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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이후, 격변하는 역사 속의 하나님
by 옥성득
2020-04-28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는 1980년대까지 현대사 연구에 투자해야 한다. 1876년 이후 한국 근현대사를 흔히 개항기(1876-1910), 일제 식민지 시대(1910-45), 해방과 건국기(1945-1960), 독재와 경제 개발 시대(1961-87), 민주화 시대(1987-현재)로 구분을 한다. 현재 한국사 연구는 박정희 대통령 시대(1961-79)는 물론 전두환 대통령 시대까지 본격적으로 하고 있다. 41년 전에 박정희 대통령이 암살되었기 때문에 두 세대가 지난 시점이고, 소위 ‘87년 체제’가 끝난 지도 33년이 지났기 때문이다. 반면 한국 기독교 역사는 아직 일제 강점기 연구도 제대로 안 된 상태이며,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연구는 초보 단계이다. 현재 한국 기독교의 여러 문제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서는 빨리 해방 이전 시대의 연구에서 60-80년대 연구로 들어서야 한다. 한국 근현대사는 격변의 연속이다. 10년마다 주요 사건이 발생하고 35년마다 새로운 패러다임의 사회가 되더니, 최근에는 그 변화에 가속도가 붙어 10년에서 20년마다 대위기가 오고 체제가 변하고 있다. 그만큼 교회도 변해야 한다. 하지만 역사적 과제를 정리하지 못한 채 새 시대를 맞아야 하기에 발달 지체와 변화 지체라는 중증에 걸려 있다. 한국 근현대사를 다음과 같이 주요 사건과 위기를 중심으로 변동하는 주기를 그려보았다. 해방 이전에도 위기가 많았으나 해방 이후에도 여러 차례 위기가 찾아왔다. 1910년의 일제 강점, 1929년의 대공황, 이후 계속된 몇 차례의 전쟁, 1950년 6.25 전쟁으로 정착된 냉전 체제, 그로 인한 1961년 5.16 쿠데타와 1972년 10월 유신 체제의 발전, 1980년 5.18 광주의 비극, 1997년 IMF 경제 위기, 2008년 세계 경제 위기, 2020년 코로나19 위기가 왔다. 그러나 우리 민족은 위기를 만날 때마다 이를 극복하는 저력을 보였다. 1919년 삼일운동 이후 자주독립을 추구했고, 자유민주 진영의 도움으로 1945년 해방과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일을 맞이했다. 1960년 4월 혁명으로 되살린 민주주의 정신은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 1987년 민주화 항쟁, 2017년 촛불 항쟁으로 이어졌다. 이런 한국 사회의 정치 경제적 대위기와 그것들을 극복하려는 민주, 자유, 평등의 정신은 당시를 살았던 세대에게 상징적으로 붙여서 말하기도 한다. 감수성이 강한 20세에 위기를 겪은 세대, 즉 1960년에 4.19 세대, 1980년에 86세대, 1997년에 IMF 세대를 탄생시켰고, 올해 20세는 코로나19 사태를 겪는 코로나19 세대가 형성되고 있다. 이제 그들은 만으로 80세, 60세, 43세, 20세로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네 세대를 대변한다. 현재 70-80대가 민주화로 출발하며 산업화를 이룬 세대라면, 50-60대는 산업화를 완성하고 민주화를 심화했으며, 지금의 30-40대는 한국을 세계화하는 주역이었다. 새롭게 맞는 팬데믹 시대에 10대와 20대가 어떻게 위대한 대한민국을 만들지 기대된다.이런 사회와 세대의 역동적이고 창조적인 변동 속에서, 한국 교회는 세대별로 어떤 새로운 패러다임의 신학(교회론, 선교론, 정치론 등)을 가지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깊이 있게 연구하고 토론해야 한다. 그중 하나가 한국 교회 자체의 문제와 씨름한 역사적 자료를 풍성하게 확보할 수 있는 한국 기독교 역사 연구이다. 불확실성의 시대에는 역사가 내비게이션의 역할을 한다. 현재 한국 교회 역사 연구 현황을 보면 안타까운 실정이다. 첫째, 한국교회사를 연구하는 학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신학교에도 전공 교수가 별로 없다. 둘째, 얼마 되지 않는 학자 중 주류는 60대 이상이다. 30대와 40대 학자가 별로 없다. 셋째, 일제 강점기를 연구하거나 연구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넷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시대의 한국 교회 역사에 대한 연구물이 별로 없다. 한국 기독교 역사를 공부하려면 한국사와 세계 교회사를 공부하고 이어서 해당 시기의 1차 자료를 읽어야 한다. 해방 이전 시대를 연구하려면 한문과 일본어와 국한문이라는 세 가지 외국어를 해야 하므로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 해방 이후도 여전히 영어 자료와 국한문 자료를 읽어야 하므로 어학 실력은 기본적으로 필요하다. 무엇보다 해방 이후는 다양한 1차 자료와 2차 자료가 넘치기 때문에 엄청난 양을 읽고 소화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사회과학과 인문학을 두루 섭렵하지 않으면 좋은 교회사 학자가 되기 어렵다. 한국 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를 공부해야 한다. 누가 그 어려운 공부를 할 수 있는가? 교회와 독지가는 한국 기독교 역사를 연구하는 여러 연구소를 지원하고, 석박사과정의 학생 장학금을 지원하고, 한국교회사 자료집 시리즈 프로젝트에 기부하고, 논문상과 저술상을 만들어 사학자들을 길러야 한다. 교회 건물 하나에 수백억을 투자해도 교인이 없으면 건물은 이단에 매각될 수도 있다. 그 수백억을 한국교회사 연구에 투자한다면, 한국 교회의 활로가 보일 것이다. 향방 없이 달리기보다는 멈추어 서서 반성하고 생각하는 교회라야 살 수 있다. 박물관 자료를 수집하는 교회사 공부가 아니라, 30년, 50년을 내다보며 교회의 방향을 제시하는 공부가 되기 위해서 해방 이전 70년(1876-1945)의 역사, 해방 이후 70년(1945-2015) 역사를 신학화하는 기독교 역사 공부가 되어야 한다. 한반도와 세계의 격변하는 역사 속에서도 인도하신 하나님께서 향후 30년의 역사 속에도 인도하실 것이다. 역사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만나고 교회를 살리는 한국 교회 역사 연구에 20대와 30대 신진 학도들이 도전하기를 바란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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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교역사
근현대사
일제강점기
해방
한반도
교회사
팬데믹시대
영과 진리가 예배의 기초입니다
by Ligon Duncan
2020-04-26
부도덕한 사마리아 여인과의 뜻밖의 만남에서 예수님은 예배에 관한 매우 놀라운 사실을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우물가의 여인을 만나주신 이 감동적인 스토리는 예수님이 그녀의 감춰진 죄와 그 내면의 수치심을 드러내시자 그녀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오랫동안 논쟁이 되어 왔던 예배의 문제에 관해 여쭈는 것으로 전개된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라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여자가 이르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요 4:20-26)예수님의 이 대답은 그의 공생애를 통한 삶과 사역, 죽음과 부활을 통해 구원하시려는 여정을 스스로 드러내신 것이다. 이것은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고, 사역과 관련된 중요한 요점들을 선언하신 것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의 특별한 ‘예배 신학’을 이처럼 잘 설명해 주신 것도 없을 것이다.우선,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특별한 선언은 성경적 예배의 모든 의미들을 함축하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예배는 특정 행위와 삶의 방식 모두를 강조하고 있는데 행위로서의 예배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 즉 교회 예배, 가정 예배, 그리고 개인 예배 형태로 나타난다.‘교회 예배’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함께 모여 주께 영광을 돌리며 그의 백성들에게 약속하신 특별한 은혜의 기쁨을 누리는 예배이다. 이런 종류의 예배는 때때로 ‘공동체 예배’(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하나님과의 만남에 함께 참여한다)로 불린다. 또 ‘모임’, ‘집합’ 그리고 ‘회중’ 예배라고도 불린다. 이 예배의 중요성은 신구약 전반에 걸쳐 모두 강조된다. 시편 110편 2절과 히브리서 10장 25절은 “그 앞에 나아갈지어다”와 “함께 모여서”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모두 ‘교회 예배’를 일컫고 있다.‘가정 예배’는 아버지 또는 가족의 연장자들이 인도하는 것으로, 하나님 중심의 가정을 세우고 가족 모든 구성원들에게 삶 속에서의 예배를 고취시켜 교회 예배를 준비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성경은 가정 예배의 중요성을 여러 곳을 통해 분명히 하고 있다(출 12:3; 신 6:6-8; 수 24:15).‘개인 예배’(때로 “은밀한 예배” 혹은 “사적인 예배”라고도 함)도 성경 전반에 걸쳐, 특히 예수님과 다니엘, 다윗, 베드로 등이 예시로 제시한 예배의 형태이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6장 6절을 통해 제자들에게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지시사항을 전달하셨고, 마가복음 1장 35절과 누가복음 5장 16절에서도 그 예를 보이셨다. 다윗은 시편 5장 3절에서, 다니엘은 다니엘 6장 10절에서,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 9절에서 이것을 언급했다. 크리스천 삶의 핵심인 예배는 신구약을 통틀어 구체적으로 제시되고 있으며,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사람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강조되고 있다. 요나서 1장 9절에서 요나 선지자는 스스로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것은 일정한 날에만 하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삶 전체의 목적을 특징짓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바울 역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10:31). 이것이 바로 우리가 말하는 삶의 전 영역에서의 예배인 것이다.두 번째로, “영과 진리로 예배한다”는 예수님의 위대한 선언은 우리가 하나님을 그분의 성품과 진리를 향해 교회와 가정에서, 그리고 개인적으로, 모든 삶의 영역에서 영화롭게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적어도 다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째, 우리는 하나님이 영이시기에 한 장소에 묶여있지 않으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둘째, 우리는 예수님의 생애와 업적을 따라 예배해야만 한다(요 1:14; 14:6). 왜냐하면 그분은 진리이시고 우리가 진정으로 예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가 예배해야만 하는 그 자체로 “진리”이시다. 그분은 하나님의 현현(요 1:14), 하나님 아버지 성품의 구현(요 14:6), 하나님의 본성과 계획의 완전한 계시(요 1:18; 히 1:1-3)이시다. 따라서 진리로 예배한다는 것은 예수님과 예수님에 관한 진리에 따라 예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자 죄인들의 유일한 구원자이시기 때문이다.그래서 우리는 “영과 진리로 예배해야 한다”고 말할 때, 다음 네 가지를 명심해야 한다. 첫째, 우리는 교회에서, 가정에서, 개인적으로 그리고 모든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영광을 돌려야 한다. 이것이 모든 예배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그분이 누구인가를 명확히 알고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그분은 영이시기에 우리가 영으로 예배해야 하고, 또 그분이 영원하신 실재이시기에 예배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명령을 충실히 지키면서 그분의 계시에 따라 신실하게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in Spirit and in Truth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신령
진정
영광
성경적예배
교회예배
가정예배
개인예배
루터, 팬데믹에 대해 입을 열다
by Justin Taylor
2020-04-24
2019년 12월 31일, 중국 보건 관계자는 세계 보건 기구(WHO)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한 새로운 폐렴이 우한 지역에 출현했다는 것을 긴급히 알렸다. 2020년 1월 7일, 보건 관계자들은 코로나바이러스군에서 새롭게 식별된 ‘2019-nCoV’라는 이름으로 이 바이러스를 명명하고 공포했다. 코로나바이러스는 보편적인 감기 그리고 사스(SARS: Severe acute respiratory syndrome)를 포함한다. 이 바이러스들은 감염된 사람과 접촉하거나 그들의 기침 혹은 재채기를 할 때 나오는 침방울을 흡입하는 것으로 전파된다. 침방울이 묻은 표면을 만진 뒤 얼굴이나 코를 만짐으로써 전염되기도 한다. 1월 7일부터 이 코로나19 바이러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국가로 번졌다. WHO는 4월 18일 현재 218만 명의 확진자와 15만 명이 넘는 사망자를 보고했다. 주식 시장은 무너졌으며, 세계 여행과 무역은 직격탄을 맞았다.크리스천들은 여러 가지 감정에 휩싸여 심각한 질문을 던지며 이러한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늘 그렇듯이 오직 말씀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인도하심을 깨달아야 한다. 과거의 크리스천들은 비슷한 위기를 어떻게 대응했었는지 과거를 돌아보는 것 또한 유익하다. 14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유럽에 엄청난 충격을 가져온 흑사병과 관련해서 쉽게 교훈을 발견할 수 있다. 흑사병은 1347년부터 1350년 사이에 중국에서 시작되었으며 당시 유럽 인구의 25%가 사망했다. 이후 15세기에도 발병하면서 많은 유럽인에게 정서적으로 깊은 상처와 공포를 남겼다. 이 전염병의 사망률은 30%에서 90% 사이였다. ‘치명적인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1527)이 사건은 1527년 마틴 루터가 쓴 “치명적 재앙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가”라는 흥미로운 소논문의 역사적 배경이 되었다. 이 질병은 1527년 8월에 루터의 도시였던 비텐베르크를 강타했으며, 많은 루터의 동료와 시민들은 필사적으로 도망쳤다. 당시 군주였던 엘렉토르 존(Elector John)은 루터에게 목숨을 위해 즉시 떠날 것을 명령했다. 하지만 루터는 질병에 걸린 사람들을 섬기기 위해 남는 쪽을 선택했다. 루터는 질병과 그 희생자들에 둘러싸여 있었다. 시장 틸로 데네(Tilo Dene)의 아내는 루터의 품에 안겨 죽어갔다. 루터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사람들과 함께 당당히 맞서고 있었다. 다른 도시와 마을에서 온 많은 독일인은 비텐베르크를 떠나라고 했다. 독일인 목사인 요한 헤쓰는 루터에게 글을 썼다. 이러한 질병을 마주했을 때 목회자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질문한 것이다. 이 소논문은 질문에 대한 루터의 답변이다. 그 지혜는 우리가 살아가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익하다. 누가 떠나는가?루터는 강한 신념을 지닌 사람들을 향해 전염병이 우리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므로 도망가지 말아야 하며, 크리스천들은 겸손히 서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연설했다. 루터는 그러한 견해가 칭찬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모든 사람의 믿음이 자신과 같이 강하지 않다는 점을 인정했다. 루터는 또한 리더의 역할을 하는 사람들(목회자, 시장 판사 혹은 의사들)은 위기가 지나갈 때까지 공동체 안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특별히 목회자들은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놓는 선한 목자와 같이 되어야만 한다고 했다(요 10:11). 루터는 부모가 자녀를 버리거나 가족 구성원이 서로를 떠나는 행동은 죄를 짓는 것이라고 강하게 이야기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한다는 것은 그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에 우리 이웃들에게 적용했다. 이를 뛰어넘어, 마치 약을 사용하는 것처럼 누군가의 생명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적으로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루터는 결코 숙명론자가 아니었다.죽음에 대한 두려움개인의 태도에 대해서, 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마귀의 일이며 어떤 그리스도인도 그에게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을 직면하는 상황에서 모든 그리스도인을 두렵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루터는 어떤 사람들은 믿음에 있어서 남들보다 더 강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 이들이나 도망치는 사람들과는 다르게 그들의 헌신에 따른 주님의 상급을 기대하며 치명적인 위험의 불구덩이에 담대하게 들어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루터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크리스천들과 죽어가는 자들을 직접 섬기는 사역자들은 종기와 감염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서,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것은 그리스도를 돌보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아플 때 네가 나를 돌보아 주었다”(마 25:36)라고 말씀하셨다.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생명을 내어 주셨고, 우리도 남들을 위해 생명을 내려놓아야만 한다고 기록했다(요일 3:16). 루터는 전염병의 심각성을 과소평가하고 하나님께 경박하게 행동하는 자들에게도 경고했다. 하나님의 말씀루터는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하여 어떻게 믿음으로 살고 죽는지를 가르침으로써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풍성하기를 강력히 촉구했다. 불신앙으로 죽어가는 사람은 아직 시간이 있을 때 회개하라는 경고를 받아들여야 하며, 기회가 있는 동안 목회자를 불러야 한다. 눈에 띄는 죄를 인지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회복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야만 하며, 가능하다면 주님의 성찬을 받아야만 한다. 실천적 단계들루터는 질병의 확산을 막기 위한 실질적인 단계들을 주장했다. 루이 파스퇴르(Louis Pasteur)가 세균 이론을 발견한 이후 시대를 살아가며, 의학 연구와 현대 병원의 과학적인 발전의 혜택을 얻고 사는 우리는 루터 시대의 비텐베르크 상황이 어땠는지 상상하기가 어렵다. 루터는 환자들이 수백 개의 개인 주거공간에 머무르는 것 대신에 특정 공공건물이 환자들을 위한 병원으로 사용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또한 크리스천들에게 전염병의 확산을 막기 위하여 집과 마당, 거리를 소독할 것을 촉구했다. 그리고 루터는 비통에 빠진 이들을 목양하는 의미에서 성경 속 장면들로 꾸며 놓은 벽과 비텐베르크 묘지가 도시 경계 밖으로 옮겨져야 한다고 했다. 그리스도의 사랑궁극적으로 루터는 각 개인이 떠날 것인지에 대한 모든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내려져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부르심에 비추어 이루어져야만 한다.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하는 우리의 여정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의학 역사책의 희미한 추억으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많은 크리스천에게는 그들의 이웃들을 향하여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는 기회이다. 그리스도의 자녀 된 우리에게는 죽음을 이기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여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삶을 살아내기 위한 기회이기도 하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the Deadly Outbreak Comes: Counsel from Martin Luther번역: 정진호
마틴루터
교회사
전염병
코로나19
중세교회
역사
팬데믹
흑사병
비텐베르크
실리콘밸리의 복음 생태계
by 박용기
2020-04-23
팀 켈러(Tim Keller)목사는 ‘센터처치’에서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를 설명한다. 복음 생태계는 복음 DNA를 가진 교회들이 한 도시에서 선교와 전도의 사명을 가지고 5-6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할 수 있는 역동적인 교회로 성장하면서 조성되기 시작한다. 이러한 역동적 교회들이 한 도시 인구의 10% 정도에 달하는 임계점에 이르면, 그때부터는 무너뜨릴 수 없는 거대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고, 복음적 교회들이 개체와 전체로서 함께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실리콘밸리는 세계 최고의 창업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HP가 창업된 이래로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세계적인 IT 기업들이 지속해서 창업되고 있는 스타트업 천국이다. 실리콘밸리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그리고 창업자들이 공생하면서 성장 발전하는 생태계가 형성된 도시이다. D. A 카슨 교수는 “각 문화 안에는 선과 악의 요소들이 모두 다 포함되어 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특정 문화의 요소 가운데 복음적 요소와 비복음적 요소가 함께 포함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생태계에서 배울 수 있는 복음적 요소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 20-30대가 스타트업 실리콘밸리 지역에 위치한 스탠퍼드대학교 졸업생의 평균 16%가 창업을 하는데, 1990년대 이후 약 4만 개의 기업이 스탠퍼드대학교 동문에 의해서 스타트업 되었다. 스탠퍼드대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은 ‘스타트업의 영’으로 충만하다. 반면 한국에서 신학교를 졸업하고 20-30대에 바로 교회 개척을 하는 젊은 목회자들은 많지 않다.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장로교 교단 총회(104회, 2019년)에 참석한 교회 대표들 1,449명 가운데 40대 목회자는 14명으로 1%도 되지 않았다. 20-30대 목회자는 단 한 명도 총회에 참석하지 못했다. 젊은이들이 교회를 떠나는 이유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다. 젊은이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젊은 목회자들을 통한 교회 개척이라고 믿는다. 20대, 30대, 40대 목회자들이 교회를 대표해서 목회한다면 회중의 나이도 젊어지게 될 것이다. 젊은 세대 목회자에 의해서 시도되는 새로운 목회 방법과 전도 방법이 기존의 교회에 신선함과 개혁의 동기를 부여할 것이다. 2. 실패가 평균인 스타트업 네오위즈 창업자 장병규는 ‘스타트업의 평균은 실패다’라고 말한다. 10개 기업이 스타트업하면 평균 1개 정도가 살아남는다. “Fail Fast, Fail Often, Fail Everywhere”(빨리 실패하고, 자주 실패하라, 모든 영역에서 실패를 경험하라). 실리콘밸리 창업가들에게 모토가 되는 문장이다. MIT 대학 기업가정신센터 소장, 빌 올렛 교수가 동양 문화권 창업자들에게 준 조언은 다음과 같다. “미국 문화권에서 실패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실패를 통해서 무언가를 배울 있다고 생각합니다. 먹음직스러우면서 칼로리가 없는 초콜릿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실패가 없는 혁신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실리콘밸리에서 세계적인 신생 기업들이 지속해서 나오는 이유는 과감한 시도와 수많은 실패를 통한 배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한 베드로를 찾아가서 “네가 나를 사랑하는냐?”라고 세 번 물으셨다(요 21:15-17). 베드로에게 다시 기회를 주시기 위해서였다. 복음은 실패한 인생에 두 번째 기회는 주는 것이다. 실패는 목회자가 무릎 꿇고 기도하는 시간을 늘려 주며, 인간의 부족함을 인정하고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는 목회를 가르쳐준다. 진정한 목회자는 실패를 복음으로 극복하면서 세워진다. 3. 액셀러레이터(Accelerator)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란 스타트업을 선발하여 시드머니 투자, 인맥 연결, 마케팅, 시장성 있는 기술개발 자문 등 신생 기업에 종합적인 멘토링을 제공하는 기관 혹은 개인을 지칭한다. 실리콘밸리에는 이러한 액셀러레이터 기관들이 넘쳐난다. 드롭박스와 에어비앤비 등이 액셀러레이터 기관의 도움과 지원으로 스타트업 되었다. 한국교회는 대형교회에서 분리 개척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목회자 개인의 역량으로 개척을 진행한다. 소위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교회를 개척한다. 각 교단에 교회 개척을 지원하는 부서들이 있지만 대부분 교회 개척을 심사하고 허가하는 수동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공격적으로 개척자들을 발굴, 지원, 육성해야 하는 이유는 교회 개척이 예수님의 대사명(마28:19-20)을 이루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기 때문이다. 미국 남침례교회의 국내선교부(North American Mission Board)에는 샌드 네트워크(Send Network)라는 부서가 있다. 샌드 네크워크는 신학교를 막 졸업한 신학생들을 교회 개척자로 모집하여 수개월 동안 훈련한다. 그리고 복음화율이 낮은 도시로 파송하여 교회 개척을 돕는 액셀러레이터 단체이다. 훈련받은 개척자들에게는 종합적인 교회 개척 훈련과 3년 정도의 재정 지원을 한다. 그리고 개척한 지역에서 존경받는 교회 목회자를 멘토로 연결해 준다. 개척된 지역의 주총회와 로컬 지방회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서 교회 개척자를 돕고 지원한다. 4. 교회 생명주기로 본 스타트업 코닥, 노키아, GM은 한때 세계적인 기업이었지만 현재는 쇠퇴한 기업들이다. 대한상공회의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 686개 기업의 평균수명은 약 33년이다. 기업이 쇠퇴하는 가장 큰 요인 중 하나는 혁신 없이 현실에 안주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통계적으로 “출생기-성장기-부흥기-쇠퇴기-죽음”이라는 생명주기를 가진다. 한 지역 교회가 쇠퇴기를 거쳐서 죽음을 맞이하는 가장 큰 이유는 교회 회중의 고령화이다. 유럽교회들이 쇠퇴하는 이유는 교회를 지키고 있는 회중의 평균 연령이 60-70대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교회도 그 생명이 다하게 되는 것이다. 2020년 한국교회는 부흥기에서 쇠퇴기로 접어든 것으로 생각된다. 교회 생명주기 통계로 볼 때 현재 교회 회중의 평균 연령이 50-60대이고, 성도 유입에 큰 변화가 없다면 그 교회는 30-40년 후에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어떻게 이러한 쇠퇴기 상황을 개혁할 수 있을까? 팀 켈러 목사는 ”오래된 교회들을 갱신하는 열쇠는 새 교회를 도시에 세우는 것이다”라고 하면서 복음적 교회는 대략 7-10년마다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젊어진다고 했다. 기존 교회가 교회 개척을 하게 되면 인력과 재정을 흘려보내야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기존 교회는 건강한 자극과 도전을 받게 된다. 새롭게 개척된 교회는 교회 내부사역보다는 교회 밖 전도에 힘을 쏟는 교회가 된다. 이러한 모습은 모교회와 주변교회에 도전을 준다. 교회 개척을 대형교회만 할 수 있다는 것은 물량주의적 사고방식이다. 200명 되는 교회가 50명 정도 분리하여 개척한 후 3-4년 사이에 다시 200명으로 회복되는 경우를 많이 본다. 개척된 교회도 부흥하면서 두 교회의 생명주기는 모두 젊어진다. 오래된 교회들이 새로운 교회를 개척함으로 한 도시에서 복음 운동(gospel movement)을 일으킬 수 있고, 건강하고 강력하게 자생하는 복음 생태계(gospel ecosystem)가 만들어질 수 있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 팀 켈러가 ‘생태계’라는 용어를 사용한 이유는 생태계는 인간이 만드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농부가 씨를 뿌리고 농작물을 잘 가꿀 수는 있지만, 햇빛, 비, 바람과 같은 날씨와 토양은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복음적 교회 개척 생태계가 형성되기 위해서는 복음적 교회들의 활동뿐만 아니라 인간의 노력을 초월하는 성령님의 역사하심이 필요하다. 한국에는 많은 복음적 교회들이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어떤 도시는 이미 10% 임계점을 넘어 건강한 복음 생태계가 형성되었다고 생각한다. 성령님께서 복음적 교회들을 연결하시고 하나 되게 하셔서 개척 교회와 기존 교회 모두가 개체와 전체로 유기적으로 결합 되기를 바란다. 그것을 통해 건강하게 성장하는 교회 개척 생태계가 모든 도시에 형성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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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절을 앞두고 부르는 찬송들
by Bobby Gilles
2020-04-05
부활절을 앞둔 회개의 시간이다. 우리의 육체와 이 세상이 죄의 저주 아래 고통받고 있음을 인식하고,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하고 구속하실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분인지를 고백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시간을 지혜롭게 잘 보내면 성도가 부활 소망을 갖게 되고 그리스도가 다시 사셨다는 큰 기쁨으로 누릴 수 있음을 목사와 찬양 인도자들이 돕는 것은 어떨까! 아래에서 소개하는 곡들을 개인 예배 시간이나 공예배 시간에 사용하면 그런 효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소개된 곡들을 부활절을 기다리며 부르는 찬송으로 생각해보라. 이 세상 험하고(Jesus Paid It All) 이 찬송은 아이들 찬양처럼 단순하지만 구속의 은혜를 강조하고자 하는 깊은 진리, 즉 “피와 같이 붉은 죄 눈 같이 희겠네”를 잘 전달해준다. 이 기간의 깊은 은혜가 1절에 잘 등장한다.“이 세상 험하고 나 비록 약하나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나를 붙드시는 그의 사랑(O Love That Will Not Let Me Go) 조지 매티슨(George Mathison)이 쓴 이 찬송은 우리의 “곤비한 영혼”과 “꺼져가는 불꽃”을 그리스도께서 지니신 “불타오르는 햇빛”과 대조시킨다. 이는, 그리스도께서는 단순히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가 아니라 우리의 삶 자체이심을 깨닫는 것이다. 이 찬송가는 우리의 삶에 고난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찬송을 부르는 이들로 하여금 구원자가 되시는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도록 돕는다. “고난 중에도 내게 기쁨 있으니주를 향해 내 마음 닫지 아니하네폭우 속에도 내게 무지개 주시니주 약속 헛되지 않음을 아네”그 아침이 오면 눈물 그치리 내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토퍼 마이너(Christopher Miner)가 곡을 붙인 ‘지울 수 없는 은혜’(Indelible Grace) 버전을 좋아한다. 당신이 섬기는 교회가 알버트 피스(Albert Peace)가 작곡한 전통 멜로디에 친숙하다면 그걸 사용하는 것이 좋겠다. 하지만 같은 곡을 종종 다른 멜로디로 불러보면 마치 새로운 곡을 배우는 것 같은 느낌으로 원곡을 재발견할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우리를 향한 아버지의 깊은 사랑(How Deep the Father’s Love for Us) 스튜어트 타운엔트(Stuart Townend)와 키스 게티(Keith Getty)는 신학적으로 탄탄한 가사로 된 많은 현대 찬송들을 썼다. 이 곡을 부르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던 그 장소에 나도 성난 군중으로 서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십자가에 달린 그를 보라그 어깨에 멘 내 죄그를 조롱하는 내 부끄러운 목소리거기 모인 무리 속에서 들려오네”아마 키스 게티와 아내인 크리스틴 게티(Kristyn Getty)가 함께 연주한 버전을 많이 들어보았을 것이다. 당신의 교회가 수용적이라면, 마르스 힐(Mars Hill) 교회 찬양팀인 케노시스(Kenosis)가 연주한 현대 프로그레시브 락 버전을 추천한다. 오! 그 보혈(O the Blood) 게이트웨이 교회(Gateway Church)가 내놓은 이 현대 찬양은 단순하지만 강력하다. 이 곡에는 성가 식으로 부르는 후렴부가 있다. 가사의 각 절은 우리 죄, 그리고 예수께서 그 죄를 위해 지불하신 대가가 무슨 관계인지 보여준다. “놀라운 은혜내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도날 위해 피 흘리셨네”주의 보혈로 나를 씻으소서(Let Your Blood Plead for Me) 지금 섬기는 교회의 마이크 코스퍼(Mike Cosper) 목사와 소전(Sojourn)교회 찬양팀 리더인 제레미 퀼로(Jeremy Quillo)가 나와 함께 아이작 왓츠(Isaac Watts)의 찬송가를 편곡했다. 사람들에게서 거의 잊혀진 이 아름다운 곡을 교회에 다시 소개하기 위해서였는데,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율법을 통해 알 수 있게 된다는 것을 왓츠가 아름다운 시로 정말이지 멋지게 표현했다. 교회에서 이 곡을 부르면 우리가 하나님의 기준을 결코 만족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우리는 우리 죄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대속에만 의지해야 한다. “그의 영원한 율법완전하고 거룩하며 의롭고 순전한 그 법을 보기 전엔내 죄가 얼마나 큰지 몰랐네”찬양 중에 눈을 들어(Praise Is Rising, 원제: 호산나[Hosanna]) 폴 발로쉬(Paul Baloche)와 브렌튼 브라운(Brenton Brown)의 이 찬양은 종려주일 예배용으로 좋은 곡이다. 부활주일 일주일 전에 오는 종려주일은 그리스도의 예루살렘 입성을 기억하는 날인데, 이 기쁨의 노래는 거기에 꼭 맞는 곡이다. 뭔가를 기쁘게 누리는 곡이 필요할 때 이 찬양을 추천한다. 예루살렘 입성 때 “호산나”를 외치던 군중들이 결국 며칠 뒤에는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게 되었다는 것은 실로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드리셨네(He Never Said a Mumblin’ Word) 최고의 흑인 영가들처럼 “그리스도는 기꺼이 자기 자신을 드리셨네”에도 많은 반복구가 등장한다. “한 마디도, 한 마디도, 한 마디도” 부분을 부를 때마다 우리 주께서 목숨을 살려달라 애원하며 십자가로 끌려가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에 새기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도 어찌 할 수 없는 사건에 휘말린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기간을 보내듯 그리스도께서도 시간과 이 땅에서의 그의 사역 기간을 보내신 것이고, 자신의 삶을 우리를 위해 드리실 것임을 이 땅에서 사시는 동안 결코 잊지 않으셨다. 비프로스트 아트(Bifrost Art) 버전은 조용한 묵상의 분위기를 만들어내기에 좋다. 회중들이 따라 부르기도 편하다.내겐 그리스도 뿐(All I Have Is Christ)‘소버린 그레이스 교회개척 네트워크’(Sovereign Grace Churches)에서는 지난 십여 년 기간 동안 풍성한 새 찬양곡들을 내놓았는데, 조던 카우플린(Jordan Kauflin)과 그가 이끄는 Na 밴드(Na Band)가 쓴 이 곡은 그들이 낸 곡 중에서 가장 좋은 곡으로 평가 받고 있는 곡이다. 소개한 여러 찬양곡들의 핵심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왜’ 지셔야 했는지를 묵상하는 것, 즉, 우리의 약함과 타락함, 그리고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반드시 필요함을 인식하는 것에 있다. 이 노래를 부르면서 우리는 ‘구원으로 인도하는’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 그리스도이심을 선포한다.“주께서 나를 먼저 사랑하시지 않았다면 나는 여전히 그를 거부하고”또한 ‘구원 이후’ 선한 삶을 향한 우리의 의지와 능력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소망이심을 선언한다.“당신의 명령을 따를 힘, 결코 내게서 나오지 못하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Modern Lenten Hymnal번역: 이정훈
영성
예배
찬송가
이세상험하고
부활절
보혈
예배자
십자가
초대교회의 사랑이 세상을 살렸다
by Moses Y. Lee
2020-04-01
초대교회라고 역병, 전염병 그리고 집단 히스테리를 몰랐던 건 아니다. 기독교와 비기독교인들의 기록을 살펴보면 초창기 기독교의 폭발적인 부흥은 기독교인이 질병과 고난, 그리고 죽음을 앞에 놓고 보여준 태도 때문이었다고 한다. 어려운 가운데서 교회가 취한 태도가 로마 사회에 주는 감동이 워낙 컸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부흥이 이어지자 이교도인 로마 황제까지도 이교도 사제에게 불평하며 좀 더 힘을 내서 수를 늘리라고 독촉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인은 어떤 면이 달랐기에 로마 제국까지 흔들었다는 것일까? 우리가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맞아 초대교회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서기 249년에서 262년, 서구 문명사회는 인류 역사가 손꼽는 끔찍한 전염병(pandemic)으로 황폐했다. 전염병의 정확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전염병이 극에 달했을 당시 로마에서는 약 5천 명의 사람들이 매일 죽었다. 그 비극을 눈으로 목격한 교부 디오니시우스(Dionysius of Alexandria)는 이렇게 썼다. “이 전염병은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은 비기독교인이다.” 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의 차이를 관찰한 그는 알렉산드리아의 비기독교인에 관해서 이렇게 적었다.“전염병이 발발했을 때, 그들은 병에 걸린 사람들을 쫓아냈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을 버리고 떠나거나 아직 죽지 않은 사람까지도 도로에 던져버렸다. 또한 매장되지 않은 시신을 먼지처럼 취급했다. 그렇게 함으로 치명적인 전염병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은 결코 전염병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비기독교인이 쓴 기록은 이런 사실을 확인해준다. 백 년이 지나서 율리아누스(Julian) 황제는 전염병 이후 시작된 기독교의 급속한 부흥을 막고자 이교도 자선 단체를 만들어 기독교인이 보여준 선행을 모방하려고까지 했다. 서기 362년에 쓴 편지를 보면 율리아누스 황제는 헬레니즘을 신봉하는 사람들이 선을 행하는 데 있어서 기독교인의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불평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급속한 기독교의 성장 원인을 “이방인을 향한 자비, 죽은 자의 무덤에 대한 돌봄, 그리고 그들 삶에서 드러나는 위장된 성결”로 꼽았다. 그는 또 다른 곳에서 이렇게도 썼다. “이건 정말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 악한 갈릴리인(그리스도인)은 자기네 가난한 자들뿐 아니라 우리 로마의 가난한 사람들까지 돌본다니 말입니다.” 비록 율리아누스가 기독교인의 선행 동기에 관해서 의문을 표현하지만, 헬라인의 자선에 관해서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데에 있어서, 특히 전염병 기간 중 기독교인이 보여준 수준에 비해 헬라인의 수준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로드니 스타크(Rodney Stark)가 쓴 ‘기독교의 발흥’(The Rise of Christianity, 좋은 씨앗, 2016)에 따르면 다 이유가 있었다. “율리아누스가 이교도 사제들에게 기독교의 수준에 맞추라고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건 이교도들에게는 선행을 추구할 이유가 되는 교리적인 근본 또는 전통적인 관습이 아예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전염병을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전염병을 대하는 비기독교인의 모습을 자기 보호, 자기 관리, 그리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픈 사람을 멀리하기로 특징지을 수 있다면, 기독교인이 보여준 모습은 그와 정반대였다. 디오니시우스에 따르면 전염병은 기독교인에게 ‘교육(schooling)과 테스트’의 역할을 했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서 기독교인이 전염병에 어떻게 대응했는지 자세히 묘사했다. 디오니시우스는 기독교인 중에서도 ‘탁월한 자들(the best)’은 그들 자신이 병에 걸리고, 심지어 죽어가면서까지도 고귀한 모습으로 아픈 이들을 어떻게 돌보았는지 기록했다.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 대부분은 끝이 없는 사랑과 헌신을 보였고,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았으며 오로지 타인만을 생각했다. 위험에 아랑곳하지 않고 아픈 이들을 돌보았으며, 그들의 모든 필요에 응답했고,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했다. 그리고 평안하고 행복하게 그들과 함께 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스도인은 병에 걸린 사람들로부터 전염이 되었기에 그들에게는 아픈 이웃들이 자연스럽게 더 많이 모여들었다. 그리스도인은 기쁜 마음으로 그들을 받아들였다. 이와 비슷하게, 폰티우스(Pontius)가 쓴 카르타고(Carthage)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 전기’(Biography of Cyprian)에 의하면, 키프리아누스 주교는 전염병이 창궐하던 당시 기독교인뿐 아니라 비기독교인까지도 헌신적으로 돌보았다고 한다.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서만 관심을 쏟고 돌본다면 그건 그리 대단한 게 아니다. 이교도 남자 또는 다른 정당을 지지하는 사람과 차원이 다른 모습을 보여야 한다. 선으로 악을 극복하고 하나님처럼 자비로운 친절을 보이고, 자신의 적까지 사랑해야 한다. 그렇기에 선은 믿음의 형제들에게만 행하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행해야 한다. 이런 봉사가 끼친 영향력은 두 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1) 같은 믿음을 가진 형제자매를 향해 기독교인이 보여준 희생은 믿지 않는 세상에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런 식의 공동체적인 사랑을 그들은 그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요 13:35). (2) 비기독교인을 위한 기독교인의 희생은 결과적으로 초대교회가 기하급수적으로 성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기독교인의 사랑에 힘입어서 전염병에서 살아남은 비기독교인의 많은 수가 기독교 신앙으로 개종했다. 코로나19 바이러스를 대하는 기독교인의 모습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계속해서 씨름하는 지금,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로마 제국 당시 비기독교인이 오로지 자기 자신만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초대교회는 두려움 없는 희생적인 봉사를 강조했다는 사실이다. 비기독교인이 전염병을 피해 도망가고 사랑하는 이들까지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버렸을 때, 기독교인은 그 전염병 한 가운데로 행진해 들어갔다. 그리고 기독교인과 비기독교인을 구분하지 않고 섬겼다. 그들은 자신들이 겪을 고통조차도 감내하며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를 닮은 사랑을 보여줄 기회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점점 더 커지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관련해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한 걸음 떨어진 상태를 계속 유지한다면, 과연 우리가 초대교회의 자세를 삶 속에서 실천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무엇보다 우리는 사회 각계각층으로 번지고 있는 패닉 상태의 두려움에 저항해야 한다. 주변에서 점점 고조되는 긴장 가운데에서도 평안과 고요함의 모범을 보여야 한다. 사람들이 가지 않고 꺼리는 식당이나 장소를 일부러 더 많이 이용하는 것은 어떨까? 의료 전문가가 말하는 조언을 조심스럽게 따르는 동시에 우리의 이웃을 위해 희생적으로 봉사할 기회를 찾을 수도 있다. 살을 파고드는 두려움과 집단 히스테리, 그리고 가짜 뉴스에 휘둘리며 나 자신의 건강만을 챙기기보다는 더 큰 공동체와 취약계층의 건강을 우선순위로 삼아야 한다. 물론 이 모든 과정에서 의료 전문가의 주의사항을 반드시 따라야 한다. 이 일을 위해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계획한 여행이나 행사를 취소해야 할 수도 있고, 다른 기회를 포기해야 할 수도 있다. 심지어 내가 감염된 거 같으면 자가 격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런 대가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사람들은 지금을 축제 기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의 시간이 아닌 건 말할 것도 없다.” 디오니시우스는 그가 겪었던 전염병의 시간을 이렇게 적었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기쁨의 시간이다.” 오해를 막기 위해서 부연할 필요가 있겠다. 디오니시우스는 지금 전염병에 따르는 고통과 죽음을 축하하고 있는 게 아니다. 단지 그는 그런 시련조차도 믿는 이를 시험하는 하나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있다. 이 엄청난 공포의 시간 중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또 봉사하는 것, 소망 중에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것 말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at the Early Church Can Teach Us About the Coronavirus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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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와 디지털 교회
by 박용기
2020-03-24
2020년 3월 전 세계는 ‘코로나19’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자가격리, 재택근무, 온라인 예배가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되었다. 직장인은 이메일, 컨퍼런스콜, 온라인 영상 회의로 소통하며 재택근무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이 집에 머무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주부들은 식사 준비와 자녀 교육으로 분주하고, 자녀들은 개학이 연장되면서 집에서 헤드셋으로 친구와 대화하면서 게임을 한다. 미국은 3월 중순부터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속하게 증가하여 현재 1만 5천 명을 넘어가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3월 13일 ‘국가비상사태’(National Emergency)를 선포했고, 주별로 250명에서 50명 이상의 집회 금지 행정명령이 내려졌다. 지난 월요일(16일)에 미국 행정부는 앞으로 15일 동안 10명 이상의 모임을 피하라고 권고했다. 이로 인하여 많은 미국 교회들은 3월 22일부터 예배당에서 모이지 못하고 온라인 예배를 드려야 한다.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교회는 그 본질적 기능을 완수하기 위해서 어떻게 디지털 리소스들을 활용해야 할까? 1. 온라인 예배를 영과 진리로 드리자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배를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하는지 예수님께 질문했다. 우리는 예배를 어느 장소에서 드려야 하는지에 관심이 많다. 예수님은 그 질문의 대답으로 특정 지리적 ‘장소’ 보다 ‘영과 진리’(in the Sprit and in true)안에서 아버지(the Father)께 예배드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눅 4:20, 23-24).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며, 그 방법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이다. ‘영과 진리’ 안에서 드리는 예배란 ‘성령님’의 조명하심으로 ‘진리 되신 예수님’을 구원자로 고백하며 ‘하나님 아버지’께 드리는 예배이다. 예배자가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면 어느 장소에서든 예배가 가능하다. 재난의 상황에서 교회는 사회적 책임과 안전수칙을 준수하면서 다양한 형식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다.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드릴 수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드릴 수 있다. 모두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이런 예배 형식을 존중해 주는 넓은 마음이 필요하다.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성도들의 모임이다. 코로나19 사태로 주일 오전에 온 가족이 집에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은 평안할 때는 경험하지 못했던 축복으로 볼 수 있다. 예배당 안에서 경험했던 그리스도의 임재를 가정, 골방, 직장에서 누리는 기회로 삼자.2.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자미국에서 코로나19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각 교단 총회, 선교단체, 기독교 대학 등에서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다양한 디지털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미 남침례교출판사 라이프웨이(Lifeway)는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다양한 디지털 리소스들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다(https://ministrygrid.com/coronavirus). 휘튼대학교와 빌리그래함센터와 새들백교회는 함께 웹사이트를 개설(https://coronavirusandthechurch.com)하고, 코로나19 대처를 위한 팟캐스트, 웨비나(Webinar)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업데이트하고 있다. 웨비나는 웹 세미나의 줄임말로 공간적 제약 없이 여러 사람이 소통하며 양질의 정보를 제공하는 온라인 세미나이다. 재난의 상황에서 인력이 부족한 작은 교회들은 재정적 도움도 필요하지만,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정보도 필요하다. 텍사스침례교단(BGCT, SBTC) 홈페이지에는 재난 상황에서 교회의 대처, 예배 생방송 방법, 디지털 목양. 디지털 소그룹, 교회학교 자료, 홈스쿨 자료 등을 신속하게 업데이트하고 있다.작은 교회도 긴급 상황에서 유튜브, 페이스북 라이브, 카카오 TV 같은 플랫폼으로 온라인 예배를 드릴 수 있다. 카카오 라이브 톡 기능을 사용하면 최대 30명까지 생방송 예배를 진행할 수 있다. 유튜브 라이브 방송을 위해서 프리즘(PRISM Live Studio) 앱을 설치하면 스마트폰에서 직접 예배를 생중계할 수 있다. 줌(Zoom)은 무료 화상회의 소프트웨어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 최대 100명까지 서로 얼굴을 보며 모임을 할 수 있다. 최근 코로나19로 북미, 이탈리아, 스페인 등의 국가에서 화상회의 앱 사용이 급증하고 있다.3. 온라인 소그룹을 시도하자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의 얼굴 보기를 간절히 원했다. 바울이 얼굴 보기 원했던 이유는 성도의 교제를 통해서 굳건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이 부족한 것을 보충하게 하려함이라"(살전 3:10). 성도의 교제는 교회의 본질적 요소이다. 사도행전과 서신서에서 신약교회는 가정에서 소그룹으로 모여 떡을 떼고 가르침을 받고 함께 기도했다. 신약교회는 이러한 소그룹 모임을 통해서 성도들의 믿음을 굳건하게 세워갔다. 교회는 코로나19와 같은 사태를 다시 만날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 소그룹(다락방, 목장, 구역, 목장, 셀 모임)을 중단하는 것보다는 디지털 리소스를 선용하여 모일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재난의 상황에서 무슨 온라인 소그룹이냐? 라고 반문할 수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세상 사람들은 재택근무를 한다. 미국 대학들은 2020년 봄 학기 수업을 온라인 수업으로 전환하고 있다. 필자가 사는 지역 공립 중고등학교는 4월 10일까지 가정 온라인 수업(Virtual Home-Based Learning)으로 수업방식을 전환하고 있다.교회도 코로나19 시대에 안전하게 소그룹 모임을 할 수 있도록 변화해야 한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화상회의 앱인 줌(Zoom)이나 스카이프(Skye) 앱, 구글 행아웃(Hangout) 등을 이용하여 각자 집에서 서로 얼굴을 보며 성도의 교제를 나눌 수 있다. 비록 화면이지만 서로 얼굴을 보고 주안에서 교제를 나눌 때, 성도들은 위로와 소망을 경험하게 된다. 새들백 교회는 이미 수년 전부터 약 1,000개 온라인 소그룹을 운영해 오고 있다. 예를 들면 주일 설교 말씀을 듣고 소그룹별로 준비된 질문지 내용으로 40분 정도 나누는 방식이다. 이런 소그룹을 통해서 새신자들이 교회 예배당으로 유입되고 침례를 받는 비율이 계속 증가하고 있다. 디지털 사각지대에 있는 성도에게는 전화심방으로 안부를 묻고 함께 기도한다면 큰 힘을 얻을 것이다.4. 온라인 합심 기도에 집중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말렉과 전투할 때, 모세의 기도 손이 올라가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기도의 손이 내려오면 아말렉이 이겼다(출 17:8-11). 국가적 위기의 상황에서 교회의 기도 손이 올라가야 한다. 코로나19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다. 미국은 3월 15일 국가 기도의 날로 선포하고, 교회가 연합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했다. 싱가폴의 한 교회는 COVID 19:00 기도회 제안하고 매일 오후 7시에 온라인 기도회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이다. 많은 한국교회가 긴급 온라인 기도회를 선포하고 매일 합심해서 기도하고 있다. 하루에 세 번 온라인 기도회를 진행하는 교회들도 있는데, 수천 명의 참여자가 동시에 접속해서 합심 기도를 한다. 규모가 큰 교회뿐만 아니라 작은 교회들도 합심하여 기도하고 있다. 한 개척교회 목사는 카카오 라이브 톡을 통해서 15명 정도 그룹과 매일 저녁 온라인 라이브 기도회를 하는데, 참여한 성도 대부분은 ‘요즘 우울한 소식밖에 없는데 이렇게 함께 온라인으로 만나서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는 것으로 큰 힘과 위로를 얻는다’라고 고백한다. 한국의 드라이브 스루(Drive through) 선별 진료소가 전 세계에 찬사를 받고 있다. 미국, 이탈리아, 영국, 독일에서도 한국의 드라이브 스루 방식을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열심 있는 기도, 뜨거운 온라인 합심 기도로 코로나19를 통과하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열심히 온라인 합심 기도를 통하여 위기의 상황을 대처하는 방식을 ‘코리안 처지 프레이어 스루’(Prayer through) 방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한국교회의 ‘프레이어 스루’ 방식은 전 세계 교회에 모범이 될 만한 사례이다. 이러한 기도의 능력으로 한국에서 코로나19 사태가 급진전 되고 있다고 믿는다. 한국교회의 기도운동이 온 세계 교회로 확산되기를 소망한다. 5. 온라인 헌금으로 선행에 동참하자 세계적 큰 흉년(a great famine over all the world) 때문에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함께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행 11:28). 안디옥 교회는 본인들도 힘들 텐데 예루살렘 교회가 더 어렵다는 소식을 듣고 구제헌금을 모아서 바나바와 사울을 통해서 예루살렘교회에 전달했다(행 11:28-30). 세상 사람들은 이런 안디옥 교회 성도들을 최초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행 11:26). 코로나바이러스보다 더 무서운 죄 바이러스로 감염되어 확진 판정을 받은 세상은 탐욕, 이기심, 자기 중심성으로 충만하다. 복음으로 죄의 바이러스에서 완치 판정을 받은 교회에 나타나는 증상은 섬김과 나눔과 희생이다. 복음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나라 시민으로 나눔과 섬김의 가치를 실현하며 세상 문화에 맞서게 한다. 코로나19 사태로 온라인으로만 예배드리는 가운데 분당의 한 교회는 14억 넘는 온라인 헌금을 대구지역 병원을 돕고, 개척교회 월세를 지원하고 있다. 강남의 한 교회는 한 주일 온라인 헌금 전액인 수억 원을 대구, 경북 지역에 기부했다. 수많은 교회가 함께 고통당하면서도 더 어려운 지역으로 사랑의 헌금을 보내고 있다. 재난의 상황에서 온라인 헌금이 예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필수적 도구로 자리 잡고 있다. 온라인 헌금으로 선행에 동참할 때 우리 사회에 코로나19의 두려움을 이기고 사랑의 복음을 확산할 수 있을 것이다.디지털 세계에 그물을 던지자 예수님께서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한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았다(눅5:4-6). 21세기는 디지털 세계(digital world)이다. 코로나19 상황을 통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한국 교회에게 전통적 방법만을 고수하지 말고 깊은 곳인 디지털 세계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고 말씀하시는 듯하다. 디지털 세계에 빠르게 적응한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넷플릭스 등은 모두 30년이 안 되는 신생 기업들이지만 21세기를 대표하는 기업들로 세상에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복음의 본질은 변할 수 없지만, 복음을 담는 그릇은 그 시대의 문화에 맞게 변해야 한다. 코로나19 사태를 통해서 교회는 ‘가서 제자 삼으라’(go and make disciples)는 예수님의 명령을 기억하며 디지털 세계 한복판으로 나아가서 그물을 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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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에서 지금 배울 것들
by Robert Gonzales Jr.
2020-03-20
기독교인들도 종종 서로 간에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곤 한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복음주의 진영 속 수많은 교단들의 난립만 봐도, 또 교단적 또는 신학적 노선 사이에서 벌어지는 날카로운 논쟁들만 보아도 이 사실은 잘 알 수 있다. 성경적으로 “사회적 정의(justice)”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 벌어지고 있는 지금의 논쟁은 불일치에 대한 하나의 좋은 예이다. 이런 종류의 분열은 사실 우리를 낙망하게 하고 고통을 주며 종종 믿음을 흔들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 안에서의 불일치가 결코 새로운 것은 아니다. “같은 마음”(빌 2:2)을 품으라고 강하게 권고했던 사도 바울 본인조차도 항상 다른 이들과 같은 마음을 품었던 건 아니다. 사도행전 15장 36-41절은 바울과 그의 가까운 동료 바나바 사이에서 있었던 날카로운 불일치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을 다음 선교 여행에 꼭 데리고 가고 싶어했다. 그러나 마가가 예전에 자신들을 저버렸다는 이유로(행 13:13) 바울이 반대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대립이 특히 더 가슴 아픈 것은 그로 인한 결과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슬픈 현실까지 성경이 굳이 드러내는 이유는 우리를 절망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훈을 주기 위해서이다. 일단 이 사건을 간단하게 살펴보고 그 다음에 교훈을 찾아보자.누가 옳은가?먼저 두 사람이 서로 갖고 있는 생각을 살펴보자. 바울의 논리는 이것이다. 마가가 전에 떠났다는 것. 그런 식의 이탈은 사실상 심각한 일이다(눅 9:62; 잠 25:19). 이 세상 그 어떤 대장이 전투 초기에 진영을 이탈한 군인을 데리고 전투를 벌이고 싶겠는가? 겉으로 보기에 바울은 성경적인 원칙을 따르는 것 같다. 그러나 판단을 내리기 전에 우리는 바나바의 이야기도 들어봐야 한다(잠 18:17). 이 구절에서 바나바의 논리는 나오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기존에 알고 있던 그의 성격에 근거해서(행 4:36; 9:26-27) 유추하는 길 밖에 없다. 나는 바나바가 마가의 과거 행동을 감싸고만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바나바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는 신실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또 다른 성경적 원칙을 바울에게 제시하지 않았을까 싶다. 과거의 죄와 실수가 꼭 미래의 신실함과 성공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사도 베드로를 생각해보자. 그는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를 여전히 사용했다. 나는 바나바가 바울에게 이렇게 말했을 거 같다. “아니, 그럼 베드로는? 왜 베드로는 되는데 마가는 안 된다는 거야?”누구 편을 들기 전에 한 가지 기억할 점이 있다. 불일치가 항상 이단 또는 부도덕과 같이 심각한 문제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예수님의 신성과 같은 근본적인 믿음의 문제를 놓고 다투는 게 아니다. 또는 사역자가 간통을 해도 되는가 여부를 놓고 싸우는 것도 아니다. 우리는 지금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헌신한 경건한 두 사람이 성경적 원칙의 적용 문제를 놓고 다투는 장면을 목격하고 있다. 이 두 사람 사이의 긴장은 이들이 각각 다른 성경적 원칙을 강조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만약에 이들이 조금만 더 균형을 가지고 자신들이 주장하는 원칙을 바라보았다면 이 다툼은 그리 오래지 않아 끝났을 것이다. 나는 사도행전을 쓴 누가가 그 어느 쪽의 편도 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누가가 바울이 실라를 선택하고 다른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한다고 썼다고 해서(행 15:40), 반드시 당시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이건 단지 바울과 바나바와 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안디옥 교회가 바울과 관계를 끊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구절이다. 그리고 행여 그들이 바울의 편을 들었다고 해도, 그게 그들이 옳았다는 의미도 아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우리가 누가 더 옳았고, 누가 더 틀렸는지에 관심을 갖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배울 점은 무엇인가?자, 이 이야기를 통해서 오늘날 많은 불일치를 경험하는 우리가 배울 점은 무엇인가? 네 가지가 있다.1. 편들고 싶은 마음을 버리라종종 우리는 한쪽을 선택하고, 또 나름의 강한 의견을 고수해야 할 때가 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꼭 그렇게 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누구나 다 나름의 고민과 의심스런 구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많은 경우, 문제를 주님의 손에 맡기는 게 가장 지혜로운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종종 보면 왜 두 명의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가 각기 다른 영역에서 사역하는지 이해가 안 될 때가 있다. 그 두 사람은 같은 도시에 있고 또 같은 신앙고백을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같이 사역하지 않고 따로 하는 걸까? 형제자매들이여, 하나님은 우리가 언제나 어느 한쪽 편을 들기 원하는 분이 아니다. 모든 것을 다 이해하고 싶은 유혹과 싸우라. 그리도 양쪽을 다 주님께 일임하라(빌 3:15). 2. 지금 시대에는 언제나 불일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종종 우리는 교회를 너무도 이상적으로 바라본다. 교회나 목회자가 실망을 주었을 때, 복음의 능력에 대해서 회의를 갖고 더 나아가서 아예 신앙을 포기하는 경우까지 보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적인 현실주의자가 되라고 하신다. 어차피 인간은 유한하고 또 우리 안에 죄가 여전하기에, 성경 속 두 명의 거룩한 사도들까지 서로 싸우게 만들 정도라면, 아무리 경건한 사람들이라도 서로 강하게 대립할 수도 있고 때로는 갈라설 수도 있는 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계시가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 전체가 다 드러나지는 않은 시대에 살고 있다(고전 13:9-10). 그건 마치 그림 퍼즐의 전체 모양이 뭔지 알 수 있는 것 같지만 중간 중간 몇 조각이 빠져있는 것과 비슷하다. 바로 이런 점 때문에 진실한 기독교인들조차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려고 할 때, 모두가 다 같은 결론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청교도인 매튜 헨리(Puritan Matthew Henry)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모든 빛과 사랑이 완벽한 천국에 가기 전까지는 결코 이 땅에서는 다 같은 마음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3. 모든 불일치를 선으로 만드는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안식을 누리라사탄은 아마도 바울과 바나바의 갈등으로 뭔가 이득을 얻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탄이 도모하는 악을 하나님은 선으로 바꾼다(창 5:20; 롬 8:28). 이 점을 생각해보라. 이 둘의 갈등 덕분에 선교 사역에 투입된 인원은 두 배가 되었다. 더 많은 사역이 가능해졌다. 새로운 교회들이 더 많이 세워졌다. 바울이 애초에 바나바에게 했던 제안은 그들이 이미 세운 교회를 다시 방문하는 것이었지만(행 15:36), 하나님의 계획은 다른 데 있었다. 하나님은 선교가 마케도니아와 그리스까지 뻗기를 원했다. 또 하나님께서 이 갈등을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유익을 끼쳤는지도 한번 생각해보라. 마가를 회복시키려는 바나바의 노력은 아마도 마가에게 희망을 주었을 것이다. 게다가 바울의 완고함은 마가로 하여금 다시는 실수를 해서는 안 되겠다는 다짐을 하도록 했을 것이다. 또 바울의 태도 덕분에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있으면서 좀 더 주의 깊게 그를 관찰하고 더 엄격했을 것이다. 또한 은혜를 강조하는 바나바를 통해 바울은 보다 더 예민하게 인내심을 가진 사람으로 그의 후반기 선교사역을 진행했을 것이다. 참으로 우리는 바울이 그의 말년에 이르러서 오네시모라는 이름의 노예에게 어떻게 했는지 알고 있다. 바울의 태도가 바나바가 마가에게 보였던 바로 그 모습이 아닌가!(몬 1장)자,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 있는 불일치과 분열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들을 위한 선, 우리를 위한 선, 그리고 당신의 이름의 영광을 만들어 가시는지 살펴보자.4. 다름이 사랑을 파괴할 필요는 없다는 점을 기억하라날카로운 불일치와 심지어 분열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 두 사람이 서로를 신실한 형제로 보았고 또 서로의 사역을 지원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를 그리스도의 사도 그리고 왕국을 위한 신실한 동역자(고전 9:5-6)라고 부르고 있다. 다른 형제들에게 “여러 성도들”을 위해 기도하라고 말한(엡 6:18) 바울은 자신부터 그렇게 했을 것이다. 바울은 계속해서 바나바와 마가를 위해서 기도했다. 그리고 바나바와 마가 역시 바울을 위해서 기도했을 것이다.이 모든 게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당신을 반대하는 사람을 기도 목록에서 지우지 말라. 그 사람이 틀리다고 생각한다면, 그를 바른 길로 인도해달라고 기도하라. 그리고 당신과 그 사람이 같은 믿음을 길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께 그를 축복해달라고 간구하라. 서로간의 불일치가 너무도 깊어서 도저히 화해가 불가능한 상황으로까지 사태를 끌고 가지 말라. 바울은 나중에 마가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돌이켰고, 심지어 마가에게 찾아가 도와달라고 말할 정도로 겸손한 사람이 되었다(딤전 4:11). 한 때 자신의 신실함을 믿지 않았던 바울이 곁에 와서 도와달라는 말을 했을 때, 마가가 느꼈을 기쁨을 한번 상상해보라.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도 바울처럼 내가 지금 갖고 있는 판단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갖도록 하자. 분명한 교리와 성경적 윤리에 대한 확신은 결코 협상의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적 원칙을 적용하는 문제라면, 최소한 나의 기존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는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리고 서로 간에 형제의 사랑을 유지하고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랑이 오래 참는 사랑, 온유한 사랑, 무례히 행하지 않는 사랑, 모든 것을 참는 사랑, 모든 것을 믿는 사랑, 그리고 모든 것을 바라는 사랑이라면, 나를 바꾸겠다는 생각은 그렇게까지 힘든 게 아닐 것이다(고전 13:4-7).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넓은 마음과 깊은 헤아림을 가진 사랑을 허락하시길 바란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Godly People Disagree: Lessons from Acts 15번역: 무제
바울
바나바
마가
실라
사도행전
불일치
분열
대립
원칙
교회생활
‘코로나19’로 인한 온라인 예배의 의미
by Jay Kim
2020-03-15
최근 몇 주간 나는 여러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극심한 혼란을 느끼고 있다. ‘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이 교회론적 난제를 우리에게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의미는 무엇일까? 두려움과 불확실성 가운데서 우리가 계속 모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할까? 우리의 결정이 지혜로운 걸까 지혜롭지 못한 걸까? 우리의 행동은 올바른가 아니면 무분별하게 행하고 있는 걸까?혼돈의 상황 속이지만 3월 말에 책 한 권을 출간할 예정이다(Analog Church, 3월 31일 출간 예정). 이 책에서 나는 교회는 지금까지 항상 아날로그 공동체였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주장했다. 각자의 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교제하기 위하여 디지털로 “연결”되는 편리함 대신 아날로그로 모이는 수고를 하는 공동체라는 말이다. 하지만 요즘 비디오와 온라인으로 드리는 예배에 대한 논의가 조금 더 낯설고 생각하지 못한 방식으로 발전되어 가고 있다. 이에 최근에 발전되고 있는 상황을 조명해 보면서, 불안하지만 앞으로 다가올 날들을 잘 헤쳐나갈 수 있도록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보았다. 편리가 아닌, 조율빠르게 급증하는 ‘코로나19’ 위기로 인해 많은 교회가 온라인 예배로 전환했다. 성도들에게 이를 독려하는 것이 좋은 방법이자 꼭 필요한 대안이라고 보고 있다. 세계 곳곳의 정부가 대규모 집회 금지를 지시하고 있으며 우리도 그 현실을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상황은 내가 사는 곳과 섬기는 곳에서도 현실이 되고 있다. 지역 대학교는 이번 학기 남은 기간에 강의실 참석 수업을 하지 않기로 했다. 공립학교도 같은 결정을 했다. 우리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교단들은 이러한 방향을 강하게 권하여 직접 참석하는 모든 규모의 집회를 중단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현재는 사회적 거리 두기가 ‘코로나19’ 바이러스의 확산을 막고 최소화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보인다.그래서 회중을 온라인 공간으로 인도해야 한다면, 회중에게 디지털 예배의 현실이 편리하지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라 일시적인 방편임을 명백하게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점을 명백하게 하느냐 하지 않느냐는 나중에 중요한 갈림길에 서게 할 것이다. 편안한 집에 앉아서 TV와 컴퓨터로 설교를 시청하는 것은 분명 편리할 것이다. 이러한 편리함은 오랫동안 훈련을 통해 형성된 예배의 마음가짐과 태도를 예배하지 않았던 때로 되돌려 놓을 수 있다. 예배당의 공간에 함께 모이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믿는다면, 온라인으로 예배하는 것을 특정 상황에 일시적으로 행하는 것으로 보아야만 한다. 우리가 직접 모여 예배할 수 있을 때까지만이다. 여행으로 멀리 떨어져 있는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을 보며 대화하는 시간이면, 나는 온라인으로 만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은 집에 도착해서 사랑하는 가족을 보고, 실제로 손을 잡고, 안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온라인 예배는 임시로 행하는 대안이라는 입장에서 행해져야 한다. 시간과 매체를 선용하기잠시지만 새롭고 낯선 디지털 현실 세계에 당면한 우리에게는 시간과 매체를 선용할 수 있는 길이 있다. 온라인으로 예배해야 하는 동안 공동체가 직접 얼굴을 마주할 수는 없지만, 정기적으로 드리는 예배를 다시 구성해 보는 기회로 삼을 수는 있다. 진실로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강조하고 다시 모여서 함께 예배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가 더욱 깊은 교제를 나눌 수 있도록 말이다.대부분의 실시간 방송 플랫폼은 실시간으로 대화할 수 있는 기능이 포함되어 있다. 온라인으로 모이는 이 기간에는 평상시 주일 예배 때보다 좀 더 대화적인 방식으로 설교하고 가르칠 수 있다. 목회자와 교회 지도자들이 설교 후에 대화로 이어지는 방법을 도입한다면 이 기간에 성도들을 더 잘 섬길 수 있을 것이다. 온라인으로 눈과 귀만 빌려서 참여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과 질문으로 소통함으로써 디지털로 분리된 세계를 연결할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정한 시간에 성도들이 함께 온라인 예배에 참여할 수 있도록 독려하여 “실시간” 집회를 강화할 수 있으며, 온라인 예배라고 언제나 원할 때 드릴 수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바꿀 수 있다. 기도에도 유사한 접근을 할 수 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기도를 나누도록 격려하는 것은 대부분의 온라인 교회들이 이미 실행하고 있다. 디지털 거리의 깊은 골을 넘어 서로를 위해 기도하는 것은 몸이 실제로 함께하여 기도할 때 느끼는 강도보다는 약할 수 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서로를 사랑하는 강력한 방식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잘 이루어지면, 교회 생활에서 겉돌고 있는 성도들을 연결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방식으로 행해질 수도 있다.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이미 대규모/소규모, 모임/흩어짐의 역동적이고 유기적인 모임이 존재한다. 대규모 주일 예배 모임이 있는가 하면, 도시 전체에서 인근 지역과 마을별로 흩어져 모이는 소규모 그룹도 있다. 예기치 못한 이 기간에 우리는 소그룹으로 주중에 모이도록 하고, “실시간” 온라인 예배 모임을 독려할 수 있다. 대규모로 모일 수 없지만, 할 수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소규모로 그리고 흩어져서 모일 수 있다. 서로 볼 수 있도록 노력하기 이러한 시기에 크리스천은 보통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요일 4:18)라는 성구를 많이 암송한다. “온전한”의 헬라어는 ‘teleia’이며, 여기서 “궁극적 종말 혹은 목적”이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telos’가 나왔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려움을 내쫓는 사랑은 우리의 두려움이 끝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새로운 시작을 향하여 우리를 이끄시는 하나님의 궁극적인 사랑이다. 여기서 우리가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있다. ‘코로나19’로 우리가 죽지 않더라도 우리는 결국 죽게 되어 있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고 흙에서 와서 흙으로 돌아갈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은 이에 머물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 소망이다. 이것이 교회가 계속 모여서 찬양하고, 설교를 듣고, 기도하며, 섬기고, 성찬의 떡과 잔에 참여해야 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미래의 소망을 실제로 몸으로 구체화하고 미리 행하는 방법이다. 현재 상황이 앞으로 몇 주간 그리고 몇 달간 한 공간에서 함께 모이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할 수도 있다. 우리는 지혜롭고 책임감 있게 행해야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가 떨어져 있더라도 말이다.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쓸 수 있다(살전 2:17).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Taking Church Online in a Coronavirus Age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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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 예배를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by Sinclair Ferguson
2020-03-11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중세 후반기의 예배가 일종의 방관자들이 모여 지켜보는 행사로 전락했다는 우려를 마음속 깊이 품고 있었다. 회중이 거의 수동적인 자세로 예배에 참여했던 것이다.그러한 회중에 대해서도 예배자들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여하간 그 예배자들은 미사가 연출되는 장면을 관찰만 할 따름이었다. 혹은 성가대의 노래를 그저 듣기만 할 뿐이었다. 당시의 예배 의식에서 회중은, 그처럼 구경꾼의 모습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을 뿐 적극적인 자세로 그 과정에 참여하지 않았다.따라서 예배의 ‘수준’은 그 예배자들이 거룩한 기쁨을 경험했는지가 아니라, 교회 음악이 시대의 기준에 부합했는지, 성가대의 노래가 훌륭했는지, 미사는 인상적으로 연출되었는지에 따라 평가되었다. 이를테면 사제가 입는 의복이나 미사 때 들려오는 종소리 또는 라틴어, 그리고 성당에 피어오르는 향 등이 그러한 연출을 더욱 극적으로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실제적인 목적에서 예배는 하나님의 대리자인 사람을 위해서만 드려졌다.종교개혁은 그 모든 관습을 바꾸어 버렸다. 그 결과 각각의 예배자들이 능동적으로 예배에 참여하며 말씀을 듣고 직접 성찬을 나누며 자신들의 마음과 영혼을 실어 기도하고 찬양했다.우리가 던져야 할 근본적인 질문그러한 종교개혁은 이 시대에 다시 필요할지도 모른다. 오늘날 교회 예배에 관해 조언하는 전문가들도 ‘주일 예배의 수준’을 가시적인 기준에 따라서만 평가하기 때문이다(사실 예배의 수준은 누군가의 주관을 뛰어넘어 그 예배를 받으시는 분을 고려해서 평가해야 한다). 어쩌면 우리의 시선은 수직적인 차원보다 수평적인 측면에서 사람에게 고정되어 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사야나 사도 요한처럼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부복하여 그 입을 가리고 경배를 올리는 참된 예배에 대한 갈망을 이미 상실했는지도 모른다.바울이 바라보았던 예배도 우리가 생각하는 예배와는 사뭇 달랐다.“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나 알지 못하는 자들이 들어와서 모든 사람에게 책망을 들으며 모든 사람에게 판단을 받고 그 마음의 숨은 일들이 드러나게 되므로 엎드리어 하나님께 경배하며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 가운데 계신다 전파하리라”(고전 14:24-25).현대 교회가 전통적인 예배에서 부족함을 깨닫고 그 공백을 채우려고 노력하지만, 오늘날 ‘예배의 개혁’은 성경이 위와 같이 제시하는 예배의 비전을 거의 주목하지 않는다. 종교개혁자들이 씨름했던 질문도 지금 우리에게는 별로 와 닿지 않는다.‘하나님은 어떻게 자신의 기쁨을 예배 가운데 드러내시는가?’‘우리는 어떻게 그 기쁨을 회중 가운데 반영하며 예배의 전 과정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목적을 따라 진행되게 할 수 있는가?만일 우리가 이처럼 근본적인 질문을 하지도 않고, 그에 대한 답변을 찾아 성경을 살펴보지도 않는다면, 예배에 대한 접근, 다시 말해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을 추구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그 결과, 깊이 생각해보지도 않고 뭔가 가시적인 효과만 가져다주는 방식을 따른다든가, 아니면 다른 교회들이 보기에 좀 더 세련된 스타일만 추구하며 예배를 드릴 수 있다.한 가지 예를 들면, 과거에는 찬송가를 펴서 거기에 인쇄된 악보를 보며 찬양하다가 이제는 대형 스크린에 가사를 띄워 놓고 한 구절씩 따라 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게 되었는데, 이러한 변화는 분명 순수하고 좋은 의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더라도 흔히 예상치 못하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다. 곧 성도의 신앙을 고양시키는 본래의 목적을 이룬다기보다 오히려 그 신앙에 손해를 입힐 수 있다.말하자면 스크린에 올라온 찬양을 한 구절씩만 따라 하다 보니, 가사 전체의 흐름을 놓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특별히 젊은 세대는 자신이 부르는 찬양이 시편의 고백을 가사로 취한 노래인지도 모르고 따라 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앞선 세대와 달리 전체 시편 중 대부분을 암송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당연히 시편에 나오는 찬송이나 참회의 노래뿐 아니라, 성경의 다른 본문에서 인용한 가사, 그리고 오늘날 우리와 비교할 때 그 문학적 재능이나 신학적 통찰이 훨씬 더 뛰어난 사람들이 작사했던 수백 편의 찬송 역시 모를 수 있다.더 나아가, 기독교 신앙에 흥미를 느끼고 예배에 참석하게 된 오늘날의 어떤 젊은이가 바로 그 기독교 신앙의 요체가 되는 사도신경을 몇 주 안에 자연스럽게 암송하겠는가? 복음의 근본적인 진리를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그런 고백을 많은 예배에서 생략하고 있는데 말이다.우리는 모두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친숙하게 알고 있으면서도, 구약성경이 그와 함께 소개하고 있는 “솔로몬의 아들 르호보암”의 죄에 대해서는 쉽게 망각한다. 다시 말해, 르호보암이 앞선 세대의 지혜를 무시하고 자기 세대의 조언만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백성을 재앙에 빠뜨린 잘못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이러한 문화적 상황에서 출간된 ‘종교개혁 예배: 현재를 위한 과거의 예전’(Reformation Worship: Liturgies from the Past for the Present)은 아침에 찬물로 샤워하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는 책이다. 우리 몸이 활기를 되찾는 데 도움을 주는 냉수 샤워처럼 오늘날 예배를 갱신하는 데 유익을 주는 책이라는 말이다.혹 대중음악만 평생 들어 온 사람은 그러한 노래를 선호할 뿐 아니라 마치 그 노래를 음악의 표준처럼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러다가 우연히 고전음악을 들려주는 라디오 채널을 발견하고 바흐와 베토벤, 멘델스존이나 헨델의 세계 속으로 진입하게 된다면, 그 사람의 감성은 더 깊고 풍요로워져서 이전보다 유익하고 만족스러운 예술적 경험을 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과거의 예전은 우리가 참여하는 예배에 아름다운 질서와 흐름 그리고 리듬을 더해 줄 수 있다.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여기서 나는 경직된 자세로 전통적인 예배를 무조건 받아들여야 한다든가, 아니면 아무런 독창성도 없이 그저 오래된 예전이면 일단 모방하고 보자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아가 “종교개혁자들이 따른 방식이기 때문에” 우리도 그와 같은 방식을 따라야 한다며 강경하게 주장하려는 의도도 없다. 그러한 태도는 우리의 예배를 질식시키는 결과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우리 중 대부분은 종교개혁이 일어난 유럽에 살지도 않고, 더더구나 16세기에 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내가 강조하려는 바는, 오늘날도 우리의 가장 큰 필요는 다름 아닌 성령과 진리를 따라 예배하는 데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예배를 신중하게 생각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과거의 예전을 참고해 볼 수 있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다. 가령 종교개혁자들이 추구했던 삼위일체적이고, 그리스도 중심적이며, 성경의 가르침에 근거한 예배의 원리를 오늘날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기 위해 전통적인 예배 방식을 살펴볼 수가 있다. 그럼으로써 지금 우리가 처해 있는 자리에서 과거의 예전이 보여 주는 복음의 진리를 새롭게 구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이런 일은 쉽지 않은 과제이다. 거기에는 지혜와 슬기와 깨어 있는 감각, 그리고 예배의 원리와 목적을 주의 깊게 추구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는 언어를 통해 선포되는 가르침만 아니라 몸으로 느끼는 경험을 통해서도 사람들이 배우고 성장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따라서 그들은 더욱 올바른 방식을 통해 예배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 또한 현재 그들의 마음이 시대정신의 영향으로 무뎌져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점진적으로 예배의 감각을 깨워 가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우리는 종교개혁의 핵심 정신을 잊어서는 안 된다. 곧 성경을 중심으로 기록된 말씀을 해석하고,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은혜의 경이로움과 믿음의 필요를 인정할 뿐 아니라, 성령의 사역을 힘입어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정신을 상실할 때, 우리의 예배는 세련되기만 할 뿐 차갑기 그지없는 죽은 형식으로 전락하고 말기 때문이다. 곧 하나님의 임재가 서린 거룩한 권능으로 충만한 예배를 드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내가 어릴 적에는 거의 모든 예배를 시작할 때 이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을 예배합시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는 그러한 말이 좀처럼 들리지 않는다. 다음과 같은 멘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서로를 향해 인사합시다.” 물론 우리 각자는 서로를 따뜻하게 환영해야 한다.그러나 예배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일이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로 하여금 진지하고 무게감 있는 기쁨을 느끼게 하며, 또한 내면의 겸손에서 우러나오는 경외심을 갖게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각자를 자신의 임재 가운데로 초대하셨다는 놀라운 특권을 자각하게 된다. 예배란 무엇보다도 그분이 우리를 환영하심으로써 드릴 수 있는 일이지, 우리가 서로를 환영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우리는 성경과 종교개혁의 유산을 통해 그와 같은 예배의 관점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차원에서 여러 가지 탁월한 예전을 모아 놓은 앞선 책(‘종교개혁 예배’)은 올바른 예배를 드릴 수 있는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 준다고 하겠다. 그러한 자료를 훌륭하고도 지혜롭게 사용하는 이가 있다면, 그 손길을 통해 얼마나 큰 복이 교회에 전달되겠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 원제: What We Can Learn from Reformation Worship and Liturgies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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