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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는 변하는 것이다
by R. C. Sproul
2020-06-14
이론상 가장 오래된 미스터리는 바로 이 질문에 담겨 있다: 시간이란 무엇인가?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는 시간과 공간을 “순전한 관념(pure intuitions)”이라고 정의했다. 우리는 시간이 물질 및 운동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질과 공간(물질과 운동)이 없다면 시간의 경과를 측정할 방법이 없다. 시간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 결코 시간을 멈출 수는 없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인간은 다양한 물질로 시간의 경과를 측정해 왔다. 표면 위를 가로지르는 태양 그림자의 움직임을 사용한 해시계, 쏟아지는 모래를 사용한 모래시계, 시계 안에서 작동하는 기어가 원을 따라 움직이는 분침과 시침. 나는 큰 벽시계를 쳐다보면서 초침의 움직임에 모든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시계 속 12라는 숫자를 보면서 초침이 그 숫자를 지나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눈은 또한 아래에 있는 6이라는 숫자를 보고 있는데, 아직까지 분침이 거기까지 가지 않은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분침이 시계 바닥을 쓸고 지나가며 6을 스치는 그 순간, 나는 시간이 미래를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는 사실을 느낀다. 분침이 그 숫자를 스쳐 지나는 바로 그 순간에 조금 전까지 미래였던 시간이 어느덧 과거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종종 시계를 앞에 놓고 이런 실험을 할 때면 나는 시계의 움직임을 멈추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그러나 시계는 멈추지 않는다. 아니, 멈출 수 없다. 누군가가 이미 선언했듯이,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피조물 속 모든 것은 다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모든 피조물은 다 변한다. 모든 피조물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겪는다. 하나님,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영원하고 불변하다. 하나님, 하나님 한 분만이 시간이 주는 이 가차없는 공격을 피해갈 수 있다. 우리는 시간 속에서 순간을 측정할 뿐 아니라 연대 및 시대라는 이름을 붙인 일정한 기간도 같이 측정한다. 마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가 그의 명저 ‘존재와 시간(Being and Time)'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우리는 현세대를 살면서 여러 번에 걸쳐 인류 역사의 변환을 목격했고, 그럴 때면 시간이라는 벽 사이에 끼인 우리는 그 벽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것과 같은 충격을 느끼기도 한다. 흔히들 시대가 변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고 시간, 그 자체가 변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전히 1분은 60초고 1시간은 60분이며 하루는 24시간이다. 그러나 문화는 패턴, 가치, 그리고 추구하는 방향이라는 면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내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 나는 극적인 문화의 변화를 목격했다. 루즈벨트 대통령(Franklin Delano Roosevelt)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라디오를 통해서 미국이 처음으로 원자 폭탄을 시험 투하한다는(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이전) 소식을 들었을 때도 나는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도 똑똑하게 기억할 수 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케네디 대통령(John F. Kennedy)이 암살되었을 때, 러시아가 우주로 스푸트니크호를 발사했을 때, 그리고 처음으로 인류가 달에 발을 내딛었을 때에도 나는 그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때보다도 내가 가장 생생하게 기억하는 십 년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1960년대의 십 년이다. 당시 미국이 겪은 문화적 무혈 혁명은 너무도 엄청나서 사람들이 그전까지 자연스럽게 여기던 문화를 1960년대 이후 세계관에 비추어 볼 때 마치 외계인의 문화처럼 생소하게 느낄 정도였다. 60년대의 혁명은 이상주의의 종말을 고했고 성적 혁명을 포함하여 우리 문화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그중에서도 결혼의 신성함이 눈에 띌 정도로 심각하게 손상되었다. 공공장소에서 들을 수 있는 깨끗하고 건전한 연설은 점점 드물어졌다. 태어나지 않은 태아의 생명에 대한 신성함은 입법적으로 공격 받았고, 도덕적 상대주의는 이제 우리 문화의 표준이 되어 버렸다.이 도덕적 상대주의와 함께 우리의 일상생활을 바꾸어 놓은 기술 발전도 있었다. 컴퓨터의 등장과 보급으로 인해 획기적으로 지식이 폭발했고, 사람들은 이제 누구라도 다 어느 정도는 “온라인”에서 살아가는 새로운 문화가 도래했다. 하지만, 이런 상대주의 문화로 인해 약물 중독, 자살, 포르노 중독 같은 사회 문제가 심각할 정도로 늘어나고 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는 특히나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도전이 되고 있다. 1960년대 이후 교회가 맞은 비극은, 세속 문화가 얼굴을 바꾸면 거기에 따라서 교회도 같이 얼굴을 바꿨다는 사실이다. 세상과 연결되고 싶은 열망에 빠진 교회는 이제 단지 세속적 세상이 내는 소리의 메아리로 전락하고 있다. 왜 그럴까? 어떻게 하든지 이 세상과 “더불어(with it)” 있고 싶은 열망과 이 현대 세상으로부터 환영받고 싶은 갈망 때문이다. 결국 교회는 어떻게 해서라도 극복해야 할 상대성을 가장 열정적으로 도입한 곳이 되고 말았다. 오늘과 같은 시대에 그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현세와 현실을 다루면서도 변하지 않는 영원과의 연결점을 잃어버리지 않는 교회다. 영원과 거룩함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면서 유한하고 세속적인 이 세상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교회다. 교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한 교회는 언제나 신성함(sanctity)을 추구할지 아니면 신성함을 더럽히는 불경함(profanity)을 추구할지를 놓고 고민할 것이다. 우리는 문화의 노예가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으로 가득 찬 교회를 필요로 한다. 죽어 가는 죄인의 박수 소리를 듣고 싶어하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분의 독생자를 기뻐하기 위해 존재하는 교회를 필요로 한다. 지금 그런 교회는 어디에 있는가? 그런 교회는 바로 그리스도가 세운 교회다. 죽어가는 세상을 향해 구속의 사명을 담당하는 교회, 우리는 바로 그런 교회를 세우라고 부름 받았다. 오 주님, 이런 부르심에 우리의 귀가 닫혀 있다면, 지금 우리를 또 우리가 속한 이 문화를 불쌍히 여겨주소서.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Times, They are a-Changing번역: 무제
시간
문화혁명
도덕적상대주의
1960년대
임마누엘칸트
마틴하이데거
진짜교회
역사
근현대교회
삶을 풀어내는 성경
by 김상일
2020-06-11
“우리가 성경 본문에 접근할 때, 우리는 ‘기존의 이해(pre-understanding)’를 가지고 접근한다. 이는 성경에서 다루는 주제에 대해 이미 수립된 신념이 있는 것이다. 이 신념들은 강하고 깊으며, 많은 경우 암묵적이다. 언어화하거나 공식화하기도 힘들며, 심지어는 스스로 인식하기도 어렵다…”(센터처치, 214쪽)팀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 신학하기’를 펼쳐 나가는 뼈대 세우기의 일환으로, 필자는 앞으로 세 번에 걸쳐서 각각 1) 성경, 2) 교리와 전통, 3)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이라는 각각의 주제를 매회 다루고자 한다. 이번 연재에서는 첫 번째로 중간 지대에서 성경을 읽는 일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살필 것이다. 필자는 켈러가 말하는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를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라고 규정하고자 한다. 그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기에 앞서, 중간 지대에서의 성경 읽기가 아닌 것은 어떤 모습인지를 먼저 살펴 보겠다. 여러 경우가 있겠지만, 대표적으로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다.‘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란,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성경을 읽는 사람의 삶이 완전히 흡수되어 버리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좋게 들릴 수 있다. 신앙인으로서 우리 모두는 성경 자체의 용어와 성경이 제시하는 나름의 틀을 통해서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더 잘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를 잘 이해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나은 해석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삶이 성경에 흡수된 채 거기에만 머무는 데서 시작된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 심판 같은 개념들, 성경 시대 당시의 문화와 언어, 지리 등에 흠뻑 빠져들어서 능통해지는 것은 성경을 중간 지대에서 읽어내는 데 필수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중간 지대의 성경 읽기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에는 현대인의 질문과 고민, 현대 문화가 가지는 독특성에 대한 고려가 담겨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좀 더 실제적으로 말하자면, 성경이 말하는 세계 안에 흠뻑 빠져들어가는 그 작업도 만만한 작업은 아니다. 성경 안에 완전히 푹 빠져들려면 내가 살아가는 문화, 나에게 익숙한 것들, 내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는 전제나 가치들을 벗어나서 낯선 문화, 익숙하지 않은 것들, 당연하지 않은 전제나 가치들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21세기의 첨단 과학과 문화 속에서의 삶을 익숙하게 여기는 사람에게 고대 문화와 그 세계로 들어가는 일은 힘들고 불편하기만 하다. 그러므로 비록 성경의 세계로 흠뻑 빠져드는 일은 모든 성경 해석자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작업임이 확실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경 읽기는 성경이 말하는 것들이 단지 성경 안에서 어떻게 풀리는지에 관한 읽기며,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아니다. 중간 지대의 신학함이 말하는 성경 읽기는 그와는 다르다. 어떻게 다른가? 좀 더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 보겠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주제는 적어도 개신교인들의 성경 읽기에서는 역사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다. 이 주제에 대해서 성경 본문이 무슨 말을 하는지에 대한 논쟁은 개신교 종교 개혁 이래로 항상 끊이지 않았고, 최근 들어서는 소위 옛 관점과 새 관점이라는 두 관점 사이의 대결로 치달으면서 논쟁이 격해졌다. 그리고 성경을 성경 당시의 관점으로 읽어내는 데 집중하는 서로 상이한 관점 사이의 이런 논쟁의 방향과 흐름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어떤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일단 이런 논쟁이 성경 본문을 읽어낼 때 주로 보여주는 관심사는 ’지금’이 아니라 ‘그 당시’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칭의론 논쟁의 핵심은 과연 칭의론이 (옛 관점이 말하듯이) 하나님 앞에서 개인의 죄책을 해결하는 구원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 아니면 (새 관점이 말하듯이) 당시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배격과 배타성의 문제, 즉 교회론과 선교론의 문제를 다루는 것이냐다.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가르침이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어떤 의미인지를 밝히는 일에 이런 논쟁이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학문적 논쟁은 현대인의 일상에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 구체적으로 무슨 뜻인지를 보여주는 데는 상대적으로 관심이 적다. 그러므로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이런 논쟁은 거의 호소력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신학자도 아니고 신학생도 아닌, 단지 일상을 살아가는 데 바쁜 현대인들이 왜 굳이 바울이라는 몇천 년 전의 인물이 말했던 ‘의로움’을 추구하는 길에 대한 얘기에 귀기울여야 하는가. 더군다나 현대 세상 문화는 의로움에는 별 관심이 없어도 괜찮은 문화다. 남에게 피해만 안 끼치면 마음대로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살아도 잘못이 아니라는 문화적 내러티브가 대세인 시대에 어느 현대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관심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노력하겠는가?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한 성경 본문을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는, 어쩌면 의로움이라는 용어가 가리키는 실재가 현대인의 삶의 어떤 부분을 말하는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켈러는 삶으로 풀어내는 성경 읽기의 실례로서 로마서 3장 21-28절을 본문으로 한 “믿음으로 의롭게 됨”(Justified by Faith)이라는 자신의 설교(2009.3.8)를 통해서 잘 보여준다. 그는 우선 이미 언급한대로 로마서 본문이 제시하는 '의로움 혹은 의롭게 됨(righteousness = to be justified: 켈러에 의하면 해당 본문에서 두 단어는 사실 같은 개념의 단어임)'이라는 단어에 대한 현대 문화의 오해를 걷어 내고자 한다. 그는 현대인 대다수가 의로움이라는 단어를 단지 도덕적이고 훈계적인 단어로 인식하는 경향이 있음을 가리키면서, 이 단어는 결과적으로 현대 문화 안에서 거의 아무런 호소력도, 매력도 없다는 것을 밝힌다. 하지만 그는 곧바로 성경 본문에 사용된 의로움이라는 단어가 사실 알고 보면 현대인들에게 아주 낯선 단어는 아닐 수 있음을 알려준다. 켈러에 의하면, 해당 성경 본문에서 말하는 의로움이란, 도덕적으로 탁월하고 완벽한 삶의 추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 주는 성취나 업적’을 가리킨다.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증해주는 성취나 업적이란 무엇인가? 켈러는 영화 '불의 전차'에 등장하는 달리기 선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는 달리기에 엄청난 열심을 보이는 선수였고, 그의 열심을 지켜보던 누군가가 마침내 그에게 왜 그토록 달리기에 열심을 내는지 묻게 된다. 켈러는 그 질문에 대한 그 선수의 대답을 이렇게 인용한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총성이 울리면, 나는 10초 안에 내가 존재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 주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어디에선가—그것이 자신의 직업이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을 받는 것이든, 어떤 대의에 대한 헌신이든—발견해야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존재다. 켈러는 이런 자기 존재 가치를 확증 받으려는 시도, 그리고 그런 확증을 가능하게 해주는 업적이나 성취가 바로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렇게 보면 모든 현대인이—아니 사실 모든 사람은—의로워지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추가적으로 켈러는 영화 '아웃 오브 아프리카'(Out of Africa)로 잘 알려진 시드니 폴락(Sydney Pollack) 감독의 인터뷰를 인용하면서 이런 의로움의 추구가 보편적인 인생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확증한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매번 영화 제작을 마칠 때마다, 나는 내가 살아야 하는 이유를 1년 정도 더 벌었다는 생각을 합니다.” 켈러에 의하면, 폴락은 '불의 전차'에 나오는 달리기 선수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으며, 자신의 노력과 성취를 통해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그들만 그렇게 하는가? 켈러는 묻는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직업적 성공으로, 자녀 교육을 통해서,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 또 다른 여러가지 방식으로 우리 스스로가 존재할 만한 이유를 얻어내고자 하지 않는가. 당장 설교자의 경우를 보자. 왜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들의 설교를 성도들이 어떻게 평가하는지에 대해서 그토록 민감한가? 왜 설교가 좋았다고 하면 우쭐하게 되고, 설교가 별로였다고 하면 그토록 우울해하는가? (이것은 필자 개인의 경험이기도 하다.) 어쩌면 설교자는 자신의 존재 가치나 자신의 정체성의 기반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설교를 얼마나 잘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고 은연 중에 생각하기 때문은 아닐까? 그것이 바로 ‘믿음과는 상관없이’ 스스로 의로워지려는 노력이라고 켈러는 말한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누구나 우리의 업적과 성취를 통해서, 혹은 다른 무언가를 수단으로 삼아서 의로워지고자 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들 대다수의 삶을 규정짓는다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됨이라는 성경의 가르침은 한낱 과거의 가르침으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삶에서 믿음 아닌 다른 것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기 때문이다.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우리로 하여금 더이상 다른 것들을 통해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구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존재 가치를 찾는 삶을 살라고 주문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설교자가 당장 하룻밤 사이에 하나님 안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게 되고, 곧바로 이후부터는 설교에 대한 성도들의 칭찬이나 비판에 귀는 기울이되, 거기에 자신의 존재 가치가 달린 듯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마 어려울 것이다. 마찬가지로, 평생 자신의 직업적 성취를 통해서 자기 존재 가치를 확인하던 사람이 성경의 가르침을 머리로 받아들인다고 해서 곧바로 가르침대로 살 수 있게 될까?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는 존재가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에 대해서 가르치는 것들을 현대인이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공명하는 것으로 명확하게 받아들일 경우, 그 파급 효과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커진다. 왜냐하면 그런 읽기는 더이상 성경을 종교적인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으로 내버려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읽기는 결국 교회나 사역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삶에 대한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사람들의 공감을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엄청나게 커진다. 성경 읽기는 궁극적으로 인생 읽기가 된다. 중간 지대에서 신학하기라는 관점에서 보면, 이런 성경 읽기는 켈러가 말하는 신학적 비전의 성격을 잘 드러낸다. 우선, 이러한 성경 읽기는 전통과 교리의 가르침을 아무 성찰 없이 기계적으로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대신, 현대인의 삶의 정황 속에서 성경을 읽어 냄으로써 전통과 교리가 말하는 바가 현대적 맥락에서 어떤 것인지를 다시 보게 해준다. 더 나아가서 이런 성경 읽기는 목회 방법론과 프로그램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를 들면, 현대인의 지대한 관심사 중 하나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는 데 있다고 한다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성경의 가르침은 교회 내에서 소그룹을 구성하는 방식에 큰 영향을 끼칠 수 있다. 어떻게 그럴까? 성도들이 자신들의 존재 가치를 교회 내 활동을 통해서 얻어내려는 노력을 최대한 지양할 수 있게 해주는 소그룹 구조는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을 교회 리더가 던질 수 있다면, 사역 프로그램이나 목회 방법론을 칭의의 가르침에 합당하게 만들기 위해 어떤 모습을 갖춰야 할지 고민할 여지가 생긴다. 이런 고민은 목회가 성공했다는 다른 교회에서 소위 잘 먹힌다는 프로그램을 무작정 가져와서 돌리는 일과는 차원이 다르다. 오직 우리 교회의 상황을 알고, 성도들의 필요를 아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을 말이나 글로 가르치는 일에서 멈추지 않고, 사역의 구조와 사람들의 관계 맺는 방식이라는 차원으로 녹여낼 수 있어야 가능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이 믿음으로만 의롭게 된다는 가르침을 설교나 성경 공부를 통해서 단지 듣기만 해서는 변화를 경험할 가능성이 적다. 하지만 자신들이 섬기는 교회 내의 사역 구조와 방법론이 그러한 칭의의 가르침을 반영하고 있는 것을 반복적으로 보게 되고, 또한 자신들이 섬기는 모든 사역 안에서 그런 가르침이 실제로 구조화되고 체화되어 교회의 삶에 녹아드는 것을 목도하게 된다면, 성도들이 변화를 경험할 여지는 당연히 더 커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중간 지대에서의 신학함이며, 그런 신학함에 맞는, 삶을 풀어내는 성경 읽기다. 마지막으로, 자신의 책 ‘센터처치’에서 켈러는 성경 전체를 꿰뚫을 수 있는 주제들을 세 가지 카테고리로 묶어서 부각시킨다. 그 주제들은 1) 추방과 귀향, 2) 언약과 성취, 그리고 3) 왕국과 도래다(센터처치, 83-88쪽). 이런 각각의 성경 신학적 주제들은 고도의 학문적 연구가 필요한 주제들이다. 하지만 그런 연구 자체에만 만족한다면, 그것은 그저 삶을 흡수하는 성경 읽기가 될 뿐이다. 궁극적으로 성경 읽기에 대한 우리의 고민은 어떻게 해야 성경을 통해서 삶을 풀어낼 수 있는지여야 한다. 비록 켈러가 이 질문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답을 주기는 하지만, 그가 모든 답을 줄 수는 없다. 결국 독자 여러분이 섬기는 교회의 상황과 필요는 오직 그 현장에서 성경을 읽어 내려고 하는 여러분 스스로만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번 글은 여기서 마치고, 다음 연재에서는 교리와 전통을 가지고 중간 지대에서 신학함이란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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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
by Derek Thomas
2020-06-07
간단히 말해서, 예배의 규범을 정하는 원칙(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이 있다는 말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 대해서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는 지시사항이 있다는 것이다. 외적으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사람이 왜 성경 속에서 발견되는 이 원칙에는 반대하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예배뿐 아니라, 기독교인의 삶 전체가 다 성경이 정해 준 규칙대로 살아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 면에서 자신을 성경적인 기독교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라면 예배에 대해 성경이 정한 원칙을 더 소중하게 가슴에 간직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반율법주의(antinomianism)와 예배 자유주의에 문을 열어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말러(Mahler) 교향곡을 어떻게 들어야 한다든가, 우표 수집을 해도 좋다든가, 흰족제비를 애완동물로 키워도 된다든가 하는 일에 대해서 성경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물론 나쁜 의도는 아니더라도, 잘못된 가르침을 받은 성경중심주의 기독교인 중에는 교리주의에 빠져서 그런 모든 취미가 하나님의 뜻에 반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어떤 환경을 만나더라도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의 삶에서 중요한 부분이다. 그리고 시대와 모든 환경을 초월하여 성경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라는 사실에 기꺼이 동의하는 것은 모든 기독교인에게 가장 기초가 되는 핵심이기도 하다. 그러나 성경적 권위가 이 시대 상황에서는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성경은 몇몇 특정한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예를 들어서, 주님의 날에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함께 예배를 드려야 한다. 우리는 또한 직장에서 노동하면서 일용할 양식을 벌어야 한다. 그에 덧붙여, 모든 가능한 환경을 다 포함하는 아주 일반적인 원칙을 성경은 제시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롬 12:1-2). 실로 우리의 모든 삶은, 그게 명령이든, 금지 사항이든 아니면 일반적인 원칙이든지 간에 다 성경에 의해서 규제 받아야 한다. 달리 말해서 한마디로 모든 삶을 통제하는 원칙이 있다는 것이다. 특히 존 칼빈(John Calvin)과 같은 종교 개혁자들과 17세기 청교도를 대표하는 웨스트민스터 총회원의 경우 회중 예배를 진지한 시각으로 바라보았다. 예배와 관련해서는 말씀에 순종한다는 일반적인 원칙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어떻게 예배를 받으셔야 할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이 필요하다고 확신했다. 그에 따라 회중 예배에 대한 특정 요구사항이 만들어졌고, 우리는 거기에서 빼거나 더해서는 안 된다. 칼빈은 이 구성에 관해 다음과 같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을 했다.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명백하게 인정하지 않은 모든 숭배 방식을 승인하지 않으신다”(‘The Necessity of Reforming the Church’). 그리고 1689년 두 번째 런던 침례교 고백서(‘Second London Baptist Confession’)에 따르면, “예배 방법은 하나님께서 제정하셨다. 그러므로 참되신 하나님에 대한 예배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방식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나 창작, 사탄이 주는 연상이나 눈에 보이는 그림 또는 조각상으로 드리는 예배를 받지 않으신다”(22.1)그렇다면 성경은 어디에서 이런 가르침을 주고 있는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성경 구절이 여기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데, 성막을 세우는 것과 관련해서 엄격한 규범을 설명한 출애굽기는 “네게 보인 양식대로”(출 25:40) 하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또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은 하나님은 가인의 제사 또는 그의 마음이 하나님의 요구 사항을 채우기에 부족하다고 암시하고 있다(창 4:3-8). 그리고 십계명의 첫 두 계명은 예배와 관련한 하나님의 특별한 지시를 담고 있다(출 20:2-6). 황금 송아지 사건과 관련한 가르침은 예배가 단지 인간이 생각하는 가치와 취향에 맞춰 드려질 수 없다는 것이다.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레 10)로 분향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하나님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삼상 15:22)라고 하시며, 제대로 형식을 갖추지 않은 사울의 예배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장로들의 전통”(마 15:1-14)에 따르는 바래새인의 예배를 거부했다. 이 모든 사례들은 성경이 분명하게 정해주지 않은 다른 방식과 인간이 중시하는 가치에 따른 예배를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특히 중요한 사례는 골로새와 고린도에서 드려지던 잘못된 예배에 대한 바울의 반응이다. 바울은 골로새에서 드려지는 예배를 “자의적 숭배”(ethelothreskia, 골 2:23) 또는 “스스로 만든 종교”라고 규정했다. 골로새 교인들은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소를 예배에 도입했다(그들은 그 원천을 천사라고 주장했다. 골로새서 2장 18절의 “천사 숭배”가 그런 의미다). 고린도 교회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과도한 방언과 예언이었고, 그로 인해 바울 사도는 회중 예배의 규범을 정했다. 바울은 영적 은사를 사용하는 숫자와 순서를 “모든 삶”에서 다 적용되지는 않는 독특한 방식으로 규정했다. 통역이 없으면 방언을 하지 못하게 했고(고전 14:27-28), 두세 명만이 예언을 하게 했으며, 그것도 순서대로 하게 했다(29-32). 적어도 고린도 사람들을 위한 바울의 가르침은 회중 예배가 규제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그 방식이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 똑같이 적용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는 무엇인가? 예배의 특정 요소가 부각되었다. 성경 읽기(딤전 4:13), 말씀 선포(딤후 4:2), 찬양(엡 5:19; 골 3:16), 그 중에서도 말씀 전체뿐 아니라 시편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탄생-삶-죽음-부활-승천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의 전개를 드러내는 찬양 부르기와 말씀을 중심으로 한 기도(아버지의 집은 “기도하는 집”, 마 21:13)다. 그리고 교회가 담당해야 할 두 개의 성례인 세례와 성찬식을 통해서 말씀을 바라보기(마 28:19; 행 2:38–39; 고전 11:23–26; 골 2:11–12)다. 거기에 추가해서 가끔씩 들어가는 요소인 맹세, 서원, 극한 금식 그리고 감사도 말씀 속에서 인정되고 부각되었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1:5 참고).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부적절함과 어리석음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고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다음주 예배에 광대가 나와서 성경 말씀을 마임으로 공연할 것이라고 광고할 수 있는 자유가 우리에게는 없다. 그렇다고 모든 예배가 다 성례만 치르는, 공장에서 나온 똑같은 모양의 과자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원칙에 충실하면서도 누릴 수 있는 엄청난 다양성이 있다. 예를 들어, 성경이 분명하게 언급하지 않은 영역에서 그렇다. 따라서 찬송가를 부를 것인가 가스펠송을 부를 것인가, 또는 성경을 세 구절 읽을 것인가 아니면 세 장을 읽을 것인가, 기도를 한 번에 길게 할 것인가 아니면 여러 번에 나눠서 할 것인가, 성찬식 때 쥬스를 마실 것인가 아니면 진짜 포도주를 마실 것인가 등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적용되거나 언급될 필요는 없다. 이 모든 영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칙은 이것이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러나 누군가가 예배 시간에 춤을 추거나 드라마를 하는 게 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물어야 한다. 성경 어떤 구절이 그런 행위를 정당화하고 있는가? (그렇다고 설교자가 강대상 위를 다니면서 목소리를 연기자처럼 하는 것도 드라마라고 주장하는 것은 지금 말하고자 하는 논의에서 벗어난다). 이 두 가지 사례는 모두 뭔가를 명확하게 보여주려는 시도며, 이것이 성경적인가 아닌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동시에 이 논의의 핵심도 아니다. 왜냐하면 성경 어디에도 명령은 고사하고, 여기에 관한 그 어떤 언급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받은 모든 성경적 해석 규칙을 기꺼이 포기하지 않는 한, 시편의 내용을 가지고 또는 법궤 앞에서 분명히 벌거벗고 춤을 춘 다윗의 사례를 갖고 지금 이런 문제를 논쟁하는 것은 시간 낭비다. 이런 식의 논쟁에서 종종 간과되는 것이 바로 신앙 양심의 역할이다. 예배를 통제하는 원칙이 없는 경우, 우리 모두는 시키는대로 하지 않는 회중을 향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다며 공격하는 “예배 인도자” 또는 강력한 목사의 지시를 받으며 예배를 드릴 수 밖에 없는 처지다. 이런 공격의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가장 위로가 되는 문장은 이것이다. “하나님만이 양심을 주관하시는 주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신앙과 예배의 문제에 있어서 말씀에 위배되거나 말씀에서 이탈된 인간적인 교리나 계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양심의 자유를 주셨다. 따라서 양심을 떠나 그런 인본적인 교리를 믿거나 그런 계명을 순종하는 것은 진정한 양심의 자유를 배반하는 것이다. 또한 그런 맹목적인 신앙과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참된 양심과 이성의 자유를 파괴하는 것이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0:2). 하나님이 주신 명백한 지침인 경우, 그것에 순종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자유다. 그 외의 다른 모든 것은 다 속박이고 율법주의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Regulative Principle of Worship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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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민스터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
by Brett McCracken
2020-06-03
미국에서는 COVID-19로 인해 세상이 멈추고 재택 명령이 내려진 이후, “필수적인 것(essential)”과 “비필수적인 것(non-essential)”이라는 두 단어가 대화 중에 중요하게 떠올랐다. 필수적인 것으로 분류된 상점과 서비스는 문을 열 수 있는데, 슈퍼마켓, 철물점, 주유소, 애완동물 가게, 세탁소 등이 이에 해당된다. 그 외 다른 것들은 “비필수적인 것”으로 분류되어 별도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문을 닫아야한다. 그 중에는 체육관, 영화관, 카지노, 소매점, 스타디움, 그리고 콘서트장 등이 있다. 교회는 다름 아닌 후자 곧 비필수적인 것에 포함되었다. 대부분의 교회가 이 명령에 따라 예배를 취소했는데,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한 공간에 모였을 때 발생하는 바이러스 전파의 위험이라는 상식 때문이다. 대부분의 교회는 하루라도 빨리 예배를 재개할 수 있도록 정부의 허가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지금 조금씩 예배를 재개하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교회 모임이 바이러스 전파를 증가시킨다는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교회 폐쇄를 이해한다고 하더라도, 교회를 “비필수적인 것”으로 규정한 사실에 대해서 항의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나는 지금 COVID-19 감염을 막는 전략 자체에 대해서 엄밀하게 따지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지역 교회의 가치다. 비록 정부가 제시한 가이드라인을 존중해야 하고 또한 교회를 다시 여는 것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접근해야 하지만, 교회가 너무도 쉽게 “비필수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현실을 보며 세상이 교회의 위치를 얼마나 손상시킬지에 대해서 걱정해 보는 것은 나름의 의미가 있다. 교회, 있으면 좋은 것, 그러나 결코 필수적이진 않은 것캘리포니아 사회 활동 재개 계획에 따라서 3단계가 되기 전까지는 교회 모임이 재개되지 않을 것이라는 주지사의 발표를 들었을 때 나는 슬펐다. 사람들이 많이 모였을 때 감염 위험이 높다는 사실에 반대해서가 아니라, 주지사의 발표는 현대 서구 사회에서 교회 모임이 얼마나 초라한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지를 제대로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캘리포니아 사회 활동 재개 계획에 따르면, 교회는 네일샵, 체육관 그리고 영화관과 같은 범주에 속하는데, “있으면 좋은 사치”지만 없더라도 오랜 시간 생활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 항목들을 모아놓은 곳이다. 교회는 한마디로 엔터테인먼트 항목에 속해 있다. 즐기는 데는 필요하지만, 인간에게 또 사회 활동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고, 더더욱 건강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재개해야할 가치는 전혀 없는 것이 교회다. 주류 판매점, 마리화나 판매점, 그리고 골프 클럽은 없으면 안 되는 “필수적인 것”으로 구분했음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모여서 드리는 예배는 굳이 없어도 사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이야말로 지금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역사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이 얼마나 혁명적인 생각인지 알고 있는가? 단지 수십 년 전만 해도, 사회에서 교회에 가는 것은 말 그대로 일상생활에서 중심이 되는 활동이었다. 개인 뿐 아니라 공동체에도 너무 중요했기 때문에, 교회에 가는 것을 “비본질적인 것”으로 구분한다는 것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오늘날 교회 모임이 “비본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은 COVID-19 전염병이 새롭게 만든 현실이 아니라 단지 우리가 그동안 보지 못하던 현실이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이런 현실은 무슨 반기독교 세력이 만든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이것은 기독교인 스스로가 초래한 현실이다. 신앙, 철저히 개인화된 소비재교회에 가는 것이 영화나 스포츠 경기를 보러 가는 것과 비슷한 소비자 습관 수준으로, 다시 말해 굳이 없어도 상관 없는 선호도의 문제로 전락한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지난 수십 년을 거치면서 우리는, 기독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교회에 책임을 지고 있고 또한 오로지 교회를 통해서만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완성된다고 생각하는 대신, 교회를 개개인이 나름의 영적 구도의 길을 가는 데 필요하다면 사용할 수도 있는 일종의 선택지의 하나로 보게 되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회(에클레시아)가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하고 있지만(예, 엡 3:7-12), 우리가 가진 무감각한 교회론은 종종 교회를 확실하게 비본질적인 장소로 강등시켰다. 표현적 개인주의를 누르기보다는 더 향상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전제 하에, 교회가 단지 사람마다 다른 영적 구도의 과정에서 있으면 좋은 것 정도의 수준이라면, 아무리 긴 기간이라도 우리는 얼마든지 교회 없이 지낼 수 있다. 게다가 얼마든지 집에서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 신앙이기 때문에 교회는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고들 흔히 간주한다. 성경책, 괜찮은 워십 찬양, 그리고 한두 개 영적인 팟캐스트만 있다면 신앙 생활에 아무런 문제가 없으니까. 영적 건강을 위해서 우리에게 정말로 교회가 필요한가?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보수주의자나 진보주의자나 구분 없이 다 신앙과 관련해선 “사유화된 개인 영성”이라는 시각을 가지고 있다. 보수주의자는 특히 “개인”을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신앙을 지키고 표현하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는, 자기 주권과 개인의 힘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이다. 진보주의자는 “사유화”를 강조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공적인 삶과 정책으로부터 종교가 분리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신앙과 관련해서 “안전하게 집에서 신앙생활 하기”야말로 진보주의자 입장에서 영구적으로 실행하기를 바라는 정책이다.) 그러나 신앙이 사유화되고, 개인화되고 또 소비 영역으로 전락하면, 모든 사람에게 피해가 된다. 건강한 교회 공동체와 연관을 가지지 않은 개인적인 영성은 언제라도 일관되지 않은 이상한 상태로 변질될 수 있다. 크게 볼 때, 지역 교회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 때 사회 또한 적지 않은 손해를 본다. 교회는 여전히 사회 공동체에 너무나 중요하다(푸드 뱅크, 노숙자 지원, 교육 지원, 고아 돌보기, 상담, 등등). 또한 교회는 더 많은 사람들의 정신적 건강에 기여한다. 교회가 다시 열리지 않는다고 해도 세상은 그것을 알아차리기는 할까? 정부가 아무리 아니라고 해도 교회가 스스로를 “필수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정부 방침에 저항해야 한다는 게 아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존 문화 전쟁에 불을 붙일 뿐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단순히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교회가 “필수적인 것”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게 아닐까? 교회를 “비필수적인 것”으로 묶고 있는 이 팬데믹은 기독교인에게 경고가 되어야 한다. 교회가 사라졌을 때, 세상은 과연 교회를 그리워할까? 교회가 애초에 하나님의 생각이었고 또 하나님의 사역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깨달은(마 16:18-19) 기독교인이 신앙 생활을 하는데 허전함을 느끼기는 할까? 어떻게 해야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가리지 않고 모두의 눈에 교회가 이 세상 속에서 “필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나는 이 전염병이 그리스도의 연합된 몸이자 영광스럽고 비교할 수 없는 선물인 교회의 가치를 상기시키는 데 일조하길 바란다. 메간 힐(Megan Hill)은 그녀의 훌륭한 새 책인 ‘속한 곳’(A Place to Belong)에서 이렇게 썼다. “지역 교회의 겸손한 모임에서 우리는 그리스도 자신과 교제한다. 그리스도인 여러분, 우리에게는 이보다 더 큰 특권은 없다.”나는 또한 이 전염병을 통해서, 사유화된 영성, 소비자화 된 영성이 충분하지 않음을 많은 이들이 깨달으면 좋겠다. 사유화되고 소비자화 된 영성은 개인에게도 또 사회에게도 좋지 않다. 그 누구에게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굳이 집을 나설 필요조차 없게 하는 “나와 예수님 신앙”을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바로 건강하고 봉사하고 또 성장하는 지역 교회에 뿌리를 내린 신앙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신앙은 교회를 통한 신앙이다. 교회를 통해 너무도 막강한 존재감을 갖게 된 신앙, 그래서 행여나 교회가 사라졌을 때 사람들이 바로 눈치채고 애통하게 만드는, 바로 그런 신앙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y We Don’t See Church as ‘Essential’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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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간힐
주일 예배와 전도의 관계
by Michael Keller
2020-05-31
주일 예배에서 전도(evangelism)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차지해야 하는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주일 예배에 참석한 회중이 모두 신자들이라고, 혹은 불신자들이라고 넘겨짚어도 되는 걸까? 고린도전서 14장 23–25절은 초대교회 예배에 신자와 불신자가 함께 참석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배를 위해 모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신자였다. 하지만 불신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향해 “미쳤다”며(23절) 거부감을 보이지 않도록, 그리고 그들이 복음을 듣고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25절)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신자들이 자신의 행실을 돌아봐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물론 이것은 예배 구성 요소 모두를 불신자들이 완벽하게 이해하도록 만들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 하려면 예배가 아니라 콘서트나 토크쇼를 열어야 할 것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찬양하는 노래와 찬송은 불신자들에게 어렵다. 성찬식도 그들에게는 이상하게만 보일 것이다.죄의 끔찍한 본질, 예수께서 거저 주시는 은혜를 회중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가정에서 하는 설교야말로 불신자들에게는 가장 어렵게 다가올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고전 2:14)에게는 복음이 언제나 불편하게 들리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 드려지는 예배이건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예배의 많은 부분이 생경하게 보이기 마련이다. 바울은 복음에서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수치스럽게 보일 수 밖에 없는 부분을 감추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적절히 상황화(contextualize)하여 불필요한 혼란과 불쾌함을 없애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에게 사람의 전통을 하나님의 계명 수준으로 여기지 말라 하신 것처럼(막 7:8–9), 우리 역시 우리가 가장 선호하는 예배 방식을 지나치게 추구한 나머지 복음을 꼭 들어야 하는 이들을 배제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다만 시편 105편 말씀처럼, “여호와께 감사하고 그의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가 하는 일을 만민 중에 알게”할 뿐이다. 어떤 식으로 이 일을 해야 할까? 시편 105편은 계속하여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의 모든 기이한 일들을 말할지어다”라고 선언한다. 이 말은 믿지 않는 이들이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보면서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보게 된다는 뜻이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이를 일컬어 ‘송영(頌榮)으로 하는 전도’(doxological evangelism)라 했다. 엄격한 의식이 아닌, 일반적인 방식성경은 예배에 대해 엄격한 모델을 제시하지 않지만 찬송, 애통, 죄의 고백, 확신, 그리고 파송에 대한 일반적인 방식들을 가르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요소들이 다 포함되어 신자와 불신자를 모두 가르칠 수 있는 예배의 공간을 만들어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우리는 믿지 않는 이들이 예배에 올 것이라는 가정 하에 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자신의 친구나 동료를 교회로 초청한 교인들은 그들이 예배 중에 불편해 하는지 아닌지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적어도 다섯 가지 기준이 필요하다. 각 항목에는 실천 사항들이 있다. 기준 1: 우리가 쓰는 말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기독교가 주변부로 밀려난 요즘 상황에서는 이 점이 교회에게 가장 어려운 걸림돌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기독교 문화는 너무도 오랫동안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기들만의 언어”와 방언을 쓰며 존재해왔다. 필자가 대학 시절 그리스도인이 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불신자 친구 한 명을 교회에 데려온 적이 있다. 예배 중에 설교자가 “어린 양의 보혈이 여러분의 죄의 구속을 위해 흘려졌습니다. 이제 그리스도를 위해 결단할 시간입니다”라고 했는데, 우리는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그게 무슨 뜻인지에 대한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실천 사항: 알기 쉽게 설명하라. 나는 설교문을 작성할 때 종종 교회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들을 상상해보곤 한다. 그들이 설교 본문이나 설교에서 설명하는 개념에 대해 가질 만한 반론이나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불필요한 기독교 용어를 피하라. 사람들이 모르는 말을 써야만 한다면, 그 의미를 설명해 주라. 기준 2: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어떤 것에 대해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예배라면, 예배를 드리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언제나 무언가에 대해 끊임 없이 가치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은 예배(worship service)라는 개념을 낯설어 한다. 기독교가 주류 문화가 아닌 요즘 시대에 이를 설명해 주는 것은 우리의 의무다. 사실 이는 신자와 불신자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다. 실천 사항: 필자가 섬기는 리디머링컨스퀘어교회(Redeemer Lincoln Square)는 각 예배 순서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해 주보 여백에 설명을 달아 놓는다. 예를 들어, 죄를 고백하는 순서의 경우 이렇게 적혀 있다. “죄의 고백은 우리가 우리 자신에 대해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해 솔직해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허상들을 좇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우리 삶을 재정비하라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은혜의 복음은 우리가 우리의 허물들을 솔직히 인정함으로써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기준 3: 적합한 투명성을 확보해야 한다SNS가 계속 광범위하게 퍼지고, 사람들이 잘 포장된 자기 모습만을 온라인에 올리면서 불신(distrust)이 생겨나고 있다. 사람들은 진실성을 갈망한다. 우리 삶이 항상 행복한 일들로만 가득할 수는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교회에만 가면 모두들 행복한 모습인 것처럼 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전적으로 진실된 모습, 죄인이지만 소망이 있는 인간으로서의 모습을 우리 예배 중에 보여 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실천 사항: 예배에는 소망에 관한 것뿐 아니라 항상 애통과 죄의 고백에 관한 요소도 있어야 한다. 필자는 개인사를 지나치게 언급하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내가 겪는 어려움을 교인들과 나눔으로써 이 기준을 실천하려 노력하는 중이다. 기준 4: 믿지 않는 이들도 예배에 온다는 것을 기억하라설교 중에, 불신자들이 기독교 신앙에 대해 가진 반론들을 그들 자신보다 더 잘 진술하는 것이 도움이 되는데, 이에는 두 가지 유익이 있다. 그러한 반론들을 이미 들어봤고 기독교가 어떤 답을 줄 수 있는지 궁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 또한 불신자들이 기독교에 대해 어떤 우려를 가졌는지 당신이 잘 이해한 내용을 진술하면, 예배에 나온 불신자들은 목사가 자신들의 마음을 알아준다고 생각하게 된다. 실천 사항: 네 가지 정도를 실천해 볼 수 있겠다. 첫째, 교인들이 성찬식에 참여하는 동안 믿지 않는 이들이 어색해하지 않도록 기도문을 인쇄하여 나눠주라. 둘째, 예배 시작 전에 불신자들을 소개하고 환영하는 시간이 있으면 좋다. 셋째, 설교를 할 때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이런 생각이 들 것입니다”라는 말을 넣으면 목회자가 그리스도인 된 교인들을 향해서도 설교하고 있다는 확신을 줄 수 있다. 넷째, 설교 후 Q&A(질의응답) 시간을 도입해 보라. 우리 교회에서는 이 시간을 Q&R (Question and Response, 질문과 반응)이라 부른다. 질문에는 반드시 반응을 보이겠다는 뜻이다. 주보에는 목사들의 휴대전화 번호가 적혀 있어서 질문이 있는 이들은 누구든지 예배 후 15분에서 20분 내에 문자 메시지로 질문을 보낼 수 있도록 한다. 기준 5: 말씀과 삶을 분명하게 제시하라불신자든 신자든 모두 구체적으로 실천되고 분명하게 선포되는 은혜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과거의 죄를 해결하는 것만이 은혜가 아니다. 은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미래의 삶에 대한 확신으로 이끈다. 기독교 교리는 중요하고, 배워야 마땅하지만, 교리는 우리가 먼저 은혜를 경험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만 우리는 비로소 그를 따르는 삶을 살고자 노력하게 된다. 의무감이 아닌 사랑 때문이다. 죄책감에 근거한 의무가 아닌 감사가 우리에게 끊임없는 동기를 부여한다. 선한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그리고 선한 삶을 위한 능력은 그제서야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이 실천되는 모습을 불신자들이 보지 못하면 그들을 설득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예배 중에는 사역 보고 및 헌신자 모집 광고를 통해 다양한 긍휼 사역 및 실천 사역을 부각시켜 보여 주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예배 참석자들은 이를 통해 은혜가 어떻게 세상으로 나아가는지 보게 된다. 실천 사항: 이 항목에 대한 실천 사항 역시 네 가지다. 첫째, 분기마다 이 세상의 고통에 대해 애통해 하며 우리가 이 세상의 필요에 어떻게 응답할 수 있는지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는 기도를 시도해 보라. 둘째, 교인들이 자신의 신앙을 실천하고 다른 이들을 섬길 수 있는 사역 기회들에 대해 예배 중에 광고하라. 셋째, 교회가 있는 지역에서 우리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는지 주시하면서 기도하며 걷기(prayer walk)를 해보라. 넷째, 신자든 불신자든 우리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예수님을 통해 주시는 참된 은혜를 믿지 않는 것이라는 사실을 매 설교마다 강조하라. 물론 이 글의 내용이 다는 아니다. 하지만 당신이 섬기는 교회와 주일 예배가 교회에 오는 모든 이들을 섬길 수 있는 공간이 될 수 있도록 고민하는 당신에게 자그마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ere Does Evangelism Fit on Sunday Morning?번역: 이정훈
영성
예배
의식
형식
전도
불신자
투명성
그라운드 안의 사람, 그라운드 밖의 사람
by 김형익
2020-05-29
빛난다고 다 금이 아니듯이, 예배당 안에 앉아 있다고 해서 다 그리스도인은 아니다. 주님께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신 것이 세리나 창기가 아닌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관원이고 선생이었던 니고데모에게 하신 말씀이었다는 점은 매우 충격적이다. 사실 나는 이것에 충격을 받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는다.교회의 지도자들, 특히 목사가 자신의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인지, 거듭나야 할 사람인지, 거듭났고 확신을 가진 사람인지, 거듭났으나 확신을 가지지 못한 사람인지, 거듭나지도 않았지만 거듭났다고 확신에 흡사한 착각을 하는 사람인지, 거듭나지 않았고 그 사실을 알기에 참으로 거듭나기를 열망하는 사람인지, 또 거듭났고 성숙에 이른 사람인지, 거듭났지만 미숙한 신앙에 머무르는 사람인지를 진단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일이다. 물론 목사가 한 영혼의 중생 여부를 어떻게 하나님께서 아시듯이 확정적으로 진단할 수 있겠는가마는. 이런 진단은, 요즘 사람들이 그렇게도 꺼려하는(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다 하는) 남을 판단하는 것도 아니고, 비판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바울 사도가 교회를 향해서 쓴 서신들을 읽어보면, 바울 사도가 서신의 대상인 교회 공동체의 신앙을 진단하고 있고 그 진단 위에서 서신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바울 서신들은 불특정 다수를 위한 신앙의 교과서로 집필된 책들이 아니다. 이점에서 목회라는 현장에서 설교와 목양이라는 책임을 맡은 목사가 회중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직무유기고 그 사역에서 영적 열매를 기대하기 어렵다.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을 경건한 어른들로 세우는 것은 나의 목회에서 포기할 수 없는 목표 중 하나다. 6년 전에 집필한 책에서 나는 경건한 어른을 이렇게 정의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목사나 장로 같은 직분을 말하는 것도 아니고 나이가 지긋한 분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은 교회의 많은 사람들이 그가 가진 재능이나 업적이 아니라 그의 경건한 영향력을 인정하기 때문에 웃어른으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정말 아는 사람, 상한 심령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줄 아는 사람, 자기 자신보다 그리스도께 푹 빠지는 법을 아는 사람, 자아를 찾는 것보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에 더 관심을 두는 사람, 거룩함에서 자라 가는 사람, 사람들에게 열심과 뜨거움의 인상을 주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 자신의 내면과 사람들 앞에서의 모습의 차이를 깨뜨리고 정직하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는 사람, 얄팍한 프로그램이나 어떤 행사로 자기를 드러내지 않는 사람, 행동으로만이 아니라 존재감으로 주님을 향한 마음을 느끼게 해주는 사람, 인생에서 그리고 심지어 교회에서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한 번도 그리스도의 모습을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에게 경건한 영향력으로 다가오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가 말하는 경건한 어른입니다.”(김형익, ‘우리가 하나님을 오해했다’ 생명의말씀사 212-213쪽). 사람은 어떻게 각자의 신앙 여정을 통과하면서 경건한 어른에 이르게 되는 걸까? 내가 늘 질문하고 고민하고 탐구하는 주제다. 최소한 한 가지 분명한 결론은, 이건 그라운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교회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을 참되고 성숙한 신자로 규정하는 현실을 보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경건한 어른이 되는 길은 그라운드 밖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성품이나 성숙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다. 교회는 믿음으로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불신자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듯이, 신자들 중에도 성숙한 사람과 미숙한 사람이 있다. 성숙한 불신자(A)가 믿음으로 구원을 얻어 신자가 되었을 때, 이들의 영적 성숙은 미성숙한 불신자들(B)보다는 비교적 빠르게 일어나는 편이다. 주님께서도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마 19:30).”고 하시지 않았는가. 이때 이들보다 먼저 교인(그들이 참된 신자인지 확신할 수 없으니, ‘교인’이라고 부르겠다)이 된 사람들 중에서 미성숙한 상태(D)에 장기간 머물던 사람들의 마음에 불편한 감정이 일어날 수 있다. 나보다 한참 늦게 교회에 들어온 사람이 성숙한 신자(C)로 빠르게 성장하여 교회의 영향력 있는 리더가 되고, 경건한 어른이 되지 않는가? 이 시기심이 긍정적으로 작동하면, 그들도 은혜 안에서 성숙해져서 C의 영역(성숙한 신자)으로 가는 길을 택하겠지만, 시기심이 부정적으로 작동하게 되고 그 유혹에 넘어가게 되면 미성숙한 신자들은 엉뚱한 방향으로 향하게 된다. 그것이 E의 영역이다. 시간과 물질의 비상한 헌신, 열심, 봉사 등으로 교회의 인정을 받게 되는 일종의 불법 속성 과정(?)이다. 이때 목회자가 이들을 성숙한 신자 혹은 경건한 어른으로 인정하게 되면(인정하는 방법은 직분이나 리더십이다), 교회 전체는 방향을 잃고 표류하기 시작한다. 그런 교회에서 경건한 어른, 성숙한 신자들을 보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사실, E의 영역으로 가서 교회의 인정을 받은 사람들은 ‘그라운드 밖으로 나간 사람들’이다. 믿음 안에서의 성장과 성숙을 포기하고 봉사와 열심으로 교회의 인정을 얻으려는 E의 영역으로 나간 사람들은 돈과 거짓으로 교회의 인정을 사려고 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목사나 장로, 그리고 집사나 권사 중에서 이런 자들이 왜 없겠는가? 주님이 하신 말씀을 들어 보자.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1–23).E의 영역에 있는 자들을 향한 말씀이 아닌가! 만일 자신이 E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고 판단된다면, 돌이켜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목회자는 그런 사람들이 D의 영역(미성숙한 신자)으로 돌이켜 C의 영역(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을 향한 은혜의 항해를 시작하도록 인도해야 한다. 목회자가 E의 영역에 있는 사람들을 통해서 교회의 성장을 이루어 보려고 한다면, 그 교회에는 더 이상 소망이 없다. 그것은 목사의 영적 매춘이고, 우상 숭배다.그라운드 밖에는 소망이 없다. 그라운드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미성숙하다고 해도, 성장의 속도가 더디다고 해도 상관없다. 그라운드 안에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가 갈 방향은 하나 밖에 없다. 성숙한 신자, 경건한 어른이 있는 C의 영역으로 가는 방향, 그 길이다.
교회
교회생활
그라운드
성숙
미성숙
바울사도
하나님나라
니고데모
바리새인
게일의 한국 선교 동기와 선교 방법
by 옥성득
2020-05-28
1888년 내한한 초기 선교사 게일(James S. Gale)이 왜 선교사가 되었고, 어떤 선교 동기로 내한했는지, 또 어떤 선교 방법을 가지고 있었는지 살펴보자. 현재 한국 교회가 당면한 교회와 선교의 정체성 위기에 대해서 숙고할 때 도움이 되는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 James S. Gale, “Missionary Motive (part),” Gale Papers, Fisher Library Univ. of Toronto. 게일의 선교 동기게일은 1891년 9월 19일에 쓴 글 ‘선교사의 동기’(Missionary Motive)에서 세 가지 선교 동기를 말한다. 첫째는 야망(ambition)이다. 선교사로서 성공해서 자기 성취, 출세, 권세, 부, 명예를 차지하려는 동기다. 이런 저급하고 이기적 동기로 전진하다가 많은 이들이 암초를 만나 파선했다. 선교사들은 이 성공 야망을 늘 경계해야 한다. 둘째는 고상한 동기인데 곧 인도주의(humanitarianism)다. 수많은 이방인들이 매일 복음 없이 죽어가고, 가난과 무지와 질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으므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려는 동기다. 선교사는 아시아인, 아프리카인들이 “불타는 집에서 구원해 달라고 발버둥치는 모습”을 그리며 현지에 도착한다. 이교도들에게 서구 교육과 의료 등 ‘문명’을 전달한다. 그러나 이는 상당 부분 선교사들의 착각이다. 동아시아만 해도 서구 문화보다 더나은 점들이 많고, 그들의 문화가 그들 상황에 더 적합하다. 자족하는 한국인들은 “이 세상에서 한국만큼 좋은 데는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불타는 집에서 아우성을 치는 자들이 아니라, 평안한 가운데 인생을 즐기고 있다. 그들의 문명적 필요가 정부나 부를 통해 해소되면 선교사는 떠나야 한다. 사람들이 부족함을 느끼지 않는 곳에서는 인도주의가 설 자리가 없다. 선교사는 휴머니스트로만 머물 수 없다. 셋째는 진정한 동기로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기 때문이다.”(For the love of Christ constraineth us, 고후 5:14). 선교지에 가지 않으면 안되는 의무와 순종과 사랑이다. 그리스도께서 나와 너를 위해 죽기까지 사랑하셨기에, 그리고 “세상 끝 날까지 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시며 “가라”(마태 28:19-20)고 명령하시기 때문에 간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동기요, 세상을 위한 그리스도가 동기다.게일의 중생 경험과 선교 동기게일은 캐나다 온타리오에서 스코틀랜드 계열 장로교회에서 자랐는데, 심판하는 하나님과 지옥의 공포에 떨며 불안하고 불행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음침한 사망의 골짜기를 가듯이 매일 기쁨 없이 지냈다. 집에서 교회까지 5마일 정도 떨어져 있어서 주일 오전 예배만 참석했는데, 14세가 다 되어 갈 때 형과 함께 주일 저녁 예배에 참석했다. 그런데 설교자가 우울한 종교 때문에 고통받는 소년의 슬픔과 고뇌를 상세히 묘사하며 설교했다. 게일은 자신을 모르는 목사가 전 교인 앞에서 자기 이야기를 한다고 느끼며 깜짝 놀랐다. 자신의 내면을 속속들이 전 회중 앞에 드러내는 설교를 듣는 순간, 갑자기 크고 놀라운 빛이 게일에게 임했다. 그는 아름다운 세계를 보았다. 게일은 영혼의 평화를 맛보며 고뇌가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빛은 예수님이었다. 그가 내게 오셨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오, 내 영혼아!”라고 그는 속으로 외쳤다. 게일은 이 경험을 평생 생생하게 간직했다. 자신을 사랑하여 찾아오신 예수님 때문에, 그는 토론토대학교를 졸업하고 녹스신학교에 입학한 후, 2년 간 전도자로 살았다. 그리고 한국 선교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주변에서 신학교 학업을 계속하라는 충고에도 불구하고, 평신도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그는 왜 선교사가 되었는가? 바로 14세 때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게일의 선교관과 선교 방법그가 전할 메시지는 신학도, 교리도, 교파도 아니었다. 오직 한 가지 예수의 사랑이었다. 따라서 문명화나 사회사업은 필요한 것이지만, 게일에게 그런 것은 진정한 선교가 아니었다. 기독교인이 정치를 할 수 있지만, 교회가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선교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유교, 불교, 도교를 깊이 이해하고 동학에도 관심이 많았지만, 동학 혁명이나 의병 전쟁은 비판했다. 종교의 정치화는 파멸로 보았다. 그는 과격한 개혁 청년 이승만이 한성감옥에 있을 때 도와주면서 개종하도록 했으나 1900년 전후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은 반대했다. 1897년 첫 안식년 휴가 때 미국 알바니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아내 헤론 부인의 친척들이 유력 인사로 있는 워싱턴 D.C.를 방문하고, 한국 경험을 담은 "Korean Sketches"를 출판했다. 1904년 이승만이 출옥하자 조지워싱턴대학에 유학을 갈 수 있도록 총장에게 추천서를 써 주어 그가 좋은 교육자가 되도록 주선했다. 그가 이승만을 신뢰한 이유는 이승만이 감옥에서 사랑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경험에서 한국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려는 비전까지 품게 되었다. 게일의 친구였던 이상재도 감옥에서 요한복음을 읽다가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중생 체험을 했다. 그 경험이 YMCA 운동, 문화 민족 운동을 하는 동력이 되었다. 게일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선교라고 확신했다. 또한 하나님은 한국 역사 속에 일해 오셨다는 한국인 조사들(이창직, 이교승, 이원모)의 말을 수용했다. 하나님은 한글이나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천, 하느님, 상제, 조화옹 등)과 같은 ‘복음의 준비’들을 기적적으로 마련해 놓으셨다. 한국 문화와 전통 종교 안에는 기독교와 만나는 접촉점이 많으며, 고대부터 한국인은 하느님을 믿어 왔다. 따라서 역사와 전통과 기존 종교는 기독교에 이용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서구화가 늘 좋은 것은 아니다. 20세기의 물신숭배, 무신론, 무도덕으로 한국의 좋은 전통, 영성, 예의, 도덕을 뿌리째 뽑아 버렸다. 식민 통치와 서구의 할리우드 문화가 판을 치는 1920년대는 1880년대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타락하고 무례한 세상이 되었다. 그럴수록 게일은 한글, 한국어, 한국 문학의 수준 높았던 전통을 보존하고 계승하기 위해서 매일 몇 시간씩 한문 문집을 번역하거나, 한국 문인들의 하늘(하나님) 숭배의 역사를 정리하고, 성경을 좋은 한국어로 번역했다. 그는 ‘천로역정’과 같은 한글 번역 소설로 평민에게 복음을 전했고, 고려와 조선 시대 문인들의 글로 유학자들과 대화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했다. 기독교 사역은 언제나 ‘왜’와 ‘어떻게’를 질문한다. ‘왜’와 ‘어떻게’는 늘 새롭게 물어야 하고 상황에 따라 변해야 한다. 110년 전의 선교 방법이 지금 다 유효한 것은 아니다. 과거에 유효했던 방법을 연구하고 그 유산을 계승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국화(상황화) 작업이 없으면, 또 팬데믹과 같은 돌발 사태에 교회의 일상이 중단되면, 교회는 표류하고 암초를 만나 신앙이 파선될 수도 있다. 성장과 팽창의 야망으로 달리다가 파선하거나, 인도주의적 사업만 하다가 표류할 수도 있다. 교회가 7일 전체를 그리스도의 사랑에 강권함을 받아 지극히 작은 자를 찾아가서 친구가 되려는 동기를 가질 때, ‘어떻게’는 그 친구가 되는 과정에서 찾아질 것이다.
역사
근현대교회
게일선교사
선교동기
한국화
한글
천로역정
팬데믹
한국교회
교회, 사람인가 장소인가
by Matthew Miller
2020-05-13
많은 이들이 어렸을 적에 손가락 깍지를 끼고 “교회가 있네요 / 첨탑도 있어요 / 열어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하며 노래를 불렀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되어 알게 된 재미있는 사실은 신약에서는 ‘교회’가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이 아니라 언제나 사람들 자신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는 ‘교회’라는 말을 예외 없이 세 가지 뜻으로 사용한다. “청소년부는 오전 9시에 교회에서 출발합니다”처럼 장소를 가리키거나 “교회가 끝나면 교제실에서 점심을 함께 하겠습니다”처럼 모임 자체를 가리킬 때 교회라는 말을 쓴다. 또는 “교회의 기도와 지원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처럼 사람들을 지칭할 때도 있다.이쯤 되면 우리가 ‘교회’라는 말을 맞게 사용하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다. 이 답의 이면에는 스토리가 있는데, 이를 들어보면 우리가 왜 ‘교회’라는 말을 이렇게 다양한 의미로 쓰는지 알 수 있다. 마태복음에서 시작해보자. 예수께서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실 때 “교회”라는 뜻으로 쓰인 헬라어는 ‘에클레시아’(ekklesia)다. 이 단어는 신약 성경에 114회 등장하는데, 사람들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칭한다. 때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을 가리키기도 하고, 한 지역 교회를 지칭할 때도 사용된다(엡 5:27; 살전 1:1). 교회론을 뜻하는 ‘에클리지올로지’(ecclesiology)는 그리스어 ‘에클레시아’에서 온 것이며 당회(sessions), 노회(presbyteries), 대회(synods) 그리고 총회(assemblies)를 “교회의 치리회”(ecclesiastical courts)라 부른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는 언제나 사람들을 가리킨다. 사람들이 모이는 건물을 뜻하지 않는다. 프랑스어나 스페인어처럼 라틴어에서 갈라져 나온 로망스(Romance)어군에 속하는 언어들은 교회를 가리킬 때 신약의 ‘에클레시아’를 그대로 사용한다. 교회는 프랑스어로 ‘레글리스’(l’eglise)이고 스페인어로는 ‘라 이글레시아’(la iglesia)인데 모두 라틴어 ‘에클레지아’(ecclesia)에서 온 것이다. 영어는 좀 더 복잡한데, 영어의 ‘처치’(church)의 어원은 다른 곳이기 때문이다. 독일어의 ‘키르케’(Kirche)나 네덜란드어의 ‘께르크’(kerk)와 마찬가지로 영어 ‘처치’(church)는 ‘에클레시아’가 아니라 “주님의”라는 뜻의 그리스어 ‘큐리아콘’(kyriakon)에서 왔다. 신약에서 ‘에클레시아’는 114회나 등장하는 반면 ‘큐리아콘’은 고린도전서 11장 20절 “주의 만찬”과 요한계시록 1장 10절 “주의 날”에서만 사용된다. 하지만 신약 다른 어떤 곳에서도 ‘큐리아콘’을 주의 백성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간이 가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자신들이 모여 성만찬을 나누는 장소를 가리켜 ‘큐리아콘’(kyriakon)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다시 말해 “주님의 집”이라는 표현을 줄여서 사용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쓰는 ‘처치’(church)라는 말이 사실상, 적어도 어원적으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예배하기 위해 모이는 실제 건물이나 위치를 가리킨다는 말이다. 영어 단어 ‘처치’(church)의 어원론을 따져보면 위에서 소개한 아이들 노래가 실제로 맞는 셈이다. “여기 교회가 있어요 / 이건 첨탑이구요 / 열어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이로 인해 윌리엄 틴데일(William Tyndale)이 성경을 번역할 때 곤란한 일이 생겼다. 틴데일이 그리스어 텍스트를 영어로 번역하던 1536년, 그는 신약의 ‘에클레시아’는 장소나 건물이 아닌 사람들을 뜻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었다. 그래서 마태복음 16장 18절을 번역하면서 틴데일은 ‘에클레시아’를 “church”라는 단어 대신 회중이라는 의미의 “congregation”으로 번역했다 (I wyll bylde my congregacion. And the gates of hell shall not prevayle ageynst it). 하지만 킹제임스역(King James Version)을 비롯해 훗날의 영어 번역본들은 ‘에클레시아’를 “church”로 번역했다. 그리하여 원래 하나님의 백성들이 만나는 ‘장소’를 가리키던 영어 단어는 지난 400여 년간 소위 “이중직”을 수행하게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가리키는 말로도 사용되어 왔다. 이러한 이유로 오늘날 우리 역시 그 단어를 두 가지 의미로 사용한다. 신약 성경에서 “church”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그것이 건물이 아니라 사람들(‘에클레시아’)을 지칭한다는 것만 기억한다면 크게 문제될 것이 없다. 에드먼드 클라우니(Edmund Clowney)는 “성경에 의하면 교회는 하나님의 백성들이고, 그리스도의 몸이요 모임이며, 성령의 교제하심이다”라고 말한다. 교회를 가리키는 성경의 은유는 다양하다. “congregation”의 원래 의미가 “모인 양 떼”인데, 성경에서는 교회를 일컬어 양 떼라 부르기도 한다. 또한, 가족, 몸, 성전, 그리고 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은유를 사용하는데, 이는 “교회”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의미한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교회, 즉 하나님의 백성들로서의 우리의 본질이 뭘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이 우리를 새롭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지속적인 믿음과 회개로 ‘하나님의 신적인 부르심에 응답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을 위한 기도에서 “교회 안에서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대대로 영원무궁하기를 바란다고 한다(엡 3:21). 다음 장에서 바울은 교회가 하나님으로 부터 ‘받은’(eklethete) 그 ‘부르심’(kleseos)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고,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kleseos)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eklethete) 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엡 4:4–5)라고 한다. 교회의 이름인 ‘에클레시아’와 신적인 부르심인 ‘클레세오스‘(kleseos)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교회의 기원이 신적 부르심에 있음을 생각할 때, 교회의 설립 이후 지속적으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교회가 하는 모든 예배, 교육, 교제, 그리고 봉사는 주의 음성을 들을 줄 아는 것에서 나온다.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요 10:27).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 일곱 교회들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모두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로 끝나는 것이다(계 2:7, 11, 17, 29; 3:6, 3, 22). 개혁주의 전통에서는 “유형(有形) 교회”와 “무형(無形) 교회”를 구분한다. 이는 눈에 항상 보이는 건물로서의 교회와 가끔은 보이지 않는 사람으로서의 교회를 구분하는 말이 아니다. 이는 “온 세계에서 참 종교를 고백하는 모든 이들과 그들의 자녀로 이루어진” 이들, 즉 교회의 회원이기 때문에 당신이 식별할 수 있는 더 많은 수의 사람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2항)과 하나님이 예정의 은혜와 중생의 능력을 통해 들을 귀를 주신 이들, 다시 말해 ”머리 되신 그리스도 아래 하나로 모여진, 모여지는, 또는 모여질 택자들의 전수(全數)로 구성된” 더 적은 수의 사람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25장 1항)에 대한 구분이다. 목사, 장로, 집사는 “유형 교회”를 섬기라 부름 받은 이들이지만 그들의 사역은 회중의 각 사람이 신적인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촉구하여 그들이 선한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를 따름으로 “무형 교회”에 속한 이들임을 증명하도록 돕는 일이어야 한다. 예수께서 돌아오셔서 양과 염소를 구별하신 후에야 비로소 무형 교회와 유형 교회가 앞으로 영원토록 완전히 일치하게 될 것이다(마 7:21–23; 25:31–46).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우리의 말과 생각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고 선한 목자의 부르심에 반응하는 그의 백성들로서의 교회에 대한 성경적 강조점을 회복하고 잊지 않도록 하자. 이를 위한 하나의 시도로 필자의 가정에서는 위에서 소개한 아이들 노래를 조금 바꿔서 부르고 있다. “교회가 있네요 / 첨탑도 있어요 / 열어 보세요 / 사람들이 보이죠”라고 부르는 대신 손 동작 순서를 거꾸로 하여 이렇게 노래한다. “교회가 있네요 / 은혜로 구원 받은 사람들이죠 / 이 첨탑 아래에서 / 늘 함께 모이죠.”출처: www.ligonier.org원제: Is the Church a People or a Place?번역: 이정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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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형교회
무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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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
에클레시아
건물
팀 켈러의 '중간지대' 신학하기
by 김상일
2020-05-09
“목회자들이 가장 많이 저지르는 실수 가운데 하나는 개인적으로 영향을 끼친 방법이나 프로그램을 무조건 반복하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영향력 있는 사역을 경험하고서는, 그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그대로 다른 세계에 가져다가 전혀 변화 없이 반복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45분 동안 한 절 한 절 강해하는 설교에 의해서 영향을 받았다면, 또는 특정한 형태의 찬양 사역에 은혜를 받았다면, 또는 특별한 예배 순서나 시간에서 도움을 받았다면, 그들은 그것을 아주 자세한 세부 사항까지 그대로 복제한다. 그들은 이미 부지불식간에 방법론 중심, 프로그램 중심이 되어 사역 방식을 자기 자신에게 맞추고 있는 것이다.”(센터처치, 206쪽)팀 켈러는 이제까지 30권이 넘는 책을 낸 베스트 셀러 작가이자, 1989년부터 최근까지도 뉴욕 맨하탄의 리디머장로교회에서 사역했던 목회자다. 그가 낸 책들은 하나같이 모두 독자들의 큰 사랑을 받아왔다. 그 중에서도 그의 목회와 신학을 총망라한 책을 꼽으라고 한다면, 독자들은 아마도 ‘센터처치’를 가장 많이 꼽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켈러가 ‘센터처치’에서 보여주는 근본적인 문제의식은, 신학이 본질적으로 어떤 학문인지, 어떻게 해야 신학을 잘 배우고 가르칠 수 있는지,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어떻게 해야 신학교 교육이 더 질 높은 목회자 후보생들을 키워낼 수 있는지에 대한 탁월한 통찰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문제의식이란 이렇다. 오랜 시간 사역을 하면서 켈러는 신학과 기독교 사역 관련 서적들이 크게 두 가지 흐름을 타고 출간되는 것을 발견했다. 그 한편에는 성경과 교리적 전통, 그리고 신학에 충실하지만, 실제적인 목회 사역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하지 않는 책들이 있다. 켈러는 이런 흐름에 속한 책들이 전통과 신학, 교리에 대한 충성(faithfulness)이라는 비유로 대변된다고 보았다. 또 다른 한편에는 성경과 교리적 전통, 신학에 대해서는 별 언급이 없지만, 실제적인 사역 방법론이나 사역의 팁(tip)을 제공하는데 치중하는 흐름에서 나오는 책들이 있다. 켈러는 이런 흐름에 속한 책들이 목회적인 성공(success)이라는 비유로 대변된다고 보았다. 앞으로 목회자 후보생들이 목회 현장에 들어가게 되면, 그들은 그 현장이 가지는 지역적, 문화적, 상황적 독특성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1) 복음이 어떤 메시지이며, 2) 복음을 따르는 삶이란 어떤 것인지를 명확하고도 설득력 있게, 또 심지어 복음을 따르는 삶이 돈이나 권력, 혹은 행복을 추구하는 삶보다 더 아름답고 매력적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충성으로 대변되는 책들도 성공으로 대변되는 책들도 어떻게 해야 현장에서 이런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다루지 않았다. 켈러가 바라보는 신학함이란, 단지 과거에 어떤 탁월한 신학자가 어떤 말을 했다는 것을 그대로 답습해서 할 수 있는 것도, 또 특정한 현장에서 어떤 프로그램이나 방법론이 잘 먹힌다고 해서 그걸 그대로 가져와서 나의 목회 현장이나 삶의 현장에 그대로 적용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켈러에게 있어서 제대로 된 신학함이란, 목회자 후보생 각자가 처한 독특한 목회 현장과 삶의 현장 속에서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이나 고민들에 대한 해답의 실마리가 교리와 신학적 전통에서 흘러 나와서 목회적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으로 열매 맺게 되는 그 창조적 작업 자체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켈러는 교리와 전통을 한 축에, 그리고 목회적 방법론이나 프로그램을 다른 축에 두고,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 그 두 가지를 유기적이고 창조적으로 연결하는 일, 즉 중간 지대의 작업이 바로 삶과 목회를 위한 신학함이라고 규정한다. 특히 켈러는 컴퓨터의 비유를 끌어들여서 신학과 교리적 전통을 하드웨어(hardware)로, 그리고 목회적 방법론과 프로그램들을 소프트웨어(software)로 비유한다. 이런 비유는 하드웨어가 잘 바뀌지 않고 유연성이 그다지 없는 반면, 소프트웨어는 필요나 상황에 따라서 유연성을 가진다는 면에서 꽤나 적절하다. 그리고 켈러의 이런 컴퓨터 비유가 가진 최대의 장점은, 진정한 신학함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사이를 연결시켜주는 미들웨어(middleware)같은 것이라고 보는데서 정점을 이룬다. “나는 컴퓨터 전문가는 아니지만, 컴퓨터를 잘 아는 친구들에 의하면, 미들 웨어라는 것은 하드웨어 및 운영시스템과 다양한 유저 소프트웨어 사이에서 기능을 맡는 층이라고 한다. 마찬가지로 한 사람의 교리적 믿음과 사역 방법들 사이에는, 어떻게 복음을 특정 문화적 상황과 역사적 순간 안으로 가져갈 것인가에 대해서 잘 고안된 비전이 있어야 한다”(센터처치, 25쪽). 켈러는 바로 이 미들웨어, 즉 교리 및 신학적 전통과 목회적 프로그램 및 방법론이 한데 어우러져서 특정 현장에서 통합적으로 열매 맺는 비전을 신학적 비전(theological vision)이라고 부른다. 켈러는 자신이 바라보는 신학적 비전의 성격에 대해서 이렇게 규정한다. “이것은 단순한 교리적 신념보다 훨씬 더 실천적인 것이며, ‘이렇게 하라’는 방법론들보다 훨씬 더 신학적인 것이다. 일단 이 비전이 서 있고, 바르게 강조되며, 가치가 부여된다면, 교회 지도자들이 도심에 있든, 주택가에 있든, 시골에 있든 간에, 예배, 훈련, 전도, 봉사, 사회 참여 등에 있어서 좋은 의사 결정을 내리는데 중추적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센터처치, 25쪽)신학적 비전은 중간 지대에 존재한다. 교리나 전통의 단순한 반복도 신학적 비전이 아니며, 어느 교회에 교인들이 많이 몰리더라는 소문을 듣고 그 교회의 사역 프로그램을 무작정 가져와서 우리 교회에서 돌리는 일도 신학적 비전이 아니다. 특정 목회 현장의 신학적 비전은 오직 그 현장 속에서 고민하는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다. 목회학 석사 3년의 공부를 통해서 학생들은 ‘앞으로 내가 목회 현장에 나가면 어떻게 신학을 해야겠다’는 감을 잡는데 도움이 되는 밑그림을 그리고, 또 어떻게 해야 그런 신학을 할 수 있는지, 그 방법에 대한 고민도 어렴풋이나마 할 수 있게 되어야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재의 신학교 교육은 단지 백과사전 식으로 어떤 논의가 있었는지를 정리하는 수준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신학적 비전을 세우는 일은(켈러처럼 예외적인 목회자를 빼면) 특정 목회자 개인이 혼자서 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일이다. 특히 목회 현장의 빡빡한 일정과 계속적으로 부딪히는 관계의 갈등을 생각해 보면 더더군다나 그렇다. 그래서 사실 신학적 비전을 키우는 일은 신학교에서부터, 교수님들의 지도 하에,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시작되어야 한다. 현재의 신학교 교육이 그런 초점을 가지고 신학생들을 교육시키고 있지 못하다는데 필자가 가지는 아쉬움은 매우 크다. 하지만 바로 그런 면에서 켈러가 ‘센터처치’를 비롯한 자신의 저서들에서 중간 지대 신학하기가 과연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작업이 가지는 의미 또한 매우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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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들웨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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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적비전
재정문제로 힘들어하는 당신에게
by Amy Dimarcangelo
2020-04-29
약 1년 전, 남편은 소매업을 시작했다. 새로 시작하는 많은 벤처기업과 마찬가지로, 불확실성과 재정적인 부담이 있고, 일터에서도 오랜 시간 일해야 했다. 다행히도 점차 자리를 잡아가며 꾸준히 성장했다.코로나19 바이러스가 덮쳤다. 처음엔 매출이 줄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매출은 곤두박질쳤다. 증시가 폭락하자 이미 주문받은 것의 대부분이 취소되었다. 지금은 사업의 미래와 그에 따른 우리의 재정이 암울해 보인다.이 세계적 유행병은 많은 사람에게 재정적으로 타격을 주었다. 직장이 문을 닫은 계약직 직원들,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않아서 출근하지 못하는 부모들, 급격한 재정 감축으로 직장을 잃은 사람들, 우리 같은 중소기업의 경영자들에게 영향을 끼쳤다. 우리는 대부분 이런 폭풍을 견뎌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우리는 당장 교회의 보살핌이 필요하다.연락하라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자신의 머릿속에 갇힐 위험이 있다. 미래를 걱정할 때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은혜를 주신다. 교회가 진리와 사랑으로 손을 내밀어 암울한 상황을 벗어나도록 도와주길 바란다. 교회가 사람들의 어려움을 살피고 돌봐준다면 그들은 하나님이 돌보고 계신다고 생각할 것이다. 비록 지금은 우리가 아직은 얼굴을 마주 보고 자유롭게 교제할 수 없지만, 전화나 문자, 이메일은 우리의 잘못된 생각을 중단시키고 다시 하나님께로 향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줄 수 있다.도움을 주기 위해 항상 진지한 대화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혼란한 상황에서 가장 좋은 위로의 방법은 혼란스러운 상황의 이야기를 멈추는 것이다. 어떻게 힘든 상황에서 행복을 경험하도록 할 수 있을까? 웃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적절한 유머는 영혼을 즐겁게 한다. “마음의 즐거움은 얼굴을 빛나게 하여도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하느니라.”(잠 15:13)계속 기도하라당신이 도울 방법은 제한적이다. 당신이 건네는 격려의 말이 진실하고 시기적절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성령님만이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당신은 우리를 위해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은 사람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신다. 하나님께 우리의 시련을 아뢰며 참된 격려와 평안을 구하고, 필요한 것을 공급해 주시기를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그렇게 하실 것이다.하나님은 우리가 예상한 대로 행하지 않으시지만, 완벽한 지혜로 우리의 기도에 항상 응답하신다. 당신이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리고 우리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해야겠다고 생각할 것이다.실질적인 도움을 주라교회는 재정적 어려움 속에서도 어려운 사람을 보살피고 도왔던 아름다운 역사가 있다. 세상 사람들에게 칭찬받을 만한 증인이었던 초기 교회 성도들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재산을 팔아 나누어 주었다.(행 2:45) 그들은 서로 필요를 채움으로써 값진 사랑을 보여주었다.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섭리와 그 뜻이 무엇인지를 구해야 한다. 특히 지금은 그분의 부르심에 주의하고 귀를 기울일 수 있는 좋은 시간이다. 성도 중에 아이를 돌봐줘야만 일을 할 수 있는 부모들이 있다. 집세를 걱정하는 월급쟁이 가정들이 있다. 사업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월급도 없이 집으로 돌아오는 사업주들이 있다. 따뜻한 마음으로 남을 위해 행동한다면 당신은 누군가의 기도에 응답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자비로운 마음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돕는 믿음을 세울 것이다. 벌벌 떨면서 자기만 살길을 찾는 대신에 하나님을 신뢰하도록 할 것이다. 마케도니아 교회는 혹독한 고난의 시험 속에서 기쁨으로 베풀었다(고후 8:1-2). 마케도니아 교회의 이러한 선례를 따라, 지금은 재정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 중 많은 사람이 큰 어려움 속에서도 기쁨으로 베풀 기회이다.당신의 어려움도 함께 나누자시련과 함께 스스로 해결하고자 하는 유혹이 찾아온다. 당신의 고난과 어려움이 우리가 당한 것과 다를지라도 이를 공유한다면, 혼자만 어려운 상황에 있지 않다는 것을 다른 사람들도 알게 할 수 있다. 시련을 겪는 사람에게 가장 큰 위로는 때로 시련을 겪는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일일 수 있다. 성도 간의 사랑은 양방향이다. 내 짐을 함께 들어줄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리고 나 또한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라고 부름을 받았다.몸의 건강을 돌보듯이 우리가 서로 보살필 때 예수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실 것이다.더 큰 계획을 기억하라이스라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 신실함을 잊곤 한다. 우리는 욥을 깨닫게 하시고, 에스더를 지키시며, 룻에게 공급하신 하나님을 기억해야 한다. 여전히 그분은 보좌에 앉아 계시며, 전쟁, 자연재해, 전염병, 그리고 경제 붕괴가 그분의 주권 안에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설령 최악의 시나리오가 예상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변치 않으신다. 그분의 계획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은 여전히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계시고, 구원하고 계시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하나님 나라가 확장되도록 일하고 계신다. 우리의 일상이 지금 당장은 다르게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앞으로 더 나빠질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것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근본적인 안전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이야기 중 일부이다. 내일, 다음 달,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하나님의 이야기가 승리로 끝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Help! Now I’m Financially Stressed번역: 송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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