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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간 목회한 분으로부터 배운 세 가지
by David Schirock
2021-05-16
버논 라이온즈(Vernon Lyons) 목사는 내 아내의 할아버지다. 1951년에 그는 시카고 남쪽에 있는 애쉬번(Ashburn)이라는 곳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리고 올해 초까지, 무려 7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그는 신실하게 그 교회에서 목회했다. 내 세대 사람들 중에 그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올해부터 그는 이제 그 어떤 컨퍼런스의 헤드라인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는다. 또 트위터를 하지 않는 그를 팔로우 하는 사람도 없다. 그가 자기 돈을 들여서 출판한 적지 않은 책과 팜플렛 중에서 아마존에서 찾을 수 있는 건 딱 한 권이다. 그가 개척한 교회 홈페이지에도 그의 이름은 더 이상 올라가 있지 않고, 지금은 새로운 담임목사가 사역을 하고 있다.버논 목사가 여러 상황에서 드러나지 않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로부터 배울 건 너무도 많다. 히브리서 13장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 사람들을 기억하라고 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이 맺은 열매를 잘 보고 그들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했다. 물론 그 누구도 예수님처럼 완벽한 모범이 되는 분은 없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삶과 목회의 여정 속에서 바라보고 배울 수 있는 신실한 선배들을 보내주셨다. 나는 아내의 할아버지를 통해서, 또 이제는 나의 가족이기도 한 그의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냄으로써 목회에 말로 다 할 수 없는 엄청난 도움을 받았다. 무려 13명의 대통령이 집권을 하고, 이 땅에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도덕적 변화가 밀어닥친 기간 내내 목회를 했던 그분의 사역 마지막 장을 지난 15년간 목격할 수 있었다. 내가 배운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것은 다름 아니라 디모데가 인내하며 사역할 수 있도록 바울이 갖추게 했던 세 가지 자질, 바로 그것이다(딤후 2:1-7). 1. 일편단심바울이 그의 사역 말년에 다다라서 그의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말했다. “병사로 복무하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병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딤후 2:4). 바울은 마가 요한처럼 사역을 등졌던 사람이(행 15:38) 나중에 돌아오는 것을 보았다(딤후 4:11). 그는 또한 세상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버린 데마 같은 사람도 보았다(딤후 4:10). 바울은 끝까지 경주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에 마음이 쏠려서는 안 된다는 것을, 복음을 전하는 사명에서 멀어지게 하는 그 어떤 습관에 빠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버논 목사의 경우, 그는 오로지 주님의 사역에만 평생을 바쳤다. 그는 사역을 출세를 위한 디딤돌로 여기지 않았다. 더 큰 교회를 만들고자 또 다른 개척을 꿈꾸지도 않았다. 그는 사역의 영역을 더 넓은 지역으로 확대하려고도 애쓰지 않았다. 그는 70년이라는 시간을 고스란히 시카고 남부 지역을 위해, 오로지 한 교회에 바쳤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교회를 향한 그의 사랑을 느끼곤 한다. 버논 목사는 그의 교회를 사랑했고 또 모든 교회를 사랑했다. 그는 종종 내가 목회하는 교회에 관해서, 또 내 설교에 관해서 묻곤 했다. 그는 생각하고, 기도하고 또 교회를 섬기는 것을 결코 지겨워 하지 않았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하나뿐이었다. 그러다 보니 1968년, 전도지를 길에 뿌렸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벌금 25달러를 물기도 했다. 그는 또한 엄청난 독서광이기도 하다. 여든 후반이 될 때까지도 배우고 성장하기 위해 각종 컨퍼런스에 참석했다. 물론 매년 1월을 안식월로 갖는 그는 언제 쉬어야 할지를 알았지만, 주님과 교회를 향한 열정은 쉬는 동안에도 식지 않았다. 헛된 것들로부터 마음을 지키고 또한 마음이 언제나 복음만을 향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에게 꼭 맞는 자기훈련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2. 성품디모데후서 2장 5절에서 바울은 선언한다.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승리자의 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바울의 포인트는 이것이다. 목사는 규칙에 따라서 섬겨야 한다. 목사의 삶이란 그리스도와 교회에게 좋은 평판을 가져다주는 데 꼭 필요한 마음의 습관을 키우는 것과 더불어 신실함을 가졌는가의 여부에 따라서 판가름날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가 만든 토대가 아닌 그 어떤 다른 토대 위에서 사역을 해서는 안 된다(고전 3:10-15). 말씀을 성실하지 않게 또 정직하지 않은 방법으로 전달해서는 안 될 뿐 아니라(고후 2:17), 목사 자신이 은혜 안에서 진보를 이루지 못한다면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참여해서도 안 된다(딤전 4:11-16). 실로, 목사에게 있어서 성품이야말로 사역의 지속 여부를 결정하는 시금석이다. 그런 면에서 버논 목사의 삶에서 내가 발견한 것은 바로 정직함, 온유함 그리고 겸손함이다. 최근 들어서, 도덕적 타락, 개인의 일탈, 그리고 사역적 야망이라는 독에 물든 리더 목회자 때문에 몇몇 큰 사역 단체가 안에서부터 무너지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이런 단체가 성장했던 이유는 지도자의 진짜 정체가 커튼 뒤에 숨겨져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정체가 드러났을 때, 사역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버논 목사라고 어떻게 잘못이 없고 비난받을 일을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를 더 잘 알게 될수록, 그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그의 말을 더 많이 들을수록, 그를 움직이는 것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 교회 그리고 인간의 영혼이라는 사실을 더 명확하게 깨닫게 된다. 그는 매일 기도와 성경 읽기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버논 목사는 항상 그가 돌보는 양 떼로 바쁘다. 교회에 있던 서재가 집으로 옮겨졌지만, 그는 여전히 주님과 교인을 섬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 COVID-19의 시대를 맞은 지금, 92세인 그는 심지어 유투브 채널을 개설해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더 알고 싶은 그의 열망과 또한 그리스도를 더 알리고 싶은 그의 헌신은 끝이 없을 정도다. 3. 열심바울은 노력을 강조함으로 디모데에게 주는 메시지의 결론을 맺는다.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딤후 2:6). 바울에게 은혜란, 하나님의 주권을 알면 알수록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는 것이었다(고전 15:10). 버논 목사가 바로 이렇다. 70년 동안 그는 수도 없이 다양한 프로그램을 시작했고 수천 번의 심방과 병원 방문, 또 수천 번이 넘는 복음 설교, 가난한 자들을 위한 지역 봉사, 공개적인 복음 변론, 선교사 격려를 위한 해외 여행, 성경학교 건립, 리더 양성 등 그의 사역은 끝이 없다.그는 정말로 열심히 사역했다. 구세대 목사답게 그는 수도 없이 많은 시간을 심방에, 상담에, 장례식에, 세례식에 그리고 말씀을 선포하는 데 보냈다.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사역은 부흥했고, 한 번 이상 교회가 나뉘어지는 상황을 이겨낼 수 있었으며 그 결과 수많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 사역에 매진하도록 만들었다. 이 모든 것이 다 SNS가 생기기 전의 일이다. 원로 목사님들을 우러러보며버논 목사의 사역을 살펴보면 내가 동의하지 않는 교리와 목회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은 상관없다. 그도 나의 사역을 보면서 같은 말을 할 것이다. 우리 두 사람의 차이 중 어떤 것은 신학적 견해에서 또 어떤 것은 말 그대로 세대 차이에서 오는 것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지점이 그의 삶이 내 삶에 가장 가치 있는 영향력을 끼친 곳이다. C. S. 루이스가 오래된 책을 몰래 엿보는 것의 위험에 대해서 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나이 많은 사람 그리고 목사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다. 새로운 것이 무조건 더 좋은 것이라고 너무도 쉽게 단정하는 젊은 사역자가 얼마나 많은가? 그러나 그런 젊은 사역자에게 진짜 필요한 것은 우리 앞에서 걸어간 이들이 가졌던 시각이다.무엇보다도 우리에게는 버논 목사와 같은 이가 오랜 시간 동안 보여주었던 성품의 능력이 필요하다. 그가 가진 마음과 체력은, 즉각적이고 풍부한 열매를 맺지 못하게 하고 단기간에 사역을 만들어내는 데만 그치게 하는 표현적 개인주의에 대한 놀라운 대안이 될 수 있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내 사역에 꼭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했다. 목자로 산다는 것은 낙담하지 않는 삶을 말한다. 나는 그를 통해 목회적 인내의 살아있는 모범을 보여주신 하나님께 참으로 감사한다. 원제: 3 Things I Learned from a Pastor Who Endured for 70 Year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끈기
버논라이온즈목사
디모데전후서
바울의목회충고
성품의능력
노익장목회
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표지
by Jon Bloom
2021-05-15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은 모두 그리스도인 리더는 섬기는 리더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님도 분명히 그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눅 22:25–26). 주어진 각 상황에서 섬기는 리더십의 모습이 어떠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사람들의 의견이 다를 수 있다. 말하자면, 어떤 경우 섬기는 리더는 다른 이들의 발을 씻기는 자일 수 있겠지만(요 13:1–17), 어떨 때는 꾸짖기도 해야 하고(마 16:23), 징계도 해야 한다(마 18:15–20). 자기 비용을 들이면서 섬겨야 할 때도 있고(고전 9:7), 강한 명령을 내려야 할 때도 있다(고전 5:2, 11:16). 흙탕물 속에 들어서기이미 흐려진 물을 더 흐리게 하는 요인들은 부지기수다. 우선, 내면의 죄로부터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리더는 아무도 없다. 이는 그들의 성숙도가 최고에 달해 있을 때조차도 그들은 여전히 결함투성이의 종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리더들의 성숙도는 내가 말한 그 최고도에 도달하지 못한 상태라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또한, 그들의 지도를 받는 그리스도인 역시 내면의 죄로부터 자유하지 못하고 그들의 성숙함도 최고에 이르지 못했다.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 리더들과 그들의 리더십 아래 있는 이들 모두 각기 다른 성향, 경험, 은사, 그리고 부르심이 있어서, 이로 인해 리더들이 리더십을 수행하는 방식, 그리고 사람들이 리더십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어떤 지도자가 진실된 마음으로 섬기고자 해도 진실된 마음으로 리더십을 따르고자 하는 이에게조차 그것이 자기 “믿음을 주관하려는 것”(고후 1:24)처럼 보여질 수 있다. 이게 다가 아니다. 자기를 따르는 이들을 속이는, 자기밖에 모르는 늑대 같은 리더들도 한동안은 섬기는 리더처럼 행동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떤 리더의 행동이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인지를 알려면 관대함, 인내심, 겸손한 마음으로 분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섬기는 리더가 누구인지에 대한 일률적인 정의 같은 것은 없다. 많은 교회들의 필요와 상황들은 실로 광대하고 다양하므로 다양한 종류의 리더와 은사들이 필요하다. 리더의 마음의 동기를 평가할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의 편견들을 조심해야 한다. 우리 각자는 특정한 종류의 리더에게 끌리게 마련이지만, 우리의 선호도는 믿을 만한 것이 아니고 심지어 무자비한 기준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섬기는 리더의 표지신약 성경은 여전히 우리에게 기독교 리더를 선택할 때 합당한 주의를 기울이라고 가르친다(딤전 3:1–13). 어떤 리더가 근본적으로 지향하는 바가 그리스도를 닮은 섬김이라는 것을 무엇을 통해 알 수 있을까? 완전하진 않지만, 필자는 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근본적인 표지를 제시하고자 한다. 1. 섬기는 리더는 자기 주인의 영광을 구한다자기 명성이나 자신이 목회하는 교인들이 그의 주인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의 주인이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 말하는 자는 자기 영광만 구하되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하는 자는 참되니 그 속에 불의가 없느니라”(요 7:18)라고 말씀하셨다. 그리스도를 닮은 리더는 그리스도의 ‘종’(엡 6:6)이며, 시간이 갈수록, 대외적인 칭찬, 지위, 또는 경제적 안정이 아닌 그리스도께만 충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런 리더의 충성 속에서는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시 15:4)라는 시편 말씀이 실천된다.2. 섬기는 리더는 자신을 희생하여 자신이 섬기는 이들이 최고의 기쁨을 누리도록 한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자기 주인의 영광을 구하는 일과 충돌하지는 않는다. 예수께서도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중략]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6, 2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의 기질, 받은 은사들, 능력, 그리고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영역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섬기는 리더는 사람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빌 1:25; 2:9–11) 요구되는 희생을 기꺼이 감당할 것이다. 그리고 이는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이 돌아가게 한다. 3. 섬기는 리더는 복음을 방해하는 것보다 자기 권리를 포기할 것을 택한다바울이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고전 9:19)라고 한 것은 어떤 의미였을까? 바울이 어떤 음식이나 음료를 스스로 금하고, 그가 섬기던 사람들로부터 경제적 지원을 받지 않고 손수 일하여 자비량으로 사역을 하던 때가 있었다는 말이다. 굶주리고, 헐벗고, 매를 맞고, 노숙을 하거나, 교회 안팎에서 수모를 당해야 했던 때가 있었다는 뜻이다(고전 4:11–13; 9:4–7). 그는 아내를 얻을 권리도 내려놓았다(고전 9:5). 이는 모두 그가 순교 당하기 오래 전에 했던 결심이다. 하나님의 종으로서 바울이 세운 기준은 실로 높다. 하지만 섬기는 리더들은, 자기 권리 포기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께 돌아올 수 있다고 믿는다면 기꺼이 그리 할 것이다. 4. 섬기는 리더는 자기가 얼마나 알려지고 유명해지는지에 관심을 빼앗기지 않는다세례 요한처럼, 섬기는 리더는 자기 자신을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요 3:29)로 여기기에, 자기가 맡은 일이 얼마나 지명도가 있느냐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다. 지명도 없는 역할을 맡은 이들을 얕잡아보지도 않고 지명도가 높은 일만 중요한 것으로 여겨 그런 일들에 욕심을 내지도 않는다(고전 12:12–26). 그는 자신이 받은 역할을 청지기로서 최선을 다해 잘 감당하고자 할 뿐, 역할을 선택하여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일임을 기쁘게 인정한다(요 3:27). 5. 섬기는 리더는 자신이 쇠하여야 할 때를 알고 그 때가 오면 묵묵히 받아들인다모든 리더들은 정해진 기간 동안만 섬기는 법이다. 어떤 기간은 길고 어떤 기간은 짧다. 어떤 기간은 풍성하고 어떤 기간은 빈약하다. 어떤 기간은 기록도 되고 추억에도 남지만 대부분의 기간은 그렇지 않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모든 기간은 끝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시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러한 기쁨으로 충만하였노라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29–30)라고 말했다. 리더 자신이 자신의 기간이 끝났음을 먼저 인식할 수도 있고, 때로는 다른 이들이 먼저 이를 알게 될 수도 있다. 때로는 그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뜻을 위해 어떤 리더의 기간이 부당하게 끝나버리게 하시기도 한다. 하지만 섬기는 리더는 그가 맡은 역할을 그리스도를 위해 묵묵히 내어드린다. 자신의 정체성과 신뢰의 근거가 자신의 부르심이 아니라 그가 섬기는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리더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라섬기는 리더의 다섯 가지 특징을 모두 완벽하게 체화한 기독교 리더는 이 땅에 없다. 그런 리더는 오직 예수님 뿐이시다. 우리를 이끄는 리더들의 대부분은 그저 신실하기 위해 노력하는 불완전한 종들일 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우리 리더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들은, 첫째, 위에서 말한 표지들 중 하나라도 그들에게서 보인다면 우리의 입을 열어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격려하는 것, 둘째, 그들이 넘어질 때는 우리의 입을 닫고 조용히 인내해주는 것, 셋째, 리더들이 우려할만한 결정을 내릴 때에는 우리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관대한 마음으로 그것을 평가하고 은혜로운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리더들과 ‘대면하여’ 이야기할 때도 이 세 가지를 적용하고, 리더들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도 이를 적용하라. 만일 리더가 자기 기간이 끝나가고 있음을 모르고 있다면, 그를 사랑하는 친구들을 통해 사랑과 은혜가 가득하고, 부드럽고, 인내심 있는 격려를 통해 이를 알려주도록 하고 필요하다면 책망을 하도록 하라. 하지만 디오드레베처럼(요삼 9) 종종 리더의 죄악된 결함이 큰 해를 끼치기도 한다. 또는 가룟 유다처럼(눅 6:16) 늑대 같은 리더로 차후에 드러나는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 은혜롭게 반응한다는 것은 타당하고 경건하며 성숙한 제자들이 종으로서 먼저 꾸짖고(마 16:23) 심지어 징계하기까지(마 18:15–20) 하는 모습일 것이다. 어떠한 리더에게 이렇게 반응해야 하는지 아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일정 기간 관찰을 해보면 그에게서 이 다섯 가지 표지들이 현저하게 결핍되어 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원제: Five Marks of a Servant Leader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목회
리더십
희생
성숙
책망
긍휼
겸손
섬김
설교할 수 있는 용기
by Chris Castaldo
2021-05-11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이런 일이 일어나는데,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 나는 강대상 앞에 서서 회중석을 바라본다. 그러고는, “크리스, 오늘 네 설교가 사람들의 마음을 꿰뚫고, 이들을 멍에로부터 구원하고, 하나님을 찬양케 할 것 같니? 너 정신 나갔구나. 대담하고, 뻔뻔스럽고, 말도 안 되지. 하지만 어쩌겠어? 이제 설교를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한다. 설교를 시작하기 직전의 그 짧은 순간, 의심의 화살이 온갖 방향으로부터 날아들 때, 내게도 반격용 무기가 있다. 사도신경에 기반한 스펄전(Spurgeon)의 말 “성령을 믿나이다”를 되뇌는 것이다. 이 말이야말로 내 말의 무력함이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하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 들 때 내가 기억해야 할 말이다. 또한 우리 주 예수님의 말씀인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를 반복하여 선포한다. 성경의 말씀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권위가 있다. 사실 이것 때문에 우리에게 설교할 용기가 생기는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임재의 빛 안으로 끌려 들어올 수 있는 수단인 하나님의 말씀을 주셨기 때문에 성경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그 모든 일들을 할 수 있다.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권위에 대한 반감회중석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일부는 성경의 권위에 대해 반감이 있을 것이다. 권위에 대한 도전은 계몽주의 이후 세속화 시대에 점차 가속화되었지만, 사실 이는 우리 인류에게 아주 오래된 전통이다. 아담과 하와가 금지된 선악과를 먹었던 때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르기를 거부해왔다. 이러한 저항은 시간이 갈수록 심화됐고, 옛날에는 권위를 위임 받은 사람들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점점 더 사람들은 이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가정, 교육, 법, 교회 할 것 없이 말이다. 이 모두가 이 세상의 최종적인 권위이신 하나님을 인류가 조롱하고 있다는 사실을 반영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세상을 향해 말씀하시는 주요 방식 중 하나인 설교에는 어떤 영향을 미칠까? “나한테 설교하지 마”는 타락 이후 우리가 주장해온 윤리적 독립성을 잘 표현해주는 말이다. “설교한다”는 말은 원치 않는 요구들을 가지고 하는 지루한 연설과 동일시 된다. 교회에 다니는 이들은 이런 식의 태도를 떠벌리며 말하지는 않지만, 교회에 다니는 이들에게도 그런 식의 태도가 이미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많은 설교자들이 성경 내용을 다루지는 않고 그저 듣기에 좋은 설교에만 치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현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성경에 무지하다는 사실도 이를 보여준다. 그리스도인들이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과 조우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접할 기회는 전혀 없을 것이다. 성경을 강해하는 설교자들이 스스로 잘 하고 있다는 지나친 자기 확신에 빠지기 전에, 설교자 역시도 권위의 문제로 씨름하고 있음을 인지해야 한다. 성경 강해 워크숍에 참석하거나 서재에 존 칼빈(John Calvin)의 그림을 걸어두거나 스스로를 진리의 수호자로 자처하는 이들 역시도 가시채를 뒷발질하는 듯 고통스런 순간들이 있다. 결국 다른 죄인들을 향해 설교하는 설교자 역시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인해 설교자는 하나님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있는 진리를 설교해야 한다. 그러나 설교자가 설교하는 자세는 겸손해야 마땅하다. 그리고 설교자 모두는 성경에 대한 진지한 확신과 자신에 대한 냉정한 회의 사이에서 어떻게 하면 균형을 잘 잡을 수 있는지 고민해야 한다. 이 균형을 잡는 네 가지 방법은 기대, 강해, 관련성, 그리고 기름 부으심이다.기대교리 공부를 통해 성경의 권위, 영감, 그리고 충족성에 대해 적절히 배울 수 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은 유익하다(effective)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딤후 3:14–16).성경이 영감(inspiration)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바울에게는 언제나 성경을 전하는 것이 유익하리라는 것에 대한 깊고 심오한 기대가 있었다. 우리가 잘 알듯 바울이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딤후 4:2)라고 권면한 것은 바로 이 근거 때문이다. 이는 설교자들을 위한 복음이기도 한데, 설교자가 하는 선포의 유익성은 설득력 있는 웅변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즉, 설교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유익하게 되도록 만들기 위한 책임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으로 인해 생생하게 살아있다. 그렇기에 말씀은 그 자체로 유익하다. 그러한 기대감으로 말씀을 전하자. 강해설교 준비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자들은 종종 성실한 말씀 연구에 꼭 필요한 시간과 동기를 찾지 못해 쉬운 지름길 같은 것을 찾아보고자 하는 유혹에 맞닥뜨린다. 그러한 순간에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 본문의 권위, 다시 말해 하나님은 바로 자기 자신의 권위로 성경 기록자들을 감동시키셔서 하나님 자신이 의도하는 메시지를 기록하게 하셨다는 사실이다(벧후 1:21). 성경 본문에 하나님에 의해 영감된 의미가 있다는 이 전제야말로 설교자들로 하여금 매주 설교 준비에 충실히 임하게 하는 강력한 동기가 된다. 하나님이 성경 본문에 영감을 불어넣으실 때 특정한 상황 속에서 하셨듯이 설교자도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 각 본문의 특정한 배경이 무엇인지를 연구하여 하나님이 의도하신 메시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경이 지닌 권위다. 이로 인해 설교자의 말씀 연구는 가치 있는 일일 뿐 아니라 필수적인 일이 된다. 관련성설교의 근간은 신중한 석의여야 하지만 성경이 증거하는 바를 보면 설교는 또한 우리 삶에 관련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설교는 우리를 권면해야 하고 우리 삶에 적용되어야 한다. 설교에 인간적인 요소를 더한다는 말이 아니다. 권면과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이 원래 의도하는 목적이기 때문이다. 성경적인 설교는 우리의 지성을 깨우는 것이 맞다. 하지만 그 설교는 또한 우리 마음을 격려하고 꾸짖기도 해야 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이 어떻게 이를 행하는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 3:17). 바울처럼 설교자도 보살피는 양 떼를 잘 먹이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성경은 자기 자신이 먼저 복음에 사로잡힌 후에 열정적으로 그 기쁜 소식을 전하는 선각자 같은 이들을 보여준다. 구약에서 예레미야는 자신의 말씀 선포에 관하여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렘 20:9)라고 고백했다. 이런 불붙음이 신약에서 오순절 날에 임했는데, 예수께서는 이 날에 대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중략]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다. 이 은사의 열쇠는 청교도들이 말했던 바 기름 부으심이다. 기름 부으심은 어떻게 임하는가? 기름 부으심은 설교자가 성경 본문의 권위와 하나님의 보좌를 이어주는 권위는 무엇인가 같은 주제를 묵상할 때 받는 것이다. 기름 부으심은 설교자로서의 부르심이 갖는 권위를 묵상할 때 주어진다. 그렇게 부르심을 받은 설교자가 복음을 선포하는 그 신적인 순간이 바로 기름 부으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와 아름다움이 듣는 이들의 마음을 꿰뚫는 그 순간이 바로 기름 부으심이다. 천상의 힘설교자가 해야 하는 일이 하늘에서 주시는 권위로 뒷받침된다는 확신을 되살리지 않으면 성경적인 설교의 회복은 불가능하다. 이 명제 안에는 결국 영감된 본문의 성격, 그것이 지닌 유익성에 대한 기대, 통찰력을 주는 강해, 회중의 삶에 대한 깊은 관련성, 그리고 그 말씀이 선포될 때 임하시는 기름 부으심이 모두 들어가 있다. 설교자로서 입을 열기 직전에 불화살들이 날아들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말씀을 맡은 종을 통해 신적 권위가 역사하셔서 사람들의 마음을 변화시키기 시작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용기, 그리고 그가 주시는 권능의 은혜에 힘입어 부름 받은 설교자들이 설교할 수 있는 것이다.원제: Courage to Preach출처: www.ligonier.org 번역: 이정훈
목회
설교와교육
성경
권위
영감
유익
관련성
강해
용기
고린도전서 설교가 필요한 이유
by Mack Stiles
2021-05-10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는 주제설교를 선호한다. 그래서 설교 준비를 할 때도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한 후 그에 관한 성경구절을 모은다. 물론 우리 교회에서도 주제설교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렇게만 설교하면, 결국에는 청중에게 묽은 죽을 먹이는 꼴이 된다.주제설교만 고집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우선 설교자는 말씀 준비에 요구되는 부담을 피해 가게 된다. 난해한 본문과 씨름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어려운 부분은 건너뛰고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하는 ‘사랑’만 이야기해도 된다. 그러나 청중이 난해한 본문을 포함해서 성경의 모든 부분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주제설교로는 그 청중을 제대로 섬길 수 없다. 그러므로 성경의 각 권을 전체적으로 설교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진리의 말씀을 옳게 다루도록 청중을 가르쳐야 한다.강해설교는 교회만이 아니라 설교자의 영혼에도 큰 유익을 준다. 우리는 설교를 준비할 때 깨닫게 된 진리를 모두 다 설교할 수 없다. 그 내용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석 같은 진리는 감사하게도 설교자의 마음에 남게 된다.주제설교만 고집할 때 따라오는 또 다른 문제가 있다. 수년 동안 내가 확인한 바로는, 성경에서 어려운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고 설명할 때 가장 흥미롭고 매력적인 설교가 전해지곤 하는데, 주제설교는 그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많이 제공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혼의 문제를 두고 씨름하게 만드는 본문, 기독교인으로서 독신으로 살아가는 게 어떠한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본문, 또는 바울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다”고 한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고민하게 만드는 본문을 연속적으로 설교하게 되면, 청중은 계속해서 성경의 흐름에 사로잡힐 수 있다.그리고 혹 그러한 본문이 다루고 있는 애매한 문제에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설교자가 각 본문을 다루는 자세는 청중 앞에 성경의 난해한 부분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고린도전서를 설교해야 하는 이유그렇다면 왜 고린도전서를 설교해야 하는지 여기에 네 가지 이유를 소개하고자 한다.1. 고린도전서는 우리와 관련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당신은 성경의 모든 본문이 우리와 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지 모르겠다. 누군가는 고린도전서가 현대 사회와는 관련이 없으며 기껏해야 다른 시대를 위해 쓰인 편지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내려놓기 바란다. 고린도전서는 복잡하지만, 오늘날과 동떨어진 문제를 다루는 성경이 아니다. 고린도전서가 복잡한 이유는 단일한 주제만을 취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편지에는 수많은 문제가 등장하며 그러한 문제가 서로 엮여서 전체 내용을 구성한다.고린도전서를 읽는 일은 마치 누군가의 통화를 한쪽에서 엿듣는 일과 같다. 편지의 대부분이 고린도 교인들의 물음에 답하는 바울의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고린도 교인들의 물음을 직접 들을 수 없다는 문제를 안고 있다. 또한 편지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문제가 있는데, 바울이 언뜻 보기에 다소 이상한, 오늘날과는 그리 상관없는 당대의 문화적 이슈를 다루고 있다는 것이다. 가령 현대 사회에서는 우상의 제물로 고기가 바쳐지는 경우가 거의 없다. 나아가 바울은 이 시대의 독자들이 가볍게 읽어서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남성과 여성의 차이까지도 언급하고 있다.그러나 우리가 표면을 살펴보는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금맥과 같은 성경의 원리가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한 원리는 우리의 설교 준비를 더욱 심도 있게 만든다. G. K. 체스터튼(Chesterton)의 표현을 빌리자면, 고린도전서는 아쉬움을 찾을 수 없는 성경, 여전히 어렵고도 아직 다루어진 적이 없는 진리로 가득한 성경이다.나는 고린도전서 시리즈를 마치고 났을 때, 그 내용이 오늘날 교회와 얼마나 관련이 깊은지를 돌아보며 새삼 놀라게 되었다. 그토록 상관성이 깊은 주제 중에는 예상한 내용도 있었다. 가령 교회의 분열이나 성적 순결성 또는 신앙의 존속을 위한 부활의 필연성 등이 그에 속했다. 그러나 예상하지 못한 주제도 있었는데, 예를 들면 (11장에서 여자의 머리에 덮는 수건을 언급할 때 거론되는) 성 정체성의 문제가 그러했다. 내가 있는 이라크에서는 교회에 설교를 들으러 오는 여성에게 지금도 머리를 가리도록 허용하고 있다.어떤 주제는 내가 있는 지역에서 특별한 관련성을 드러내기도 했다. 우리 교회는 쿠르디스탄 지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란과 시리아 그리고 터키에 의해 둘러싸인 지역이다. 그래서인지 내가 바울의 과거사, 즉 이 편지의 저자가 원래는 테러리스트였다는 설명을 하자, 청중은 그 내용을 더욱 주의 깊게 듣게 되었다.이외에도 우리가 처한 상황에 구체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왜냐하면 바울은 결국 인간의 문제를 다루었으며 우리는 인간으로서 당시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복음을 삶 가운데 구현하기 위해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는 문제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든 적용될 수 있는 주제다.물론 우리는 고린도만큼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양극화된 사회에 살고 있지는 않다. 실제로 고린도와 같은 도시를 본 적도 없다. 또한 오늘날도 여러 가지 성 문제가 있다고는 하지만, 1세기 고린도 교회만 직면했던 문제도 있으므로 그 특수성을 쉽게 간과해서는 안 된다.2.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세속적인 분열을 예방하기 위한 지침을 풍부하게 제시한다고린도전서의 주제는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변화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 나는 목사로서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어떤 종류의 교회를 원하는지 잘 알고 있다. 이를테면 복음 중심적이고 십자가 진리를 붙드는 공동체, 즉 성경의 가르침에 충실한 공동체를 원할 것이다. 다시 말해, 모든 멤버가 진실한 세례 교인으로서 거룩한 생활을 요구하는 언약 관계를 반영하고, 복음의 은혜 가운데 서로를 돌보며 장로들의 리더십에 기쁨으로 순종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며 궁극적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원할 것이다.물론 나도 그와 같은 교회를 원한다.그렇다면 고린도전서를 설교하면 교회가 그렇게 변화되겠는가? 글쎄, 반드시 그렇게 변화되지 않을 수는 있다.그러나 그러한 변화를 위한 기초를 놓을 수는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는 교회를 갈라놓는 여러 문제에 대해 정면 공격을 가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는 교회 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세속적인 분열을 예방하기 위한 하나님의 지침을 풍부하게 제시한다. 또한 성적으로 문란한 시대를 살아가는 신자들 가운데 퍼져 나가는 정욕적이고 육감적인 성격의 죄악을 멀리하도록 권고한다. 그리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모습으로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제시한다.3. 고린도전서는 성경적 교리와 목회적 정서 모든 면에서 건강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고린도전서는 건강한 교회를 위한 토대를 제공한다. 가령 1장에서 우리는 성경적 회심이 무엇인지에 대한 바울의 뚜렷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또한 5장에서는 권징의 원리를 확인할 수 있고, 14장에서는 교회 전체가 예수님을 증언하는 모습이 어떠한지 살펴볼 수 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전체에 걸쳐서는 교회 멤버십의 필요성과 실제성에 대해 배울 수 있다.나아가 우리는 그토록 까다롭고, 죄악 되며, 다투기 좋아하는 공동체를 바울이 어떻게 사랑했는지도 엿볼 수 있다. 이는 성경적 제자훈련의 정신을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나는 바울이 그 문제 많던 성도들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를 살펴보기 좋아한다. 그는 처음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고린도 교인들에게 베푸신 사랑을 생각하며 감사를 표한다. 그러면서 마지막 날까지 예수님이 그들을 흠 없는 모습으로 보전하시리라고 이야기한다. 흠 없는 모습으로? 그렇다. 바울은 그 죄인들에 대해 그리스도 안에서 거룩해진 성도라고 언급하며 편지의 서두를 연다(고전 1:2). 거룩한 성도 말이다.그러다가 편지의 본론에 가서 고린도 교인들이 저지른 온갖 죄악을 거론한다. 그들은 잘난 체하며 불화를 일으켰고, 서로를 법정으로 데려가려 했으며, 음란한 행위를 벗어던지지도 못했다. 게다가 교리적인 이해도 느슨했고, 도덕적인 행동거지도 해이했다. 나아가 사랑의 정신은 없으면서 사소한 신학적인 문제에만 매달렸다. 또한 기꺼이 이혼을 용납하고, 성찬 자리에서는 곧잘 술에 취했다. 그리고 파벌과 다툼을 일삼았다. 심지어는 바울의 사도성도 인정하지 않았다.이 모든 사실을 감안한다면, 편지의 결말에 이르러 바울이 이러한 마지막 문장을 남긴다 해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난 이제 내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노라!”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나의 사랑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무리와 함께 할지어다”(고전 16:24). 바울은 복음의 은혜 가운데 그 문제 많던 성도들을 끝까지 사랑했던 것이다.이처럼 고린도 지역에 있던 교회는 실제적인 문제를 안고 있던 실제적인 교회였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의 청중이 들어야 할 매우 중요한 메시지가 편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물론 여러 가지 교리적인 내용을 그로부터 들을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바울이 보여 준 사랑으로 당신이 교회를 사랑하며 양육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듣고 배울 필요가 있다.4. 고린도전서는 장기적인 비전을 제시한다당신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는가? ‘저 사람들만 내보낼 수 있으면, 더 좋은 교회를 이룰 수 있을 텐데.’하지만 바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고린도전서는 하나님이 사람들을 바라보시는 관점으로 그들을 바라보게 해 준다. 또 성경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고, 혹 교회가 엉망진창이더라도 교회의 가능성을 생각하도록 이끌어 준다.바울은 교회에 대해 장기적인 비전을 품었다. 당신도 쉴 새 없이 재현되는 당치도 않은 모든 문제를 마음에 담아둘 필요가 없다. 바울은 하나님 나라의 진전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된 도구가 교회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 나라가 진전되기 위해서는 인내와 자비와 긍휼과 관용의 자세가 필요한데, 바울은 바로 그러한 자세로 고린도 교인들을 대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그들의 삶에서 역사하여 빌립보 교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들도 신앙의 완성에 이르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았다(빌 1:6). 다시 말해, 교회를 구성하는 그들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일하고 계심을 신뢰했다.이와 같이 바울은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교회를 이루기 위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자세가 무엇인지를 보여 주는 모델이 된다.원제: 4 Reasons You Should Preach through 1 Corinthians출처: www.9marks.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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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여, 상상의 문을 열어라
by Abraham Cho
2021-04-21
“제가 주문을 걸려고 하는 것 같습니까? 뭐 그럴지도 모르죠. 하지만 어릴 적 듣던 동화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주문은 마법을 걸 때도 쓰지만 깨뜨릴 때도 쓰지 않습니까? 만일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이 사악한 마법에서 깨어나려면, 여러분과 저에게는 가장 강력한 주문이 필요합니다.” ( C. S. 루이스, ‘영광의 무게’)나는 수시로 자문해 왔다. ‘설교 시간에 도대체 무엇을 하려는 걸까? 설교는 정말로 어떤 행위를 말하는 걸까? 교리를 가르쳐 생각을 변화시키는 행위일까? 아니면 영감을 끼쳐 새로운 정서를 불러일으키는 행위? 그도 아니면 도덕적 교훈을 들려줘서 의지를 강화하는 행위?’이런 질문과 함께 수년의 세월이 흘렀다. 마치 고속도로에 세워진 이정표를 쌩쌩 지나가듯, 매주일 설교도 그렇게 해 나갔다. 그러다 이러한 물음에 다다랐다. ‘설교란 그 모든 행위를 넘어선 작업이 아닐까? 어느 한 가지 행위에 제한되지 않으면서 그 모든 행위를 수반하는 작업이 아닐까?’ 그러나 뚜렷한 답변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저 매듭이 풀린 실처럼, 정리되지 않은 물음으로 마음 한편에 남게 되었다. 그러던 중, 서로 무관해 보이는 세 가지 상황을 통해 나는 그 실을 의미 있게 매듭지을 수 있는 놀라운 통찰을 얻게 되었다.흥미롭게도 각각의 상황에서 얻은 통찰은 모두 상상과 관련되어 있었다.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치다첫 번째 통찰은 C. S. 루이스가 1956년 11월 18일자 ‘뉴욕타임스’ 서평란에 기고한 글을 우연히 읽다 얻게 되었다. 당시는 루이스의 기념비적 작품인 ‘나니아 연대기’의 최종편, ‘마지막 전투’가 막 출판된 해였다. 그가 기고한 아티클의 제목은 ‘가끔은 우리가 들어야 할 진리를 동화가 가장 잘 말해 주기도 한다’였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이 왜 동화를 쓰는지 설명했다. 그중 눈에 띄는 대목을 인용해 보면 이렇다.“동화란 내가 말해야 할 진리를 표현할 수 있는 이상적인 양식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나는 동화를 쓴다. [중략] 어린 시절 내가 품고 있던 신앙을 마비시킨 어떤 금기 사항 따위를 몰래 비켜 갈 수 있는 게 뭐냐 하면 바로 이런 종류의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우리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의 고난에 대해 어떻게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실제로는 그런 느낌을 갖기 어려웠던 이유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기에 그 주된 이유는 바로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말을 들었다는 데 있다. 무엇인가를 느껴야만 한다는 당위는 느낌 자체를 얼어붙게 만든다. [중략] 그 모든 당위를 상상의 세계 속에다 던져 버리고 스테인드글라스로 뒤덮인 성전과 주일학교 울타리를 벗어날 때에야 비로소 그러한 느낌을 생생히 되살릴 수 있지 않을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루이스가 보기에는, 상상을 통해서야 기독교 신앙을 억압하거나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만든 금기 사항, 다시 말해 '우리를 감시하던 용을 몰래 지나칠' 수 있게 된다. 훈계조의 설교를 지루하고 따분하게 여기는 청중의 마음속엔 파수병이 세워져 있다. 그 파수병의 감시를 피해 갈 수 있는 게 바로 상상이다. 루이스는 그렇게 감시하는 용을 지나치고 난 다음 희미해진 진리를 '생생히 되살리기' 위해서는 상상이 필요하다고 믿었다.이러한 루이스의 발상이 옳다면, 어린 시절의 신앙을 잃어버린 청중을 일깨우기 위해 그들의 상상에 호소하는 설교를 하는 것은 훌륭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때로는 매우 설득력 있는 근거를 지닌 논변이나 정서적으로 깊은 영감을 끼치는 강연이라 할지라도, 용을 정면으로 공격하다가 끔찍한 결과만 초래하곤 한다. 그러나 상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용을 몰래 지나치게 도와준다. 이러한 발상이 흥미로워 나는 그 통찰을 마음에 잘 담아 두었다.새로운 세계로 들어가다두 번째 통찰은 몇 주 후에 찾아왔다. 바로 데이비드 존 실(David John Seel)이 이성은 세계관 ‘안에서’(within) 작동하지만 상상은 세계관 ‘사이에서’(between) 작동한다고 설명한 내용을 접했을 때였다. 이는 논리가 내적 일관성을 확립하고 그 일관성을 강화하는 역할을 수행하며 하나의 세계관 안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지만, 그 구성이 얼마나 촘촘하든 사실상 논리 자체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이동시키지는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즉 패러다임 전환을 이끌어 내지 못한다는 설명이었다. 그러나 상상은 그렇게 한다고 그는 말했다. 이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통찰을 제공했다.이러한 통찰이 설교에 끼치는 영향은, 우리 대부분이 알고 있는 사실 곧 논변으로는 누군가를 하나님 나라로 인도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는 데서 드러난다. 우리가 전하는 설교를 통해 비신자가 경험해야 할 일이란, 다름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세상에 드리워진 커튼이 잠시라도 걷히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가운데 완전히 새로운 전망을 보게 되는 일이다. 말하자면 전혀 다른 세계관 속에 들어가 잠깐이라도 그러한 관점을 통해 세상을 살펴보며 그 렌즈가 과연 자신에게 잘 맞는지 확인해 보고, 나아가 그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창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며 이 세상이 정말 어떠한 세상으로 변화될지를 가늠해 봐야 한다. 그러한 방식으로 비신자에게 상상이 일어나야 결국에는 팀 켈러(Tim Keller)가 자주 말하듯, “그 말이 진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진리면 좋겠다는 바람이 생기네요”라고 스스로 고백할 수 있게 된다. 이처럼 상상은 한 가지 세계관에서 다른 세계관으로 청중을 이동시킨다.캄캄한 마음속으로 여행하다세 번째 통찰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찾아왔다. 그 통찰은 평온히 책을 읽다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상처받기 쉬운 상담 시간에 주어졌다. 당시 나는 수년 간 앓고 있던 우울증을 더 깊이 이해하고 바르게 대처하기 위해 어느 상담가의 도움을 받고 있었다.그런데 상담가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목사님은 지나온 길에서 자신이 어떤 경험을 했는지, 또 그 경험이 현재 자신의 감정 상태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 자체로는 훌륭하고 건강하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결국 치유란, 좌뇌의 활동이 아니라 우뇌의 활동에서 일어납니다. 치유는 목사님이 느끼는 감정에 관한 추론이나 지난날 경험한 일에 대한 분석에서 주어지지 않습니다. 사실 그 모든 생각이 때로는 치유를 가로막는 장애물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진 상처가 무엇인지를 들여다봐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바로 그 상처를 느끼고 상상하며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이때 목표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더 잘 이해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새롭게 일어났는지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그분으로 인해 실제로 모든 게 바뀌었기 때문입니다.”나는 멍하니 그를 쳐다봤다. 그 말이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를 쳐다봤다. 그날 나머지 상담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후로는 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가지고 주어진 길을 갈 수 있게 되었다.상처 입은 자들에게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 고통의 자리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상상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일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자신을 감시하는 용과 세상의 단편적인 세계관, 그리고 상처 입은 영혼이 자기 안에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면, 바로 설교를 통하여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맞닥뜨리게 하는, 그리하여 인생의 변화를 이끌어 내는 상상의 세계를 경험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상상은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을 그리스도 안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의 감각적인 경험 세계 속에서 볼 수 있게끔 도와준다. 즉 우리 자신에 관한 사실이 진정으로 우리에게 주어지는 현실이 되도록 만들어 준다.마법에 걸린 문을 발견하다이러한 통찰 중 그 무엇도 서두에서 언급한 설교 행위에 관한 개념을 평가 절하하지 않는다. 올바른 교리를 가르치며 지성에 호소하는 설교는 매우 중요하다. 청중의 정서에 깊은 갈망을 불러일으키는 설교도 없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복음으로 새로워진 인생에 거룩한 의지를 고양시키는 설교 역시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지, 정, 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자리하고 있는 모든 방과 연결된 홀은, 오랫동안 잊혀지고 감추어진 문, 다시 말해 마법에 걸린 상상의 문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 마법에서 깨어난 세상에 살고 있다고 믿으며 무심결에 설교 역시 마법에서 깨어난, 상상이 결여된 행위처럼 여겨 왔을지 모른다.보다 덜 알려진 또 다른 에세이에서 루이스는 상상이 우리의 인식에서 차지하는 역할이 무엇인지 좀 더 심도 깊게 다루었는데, 거기서 이렇게 설명했다. “내가 보기에, 이성이 진리의 타고난 기관(the natural organ of truth)이라면, 상상은 의미의 기관(the organ of meaning)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새로운 메타포를 낳거나 옛것을 되살아나게 하는 상상은 진리의 원인은 아니지만 그 조건이 된다.”상상이 진리의 조건이 되는 이유는, 상상이 진리를 생산해서가 아니라 진리를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개념 세계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이 땅에서 살고 죽으신 후 다시 사셨다는 진리가 자리한다.바로 이 진술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상상이 요구된다. 그리고 이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진리다(벧전 1:12).원제: Stir the Imagination, One Sermon at a Ti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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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
CS루이스
영광의무게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를 위한 격려
by Stephen Witmer
2021-04-16
필자의 부친은 메인(Maine)주의 시골 지역에서 삼십 년 간 목회했다. 그 대부분 기간 동안 아버지는 각각 다른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 세 개의 교구에서 목회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잘 모르지만, 나는 사람들에게 전혀 인지도가 없는 곳에서의 목회가 주는 기쁨과 희생이 무엇인지 경험하며 자랐다. 아버지께 듣기로, 몹시도 춥던 어느 겨울 주일 아침, 섬기던 교회 예배에 나이 지긋한 여자분 두 명만 참석했다고 한다. 예정대로 예배를 진행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아버지가 물었을 때 그분들은 예배를 드리자고 했고, 아버지는 설교를 하고, 찬송과 기도를 인도했으며, 다같이 헌금도 했다.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셨다. 이후 계속하여 나는 우리가 살았던 작은 마을에서 목회의 기쁨과 산고를 직접적으로 맛보았고, 미국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시골 교회 목회자들을 만나보는 특권을 누렸다. 내가 만난 많은 시골 교회 목사들은 모두 사역을 훌륭하게 감당하고 있었다. 그들에게는 비전, 에너지, 열정, 그리고 능력이 있다. 다른 모든 목회자들처럼, 그들 역시 격려가 필요하다. 작은 마을에서의 목회는 힘들다. 사람들이 그다지 감사하는 것 같지도 않고, 소위 더 넓은 세상에서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격려가 필요한 곳이다. 마가복음 6장 1–6절을 보면 고향에서 사역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전 세계의 작은 마을과 시골 지역에서 예수님을 위해 자신의 삶을 드리는 사역자들을 위한 강력한 격려가 이 짧은 본문에 적어도 세 번 등장한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을 사랑하신다나사렛은 인구가 200명에서 400명 정도에 이르던 별 볼일 없는 곳이었다. 나사렛에서 북쪽으로 9마일 정도 떨어진 더 크고 부유한 마을이었던 가나 출신인 제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을 무시했다(요 1:46; 21:2). 하지만 마가의 묘사를 읽어보면 예수님은 결코 나사렛을 무시하지 않으셨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 자신이 나사렛에 가셨을 뿐 아니라 제자들도 데리고 가셨다. 사람들을 가르치고 그들의 병을 고쳐주고자 하는 완벽한 사역 계획도 있었다. 어디든 갈 수 있던 하나님의 아들이 이 작은 마을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라. 오늘날의 “도시의 한복판을 취하라” 식의 접근법이 아니다. 사실 복음서를 보면 예수님은 결코 자신이 작은 마을 출신이라는 사실을 부인하거나 그것을 넘어서려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레이 오트룬드(Ray Ortlund)의 지적처럼 예수님은 부활과 승천 이후에도 여전히 자신이 그 작은 마을 나사렛 출신임을 말씀하셨다(행 22:8). 중요한 것은, 마가복음 6장이 나사렛에 대한 예수님의 사랑과 관심이 일탈이 아님을 보여준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에 나사렛에 대해 특별히 호의를 보이신 것이 아니었다. 나사렛에서 그가 시간을 보내셨다는 사실은 예수님은 크든 작든 상관 없이 모든 곳을 똑같이 귀히 여기신다는 것을 보여준다. 6절은 예수님은 “모든 촌에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시더라”라고 말한다. 뒷부분에서 마가는 예수님이 “지방이나 도시나 마을에서” 사역하셨다고 기록한다(막 6:56). ‘마을’로 번역된 이 단어는 사실 ‘밭’으로 번역되어야 하는데, 그리 보면 예수님은 심지어 사람들이 일하던 밭으로도 찾아가셨다는 의미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그런 곳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 당신이 사역하는 곳 역시 그가 알고 계시며, 당신이 그 마을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그 곳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수님은 당신이 예수님의 사랑으로 그곳을 더욱 사랑할 수 있도록 당신을 초청하신다. 예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알고 계신다예수님은 낙심한 모든 작은 마을 목회자들이 겪는 어려움들을 아주 소상히 알고 계신다. 예수님 자신 역시 어려운 작은 마을 사역을 감당하셨다. 나사렛에서의 사역은 그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어떤 교회 지하에서 원탁을 중심으로 접이식 의자에 앉아 도시락을 함께 먹으며 목회에서의 어려움들을 함께 나누고 있는 한 무리의 목회자들을 한 번 상상해 본다. 예수님도 바로 거기에 계신다. 예수님은 “그래, 나도 나사렛에서 멋진 사역을 할 수 없었단다. 대부분이 나를 거절했지. 아주 ‘척박한’ 땅이었어”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나사렛에서 예수님이 마주하셨던 문제는 모든 작은 마을 사역에 있어 공통된 문제였는데, 그것은 바로 서로를 너무도 잘 안다는 것이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이미 잘 안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에 대해 더 이상 ‘알려고’ 하지 않았다. 예수님이 어릴 때부터 그들 가운데서 자랐기 때문에 그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시던 하나님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들은 오히려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들에 대해 불편해 했다. 미국에서 소위 기독교왕국(Christendom) 이후 등장한 도시들처럼 진보적이지 않은 시골 지역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문화들이 여전히 주류를 형성한다. 하지만 기독교는 겉치장 수준에서 받아들여질 뿐 깊은 내면은 그렇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런 곳에서 정작 중요한 것은 교회 출석, 전통 가치, 문화적 기독교 같은 것들이지 예수님의 권능과 임재가 아니다. 내 친구 중 하나가 남부에 있는 어떤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인 교회를 개척했는데 전통적인 지역 교회들의 저항을 받았다. 어떤 가난한 시골 지역에서 학령기 아이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는 다른 친구 한 명은 내게 말하길 그 지역의 비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문제 제기를 하지 않지만 자기 사역에 대해 반대하는 이들은 모두 지역 ‘교회들’이라고 했다. 기독교 전통의 문화적 유산을 너무도 잘 아는 것이 오히려 ‘우리의’ 작은 마을에서 역동적이고도 실천적인 신앙에 대한 경멸을 만들어낼 수 있다. 나사렛에서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에서의 삶에 있어 바로 그러한 국면들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에 대한 장애물로 작용한다. 마을 구성원 사이의 지나치게 가까운 관계는 외부인을 적대시하는 죄를 조장한다. 지금껏 지켜온 전통을 지키고 현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습성은 변화와 적응을 기피하게 만든다. 도시에서 일어나는 과당 경쟁과 혁신 일변도의 삶을 피하고자 하는 욕구는 역설적이게도 그저 그런 평범함을 고집스럽게 고수하는 현상을 초래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작은 마을의 그러한 면들이 그곳에서의 우리의 사역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를 알고 계신다. 그 자신이 그것들을 경험하셨다.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은 당신이 겪는 어려움들을 이해하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사람들을 구원하신다예수님의 작은 마을 사역을 보면 정신이 번쩍 드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에게 소망을 주기도 한다. 이 본문에 숨겨진 작지만 위대한 격려는 예수님이 그의 고향 사람들 중에서 믿는 자들을 찾으신다는 사실이다. 이 본문에 나온 예수님의 네 형제들 중 두 명이 훗날 신약 서신의 저자들이 될 것이었다. 유다와 야고보는 예수님을 형으로 두고 자랐고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예수님이 단순히 자기들의 형이 아니라 그들의 주요, 그리스도요, 주인이심을 깨닫게 되었다(유 1; 약 1:1). 예수님은 작은 마을에서도 그를 따르는 자를 찾으신다. 그 자신이 몸소 그런 곳에 가셨고 제자들 역시 그런 곳에 보내심으로써 이를 보이셨다(마 10:11; 눅 9:6). 예수님 이후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의 발자취를 따랐다. 바울은 회심한 후 “먼저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행 26:20)을 향해 복음을 전했다. 바울과 바나바는 루스드라와 더베 뿐 아니라 그 근방으로도 가서 복음을 전했다(행 14:6–7). 작은 마을에서 사역하는 목회자여, 예수님이 '당신’을 그곳에 보내신 것은 그가 당신이 섬기는 그 작은 공동체를 깊이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이웃과 그곳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를 찾고 계신다. 예수님은 작은 마을들을 사랑하신다. 그런 곳에서의 목회가 어렵다는 것을 잘 아시지만 그 자신이 그런 곳에 가시고 그를 따르는 자들 역시 그곳에 보내신다. 담대하라. 당신의 사역지에 그가 구원코자 하는 이들이 있다(행 18:10). 그들을 구하는 일에 기쁨으로 동참하라. 원제: Small-Town Savior: For Discouraged Pastors in Forgotten Place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목회
난관
시골
작은마을
사랑
구원
격려
나사렛
오트룬드
어려움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해도 될까
by Jeff Robinson
2021-04-13
찰스 스펄전(Charles Spurgeon)이 사역하던 시대에는 설교와 웃음은 어울리지 않는 것이라 생각했다.복음주의자들, 특히 개혁주의적 성향이 있는 이들은 유머 감각이 없는 것으로 유명했다. 스펄전은 자서전에서 제12계명이 있었다면 “주일에는 어두운 표정을 짓지 말지니라”였을 거라고 재치있게 말했다. 스펄전은 유머와 거리가 먼 경향에 저항했다. 그는 위트가 넘치는 이였고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했다. 위대한 스펄전은 복음에 대해서는 극도로 진지한 태도를 취했으나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펄전은 설교에 관해 “삼십 분 내내 사람들을 졸게 하느니 차라리 잠시 웃기는 것이 더 낫다”라고 말한 바 있다. 스펄전이 설교 중에 했던 어떤 익살맞은 유머에 대해 교인 중 한 명이 이의를 제기했을 때 그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할 수 있는 재미있는 표현들이 많았지만 그것 하나만 한 겁니다. 사실 이의를 제기하실 게 아니라, 이렇게나 많이 절제한 저를 칭찬해주셔야 해요. 자제하지 않으면, 저는 정말 웃기거든요.”스펄전이 유머를 무턱대고 쓴 것일까? 하나님에 관한 깊은 진리를 다룰 때 지나치게 히히덕거리는 것이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을까? 톰 네틀스(Tom Nettles)가 쓴 전기를 보면 설교자의 황제(Prince of Preachers)라 불리는 스펄전은 유머를 복음이라는 낚시 바늘에 다는 일종의 미끼로 보았음을 알 수 있다. 톰 네틀스는 이렇게 썼다.“비록 그의 유머가 저속하다 생각한 이들도 있었지만, 스펄전은 설교 곳곳에서 유머를 사용하는 것은 물고기를 유인하는 '미끼' 같은 것이라 믿었다. 스펄전은 당시 설교자들이 '지루하고 단조롭고 길기만 하고 뭔가 불쾌한 표정으로' 설교를 하기 때문에 회중석이 그렇게 텅 빈 것이라 했다.” 오늘날의 설교자들이 스펄전을 따라 해야 할까? 설교를 듣는 이들이 마음 편히 웃을 수 있게 하는 유머를 써도 되는 걸까? 필자의 생각에는 강단에서의 유머 사용에 관한 한 스펄전에게는 매우 균형 잡힌 관점이 있었던 것 같다. 그의 원칙은 “당신의 성향에 맞다면 유머를 사용하라. 하지만 유머가 복음 진리로부터 사람들의 주의를 빼앗거나 복음 진리를 훼손하지 않도록 주의하라”였다. 스펄전의 아내인 수지 스펄전(Susie Spurgeon)은 강단에서의 유머 사용에 관한 남편의 원칙을 다음과 같이 아주 명확하게 묘사했다. “남편은 유머를 지나치게 쓰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유머 사용을 일부러 피하지도 않았어요.” 내 자녀들은 익히 알고 있는 바이지만 나는 유머 감각이 출중한 사람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웃는 것이 좋고 진지한 사람들이 적절하게 유머를 사용하는 것을 참 좋아한다. 나는 적절하게만 사용하면 유머는 설교를 더 호소력 있게 만들 수 있다는 데 대해 스펄전과 생각이 같다. 그의 관점대로, 내가 내 설교에서 유머를 사용함에 있어 도움을 얻었던 가이드라인 네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당신의 성향에 자연스럽게 맞을 때에만 유머를 사용하라안 좋은 예를 먼저 들자면, 뼛속까지 진지함으로 가득한 어떤 설교자가 설교 중에 자기 아내에 대해 농담을 했다고 한다. 시시한 유머였을 뿐 아니라 자기 아내에 대한 아주 고약한 농담이 되고 말았다. 회중석에는 적막만 흘렀고 그 설교자는 망신을 당했다. 내가 그 설교자였다면 엄청난 수치를 느꼈을 것이다. 마틴 로이드존스(Martyn Lloyd-Jones)의 ‘설교와 설교자’(Preaching and Preachers)를 보면 그가 유머에 대해 ‘결코’ 반대하는 입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로이드존스는 이렇게 쓴다. “유머는 자연스러운 경우에만 설교에서 허용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저 웃기려고 애쓰는 이는 가증한 사람이며 결코 설교자로 세워져서는 안 된다. 회중의 환심을 사려고 주도면밀하게 유머를 쓰는 이들도 마찬가지다.”자신의 성향 자체가 그렇기 때문에 유머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현대 복음주의 설교자들의 예는 넘쳐난다. 스코틀랜드 억양이 그의 유머를 한껏 고양시켜주는 알리스테어 벡(Alistair Begg)이 있고, 맷 챈들러(Matt Chandler), 케빈 드영(Kevin DeYoung), 러셀 모어(Russell Moore), 트립 리(Trip Lee), 그리고 고(故) R. C. 스프로울(R. C. Sproul) 박사 같은 이들이 그 예다. 2. 유머는 절제하며 사용하라성경에도 유머가 나온다. 잠언은 현명하지 못한 아내의 어리석음을 재미있게 그려낸다. 또 솔로몬은 무기력에 빠진 이들에게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잠 6:6)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도 자신만의 풍자를 사용하셔서 바리새인들과 우리들에게 이르시기를 다른 이들의 눈에 있는 티를 보기 전에 우리 눈에 있는 들보를 빼라 명하신다(마 7:1–5). 성경 안에서 사용된 유머의 예는 더 있을 것이다.하지만 성경은 유머를 극히 제한적으로 사용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진지함을 요구한다. 우리가 하는 설교 역시 이를 반영해야 마땅하다. 3. 유머를 무턱대고 쓰지 말라내가 설교 사역을 시작하던 때 경험 많은 한 목사가 조언을 하길 유머 모음집을 하나 사서 웃긴 일화나 이야기들을 최대한 많이 머리에 넣어두라고 했다. “매 설교를 시작할 때마다 농담을 몇 개 던지면 회중들이 워밍업이 되는 거라네. 그러고 나서 본격적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거지.” 감사하게도 나는 에이드리언 로저스(Adrian Rogers)나 우리 가족이 출석하던 교회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성장했기에, 그 경험 많다던 목사의 말을 흘려들을 수 있었다. 유머는 우리의 설교 전달을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지 설교 자체를 지배해서는 안 된다. 허튼소리는 전혀 하지 않았지만 분명히 유머 감각이 있었던 로이드존스나 천성적으로 아주 쾌활했던 스펄전 역시 설교자는 그저 웃기는 것 자체를 위해 웃기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 했다. 강단에서의 유머는 천박해져서는 안 된다. 스펄전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의 종은 적용점 없이 진부한 농담이나 쓸데없는 이야기를 던지며 회중의 환심을 사려고 하는 연예인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중략] 성경 배우는 일을 재미있게 만드는 것과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히히덕거리며 웃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다.” 로이드존스 역시 지혜로운 조언을 준다.“설교에서 절대 유머를 쓰면 안 된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하지만 설교 사역의 위상 때문에, 그리고 우리가 가르치는 진리의 성격 때문에, 유머 사용은 최소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4. 유머가 하나님의 말씀의 중대함으로부터 사람들의 관심을 빼앗지 말아야 한다잘 쓰면, 유머는 회중에게 잠시 쉬어갈 수 있는 틈을 줄 뿐 아니라, 특히 그 유머가 우리 일상 생활에 적용이 될 때는, 진리를 깨닫도록 빛을 비춰주는 역할도 한다. 하지만 유머는 주의해서 다루어야 한다. 예를 들어 지옥에 대해 설교할 때 나는 결코 유머를 사용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에 대해 설명할 때, 죄의 치명성에 대해 가르칠 때나 회개를 촉구할 때 역시 유머를 쓰지 않을 것이다. 지옥에 대해 설교하면서 농담을 연이어 던지는 설교자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다. 그 농담 때문에 회중은 주제의 엄숙함으로부터 주의를 빼앗겼고 결국 전체 설교에 악영향을 미치고 말았다. 죽음은 우스운 것이 아니다. 죄에 대한 하나님의 분노 역시 웃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유머는 항상 적절한 상황에서만 사용하고 그 표현에 있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풍자와 희화로이드존스는 사람들을 웃기는 설교자들이 비판받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그는 유머 남용에 대한 위험 때문에 유머 자체를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주장했다. “유머의 남용을 방지한답시고 설교가 지루하고 특색도 생명력도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도록 주의하라.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잊되 우리의 대적이 우리를 노린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설교에서의 유머 사용은 결코 잘못된 길로 가지 않을 것이다.” 스펄전의 설교는 그의 진리에 대한 끓어넘치는 열정을 담아냈지만 그의 모든 설교가 항상 그런 식인 것은 아니었다. 스펄전은 교회사를 공부하며 하나님이, 예를 들자면, 마틴 루터(Martin Luther) 같은 이들을 사용하셔서, 유머를 통해 어두움에 빛을 비추셨고 당시의 부조리를 풍자하게 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웃음은 종종 어두움과 죄를 일격에 몰아내는 의의 정예 무기가 된다. … 눈물 만큼이나 웃음 속에도 거룩함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는다. … 우리는 조롱이라는 무기를 사용하여 사탄에게 대항할 수 있다. 종교개혁은 인간 안에 있는 유머 감각에도 힘입은 바가 크다는 것을 나는 강조하고자 한다. 루터의 친구들이 내놓았던 유머로 가득한 풍자와 희화화는 오히려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탄탄하고 무게 있는 논증들보다 더 독일인들의 눈을 열어주었고 사제직의 가증함을 보게 하는 역할을 감당했다.” 아멘.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은 주권자이실 뿐 아니라 그 자신이 행복하신 분이시다. 그렇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도 웃을 줄 알고, 다가올 날들에 대해서도 웃는 우리들이 되도록 하자(잠 31:25).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Should We Use Humor in Our Preaching?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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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
by 고상섭
2021-03-26
고난 주간이 다가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해 설교를 한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이 있지만, 이 땅의 고통과 악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이해할 수도 있다. 팀 켈러는 ‘팀 켈러, 고통에 답하다’에서 피터 버거의 말을 인용해서 인간의 고통의 해결책으로서의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사회학자 피터 버거는, 모든 문화는 고통과 고난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방법들을 구성원들에게 제공한다고 말하면서 기독교는 두 가지 기본적인 방식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바로 성육신과 대속의 교리다. 고통을 당하신 하나님 알베르 카뮈는 “죄 없는 하나님의 희생만이 무고한 이들에게 끝도 없이 쏟아지는 고문을 정당화 한다. 신이 당하는 비참한 시련만이 인간의 고뇌를 누그러뜨릴 수 있다.”라고 말했다. 신약 성경에는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위한 상상할 수 없는 위로들로 가득 차 있다. 절대자 하나님이 스스로 세상에 오셔서 고난의 쓴 잔을 경험했다는 것은 고난 당하는 이들에게 한없는 위로가 된다. 그분은 자신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기 위해 스스로 고난 당하신 것이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을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 이라고 가르친다. 자기 안에 신성의 모든 충만이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난을 받으셨다. 히브리서 5장 7절은 예수님이 이 땅에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시는 삶을 사셨다고 말한다. 거절과 배신, 가난과 학대, 낙심과 좌절, 사랑하는 이의 죽음과 극심한 고통, 그리고 죽음을 누구보다 더 절실하게 경험하셨다. 또 십자가에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최악의 고통조차 감당하셨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리는 고통보다 더 큰 고통이 없다고 하는데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잃어버리셨다.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까?”라고 부르짖으며 아버지와의 철저한 단절을 경험하셨다. 전능하신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스스로 자신의 힘을 버리고 약함과 어두움에 뛰어들었다는 이야기는 다른 종교에서는 상상조차 못할 일이다. 목회자인 존 딕슨은 ‘하나님의 상처’에 대해 강연을 한 적이 있었는데 메시지를 들었던 어느 무슬림 남성은 “우주의 창조주가 자신이 지은 피조물의 세력에 굴복하다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로군요”라고 말했다. 존 딕슨은 이렇게 대답했다. “무슬림 청년이 신성모독이라고 비난했던 사실을 크리스천들은 소중하게 간직합니다. 하나님이 상처를 받으셨다는 사실입니다.”신약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을 외면하고 등을 돌렸지만 주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셨다고 말한다. 세상의 모든 주요 종교 가운데 오로지 기독교만이 신이 친히 세상에 오셔서 스스로 고난과 죽음의 길을 걸으셨다고 가르친다.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세상에 가득한 악과 고통을 없애주는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실은 우리에게 악과 고통이 가득한 세상 속에 절망하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힘을 제공해 준다. 인간은 세상의 악과 고통이 왜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어떤 것이 그 이유가 될 수 없는지는 알게 된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지 않으시거나 우리를 보살피지 않으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류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안겨 주시려고 더없이 깊은 고난에 스스로 몸을 던지셨다.” 이것은 고난의 이유를 말해주지 않지만 고난 속에서 하나님이 여전히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명확히 이야기하고 있다. 어쩌면 하나님이 고난의 이유를 다 알려주신다고 해도 유한한 인간의 지혜와 지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른다. 어린아이와 부모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세 살짜리 아이는 부모의 행동이 이해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속내를 다 알지 못하더라도 부모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 안다면 신뢰하고 두려움 없이 살아가게 될 것이다. 아이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다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부모를 신뢰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친아들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셨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다른 무언가를 과연 아끼실까? 목숨을 내어주신 주님이라면 우리에게 더없이 유익하고 합당한 것들을 은혜로 아낌없이 베풀어 주시지 않을까? 사실 하나님은 인간의 머리로는 도무지 헤아릴 수 없는 선물을 이미 넘치게 주셨다. 사랑으로 악을 정복하신 하나님 성경은 예수님의 탄생을 전하며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치었도다”(마 4:16)라고 말한다.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세상의 빛이라면 어째서 이 땅에 가득한 고통과 어둠을 단번에 손보지 않느냐고 따지기도 한다. 세상에 있는 비극을 왜 멈추시지 않느냐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젊은 나이에 죽는 것을 택하기보다 직접 불의를 산산이 부수고 악을 끝내셨다면 어땠을까? 그 당시 모든 악을 없애주셨어도 계속 시간이 지나면서 악은 이어질 것이고, 지속적으로 악을 무너뜨리는 일을 계속 해야 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악과 어둠은 대부분 인간 내면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만약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악과 고통을 쳐부술 칼과 권세를 손에 쥐고 오셨다면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정의를 실현하는 대신 악을 견뎌내셨다. 두 손에 칼을 쥐시는 대신 못박히셨다. 오랜 세월 동안 전해온 기독교의 가르침을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우리 대신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우리가 받아야 할 징계를 대신 받으셨으므로 언젠가는 세상에 다시 오셔서 인간을 완전히 멸하시지 않고도 악을 심판하실 수 있다. 예수님은 로마의 압제를 끝내는 정치적 프로그램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인간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대신 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 주님께는 더 근본적인 회복 계획이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을 시작하시려고 이 땅에 태어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셨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우리가 속한 사회 속에서 마주치는 무수한 악 앞에서도 무기력해지지 않고 과감히 맞서고 견디게 한다. 또한, 우리 마음에 도사린 악을 몰아내는 특별하고 강력한 능력을 가진 신인류를 이 세상에 창조하셨다. 그렇게 예수님은 어두운 세상 속에서도 빛이 되신다. 우리에게 베풀어 주신 그 사랑 때문에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바른 길을 찾아갈 수 있는 소망을 가지게 된다.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 절망과 고통 속에서도 끊어지지 않는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그리고 그 목숨보다 소중한 사랑 때문에 우리는 소망 가운데 고난을 견디며, 마지막 날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고난을 이기며 살아가는 소망의 사람들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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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받지 못하는 리더십은 무너진다
by Matthew J. Hall
2021-03-15
재료 하나가 빠질 때 요리 전체를 다 망치는 경우가 있다. 어떤 것은 정말로 없어서는 안 되는 경우가 있다. 다른 사람을 인도할 때, 신뢰가 없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 신뢰야말로 리더십의 핵심이다. 다른 사람을 인도하라는 부름을 받았다면, 그것은 당신을 향한 사람들의 신뢰를 잘 관리하라는 부름을 받은 것과 다르지 않다. 학생은 선생을 믿고 싶어한다. 부부라면 서로를 믿기 원한다. 교인은 담임목사를 믿을 수 있어야 하고, 종업원은 그들의 관리자를 믿고 싶어한다. 신뢰가 실종될 때, 따르는 자들은 사라진다.나 역시 리더로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나의 역량을 신뢰하길 바란다. 그들이 나의 판단력을 믿기를 바라고, 또 다가올 도전과 기회를 잘 예측해서 우리 조직을 성공적으로 이끄는 혁신적인 역량을 가진 리더로 나를 신뢰하길 바란다. 나는 아내와 자녀들로부터도 그런 신뢰를 받고 싶다. 그리고 나는 이 글을 읽는 당신도 같은 생각일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이런 리더십 역량은 인격에 대한 신뢰에 균열이 생기는 순간, 한순간에 완전히 허물어질 수 있다. 만약에 나를 따르는 사람들이 나의 인격에 대해 의심을 하게 된다면, 내가 어떤 역량을 가졌는가는 더 이상 중요한 게 아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신뢰를 쌓고 또 강화할 수 있을까? 네 가지 실질적인 방법이 있다. 1. 진실을 말하라언제나 그래야 한다. 기독교인 리더십이라면, 진실을 말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얼마나 쉽게, 보이지 않게, 서서히, 거짓의 늪으로 빠질 수 있는지, 또한 갖은 방법을 다 동원해서라도 진실을 가리려고 하는지 우리는 알고 있다. 당연히 누군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거짓말을 하지는 않는다(이것은 영적으로 아주 두려운 상황일 수도 있다). 그러나 진실을 반만 말하면서 어떤 사실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를 남겨두는 것은 어떤가? 만약에 함께 일하는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면? “글쎄, 저 사람이 말하는 건 10퍼센트 정도만 믿어야해. 너도 알잖아? 저 사람 얼마나 과장이 심한지.” 집, 직장 또는 교회 어디에 있든지 당신이 이끄는 사람들은 언제나 당신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성경 전체에 걸쳐서 드러난 하나님은 철저하게 믿을 수 있는 존재다. 하나님은 언제나 진실만을 말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믿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이 당신에 대해서도 같은 말을 할 수 있는가?2. ‘미안하다’고 말하라당신이 리더라면 ‘미안하다’라는 말에 익숙해져야 한다. 당신은 이 말을 자주 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은 사람들을 실망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 편에서, 판단 실수를 할 수 있다. 플랜 A가 맞다고 생각했는데 틀릴 수 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화나게 할 수도 있다. 이와는 다르지만, 당신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는 또 다른 경우가 있다. 당신의 판단이 분명히 옳지만 그것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들게 해야만 하고 때로는 그들의 트라우마까지 자극해야 하는 경우다. 꼭 대단한 일 때문에 누구를 해고하거나 누구를 강등시키는 것은 아니다. 동료에게 또는 가족에게 또는 교회 지체에게 죄를 지었다면, 그것은 사과할 일이다. 나 자신을 변호하거나 정당화하고 싶은 충동을 이겨내야 한다. 당신을 비판하는 사람들이 옳을 때, 분노를 쏟아내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한다. 물론 어떤 리더에게 있어서 “미안하다”라는 말이 가장 힘든 말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말 자체를 하지 않는 리더를 만난 적이 있을 것이다. 만약에 당신이 그런 리더라면,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그 말을 빨리 그리고 겸손하게 하는 법을 배워라. 그렇게 할 때, 장기적으로 리더로서 당신의 영혼에 도움이 될 것이다. 3. 실패를 잊지 말고 성공을 나누라혹시나 무엇인가 잘 되면 다 자기가 잘 해서 그런 거라고 말하고, 또 뭔가가 잘못되는 경우에는 절대로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리더를 본 적이 있는가? 왜 매출이 늘었을까? 물론, 리더 때문이다. 왜 매출이 줄었을까? 그것은 절대로 리더 때문이 아니다. 이런 리더는 분명 마케팅 부서에서 볼 수 있다. 나는 이런 유형의 리더는 세상에서만 만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이런 식의 세상적인 나르시시즘은 너무도 쉽게 기독교인 리더와 기독교 단체를 오염시킨다. 잘 인도하다는 것은 비난을 피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당신이 중요한 리더의 역할을 하고 있다면, 비록 당신의 결정 때문에 생긴 일이 아니라고 해도 당신의 책임 하에 문제가 생겼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리더로서 책임을 져야 한다. 리더가 그렇게 할 때, 신뢰가 쌓인다. 충성심은 깊어진다. 그러나 리더가 책임을 회피하고 아랫사람에게 손가락질을 할 때, 얼마나 빨리 직원들이 다른 회사에 이력서를 내는지 보게 될 것이다. 이 원칙은 집이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를 인도할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것은 집에서도 마찬가지다. 4. 책임감과 독점욕의 차이를 배우라이것은 미묘하지만 아주 위험한 차이다. 그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당신을 신뢰하게 하는 데 아주 큰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인도한다는 것은 어떤 목표, 전략, 그리고 사람 등에 관해서 당신이 일종의 무한 책임을 진다는 의미다. 그것은 종종 가장 먼저 출근해서 가장 늦게 퇴근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종종 너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잔소리하지 않고, 대신 전체 그림을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각을 키우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리더라면 맡은 책임과 관련해서 결코 이런 식의 한가한 소리를 할 수는 없다. “그런 건 신경 안 써.” 왜냐하면 리더는 책임지는 자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혜로운 책임감과 독점욕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우리'라고 말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나'라는 주어를 사용해서 말할 수도 있다. 당신이 함께 일하는 사람들, 특히 당신 밑에 있는 사람들은 '당신의 사람 또는 당신의 팀'이 아니다. (그들이 믿는 사람이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기독교인의 시각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존재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우리가 가진 권위와 영향력을 극대화하여, 결국 그들이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굴복할 때 누리는 기쁨을 알고 그 기쁨이 더욱 충만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차이를 이해함으로써 당신은 훨씬 덜 자기 방어적인 리더가 될 수 있고 또한 아주 작은 일에는 반응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비판받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일수록 자기 방어에 빠져 상대를 공격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다른 의견을 내는 경우에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개인적인 공격으로 받아들인다. 팀원이 다른 곳으로 떠났을 때, 독점욕이 강한 리더는 그것을 배신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적 독점욕이 강한 리더보다 리더를 향한 신뢰를 더 쉽게 깨부수는 것도 없다. 수단으로서의 신뢰신뢰는 정말로 효과적인 리더십의 통화 수단(currency)이다. 그것이 없이는 다른 사람을 이끌 수 없다.신뢰가 조직 내 새로운 리더에게 부여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아주 잠시 뿐이다. 궁극적으로 리더라면 누구나 자신만의 신뢰를 구축해야 한다. 신뢰를 쌓는 데는 수 년이 걸리지만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리더로서 누구나 실수할 수 있다. 당신의 한계와 약점을 언제나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누구나 리더로 살다보면 사람들의 신뢰를 잃을 수도 있다. 그러나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 구주는 불완전한 리더들을 통해서 일하신다는 것이다. 우리 구주에게 완전한 사람은 없다. 우리는 쓰러져도 구주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다. 그것은 정말로 좋은 소식이다. 원제: The Non-Negotiable Virtue in Leader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목회
리더십
인격
신뢰
진실
책임
미덕
역량
복음중심성은 강단에서 드러난다
by Yancey Arrington
2021-03-13
많은 개척 교회들이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좋은 일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말이 정확히 뜻하는 바는 무엇인가? 교회 개척자가 매 설교마다 예수님을 언급해야 한다는 말인가? 예배마다 구원으로의 초청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야 한다. 개척된 교회가 얼마나 복음중심적인지 '테스트' 해보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강단을 관찰하는 것이다. 어떤 교회가 홈페이지에 '복음중심적'이라는 말을 자주 썼더라도, 그 교회가 복음의 중심성을 진정한 가치로 여기는지, 아니면 그저 유행을 따르는 것인지는 주일에 그 교회 목회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왕이 승리하셨다복음중심 설교의 구체적인 내용들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다음 예화를 보라.침략군과 전투를 벌이기 위해 성을 나서는 왕이 있다고 상상해보라. 왕이 패하면 그는 자신의 참모들을 성으로 돌려보내 안 좋은 소식을 전한다. 그뿐 아니라 참모들은 성 안의 백성들에게 “적군이 진격해오고 있소. 저격수들은 이쪽으로, 전차들은 저쪽으로 배치하시오”라고 말하며 새 전략과 기술을 안내해 줄 것이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오로지 백성들을 준비시켜 적들을 무찌르기 위해서다. 백성들은 이제 전쟁의 승패가 자신들의 어깨에 달렸음을 직감하고 엄청난 부담감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만일 왕이 적들을 제압한다면, 그는 사자들을 보내 ‘좋은’ 소식을 전할 것이다. 그들은 “왕이 적들을 무찔렀소! 우리 주군께서 백성들에게 선사하시는 평강과 복을 누리시오!”라고 외치며 성 안의 광장으로 달려 들어갈 것이다. 이 기쁨의 선언에 백성들은 그들의 일상에서 자유를 다시 만끽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들의 왕을 향해서는 사랑과 감사의 마음을 품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중심적 교회란, 이를테면 십자가에서 성취하신 사역으로 하나님께서 승리를 쟁취하셨다는 사실을 설교, 목회, 선교에서 힘써 강조하는 교회를 말한다. 진실로 왕이 승리하신 것이다. ‘훌륭한 충고’ 와 같은 설교이런 식의 접근이 설교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먼저 큰 그림을 그려보자면, 전형적인 요즘 교회는 자기 설교가 실제 삶과 '연관성'이 있고 '실용적'이라고 홍보한다. 많은 교회 홈페이지에는 “우리 교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이 진리라는 성경적 원리를 통해 여러분의 매일의 필요를 어떻게 충족시켜 주는지 오셔서 확인하세요”와 같은 문구들이 적혀 있다. 이에 더해, 소위 교회 성장 '전문가'들은 교회를 개척하는 이들에게 이렇게 해야 많은 교인들을 유입시킬 수 있고, 이를 통해 이제 막 시작한 개척 교회가 역동적으로 자랄 수 있는 탄력을 충분히 얻을 수 있다고 조언한다. 그 결과, 회중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재정, 가정, 결혼 등에 관한 주제 설교의 불균형적인 반복뿐이다. 너무도 자주, 그런 설교는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 사역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실용적인 적용에 오히려 더 초점을 맞춘다. 요약하자면, 사람들이 얻어가는 것은 복음이 아니라 일련의 '괜찮은' 충고 정도라 하겠다. 사실, 그 적용이라는 것은 최신 자기 계발서나 토크쇼 출연자들이 하는 말들로부터 건질 수 있는 것들과 거의 흡사하다. 그런 설교가 바라는 바는 사람들이 실제적인 '할 일'을 깨알같이 적은 설교 노트를 가지고 교회를 나서서 그것들을 가정, 직장, 학교, 그리고 삶의 기타 국면에서 적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종류의 설교들이 성경을 전혀 언급하지 않거나 예수님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훌륭한 충고'와 같은 설교를 하는 이들이 설교 결론부에 예수님을 슬쩍 끼워넣는 것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구원하기 원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기도 한다. 그래서 기도문을 따라하거나, 강대상 앞으로 나오거나, 방문카드를 작성하거나 하는 것으로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강조하곤 한다. 다시 말하지만, 이런 식의 설교 전략은 개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교회에는 효과적일 수도 있다. 출석한 이들이 설교가 아주 통찰력 있고 실용적이라고 칭찬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결국 설교 내용이 교인들의 관심사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춘 것이다. 그들은 인생에서 '성공'을 원하기에 그 성공을 쟁취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어떠한 조언이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런 설교의 잠재적인 문제점들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훌륭한 충고식 설교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성경의 초점을 하나님에게서 우리에게로 옮겨가게 한다는 것이다. 그게 바로 우리를 슬프게 한다. 예수님이 성경의 전체요 본질이 아닌 성경 이야기의 ‘일부’로 전락되고 만다. 결과적으로, 이런 종류의 설교는 듣는 자들로 하여금 구원에는 예수님이 필요하지만 그 외의 영적 성숙은 여러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자기 스스로에게 달린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훌륭한 충고식 설교는, 듣는 이들을 은혜가 아닌 율법에 뿌리 내리게 하기 때문에 얼마나 선한 의도로 했는가에 상관 없이 실상 복음으로부터 분리된 설교다.그런 설교들이 문제가 있는 이유는, 진정한 복음은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나의 성장을 가능케 할 뿐 아니라, 성장을 강화하고 유지시키기까지 한다고 가르치기 때문이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시작하기 위해 지나가야 하는 문 같은 것이 아니고, 우리가 들어가 살아가는 방 자체다. 복음중심 설교는, 그리스도인의 성장이 그리스도께서 완수하신 사역과 성령의 신실한 권능에 의해 시작되고 뿌리를 내리는 것임을 늘 반복해서 강조해야 한다. 바울의 설교바울은 “훌륭한 충고”식 설교에 대해 뭐라 말할까? 바울은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고 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그의 사역과 설교를 세워간다. 예수님에 대해 여러 가지를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바울은 십자가에서의 그의 사역으로 곧장 나아간다. 다시 말해, 바울 역시 '실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들에 관해 가르쳤지만, 그는 그렇게 함에 있어 예수님이 또 하나의 좋은 인생 코치, 자기 계발 전문가, 문제 해결사, 혹은 성공에 관한 구루(guru)인 것처럼 보이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바울의 설교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다른 선택지가 없고 다른 예수님이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복음중심적 교회들이 매일의 삶의 다양한 영역 속에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에 대해 전혀 다루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교회들은 행함(doing)을 의도적으로 존재(being)와 연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서 우리의 모든 행함은 십자가에서의 그리스도의 사역, 즉 그 결정적인 “다 이루었다”(요 19:30)에서 흘러나온다는 뜻이다.그래서 복음중심적인 개척 교회에서 선포되는 설교에서는, 복음의 좋은 소식이 설교의 결론 뿐 아니라 본론 역시 규정한다. 궁극적으로 설교자는 자문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선포자이기 때문이다.이 세상이 필요로 하는 이들은 (단순히) 훌륭한 충고를 해주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 세상에 필요한 것은 복음을 깊이 이해하는 교회, 즉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에 중심을 두는 설교를 행하는 교회다. 이러한 설교는 회중의 '행함'이 그리스도의 “다 이루었다” 위에 세워질 수 있게 한다. 원제: How Can You Tell if a Church Is Gospel-Centered? Start with the Pulpi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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