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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아무나 설교자로 부르지 않으신다
by Matt Hodges
2018-11-21
콜로라도의 한 교회가 올린 구인광고가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들은 스티븐 퍼틱(Steven Furtick)과 같이 최고의 설교자가 작성해 준 설교 원고를 외워서 읽을 목회자를 찾고 있었다. 당신은 어떤 한 편의 설교를 듣고 난 후, 강력한 힘을 느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당신에게 “왜 그 설교자를 모방하지 않죠?”라는 질문을 던질지 모른다.물론 그들이 갖는 의문이 올바른 생각은 아니다. 하지만 이러한 생각은 오늘날 많은 교회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즉, 교회가 목사에게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설교를 통한 특별한 의사소통 기술이다. 특히 이제 막 교회를 시작하는 개척 교회 목사들이 이 논리에 취약한 편이다.비교의 위험교회 개척자는 늘 불안감을 안고 산다. 자신을 비슷한 형편에 놓인 다른 목사와 비교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우리는 날마다 온라인(소셜미디어, 팟캐스트, 설교 클립 등)을 통해 훌륭한 설교들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자연스럽게 온라인에서 듣거나, 읽은 설교들과 나의 최근 설교를 비교하게 된다. 물론 항상 자신의 설교가 그들보다 더 탁월하길 원한다. 하지만 이는 쉬운 일이 아니다. 설교만큼 큰 좌절과 빠른 포기를 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서서히 우리는 앞서 말한 설교자 구인광고의 거짓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탁월한 설교자가 되고 싶다면, 내가 ‘그 설교자’처럼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설교자의 타고난 기질, 카리스마, 자연스럽게 결론에 도달하는 전개 방식, 확신에 찬 말투 등이 나에게는 없는 부분이라고 생각하며 자책한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그 설교자처럼 재미있게 말할 수 있지?’, ‘나도 그 설교자처럼 열정적인 모습을 보여 주어야만 해’,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말겠어’ 등의 생각들로 많은 시간을 보낸다.물론 탁월한 설교자로 성장하기 위해 노력하다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 교회 개척자로서 최고의 설교를 위한 노력만큼 중요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장을 이루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 특히 설교에 대해 특별한 은사를 가진 설교자들을 통해 배우는 것은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배운다는 것이 모방하는 것이 아님을 늘 기억해야 한다.아무 생각 없이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모방하는 것은 자신의 강단에 대한 자신감과 신뢰를 약화시키는 행동이다. 다른 설교자를 무조건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길 때 기억하면 좋을 두 가지 조언을 제시하고자 한다.1. 설교는 단순한 의사소통을 넘어선 행위이다당신은 커뮤니케이터로 성장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설교자로 성장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설교는 단순히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것을 넘어선 행위이기 때문이다. 설교자는 일반적인 연설가 혹은 커뮤니케이터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향해 설교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갈 때 …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1-5).바울은 설교자의 확신에 찬 어조와 설득력 있는 언어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다(행 17장). 바울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을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설교가 설득력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바울이 살았던 당시의 궤변가들과 수사학자들이 즐겨 사용했던 ‘설득을 위한 스킬’들이 자신의 설교에서는 결여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바울의 모든 설교는 그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능력이 있었다.우리는 종종 다른 설교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설교를 꾸미려는 욕망에 휩싸일 때가 있다. 이는 설교의 능력이 성령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는 잘못된 가정에서 비롯된다.2. 하나님은 양떼를 다른 사람이 아니라 당신에게 주셨다 나는 매트 챈들러(Matt Chandler)가 교회 개척자들을 방 한 가득 모아 놓고 팀 켈러(Tim Keller)를 따라하려는 시도를 멈추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도 아는 바와 같이 당신은 그리 똑똑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서 팀 켈러 목사님이 설교하기를 바라셨다면, 하나님은 그분을 당신 교회의 목사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우리가 성경에서 확인하는 하나님은 주로 지역 교회를 통해 진리의 말씀이 선포되기를 원하신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실 때는 설교단도 함께 맡기신다는 의미이다.이 말을 믿기 어려운가? 당연하다. 그러나 당신이 목사로서 성도들에게 수차례 했던 이야기를 떠올려 보라. 당신은 분명 “하나님은 여러분을 위한 특별한 목적을 가지셨습니다. 살고 있는 장소나 직장 등 삶의 모든 영역에 당신을 세우신 분명한 이유가 있음을 믿으십시오”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 믿음은 자신에게 맡기신 설교단에 대해 의심하는 목사에게도 똑같이 적용되어야 한다.하나님은 무한한 지혜 가운데 당신을 통해 교회를 세우기 위해 계획하시고, 당신을 선택하셨다. 만약 다른 사람을 원하셨다면, 그 사람을 당신의 교회로 인도하셨을 것이다. 모방이 아닌, 성숙설교자로서 배움과 성장을 지속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종종 배움과 모방 사이의 경계를 없애고 싶은 유혹이 찾아올 때가 있다. 아마도 당신의 교회가 생각만큼 부흥하지 못하거나, 다른 교회들이 먼저 부흥, 성장하는 모습을 보는 순간일 것이다. 그때 당신은 자신이 설교에 필요한 요소들을 충분히 갖추었다는 것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아 불안감을 느낄 것이다.지금이다! 바로 그때, 당신은 마음속의 거짓과 싸우고, 진리를 고수해야 한다. 하나님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당신을 ‘그 교회’의 설교자로 선택하셨다. 당신이 믿는 그분은 가장 선하신 분이며, 이 세상의 주권자이시다.하나님이 당신과 교회의 주권자이심을 알고 설교하라. 분명 성령님이 당신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할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주셨음을 알고 설교하라. 당신의 가치는 설교에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당신이 가치 있게 되었다는 확신을 갖고 설교하라. 당신은 매주, 매순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특권을 가진 설교자임을 잊지 말고 설교하라.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od Didn’t Call Someone Else to Preach to Your Church번역: 김형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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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에게는 어떤 친구가 필요한가?
by Matthew J. Hall
2018-11-20
리더가 되는 일은 외로운 모험의 길을 걷는 것일까? 교계 안팎에서 리더십에 대한 권위 있는 이들의 의견을 들어보면, 리더에게는 대체로 외로움이 따름을 알 수 있다.리더는 가끔 홀로 서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험은 리더로 하여금 의사 결정과 중압감의 부담을 완전히 이해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끼게 할 수도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CEO의 절반이 자신의 업무와 관련하여 외로움을 느낀다고 한다.교회 리더들도 외로움으로부터 자유롭지 않다교회 리더들에게는 짊어져야 할 고유한 부담들이 있다. 그런 그들에게 우정은 필수요소이다. 나는 제한적으로 리더의 역할을 부여 받은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 축에 속한다. 나는 경험과 반성을 통해, 즐겁고 효과적인 리더십을 위해서는 우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우정은 운이 좋은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사치 그 이상의 것이다. 우정은 삶의 만족도를 높여 준다. 우정으로 인해 사람답게 사는 삶에 대해 배우게 된다. 감사하게도 교회 리더들도 그들을 위한 우정을 예비하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다.역사학자 마틴 마티(Martin Marty)의 현명한 말을 들어보자. “위인들의 삶에서 우정의 질이나 결여는 그들에 대해 다른 특징들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해 준다.” 나는 종종 극도로 개인주의적인 서구 사회에서 살며, 우리가 오래된 진리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마음이 든다. 하지만 잠시만 생각해 보라. 기독교 역사에서 많은 위대한 인물들이 자신의 소명을 우정에 의존했다. 여기에 내가 하나님의 은혜로 계속해서 배우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배워 나갈 세 가지 교훈이 있다.1. 참된 친구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해 준다우리의 관계는 하나님과의 교제를 닮았다. 그리고 그런 우정의 기초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본질적인 것이다. 온 우주의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에게 말씀을 통해 자신을 계시하셨다. 하나님이 우정의 행위로써 피조물에게 자신을 계시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하나님과의 교제는 진실을 말하기를 요청한다. 따라서 하나님은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분으로서 경배와 신앙의 대상이 되신다.가장 참되고 최상의 상태에 있는 인간의 우정은 이 진실을 반영한다. 친구들은 다른 사람들과 자신 그리고 복음에 대해 진실을 말해 준다. 리더십은 판단을 내리고 현명한 조치를 내리는 일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리더가 이끌어야 하는 사람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 대한 판단이 필연적으로 개입된다. 나는 종종 나의 판단이 잘못된 정보에 기반했거나 불완전했음을 발견할 때가 있다. 그때는 더 정확한 관점을 제공해 줄 참된 친구가 필요하다. 누군가 리더를 실망시킬 때, 그들을 해고하거나 관계적으로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는 일은 쉽다. 그러나 친구는 눈에 보이는 것 이상의 일들이 일어나고 있음을 설명해 줄 수 있다. 친구는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에 대해 최선의 상황을 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 필요한 경우, 친구는 공동체의 사명에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주의와 경고를 대신해 준다. 우리에게는 이러한 친구가 필요하다. 오직 진정한 친구만이 리더를 위해 그런 행동을 해 줄 수 있다.또한 친구는 자신에 대한 진실을 알기 위해서도 필요하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리더들은 자신에 대한 평가에 대해 취약하다. 죄와 교만은 자신의 약점들은 과소평가하고, 능력과 덕목들은 과장하는 일을 즐겨한다. 간혹 아부하기 위해서나 혹은 당신을 실망시킬까 두려워서 이런 사각 지대에 머무르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진정한 친구는 선지자적 용기를 가지고 리더의 책임을 지적한다. 당신은 친구를 교만으로부터 당신 자신을 지켜 주는 은혜의 선물로 보는가?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크리스천 친구는 우리에게 복음에 대해 진실을 이야기한다. 그들은 우리 앞에서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용어들로 복된 소식을 상기시켜 준다. 친구는 리더에게 스스로 죄인이라는 사실과 매일 구원의 은혜가 필요함을 가르쳐 준다. 그리고 모든 좋은 것들은, 심지어는 리더로서의 역량까지도 전적으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임을 상기시켜 준다. 또한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동체에서의 성공이나 지위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발견하는 일임을 일깨워 준다. 진정한 친구는 사라져 버릴 세상의 것이 아닌, 영원히 지속될 하늘의 것에 희망을 갖도록 우리를 도와준다.2. 참된 친구는 자기의 유익이 아니라 사랑으로 움직인다우정은 선호적인 사랑이다. 기독교적 우정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자신보다 더 선호함을 의미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친하게 지낼 수 있지만, 참된 우정을 갖기는 쉽지 않다. 우리의 삶은 필요에 의해 우호적인 문화를 요구하는 제도들과 조직들 속에 묻혀 있다. 우리는 복도에서, 회의에서, 사교석상에서 동료들을 만난다. 온정, 예의, 우호적인 선의의 문화는 분명 건강한 조직적 기풍의 본질적인 특징이다. 하지만 직업적인 대화들과 순수한 거래 관계를 뛰어 넘는 참된 우정은 보기 드문 선물이다.그 이유는 만물의 태초에 기초하고 있는 오래된 진실이다. 우리는 분명 하나님을 위해 창조되었지만,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도 창조되었다. 이 계획의 중심에는 사랑의 역동적 힘이 자리 잡고 있다. 이기심은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들을 거래의 기회로 삼게 한다. 그리고 안정, 동의, 확인, 쾌락을 위한 나의 필요를 만족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도구화하게 한다. 그러나 삼위일체적 관계 속에서 흘러 넘치는 사랑은 자신을 추구하지 않는다. 사랑은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다.우정의 상업화는 우리로 하여금 셀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관계를 맺게 한다. 심지어 사람들을 일종의 서비스로 바라보게 한다. 내재적 삼위일체 안에 있는 기쁨의 교제를 본받는 대신 우정은 훨씬 더 가치가 떨어지는 목적을 위해 이용되기도 한다. 죄로 인해 우리 모두는 우정에 있어 왜곡되고 편향되어 있다. 교회 리더들은 이기심이 교묘하게 우정으로 가장하는 구체적인 방식들에 대해 주의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우정의 모습을 한 다른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분명 치명적인 모조품이다.3. 참된 친구는 당신의 리더십이 실패했을 때도 곁에 남는다일정한 시점이 되면 당신의 리더십은 약화될 것이다. 이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일이다. 하지만 실패는 이 과정을 가속화시킨다. 친구들처럼 보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성공의 시절을 보내는 자신을 발견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회사가 망하고 조직이 파산하거나 또는 당신이 더 이상 역량과 기술로 명성을 얻지 못한다면 어떤 일이 생기겠는가?성경에는 우정을 오래 지속되는 것으로 그리고 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잠 17:17).인생을 살다가 위기의 순간을 만나면 당신의 형제자매들이 함께할 것이다. 그러나 친구들은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과 함께한다. 형제자매는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주어진 것이다. 하지만 우정에는 우정을 훨씬 달콤하게 만드는 자발적인 성질이 있다. 친구는 우리를 거부하고 물리칠 수 있다. 이러한 선택적인 역학은 우정을 위협한다. 하지만 그로부터 형용할 수 없는 기쁨과 사랑을 위한 잠재력이 드러나기도 한다.당신이 만일 리더이고 주변에 친구들이 많다고 자만한다면, 너무 확신하지 말기 바란다. 한편, 직업적 관계의 피상성과 기회주의적 성격을 너무 의식하여 냉소적이 되지 않도록 노력하라. 훨씬 더 성경적이고 현명한 전략은 현실주의적으로 관계에 접근하는 것이다. 냉소주의는 당신의 외로움을 악화시키고, 타인을 불신하게 만들며, 우정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빼앗을 것이다. 현실주의는 당신에게 참된 우정의 가치를 밝은 눈으로 보게 할 것이다. 즉 다른 사람들로 인해 실망감을 느낄 때, 환멸로부터 당신을 지켜 줄 것이다.참된 친구는 모든 이들이 떠났을 때에도 계속 당신과 함께할 것이다. 이런 종류의 충성과 신실함은 우리에게 더 큰 실재를 보여 준다. 즉 우정을 완전하게 지니고 계신 분, 바로 하나님이라는 실재를 보여 주는 표지가 된다. 한 찬송가의 가사가 이를 확실히 보여 준다. “죄인들의 친구 예수여! 내 영혼의 사랑 예수여! 친구들은 날 버리고 대적들은 날 해하나 구주는 날 온전케 하시네.”면식 관계와 친구아마도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는 친구의 수는 적을 것이다. 사회관계망(SNS)과 유사 우정의 시대 속에서, 우리를 쉽게 그릇된 방향으로 인도하는 유해한 모조품들이 존재한다. 당신에게는 아마도 수백 명의 ‘지인’들이 있을 수 있지만, 진정한 친구는 서넛 정도 밖에 없을 확률이 높다. 이 말이 실망스럽게 들리는가? 당신은 아마도 우정의 본질을 오해했거나, 잘못된 기대들로 인해 반복적으로 좌절을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많은 이들이 C. S. 루이스가 우정과 교제를 구별한 설명에 혼란스러워 한다. 그의 말을 들어보자. “우정은 둘 또는 그 이상의 동료들에 의해 발생한다. 곧 다른 이들이 가지고 있지 않아서 마지막까지 자신만의 고유한 보물(또는 부담)이라고 믿었던 어떤 통찰이나 관심, 혹은 선호를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의 순수한 교제로부터 출발한다.”다시 말해, 우정은 “뭐라고요? 당신도요? 나는 내가 유일한 줄 알고 있었는데”라는 말들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he Kind of Friend Every Leader Needs번역: 주영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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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rad Wheeler
2018-11-16
지난주에 나는 우리 교회의 주일예배 설교를 준비하는 데 약 25시간을 할애했다. 사무엘상 9-11장을 본문으로 한 설교였다. 이 설교에서 나는 전체 본문을 먼저 읽고, 그 다음 40분에 걸쳐 그 의미를 설명했으며, 마지막으로 이를 회중에게 적용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숙고하는 데 이처럼 긴 시간을 할애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회중이 나의 (때로는 고통스러운) 혼잣말을 들으려고 시간을 바치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도 예전에 이런 질문들을 받은 적이 있다. 또는 가까운 친구들이 나를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질책하기도 했다. “왜 너는 예배의 다른 부분보다 설교를 특별히 중시하니?” “그렇게 하는 방식은 합리적, 이성적, 체계적 강론을 선호하는 서구 문화를 반영하는 건 아니니?” “네가 말하는 내용의 95%는 아무도 기억하지 않아. 성도들은 시간 허비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하지만 지역 교회에는 설교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시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말씀을 듣는다나는 앉아서 누군가의 말을 듣는 것에 별 흥미가 없다. 그보다는 영화를 통해 마음이 움직이고, 요란한 드럼 소리에 힘이 나며, 예술 작품에 감동을 받는다. 그러나 성경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장면은 하나님의 백성이 모여 그분의 말씀을 듣는 모습이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잠잠해야 한다.하나님은 출애굽 당시, 그 백성과 더불어 언약 관계를 세우셨다. 이때 그들에게 함께 모여서 말씀을 들으라고 명하셨다(출 24:7).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대적들을 앞에 두었을 때, 하나님은 그들을 20마일 북쪽으로 나아가게 하신 후에 다시 둘로 나누어 각각 맞은편 절벽 앞에 세우셨다. 그곳의 깎아지른 듯한 두 산들이 자연적인 대강당 역할을 했다. “여호수아가 율법책에 기록된 모든 것대로 축복과 저주하는 율법의 모든 말씀을 낭독하였으니 모세가 명령한 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온 회중과 여자들과 아이와 그들 중에 동행하는 거류민들 앞에서 낭독하지 아니한 말이 하나도 없었더라”(수 8:34-35). 남방으로 기습 공격을 전개하는 와중에 그러한 일을 행한 것은 의외의 장면이다. 하지만 그것은 보통의 전쟁이 아니고, 그들은 보통 민족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창조한 말씀이 곧 자기 민족의 삶을 규정짓는 말씀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그들은 전쟁 중에도 말씀을 놓지 않았다. 여러 해 후에, 요시야가 언약 백성을 하나님께로 돌이키게 할 때에도, 그는 “여호와의 전 안에서 발견한 언약책의 모든 말씀을 읽어 무리의 귀에 들려” 주었다(대하 34:30). 본토로 귀환한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모였을 때, 느헤미야는 에스라를 나무 강단에 세웠다(느 8:4).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느 8:7), 에스라와 서기관들이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였다(느 8:8). 누가복음에서 예수님은 회당에 들어가셔서 두루마리에 적힌 이사야서를 읽으신 후에 다시 그 내용을 가르침으로써 공적 사역을 시작하셨다(눅 4:14-22). 사도행전 2장에서 사람들이 구원받은 것은 복음과 관련된 다른 책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바로 베드로의 공개적인 요엘 2장 강해를 통해서였다. 사도행전 6장에서 집사들이 세워진 것은 사도들로 하여금 자유로이 하나님 말씀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었고(행 6:2),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전하라고 당부했다(딤후 4:2). 이외에도 얼마든지 성경 속 예를 더 들 수 있다. 우리의 눈은 마음을 흥분하게 하지만, 우리의 귀는 영혼의 힘을 얻게 한다. 우리는 천국 문과 지옥 불의 장면을 눈으로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모여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말씀을 전달하는 설교는 성경 읽는 방법을 가르친다얼마 전에 데이비드 웰스(David Wells)는 복음주의자들이 더 이상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용기를 지니고 있지 않음을 한탄했다. 오늘날 우리는 어떤 의미에서든 크리스천으로서 용기를 지니기 위해 애쓰고 있다. 최근 더욱 불거지는 성(性) 문제와 이와 관련된 문화적 태풍이 덮쳐올 때, 당신은 이에 대해 대항할 말을 가지고 있는가? 만일 없다면, 이는 성경에서 길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성경에서 하는 말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혹은 우리가 성경을 도덕적 이야기 내지 이솝 우화의 종교버전쯤으로 여기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교회 생활의 핵심으로 보전한다면, 특히 성경의 연속적인 본문을 연이어 설교함으로써 그렇게 한다면, 교인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게 될 것이다.성도들은 성경 읽는 법을 배우기 위해 굳이 신학교에서 수업을 들을 필요가 없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실한 설교다. 곧 하나님의 창조적인 말씀의 능력, 첫 아담의 실패, 희생 제사의 필요성, 둘째 아담과 새 에덴에 대한 약속을 촘촘하게 연결시켜 주는 설교를 들려주어야 한다.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이 하신 일과 예수님이 이루시는 새 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주는 설교가 필요하다. 내가 이전에 섬기던 교회들은 비록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했지만, 그 말씀을 이를테면 채굴할 금이 가득한 광산처럼 여기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지나가는 길에 주울 수 있는 몇몇 자갈들이 흩어진 작은 언덕 정도로 여겼다. 다행히도 나는 이후에 풍성한 성경 주제들을 세밀히 연결시키고, 또 그 모든 내용들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가리키는지를 들려 주는 교회를 만나게 되었다. 그 때의 설교가 바로 금광을 캐내는 것과 같은 말씀이었고, 나는 비로소 확신과 용기를 지니고서 구약성경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와 가르침의 핵심으로 삼을 때, 성도들이 성경 읽는 법을 배울 뿐만 아니라 스스로 성경 말씀을 깊이 묵상할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면 교인들의 삶이 변화한다만일 설교 내용의 대부분을 금방 잊어버린다면 그 설교가 무슨 유익이 있을까? 하지만 성도들은 들은 내용을 모두 잊어버리지 않는다. 그들은 하나님, 결혼, 재물 등에 관한 마음을 움직이는 설교를 기억할 것이며, 이런 설교들로 인해 변화를 얻을 것이다. 따라서 설교 자체를 무익하게 여겨서는 결코 안 된다.한편의 설교가 교인들의 마음에 영원히 머물러야 하는 건 아니다. 설교가 그들의 삶을 변화시킨다는 건 그런 의미에서가 아니다. 그보다는 곧바로 이어지는 다음 주일까지 성도들의 마음을 지켜줄 수 있다는 의미에서 성도들을 변화시킨다는 뜻이다. 한 번의 설교가 한 주를 지켜 주는 말씀인 것이다. 즉, 매주의 설교는 우리를 다음 주일의 예배로 이어준다. 천국에 가는 날까지 그러할 것이다. 그리고 천국에서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거하시므로, 더 이상 설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출처: www.9marks.org원제: Why Preaching?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목회
설교와교육
설교준비
언약관계
데이비드웰스
느헤미야
목회자는 성도들을 좋아해야 한다
by Gavin Ortlund
2018-11-14
애정은 목회 사역의 일부이다. 바울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빌 1:8)라고 하거나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라”(살전 2:8)라고 말한다.애정은 친절함이나 사랑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위 성경 구절에서 애정은 사모함(빌 1:8), 또는 극진히 생각함과 친애함(살전 2:8)을 의미한다.다시 말해, 목회를 잘하려면 성도들을 사랑할 뿐만 아니라 좋아해야 한다는 말이다. 당신의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야 한다. 그러나 목회의 중압감이 있거나 목회를 오랜 시간 하다 보면 애정이 식기 쉽다. 부부가 의지를 가지고 계속적인 노력을 해야 하듯이 목회자들도 마찬가지다. 목회자는 성도와의 관계에서 의지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애정(예를 들어, 사모함, 극진히 생각함, 친애함)을 쏟아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필요할까?1. 성도들의 가족에게 관심을 보이라아버지로서, 내게 가장 의미 있는 일 중의 하나는 사람들이 내 자녀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이다. 누군가의 가족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을 사랑하는 길이다. 목회자는 성도들의 가족에게 여러가지 방식으로 관심을 표현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들의 이름을 외울 수 있다(가능하다면, 메모지에 적어서 주머니에 넣어 가지고 있으라). 교회의 규모에 따라 조금씩 다르겠지만, 가능한 선에서 교회 아이들에 관해 이야깃거리들을 메모하고, 그중 최소 한 가지는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대학에 입학한 신입생들의 이름을 기록해 두는 것도 좋다. 그들을 격려하고 대학에서 영적으로 자라가는 길을 상담해 주어라. 당신이 그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점을 인지시켜라.2. 성도들에게서 은혜의 증거를 찾아 축하하라목회자는 모든 문제들에 관심을 두기 쉽다. 목회자는 시간을 일부러 내서라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삶에서 행하신 선한 일을 찾아 나누고 축하해야 한다. 예를 들어, 마음 속 복음을 따라 불평없이 긴 시간 교회의 일을 감당하는 청년이 있을 수 있다. 또 눈에 띄는 변화는 없지만 넘어지기 쉬운 죄를 잘 분별하여 삶의 본이 되는 오랜 교인이 있을 수 있다. 또 어쩌면 당신의 목회를 통해 긍정적인 영향을 받은 새신자가 있을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하찮거나 사소한 일들이 아니다. 정말로 축하할 만한 일들이다. 이것들을 무시하지 말라. 그 무게를 온전히 느끼라.문제에만 집중하고 있으면 성도들에게 애정을 느끼기 쉽지 않다. 훌륭하거나 긍정적인 부분을 찾아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관계에 도움이 된다.3. 성도들의 일터를 방문하라성도들은 일터에 방문하여 관심을 표하는 목회자에게 감사와 친밀함을 느낀다. 이것이 목회자와 성도들과의 관계를 더 좋게 만들어 줄 것이다. 단 한 번이라도 당신이 ‘그들의 세계’를 방문하고 나면 성도는 당신을 이전과는 다르게 본다. 또 일터 방문을 통해 해당 성도의 동료들까지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4. “사랑합니다”라고 많이 말하라나의 할아버지는 설교를 하던 중 잠시 멈추고, 성전의 곳곳을 둘러보며 “사랑합니다”를 여러 번 말했다고 한다. 이는 그 자리에 있던 성도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내게 전해주는 것을 보면 말이다. 이는 상황에 따라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의미로 다가올 수 있다. 물론 행동이 수반되지 않은 채 말 하나만으로 모든 것을 평가하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말은 굉장히 중요하다. “사랑합니다”라고 크게 말하고 나서 성도들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지켜보라. 특히 이전에 불화와 갈등이 있던 사람이라면, 사랑한다는 표현이 서로 간의 신뢰와 선의를 다시 세우도록 도울 수 있다.나는 목회에서 내 모든 것을 걸고 사랑하고 싶다. 사랑이 가진 치유의 힘은 죄의 파괴력보다 훨씬 크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벧전 4:8).5. 성도들을 위해 규칙적으로 기도하라규칙적인 기도는 기본이지만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기 쉬운 일 중 하나다. 이를 위해 일정표나 시스템을 갖는 것은 분명한 도움이 된다. 내가 실천하고 있는 방식은 매우 단순하다. 나는 매일 아침 QT를 하고 난 후, 성도 중의 한 명을 위해 기도한다. 물론 당신은 다른 시간과 방식으로 기도해도 좋다. 그러나 내가 실천하고 있는 이런 기본적인 방식을 통해 각각의 교인을 기억하며 기도를 실천할 수 있다. 또 한 해에 모든 성도를 위하여 적어도 한 번은 기도할 수 있게 도와준다. 물론 교회의 크기와 성도의 수에 따라 여러 번 기도할 수도 있다.6. 성도들이 당신을 섬길 수 있게 하라슬프게도, 교회에는 목회자를 공격하려는 비판적인 사람들도 종종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은 목회자를 진정으로 격려하기 원한다. 때때로 격려자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거나 혹은 당신이 먼저 마음의 문을 열고 다가오기를 기다릴 수도 있다. 격려자들과 기도의 병사들은 보통 비판자나 반대자보다 눈에 띄지 않거나 목소리가 작다.많은 경우, 목회자들이 성도들에게 자신의 연약함을 보여주는 것을 꺼리고, 적정한 거리를 두려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건강한 목회를 위해서는 그들에게 주는 것뿐만 아니라 받는 법도 배워야 한다. 목회자는 성도를 돌보는 목자일 뿐만 아니라 교회의 한 지체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도들에게 감정적 담을 쌓는다면, 그들을 향한 애정은 조금씩 식어갈 것이다.만약 성도들이 당신의 아이들을 돌봐 주겠다고 손을 내밀면 그 손을 잡아라. 죄책감을 갖지 말라. 성도들이 당신을 위해 기도해 준다고 하면, (이것이 복잡한 일임을 알지만) 당신이 정말로 기도가 필요한 부분에 대해 솔직하게 부탁하라. 당신이 진정으로 휴가나 안식년이 필요하다면, 그것에 관해서도 정직하게 말하라. 부글거림을 안고 당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보다는 건강한 목회를 추구하기 위하여 해고당하는 편이 더 낫다.7. 하나님의 눈으로 성도들을 보라성도들은 목자의 양떼다. 하나님은 질투하며 사모하는 남편 같은 사랑으로 성도들을 사랑하신다.“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아 8:6).만약 성도들과의 관계에 실패를 경험하고 있다면, 주님께서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기억하라. 당신 앞에 서신 예수님은 그들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신다. 십자가에서 목숨을 내어 주시기까지, 예수님은 그들을 생각하고 계신다. 지금도 예수님은 피로 값 주고 사신 자신의 귀한 백성들을 위해 중재하고 계신다. 이것이 예수님이 성도들의 가치를 드높이는 방식이다.예수님이 성도들을 위해 보혈을 흘리셨다면, 목회자인 우리는 그들에게 온 마음을 줄 수 있어야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Pastors Should Like People (Not Just Love Them)번역: 정은심
목회
리더십
애정
하나님의눈으로
목자의양떼
규칙적인기도
일터를방문
가족에게관심
사랑표현
칭찬하기
적용이 없다면, 당신은 설교하지 않은 것이다
by Michael Lawrence
2018-11-09
도대체 강의의 요점이 무엇인가 생각하면서 교실에 앉아 있었던 경험이 있는가? 나는 대학에서 미적분과 씨름하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 아마 수학 전공자라면 그 강의를 명확하게 이해했겠지만, 영문학 전공자인 나에게는 추상적인 내용의 지겨운 강의였다. 현실 세계에 미적분을 어떻게 적용하는지 이해하지 못한 채,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추상적 세계를 왜 배워야 하는지 고민했다. 만일 당신이 수학 전공자라면, 세익스피어의 소네트에 대해 토론할 때 느낄 법한 기분을 한 번 생각해보라. 설명 ≠ 적용수학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것이 아니다. 설교에 대해 논의하고자 이 글을 시작한다. 어떤 목회자들은 매주 성도를 미적분이나 작곡을 배우는 신입생처럼 대하는 경우가 있다. 마치 교사처럼, 목회자는 맡은 과목에 대해 열정적으로 준비한다. 우리는 헬라어와 히브리어의 동사 시제에 대하여 숙지하고 있다. 또한 고대 근동의 역사적, 문화적 배경에 대한 질문에 대답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 성도에게 교차대구법에 대해 설명할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학식 있는 번역자의 잘못을 지적하고 우리의 독법이 옳음을 증명하도록 공부한다. 하지만 이처럼 지식을 풍부하게 준비하고 전달해도, 성도는 그 지식으로 무엇을 해야하는지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을 충분히 설교하고, 성도 역시 그 지식을 흡수하지만, 정작 그 다음 우리는 회중에게 이와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여러분에게 달렸어요. 이 말씀을 자신에게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지 스스로 알아내십시오.” 이러한 접근은 말씀을 어떻게 적용해야 하는지 모르는 성도를 당황시킬 뿐만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영성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갖게 만든다. 성경 본문을 설명하는 것으로 설교를 마친다면 이는 충분하지 않다. 좋은 목자라면 성도가 말씀을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의 몇 가지 이유가 그 답이 될 수 있다. 첫째, 적용은 힘든 일이다. 문법이나 문맥의 분석은 쉬운 반면, 서로 다른 인간의 마음과 각각의 상황을 두루 고려하는 과정은 무척 복잡하다. 둘째, 적용은 주관적이다. 문장을 올바로 해석하거나 동사를 적당하게 배치하는 일은 객관적인 검토가 가능한 일이다. 하지만 말씀을 일상에 올바르게 적용하는 방법은 수식이나 문법처럼 객관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셋째, 적용은 복잡하다. 성경 본문은 요점이 있다. 그러나 적용은 여러 가지 경우가 존재한다. 수많은 상황 중 한 가지를 선택하는 건 힘든 일이다. 넷째, 적용은 개인적이다. 하나의 본문을 다양한 성도에게 어떻게 적용할까 고민할 때마다, 이내 포기하고 결국 내 삶에 어떻게 적용할지 생각하는 것으로 그치고는 한다.이 모든 이유는 목회자가 인간으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연약한 육신과 관계가 있다. 또한 능숙하지 못하거나 복잡한 일을 피하려는 습관과 연관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핑계에 대해 목회자가 해야 할 일은 회개이다.적용 ≠ 자각하게 함 적용은 성도의 몫이며 궁극적으로 목회자의 권한을 넘어선다는 시각이 있다. 이는 설교에서 적용을 무시하는 다섯 번째 이유로서 위의 네 가지 경우보다 조금 더 신학적으로 보인다. 본문을 사람의 마음에 최종적으로 적용하시는 분은 성령이 아닌가? 만일 설교자가 나서서 본문을 삶에 적용해 주려다가 실수한다면, 성도를 말씀의 갈고리에 거는 일에도 실패하는 것 아닌가? 또한 그러한 실패는 청중으로 하여금 적용의 책임을 면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지 않는가? 만약 설교자가 진리의 말씀을 전하는 것까지 책임지고 적용의 자리는 그대로 남겨둔다면, 성령께서 자신의 일을 행하실 것이 아닌가? 성령은 설교자보다 훨씬 더 적용을 잘 담당하실 것이다. 오늘날 매우 존경받는 설교자들이 이러한 주장을 피력하는 것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미안한 말이지만, 이러한 논리는 비성경적이며 신학적으로도 타당하지 않다. 이는 확신과 적용을 혼동한 예이다. 죄와 정의 및 심판을 자각하고 확신하게 하는 것이 성령의 사역이다(요 16:8). 성령 이외의 그 누구도 참된 확신에 이르게 하지 못한다. 확신은 심령(heart)의 문제이기 때문에 목회자가 이 몫을 인위적으로 담당하려 할 때 종종 율법주의에 빠지는 오류를 범하기도 한다. 오로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 안에서만 무엇이 진리인지 자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그 진리의 근원이 하나님이기에 그대로 행해야 한다는 신념도 갖게 된다. 하지만 적용은 성령처럼 확신을 주는 것과는 다르다. 적용은 상황에 대한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 주해가 성경 본문의 문맥을 이해하게 돕는다면, 적용은 그 본문이 펼쳐지는 오늘의 실제를 탐구하는 일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적용은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하게 거하는(골 3:16) 삶과 윤리를 만들고 알아가는 일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통 자신이 경험한 틀 안에서 타인의 말을 이해하고 대입시키는 경향이 있다. 따라서 목회자가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적용에 대한 범위를 넓혀주고자 노력할 때, 성도는 자신의 틀을 넘어 이전에 생각하지 못한 범주까지 말씀의 적용을 확장시킬 수 있다. 예컨대, 나는 요한복음 3장 16절을 들을 때마다, 곧바로 복음에 대한 나의 소명을 떠올린다. 내게는 그것이 자연적이며 거의 자동적인 반응이다. 하지만 이보다 훨씬 더 넓고 교훈적인 적용을 통해 오늘의 나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깊이 생각하고,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 실제의 삶 속에서 무엇을 의미하는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다. 한 구절에 대한 적용의 범위를 이토록 깊고 넓게 확장시킴으로써, 비로소 말씀이 삶 속에서 생명력을 갖고 거할 수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바른 적용은 성령의 사역을 침범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도가 성령께서 주시는 확신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다 적용을 기피하는 것은 매우 비성경적이다. 적용은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이들이 꼭 해야 할 일이다. 성경에 나타난 적용의 예는 다양하다. 신명기 6장 7절은 자녀를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말한다. 또한 느헤미야 8장 8절에서 에스라와 레위인들은 백성들을 향해 율법책을 낭독할 뿐만 아니라 그 뜻을 해석하여 모든 이가 내용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이처럼 구약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말씀을 아는 지식을 넘어 말씀이 삶 속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이해시키는 데에 관심을 기울인다. 이 관심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에서 계속된다. 누가복음 8장 21절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들이 자신과 밀접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고 확언하셨다. 또한 산상수훈에 관한 예수님의 말씀은 설교를 듣는 것에서 끝내지 말고 삶 속에서 행하라는 당부로 가득하다. 사도들의 서신 역시 실천적인 내용으로 가득하다. 사도들은 장로에게 적용을 강조했으며, 장로나 다른 가르치는 자들은 실천적인 경건을 언급하는 동시에 모범을 보였다(딤전 2:2; 4장). 에베소서 4장 12절부터 13절은 이러한 모습을 가장 잘 묘사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도와 교사를 교회에 선물로 주신 것은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다. 만일 우리가 구체적이고 실천적으로 하나님의 이런 목적을 설명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어떻게 주님의 일꾼으로 준비시킬 것인가? 바울은 적용을 기피할 대상이 아니라 부단히 추구해야 할 목표로 생각했다. 몇 가지 예들 실제적인 적용의 사례 두 가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사무엘하 11장에는 다윗의 이야기가 나온다. 다윗이 밧세바와 간음하고 권력을 남용하여 살인을 저지른 후 이러한 죄를 덮고자 애쓰느 과정이 묘사되어 있다. 이 본문은 성적인 부정과 살인에 대한 직접적인 적용에 적절하다. 하지만 간음이나 살인에 직면하지 않은 교인들은 이 말씀을 삶에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들에게 이 본문은 의미없는 말씀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윗의 죄를 통해 우리는 성도가 죄의 일반적인 패턴을 눈으로 확인하도록 도울 수 있다. 죄의 기만적이고, 우발적이며, 점진적인 특성을 보도록 이끌어야 한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가 아니라 엄마, 할머니, 대학생, 회사원, 사업가, 또는 퇴직자로서 '죄를 범할 수 있는 상황'에 대해 숙고하도록 도와야 한다. 이러한 적용을 시도할 때, 목회자가 성도의 상황을 일일이 열거할 필요는 없다. 성도에게 해당 구절의 의미를 알려주고 그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에 대해 고민하도록 방향을 이끌어 주면 된다.그 다음으로 에베소서 6장 1절부터 4절을 읽어보자. 이 본문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가르침으로 곧바로 생활에 적용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하지만 자녀가 없거나 더 이상 자녀와 함께 살지 않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저 남의 이야기로 듣거나 주변의 부모들을 위로하기 위해 참고만 해야하는가? 아니다. 이러한 본문의 내용까지도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성도가 알도록 목회자가 역할을 담당해야 한다. 즉 본문 속 부모에 대한 존중을 통해 보편적 권위의 개념을 성도가 이해하고 삶 속에서 적용하도록 이끌어야 한다. 교사와 학생, 고용주와 피고용인, 장로와 성도 모두가 경건한 권위와 관련하여 분명 배울 것이 있다.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이 말하듯이, “제5계명에 있는 부모는 육신의 부모만이 아니라, 연령과 은사에 있어 모든 윗사람과 특히 하나님의 규례에 의해 가정과 교회와 국가를 막론하고 우리보다 높은 권위의 자리에 있는 자들”을 뜻한다(제124문에 대한 답).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권위 아래 있으며, 동시에 삶의 다른 현장에서 권위를 행사하기도 한다. 사려 깊은 적용은 그 권위를 바르게 인정하고 행사하도록 도울 수 있다. 이 모든 사실은 무엇을 뜻하는가? 적용이 없는 설교는 결코 설교가 아니며 단지 강의일 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교인들이 목회자의 강의를 듣고서 그 요점을 혼동하도록 방치하여서는 안 된다.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도록 말씀의 적용에 힘써야 한다.출처: www.9marks.org원제: No Application? Then You Haven’t Preached번역: 김태곤 (매일배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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