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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테스탄트 윤리: 어떻게 ‘믿음만으로’ 산업에 활력을 줄...
by David Mathis
2021-10-30
살아 있는 동안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를 “최초의 미국인”으로 여겼다. 그의 업적은 실로 놀랍다. 편집자 및 출판인으로 시작해서 나중에 과학자이자 발명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철학자이자 정치인으로 변신해갔다. 공인된 수학자이기도 한 그는 펜실베니아 대학교뿐 아니라 필라델피아 최초의 소방서도 설립했다.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 1706–1790)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보다 이 년 늦게 태어났지만 삼십 년 이상 더 오래 살았고, 무엇보다 그는 주어진 시간을 최대한 활용한 삶을 살았다. 그는 쌍안경, 피뢰침 그리고 프랭클린 스토브를 발명했다. 프랑스 주재 대사를 지내기도 한 그는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도 기억되는데, 무엇보다 여러 식민지를 하나로 통합했고 또한 초대 우체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전기 작가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에 따르면, 프랭클린은 “그 시대의 가장 뛰어난 미국인이자 우리가 아는 미국이라는 나라의 사회 유형을 발명하는 데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친 사람”이었다. 프랭클린의 노력은 지칠 줄 모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백 여 년이 지난 후에도, 근면함과 여러 업적으로 여전히 기억되고 있는 프랭클린은 독일 철학자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에게는 베버가 “프로테스탄트 직업 윤리”라고 부른 모범으로 나타났다.그러나 베버는 심각하게 실수한 것이다. 잘못 알고 있는 베버1905년,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The Protestant Ethic and the Spirit of Capitalism)’을 통해서 “프로테스탄트 윤리”라는 문구를 유명하게 만든 베버는 프랭클린을 “교리적 특수성을 소진한 프로테스탄트가 현대 자본주의를 육성한 방법에 대한 거의 완벽한 예”라고 표현했다(토마스 키드, Thomas Kidd, ‘Benjamin Franklin’, 3쪽). 스코틀랜드의 경제학자 아담 스미스(Adam Smith, 1723-1790)와 마찬가지로 프랭클린은 개신교이자 칼빈주의의 가정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근면함, 검소함, 성실함을 배웠다. 그러나 키드는 프랭클린의 윤리는 그가 “기독교 정통을 버림”으로 “종교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모든 것에서 분리”되었기에 가능했다고 썼다. 20세기 초에 들어 베버는 정통을 향해 프랭클린이 가졌던 혐오감이 베버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모델로서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일으키는 단점이 제거된 프로테스탄트의 생산성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두 가지 오류를 범했다. 첫 번째로, 그는 교리가 사라져 버린 윤리에 교리적이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두 번째이자 그리고 더 심각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에 대한 그의 이해가 거꾸로 된 것이다. 베버의 무교리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아예 뿌리에서부터 열매를 끊어낸 것일 뿐 아니라, 애초에 뿌리에 대한 그의 이해부터가 틀렸다. 베버의 눈에 프랭클린의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교리적으로 특별한 조상의 윤리를 개선한 것으로, 베버의 주장에 따르면, 그 조상은 근면한 노동을 통해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았음을 증명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오늘날까지 뉴욕 타임즈에 여전히 발생하는 이런 오류를 바로잡기 위해 존 스타크(John Starke)는 2012년에 이렇게 썼다. “베버의 책은 불행히도 프로테스탄트, 칼빈주의, 직업 및 자본주의에 대한 잘못된 신화를 배가시켰다. 오늘날까지 많은 사람들은 개신교도가 열심히 일하는 이유가 다름 아니라 구원받았다는 증거를 만들어가기 위해서라고 오해한다.”베버가 자신의 틀린 생각에 동의하는 자칭 프로테스탄트, 칼빈주의자 또는 청교도를 알고 있었는지에 관해서 나는 별 의문을 제기할 마음이 없다. 그러나 과연 성경과 프로테스탄트 운동, 그리고 그 대변인들이 이런 충동을 가르쳤는지 여부는 결코 모호하지 않다. 종교 개혁의 피뢰침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였으며, 만약에 우리가 이 교리가 주는 자극을 통해서 생산성 향상을 지향한다면 우리는 베버와 그의 잘못된 개념의 나머지 상속자보다 훨씬 더 잘할 것이다. 믿음에서, 노동을 위해베버는 관찰자로서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프로테스탄트 신학은 교회뿐 아니라 세상을 바꿨다. 프로테스탄트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온전히 받아들임으로써 근면성을 촉발시켰다. 칭의의 재발견이라는 바울 신학은 고되기도 했지만, 누가 봐도 유익한 노동을 낳았다. 그러나 베버는 그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지 못했다. 그는 프랭클린 속에서 엄청나게 생산적인 사람을 보았고. 아마도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교리가 없이도 존속할 수 있기를 바랬다. 그러나 베버는 프랭클린이 프로테스탄트 교리에 깊이 잠긴 가정에서 어떻게 교육을 받았는지, 그리고 바로 그런 사실이 정확히 그로 하여금 어떻게 그토록 근면한 삶을 살게 한 것인지에 관해서 간과했다. 프로테스탄트 종교 개혁이 회복시킨 두 가지는 이른바 최고 권위(교황 및 공의회를 포함한 모든 인간 권위에 대해서 최종 권위는 오로지 성경뿐이라는 사실)에 관한 형식적 원칙과 인간이 하나님(아무리 의롭고 선해도 인간의 공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과 올바른 관계를 맺는 방법에 대한 물질적 원칙이었다. 개신교도는 결코 노동이 하나님의 은총을 보장한다고 믿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선택을 내가 증명한다고 해서 그것이 노동의 원동력이 된다고도 믿지 않았다. 오히려 하나님은 오로지 은혜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완전한 삶과 희생적인 죽음과 승리의 부활을 근거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경건하지 않은 자들을 그 앞에서 의롭다고 선언하신다. 개신교도에게 있어서 노동에 대한 첫 번째이자 기본 단어는 손으로 하는 노동을 통해서는 결코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것이다. 내가 하는 노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아무리 인상적이다 해도, 그것으로 전능자의 인정과 은총을 얻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칭의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수용은 우리의 공로나 하나님의 명령 수행 여부에(롬 3:28) 달린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롬 3:24) 통해서 우리에게 온다. 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선택하는 것은 오로지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롬 9:16)이다. 따라서 참으로 적절하게도, 그의 백성에 대한 하나님의 최종적이고 결정적인 승인과 포옹은 그를 향한 사람들의 믿음을 통해서이지, 결코 하나님을 위해 뭔가를 하는 공로를 통한 게 아니다(롬 4:4-5; 딤후 1:9; 딛 3:5).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에 근거한 기독교 신앙을 제대로 이해하게 될 때, 그것은 인간이 노동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안식이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그리고 이 안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의 성령을 통해 우리가 가진 에너지를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쏟아 붓도록 하는, 심지어 초자연적인 야망을 공급하신다. 공로와 믿음만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서로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주장하기 위해, 개신교도는 이 두 주제에 대한 대부분의 성경 가르침이 사도 바울이라는 한 목소리로부터 나온다는 점을 지적하곤 한다. 사랑과 노동을 위해 자유롭게 된믿음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때 우리는 칭의에 더하여 “약속된 성령”(엡 1:13)이라는 또 다른 은사를 받는다. 성령은 우리 속에 의롭다 하심을 얻는 믿음을 낳도록 도우실 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새 생명, 새 욕망, 새 성향, 새 본능, 그리고 새 사랑을 부어주셨다. 성령으로 말미암아 의로운 안식에 들어간다고 해서 우리가 게을러지는 건 아니다. 도리어 바울은 성령이 우리를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딛 2:14) 준비시키고, 또한 선을 행하기를 열망하고 준비되게 하신다고 말한다(딤후 2:21; 3:16-17; 딛 3:1-2). 그 뿐 아니라 믿음의 가정 안에서 그리고 가정 밖에서까지 다른 사람의 선을 섬기는 일에 전념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딛 3:8, 14).이러한 영혼의 궁극적인 안식을 불러온 종교개혁의 회복은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을 낳았다. 결코 게으르고 냉담한 사람들이 아니다. 새로운 에너지와 자유, 새로운 비전과 희망, 새로운 주도권, 자아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타인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바치려는 새로운 욕망을 가진 부류의 사람들, 이 모두를 우리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다. 굳이 프로테스탄트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러야 할 직업 윤리가 있다면, 바로 이런 사랑이다. 교리로 네 노동을 채우라베버가 “교리적 특수성이 고갈된 개신교”를 원했던 반면, 베버보다 한 세기 앞서(또한 프랭클린에 훨씬 더 근접했던) 윌리엄 윌버포스(William Wilberforce, 1759-1833)는 정확히 그 반대를 원했다. 윌버포스의 생각에 따르면, 직업 윤리의 불을 지피는 게 바로 프로테스탄트 교리라는 것이다. 연료를 빠진 엔진은 멈추는 게 당연하다. 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윌버포스를 요동치게 한 것은 그가 기독교의 “특이한 교리”라고 부른 것에 대한 깊은 성경적 충성이었다. 그는 말하기를, 이런 교리가 자신 안에서 차례로 진정한 애정을 불러일으킨다고 했다…. 바로 이런 영적인 것들 때문에 교만과 탐욕과 두려움의 세력을 깨뜨리고 도덕을 변화시켜 국가를 정치 복지로까지 이끈다고 보았다. 윌버포스가 “특이한 교리”라고 말한 것은 본질적으로 프로테스탄니즘이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인간의 타락, 하나님의 심판, 십자가 위에서 이룬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 성령에 의한 중생, 선에 헌신하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 되는 성령의 열매”이다. 다른 모든 세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에게도 독특하고 특별한, 이런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절실히 필요하다. 성령의 권능으로 인해 프로테스탄트 교리는 결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그 교리로 인해 이웃뿐 아니라 원수까지 사랑하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와 성실함, 새로운 욕망과 꿈까지 우리 속에서 자라날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자기 희생적인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해 자신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음을 아는 사람이다. 기쁨에서, 기쁨을 위해완전할 뿐 아니라 상세하며, 또한 시간에 의해 검증되고 성경에 근거한 프로테스탄트의 교리적 특수성은 우리의 일과 소명을 의미와 능력으로 가득 채울 것이다. 그리고 단지 “직장에서”뿐만 아니라 가정과 교회, 그리고 사회에서도 그럴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일과 노동의 개념은 단지 돈을 받고 일하는 “낮일”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유요, 천국이 되신다. 우리에게는 안전한 영원이 보장되었다. 지금도 우리에게는 성령이 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이용하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자유롭게 사랑하고 봉사할 수 있다. 게으름으로 주의가 산만한 하루보다 훨씬 더 힘든 노동으로 하루를 보냈다고 해도, 그 누구보다 더 행복한 영혼을 만드는 교훈을 통해 오늘도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에서 시작해서 기쁨으로 끝나는 노동을 한다. 그것은 프랭클린보다 훨씬 더 깊은 뿌리를 가지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원제: The Real Protestant Ethic: How ‘Faith Alone’ Sparks Industry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신앙과소명
노동윤리
벤자민프랭클린
막스베버
윌리엄윌버포스
종교개혁
프로테스탄트
오직민음
조나단에드워즈
우리 몸과 정신의 잊혀진 언어
by 최창국
2021-10-29
창조적 선물로서 정신세계 몇 년 전 영적지도와 꿈에 대해 강의를 할 때, 한 목회자로부터 교회가 꿈에 대한 바른 이해를 하지 못하여 큰 어려움이 있었다는 고백을 듣게 되었다. 이 목회자는 한 권사가 어느 날 꿈속에서 교회 안에서 한 여자 집사와 한 남자 집사가 사귀는 꿈을 꾸었다고 하면서, 이 여 집사가 성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여러 사람들에게 말함으로 교회가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권사는 하나님께서 꿈을 통해 이 문제를 자기에게 보여주었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꿈에 대한 이러한 왜곡된 해석은 꿈이 상징의 언어라는 점을 간과하는 데서 비롯된 잘못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남성에게는 남성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고 여성에게는 여성호르몬이 많이 나오듯이, 인간의 정신 현상인 꿈도 보편적으로 여성은 꿈속에서 주로 여자가 많이 등장하고 남성은 꿈속에서 주로 남자가 많이 등장하게 된다. 남자에게 남성 호르몬보다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나오면 문제가 발생하듯이, 인간의 꿈에서도 반대 성이 나타나는 것은 성적인 문제가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말해준다고 것이 일반적 해석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권사의 꿈속에 등장한 여 집사는 이 여 집사의 성적인 문제가 아니라, 이 권사 자신의 성적인 문제가 꿈을 통해 상징적으로 발현된 것이라고 보는 해석이 더 타당하다. 물론 주관적인 꿈과 객관적인 꿈을 분별하는 지혜도 필요하다. 즉, 주관적인 꿈 해석은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사물은 자기 자신의 어떤 것을 상징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객관적인 꿈 해석은 꿈속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사물이 실제로 그 사람이나 사물을 말해주는 것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대부분 꿈은 주관적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리스도인들 중에 꿈을 하나님의 계시로 이해하거나 영적으로 충만한 사람에게 하나님은 꿈을 통해 말씀해 주신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의 정신 세계에 대한 무지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교회 역사에서 인간의 정신 질환을 영적인 문제나 마귀의 역사로 이해하고 행한 큰 죄악을 우리는 알고 있다. 신학자 루이스 벌코프는 인간 정신 세계의 탐구가 일반계시의 중요한 한 영역임을 말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일반 계시는 언어(verva)의 형태로 인간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사물(res)로 된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의 구성과 자연의 전체 구조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적인 다스림의 과정으로 인간에게 오는 인간의 지각과 의식을 향한 적극적인 나타남이다. 하나님의 생각들은 자연의 현상 속에, 인간의 의식 속에, 그리고 경험 및 역사의 사실에 나타나 있다”(L. Berkhof, 『조직신학』, 139). 인간의 정신 혹은 마음의 탐구는 지극히 기독교적인 행위이다. 이는 마치 농부가 계절의 질서를 파악하는 것과 같다. 농부가 계절의 질서를 알아야 농사일을 할 수 있는 것처럼 특히 영혼 돌봄 사역자는 인간의 정신 세계의 질서를 알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인간의 정신 세계의 질서와 문제를 완전히 파악하였다 할지라도 인간의 내면의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정신 구조와 꿈과학자들은 뇌와 무의식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인간의 무의식적 특징을 발견하였다. 과학자들은 인간의 정신 활동의 대부분은 무의식이 장악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과학자들은 인간은 인지 기능의 5퍼센트만을 의식이 감당하고, 나머지 95퍼센트는 무의식이 감당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Leonard Mlodinow, 『새로운 무의식: 정신분석에서 뇌과학으로』, 51).무의식의 언어는 주로 꿈을 통해 발현된다. 무의식의 주요 매개체인 꿈은 의식이 외부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여러 형태로 왜곡되었던 것을 교정하는 기능을 한다. 꿈은 또한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하지 못하거나 발달시키지 못하거나 열등한 것들을 의식화하고 정신의 균형성을 위한 보상적 기능을 한다.과학자들의 연구를 통하여 밝혀낸 것은 모든 인간은 꿈을 꾼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하루에 잠 속에서 보통 작게는 15분에서 길게는 90분가량 꿈을 꾼다. 우리가 꿈을 꾸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꿈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의 의식이 쉬고 있을 때 무의식 속에서 발생한다. 인간은 꿈을 피할 수 없는 존재다. 꿈은 의식에서 거부된 정서들과 욕구들을 무의식의 언어를 통해 발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꿈은 그보다 훨씬 더 광활한 역할을 하는 세계이다. 꿈은 인간의 마음의 문제, 정서 불안, 인간관계 갈등, 경제문제 등 헤아릴 수 없는 원인들을 상징적으로 발산한다. 꿈은 우리 안에 좌절 된 욕구가 무엇인지를 알려줄 뿐만 아니라 우리의 안녕을 목표로 한다. 나아가 무의식의 중요한 장인 꿈은 정신의 균형을 통한 인격 발달을 목표로 한다. 창조적 선물로써 꿈꿈은 우리의 몸과 유기체적으로 관계되어 자기 언어를 발산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사람이 과식을 하게 되면 간에 나쁜 영향을 주게 되고, 그 결과 뇌에 자극적인 액체(humors)를 보냄으로 나쁜 꿈을 꾸게 된다고 생각하였다(Morton Kelsey, Dreams: A Way to Listen to God, 60). 그는 현대 과학에서 밝힌 꿈과 몸의 관계를 일찍 이해했던 것이다. 꿈과 몸의 관계에 대한 한 임상적 연구에서 건강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음식과 나쁜 꿈의 관계를 연구하였다. 연구 결과 매운 음식을 많이 섭취한 사람들은 숙면을 취하지 못하였다. 매운 음식은 몸의 온도가 올라가게 하여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잠자기 바로 전에 매운 음식을 먹었을 때는 몸이 활성화되기 시작하면서 나쁜 꿈을 꾸는 경우가 많았다. 질이 좋지 않은 기름진 음식을 많이 섭취한 경우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많은 꿈을 꾸는 현상이 발생하였다. 많은 알코올을 섭취하는 경우에는 잠은 쉽게 들지만 오랫동안 숙면을 취하지 못하게 하여 나쁜 꿈을 꾸는 경우도 많았다. 항 우울제와 같은 약을 복용하는 경우도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자주 꾸는 경우가 많았다. 우리가 늦은 밤에 과식을 하고 자게 되면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더 많이 꾸게 되고 꿈을 기억하게 된다. 우리가 육체적으로 피곤하면 잠을 깊게 자지만 몸의 건강이 좋지 않을 때는 숙면을 취하지 못하고 꿈을 더 많이 꾸게 된다. 이러한 예는 우리의 몸의 상태와 꿈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우리의 무의식은 꿈을 통해 우리의 몸의 상태를 알려주기도 한다. 무의식의 언어인 꿈은 우리의 정신 세계의 전체성을 위한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우리 몸을 지키는 파수꾼이다.과학자들의 꿈과 음식과의 관계 연구에서 자기 전에 몸에 자극성이 심한 음식을 섭취하였을 때 나쁜 꿈을 발현시킨다는 것은 음식 자체가 꿈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질이 좋지 않은 음식이 몸에 나쁜 영향을 주면 몸의 상태가 나쁜 꿈을 발현시키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몸은 질병과 꿈을 통해 자기 권리와 언어를 발산하기도 한다. 한 중년 여성은 나쁜 꿈을 통해 암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여성은 어느 순간부터 매일 밤에 악몽이 지속되자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 보았지만 아무 이상이 없었다. 하지만 악몽이 몇 달 동안 지속되자 병원에 다시 가서 점진을 한 결과 유방암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암 수술을 받은 후에는 악몽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여성의 악몽은 자기 몸의 치유의 필요성이 꿈의 언어로 발산된 것이다. 이처럼 몸도 정신성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자기 언어를 발산하는 기능이 있다. 인간의 몸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신비롭고 예술적이다. 몸은 가르치지 않아도 잠을 자며, 목마름과 배고픔을 구별하고, 울고 웃고, 땀을 배출하고, 체온을 조절하며, 음식을 소화시키며, 노폐물을 배설하고, 상처를 스스로 치유한다. 인간의 정신은 어떤 것도 몸과 소통하지 않으면 최상의 상태나 건강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현대인들은 몸의 외형적인 현상에만 열중한 나머지 몸에 내재하는 예술성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몸의 정신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음으로 몸의 바른 가치를 일구어 내지 못하고 있다. 몸의 정신성은 꿈과 질병을 통해 자주 드러난다. 몸은 생물학적인 기능을 넘어서 생명력이 넘치는 정신 또는 영혼의 마당이요 자원이다. 때문에 몸은 단순히 영혼의 시녀나 정신의 종이 아니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몸이 겪는 질병은 단순히 신체적 현상으로만 이해하기보다는 몸이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Thomas Moore, Care of the Soul, 164). 우리가 몸의 정신성을 인정하게 될 때 우리는 몸의 아름다움과 몸이 말하는 소리를 더 깊이 있게 인식할 수 있다. 몸은 정신 또는 영혼의 수많은 신호의 근원이 된다. 우리가 몸이 지닌 생명력을 새롭게 인식함으로써 정신 또는 영혼의 흐름이 활성화될 때 몸은 그것을 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꿈은 인간의 무의식의 언어를 상징적으로 발현하는 매개체일 뿐만 아니라 몸의 정신성을 드러내는 중요한 통로라는 인식은 결코 간과할 수 없다. 이러한 인식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꿈 해석에 새로운 아이디어와 관점을 제공해 준다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선물인 몸은 꿈을 통해서도 자기 언어를 발산할 뿐만 아니라 몸의 권리를 표출하기 때문이다. 꿈은 우리에게 많은 메시지를 주는 중요한 무의식의 언어다. 하지만 12세기 전후 이성주의가 팽배해 지면서 무의식의 언어인 꿈은 잊혀 진 언어가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꿈을 의미 없는 현상으로 여기고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인 꿈의 언어를 왜곡되게 해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꿈에 대한 해석적 능력을 상실하여 꿈을 직해하므로 많은 왜곡된 결과를 낳고 있다. 꿈은 하나님의 창조적 선물로써 우리의 정신과 몸의 상태를 말해주는 중요한 상징의 언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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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drew Wilson
2021-10-24
찬양은 몸과 영을 하나로 연합한다.“내가 주를 찬양할 때에 나의 입술이 기뻐 외치며 주께서 속량하신 내 영혼이 즐거워하리이다”(시 71:23). 우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주를 기뻐하는 마음으로 선율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찬양은 우리 몸도 움직이게 한다. 혀, 목, 가슴, 횡경막, 폐의 호흡 그리고 흉부의 떨림까지 영혼의 기쁨에 합해져서 찬양은 더욱 은혜롭게 된다. 온 몸으로 찬양하면 우리의 감정은 고조되고 우리의 기쁨은 한층 더 커진다. 은혜로우신 하나님은 우리가 찬양할 때 엔돌핀과 옥시토신의 분비가 증가하도록 창조하셨다. 우리 몸과 영혼은 찬양할 때에 하나가 된다.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찬송하리)”(시 84:2).찬양으로 하나 되는 네 가지 유형을 보자. 1. 찬양은 다른 성도들과 하나 되게 한다제니 폴락(Jennie Pollock)이 지난 달 그녀의 블로그 아티클 'Together We Sing'에서 함께 부르는 찬양의 기쁨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의 글에 의하면, 노래는 우리를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게 해준다. 노래는 교회에서 부르는 찬양이든 축구 경기장에서 부르는 응원가이든 서로를 하나 되게 해 주며, 함께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교감을 준다. 심리학자들은 노래가 갖는 독특한(하이브 스위치) 기능에 대해 끊임없이 말한다. 노래는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을 일시적으로 이타적이며 공동체적인 상태로 몰입하게 하는 기능에 대해서 말이다. 음악에는 분명 그런 기능이 있다. 만약 많은 사람이 동시에 말을 한다면 각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 어려울 것이다. 반면에 함께 노래를 한다면 더더욱 하모니를 맞춘다면, 개별 라인의 의미는 선명해질 것이고 다른 파트와 조화를 이루며 그 노래는 더욱 강하고 아름답게 표현될 것이다. 그게 바로 교회가 보여줘야 할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시편을 함께 노래하며 산 자와 잠자는 자가 서로 하나됨을 느낀다면 더욱 영광스러울 것이다. 2. 찬양은 인간과 살아있는 피조물을 하나로 이어준다아침에 눈을 떴을 순간에 차소리나 애들 소리가 없다면 새들의 새벽 합창이 들렸을 것이다. 피조 만물은 노래를 한다. 항상 그래왔다. 진짜 음악처럼 노래하는 새들도 있고, 바다 속 깊은 곳에서 혹등고래는 멜로디를 만들기도 한다. 생쥐는 찍찍거리는 초음파 소리로 노래하고 귀뚜라미는 날개를 비벼서 아름다운 곡조 소리를 낸다. 한번은 조용한 이른 아침에 사자가 점잖게 으르렁거리는 소리에 잠을 깬 적이 있는데, 기묘하게도 음악처럼 들렸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천사 같은 존재들은 말할 것도 없다. 창세 이래 매일같이 찬양을 해왔기 때문이다.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의 아름다운 찬양은 이렇게 시작했다. “우리 왕되시는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여, 목소리 높여서 우리 함께 노래하자.” 그런데 그 밖에도 노래하는 방법들은 허다하다. 하나님의 피조물은 이미 노래하고 있으며, 우리는 그 대열에 초청받은 것이다. 3. 찬양은 생물과 무생물을 이어준다사람들은 종종 모든 것과 연결되고 싶다는 소망이나 그걸 실제로 경험한 이야기를 하곤 한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자신이 세상과 조화되며 만물이 하나됨을 느낀다. 외딴 곳을 여행하거나 혹은 환각초를 피웠을 때 이런 느낌이 든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성경적 관점으로 보면, 우주 만물과 연결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노래다. “너희는 기쁨으로 나아가며 평안히 인도함을 받을 것이요 산들과 언덕들이 너희 앞에서 노래를 발하고 들의 모든 나무가 손뼉을 칠 것이며”(사 55:12), “바다와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주하는 자는 다 외칠지어다 여호와 앞에서 큰 물은 박수할지어다 산악이 함께 즐겁게”(시 98:7~8)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하늘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 지어다”(시 148:2). 이런 구절들이 조금이라도 과장되게 들린다면 이 성경 구절을 깊이 새겨보라. 예수께서 환호하는 제자들을 꾸짖어 달라는 바리새파들의 항의를 받고 하신 말씀이다.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칠 것이다’(눅 19:40). 4. 찬양은 피조물과 하나님을 하나되게 한다창조의 노래는 위대한 성악가이신 하나님, 윤율의 창시자, 조화의 근본, 세상만물을 지탱시켜 주시는 그분의 능력의 말씀과 때마다 계절의 리듬을 유지하시는 그분의 박자로 시작하고 끝난다. 나는 방금 ‘마술사의 조카’(나니아 연대기 여섯 번째 작품)를 아들에게 읽어 주고 있었는데, 아슬란이 노래로 나니아를 창조하는 대목이 다시금 경이로웠다. 그런데 하나님의 노래 가운데서는 가장 큰 환희는 창조가 아니라 구속사역에 담겨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 부르시는 특별송이 있는데 스바냐 3장 17절 말씀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우리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서 함께 찬양할 때 단지 우리끼리 서로 맞추거나 전체가 하나로 만들어진 질서에 맞추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분은 자녀들을 위해 소리 높여 노래를 부르시는 하나님이시며, 죽음을 앞두시고 제자들과 함께 찬미의 노래로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분이시다.“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원제: The Unifying Power of Singing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순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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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중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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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연대기
교회 실종을 가족 실종처럼 느껴야 하는 이유
by Trevin Wax
2021-10-22
나는 무척이나 조부모님을 다시 안아드리고 싶다. 나는 동생과 동그란 도넛들을 우적우적 먹고 난 후 함께 기타를 치며 보내는 토요일 아침을 기다린다. 나는 부모님과 야외에서 고기를 구워 먹고 나서 연못 주변을 거닐며 즐거운 대화를 나눈다. 그리고 그 날 아이들은 시끄러운 사촌 모두와 재회하여 그 집은 왁자지껄한 기쁨으로 가득해 간다.우리에게 과학 기술의 발전은 감사한 일이지만, 얼굴을 보면서 대화하는 시간만큼 좋지는 않다. 나는 가족이 그립다. 나의 교회 사람들 또한 그립다. 줌(Zoom)을 통해 교회 내 모임을 만나거나 또는 예배가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주일을 보내지만, 나는 성도들의 대면 모임을 몹시 기다린다.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은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가족이기 때문이다.트레빈 형제20대에 루마니아에서 목회 사역을 하면서 알게 된 문화적 차이 중 하나는 모두가 나를 “트레빈 형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형제”는 성도들이 교구 목사들에게 준 직함이었다. 그것은 애정과 존경의 용어였다. 루마니아 교회가 가진 문화에서는 모든 사람이 다 형제나 자매였다. 어린 10대들이 노래하고, 큰소리로 기도하고, 또는 권고할 때에 알린 형제 또는 리디아 자매 등으로 소개되곤 했다. 모두가 형제 또는 자매였기 때문에 교회는 내가 전에 경험했던 어떤 것보다 더 가족처럼 느껴졌다. 영적 성장을 향한 사도 바울의 비전을 다룬 스코트 맥나이트(Scot Mcknight)의 최근 저서(바울 목사: 교회에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돕는 것)에서 ‘형제자매로 지칭되는 문화’로서의 교회에 관해 한 챕터를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그는 목사들이 성도들에 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더 관심을 가질 것을 당부했다.“말이 중요하다. 이미지는 모양을 만든다. 비유는 살아 있다. 어떤 설교자 유형들은 그들의 교회를 청중들로 생각하고, 어떤 상담자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영혼들로 생각하며, 어떤 교사 유형들은 그들을 학생들로 생각한다; 제사장 유형들은 자신들의 회중들을 중재가 필요한 죄인들로 또는 가난한 사람들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도 바울은 계속해서 그의 교회들을 형제자매들이라 불렀다. 그리고 계속해서 그들을 형제자매로 생각하고 그들을 형제자매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청중, 영혼들, 학생들 또는 중재가 필요한 사람들이라는 문화가 아닌 형제애라는 문화를 만들었다.”(62)친구 이상스코트는 가족 문화로서의 교회가 두드러져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 교회는 5가지로 특징 지어진다.1. 사랑으로2. 모든 형제자매에 대한 사랑으로3.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과정에서 동반 성장으로4. 경계의 안전과 보장을 인정함으로5. 형제자매 관계는 우리의 형제이신 예수와 함께 시작되었음을 앎으로써마지막 요점은 나머지 모든 것의 토대가 된다. 스코트는 기록한다.바울에게 우리는 친구 이상이다. 우정은 최종 목표가 아니다. 오히려 우정은 형제애로 변한다. 우리는 우리의 맏형 때문에 형제자매들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과 성령의 능력을 통해서 형제자매들이 되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구속 때문에 형제들로 관계를 맺었다(78). 형제자매라는 용어로 교회를 묘사한 바울의 서술은 그리스도인들이 형제자매처럼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코트는 루마니아 작가 에밀 시오란(Emil Cioran)의 말을 인용한다: “사랑은 서로를 더 낫게 여기는 두 사람의 합의이다.” 즉 교회 가족 구성원이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라는 바울의 훈계와 같다(롬 12:10). 형제자매라 칭하는 문화에 대한 도전소비주의 사회에서 교회로서 우리가 직면한 도전들 중의 하나는 민족성, 계급, 문화, 정치 또는 예배 스타일로 구별된, 여러분과 비슷한 사람들이 있는 교회 모임을 찾기 쉽다는 것이다.우리는 소비주의적 충동에 저항해야 한다. 가족으로서 교회의 형성적 영향은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사람들, 즉 다양한 차이점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공동체로 던져질 때 가장 큰 효과가 있다. 여러분의 형제자매를 사랑한다는 것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들이 가족의 일원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너를 선택하셨듯이 하나님은 그들을 양자로 삼으셨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형제자매의 문화는 교회가 단지 예배에 들락날락하는 사람들의 자발적인 연합이라는 개념에 반대한다. 어떤 신자들은 이런 식으로 행동하고, 그리고 어떤 교회 지도자들은 교회는 본질적으로 견고하지 못하다(porous understanding of the church)는 이해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스코트는 교회가 가족처럼 "사랑의 경계가 있는 공동체"라고 인식한다.기독교 공동체의 형제자매를 표시하는 것은 세례, 그리스도 아래 있는 믿음의 삶, 그리고 그 물에서 흘러나오는 정체성이다. … 그 경계가 있는 공동체는 고대 가족들처럼 신앙의 공동체로서 합당하게 생활함으로써 그 명예를 지키는 형제자매 공동체와 같다는 것을 알도록 배워야 한다(70). 가족 싸움이 있는 교회나는 교회를 가족으로 보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견해를 제시하고 싶지 않다. 모든 사람이 서로를 형제와 자매로 보는 교회, 사람들 서로가 더욱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이 확고한 것이라 보는 교회에서는, 사람들이 가족처럼 사랑할지 모르지만 반대로 가족처럼 다투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가족의 모험거리이다, 그렇지 않은가? G. K. 체스터턴(Chesterton)은 가족이 “항상 화목한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작가들을 문제 삼았다. 그리나 가족의 불협화음이 가족을 좋은 조직으로 만드는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그것은 너무나 많은 차이점과 다양성을 포함하고 있는 그 이유 때문에 건전하다. … 그것은 우리의 형제 조지가 우리의 종교적 어려움에 관심이 없지만 트로카데로(Trocadero) 레스토랑에 관심 있기 때문이다. … 우리 삼촌 헨리는 우리의 자매 사라의 과장된 야망, 즉 가족은 인류와 같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좋은 이유나 나쁜 이유로 가족에게 반란을 일으키는 남자들과 여자들은 좋은 이유든지 나쁜 이유든지 솔직히 인류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이모는 다른 사람들처럼 불합리하다. 아빠는 일반 사람들처럼 흥분을 잘한다. 우리 막내는 일반 사람들처럼 장난꾸러기이다. 할아버지는 세상 사람들처럼 어리석고 늙었다. 또한 체스터턴(Chesterton)의 교훈은 교회에 관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감정을 품는 자들에게 적용된다. 이런 저런 쟁점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이 사람 또는 저 사람과 잘 지내지 못한다. 불필요한 것들을 토론하는 것 같다. 교회 가족을 같은 친구 그룹으로 바꾸는 것이나 또는 당신이 가장 좋아하는 기독교 사상가들이나 팟캐스트에 기초하여 당신의 영적 성장을 재단하는 것은 유혹적인 일이다. 하지만 교회가 살아 있기 때문에 교회 안에 이슈들과 문제들과 논쟁들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교회가 진짜 죄인들, 아니면 성인들로만 가득 차 있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헌신 그리고 그의 위대한 구원에 대해서 감사 외에는 거의 공통점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기 때문에 종종 드라마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라면 어떨까? 아마도 이번 격리 기간에 우리는 교회를 그리워하는 것이 가족을 그리워하는 것처럼 느껴지는지를 질문해야 할 것이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형제자매 문화를 더 발전시킬 수 있을까? 만일 그렇지 않다면 이 고립의 시기에서 벗어나게 될 때 우리가 어떻게 상황을 바꿀 수 있을까? 원제: Why Missing Church should feel like Missing Famil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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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의 첫 8세기에 관한 여덟 가지 이야기
by Donald Fairbairn
2021-10-20
교회사에 관심 있는 대부분의 개신교인이 가장 잘 아는 분야는 아마도 종교개혁이고, 또 동시에 자신이 속한 교단의 역사 정도는 어느 정도 인지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중 적지 않은 사람이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에 대한 지식도 조금은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초기 기독교 역사에는 우리 대부분이 알고있는 것보다 훨씬 더 풍성한 이야기가 숨어있다.다음은 아마도 당신이 몰랐을 기독교 교회의 첫 8세기에 관한 여덟 가지 중요한 사항이다. 1. 초기 기독교를 단지 로마에 해당하는 현상으로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대부분의 초기 기독교인이 로마 제국 내에 살았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거의 처음부터 로마 제국 외부에도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신이 모르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비록 1세기는 아니었지만 2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복음은 오늘날의 터키 동부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가장자리에까지 도달했다. 그리고 늦어도 4세기에 이르러 인도에 확실하게 도달했는데, 어쩌면 1세기 또는 2세기에 이미 닿았을 수도 있다. 4세기에 들어서는 복음이 로마제국을 넘어 아프리카(지금의 에티오피아)에까지 이르렀고, 알프스를 넘어 북유럽으로, 멀리는 아일랜드까지 로마제국 바깥에까지 뻗어나갔다. 첫 번째 천 년 동안 유럽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 더 많은 기독교인이 살았다.2. 초대교회가 로마인에게 박해를 받아 카타콤에서 은밀히 예배를 드렸다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말이 사실이기는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는데, 로마의 기독교 박해가 처음 3세기 동안은 매우 산발적이었고 장소와 시간에 따라 다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이 몰랐을 사실은 기독교 초기에 기독교인에 대한 최악의 박해는 로마가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으로부터 왔다는 것이다. 처음 3세기 동안 로마인은 기독교인을 좋아하지 않았고 도리어 페르시아인이 기독교인을 용인했다. (고대 산스크리트 속담 중에 “내 적의 적은 내 친구”가 있다) 그러나 4세기 초에 로마 제국이 기독교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인은 기독교인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로마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니까 말이다. 페르시아의 박해는 339년부터 370년까지 일어났으며, 상대적으로 기독교인은 그 기간 내내 로마 제국 내에서 우호적인 지위를 얻었다.3. 4세기 초 로마제국의 개종이 기독교 역사에서 분수령이 된 순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당시에 로마는 기독교로 개종한 4개 왕국 중 하나일 뿐이라는 사실은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나머지는 아르메니아, 조지아, 악숨(오늘날의 에티오피아 북부와 예멘)이었다. 사실, 현대 터키 동부의 작은 왕국인 오스로엔(Osrhoene)이 아르메니아보다 120년 앞선 2세기 후반에 공식적으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오스로엔은 수세기 동안 중요한 기독교 중심지로 남아 있었지만 독립 왕국으로 남아 있지는 않은데, 216년에 로마제국에 흡수되어 공식적으로 기독교 왕국으로 인정받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가 지금까지 기독교로 개종한 왕국 중 가장 컸던 것은 사실이지만, 결코 유일한 왕국은 아니었다.4. 381년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에서 그리스어로 완성된 니케아 신경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것은 로마 제국 내 모든 교회의 표준 신경이 되었다. 그러나 410년에 페르시아 내 교회와 그 이후에 조지아, 악숨, 아르메니아, 그리고 멀리 인도에 있는 교회까지도 이 신경을 채택했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오늘날까지 니케아 신경은 전체 기독교 교회에서 받아들이는 유일한 성서 이후의 저작물이다. (이와 반대로, 사도신경은 교회 협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승인된 적이 없다. 단지 라틴어를 사용하는 서구 교회에서만 전통으로 존중받을 뿐이다.)5. 사람들이 고유의 언어로 성경을 읽을 권리를 옹호한 14세기 영국인 존 위클리프(John Wycliffe)를 알 것이다. 물론, 위클리프 성경 번역(Wycliffe Bible Translators)은 그의 이름을 따서 만들어졌다. 그러나 성경 번역이라는 분야에 있어서 위클리프는 사실상 천 년이나 늦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당신은 아마도 몰랐을 것이다. 동부 아프리카와 서부 아시아에서는 초기 기독교 세기에 이미 방대한 수준의 성경 번역이 있었다. 5세기 경에 성경은 시리아어(서아시아에서 사용되는 언어, 예수가 사용했던 아람어와 유사)로, 아프리카 방언인 콥트어(이집트에서 사용됨) 및 게츠어(에티오피아에서 사용됨)로, 그리고 아르메니아어와 그루지야어로 번역되었다. 사실, 4세기 말에 메스롭 마쉬토트(Mesrop Mashtots)라는 뛰어난 아르메니아 언어학자는 오로지 성경 번역을 목적으로 아르메니아 알파벳을 고안한 최초의 사람이 되었고, 그는 나중에 그루지야어 알파벳 개발에도 참여했다. 얼마든지 위대한 현대 성서 번역 기관을 “메쉬토트 성경 번역(Mashtots Bible Translators)”이라고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6. 당신은 아마도 6세기와 7세기에 북유럽의 많은 지역을 복음화한 아일랜드 수도사 콜롬바(Columba), 콜롬바누스(Columbanus), 그리고 보니파시오(Boniface)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활동하던 당시에 페르시아 기독교 수도사들이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 실크로드 동쪽으로 여행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600년까지 그들은 소그디아(오늘날의 구소련 중앙아시아 공화국) 전역에 기독교 센터를 세웠고, 635년에는 중국의 수도인 장안(현재의 시안)까지 도달했다.7. 732년에 있었던 투르 전투(Battle of Tours)에 대해 들어보았을 것이다. 이 전투에서 프랑크족 전사들이 무슬림 군대를 물리치고, 그들을 피레네 산맥을 넘어 스페인으로 후퇴시켜 유럽의 기독교 문명을 이슬람으로부터 “구원”했다. 그러나 아마도 당신은 8세기 초에, 유럽을 “구한” 훨씬 더 중요한 전투가 벌어졌다는 사실은 몰랐을 것이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은 전 세계에서 가장 소중한 소유물이었는데, 그것을 간절히 원한 아랍 무슬림은 80년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의 절정은 717년에 시작된 해상 연합 공격이었지만, 일 년 이상의 전투 끝에 비잔틴 제국이 승리했다. 그리고 아마도 당신은 아랍 정복의 결정적인 전투가 751년 탈라스 전투(현대의 타지키스탄)라는 사실도 모를 것이다. 이 전투에서 아랍인은 중국을 물리치고 지상 최강국이 되었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정복에 성공한 아랍이었지만, 그들이 유럽 정복에는 실패했다는 사실 때문에 세계 지도는 다시 그려져야 했다. 유럽은 대부분이 살아남았고, 그제서야 유럽이 기독교의 중심이 되는 길을 걷기 시작했다.8. 전체 이슬람 기간 내내 중동 전역에 존재했던 소규모의 기독교 단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 그룹은 20세기와 21세기 역사상 가장 박해받은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나 이 그룹의 조상이 한때 시리아, 페르시아 및 중앙 아시아에서 대다수를 차지하는 인구였다는 사실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인은 아랍 국가에서 확실한 2등 시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동체 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 이웃 무슬림들 사이에서 신앙을 증거했다. 그들은 이슬람교도를 대상으로 아랍어로 사과문을 썼고, 삼위일체와 성육신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 이슬람 지도자와 공개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당시의 글은 오늘날 이슬람교도와 교류하는 우리에게 계몽적인 읽을거리를 제공한다. 교훈이 기다린다우리는 왜 이런 사실들을 몰랐을까? 비록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 역사에 대해 많이 들었다고는 해도, 우리가 배운 대부분이 종교개혁의 배경이 되는 서방 교회와 중세 로마 카톨릭 교회에서 왔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현재의 기독교 주류와 연결되는 역사만을 배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기독교의 모든 역사가 아니며 초기 기독교 이야기의 나머지 부분은 오늘날 가치 있고 매혹적인 많은 교훈을 담고 있다.주님은 개신교인인 우리가 인식하는 것보다 훨씬 더 이른 때에 세계의 더 많은 지역에서 더 많은 종족을 통해 일하셨다. 따라서 유럽과 마찬가지로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초기 기독교인의 이야기는 우리 이야기의 일부이다. 편집자 주: 이 주제와 관련해서 보다 더 많은 내용을 접하려면, ‘글로벌 교회- 첫 8세기: 오순절에서 이슬람 시작까지(The Global Church—The First Eight Centuries: From Pentecost Through the Rise of Islam)’를 읽으라. 원제: 8 Things You Didn’t Know About the First 8 Christian Centurie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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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를 위한 질문 세 가지
by Paul Levy
2021-10-14
교회의 입장에서 또는 목회자로서 우리는 종종 필요 이상으로 일을 복잡하게 만들 때가 있다. 전도를 마치 당신 안에 숨겨진 놀라운 전도자를 끄집어내는 어떤 강좌나 세미나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여기지는 않는가? 전도를 꼭 배워야 하는 어떤 과정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염려될 때가 있다. 물론 전도라는 용어 자체가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니라”(눅 6:45)라고 말씀하심으로 전도가 무엇인지 매우 명확하고 단순하게 알려주신다. 간단한 이야기다. 당신 마음 속에 그리스도와 그분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넘친다면, 그 사랑은 자연스럽게 말을 통해서 밖으로 넘쳐난다는 것이다. 전도가 단숨에 이뤄진다고 생각할 정도로 우리가 순진한 사람들은 아니다. 사람들이 믿음에 이르게 하는 일에는 복음을 나누고 초대하고 기도하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누구나 다 잘 알고 있다.우리는 계속해서 복음의 씨를 뿌리고 또 심는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서 더하게 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자라게 하는 것은 그분의 일이며, 그렇기에 우리는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교회를 세우실 것이라는 약속에 확신을 가지고 있다(마 16:18). 그러나 요즘과 같은 코로나 시대에 나는 교회가 어떻게 해야 세상을 향해 손을 뻗을지를 좀 더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를 두셨고, 또한 우리가 직면하는 다양한 상황 속에서도 함께 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아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도 역사하신다. 당신이 나와 비슷하다면, 복음에 대해 말할 정도로까지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매우 수줍음을 느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최근 들어 친구를 위해 기도하고 그들과 복음에 관한 대화를 나눌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을 찾았고, 그것을 오늘 당신과 나누고 싶다. “오늘 우리집에서 저녁 같이 하실래요?” 물론 이것은 기독교적 질문은 아니다. 음식 산업은 거대하고 사람은 누구나 다 만찬에 열광한다. 어느 서점에나 어마어마한 요리책이 쌓여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으로서 환대에 대해 말하는 우리의 핵심이 음식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내가 가진 것을 나누고, 그러기 위해서 나 자신과 가정을 오픈하겠다는 것이다. 성경적 환대의 개념은 “손님을 위한 최선이 무엇인가?”를 찾는 게 아니라, “내가 가진 것을 나누어 갖겠습니까?”이다. 여러분 중 일부는 훌륭한 요리사겠지만, 나처럼 그렇지 않은 사람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잘 대접해야 할 의무가 있다. 주일에 교인들이 서로의 집에 방문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큰 격려가 된다. 그러나 우리는 그 환대를 불신자들에게까지 확장할 수 있다. 식사 초대는 비기독교인에게 다가가는 좋은 방법 중 하나다. 식사 초대를 고려할 때 평소에 기도하던 사람 중 떠오르는 이가 있는가? 초대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 아침 식사, 점심 식사, 테이크아웃, 또는 각자 집에서 음식을 갖고 오는 포틀럭 식사 등 선택지는 많다. 자연스러운 대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걱정된다면, 수다스러운 기독교 친구도 같이 초대하라. 런던과 같은 외로운 도시에서 사람들을 집으로 데려오고 환영하는 것은 반문화적이지만, 집과 마음을 공개함으로써 결국에는 좋은 전도 기회를 만나게 될 것이다. “교회에 가 볼래요?”이것은 은근히 큰 두려움을 야기하는 질문이다. “저 사람은 절대 교회에 오려고 하지 않을 거야.” 또는 “저 사람이 교회에서 하는 말을 이해할 리가 없지.” 등을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나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훨씬 더 우리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다. 물론 다양한 상황이 주는 많은 도전으로 인해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하기 위해 모일 때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고 한 그 약속을 믿는다. 성경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으로 묘사하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이 제자들 가운데 거하신다고 말한다(엡 2:22). 따라서 우리가 사람들을 교회에 초대할 때 그것은 사실상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만나도록 초대하는 것이다. 우리가 모여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기도는 이것이다. “그러나 다 예언을 하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물론 이것은 하나님의 일이며, 내 힘으로 사람의 삶에서 일어나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교회에서 친절과 사랑으로 새로운 사람들을 환영하고 불신자를 데려온 사람에게까지 관심을 갖고, 행여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는지 유심히 살피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 백성이 갖는 교제의 매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백성이 참된 하나님의 백성이 될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다. “성경 한번 읽어보실래요?”이 마지막 질문은 우리 중 많은 사람이 생소하게 여기지만 사실상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읽지도 않고 성경을 무시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은 결코 성경을 무시하지 않는다. 단지 그들은 성경이 자신의 삶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뿐이다. 신자라고 하더라도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물며 외부인이라면 교회의 그 어떤 일도 이해할 수 없다. 그들의 눈은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다. 따라서 그들과 함께 앉아서 질문과 의견을 듣고, 그들이 생명의 말씀에 관심을 갖도록 하는 방법을 놓고 고민해야 한다. 최근에 누군가가 ‘성경 공부’라는 이름을 붙이는 대신 책을 읽고 토론하는 북클럽으로 성경 읽기 모임을 만들라는 조언을 했다. 우리에게는 질문과 답변이 있는 성경 공부가 익숙하지만, 비기독교인에게 그런 형태는 매우 낯선 것이다. 복음서 한 장을 읽고 나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는 게 좋다. “느낌이 어때요?”, “인상 깊은 부분이 있었나요?”,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이 뭐라고 생각하나요?”, “지금 읽은 내용이 예수님에 대해서 알려주는 게 무엇인 것 같습니까?” 이런 식으로 대화를 나눌 때 대화가 얼마나 물 흐르듯 흘러가는지, 당신은 크게 놀랄 것이다. 나는 사람들과 마가복음을 함께 읽는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읽는 시간이 15분에서 20분을 넘어가면 힘들어진다. 또 나는 나 자신에게 설교를 그만두라고 수시로 암시를 해야 하지만, 당신에겐 해당이 되지 않을 수도 있다. 본문 설명이 독백이 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질문을 받고 “나도 모르겠네요.”라고 말하는 것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성경 공부 인도에 관한 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을 수도 있다. 만약 그렇다면, 경험 많은 교회 지도자에게 가이드를 받도록 하라. 지금까지 내가 말한 내용 때문에 당신이 부담 또는 죄책감을 느끼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질문은 내게 있어서 친구와 이웃에 대해 생각하는 데 도움이 되었고, 무엇보다 내 속에서 기도하고 싶은 갈망을 불러일으켰다.교회 생활에는 여러 계절이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이상한 계절을 살고 있다. 그러나 이 때를 주님께서 우리의 교제를 더 풍성하게 하시고 새 생명을 가져오는 시간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자. 원제: Three Questions for Evangelism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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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성공과 실패, “실패해도 괜찮아!”
by 김형익
2021-10-12
성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뵌 이사야 선지자는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반전 그 자체다.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이사야 6:9–10).” 하나님께서는 자원하여 헌신하는 이사야를 칭찬하시며 그의 사역의 성공을 보장해주시는 대신, 도리어 그가 실패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사야는 보장된 실패로 부름을 받은 것이다! 우리는 사역에서의 성공과 실패를 어떻게 가늠할 수 있을까? 팀 켈러는 ‘센터처치’의 프롤로그에서, 교회 내의 회심자, 등록자, 헌금 액수의 증가로 측정되는 성공, 그리고 성공이 아닌 신실함(faithfulness)을 사역을 평가하는 유일하고 참된 범주로 여기는 입장을 소개한다. 그리고 켈러는 성공이나 신실함보다 더 성경적인 기준으로 열매 맺음(fruitfulness)을 제시한다. 그의 말에 공감하면서 이런 질문을 조심스럽게 던지게 된다. “신실함은 열매를 맺는가? 신실함과 열매 맺음의 관계는 무엇일까?” 나의 대답은 신실함은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다만, 그 열매는 즉각적이지 않을 수 있고 심지어 인생의 시간 안에 결실을 보지 못할 수도 있다. 열매는 자신과 주변의 사람들이 확인할 수 있는 가시적인 열매일 수도 있지만, 때로는 나 자신 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열매가 맺히기도 한다. 그래서 많은 사역자들을 자만하게도 하고 좌절하게도 하는 이 열매의 문제는 좀 더 세심한 성경적 이해를 필요로 한다. 마틴 로이드 존스(1899-1981) vs. 아더 핑크(1886-1952)마틴 로이드 존스(Martyn Lloyd Jones)와 아더 핑크(Arthur Pink), 이 두 인물은 동시대를 살았던 영국의 목사들이다. 로이드존스는 런던 중심가의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를 하면서 당대 최고의 설교가로 인정받았고 생전에 그의 설교는 영국을 넘어 전세계에 영향을 미쳤다. 반면, 핑크는 30대 중반 이후 설교할 강단을 원했으나 얻지 못했고 결국 월간지 ‘성경연구’(Studies in the Scriptures)에 설교를 쓰다가 루이스 섬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훗날 핑크의 사후에 그가 ‘성경연구’에 남긴 많은 설교들은 여러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영적 삶을 부요하게 해주었다. 그의 사후에 말이다. 이 두 인물은 생전에 개인적으로 접촉한 적은 전혀 없었지만, 핑크의 ‘성경연구’의 정기구독자였던 로이드 존스는 한 영향력 있는 목사에게 “설교를 위해서 핑크의 책을 읽으세요”라고 조언을 했을 뿐 아니라, 자신에게 우울증이 찾아왔을 때 핑크의 설교를 통해 섬광처럼 비친 하나님의 영광을 느꼈고 수일간 천국을 경험하는 압도적 확신과 기쁨의 상태를 경험하기도 했다. 두 사람은 근본적으로 같은 복음을 전했던, 충성된 말씀의 사역자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의 자리는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우리는 로이드 존스의 사역은 성공이고 핑크의 사역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의 전기를 쓴 이안 머레이(Iain Murray)는 로이드 존스의 회고담을 소개한다. “내가 핑크 처럼 행동했다면 나는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 그래서 나는 아주 오래 참아야 했고 사물을 아주 멀리 보아야 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목사직에서 물러났을 것이고 모든 일은 끝났을 것이다.”(‘아더 핑크’ 228쪽; ‘로이드 존스 평전 2’ 398쪽). 이 말은 두 사람의 기질과 성향이 만들어낸 차이를 잘 보여준다. 로이드 존스가 생전과 사후에 전세계 기독교회에 영향을 미쳤다면, 핑크는 사후에야 비로소 큰 영향을 미쳤는데 이것은 기질과 성향의 차이와 무관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끝까지 충성스러웠고 그들의 사역에는 열매 맺음도 풍성했다.윌리엄 스틸(1911-1997)또 한 사람을 생각해보자. 윌리엄 스틸(William Still)이다. 그에 대한 싱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의 말이다. “나는 십대에 윌리엄 스틸을 처음 만난 후 그가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빚을 졌다. 스틸만큼 나에게 목사의 일에 대해 인상적인 메시지를 준 사람은 없다.” 스틸은 1945년부터 1997년 임종하기 2개월 전까지 52년간 줄곧 스코틀랜드의 길컴스턴 남부교회에서만 목회를 했다. 그의 말씀 사역은 생전에 이미 영국은 물론 해외로까지 널리 알려졌었다. 그가 50 여년 목회의 반환점을 돌 무렵인 1964-1965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IVF 신학생 컨퍼런스에서 전한 말씀이 ‘목사의 길’로 출판되었는데(장호준 역, 복있는사람, 2011), 이 책은 목회론의 고전으로 평가받고 있고, 싱클레어 퍼거슨은 모든 목사가 1년에 한번 씩은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책에서 스틸은 자신이 얼마나 고군분투하며 목회를 하는지, 복음이 얼마나 많은 저항을 불러오며 목사는 얼마나 많은 오해와 비난을 감수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면서 “목사의 가장 큰 실패는 하나님의 말씀을 효과적이고 온전한 방식으로 수종 들지 못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적어도 그가 이 설교를 했던 1964-1965년까지 그의 교회에서는 많은 사람이 그의 설교로 인하여 계속 떠나고 있었다. 그는 죽기까지 충성된 말씀의 종이었다. 그의 자리는 로이드 존스와 핑크의 사이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스틸의 사역은 성공인가, 실패인가? 그의 사역은 생전 보다 사후에 더 많은 열매를 맺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나에게도 말이다.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아더 핑크는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의 전형적인 사례이다.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의 사례를 보여주는 인물들은 성경과 교회 그리고 선교의 역사에서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내가 무슨 말을 더 하리요? 이런 사람들의 일을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리로다”라고 썼던 히브리서 기자의 심정에 공감한다. 물론 우리는 모든 사역을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과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의 극단적 이분법으로 구분할 필요는 없다. 모든 사역자는 눈에 보이는 성공과 실패 뿐 아니라, 진짜 성공과 실패의 다양한 조합을 경험하지만, ‘성공 같아 보이는 실패’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한다. 너무나 많은 사역자가 성공 같은 실패의 희생자가 되고 있다. 대형교회로 성장시켰거나 대형교회의 목사가 됨으로써, 경탄할 만한 사역의 결과를 만들어냄으로써, 탁월한 설교자나 저술가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을 얻음으로써 말이다. 반면,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은 거의 항상 사역자 자신에게는 고난의 형태로 주어지는데, 이것을 말씀으로 잘 해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리고 ‘이름 없이 빛도 없이 감사하며 섬기리다’라는 고백을 가지고 씨름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사역자 자신에게 미치는 유익은 가히 헤아릴 수 없다. ‘실패 같아 보이는 성공,’ 이 고난의 콘텍스트 안에서 사역자가 성경의 텍스트를 만날 때, 하나님의 말씀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하고 달콤하게 사역자 자신을 변화시키는 은혜를 경험하게 한다. 그리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가 지나온 삶과 그의 말씀 사역은 수렴의 과정을 거쳐 점점 더 삶의 깊이가 녹아있는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실패해도 괜찮아!당신이 이제 사역을 준비하고 있거나 사역의 길로 들어서는 길목에 서 있다면, 혹시 사역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있을지 모르겠다. 어쩌면 당신은 이제 막 사역에 들어섰거나 이미 오래도록 사역을 해온 사역자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미 어느 정도 실패를 맛보았거나 실패감에 젖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실을 기억하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실패해도 괜찮아. 그것이 네 눈에 실패로 보이든 성공으로 보이든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나이고 또 실패하든 성공하든 네가 언제나 내 아들이고 내 딸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렴. 실패해도 괜찮아. 그리스도가 이미 십자가에서 너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지 않았니?” 청교도 목사 헨리 스쿠걸(Henry Scougal, 1650-1678)이 ‘인간의 영혼 속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에 남긴 중요한 경구가 있다. “한 영혼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 영혼이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되어야 한다.” 이 말을 이렇게 고쳐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사역자의 설교와 사역의 가치와 탁월함은 그가 사랑하는 대상에 의해 평가(측정)되어야 한다.”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 일을 계속하라!
교회사역
팀켈러
센터처치
마틴로이드존스
아더핑크
성경연구
윌리엄스틸
싱클레어퍼거슨
헨리스쿠겔
찬양은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Shai Linne
2021-10-03
20여 년 전 내가 기독교로 회심했을 때 어머니 교회에서 보낸 첫 주일을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 당시에는 교회 예배가 어떤 모습일지에 대해 상상한 적이 거의 없었다. 자라면서 나는 가끔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 건물에 발을 디뎠다. 어머니와 내가 알고 지내는 몇몇 기독교인들은 여러 해에 걸쳐 나를 교회에 초대했다. 내게도 구원이 필요할 수도 있을 거라는 그들의 생각을 속으로 비웃으면서 나는 항상 정중하게 거절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이 달라졌다. 몇 주 전에 나는 요한복음을 읽은 후 내 삶을 그리스도께 바쳤다. 갑자기 나는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게 되었다. 나는 교회에 대해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지만, 내게 강력하게 자신을 계시하신 나의 보배로운 주 예수님을 환호하는 데 나만큼 열심인 사람들이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축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자리로 걸어가는데 이름 모를 성도들이 수차례 멈춰 서서 따뜻한 포옹으로 인사를 건넸다. 어떤 사람들은 몇 년 동안 나를 위해 기도해 왔다고 말했다. 반주가 시작되자 모두 일어서서 한참 동안 ‘찬양과 경배’에 전념했다. 노래하고, 박수치고, 춤추고, 외치는 소리가 가득했다. 회중 전체가 동참하는 경배 찬양은 하나님이 위대하신 분이며 매우 중요한 분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모든 찬양이 나에게는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러나 멜로디가 익숙해지자마자 바로 참여하게 되었다. 특히 한 곡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 새롭게 발견한 사랑의 기쁨과 단순함을 잘 포착하고 있었다.주의 이름 높이며주를 찬양하나이다나를 구하러 오신주를 기뻐하나이다하늘 영광 버리고 이 땅위에십자가를 지시고 죄 사했네무덤에서 일어나 하늘로 올리셨네주의 이름 높이리주님을 영접한 초기에 나는 위의 찬양 가사처럼 교회에서의 찬양을 주로 나의 구원을 생각하며 하나님을 예배하는 수단으로 여겼다. 그때는 찬양이 성도의 성화를 위한 은혜의 수단이라는 사실을 잘 몰랐다.성화하면 무엇이 떠오르는가? 우리 대부분은 성경 말씀, 믿음, 성령, 시련, 시험, 고난, 기도와 같은 것들을 떠올릴 것이다. 이 모든 단어들이 우리에게 예수님을 더 닮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수년에 걸쳐 신자 개개인과 회중 모두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지식 안에서 잘 자라도록 돕는 데 찬양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린도후서 3장에서 사도 바울은 모세의 율법의 영광과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나타난 새 언약의 더 큰 영광을 대조한다. 그는 18절에서 주님을 따르는 신자들이 어떻게 거룩하게 되어가는지에 대해 강력하게 설명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다음 장에서 사도 바울은 사도들이 발견한 성경의 진리를 공개적으로 진술하는데, 그 말씀을 통해 이 영광스러운 성화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부여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이것을 설교나 성경 연구 또는 개인의 헌신과 연관시킨다. 그러나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엡 5:19)로 우리가 함께 찬양할 때도 이러한 변화가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보았는가? 그렇다, 찬양은 정말 사람을 변화시킨다!우리는 고난, 어려움, 의심 또는 낙담을 다루는 시편 기자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신뢰와 희망의 표현으로 결론을 내리는 수많은 시편에서 이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특히 시편 3, 22, 31:9–24, 38, 73 참조).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은 단순히 더 좋아진 기분이 아니라 영적으로 심오한 것이었다. 즉,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깊어지는 사랑과 같이 성령님만이 주실 수 있는 특별한 은혜다. 시편은 원래 하나님 백성의 찬송가였다. 교회는 이 시편들을 시대에 걸쳐 메아리쳐 왔기 때문에 많은 신자들은 원저자들이 처음 시를 썼을 때 경험했던 것과 같은 영적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이것은 우리가 성경과 복음으로 충만한 노래를 부를 때에도 적용된다. 하나님의 말씀이 전파되든 노래로 불리든 영광이 그분께 돌려진다. 복음은 묵묵히 읽든지 선율로 읽히든지 모든 믿는 자들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다. 기독교인들이 기쁘게 모여 함께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들 스스로 하나님 말씀의 진리에 순복하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시사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합된 자들이라는 걸 기억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경험은 거의 없다.회중이 함께 모여 성경 말씀에 근거한 복음 중심의 찬양을 부르는 것으로 우리가 얼마나 자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강화되고 있는가? 또 복음에 대한 감사가 깊어지고 죄의 유혹이 약해지며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고조되었는가?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것은 고린도후서 3장 18절 말씀이 작용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기쁨과 그분의 영광을 위해 자기 백성에게 좋은 선물을 주기를 좋아하시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가 베푸시는 친절이다.나는 우리가 실제로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들이 교회 예배에서 일어나고 있다고 확신한다. 히브리서 6장은 우리가 “내세의 권세”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암시한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성결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우리가 교회에서 말다툼을 하거나 예배 중 키보드의 시끄러운 소리나 예배 후의 점심 식사 계획으로 주의가 산만해지면 그것을 쉽게 놓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실제로 우리를 변화시키실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우리가 모임에 참여하면, 죄인들이 모든 얼룩진 죄과를 벗게 된다는 찬양을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눈물을 흘리게 될 수도 있다. 우리가 방황하거나 사랑하는 하나님을 떠나기 쉽다는 것을 노래로 다시 고백할 때 마음이 움직여 회개하게 될 수 있다. 우리는 ‘거룩하고 거룩하고 거룩하고 자비롭고 전능하신 삼위의 하나님, 복되신 삼위일체’를 말로 표현할 때 경외심에 압도될 수 있다. 우리가 월요일을 맞으며 자신감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주일을 통해 그분이 승리하심으로 죄의 저주가 나를 지배하지 못한다는 것을 기억했기 때문이다.우리 교회의 전통 중 하나는 모임이 끝날 때 서로에게 축복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하나님의 사랑과성령의 교통하심이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지금 그리고 영원히 당신과 함께 하기를우리는 찬양을 드리며 형제자매들을 둘러보고 음악에 맞춘 성경 말씀으로 서로 격려한다. 그리고 매주 나의 이야기는 똑같다. 내가 교회에 와서 느낀 것이 무엇이든, 지난주에 얼마나 힘들었든지 간에, 우리가 거룩한 세레나데에 참여하면서 성도들과 눈을 마주치는 그 순간에 무언가 일어난다. 항상 정확하게 표현할 수는 없지만, 찬양을 드리고 나면 내가 예배를 드리러 교회 안으로 처음 들어갔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항상 지구를 뒤흔드는 것과 같은 것은 아니지만 거기엔 뭔가 다른 초월적인 것이 있다.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찬양은 진정으로 사람들을 변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원제: Yes, Singing Really Does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찬양
변화
주의이름높이며
회중
시편
성화
십자가
삼위일체
함께 예배해야 할 때 혼자인 이들을 위해 할 일
by Kathryn Butler
2021-09-26
지난 몇 개월 동안 교회는 대면 예배로 회복하는 달콤함을 기뻐했다. 줌 회의가 모든 일을 대신하도록 만든 2020년의 격동은 기독교인의 삶에서 대면 예배와 친교의 중요성을 다시금 깨닫도록 만들었다. 콜린 한센(Collin Hansen)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몸이 제대로 일하려면 손과 발, 그리고 귀와 눈 모두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그러나 예배하는 모든 제자가 다 모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주일마다 감사의 소리를 높이는 순간에조차 우리는 자리를 비운 형제자매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 중 일부는 면역이 저하된 상태이며, 그 결과 백신 접종에도 불구하고 COVID-19에 걸릴 위험이 높다. 또 어떤 사람들은 코로나바이러스가 일상적인 단어가 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심각한 상태에서 고통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겪는 그리스도인은 생명을 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해서 시련을 견디는 그리스도의 제자임에도 불구하고 종종 그리스도의 몸에서 단절되는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연결되어야 할 때 혼자가 된내 친구 앨리스는 이 외로운 길을 잘 알고 있다. 그녀가 암 치료를 위해 화학 요법을 시작했을 때 그녀가 다니는 교회는 조심스럽게 대면 예배를 재개했다. 마침내 형제자매들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되었지만, 취약한 면역 체계로 인해 그녀는 자가 격리를 할 수밖에 없었다.앨리스는 이렇게 말했다. “어려운 일을 겪는 그 때에 사실상 가장 취약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어떤 분리감(dichotomy) 말이에요. 내가 가장 필요로 했던 것은 누군가가 안아주는 것, 함께 있는 것, 그리고 내 머리에 손을 얹고 해주는 안수기도인데, 약해진 면역력과 코로나 때문에 정작 가장 힘든 시간 내내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또 다른 친구 진은 코로나가 한창 퍼지고 있을 때 장기 이식을 받았다. 그녀가 예상했던 것은 수술 후의 격리였지, 결코 백신을 기다리는 예닐곱 달의 장기 격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 오랜 기다림 끝에 알게 된 것은 백신 효과가 이식 환자에게는 떨어진다는 사실이었고, 진은 배신감을 느꼈다. 그녀는 말했다. “제가 기억하는 한 교회는 내게 매우 중요해요. 아버지가 목사님이셨고 어머니는 오르간 반주자였어요. 다시 교회에 다니지 못하면 우울증에 걸릴 거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어요.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요?”질병과 씨름하는 사람들은 거의 대면 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선택권이 없다. 그러나 이런 신자들도 몸의 일부, 곧 하나님의 양자로 남아 있기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발전에 있어 다른 어떤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하다(롬 12:4-8, 고전 12:12-13).여기 교회가 도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과 가정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을 수 있는 세 가지 방법이 있다.교회가 도울 수 있는 세 가지 방법1. 사역을 집으로 심방, 전화 통화, 그리고 영상 통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목마른 이들에게 시원한 물 한 컵을 제공할 수 있다. 앨리스는 말한다. “목사님과 장로님이 정기적으로 줌을 통해서 성경 구절을 읽어주었고 우리는 함께 기도했습니다. 교회 리더십과 나누는 달콤한 교제의 시간이었고, 그건 제게 힘을 주었어요.”앨리스의 사례는 대면 예배가 힘든 사람들을 위해서 사역을 집으로 가져오는 것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심방은 암담한 상황에서도 빛을 제공할 수 있다.2. 이웃 사랑내가 이야기를 나눈 많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형제자매들과의 교제가 생명을 준다는 사실을 언급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돌봐야 하는 책임 때문에 일년 넘게 교회에 가지 못하게 된 내 친구 헬렌은 전화를 통해 위안을 얻었다. 진은 교회 친구들의 방문에서 위안을 얻었다. 진은 말한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기도할 때 정말 도움이 됐어요. 나는 특히 아이들이 오는 것이 너무 좋아요. 무엇보다 병 말고 다른 얘기도 할 수 있어서 좋았어요. 그런 만남을 통해서 나의 정체성은 ‘새 장기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았어요.”앨리스는 또 교인들의 사랑을 통해 성령이 역사하시는 것을 보았다고 말했다. “나는 우리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지체라는 사실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누군가를 위해서 격려하고 기도하기 위해 그 사람을 반드시 잘 알 필요는 없어요. 하나님은 우리가 아는 교제의 네트워크 보다 훨씬 큰 분입니다.”앨리스는 여전히 교회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손과 발이 되십시오. 격려하고, 나누고, 경청하고, 함께 그리고 (심지어 줌을 통해서라도) 기도하고, 실질적인 필요를 제공할 방법을 찾으세요. 당신의 손을 내미십시오.”라고 격려한다.3. 녹음 자료의 활용라이브 스트리밍 교회가 대면 예배를 대체할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예배에 참석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영양을 공급하는 데에는 꼭 필요하다. 헬렌은 어려운 시기에 만나는 온라인 예배를 “생명선”이라고 부른다. 앨리스는 말한다. “항상 그렇지만 가장 어려운 시기에는 특히나 더 거의 모든 설교나 찬양이 저에게 더 강렬하게 다가왔어요. … 내가 아예 예배를 건너뛰었다면, 그 시간 동안 내 영혼을 위한 중요한 모든 격려를 다 놓쳤을 것입니다.”많은 교회가 대면 예배를 재개하고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멀어짐에 따라, 이런 여성의 이야기는 집에서 나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라도 디지털 녹음 서비스가 선택적으로 배포되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점을 알려준다. 소망을 붙잡는 세 가지 방법1. 말씀 속에 머물기성경은 우리 발에 등이요 길을 비추는 빛이다(시 119:105). 우리가 몸과 분리되어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면 험한 폭풍우도 헤쳐 나갈 수 있다.헬렌은 이렇게 말한다. “이 기간 동안 나는 과거에 성경에서 본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주님 외에는 다른 누구와도 이야기하지 않았고 내내 앉아서 깊이 생각할 시간을 가졌습니다.”앨리스는 말한다. “집에서 혼자 고립된 나 자신을 생각하면서 이게 혹시 하나님의 강권하심으로 인해 생긴 강요된 휴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가 나를 눕게 하신다.’ 그건 내가 스스로 휴식을 선택할 능력이 없어서라는 게 아니라,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결코 나 스스로 선택했을 리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말입니다.” 이 분리 기간 동안 교제를 갈망하는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혹시 주님께서 당신으로 하여금 그분의 말씀을 깊이 연구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시 46:10)으로 부르시는 건 아닌지 말이다. 2. 쉬지 말고 기도하기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염려를 그의 발 앞에 두라고 부르신다(빌 4:6). 질병이 우리를 고립시킬 때 우리의 기도는 더욱 뜨거워질 수 있으며, 우리를 소망에 더 단단히 고정시킬 수 있다.앨리스는 말한다. “내가 믿음의 길을 걸으면서 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은(그런데 그게 하나님께서 내게 요구하신 사명의 전부였을까요?), 신실함을 유지하고, 말씀 안에 머물며, 계속 기도하는 것뿐이었어요.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혀 답을 못 하고,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놀라서 그냥 도와 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을 때에도, 믿음이 약해져서 헤맬 때에도 하나님은 온유와 사랑으로 저를 대하셨습니다.”우리 구주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신다(히 4:15). 그리고 그는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요일 5:14).3. 당신이 누구인지 기억할 것질병으로 인해 소중히 여기던 훈련과 교제에서 멀어지면 우리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잊어버릴 수 있다. 교회에서 아무도 당신을 신경 쓰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은 당신을 보신다는 것을 기억하라. 당신의 가치는 자립, 재능, 건강 또는 독립성에서 오는 게 아니다. 당신의 가치는 오로지 변하지 않는 예수님으로 인해서만 샘솟는다. 참되고 가장 중요한 당신의 정체성은 교회 출석 능력과는 아무 상관이 없으며, 모든 것은 다 당신이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자(창 1:26)이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요 3:16) 자녀라는 진리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당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롭게 되었다(계 21:5). 장애도, 질병도, 전 세계에 만연한 바이러스도, 그 어떤 것도 그리스도 안에서 당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서 당신을 끊을 수 없다(롬 8:38-39).원제: When You Can’t Gather: Help and Hope for Those Worshiping from Hom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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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자사역
고난중에기뻐하기
심방의중요성
대면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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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읽기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Terry Johnson
2021-09-19
나는 1960-70년대 전형적인 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랐다. 그 교회는 성경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며, 남부 캘리포니아의 여러 교회와 농장이 풍부한 캘리포니아 중부 계곡과 교단적으로 연결된 교회였다. 이 회중은 처음에 황량한 지대와 대공황의 고난을 피해 서부에서 새롭게 시작하는 가족들로 구성되었다. 우리 교회는 우리와 유사한 다른 교회와 마찬가지로 좋은 교회, 복음주의 교회, 신실한 교회였다.그러나 나는 설교 본문이 된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교회 예배 중에 성경 낭독을 들은 기억이 없다.복음에 대한 소홀함이웃 교회들의 이러한 모습은 10대와 20대 초반에 내가 한 번쯤 방문했던 남부 캘리포니아의 모든 대형 복음주의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무렵 그 지역의 복음주의 교회들은 교회 예배에서 많은 분량의 성경 읽기를 하지 않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오늘날 전형적인 복음주의 교회의 특징이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대비되는 성공회 교회의 성경읽기나는 영국 브리스톨에 있는 성공회신학대학 Trinity College에서 2년을 보냈다. 그 기간 동안 예전적 교회나 비예전적 교회, 진보 교회나 보수 교회 등 성공회에 속한 수많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보았다. 그 교회들은 모두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었다. 바로 기도서와 연간 일정표에 따른 성경 읽기였다. 구약, 신약의 서신, 복음서, 시편 등 모든 성경이 다 포함되어 있었다.성경읽기가 풍요롭고 계속되는 것은 아이러니한 점이 있었다.대체로 미국의 복음주의자들은 공적 예배에서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지 않는다. 성공회 신자 중 일부는 자유주의적 회의론자이며 성경의 무오성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참으로 아이러니이다.왜 복음주의 교회는 많은 분량의 성경 읽기를 하지 않을까? 나는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배 시간에 찬양하고 말씀을 전하고 아마도 광고나 가벼운 대화에 상당한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 하지만 설교 본문 외에는 성경 읽기가 생략되어 있다. 왜일까?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그 안에서 가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적 예배에 많은 분량의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지루한 일이며, 지루하다 생각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성경을 믿고 무오성을 옹호하는 복음주의 교회는 단순한 성경 읽기가 공적 예배에서 자리를 차지하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성경 말씀 자체의 증언나는 ‘Worshiping with Calvin’에서 J. C. 라일(J. C. Ryle, 1816-1900)을 포함하여 이 단순한 공적 성경 읽기로 변화된 사람들의 예를 제시했다. 그러나 복음주의자들에게 성경 읽기를 통해 변화된 것에 대한 이야기식 간증이 필요한 건 아니다. 성경 자체가 우리에게 증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거듭나며,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에 이르고, 하나님의 말씀의 신령한 젖으로 자라며,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로 거룩하게 되고, 은혜의 말씀이 우리를 세워 영원한 기업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진리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열매를 맺으며 자라나게 하고,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고 좌우에 날선 검보다 예리하며, 복음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증언한다(벧전 1:23-25; 롬 10:17; 벧전 2:2; 요 17:17; 행 20:32; 골 1:6; 히 4:12; 롬 1:16; 참조 엡 6:1, 살전 2:13, 딤후 3:15, 렘 23:29, 사 55:11, 살전 1:5, 약 1:21). 이 외에도 성경은 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내 인생의 전환점나에게 전환점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1977년 가을 밤에 있었다. 그 때 나는 트리니티 학생들 몇 명과 함께 브리스톨 다운스를 가로질러 보수적인 성공회 교회인 St. Mary’s Redcliff Church로 걸어갔다. 예배 중간쯤에 한 남자 성도가 일어나 구약 성경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낭독했다. 그는 그 말씀을 천천히, 주의 깊게, 그리고 강조하여 읽었다. 효과는 강력했다. 그리고, 다이나믹했다.그러자 나는 이해를 할 수 없는 의문이 생겼다. “복음주의 교회에서는 왜 확장된 거룩한 독서(역사적 개혁주의 실천)를 지속하지 않는가?”라는 의문이다. 물론 성경 읽기는 지루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의 모든 요소는 제대로 관리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잘 읽는 데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읽는 사람은 이해와 뉘앙스를 가지고 읽을 수 있도록 성경 본문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현실을 직시하자. 회중을 지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은 구차한 변명이다.우리가 성경이 스스로 증거한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교회의 공적 예배에서 실질적이고 체계적인 성경 읽기를 소홀히 할 수 없다. 성경 읽기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XXI.3-5)와 그 자매고백서(London, Savoy)에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규정된 예배의 필수 요소로 확인된 5개 항목 중 하나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적 예배에 관한 지침서인 예배모범(Directory for the Public Worship of God)은 두 차례의 주일 예배에서 모두 구약과 신약 성경에서 각각 한 장씩을 읽도록 권하고 있다.공적 예배에서 성경을 적어도 한 장씩 읽는 방식은 이를 실행할 수 있는 좋은 방식일 것이다. 원제: Yes, Scripture Reading Really Does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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