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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by David VanDrunen
2021-05-30
하나님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을 통해 자신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신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스스로 영광받으시는 가장 위대한 방법 중 하나는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의 거룩한 행동을 통해 그분의 백성인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돌리게 하는 것이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말에 따르면, “때로 [성경에서], 마치 모든 일의 전부와 끝인 것처럼 참된 종교를 받아들여 실천하고, 죄를 회개하고 거룩하게 되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함으로써 드러난다.” 만약 에드워즈가 옳다면, 본래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라면 성경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구체적인 방법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구조와 우선순위에 대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해야 한다. 성경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세 가지 방법, 즉 믿음, 예배, 겸손한 섬김을 살펴보도록 하자. 1.우리의 믿음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 얻고, 믿음은 모든 선한 일에 뿌리가 되는 기초이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행동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과 믿음 사이에 지울 수 없는 연결관계를 찾길 기대한다. 고린도후서 1장과 로마서 4장, 두 본문은 이 관계를 명쾌하게 연결시킨다. 고린도후서 1장에서 바울이 지속적으로 선포하는 하나의 메세지가 있다.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 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중략]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 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고후 1:18-20).바울이 의미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 바울은 그의 다른 서신 어느 곳에서도 쓰지 않은 흔치않은 언어를 사용하지만 의미는 명확하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에게 많은 약속을 하셨고, 그리스도는 약속의 성취다. 그분은 하나님의 오랜 약속에 위대한 ‘예’이다. 바울의 설교는 항상 ‘예’였다. 왜냐하면 이는 항상 그리스도를 가리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우리의 “아멘”은 믿음의 행위 외에는 아무것도 될 수 없다.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응답은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한다. 믿음은 그 동의를 제안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아들인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아멘을 입 밖으로 낼 수 있을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로마서 4장에도 동일한 주제가 나온다. 바울은 위대한 믿음에 관한 장에서 여러번 아브라함을 언급한다. 초반에 그는 하늘의 수많은 별과 같이 자손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반응으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롬 4:3)라고 창세기 15장 6절을 인용한다. 이 장의 끝으로 가면서 바울은 이 사건으로 돌아와 아브라함이 거의 100세였고 그의 아내 사라가 불임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언급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터무니없게 생각할 수 있는 세속적인 모든 이유를 갖고 있었지만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사라의 태가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해졌다]”(롬 4:19-20). 바울은 그가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라고 설명한다. 로마서 4장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이 강한 믿음의 행위 자체를 통하여 분명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음을 볼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과 ‘그분이 수행할 수 있다고 약속한 것을 완전히 믿는것’은 아브라함의 신앙에 내포된 마음의 훈련이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하나님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리고 그분의 능력과 신실하심에 의존하는 것이다.”라고 존 머레이(John Murray)는 로마서 4장 20절을 주석했다.2.우리의 예배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다른 어떤 것보다 더 많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 성경이 말하는 하나의 행위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예배다. 예배는 그 본질에 있어서 오직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린다. 우리가 많은 방법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지만 성경은 전심으로 그분의 이름을 부르며 모든 영광이 그분께 있다고 선언하는 것 외에는 우리가 하는 그 어떤 것도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고 말한다. 때로 사람들은 삶의 모든 것이 예배라고 말한다. 일하는 것도 예배고, 농구를 하는 것도 또는 피아노를 연습하는 것도 예배라고 한다. 우리의 모든 노력 가운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참으로 적절하나(고전 10:31), 예배는 다른 일을 제쳐두고 우리의 마음과 정성을 온전히 주님께 두는 뚜렷한 행위로, 그의 말씀을 받기 위해 기도와 찬양으로(개인적으로, 가족, 특히 공동체 예배에서) 그분에게 반응하는 것이다. 예배와 관련된 많은 성경 본문에서 주를 부르고, 주께 노래하고, 주를 찬양하라는 반복적인 권면과 다른 유사한 행위들은 하나님이 구별된 예배의 행위에서 더 특별히 기뻐하신다는 충분한 증거를 제공하고 있다. 우리가 예배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때, 우리는 지금도 천사의 노래를 따라하고 참여할 수 있는 특권을 가지게 된다. 그리고 함께 예배드리는 자들이 우리 눈에 보이게 될 그날을 기대하며 하나의 큰 공동체로 함께 죽임당하신 어린양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그래서 우리는 지금 불완전한 마음과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영원히 우리가 할 일을 시작한다. 그것은 예배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3.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 신약 성서는 분명히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특히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세우는 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권면한다. 패턴은 이와 같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영광을 예배에서 선포할 때, 우리의 모든 삶에서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축복하는 모든 섬김에서, 감사하는 겸손이 우리로부터 흘러 하나님의 영광까지 다다른다.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고 우리를 권면하는 가장 포괄적인 성경 본문은 베드로전서 4장 10-11절이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 같이 서로 봉사하라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하도록 있느니라 아멘”베드로는 우리에게 우리가 가진 모든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 힘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기 위해 사용하길 권면한다. 그는 그리스도인에게만 이 섬김을 제한할 의도는 분명 없었지만, 그의 초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형제자매를 섬기는 데 있다. 왜냐하면 이전 구절에서 그는 독자들에게 ‘서로’ 사랑하고, ‘서로’ 대접하라고 권면한다(벧전 4:8-9). 하나님은 우리가 전심으로 다른 사람에게 행한 섬김을 통해 영광 받으시고, 특히 믿음의 형제들에게 행한 섬김을 통해 영광 받으신다. 더욱이, 베드로는 이를 고통을 동반하는 섬김으로 묘사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바로 ‘불시험’과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욕을 겪는 그들을 격려했다(벧전 4:12-16).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시기 때문에(벧전 4:14), 우리는 그리스도 고난에 동참하는 것을 즐거워하고(벧전 4:13), ‘그리스도인’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벧전 4:16). 이 본문에서 베드로는 우리는 모든 은사를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일에 사용해야하며 그래야만 하나님이 모든 것에서 영광을 받을실 것이라고 말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에 참여하는 것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6장 1절은, “모든 성도는 성령과 믿음으로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중략] 그리스도의 영광 안에서 화목한다”라고 시작한다.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이라는 종교개혁의 주제와 이를 고무시키는 성경 본문의 관점에서, 피조물들이 단지 이 영광에 참여한다는 생각은 처음에는 모순적이고 아마도 신성모독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그러나 성경은 또한 모든 영광이 하나님께 속했고, 그분의 백성들이 그 영광을 공유한다고 말한다.‘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은 하나님에 관한 것이고 어떻게 그분이 스스로 영화롭게 하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스스로 영화롭게 하는 위대한 방법은, 우리를 영화롭게 함을 통해 그리고 우리의 믿음, 예배, 전심으로 그분과 우리의 이웃을 향한 섬김을 통해 그분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것이다. 이 신성한 영광의 이야기를 쓰시고 오직 믿음과 은혜,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중요한 역할로 부르신 하나님이 얼마나 자비로우신가! 원제: 3 Ways to Glorify God in Your 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송유희
믿음
예배
섬김
에드워즈
겸손
영성
우선순위
아브라함
하나님께영광
공동체
오늘날 교회에 예수님이 오시면 상을 뒤엎으실까?
by Caroline Cobb
2021-05-12
항상 나를 괴롭히던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가 하나 있다. 그 이야기는 사복음서에 다 들어있으며, 그 이야기가 없는 예수님의 모습은 어딘지 모르게 고르지 않고 어설픈 느낌마저 준다. 예수님에 대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이 장면을 노래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이 노래(이 페이지에 포함된 가사 참조)를 만들면서 나는 오히려 더 큰 혼란을 느꼈다. 그것은 성전에 들어가신 예수님이 의로운 분노를 표출하는 이야기다. 상을 내던지고, 채찍을 휘두르고, 환전상과 상인을 몰아낸다. 그의 내면에는 뜨거움이 솟았고 그의 눈은 질투심으로 번뜩였다. 예수님이 왜 그렇게 화가 났는지 궁금한 적이 있는가? 이 점을 생각해보라. 이 상인들은 희생 동물과 성전 화폐를 제공하고 있었는데, 그 두 가지는 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신자들에게 중요한 자원이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기독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백성에게 책, 팟 캐스트, 음악, 성서 연구 등을 제공함으로 예배에 도움을 준다. 자, 그럼 뭐가 문제라는 거지?콘서트에서 하나님의 이야기를 노래하고, 새 앨범과 상품을 발표하고, 가끔 컨퍼런스에서 연설과 진행을 하면서 그리스도의 신실한 종이 되기를 갈망하는, 일종의 기독교 자원을 판매하는 ‘산업(industry)’에서 일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이야기로 노래를 만들면서 스스로에게 매우 불편한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오늘날 우리 교회에 오시면 상을 뒤엎을까? 우리가 하는 SNS는? 컨퍼런스는? 내 콘서트는? 내 마음을 보시면? 중요한 맥락해마다 고대 근동 전역에서 온 순례자들이 유월절 축제를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들었다. 유대 율법에 따라 여호와를 예배하기 위해서는 희생에 적합한 정결한 동물이 필요했다. 먼 거리를 여행해야만 했던 사람들에게 제물로 쓸 동물을 데려오는 것은 불가능했고, 따라서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동물을 사야만 했다. 또한 필요한 성전 세금을 지불하기 위해서 자국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꿔야했다. 성전 외곽 뜰에서 상인과 환전소는 희생 동물과 성전 화폐를 제공했다. 그들은 순례자들로 하여금 제사를 준비하도록 했다. 성경주석가인 레온 모리스(Leon Morris)는 “그들은 유용할 뿐 아니라 꼭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상품 그 자체, 심지어 사고 파는 것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 사실상 이런 상인들이 없었다면 예루살렘으로 오는 순례자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방법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이 분노한 이유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화를 내셨나? 세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다.1. 훼손된 증언상인과 환전소는 이방인의 뜰 안에 가게를 세웠다. 이 바깥 뜰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외국인을 상상해보라. 성전에서 이보다 더 멀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사고 파는 큰 소리, 가축의 소음과 악취, 동전의 울림으로 가득한 이 혼잡한 시장에서 어떻게 예배하고 기도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 가게가 되었기에 분노하셨다(막 11:17). 하나님의 계획은 이스라엘 민족을 통해서 모든 민족이 그에게 예배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지만, 이제는 이스라엘 민족이 벌이는 장사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의 성전에 아예 발을 들일 수 없게 되었다. 2. 공허한 예배같은 날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셨고, 열매 없는 무화과 나무를 저주하셨다. 팀 켈러(Tim Keller)는 무화과 나무가 “이스라엘에 대한 완벽한 은유이며, 단지 그런 의미를 넘어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주장하지만 그를 위해 열매를 맺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완벽한 은유”라고 지적한다. 성전 정화는 공허한 종교 활동, 입술로만 드리는 예배, 열매 없는 의식에 대한 기소다. 상인들은 하나님의 기도의 집을 시장으로 만듦으로써 예배를 공허하고 상거래와 같이 그냥 들어갔다 나오는 의식으로 전락시켰다. 3. 자기 중심의 이유예수님은 예레미야 7장 11절을 인용하여 이 상인들이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했다. 그들은 서비스와 자원을 가장하여 순례자의 헌신을 악용했으며 종종 엄청난 금액을 청구했다. 그들의 동기는 여호와 예배를 촉진하는 것이 아니라 이익과 개인적 풍요였다. 기껏해야 그들은 예배를 사업의 기회로 왜곡한 것이고, 최악의 경우 예레미야서가 말하는 것처럼 그들은 하나님께 적대적인 욕심에 가득한 인간들이다. 어느 쪽이 되었든, 그들은 사람들로부터는 돈을 훔쳤고 하나님으로부터는 그에게 합당한 영광을 빼앗았다. 오늘날 교회에서 상을 뒤엎기혹시 현대 서구 교회 문화가 우리가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더 번잡한 성전 외부의 뜰처럼 느껴지지는 않는가? 우리는 건강과 부를 약속하면서 취약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탐욕스러운 거짓 교사들이 일으키는 심각한 사례를 주변에서 계속 목격하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에 더 미묘하고 더 교활하며 또한 훨씬 더 널리 퍼진 상업주의 문화가 있는 것은 아닐까? 예수님의 분노를 불러일으킬만한 그 무엇이 우리 교회와 우리 마음에 스며든 것은 아닌가? 예수님의 성전 정화 사건은 하나님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르며 돈을 벌고, 소셜 미디어에 내 음악을 홍보하고, 또 콘서트 후에는 음반을 파는 ‘판매대’를 운영하는 싱어송라이터인 내게는 경고가 된다. 또한 기독교 유명인과 수많은 기독교 상품으로 넘쳐나는 오늘날 서구의 모든 복음주의자들에게도 경고가 된다. 이 경고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무엇인가? 기독교 서적과 음악을 쓰고 홍보하는 것을 그만둬야 하나? 출판사와 음반사 그리고 모든 컨퍼런스를 포기해야 하나? 예수님은 내 음반이 전시된 테이블도 뒤엎으실까? 어쩌면 그러실지도.그러나 이러한 질문은 과장된 것이며 성전과 교회를 일대일로 비교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잠시 이런 불편함을 느껴보자. 그리고 하나님 앞에서 이 질문과 씨름하자. 우리는 어쩌다 예수님의 격노를 불러일으킨 상인과 환전소처럼 된 것일까? 우리 교회, 행사, 또 소셜 미디어 프로필이 판매 홍보물로만 가득 차버리는 바람에 도리어 열방과 잃어버린 이웃을 위한 복음의 목소리가 밀려나는 것은 아닐까? 회개와 온 마음을 다한 제자도가 소홀히 되고 있는 현실을 바꾸기 위한 예배에 필요한 자원을 홍보한 적이 있는가? 어쩌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보다 이윤과 무대 그리고 우리 자신의 영광을 쫓게 되었는가? 우리 각자는 예수님께서 성전을 깨끗하게 하신 것과 같은 방식으로 우리의 간증과 예배, 그리고 우리 마음속의 동기를 거듭해서 깨끗하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마음과 교회, 그리고 조직의 테이블을 뒤엎어서 우리의 동기를 성결하게 하심으로 우리 속 가장 깊은 갈망이 오로지 그분을 향한 경배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예수님, 진정한 성전이자 우리의 희망예수님은 더 참되고 더 나은 성전이다. 그는 율법의 성취며 완전한 대제사장이며 흠 없는 어린 양이다. 그는 더 진실하고 더 나은 증인이다. 그를 통해 모든 나라와 부족 그리고 언어는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고 또 그렇게 될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개인적인 이득이 아니라 오직 아버지께 드리는 희생적인 사랑과 순종이 동기가 되는, 완전한 예배의 삶을 사셨다.예수님, 필요하다면 상을 뒤엎으셔서 나도 예수님처럼 되도록 하소서.Turn the Tables | Caroline Cobb (Official Lyric Video)가사1절넌 예배자를 착취해헌신을 악용해 돈을 벌지신성함을 이익으로 팔아버리지거룩함을 상품으로 만들지열방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그들은 문턱을 넘지 못해 왜냐하면 장사 물건과 상인으로 가득해서주님의 성전이 말이야2절예수님이 와서 상을 뒤엎어예수님, 거룩한 분노로 뚜껑이 열렸어채찍을 휘두르고 우상을 내쫓지아버지 이름 때문에 질투에 사로잡혀열방이 성전에 들어가려고 할 때예수님이 열린 문이 되어 서 있어 왜냐하면 삼 일이 지나면 알게 되지예수님이 바로 주님의 성전에 들어가는 통로임을후렴상을 뒤엎어라, 상을 뒤엎어라상을 뒤엎어라, 상을 뒤엎어라3절구원 스토리에 네 이름을 올리고 싶나빛 속에 있는 네 이름 보고 싶나영광의 일부가 되고 싶나그건 네가 뭘 팔아서 되는 게 아니야네 마음이 성전인 걸 모르나예수님이 네 마음문을 두드리고 있어그가 네 마음속 상을 뒤엎도록 해그래서 네 마음이 주의 성전이 되도록 해후렴상을 뒤엎어라, 상을 뒤엎어라상을 뒤엎어라, 상을 뒤엎어라 원제: Would Jesus Turn Over Tables in Today’s Churc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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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을 향한 루터의 용기가 지금 우리에게 주는 의미
by Robert Kolb
2021-04-29
어떤 의미에서 마틴 루터가 보름스(Worms)로 가는 길에 발을 들인 것은 우연이었다. 루터는 '박사'로서 교회의 교리를 옹호하고 어거스틴 수도사로서 교구 사제들의 사역을 돕겠다고 맹세했다. 1517년 면죄부 판매는 이 두 가지 부분에 있어서 루터로 하여금 행동하도록 만들었다. 95개 반박문을 통해 면죄부를 공격함으로써 루터는 사회의 기둥이자 당시 권위의 정점에 있던 교황의 권력에 도전했고, 또한 교회법을 의식 그대로 지키는 데 관한 의문을 던졌다.루터의 아이디어는 면죄부에 대한 사소한 논쟁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기에 실로 혁명적이었다. 사실 루터를 반대하는 사람들이 그가 벌이는 일의 중요성을 더 일찍 감지했다. 루터는 지금 교황이 이끄는 시스템에 따라 이뤄지는 모든 성례가 과연 하나님이 규정한 의식에 맞게 수행되는 것인지에 대하여, 기존 기독교 신앙의 전반적인 이해와 실천 그 자체에 도전한 셈이다. 실제로 루터는 각종 성례보다는 말씀이 계시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임을 주장했다. 루터가 보름스 의회에 섰다는 사실은 그가 다름 아니라 성경이 주장하는 복음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기에, 그 순간은 교회 역사 전체에 큰 영향을 끼쳤다.보름스로 가는 여정95개 반박문 이후 비텐베르크 신학 교수였던 루터에게는 엄청난 비난의 폭풍이 닥쳤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진정한 자유를 발견한 루터는 그 어려움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얻었다.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의 심판 보좌 앞에서 두려움에 떨지 않았다. 그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그의 삶의 기초로 삼고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도 자신있게 설 수 있었다. 그는 성경이 말하는 복음을 세상에 바로 전파할 것을 소명으로 받았음을 확신했다. 그는 포기할 마음이 없었다. 그래서 1521년 1월, 그는 파문되었다. 루터에 대해 화가 난 것은 로마 교회만이 아니었다. 교황의 권위에 대한 도전은 또한 독일 제국의 근본적인 통일과 그 지도자들의 권위마저도 흔들었다. 교회와 국가가 융합된 당시 상황은 특정 지역에 대한 임시 관할권을 가지고 있던 주교와 대수도원장들로 하여금 루터의 반박문에 대한 종교적이고 또한 정치적인 격한 반응을 일으키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특정 지역 통치자에 속하지 않는, 공작과 백작 등등 100개 이상의 제국 도시의 지방 자치 단체 대표들도 예외가 아니었다.물론, 루터에게 동맹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그의 통치자이자 소리 없는 지지자였던 작센의 프리드리히 현공(Frederick the Wise of Saoxny)은 제국의 강력한 선거인이었다. 당시 제국 정부의 최고 엘리트 인사들은 루터를 제거하려고 맹렬히 노력하는 중이었다. 루터의 개혁 요구에 동조하는 일부 사람들조차 루터가 그의 논문 ‘교회의 바빌로니아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속에서 주장한 중세 가톨릭 성례에 대한 비판을 철회함으로 교회와 화해하기를 바랐다. 이러한 거대한 정치적 반대에 직면하고도 사라지지 않은 루터의 담대함은 오늘날 믿는 우리에게 힘을 준다. 이 시대를 지배하는 악한 영의 적극적인 적대감이 점점 커지고 또한 기독교인들이 각종 이데올로기의 분노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 어떤 왕과 권력자 앞에서도 우리를 떠나지 않겠다고 루터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마 10:16). 하나님은 가장 끔찍한 상황에서도 그분의 구원 진리에 대해 간증할 수 있는 힘을 우리에게 주신다. 말로 또는 무기로 위협을 받을 때에도 주님은 궁극적으로 우리의 안전을 보장하신다. 우리 앞에 어떤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모르지만 주님은 성도들의 삶과 죽음, 모두를 다 사용하여 결국은 그분의 왕국을 발전시키고 그 왕국이 임하도록 하심을 확신한다. 황제 앞에 선 루터 불확실한 운명에 맞서 보름스로 가는 내내 루터는 교황권에 반대하고 널리 퍼진 개혁 욕구에 생명을 불어넣은 영웅으로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보름스를 향한 모든 발걸음은 루터에게 그의 삶이 균형을 이루고 있음을 상기시켰다. 나움부르크에서 한 신부가 그에게 한 세대 전 피렌체의 개혁가였던 제롬 사보나롤라(Jerome Savonarola) 그림을 주었다. 루터는 (체코) 보헤미안 지방의 얀 후스(Bohemian Jan Hus)와 같이 자신과 비슷한 운명을 맞이한 다른 개혁자들을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루터는 자신이 황제의 수배자 리스트에서도 첫 번째라는 소식을 듣고도 담대함을 잃지 않았다. 지붕에 붙은 타일만큼 많은 악마가 자신을 기다려도 보름스로 가는 발걸음을 멈출 수 없다고 루터는 말했다. 다음날 루터가 황제 카를로스 5세가 있는 의회에 모습을 드러냈다. 판사는 루터에게 단 두 가지 질문에만 대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루터 앞에 있는 책들이 다 루터가 쓴 책인지, 그리고 그가 쓴 모든 글을 다 부인하고 철회하겠다는 명령에 따를 것인지였다. 루터의 법률 고문을 맡은 비텐베르크 법학 교수 제롬 슈르프(Jerome Schurff)는 책 제목을 읽어 달라고 요청했다. 루터는 어떤 책은 믿음을, 영혼의 구원을, 그리고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다루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부인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는 두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고려할 시간을 요청했다. 카를로스 황제는 마지 못해 동의했다.결국에 루터는 경건함과 좋은 기독교적 행동을 장려하는 그의 작품을 철회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논문들은 기독교 신앙과 신자들을 훼손하는 거짓 가르침과 관행을 비판하는 내용이었다. 루터는 그 글도 부인할 수 없었다. 루터는 글 중의 일부가 서둘러 쓰였고 그 순간의 열정에 사로잡혀 수도원 사제와 성경 교사에 걸맞지 않은 성급함으로 인한 거침이 글 속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는 그 점을 후회했다.판사는 루터에게 그의 저작물 사이에 내용적인 구분은 용납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이단자로서 그는 자신의 모든 거짓 가르침을 다 거부하라고 요구했다. 루터는 모든 저작물을 다 철회할 것을 강요받았고, 그렇게 하는 경우에 카를로스 황제가 교황 레오에게 파문을 해제해 달라는 특별 간청을 할 것이라는 약속을 받았다. 그러나 루터가 계속해서 교황의 권위에 저항한다면 그는 다른 이단자와 동일하게 취급받을 것이었다. 여기에 대한 루터의 대답은 잘 알려져있다."성경 말씀 또는 명확한 이성에 의해서 설득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이나 평의회 중 어느 쪽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많은 경우에 틀리고 서로 간에도 모순된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져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가 인용한 성경에 붙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내 양심 또한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 안전하지도 또 옳지도 않기에 나는 그 어떤 것도 철회할 수 없으며, 철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제발 나를 도우소서, 아멘." 25년이 지나서야 등장한 한 기록에 따르면 그는 또한 이렇게도 말했다고 한다. “주여, 내가 여기 있습니다. 나는 도무지 지금과는 다르게 행동할 수 없습니다.” 루터가 정확하게 이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고 해도, 이 말 속에는 그의 심정이 그대로 담겨있다. 루터의 입장은 분명했다. '명확한 이유'에 근거해서 루터는 교황이 일반적인 논리 및 정직한 성경 독해와는 양립할 수 없는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루터의 양심은 그에게 옳고 그름을 말하는 목소리 그 이상이었다. 그의 양심은 예수님과 성경을 통해서 스스로를 계시하신 창조주에 대한 궁극적인 헌신뿐 아니라 동시에 현실을 제대로 이해하려는 지적 욕망이기도 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제약을 받았다. 바로 이 사실 속에 개혁가의 위대함이라는 또 다른 유산이 있다. 루터처럼 기독교인들은 오늘날 많은 종류의 위협을 인식하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무서운 것은 우리 안에서 피어오르는 타협하고 싶은 유혹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서만 제약을 받는 것은 참으로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살고 싶다는 우리의 인간적인 계획이 가진 거짓된 욕망의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정부에 의한 임박한 처형을 걱정하는 상황이 아니더라도, 오늘날에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실함은 항상 옛 자아의 죽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물질주의와 개인주의로 대표되는 문화는 주님께서 하나님을 향한 사랑 다음에 놓으신 '이웃에 대한 사랑'보다 '나의 즐거움'과 '나의 권리'에 대한 사랑을 더 중요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유행하는 내적 지향의 삶을 죽이는 것은 외부로부터 오는 믿음에 대한 위협에 맞서는 것보다 더 큰 용기와 더불어 성령님의 강력한 도움이 필요하다. 보름스에서 종교개혁으로제국에 고용된 스페인 군인들이 “꼬챙이에 꽂아서 죽여라”라고 외치는 와중에 제국의 관리들은 루터를 의회에서 밖으로 데리고 갔다. 의회에 참석했던 왕자, 귀족 및 지방 자치 단체 대표들은 심의할 시간을 요청했다. 그러나 황제는 그런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보름스에 불안을 조장하고 있는, 루터에 대한 대규모의 대중적 지지로 인해 발생하는 긴장을 완화하는 것이었다. 루터에 반대하는 신학자 및 정치 고문과의 결실 없는 한 주간의 격론 끝에 루터는 보름스를 떠났고, 카를로스 황제는 그를 무법자로 선포하고 그의 모든 저술과 추종자의 근절을 명령했다. 루터는 여행 중에 납치되었지만 이것은 루터를 바르트부르크 성(Wartburg Castle)에 숨겨두기 위한 그의 친구 프리드리히 현공의 계획이었다. 그곳에서 루터는 11개월 동안 신약성경을 번역하고 여러 교육 프로그램, 그의 첫 번째 우편물 및 기타 여러 논문을 작성했다. 그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교회와 사회 속으로 전파되었고,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보름스 의회는 루터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키지 않았다. 단지 무법자로 낙인 찍힘으로 이동에 제한이 생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제 그의 말은 인쇄술을 통해 훨씬 더 강력한 이동성을 얻게 되었다. 성경 말씀에 대한 그의 지속적인 간증은 독일어와 라틴어로 전파되었으며, 덴마크어, 영어, 헝가리어, 폴란드어, 스웨덴어 및 기타 언어로 번역되어 유럽 전역과 마침내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로 퍼졌다.보름스에서 루터가 교황과 황제가 가하는 처형의 위험 속에서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담대하게 선포했던 말은 즉시 널리 퍼져 나갔다. 망명이나 처형의 위협을 받는 다른 개혁자들은 루터로부터 용기를 얻었다. 루터의 어거스틴수도회 동료인 얀 반 데르 에쉔(Jan van der Esschen)과 헨드릭 보에스(Hendrik Voes)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루터가 피했던 바로 그 운명을 만났다. 그들은 2년이 지나고 브뤼셀(Brussels)에서 꼬챙이에 찔려 죽음을 당했다. 500년이 지난 후, 보름스에서 드러난 루터의 모습은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진 인간이 주는 최악의 위협 앞에서도 예수님이 주님으로 역사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는 용기 있는 신앙고백의 모델을 제공한다. 500년이 지난 후 우리의 상황은 1521년에 루터가 직면했던 상황과는 많이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은 점점 더 신앙에 대한 적대감에 직면한다. 신자들은 종종 다음 두 가지 반응 중 하나를 취한다. 주님을 나의 구주로 고백할 때 만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담대하게 예수님이 누구인지를 외칠 뿐 아니라, 그 진리를 위해서는 나의 모든 것을 다 희생할 준비가 되어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존재의 중심이자 주인이다. 한편 위기 상황이 닥치기 전까지는 자신감에 넘치다가 막상 위기를 만나면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 도망칠 문을 찾았던 베드로처럼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도 있다. 심각한 위협이나 고난에 맞서기에는 충분한 용기가 없다고 절망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그러나 걱정하면 안 된다. 성령님께서 때에 맞는 은사를 통해서 우리를 도우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바로 지금 이 시대 속에 그분의 이름과 진리의 증인으로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는 무엇보다 삶 속에서 그분의 임재와 도우심을 의지해서 선한 용기와 강한 믿음을 가져야한다. 우리가 그분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느끼거나 또는 그분의 말씀에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너무 쉽게 굴복할 것 같다는 두려움에 떨든지 관계없이, 우리는 성령님이 우리의 인도자이자 위로자임을 확신해야 한다. 성령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든든한 보호자이시다. 성령님은 우리로 하여금 때가 되었을 때 어떤 말을 할지 가르쳐 주시고 주님을 담대하게 증거하는 용기를 잃지 않도록 도우신다. 원제: What Martin Luther’s Stand for the Gospel Means for Us To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역사
종교개혁
마틴루터
보름스회의
성령님의역할
현대기독교인의태도
쪼개진 개혁주의를 바라보는 네 가지 견해
by Kevin DeYoung
2021-04-28
미국이 갈수록 심화되는 분열과 양극화에 시달리고 있는 것은 모두가 아는 일이다. 우리 중 많은 사람들이 정치판에서 증가하는 적대감, 공격성 및 폭력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것은 교회안의 분열이다. 특히 내가 몸담고 있는 보수 복음주의 개혁 세계에서 증가하고 있는 파벌주의다. 문제가 좌파 때문인지 우파 때문인지 아니면 둘 다 때문인지, YRR(Young, Restless, and Reformed)가 더 이상 젊지 않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 쉼이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내 기억이 너무 긍정적인지는 모르겠지만 2000년 초부터 2014년까지 다양한 개혁주의와 개혁주의 네트워크, 사역자들 및 교회 지도자들이 함께 연합하는 놀라운 일들을 (그 현장에서 직접) 보았다. 물론 '개혁주의 부흥'이나 '신칼빈주의'또는 'YRR'은 항상 명백한 선을 따라 나뉘어졌다. 성례전과 성령 은사, 행정절차 및 예배에 대한 접근 방식에 대해 일반적으로 의견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 '연합'은 중요한 신학적 신념에 의해 결속되었다. 그것은 역사적 기독교 정통, 성경의 무오성, 대속론, 칼빈주의 구원론, 종교개혁의 오직(Solas), 성별보완주의, 강해 설교 중심이었다. 10년 이상 지속된 이 연합 운동은 반대하는 것들에 대해서도 같은 맥락을 유지했다. 우리는 자유신학, 알미니안주의, 이머징 운동, 구도자 중심, 번영 복음, 성별평등주의, 성윤리 수정주의, 가톨릭, 희석된 복음주의, 인기 없는 교리적 진리에 대해 타협하는 자들이 아니다.10여 년간 놀랍게도 많은 목회자들과 교회들, 많은 네트워크가 이러한 신념으로 결속되는 듯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많은 형제 자매들이 흑인 개혁주의자들을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기독교 힙합문화는 풍부한 신학적 포도주가 새 부대에 채워지며 널리 칭송을 받았다. '크신 하나님 신학은 이 운동이 오름세를 타고 지속되도록 한 것뿐만 아니라 이전에 나뉘어졌던 사람들을 하나로 모았다. 그러나 퍼거슨 사건(2014), 트럼프(2016), 마틴루터킹 사망 50주년(MLK50, 2018), 코로나 바이러스(2020–2021), 조지 플로이드 사건(2020), 그리고 트럼프(2020–2021)를 거치며 이 놀라운 연합이 무너지는 듯해 보인다. 분명히 가장 큰 문제는 인종 문제와 인종 문제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것(예를 들어, 경찰 총격 사건, 비판적 인종 이론, 트럼프)이지만 우리를 분열시키는 것은 인종 문제만은 아니다. 그것은 더 광범위하게 우리가 갖고 있는 각양각색의 본능과 감수성, 다양한 두려움과 의심, 다양한 지적 및 문화적 성향이다. 그렇다. 중요한 신학적 의견 불일치도 우리의 사고와 중심의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서류상 동일한 교리적 서술을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들이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우리의 차이점을 이해하는 한 가지 방법왜 그럴까?이것이 내가 지난 1년 동안 생각했던 것이다. 내게는 문제를 해결할 방법은 없다. 문제 해결의 다음 단계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하려는 시도는 중요한 시작이다.현재로서는 적어도 네 개의 다른 '연합'이 있는 것 같다. 오래된 많은 네트워크와 동맹이 무너지고 새로운 노선을 따라 재편되고 있다. 이 새로운 노선들은 고전적 의미에서 교리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문화적 분위기, 정치적 성향, 또는 개인적인 감성을 나타내고 있다. 시시각각에 따른 주된 필요 사항과 현대 문화에서 교회의 가장 시급한 관건이 무엇인지를 평가하는 것에 따라 각 연합의 이름을 붙여볼 수 있다. 각 그룹에 이 평가에 상응하는 단어들을 부여해 보자.1. 통회 : “과거와 현재의 악에 대한 교회의 범행을 보세요. 우리는 불의, 편견, 인종 차별, 성차별, 학대에 대해 눈이 멀었습니다. 교회가 죄를 인정하고 자복하며 이를 보상하고 극복하는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야 합니다."2. 동정 : “교회와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가진 상처와 슬픔을 보세요. 이제는 귀 기울여 듣고 배워야할 때입니다. 지금은 우는 자들과 함께 울 때입니다. 세상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여주는 교회가 필요합니다." 3. 조심 : “우리 세대를 시사하는 도덕적 혼란과 지적 부주의를 보세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 정의에 주목해 봅시다. 세상은 교회가 최고의 신학적 전통을 활용하고 우리 시대의 도전을 이해하여 그 길을 제시해주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4. 용기 : “시대 정신에 대한 교회의 타협(혹은 전면적 항복)을 보세요. 지금은 후퇴할 때가 아니라 전쟁을 선포할 때입니다. 세상은 교회가 고집스러운 자들을 책망하고, 위험을 경고하며, 진리를 위한 방어벽을 세우는 것을 필요로 합니다. 아무리 나쁜 평을 받는다 해도 말입니다." 각 그룹은 긍정적인 단어로 표현된다. 나는 다른 어떤 그룹보다 3번 그룹에 가깝지만 각각이 추구하는 장점을 표현하는 방식으로 각 그룹을 묘사하려고 최선을 다했다. 우리 대부분은 위의 목록을 읽고 “네 그룹 모두 마음에 드는군. 적절한 때에 적절한 장소에서 적절한 방법으로 교회는 통회하고 동정적이며 조심스럽고 용기 있게 행동해야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이 개요의 목적은 특정한 사람이나 그룹을 묵살하려는 것이 아니며 각 범주에서 사분의 일씩 섞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개요의 위험은 사람들이 좀 더 엄격히 분류를 하려고 하거나 또는 바른 접근이나 정답은 없다는 식의 도덕적 등가성으로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중요한 경고를 만드는 것은 개념에 따른 그룹화는 우리의 불일치가 한 가지 이유에서 만이 아니라 많은 면에서 기본 자세나 방식에 대한 것임을 좀 더 명확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어떤 그룹화 방법도 일반화되고 단순화되고 불완전할 수 있지만 여전히 유용할 수 있다. 특히 일부 범주에는 좌파와 우파(1번에 가까울 수록 좌파, 4번에 가까울 수록 우파)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네 그룹이 두 가지 광범위한 범주에서 일련의 시대적인 문제들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생각해보자. 표 1 (인종문제)표 2 (정치와 젠더 문제)요점은?다시 말하면 이 개요의 요점은 엄격함이나 상대주의가 아니다. 나는 모든 개혁주의 기독교인이 한 줄로 깔끔하게 배치될 수 있다고 제안하는 것도 아니고, 우리 모두가 장님 코끼리 말하듯 다른 사람보다 모든 진리에 더 가까울 수 없다는 것도 아니다.이 개요를 정리해 보는 이유 중 하나는 현재 맥락을 이해하기 위한 단계를 밟는 것이다. 1번과 4번이 가장 큰 목소리를 내고 있는 것이 타당한 이유는 이들이 이러한 문제에 대해 가장 냉엄한 표현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 간에 온라인에서 많은 소음을 발생시키며 충돌하고 있다. 또한 1번과 4번이 가장 분리주의자일 수 있다. 1번 가운데 어떤 목소리는 백인 복음주의 틀에서 탈출하도록 장려하고 있고, 4번 가운데 어떤 목소리는 인종 차별에 대해 경계하는 이들의 파면을 장려하고 있다. 2번과 3번은 연합을 호소하거나 모든 측면을 이해할 것을 요구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양쪽 범주의 끝에서는 질척거리는 소리로 들릴 것이다. 2번과 3번이 중간지점을 찾으려는 노력이 어려움에 부딪치는 이유는 많은 2번이 3번의 동료들에게 위험한 4번을 지목해 내도록 하고 있으며, 3번은 2번의 동료들이 1번에게 덜 동정적이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맥락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는 엄격한 기도, 성경적 성찰, 합리적 숙고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모든 입장에 이르렀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정직하다면 우리 모두는 특정한 본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양육배경, 경험, 상처, 성격, 은사 및 두려움에 의해 특정 해석에 끌리고, 가장 복잡하고 논란이 되는 문제에 봉착했을 때는 익숙한 패턴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누군가의 마스크 착용에 대한 의견을 알면 그들이 기독교 민족주의와 제도적 인종주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꽤 잘 알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확실히 동료 그룹화는 이 시대의 정치 총체화 효과와 마찬가지의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측 가능한 우리 자신의 고유한 감성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종종 더 큰 역할을 한다.험프티 덤프티(Humpty Dumpty: 영국 동요에 나오는 담벼락에서 떨어져 깨져버린 달걀 캐릭터-역주)의 부서진 조각들을 다시 합칠 수는 없다. 일부 조각은 처음부터 함께 붙여질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네트워크, 교회, 또 우리의 마음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의 사람들을 훈련시키고 우리에게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다가갈 수 있는 더 나은 준비를 갖추게 될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아마도 우리의 문화적 감성과 정치적 성향이 아니라, 은혜와 진리로 충만한 아버지로부터 오신 성육신 하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영광에 새로운 초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다.원제: Why Reformed Evangelicalism Has Splintered: Four Approaches to Race, Politics, and Gende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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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교회가 영혼을 치유할 순간입니다
by Scott Mehl
2021-04-27
지난 한 해는 COVID-19의 위험부터 다양한 폐쇄 및 제한, 그리고 여름부터 있었던 시위에서 1월 6일 마국 대통령 선거 결과 발표에 이르기까지, 각종 도전과 어려움으로 가득 찬 한 해였다. 그러나 각종 헤드라인과 토론, 보건부의 명령과 트윗 폭풍 아래에 숨어있는 본질은 끝나지 않는 인간의 고통이다. 상처받은 사람들은 영혼의 치유를 원한다올해는 시작부터 각종 상처와 어려움, 혼란과 고립의 이미지로 점철되고 있다. 불안감, 우울증, 자살 시도, 재정적 어려움, 분노, 결혼 불화 및 관계의 긴장 수준은 사실상 사상 최고 수준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우리의 관심을 끄는 동시에 아드레날린 분비를 상승시키는 모든 논쟁뿐 아니라 문화적이고 정치적인 다양한 과정을 넘어서, 2021년 봄은 무엇보다 교회에게는 영혼을 돌보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모든 교회는 지금 현실을 영혼을 돌보는 순간으로 맞아야 한다. 또한 당신에게도 지금은 영혼을 돌보는 순간이 되어야 한다. 영혼 돌봄에 있어서 내 생애에 지금처럼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필요가 요구되었던 적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그리스도의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이 순간의 현실을 바로 보는 열린 눈과 더불어 공감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소망을 다시 경험해야 하는 주변 사람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나는 정신 건강에 대한 통계 또는 작년에 발생한 코로나 희생자에 대한 사례를 들어가며 내 요점을 설명하고 싶지 않다. 누구나 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 대신, 코로나 사태라는 현실을 제대로 살아가기 위해서 우리 모두가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인 지침을 제시하려고 한다. 알다시피 지금의 위기는 단순히 목사, 상담사, 치료사로 해결될 수 없다. 2020년이 남긴 고통과 그 고통의 규모를 해결할 전문가는 전 세계를 다 통틀어도 충분하지 않을 정도다. 지금은 온 교회 가족이 복음의 소망과 성령의 힘을 받아 서로의 삶에 더 깊이 개입해야 하는 순간이다. 사실 이것은 애초에 교회 가족이 존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고후 1:3-7; 엡 4:15-17).하나님은 그의 자녀인 우리 모두가 다 연민과 은혜와 새로운 에너지로 무장해서 이 순간을 맞이함으로 세상을 향해 예수님의 온유한 손길을 내밀 수 있도록 우리를 부르신다. 이를 위해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지금 상황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취할 수 있는 몇 가지 실용적인 방법이 있다. 물론 고통이 없는 시대는 없겠지만, 지금 당장 주변 사람들의 마음에 가장 필요한 것은 복음의 은혜와 소망이다. 지금이 바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1. 지금은 찾아다녀야 할 때다예수님은 사람을 찾아다니셨고, 우리의 마음이 예수님과 동일하게 뛴다면 우리도 사람을 찾는 이가 되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이 가장 조용해질 때가 바로 그들이 우리를 가장 필요로 하는 때일 수가 있다. 이것은 2020년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고립 또는 격리의 여파에서 볼 때 더더욱 사실이다. 얼마나 오래되었는지 또는 얼마나 어색해 보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고통과 불안, 우울증과 두려움 가운데 있는 사람들을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는 한 우리에게 그들을 돌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2. 지금은 들을 때다우리 모두가 말하고 SNS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만, 인내와 공감을 가지고 상대의 말을 듣는 데는 점점 더 시간을 줄여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 몇 년간 정신 건강이 악화되었다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경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사역의 첫 번째 단계며, 사실 그 자체로 하나의 사역이기도 하다. 다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에 복음의 희망을 적용하도록 진정으로 돕고 싶다면 먼저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경청을 통해 예수님의 인격과 사역이 누군가의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발견할 수 있고, 무엇을 언제 말해야 하는지까지도 알 수 있게 된다. 3. 지금은 말씀에 빠질 때다내가 아는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상처받고, 낙담하고, 혼란스럽고, 두려워할 때 어떻게 사역적으로 접근할지에 관해서 지레 겁을 먹는다. “하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할 때 가장 자주 사용하는 성경 구절은 거의 언제나 최근에 읽거나 공부한 결과에서 나온 것이다. 성경적 진리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복음적 희망을 가지고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자신을 담그는 것이다. 읽고, 연구하고, 기도하고, 외우고, 또 묵상하라. 4. 지금은 목회자에게 도움을 요청할 때다영혼을 돌보는 성경적 도구 중 일부를 특별히 갖추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교회가 겪고 있는 고통을 향해 하나님이 제공하시는 해결책의 일부가 되고 싶다면, 당신이 가장 먼저 이야기해야 할 사람은 출석 교회 목사다. 2020년은 많은 목회자들에게 낙담을 준 한 해였다. 상처받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람들을 돌볼 수 있도록 나를 준비시켜 달라고 목사에게 요청하는 것보다 그에게 더 큰 격려가 되는 것은 없다. 그리고 그런 양육이야말로 목사의 핵심적 사역이다(엡 4:11). 그리고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목사가 모르는 경우라고 하더라도, 당신에게는 여전히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훌륭한 조직(성경 상담 및 제자 교육 연구소 포함)이나 좋은 책이 있다. 그중에는 내가 쓴 ‘Loving Messy People: The Messy Art of Helping One Another Become More Like Jesus(사랑스럽지만 복잡한 사람들: 더 예수님처럼 되도록 만드는 서로를 돕는 복잡한 기술, Shepherd Press, 2020)’도 있다. 5. 지금은 기도할 때다마지막으로 교회 가족에게 영혼의 돌봄이 절실히 필요한 순간이라면, 지금이야말로 무엇보다 근본적으로 교회 가족이 합심하여 기도해야 하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상기시키신 것처럼 말이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궁극적으로 오직 하나님만이 이 순간에 영혼을 돌보는 요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 그는 우리의 사랑스러운 행동과 말을 사용하여 고통받으며 고군분투하는 다른 사람들을 돌볼 수 있지만 무엇보다 모든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예수님 자신이다.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변 사람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일은 그들을 위해 신실하게 기도하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이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면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하라. 지금은 기도할 때다. 하나님께서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도록 부르신 일대일 사역을 시작하고, 듣고, 진실을 말하고, 사역에 올인하지 않으면 도무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연민의 마음을 당신 속에 부어 주실 것을 기도하라. 화재가 발생하면 소방관이 움직인다. 전쟁이 발발하면 군대가 움직인다. 어떤 문제에도 그 문제의 해결에 필요한 고유한 장비가 있기 마련이다.지금과 같이 우리 사회에서 정신적, 정서적, 영적 건강의 위기가 절정에 달할 때 기독교인들은 움직이도록 부름받았다. 지금은 문제가 발생한 때다. 그리고 우리야말로 그 문제를 해결할 독특한 사명을 받은, 그 문제 해결에 필요한 장비를 갖춘 유일한 존재다. 지금은 교회가 영혼을 돌봐야 할 바로 그 순간이다. 원제: The Church’s Soul-Care Moment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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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치유
코로나바이러스
영적훈련
교회사명
경청
개혁 교회에서 벨직 신앙고백의 중요성
by Cornelis Venema
2021-04-26
벨직 신앙고백은 개혁주의 신앙고백 가운데서도 매우 잘 알려지고 사랑받는 고백서에 속한다. 위대한 교회사가이자 신앙고백 연구가인 필립 샤프(Philip Schaff)는 벨직 신앙고백에 대해 “전반적으로 살펴볼 때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을 제외한다면 칼빈주의 교리 체계를 가장 잘 표현해 낸 신조”라고 평가했다. 이 신앙고백은 (현재 벨기에가 자리한) 네덜란드 남부 저지대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며 뿌리내린 개혁교회에서 유래하여 ‘벨직’이라는 이름으로 흔히 알려지게 되었다. 또 역사적으로는 네덜란드 개혁교회를 대표하는 세 가지 신조 중 하나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벨직 신앙고백은 개혁신앙에 관한 풍부한 진술만이 아니라, 그 최초의 작성자와 지지자들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상황 때문에도 큰 사랑을 받고 있다.여기서는 바로 그 신앙고백을 간략히 살펴보기 위해 다음 두 가지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첫 번째는 고백서가 작성된 당시의 배경과 상황이고, 두 번째는 개혁신앙을 고전적으로 진술한 고백서의 독특한 내용이다.배경과 상황벨직 신앙고백은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개혁 교회 목사인 귀도 드 브레(Guido de Brès)에 의해 최초로 작성되었다. 그는 제네바에서 사역한 칼빈의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물론 드 브레가 이 신앙고백의 주요 작성자이긴 하지만, 개혁 교회에 속한 다른 목사나 신학자들도 고백서의 최종적인 형태를 확정하는 데 기여했다. 그 가운데는 이후 라이덴대학교에서 저명한 개혁파 교수로 활약하게 될 프란시스 유니우스(Francis Junius)도 포함되었다.벨직 신앙고백은 1561년에 처음으로 작성되었고, 승인을 위해 제네바와 다른 지역에 있는 개혁 교회들 앞으로 그 사본이 보내졌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형태는 1618-1619년에 개최된 도르트 총회 기간에 확립된 것이다. 그 당시 이 고백서는 개정을 거쳤을 뿐 아니라 공식적으로 네 개의 언어(원어인 프랑스어를 포함하여 라틴어와 네덜란드어 및 독일어)로 진술되었다. 또한 이 신앙고백은 작성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스페인의 펠리페 2세에게 헌정되었는데, 이는 네덜란드 전역에 통치권을 행사하던 그에게 개혁 신앙에 대한 관용을 베풀어 주기를 바라던 의도를 담고 있었다. 이렇게 출판된 벨직 신앙고백은 초기부터 네덜란드 개혁 교회 안으로 깊이 수용되었다.이 신앙고백의 주요 작성자인 귀도 드 브레는 순교자로 생을 마감하기 전, 자신의 아내 카타리나(Catherine)에게 다음과 같은 옥중 편지를 남겼다. “당신의 슬픔과 고뇌를 생각하니, 나는 기쁨과 즐거움 중에서도 근심하지 않을 수 없어 편지를 쓰게 되었소. 당신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슬픔에 빠지지 않도록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구려. [중략] 만일 우리가 더 오랫동안 함께 살기를 주님이 원하셨다면, 그분은 그리하도록 상황을 주장하셨을 거요. 그러나 그분이 기뻐하시는 뜻은 그게 아닌가 보오. 그러니 우리는 이제 그분의 선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또 그것만으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나는 당신이 주님 안에서 위로를 얻기를 기도하오. 그리고 당신 자신과 당신이 겪는 모든 일도 오직 그분께 맡기기를 기도하고 있소. 그분은 과부의 남편이자 고아의 아비시니, 결코 당신을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실 거요. [중략] 잘 있어요, 사랑하는 나의 카타리나! 하나님이 당신을 위로하시고 그분의 거룩한 뜻에 순종할 수 있는 마음을 주시기를 기도하며, 당신의 충실한 남편, 귀도 드 브레.”이 감동적인 글은 드 브레가 순교를 앞두고 기록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지키고 네덜란드에 있던 복음적인 개혁 교회 신자들이 당하던 고난을 증언했다는 이유로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 불굴의 신자들은 극심한 박해 속에서도 드 브레와 같이 '기쁨과 즐거움'을 고백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복음의 진리를 부인하느니 차라리 “그들의 등을 채찍에, 그들의 혀를 칼에, 그들의 입을 재갈에, 그들의 전신을 불길에 내주는” 편이 낫다고 벨직 신앙고백의 서문을 통해 선언했다. 이러한 표현은 무의미한 공언이 아니었다. 실제로 네덜란드 종교개혁 당시에 일어난 투쟁으로 약 십만 명으로 추산되는 개혁파 신자들이 목숨을 잃었다.이러한 벨직 신앙고백의 작성 목적과 그 고백서가 펠리프 2세에게 헌정된 일은 특별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당시 귀도 드 브레와 네덜란드 개혁파 신자들은 로마가톨릭의 통치권과 그 아래에서 공무를 수행하는 관료들의 거센 박해에 직면했는데, 그 상황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이 성경의 가르침과 거룩한 공회에서 초기에 합의한 교회의 신조들과 일치한다는 사실을 증명하고자 했다. 그 결과, 벨직 신앙고백은 전체적으로 화합을 도모하는 어조를 띠게 되었다. 특히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뿐 아니라 삼위일체에 관한 성경의 위대한 교리에 개혁 신앙이 얼마나 충실한 입장을 견지하는지를 주의 깊게 입증하는 데서 그러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다. 물론 핵심적인 조항에서 로마가톨릭 교리를 거절하고 있지만, 이 신앙고백은 개혁 신앙이 기독교회의 역사적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독자들에게 알려 주는 데 그 목적을 두고 있다.또한 벨직 신앙고백은 1559년에 출판된 프랑스 갈리아 신앙고백과 매우 유사한 내용을 갖추고 있지만, 그 작성 목적에서 독특한 차이를 드러낸다. 즉 벨직 신앙고백은 개혁 신앙이 ‘재세례파’ 신앙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히려는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작성되었다. 종교개혁 초기에 네덜란드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재세례파 중에는 단순히 유아세례 관습을 반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자신의 통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시민 정부의 관료들도 자신의 종으로 삼으신다는 사상을 거부하는 자들이 있었다. 왜냐하면 재세례파는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인 교회를 시민 사회의 질서와 날카롭게 구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역 수행이나 계약 체결 또는 세금 납부 등도 거절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세상과의 엄격한 단절도 주장했다. 벨직 신앙고백은 개혁 신앙이 그처럼 극단적인 종교개혁 분파와 동일한 성격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기 위해 기록되었고, 그러한 목적이 이 신앙고백의 또 다른 특징적인 면모를 잘 보여 주게 되었다.독특한 내용벨직 신앙고백은 특정한 교리 문제를 다루기 위해 작성된 도르트 신조와는 성격이 다른 문서다. 오히려 그에 앞서 제작된 칼빈의 제네바 신앙고백이나 갈리아 신앙고백과 유사하게 개혁 신앙을 포괄적으로 진술하는 내용을 제시하고 있다. 넓게 살펴보면, 벨직 신앙고백을 구성하는 37개 조항의 내용은 사도신경의 세 가지 항목을 따라 배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서론에서는 성경의 영감과 권위에 대한 종교개혁의 관점을 제시한 후(1-7항), 삼위일체와 더불어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 사역에 관한 진리를 선언한다(8-13항). 다음으로 본론에서는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이 진술되는데, 여기서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믿음’으로 구원에 이른다는 종교개혁의 이해가 중세 로마가톨릭의 그릇된 가르침과 대조를 이루게 된다(14-23항). 끝으로 결론에서는 성령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진술이 요약적으로 제시되며, 여기에는 교회와 성례에 관한 몇 개의 조항과 하나님이 지명하신 시민 정부의 공적 사역에 관한 하나의 조항이 첨가된다(24-37항).이러한 벨직 신앙고백의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는 차원에서, 개혁신앙을 증언하는 진술 가운데 눈에 띄게 나타나는 두 가지 특징을 확인해 보고자 한다.첫 번째로 벨직 신앙고백은 이후 작성될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과 같이 계시 특히 성경에 관한 개혁 신학의 교리를 전형적인 방식으로 진술하는 특징을 가진다. 예를 들어 2항에서 하나님은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라는 두 가지 수단을 통해 '알려지신다'고 설명된다. 이에 따르면, 창조 세계 및 하나님의 주권적인 목적 아래 진행되는 역사는 그분의 영원한 권능과 신성을 증언하는데, 이는 하나님의 일반 계시를 담고 있는 일종의 '격조 높은 책'으로서 죄인으로 하여금 그분에 대한 무지와 반역에 어떠한 핑계도 댈 수 없게끔 만든다. 이에 하나님은 자신의 뜻과 목적,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신 자신의 구속 사역을 '더 분명히' 드러내기 위해 교회에 성경을 제공하셨다. 바로 이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되어 신적 저자의 완전한 권위를 가지고 있으므로 기독교 신앙의 질서와 토대를 확립하기 위한 유일한 규범이 된다.두 번째로 벨직 신앙고백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관한 내용을 진술할 때 단지 교회 역사의 초기에 합의된 신조들을 반영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과 자비에 따른 선택 및 자기 백성을 위한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이해하는 개혁 신학만의 독특한 관점도 함께 강조하는 특징을 지닌다. 이를테면 오직 은혜로 말미암는 이신칭의 교리가 여기서도 분명히 진술되고 있다. 흥미로운 대목은 22항인데, 이 내용은 신자의 칭의를 위해 전가되는 그리스도의 의의 본질에 관한 논쟁이 일어난 도르트 총회에서 약간 수정되었다. 그 조항은 분명하게도 그리스도의 의가 “그분의 모든 공로와 그분이 우리를 대신하여 행하신 그 수많은 거룩한 행위”를 포함한다고 명시함으로써 신자에게 전가되는 그분의 의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능동적 순종’이라고 일컫는 부분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명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24항에서는, 신자의 칭의가 성화의 은혜와는 분명히 구별되지만, 그리스도의 구원 사역에서 두 가지 혜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신자에게 전달되는 하나님의 은혜 속에 공존하기에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이 진술된다.이러한 벨직 신앙고백은 기록 당시의 역사적 정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흔적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당대만이 아닌 현재까지도 개혁교회의 신앙을 대변하는 최고의 역사적 진술 중 하나로 남아 있다. 따라서 복음적인 신자라면 이 고백서를 가까이하고 그 진술이 작성될 당시에 얼마나 험난한 박해가 주어졌는지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수많은 순교자의 피로 승인된 벨직 신앙고백은 그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이 자기 뜻대로 베푸시는 주권적인 은혜를 확고하게 증언하며, 지금도 수많은 이들에게 (야로슬라프 펠리칸[Jaroslav Pelikan]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이들의 살아 있는 신앙'을 보여 주고 있다.원제: The Belgic Confession출처: www.ligonier.org번역: 장성우
역사
중세교회
벨직
신앙고백
배경
상황
필립샤프
귀도드브레
여성이여, 복음 전파의 롤 모델이 되라
by Kathleen NielsonㆍGloria Furman
2021-04-24
나이 든 여성이 젊은 여성에게 '선한 것'(딛 2:3)을 가르치게 하라고 바울은 디도에게 교훈했다. 교회 안에서 여성들이 선한 것을 함께 배우고 성장해갈 때, 전도하는 것 역시 그 '선한 것'의 중요한 한 부분임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특권이 있다. 남녀를 막론하고 교회 구성원 전체가 전도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복음 전하는 것에 대하여 여성들이 함께 깊이 고민해보는 것이 좋다.구체적으로 세 가지 이유가 있다.1. 복음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 필요하다우선, 여자 성도들은 자기 중심적이고 내부지향적인 목소리가 아닌, 복음 중심적이고 외부 지향적인 목소리를 들을 필요가 있다. 오랫동안 평안한 삶을 살아온 많은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정을 갖거나 분명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려울 때가 많다. 상대적으로 유복한 삶은 우리를 스트레스에 취약하게 만들고, 나태하게 하고, 외모에 대해 걱정을 늘어놓게 하거나, 경건치 못한 향락에 쉽게 빠져들게 한다. 그러한 삶을 사는 여성들이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는 열정적으로 목소리 높이는 것을 많이 보아왔다.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다. 하지만 계속 그렇게 하면 자기 이미지, 자아정체성, 자신의 감정, 직업에서의 만족 등 온통 자신을 향한 곳에만 생각을 빼앗기게 된다. 우리는 자신에게만 초점을 맞추는 것에서 벗어나 사회적인 문제에 더욱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우리는 여전히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는 육체적, 감정적 필요에 지나치게 관심을 둔다.왜 우리는 예수님의 좋은 소식, 모든 사람의 가장 중요한 것을 채우시는 예수님을 나누는 일에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것일까? 2. 롤 모델이 필요하다뛰어난 롤 모델은 성경의 가르침을 탁월하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이들이다. 남녀 모두 전도해야 하지만, 여성들은 특별하고도 중요한 역할을 여러 방식으로 감당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다음 세대를 위한 롤 모델이 되는 것이다. 복음의 열정을 실천으로 옮기는 여성, 다시 말해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우리를 구원하신 놀라운 소식을 사람들에게 보이고 나누며, 충실히 섬기는 것이 어떤 것인지 행동으로 보여 주는 모습이다.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이 있는 여성들은 다양한 상황을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 여성들의 삶은 많은 경우 다양한 관계로 이루어져 있는데, 그 안에서 가정, 일, 친구 관계, 손님 접대, 긍휼 사역을 동시에 감당해야 한다. 우리 주위의 여성들이 여러 사역을 감당하며 풍성한 열매를 맺는 것을 볼 때 우리는 삶의 모든 곳에서 복음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부엌의 식탁이든, 수천 명 청중 앞의 연단이든, 사무실 책상이든 상관없다. 굳이 전 세계 복음화를 논하지 않더라도, 여성들은 길 건너 이웃과 옆 동네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면 창의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을지 서로 이야기하며 나눌 수 있다.지속적인 증인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말씀을 배우고 나누는 것이다. 어떤 일을 하든 우리는 이 일을 위해 서로를 격려할 수 있다. 신중하면서도 지속적으로 하나님 말씀을 연구하고자 애쓸 때 우리는 자신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진리의 말씀을 먹일 수 있다. 모든 삶에서 그 마음이 복음으로 가득한 여성의 말과 행동은 성경으로 가득 차게 된다. 명확한 복음의 변증에 관한 언어는 구약과 신약 성경 자체의 논리, 예수님이 중심에 있는 성경의 이야기로부터 흘러나온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할 때, 우리의 말씀 연구를 일상적인 개인 식사로 보지 않고 함께 모여 즐기는 큰 식탁의 만찬으로 보게 된다.3. 복음의 긴급함을 깨달아야 한다마지막으로, 여성들이 개인 전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깊이 고민해봐야 하는 이유는 '선한 것'을 서로에게 가르치는 것이 시급한 일이기 때문이다. 디도에게 주는 바울의 교훈 뒤에 나오는 단락은 교회 안의 여러 그룹에게 주는 것인데, 바울이 가르친 것의 중요한 이유를 보여 준다."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딛 2:11–13).이 본문에서 강조하는 바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구속 사역이다. 이 사역은 특정한 시대에 일어나는데, 이 시대는 주 예수님이 이 땅에 다시 오실 때 그의 모든 영광에서 절정에 이르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이 세대'는 성경에서 가르치는 '말세'를 뜻한다(행 2:17; 히 1:2). 즉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를 가리킨다. 이는 예수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의 시대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열방에 전하고, 신자들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시대다. 예수님이 승천하시기 전에 주셨던 분명한 명령에 따르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마 28:18–20)는 일로 부르심을 받았다.그 명령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주셨고, 그들을 통해 교회에, 즉 언제 어디서나 제자를 만들고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설교자들과 교사와 전도자들에게 주어졌다. 초대 교회의 여성들처럼, 오늘날의 여성들 역시 교회의 일부로서 이 시급한 부르심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이 언급한 뵈뵈, 브리스가, 마리아, 유니아, 드루배나, 드루보사, 버시, 루포의 모친, 율리아, 네레오의 자매(롬 16) 같은 숱한 여성 일꾼들을 기억하라.21세기를 특징짓는 경제 발전과 기술 개발을 누리며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복음 전파의 시급함을 느끼기는커녕 성경이 가르치는 분명한 진리조차도 부끄러워하는 듯하다. 성경은 예수님을 통한 구원의 길을 보여 준다. 예수님은 우리 죄를 대신 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대신 감당하시며, 우리를 위해 죽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다. 메시아다.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셔서 그를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신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가르치고 우리가 나누어야 할 기쁜 소식이고, 복잡할 것 없는 분명한 소식이다.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교회가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정치적으로 '폐쇄적인' 국가에도 예수님이 그의 백성을 그의 말씀을 통해 왕으로서 다스리신다. 복음은 실로 긴급히 전해져야 하는 소식이다. 예수님이 다시 오실 소망의 날이 더욱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다.우리는 모두 복음 중심으로 외부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 말씀으로 충만한 흔들림 없는 롤 모델이 필요하다. 사람들을 복음의 능력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이 메시지의 절박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떡이다. 우리는 이를 나누어야 한다.원제: Needed: Word-Spreading Women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이정훈
교회사역
여성
전도
역할
모델
긴급성
복음초점
루터의 보름스 저항이 주는 교훈
by Ivan Mesa
2021-04-18
종교개혁이 시작된 순간으로 1517년 10월 31일 마틴 루터가 비텐베르크 교회 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못박는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나 아마도 더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난 것은 거의 4년 후 1521년 4월 18일에 루터가 보름스 회의에 섰을 때였다. 자신의 글들을 철회하도록 압력을 받자,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만약 성경의 증거함과 명백한 이성에 비추어 나의 유죄가 증명되지 않는 이상 나는 교황과 공의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겠습니다. 사실 이 둘은 오류를 범하여 왔고 또 서로 엇갈린 주장을 펴왔습니다.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의심스러운 것이 있는데 나는 아무것도 철회할 수 없고 또 그럴 생각도 없습니다. 만약 양심에 어긋나게 한다면 구원이 위태로워질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저를 도우소서, 아멘.”이 중대한 사건의 500주년을 맞이하여, 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헤르만 셀더휘이스(Herman Selderhuis), 칼 트루먼(Carl Trueman) 등 종교개혁 학자 세 명에게 루터의 저항이 중요한 이유와 오늘날 교회에 남긴 유산에 대해 500 단어 정도로 설명해 달라고 부탁했다.오직 성령1521년 4월 18일 마틴 루터는 아마도 그의 생애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을 경험했다. 그는 스페인 출신 신성로마황제 찰스 5세 앞에 출석할 것을 요구받았는데, 그 회의는 보름스(Worms)에서 소집하도록 되었고, 그곳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약 40 마일 남쪽, 라인 강 상류에 위치하고 있었다.보름스에서 루터가 불타는 죽음에 직면하는 것과 같이 용감하게 저항한 사건은 개신교도라고 불리게 된 자들이 로마와 결별하는 것을 확실하게 하였다. 또한 그것은 루터파, 개혁파, 성공회, 그리고 심지어 재세례파 등 그의 행렬을 따르는 운동이 결정적으로 성경적인 운동이 되도록 했고 말씀의 영성이 경건을 형성하도록 했다.종교개혁자들이 그 시대에는 깨닫지 못했을지라도, 루터가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군주 앞에서 성경을 그의 유일한 무기로 삼고 맞선 것은 먼훗날의 교회의 성격을 설정한 것이었고, 후에 교회는 군주들의 도움을 사방으로 내던지고 오직 성령만 의지하게 되었다.마이클 헤이킨(Michael Haykin), The Southern Baptist Theological Seminary 교회사 교수 영웅도 책도 비상식도 절대적이지 않다 위험한 일은 황제 앞에 선 루터를 영웅으로 보는 것이다. 그는 영웅이 아니었다. 그는 심지어 철회 여부의 결정을 연기하도록 허락해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였다. 우리가 루터에 초점을 맞춘다면, 그가 거부한 것을 해야할 것이다. 루터는 ‘나는 교황이나 종교 회의를 믿지 않는다’고 말했다. 어떤 영웅도, 어떤 기독교 지도자도, 어떤 전통도, 루터와 칼빈이나 그 전에 있었거나 후에 나온 어떤 위대한 신학자를 전적으로 따를 수는 없다. 오직 성경뿐.“저는 제가 인용한 성경 본문에 메여있습니다.” 이것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지속적으로 울리는 메시지다. 그것은 종교개혁 때 보았듯이 교회 내 분열을 일으킬 수 있다. 신학적 고립을 초래할 수 있고, 돈과 명성과 경력을 잃게 할 수 있으며, 생명까지도 잃게 할 수 있다.루터가 단지 어떤 신성한 책에 메여있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보름스에서 그는 "성경의 증언"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말한다. 우리는 어떤 책에 의해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께 메여 있어야 한다. 루터는 보름스에서 성경을 단순히 어떤 책으로 생각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 경고하지만, 또한 성경이 신성한 본문으로 된 비인격적 책이라는 신학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루터는 성경을 변호하면서 하나님을 잃어버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보름스에서 있었던 루터의 증언에 관련된 교훈이 또 있는데, 그때 그는 또한 분명한 이성적 논증에 의해 유죄가 되기를 원한다고 말한다. 오늘날 교회는 여러 지적이고 신학적인 도전에 직면하고 있으며, 우리가 그것들로부터 도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믿음을 수호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성적 논증이 가능한 견고한 신학이 필요하다. 루터는 보름스에서 우리에게 심도있는 신학 교육을 권장한다. 학문적으로 신학을 하고, 불신앙에 대해 이성적으로 토론할 수 있고 이단을 분별하고 공격할 수 있는 신학자들을 훈련시키기 위함이다.루터가 보름스에서 가장 확실하게 만든 핵심은 성경이 구원에 관한 것이며 종교 개혁도 구원에 관한 것이라는 점이다. 루터에게는 선택 사항이 없었다. 구원이 위험에 처했기 때문에 철회할 수 없었다. 교회에서 많은 것을 토론하지만, 우리가 여전히 구원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보는가? 우리 설교의 목표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들의 구원하기 위함인가? 크리스천으로서 나의 관심이 나의 세속적 행복인가 아니면 영원한 행복인가?루터가 보름스에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영원한 사망에서 사람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으로 받았다는 것이다. "성경의 증언"은 그리스도 밖에는 멸망이라고 증거한다. 루터는 보름스에서 그의 양심에 호소한다. 모든 이가 구원받을 필요가 있기에 이것이 계속해서 교회와 모든 신자의 양심에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헤르만 셀더하위스(Herman Selderhuis), 네델란드 Theological University Apeldoorn 교회사 교수개인주의는 영웅이 아니다 95개 조항을 못 박은 사건과 같이, 보름스 회의는 오히려 더 정당화가 필요하지만, 개신교를 생각하는 게 불가피하게 한다. 긴박한 상황으로서 신성로마황제 앞에서의 재판은 분명히 대학에서 토론 대회 광고를 게시하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다.만일 가장 눈에 띄는 한 순간을 꼽아본다면, 분명 (아마도 실제로 한 말 그대로는 아닌 것 같지만) 루터가 "여기 내가 서있습니다"라고 말한 순간일 것이다. 그 숙명적인 날의 결론에 의해, 여러 제국의 당파들 간의 우호적인 타협 때문에, 루터의 문제가 사라지거나 해결되지는 않았을 것이 너무나 분명했다.하지만 그 순간은 루터의 질문에 대해 작센(Saxony)의 선제후와 카를(Charles) 5세 사이의 관계가 돌이킬 수 없게 된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 그것은 교회의 주장에 대해 개인이 양심적으로 말할 수 있는 권리를 상징하게 되었다. 루터는 자신의 발언에서 그를 반대하는 이들이 그에 대한 비평을 정당하게 하게 하도록 요구했다. 교회가 주장하는 ‘진리’가 성경의 가르침과 이성에 의해 보증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 없는 것일 수 있다. 그 이성은 물론 후대의 독립적인 이성이 아니라 이해를 추구하는 믿음으로 대표되는 이성을 말한다.여기에 위험이 있다. 개인주의가 왕노릇하고 개인의 양심이 일반적으로 개인의 기호와 동일시되는 세상에서 자라난 우리에게, 루터가 보름스에서 맞선 것이 자신을 진리의 용사로서 나타내기를 원하는 어떤 문제아를 지지하게 만드는 (안도하게 하는) 역사적 유사점을 제공할 수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런 사람들은 이러한 과거의 정신을 불러 일으켜 그들의 권위와 지혜에 대한 새로운 주장을 영웅처럼 치장해주기를 바란다.그러나 보름스의 배경은 실제로 ‘성경의 사람’이나 부패한 기득권을 깨부신 사람의 모습이 아니다. 신학적 교육과 성경 원어와 과거 위대한 사상가들의 신학적 기록들에 흠뻑 젖어있고, 말씀과 성례로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일상에 깊이 빠져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또한 그는 진리에 붙들린 사람이다. 루터의 맞섬은 경력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고, 자신에게 관심을 끌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반응이었고, 그가 아는 모든 것을 제공한 것이었다. 자신이 처하기를 원치 않았을 상황 속에서 말이다.여기에 교훈이 하나 있다. 특별히 사려 깊은 학습과 열렬한 성직자 정신, 또는 보름스 회의에 있었던 것과 같이 개인이 감당해야 할 대가나 위험 중 어느 것도 감당하지 않고 루터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기반을 제공하고 있는 때에는 더욱 그러하다. 자유로운 사회에서는 모두가 말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보름스에서 학식 있고 헌신적인 성직자와 목사였던 루터의 말은 들려져야 할 권리가 있었다. 그의 정신을 소환하여 자기 자신의 격분을 거룩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수많은 사람들과는 달리 말이다.칼 트루먼(Carl Trueman), 펜실베니아 Grove City College 종교학 교수원제: Lessons from Luther’s Stand at Worms: 500 Years Ago Toda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강경원
역사
종교개혁
웜스(Worms)회의
마틴루터
루터의저항과유산
웜스회의500주년
교회개척에 있어서 즉각성이라는 우상
by Adam Ramsey
2021-04-15
“목회자(특별히 복음전도 목회자)가 반복하는 죄는 성급함이다.” (유진 피터슨)내게는 아내와 동료들이 입증해 줄 수 있는 이야기가 한 가지 있다. 나는 뭐든 빨리 하는 것을 좋아한다. 운전하고, 책을 읽고, 생각하고, 결정하고, 기록하고, 먹고, 걷는 것조차 빨리 한다. 아무 생각 없이 공항에서 꾸물대는 사람들이나 추월 차선에서 규정 속도보다 낮게 달리는 뻔뻔한 모든 사람들에게는 화 있을진저.나는 기도할 때에도 "주님 '지금 당장' 내게 인내심을 주세요"라고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지난 몇 년 간, 천천히 하는 법을 배우긴 했다. 교회 안에서 성령께서 일하시는 속도에 집중했고, 주님 앞에서 잠잠하게 기다렸다. 신속함의 우상보편적으로 선진국가의 교회 개척자들은 마치 대륙횡단 여행 중에 있는 네 살 아이 수준의 인내심을 갖고 있다. ‘아직 도착하려면 멀었어요? 얼마나 더 가야되요?’ 우리 마음의 뒷좌석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나는 수만 명 규모의 초대형 교회와 몇십 명 정도 되는 가정교회, 그리고 그 중간 규모 정도되는 교회에서 목회한 경험이 있다. 각각의 경우, 내 마음은 성급함이라는 유혹에 사로잡혔다. 즉각적 만족감을 주는 우상과 같은 유혹은 모든 사역의 현장에 존재하며, 우리가 풍성한 비전과 자원의 부족함 사이의 긴장을 다룰 때, 이러한 유혹은 교회 개척자들을 심각하게 괴롭힌다.교회 개척자들은 날마다 유혹에 대해 깨어서 성령께서 움직이시지 않는 순간까지만 나아가야 한다. 성도들의 창을 통하여, 우리가 그들을 위해 갈망하는 것과 우리가 실제 보는 현실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감을 발견해야 한다. 자기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결혼 생활과 사역을 밑바닥까지 혹사시키는 리더는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성경 말씀의 지혜가 교만함과 인내심을 나란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 어찌 놀랄만한 일이겠는가? 예를 들어 전도서 7장 8절을 보라. “일의 끝이 시작보다 낫고 참는 마음이 교만한 마음보다 나으니”성급함이란 우리의 시간이 하나님의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생각의 교만이다.서두르지 않는 예수님의 사역마치 처음 출전하는 큰 시합에서 출발선에 서 있는 달리기 선수들처럼, 교회 개척자들은 출발할 때부터 지속 가능한 수준을 유지하며 빛처럼 빠른 속도에 이르도록 추진시키는 아드레날린을 조절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무엇보다 목회자는 장거리 선수지, 단거리 주자가 아니다.짐 엘리엇(Jim Elliot)이 '소음, 서두름, 그리고 군중'이라고 명명했던 불경한 삼위일체는 우리의 기쁨을 쉽게 빼앗아 간다. 대형 교회 혹은 성장하는 교회 자체에 문제가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예수님의 공생애의 최전선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하기 위해 사용했던 것들에 대해 우리 역시 어느 정도 경계를 해야 하지 않을까?첫째로, 즉각적 만족의 성급함이었다. “이 돌들로 떡덩이가 되게 하라”(마 4:3). 둘째로, 화려한 과시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려는 유혹이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내리라…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마 4:5–6). 마지막으로, 사탄은 세계적인 영광과 능력을 미끼로 사용했다(마 4:8–9). 이들 각각의 유혹 (성급함, 자기 증명, 영광)은 타이밍과 관련이 있다. 결국 예수님의 금식은 끝날 것이고, 메시아로서 주님의 정체성은 입증될 것이며, 지상 왕국의 영광은 그분께 속할 것이다.하지만 아직이다.그리고 '아직'의 시간 동안, 예수님은 인내하시며 성부 하나님의 때를 신뢰하고 계신다. 복음서에서 단 한번도 급하게 행동하시는 예수님을 발견할 수 없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렇게 행동하는가?성령의 속도에 맞추어 달리라알란 크라이더 (Alan Kreider)가 쓴 ‘초대 교회의 숙성된 인내’(The Patient Ferment of the Early Church)라는 책에서, 그는 인내야말로 로마의 통치 아래에 있던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필수 덕목이었다고 소개한다. 하나님께서 인내하시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내해야만 했다. 상황을 조작하거나, 근심하거나 서두르지 않고 결코 그들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기로” 결단했다. 그야말로 교회 개척을 위한 놀라운 지혜다. 오래 지속되는 사역을 위한 사역의 더딘 속도는 후진이 아니라 많은 결실 가운데 앞으로 나아가게 한다. 서구 교회는 컨퍼런스나 팟캐스트라는 하늘에서 잠깐 있다가 금새 없어지는 별똥별을 흉내내는 리더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우리는 계절을 이해하고 기다림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농부와 같은 리더가 필요로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명에 우리보다 더 큰 책임을 가지고 헌신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수확하는 성실한 사역의 리듬 속에서 쉼을 누릴 수 있다. 모든 결과는 주님께 맡긴 채 말이다. 야고보서 5장 7–8절은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급한 시간 속에서, 우리는 인내로 나아가는 연습을 다시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교회를 위하여 엄청난 기도를 드릴 뿐만 아니라 오래 지속되는 사역으로 이끄는 삶의 규칙을 통해 거룩한 한계를 수용한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충실한 결말을 만들어 내는 리더십 습관(예를 들어, 참된 다양성, 솔직한 친구관계, 정기적인 안식일의 쉼, 그리고 성급하지 않은 기도생활 등)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만일 우리가 예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보다 예수님과 함께 동행하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한다면 어떻게 될까?갑자기 닥쳐올 문제들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기억하게 될 때 인내는 성장한다. 우리는 우리의 시선을 주님께만 고정하면 된다. 시간을 창조하신 그분께서는 결코 계획의 뒤편에 계시지 않는다. 그리고 모든 것(심지어 기다림조차도)을 직면할 수 있는 능력은 그 영광스러운 진리 가운데 존재하고 있다. 원제: Church Planting and the Idol of Immediacy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진호
교회개척
우상
성급함
알렌
인내
유진피터슨
우상숭배
가정교회
삼위일체
짐엘리엇
교회의 문제를 보며 떠나는 이들에게
by Lucas O’Neill
2021-04-14
가끔씩 교회가 병원 응급실처럼 느껴진다.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눈가에 고통이 서린 방문객이 보인다. 이전에 다니던 교회가 복음을 변질시키고 더럽혀서 격한 슬픔을 느꼈던 사람이다. 또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앞서 출석하던 대형 교회를 빠져나와 우리 교회에 함께 등록하게 된 몇몇 교인들이 눈에 띈다. 이들은 그 교회의 담임목사가 어처구니없는 행실로 부도덕한 모습을 보인 나머지 실망해서 교회를 떠났고, 지금은 그 문제를 알게 된 또 다른 부부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 다시 새로운 얼굴을 찾아 인사하려고 고개를 돌리니, 역시나 이전 교회에 더 이상 참석하지 않기로 한 세 명의 성도가 시야에 들어온다. 교회 리더들이 너무 타락했다는 게 이유였다. 당시 세 명 중 한 사람은 그 타락상이 어느 정도였는지 약간이나마 나눠 보려 했으나 결국에는 형언하기 힘들어했다. 그리고 다른 두 사람은 마치 그 실상을 몇 마디라도 입에 담으면 비통한 기분이 가실 것 같지 않은지 몸짓으로 문제의 심각성을 대신 표현하려고 했다.나도 이러한 상황이 그저 생소하게 여겨진다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하지만 우리 교회에는 이와 같은 사례가 넘쳐 난다. 어떤 부부는 지나치게 돈을 밝히면서 언사가 거친 목사로 인해 교회에서 나오게 되었다. 그러자 목사는 교회를 떠난 부부 가족을 피하라며 전체 회중에게 말했다고 한다. 이에 그 부부는 많은 친구들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또 한 자매는 앞선 교회에서 번영복음을 선전하는 모습을 보고는 발길을 끊게 되었다. 그러자 가족처럼 지내던 이전의 지체들은 그녀가 우리 교회로 나오게 되면서 광신도로 바뀌었다고 조롱했다. 그리고 교회의 요청을 따라 직장을 그만두게 된 형제도 있다. 그 교회가 추진하는 개척 운동의 일환으로 그 형제에게 사직을 권하며 새로운 예배 인도를 제안했던 것이다. 이에 형제는 직장을 그만두고 이삿짐도 다 싸게 되었다. 그러나 결국에는 교회가 그를 밀어내고 말았다. 나이가 많다는 게 이유였다.이처럼 엄청난 자원과 능력을 갖춘 교회들이 결국에는 삼손과 같이 곁길로 나가거나 자신의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모습을 보게 되면, 그야말로 깊은 번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교회들이 그릇된 길을 가는 동안,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피를 흘리며 주저앉고 만다. 그렇게 탈선한 교회들로 인해 상처 받은 신자들을 회복시키는 일 또한 여간 힘든 과정이 아니다.어쩌면 당신 역시 사랑하는 교회를 떠나야 했던 경험이 있을지 모른다. 아니면 교회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방식으로 규모가 더 큰 다른 교회에 병합되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교회의 지도층이 전반적으로 제 기능을 못해 공동체의 회복을 꿈꾸기조차 어려울 수도 있다. 심지어는 교회의 치리 구조상 고집불통인 리더십을 교체하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이 가운데 어떠한 상황을 만났든 간에, 당신은 깨닫는다. 한때는 가정처럼 편히 여겨지던 교회가 이제는 더 이상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그리고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다가 어딘가에 버려진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상태에 처한 당신이 마음을 다시 회복하는 데 도움이 되는 여섯 가지 지침을 한번 제시해 보고자 한다.1. 교회를 떠나려거든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떠나라당신은 앙심을 품고 교회를 떠나거나 단순히 어려운 상황을 견뎌 내기 힘들다는 이유로 공동체를 이탈해서는 안 된다. 나는 실제로 우리 교회를 방문하는 사람들 중 일부에게는 원래 다니던 교회로 다시 돌아가 문제를 해결하라고 권면한다. 물론 우리 교회도 마음이 깨지고 상처 입은 사람들을 받아들이기 원하지만, 그들이 단지 교회에서 말다툼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좋은 공동체를 떠나게 되기를 원하진 않는다. 만일 누군가가 당신을 비방한다면, 그 사람과 화목하기 위해 용기를 내서 필요한 대화를 해야 한다(롬 12:16-18). 그러나 혹 교리적인 또는 도덕적인 문제로 인해 교회의 사명이 돌이키기 힘든 상태에 빠졌다면, 당신 자신과 가족 모두를 지키기 위해 그 교회를 떠나는 게 상책일 수 있다. 물론 그때도 성도 간의 연합을 지키기 위해 당신이 해야 할 몫을 감당했는지는 분명히 점검해야 한다(엡 4:2-3).2. 한 교회를 떠나기로 한 일은 올바른 결정이 될 수 있어도, 교회 자체를 떠나기로 한 일은 언제나 잘못된 결정임을 명심하라특정 교회를 떠나는 데는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 있지만, 교회 자체를 떠나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을 수 없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에서 받은 상처를 다름 아닌 교회를 통해 치유 받도록 계획하셨다. 물론 세상에는 건강하지 않은 교회가 존재한다. 그러나 건강한 교회 역시 존재한다.우리는 요한계시록 2-3장에서 예수님이 여러 지역에 있는 교회들을 대상으로 칭찬과 책망을 하시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가령 사데 교회를 향해서는 사실상 죽은 자와 같다고 하시며 엄중하게 질책하시는 반면, 서머나 교회나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칭찬만 하신다. 또 버가모 교회와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서는 어떤 문제가 있으나 그 문제를 잘 극복해 내라고 요구하신다. 여기서 사명이 완전히 사라진 교회는 없다. 그런 차원에서 제도화된 교회를 거부하는 일은, 제도화된 교회를 세우신 예수님을 거부하는 일이 된다(엡 4:11-16). 우리는 오히려 예수님이 친히 정하신 질서를 저버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마 18:17). 결국 신자들의 모임에서 우리에게 필요한 격려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 이유 때문에라도 우리는 교회에 가야 한다(히 10:25). 따라서 믿음과 행실에서 본이 되어 기억에 담아둘 만한 리더가 많은 교회를 찾아야 한다(히 13:7). 내가 알기로는, 그런 교회가 많이 있다.3. 교회에서 당한 아픔을 이야기하되 지혜롭게 이야기하라어떤 사람들은 과거의 고통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음으로써 그 아픔을 싸매거나 경감시키려 한다. 혹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면, 결국에는 험담이나 비방을 하지 않을 수 없다고 느끼는 것이다.반대로 또 다른 사람들은 거의 모든 대화 때마다 과거에 당한 고통을 화제로 꺼내 마음의 짐을 내려놓으려 한다. 자신의 불편한 감정을 환기시키기 위해 그런다지만, 대개는 적의나 원한 또는 분노가 이면의 동기로 자리하고 있을 때가 많다.위의 두 경우 모두 건강하지 못한 태도다. 그보다는 당신의 이야기를 경청하고 절제된 말로 조언을 해 줄 수 있는 성숙한 지체와 더불어 고통의 문제를 다루는 편이 좋다.4. 슬픔도 하나의 과정임을 기억하라혹 당신이 선호하는, 복음중심적 가치가 실현되는 교회를 찾았다 하더라도, 다시 공동체에 깊이 참여하려면 당신만의 시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상처가 아물고 심장이 다시 뛰도록 스스로에게 시간을 내줘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새로운 교회에 참여하는 부담이 클수록 서서히 익숙해지도록 행동하는 게 지혜롭다. 때로는 치유와 적응의 기간을 두는 것이 공동체를 다시 섬길 수 있도록 스스로를 준비시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이 되기 때문이다.5. 당신이 떠난 교회에 그대로 남기로 결정한 지체들을 이해하라분명 어떤 친구들은 당신이 다니던 교회에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당신이 떠나는 모습을 보고 불편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심지어는 당신이 얼마나 부드러운 자세로 교회를 나왔든지 간에, 당신으로부터 판단을 받고 있다는 느낌을 자동적으로 품게 될 수도 있다. 혹은 아예 당신을 못 본 체하거나 당신이 교회 리더십에 불순종하고 나갔다며 비난할 수도 있다.그러나 어떤 경우든 그들을 이해하려고 힘써야지, 그들에게 앙갚음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교회를 떠난 일을 당신이 원하는 방식대로 바라보도록 모든 사람을 설득할 필요가 없다. 사실, 당신이 무슨 말을 하든 수많은 사람들은 설득되지 않는다. 또 안타깝게도 목사의 부적격한 모습이 더 심하게 드러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설득되지 않는다.이와 관련하여 설득이 불가능한 경우와 진리에 대해 마음이 열려 있는 경우를 서로 구분하여 상대를 이해하면 도움이 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이 다니던 교회에 남아 있는 어떤 교인에게는 당신이 떠난 일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또 어떤 교인은 당신과의 교제를 박탈당했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들이 어떻게 반응하든, 그 반응 때문에 스스로를 괴롭히지 말기를 바란다. 오히려 인내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하라.6. 슬픔 속에서 성장을 꾀하며 앞을 향해 나아가라당신은 교회를 옮길 때 수반되는 정서적인 부담을 질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시간이 흐르다 보면, 예측할 수 없이 분노가 치민다거나 그 감정이 가라앉는 데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또 이전의 친구들이 당신에게 연락을 취하지 않으면 버림받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그래서 가족을 잃어버린 것처럼 슬플 수도 있다. 아마 새로운 교회에도 당신의 마음을 공감해 줄 신실한 교인들이 있겠지만, 그들이라고 당신이 처한 상황을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다.당신이 겪는 슬픔은 이처럼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진행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사랑하는 자들을 먼저 보낼 때 느끼는 슬픔과 같이, 우리는 소망을 가진 자로서 현재의 슬픔을 겪는다. 하나님은 사람의 악한 의도까지도 우리를 위해 선한 결과를 내도록 지금 이 순간에도 배후에서 역사하신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을 사용하여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닮아가게 하신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은 없다. 그러므로 적절한 때에 슬픔의 재 가운데서 일어나, 다시 한번 간절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를 찾길 바란다.원제: Some Counsel for Christians Leaving Toxic Church Environments출처: www.9marks.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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