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교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장로가 되고 싶은가? 오늘부터 장로답게 살기 시작하라
by Bobby Jamieson
2021-09-15
장로가 되고 싶은가? 그렇다면 장로로 임명되기 전에 장로로 ‘오해’받는 것을 목표로 삼으라. 어떤 장로들에게는 목회가 그들의 사역이다. 하지만 전부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종종 목회를 다른 직업과 똑같이 취급함으로써 많은 혼란과 피해가 발생한다. 그래서 존 파이퍼(John Piper)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전문직업인이 아닙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했다. 비록 목회가 직업이라 하더라도 목회는 다른 모든 직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따라서 목사보다 좀 더 넓은 범주인 장로의 직분을 놓고 생각해보자. 장로가 되기 위해 지원하지도 않고, 장로로 취업이 되는 것도 아니다. 장로라는 직업을 갖고 장로 직분을 시작하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장로는 그 대신에 교회로부터 임명받는다. 비록 이런 용어가 성경에 명시적으로 사용되지는 않았지만, 교회가 장로들을 “인정한다(recognizes)”라고 표현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본다. 어떤 개인이나 교회도 사람을 장로로 만들 수 없다. 물론 교회는 누구든지 원하는 사람을 장로로 임명할 수 있지만, 성경적 자격을 갖추지 못한 상태라면, 또 장로로서 헌신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장로라고 불려도 그는 결코 장로가 아니다. 누군가가 장로인가 아닌가를 결정짓는 것은 성품과 영적 수고(spiritual labor)다. 이런 사실은 모든 장로가 사실상 장로로 임명받기 전에 이미 장로라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적법한 장로는 그 직분에 임명되기 전에 이미 품성과 능력 면에서 자격이 있음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이 짧은 에세이는 장로의 능력에만 초점을 맞출 것이다. 장로는 무엇을 하는가?모든 장로가 수행하는 근본적인 사역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온 교회의 삶이 성경을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장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하나님의 말씀을 개개인의 영적 싸움과 죄에 적용하고, 다른 장로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교회의 전체 사역과 선교 사명을 인도해야 한다. 모범을 보이고, 가르치고, 조언하고, 인도하라. 인도하는 사람만이 공식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교회가 요구하지 않는 한 교회 전체를 이끌 수 없다. 그러나 경건한 모범을 보이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조언하는 데는 누구의 허락도 필요하지 않다. 사실 성경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경건한 모범을 보이고 서로 가르치고 서로 의논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데살로니가 교회의 그리스도인을 칭찬한다.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말씀을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리고 그 결과로 그들이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느니라”(살전 1:6-7),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살전 2:14)라고 말한다.그리고 베드로는 우리에게 사탄을 대적하고 믿음에 굳건히 서라고 말한다.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벧전 5:9). 그러므로 지금 당장 경건한 모범을 보임으로 장로보다 더 먼저 장로가 되라. 그렇게 함으로써 당신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장로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관한 요점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모든 그리스도인이 서로 가르치고 조언하기를 기대한다. 바울은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스스로 선함이 가득하고 모든 지식이 차서 능히 서로 권하는 자임을 나도 확신하노라”(롬 15:14).그리고 골로새 교회에도 권면한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 3:16).마지막으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권면한다.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살전 5:14). 이 모든 구절이 다 모든 그리스도인을 향한 권고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다 예외없이 다른 그리스도인을 가르치고 조언해야 한다.그러니 당신, 지금 뭘 기다리는가? 당장 시작하라.‘장로가 되기(Eldering)’를 시작하는 데에는 네 가지 방법이 있다. 1. 제자 훈련제자 훈련은 쉽게 말해서 다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도록 돕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닮아 성장하도록 돕기 위해 의도적으로 영적인 선을 행하라. 다른 교인에게 영적인 질문을 던지고 인내심 있게 그들의 대답을 탐구하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기도하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경을 읽으라. 영적으로 성장하고 싶어하며 또한 정기적으로 함께 성경을 읽고 싶어하는 다른 신자를 찾으라. 일주일에 한 번 만나 교대로 로마서 한 장을 서로에게 가르칠 수 있다. 제자를 삼는 것은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엡 4:15). 제자를 삼는다는 것은 복음뿐 아니라 자신의 삶까지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이다(살전 2:8).제자 훈련은 공식적이거나 비공식적일 수도 있고 또한 정기적이거나 비정기적일 수도 있다. 매주 같은 시간, 같은 커피숍의 같은 테이블에서 만날 수 있다. 또는 식료품을 사러 갈 때 누군가를 데리고 와서 그리스도와 함께 걸어가는 길에 대해 질문할 수도 있다.2. 환대환대에 관한 대부분의 성경의 권고는 당신과 아무런 관계가 없는 그리스도인들에게까지 물질적 지원을 하라는 것이다.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 13:2; 롬 12:13; 요삼 5-8). 그러나 베드로전서 4장 9절은 환대가 상호 간의 의무라고 규정한다.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그렇다면 그리스도의 영광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성장을 위해 다른 그리스도인들에게 어떻게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을까?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인턴을 한 독신 형제인 제레미 뮬러(Jeremy Mueller)는 정기적으로 저녁 식사를 만들어 다른 교인들에게 가져다 주곤 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 교회의 많은 가정에서는 다른 교인에게 단지 아이 돌보는 일만 맡기는 것이 아니라 그 전에 그 사람이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면서 친해지는 시간을 갖는다. 어떤 필요를 충족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가정을 봉사와 교제의 허브로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 해야 다른 사람을 육체적으로 섬기면서 동시에 영적으로도 도울 수 있을까?자녀가 많아 어쩔 수 없이 미니밴을 사야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이야기부터 시작하자. 사실 나의 첫 차는 1996년식 은색 머큐리 빌리저(Mercury Villager)로서 내가 로스앤젤레스의 대학에 갈 때 갖고 가도록 부모님이 허락해 주신 차다. 그 미니밴은 지금 내가 이어서 타고 있는 은색 2011년식 혼다 오디세이(Honda Odyssey)와 묘하게 비슷했다. 그러나 학부 시절에 내 빌리저는 서핑보드와 악기, 캠핑 장비를 운반하는 것 외에도 남가주대학(University of Southern California) 캠퍼스에서 그레이스교회(Grace Community Church)로 가는 비공식 버스 사역을 담당했다. 학생들에게는 교회로 갈 운송 수단이 필요했고, 빌리저에는 좌석이 있었다.교회는 오전 8시 30분에 시작했고 학교에서 20분 떨어진 거리에 있었다. 주차하고 자리를 찾으려면 늦어도 8시까지는 가야 했다. 그래서 몇 년 동안 거의 매주 일요일 아침에 나는 6시 전에 일어나서 7시 전부터 차를 타고 돌아다녔다. 기숙사 주차장에서 듣는 전화 응답은 마치 영화 대본처럼 예측 가능하고 똑같았다. “(베개에 파묻혀서) 아, 뭐라고?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어? 알았어. 바로 내려갈게.”3. 전도바울이 디모데에게 “전도자의 일을 하라”(딤후 4:5)고 명령한 것처럼 우리도 전도해야 한다. 맥 스타일스(Mack Stiles)는 이렇게 말했다. “전도는 설득을 목적으로 복음을 가르치는 것이다.” 장로의 말씀 사역이 주로 전체 성도들을 대상으로 하는 반면, 모든 장로, 특히 전임 설교 목사는 개인 전도에서 본을 보여야만 한다. 비기독교인 학우나 직장 동료들과 복음주의적 성경공부를 시작하는 것을 고려하라. 전도의 기회를 위해 기도하고 전도의 기회를 만들라. 4. 상담영혼을 돌보는 법을 배우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을 묵상하라.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게으른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게으름의 원인과 증상은 무엇인가? 마음이 나약한 사람을 강하게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약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가? 아니면 너무 열심을 내는 바람에 그들을 짓밟는 경향이 있지는 않은가? 다양한 영적 질병을 진단하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책장을 가득 채운 정확한 맞춤 처방전을 적절하게 분배하는 법을 배우라. 젊은이와 노인, 열망이 있는 사람과 무관심한 사람 등 다양한 그리스도인을 향하여 영적 주도권을 잡으라. 당신과 비슷하지 않은 사람들에게조차 영적인 선을 행하는 방법을 배우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특정한 영적 프로필을 가지고 있다. 성격, 문화, 성장 환경, 가족, 삶의 시점, 물질적 상황, 직업과 책임, 희망과 두려움, 죄와 투쟁, 육체적 정신적 고통, 영적 은사, 영적 성숙 등등 이 모든 것이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향해 무엇을 가지고 갈지를 결정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서 무엇을 얻어갈지도 함께 형성한다. 그리고 이 모든 특징을 통해서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말씀이 무엇인지, 또 과연 그들에게 열린 귀가 있는지도 알 수 있게 된다. 성도들의 은사와 은총은 매우 다양하며, 사탄이 그들을 올무에 가두려는 계략 또한 다양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는 것 뿐만 아니라 사랑으로 말하는 방법까지 함께 배워야 한다. 열쇠가 꼭 맞는 자물쇠를 찾는 법을 배우라. 고군분투하는 양들을 뻔한 진리만이 아니라 진정한 진리(the right truth)로, 또한 적절한 때에 적절한 어조로 섬기는 법을 배우라. 말을 잘하는 것만큼 잘 듣고자 하는 열망도 가져야 한다. 찰스 스펄전(Charles H. Spurgeon)은 “사람과 더불어 많은 일을 하는 사람은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사람과 함께 있을 때 편안함을 느껴야 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여러 종류의 양들 사이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방법을 익히라. 거의 환상적일 정도로 다양한 성도들을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장로가 되기 전에 장로가 되라. 원제: Want to Be an Elder? Start Eldering Now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장로
장로직분
장로의역할
삶으로하는전도
장로사역
TGC 선언: 교회가 최우선순위이다!
by Brett Mccracken
2021-09-12
어디서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를 놓고 우리는 매주 수백 가지 선택을 한다.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열 때 차고 넘치는 수많은 선택 앞에서 우리는 압도되곤 한다. 광고에 기사에 각종 동영상에 팟캐스트 등등 우리의 선택을 기다리는 수많은 것들이 넘친다. ‘복음연합’(The Gospel Coalition)은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선택지 중의 하나이다. 인터넷이라는 매체의 특성 자체가 풍성함이 부족하기에, ‘복음연합’이 제공하는 콘텐츠로 인해 당신이 영적으로 풍성해지기를 바란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지금 영적 건강과 관련해서 당신이 꼭 했으면 하는 하나의 행동이 있음을 말하려고 한다. 이 행동은 그 어떤 콘텐츠(물론 ‘복음연합’ 사이트를 포함해서)를 클릭해서 읽는 것보다도 훨씬 중요하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이 특정한 행동이 도대체 무엇일까? 바로 교회에 전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TGC는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존재한다. 결코 교회를 대체하기 위해 있는 게 아니다. 주일 아침에 어딘가에서 보낼 두 시간이라는 여유가 있다면, TGC 등 웹사이트를 탐색하는 데에 그 시간을 쓰지 말라. 교회에 가라. 간곡히 당부한다. 교회를 소홀히 하지 말라(히 10:25). 우선순위를 제대로 정하라. 그리고 그 우선순위에 전념하라. 거기에 투자하라. 교회에서 봉사하라. 피와 살이 느껴지는 진짜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라. 사람들과 부딪힐 때 만날 수밖에 없는, 불가피할 정도로 불편한 측면까지도 기꺼이 받아들여라. 인터넷 시대에 더 깊이 빠져들수록, 인터넷을 기반으로 사역하고 있는 우리 TGC는 더 확신하게 된다. 건강한 지역 교회에 뿌리를 내리고 교회를 향한 사랑과 헌신에 의해 신앙생활을 하는 기독교인이 가장 건강하고 능력이 넘친다는 사실을 말이다.신앙 형성은 교회에서 만들어진다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는 좋든 나쁘든 영적으로 세워져 간다. 대부분의 시간을 성경을 읽고 교회 생활에 투자한다면, 우리는 분명한 한 방향을 향해서 영적으로 세워져 갈 것이다. 반대로 대부분의 시간을 TikTok, Twitter, 그리고 Netflix에서 보낸다면, 우리의 신앙 형태는 전혀 다른 방향을 향해서 형성될 것이다. 온라인에서 보내는 과도한 시간은 기독교인을 나쁜 방향으로 이끌어간다. 편견을 강화시키는 온라인 거품 속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또한 다양한 방향에서 우리를 급진적으로 만들려는 목소리로 가득 찬 선별된 기사들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수록, 우리의 욕망은 하나님이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라 온라인 종족이 사랑하는 것을 더 바라도록 형성되기 마련이다. 고도로 온라인화 된 기독교인(Highly Online Christian)은 자연스럽게 대표적으로 성경이나 교회 등등과 같은 대상을 향해 점점 더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 그러한 것들이 그들이 온라인에서 섭취하는 내러티브와 완벽하게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견고한 기반 위에서 그들의 사고를 재조정할 수 있도록 하는 대상을 기피하는 HOC(Highly Online Christian)는 그 결과 디지털을 기반으로 그들 스스로가 만들어낸 자기기만이라는 나선형 구조에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슬프게도, 이런 일이 지금 전세계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그 이유는 단순하다. 기독교인이 온라인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교회 공동체에서는 더 적은 시간을 보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결과는 무엇인가? 많은 교회가 바른 기독교인을 만들어내는 싸움에서 지고 있다.바로 이런 상황 때문에 ‘교회 재발견’이라는 탄원이 지금 무척이나 시급한 이유이다. 기독교 세계를 포함해서 온 세계 속에서 들끓는 분열과 불안은 지금 빠르게 그 전환점(tipping point)에 도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현실 속에서 꼭 필요한 치유는 결코 온라인으로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교회에 다시 한 번 더 헌신한다면, 진전을 기대할 수 있다. 교회는 그의 백성의 번영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유일한 선물이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법을 배우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적용하며 그의 사명에 참여한다.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사랑을 주문하고, 그분을 찬양하도록 우리의 마음을 고조시키기에 가장 좋은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다음에 열거하는 모든 역사가 일어나는 곳이다. - 그 어떤 유튜브 동영상이나 위키피디아 항목도 교회처럼 우리를 미덕으로 훈련시킬 수 없다. - 그 어떤 트위치(Twitch) 스트림이나 서브레딧(subreddit)도 교회처럼 지속 가능하고 양육에 효과적인 커뮤니티를 만들 수 없다.- 그 어떤 어떤 트위터 토론도 교회가 할 수 있는 것처럼 원수를 사랑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없다. - 그 어떤 활동가의 해시태그도 교회처럼 정의를 행하고 자비를 사랑하려는 기독교인의 의로운 분노와 열망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다.- 그 어떤 스포티피(Spotify)의 예배 재생 목록도 예배당에 모여서 함께 부르는 회중 찬양의 영광을 복제할 수 없다.- 그 어떤 유명 설교자의 블로그나 팟캐스트도 개인적으로 나를 알고 사랑하며 가장 힘든 순간에 내 곁에 앉아서 나를 위로해줄 수 있는 우리 교회의 목사님이라는 선물을 대신할 수는 없다. - 그 어떤 소셜 미디어의 “자신의 약함 고백”도, 그게 아무리 많은 ‘좋아요’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교회에 모여 함께 한 목소리로 고백하며 느끼는 가족과도 같은 친밀함이 주는 만족에 비교할 수 없다. 온라인에 그리스도인의 삶에 유익한 것이 많이 있을까? 물론 많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감히 교회를 이기지는 못한다. 물론, 이건 힘든 이야기이다“너무 이상주의적이라고 당신은 지금 생각할 수도 있다. 우리 교회는 내가 안전하다고 느끼는 곳도 아니고 나를 아는 곳도 아니야. 게다가 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자란 사람도 아니라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위에서 열거한 진술이 현재 당신이 느끼는 교회 경험과 일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진술은 교회를 여전히 있는 그대로 설명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교회에 헌신하는 교인으로 사는 것이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다. 최대한 건강한 교회를 찾으라. 그러나 그 교회가 완벽할 것이라고 가정하지는 말라. 결코 그렇지 않을테니까. 분명히 불편할 것이다. 탈수 증세로 병원을 찾은 당신의 팔에 의사가 링거 주사를 꽂으면 불편한 건 당연하다. 그러나 그 수액은 당신의 생명줄이다. 불편함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건강을 회복하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지금 디지털 시대라는 덩굴 위에서 서서히 죽어가고 있다. 교회에 가는 것이 결코 가장 편한 것은 아니지만, 다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가장 필요하다. - 디지털 시대의 혼란 속에서 교회는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된다. - 당파적 민족주의 속에서 다양하고 글로벌한 가족인 교회는 당파의 벽을 허문다. - 육체가 없는 초현실주의나 가상의 삶 속에서 육체를 입은 교회는 우리를 현실과 다시 연결시킨다.- 순간적이고 눈 깜짝할 사이에 놓칠 수 있는 온라인 생활의 속도 속에서 교회는 우리를 역사와 연결할 뿐 아니라 현실보다 훨씬 더 큰 이야기, 즉 영원한 이야기 속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교회는 이긴다인터넷에서 1시간(또는 트위터에서 5분)만 보내면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처럼 느낄 수 있다. 온라인 속에서는 모든 것이 다 감정적 긴급성과 “속보”의 중요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불길한 헤드라인은 또 다른 COVID-19의 급증, 또 다른 끔찍한 폭력 행위, 페이스북에서 공유된 또 다른 무모한 음모 이론을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 트위터가 주요 기준점이라면, 교회도 지금 무너지고 있다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내 경험에 따르면, 온라인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교회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낼수록 거의 항상 우울함과 절망감이 사그라들었다. 왜 그럴까? 그건 내가 교회에 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결코 무너지지 않을 유일한 기관의 일부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영원토록 나의 민족이 될 다양한 피부색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을 둘러보고 있다. 나는 지금 내가 앞으로 영원히 하게 될 바로 그 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하고 있다. 교회는 나를 이 덧없는 삶의 흐릿한 안개에서 벗어나 맑고 산소가 풍부한 영원의 공기로 인도한다. 손을 들어 찬양하며 내 입술이 찬양이 주는 달콤함을 맛볼 때, 그건 마치 에이미 애덤스(Amy Adams)가 영화 콘택트(Arrival)에서 경험했던, “그녀의 미래에 대한 기억”과도 같다. 그렇다. 교회에서 우리는 천국의 삶을 미리 엿볼 수 있다. 세상의 기초가 무너질 때,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초로 하는 교회로 달려가야 한다. 교회가 당신을 실망시킬까? 당연하다. 상처와 흉터가 생길 것이다. 거기에는 그 누구도 예외가 없다. 그리스도의 신부이자, 천국의 한 모습이기도 한 교회에는 항상 흠이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늘도 교회를 거룩하게 하고 있으며 언젠가 그 신부는 흠 없이 빛날 것이다(엡 5:27).기독교인이여, C. S. 루이스(C. S. Lewis)가 말한 것처럼 “교회는 우주보다 오래 살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모든 문화, 모든 제도, 모든 국가, 인류, 모든 생물학적 생명이 멸종되어도 교회 안에 있는 한 우리 모두는 여전히 살아 있는 때가 반드시 올 것이다. 불멸은 세상의 일반성에 주어진 약속이 아니라 우리에게 약속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것은 사회나 국가를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여, 지옥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베드로에게 하신 예수님의 약속(마 16:18)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은 지옥의 문이 시애틀의 한 대형교회나 국제 변증 사역 또는 복음 중심의 연합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으셨다. 그런 것들은 다 왔다가 갈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교회는 끝까지 남을 것이다. 교회는 예수님이 세우신 유일한 기관이며 성공으로 끝날 유일한 기관이기도 하다. 다른 모든 기관, 파라처치 사역, 자선 단체 및 기업은 결국 다 끝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TGC가 20년 후에도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렇지 않아도 괜찮다. 할 수 있는 한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회가 이 복잡하고 도전적인 역사 속에서 번성하도록 돕기를 원할 뿐이다. 우리 TGC는 교회를 대체하지 않는다. 우리는 단지 교회의 치어리더이자 교회를 돕는 장비에 불과하다. 우리는 디지털 제자도라는 어려운 과제에서 교회를 돕고 싶다. 목회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디지털 시대 기독교인 양성을 위한 전쟁의 최전선에 서 있다면, TGC는 영혼을 위해 싸우고 다양한 방향에서 오는 무자비한 공격을 감당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그들이 잠시 참호에서 쉴 때 필요한 자원을 공급하는 보급선과 같다.그리고 그 모든 과정은 다 전투이다. 당신이 이 글을 어떤 디바이스를 사용해서 읽고 있든지 간에 그곳은 영적 전쟁터이다. 온라인에서 기독교인들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오늘도 뽑혀지고 있다.그게 당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방어력을 강화하고, 산소를 보충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주는 영양을 섭취하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져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 당신의 삶을 맡기라는 것이다.원제: TGC’s Manifesto: Prioritize Your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생활
온라인교회
온라인기독교인
온라인신앙의위험
교회의생존
우선순위
TGC
복음연합
건강한교회
가상 교회 같은 것은 없다
by Jonathan Leeman
2021-09-08
COVID-19 대유행으로 전 세계 교회는 많은 도전을 받았다. 성도들이 한 곳에 모여서 함께 예배드리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데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COVID-19 초기에 몇 달 동안 모임을 할 수 없을 때, 나는 내 교회를 잊어버린 것처럼 느꼈다. 사람들은 “당신의 교회는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전화를 걸고 교인들에게 문자를 보내곤 했지만, 성도들 전체를 다 돌보지는 못했다. 교회는 폭풍우가 지나간 후 웅덩이가 여기저기 얕게 퍼져 있는 주차장의 빗물과 같이 느껴졌다.장로들은 신앙에 어려움을 겪거나 특정한 유혹에 직면해 있는 영적으로 연약한 교인들을 가장 걱정했다. 우리는 이미 영적으로 표류하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 전염병이 그들을 완전히 몰아내기 몇 달 전에 한 발만 내디뎠던 사람들에 대해 걱정했다.그러나 모이지 못하는 것은 영적으로 장성한 사람이든 미성숙한 사람이든 모든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모두 정기적으로 성도들을 만나고 교제를 나눌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보거나 만나는 이들은 직장 동료, 학교 친구 또는 TV 캐릭터에만 국한될 수밖에 없다.무엇을 놓치고 있는가?팬데믹이 시작되자 많은 교회에서 예배를 생중계했고, “가상 교회”의 지속적인 가치를 칭송하는 목소리가 많아졌다. 이전에 이 아이디어를 비난했던 목사들도 이제 “가상의 예배 공간”을 열고 이것이 무기한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약속하면서 전담 목사를 배치했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지상명령을 완수하는 역사에서 흥미로운 발전이라고 말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궁금한 것이 있다. “교회”를 경험하는 수준이 방송을 보는 것에 불과할 때 우리가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우선, 당신은 교회 성도들에 대해 덜 생각한다. 마음에 그들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들과 직접 맞닥뜨리지 않기 때문에 그들과 잠깐이라도 대화를 할 기회가 없다. 사실 그런 마주침과 간단한 대화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더 긴 대화로 이어질 수도 있는데 그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성도 간에 격려하거나 어떤 책무를 수행하거나 사랑을 베푸는 일에서 목회자가 직접 나서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된다.진리인 성경을 다운로드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은 단순한 정보 전달 이상이라는 사실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교회가 온라인으로만 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구체화되는 느낌과 경험과 진리를 목격할 수 없다. 이러한 것들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형제자매 사이에 사랑의 끈을 만든다. 가상 교회라는 말은 모순적이다.엉망인 축복생각해 보라. 어쩌면 당신은 일주일 내내 어떤 형제에 대한 숨은 증오와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주님의 만찬에 참여하고 그분의 임재를 경험함으로써 죄가 드러나고 이를 고백하게 된다. 어쩌면 당신은 어떤 자매의 신앙에 대해 의심이 들고 그로 인해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같은 찬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마음이 따뜻해진다. 어쩌면 당신은 국가에서 정치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이 문제로 씨름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설교자가 그리스도께서 승리와 변호를 위해 오셨음을 선포하자 주변에서 “아멘!”하는 외침을 듣는다. 이때 당신은 소망으로 동맹을 맺은 하늘 시민에 속해 있음을 기억하게 된다. 당신은 어둠 속에서 투쟁을 계속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점심을 먹으며 다정한 목소리지만 절박하게 묻는 노부부의 “정말 잘 지내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당신을 빛으로 이끈다.하지만 그 어느 것도 가상으로는 경험할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를 다른 피조물과 관계를 맺도록 만드셨다. 그리스도인의 삶과 교회의 삶은 다운로드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살펴 지키고, 듣고, 직접 행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디모데는 자신의 삶과 교리를 살필 필요가 있었는데(딤전 4:16), 그 이유는 그것이 자신과 그의 청중을 구원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가상 교회 또는 인터넷 교회가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편리하고, 솔직히 말해서 불편한 관계를 피할 수 있다. 가상 교회에서는 그런 유익을 얻는다. 그것은 강한 유혹이다.나는 미혼일 때 다른 도시로 이사했다. 다니는 교회도 없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도착한 지 며칠 만에, 어떤 생각이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나가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아무도 나를 보거나 내 말을 듣거나 내게 묻거나 하지 않았다. 꽤 괜찮은 것 같았다. 하지만 즉시 성령께서 “그 생각이 어디에서 온 줄 알고 있는가? 그것은 따라야 할 충동이 아니다"라고 나를 꾸짖어 주셔서 감사했다.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날 성령께서 내 마음을 점검해 주셔서 감사하다. 하지만 알아야 할 교훈이 있다. 그 교훈은 성령께서 일반적으로 교회의 형제자매들을 사용하여 우리가 어리석음과 유혹에 맞서 싸우도록 도우시겠다는 것이다.그렇다, 모임이나 교회가 불편할 수 있지만 사랑도 그렇다. 관계가 엉망이지만 사랑도 그렇다. 상처받기 쉬운 대화도 무섭지만 사랑도 그렇다.우리는 서로 의존하는 존재다가상 교회를 밀어붙이는 것이 기독교의 개인주의화를 독촉하는 건 아닌지 우려된다. 우리는 전염병과 같은 비상 상황에서 제한된 시간 동안 그러한 도구를 사용하는 것이 지혜로운지 논쟁할 수 있다. 미국의 해안 도시들은 제2차 세계 대전 중 정부가 전기를 공급하지 않아서 정전으로 인해 주일 저녁에는 모일 수 없었다. 그럴 수 있다고 본다.하지만 (좋은 의도라도) 가상 교회를 영구적인 선택으로 제안하거나 권장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제자도를 해칠 수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자율적으로 지켜도 된다고 생각하도록 훈련시킨다. 가족의 일원이 되고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르치지 않고도 추상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예수님을 따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그런 점에서 목회자들은 사람들이 가능한 한 가상 교회에 “출석”하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는 교인들에게 실시간 스트리밍 옵션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할 수 있는 부드러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가상 교회에 “출석”하는 것은 그들의 제자도에도 좋지 않고 그들의 신앙에도 좋지 않다. 우리는 그들이 안주하지 않고 가능하다면 우리와 함께 모이는 데 열심을 내도록 이 사실을 분명히 해야 한다.모이라는 성경의 명령은 부담스러운 것이 아니라(히 10:25; 요일 5:3) 우리의 믿음과 사랑과 기쁨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원제: There’s No Such Thing as Virtual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가상교회
팬데믹
예배
교회의모임
인터넷교회
주일 아침에 울리는 가장 중요한 악기
by Bob Kauflin
2021-09-05
시편 낭독이 끝날 때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러 개의 악기가 폭발한다. 류트, 하프, 탬버린, 현악기 및 파이프는 모두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인다. 오늘날에는 피아노, 일렉트릭 및 어쿠스틱 기타, 금속악기, 현악기, 그리고 신디사이저, 오르간 및 여러 종류의 타악기가 사용된다. 이 모든 악기를 연주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과 가치 그리고 그분의 역사하심에 반응하기 위해서이다. 이렇게 많은 악기가 예배 시간에 쓰이는 것을 보는 사람 중에서 어쩌면 더 많은 악기를 쓸수록 더 잘 예배드릴 수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건 아니다. 현실적으로 모든 교회가 다 이렇게 많은 악기와 연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게다가 상당수의 교회가 단지 피아노 또는 기타 하나로만 예배를 드리고 있고, 하물며 그것조차 없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교인 숫자와 관계없이 교회라면 다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악기가 있다. 그리고 너무나 다행스럽게도 그 악기는 매 주일 아침 하나님이 가장 관심을 갖고 있는 악기이기도 하다. 바로 교인들의 목소리이다. 이 사실이 예배에 좋은 영향을 끼치는 다른 악기들의 가치 있는 기여를 허사로 만든다는 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악기를 단지 예배에 유용한 것으로 보아야지, 예배에 필수적인 것으로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악기는 단지 우리의 목소리를 보완하고 돕기 위한 것이지, 우리의 목소리를 대체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게 아니다. 목소리를 높이자수많은 악기가 나열된 총 150편에 이르는 시편이지만, 목소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시편은 악기를 사용하는 시편보다 일곱 배나 더 많다. 물론 이 사실 하나만을 놓고 결론이 났다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몰라도, 이 점이 우리에게 바른 찬양과 관련해서 주는 시사점은 결코 적지 않다. 시편을 자세히 살펴보면 시편을 통해 찬양할 때 그 뒤를 받쳐주는 악기를 하나님이 지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단지 노랫말을 주었을 뿐이다. 물론 많은 시편에는 악기가 언급되어 있고, 또 그런 악기를 연주하라는 명령도 있다. 그러나 하나 확실한 것은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악기를 사용하는 것보다 어떤 언어를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가에 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이다. 비록 신약이 플루트, 트럼펫 , 하프를 언급하고 있지만(마 11:17; 고전 14:7–8; 살전 4:16; 계 5:8; 14:2; 15:2),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였을 때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찬양이라는 점을 신약은 분명히 하고 있다(마 26:30; 막 14:26; 행 16:25; 고전 14:15, 26; 엡 5:19; 골 3:16; 약 5:13). 악기만 가지고 “가르치고 훈계하라”는 성경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목사, 리더, 기술팀, 그리고 당연하겠지만 찬양 사역자까지도 그들이 교회에서 맡은 역할은 교인들의 목소리가 예배에서 가장 크게 들리도록 돕는 것이다. 바로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교회 구성원으로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한번 살펴보자. 교회 구성원을 위해서비록 당신이 교회 찬양팀에 속한 정식 멤버가 아니라고 해도 최소한 네 가지 방법을 통해서 당신은 찬양과 관련해서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있다. 준비하라. 좋은 연주자는 주일 예배를 위해서 계획을 세우고 또 연습한다. 그러나 단지 교인 중 한 사람으로서 당신이 굳이 교회에 가면서 목을 풀 필요는 없지만, 당신은 그 대신 마음을 준비해야 한다. 주일 예배 시간에 찬양이 당신의 마음을 열기 전에 토요일 밤 또는 그 전부터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주신 풍성한 은혜를 묵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라. 인간의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은혜롭게도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우리가 받을 벌을 대신 받게 하셨고, 그 결과 우리는 용서받고 의롭다 함을 받았고 또 하나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약속한 모든 것은 100퍼센트 이뤄질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찬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참여하라. 뻔한 말이지만 모든 교인이 한 명도 빠지지 않고 모두 다 찬양할 때 그들의 찬양 소리는 더 선명하게 들릴 것이다. 찬양팀에서 악기를 담당하는 누군가가 악기를 아예 연주하지 않고 멍하니 서 있다면 아주 이상할 것이다. 마찬가지이다. 교인이 찬양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면 그건 말이 되지 않는다. 내가 많은 회중 가운데에서 의의 기쁜 소식을 전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내 입술을 닫지 아니할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시 40:9).주변을 돌아보라. 찬양을 하는 중에 주변 교인들과 간간히 눈을 맞추도록 하라. 나도 당신과 함께 찬양하고 있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그렇게 하는 게 얼마나 기쁜지를 보여주도록 하라.받으라. 나는 종종 주일 예배를 드리는 중에 찬양하기를 잠시 멈추고 대신 다른 이들이 선포하는 하나님의 진리가 내 영혼을 씻기도록 한다. 교회에서 사용하는 음악과 관련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가르치실 때, 우리는 “서로 화답하고” 또 “피차 가르치며 권면”해야 한다(엡 5:19; 골 3:16). 이건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다 서로를 세우기 위해서라고 한 말씀과(고전 12:7; 14:5, 12, 26)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다른 교인이 내 주위에서 찬양하는 것을 듣는 것은 은혜와 성숙을 가져다주는 좋은 방법이다. 시끄러운 신디사이저 소리와 혼란스러운 기타 화음 때문에 심지어 찬양하면서도 정신을 못 차리는 건 오늘날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에서 이런 일은 찾아볼 수 없다. 우리가 예배드리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하기 위해서이지, 단지 음악적인 경험을 위해서가 결코 아니다. 격려하라. 찬양 사역자와 멤버들을 칭찬하라. 그들이 선택한 특정 찬양에 대해서 감사하라. 하나님이 그들이 선택한 찬양을 사용해서 당신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더 바로 바라볼 수 있었고 또 믿음이 더 강해질 수 있었다고 고백하라. 주변에서 큰 소리로, 담대하게, 기쁘게, 그리고 신실하게 찬양하는 사람들 때문에 당신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표현하라. 특히 슬픔과 시련 속에서 믿음, 신뢰, 기쁨의 찬양을 부름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드러내는 사람들을 격려하라. 교회 지도자를 위해서만약에 당신이 지금 교회에서 찬양을 인도하는 책임자라면, 당신이 어떻게 하는가에 따라서 교인들의 찬양을 방해할 수도 또는 도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교인들이 다 함께 한 목소리로 드리는 찬양의 가치를 가르쳐라. 주일 예배 시간 중 멘트를 통해서건, 아니면 설교를 통해서건, 교인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통해서 찬양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점을 바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마음을 다해서 찬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야 한다. “예배로의 부름”이라는 순서로 예배를 시작할 때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에 관한 찬양을 하는 것을 고려해보라. 세팅된 볼륨을 잘 살펴보라. 많은 경우에 악기 소리가 너무 커서 전체 교인의 찬양 소리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의 소리도 들리지 않는 경우가 있다. 또한 그와는 정반대의 경우도 있다. 밴드와 찬양 인도자의 소리가 너무 작아서 노래에 자신이 없는 교인으로 하여금 음정이 틀릴까 봐 소리 내서 찬양하는 것을 꺼리게 하는 경우도 있다. 음악의 볼륨을 적절하게 조절해야 한다. 다른 사람의 찬양이 아예 들리지 않을 정도로 너무 커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노래에 자신감이 없는 사람이 찬양을 못 할 정도로 너무 작아서도 안 된다. 키(key)와 음역대를 곡이 아닌 교인들 수준에 맞춰라. 찬양곡에 따라서 더 근사하게 들리는 음 높이에 키를 맞추려고 한다면, 그건 인도자가 자기들을 위해서 찬양하는 것이지 결코 교인들을 위해서 찬양하는 게 아니다. 어떤 솔리스트가 멋지게 찬양하는 걸 보려고 교인들이 예배에 오는 게 아니다. 아니, 그래서는 절대 안 된다. 그러나 교인이 찬양을 할 때 키가 너무 높거나 낮아서 부르는 게 고역이 되는 경우라면, 그들은 너무도 쉽게 단지 구경꾼으로 전락할 수 있다.구성을 단순화하라. 악기 연주가 너무 일정하고 단조롭다면, 교인들은 앞에서 인도하는 찬양대를 보고 별 대단하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너무 전문적이고 화려하게 찬양을 인도하는 경우라면 교인들이 내적 진리에 집중하기보다는 찬양 인도대의 화려한 음악적 기교에 감탄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가능한 한 적은 악기를 사용해야 한다. 언제 어떤 악기를 연주할지에 대해서 다양성을 가지라. 그리고 찬양 인도자가 귀 안에 모니터를 꽂고 있는 경우라면, 교인들의 찬양 소리가 제대로 들리는지를 항상 확인해야 한다. 불을 켜라. 종종 어떤 사람들은 어두울수록 방해도 덜 받고 음악을 하는 데에 더 편하게 느낄지 모르지만, 어두운 예배당은 교인들로 하여금 예배의 주인공은 연단에 서 있는 사람들이고, 또한 지금 가장 중요한 일은 바로 저기 연단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불이 밝아야 찬양 인도자는 주변을 더 잘 살펴보면서 찬양을 인도할 수 있다. 의도적으로 악기 없이 부르는 아카펠라를 시도하라. 대부분의 교인들은 그들 자신이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라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왜냐하면 교인들이 자기네들 혼자 찬양을 부른 적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모든 악기음이 사라지고 찬양 인도자가 아카펠라로 혼자 찬양할 때 교인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든다면, 그건 바로 교인들이 자신들의 찬양이 아니라 앞에 있는 찬양팀의 찬양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신호이다. 예배 때마다 두세 번 아카펠라를 포함하도록 하라. 그렇게 함으로서 찬양 팀의 역할은 교인들을 도와주는 것이지 그 반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교인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게 된다. 악기만 연주하는 독주 시간에 제한을 두라. 교인들이 중간중간 악기 연주를 듣기 위해서 찬양을 멈춰야 한다면, 교인들의 영혼이 찬양 속 진리와 계속 연결되는 것은 쉽지 않게 된다. 한 가지 제안을 하자면 처음에 시작할 때 악기로만 시작을 하고, 중간에 들어가는 독주 부분은 최대한 제거하는 것이다. 또는 마지막 엔딩 부분을 악기로 마무리하지 말고 교인들의 찬양으로 끝내는 것이다.모든 이의 유익을 위해서 교인의 목소리를 가장 중요한 악기로 삼을 때, 우리에게는 다음 다섯 가지의 유익이 있다. 첫 번째로 교인의 목소리가 가장 중요한 악기가 될 때 우리는 에베소서 5:19과 골로새서 3:16의 명령을 새롭게 상기하게 된다. 단지 하나님을 향해서만 찬양하는 게 아니라 우리가 서로 서로를 바라보며 찬양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보다 더 확실하게 내 주변에 있는 형제자매로 인해 각 사람이 세움을 받는다는 사실을 기억하게 된다. 두 번째로 교인들의 전체 목소리가 내는 찬양의 가치를 알게 된다는 것은 예배가 공연으로 전락할 위험을 줄여주고, 그에 따라 모든 교인이 참여하는 진정한 예배가 됨을 의미한다. 앞에서 인도하는 사람에게 받는 감동은 줄어들고, 내가 참여함으로 느끼는 감동이 늘어남을 의미한다. 찬양 팀은 단지 함께 예배하는 큰 지체의 일부이지 결코 분리된 파트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우리를 인도하는 분은 오로지 대 제사장되신 예수님뿐이고, 오로지 그분만이 우리가 아버지께 드리는 모든 찬양의 제사가 완전하도록 할 수 있다(벧전 2:5).세 번째로 교인 전체의 역할을 중요시함으로 우리는 교인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다시 상기할 수 있다. 통상 “오늘 예배 어땠어?”라는 질문이 함축하는 바는 앞에서 찬양을 인도했던 사람들이 잘했는지의 여부를 묻는 경우가 많다. “예배”가 단지 주일에 모여서 노래하는 것이 아니다. 예배는 앞에 있는 몇 명의 찬양 팀이 하는 게 아니라, 교인 전체가 다 함께 드리는 것이다. 따라서 “예배”의 질을 결정하는 것은 교인 전체가 보여주는 열정과 합심과 참여와 표현에 달려있다.네 번째로 교인 전체의 목소리에 우선 순위를 둠으로 우리는 앞에서 환상적인 소리를 내는 음악가에게 덜 의존하게 되고, 반대로 믿음으로 넘치는 우리의 내면을 더 의존하게 된다. 매주 훌륭한 악기를 동원해서 아름다운 예배를 드리도록 하는 교회에 우리는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한번 솔직해지자. 교회에서 찬양을 담당하는 대부분의 음악가는 잘해야 평균 수준이다. 시간이 갈수록 그들의 실력이 늘기를 바라지만, 사실 그들은 그렇게 탁월한 전문가는 아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은 결코 주님의 영광을 향해 육신과 마음의 눈을 열고 예배에 참석하는 교인 각자가 내는 목소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교인을 가장 중요한 악기로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의 하나 됨을 더 잘 표현하게 된다. 교인들과 찬양팀 사이를 가르는 줄도, 또 목사와 교인을 가르는 줄도 없다. 우리 모두는 다 그리스도의 몸이고, 그의 피를 통해 하나가 되었으며 또한 성령 안에서 함께 묶인 바 되었다.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 15:5-6).어린 양의 영광을 노래하는, 영원토록 계속될 그 찬양이 다른 악기가 아닌 교인들의 목소리를 통해 점점 더 크게 울려퍼지는 교회가 되길 소망한다. 원제: The Most Important Instrument on Sunday Morning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예배
찬양
회중찬양
악기
찬양팀
찬양인도자
찬양의본질
영성
주일예배
자발적참여
개척 당시 꿈꿨던 비전과 다른가?
by Jason James
2021-08-30
비전을 제시하는 것은 교회 개척자로서 소명의 핵심이다. 그것은 팀에 활력을 불어넣고 재정적 지원을 늘리고 교회가 어려움 속에서도 인내하도록 촉구하기 위해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개척자의 마음에 고통이 서린다. 사역은 더 이상 그가 상상했던 것이 아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다른 사람들은 그의 부르심을 확신할 수 없게 되고, 그로 인해 자신의 소명에 그토록 확신했던 그에게 더 이상 확신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의 눈은 희미해져가고, 그 비전은 구체화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나는 이 고통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뉴욕시에 교회를 세우라는 하나님의 응답을 받은 후, 우리는 들떠서 가족과 친구들을 불러 이 부르심이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라는 것을 반복해서 말했다. 그러나 여정의 어딘가에서 우리는 이 섭리가 우리가 상상한 대로 정확하게 이루어지도록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다고 잘못 생각했다.사역 계획이 우리가 상상한 대로 되지 않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망한 바가 성취되지 않아 암울함으로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떻게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할 힘을 찾을 수 있을까? 실망으로 인해 우리의 소명에 의문이 생기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나 더 나쁘게 하나님의 성품에 의문이 생기면 어떻게 해야 할까?더 큰 비전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실 때 우리가 먼저 상상을 하는 방식에 대해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이야기를 세상을 위한 그분의 계획에 짜 넣으실 것이라고 겸손하게 생각하면서 궁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 이 교회 개척은 어떤 모습이 될까?’ 우리는 교회 개척이 가시적인 성공과 중요한 의미가 되어야 한다고 상상하며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우리 대부분과 달리) 하나님이 이루실 일에 대한 분명한 약속까지 들은 사람들의 예로 가득 차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상상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그들의 생애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사례도 있다.아브라함은 그의 후손이 별처럼 셀 수 없을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는 자주 별 아래 누워서 하나님의 약속의 상징을 바라보았지만 정작 아이가 없는 자신을 발견한다. 죽기 전에 그의 자손이 수많은 별과 같이 셀 수 없을 만큼 많지 않다는 걸 발견한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하나님은 타오르는 불 가운데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그는 두려운 마음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도록 그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모세가 40년 동안 광야에서 방황하며 그 약속의 땅을 멀리서만 볼 줄 어찌 알았겠는가?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으로 담대히 고백했다. 그러나 감옥에서 그는 자신의 고백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았는가? 그는 바라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예수님에게 물었다.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마 11:3)이 사람들은 자신들이 들은 것과 경험한 것, 하나님께서 계시하신 것과 그들이 상상했던 것들을 조화시키려고 노력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상한 갈대들을 꺾지 않으셨다. 그분은 우리도 꺾지 않을 것이다.하나님께서 부르셨을 때 우리는 교회에 대한 강력한 비전을 생각했지만,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라고 촉구하는 구름 같은 증인들이 있다. 아브라함이 그랬듯이, 우리도 예수님을 고대해야 한다(요 8:56). 모세가 그랬듯이, 우리도 사역의 모든 상급보다 예수님을 더 큰 보화로 여겨야 한다(히 11:26). 그리고 요한이 그랬듯이, 우리도 그리스도께 질문할 수 있어야 하지만 그로 인해 걸려 넘어지지 않아야 한다(마 11:6).우리는 별들 너머로 그 수를 계수하고, 이름을 지어 주시는 창조주를 바라보며 그분에게 매료되어야 한다. 언젠가는 구름이 끼고 우리의 소명을 확인시켜 주는 모든 표징과 상징이 사라질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바라보게 될까?더 큰 항복아내와 나는 2011년 12월에 뉴욕시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것에 대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2년 후 우리는 그 확신이 계속될 것이라고 가정하고 뉴욕으로 이사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른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우리는 도착한 후 거의 1년 동안 실직 상태였다. 우리는 이웃과의 관계와 소속감을 키우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3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 상실을 안타까워하다가 결국 기존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내가 그 교회의 목사가 된 지 1년 후, 우리는 그 교회를 폐쇄해야 했다.나는 이해하려고 애썼다. 왜 하나님은 그렇게 확신시켜 주시고는 우리 삶에 최악의 두려움만 주셨는가? 물론 하나님은 그 이상을 원하셨다. 우리는 그분의 계획에 우리의 성공뿐만 아니라 우리의 완전한 항복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몰랐다. 우리가 할렘에 New Hope Church를 개척한 것은 2020년 전염병이 우리 도시를 강타하기 2주 전, 우리가 교회 개척을 위해 처음 기도를 시작한지 9년이 지난 후였다.교회 개척자들은 우리의 계획을 주님께 맡겨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회에 대한 우리의 비전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것은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정체성이 목사, 개척자, 비전 있는 지도자일수록 더욱 그렇다. 우리의 비전이 성공하는 것은 우리가 누구인지와 관련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비전을 포기하는 것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이 된다.그러나 예수님은 상실로 근심하여 죽게 될 때 항복하는 방법을 보여 주신다(마 26:38). 그분이 항복한 것은 열심 있는 교사나 역동적인 선지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서 항복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목회자나 개척자로서가 아니라, 종과 지도자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과 딸로서 예수님처럼 항복할 때, 우리가 잃는 것은 우리가 여전히 소유하고 있는 보화와 결코 비교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의 시야를 넓히고 손을 벌려 그것을 붙들 수 있다. 우리가 여전히 보고 있는 영광을 우리는 사람들에게 전할 수 있다. 사역이 우리가 생각했던 것과는 다를 지라도 말이다.원제: When Ministry Is Not What You Envisione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개척
비전
항복
하나님의약속
하나님의섭리
아브라함
모세
세례요한
보화
효과적인 회중 기도를 위한 네 가지 원칙
by Pat Quinn
2021-08-29
지난 13년 동안 미시간 주 이스트랜싱에 있는 대학 개혁교회에서 나는 장로, 예배 인도자, 그리고 상담 책임자로 케빈 드영(Kevin DeYoung) 목사와 함께 교인들을 섬기는 특권을 누렸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성경적인 예배야 말로 드영 목사가 가장 신경쓰는 첫 번째 우선 순위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그가 예배에서 특히 강조한 사실 중 하나가 철저하게 준비하고 드리는 회중 기도였다. 그래서 2010년의 경우 예배 중에 내가 기도를 인도하는 경우 나는 회중 기도를 준비하고 기도문을 쓰는 데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나는 회중 기도야 말로 공예배에 있어서 정말로 중요한 요소이며 따라서 우리가 이 기도를 그 무엇보다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잘 준비하도록 주님께서 은총을 주셨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그 결과 하나님은 그 과정에서 내가 배운 교훈을 책에 담을 수 있도록 도우셨다.내가 쓴 책을 바탕으로 쓰는 지금 이 글이 목회자, 예배 인도자, 기타 사람들이 설교나 찬양을 준비하는 것처럼 기도 인도에도 똑같은 정성과 준비를 바침으로써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교회를 더 건강하게 하는 데에 도움이 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기도한다. 회중 기도를 잘 준비하기 위한 4가지 원칙은 다음과 같다. 1. 회중 기도에는 경배와 회개 그리고 간구가 포함되어야 한다하나님에 향해 마음을 다해서 감탄하고 또한 사랑을 바치는 것은 창조주이자 구속주이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기초가 되기 때문에, 회중 기도에서 첫 번째이자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바로 경배이다. 경배하는 기도는 우리가 죄 가운데서 죽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살리셨다는 것을 기억함으로(엡 2:1-10)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이로움이 넘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열광적인 찬양으로 넘쳐나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한없이 합당하신 분이다. 공동 회개는 종종 예배에서 소홀히 하거나 심지어 청중의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것으로까지 여겨진다. 그러나 죄의 보편성과 심각성을 고려할 때 회개의 시간이 없는 예배는 진심을 담은 온전한 예배라고 할 수 없다. 회개는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끔찍한 죄악과 더불어 그리스도 안에서 담긴 충만한 용서의 은혜를 묵상할 때 우러나오는 감사의 슬픔을 느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간구는 회중 기도의 자연스러운 부분이지만 인간은 누구나 당장 느끼는 필요에 초점을 맞추려는 유혹을 받기 때문에 경배 및 회개의 기도와 적절한 균형을 이루도록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우리가 공동으로 간구하는 기도의 분위기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풍부한 자비를 신뢰하면서 우리의 모든 염려를 그분께 올릴 때 하나님께서 반드시 응답하신다는 열렬한 확신으로 넘쳐야 한다. 이 세 가지 필수 유형의 기도는 예배뿐 아니라 그 외 전반적인 신앙생활에서도 개별 기도를 비롯한 다양한 방식에서 적용될 수 있다. 2. 회중 기도는 삼위일체를 반영해야 한다 모든 회중 기도가 성부, 성자, 성령을 언급할 필요는 없지만,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우리의 기도는 언제나 삼위일체의 진리를 일관되게 증거해야 한다. 그 이유는 성경 속 모든 진리가 삼위일체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세 위격은 창조, 섭리, 구속, 성화, 완성에 동등하지만 뚜렷하게 구분되어 서로 관계하고 있다. 에베소서 3장 14-19절에 나오는 바울의 기도는 삼위일체를 반영한 기도의 좋은 예이다. 그는 에베소 성도들이 성령으로 강건하게 되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아들이 그들의 마음에 거하기를 아버지께 기도한다. 다음은 삼위일체 찬양의 한 예이다. 하늘과 땅에 있는 만물의 창조주이신 아버지, 우리는 아버지를 경배합니다. … 아버지의 완전한 형상과 빛이 되신 예수님을 찬양합니다. … 생명을 주시는 분, 보혜사이시며 돕는 분이신 성령님을 경배합니다.3. 회중 기도는 사려 깊고 경건해야 한다 기도가 공개적일수록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주일 아침 예배에 하는 기도라면 특히 더 그렇다. 제대로 준비되지 않은 기도는 중언부언과 불경건으로 흘러갈 수 있다. 중언부언은 문장마다 계속해서 그러니까, 음, 따라서, 정말로 등등의 단어를 쓰거나 또는 하나님과 예수님을 계속 반복하는 경우이다. 사실상 그런 기도는 이미 기도한 내용을 단어만 살짝 바꿔서 반복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그건 마치 비행기가 착륙하지 않고 계속 하늘을 뱅뱅 도는 것과 비슷하다. 교인들은 그럴 때면 마음속으로 “제발 그만 좀 끝내요”라고 외치고 있다. 이런 중언부언 기도에 대한 치료법은 철저한 사전 기도와 더불어 내용을 잘 준비하는 것이다. 불경한 기도는 하나님의 장엄한 초월성이 우리 속에 거하는 그분의 자비로운 내재성(immanence)으로 인해 잊혀지거나 아예 삼켜질 때 일어난다. 마찬가지로, 불경한 기도는 하나님과의 친밀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면서 동시에 겸손한 경건함을 과소평가한다. 이런 식으로 생각없이 과도하게 하나님을 친숙하게 표현하는 경우, 하나님은 기도 속에서 거룩하신 분이 아니라 마치 우리의 “친구”나 또는 “여자 친구”처럼 들릴 수도 있다. 불경에 대한 치료법은 죄 많은 피조물과 거룩하신 하나님 사이의 무한한 거리뿐 아니라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의 사랑 사이의 불가분성을 기억하는 것이다. 전도서 5장 1-2절은 기도할 때 우리가 왜 사려 깊고 경건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너는 하나님의 집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한 자들이 제물 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그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 너는 하나님 앞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말며 급한 마음으로 말을 내지 말라.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너는 땅에 있음이니라 그런즉 마땅히 말을 적게 할 것이라.4. 회중 기도는 복음 중심이어야 한다D. A. 카슨(D. A. Carson)은 학생들이 그의 가르침을 배웠을 뿐 아니라 그가 흥미를 느끼는 것이 무엇인지도 배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렇다면 사도 바울은 무엇에 열광했을까? 그는 무엇에 대해 생각하고, 이야기하고, 글을 쓰고, 또 기도했을까? 답은 이것이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성경 전체가 예수님의 구속 사역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에(눅 24:44-47), 복음은 회중 기도를 포함하여 모든 예배에서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노래하고, 전파하며, 기도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를 격려하는 것은 없다. 다음과 같은 경배의 기도는 복음이 드러내는 다양한 영광을 기뻐한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합당히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겸손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를 하늘로 올리기 위해 이 땅에 오셨고, 우리가 그와 같이 될 수 있도록 우리와 같이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놀라운 사랑을 봅니다. 우리가 주께 올라갈 수 없을 때 그는 우리에게 가까이 오셨습니다. 우리를 자신에게로 이끌기 위해 그분은 스스로 낮아지셨습니다. …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영광스러운 지혜를 봅니다. 주께 돌아갈 마음도 없고 회복을 계획할 지혜도 없는 우리가 완전히 길을 잃었을 때, 그는 우리를 끝까지 구원하기 위해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 되셨습니다. … 가장 높은 곳에서 아버지께 영광을!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난 당신의 놀랍고도 돈으로 매길 수 없는 구속의 사랑을 함께 찬양합니다.글을 맺으면서 연습 하나회중 기도의 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여기 한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 이번 주에 골로새서 1장 3-14절에 빠져 보라. 아름답고 균형 잡힌 기도, 경건하고도 삼위일체와 복음 중심의 기도를 묵상하라. 그리고 “나”를 주어로 해서 경배, 회개, 그리고 간구의 개인기도를 작성하라. 마지막으로 주어를 “우리”로 바꿔서 회중 기도로 전환하고 이를 사용하여 가족예배에서, 성경 공부에서 또는 교회 예배에서 기도로 인도하라. 원제: 4 Principles of Effective Public Pray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회중기도
바울의기도
묵상과기도
예배
기도의중요성
기도의요소
바른기도
싱클레어퍼거슨
케빈드영
자비와 정의 사역을 위한 교회의 역할
by 고상섭
2021-08-21
교회의 존재 이유 중의 하나는 세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어떻게 섬겨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이 교회가 당면한 어려움이다. 대부분 개교회를 중심으로 가난한 이웃을 섬기고, 독거노인들의 반찬을 배달하는 등의 일들을 실천하는 경우가 많다. 한 교회의 힘으로 한 나라나 지역의 가난 자체가 변화되지 않는다는 생각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하는 것은 좋은 태도이지만 우리는 개인의 가난과 함께 가난을 일으키는 구조적 문제까지 해결할 수 있는 노력도 아울러 필요하다. 1. 왜 정의인가?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우리가 어떻게 정의를 이룰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구체적인 대안들을 제시하고 있다. 먼저. 왜 가난한 사람들 돕는 사역을 ‘구제사역’ 이라고 말하지 않고 ‘정의 사역’ 이라고 말하는가? 구제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자선 행위같은 느낌을 주고, 또 구제하는 사람이 선한 일을 한다는 뉘앙스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팀 켈러가 ‘정의’ 라고 말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라는 단어로 구약에 다양하게 나타나는 단어인데 레위기 24장 22절에 그 의미가 선명하게 드러난다. “거류민에게든지 본토인에게든지 그 법을 동일하게 할 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임이니라”(레 24:22)여기서 ‘미쉬파트’는 ‘그 법을 동일하게 하라’는 의미이다. 징벌이든, 보호든, 보살핌이든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라는 뜻이다, 그리고 주로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향해서 말씀하실 때 사용되었다. 즉 교회 안이나 그 지역에 가난한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돌아가야 할 몫을 돌아가지 않게 하는 하나님의 정의를 실천하지 못한 일이 되는 것이다. 약자를 돌보는 것은 이스라엘의 의무였고, 구약에서 선지자들이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할 때도 예배를 드리지 않은 것이나 성경을 열심히 읽지 않은 것으로 책망하지 않으신다. 고아와 과부를 돌보지 않은 것으로 책망하신다. 즉 약자를 돌보는 삶은 이스라엘의 신앙 전체를 판가름하는 열매라고 할 수 있다. 2. 어떻게 정의 사역을 해야 하는가? 팀 켈러는 한 개인이 다른 개인을 돕는 것이나, 한 교회가 한 사람을 돕는 것도 중요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좀 더 높은 단계의 전략이 필요함을 이야기 한다. 그래서 약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단계를 통해 교회의 역할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로드맵을 세 단계로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 : 구제(Relief) 가장 쉽게 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은 ‘구제’이다. 구제란 직접적인 도움을 제공해서 사람들의 신체적, 물리적, 사회적 필요를 채우는 일이다. 노숙자들에게 일시적인 거처를 제공하거나, 궁핍한 사람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제공하는 것, 그리고 의료 봉사 및 위기 상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성경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난 사람에게 응급처리를 해주고 회복 기간에 소요되는 경비를 지급한 것이 구제활동이다. 두 번째 단계 : 개발(Development) ‘개발’은 ‘구제’보다 한 단계 더 발전된 개념으로 사람이나 공동체에 적절한 자원을 제공해서 구제에 의존하지 않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그를 놓아 자유하게 할 때에는 빈 손으로 가게 하지 말고 네 양 무리 중에서와 타작 마당에서와 포도주 틀에서 그에게 후히 줄지니 곧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신 대로 그에게 줄지니라”(신 15:13-14)신명기 15장 13-14절을 보면 구약 성경에서 노예의 채무가 면제되고 그가 풀려날 때 하나님께서 그의 전 주인이 곡식, 도구, 그리고 재물을 그에게 주어서 내보내어 자급할 수 있는 경제생활을 시작할 수 있게 하셨다. 성경학자 크리스토퍼 라이트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법은 … 공동체에서 가장 연약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자립할 기회를 보장해준다는 게 어떤 의미를 갖는지 정확하게 파악하길 요구하고 있다. ‘기회’라면 재정적인 자원이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교육이나 법률 지원, 일자리 창출 등도 여기에 속한다. 이런 요소들은 쓰고 남은 걸 넘겨주거나 선심 쓰듯 베푸는 차원을 넘어서는 권리의 문제이다.”오늘날로 적용해보자면 개인을 위한 교육, 직장 창출, 훈련 등이 포함된다. 또 이웃이나 지역에 대한 개발은 사회 재정적 자본을 사회 시스템에 투자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주택 개발 또는 주택 소유 그리고 여러 자본 투자를 말한다. 물론 ‘개발’은 ‘구제’보다 더 많은 시간이 걸리고 더 많은 비용이 드는 일이다. 이것을 위해서 한 교회의 구제사역이 아닌 지역 교회의 연합을 통한 개발사역으로 나아가야 한다. 개교회의 구제 사역만으로는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것과 같을 때가 있다. 은혜로 그 일을 감당한다는 결단은 의미 있는 일이지만 좀 더 체계적인 전략이 있다면 더 많은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도울 수 있을 것이다. 지역 교회의 연합을 통해 구제와 함께 개발사역이 전개 되어야 한다. 세 번째 단계 : 개혁(Reform)개혁은 즉각적인 필요를 채우는 구제와 의존성의 문제를 해결하는 개발의 차원을 넘어 의존성 문제를 만들거나 약화시키는 사회적 조건과 구조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다. 욥은 “불의한 자의 턱뼈를 부수고 노획한 물건을 그 잇새에서 빼내었느니라”(욥 29:17) 고 말했다. 또 레위기 19장 15절에서 모세는 부자와 영향력 있는 사람들에게 특혜를 주는 법률 체계에 대한 하나님의 반대 입장을 말했다. “너희는 재판할 때에 불의를 행하지 말며 가난한 자의 편을 들지 말며 세력 있는 자라고 두둔하지 말고 공의로 사람을 재판할지며”(레 19:15) 또 사람들의 수입을 쥐어짜는 대금업 시스템에 대한 반대를 표하기도 했다(출 22:25-27). 선지자들은 불공정한 임금에 대해 책망하기도 했고 타락한 사업 관행을 심판하기도 했다. “그런즉 왕이여 내가 아뢰는 것을 받으시고 공의를 행함으로 죄를 사하고 가난한 자를 긍휼히 여김으로 죄악을 사하소서 그리하시면 왕의 평안함이 혹시 장구하리이다 하니라”(단 4:27) 또 다니엘은 비기독교 국가에서 공무원으로 빈곤층에 대한 자비가 결여되지 않도록 조치하기도 했다. 이것은 교회가 추구해야 하는 정의 사역의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교회의 여러 가지 존재 이유 중에 정의 사역에만 온 교회가 많은 에너지를 투입할 수 없다는 것이다. 구제와 개발 그리고 개혁까지 이루는 이상적인 전략은 좋지만, 그것을 이루기에는 개교회가 너무 큰 짐을 지게 된다. 그러면 어떻게 정의 사역의 단계를 이룰 것인가? 3. 어디까지가 교회의 역할인가? 팀 켈러는 첫 번째 구제의 일에 지역교회가 집중해야 하고, 두 번째 개발의 사역도 어느 정도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개교회가 개발을 모두 하기는 힘든 일이므로 지역 교회 연합을 통해 함께 이루어 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한 교회가 세 가지 단계를 모두 하려면 가장 중요한 복음과 말씀 사역이 흔들릴 수도 있다. 개발과 개혁의 사역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이다. 교회의 재정과 자원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개교회가 이 일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른다. 또 교회 리더십의 자원도 한정적이기 때문에 말씀을 전하는 목회자가 지역개발과 관련된 행정 일에 전문성을 갖지 못할 때도 많다. 결국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교회 외 사역단체들과 연관해서 일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또는 비영리 조직을 분리하여 지역 개발과 사회 구조 개혁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는 구제와 개발을 힘쓰고 교회에 소속된 사람들 중에 헌신된 사람들이 지역단체들과 연합하여 개발과 개혁에 동참해서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팀 켈러는 제도적 교회가 해야 하는 중요한 일과 유기적 교회가 해야 하는 일들을 구분하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제도적 교회 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의 원리를 배우면서 신앙생활을 하고, 유기적 교회에서는 흩어진 평신도들이 각 영역에서 다양하게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제도적 교회가 전부를 맡아서 진행하기에는 어려운 일이지만, 그 일을 전담으로 하는 단체와 유기적 교회의 신자들이 함께 동참해서 일을 하는 것은 훨씬 수월하게 일할 수 있게 된다. 결국 교회의 말씀 사역과 정의 사역은 연결되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이웃을 향한 사랑의 실천으로 구제와 개발과 개혁을 이루어가야 한다. 개교회가 너무 무리해서 모든 것을 맡게 되면 교회 자체가 가지는 중요한 일들을 하지 못하게 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구제에만 집중한다면 의존성과 사회 구조적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전체적인 전략을 가지고 구제와 개발과 개혁을 이루어야 하지만, 그 속에서 교회의 역할이 어디까지인지를 생각하고 개교회가 집중해서 해야 할 일과 지역교회가 연합해서 해야 할 일, 그리고 사역단체와 연결해서 해야 할 일들을 분별해야 한다. 세상의 정의를 실천하는 일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일이지만 또한 좀 더 지혜롭고 좀 더 명확한 전략과 단계도 필요하다. 개인의 윤리에만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개인의 윤리를 배제한 사회 윤리에만 집중하는 교회도 있다. 그러나 언제나 이 둘은 따로 떼어질 수 없는 하나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개인의 윤리와 사회의 구조 모두에게 영향을 미쳐야 한다. 지금 우리에게는 더 큰 은혜도 필요하고 더 큰 지혜도 필요하다. 하나님은 세상으로 하나님의 정의가 흐르기를 원하신다. 그 중요한 역할이 은혜를 받은 교회에게 있다. 좀 더 전략적으로 우리는 세상을 섬겨야 한다.
교회
교회사역
자비
정의사역
구제사역
미쉬파트
팀켈러
구제
개발
개혁
종교개혁이 복음을 구했다
by R. C. Sproul
2021-08-19
스위스, 제네바의 구시가지에는 제네바 대학에 인접해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 있다. 그 공원 가까이에는 존 칼빈이 매일 설교하고 가르친 교회도 있다. 그 공원에는 16세기 개신교 종교개혁과 관련한 영구적 기념비가 있다. 주요 볼거리는 칼빈, 존 낙스, 울리히 쯔빙글리, 테오도르 베자 등의 조각상으로 꾸며진 장엄한 벽이다. 그 돌벽에는 라틴어로 ‘Post Tenebras lux’(“어두움 뒤에 빛이 있으라”)라고 새겨져 있다. 이 단어들은 종교개혁의 원동력을 잘 포착하고 있다. ‘어두움’이라는 표현은 복음의 암흑기였던 후기 중세시대를 의미한다. 그 당시 어둠은 점진적으로 최악에 이르렀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칭의 교리의 빛은 거의 꺼져 있었다. 논쟁의 쟁점종교개혁은 교회 역사에서 가장 예민한 사안으로 논쟁의 불길을 불러일으켰다. 교회는 그 이전에, 특히 그리스도의 본성이 쟁점이 되었던 4-5세기에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었다. 4세기에 일어났던 아리우스파 이단은 니케아 회의와 신조로 결국 종결되었다. 5세기에는 단성론자와 네스토리우스파 이단과 이에 대항하는 교회의 투쟁이 칼케톤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분명히 선언함으로 귀결되었다. 니케아와 칼케돈 이후, 이들 공의회의 결정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성에 대한 기준으로서 그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리하여 삼위일체 교리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연합 교리는 거의 보편적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로 여겨지고 있다.모든 세대는 교회 역사를 통해 교리적 투쟁과 논쟁을 보아왔다.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이단들은 교회를 괴롭혔고 격렬한 논쟁과 심지어 분열도 불러일으켰다.그러나 지금까지 어떤 교리적 논쟁도 칭의에 관한 논쟁만큼 더 맹렬하게 진행되거나 오랜 기간 영향을 끼친 적은 없다. 16세기에 논의된 다른 부수적인 쟁점들이 있었지만, 이것만큼 중심적이고 이것만큼 뜨거운 것은 없었다. 역사가들은 종종 칭의를 종교개혁의 중요한 원인으로 규정한다. 그것은 논쟁의 중요한 핵심 문제였다. 하나님 나라 백성들 간에 가장 깊은 불화를 만들고 수많은 종파로 나뉘게 하여 교회를 분열로 이끈 중심에는 바로 이 교리 문제가 있었다.오직 믿음 아니면 실패어떻게 하나의 교리에 대한 논란이 그렇게 많은 분파를 만들고 적대감을 초래할 수 있었는가? 사소한 일로 전쟁을 벌이는 경향이 있는, 논쟁하기 좋아하고, 시끄럽고, 호전적인 신학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단순한 갈등의 한 사례였는가? 별것 아닌 일에 소란을 일으키는 늘 있었던 오해의 한 사례였는가?우리는 마틴 루터가 그 논쟁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지를 알고 있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교회가 서거나 쓰러지는 신념”이라고 불렀다(교회를 세우거나 무너뜨리는 명제). 가장 핵심이 되는 이 주장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오직 믿음)라는 루터의 대표 명제와 연결되었다. 신약 성경의 “복음”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우리를 위한 그의 사역을 공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사역의 유익들이 어떻게 신자를 위해, 신자에 의해, 신자 안에서 적용되는지에 대한 선언을 담고 있다.칭의와 구원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는 가장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오직 믿음에 대한 루터의 주장은 칭의의 “방법”은 복음 자체에 필수적이고 본질적이라는 신념에 근거하였다. 그는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를 복음과 구원에 필요한 본질적인 것으로 보았다.복음이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선 이후로, 루터와 다른 개혁자들은 칭의에 대한 논쟁을 삼위일체나 그리스도의 두 본성과 같은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를 논하는 것처럼 중요하게 여겼다. 복음이 없으면 교회는 무너진다. 복음이 없으면 더 이상 교회가 아니다.개혁자들은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랐다:1.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복음에 필수적이다.2. 복음은 기독교 신앙과 구원에 필수적이다.3. 복음은 교회가 참된 교회가 되기 위해 필수적이다.4.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거부하는 것은 복음을 거부하는 것이고 교회 건물로 전락하는 것이다.어둠을 밀어내기개혁자들은 로마가 오직 믿음을 비난하고 거절하였을 때, 로마는 스스로를 정죄하고 참된 교회가 되지 못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성경적 기독교를 계속 이어가고 참된 복음을 가진 진실한 교회가 되기를 추구하는 새로운 교회 공동체들이나 교파들의 창설을 촉진하였다. 그들은 개기일식의 임박한 위험으로부터 복음을 구하려고 노력하였다. 일식 비유는 도움이 된다. 일식은 태양을 파괴하지 않는다. 일식은 태양을 모호하게 가린다. 그것은 빛이 있었던 곳에 어둠을 가져온다. 개혁자들은 복음의 빛이 다시 찬란하게 빛나고 선명하게 보일 수 있도록 일식을 제거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16세기 개신교 교회의 삶은 완벽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온전히 환한 빛에서 보면, 그 시대에 다시 일어난 경건의 움직임은 복음의 힘을 입증한다. 원제 : The Reformation Rescued the Gospel출처 :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 김종성
역사
종교개혁
오직믿음
복음
칭의
어두움후에빛이있으라
루터
칼빈
쯔빙글리
베자
설교를 더 잘 듣기 위한 일곱 가지 방법
by Christopher Ash
2021-08-15
어떻게 설교를 듣는가? 여러분은 이것이 어리석은 주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어떻게 TV를 시청하는가에 대해 쓰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것이다. 리모컨을 사용할 필요가 없으니 설교를 듣는 것은 TV를 시청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 설교를 듣는 것은 수동적인 활동으로 나에게 설교되는 것이지 내가 능동적으로 하는 무언가가 아니다.그러나 설교를 듣는 것이 그렇게 쉬운 것만은 아니다.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다.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듣는다면 더욱 많이 받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듣는다면 우리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빼앗길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설교를 듣는 것은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듣고 있는지 주의하여 삼가도록 하자. 여기에 일곱 가지 조언이 있다.1.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대하라우리가 사람의 목소리에 의해 생기는 음파를 듣는 것이지만, 설교자가 성경을 가르치기 시작하면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의 권위있는 음성을 듣고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교회 내의 성경 강론에 대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라고 기록하였다(벧전 4:11). 만일 누군가 신실한 설교를 듣는다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처럼 들어야한다.주중에 다음 주일의 설교자를 위해 기도하라. 당신 자신과 그리고 교회에서 함께 예배할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 가능한 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새롭고 주의 깊은 자세로 설교 듣기에 임하라. 당신의 생각과 마음을 고요히 하고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실 것을 기대하라. “주여, 제게 말씀하옵소서. 제가 듣겠나이다.”2. 하나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정하라디모데가 에베소에서 설교할 때, 바울은 그에게 경고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설교자를 원한다고 하였다(딤후 4:3). 본성적으로 우리 모두는 그것을 원한다. 우리 자신에 대해 더 낫게 느끼게 하고 우리의 자존감을 부추기며 이미 존재하는 편견을 강화하는 설교를 원한다.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는 날마다 주마다 죄에서 돌이켜 그리스도를 의뢰하도록 명하신다. “모든 도덕적 더러움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고 명하신다(약 1:21). 우리는 말씀 아래 겸손히 앉아야 한다. 심판하는 자세로 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하나님이시지 우린 아니다. 우리의 견해와 신념과 마음과 삶을 바꿀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3. 설교자가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는지 확인하라우리의 질문은 어떻게 강해 설교를 듣는가에 관한 것이다. 설교는 하나님께서 이미 성경에 넣어두신 의미를 성경으로부터 찾아 보여주어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설교는 강해, 곧 거기 있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어야 한다. 다른 방법은 “주입하는” 설교인데, 설교자가 본문에 어떤 뜻을 주입하는 것이다. 물론 한 단락을 해설하는 설교가 있고 한 단락 이상의 더 많은 구절들을 가지고 해설하는 설교도 있다. 전자의 경우에는 설교자가 그 본문이 말씀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지 확인하기에 더 쉽다는 장점이 있다.설교자의 권위는 목사든 사역자든 그 누구든지 그의 직위나 그 사람의 능력치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위임받은 권위다.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그가 말할 때 그는 권위를 가지고 말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을 때는 그에게 권위가 없다. 한 친구가 전에 내게 말했다. 그 목사가 설교할 때 그는 스스로 성경을 펴서 “이것이 어디에 나오지?”라고 질문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좋은 질문이다. 만약 설교자가 성경 본문에서 그것을 얻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면 고개 숙이고 회개하며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겸손하라. 그러나 속지 마라. 설교를 듣기 전, 주중에 그 본문을 읽어라. 그것을 숙고하라. 이것을 하기 위해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지만, “그 주된 생각이 무엇인가? 그 설교의 핵심이 그 본문의 핵심인가?”를 확인해 보라4. 교회에서 설교를 들으라요즘은 온라인상에서 설교를 내려 받아 자기가 원하신 시간에 편한대로 듣는 것이 가능한 시대이다. 이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최선은 아니다. 하나님의 표준적인 방법은 그분의 백성이 모여서(‘교회’의 뜻이 ‘모임’이다) 함께 그분의 말씀 아래 앉아 듣는 것이다.설교를 듣는 것은 단지 ‘나와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함께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우리는 함께 듣는다. 그래서 서로에게 책임이 있다. 내가 그 설교를 들었고 여러분도 내가 그것을 들은 것을 안다. 이제 여러분도 내가 들은 것을 알기에, 내가 그에 합당하게 반응해야 할 것을 여러분들이 기대하고, 나도 여러분이 그러리라고 기대한다. 우리는 함께 모여서 서로 도우며 경건하게 살도록 서로 격려한다(히 10:24-25).5. 매 주마다 그곳에 있어라교회에 정기적으로 참여하라. 우리는 헌신하지 않아도 괜찮은 문화적 분위기 속에 살고 있다. 이리 저리 떠다니며 구경꾼처럼 뒷좌석 끝자락에 앉아있기가 매우 쉽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언약의 가족과 함께 지속적으로 모이는 일에 헌신하는 것이다.하나님께서는 쉽게 한두 주일의 설교를 듣는 것만으로 우리를 고치지 않으신다. 그분께서는 오랜 시간 동안 그분의 말씀을 지속적으로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려서 우리의 생각과 마음과 인격을 만드시고 형성해 나가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시는 설교를 듣고 또 들어야 한다. 베드로가 말씀하기를, “너희가 이것을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라고 한다(벧전 1:12). 교회에 출석한 주일 혹은 출석하지 않은 주일에 대해 계속 출석 체크를 해보라. 당신이 얼마나 자주 참석하지 않는지 놀랄 수도 있다. 그곳에 규칙적으로 있기를 다짐하라. 당신 자신의 유익과 주위 사람들의 유익 모두를 위하여 그리하라.6. 성경이 말씀하는 것을 행하라야고보 사도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말씀하는 것을 행하라”(약 1:22)라고 기록한다. 설교의 목적은 우리가 다 아는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예수님 같이 되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간직하고 인내로 경건한 인격의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눅 8:15). 우리는 대접을 받거나 지적인 정보로 우리의 뇌 세포들을 자극하거나 교묘한 웅변술에 의해 우리 감정이 동요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하는 것에 나아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듣고 예배하고 순종하기 위해 나아오는 것이다.주일 설교 후에, 설교 말씀을 순종할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 생각하라. 그것을 적어두라. 그것이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라. 어떤 것은 새로 시작해야 하고 어떤 것은 그만 두어야 할 것이다. 어떤 말은 해야 하고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일 수 있다. 대부분은 마음의 태도와 소원에 관한 것이다. 주일마다 기록을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때때로 과거 기록을 살펴보고 당신의 진보를 돌아보라. 하나님께서 당신 안에 그분의 말씀으로 어떻게 역사하시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당신 스스로 놀랄 수도 있고 격려를 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7. 성경이 오늘 말씀하는 것을 행하고 즐거워하라“너희가 오늘 그의 음성을 듣거든 너희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말지어다.” 시편 95편에서 그렇게 말씀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그것을 인용하여 그렇게 말씀한다(히 3:15). 우리의 들음에는 긴급함이 있다. 내일로 미루지 말라. 내일이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리고 즐거워하라. 하나님께서 성경을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정확히 기록되게 하신 것을 기뻐하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좋은 소식을 인하여 기뻐하라. 당신이 신자라면 당신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언약의 가족과 함께 앉아서 설교를 듣는 매시간이 당신의 왕께 새로운 회개와 새로운 신뢰와 새로운 순종의 시간이 되게 하라.원제: 7 Ways to Become a Better Sermon Listen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강경원
교회
교회생활
설교
예배
말씀
성경
설교듣기
비유
설교자
강해설교
아시아 선교 역사 속에 나타난 부흥의 은혜
by J. Nelson Jennings
2021-08-04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와 허드슨 테일러(Hudson Taylor)는 아시아 지역 선교와 관련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특히 유명하다. 이들 이전에는 프랜시스 재비어(Francis Xavier), 마태오 리치(Matteo Ricci), 그리고 또 많은 이들이 전세계에 걸친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겼다. 그러나 오로지 아시아 선교와 관련해서만 보게 되면, 이런 유명한 사람들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아시아 선교를 제대로 조망하려면, 그 선교에 있어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또한 거기에 아시아라는 넓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다루는 하나님을 제대로 보려면, 대상이 되는 시간의 범위도 훨씬 더 확장해야 한다. 성경은 서 아시아에서 아주 오래 전 발생한 하나님의 특별한 구속 사역을 보여준다. 오늘날 이라크에 해당하는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러내어 지금 동서 터키 지역에 해당하는 하람으로 그를 이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그의 후손을 별처럼 많게 할 것이고 또한 그에 따라 모든 나라를 축복하겠다는 언약을 맺으셨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그리고 그 주변부까지)을 서 아시아에 포함시키는 일반적인 관례를 따른다면, 구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구속 사역(이집트를 제외하고)과 복음서 및 다른 신약에 기록된 모든 구속 사역의 기록이 다 아시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오순절 성령님의 부어주심에서 드러난 다양한 아시아인(“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림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 아시아,” 행 2:9)에 관해서는 특별히 언급할 필요가 있다. 예루살렘을 떠난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아시아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했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요한계시록을 보면, 요한에게 특별히 나타난 예수님은 다른 곳이 아닌 아시아의 일곱 교회(오늘날 터키 서부)에게 메시지를 전한다. 이 사실은 하나님이 당신의 구속 사역을 펼치는 데 있어서 특히 아시아를 중요시했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렇기에 아시아 후속 선교는 지금까지 하나님이 당신의 세상을 다룬 방식과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완벽하게 연결된다. 기독교 복음이 아시아의 다양한 지역으로 퍼져 나감에 따라, 예수 그리스도가 사절을 보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창조자이자 왕인 하나님과 씨름하고 또 하나님으로부터 숨으려는 다양한 방법을 시도했다. 대부분의 학자들과 지금까지 지속되는 전통이 실제로 발생했다고 믿는 바에 따르면, 예수님의 제자 도마가 인도에 도착했을 때 그 지역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궁극적인 실재(ultimate reality)와의 연합을 갈망하면서도, 동시에 나중에 힌두교로 알려진 종교 속 무수한 신들이 빚어내는 다양한 서사적인 기록에 푹 빠져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 예수에 대한 도마의 증언을 사용하여 기독교 공동체가 인도에서 시작하도록 했으며, 그중 일부는 오늘날까지 인도의 여러 지역에서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초기 기독교 시대에는 시리아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메소포타미아 속 에데사(Edessa)를 지나서 인도와 로마 제국 사이에 있는 페르시아 제국의 일부로까지 믿음이 퍼져나갔다. 로마와 페르시아의 영향을 막아 온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다대오와 바돌로매라는 사도를 통해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3세기 후반,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Gregory the Illuminator)가 아르메니아에 도착했고, 왕 티리다테스(Tiridates)의 개종과 더불어 AD 301년에 최초의 기독교 국가가 형성되었다.이런 초기 서 아시아에서 이뤄진 기독교 선교는 AD 431년 에베소 공의회(Council of Ephesus)가 그레코 로마를 중심으로 동쪽에 위치한 기독교를 정치적, 지리적, 또 문화적으로 통합함과 동시에 네스토리우스(Nestorius, 콘스탄티노폴리스의 대주교이며, 재직기간은 428년 4월 10일에서부터 431년 6월 22일까지이다. 기독교의 한 갈래인 네스토리우스파(경교)의 시조이다)를 이단으로 선포함으로 서구 기독교 역사 속에서 거의 사라졌다. (또한, 거기에 더해서 몽고 제국은 13세기 태평양-유럽의 동서 상업, 문화 및 종교적 상호 작용의 정점을 찍도록 만들었는데, 초기 기독교로부터 무려 천 년이 지나서 발생한 그런 몽골 제국의 붕괴는 아시아 기독교에 대해 유럽이 거의 제대로 된 인식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와의 연결 내지 인식과 관계없이, 아시아 선교사는 계속해서 동쪽으로 가면서 복음을 전했고 7세에 이르러서는 당나라의 수도에까지 이르렀다. 시리아어, 페르시아어, 터키어, 그리고 중국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파함으로 기독교인은 숫자가 계속 늘어갔고, 오늘날 볼 때에 놀라울 정도로 어떤 때에는 그 숫자가 서구 기독교인의 숫자를 능가하기도 했다. 7세기 들어 시작된 이슬람의 전파는 대부분의 아시아에서 더 이상 기독교가 사회 정치적으로 우위를 점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어떤 몽골 군주, 특히 1206년에서 1227년까지 다스린 징기스칸(Genghis Khan)은 기독교와 불교와 같은 타 종교에 관대했다. 13세기와 14세기 중에 새롭게 만들어진 프란치스코회(Franciscans)는 이미 잘 닦여진 실크로드를 통해서 선교사들을 중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14세기 후반, 야만적인 몽골 통치자인 티무르(Tamerlane)의 부상은 재결합한 몽골 제국 전역에서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에게 끔찍한 재앙을 가져왔다.세상을 향한 유럽의 확장은 1400년대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아시아 내 기독교는 남 아시아와 시리아 속에 존재하는 작고 연약한 모습의 1세기 후반 기독교의 모습과 많이 닮았다. 그러나 그 후 7세기에 걸쳐서 아시아 전역의 사람들은 새로운 서구와 잇는 길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대부분의 경우, 서구 선교사들은 아시아로 뻗어가는 서구의 상업, 정치 그리고 군사적 확장과 함께 들어왔다. 초기에 이런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포르투갈의 보호를 받는 예수회(Jesuits)의 프란시스 재비어(1506–52)와 같은 선교사가 인디아와 남동 아시아, 일본, 그리고 중국의 해안선을 따라서 복음을 전파한 것이다. 예수회의 대부분은 이탈리아의 혈통으로 담대하게도 기독교의 가르침을 토착 사상과 융합을 했는데, 가장 대표적인 사람으로는 중국에서 활동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1552 ~ 1610)와 인도의 로버트 드 노빌리(Robert De Nobili, 1577 ~ 1656)이다. 스페인의 보호를 받는 프란시스코회와 다른 가톨릭 선교사들은 새롭게 점령되어 필리핀이라는 이름이 붙은 곳에서 설교를 했다. 의심스러운 수준의 믿음과 열정을 가진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영국와 네덜란드 무역회사와 함께 도착했다. 어떤 지역에서 기독교 개종자의 숫자는 광범위했는데, 예를 들어, 인구가 이천만 명인 일본의 경우1614년에 이르자 어림잡아 삼십만 명의 기독교인이 생겨났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겠지만, 새롭게 도착한 유럽인을 환영하는 아시아인들은 무엇보다 그들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 유익에 더 관심이 있었다. 17세기 이후로 해서 제국의 진보와 함께 아시아로 확산된 또 다른 형태의 기독교는 러시아 정교회였다. 또한 영적인 면에 초점을 맞추는 독일 경건파(Pietists) 소속의 바톨로뮤 지겐발크(Bartholemäus Ziegenbalg, 1682–1719)와 하인리히 플뤼챠우(Heinrich Plütschau, 1677–1752)는 덴마크의 후원을 받으며 1706년 인도에 입국했다. 1792년 윌리암 캐리의 인도 선교를 지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영국 침례교 선교회(English Baptist Missionary Society), 1795년에 결성되어 중국에 간 최초의 선교사인 로버트 모리슨(Robert Morrison, 1782–1834)을 파송한 런던 선교회(London Missionary Society), 1812년에 만들어져서 최초의 북미 개신교 선교사인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1788–1850)을 버마로 파송한 미국 선교위원회(American Board of Commissioners for Foreign Missions)와 같은 개신교 선교 단체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서구 선교사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인 이유로 진출하는 나라라면 어디를 가리지 않고 함께 갔다.1840년대와 1860년대 초 아편 전쟁(Opium Wars)의 여파로 생긴 유럽의 중국 내륙 진출은 영국 선교사 허드슨 테일러(1832-1905)에 의해 중국 내지 선교회(China Inland Mission)가 1865년에 생겨날 수 있었던 배경이 되었다. 중국, 인도네시아, 일본, 한국, 시암 그리고 또 다른 곳에서 프랑스 가톨릭 선교사들의 활동은 점점 더 활발해졌다. 네덜란드 선교사들은 말레이지아, 방글라데시, 포모사(Formosa), 세일론(Ceylon) 및 네덜란드의 영향권 아래 있는 국가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19세기 미국의 확장은 미국 선교사들을 경제적으로 유리한 중국, 일본, 태평양 제도로 진출하도록 만들었다. 초기 일본에서 있었던 기독교 성장은 1630년대 후반에 있었던 가혹한 핍박 때문에 중단되었다. 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직후 뿐 아니라 1850년대 일본이 스스로 2세기 동안 시행한 서방 세계와의 격리 상태가 강제적으로 끝나고 난 직후에는, 일본에도 약간의 기독교의 성장이 있었다. 한국에서 가톨릭은 1780년대에 처음으로 소개된 이후 거의 1세기 동안 핍박을 받았다. “은둔의 나라(Hermit Kingdom)”가 열리자 개신교 선교사들은 1880년대에 들어 본격적으로 한국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미국 장로교 선교사 요한 네비우스(John Nevius, 1829-1893)의 조언에 따라, 선교사들은 교회 개척에 있어서 자치(self-governing) 자립(self-supporting) 그리고 자전(self-propagating)이라는 “삼자(three-self)” 원칙을 도입했다. 한국 교회의 성장은 외국인과 한국 설교자의 공동 노력에 힘입어서 급속한 성장을 하기 시작했고, 그 성장은 1907년에 있었던 대 부흥으로 인해 더 가속화되었고, 또한 1910년에서 1945년까지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열매를 맺었다. 1950년에서 1953년까지 한국 전쟁 이후 보다 더 집중적인 성장을 한 한국 기독교는 이제 선교사를 나머지 아시아 국가와 전 세계에 보내는 수준이 되었다. 왜 복음이 일본보다 한국에서 더 깊고 넓게 뿌리를 내릴 수 있었을까? 많은 중요한 요인들 중에서도 한 가지 핵심적인 요인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기독교가 들어가기 이전부터 있었던 신(deity)에 대한 토착 의식이다. 고대 한국에서 최고의 신은 하나님(Hananim)으로 불린다. 온 우주를 지배하고 온 인류를 심판하는 신이다. 일본의 경우에는 모두 다 카미(kami)라는 용어로 지칭할 수 있는 열도를 창조한 신화적인 창조자, 자연을 다스리는 신비로운 힘, 그리고 지배자 가문의 조상 정도의 신은 있지만, 한국에서와 같은 절대적인 힘을 가진 신(supreme deity)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측정할 수 없는 하나님의 깊은 경륜만이 왜 한국과 일본 사이에 이런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에 대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와 최근 몇 세기 동안, 하나님은 아시아 전역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빠르게 바꾸기 위해 외국인 및 해당 국가의 복음 전파자를 사용했다. 한국을 제외하고는 지난 한 세기 동안 북동부 인도의 나갈랜드(Nagaland) 정도가 놀라운 수준의 기독교 성장이 일어난 유일한 곳이다. 좀 더 최근을 살펴보면, 중국도 1억에 가까운 사람이 기독교를 믿게 되는 거의 천문학적 성장을 이루었다. 국내외 아시아 선교사들은 인도, 싱가포르, 중국을 포함한 아시아의 거의 모든 지역에서 나오고 있다. 그 어느 때 보다 “아시아 선교”라는 사명에는 이제 전 세계 그리스도의 복음 전파에 참여하는 아시아 출신 선교사들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해 그 역할을 감당하고 있다.원제: The Church in Asia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근현대교회
아시아교회
아시아선교
윌리엄캐리
허드슨테일러
프랜시스재비어
마태오리치
경건파
평양대부흥
백만인구령운동
처음
이전
열린
11
페이지
12
페이지
13
페이지
14
페이지
1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