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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플터치 & 큐티

너무 늦지 않게

8월 21일 와플 QT_주말칼럼

2022-08-21

주말칼럼_너무 늦지 않게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나뭇잎은 조금씩 물들어갔지만

푸르름 산과 들에 물결치고

해는 산허리에 걸려 있지만

발밑의 햇살 넉넉히 길을 밝혔다

집에 돌아가기까지는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믿었었다

그래서 잠시 마음 풀어놓고

놀이마당을 기웃거렸던 것이

한순간의 꿈으로 사라져버렸다

돌아갈 길은 어둠에 묻혀버렸고

별들은 저희끼리 아득한 곳에서

아무리 불러도 대답하지 않는다


 - 홍윤숙 <일생>


몇 해 전, 제주도로 휴가 갔을 때였습니다. 성산일출봉 가까운 해변에서 한때를 보내고 있었지요. 여름 지나 시월 중순에 든 터라 물놀이 때는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아이들은 ‘때’가 없지요. 신발 벗고 바지 걷고, 첨벙 뛰어들더군요. 발이 시린지 오래 있지는 못하고 뛰어나와 모래밭에 발을 묻더랍니다. 아내는 성산일출봉을 낀 먼바다 풍경에 시선이 머물렀고, 저는 얕은 물 군데군데 심긴 낮은 바위를 딛고 저만치 해변에서 멀어졌습니다. 뭐가 좀 있을까 싶어 돌을 들척이면서 돌아다니고 있었던 겁니다. 


그게… 잠깐이었습니다. 삼십 분, 한 시간 지난 게 아니었는데 벌써 물이 들어 발 딛고 온 낮은 바위들이 잠겼더랍니다. 순간 난처했지만, 아직 물이 깊이 들지 않아서 신발 벗고 바지 걷고 찬물 몸에 적시며 건너왔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잠깐’이라는 걸, 그 ‘잠깐’만으로도 세상이 바뀌더라는 걸 말입니다. 내가 발 디딘 바위가 잠기고, 내가 건너온 길이 사라지고, 내가 살아온 시간이 없어지는 건 ‘잠깐’이면 충분했습니다. 그걸 모르고 ‘뭐가 있을까’ 돌을 들춰가며 바닷속만 들여다보았더랍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그렇지요. 저만치 해가 기울지만, 아직은 눈앞이 환합니다. “산과 들에 물결치는 푸르름”에 재미 들다 보니 “조금씩 물들어가는 나뭇잎”을 깜박한 겁니다. 한 걸음 길 밝히기에는 빛이 아직 환했고, 그래서 ‘산허리에 걸린 해’가 ‘곧’ 넘어갈 거라는 걸 잊은 게지요. 아니, 깜박하거나 잊은 게 아닙니다. 그렇게 ‘믿은-믿고 싶은’ 겁니다. “아직 충분한 시간이 남았다고”, 걱정할 일 아니라고, “마음 풀어놓고” 기웃거린 놀이마당은 그 섣부른 믿음의 성소였습니다. 


아차 싶기까지 ‘잠깐’이었습니다. 섣부른 믿음으로 쌓아 올린 ‘놀이마당의 공든 탑’이 무너지는 데 걸린 시간이 ‘잠깐’이기 때문이지요. “돌아갈 길” 아득해지고, 어둠에 묻힌 하늘길에는 별들만 “저희끼리” 환합니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지요. 닫힌 길이 다시 열리거나, 묻힌 하늘이 다시 환해 지지 않습니다. 어둔 하늘 아득한 길, 그 발밑으로 모든 것이 “한순간의 꿈”이 되어 “사라져”버립니다.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생각”했고 그리 믿고 살았으나, 너무 늦어버렸습니다. 그의 인생이 그랬습니다. 


산수유나무에 꽃이 피고 지었습니다. 매화도 벚꽃도 강변북로 어디쯤에는 개나리 노란 꽃밭도 그랬습니다. 곧 밤꽃이 활짝이겠지요. 꽃 좋아하면 나이 든 거라는데, 나이가 드는 걸까요. 민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너무 늦은 인생이라는 게 있을까’ 하며 살았습니다. 오전 아홉 시 뿐 아니라 오후 여섯 시에도 포도원 문은 열려있는 것이라고, 그래서 안심했다지요. 밤 아홉 시에도, 새벽 한 시에도 포도원은 그렇게 문 열려있을 거라고 ‘믿었던’ 모양입니다. 너무 늦으면 꽃 피울 수 없다는 걸 잊지 않아야겠습니다. 평강^^




작성자 : 이창순 목사(서부침례교회)
출처 : 맛있는 QT 문화예술 매거진 <와플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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