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W CITY CATECHISM뉴시티 교리 문답

Question 9 하나님은 첫째 계명, 둘째 계명, 셋째 계명에서 무엇을 명하십니까?

하나님은 첫째 계명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이 참되고 살아 계신 유일한 하나님임을 알고 신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둘째 계명에서는 모든 우상 숭배를 피하고 하나님을 그릇되게 경배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셋째 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높이며 그분의 말씀과 사역도 높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첫째 계명에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을 참되고 유일한 하나님임을 알고 신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둘째 계명에서는 모든 우상을 경배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셋째 계명에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높이라고 명하셨습니다.

성경

신명기 6장 13-14절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를 섬기며 그의 이름으로 맹세할 것이니라 너희는 다른 신들 곧 네 사면에 있는 백성의 신들을 따르지 말라.

해설

찰스 H. 스펄전 하나님은 성경에 계시되고 주 예수의 인격으로 현현하신 하나님이 바로 하늘과 땅을 만드신 그 하나님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하신다. 인간은 자신의 취향에 따라 자신을 위한 신을 만들어 낸다. 굳이 나무나 돌이 아니어도 자신의 의식이나 세련된 사고라고 부르는 것에서 자기 입맛에 맞는 신을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그 신은 인간이 저지르는 악행에 그다지 가혹하지도 않고, 죄를 뉘우치지 않는 사람들에게 엄격한 공의로 벌을 내리지도 않는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거부하고, 다른 신들을 정교하게 만들어 낸다. 예를 들면 “신성한 자” 라면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자기 상상의 산물을 만들어 내고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너희의 신이로다. 이스라엘이여!”

그러나 그때 성령은 그들의 마음을 밝히셔서 여호와가 하나님이며, 어느 것도 그분께 견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하신다. 성령은 자신의 백성에게 하늘과 땅의 하나님이 성령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가르치신다. 그 하나님의 속성들은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그분의 자비에는 공의가 수반되고, 그분의 사랑에는 거룩함이 따르며, 그분의 은혜에는 진리가 함께하고, 그분의 능력은 온유함과 연결된다. 하나님은 이교도의 신들이 그렇듯 죄를 눈감아 주거나 기뻐하는 분이 아니시다. 악행을 그냥 지켜보실 수 없는 분이며, 죄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묻는 분이다. 이것은 오늘날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사이에 굉 장한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철학자들은 “좋아요, 당신이 원한다면 신이라고 하죠. 하지만 그 신은 틀림없이 내가 지금 당신 앞에 독단적으로 내놓는 그런 성격을 가지고 있을 것 같군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리스도인들은 이렇 게 대답한다. “우리가 할 일은 신을 지어내는 것이 아닙니다. 진리의 성경에 계시된 한 주이신 그분께 순종하는 것입니다.”

묵상

존 린 십계명에서 첫 세 계명은 참되고 살아 계신 유일한 하나님과 관련하여 그분이 보시기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보여 준다.

첫째 계명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들을 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우리가 예배할 유일한 대상이시며, 우리가 사랑하고 갈망할 궁극적인 대상이시다. 둘째 계명도 비슷한데, 하나님에 대해 우리 마음대로 만들어 낸 개념을 따라 하나님을 예배해서는 안 된다고 명한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 숭배라고 말한다. 우리는 우리가 원하는 모습의 하나님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을 경배해야 한다. 다시 말해 거짓된 신들을 예배하거나, 하나님을 거짓되게 예배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셋째 계명도 첫 두 계명과 비슷하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거나 함부로 대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이 그분의 성품과 본 질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있는 자" (I Am)라고 알려 주셨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내 이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며 영원한 자' 이다"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우리가 특정한 단어를 말할 수 있거나 말할 수 없다는 뜻이 아니다. 말로든 삶으로든 하나님을 이야기할 때,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온전히 높여 드리고 공경한다는 의미다. 다시 첫 두 계명을 조금 더 살펴보자. 예를 들어 삶에 세운 몇 가지 목표(명망, 특정 직업, 우리가 꿈꾸던 사람과 관계 맺는 것 등)를 이루는 것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평안을 줄 뿐 아니라 마음 깊이 갈망하는 중대한 해답을 줄 것이라고 믿는다고 해보자. 실용적인 면에서 날마다 우리는 그 목표가 우리에게 하나님보다 더 깊은 평안을 줄 것이라고 기대한다. 자, 지금 우리는 첫 계명을 어겼다. 명망, 특정 직업, 특정 인물이 우리가 예배하는 대상이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목표를 하나님으로 돌려야 한다.

이번에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가 갈망하고 기대하는 명망, 직업, 관계를 주셔서 평안케 하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배한다고 하자. 다른 이야기 같지만, 이 역시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에 대해 자신이 생각하는 개념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것이다. “주문형 신”, 즉 우상을 창조한 것이다. 첫 두 계명은 하나님만 예배하고, 되신 하나님으로 예배하라는 명령이다. 만들어진 신이나 우상을 예배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이 계명들은 왜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하나님만 예배하라고 명령하는가? 어째서 셋째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과 성품을 높이고 공경할 것을 그토록 주장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하나님만이 성취하실 수 있는 갈망을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다. 바로 그분을 향한 갈망 말이다. 우리가 계속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변형하려고 하거나 그분을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면, 결코 평안을 얻지 못할 것이다. 진정한 위안도, 진정한 의미도, 진정한 기쁨도 경험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결코 온전해지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변형된 하나님이나 다른 신이 아닌 참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이 우리 삶의 중심에 계시다면, 우리는 참 평안을 얻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런 말을 남겼다. “주님, 주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은 주님 안에서 쉬기 전까지는 쉴 수 없습니다.”

기도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 당신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납니다. 그리고 우리는 존경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주님께 나아갑니다. 주님의 계명에 진실 하도록 우리를 지켜 주십시오. 우리 삶에 있는 거짓 신들을 밝히 드러내 주십시오. 영과 진정으로 주님만 예배하길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