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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질 위기에 있는 찬송가 살리기
by Leland Ryken
2020-03-09
우리는 특정 생물이 계속해서 멸종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루에 약 200종의 동식물이 멸종되고 있다고 하니 충분히 위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와 같은 멸종이 지금 교회에서도 일어나고 있다.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위대한 찬송가를 다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교회에서 찬송가가 사라지는 것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일어나기도 하고, 순식간에 벌어질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많은 교회에서 찬송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고, 이미 사라진 곳도 있다는 사실이다. 믿음의 찬송가를 사랑하고, 지키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서 한 가지 방법을 제안하려고 한다. 사랑하는 찬송가를 잃어버리지 않을 수 있다. 바로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편으로 읽고 묵상하는 것이다. 이런 제안은 혁명적인 게 아니다. 경건 묵상을 위한 찬송가 선집(anthology of hymns)을 위해 조사하는 중 ‘찬송가: 독서의 역사’(The Hymnal: A Reading History)라는 책을 만났다(이 책에 관해 내가 TGC에 쓴 리뷰를 읽어보라). 이 책에 의하면 1870년대까지 전통적인 찬송집은 들고 다닐 수 있는 크기로 세로 13센티에 가로 8센티로 된 시 모음집이었다. 거기에는 악보가 없다.이런 찬송시 모음집은 주일날 예배시간에 부르기 위해서가 아니라 평일 삶 속에서 묵상을 위해 사용되었다. 찬송가 속의 시는 개인 또는 가족 경건의 시간에 사용되었다. 교인들은 사무실, 학교, 들판 그리고 시장으로 갈 때도 항상 들고 다녔다. 찬송시 모음집은 아이들의 교육, 특히 글을 읽도록 가르치는 데에도 널리 활용되었다. 아이들은 찬송시를 외웠고, 또 선물로 찬송시 모음집을 받기도 했다. 부모는 가족의 추억을 거기에 기록했고, 그 속에 열차표에서 사업상 편지까지 끼워두고 보관했다. 전통 찬송가를 부르는 교회든지 아니면 전통 찬송가를 더 이상 부르지 않는 교회든지 찬송가의 가사를 읽고, 그것을 시로 묵상하는 것을 심각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라.찬송은 시다찬송가는 노래로 불리기 전에 시였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가장 먼저 필요하다. 작사가가 노래로 불릴 것을 고려해서 썼다고 해도 그들은 찬송가를 먼저 시로 만들었다. 찬송가를 오직 노래의 가사로만 생각할 때 우리는 찬송가가 가진 시적 아름다움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는 몇 가지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한 가지 한계는 이것이다. 음악이라는 것이 우리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우리의 시선을 가사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노래하면서 가사 속에 숨은 이미지와 은유, 그리고 뉘앙스를 제대로 음미하기 위해서 잠시 멈추거나 속도를 늦추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찬송시를 부를 때 생기는 또 하나의 한계는 다음 절의 가사가 앞 절의 가사 바로 아래, 그리고 같은 흐름의 멜로디 안에 위치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다음 절의 시작은 앞 절의 시작과 동일하다. 그 결과 절마다 같은 사이클이 반복되는 것이다. 가사에 담긴 의미, 앞으로 쭉쭉 나아가는 의미의 선형적 전개(linear unfolding of the text)는 크게 손상되고, 같은 구역만 반복적으로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 들게 된다. 애초에 찬송가 가사는 반복되는 사이클이 아니라 시작과 중간 그리고 끝이라는 선형적 전개의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찬송가를 시로 경험하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이제 접근방식을 바꾸어야 한다. 찬송을 시로 읽기일반적인 시를 읽을 때 쓰는 방식을 적용하는 것으로 시작하자. 시인은 자기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해서 시를 쓴다. 약 50년 전 내가 대학원생이었을 때 ‘시인이 사용하는 언어’(Language That Poets Use)라는 책은 많은 인기가 있었다. 시인들이 사용하는 특별한 언어를 시적 관용구(poetic idiom)라고 표현한다. 간단히 말해서 시인들은 은유와 직유라고 부르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체를 통해서 생각한다. 이런 시적 관용구는 읽는 사람에게 무엇을 생각하게 하는가?첫 번째로 빨리 읽는 게 정상인 우리의 삶에서, 또한 교회에서 멈추지 않는 음악을 계속 따라가야 하는 상황에서 천천히 읽는 것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천히 읽게 될 때 시 속에 숨은 이미지와 형체를 찾아내어 펼치게 되고, A가 B와 같다고 말하는 시의 은유와 직유를 비로소 이해하게 된다. 이는 단어와 구절이 주는 언어의 아름다움을 누리기 위해서 잠시 멈추는 것이다. 시인의 시적 능력이 만든 효과를 누리고 감상하는 것이다. 시가 가진 두 번째 중요한 요소는 시인의 사고가 선형적 방식으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찬송가 선집에서 찬송시를 설명할 때 말했듯이 위대한 찬송가 속에 들어있는 순차적 전개(sequential progression)가 중요하다. 찬송가를 모든 시가 다 나올 수 있도록 절에 따라 순차적으로 프린트해 보라. 찬송시가 이런 식으로 프린트된 것으로 알 수 있는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는 위대한 찬송시의 작사가가 절마다 그들이 말하고 싶은 내용을 얼마나 깊이 있게 실었는가이다. 대부분의 경우 각 절은 전체 흐름 속에서 달성해야 하는 고유의 “역할”을 가지고 있었고, 각각의 절마다 그 자체의 이미지와 단어 패턴이 있었다. 각각의 절을 하나의 독립된 작은 세상으로 이해할 때 우리는 비로소 그다음 절이 앞선 절 속의 사고 또는 느낌을 어떻게 더 발전시켜 나가는지를 알 수 있다. 시의 마지막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때까지 전개된 각각의 절의 일관성을 되돌아볼 수 있게 되고, 한눈에 각각의 절이 어떻게 서로 연결되어 있으며, 전체 시가 말하고자 하는 통일된 주제를 제대로 표현했는지 알 수 있게 된다.시의 세 번째 요소는 장르이다. 우리가 쓰는 모든 찬송가를 하나의 장르, 즉 “찬양”이라는 한 장르에 몰아넣었다. 그러나 찬송시 모음을 우리가 영국 문학 모음집처럼 접근할 때 여러 가지 사실들이 드러난다. 우리는 먼저 문학과 성경 장르라는 익숙한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그럴 때 찬송가 속 다양한 장르가 발견된다. 개인의 체험을 담은 시, 승리의 노래를 담은 시, 대관시, 자신을 고백하는 시, 특정 상황의 시(시인의 삶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일을 당했을 때 지은 시) 그리고 그리스도 찬양시 이다.찬송시를 우리에게 익숙한 일반시의 카테고리 속에 놓고 볼 때, 우리는 언어의 이미지와 형태라는 시적 질감(poetic texture)의 측면에서 유익을 얻는다. 특별히 중요한 예를 하나 들자면, 우리가 익숙한 찬양은 정말로 많은 경우 성경의 풍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찬송시를 설명할 때 “성경적 참조의 모자이크”라는 표현을 반복해서 사용한다. 찬송시를 분석하는데 많은 시간을 쓰는 경우에만 우리는 비로소 시인들이 성경적 암시라는 네트워크를 얼마나 신중하게 사용했는지 알 수 있다. 찬송시의 유익위대한 찬송가의 멸종이라는 위기를 맞지 않았다 하더라도 찬송가를 경건을 위한 시로 간주하고 읽는 것은 참으로 훌륭한 생각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기독교 문화(기독교 문학 작품과 그 외에도 기독교 신앙을 표현하는 다양한 예술형태)의 중요한 요소인 찬송가의 완전히 새로운 측면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경건을 위한 시라는 측면에서 가장 좋아하는 찬송가를 향해 다가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은 새로운 발견의 여정이었다. 그것은 문학과 경건의 승리라는 보석 상자를 여는 것과 같았다. 나는 여태 아무도 몰랐던 찬송가를 알게 된 것 같은 감정을 반복해서 느꼈다. 그럼 어떻게 해야 새로 발견한 이 보물을 우리 개인과 공동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당장 사용할 수 있을까? 우리는 경건에 도움을 주는 찬송시를 교회 게시판과 웹 사이트에 올릴 수 있다. 목회자와 성경공부 리더는 설교와 연구에 포함 시킬 수 있다. 더 이상 부르지 않기 때문에 찬송가를 포기하는 일은 하지 않아도 된다. 회중들이 내가 제안한 이런 형태로 찬송가를 들을 수만 있다면 아마도 그들은 그 찬송가를 부르자고 먼저 요청할지도 모른다. 이런 공동체적인 찬송가 사용은 얼마든지 개인적인 사용으로 더 확장될 수 있다. 어떤 시리얼 제품의 TV 광고가 생각난다. “먹어보세요. 당신은 좋아하게 될 겁니다.” 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내가 제안한 것을 한번 해 보라고. 그렇게만 하면 반드시 좋아하게 될 것을 장담한다고 말이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an Hymns Be Saved from Extinction?번역: 무제
영성
예배
송시
찬송가
멸종
경건
장르
성경의 권위가 살아있는 교회
by Reuben Hunter
2020-03-06
더미(Dummies)를 위한 책들은 엄청난 성공을 했다.컴퓨터 프로그래밍에서 프랑스 와인에 이르기까지 일반인들을 위해 복잡한 내용을 쉽게 엮은 책은 폭발적으로 팔려나갔다. 이러한 책이 성공하는 이유는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만 얻을 수 있는 정보를 쉽고, 단순한 방식으로 제공하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에도 “더미를 위한” 안내서가 많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기독교 출판사들이 “성공적인 교회 개척을 위한 쉬운 5가지 단계”라는 책을 출판했다.우리는 얻을 수 있는 모든 도움이 필요하기에 이러한 책은 유용하다. 하지만 그러한 자료들은 성경적 가르침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경험과 생각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데 위험성이 있다. 우리가 개척하기 원하는 교회의 모습은 하나님이 설계하신 모습이어야 한다. 교회 개척은 성경에 따라 설립되어야만 한다.교회를 개척할 때 해야 할 일이 많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 한 가지는 사역의 모든 측면에서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말씀 중심 사역바울의 사역을 간단히 살펴보면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 가장 우선시 되었다. 데살로니가전서 2장은 다음과 같다.“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2:2).“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2:4).“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였노라”(2:9).“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도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가운데에서 역사하느니라”(2:13).바울의 사역은 하나님 말씀이 가장 우선이었다. 예수님의 사역은 말씀이 중심이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죄인을 구원하셨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며 성화의 자리로 이끄신다. 이러한 모든 것을 말씀으로 가르치셨다.바울이 디모데에게 사역의 지휘봉을 넘겨줄 때 복음 선포를 우선시하라고 촉구하는 이유이다. “하나님 앞과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가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1-2).이것은 우리가 교회를 개척할 때 시작해야 할 부분이다.우리가 실천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우선성을 자신에게 상기시켜야만 한다.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말씀 없이는 교회 공동체에 특별한 것을 제공하지 못한다. 그런 교회는 세상의 조직에서 제공할 수 없는 것, 즉 교회만이 제공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 없이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중심성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말씀이 없다면 다른 기능적인 것을 우선시하게 될 것이다. 비록 그것들이 선한 일이고 중요할 수도 있겠지만, 하나님 말씀보다 앞선다면 심각하게 오류를 범하는 것이다.성경 말씀을 개척하는 교회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분명한 규칙을 세우고, 겸손의 미덕을 가르치며, 믿음을 키워야 한다.1. 규칙 세우기교회를 새로 시작할 때 당신이 해야 할 것은 수도 없이 많다.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해야 한다. 모금하기, 사람들과 만나기, 홈페이지 만들기, 주보 만들기, 주일학교 커리큘럼 만들기, 예배 후 다과 제공하기, 그리고 교회 위치 홍보하기 등 끝이 없다.이 모든 것이 중요 하겠지만 체크리스트의 가장 우선순위는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 말씀을 우선시하는 것은 다른 일들에 “NO”라고 말하는 훈련이 포함된다.2. 겸손교회 개척을 할 때 많은 일을 감당하면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선보인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좋아하고 칭찬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을 드러나게 하거나 멋진 모습으로 보이게 할 수 있다. 하지만 성경 연구에 마음을 두고 매주 성경 가르치기에 몰두한다면 당신이 드러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님 말씀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은 화려한 것이 아니다. 칭찬받고 우리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관심을 우리로부터 제거하는 것이다. 교회 개척을 위해 많은 활동과 노력은 좋은 것이지만 겸손이 필요하다.3. 믿음그리스도는 그분의 교회를 스스로 세울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그 약속을 믿어야만 한다. 이것은 오늘날 유럽과 같이 생명을 살리고, 성화시키는 말씀 사역이 매우 느리게 진행되는 지역에서 특히 그렇다. 하나님 말씀을 당신 사역의 중심에 두기 위해서는 그분을 신뢰해야 한다.당신의 이웃과 사람들은 하나님 말씀을 원하고 있는가? 말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있는가? 마이크 맥킨리(Mike McKinley)는 이렇게 말한다.하나님 말씀을 사용하여 복음을 전하라. 사람들을 제자 삼으라. 그리고 공적 예배를 시작하면 하나님 말씀을 가르치라.계속 설교하라끝으로 설교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교회의 여러 가지 사역 중에서 말씀 사역의 중요성을 깨닫고 회복하려는 열망이 있다. 이러한 상황을 일부 사람들은 지루하고 힘들게 생각한다. 그래서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는 설교가 아니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을 가르치라”(딤후 4:2)고 했고, 교회는 오랫동안 이것을 실천해오고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모여 그분의 뜻을 올바르게 전하는 메시지를 겸손히 들을 수 있도록 하셨다. 성령의 사역을 통해 그 뜻을 깨닫게 하신다.모든 교회가 성령의 사역을 통해 말씀을 깨닫고 올바르게 세워지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Give the Bible Functional Authority in Your Church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말씀중심사역
설교
성령사역
성경의권위
제자
Dummies
‘교회개혁’은 목사를 ‘엄선’하는 것부터
by 장대선
2020-02-25
우리의 신학 현실을 보면, 의외로 교회론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부족한 경우들을 볼 수 있다. 즉 교회라 할 때 ‘개별 교회’로서만 이해를 할 뿐, ‘가시적 교회’(visible church)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거나 없는 경우를 흔히 볼 수 있다. 그처럼 부정확한 교회에 대한 이해를 보완(혹은 극복)하지 않고서는 교회의 문제점에 대한 정확한 인식에서부터 대안을 모색하는데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도 온전하게 대처할 수 없다.사실 참된 교회는 오직 천상의 교회이며, 그런 교회가 이 지상에서 구현되는 것은 예배당이나 회중들의 규모, 혹은 조직과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서는 ‘가시적 교회’라고 명시하고 있다. 가시적 교회는 한 국가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모든 자와, 그 자녀들로 구성된다(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25장 2항)고 했다. 그처럼 한 국가에 한정되지 않으며 전 세계적으로 참된 믿음을 고백하는 자들과 그 자녀들로 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으로서, 그것은 ‘유형적인 교회’(A tangible church)가 아니라 ‘가시적 교회’로서 이해할 때 비로소 교회의 바른 인식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지상의 교회, 즉 가시적 교회는 항상 교회의 표지(sign)에 의해 분별이 되니, 잘 알고 있는바 말씀 선포와 가르침, 그리고 성례의 올바른(성경의 규정적 원리에 따른) 시행, 또한 (성경에 근거한 규정적 원리로서의) 권징의 시행이라는 세 표지에 의해서다. 따라서 그런 표지에 연계되는 직분들, 특히 치리회를 구성하는 목사와 치리장로의 직분은 교회를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직무를 수행하는 아주 중요하고도 결정적인 것이다.일찍이 개혁된 교회로서 장로교회 정치를 광범위하게 구현했었던 프랑스 신앙고백(1559)은 교회에 관한 고백을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교회의 직원에 대한 고백을 제시한다. 즉 제29조에서 “우리는 참된 교회에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확립된 규율이 적용되어야 한다고 믿는다.”라고 하면서, 곧장 이르기를 “그러한 교회에 목사, 장로, 집사가 있는 까닭은 순전한 교리를 전수하고, 악덕을 개혁하고 억제하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사람을 그들의 필요에 따라 구제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인 거룩한 집회에서 성인과 아이 모두 교화하기 위해서다.”라고 했다. 바로 이 같은 고백의 기초로부터 교회에 대한 모든 신앙고백이 시작하고 있다.프랑스 개혁교회의 치리서(1559) 또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바로 교회 직원에 대한 규정(canon)인데, 특별히 목사에 관하여는 무려 57개의 규정으로 목사에 관한 전반을 다루고 있다.그 가운데 1조를 보면 “성직의 조건을 갖추고서 목사로 선택될 사람은 사도들의 규정(Canon of the Apostle)을 지켜야 하므로, 가능한 한 모든 성실함으로 그들이 교리를 잘 숙지하고 있는지 점검을 하며, 또한 [그것을] 가르칠 수준이 되는지, 아울러 그들의 행실 또한 점검해야 한다.”고 했다. 2조에서는 이르기를 “교회에 등록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초신자인 경우, 특히 사제와 수도사는 오랫동안 그리고 성실한 질의가 없거나, 교리와 생활면에서 증명이 없거나, 개종한 지 적어도 2년이 지나고 그들이 속한 삶의 자리에서 선한 증언으로 확인된바 없이는 성직을 맡아서는 안 된다. 또한 지방 대회와 전국 대회의 조언 없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에게 안수를 주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한마디로 신앙과 인격에 있어 확실한 자가 아니면 목사가 될 수 없도록 한 것이다.뿐만 아니라 제네바로 피신한 영어권 회중들로 구성된 제네바 피난민 교회의 예배와 치리에 관해 규정한 제네바 치리서(1556) 역시 치리에 관해 규정하면서 가장 먼저 다루는 것이 목사에 관한 것인데, “1. 목사들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것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답하기를 “교회가 선출될 사역자를 부지런히 숙고하게 하여 사도 바울이 그 소명을 가진 사람에 대해 꾸짖은 그러한 과실을 발견할 수 없어야 한다. 그러나 이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그러한 장점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책임을 맡을 수가 있었고 부지런히 이를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라고 하여,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라고 한 디모데전서 3장 2-7절 말씀을 목사에게 직접 적용하고 있다.이처럼 16세기 개혁된 신앙과 교회의 가장 중요한 주제는 목사에 대한 것,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교회의 직분을 감당하는 자들에 대한 바른 이해였다. 그것 없이는 그 어떤 지엽적인 개혁이나 개선도 아무런 실효성이 없으며, 특별히 가르치는 사역과 다스리는 사역에 공히 참여하는 목사 직분이야말로 아무나 세울 수 없는, 그리고 함부로 여길 수 없는 절대적이고도 중요한 직분이였던 것이다.오늘날 대부분의 교단 현실에서는 프랑스 개혁교회 치리서 2조에서 말하는 “[그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는 사람과 다름이 없는 자”들에게 안수하고 있는 경우를 볼 수 있다. 심지어 목사의 경우에 그 어떤 스캔들에 연루되는 것 자체만으로도 면직의 사유가 될 수 있을 만큼 엄격한 권계 가운데 있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는 것이 16세기 개혁된 교회들의 치리규정 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그런 일들을 얼마든지 묵인하며 숨기고서 직분을 유지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야말로 무질서하기 짝이 없는 형국이다. 더구나 그런 자에 의해 개혁이 언급되고 개혁신학이 논의되는 일까지도 일어나는 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치리 혹은 권징의 수준이다. 더디다 할지라도 목사들을 엄선하여 세우는 것이야말로 참된 교회개혁의 시작이자 정도일 것이다.
역사
중세교회
프랑스개혁교회치리서
가시적교회
사도들의규정
목사안수
직분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
by Barry York
2020-02-21
참된 교회를 구분하는 세 가지 특징은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당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순수한 복음의 선포, 성례의 바른 집례, 그리고 신실한 권징의 행사. 그러나 참된 교회를 가르는 이런 특징이 매주 회중 예배를 드리는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그리고 어떤 영향을 끼쳐야 할까? 종교개혁을 거치면서 교회의 표지(標識, notae ecclesiae)로 알려진 세 가지 특징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기억해야 할 몇 가지 중요한 사실이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이런 특징을 가지는 진정한 목적을 잃을 수도 있고, 또 그 특징들이 교회 생활을 하는 성도에게 어떤 의미인지도 잃어버릴 수 있다.가장 먼저 기억할 점은, 참된 교회의 특징을 이야기하는 우리는 지금 눈에 보이는 교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신학자들은 시대를 초월해서 이 땅과 하늘에서 선택받은 모든 사람이 모이는 보이지 않는 교회와 지금 여기에서 주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보이는 교회를 구분했다. 참된 교회를 가르는 세 가지 특징은 보이지 않는 교회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교회 중에서 어떤 교회가 진짜로 그리스도에게 속했는지를 알 수 있도록 한다.눈에 보이는 교회라면 반드시 가져야 할 최소한의 자질들과 속성들 그리고 활동들이 있다. 그러나 그중에서 오로지 몇 가지 특징만이 참된 교회를 가르는 잣대로 쓰인다. 흔히 교회를 묘사하는 형용사로 거룩과 사랑을 언급하기도 한다. 그리스도의 신부 또는 주님의 몸이라는 등의 여러 가지 호칭을 교회에 붙일 수도 있다. 교회는 예배, 복음 전도, 봉사 그리고 빈민 구제와 같은 여러 활동에 참여할 수도 있다. 참된 교회를 규정하는 세 가지 전통적인 특징을 강조할 때에 우리는 교회의 가장 핵심이 되는 정체성을 말하는 것이다. 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만드는가? 복음을 설교하고 세례와 주의 만찬에 참여하는 성찬을 집례하고, 공식적이고 올바른 권징을 행사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교회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는가를 보여주는 징표이다. 프란시스 튜레틴(Francis Turretin)은 ‘변증신학 강요’(The Institutes of Elenctic Theology)에서 이렇게 말했다. “바른 교회를 알려주는 특징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가 목자 되신 진짜 양우리와 늑대의 소굴을 구분할 수 있게 한다는 점에서 큰 가치가 있다.”종교개혁 내내 개신교와 로마 가톨릭 사이에는 엄청난 갈등이 계속되었다. 그것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는 교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진짜 교회를 어떻게 정의할 것인가를 놓고도 벌어졌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진짜 교회의 정의를 “우리는 유일하고 거룩하고 통합된 그리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는다”라고 정의한 니케아 신조 속의 네 가지 자질(One, Holy, Catholic and Apostolic)에 근거해서 판단했다. 로마 교회는 이 점을 특히 트리엔트 공의회가 채택한 경전과 신조에서 명확하게 했다. “교회의 특징”이라는 제목이 붙여진, 교회를 결정하는 네 가지 특징인 하나 됨, 거룩함, 통합됨 그리고 사도성은 개별적으로 취급되었다. 그리고 교회라면 예외 없이 이런 특징을 알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교황의 왕좌에서 이 하나하나의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진짜 교회의 첫 번째 특징은 니케아 신조에서 표현되었듯이 하나 됨을 구성하고 있다. 멀리까지 넓게 흩어진 수많은 무리가 하나라고 불리는 것은 사도 바울이 에베소 교인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잘 설명되고 있다. 하나의 주님, 하나의 믿음 그리고 하나의 세례. 교회는 오로지 한 사람의 통치자와 관리자가 있다. 그분은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이고, 영원한 아버지가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어 통치하고 다스리게 했고, 교회가 그의 몸이 되도록 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존재, 즉 교황은 사도의 대표인 베드로의 적법한 계승자로서 사도의 자격(Apostolic chair)을 유지하게 된다. 눈에 보이는 교회의 하나 됨이 교황으로 인해서 가능하다는 로마의 주장은 오로지 그리스도만이 보이는 교회와 보이지 않는 교회 모두의 머리가 된다고 주장하는 프로테스탄트의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이렇게 서술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유일하신 머리이시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이 어떤 의미로라도 교회의 머리가 될 수 없다” (WCF 25.6).그리스도의 머리 되심을 확증할 때 우리는 가장 확실한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만약에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라면 교회는 그의 몸이 된다는 것이다(엡 1:22-23; 골 1:18). 그리고 교회는 몇몇 특징을 가지게 되는데 그것은 그 특징을 만드는 머리(Marker)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이 누구인가는 바로 그의 백성인 우리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 다음 사실을 생각하면 특히 더 그렇다. “그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은 그의 독생자이신 주 예수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 선지자, 제사장과 왕, 그의 교회의 머리와 구원자, 만물의 상속자, 그리고 세계의 심판자로 선택하고 임명하기를 기뻐하셨다.” (WCF 8.1).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참된 교회라면 당연히 이런 그리스도의 직분(offices)을 제대로 반영할 것이라고 기대하게 된다.다르게 표현하자면, 머리 되신 예수님이 우리의 선지자, 대제사장 그리고 왕이 되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의 정체성과 역할을 함께 나눠 가진다. 그래서 베드로가 교회에게 다음과 같은 말씀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여기서 우리는 교회도 교회의 주인인 구세주처럼 선지자적이고, 대제사장적이고 또 왕이 되어야 함을 알 수 있다. 참된 교회 속에서 찾을 수 있는 그리스도의 세 가지 직분은 참된 교회를 만드는 세 가지 특징과 정확하게 일치할 뿐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어떻게 예배해야 하고 이 세상에서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선지자적인 교회는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만을 선포한다. 신자는 매주 강단에서 경건한 목사에 의해서 하나님의 통치하심이 신실하게 선포되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 바른 말씀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말씀에 맞게 경건한 삶을 사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를 다녀야 한다(행 20:20-21, 26-28). 매주 당신은 교회에 올 때마다 복음을 듣고 싶은 열정으로 넘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당신 위에 있음을 안다는 것은 예배드릴 때마다 말씀을 향해 적합한 마음과 태도를 가지고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백성에게 낭독하여 듣게 하니 그들이 이르되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리이다”(출 24:7). 청중은 예배뿐만 아니라 다른 기회를 통해서도 열심히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해야 한다. 바른 교회라면 복음이 선포되고, 복음이 소중히 여김을 받으며, 모든 공동체 안에서 복음이 나날이 퍼져가는 곳이라고 소문이 나게 마련이다.대제사장적인 교회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거룩한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산돌(living stone)로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벧전 2:4-5). 그럴 때 교회 성도는 모두가 다 거룩해짐으로 그리스도의 보혈 아래 있음을 증명하는 성례에 참여할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된다. 그들이 교회에 발을 들이는 순간 주님은 각각의 성도에게 성수를 통해 세례를 받게 함으로 세상과 구별한다. 주님은 이제 성찬식을 통해 성도를 양육해나간다. 새로운 성도에게는 새로운 세례가 적용된다. 신앙을 점검하며 주님의 식탁에 앉는 성찬식에 참석할 때마다 성도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선택으로 인해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과 그리스도의 거룩한 사역에 동참하도록 구별되었다는 게 얼마나 놀라운 특권인지를 깨닫고 감탄하게 된다. 성례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교회와 함께 제사장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도록 하라.왕으로서의 교회는 다시 살아나신 왕의 아들과 딸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모든 권능과 능력을 가진 한 분의 명령을 받아 모든 성도를 제자로 만들어 감으로 교회는 그리스도의 주되심을 보여줄 수 있다(마 28:18-20). 지역 교회의 신실한 성도로서 당신은 성경의 명령을 배우고 거기에 순종하는 제자가 되었는가? 경건한 멘토와 지도자가 주는 훈계를 겸손한 마음으로 받아들여 삶을 수정할 용의가 있는가? 당신의 교회가 죄악에 빠진 형제를 향해 사랑과 신실한 노력으로 그를 다시 회복시키고, 또 필요하다면 그에 따르는 바른 권징을 행하는가? 당신이 다니는 교회의 장로가 진정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자를 찾고, 헤매는 자를 데리고 오며, 상한 자를 싸매고, 약한 자를 강하게 하며, 세상의 강하고 해로운 영향으로부터 당신을 지키고 있는가(겔 34:16)? 바른 삶을 통해서 당신의 교회가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는 곳임을 보여주도록 하라. 지금 당신이 참된 교회의 특징이 분명한 교회를 다니고 있다면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사역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에 당신이 다니는 교회에 참된 교회의 특징이 없다면 그건 그 교회에 뭔가 심각하고 무서운 문제가 있음을 의미한다. 주님께서 당신을 주의 백성 가운데 성령님이 분명히 내주하는 참된 교회로 인도하길 바란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hurch and the Offices of Christ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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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게 하라!
by 고상섭
2020-02-19
팀 켈러는 복음이 단지 신앙인이 되기 위한 최소한의 교리로 여겨지는 위험성에 대해 심각한 우려를 나타냈다. 복음은 신앙의 출발이자 전부라고 말하면서 모든 사역이 복음 안에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복음은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묶는다. 모든 형태의 사역은 복음으로 동기부여가 되고, 복음에 기초해야 하며, 복음의 결과여야 한다.” 또 이것을 오케스트라의 조율에 비유해서 설명한다. 오케스트라가 하나의 하모니를 만들려면 악기가 조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모든 연주자는 기준이 되는 한 음을 중심으로 악기를 조율한다. 복음이 바로 그 한 음이어야 한다. 교회의 모든 사역이 오케스트라의 악기가 되어 복음 안에서 통합되고, 하나로 조율되어야 한다. 복음과 사역이 바르게 관계 맺지 못할 때1. 회심자의 숫자가 줄어든다만일 어떤 사역의 요소가 복음의 결과로 인식되지 않는다면 종국에는 교회 설교와 가르침에서 복음이 아닌 것이 복음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상담, 제자훈련, 사회정의, 문화 사역, 교리학습, 심지어 전도조차도 복음을 대체하는 것이 될 수 있다. 그러면 복음이 더 이상 교회 사역의 중심에 서지 못한다. 이렇게 되면 회심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줄어든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마음속에 숨어 있는 우상을 제거하고 회개하는 일이 복음을 깨달을 때 비로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2. 설교가 단순 권면이나 정보 전달이 된다 복음을 설교하는 것이 복음의 결과인 다른 활동들과 혼동되거나 분리되면 설교는 단순한 권면 또는 정보 전달이 된다. 복음을 통해서 은혜를 받고,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 헌신하는 사역이 되어야 한다. 순서가 바뀌게 되면 율법주의나 공로주의에 빠지게 된다. 사랑하라, 용서하라, 기도하라는 권면이 복음에서 흘러나오지 않는다면 단순한 권면에 불과하게 된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바울은 로마서 12장을 시작하면서 우리의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권면하고, 이것이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라고 소개한다. 이때 ‘영적 예배’는 ‘Spiritual service of worship’(ESV)이라고 번역하기도 하지만 ‘reasonable service’(KJV) 또는 ‘intelligent service’(YLT)라고 번역한다. ‘이성적인’, ‘합리적인’이라는 의미의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로마서 1~11장까지 복음을 설명하고 있다. 복음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자신의 인생을 하나님 앞에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는 것이 가장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당연한 삶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인생을 드려야 한다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깨달을 때 자연스러운 헌신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복음이 사역과 바르게 관계를 맺을 때 위의 그림은 리디머 교회의 홈페이지에 등장하는 그림이다. 다섯 가지 다양한 사역의 중심에는 복음이 있다. 즉 복음이 사역의 기초가 되고, 복음으로 시작된 사역의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경우에도 개인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가 있고, 사회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가 있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개인 구원에 집중하는 교회는 사회 구원에 관심을 좀 더 기울여야 하고, 사회 구원에 관심을 기울이는 교회는 좀 더 개인 구원, 즉 복음선포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팀 켈러는 개인 구원과 사회 구원이 분리되는 이유는 복음의 본질을 바르게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단순히 두 개의 사역을 합쳐야 하는 문제가 아니라 애초에 복음에서 출발하지 않은 문제라고 말한다. 참된 복음이 선포되고,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게 된 개인은 하나님과 바르게 관계를 맺지 못하는 모든 세상에 대해 아픔을 느끼고, 세상이 하나님을 알도록 힘쓴다. 이것은 복음에서 흘러나온 정서이다. 즉 복음은 사회의 정의와 자비 사역으로 자연스럽게 흘러가게 된다. 정의와 자비 사역의 기초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이다.이 사역의 이름을 ‘정의’라고 말하는 이유는 히브리어 ‘미쉬파트’라는 단어 때문이다. 미쉬파트는 일반적인 ‘정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징벌이나 보호, 보살핌 등 어떤 형태든지 상관없이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주는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참된 복음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마땅히 돌아가야 할 몫을 내어주는 것을 말한다. 복음의 은혜가 정의와 자비를 세우는 것이다. 팀 켈러는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의롭다’라는 단어를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기에 삶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모든 관계를 바로잡는 일에 자연스럽게 헌신한다.”교회 안에 ‘정의와 자비’는 단순히 사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것에서부터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모든 교회 사역이 복음과 연결되어서 뿌리 깊은 신학적 기반을 마련해 줄 때 더 열정적으로 사역할 수 있다. 소그룹을 형성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복음이 교회의 공동체를 창조한다. 팀 켈러는 소그룹에 참여하는 사람의 숫자가 주일 예배에 참여하는 사람의 절반에 못 미친다면, 그 교회는 공동체가 아니라 문화센터에 가깝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문화센터에서 개인적인 기술을 배우듯이 교회에서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강의를 듣고, 그것을 적용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닐 것이다. 하나님을 알아가는 가장 중요한 원리는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고, 기도하며,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서 성장하는 것이다. 인간적인 열심과 권면으로 서로 사랑하려는 노력을 아무리 해봐도 그 사랑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참된 공동체를 탄생시키는 것은 오직 복음뿐이다. 본 회퍼는 <신도의 공동생활>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인에게 함께 만나서 공동체를 이루게 하셨다. 그들의 교제는 온전히 예수 그리스도 위에 세워진다. 이것이 ‘외부적 의’이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는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성경적 메시지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이것만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를 사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우리를 자유롭게 하며 누군가의 비교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회복하게 함으로 다른 사람과 연합을 이룰 수 있는 기초를 마련해준다. 결국 복음이 공동체를 만들어 간다. 우리 교회의 모든 사역은 달력에 표시하는 연간 스케줄로 끝이 나서는 안 된다. 한번 치르는 이벤트성 행사여도 안 된다. 모든 부서와 모든 사역의 프로그램은 복음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하고 복음에서 흘러나와야 한다.목회자들이여! 복음이 모든 사역의 중심이 되게 하라.
교회사역
복음
공동체
팀켈러
자비
회심자
미쉬파트
설교
의도는 좋아도 결과는 나쁠 수 있다
by R. C. Sproul
2020-02-10
좋은 의도로 포장된 길을 따라가다가 엉뚱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다. 누구도 그런 목적지에 이르기를 원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의도는 선한데 결과는 비참한 경우가 우리 주변에 더러 있다. 최근 여러 교회에서 예배의 방식을 뜯어고치는 일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현상을 보며 좋은 의도로 포장은 되었으나 위험한 목적지로 향하는 도로를 떠올린다. 그와 같은 교회에서 좋은 의도를 가지고 예배의 방식을 변화시키는 데는 나름대로 목적이 있다. 전통적인 예배의 스타일을 거부하는 젊은 세대에게 다가가기 위한 목적이다. 그들 중 상당수는 교회 생활이 시대에 부적합할 뿐 아니라 지루하다고 여긴다. 따라서 그런 이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 위한 노력을 하다 보니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식에도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된 것이다.지난 수십 년에 걸쳐 그와 같은 예배의 변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 예를 꼽자면 ‘구도자 중심의 모델’(seeker-sensitive model)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구도자란 교회 밖에 있는 비신자로서 특히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찾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런데 그와 같은 구도자를 전도하려는 좋은 의도에서 주일 예배를 바꾸려는 시도가 사실상 성경이 가르치는 중요한 진리를 올바로 이해하지 못한 모습을 반영하기도 한다.바울은 로마서 3장에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도 이 사실을 생각하며, 비신자란 하나님이나 그분의 나라를 찾고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힘을 다해 그분으로부터 도망치는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회심하지 않은 사람이란 인생의 궁극적 의미나 목적, 죄책으로부터의 해방, 또는 참된 기쁨이나 행복과 같이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추구할 뿐이라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익은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혜택으로서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살아 있는 관계를 맺을 때만 주어지게 된다. 따라서 교회의 목회자들이 오직 하나님만 주실 수 있는 유익을 사람들이 찾아 헤맨다고 해서 그들이 곧 하나님을 찾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는 큰 오산이다. 그들은 단지 혜택을 바랄 뿐 그 혜택의 수여자는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신자에게 맞추기 위해 예배의 방식을 바꾸려는 시도는, 그들이 하나님을 찾지 않는 이상 잘못된 결과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을 찾는 일은 회심을 통해서만 시작된다. 만일 우리가 구도자를 감안하여 예배를 개선해야 한다면, 오히려 신자를 위해 그 일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신자만이 사실상 구도자이기 때문이다.1세기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주일에 모여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다 함께 기도하면서 떡을 떼는 데 집중했다(행 2:42). 이는 비신자의 모임이 아닌 신자로 이루어진 초대교회의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보여 준다. 물론 주님의 경고와 같이, 신자의 모임에는 거짓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자들이 섞여 있을 수 있다. 좋은 곡식 사이에 가라지가 함께 섞여 자랄 수 있다(마 13:36-43). 그렇다고 해서 그 가라지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려고 밭을 갈아엎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의 백성이 공동으로 모이는 목적은, 이미 구약성경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바와 같이, 오직 그분께만 찬양과 경배를 올리기 위해서이다. 예배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방식을 따라 그분을 예배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야 한다.구약성경은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이 아니라 우리 편에서 원하는 방식대로 예배를 드렸을 때 어떠한 결과가 있을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그에 관한 가장 뚜렷한 사례는 레위기 10장에 소개된다. 거기서 아론의 아들인 나답과 아비후는 하나님이 명하시지 않은 불을 담아 그분 앞에 분향함으로써 현장에서 바로 심판을 받게 된다. 이 젊은 제사장들은 하나님이 불편하게 여기시는 방식을 따라 한번 ‘시험 삼아’ 예배를 드려 본 것이다. 이에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아론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를 가까이 하는 자 중에서 내 거룩함을 나타내겠고 온 백성 앞에서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레 10:3). 예배는 결코 하나님을 모독하거나 세속적인 방식을 따라 드려져서는 안 된다. 요즘 젊은 세대에게는 혹 주일 아침에 스타벅스에 모여 신앙을 나누며, 기존의 예배를 대체하는 방식이 매력적으로 느껴질지 모르겠지만, 그런 모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예배가 될 수 없다.예배의 구조를 바꾸려는 시도에는 잘못된 오류가 전제되어 있다. 말하자면 현세대가 최첨단 기기의 영향을 너무 많이 받아 문화적으로나 상황적으로 격변의 과정을 거쳤기에 전통적인 방식으로 성경만 해설하는 설교에는 더 이상 반응하지 않는다는 전제이다. 20세기 초반에 자유주의 신학의 대변자였던 해리 에머슨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도 사람들은 더 이상 교회에 와서 저 옛날 사도나 선지자들이 남긴 메시지를 듣는 데 관심을 두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가 있다. 포스딕은 그런 메시지가 시대에 완전히 뒤처지기 때문에 설교의 초점도 하나님의 말씀을 강해하는 방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우리도 현대 문화의 변화를 겪은 이들에게 다가가고자 할 때는 뭔가 혁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하지만 그런 생각에는 지난 수십 년간 인간의 본성이 변화되어 더 이상 지성을 통해서는 그들의 마음에 들어갈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이 이제는 능력을 상실하여 뭔가 더 강력하고 역동적인 예배를 경험하기 위해서는 다른 대체 수단이 필요하다는 전제가 깔려 있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와 같은 시도에 담긴 의도가 혹 선했을지라도 그 결과는 참담할 수밖에 없다고 믿기에 깊은 우려를 금할 수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Good Intentions Gone Bad번역: 장성우
영성
예배
의도
구도자
방식
해리에머슨
비신자
아퀴나스
청소년 사역에 필요한 다섯 리더
by Chelsea Kingston Erickson
2020-02-07
우리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청소년 리더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당신 교회의 청소년 리더는 결혼한 젊은 커플이거나 대학생이 십대들과 함께 하기에 좋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젊은 사람들을 믿음으로 양육한다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의 공통된 소명이라 여긴다.만약 젊은 그리스도인들이 리더의 신앙을 닮아 간다면 그들에게는 다양한 신앙의 모델이 필요하다. 삶에서 신앙인으로서 어른의 모습을 보여줄 사람이 필요할 것이다. 이는 우리가 어떠한 리더를 구성해야 하는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청소년 사역팀의 리더로 선호하는 다섯 가지 유형이 있다.1. 학생 부모현재 학생의 부모보다 더 좋은 청소년 리더를 생각하기는 어렵다. 부모는 이미 영적으로 아이들의 삶에 중요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 아이들의 친구에게 다가갈 준비가 되어있고 효과적으로 연락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개인적인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 그들의 필요를 파악할 수 있다.청소년 사역자는 부모 참여가 그들의 아이들과 잘 맞는가를 확인해야 한다. 청소년 사역에 관심 있는 분들에게 그분의 아이들이 어떻게 느끼는지 파악하라고 물어야 한다. 중등부까지는 부모와 부모의 아이들이 잘 어울릴 수 있다. 고등부에서는 아이들이 믿음에 대한 질문과 갈등으로 고군분투할 수 있다. 만약 교회가 나이와 성별에 따라 작은 그룹으로 나누어 운영할 수 있다면, 부모는 그들의 아이가 포함되지 않은 그룹을 인도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아이들의 세계에 참여하는 동시에 다른 청소년들과 어울릴 수 있을 것이다.우리 교회에 몇몇 아버지들은 중학생이 된 아이들을 계속해서 섬기기로 했다. 사역의 연속성과 함께 더 많은 학생을 섬기는 것이다.2. 집에 있는 부모집에 있는 부모들은 청소년 리더를 양육하기에 좋다. 만약 그들의 아이들이 학교에 다니는 나이라면 행정 업무, 행사 계획, 그리고 학생들과의 연락을 도울 수 있다. 어린아이가 있는 부모들은 다른 나이의 그룹과 교류하는 것을 즐기기도 한다.우리 교회에 한 젊은 엄마는 고등부를 섬긴다. 바쁜 엄마지만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면 종종 그녀의 어린아이들을 데려와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도록 한다. 어떤 부모들은 일주일에 10시간 이상의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3. 빈 둥지 부모빈 둥지 부모는 능력 있는 청소년 리더 중 하나가 될 수 있다. 이들은 사역의 원동력이 되고 조력자가 된다. 자신의 자녀는 성장해서 독립했기 때문에 양육에 대한 많은 정보와 지식, 지혜를 나누어 줄 수 있다. 그들은 사회에서 전문가로 활동하거나, 조직의 리더, 혹은 경영자 등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감당하고 있기 때문에 오전 6시에 만나야 할 수도 있다. 이른 아침에 열리는 회의가 힘들겠지만 그만큼 충분한 가치가 있다.이 연령층은 십대들을 만나기 전에 많은 부담을 느끼기도 한다. 자녀가 이미 성장해서 그동안 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청소년 사역자는 그들에게 “따뜻함을 줄 수 있는” 좋은 리더라는 확신을 심어주어야 한다. 용기를 북돋아 주고 함께 한다면 빈 둥지 부모들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경험을 배울 수 있다.4. 조부모나이가 많은 어른들은 잠재력 있는 청소년 리더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지만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신명기 32장 7절은 젊은 사람들에게 공동체의 어른들로부터 지혜와 경험을 찾으라고 말한다. 나이 든 어른들은 지혜를 나누어 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전해줄 시간이 있다. 만약 그들에게 손주(또는 조카)가 있다면 그들은 이미 젊은 사람들에 관한 전문가일지도 모른다. 어떤 청소년 그룹과 어울려서 게임을 하는 것은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학생들을 사랑하고 돌보는 그들의 능력은 누구보다 앞선다. 우리 중등부에는 종종 하이킹 계획을 세우거나, 자전거 여행을 계획하고, 야외활동에 대한 애정을 나누는 할아버지가 있다. 그는 학생에게 삶의 중요한 기술을 가르치고, 믿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눔으로 인생의 멘토가 된다. 고등부에 한 나이 든 부부 커플은 최근에 학생들과 건강 문제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이처럼 귀한 커플을 존경한다. 그들과 기도 제목을 함께 나누기도 한다.5. 독신자결혼한 커플이나 양육 경험이 많은 사람들만으로 팀을 꾸리고 싶지만, 독신자를 등한시하지 말아야 한다. 젊은 전문가든 나이 든 어른이든, 싱글들은 시간과 에너지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그들은 청소년 사역 프로그램 외에 별도로 학생들과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한 부담이 적다. 자연스럽게 교회의 가족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학생들이 아직은 싱글이기에 독신으로서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도 필요하다. 봉사할 독신들을 적극적으로 모집함으로써 우리는 학생들에게 결혼과 독신 모두가 하나님의 좋은 선물임을 보여준다.(고전 7)청소년 사역자들은 독신자들이 함께 사역하는 시간을 고마워할 수 있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들은 사역자를 대신하여 학생들에게 상당한 에너지를 쏟을 것이고, 사역자는 그들에게 더 많은 지원을 해야 할 것이다. 독신 리더들은 학생들을 위해 기도하고 사역의 필요를 논의하는데 더 많이 시간을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협력 관계는 사역자에게도 큰 힘을 준다.청소년에게 친구가 되어주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것을 성경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잘 수행하기 위하여 다양한 삶의 경험이 필요하다. 우리가 청소년 리더로 재미있는 대학생과 신혼부부만을 고집하고 있다면 우리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한다. 고정된 생각을 버리고 넓게 생각하면 청소년 사역이 달라진다. 무엇보다도 학생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Leaders Every Youth Ministry Needs번역: 송유희
교회사역
청소년
부모
독신자
경험
리더
조부모
유대인에 뿌리를 둔 기독교 신앙
by Adam Stewart Brown
2020-01-28
내가 어렸을 때, 우리는 매년 여름 보솔레일 섬(Beausoleil Island)에서 2주간 야영을 했다. 호수가 잔잔한 날 물이 맑은 곳으로 가면 4야드가 넘는 깊이의 호수 바닥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러나 바람이 불고 하얀 물보라가 칠 때면 텐트를 친 호숫가의 불 옆에 앉아 다음날까지 조용히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만약에 책이 보트이고 독서가 그 보트를 타고 항해하는 것이라면, 파울라 프레드릭슨(Paula Fredriksen)의 신간인 ‘기독교인이 유대인이었을 때: 첫 번째 세대’(When Christians Were Jews: The First Generation)를 읽는 것은 금광을 표시해놓은 지도를 손에 들고 아름다운 경치를 즐기며 항해하는 엄청난 모험이 될 것이다. 학문적인 측면으로만 본다면 그녀의 의견에 반대할 것은 많지 않다. 프레드릭슨의 책은 정교하게 기술되었고, 충분히 설득력이 있으며 추구하는 목표에 있어서 명확하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많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 책은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난파시킬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을 주의해야 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온 정통 교리가 주는 안전함과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프레드릭슨의 기본 전제는 좋은 것이다.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유대인 운동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 진실을 재발견하려는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권위자가 아니다. 기독교 첫 세대의 재구성보스톤 대학에서 종교학을 연구하는 프레드릭슨은 바울 서신서, 복음서 그리고 사도행전의 배경이 되는 당시 상황을 설득력 있게 재구성했다.그녀의 논지는 원래 “예수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가 군주가 되어 종말론적 다윗 왕국이 임하기를 기다리는, 임박한 종말을 기대하는 유대인 종파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왕국이 실현되지 않자 그 운동은 빠르게 적응했다. 네 단계의 확장이 이뤄졌는데 처음에는 유대인, 예루살렘 거주민, 예수 공동체였던 것이 오늘날 “기독교”로 알려진 이방인 중심의 글로벌한 예수 제도로 전환되었다는 것이다.프레드릭슨에 따르면 나사렛 예수가 대관식이 아닌 십자가에 못 박혔을 때(서기 30년경) 처음으로 종말이 좌절되었다. 종말에 대한 환상이 두 번째로 깨어진 것은 예수의 부활이 모든 사람의 부활로 이어지지 않고 중단되었을 때였다(서기 30-32). 세 번째 타격은 로마의 칼리굴라 황제가 성전을 더럽혔을 때, 그것이 다니엘서에 나오는 “가증한 것”이 분명함에도 다니엘이 예언한 것과 같은 묵시적인 종말로 이어지지 않았을 때였다(AD 39-40). 이방인을 통한 기독교의 시작으로 연결된 마지막 실망은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졌지만, 영원한 왕국이 예루살렘에 도래하지 않았을 때였다(AD 70).프레드릭슨은 깔끔하고 강력하며 잘 정리된 이론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문제가 있는데 여기 다섯 가지를 소개한다. 1. 그녀의 이론은 성경의 무오함을 무시한다프레드릭슨에 따르면 베드로전후서와 야고보서는 베드로와 야고보 사도가 쓴 게 아니다. 또 자기가 살아 있을 때 예수가 다시 올 거라는 바울의 기대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복음서는 고작해야 예루살렘 성전 파괴 후에 쓰인, 왜 하나님의 왕국이 아직 도래하지 않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 역사를 수정한 기록에 불과하다. 가장 늦게 쓰인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은 애초 진짜 예수가 주장한 종말론적 가르침을 깎아내리는 동시에 이방인들을 향한 선교를 합법화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프레드릭슨은 성경을 진지하게는 받아들이지만 믿음으로 받지는 않는다. 전적으로 진실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그녀의 회의적 시각은 우리가 왜 그녀의 결론에 회의적일 수밖에 없는지를 알려준다. 프레드릭슨은 말씀 앞에 복종하기보다는 행여 존재했을지도 모르는 말씀의 배경이 된 세계를 재구성한다. 한 마디로 ‘오직 말씀으로’(sola scriptura)의 정신을 거부하고 있다. 2. 그녀의 이론은 말씀 속 예수를 역사 속 예수와 대치시킨다프레드릭슨은 바울이나 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의 신학적, 사회학적 목적을 위해 예수가 하지도 않았던 말과 행동을 성경에 기록한 사람들이라 생각한다. 우리 스스로에게 성경의 어느 부분이 역사적이며, 어떤 부분이 아닌지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순간, 우리가 딛고 있는 믿음의 땅은 빠르게 침식해버릴 것이다. 성경 속 예수가 다름 아닌 역사적인 예수라는 확신은 정통 신앙의 근간이다. 3. 그녀의 이론은 부활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는다예수의 부활을 언급할 때 프레드릭슨은 부활한 예수를 사람들이 주관적으로 만들어낸 만남이라고 묘사한다. 그녀는 예수 운동을 태동시킨 부활의 객관적인 권위를 무시한다. 만약에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진짜로 살아났다면, 곧 하나님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라고 그를 따르던 사람들의 주장은 대단히 의미가 있다. 그러나 예수의 제자들이 몇 달에 걸친 집단 환상을 경험한 것에 불과하다면, 예수 운동은 단지 사회학적 현상에 불과하다.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은 프레드릭슨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4. 그녀의 이론은 예수의 생애 이후에도 다윗 왕가를 요구한다프레드릭슨은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예수 출생 이야기가 불일치한 것처럼 주장함으로 나사렛 예수의 족보 배경은 그의 죽음 이후에 다윗 혈통의 자격을 부여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식으로 예수를 다윗 혈통으로 바꾼 것은 예수 공동체가 정복하는 왕의 이미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윗과 같은 군인 이미지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주장은 예수 자신의 역사적 모습과 사명에 모순된다.강철 막대로 세상을 정복할 다윗 혈통의 왕을 기대했다는 그녀의 해석은 옳지만(시 2). 구약은 또한 고통받는 종의 오심을 기대했다(사 53). 프레드릭슨의 주장과는 달리 예수를 따랐던 공동체는 예수가 자신에 대해 가졌던 이해에 상충하지 않는 두 가지 형태의 기대를 모두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막 14:60-62).5. 그녀의 이론은 4세기,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예수의 신격화를 주장한다양자됨(sonship)에 구약의 구절을 활용하고, 또 고대 로마 황제 숭배 관습에 호소함으로써 프레드릭슨은 예수의 신성한 아들 됨에 관한 바울 서신서의 모든 주장은 하나님 아버지와 동등한 신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단지 다윗 왕가의 가계도에 들어가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프레드릭슨에 의하면 예수는 성경이 쓰이고 한참이 지난 4세기에 들어서야 이방인이 만든 교회에 의해서 “하나님”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4세기 이야기를 하면서도 프레드릭슨은 바울이 예수를 완전한 하나님으로 여기지 않았다는 주장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바울 서신서 외에 다른 많은 신약 성경에서 드러난 하나님과 함께 영원하고, 하나님과 동등한(co-eternal and co-divine) 예수의 모습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비록 그녀가 왕의 혈통이라는 구약 속 양자됨의 측면을 올바르게 해석했지만, 시작부터 예수에게 온전한 신성을 부여하는 성경 본문 전체와 구약의 구절을 상호 연결해서 이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앞을 조심하라유대인에 뿌리를 두고 있는 기독교 신앙을 재발견해야 할 필요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프레드릭슨의 연구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녀의 책을 읽는 사람들이 그녀의 사회 역사적 재구성에 의해 믿음이 흔들리고, 성경의 불신으로 빠질 위험이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당신 지적 수준과 신앙의 확고함을 먼저 확인하라. 그리고 믿음이 충만한 멘토를 꼭 곁에 두고 이 책을 읽으면서 만나게 될 폭풍우를 함께 지나야 한다.* 아담 스튜어트 브라운(Adam Stewart Brown) 박사(PhD)는 캐나다 온타리오에 있는 Southshore Bible Church의 담임 목사이다.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When Christians Were Jews번역: 무제
복음
율법
그리스도
율법주의
반율법주의
팀켈러
신앙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 치유하기
by David Gibson
2020-01-23
죽어가는 교회는 화난 언어를 사용하고, 차별하고,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모습은 어디에서 오는가? 둘로 분열된 마음에서 온다. 둘로 나누어진 자아,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는 겉으로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내면의 이중성(double-ness)이 어떤 형태로 외면에서 드러나는지 살펴보자.“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 우리는 듣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 둘로 나뉠 수 있다.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행하는 것은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 둘을 서로 갈라놓는다. 교회에 있는 것도 좋아하고 설교를 듣는 것도 좋아하지만, 화요일 정도가 되면 하나님이 명령한 일을 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 왜 그럴까?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약 2:1). 야고보서는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보다 부유한 사람들을 더 사랑하는 근본적인 이유를 여기에서 찾는다. 우리 중 일부는 주 예수 그리스도, 영광의 주를 사랑하지만, 다른 일부는 부와 명성 그리고 특별한 지위를 사랑하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바라보는 시선의 끝에 있는 영광에서 둘로 갈라서지 말라고 요구하고 있다.“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약 2:15-16). 우리는 믿음과 선행을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할 뿐 아니라 하나가 없이도 다른 하나가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왜 그럴까?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분열하는 그 선이 다름 아닌 우리의 입술까지 나눈다는 사실에 주목하라. 우리의 말이 일치하지 않는다. 우리의 말은 형태와 내용에서 둘로 나누어져 있다. 세상이 교회 안에 있을 때우리는 야고보서에서 하나님이 하나 되라고 한 곳이 두 개로 나누어진 이중성의 문제를 다루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이 서신서의 핵심은 마음이 바뀌지 않는 한 말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같은 방에 있는 부자 또는 가난한 사람과 어떻게 관계를 맺느냐에 있어서 진짜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 내면의 악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4).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이 진짜 문제이다. 바로 이 진짜 문제 때문에 우리는 누군가가 교회 공동체에 해를 입히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가 개인적으로 이득을 얻을 수만 있다면 기꺼이 눈을 감는다. 야고보서는 이런 문제에 대해서 건조한 의학적 처방을 내리는 것, 그 이상을 보여준다. 야고보서는 이것을 간음이라고 부른다. 간음은 이중성의 궁극적인 형태이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하나가 되어야 할 것이 왜곡되어 두 개로 변형된 것이다. “간음한 여인들아 세상과 벗 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니라”(약 4:4).신혼여행에서 막 돌아온 젊은 부부를 생각해보자. 그들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모험을 함께 시작했다. 새 아파트의 현관에서 벨이 울린다. 문을 열자 남편이 몇 년 전에 사귀었던 애인이 거기 서 있다. “안녕, 자기랑 같이 몇 년 살려고 왔어.” 아내가 놀라서 소리를 치기도 전에 젊은 남편은 옛날 애인을 끌어안고는 말한다. “정말로 재미있겠다. 우리 같이 진짜 멋진 가족을 만들어 보자고!”신부가 왜 울고 있는가? 시기심 때문이다. 거룩한 시기심 때문이다. 사랑 때문이다. 진짜 사랑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냐”(약 4:5).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가? 당신은 침대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이다. 당신은 세상과 결혼한 사람이다. 세상은 부자를 좋아한다. 세상은 싸우고 죽이고 더러운 시기심과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하다. 당신이 그런 것을 좋아할 때, 그 사실은 당신이 사랑에 이중적인 인간임을 보여준다. 당신이 진짜 믿는 것은 무엇인가?야고보서가 폐부를 찌른다고 생각하게 한 메시지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다툼, 절제되지 못한 혀, 우리 속의 분열, 그리고 이 서신서 속에 있는 또 다른 수많은 증상은 우리가 하나님 속이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있다. “주님, 저는 온전히 당신만을 따릅니다.” 말은 얼마든지 이렇게 한다. 그런데 행함을 보면, 우리가 하는 결정을 보면 나는 온전히 나 자신만을 따른다는 것을 알 수 있다.야고보서는 가장 아픈 서신서이다. 내 친구 앤디가 말한 것처럼 야고보서는 의사와 같다. 그 의사는 우리의 말과 삶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맺은 관계를 자세히 조사하고는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진짜로 믿는 게 뭔지를 드러낸다. 마치 발진과 기침 그리고 거친 숨소리를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하는 의사와 다르지 않다. “문제가 심각한데요.” 야고보서는 이렇게 말한다. “당신 교회에서 몇 달만 같이 생활하게 해주세요. 그럼 내가 잘 관찰하고 살펴봐서 당신들이 진짜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를 알려주겠습니다.” 야고보서는 또 말한다. “당신이 친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볼게요. 교회 지체들과 가족, 자녀들에게 어떻게 말하는지도 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마음이 무엇인지, 당신이 진짜로 사랑하는 대상이 누구인지 알려주겠습니다. 당신이 외부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도 보겠습니다. 당신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지 그렇지 않은지 여부를 알려주겠습니다.”우리 속에서 그런 증세들이 발견된다면, 그리고 우리가 죽을병에 걸렸다고 알려준다면 우리가 의지할 도움은 무엇이 있을까? 은혜, 하늘이 준 치료제교회를 죽이는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 아는가? 당신은 교회가 어떻게 진짜로 죽는지 알고 있는가?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이런 말을 할 때 교회는 죽는다. 가정에서 복음을 죽이고 싶다면, 자녀들과의 관계에서 또 부부 관계에서 복음을 죽이고 싶다면 이렇게 말하면 된다. “아이고, 목요일이잖아. 지칠 때도 됐지.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어리석고 칼과 같이 날카로운 혀를 가진 사람은 변해야 한다. 복음의 사람이라면 결코 이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 “원래 다 이런 거 아니야?” 아니다. 이 모든 것의 요점은 경고이다. 야고보서는 지금 우리 속에서 뭔가가 잘못되었다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혀는 엄청난 손상을 입힌다. 선한 행함이 없다는 것은 죽은 믿음이라는 의미이다. 이런 두 마음을 가지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렇게 부서진 믿음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대답은 여기 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부르는 바로 그 처방제를 써야 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 이런 질병에 대한 치료제는 회개이다. 정기적으로, 매일 그리고 마음을 쏟아서 회개해야 한다. 이 처방제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목요일이잖아”라고 말하면 안 된다. 우리는 이제 “이건 죄야”라고 말해야 한다. 그게 바로 지금 야고보서가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하게 하라”(약 4:8).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흔히 자신을 정당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완곡하고 모호한 언어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그건 죄이다.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는 가난한 자보다 부자를 더 좋아하고, 듣기 좋은 식으로 말하고, 도울 마음이 전혀 없으면서도 태연하게 잘 지내냐며 상대의 안부를 묻는 것이다. 분열된 마음 치료하기야고보서는 하나님과 함께 더 깊이 들어가라고 우리를 가르친다. 당신이 말하는 것, 타인과 관계 맺는 것, 그리고 질문하는 법을 제대로 배우도록 가르친다. 도대체 마음속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죄와 은혜 그리고 용서에 대한 주제가 식탁이나 침대에서, 커피를 마실 때 오가는 대화가 되어야 한다. 교회에서 누군가가 당신에게 잘못 했거나, 당신이 누군가에게 잘못하고 있어서 제대로 된 관계가 유지되지 않는다면 당신을 도울 수 있는 것은 야고보서이다. 이 서신서는 내게 도움이 되었고 당신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다. 나눠진 마음을 치료하는 것은 복음이다. 은혜이다. 용서해 달라고 누군가에게 마지막으로 말한 게 언제인가? 당신의 말과 생각 그리고 행동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소리높여 회개한 게 마지막으로 언제인가? 그게 바로 우리가 치료제를 섭취하는 방법이다. 지금 바로 시작할 수 있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 속의 단어를 가지고 지금 바로 회개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 많으시다. 자비하시고 또 오래 참으신다. 불안한 연인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생각해보라. 간음이 들통났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거기에는 분노가 있고 배척과 갈라짐이 따른다. 환대와 따뜻함의 시간은 끝났다. 그러나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가? “간음한 여인들아...하나님을 가까이하라”(약 4:4,8).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고 감사하다. 우리를 치유하신다. 지금 바로 상처 입은 자를 온전하게 회복하고 분열된 마음을 치유하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죽어가는 교회를 다시 살릴 수 있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Symptoms of a Dying Church번역: 무제
교회생활
분열
회개
치유
회복
은혜
치료제
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
by David Gibson
2020-01-10
“나는 그녀가 죽기 전부터 그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10년 전이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매우 아팠지만,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더군요. [중략] 그녀는 결코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상태는 천천히 그리고 점점 더 악화되어 고통스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죽었습니다. [중략] 여기서 말하는 그녀는 교회입니다.”톰 라이너(Thom Rainer)는 ‘죽어가는 교회의 부검’(Autopsy of a Deceased Church)에서 이렇게 썼다. 죽어가는 교회의 두드러진 특징 중 하나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자신이 교회 영안실로 향하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겉으로 보기에는 살아서 매주 출석할 가치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죽음의 증상이 만연한 교회가 우리 주변에는 적지 않다. 여전히 심장이 뛰고 있는 교회의 경우, 그게 더 번창하려고 힘차게 숨을 쉬는 건지 아니면 죽기 전 마지막 숨을 몰아쉬는 건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을까? 의사로부터 받는 도움우리가 어떤 교회에 속해 있든지 이런 문제에 있어서 야고보서가 도움을 줄 수 있다. 지금 모든 상황이 좋아서 결코 실패할 리가 없다고 착각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언제라도 모든 것이 다 사라질 수 있다는 경고를 해줄 수 있다. 지금 부서진 상태라서 상처받고 당황한 신자들이 상상 이상으로 절망하고 있다면, 야고보서는 그런 우리에게 위로를 주고 상처를 싸매줄 수 있다. 야고보서가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우리를 도울 수 있는 이유는 문제의 증상과 근본 원인을 모두 다 제대로 보기 때문이다. 야고보서는 단순한 기침일 것이라는 생각으로 병원을 찾은 우리에게 천천히 숨을 쉬라고 하면서 더 근본적인 기침의 원인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다. 야고보서는 우리가 가진 모든 문제의 근본적인 원인을 향하여 깊이 들어간다. 그리고는 애정을 가지고 날카로운 메스를 사용한다. 어떤 것을 처방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야고보서는 우리에게 증상, 병, 그리고 죽어가는 교회에 필요한 치료약을 알려준다.죽어가는 교회의 세 가지 증상야고보서는 스스로 교회의 건강을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되는 세 가지 증상을 제시한다. 우리가 하는 말, 우리가 그어버린 경계선, 그리고 선한 일을 무시하는 증상이다. 1. 교회가 화난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한다우리는 이 증상에 대한 첫 번째 힌트를 야고보서 1장 19절에서 얻는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같은 주제가 1장 26절에 또 나온다.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3장에 이르러서 야고보서는 우리가 혀를 가지고 저지를 수 있는 진짜 재앙이 무엇인지 직설적으로 보여준다.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약 3:6). 야고보서는 분명하게 말한다.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약 3:10). 그럼에도 야고보서 저자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이런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현실을 다 너무 잘 알고 있다. 우리 집의 경우에는 주로 목요일에 발생한다. 왜 하필이면 이 날인지 모르겠지만, 이상하게도 이날이 되면 우리의 혀가 최악의 말을 내뱉곤 한다. 인내심이 짧아지고 성질이 예민해지며 말이 날카로워진다. 형제끼리 싸우고, 부부가 싸우고, 또 부모가 자녀와 싸우면서 집안은 화염에 싸이고 사람들은 화상을 입는다. 조절할 수 없는 혀는 하나의 증상이지 병이 아니다. 2. 교회가 더러운 선을 긋기 시작한다2장에서 이런 교회의 특징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런 교회는 사람을 편애한다. 가난한 사람보다 부자를, 없는 사람보다 있는 사람을 더 좋아한다. 특정 유형의 사람들을 존중하고, 또 어떤 사람들에게는 모욕감을 준다. 내부 군중이 있고 또 외부 군중이 있다. 각종 사회적인 수단과 부요함을 찾거나,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들에게 이런 교회는 아주 매력 있다. 이런 식의 사회경제적 구분선이 당신 교회에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꼭 이런 특정한 선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다른 방법으로 선을 그을 수 있다. 그렇게 선을 그음으로 우리는 어떤 특정한 물리적 공간과 사회 집단에 포함되어서 안전하다고 느낀다. 어떤 특정 사람들과 유대를 맺거나 다른 특정한 사람들을 배척하고 무시하게 된다. 우리는 남자와 여자, 젊은이와 노인, 기혼자와 독신자, 직장인과 실업자 외에도 수없이 많은 종류의 선을 긋는다. 사람은 누구나 내게 줄 것이 없는 사람보다는 나를 도와줄 수 있는 사람들에게 끌리기 마련이다. 우리는 선을 그을 때 하나님과 다르게 긋는다. 하나님은 위험에 노출되고 가난한 자, 약한 자, 줄 게 없는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렇기에 그의 눈앞에서 정결한 종교인은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사람이고 이 세상이 주는 보상에 물들지 않는 사람이다(약 1:27).3. 교회가 선한 일을 등한시하기 시작한다야고보서가 도전적인 이유는 그 서신서의 수신자가 믿음이 있는 교회였기 때문이다. 그냥 교회도 아니고 복음을 사랑하는 교회였다. 그 교회의 신학은 정통이었고 교회 전체는 활발하게 사역하고 있었다. 말씀이 선포되고 듣는 것을 사랑하는 교회, 성경을 사랑하는 교회였다.그 교회가 성경을 사랑한다고 해서 성경이 말하는 모든 것을 다 하는 건 아니었다. 그래서 야고보서는 그런 사각지대를 우리에게 알려준다. 선한 일이 없으면, 행함이 없으면 그건 죽은 믿음이다. 너는 겉으로는 살아있는 거 같지만 사실은 죽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약 2:26).나쁜 말을 하고, 편을 가르는 선을 긋고, 선행은 없다. 우리가 그런 증상을 가지고 의사에게 갔을 때 그가 이렇게 말한다면 도움이 될까? 그게 제대로 된 치료가 될까? “좋아요, 그럼 앞으로 좋은 말을 하고, 선을 긋지 말고, 선행을 하세요.” 이런 죄가 어디에서 오는가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약 1:5-8).이 구절 속 용어는 인간 구성의 일부를 설명하는 것으로, 보기에 따라서는 의학 용어이기도 하다. “두 마음”이라는 단어는 사실 “두 영혼”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은 내 속에 “두 개”가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그 “두 개”는 나의 하나됨(one-ness)을 손상시킨다는 것을 알려준다. 우리는 두 개로 분열된 자아를 가지고 살 때 조만간 정신과 의사를 만나게 될 것을 잘 알고 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은 정신과 의사는 당신에게 ‘분열된 자아’라는 진단을 내릴 것이다. 야고보서는 우리의 가장 깊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모든 증상이 흘러나오는 근원이 되는 우물을 말해준다. 그것은 바로 영적으로 분열된 자아이다. 분열된 내면은 외부로도 그 분열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분열된 마음은 분열된 행동으로 이어진다. 악한 생각과 이기적인 욕망의 결과로 시들시들 죽어가는, 영적으로 분열된 교회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하늘이 준 치료제, 은혜의 복음이라는 치료제가 필요하다.출처: www.desiringgod.org원제: Three Symptoms of a Dying Church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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