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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세상이라는 이원론적 신학을 극복하라
by 김상일
2021-02-06
지난 해 12월, 필자의 책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CLC_기독교 문서 선교회)이 세상에 나왔다. 책은 말 그대로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의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그가 자신의 저서 30여 권에서 다루는 각각의 주제를 어느 정도 세세하게 소개하는 일을 목적으로 집필되었다. 하지만 필자가 그 책을 저술한 목적은 단지 켈러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의 큰 그림을 그리고 켈러 사상에 대한 자세한 소개를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필자가 책을 통해서 정말 하고자 했던 말은, 켈러가 추구하고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은 1) 하나님과 2) 그리스도인 개인 및 공동체, 그리고 3) 믿지 않는 이웃(과 그들이 숨쉬며 살아가는 도시 문화) 사이에 어떻게 해야 복음을 통해서 연결과 소통이 일어날 수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묻는 작업을 수반한다는 것이다. 정말 그런가? 켈러의 신학적 비전은 정말로 그런 작업을 수반하고, 그런 질문을 계속적으로 하고 있는가?켈러가 자신의 신학적 비전을 가장 광범위하고도 세밀하게 다룬 '센터처치'를 살펴보면 그에 대한 답을 알 수 있다. 켈러는 같은 책 후반부에서, 실제적인 교회의 사역이 추구하는 바를 네 개의 사역 접점이라는 말로 요약한다. 이 각각의 사역 접점은 교회 공동체의 정체성과 사명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하지만, 켈러가 왜 '센터처치'를 썼는지, 더 나아가 왜 신학적 비전을 말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생각해 보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1. 사람들을 하나님께 연결하는 것 (전도와 예배를 통해서)2.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는 것 (공동체와 제자도를 통해서)3. 사람들을 도시에 연결하는 것 (자비와 정의를 통해서)4. 사람들을 문화에 연결하는 것 (신앙과 직업의 통합을 통해서) (센터처치, 616)이 네 가지 사역 접점은 교회가 어떤 공동체인지를 규정하며, 교회가 왜 세상에 존재하는지, 그 까닭을 설명해준다. 켈러는 연결시키는 공동체가 교회라고 본다. (연결이 저절로 소통을 담지한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연결하고, 사람들을 서로에게 연결하며, 사람들과 도시를, 그리고 마지막으로 사람들과 문화를 연결하는 일이 켈러가 바라보는 교회의 주된 사역이다. 켈러의 신학적 비전은 어떤 목회자든, 어떤 교회든, 각각 처한 목회적인 상황 속에서 이런 네 가지 사역 접점을 어떻게 추구해야 할 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게 해준다. 그러므로 신학적 비전을 찾아가기 위해서 켈러가 제시하는 여덟 개의 질문은 바로 그런 점을 역설한다. 나는 신학적 비전을 형성하기 위해 비슷하지만 좀 더 구체적인 질문들을 제안한다. 우리가 이 질문들에 답을 해나가다 보면, 신학적 비전이 도출될 것이다. • 복음은 무엇이며, 어떻게 현대인의 마음에 다가가도록 이 복음을 제시할 것인가?• 문화는 어떤 모습이며, 우리는 문화에 어떻게 연결되고 어떻게 대항하면서 소통할 것인가?• 우리는 어디에 있는가? (도심, 외곽, 신도시, 시골 등) 그리고 그 점이 우리의 사역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가?• 공공 영역과 문화 생산에 어떻게 그리고 얼마나 그리스도인이 참여할 것인가?• 교회 안의 다양한 사역들(말씀, 봉사, 공동체, 교육 등)을 어떻게 상호 연결할 것인가?• 우리 교회는 얼마나 혁신적이며,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하는가?• 우리 교회는 도시와 지역 안에서 다른 교회들과 어떻게 연결될 것인가?• 기독교의 진리를 어떻게 세상에 제시할 것인가? (센터처치, 28)내 책에서도 얘기한 바 있지만, 이 질문들은 모두 연결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거나, 연결하는 일을 질문의 전제로 깔고 있다. 만약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스스로의 목회적 상황에서 이 질문들에 대답해 보려는 시도를 한다면, 그게 바로 여러분의 독창적인 신학적 비전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독창적인 신학적 비전은 여러분의 교회와 사역에 가장 합당하며 유용한 도구가 되어, 어렵고 복잡하며 때로는 명확한 답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목회적 상황 속에서 여러분이 다른 것들(외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고려, 혹은 교회 성도들이나 주변인들의 압박 등)에 흔들리지 않고 다시 복음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붙잡아 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연결과 소통이 켈러의 신학적 비전에서 본질적인 요소가 맞다면, 그리고 켈러가 말하는 네 가지 사역 접점이 모두 공통적으로 연결과 소통을 말하고 있다면, 켈러는 왜 굳이 자신의 신학적 비전의 틀을 세우는 큰 축으로 ‘복음,’ ‘도시,’ ‘운동’을 선택했느냐는 의문이 남는다. 여기에 대해서 필자는 앞서 언급한 필자의 책에서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에 대한 필자의 대답은 ‘복음,’ ‘도시,’ ‘운동’은 연결과 소통을 이루는 세 가지 주체며, 그 세 가지 주체가 서로 관계 맺는 방식이 바로 연결과 소통이라는 점이다. 켈러가 구축하는 신학적 비전은 궁극적으로 이 세 가지 주체를 연결하고 소통하는 작업이다. 그 세 가지 주체는 각각 ‘하나님’(복음), ‘세상’(도시), ‘교회(운동)’를 상징한다. 혹은 ‘하나님 (복음),’ ‘믿지 않는 이웃 (도시),’ ‘믿는 신앙인 공동체 (운동)’로 바꿔서 표현할 수도 있겠다. 즉 ‘하나님’, ‘이웃,’ ‘나 자신(혹은 교회인 우리 자신)’의 구도가 '센터처치'의 세 가지 축을 이룬다. 교회는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하고 소통하며,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성숙해 가면서 세상에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분의 복음이 어떤 소식인지 소개하고 알린다. 이런 관계 맺음에 연결과 소통은 필수적이다.”(김상일,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 10-11)이렇듯 팀 켈러의 신학적 비전에 연결과 소통이 필수적이라는 사실은 그 자체로 우리의 삶과 사역에 여러 가지 함의를 생각해 볼 수 있게 해준다. 이 글에서는 그중에서 특히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켈러의 신학적 비전이 어떻게 교회와 세상 사이에 이원론적인 관점이 자랄 여지를 그 싹부터 잘라 버리는지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서 마치고자 한다. 우선 이원론이란 무엇인가를 살펴봐야 하며, 교회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대하기 시작할 때 어떤 일이 발생하는지에 대한 켈러의 생각을 들어봐야 한다. 켈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원론은 영적이며 거룩한 것을 나머지 삶과 분리하는 철학이다.… 그래서 교회와 그 활동은 선하고 순수한 것이며, 세속 세계는 악하고 오염된 것으로 보는 이원론이 만연하였다. 이 관점에서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섬기는 최상의 방법은 설교, 전도, 제자 훈련 등 직접적 형태의 사역을 하는 것이다. 이는 기독교가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삶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인 평안과 힘을 얻기 위한 수단으로 대할 뿐이다.”(센터처치, 691-692) 켈러에 의하면, 기독교는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관점을 제공하며, 삶의 모든 활동에 영향을 미치는' 신앙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삶의 어떤 현실도 교회의 정체성이나 사명과 분리해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즉 교회는 세상 어디와도 연결하고 소통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을 가진 목회자와 교회는 절대로 이원론적으로 사역할 수 없다. 앞서 살펴본 사역의 네 가지 접점은 이원론이 연결과 소통을 지향하는 신학적 비전에 자리할 곳이 전혀 없음을 명백히 보여준다. 더군다나 켈러는 다음과 같이 율법주의와 이원론이 얼마나 서로 관련성이 깊은지를 보여주면서, 자신의 신학적 비전이 연결과 소통을 말하는 이상, 교회와 세상을 이원론적으로 구분하는 일은 불가하다는 점을 역설한다. “율법주의적 기독교는 이원론적 기독교로 귀결된다. 사람들이 은혜의 복음을 깨닫지 못할 때, 그들은 바리새인처럼 전례적 경건이나 정결에 집착하는 경향이 생긴다. 만일 우리가 삶의 정결함이나 의로움에 의해 구원된다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교회 담 안에 머물러야 할 동기부여가 생긴다. 비신자들과 그 생각들을 접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과 분위기 속에 머물고 싶은 자극을 받는다.”(센터처치, 692)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일은 율법주의적인 동시에 이원론적일 수밖에 없다. 깨끗한 곳에만 머물면 되며, 거룩한 곳에만 거하면 된다는 생각은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라는 말씀을 정면으로 반박할 뿐 아니라, 예수께서 굳이 왜 이 세상에 내려오셔서 거룩한 바리새인들이 멸시하고 천시하는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거하셨는지를 설명할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켈러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린다. “그리스도인 교회가 구별되어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교회는 또한 주변에 속해야 하며 주변과 분리되어서는 안된다. 이웃들에게 교회가 섬기는 공동체임을 보여주어야 하며, 희생적으로 시간과 재물을 도시의 공익을 위하여 사용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센터처치, 566)연결과 소통의 근원적 동력은 하나님의 복음이며, 복음은 하나님께서 죄로 가득찬 세상을 사랑하셨다는 메시지다(요 3:16). 사랑하려면 만나야 한다. 관계를 맺어야 한다. 연결되어야 한다. 예수께서는 죄인들과 연결되기를 거부하지 않으셨고, 기꺼이 그들과 사랑의 관계를 맺으셨다. 예수께서는 그렇게 함으로써 어떻게 하나님의 사랑이 스스로 율법을 지킨다고 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즉, 자기들의 율법적 의로움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거부한) 사람들을 비껴갔는지, 그리고 바로 그런 율법적 의를 주장하는 사람들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전혀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자책하며 괴로워하던 사람들을 향했는지를 몸소 보여주셨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교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은 명확하다. 교회 안에서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을 나누는 문화를 타파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가? 마치 바리새인들이 그랬듯이 스스로 열심히 자기 의를 붙잡는 대신, 사랑이신 하나님에게서 사랑을 배우고, 사랑을 몸소 드러내신 예수님을 따라서 사랑해야 한다. 율법적 의로움 대신, 교회를 향해서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묵상하고, 하나님께서 어떤 은혜를 베푸셨는지, 또 어떤 은혜를 베풀고자 하시는지, 세상 앞에서 몸소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신학적 비전은, 여러분이 섬기고 사역하는 교회가 어떻게 교회로서 세상과 연결되어야 하는지, 세상에 흡수 당하는 대신, 복음에 기반해서 사랑하면서도 바로 그 사랑 때문에 세상과 구별되는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지를 고민하는 데 버팀목이 되어주며 안내표가 되어준다. 오늘도 이 길을 걸어가는 이 땅의 많은 교회들을 응원하면서, 복음이 한국 교회 안에서 더 풍성하게 드러나게 되어 한국 사회가 하나님의 사랑을 더 깨닫게 되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도한다.
교회
세상
이원론
센터처치
제자훈련
신학적비전
공동체
사역접점
팀켈러
복음도시운동
십자가를 지고 제국을 관통하다
by Nathan Tarr
2021-02-04
시리아 여름의 열기를 피해 한 노인이 족쇄를 찬 채 앉아서 글을 받아적는 이에게 뭔가를 열정적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그의 말은 확신과 긍휼이 섞여 있는데, 마치 아버지가 자녀에게 말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옆방에는 트라야누스 황제(emperor Trajan)의 군단 소속 군사 열 명이 하루의 피로를 풀며 술을 마시고 있다. 안디옥에서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가는 길은 비록 긴 여정이었지만, 그래도 군인들에게는 그게 다키아 전쟁(Dacian war)으로 다시 보내지는 것보다는 나은 길이었다. 서기 107년 8월이다. 죄수의 이름은 이그나티우스(Ignatius)고, 겨우 2주 전, 체포되기 전까지 그는 안디옥의 주교였다.사도 이후이그나티우스가 콜로세움으로 가고 있던 당시 교회는 불안정한 상태였다. 이그나티우스의 멘토였던, 사도 요한이 얼마 전에 죽었고, 이제 역사상 처음으로 부활하신 예수를 직접 본 증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도적 권위를 가지고 교회를 위로하고 교회가 가야 할 길을 지도해줄 지도자가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위로와 지도에 대한 필요성은 매우 컸다. 로마 사회는 교회 밖에서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로마 신들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로 소외시키고 있었고, 당국은 기독교 예배에 있다는 이상한 의식(rites)에 대한 소문을 한층 더 강화된 박해로 대응하고 있었다. 외부에서 오는 압력은 그 도를 따른다고 주장하는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 결함을 노출시킨다. 교리적 차이가 스며들기 시작하면서, 성육신의 진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거나(Docetism, 가현설, 역자 주: 예수의 몸은 환상일 뿐이라는 영지주의 교리) 또는 모세의 율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에비온파의 주장(Ebionism)이 들어오기도 했다. 정도에서 벗어난 행동을 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쓰면서도 여전히 죄를 짓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지 않았다. 교회가 로마 제국 전역으로 계속 확장됨에 따라서 교리와 삶의 양식에서 오는 오류는 오히려 배가되었다. 이 모든 문제는 바로 권위가 사라지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질문에 대답하던 과거의 방법은 이제 사라졌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셨고 사도들은 다 순교했다. 영속적인 새로운 권위는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신앙에 대한 고백적인 합의, 성경 표준에 대한 인정, 그리고 성경적인 교회 구조 등등 그 어떤 것도 결정된 게 없는 상태였다. 마지막 일곱 개 편지막 일흔을 넘긴 나이의 이그나티우스가 로마로 가는 중에 일곱 회중에게 보낼 편지를 씀으로써 교회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순간이 펼쳐진다. 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그의 사역은 유성으로 비유되었다. 즉 이그나티우스의 인생에서 가장 밝은 순간은 바로 '화염에 쌓여서 죽기 직전에 주변을 아주 잠깐 밝게 비추는 바로 그 때'가 된 것이다(사도신앙의 전달자, Apostolic Fathers, 166).그러나 이그나티우스는 순교자로서의 역할보다는 목사로서의 역할에 훨씬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글을 쓰면서 자신의 죽음보다 교회가 지향할 제자도에 더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므로 그를 베틀의 북(베틀에서 씨줄을 날줄 사이에 좌우로 넘으면서 천을 짜는 기구 - 편집자 주)과 같은 직조기로 생각할 때, 우리는 그를 한층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닮는 것(Christlikeness)이라는 실을 자기 뒤에 묶고, 그는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면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지향할 아름다운 진리로 교회를 하나로 묶을 천을 짜고 있는 것이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한 고뇌 뿐 아니라 교회에 대한 근심이라는 실을 가지고 그가 지금 짜고 있는 패턴은 최소한 다섯 가지 방향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집중하고 있다. 1. 십자가의 가지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기본적으로 십자가는 주 예수의 지상 사역의 중심이었다. 이그나티우스는 이 세상에서 예수 삶의 본질을 담아낸 것으로 십자가를 제시했다. 예수가 수동적으로 순종한 민감한 그 순간은 예수가 평생동안 지향했던 겸손의 완성이 되었다. 예수는 처음부터 끝까지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였다(사 53:3).'모든 일에'(히 4:15) 걸쳐서 예수가 짊어진 고통에 대한 넓은 시각은 이그나티우스 뿐 아니라 그가 편지를 쓴 사람들에게까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할 수 있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다.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예수의 말씀을 놀랍게 적용하면서 이그나티우스는 이렇게 썼다. “누구라도 아버지가 심은 사람이라면, 그 사람은 십자가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길, 또 우리 안에 그분의 생명을 품는 길은 순교자로서만이 아니라 제자의 평범한 삶을 살면서도 “그분의 고난 속에서 함께 죽는 것이다”(3.1).2. 어리석을 정도로 다른 희망두 번째로, 십자가는 그리스도 복음 선포의 중심이다.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라는 복음 선포에서 '열정은 우리에게 분명해졌으며' 따라서 우리는 당연히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야 한다(6.7). 이그나티우스는 갈보리에서 드러난 구원의 힘을 찬양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죽음을 피하게 되었다.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죽었기에 우리는 다시 태어날 수 있었다. 더욱이 구속받은 자의 공동체로서 교회의 목회 생활은 십자가에 의해 정해진다. 이그나티우스는 산 돌을 하나님의 성전으로 들어올리는 크레인으로 십자가를 묘사한다(1.9). 주님의 마지막 만찬 속 부서진 예수의 몸과 흘린 피 옆에 정기적으로 모여서 개혁하고(1.20),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선포하는 이들은 바로 십자가로 인한 회중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회는 십자가의 약하고 무모한 공격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자 하는 사람들을 거부해야 한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말을 하면 그 사람 앞에서는 귀머거리가 되어라. 예수는 진짜로 태어났고 진짜로 박해를 받았고 진짜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고, 진짜로 다시 살아났다”(3.9). 그렇지 않다면, 즉 우리의 희망이 이 세상의 희망에 비교하여 명백하게 다르지 않거나 '어리석을 정도로' 다르지 않다면, 누군가는 예수를 육체를 입은 하나님임을 부인함으로써 “나를 찬양할지는 몰라도 내 주를 모독하는 것이다”(6.5).3. 가장 미움받을 때 가장 위대해진다세 번째로, 십자가는 기독교 제자도의 핵심이다.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서 죽었듯이 나도 그를 위해 죽으려고'(4.6) 지금 로마로 가고 있는 것은 맞다. 그의 긴 여행은 이제 배움의 현장이 되었다. “나는 이제야 진짜 제자가 되는 것을 배우고 있다”(1.3). 그러나 기독교 제자도는 단지 순교라는 영적 은사보다 더 깊고 더 광대하다. 더 광대한 이유는 제자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다 적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세상의 인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침'을 몸에 지녀야 한다(2.5). 더 깊은 이유는 십자가가 우리의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일단 우리가 '예수님의 피를 통한 새 생명을 얻게 되면', 우리의 새롭고 또 '의로운 본질'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여주신 십자가를 우리 속에서 드러내는 것을 기뻐하도록 만든다. 우리 속에 있는 그리스도의 영이 우리로 하여금 세상이 아닌 그를 더 닮고 싶도록 만든다. 세상의 분노를 향해서는 친절하라. 세상의 자랑을 향해서는 겸손하라. 세상이 주는 비난을 향해서는 기도하라. 세상의 오류를 향해서는 믿음 안에서 굳건하라. 세상의 잔인함을 향해서는 문명화되어라. 세상을 닮으려고 애쓰지 말라…. 대신, 우리 주님을 닮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 속에서 사탄이라는 잡초가 뿌리내리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더 많은 욕을 먹었고, 더 많이 속았고, 더 많이 거부당한 우리 주님을 바라보자(1.10). 그는 로마에 있는 교회에서 이렇게 썼다.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미움을 받을 때 (예수님처럼) 가장 위대해진다”(4.3).4. 하나님으로 가는 길네 번째로, 그리스도와 교통하고 싶은 이그나티우스에게 십자가는 그 중심이 되었다. 그가 쓴 편지 속에서도 가장 놀라운 부분은 로마에 있는 신자들에게 괜히 하지 않아도 될 걱정 때문에 자신의 임박한 순교를 방해하지 말라고 호소하는 장면이다. 그리스도가 삶과 죽음을 거꾸로 뒤집어놓은 사실을 생각하면서, 그는 이렇게 썼다. “생명으로 들어가는 나를 방해하지 말라. 그리고 나와 같은 죽음을 원하지도 말라”(4.6). 콜로세움으로 가는 이그나티우스의 길은 눈에 보이는, 하나님의 면전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런 길 위에서조차 고난 속 그리스도와 나누는 교제는 그의 몸을 휘감은 사슬까지도 '그리스도 안에서' 가지고 가는 '영적 진주'로 바꾸었다.바로 이런 점에서 이그나티우스는 자신을 우리가 본받아야 하는 모범으로 만든다. 우리도 “망치질을 당하는 모루처럼 굳건하게 서 있어야 한다”(7.3). 우리도 항구를 향해서 가는 풍랑 속의 배다. 우리도 “하나님 안에서 부족함이 없기 위해서 세상에서는 많은 것이 부족하다”(3.5). 그럼에도 우리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박해받는 교회가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그 가운데 함께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리스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6). 참으로, “그분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7.1). 그의 십자가 때문에, 우리는 그의 고난 안에서 죽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부활 때문에, 고난은 탄생의 아픔에 불과하게 되었고, 무덤은 이제 자궁이 되었다. 그리고 죽음은 온전하고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이 되었다. 5. 성경이 열리다다섯 번째로, 21세기를 사는 제자들이 이그나티우스가 그리스도를 따른 것처럼 그를 따르려고 할 때, 아마도 가장 관련성이 높게 적용 가능한 것은 이 부분이 아닐까 싶다. 십자가는 그의 성경해석의 중심이 되었다. 십자가에 달린 메시아라는 개념이 이스라엘 성경(구약 성경)에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는 비난을 거부하는 한편, 이그나티우스는 복음 속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지혜를 읽을 수 있는, '바꿀 수 없는 기록 보관소'로 이해했다. 구약 성경을 올바로 이해할 수 있는 렌즈는 바로 그리스도가 누구인가와 그가 이루신 일을 보는 것이다(5.9). 1세기 교회나 21세기 교회나, 하나님의 책이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열쇠를 통해 그리스도를 제대로 보여줄 때만, 그리스도가 온전히 드러나고 선포되고 또 경배받으며 그의 제자를 거느리게 된다. 십자가의 그리스도이그나티우스의 사례를 생각하면서 우리는 그가 보여준 신실한 증거로부터 용기를 얻게 된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한 간증은 그가 콜로세움에 들어섰을 때 모래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지지 않았고, 그 대신 그가 쓴 일곱 편지를 통해서 교회를 살렸다. 성령님의 인도로 정경이 확정되었을 뿐 아니라, 교회가 만든 신조를 통해 바른 믿음의 길이 명확하게 요약됨으로써 지켜야 할 바른 신앙의 도리를 알게 된 것에 대해서 우리는 기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제국을 가로질러 가는 내내 이그나티우스가 짊어졌던 십자가에 또 그가 교회에 요구했던 그 부름에 주목해야 한다. 여기에 열거된 몇 가지 사실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에서,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우리의 희망, 기쁨, 그리고 생명이다. 원제: He Carried a Cross Through the Empire: IGNATIUS OF ANTIOCH (35–107)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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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역사
초대교회
목회자의 윤리적인 문제,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by Jim Davis
2021-01-26
내가 속한 교회의 목회자가 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교회 생활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아마도 부적절한 행동을 한 사람에게 맞서는 일일 것이다.더구나 그 사람이 만일 당신의 목회자라면 어떻겠는가? 만일 당신이 교회의 지도자에 대해 걱정하는 점이 있거나 혹은 윤리적인 문제가 있다는 확실한 정보가 있다면 어떻겠는가? 침묵하기보다 교회에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을 할 수 있을까? 성경은 목회자의 잘못을 지적하는 일에 대해서 어떤 지침을 제공해 주고 있는가?당신의 마음을 먼저 점검하라누군가의 잘못을 추궁할 때는 언제나 우리 자신의 동기를 먼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형제 눈 속에 티를 빼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 눈 속에 들어 있는 들보를 먼저 빼라고 가르치신다(마 7:1-5). 이 말은 상대의 잘못을 지적하지 말라는 의미가 아니다. 상대에게 맞서기 전에 우리 자신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라는 말씀이다. 바울이 “장로에 대한 고발은 두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딤전 5:19)라고 한 이유는 질투나 악의에 찬 한 명의 교인으로부터 장로들을 보호하기 위해서다.스스로 이러한 질문을 해보라. 혹시라도 내 마음에 먼저 다루어야 할 질투가 있는가? 비난할 만한 성경적인 근거가 있는가? 나의 목표가 이 사람을 회복시키기 위함인가 아니면 그 사람을 허물어 버리기 위함인가? 교회의 번영을 보기 위함인가? 꼭 내가 언급해야 하는 문제인가?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경우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경우는 개인적인 것과 일반적인 것이 있다. 목회자가 당신에게 개인적으로 상처를 주었는가? 아마도 그가 신뢰관계를 깨고 당신에 대한 소문을 냈거나 당신을 묵살했거나 도움이 필요할 때 홀대를 했을 수도 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에서 명백하게 말씀하신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마 18:15)라고 말이다. 예수님은 만일 그가 듣지 않으면 누군가를 데리고 가라고 지시하신다(마 18:16). 당신이 지금 상대하는 사람은 당신의 목회자이므로, 교회의 장로나 다른 지도자와 함께 가기를 제안한다.이때 다른 이의 일에는 참견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 목회자가 개인적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것을 당신이 안다면, 당사자에게 그 문제를 말하게 하라. 그들이 수줍어하거나 두려워하면, 그 과정에 그들과 동행하되 그들이 말할 때 그들 옆에 서서 지지해 주라.목회자로서의 문제가 아닌 갈등의 두 번째 경우는 좀 더 일반적인 문제이거나 본성적인 죄에 관한 것이다. 아마도 당신이 크리스천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위를 하는 목회자를 목격했지만 그 잘못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었을 수 있다. 염려되는 부분이 그의 가르침이나 교리적인 문제일 수 있다. 목회자가 교만으로 가득하여 그에게서 겸손의 모습을 찾기 어려울 수도 있다. 그의 생활 양식에 문제가 있거나 관계가 부적절할 가능성이 잠재해 있을 수 있다. 히브리서 12장 15-16절은 우리에게 서로 살피라고 가르친다. 당신의 목회자도 다른 사람과 똑같이 이 부분이 필요하다. 그에게 직접 가서 당신이 목격한 것에 대해 말하고 그가 받은 소명을 그가 잘 이루기를 소망한다는 당신의 마음을 전하라. 당신이 그의 마음을 다 아는 것이 아니므로, 행동에 대한 그의 동기를 추측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일반적으로 볼 때 그의 행위가 어떻게 보일 지와 당신이 목격한 특정 상황에 대해서만 말하라. 그가 당신의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의 다른 지도자에게 알려 그들이 이 일에 관여하게 하라. 그리하여 만일 문제의 목회자가 자신의 이러한 부적절한 범행을 알아차리고 회개하면 하나님을 찬양하라. 목적은 회복이지 벌을 주는 것이 아니다. 그 행위의 무게감에 따라 간단한 대화로 그는 당신의 개입에 감사하고 바른 방향으로 옮겨갈 수 있다. 좀 더 심각한 행위의 경우에는 교회 지도자들의 감독 하에 회복을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어느 쪽이든 당신은 교회를 축복한 것이다. 목회자로서의 문제가 되는 갈등의 경우성경에 명시되고 있는 장로의 자격을 근거로 목회자로서의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딤전 3:1-7; 딛 1:5-16)에 대해 정당하게 혐의를 제기하는 것이라면, 당신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이 문제에 대해 알려야만 한다. 권위 있는 사람에 대해 이와 같이 혐의를 제기하는 것 자체로 당신은 본질적으로 위협을 느낄 수 있겠지만, 하나님은 교회 안에 당신 곁에 서서 지지해 줄 다른 지도자들을 주셨다. 두세 명의 증인이 필요하다고 한 디모데전서 5장 19절 말씀은 무슨 의미일까? 다른 증인을 찾아서 당신의 부담을 줄이라는 말씀이다. 바울은 교회 지도자들에게 고발을 받아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가르치고 있다. 당신이 증인들을 찾을 수 있으면 이러한 고발은 금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성적으로 부적절한 행위나 학대를 하는 목회자는 희생자들과 격리시키고 그가 혼자라는 생각을 하게 하여 결국 더이상 그 죄를 지속하지 못하게 만든다. 한번 고발이 이루어지면 교회 지도자들은 성경을 근거로 추가 증인들을 찾아내야 할 책임이 있다(증인을 찾는 일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다).마태복음 18장에 나오는 것처럼 해당 목회자에게 직접 가는 것은 어떤가? 마태복음 18장은 모든 상황에 쉽게 적용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말씀은 평신도 중 한 명이 다른 한 명에게 직접 지은 죄를 다루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15절).만일 목회자로서 문제가 되는 죄를 알고 있는데 그것이 성적으로 무분별한 행위, 횡령 및 권위 남용과 같이 당신에게만 개인적으로 지은 죄가 아니라면, 당신은 홀로 그 목회자를 맞서지 말아야 한다. 디모데전서 5장은 이러한 상황에서 목회자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쳐 주고 있다. (물론 이 경우에도 증인들이 요구되는 것은 불의의 비방으로부터 목회자를 보호하기 위함이다.) 신실한 장로들은 책임을 지고 그 목회자의 사례를 점검하고 그의 죄에 대해 맞서야 한다. 회중의 목자로서 그들은 양떼 중 연약한 자들을 돌보고 보호해야 할 책임이 있다. 목회자의 행동이 불법적이라면?교회 지도자들은 예외 없이 이 사례를 당국에 넘겨야 한다. 교회 자체 조사는 적절하지 않으며 특히 누군가 위험에 처해 있으면 더욱 그렇다.하나님은 우리에게 권위자들을 주셨고, 혐의가 있는 사람이 누구든지 상관없이 우리는 그 사실을 알게 된 즉시 우리 가운데서 행해지고 있는 범죄에 대해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내 말이 전달되지 않는다면?슬프게도, 목회자가 성공하고 있고 교회가 성장하고 있으면, 교회 지도자들은 '불편한' 고소 등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다. 당신의 고발이 무시되거나 교회의 평화 유지를 위해 죄를 덮고 넘어가야 한다는 말을 듣는다면, 당신의 교회 지도자들은 당신과 맺은 언약을 깨는 것이며 스스로 리더의 자격이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이쯤 되면 당신은 몇몇 방안을 선택할 자유가 있다. 당신이 속한 교단에 권위 있는 기관과 전체 교회에 이 문제를 제기하거나 교회를 떠날 수 있다. 교회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책무를 포기하면 책임이 따르며 대부분의 정관에는 이를 집행할 수 있는 규정이 있다.죄는 드러나게 된다목회자의 죄는 언젠가는 드러나게 된다. 심판의 날에는 반드시 드러날 것이다. 하지만 그 죄가 다른 사람을 계속 해하는 것을 막으려면 침묵하지 않기를 권한다. 교회 전체가 바로 가게 하는 짐을 당신 홀로 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당신이 속한 교회 지도자들이 책무를 행하도록 당신이 기여하고 교회를 잘 섬겼다는 자긍심으로 하나님과 교회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란다.윤리적으로 문제가 있는 지도자에 맞서는 일은 항상 어렵지만 하나님이 당신에게 말씀을 주시고 용기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교회를 당신이 아끼는 것보다 더 아끼신다는 것을 기억하라.원제: What Should I Do If I See Moral Failings in My Pasto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교회
교회생활
목회자의윤리적부패
목회직부적격행위
장로의자격
딤전3:1-7
딛1:5-16
형제눈속의티
우리눈속의들보
이 시대 복음주의라는 이름의 의미는?
by Trevin Wax
2021-01-23
'복음주의'라는 이름은 미국에서 특히 논쟁의 중심에 있는데, 선거철을 맞아 '복음주의 투표'의 의미와 중요성이 대두되었기 때문이다. 복음주의는 무엇인가? 그 활동 상태는 어떤가? 최근에 나온 책들은 백인 복음주의자들을 가짜 기독교 민족주의와 연결시킬 뿐 아니라 당파적으로 치우친 정치에 지나치게 관여하거나 가부장제를 드러내는 지나친 표현들과도 연결시키고 있다.데이터는 다르지만 다양한 설문 조사는 흥미로운 질문들을 제기한다. - (주로 소수 민족 교회에서) 복음적 신앙을 고수하면서도 '복음주의 정체성'은 (아마도 이 용어가 주는 정치적 의미 때문에) 주장하지 않는 많은 기독교인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 이와 반대로,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지만 교회에 거의 출석하지 않을 뿐 아니라 핵심적인 복음주의 교리를 고수하지도 않는 수많은 미국인에게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 지난 세기 중반에 시작된 리뉴얼 프로젝트(분리주의 근본주의자와 사회적 복음을 주장하는 자유주의에 대응하려는 운동)가 이제 미국에서 사실상 사회-정치적 관점과 동의어가 되어버린 지금 상황에서 '복음주의'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 우파, 좌파와 관계없이, 기독교인 스스로가 궁극적인 권위로 옹호하는 성경보다 오히려 문화적 배경과 정치 철학에 더 큰 영향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현재 상황에서 복음주의 교회에 출석하는 신자들이 많은 사실이 내포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 폴라 화이트(Paula White)에서 팀 켈러(Tim Keller), 그리고 존 파이퍼(John Piper)에서 로버트 제프리스(Robert Jeffress)에 이르기까지 '브랜드'가 중요한 시대에 '복음주의'라는 이름에 굳이 연연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상황은 일부 복음주의자들로 하여금 복음주의라는 용어 자체를 조롱하게 만들고 있다. 왜 이 이름을 생략하지 않는가? 왜 우리 자신을 그냥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면 안 되는가? 그게 아니면, 복음의 사람이라고 불러도 되지 않을까? 그것도 아니라면, 우리가 물려받은 문화 간, 교파 간 리뉴얼 무브먼트의 아름다움을 묘사하는 다른 좋은 용어를 찾을 수는 없을까? 그러나 더 나은 방법은 '복음주의' 정체성을 벗기기 위해 너무 빨리 서두르기보다는 그 전에 한 발 물러서서 시간적 관점과 지리적 관점에서 이 모든 상황을 관찰하는 것이다. 시간적 관점먼저 역사적 관점에서 몇 가지를 살펴보자.‘누가 복음주의자인가?(Who Is An Evangelical?)’를 쓴 토마스 키드(Thomas Kidd)는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당파적, 민족적' 정의가 '역사적으로 독특하다'고 믿는다. 복음주의는 처음부터 다 민족적이었다. 백인만이 '정상적인' 복음주의자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최근 수십 년간 드러난 운동의 정치적 요소가 복음주의적 정체성의 핵심을 정의하는 것도 아니다. 복음주의의 역사를 면밀히 살펴보면 그 운동은 현재 이 순간에 정의될 수 없고 또 정의되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우리 모두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헌신,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 사역에 대한 초점, 전도 사역에 쏟은 열심, 그리고 각종 사회적 활동으로 이름을 알린 수많은 형제 자매들의 연결선상에 있다. 우리는 여러 세대에 걸친 풍부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심지어 미국의 신 복음주의 운동보다도 앞서는). 이런 역사 모두를 다 너무도 성급하게 '복음주의'라는 용어로 깎아내리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실한 기독교의 모범을 보였던 과거의 사람들과 단절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리적 관점이제 전 세계를 향해 시야를 넓혀보자. 최근에 일어난 엄청난 변화를 인정하지 않고는 현재의 복음주의에 대해 말할 수 없다. 사무엘 에스코바(Samuel Escobar)는 북쪽에서 시작해 '전 세계의 남쪽'으로 진행되는 기독교 전파의 지리적 변화를 지적한다. 오늘날 세계의 종교 지도를 살펴보면 20세기 초의 상황과 21세기 초의 상황 사이에 뚜렷한 대조를 발견할 수 있다. 스코틀랜드 선교 학자 앤드류 월스(Andrew Walls)는 “기독교 세계의 무게 중심이 남쪽으로 크게 이동했다”고 설명했다.지나 줄로(Gina Zurlo)는 ‘세계의 복음주의’(Evangelicals Around the World)에서 구체적인 수치를 보여준다. - 복음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는 (브라질, 에티오피아, 나이지리아, 인도네시아에 있는 가장 큰 다섯) 교단에 속한 인원을 계산하면, 약 1억 5,060만 명이 된다. - 복음주의 교파 소속 유무에 관계없이 자기 자신을 복음주의자로 인식하는 개인을 계산한다면, 1 억 3,490만이다. - 핵심이 되는 신학적 사실에 동의하는 사람들을 (선교 단체인 Operation World가 사용하는 방법으로) 계산하면, 그 숫자는 5억 4,590만 명이다!이런 숫자가 말하는 것은 무엇인가? 줄로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떻게 정의하는가와 관계없이 복음주의는 분명히 세계적인 운동이다. 복음주의의 발상지인 유럽은 현재 3.8퍼센트로 세계에서 가장 비복음주의적인 대륙이다.”복음주의는 세계적인 현상이다. 이런 현실은 내가 공산주의 이후 동유럽에서 복음주의 교회를 섬기며 보낸 5년의 경험을 통해서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지금 미국에서 직면한 특수한 도전과 정치적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볼 때 복음주의 운동의 한 부분에만 영향을 미칠 뿐이다.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hristianity Today)’에서 티시 해리슨 워런(Tish Harrison Warren)은 우리의 정체성이 단지 미국에서 일어나는 일을 통해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글로벌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강조한다. 기독교 운동의 선봉대는 미국 해안에 있지 않다. 따라서 북미 문화는 교회의 미래를 결정하지 않는다. 서구의 세속화, 또는 서구의 기독교 주변화가 교회 성장을 제한하는 힘은 허리케인을 막거나 계절을 바꿀 정도로 엄청난 것이다. 그러나 100년 전까지만 해도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글로벌 기독교의 고유한 성장과 부흥은 우리가 두려워 할 필요가 없음을 상기시킨다. 하나님은 전 세계를 대상으로 끊임없이 일하고 계신다. 글로벌 운동으로서의 복음주의를 고려할 때 북미에서 목격하는 복음주의와 연관된 정치적 의미 때문에 복음주의 자체를 무시하려는 것이 얼마나 근시안적인지 알 수 있다. 워런의 도전은 그래서 일리가 있다. 나는 복음주의자들을 생각할 때 태국에서 교회를 개척하던 싱가포르인, 우간다에서 난민을 섬기던 르완다 가정, 나이지리아 신학생, 또는 남아메리카의 에반젤리코스(evangélicos, 라틴 개신교인을 일컫는 용어)를 떠올린다. 이제 우리는 교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논의에서 이러한 목소리를 최우선에 그리고 중심에 두어야한다. 그들이야말로 지구상 복음주의자들의 대부분을 구성하는, 우리의 미래이자 현재다.더 큰 질문이처럼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시야를 넓힐 때, 적어도 내게 있어서 이 글의 시작 부분에서 나열한 모든 도전적인 질문을 다 덮어버리는 새로운 질문에 직면하게 된다. - 우리는 왜 '복음주의' 속에 담긴 미국만의 특징이 '복음주의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데 과도한 영향을 미치도록 계속 놔두어야 하는 걸까? 미국인이 복음주의라는 용어의 유일한 주창자도 아니고 또 이제는 핵심적인 주창자도 아니다. 한 국가에서 일어나는 사회 정치적 논쟁이 전 세계적 운동을 정의하게 만드는 것은 세계에 대한 좁은 시각이며 솔직히 말해 미국 중심의 세계관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다음과 같은 가치를 공유하는 글로벌 복음주의자로서 전 세계의 형제 자매들과 마음을 함께 하고 싶다.(1) 복음주의 전통에서 얻을 수 있는 모든 선한 것에 감사한다.(2) 세계적으로 볼 때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교회의 성장에 흥분한다.(3) 성경의 권위, 복음의 중심성, 전도의 긴급성, 그리고 복음이 가진 세계를 변화시키는 능력에 헌신한다.(4) 리뉴얼 프로젝트를 갱신함으로써 교회가 복음과 성경에 비추어 계속해서 새로워질 수 있도록, 그리고 그런 새로움이 미국에서도 일어날 수 있도록 헌신한다. 나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표현하거나 또는 복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마다 나는 그 용어를 어느 한 지역 또는 편향된 정치적 의미를 초월하는, 역사적이고 세계적인 의미로 말한다는 점을 꼭 명시하곤 한다. 복음주의의 글로벌 운동이 제대로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정치로 인해 종종 왜곡되는 미국 중심의 정의(definition)를 뛰어넘는 새로운 모색이 필요하다. 물론 복음주의라는 용어가 가진 세계적인 포괄성을 포용하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에게 전 세계의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님의 기쁜 소식인 복음을 알리는 것이다. 원제: The “Evangelical” Label Doesn’t Belong to the U.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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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by Michael J. Kruger
2021-01-15
우리는 수많은 진리의 가설로 가득한 세상에 살고 있다. 매일 우리는 무엇인가는 참이고 그 밖의 다른 것들은 거짓이라는 외침의 공세를 받으며 살아가며, 무엇을 믿어야 하고 믿지 말아야 할지에 대해 듣는다. 오직 한 가지 방식으로만 행동해야 하며 다른 방식으로는 하지 못하도록 요구 되기도 한다. 오프라 윈프리는 자신이 발행하는 월간지 칼럼에서 우리의 삶과 관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소개한다. 뉴욕 타임즈의 사설란은 정기적으로 오늘날의 큰 도덕적, 법적 혹은 공공 정책 문제에 어떤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 한다. 영국의 무신론자이자 진화론자로 알려진 리처드 도킨스는 우주 내에서 우리의 역사적 기원과 위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지를 소개한다. 우리는 이 모든 주장을 어떻게 걸러내야 할까? 사람들은 관계, 도덕, 하나님, 우주의 기원 및 기타 중요한 질문 등에 어떤 답을 내려야 할지를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러한 질문들에 답변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표준, 기준, 혹은 규준이 필요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절대적인 권위가 필요하다. 비록 스스로 인식하지는 못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호소하는 대상에 대해 어떤 절대적인 규범을 가지고는 있다. 어떤 이들은 이성과 논리에 호소하여 논쟁거리들을 판단한다. 어떤 이들은 경험에 의존하기도 한다. 또 다른 이들은 자기 자신 즉, 어떤 대상에 대한 자신의 주관적인 감각을 선호하기도 한다. 비록 이들 각각의 접근 방식에는 어느 정도의 진리가 존재하기는 하지만, 기독교인들은 역사적으로 이 모든 것들을 지식을 위한 절대적 기준으로서 거부했다. 대신,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절대적인 규범으로서 합당하게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한 가지만을 용인했는데 이는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 자체보다 더 높은 권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물론 우리가 논란이 되는 진리의 주장들의 도전을 마주하는 최초의 세대는 아니다. 사실 아담과 하와가 태초에 그러한 딜레마에 직면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먹게 되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명확하게 말씀하셨다(창 2:17). 반면에 뱀은 아담과 하와에게 정반대로 이야기 했다. “너희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창 3:4). 아담과 하와는 이 논란이 되는 두 주장을 어떻게 판단해야 했을까? 경험주의에 따라서? 합리주의에 따라서? 그들 자신에게 옳다고 판단되는 기준을 따라서?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간절히 붙잡아야 할 유익한 기준은 오직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해주셨던 말씀 뿐이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나님의 계시를 바라보는 것 대신에 하와는 더 면밀히 알아보는 쪽으로 결정했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창 3:6). 사실, 아담과 하와가 과일을 먹은 것 자체가 타락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본질적으로 타락이란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삶의 절대적인 기준인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했다는 사실에 대한 것이다. 하지만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절대적인 기준이라면, 다음의 질문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디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고 찾을 수 있는가? 물론 이 문제는 종교개혁의 핵심이 되었던 논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로마 가톨릭 당국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삶과 교리의 절대적 표준이 된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도 이 말씀을 성경 밖에서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로마는 세 가지 측면의 권위를 주장했는데 이는 성경과 전통과 교도권을 포함한다. 이 삼중 권위의 가장 핵심이 되는 요소는 바로 교도권(Magisterium)으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칠 수 있는 직분을 의미하며 주로 교황에게서 나타나는 것이다. 교황이 사도 베드로의 후계자로 간주되기 때문에, 그의 공적 선언(Ex Cathedra 혹은 성좌 선언[from the chair]이라고 불린다)은 곧 하나님 그분의 말씀으로 간주된다.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교회를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종교개혁 운동가들은 이 부분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 반대했다. 그들은 그리스도 이전에(히 1:1)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다양한 방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달하셨던 것을 인정한 반면, 성자 예수님 안에서 종결하신 계시의 말씀(히 1:2)이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 여전히 지속되어 질 것이라고 더 이상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한다. 성경은 사도의 직분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구속사적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것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엡 2:20). 사도들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활동에는 주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증거하며 가르치고 적용하는 권세를 교회에 부여하는 것을 내포한다. 따라서 사도적 가르침이 영구적으로 구체화 된 신약 성경의 기록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계시의 최종판으로서 드러나야 한다. 구약성경과 더불어 신약성경만이 유일무이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르게 인식되어야 한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즉 성경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렇기 때문에 성경만이 삶과 교리를 위한 무오한 규범이라는 고백은 종교개혁의 불을 붙이기 위한 연료를 공급해 주었다. 진정 이 고백은 종교개혁의 형상인(formal cause)으로 여겨졌다. (반면, 오직 믿음[Sola Fide]은 질료인[material cause]이었다.) 이 교리에 대한 의견은 마틴루터가 그의 가르침을 철회하라는 요청을 받은 이후 보름스 의회(1521년)에서 그가 했던 유명한 연설 중에 구체화 되었다. “내가 성경의 증거와 명백한 이성에 의해 설득되지 않는 한(사실 나는 명백히 교황이나 공의회가 종종 잘못을 저지르고 서로 상반되었기 때문에 그들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인용했던 성경말씀에 묶여 있으며, 내 양심은 하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내 자신의 양심에 거슬러서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않고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하나님이여 나를 도우소서. 아멘”루터에게는 성경이, 오직 성경만이, 우리가 믿는 것의 최종 결정권자였다. 물론, 많은 기독교 핵심 고백들과 마찬가지로, '오직 성경'(Sola Scriptura) 교리는 종종 잘못 이해되거나 적용되기도 했다. 안타깝게도 어떤 이들은 오직 성경 교리를 “나, 하나님, 그리고 성경” 형태의 개인주의를 정당화하는 용도로 사용하기도 했으며, 이때 교회는 진정한 권위를 드러내지 못하며 말씀을 적용하고 해석할 때 교회의 역사는 고려되지 않았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교회들은 교회의 풍성한 전통과 신조, 그리고 신앙고백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되어 버린 반역사적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들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교리의 의미를 오해하여 성경을 유일하면서 무오한 권위로 이해하기보다는 단지 유일한 권위라고만 생각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한 개인주의적 접근은 실제로 그것이 보존하고자 하는 오직 성경 교리를 약화시킬 뿐이다. 신자 개인의 자율성을 강조함으로써 성경이 의미하는 바에 대해서는 결국 사적이고 주관적인 결론만 남게 된다. 개인의 권위로서 간주되는 것은 결코 성경의 권위가 아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성경같은 교리가 왜곡될 것을 인식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와 반대로, 그들은 교부들, 교회 회의, 그리고 신조와 신앙고백서에 의존하는 일에 열심을 냈다. 이러한 역사적 뿌리는 정통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일 뿐만 아니라 겸손함을 유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대중의 인식과는 다르게, 개혁자들은 그들 스스로 어떤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있다고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교회가 원래부터 믿어 온 것이었으나 후대에 오해되고 왜곡되어 버린 매우 오래된 무엇인가를 회복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종교개혁자들은 혁신가들이 아니라 발굴가들이었다.오직 성경 교리가 우리를 보호한다는 입장에 대항하는 다른 극단주의자들도 존재한다. 오늘날 많은 교회의 개인주의적이고 반역사적인 태도를 우리가 피하기를 원하지만, 오직 성경 교리는 신조와 신앙고백서 혹은 기타 인간이 기록한 문서(또는 개념)를 과도하게 수정하거나 성경의 수준까지 끌어 올리는 것으로부터 우리를 보호한다. 우리는 언제나 로마교회가 저지른 동일한 실수를 저지르지 않고, 우리가 “전통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수용하지 않도록 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전통주의”는 성경이 말씀하지 않는 부분까지 그리스도인의 양심을 속박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오직 성경 교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의 보호자다. 하지만 오직 성경 교리에 대해 우리가 마주하는 가장 큰 위험은 그것을 오해하는 것이 아니라 망각하는 것이다. 우리는 교리를 16세기 논쟁(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사이에 있었던 옛날의 논쟁이며 오늘날과는 무관한 흔적)이라는 의미로 단순하게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현대 개신교 교회들은 그 어느 때보다 지금 이 교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종교개혁의 교훈은 광범위하게 점차 잊혀졌고, 다시 말하지만 교회는 성경 밖의 절대 권위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교회를 다시 오직 성경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우리는 교리 그 자체를 가르치기만 해서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물론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지만 말이다.) 대신, 우리가 교회를 되돌리기 위한 중요한 방안은 진정으로 성경만을 설교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교회를 변화시키고 개혁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오직 성경에 대해서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증명해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설교해야 한다. 우리가 선호하거나 회중이 듣고 싶어하는 부분만을 선별적으로 골라내서는 안된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만을(Sola Scriptura) 전파해야 하며, 또한 반드시 모든 말씀(Tota Scriptura)을 전해야 한다. 이 둘은 늘 함께 가야 한다. 이 두 교훈이 성령의 능력으로 함께하게 될 때, 우리는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원제: Where is the Word of God?출처: www.ligonier.org번역: 정진호
근현대교회
하나님의말씀
어디에
오직성경
오직믿음
오직은혜
모든말씀
전통주의
공적선언
주님은 보장된 사명을 명령하셨다
by Dayton Hartman
2021-01-12
많은 사람들이 입을 벌리고 하늘을 응시하며 모여들었다.이 장면은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승천하시는 사도행전 1장의 장면이다. 사도들은 이제 모든 것이 끝일까 생각한다. 왕국이 회복되었는가(행 1:6)? 왕국이 도래하는 날짜와 시간을 주시기보다는 예수님은 그들에게 패러다임이 변화되는 새로운 과제를 주셨다. 제자들이 성령님으로부터 권능을 받을 때, 예수님은 그들에게 복음을 가지고 땅끝까지 가라고 명하셨다(행 1:8). 그것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는 그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결정적인 대답이다.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신 때와 시기를 아는 것은 그들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들은 그저 복음을 멀리, 넓게 가져가야 하는 책임을 알면 된다.그리고 그들은 교회를 세움으로써 이 일을 성취할 것이다.실패하지 않을 사명제자들에게 지상대명령(the Great Commission)을 주시기 전, 예수님은 그의 교회를 세우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교회가 세워지는 것을 음부의 권세가 막지 못할 것이라고 하셨다(마 16:18).교회를 개척하는 사람으로서, 나는 이 위대한 확신을 계속해서 되새긴다. 교회 개척은 어렵고 재정이 많이 드는 일이다. 교회 개척은 마치 지옥의 권세 자체와 맞서 싸우는 전투와 같다. 하지만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예수님의 계획은 더 많은 지역 교회를 세움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아는 것이 나에게 큰 위안과 자신감을 준다. 이 사실은 특히 어려운 때 나를 앞으로 이끌어 준다.그렇기에 나는 이 지상대명령이 나의 교회나 어느 한 교회에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교회는 다음 달이나 다음 세기에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당신의 교회도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확신이 나에게 힘이 되는 것은 내가 섬기고 전하는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모으고 세우시는 데 실패가 없는 분임을 내가 알기 때문이다.약속의 그림자최근에 다니엘서를 읽으며 느부갓네살의 첫 번째 꿈에 대해 생각했다. 미국 복음주의는 이 꿈을 주로 선지자적 예언으로 연관 지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초대교회는 이 꿈이 예수님의 승리를 상징하며 지상대명령을 수행하는 멈출 수 없는 교회의 전진이라고 믿었다. 다니엘은 신상의 금속이 각각 무엇을 나타내는지 설명함으로써 왕의 꿈을 해석하고, 그 다음 그 금속들의 파괴와 끝없이 이어지는 새로운 왕국의 진전에 대해 설명한다.“그 때에 쇠와 진흙과 놋과 은과 금이 다 부서져 여름 타작 마당의 겨 같이 되어 바람에 불려 간 곳이 없었고 우상을 친 돌은 태산을 이루어 온 세계에 가득하였나이다”(단 2:35).초대 그리스도인들은 이 예언이 그리스도의 재림과 죽은 자들의 부활로 마침내 절정에 이를 교회의 전진을 보장한다고 믿었다. 이레니우스(Irenaeus 130-202 AD 초대 교회의 교부이자 최초의 가톨릭 신학자 – 역주)는 “그러므로 위대하신 하나님은 다니엘에 의해 미래의 일들을 보여주고, 당신의 아들로 그 일들을 확인시켜 주셨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속세의 왕국들을 파괴하고 의로운 자들의 부활인 영원한 왕국을 소개할 손대지 아니한 돌이다”라고 썼다(모든 이단에 반대하여, 5.26.2). 비슷하게, 히포의 어거스틴(Augustine of Hippo 354-430 AD 히포의 주교. 서방교회의 교부이며 대표적 신학자 – 역주)도 다니엘서 2장의 태산을 교회 자체라고 해석하였다. “다니엘의 해석에 따라, 아주 작은 돌이 세상의 왕국들을 추월할 때까지 자라 ‘온 세계에 가득’할 때까지 커진 것이 바로 그 산(교회)이다”(시편 주해 43.4).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회 계획에 대한 초대 교회의 확신을 일부라도 회복한다면, 아마도 우리는 실패할 수 없는 임무를 추구하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될 것이다. 지상대명령을 교회 개척을 통해 수행하며 말이다.기독교 단체(Para-Church) 사역은?하지만 기독교 단체 사역은? 나는 교회 개척에 관한 토론에서 이 질문을 자주 받는다. 기독교 단체 사역은 지역 교회들에 의해, 그리고 그 교회들을 위해 쓸 수 있는 훌륭한 도구이다. 이 사역들은 여러 방면의 실제적이고 영적인 필요를 채울 수 있게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기독교 단체를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주님은 교회를 위해 죽으셨다. 예수님은 9Marks와 같은 기독교 사역 단체의 성공을 약속하지 않으셨지만, 이 사역이 영적 건강을 위해 지원하고 응원하는 교회의 궁극적인 성공은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기독교 단체 사역을 시작하라고 명하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더 많은 교회를 세울 더 많은 제자를 키우라고 명하셨다.제자들을 만들고, 교회들을 개척하고지상대명령의 중심 명령은 제자를 만들라는 것이다(마 28:16-20). 제자들은 지역 교회의 노력을 통해 만들어진다. 새로운 제자들이 성숙해져 감에 따라 그들이 다른 제자들을 더하여 갈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제자가 만들어지면, 점점 더 많은 교회가 태어난다.그렇다면 제자를 만드는 사명은 곧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다. 지상대명령을 진정으로 받아들이는 각 교회는, 더 많은 교회를 세우는 제자를 양성할 교회를 만들 필요성을 심각하게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반복되어야 할 패턴이다.왜 지역 교회인가? 정확히 말하면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작동하기 때문이다(마 28:18).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표현되었다(고전 12:12-13). 교회는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힘을 얻은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그의 통치에 복종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양하고 전파하는 곳이다.더 나아가서, 아픈 자를 돌보고, 낮은 자를 높이며, 학대받은 자들을 위해 정의를 구하는 하늘나라의 시민들을 세례와 성찬식의 성례를 통해 나타내는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왕이신 하나님과 그의 나라가 온다는 좋은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 복음을 전하는 동안 이루어진다. 원제: The Great Commission Is Guaranteed, So Let’s Get to Work출처: www.9mark.org번역: 허예송
교회
교회개척
지상대명령
어거스틴
초교파
이레니우스
초대교회
파라처치
지역교회
리디머교회의 도시사역 전략 5가지
by Tim Keller
2021-01-02
이 글은 2004년 팀 켈러 목사가 “도시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복음 변화가 가져다주는 모든 측면을 반영하기 위해 우리는 다섯 가지 주요 방면에서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하며 리디머 교회의 도시 사역을 위해 내놓은 다섯 가지 전략이다. 도시 교회 개척 및 사역에 관심있는 목회자들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기대와 함께 오래 전의 글을 게재한다-편집자리디머(Redeemer)는 도시의 안과 밖을 책임지는 교회가 되겠다는 창립 목적 일환으로 다섯 가지의 핵심 사역 전략 사이에서 사역의 균형을 맞추려고 한다. 사역의 균형을 달성하는 게 결코 쉽지 않겠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전도, 공동체, 말씀과 행동, 신앙과 일, 그리고 교회 개척이라는 다섯 가지 사역 중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고 똑같이 강조해왔다. 복음과 그 영향력우리가 하는 모든 사역의 기초는 하나님께서 우리 스스로 이룰 수 없는 구원을 이루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세상 속으로 들어오셨다는 복음의 메시지이다. 이 좋은 소식은 무엇보다도 은혜 중심이다. 예수님은 우리가 살아야 할 삶을 사셨고(그러나 전혀 반항적이지 않게),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삶에 대한 형벌을 지불하셨다(그래서 우리가 이제 죄값을 치를 필요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모든 종교처럼 우리의 노력과 기록을 통해서가 아니라 그의 노력과 기록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한다.두 번째로 이 좋은 소식은 왕국 중심이다. 예수님은 궁극적으로 개별적인 영혼을 죄로 물든 세상으로부터 구원하시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과 능력을 우리가 사는 물질세계 속으로 부어주시어 궁극적으로 이 세상을 갱신하고 회복시킨다. 따라서 우리는 개인의 개종뿐만 아니라 도시 전체의 평화와 번영을 추구한다. 이렇게 복음 속에 담긴 은혜와 왕국을 강조함으로 우리도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29장 1-7절에서 가르치시고 또 바울이 사도행전에서 보여준 선교 모습처럼 우리 스스로가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하도록 강요한다. 은혜 중심은 우리가 도시를 경멸하지 않고 사랑하도록 상기시킨다. 왕국에 대한 생각은 하나님을 믿는 도시의 시민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지상 도시에서도 최고의 시민으로 살도록 인도한다. 도시 사역의 다섯 가지 전략복음에 대한 이런 이해가 기초가 될 때 도시에서 사역하는 다섯 가지 방법이 흘러나온다. 첫째, 리디머 교회는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매우 효과적인 전도를 추구한다. 종교적 도덕주의와 달리 복음은 복음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도 경멸하지 않는 신자를 만들어낸다. 복음은 단순히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그분의 구원 사업에 비추어 서로를 향한 공감을 바탕으로 공동으로 추구하는 문화적 희망과 열망을 해결할 방법을 추구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도 복음주의적 예배이다. 은혜의 복음이야말로 모든 사람이 언제나 필요로 하는 핵심이기에 우리는 신자의 양육과 불신자의 구도, 이 두 가지를 예배를 통해 동시에 이룰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 성장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다양한 필요의 상황(points of need)에서 복음을 적용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불신자들에게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예배와 설교는 매주 새로운 방식으로 복음을 드러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예배를 통해 세속적이고 다원적인 문화 속에서 어떻게 복음을 일관되게 표현하는가를 기독교인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 두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주로 공동체라는 맥락에서 영적 형성을 제공하고자 한다. 교리 시험에서 항상 “A”를 받은 사람이라고 해도 복음의 의미가 공동체를 통한 지속적인 성찰, 훈계 및 모델을 통해 실질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그 사람은 여전히 영적 장님이고 또한 영적 침체(deadness)에 빠져 있을 수 있다. 은혜와 지혜 그리고 품성의 성장은 단지 교육을 통해서 일어나는 게 아니라 복음의 뚜렷한 의미가 살아 역사하는 친밀한 가족적 관계와 반문화적 공동체에서 생활할 때에만 가능하다. 서구 기독교인들에게는 여전히 강력한 개인주의적 긴장이 존재하는데, 그건 사람들은 영감을 얻기 위해 교회에 발을 들이지만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양보하면서까지 도시나 공동체 속에서 서로에게 봉사하려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에 대한 이런 종류의 헌신만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복음이 역사하도록 하는 길이다. 세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말과 행동을 통해서 사역하려고 한다. 성경의 기본 이야기는 구원의 목적으로 하는 동시에 또한 물질적이고 영적인 면에서 전 세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개인을 회심시키는 것처럼 봉사를 통해 이웃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에 대한 무관심은 은혜와 하나님의 자유로운 구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을 보여준다. 복음을 붙잡는 교회라면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자유주의” 교회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더 희생적으로 봉사해야 하고 또한 동시에 우리 주변에 있는 수많은 “보수적” 교회보다도 더 효과적인 복음주의적 사역을 지향해야 한다. 그것은 말(성경의 가르침)과 행동(봉사 행위), 모두에서 복음을 드러내는 통합적(holistic)인 방향이다. 네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사람들이 문화적 갱신을 위해 신앙과 일을 통합하는 데에 도움이 되고자 한다. 대부분의 미국 기독교인들은 직장에서 일할 때에는 믿음과 신앙을 드러내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 영향을 미치는, 현실에 대한 포괄적인 해석을 주는 변혁적 세계관에 필요한 수단이 아니라 단지 개인의 평화에 필요한 수단으로만 간주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풍부한 이해는 우리가 비즈니스 거래를 처리하고, 음악을 연주하고, 정부를 이끌고, 미디어에서 일하고, 장학금에 참여하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깊고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리디머는 기독교인의 문화 참여를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으며, 그들이 직업에서 탁월함, 독창성 및 책임감을 가지고 일할 수 있도록 돕고자 한다. 올바른 복음 이해를 바탕으로 인도적이면서도 창의적이고 훌륭한 사업 환경을 개발하는 것은 창조의 회복이라는 사역의 일부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은 기쁨과 희망 그리고 진리를 예술 속에 구체적으로 드러냄으로 프로젝트나 공연에까지 지속적인 기여를 할 수 있게 된다. 다섯 번째로 리디머 교회는 새로운 교회의 주요 사역에 촉매제가 되어야 한다. 도시를 위한 교회가 되겠다는 우리 사명의 일환으로 리디머는 복음 전파에 사명감을 가진 교회 개척을 돕고자 하며 또한 그렇게 시작한 교회가 이 같은 다섯 가지의 갱신 사역에 초점을 맞추도록 힘쓸 것이다. 다음 세대에 걸쳐 뉴욕시 지역에서만 수백, 수천 개의 새로운 복음 중심 교회가 시작된다면, 그로 인해 활동적인 기독교인의 수는 열 배에서 스무 배까지 늘어날 것이다. 이 역동적인 인구의 정밀 검사는 순차적으로 뉴욕시의 문화를 변화시킬 것이다. 다섯 가지 사역 전략의 균형을 맞추는 것이 중요하다이 모든 사역의 전략을 한꺼번에 추진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전통적으로 볼 때 이러한 강조점 중에서 하나 또는 두 가지에 매우 능숙한 교회는 또 동시에 다른 강조점에 약한 경우가 많다. 그렇다면 리디머에서 우리는 왜 이 다섯 가지 모두를 다 시도해야 하는가? 첫 번째로 모든 사역이 복음에 의해 요구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복음의 은혜 지향성은 복음적 예배와 깊은 공동체를 가능케 하고 또 필요하게 만든다. 복음의 왕국 지향성은 전체적인 사역과 신앙 그리고 일의 통합을 필수적으로 만든다. 은혜와 왕국 지향성은 교회 개척에 커다란 동기를 부여한다. 두 번째로 도시에 장기적인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다섯 가지의 사역 전략이 모두 상호 의존적으로 필요하기 때문이다. 기독교인들이 공동선을 위해 희생적으로 일하는 통합적 사역은 예수님을 믿으라는 설득력 있는 복음적 소명에 꼭 필요한 맥락이다(단순히 교회 숫자와 영향력을 늘이는 게 목표라면 도시 사람들이 굳이 왜 우리의 말을 들어야할까?). 또한 기독교인이 복음에 대한 믿음을 직업과 대중에서 계속 분리한다면 아무리 수많은 개종이 있더라도 우리는 문화를 바꿀 수 없다. 마지막으로, 교회 개척은 궁극적으로 도시에서 행하는 다른 모든 사역을 늘리는 유일한 방법이다. 따라서 사역이 효과적으로 수행되려면 이 모든 사역을 한꺼번에 수행하는 길만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들은 상호 의존적이며 또한 서로 맞물려 있다.결론많은 기독교인들이 대학을 마치고 직장을 찾기 위해서 도시로 이주한다. 이것이 도시에 있는 교회에 도움이 될 수 있지만, 기독교인들이 일단 도시에 정착한 후 방향을 바꾸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서 29장 1-7절에서 설명하신 도시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복음에 회의적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믿음에 대해 효율적이고 공감을 가지고 말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다. 또한 현대 기독교인은 다른 교인들과 깊은 공동체를 추구하는 대신 교회에서도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심지어 소비자와 같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도시의 공동선에 헌신하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봉사하기보다는 재미와 발전을 위해 도시를 이용한다. 또한 기독교 신앙과 소명을 신중하게 통합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뉴욕에 사는 기존의 기독교인과 뉴욕에 새로 온 기독교인이 앞서 말한 다섯 가지 전략 모두에서 사역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도시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오늘날 현대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뉴욕시에서 우리가 정기적으로 세속적 사람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끄는 수천 개의 새로운 교회 공동체를 만들어낼 수 있다면, 또한 도시가 추구하는 공동의 선을 추구하고, 불우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돌보고,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시를 쓰고, 영화를 만들고, 사업을 시작하고, 또 예술 작품을 제작하고 새로운 벤처 자금을 지원하며, 산문을 저술하도록 격려한다면, 우리는 이 도시가 번영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읍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라”(렘 29:7)원제: Five Ministry Fronts in the City출처: redeemercitytocity.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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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시스 쉐퍼, 2020년을 향해 경고했다
by Elliot Clark
2020-12-28
故 프란시스 쉐퍼(Francis Schaeffer)가 남긴 기독교에 대한 공헌을 고려할 때, 우리는 종종 스위스 알프스의 라브리 공동체와 그의 주목할만한 저서 ‘거기 계시는 하나님(The God Who Is There)’, ‘이성에서의 도피(Escape from Reason),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How Should We Live?)’를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그의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저서 중 하나인 ‘20세기 말의 교회(The Church at the End of the 20th Century)’는 아마도 2020년 말 현재 미국 교회가 처한 현실과 가장 깊은 관련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정확히 50년 전에 발간된, 1970년 수준의 보기 흉한 표지가 반영하듯 이 짧은 책 속에 담긴 내용은 상당히 올드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이 다루는 주제는 놀랍도록 현대적이다. 쉐퍼는 진리와 개인적 책임의 상실, 권위의 붕괴, 그리고 증가하는 폭력이 가져다주는 위협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그는 또한 임박한 생태 재앙과 과학적 조작, 심지어 국가가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개발하고 무기화 할 가능성까지도 경고한다. 어쩌면 이런 점이 아마도 이 책의 가장 큰 약점일지도 모르겠다. 즉, 책의 진정한 가치가 쉐퍼가 제시한 경고 때문에 가려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쉐퍼의 분석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는 교회에게 총체적이고 희망적이며 긍정적인 방향을 제공한다. 20세기 말의 교회프란시스 쉐퍼“우리 세대에 교회에게 미래가 있습니까? 나는 교회가 지금 정말로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고 믿습니다. … 우리는 현재 엄청난 압력과 더불어 미래의 조작이라는 위험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우리가 만날 위기는 너무나 엄청나서 지난 40년 간 교회가 치른 전투가 마치 어린아이 장난처럼 보이게 될 것입니다.”오늘날 쉐퍼가 예측한 압력과 전투는 복음주의 교회 전체를 휩쓸고 있다. 그 위기는 주변 세계의 도덕적 부패에서 비롯되었다. 그 위기는 기독교적 원칙과 정치 이념 사이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그 위기는 또한 교회 내부, 특히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 도덕적 그리고 신학적 타협 때문이다. 이 책을 통해서 다시 만나는 쉐퍼의 통찰은 기독교인으로 하여금 이러한 전투를 이해하고 대처하는 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IVP쉐퍼 시대의 혼란쉐퍼는 당시에 있었던 학생 혁명에 대해서 쓴다. 그가 살았던 시대에 미국과 유럽의 청소년 문화를 특징지었던 것은 부모와 정치 엘리트들의 권위주의를 보면서 느낀 그들의 환멸감이다. 그들은 그런 권위주의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어떤 구속도 받지 않는 자유에 관심이 있었다. 거기에 끝없는 전쟁이 가져다 준 피로감도 있었다. 그리고 집에서, 특히 미국에서 학생들은 빈곤과 인종 차별이라는 두 가지 문제에 불안해했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신 좌파(New Left)로 알려진 정치 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책의 서두에서 쉐퍼는 지금 사회가 양극화, 환멸, 희망의 상실이라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정치적으로 볼 때, 쉐퍼는 애초에 자유라는 개념을 탄생시킨 유대-기독교와의 분리를 통해 자주적 자유를 추구하던 고전적인 자유주의가 결국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게 된 환경을 한탄한다. 그는 또한 기본적으로 보존할 가치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탈 기독교 사회를 사는 상황 속에서도 개념상 현상유지(status quo)를 위해서 싸울 수밖에 없는 보수주의의 무익함에 대해서도 경고를 던진다. 1970년에 쉐퍼는 유럽 대륙뿐만 아니라 미국에게도 이미 탈 기독교 국가라는 진단을 내렸다. 그는 문화적인 힘과 영향력을 상실해버린 역사적 기독교가 이제 서구에서조차 소수가 되어버린 현실에 대해서 묘사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쉐퍼는 복음주의자들이 처한 큰 위험을 지적하는데, 안위와 풍요함 그리고 개인적인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정치 엘리트의 편을 드는 바로 그 위험이다. 사회적인 혼란과 격변을 맞아 쉐퍼는 기독교인이 순간에 지나지 않는 안락함을 위해 타협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놀랍도록 선구자적인 작업을 통해서 쉐퍼는 서구 사회를 떠받치던 기독교적 기반이 무너질 때 닥칠 수밖에 없는 자유의 상실을 계속해서 예언한다. 그리고 이에 대응하여 쉐퍼는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닌, 일종의 문화 전쟁을 요구한다. 쉐퍼는 마치 영적 혁신(spiritual reformation)처럼 보이는 기독교 혁명(Christian revolution)을 요구한다.개혁: 더 나은 혁명 오늘날과 놀랍도록 유사한, 그가 살았던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현실을 감안할 때, 쉐퍼는 지금 교회에게 꼭 필요한 진정한 혁명의 세 가지 측면을 제시한다.1. “기독교인들은 호전적인 사람이 되는 것과 동맹자가 되는 것 사이에 차이가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독교인은 어떤 특정한 정치 진영의 편을 들지 않으면서도 얼마든지 특정한 이상을 긍정하고 또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통해 그 이상의 실현을 이룰 수 있다. 쉐퍼는 이렇게 썼다. “사회적 불의가 있다면, 그렇다고 말하십시오. 지금 우리에게 질서가 필요하다면, 그렇다고 말하세요.” 우리 시대에도 이 점은 여전히 적용된다. 교회는 천국의 가치(예를 들어, 흑인의 생명은 중요하다 Black Lives Matter, BLM)를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해야 하며, 동시에 여전히 지상 왕국의 가치, 판단 및 행동(예를 들어, BLM이라는 의제와 관련해서 문제가 되는 측면들)과 맞서 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쉐퍼가 살았던 시대와 마찬가지로 목사와 기독교인은 반드시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데에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쉐퍼는 교회가 그리스도와 성경, 진리와 사랑을 대변하기 위해서라도 특정 정치적 세력의 편이 아니라 철저하게 외부 세력으로 남아야 한다고 믿는다. 즉 교회는 정치적 양극화와 문화적 종속(cultural capitulation)을 모두 거부하면서도 옳은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대를 이어 내려온 부모의 정치적 소속에서 벗어나려는 경향을 가진 다음 세대를 향해서 던지는 쉐퍼의 호소일 것이다. 그런 현실이 50년 전에도 사실이었다면 오늘날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도 그건 바뀌지 않았다. 2. “기독교인과 교회는 진지하게 진리를 다뤄야 합니다”이 혁명의 두 번째 구성 요소는 아카데미 차원에서 논의되는 신학적 자유주의에 대항하는 동시에 전도를 통해 세계를 품으려는 담대한 진리 선포(truth-telling)를 포함한다. 현대 교회는 초대 교회처럼 종교적, 세속적 세력 모두로부터 경멸을 당해도 기뻐할 정도로 진리를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다시 말해서 교회에게 필요한 것은 사도들의 정신(backbone), 변하지 않는 복음을 수호하기 위해 부끄러움과 거절을 기꺼이 감당하는 정신이다. 그러나 쉐퍼는 동시에 위선에 대해서도 경고한다. 진정성에 매력을 느끼는 문화일수록 비진리를 실천하는 얄팍한 교회를 기가 막히게 분별하는 재주를 가지고 있다. 쉐퍼는 말한다. “지금은 진리라는 개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게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세대에게 우리 기독교인이 진리를 얼마나 진지하게 받아들이는지를 보여주어야 하는 때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교리 뿐 아니라 삶을 통해서만이 가능하다. 쉐퍼는 교회가 불신자들과의 깊은 대화에 참여할 것을 독려한다. 거대한 컴퓨터가 지배하는 “전자 마을(electronic village)”을 예측했던 캐나다 철학자인 마샬 맥루한(Marshall McLuhan)을 언급하면서, 쉐퍼는 기독교적 증언이 피상적인 의사 소통에 맞서 싸워야 할 뿐 아니라, 기독교는 언제나 “제대로 된 콘텐츠를 다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하는 전도와 변증은 트위터의 몇 마디 또는 영감을 주는 인스타그램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는 것이다. 끝없는 비난과 폭언의 시대에 기독교인의 반응은 깊은 관계성과 명백한 합리성을 바탕으로 해야 한다. 2020년 현재, 쉐퍼가 던지는 위선에 대한 경고는 정치적 음모와 과학적 추측을 퍼뜨리려는 기독교인에게도 적용된다. 다른 사람을 설득하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지적 진실성(intellectual integrity)을 통해 상대방의 신뢰부터 얻어야 한다.3. “교회는 진정한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기독교인은 진리를 설교하고 비진리에 맞서야 한다고 쉐퍼는 말한다. 쉐퍼는 또한 기독교인이라면 세상을 향해서 “이 세상에서도 얼마든지 아름답고 특별한 것을 가질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특히 그는 교회에 도전한다. “세상이 기독교인의 인간관계에서 아름다움을 볼 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바탕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기독교 공동체가 다툼과 싸움 그리고 내분을 멈추는 모습을 세상이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지금 제대로 살고 있지 않습니다.” 교회는 하나의 대안적 공동체, 사랑으로 하나가 된 진정한 가족을 의미한다. 그리고 쉐퍼는 그러한 사랑을 증언하고 또 그러한 공동체를 육성하는 실질적인 수단으로서 타 인종 및 전혀 다른 사회 경제적 계급을 향한 급진적인 환대를 주장한다. 쉐퍼는 “그리스도인의 표시”(별도의 책으로 출간되기도 했음)라는 제목의 부록으로 책을 마무리하는데, 다음과 같은 사랑을 호소한다. “우리의 사랑은 세상이 관찰할 수 있는 형태를 가져야 합니다. 세상이 우리의 사랑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슬프게도 오늘날 많은 교회 속에서 세상이 보는 것은 우리가 정치적 경쟁자나 이념적 반대자들을 향해 드러내는 사랑이 아니다. 정치적 싸움은 이제 교회 속으로까지 깊이 파고들었다. 내 기억에 올해처럼 교회가 갈갈이 찢어진 해는 없는 거 같다. 인종간의 긴장, 과열된 선거, 코로나 대응 방식, 심지어 마스크를 쓰느냐 마느냐와 같은 문제로 교회는 분열되었다. 우리가 전쟁을 벌이려면 그 전쟁은 우리 속에서 일어난 분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2020년 말 교회는 사랑으로 하나되어 회복을 경험해야 한다. 그리고 교회를 지켜보는 세상에게 아름다운 공동체의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원제: Francis Schaeffer Warned Us About 2020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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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부르는 성탄절 찬양 위험하지 않을까?
by Ken Boer
2020-12-17
함께 모여 소리 높여 크리스마스 찬양을 부를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그런데 코로나 상황인데 함께 모여 노래하는 게 위험한 건 아닐까?지금 위험하다고 하는 게 진짜일까 아니면 과장된 것일까?육 개월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우리가 아는 건 뭐가 있을까?시간이 흐르면서 바이러스에 대한 우리의 이해도 높아졌다. 전염병 초기에 물었던 질문은 마치 “차를 모는 게 안전한 거야?”와 같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운전과 관련해서 운전자의 나이, 차의 종류, 길의 상태 등등과 관련해서 자세하게 질문을 한다. 물론 아직까지도 충돌 평가 또는 자동차 잡지까지는 몰라도 처음보다는 많이 알게 되었다. 지난 몇 달 동안 우리의 지식은 주로 다음 세 가지 경로를 통해서 들어왔다. (1) 노래할 때 튀는 비말에 관한 연구, (2) 바이러스의 공중 전파에 대한 연구원 및 공중 보건 전문가의 진화하는 견해, (3) 실생활에서 필요한 완화 및 측정을 위한 실질적인 전략.이 글을 읽기 전에 내가 지역 교회의 예배 담당 목사라는 점에 유의하길 바란다. 비록 의학 교육을 받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 글은 의학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작성했다. 인용된 연구 중 일부는 검토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고맙게도 우리의 이해를 발전시킬 수 있을 정도로 지금 소개하는 연구에 관해서는 충분한 합의가 있었다. 노래에 대한 연구노래가 말하는 것보다 더 많은 에어로졸을 생성하는가? 그렇다. 하지만 중요한 건 볼륨의 정도이다. 영국의 연구원들은 가장 낮은 볼륨 수준에서는 호흡, 말하기 또는 노래로 생성되는 에어로졸에 통계적 차이가 없음을 발견했다. 대화 뿐 아니라 노래할 때에도 볼륨이 증가함에 따라 에어로졸의 질량이 크게 증가했다. 가장 큰 볼륨으로 노래하면 가장 큰 볼륨으로 소리를 지르는 것보다 1.5 배에서 3.4배 더 큰 에어로졸 덩어리가 생성되었다.스웨덴의 연구는 규모라는 측면(sense of scale)에서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그들이 실험에서 측정한 중간값(median)의 초당 입자 방출 정도는 호흡용 입자 135개, 일반 대화용 입자 270개, 큰 대화용 입자 570개, 일반 노래용 690개, 큰 노래용 입자 980개였다. 마스크를 쓰는 경우라면 큰 노래에서도 방출된 입자는 410개에 불과했다. 독일과 미국에서 실시한 연구에서 이 실험을 보완하는 결과를 얻었다. University of California Davis의 연구원들은 볼륨을 10데시벨 줄이는 게 실내 환기 속도를 두 배 늘리는 것보다 공기 전파 위험을 줄이는데 더 효과적일 수 있다고 추정했다.공기 전파큰 비말에 비해 작은 에어로졸은 얼마나 위험할까? 전염병 발발 이후, 건강 전문가들은 바이러스가 확산될 수 있는 세 가지 가능한 수단을 확인했다. 접촉 전염(물리적 접촉), 비말 전염(일반적으로 6피트 이내의 공기를 통해 확산되는 입자) 및 공기 중 전염(더 작은 에어로졸 입자로서 더 멀리 이동할 수 있고 더 오랜 시간 동안 공중에 떠 있음). 그런데 여기 세 번째 전파 경로에 대한 연구 결과는 전염병이 발발한 이후 계속적으로 변경되었다. 7월에는 에어로졸 물리학, 유동 역학, 건축 공학과 같은 주제에 대한 배경 지식을 가진 200명 이상의 과학자들이 보건 기관에 에어로졸 전파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말 것을 요청했다. 그에 대한 연구가 여전히 진행 중이기 때문에 예방 원칙을 지켜달라는 촉구가 잇달았다. 그리고 이어지는 몇 주간에 걸쳐서 여러 연구 기관의 연구를 종합해서 WHO는 에어로졸에 대한 입장을 어느 정도 업데이트했고, 그건 중앙방역센터도 마찬가지였다. WHO는 현재 ARS-CoV-2가 주로 밀접 접촉을 통해 전파되지만, 공기 중 전파는 “특정 환경, 특히 감염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오랜 시간을 보내는 실내, 혼잡하고 환기가 잘되지 않는 공간”에서 발생할 수 있는데 여기에는 “성가대 연습”과 “예배 장소”가 포함된다. 중앙방역센터는 여기에 동의하는 동시에 좀 더 구체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대부분의 감염은 공기 중 전염이 아닌 밀접한 접촉을 통해 전염된다, 그러나 공기 중 전염은 … 특별한 상황에서 얼마든지 발생할 수 있다.” 중앙방역센터가 말하는 특별한 상황에는 “폐쇄된 공간,” “호흡기 운동(예: 소리치기, 노래, 운동)으로 생성되는 호흡 입자에 장기간 노출” 및 “부적절한 환기(또는 공기 처리)”가 포함된다. 일부 과학자들은 담배나 담배 연기의 비유가 다양한 상황에서 공기 중 전파의 위험을 대략적으로 평가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조깅을 할 때 실외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지나쳐 달려가면 약간의 담배연기를 들이마실 수는 있지만, 그건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공기정화기(HVAC)가 켜져 있지 않거나 창문이 열려 있지 않은 작은 방에서 흡연자 근처에 있다면 아마도 상당한 담배연기를 흡입할 것이다. 큰 강당에서 흡연자로부터 몇 줄 떨어져서 앉아있는 경우, 연기가 다양한 방향으로 퍼지기 때문에 당신이 마시는 담배연기는 희석된 것이다. 따라서 생성된 양, 방의 입방 부피 및 환기 등 모든 요소가 다 감염에 충분한 양을 흡입하는가 아닌가에 영향을 준다. 완화 전략그럼 이런 연구를 교회에 어떻게 적용할까? “장시간” 노래는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이고, 올바른 공기 처리 및 환기를 위한 표준은 무엇인가? 또 허용 가능한 위험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가장 위험한 상황은 과격한 호흡과 불충분한 환기가 장기간 결합되는 상황이다. 천장이 낮고 HVAC 시스템이 유지되지 않고 또 45분 동안 큰 소리로 찬양하는 교회는 천장이 높고 통풍이 좋으며 찬송가 몇 곡만 부르는 교회보다 공중 전파 위험이 훨씬 더 높다.여기 전문가들의 몇 가지 조언이 있다.1. 기본부터 시작하라. 사회적 거리두기는 사실상 비말 전파의 위험을 제거한다. 마스크는 근본적으로 에어로졸을 필터링하여 공기 중 전염의 위험을 크게 줄인다. 더 복잡한 답을 찾기 전에 이러한 기본적인 솔루션을 간과하지 말라. 2. 건물의 환기에 대해 알아보라. 실내의 입방 부피는 얼마인가? 시간당 몇 번이나 환기를 하는가? 공기 중 몇 퍼센트가 신선한 공기인가? 창문을 열어야 할까? 고효율 필터를 고려해야 할까?3. 실내가 위험해 보이면 추가 조치를 취하여 측정할 수 있다. 일부 연구자들은 다양한 과학 논문을 근거로 위험 계산기(risk calculators)를 만들었다. 또 어떤 이는 이산화탄소 측정기(CO2 meter)를 통해서 실내의 환기 측정을 위한 대용품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권장한다 (물론 이 경우에도 찬양하는 경우에는 한계가 있다).4. 각각의 완화 조치는 다 도움이 된다. 뮤지컬 그룹은 국제 공연 예술 에어로졸 연구의 권장 사항과 영국에서 발표한 유사 결과에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럼 이제 어떻게? 전염병 상황을 맞아 교회 지도자라면 우선순위라는 측면에서 큰 지혜가 필요하다. 각각의 교회마다 인구 통계, 물리적 회의 공간, 지역에 따른 각종 규제 등등에서 다 상황이 다르다. 찬양은 예배에서 빠질 수 없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렇기에 교회 지도자는 성도 간의 연합을 유지하면서 또 하나님을 공경하는 방식으로 바르게 찬양을 인도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움이 필요하다.아무리 완화 전략을 사용한다고 해도,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완화 전략에 반대하지만 또 사랑도 없다면, 역시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지금과 같은 전염병 시대를 겪으면서도 모든 것을 견디고 인내하는 자세이다(고전 13:7).우리는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육체적 건강이 중요하듯 영적 건강도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전염병에 걸린 많은 사람들이 느끼는 우울증에 대한 가장 좋은 완화 전략 중 하나는 주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시 42:5). 특히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여서 찬양하는 시간을 오랫동안 갖지 않을 때 우리는 결코 창조주께서 우리를 만드신 방식대로 바르게 움직일 수 없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의 뜻에 따라는 것이 교회에 모여서 함께 안전하게 찬양하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는 스트리밍 예배를 드리면서 집에서 즐거운 소음을 내거나, 아침 예배나 가족 저녁 식사에 성탄 찬양을 추가하거나, 또는 차에서 볼륨을 높이고 크게 찬양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은 언제나 우리가 그분을 찬양함으로 우리의 마음이 주님만을 향하길 원하신다. 이 세상에서도 또 저 영원한 곳에서도 주님의 인도를 받는 우리가 서로의 육체적 또 영적인 선을 바르게 추구할 수 있기를 간절히 간구한다. 원제: Is It Wise to Sing Christmas Carols in Church This Year?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영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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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탄예배
비말
마스크
코로나 시대 크리스마스 어떻게 준비할까?
by Sarah Eekhoff Zylstra
2020-12-13
평소라면 지금쯤 주일학교며 성가대 그리고 포인세티아로 본당을 장식하는 등등 교회 스태프들이 크리스마스 준비로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올해 전국적으로 코로나19 사례가 급증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크리스마스 콘서트, 온 가족이 붐비는 어린이 축하 행사와 같은 전통적인 행사를 취소하는 건 물론이고, 시시각각으로 온 나라의 건강 상태가 급변하고 있다. 따라서 이번 크리스마스에 교회 교역자들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첫째도 창의성, 둘째도 창의성이다. TGC는 전국에 걸쳐서 다섯 명의 목사들과 그들이 이번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떻게 보낼지와 관련해서 대화를 나눴는데, 양초를 나눠줄 지 그리고 그들이 대림절(Advent)에는 어떤 설교를 준비하고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목사: 후안 산체스(Juan Sanchez)교회: 하이포인트 침례교회도시: 오스틴, 텍사스규모: 등록교인은 약 500명,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6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평상시 크리스마스라면 천 명 정도가 앉는 이 교회 본당이 꽉 차기 마련이다. “평소 교회에 안 다니는 사람들도 크리스마스면 교회에 와요. 우리는 아주 단순한 예배를 드리죠.” TGC 이사회 멤버이자 이 교회 담임목사인 후안 산체스의 말이다. 한 시간 정도 하는 예배에서는 크리스마스 찬양이 울려 퍼지고 크리스마스에 알맞은 복음 설교가 선포된다. 이 교회는 올해도 사회적 거리를 지키고 마스크 착용을 의무화한 상태로 작년과 똑같이 하려고 계획하고 있는데 문제는 공간이다. 6월에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참석하는 교인 수는 점차 증가하여 현재 350명을 돌파했다는 게 산체스 목사의 말이다. 문제는 본당이 사회적 거리를 지키는 한 그 인원 이상을 감당할 수 없다는 데에 있다. 처음에는 예배에 온 사람들에게 기록을 하고 본당에 들어가도록 요청했다. 그러나 몇 주가 지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록을 하지 않았는데, 그건 예배 참석하는 사람들의 숫자에 비해 본당 공간이 워낙 충분해서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는 상황이 다를 것이다. “이번 주 당회 모임이 있는데요. 본당 입장시 신원 기록에 대한 얘기가 나올 겁니다.” 산체스 목사가 말했다. 교회는 25명이 들어갈 수 있는 추가 예배실을 하나 준비했고 또 하나를 준비할 계획이다. 그 방들까지 다 차면 늦게 온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참석할 수밖에 없게 된다. “예배를 한 번 더 하는 건 꺼려집니다. 우리 교회는 대 예배는 단 한 번만 드린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거든요.”대림절에 산체스 목사는 여름부터 시작한 설교 시리즈를 이어갈 것이다. “다시 대면 예배로 모이기 시작했을 때 무엇을 설교해야 할 지 고민했어요. 인종 문제에 관한 시리즈가 필요할까? 아니면, 정치? 도대체 이 문제를 어떻게 전달하지? 다행히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나는 예전에 에베소서를 설교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고요, 이번에 준비하면서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설교가 바로 에베소서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사도 바울의 편지는 백인, 히스패닉, 아프리카계 미국인 뿐 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온 이민자들이 참석하는, 인종 면에서 매우 다양한 이 교회에 일치와 평화의 중요성이라는 강력한 성령의 메시지를 불어넣었다. “우리는 인종차별과 관련해서 전혀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으며 이곳 보수적인 도시 오스틴에서 강력한 반 인종차별 시위를 했습니다. 나는 성경이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문제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 문제에 관한 본문을 내가 임의적으로 한두 개 고르는 것보다 지속적인 본문 강해 설교를 통해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에베소서는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문제를 다 다루고 있습니다.”산체스 목사는 12월 27일에 에베소서 마지막 강해설교를 할 것이다. 설교 제목은 “선교를 위한 담대한 복음 선포”이다. 산체스 목사는 말한다. “오늘날도 희망은 있습니다. 우리 자신 때문이 아니라 복음 때문에 말입니다.” 목사: 데릭 퍽키트(Derrick Puckett)교회: 리뉴얼 교회 도시: 시카고, 일리노이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300명 리뉴얼 교회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보통 찬양으로 보낸다. 중간에 누가복음 2장을 본문으로 하는 5분 정도의 설교가 있지만 설교가 끝나면 일곱 곡을 다시 부른다. 그리고 예배 끝날 때에 교인들은 촛불을 켠다. 그러나 리뉴얼 교회는 그들이 공간을 빌려쓰고 있는 학교가 3월 이후 온라인으로 전환하면서 내내 온라인 예배를 드리고 있다.“온라인으로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 드리기로 결정했어요. 게다가 코로나 상황이 더 안 좋아지고 있고요.” 퍽키트 목사의 말이다. 찬양에 누가복음 2장 등등, 다 비슷할 것이다. 단지 이번에는 교인이 아닌 교회 스태프가 성경 본문을 읽게 된다. 크리스마스 전 화요일에 각종 크리스마스 장식이 된 사무실에서 예배를 녹음할 것이라고 했다. “정상적인 예배인 것처럼 옷을 입을 겁니다.” 퍽키트 목사가 말을 이었다.“보통 때에는 크리스마스 예배를 하지 않는 다른 교회도 초청을 하는데 말입니다.” 그러나 올해는 온라인이다. 사람들에게 온라인으로 예배에 참석하라고, 온 가족이 모여서 함께 노래하자고 그리고 소셜미디어를 통해서 예배 방송을 전파하자고 격려하고 있다.퍽키트 목사는 이번 크리스마스가 적지 않은 교인들에게 힘들 거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상당수의 교인이 시카고 시의 ‘자가 격리 권고’에 따라서 추수감사절에도 가족에게 돌아갈 수 없었던 젊은 독신자 또는 부부이다. “시카고가 원래 집인 사람이 거의 없어요. 그 점을 잊지 않으려고 합니다. 쉽지 않아요.”여름에는 교인들이 가끔 만나서 공원에서 시간을 보냈다. 교회 지도자들도 격주로 심방 전화를 돌렸다. 그런 사역 중 일부는 전에는 없던 것이었다. 대면 예배가 없었던 지난 8개월 동안 리뉴얼 교회에는 15명이 새로 등록했다. “우리 교회는 방법을 찾아낼 겁니다. 교인들은 교회가 더 필요합니다. 최대한 있는 상황을 그대로 인정하면서도 교인들과 함께 해야 합니다. 평상시 크리스마스 때보다 더 함께 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합니다. 교회는 그런 곳이니까요.”목사: 매트 프록터(Matt Proctor)교회: 코너스톤 교회도시: 마리온, 아이오와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3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명코로나 전에도 프록토 목사는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몇 명이나 올 지 가늠하기 힘들었다. “어떤 해에는 많이 왔고 또 어떤 해에는 거의 없고요.” 프록토 목사의 말이다. 출석 수는 그 해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타지로 가지 않고 집에 남아있는가에 달려있다. 코너스톤 교회는 그래도 나름 유대 관계가 탄탄한 교회이다. 올해 여름 다시 대면 예배를 재개한 이후 교인의 약 95%가 적어도 한 번은 예배에 참석했다. “그 중 일부는 주일 예배에 고작 한두 번만 참석했어요. 교인 일부는 암 치료를 받고 있고요. 또 일부는 설교만 듣고 나갑니다.”지난 몇 주 동안 아이오와 주에서 코로나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 예배를 선택했다. 교인 숫자가 떨어지기 전에 프록터 목사는 예배를 다시 2부로 늘이려고 했지만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모여서 예배드리는 건 아름답습니다.” 프록터 목사는 웃으며 말했다. “예배를 두 번 드리지 못하기 때문에 처리해야 하는 몇 가지 복잡한 문제가 있어요. 더 많은 사람들이 ‘아, 잘 됐네요.’라고 말할 것 같지만, 사실은 누구나 다 본당 안에 앉아 자신만의 공간을 차지하고 그 순간을 공유하고 싶어합니다.”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는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이야기, 성경 말씀과 찬양으로 구성된다. 코너스톤 교회는 크리스마스 예배에서도 매주 예배 때처럼 끝날 때가 되어서야 찬양을 부른다. 그래서 말씀만 듣고 싶어하고 노래 부르는 게 불편한 사람은 조용히 빠져나갈 수 있도록 배려한다. 프록터 목사는 개개인이 촛불을 켜고 들게 할 계획인데 문제는 사회적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떻게 옆에 사람에게 불을 붙이도록 할 것인가이다. “아무래도 가운데 촛불 자리를 따로 만들어야 할 거 같고요.”코너스톤 교회는 또한 크리스마스 전에 비디오를 만들어서 교인들이 크리스마스를 축하할 때 그때 그때 사용하도록 도울 계획이다. 프록터 목사는 매년 번갈아가면서 한 해는 대림절 설교, 그리고 다른 해에는 특별히 마음에 와 닿은 말씀으로 설교를 한다. “올해는 한참 전부터 크리스마스 때가 되면 대림절에 맞춘 본문에 도달할 수 있도록 계획을 세워서 마가복음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금 심판에 관한 내용을 담은 13장을 읽고 있다. 그리고 12월 20일 십자가에 관해서 설교하려고 준비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왜 성육신이 꼭 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서 마가복음을 통해서 알아가고 있는 중입니다.”목사: 존 마하피(John Mahaffey)교회: 웨스트 하이랜드 침례교회도시: 해밀톤, 온타리오, 캐나다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100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500명웨스트 하이랜드 침례 교회 목사이자 TGC 캐나다 의장인 존 마하피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1,000명 이상의 사람들이 본당에 모여서 놀라운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를 드립니다. 크리스마스 예배는 하나의 공동체 행사입니다. 모두가 촛불을 들고 조명을 낮춘 상태에서 찬양을 드립니다. 실로 아름다운 가족 시간이에요.”올해 웨스트 하이랜드 교회는 기존 크리스마스 예배를 2부로 나눠서 두 번 할 예정이고, 예배에는 30% (또는 약 250개의 의자)만 참석할 수 있습니다. “참석자는 미리 등록을 해야 하며 우리는 가족 별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서 가족 간에 6피트 씩 떨어지도록 할 것입니다.” 마하피 목사의 말이다. 올해 교회는 예배를 3부 그러니까 한 번 더 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상황이 쉽지가 않네요. 새로운 방식으로 사역을 하는 게 너무 힘듭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자고 결심했습니다.” 찬양을 할 때에도 교인들은 마스크를 써야 한다. 이제 크리스마스 캐롤도 마스크를 쓰고 부를 것이다. 문제는 성가대이다. “예배 담당 목사가 꽤나 창의적이에요. 그래서 40, 50명 되는 성가대원 각자가 찬양을 하는 비디오를 만들게 했어요. 그리고 그 비디오를 다 모아서 하나로 통합한 거지요. 그래서 스크린으로 보면 전체가 다 모여서 마스크를 쓰지 않고 찬양한 것처럼 보입니다.”스태프는 촛불을 들고 다니면서 불을 붙이는 봉사 인원을 모집해서 최대한 교인들간의 거리를 띄우도록 할 것이다. 또 하나 가능한 선택지는 커다란 초를 앞에 놓고 사람들이 차례로 앞으로 와서 불을 붙이고 자기 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우리가 평소에 하던 모든 것을 못 하게 된 건 좋은 일일수도 있습니다.” 마하피 목사는 말을 이었다. “똑같은 성탄절을 지난 20년간 보냈어요. 이제 기존의 관행에서 탈피해서 새로운 변화를 주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겠죠.”마하피 목사는 대림절 시리즈 설교 제목을 “미리 예언된 크리스마스- 구약을 통해서 살펴본 대림절”로 정했다.“구약 속 메시아에 관한 예언을 좀 살펴볼 겁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암울했던 시기에 그 예언들이 나왔거든요. 나는 그들이 처했던 그 암흑기에 중점을 두려고 합니다. 어쩌면 크리스마스 메시지로는 너무 어두울 수도 있지만, 그게 지금 우리 교인들이 처한 상황과 일맥상통한다고 느낍니다.”목사: 가레트 켈(Garrett Kell)교회: 델 레이 침례교회도시: 알렉산드리아, 버지니아규모: 코로나 사태 전까지 주일 출석 약 550명 그리고 현재 대면 예배 참석은 약 350명겉으로만 봐서는 델 레이 침례교회가 맞는 대림절은 다른 해와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교회는 전형적인 개혁주의 침례교회입니다.” TGC 이사이자 담임목사인 가레트 켈 목사의 말이다. 그러나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는 이 교회에서도 아주 큰 행사이다. 참석자의 반 이상이 평상시에는 예배에 참석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상당수가 일 년 내내 한 번도 교회에 오지 않던 사람들입니다. 어떤 경우는 타지에 있다가 잠깐 들린 경우고요. 따라서 그 날 예배는 복음을 전하기에 정말로 좋은 기회지요.”올해 그는 250명 참석으로 제한된 본당에서 설교할 것이다. 그리고 그 예배는 동시에 온라인으로 생중계될 예정이다. 또 일부 교인은 주차장에서 설교를 들을 것이다. 델 레이 교회는 그렇게 해서 약 400명 정도를 현장 예배에 참석시킬 것이다. 그 정도면 평소 크리스마스 이브 예배에 참석하는 인원을 거의 다 채우는 셈이다.이 교회는 크리스마스 전후로 해서는 평소에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하는 전도 프로젝트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올해는 코로나로 인해 실직의 위기를 맞은 사람들을 돕는데 교회가 앞장서기로 했다. 크리스마스 선물과 생필품을 이웃에게 나눠줄 예정이다.교인들끼리도 서로 돕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우리 교회는 하나의 가족입니다. 추수감사절과 크리스마스에는 서로 서로 안부를 묻습니다. 누가 혼자 된 상태이고 그래서 누구를 초대해서 함께 식사를 해야하는지 다 알고 있습니다. 물론 내 생각에 올해는 상황이 조금 바뀔 거 같네요. 그러나 실외 히터를 갖춘 가족들은 사람들을 초대해서 올해에도 좋은 시간을 보낼 겁니다.” 켈 목사는 지금 요한계시록을 강해설교 중이다. “이 성경에는 어두움과 희망을 주는 빛이 함께 섞여 있습니다. 올해 특히 요한계시록이 우리에게 필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준비에 따라서 우리는 지금 21장에서 22장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통해서 모든 것을 다 새롭게 만드신다는 내용이죠. 감사하게도 그게 바로 지금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입니다. 정말 그 어느 때 보다도 말이죠.” 원제: Go Tell It on the Facebook Live: Preparing for a COVID Christmas Eve Servic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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