 다른 글을 읽었거나, 특히 9Marks 자료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한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다지 새로운 것을 찾지는 못할 것이다. 이 책이 가져다주는 독특한 공헌은 오히려 견고하고 성경적 교회론을 매력적이고 설득력 있고 접근 가능한 방식으로, 요즘과 같이 중요한 시기에 한 권으로 묶어서 냈다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 권의 책 이상이 필요하다팬데믹 이전보다 교회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더 풍성한 성경적 이해를 가진 교인으로 교회가 넘치기 바라는 저자의 열망을 나도 똑같이 느낀다. 이 책이 그 점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역사가 일어나려면 수백만 명의 마음에서 변화가 생겨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단지 이 책과 같이 좋은 책 몇 권이 출판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나는 무엇보다 교회가 감당해야 할 중요한 역할을 다시 실감한다. 생각이 행동을 형성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대부분 교인이 무슨 깊은 생각을 해서 교회를 떠나는 게 아니다. 마찬가지로, 무슨 깊은 생각을 했다고 교회로 돌아가는 것도 아니다. 제임스 K. A.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우리는 단지 “생각하는 사물”이 아니라 몸을 가진 피조물이며, 아는 것과 행동하는 것 사이에는 종종 간극이 발생한다. 그렇다고 지식이 필요 없다는 게 아니다. 오히려 더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스미스는 습관의 힘을 옳게 지적했고, 나는 지난 18개월 동안의 목회 경험에서 그것이 사실임을 확실히 발견했다. 교회 안 가는 게 일단 몸에 익자 다시 교회 가는 습관을 들이는 게 힘들다는 고백을 하는 교인이 적지 않다. 그건 교회에 대한 그들의 이해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습관의 힘이라는 면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저자는 서문에서 이 점을 간단히 언급한다.)그렇다면 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어떻게 해야 다시 기독교 공동체에 참여하는 습관과 리듬을 몸에 익힐까? 찰스 더히그(Charles Duhigg)가 쓴 Power of Habit(습관의 힘)의 한 구절이 도움이 된다. “습관이 자리를 잡으려면, 변화가 가능하다고 믿어야 한다. 대부분의 경우 그런 믿음은 그룹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하다.”조너서 리먼의 이야기는 이런 현실을 강력하게 증언한다. 리먼은 성령께서 자신을 교회로 이끈 이유가 설교와 지역 교회(복음과 복음 사회)의 교인 때문이었다고 고백한다. 당시만 해도 리먼은 “교회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제대로 된 대답을 할 수 없었지만, 그는 고백한다. 성령이 그를 교회로 이끌기 위해 사용한 것은 복음과 복음 사회, 그러니까 복음 때문에 모인 교인들이었다는 것을. 교인을 교회로 이끄는 게 무엇인가는 질문과 관련해 리만의 경험이 책의 중요성을 배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지적인 대답 이상의 무엇이 필요하다는 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중요한 건, 애정을 불러일으키고 습관을 형성하는 공동체이다. 기억하자. 주의 깊고 성실하며 노력하는 목회자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을 만드는 모든 지체가 다 필요하다. 방황하는 사람들을 돕도록 그리스도인을 준비시키라이게 사실이라면,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가 질문이 떠오른다. 같은 교회를 다니던 교인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경우에, 다시 돌아오게 하려면 할 수 있는 게 무엇일까? 최소한 그 답의 일부는 분명해 보인다. 기독교 공동체인 우리가 먼저 주도권을 잡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다가가야 한다. 그들을 추적하고 둘러싸야 한다. 그리고 그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말과 행동으로 상기시켜야 한다. 자, 이제 이 책이 의도하는 독자에 관련해 마지막 질문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책 전체에 걸쳐서 이런저런 이유로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아예 독자로 가정하고 직접적으로 언급한다. 그러니까 이 책이 대상으로 하는 독자가 바로 교회를 재발견해야 하는 당사자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 중 과연 얼마나 이 책을 읽을지 궁금하다. 누가 사준다고 해도 읽을까? 그러길 바란다. 그러나 나는 이 책이 좀 덜 직접적이고, 또 보다 조절된 방식으로 쓰일 때 더 효과가 있을 거 같다. 이 책의 성공은 당신 같은 사람이 읽는가 아닌가에 달려있다. 그러니까 TGC 서평을 읽는 사람, 이미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지만, 교회가 무엇인지, 왜 꼭 다녀야 하는지 흔들리는 사람에게 제대로 된 대답을 못 하는 사람이 읽을 때 이 책은 가장 효율적으로 쓰일 것이다. 이 책은 가장 먼저 당신에게 교회에 대한 명확하고 성경적인 가르침을 제공할 것이다. 그리고 절대로 이 책을 사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설혹 누가 준다고 해도 읽지 않을 주변 사람에게 교회의 아름다움과 필요성을 전달하도록 준비시킬 것이다. 자신이 당신의 사랑을 받고 있는지 알고 있는 사람에게, 당신은 이 책이 담고 있는 진리를 명확하게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다시 말해서, 지금 이 순간 이 유용한 책의 존재는 좋은 기독교 문학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또한 오늘을 사는 교인들이야말로 이 책 교회의 재발견이 묘사하는 교인으로 살아야 할 필요를 보여준다. 그건 단지 교회를 떠나 방황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만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교회의 재발견Rediscover Church: Why the Body of Christ is Is Essential콜린 핸슨, 조너선 리먼“교회가 없는 그리스도인은 곤경에 처한 그리스도인이다.” 코로나 대유행으로 예배 장소가 갑자기 폐쇄된 이후 많은 그리스도인이 교회 생활을 건너뛰고 온라인 예배조차 소홀히 했다. 하지만 이런 현상은 사실 코로나19 이전부터 유행하기 시작했다. 정치·인종 갈등을 포함한 양극화 문제는 적지 않은 교인을 교회로부터, 또 서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자매로 모이기를 다시 다짐할 때이다. 교회의 재발견에서 콜린 핸슨과 조너선 리먼은 교회가 신자와 하나님의 선교에 필수인 이유에 대해 논한다. 말씀과 개인적인 이야기를 통해 두 저자는 독자에게 하나님이 왜 모이라고 하는지, 진짜 의도를 보여준다. 개인으로 또 그리스도의 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을 영적으로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교회 쇼핑과 라이브 스트리밍 서비스로 대표되는 이 시대에도 왜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정기적으로 한자리에 모이는 신자에게 교회의 미래가 달려있는지, 그 이유를 이 책에서 발견하라. 여기를 클릭하시면 두 저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습니다.원제: How Can We Bring Back Those Who’ve Drifted from Church?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의재발견
교회의의미
팬데믹
방황하는교인
교회의위기
온라인예배
대면예배
재전도의중요성
교인훈련
교회이탈
팀 켈러를 상황화하자
by Trevin Wax
2022-06-09
몇 주 전에 나는 (1) 문화 전쟁의 간략한 역사, (2) 예의와 신념을 갈라 놓는 경향, (3) 우리가 지금 “부정적인 세계”에 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심층 고찰, (4) 왜 이런 사실이 내게는 과거로부터 기인한 폭발처럼 느껴지는지, 그리고 (5) “부정적인 세계”라는 틀(framework)을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필요한 렌즈의 변경, 이런 순서로 시작하는 신-종교 우파(neo-Religious Right)의 부상에 관한 시리즈를 시작했다. 다음 칼럼에서 나는 어떻게 공적 생활에 유익하고 충실하게 참여하는지에 대해 좀 더 규범적인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하지만 그 전에 먼저 논의하고 싶은 게 있는데, 바로 팀 켈러 목사의 문화 접근 방식이다. 제임스 우드의 팀 켈러 비판제임스 우드(James Wood)가 쓴 “팀 켈러에 대한 내 관점은 어떻게 달라졌는가”(How I Evolved on Tim Keller)는 정치 참여와 관련하여 복음주의적 “제3의 길”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켈러에 관한 가장 건설적인 비판으로 유명하다. 우드는 이렇게 썼다.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욕을 덜 먹고 싶어 하는 복음주의적 열망은 현 정치적 순간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을 모호하게 만들 수 있다.”우드는 지금 교회가 기존 기독교의 도덕적 비전을 전적으로 뒤집어 놓은 사회가 만들어낸 “부정적 세계”에 살고 있다는 아론 렌(Aaron Renn)의 평가에 동의한다. 켈러의 전략은 [기독교에 대해] “중립적인” 사회에서는 그나마 효과가 있었지만 “부정적인” 세계에서는 효과가 없으며, 그가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종종 그를 실질적인 선택과 양보가 이루어져야 하는 싸움에 발을 담구고 손을 더럽히고 싶어 하지 않는, “싸움에서 한 발 떨어진” 상태에 머물게 만든다는 것이다. (우드의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세기 전환기에 이미 맨해튼은 기독교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았고, 한참 전부터 “부정적”이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미국 여러 지역에서 봉사하는 사람들은 몇 년에 걸쳐서, 맨해튼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문화가 지금 우리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는 켈리의 경고를 들어 왔다.)우드는 후속 글 “이것은 팀 켈러에 관한 글이 아니다”(This Article Is Not About Tim Keller)에서 켈러에게 분명한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이 글의 목적은 켈러의 사상 구조가 “제자들에 의해 지나치게 전유된” 나머지, 부족주의를 피하려는 고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많은 기독교 지도자가 정치적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조차 도덕적 동등성을 암시하는 수준에까지 이르렀다는 점을 비판하는 데 있다는 점을 분명하게 했다. “우리에게는 상당한 양의 기독교 현실주의가 필요하다는 점을 제안하고 싶다. 이를 본회퍼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우리는 지금 처한 ‘구체적인’ 상황에 더 잘 적응하고, 그 안에서 ‘책임 있는’ 행동이 어떤 모습인지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나는 우드의 두 번째 글을 뉴스레터 독자를 위한 Trevin's Seven의 링크 목록에 넣었다. 그건 그가 쓴 모든 내용에 동의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지금과 같은 문화적 상황에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게다가 비판을 주로 하는 대화에조차 내가 관심이 많고 마음이 열려 있는 건, 팀 켈러의 영향이다. 나는 팀 켈러 때문에 비판에 열린 사람이 되었다. 나는 우드의 칼럼이 다음 두 부류로부터 공정한 고려와 평가를 받기 바란다. (1) 팀 켈러를 문화에 대한 구식(심지어 ‘비현실적 진보주의자’(closet-progressive)라고까지 부르는!) 접근 방식의 대표자라고 조롱하고 비난하는 사람, 그리고 (2) 팀 켈러를 신성시하고 비판 자체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 켈러의 공적 신학에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은 증오와 두려움 또는 불의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정당화와 방어첫째, 팀 켈러가 수십 년간 사역에서 내내 강조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특히 오로지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는 변화의 능력이다.예수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로 인해 나를 의롭다고 선언하는 진리가 마음에 스며들 때, 우리는 더 이상 비판에 방어적이고 독선적으로 반응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전히 내 성품과 관점에 남아 있는 결점을 다른 누군가가 드러내줄 것을 기대한다. 우리는 남을 업신여기지 않는다. 속물근성에 빠질 때마다, 주님의 용서를 구하고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가기를 기도한다. 만약에 정치적 계산이나 공적인 입장이 다를 수 있는 사람을 조롱하는 켈러의 제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켈러가 강조하는 은혜와 그 능력을 배반하는 것이다. 사역 모델 검토둘째, 모든 사역 모델은 결국 다음 세대 지도자에 의해 검토되고 변경되며 때로는 거부되기도 한다. 켈러는 다양한 사역 모델에 대해 글을 썼고, 다양한 사역 철학에서 드러나는 과잉을 비판했다. 모든 사역 모델에는 강점과 약점이 있으며, 이를 지적하는 데 켈러보다 뛰어난 사람은 없다. 비판이 허용되어서는 안 되는 목회 모델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정치와 문화에 대한 켈러의 접근 방식이 젊은 복음주의자의 비판을 받는다고 해서 놀랄 필요가 없다. 켈러가 가장 경계하는 건, 한 가지가 옳다는 생각에 빠져 다른 모든 것에서 통찰력을 얻으려는 시도 자체를 배제하는 태도이다. 어떤 문제에 관한 자신의 말이 “마지막 결론”이 되어 이 시대에 유일한 믿을 만한 접근방식으로 신성시되는 것을 켈러가 가장 경계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상황화와 사역셋째, 켈러는 상황화의 중요성과 공동체의 필요에 따라 우리의 자세, 접근 방식 및 관행을 조정할 필요성이 있음을 강조한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많은 이가 오해하는데, 상황화는 결코 “사람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사는 사람들이 가진 삶에 대한 질문에 그들이 전혀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성경의 대답을 주는 것이다. 아무리 거부한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와 형태로, 강력한 호소와 논증을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몇 년 전 나는 팀 켈러와 변증론, 교리 교육의 필요성, 문화 변화 및 사역 대응과 같은 주제를 토론하는 그룹에 참여한 적이 있다. 토론 시간이 거의 끝나갈 무렵, 그는 자신의 과거 설교가 오늘 토론 모임에서 하루 종일 다룬 내용에 관한 훌륭한 모델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우리를 놀라게 했다. 다음 세대는 자신과 다른 사역을 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점이 있다. 그렇다고 팀 켈러가 자신이 설교한 방식이 틀렸다고 유감을 표현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그가 의미한 바는 다음과 같다. 다음 세대에 필요한 것은 팀 켈러의 방법이나 접근 방식을 단순히 답습(model)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문화적 상황을 고려하여 우리가 논의한 모든 방식으로 응답하는 설교라는 것이다. 말하자면, 흉내 내지 말고 상황화하라는 것이다!세워야 할 시간넷째, 우리보다 먼저 간 신실한 신앙 선배와 단절되지 않은 상태에서 앞을 내다보고 나아간다면, 젊은 복음주의자는 교회를 잘 섬길 것이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태도는 우리의 작업이 그들의 통찰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들의 작업을 넘어서야 하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지금의 문화적 상황(moment)에 맞지 않는 측면에는 수정까지 가할 수 있어야 한다. 오늘날 대부분 담론이 신학자, 작가, 지도자, 목사 또는 정치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고 무조건 “좋은 쪽” 또는 “나쁜 쪽”이라는 범주에 집어넣는, 한마디로 전부 아니면 전무의 접근 방식으로 이뤄진다. 이러한 환원주의적 접근은 우리를 빈곤하게 만든다. 단지 최신 신학적 입장이나 정치적 제안에 정확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독실하고, 성경에 뿌리를 둔, 게다가 신학적으로 유익한 목사나 신학자를 배제한다면, 우리는 지혜의 길을 거부하는 것이다. 뜨겁게 타오르는 소셜 미디어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다른 사람이 이미 구축한 명성을 허물고 그 위에 자신의 입지를 구축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나는 종종 온라인에서 반대자를 향해 “무지하다” 또는 “사악하다”라며 경멸하는 목사와 신학생을 보면서 큰 실망을 느낀다. 켈러는 이런 식의 조롱을 받는 쪽이었다. 하지만 켈러를 모델로 삼는다는 사람 중에서도 켈러가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를 대우하는 이들이 있다. 이런 식의 전부 아니면 전무라는 접근 방식은 전도뿐 아니라 앞으로 나아갈 길까지 가로막는다.교회의 사계마지막으로, 팀 켈러의 글을 활용해서 우리는 교회가 속한 “계절”에 따라 가장 좋은 정치적 자세가 무엇인지에 관해 다양한 대화를 할 수 있다. 교회의 계절을 설명하는 켈러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겨울: 과거 기독교가 없었던 문화와 교회가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상태를 묘사한다. 교회가 사람들의 관심을 거의 끌지 못한다. 독특하고 활력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과 공동체를 만나기 힘들다. 복음의 열매는 없다. 오늘날 많은 문화권에서 교회는 전쟁에 휘말리고 영적으로 취약하다. • 봄: 과거 기독교가 없었던 문화에서 교회가 곤경에 빠지고 심지어 핍박받기도 했지만, 지금은 성장하고 있는 상황(예: 중국 교회)이다.• 여름: 니버(Niebuhr)가 “동맹 교회”(allied church)로 묘사한 상황이다. 교회는 대중에 의해 높이 평가되고 기독교 문화가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지며, 많은 그리스도인이 문화 생산의 중심지에서 활동한다. • 가을: 오늘날 서구 교회의 상황이다. 탈-기독교 문화에서 교회가 점점 소외되어 가고 있으며, 교회의 독특성을 강화하고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는 상황이다. 그는 이렇게 결론 맺는다. “교회는 우리가 가진 확신과 가장 잘 맞는 모델 속에 거주해야 한다. 그리고 그 확신에 필요한 ‘도구’는 우리의 은사를 정확하게 반영해야 합니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모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면, 그 다음 단계로 문화적 계절과 맥락에 따라 다른 도구까지도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다시 말해, 켈러 자신이 지금 이 순간에도 자신의 은사를 가장 잘 적용하고자 하는 다양한 교회와 개인을 향해 열려 있다.비판에 열린 자세팀 켈러에 대해 내가 가장 높이 평가하는 것 중 하나는 그가 자신과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의 말을 듣는 방식이다. 팟캐스트 Mere Fidelity의 최근 에피소드에서 켈러는 기독교가 결코 이념적 범주에 쉽게 들어맞는 종교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기독교는 중도가 아니라 ‘극단의 결합작품’(patchwork of extremes)이다. 그러나 모든 문제에 대한 “제3의 길”을 찾는 것은, 켈러의 잦은 경우처럼, 신학만큼이나 변덕스러운 모두와 평화하고 싶은 충동에서 비롯된다. “내가 가끔은 좀 과하다”고 켈러는 스스로 인정했다.하나님이 많은 사역 모델과 많은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 일하신다는 것을 깨닫는 자기 인식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한 확신,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확고한 믿음, 그리고 사역의 열매는 말씀에 충실한 설교를 통해 일하시는 성령님께 달려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다. 향후 50년 팀 켈러의 방법과 모델 중 무엇이 살아남더라도, 그가 지향한 개방성과 호기심이라는 특성만은 점점 더 부각되기를 나는 간절히 기도한다. 원제: Let’s Contextualize Tim Kell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팀켈러
제3의길
비판을대하는자세
상황화
문화전쟁
세속화
사역모델
열린자세
기독교의미래
교회의사계
죽은 제3의 길, 살아 있는 제3의 길
by Chris Watkin
2022-06-04
“제3의 길”(the third-way)이 무엇일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나는 전혀 몰랐는데, 얼마 전 “제3의 길-주의”(the third-wayism)이라는 용어가 특정 기독교 사역, 특히 팀 켈러를 비판할 때 사용된다는 것을 알았다.[1] 내가 대충 이해한 바로, 이 말은 지금 사회에 만연한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양자 대결 구도의 정치적 또는 문화적 대안을 거부하고 제3의 다른 접근 방식을 추구하는 입장을 말한다. 그게 뭔지 알지도 못하는 데 나는 제3의 길을 추구한다고 비난을 받은 사람이다. 그런 경험이 있기에 나는 특히 더 다른 이의 비판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제3의 길에 대한 비판에는 일면 귀를 기울일 요소도 있지만, 한편으로 많은 오해와 모순, 순진한 발상들로 가득하기도 하다. 제3의 길이 무엇인지와 더불어 무엇이 아닌지를, 그리고 각종 비판에도 불구하고 왜 그 길이 각종 논쟁에 대한 건전하고 성경적인 접근 방식이라고 내가 생각하는지에 관해서 네 가지 요점을 (또는 권고를) 가지고 설명하겠다. 1. 제3의 길 주의라고 모든 게 다 같지는 않다 제3의 길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은 점부터 이야기하자. 이 비판에서는 크게 두 가지가 주로 제기된다. 첫째, 항상 중간을 추구하는 제3의 길은 진리가 서로 반대하는 양쪽 진영 사이 어딘가에서 발견된다고 가정하기에 모든 정치적 또는 문화적 불일치에 관한 토론에서 양쪽 모두를 동일하게 취급할 수밖에 없다는 비판이다. 그러나 “절충하는” 접근 방식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중용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지 성경과는 거리가 멀다. 중용과 달리 성경은 분명한 대립(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빌 2:12-13)을 이야기한다. 정통과 이단은 신경 쓰지 않고 양측의 차이만 좁혀 가면 된다는 생각은 단지 잘못된 문화적 참여로 끝나는 게 아니라 아예 배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제3의 길은 이런 식으로 조잡하게 절충하자는 게 아니다. 제3의 길의 사고방식은 기존의 이념들 사이에 어색하게 끼어들기보다는 성경을 기준으로 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모든 주제에 관해서 할 이야기를 제대로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다. 성경이 있는 그대로 그 의미를 드러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될 때에야 우리는 비로소 성경과 함께 세속적인 이데올로기와 의미 있는 대화를 가질 수 있다. 제3의 길에 관해 확인된 두 번째 비판은 스스로 한 수 위라고 생각하며 기존의 모든 입장을 거부하고, 모든 논쟁과 싸움을 초월해 자기네는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것처럼 신선놀음을 하다 보니 이웃 사랑을 단지 성결의 문제로 축소시키기까지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어떤 입장도 절대적으로 지지하지는 않고 대신 모든 입장을 다 깔보는 게 제3의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비판이 사실이라면, 제3의 길은 비난받아 마땅하지만, 이런 식의 조잡한 풍자화는 팀 켈러와 같은 사상가가 펼쳐가는 사역의 전부도 또 실체도 아니다. 위조지폐가 있다고 해서 모든 돈을 다 금지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종종 엉터리 제3의 길이 있다 해서 모든 “제3의 길-주의”를 거부해서도 안 된다. 2. 근대성은 이원론에 의해 체계화된다더 나은 성경적 제3의 길에 관한 사례를 구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에서 시작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현대 서구 문화가 선천적으로 이원론에 취약하다는 것이다. • 기호와 사물; 주체와 대상;• 미신과 계몽;• 타율성과 자율성;• 편견과 자유사상;• 전통과 현대.목록은 더 이어질 수 있다. 우리는 정치와 국제 관계에서도 다음과 같은 이원론의 지배를 받는다.• 제1세계와 제3세계;• 정복자와 피지배자;• 압제자와 피해자;•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 구호 받을 자격이 있는 빈민과 구호 받을 자격이 없는 게으른 빈민.이 같은 패턴에 따라 미국, 영국, 호주 정치는 좋든 싫든 두 개의 주요 정당이 지배하고 있다.그러나 이러한 이원론 중 그 어느 것도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무엇을 알 수 있고 또 어떻게 번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성경 말씀의 풍부함과 복잡성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다. 근대성이 가져온 이원론은 종종 해를 입히고 폭력적이다. 그런 이원론을 거부하는 건 우유부단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기존의 이거 아니면 저거라는 선택지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하기보다는 성경이 뭐라고 말하는지 한번 들어 보자는 것이다. 3. 제3의 길은 첫 번째 길이다이와 관련하여 기억해야 할 점은 성경이 현대의 세속 문화가 제시하는 이원론에 단순히 반응하는 수준에서 사후약방문식으로 세 번째 대안을 내놓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제3의 길”이라는 용어에는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현대의 이원론은 훨씬 더 복잡한 성경적 실재를 축소시킬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 왜곡한다. 하나님의 성품에서 발견하는 공의와 자비가 드러나는 사례를 들어 보자. 하나님은 공의로우신가? 끝까지 그러하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신가? 주를 찬양하라. 그러하시다. 그의 크신 긍휼로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살리셨다. 사도 요한이 간결하게 표현한 것처럼, 하나님은 반은 공의이고 반은 은혜가 아니라, “은혜와 진리가 충만”(요 1:14)하시다. G. K. 체스터턴은 성경이 말하는 급진적인 “제3의 길”을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우리는 두 개의 합성이나 타협을 원하지 않고 절정에 이른 그 두 가지를 모두 원한다는 것, 말하자면, 사랑과 분노가 모두 붙타는 상태를 원한다. … 이 조합의 아이디어가 지정 정통신학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독자에게 상기시킬 필요는 없을 것이다. 정통신학은 그리스도가 요정처럼 하나님과 사람으로부터 동떨어진 존재가 아닐 뿐더러, 켄다우로스처럼 반쪽은 인간, 반쪽은 동물의 존재도 아니고, 100퍼센트 사람인 동시에 100퍼센트 하나님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2]두 가지 다 에너지의 정점에 있다.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이다! 그러나 우리 문화에서 하나님의 속성이 어떻게 갈라지고, 그 결과 같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조차 어떤 분열을 일으키는지 한번 살펴보라. 하나는 자비와 이해에 바탕을 둔 형벌 제도이고 또 하나는 정의와 형벌에 기반을 둔 형벌 제도이다. 우리가 정의와 자비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추구한다면, 그건 오늘날 서로 다른 현대 주장의 차이를 줄이자는 게 아니다. 도리어 풍부하기 이를 데 없는 성경의 그림을 현대의 세속적 모델이 쪼개서 왜곡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수많은 이단처럼,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낼 능력이 없는 그들은 진리의 일부를 취하여 마치 전체 진리인 양 만들어낼 뿐이다. 하나님의 성품 속 풍부한 복잡성은 제3의 길이 아니라 첫 번째(창 1:1)이며, 이런 하나님의 길을 공개 담론에서 제기하는 것은 새로운 제3의 길을 개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이데올로기가 잘못된 방향으로 떨어져 나온 원래의 첫 번째 길로 돌아가자고 주장하는 것이다. 4. 신학은 정치와 다르다이런 저런 세속적 이데올로기 문제에서 성경을 직접 적용하지 않는 모습을 책임의 포기, 즉 중요한 사회적 또는 정치적 문제에서 분명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이것은 신학과 정치를 혼동하는 것이다. 신학적 참여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성경의 복잡한 진리, 그러니까 창조, 타락, 구속, 완성에 대한 포괄적인 이야기와 그에 관한 모든 세부 사항이 현대의 존재론과 인식론, 그리고 정치가 만들어내는 각종 범주 및 구조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가? 그러나 정치적 현실이 다루는 질문은 전혀 다르다. 이런 것이 가장 큰 질문이다. 다음 선거에서 누구에게 투표할까?신학적 측면에서 먼저 생각하면, 하나님과 인류와 사회와 세계에 대한 실로 완전한 관점을 제시하는 성경의 가르침을 제대로 반영한 정당은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여전히 한 정당에 투표하고 또 심지어는 선거 운동까지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나의 정치적 비전과 용어는 결코 그 정당의 의제에 포함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또한 나는 그 정당이 성경에 반대되는 입장을 취할 때 지적하는 것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성경을 단지 제3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해서 내가 정치적으로 열정적이 되는 것을 막을 수는 없다. 오히려 내가 누구누구의 정치적 푸들로 전락하는 것을 막아 줄 것이다. 권고: 단지 한두 사람의 글에 제자훈련 또는 사역을 걸지 말라이 글에 나온 비난은 주로 팀 켈러의 사역에 대한 것이다. 켈러는 스스로 인정했다시피 일종의 화해자이다. 진짜 논쟁을 즐기는 사역자들은 따로 있다. 그러나 괜찮다. 어차피 교회는 다양성을 필요로 한다. 21세기에 “나는 켈러를 따른다”라고 해서 1세기에 있었던 “나는 아볼로를 따른다”나 “나는 게바를 따른다”보다 사정이 더 나아진 것은 아니다. 팀 켈러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대로 일하는 일꾼”(고전 3:5)의 한 사람일 뿐이다. 누구라도 그 사람의 사역이 이룬 성공 또는 문화적 통찰을 유일한 길로 취급한다면, 그 잘못은 그 사람이 아니라 맹목적으로 따르는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팀 켈러의 독서는 광범위하고 다종다양하다. 그는 단지 한 사상가나 한 패러다임을 따르지 않는다. 그러니까 팀 켈러 또는 다른 사람과 관련해서도 이원론에 빠지지 말자. 하나님의 은혜로 그는 내가 기독교적 성장과 이해력을 키우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렇기에 나는 이제 ‘켈러주의자’(Kellerist)가 되지 않음으로써 그의 모범을 따르겠다고 결심한다. 그리고 이게 “제3의 길”이라면, 나는 기꺼이 거기에 등록하겠다. [주]1. 가장 최근의 예는 다음과 같다. James R. Wood, “How I evolved on Tim Keller,” First Things, 5/6/22. https://www.firstthings.com/web-exclusives/2022/05/how-i-evolved-on-tim-keller일찍이 제3의 길은 논한 글은 다음 글을 보라. Chad Hall, “Third Way Faith,” Christianity Today, 10 October 2008. https://www.christianitytoday.com/pastors/2008/october-online-only/third-way-faith.html.2. Chesterton, Orthodoxy, 296. [역주: G.K.체스터턴의 정통(아바서원), 208쪽에서 인용]원제: The Third Way is Dead. Long Live the Third W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제3의길
팀켈러
중용
근대성의특징
이원론
G.K.체스터튼
스마트폰은 아이들의 창의성을 어떻게 가로막는가?
by Trevin Wax
2022-05-19
17년째 찾지 못하고 있다.이따금 부모님 댁에 갈 때면 온 다락방을 어지럽게 뒤져 보고 서랍 여기저기를 열어 봤다. 오래된 비디오테이프 하나를 찾기 위해서였다. 8편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진 시트콤이 담겨 있는 테이프였다. 내 형제들과 교회 친구 몇몇의 도움을 받아 직접 각본을 짜고 촬영한 것이었다.25년 전 일이다. 우리는 내 방 절반을 거실처럼 꾸며 놓고 드라마를 찍었다. 대본을 써서 서로 나누고 주제곡을 녹음했다. 관객 웃음소리까지 삽입했다. 그동안 옛날 라디오 시트콤을 따라 라디오 드라마 여러 편을 녹음했던 터라, “더 룸”(The Room)은 우리의 첫 작품은 아니었지만 다년간 기른 우리의 창의력이 절정을 이룬 작품이었다고 할 수 있다.어린 시절의 창의성내가 녹음이란 것을 처음 시작한 건 12살 때였다. 해를 거듭할수록 장비가 더 좋아졌다. 처음에는 큼직한 스피커 두 대와 테이프 하나를 넣을 수 있는 휴대용 라디오로 시작해서, 이후에는 재생과 녹음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카세트 데크를 사용했다.녹음을 시작하고 2년 동안 옆집에 살던 존과 함께 나는 ‘트레빈과 존의 쇼’라는 타이틀로 100편이 넘는 에피소드를 녹음했다. 남동생 허버트를 주연으로 한 스핀오프도 찍었다. (동생은 높은 톤의 목소리로 스티브 얼 커 같은 사랑스러운 괴짜 캐릭터를 연기했다.)한번은 홀로 아이들을 키우는 젊은 과부 역할에 여동생을 섭외하여 작품을 만든 적도 있다. (작품 제목은 ‘사람들은 켈리를 좋아해’였다.) ‘트레빈 쇼’는 40편이 넘는 에피소드를 녹음하여 두 개의 시즌으로 내보냈는데, 이야기가 길어진 만큼 많은 인물의 변화를 그려내야 했다. 결국 부모님과 형제, 사촌, 교회 친구들까지도 목소리 배우로 투입해야 했다. 이들의 연기는 대본과 상관없이 흘러갈 때도 많았다. 14살쯤 되었을 때 이제 “토크 라디오”(talk radio)로 발전했다. 어느 오만한 영국인(“제트 데이비스”)이 1990년대 중반에 일어난 정치 사건들을 거들먹거리며 이야기하는 내용이었는데, 내 동생에게 그 영국인 역을 맡겼다. 그러나 역시 내 최고의 작품은 ‘더 룸’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비디오의 세계에 진입했다!드디어 찾다10월 어느 날 할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영영 잃어버렸다고 생각했던 그 비디오테이프를 찾았다. 당장에 필요한 장비를 사들여 비디오테이프를 디지털 파일로 변환했다. 그리고 일주일 후에 복원한 영상 앞에 온 가족이 둘러앉았다. 형제들과 어린 조카들은 어린 시절 우리의 창의성을 엿보는 재미에 흠뻑 빠져들었다.몇 년이 지나 보게 된 이 영상이 음질이나 화질 면에서 좋을 리가 없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일 우리가 어렸을 때 아이폰을 사용할 수 있었더라면 얼마나 더 많은 걸 할 수 있었을까. 하지만 우리가 열다섯 살이던 그때는 스마트폰이라는 혁신의 혜택을 누릴 수 있기 전이었다.그러고 나서 나는 다시 생각했다. 아이폰을 가지고 있었다면 애초에 이런 드라마를 만들 생각조차 안 하지 않았을까. 그때에도 이미 내 친구들 거의 다 슈퍼 닌텐도나 닌텐도 64를 하느라 바빴다. 대본을 쓰고 드라마 녹음을 한다거나 캐릭터를 만들고 이야기를 짜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우리 가족도 비 오는 날이면 비디오 게임을 하곤 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시간은 (특히 여름에는 더욱) 야외 활동을 하면서 보냈고, 그렇지 않더라도 뭔가 창의적인 활동을 찾아서 하려고 했다.어린 시절의 창의성을 잃는다?오늘날 스마트폰은 과거보다 아이들이 창의성을 더 많이 발휘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준 것 같다. 그렇다면 그만큼의 창의적인 결과물 또한 만들어 내고 있는가? 가끔은 그렇다.우리 아이가 마인크래프트에서 만들어내는 세상은 경탄을 자아낸다. 슈퍼마리오 메이커에 아이가 직접 만든 스테이지는 또 어떤가? 나도 이걸 하면 얼마나 재미있는지 모른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마트폰이 우리 다음 세대의 창의력을 야금야금 갉아 먹고 있는 것 같다. 마트에 가면 쇼핑 카트 안에서 주변은 의식하지 않은 채 오로지 아이패드에만 푹 빠져 있는 어린아이들을 지나치게 된다. 혹시 다음에 정지선에 서게 되면 주위의 차 안을 한번 살펴보라. 아이고 어른이고 청소년이고 너나할 것 없이 들고 있는 기기에서 나오는 미세한 빛이 그 얼굴을 비추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말 심각하게도 운전하면서 문자를 하는 사람도 있다.물론 우리는 기술이 가져다준 모든 혜택에 감사해야 한다. 오늘날 기기들의 성능은 정말 놀라움의 연속이다.그러나 혹 스마트폰의 사용이 창의성 계발의 도구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상상력 발달을 가로막는 것이라면 어떨까? 작은 아이폰 화면 안에서 모든 것이 가능한 세계가 펼쳐지고 있으니 우리 주변의 실제 세계에는 무신경해지거나 우리 자신이 가진 창의성의 깊이를 탐색해 보려는 시도와는 점점 멀어진다면? 우리 다음 세대도 마당에서 상상의 요새를 만드는 즐거움을 알 수 있을까? 폭풍우 친 다음 날 물이 차오른 계곡을 누비는 스릴을 알 수 있을까? 전쟁과 성곽, 왕의 통치 기록까지 완벽하게 갖춘 자기 마음대로 만든 왕국 이야기를 가질 수 있을까?창의성은 사라진 것이 아니다. 재치 있는 틱톡을 보거나 재미와 교훈을 주는 인스타그램을 보라. 얼마나 창의적인지 모른다. 이런 콘텐츠를 만들고 소비하는 일이 지금보다 수월했던 때는 없다.다만 스마트폰이 이전보다 우리가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 주긴 하지만 이런 문화 환경이 오히려 우리의 창의성을 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문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지루한 순간에는 다들 어김없이 휴대폰을 들기 때문이다. 혹시 우리는 토디 헨리(Toddy Henry)가 ‘여백’(negative space)이라고 부른 공간을 없애고 있지는 않은가?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활동적인 순간들 사이사이의 시간은 아이디어와 통찰력이 형성되고 보이지 않는 정신의 세계가 서로 연결되는 때이다. 당신의 삶에서 무력감과 집중력 저하가 지속되고 해야 할 일을 놓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면, 당신은 인생에서 중요한 것, 곧 느린 속도감과 여백이 주는 유익을 놓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없다고 생각되는 것이 있다고 생각되는 것보다 당신의 삶에 훨씬 더 많은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지루함은 문제가 아니다. 창의성이 발현될 수 있는 조건이다.얼마나 많은 잠재력 있는 작가들이 모험 이야기에는 손을 대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재능 있는 뮤지션들이 더는 새로운 멜로디를 만들기 위해 키보드에 앉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유능한 건축가들이 요새나 나무로 된 집을 더는 만들지 않게 될까?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주변의 세계를 관찰 한번 해보지 않고 성인이 될까? 요즘 아이들은 손에 들린 작은 스크린의 세계에 빠져 있으니 말이다.세상이 기대하고 있는 예술의 탄생, 다음 세대의 정신 건강과 감정 건강, 그리고 아이들의 어린 시절을 즐겁게 해 줄 재미 가득한 상상력을 지켜 주려면, 부모들이여, 부디 아이들의 휴대폰 사용을 제한하기를 바란다.그렇게 하면, 여러분의 자녀도 나중에는 여러분에게 감사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어린 시절의 창의성이 맺은 열매를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는 함께 오래도록 만끽하게 될 것이다.원제: How Smartphones Stifle Childhood Creativit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드라마
어린시절
창의성
스마트폰사용제한
창의성을앗아가는문화적환경
무력감과집중력저하
창의력이발현될수있는조건
4050세대를 위한 복음을 찾아서
by 김선일
2022-05-14
“4050세대, 영적으로 안녕한가?”와 논제가 이어지는 글입니다. 이야기들 A(40대 남)는 5년 전부터 교회를 다니고 있지만 설교를 들을 때마다 몇 번 씩 마음에 부대낌을 느꼈다. 기독교 집안에서 자란 아내가 아이들 양육에 교회만큼 좋은 데가 없다며 권유하는데 남편이자 아버지로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처음에는 제법 규모가 있는 교회를 다녔지만, 담임목사가 기업의 오너 같고 아무나 만날 수 없는 “신적인 존재”처럼 보여 한동안 나가지 않았다고 한다. 이사를 하면서 옮긴 교회는 다행히 교회의 철학과 목사의 메시지가 만족스러웠다. 하지만 그는 이따금 공공연하게 정치 집회를 하는 목사들과 그런 목사들을 옹호하는 교인들을 볼 때면 굉장한 거부감을 느끼며 신앙생활을 지속해야 할지 갈등을 겪곤 한다. 모태신앙인 B(50대 여)씨는 평생 열심히 즐겁게 교회생활을 해 왔다. 가족 중에 목회자들도 있어서 교회와 목사들의 세계에도 익숙하다. 그런데 그 역시 언제부터인가 편향된 정치 메시지가 늘어나는 설교 시간이 고역이 되었다. 정치적인 발언이 계속 강단에서 흘러나오자 견디기 힘들어진 B는 10년이나 다닌 교회를 뛰쳐나왔다. 그렇다고 그가 자신과 같은 정치적 입장의 설교를 듣고 싶다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담백하게 성경본문에 충실한 말씀을 듣고 싶었다. 그는 또한 종종 교회에서 경험한 불합리한 일처리나 은혜로 문제를 덮는 방식도 불편했다. 세상에서 상식과 정의의 기준은 갈수록 높아지는데 교회는 여전히 현실과 담쌓고 사는 것 같아 그로서는 매우 실망스러웠다. C(40대 여)는 아이 둘을 키우는 엄마다.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을 위해서 입시 위주의 교육보다는 지역공동체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는 생태 교육이나 독서교육에 아이들과 함께 참여한다. C는 종교적 배경이 전혀 없기 때문에 기독교는 매우 낯설고, 종종 배타적이라는 인상을 갖고 있다. 그러다가 공동체 운동에서 몇몇 그리스도인들과 어울리게 됐는데, 그들이 자신과 같은 교육관과 사회적 책임감을 갖고 있어서 말이 통한다고 느꼈다. 하루는 인근 사찰로 문화유산 탐방을 가보자는 조심스러운 제안에 그들이 흔쾌히 응하는 것을 보고 신선한 충격을 받았다. TV에서 보던 불상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는 과격한 교인의 모습이 전부가 아님을 알았다. 그 후로 교회에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지역공동체 운동에 참여하는 목사의 교회에 조심스럽게 출석하기 시작했다.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재직 중인 D(가명 50대 남)는 불교 집안에서 자랐다. 80년대 학번으로 대학 시절 사회과학 서적을 탐독한 까닭에 기독교는 가진 자의 종교라는 인식이 강했다. 어쩌다보니 그리스도인 배우자를 만나긴 했지만 교회와는 여전히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 40대에 이르러 (친구인 필자의 권유도 듣고) 가족과 함께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하루는 필자에게 딸이 교회에서 특송하는 동영상도 보내주며 훈훈한 대화도 나눴다. 그런데 얼마 전 통화에서 D는 이제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고 했다. 코로나로 인해 현장 출석을 못하기도 했고, 성인이 된 자녀들과 가족이 함께 교회에 가는 즐거움도 희석됐다. 더 중요한 점은 신앙생활을 해야 할 뚜렷한 동기를 못 찾겠다는 것이다. 몸도 마음도 갱년기에 접어들고 후반 인생도 준비해야 하는데 내 인생의 치열한 고민에 무심한 교회는 별로 재미가 없다고 한다. 위의 사례들이 4050세대 전체를 대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의 경험과 판단이 전부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이들이 교회에 대해 갖는 실망과 불편함이 동일하진 않다. 사회적 문제에 대한 인식이나 정치적 성향도 조금씩 달랐다. 중요한 점은 이들 모두 교회 언저리를 오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 언저리 밖으로 떨어져 나갔거나, 혹은 언저리에서 고민하거나, 아니면 조심스럽게 교회 언저리 안으로 들어오는 이도 있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혹은 느꼈던) 교회에 대한 불편함도 최근 조사에서 나타난 대로 교회의 배타성과 물질주의, 이기주의와 관련되어 있다. 또한 교회에게 기대하는 바도 약자를 도우며 사회에 모범이 되어 달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은 늘 제기돼 왔기 때문에 아주 새로운 사실은 아니다. 다만, 4050 세대의 비종교화와 교회에 대한 실망이 최근 코로나 팬데믹 상황과 대선을 거치며 더욱 두드러진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공의 복음한국 사회의 허리인 4050세대는 생산성과 소비여력뿐 아니라 사회정의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유연성도 매우 높다. 우리 사회가 절차적으로 민주화되어가는 흐름 속에서 성장한 이들은 공공성의 진보에 민감하다. 또한 경제 성장기를 경험했기에 안정적인 삶을 희구하는 중산층 라이프스타일에도 익숙하다. 이러한 두 가지 특성에서 필자는 4050세대와 소통하는 ‘공공의 복음’과 ‘일상의 복음’을 구상해 본다.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소식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하나님 나라 선포는 온 세상을 향한 좋은 소식이다. 그의 몸 된 교회 또한 존재하는 방식이 좋은 소식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교회가 전하고 말과 행동으로 보여주는 삶이 우리 사회의 공공적 과제에 좋은 소식이었는가? 한편으로 교회가 우리 사회의 공적 과제들에 전혀 무심하지 않았다는 항변에도 일리는 있다. 실제로 많은 교회들에서 예배 시간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며, 가난하고 약한 이웃을 위한 구제도 강조한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사회봉사 관련 업무에 종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교회가 공공선에 기여하는 이미지를 구축하지 못했다. 이는 비단 이미지 메이킹의 문제가 아니라, 진정성의 문제로 귀결된다. 필자의 친구인 50대 남성은 교회가 보여주기 행사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했다. 또한 4050은 아니지만 최근에 회심했던 한 20대 남성은 교회의 구제는 그들만의 홍보를 위한 자기만족적 활동으로 보였다고 한다. 선한 의도에서 실천을 한 이들에게는 억울한 소리겠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느껴진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벤트성으로 보이는 그러한 구제 활동을 보면서, 복음으로부터 비롯되어야 마땅한 인간에 대한 예의와 배려가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공공의 복음은 중요하지만 교회가 사회봉사를 더 많이 하는 것이 진정한 대안이 될지는 의문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사회적 봉사 활동은 반사체이기 때문이다. 더욱 근본적인 발광체는 복음으로 인해서 변화된 성품의 공동체일 것이다. 교회가 복음에 기초한 온유와 겸손의 성품을 형성하는 공동체가 되지 못하면 교회의 모든 선한 실천과 노력들도 가려지는 일식 현상이 일어날 뿐이다. 미국의 조사이긴 하지만, 사람들이 기독교에 가장 수용적이 되는 경우는 그리스도인들이 타인을 배려하고 돕는 모습을 볼 때라고 한다(Rick Richardson, You Found Me, IVP, 2019: 185). 이는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 교회 안의 습속을 재형성하는 차원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속죄가 우리의 성품과 가치를 더욱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복음의 깊은 과제인 것이다. 일상의 복음그 다음으로 4050세대의 상황에 더욱 실제적으로 다가가는 것은 일상의 복음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는 4050세대가 우리 사회에서 처음으로 집단적 중산층을 형성했던 세대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지속하기 위해서 이들은 매우 현실적이며, 또 합리적인 생활방식을 추구한다. 일과 가정, 인간관계, 그리고 돈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고 있다. 물론 이러한 가치들은 개인주의와 소비주의로 변질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교회는 지속적으로 이를 경계하고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안정적으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하고 무슨 일을 하며 살아야 의미가 있을지, 배우자 및 자녀들과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하고 다른 이들과 어떻게 건강한 관계를 맺고 지내야 할지와 같은 일상의 문제에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하는 중년의 과제들은 치열한 가치관의 전투가 벌어지는 현장이다. 이러한 일상의 문제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우리를 어떠한 선택으로 안내하는가? 종종 ‘오직 복음’이나 ‘본질’을 부르짖는 소리들이 공허하게 들리는 이유는 일상의 구체적인 문제와 복음이 연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산만하고 불안하여 공부도 게을리 하는 아이를 둔 부모를 위한 복음은 무엇인가? 아이에게 구원의 확신을 심어 주고, 성경읽기와 기도하기를 강요하면 아이의 삶이 복음적으로 변화가 될까? 이러한 종교적 형식만을 (혹은 경건의 모양만을) 강조하는 것이야말로 실속 없는 본질환원주의다. 복음은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관계,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낸다. 먼저 부모는 하나님께 맡기신 양육의 사명을 개인적 욕망이나 무관심으로 소홀히 하지 않았는지 돌아봐야 한다. 그리고 아이가 부모를 통해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있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자신은 사랑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에게는 폭력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 다음, 아이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부르심에 응답하는 삶을 살 수 있도록 부모는 아이의 성향과 은사를 발견해서 사랑과 책임으로 양육하며, 발달 단계에 맞는 적절하고 일관된 훈육도 제공해야 한다. 복음적인 공동체의 조언과 지원도 받을 수 있다면 더욱 좋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자녀양육만이 아니다. 일, 관계, 문화 등에서 복음은 적용되어야 한다. 지금 우리의 교회는 복음과 복음의 능력을 일상에서 경험하고 공유하는 공동체인가? 복음은 우리 삶과 연결되어야 들린다. 복음은 유일하지만, 사람들의 실존적 상황에서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만큼 복음은 풍성하고 깊이 있다. 앞에서 소개한 4050세대의 사람들은 비록 교회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지만 그들의 일상을 위한 복음을 듣고 싶어 한다. 복음이 그들의 실제적 삶에 어떠한 의미를 주는지 궁금해 한다. 교회 배경이 없던 40대 여성 C는 차를 타고 가다 한 교회 건물에 부착된 현수막의 “해석되어야 해결됩니다”라는 짧은 문구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다고 한다. 어쩌면 그는 같은 문구를 무심하게 지나쳤던 필자에 비해서 인생의 의미에 관한 영적 의미를 더욱 진지하게 찾고 있는지 모른다. 복음이 우리의 삶을 해석하고 변화시키는 그 메시지를 연구하고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롬 10:14)
4050세대
비종교화
탈종교화
탈교회
복음과삶
일상의복음
공공의복음
복음의공공성
4050세대, 영적으로 안녕한가?
by 김선일
2022-05-07
최근 조사에서 한국 교회의 호감도가 천주교와 불교에 비해서 현저히 낮게 나온 결과가 적잖이 충격을 주고 있다. 국민일보와 코디연구소가 지앤컴리서치에 의뢰해서 발표한 기독교의 대국민 이미지 조사의 종교별 호감도에서 개신교는 25.3퍼센트로 천주교(65.4%)나 불교(66.3%)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종교별 이미지에서도 천주교는 진정성, 헌신, 희생 등의 이미지가 중심을 이루고, 불교는 상생이나 포용 등을 떠오르게 하지만, 개신교는 배타적, 물질적, 위선적이라는 이미지가 주로 나타났다. 대략 예상은 했지만 막상 통계 수치로 나오니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오랫동안 매번 제기돼 왔던 한국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문제는 여전히 해소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부정적 이미지는 최근 코로나와 대선을 거치면서 더욱 심화된 모습을 보인다. 사진 제공: 지앤컴리서치 그런데 이번 지앤컴 조사뿐 아니라 지난해 발표된 한국갤럽의 한국 종교에 관한 조사에서도 필자가 공히 주목하는 지표는 연령대별 응답, 특히 40대와 50대의 종교성이다. 지앤컴 조사에서 주목해야 할 세부 지표는 연령대별 응답 양상이다. ‘한국 기독교를 신뢰하지 않는다’는 응답은 40대 79.8퍼센트, 50대 80.4퍼센트로, 60세 이상의 69.9퍼센트보다 훨씬 높았고, 20대의 77.1퍼센트보다도 높게 나왔다. 이러한 부정적 인식은 코로나 전후 호감도에서도 같은 패턴을 보인다. 40대와 50대는 “나빠졌다”는 응답이 각각 60.2퍼센트와 59.7%퍼센트로, 마찬가지로 60세 이상의 38.6퍼센트, 20대의 54.5퍼센트보다 높다. 특히 지난 3월 대선 전후로 교회에 대한 호감도가 나빠졌다는 응답에서도 40대는 33.2퍼센트, 50대는 32.3퍼센트로 다른 연령대(20대 15%, 30대 26.6%, 60세 이상 17.9%)에 비해서 두드러지게 부정적이다. 이러한 결과를 보면 기독교에 대한 이미지에서는 2030세대에 비해 4050세대가 더욱 부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최근 더욱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30대는 코로나 이후 교회에 대한 호감도에서는 40~50대와 동조하는 반면, 대선 이후 호감도에서는 20대와 40~50대 중간에 있다.) 2021년 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현황에 대한 보고서’에서도 40대와 50대의 비종교화 현상이 눈에 띄게 나타났다. 이 조사 결과가 발표된 당시 20대의 비종교화가 중점적으로 보도되었으나, 세부 지표를 보면 오히려 그에 못지않게 40대와 50대의 ‘종교 이탈율’은 심각했다. 한국의 전체 종교인 비율은 2014년 50퍼센트에서 2021년 40퍼센트로 10퍼센트포인트나 하락했다. 그 가운데 20대에서 종교를 믿는 인구의 비율은 22퍼센트이고, 나머지 78퍼센트가 비종교인으로서 다른 연령대를 압도한다. 따라서 20대의 비종교화가 눈에 띄는 것은 당연하다. (30대의 종교인 비율은 30퍼센트, 40대는 32퍼센트, 50대는 43퍼센트, 60세 이상은 59퍼센트이다.) 여기서 종교인 수치만 보면 40대와 50대는 20대보다 꽤 큰 차이로 높기 때문에 여전히 종교 친화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2014년도의 결과와 비교하면 양상이 달라진다. ‘종교 이탈율’ 최고는 4050세대20대의 종교인 비율은 2014년의 31퍼센트에서 2021년 22퍼센트로 9퍼센트포인트가 하락했고, 30대는 38퍼센트에서 30퍼센트로 8퍼센트포인트가 하락했다. 반면, 40대는 2014년 51퍼센트에서 32퍼센트로 무려 19퍼센트포인트나, 50대도 60퍼센트에서 43퍼센트로 17퍼센트포인트가 하락함으로 20~30대와 격차를 보였다. 60대는 68퍼센트에서 59퍼센트로 9퍼센트포인트로 떨어졌으니 상대적으로 하락폭은 덜하다. 다시 말해, 전체적으로 비종교화가 진행되고 있지만 그 가운데 종교 이탈율이 가장 높은 연령대는 40대와 50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동일 세대에서의 ‘비종교’ 인구 비율은 20대와 30대가 가장 높지만, ‘탈종교’ 인구 비율은 40대와 50대가 더욱 높다. 2014년 조사에서는 과반수이상이 종교 인구였던 40대와 50대의 탈종교화가 가속되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비종교인의 과거 신앙 경험을 묻는 질문에서도 1984년 이후 조사 때마다 개신교 이탈자가 가장 많다고 하니, 종교 이탈자가 기독교에서 덜 나왔을 개연성도 없다. 이러한 양상은 이번 지앤컴 조사에서 나타난 한국 교회에 대한 4050세대의 부정적 인식 상승과도 유사해 보인다. 이 두 조사에서 나타난 4050대의 탈종교화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를 고려할 때, 이들이야말로 최소한 복음 사역의 측면에서 한국 교회가 각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대상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해 다음세대 선교에 대한 긴박감은 자주 고취되는데 비해, 현재 한국 사회를 지탱하는 허리이자 인구 비중도 가장 높은 4050세대는 의외로 선교적으로나 목회적으로 소외되지 않았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중년 세대라고도 통칭될 수 있는 이들은 어느 정도 사회적, 재정적 안정을 이루며 교회 활동과 봉사에서도 가장 많은 기여를 하리라는 기대를 받곤 했다. 과거에 목회자들끼리 ‘개척교회는 40-50대 집사 다섯만 핵심 멤버로 있으면 지속가능하다’는 경험칙을 농담으로 나누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그처럼 회중의 ‘기둥’과 같던 이들의 신앙생활이 수동적이 되고, 심지어 교회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흐름이 발생한 것은 아닐까? 사실 생애 여정에서 40대와 50대는 종교로 회귀할 가능성이 높아지는 시기여야 한다. 젊을 때는 한창 인생의 목표를 위해서 바쁘게 살아가며, 개인주의적이고 쾌락주의적인 문화의 유혹도 넘쳐나는 시기여서 전통적인 교회오빠, 교회누나들 외에는 대체로 종교생활과 무관하게 지내곤 한다. 그러나 결혼해서 아이들을 낳아 가정을 이루고, 사회와 직장에서의 책임감은 더욱 무거워지며 건강에도 이상신호가 켜지는 중년의 위기는 종교에 대한 관심과 의존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킨다. 미국에서 1980년대 중반 이후 복음주의의 르네상스를 일으킨 ‘구도자 교회’ 열풍도 그 시기에 중년이 된 베이비부머 세대가 교회로 귀환한 데 힘입은 바 크다. 미국의 베이비부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46년부터 피임약이 승인되기 전인 1962년까지 태어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은 젊은 시절에 1960년대의 자유 민권운동과 대중문화의 폭발적 성장을 경험했다. 높은 사회적, 문화적 의식을 갖춘 그들은 성인이 되어 사회의식과 문화적 감각이 부재한 교회와는 거리를 두었다. 그러나 교회를 떠난 이들이 1980년대 중반부터 중년에 이르러 외로움, 중독, 자녀 및 배우자와의 관계, 인생의 의미 등을 놓고 고민하게 되었고, 이들의 필요에 구도자 교회들이 응답하면서 미국의 종교지형에 변화를 일으켰다. 인생의 더 깊은 의미와 새로운 관계에 대한 필요가 비단 서구인뿐 아니라 도시 문명과 개인주의 사회의 중년 세대에게 보편적으로 일어나고, 이것이 사회학자 웨이드 클락 루프(Wade Clark Roof)의 표현대로 종교, 혹은 교회로 돌아오는 ‘구도자의 세대’를 형성할 수 있다면, 현재 한국의 4050세대에게서 일어나는 탈종교화와 교회에 대한 실망은 일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한국의 세대에 대한 종합적 연구를 한 사회학자 최샛별에 따르면, 40대와 50대는 동일 세대로 묶이지 않는다. 그는 한국의 세대를 88만원 세대, X세대, 베이비붐 세대, 산업화 세대로 분류하는데, 현재의 40대는 X세대에 속하고 50대는 베이비붐 세대에 속하게 된다. X세대(1970-1979년생)는 경제적 풍요와 정서적 안정을 누린 세대로서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최상의 가치로 여긴다. 반면에 베이비붐세대(1950-1969년생)는 전통적 가치관을 내재화하고 공동체를 중시하며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경험한 이들이다. 필자는 최샛별 교수의 베이비붐세대 연령 범위(20년)는 지나치게 확대되었다고 본다. 어쨌든, 현재의 50대는 베이비붐세대의 후발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40대와 50대가 세대 상 구분이 될 수도 있지만, 이들은 공통적으로 민주화 이후 한국 사회의 발전을 체감하며 자랐다. 따라서 인간 존중과 약자를 배려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식도 높은 세대라 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전례 없는 디지털화와 고령화의 사이에 ‘낀 세대’로서 실생활의 불안과 고민도 안고 있다. 하지만 문화적으로는 개방적이고 유연하다. 40대는 2030세대의 문화적 코드를 공유할 수 있는 기성세대이기도 하다. 이번 조사에서도 그렇지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교회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사회적 봉사에 더 많은 기여를 해주길 기대한다. 이러한 요구는 4050세대에서도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필자는 교회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는 단순히 교회의 봉사 활동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복음의 진정성이 왜곡되기 때문이라고 본다. 한국 교회의 사회를 위한 활동 총량이 타종교에 비해 뒤처지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에서 나타난 공공의식과의 불협화음, 정치적 편향성은 교회가 대변하는 복음의 순수성에 대한 의구심과 복음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는가에 대한 회의를 불러일으켰으리라고 본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하나님 나라의 복음이 4050세대에게도 인생의 깊은 위로와 궁극적 비전을 마땅히 제시할 수 있음에도, 교회의 사회문화적 상식과 공감능력 부재가 이들의 영적 조망권을 차단하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이 필요하다. 복음은 모든 세대에게 동일하게 선포되어야 한다. 각 세대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가 그들의 관심과 필요에 응답하고 더욱 근본적인 해답을 줄 때 복음 앞으로 나아오게 될 것이다. 청년 세대를 향한 복음 사역의 헌신자들은 여전히 고군분투하며 한국 교회의 미래를 위한 중대한 사명을 감당하고 있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노년 세대는 한국 교회를 든든히 지켜오고 있다. 그런데 늘 교회의 곁에 있을 것으로 여겨온, 또한 노년과 청년을 잇는 4050의 중년 세대는 영적으로 안녕하신가? 아무래도 지금 우리는 교회와 복음에 대한 그들의 고민이 더욱 깊어져 가고 있지 않은지 면밀히 살펴야 할 시점에 이른 것 같다. (다음 글에서는 ‘4050세대를 위한 복음을 찾아서’를 주제로 4050세대의 이야기 속에서 복음과의 만남을 다루어 보려고 한다.)
4050세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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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종교인구
탈종교
베이비붐세대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by 김선일
2022-03-26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매년 가입 국가들을 대상으로 조사해서 발표하는 ‘더 나은 삶 지표’(Better Life Index)는 11개 항목을 기준으로 삶의 질과 만족도를 평가한다. 우리나라는 시민참여·안전·주택·교육에서는 높은 점수를 얻은데 반해, 환경·건강·일과 삶의 균형(Work-Life Balance, “워라밸”)·수입에서는 평균을 훨씬 밑도는 점수를 얻었다. 이중 우리나라가 수년째 최하위권에 속하는 항목은 놀랍게도 공동체 지표다. 2015년부터 지속적으로 조사 대상 국가들 중에서 그야말로 꼴찌를 차지하다가 가장 최근의 조사에서는 세 나라를 제치고 부상(?)했으나 여전히 최하위권이다(41개국 중 38위). 도움이 필요할 때 의지할 사람이 있느냐는 질문에 우리나라 사람들의 80퍼센트가 그렇다고 답했는데, 이는 OECD 평균인 91퍼센트보다 낮은 수치다. 사회적 연대의 약화는 경제적 위기와 관계적 고립을 불러일으켜 삶의 만족도를 저하시킨다고 이 조사는 말한다. 전통적으로 두레, 향약, 품앗이 같은 이웃 공동체가 강했던 이 나라에서 사회적 관계의 급속한 와해는 큰 숙제가 된 것이다. 이제 정점을 지나고 있긴 하지만 코로나로 인해 고립된 생활은 기본값이 되었고, 온라인 공간은 개인으로부터 출발하는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간다. 메타버스는 현실적인 가상공간에 나와 또 다른 이들이 아바타라는 유사한 수평적 관계로 참여하는 커뮤니티를 형성한다. 같은 신념과 취향을 공유하는 연대감이 집단에 대한 의무적 소속감을 빠르게 대체해 간다. 연대감을 위해서는 물리적으로 같은 장소에 모여서 친소관계를 쌓을 필요도 없다. 서로 다른 곳에서 신념을 공유하며 공동의 행동을 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예를 들어, 인스타그램의 해시태그 등산스타그램에는 술, 김밥, 산악회 장면은 없고 커피, 패션, 등산화 같은 각자의 취향을 더 드러낸다. 모두가 한 테두리 안에서 한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팔을 걸고 이합집산’하기 때문에 지시나 주장으로 공동체를 결속할 수 없다. 사람들이 공감하고 수용할 수 있는 메시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날 인터넷 커뮤니티들은 각종 팬덤으로 모인다. 문화, 정치적 셀럽에 대한 팬덤뿐 아니라 취미와 관심사를 나누는 팬덤 커뮤니티들도 많다. 공감은 팬덤을 찾는 연료이며, 커뮤니티는 팬덤을 공유하는 개인들의 집합이다(2022 트렌드 노트, 57-59).우리의 존재가 뿌리내리고 있는 근본적 관계는 가족이다. 가족 간 분화가 증가했다는 서구 사회와 달리, 우리나라에서 코로나 상황 속에서 가족의 소중함을 새삼 느끼게 해주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가족의 형태를 바라보는 시각에는 변화가 감지된다. 가족은 소중하지만 그 형태는 유연해야 하고 구속적이어서는 안 된다. 가족이라고 같은 공간에서 함께 살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서로 떨어져 있더라도 가족적 의무감보다는 심리적 동반의식이 더 중요해졌다. 가족의 소중함은 개인을 위한 든든한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가장 끈끈한 결속체인 가족에 대한 이와 같은 변화된 인식은 젊은이들뿐 아니라 기성세대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다. 부모 또한 자녀의 미래에 대한 반영구적인 의무감보다 이제는 자신의 제2인생에 대해서 더욱 진지한 책임감을 느끼는 태도로 바뀌고 있다(2022 트렌드 모니터, 98-102). 우리 사회에서는 지난 몇 년간 가장 대표적인 준거집단인 가족, 회사, 교회까지도 관계와 공동체의 진화를 겪고 있다. 진화란 환경의 변화에 맞춰 적응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소속과 연대의 의미도 점진적으로 달라지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취향과 자기존중의 문화에서 얼리 버드들이 선제적으로 트렌드를 끌어가는 듯하지만, 아직 우리 사회의 전체 문화를 지배하는 양식으로 확산되진 않았다고 본다. World Value Survey 2020년 조사를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도 ‘생존 가치’(Survival Values) 대 ‘자기표현 가치’(Self-Expression Values)에서 ‘생존 가치’ 쪽에 더 기울어져 있다. 같은 유교 동아시아 국가들 중에서도 일본, 홍콩, 대만보다 낮고 일본과는 꽤 큰 차이를 내고 있다. 심지어 중국보다도 떨어진다(아래 그림). 원래 한국 사회는 집단적 위계주의가 강한 문화이며, 가족적 유대감은 대부분의 조직에서도 권장되었다. ‘우리가 남이가?’ ‘한 배를 탄 공동 운명체’ ‘가족 같은 회사’ 등의 끈끈한 연대는 가족, 일터, 교회까지도 지배해 왔다. 지금도 연줄 문화의 체취는 슈퍼개인의 옷으로 바꿔 입는 와중에도 진하게 남아 있다. 이러한 관계 문법의 전환기는 교회의 선교적 전진기지가 세워져야 할 지점이다. 생활의 모든 선택 기준이 개인의 미세한 욕구에 맞춰 파편화되고, 끼리끼리의 연대가 심화되는 상황에서 사회적 공감력을 기르는 일은 구성원들의 급선무가 되었다(트렌드 코리아 2022, 191). 선거 때마다 우리 사회는 세대 간, 성별 간, 정체성 집단 간 대립으로 몸살을 앓는다. 어느 사회나 이러한 갈등을 겪지만, 한국 사회의 파편화는 취약해진 공동체 의식으로 인해 더욱 증폭되는 것 같다. 사회적 유대감이 약화되고 신념과 취향의 간극이 벌어지는 시대에 이 간극을 넘어서는 공동체를 제공하는 것이 바로 교회의 사명이 아닐까? 코로나 이후 시대에 관계의 방안을 제시하는 존 리비의 ‘당신을 초대합니다’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는 공동체를 만들고 이를 온오프 공간 모두에서 확장하는 초대의 힘을 제안한다(전자책, 21/152). 영향력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한데. 정직성, 역량, 선의는 신뢰의 공동체를 만드는 핵심 요소라고 한다(전자책, 37/152). 코로나 이전부터 사람들이 각자의 취향을 공유하고 경험하는 살롱문화나 ‘남의집 프로젝트’와 같은 작은 모임들은 시도되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 비록 더디더라도 코로나 이후를 맞이하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유예된 관계적 욕구를 다시 복원하려 할 것이다. 하지만 다가올 시대는 이전과 같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특히 공동체와 모임에서는 더욱 그렇다. 군중 속의 개인으로 순응하는 표면적 공동체로 돌아가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할 것이다. 코로나 이후의 교회는 기독교적 공동체의 진정한 가치를 깊이 탐색해야 한다. ‘공동체로 산다는 것’의 저자 크리스틴 폴은 기독교 공동체의 핵심적 실천 네 가지를 감사, 약속, 진실함, 손대접으로 보았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 존재를 감싸고 있음을 믿을 때 나오는 자연스러운 표현이다. 약속은 공동체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바탕이다. 진실함은 상호 신뢰의 원천이다. 손대접은 테두리 밖의 사람들을 초대하고 맞이하는, 그래서 사회적 유대가 와해되어 가는 이 시대에 저항하는 급진적 실천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철저하게 계층화된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귀족으로부터 평민과 노예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족 됨을 경험하는 실천으로 제국을 변화시키는 힘을 발휘했다. 역사적으로 교회는 그 어느 곳보다 역사적으로 이처럼 새로운 연대로서의 관계를 위한 가장 강력한 유산을 갖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됨이라는 복음의 유산이다. 교회가 선포하는 복음이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수평성과 개방성을 회복한다면, 그러나 복음의 메시지가 개인이 자기들의 삶에서 안고 있는 과제들을 해석하며 해피엔딩의 스토리로 그들을 인도한다면, 관계 결핍의 시대에 교회의 선교적 잠재력은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러한 잠재력은 성직 계급이나 교회 건물에서 우러나오지 않고, 복음을 믿고 복음대로 살아가는 평범한 그리스도인들이 일상의 장소와 개인의 공간에서 이웃을 초대하고 환대하는 실천을 통해 구현될 것이다. 한국 교회에는 이미 구역, 셀그룹, 소그룹, 목장, 가정교회 등의 축적된 공동체적 연륜과 경험이 있다. 제도로서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이와 같은 기존의 공동체적 역량을 세상 속에서의 작고 진실한 관계에 헌신하도록 성도들을 격려하고 공동체를 연습하게 하며(공동체의 문화는 연습을 통해 체화된다), 교회의 테두리를 넘어서 선교적 공동체로 담대히 나아가도록 후원하는 것이다. 이전 글: • 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모두에게 필요한 기독교적 기업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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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관과 내러티브 열풍
by 김선일
2022-03-19
세계관이라는 용어가 부쩍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근엄하고 진지하게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이었던 이 용어가 깃털처럼 가볍게 쓰인다. 과거처럼 학계나 교회에서가 아니다. 대중문화에서 앞 다투어 세계관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아예 아이돌이 인기를 끌기 위해서는 세계관을 갖추는 일이 필수라고 한다. 아이돌 멤버들에게 세계관은 하나의 기본 사양이 되었다(‘2022 트렌드 노트’, 129) 전형적으로는 뮤직비디오가 나오면 그에 대한 세계관적 해석이 다양하게 시도된다. BTS의 한 멤버가 초월적 존재이며 다른 멤버들은 그 존재의 여섯 인격체라는 식의 엉뚱한 해석이 인기를 끈다. 이러한 가설이 성립되려면 그에 부합되는 세계관이 설정되어야 한다. 국내 최대의 엔터테인먼트 기획사인 SM은 SMCU(Culture Universe) Origin이라는 유튜브 영상을 내보이면서 세계관을 통한 이야기 전달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영상의 내레이션은 창세기를 연상시키듯 “태초에”(In the beginning)로 시작되며, 그 동안 종교와 과학이 점유하던 세계의 기원과 형성에 대한 무의식에 담겨진 신화적 이야기를 펼쳐 보이겠다고 한다. 놀이가 된 세계관세계관은 우주적 판타지만을 다루지 않는다. 넷플릭스 인기 드라마 ‘킹덤’은 조선 시대 좀비물에서 후속작 ‘킹덤: 아신전’에 이르러 조선 북방으로 무대를 옮기며 역병을 부른 허구의 풀 생사초의 기원을 찾는다고 해서 세계관을 확장시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더 나아가 세계관이라는 용어는 우주나 국경과 같은 거대 영역만이 아니라 생활세계에도 적용된다. 개그맨 3인이 만든 유튜브 ‘피식대학’은 그들이 각기 다른 세계관을 만들어서 산악인협회, 올림픽국가대표, 대선 등을 코믹하게 풍자한다. 판타지보다는 패러디에 가깝고 비전의 스케일도 작지만 그들 각자가 현실과는 다른 세계와 캐릭터를 설정한다는 점에서 이 또한 세계관 놀이라고 불린다. 이와 같이 세계관은 하나의 허구 세계를 설정하고 그 세계를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촘촘히 만들어 구조를 갖춘 다음, 그 세계관에 부합하는 노래, 캐릭터, 밈 등의 콘텐츠들이 개발된다. 그런데 여기서 유행처럼 사용되는 세계관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는 worldview가 아니라 우주라는 뜻의 universe이다. 관점을 의미하는 ‘세계관’은 관행적으로 쓰일 뿐 문자적 의미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따라서 현재의 세계를 이해하는 방식일리는 만무하고, 오히려 현실 경험세계를 넘어서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한 상상과 구상이다. 가장 거대한 스케일의 세계관으로 꼽히는, 우주를 구하는 히어로들의 총 집합체인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arvel Cinematic Universe)가 대표적이다. BTS와 SMCU의 세계관도 유니버스라는 단어를 쓴다. 따라서 이는 상상과 유희의 세계다. 서로 다른 우주, 다른 행성에서 활동하는 히어로들이 결국에는 통합된 유니버스에서 만난다는 설정에 사람들은 열광한다. 세계관의 확장뿐 아니라 세계관의 통합은 더욱 더 흥미진진한 이야기다. 인간은 모든 실타래가 맞춰지는 서사의 종결을 갈망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경험과 현실을 훌쩍 뛰어넘는 이 허구적 세계관의 발상은 평행우주론과 같은 과학적 가설과 메타버스라는 가상현실 기술의 발전을 배경으로 한다. 디지털 기술은 우리의 일상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가져다주었고, 이제 가상현실 기술은 우리의 상상을 확대시키는 세계관적 콘텐츠를 요구하게 됐다. 한편으로 사람들이 크고 작은 세계를 설정하는 이 욕구는 현실의 결핍을 반영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희망이 없는 현실 속에서 우울해하고 좌절하며 시간을 보내지 않는다.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인생을 살지 않는다. 비록 가상이라 할지라도, 자기들의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서 그 안에서 웃고 즐기며 소통할 수 있는 동반자들과 연대한다. 세계관과 내러티브의 동행내러티브는 세계관을 움직이게 하는 연료다. 내러티브와 이야기는 비슷하지만 미묘한 차이를 지닌다. 이야기는 내러티브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인과관계를 서술한다면, 내러티브는 이야기가 어떻게 들려지는지를 말한다. 우리가 내레이션을 할 때 화자의 시점을 곁들이는 것과 같다. 우리는 일인칭 내러티브라고 하지 일인칭 이야기라고 말하진 않는다. 이야기가 표현된 내용 자체라면 내러티브는 자기만의 틀로 내용뿐 아니라 신념과 가치를 내포한다. 내러티브에는 대안적 세계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다. 그것은 꼭 기승전결의 이야기 구조여야만 하는 것이 아니다. ‘아메리칸 드림’ 자체가 내러티브의 골격이라면, 여기에 여러 가지의 이야기들이 파생된다. 비트코인이 경제계를 강타한 이유도 사토시 나카모토라는 가명의 인물이 금융 중앙통제시스템을 거부하고 아나키스트적 상호연결을 기획한다는 내러티브 때문이다. 내러티브는 새로운 세계를 발효시키는 내러티브를 담고 있다(‘트렌드 코리아 2022’, 412-413). 지금까지 세계관과 내러티브에 대해서 간단하고 투박하게 설명했다. 이러한 현상에 대해서 기독교가 제공할 수 있는 자원은 있는가? 기독교는 세계관 및 내러티브와 얼마나 가깝다고 생각되는가? 아마도 당신이 경험해 온 신앙의 관습에 따라서 그 거리가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신앙을 교리적 명제나 규칙으로 배우고 표현해 왔다면 세계관과 내러티브는 다소 어색할 수 있다. 1980∼90년대에 한국 교회에 기독교 세계관 학습 열풍이 불었고 지금도 세계관은 많은 교회들과 선교단체에서 가르치는 주요 주제이긴 하다. 하지만 기독교 세계관 학습은 상상과 내러티브와 비전으로보다는 기독교 교리의 하위 주제로서 ‘인지적 관점’에 머무르는 경향이 있다. 더군다나 이 관점은 세상의 문화와 풍습에 대해서 비판적 접근을 통해 이해보다는 판단에 더 많이 사용된다. 오늘의 세계관 열풍은 그와는 결이 다르다. 앞서 말했듯, 이 세계관은 상상의 질서를 구축하고, 그 안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세계를 해석하며 밈을 전파하며 노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상상-서사-해석-공유-놀이의 체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인, 세계관의 사람들이러한 세계관과 내러티브 현상은 비록 정교한 소비 자본주의의 기획으로 설계된 틀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극복하고 살아내려는 사람들의 열망을 담고 있다. 기독교 세계관은 이러한 허구적이고 사실상은 일시적 쾌락으로 소비되는 세계관 놀이와 다르다. 기독교 세계관은 초월을 갈망하나 그 초월은 현실에 도래하는, 그리고 현실을 변혁하는 완성을 지향한다. 사도 바울은 고대 1세기에 주변의 야만족들과 비교해서 우월한 로마제국의 시민의식을 지닌 빌립보 교인들에게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빌 3:20)고 선언하면서, 그 하늘의 구원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영광을 따라 아름답게 변화시키리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더 큰 세계를 바라보고 그 세계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은 진정한 의미에서 세계관의 사람들이다. 한편으로 이는 우리에게 새로운 과제를 던진다. 그리스도인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를 상상하며 오늘을 살아가는 존재이어야 한다. 상상과 내러티브는 기독교 신앙을 생동감 있게 경험하고 표현하는 중요한 기제가 된다. 오늘날 신앙의 언어는 지극히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당장의 문제와 고민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위로와 용기를 위한 신앙의 언어는 물론 필요하지만, 더 큰 이야기와 세계의 궁극적 변화에 대한 소망을 견고하게 품지 못한다면 우리는 현실 효용성에 의존하는 실증주의적 검증의 늪에 빠질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현실과 미래를 위한 선명한 세계관과 탄탄한 내러티브를 제공한다. 성경의 내러티브는 우리로 하여금 더 많은 상상과 비전을 창조할 수 있는 원천이 된다. C. S. 루이스의 ‘나니아연대기’나 J. R. 톨킨의 ‘반지의 제왕’이 대표적인 세계관 판타지다. 탄탄한 세계관에 기반을 두는 내러티브는 삶의 문제들을 곡진하게 파고든다. 팀 켈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묘사하는 언어가 오늘날의 다양한 문제들과 소통하며 가장 좋은 대안을 제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억압의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에게는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의 전쟁터 언어가,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는 이들에게는 우리를 의롭게 하신 법정의 언어가, 수치심과 거절된 감정으로 씨름하는 이들에게는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추방과 귀향의 언어가 강렬하게 다가올 것이라는 말이다(‘팀 켈러의 센터처치’, 280). C. S. 루이스가 고대의 신화들이 공통적인 양식과 영향력을 끼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을 둔 참된 신화라고 했듯이, 성경적 세계관은 많은 상상의 세계관들이 있으나 유일하게 초월과 현실을 통합하고 역사를 완성하는 참된 세계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교회는 그 세계관을 오늘의 삶을 변혁시키는 내러티브로 해석하고 공유하는 가운데 위로와 소망을 나누는 공동체다. 이전 글: • 메타버스와 교회의 과제• 복음중심 신앙은 생태적 감수성을 동반한다• 일상의 재발견: 루틴의 영성이 필요한 시대 • 슈퍼개인의 시대: 기독교적 개인주의를 위한 변명• 트렌드를 읽다, 복음에서 길을 찾다 다음 글:• 코로나 이후, 새로운 공동체를 준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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