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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예배
by Albert Mohler
2020-01-06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대심문관은 타락한 인간 본성에 통찰력을 던진다. “인간은 자유가 있는 한, 숭배할 누군가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애쓴다.” 대심문관의 말이 믿을만한 신학 안내서로 부족할지라도, 이 부분에서는 그가 확실히 옳다. 인간 존재는 확실히 종교적이다-심지어 우리 스스로가 누구인지 모를 때에도-그리고 인간은 계속해서 숭배할 대상을 찾는다.인간은 또한 죄인이다. 우리의 예배는 자주 개인 선호에 따른 우리 자신의 이교도 신앙에 기반을 둔다. 존 칼빈이 상세히 설명한 것처럼, 타락한 인간의 마음은 “우상을 만드는 공장”이다. 항상 예배하고 숭배할 새로운 우상을 만든다. 임의대로 부패한 공장은 절대 참된 예배를 만들 수 없을 것이며 대신에 자신의 발명품을 예배하게 될 것이다.교회는 예배에서 진리를 깨달은 사람만 모이고, 살아있는 하나님을 방법적으로 발견한 사람들로 구성된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어린 양의 피로 구원받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연합되며, 예배의 자리로 부름받은 사람들로 이뤄진다. 예배는 피조물인 우리가 만들어진 목적이다. 그리고 오직 구원받은 자들만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를 예배할 수 있다.우리는 어떠한가? 영국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은 자신의 동료 철학자에게 ‘사람들이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가’하는 것을 알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은 예배시간에 그들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조언했다. 신학책과 교리에 대한 문서는 회중이 무엇을 믿는지 드러낼 테지만 예배는 ‘정말로 이를 믿는가’하는 것을 드러낼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우리는 큰 곤경에 처해있다.많은 복음주의자 사이에서 예배라고 부르는 것들의 혼란스러움을 보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예배라기보다 혼돈의 축제와 같은 예배를 하는 교회들이 있다. 수년 전, A.W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교회가 예배를 ‘오락의 최대치, 진지한 가르침의 최소화’라는 생각을 한다. 심지어 예배를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깨닫는 장소’로 생각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50여 년 전의 이런 말은 현재 행해지고 있는 예배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고발하는 듯하다.우리가 가진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은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추적을 해야만 한다. 우리는 모더니즘이 초현실주의를 붕괴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예배의 초점이 하나님에게서 벗어나 “수평화” 되어 인간에게로 이동되었다. 신학적 자유주의는 단순히 새로운 세계관을 받아들였고 근대성이 요구하는 신학적 타협을 이루었다. 예배는 경이롭고 위대한 하나님께 기쁨으로 순복하는 행위가 아닌 예배자가 판단하는 “의미 있는 경험”으로 바뀌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문화적 엘리트의 세계관과 문화의 가장 강력한 영향의 중심, 급진적 주관주의, 도덕적 상대주의를 지배하고 있다. 그리고 포스트모던 세계관의 표식인 절대 진리에 대한 적대감은 일부 교회의 예배에도 나타나고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말을 넘어선 이미지의 승리를 축하하지만, 기독교는 말씀 중심의 신앙이고 하나님의 언어적 계시와 성육신한 말씀인 예수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모든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건설되었다고 주장한다. 철학자 리처드 로티는 진리는 만들어지지 발견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런 급진적인 실용주의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예배를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를 설교하고, 듣고, 믿고, 고백하는 훈련이라기보다 의미를 “만드는” 행위로 볼 것이다.많은 기독교인이 믿음을 경험적 차원의 필요성으로 이야기하지만, 경험은 말씀에 근거해야 하며 말씀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만 한다. 이것이 예배에 중요한 것이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임의대로 의미 있는 경험을 충족시키는 예배를 하거나,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예배 대신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예배를 찾고자 할 것이다.올바른 예배에 대한 관심은 개혁주의의 중심이며 오늘날 가장 중요한 신학적 논의의 중심이다. 예배를 바르게 이해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예배의 개념은 하나님을 바라고, 말씀을 이해하며, 전능하신 하나님만을 의지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나의 비참함을 알고, 전능하신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다. 휴스 올리펀트 올드는 개혁주의자들의 예배는 “하나님의 권능과 위엄, 경외감, 존엄, 다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확신”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로 돌아가는 유일한 길이자 삼위일체 하나님의 영원하고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이 회복되는 길이다. 인간 중심의 쇼에서 참된 예배의 길로, 참된 예배자로 돌아가는 방법이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선택과 대안은 없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Worship According to the Word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숭배
로저
복음주의
포스트모더리즘
올드 랭 사인: 오래된 친구를 기억하며
by Jon Bloom
2019-12-31
전 세계적으로 많은 사람이 부르고 사랑받는 이 노래는 후렴부에 “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라고 되어있다. 이것은 오래전 스코틀랜드의 한 무명 음유시인에 의해 부분적으로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요즘은 시적(詩的) 감흥은 다소 떨어지지만 이 노래를 ‘아주 오래전’이나 ‘지난날’이라 부른다. 이 노래가 얼마나 오래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스코틀랜드의 유명한 시인이며, 이 노래를 지은 이로 알려져 있는 로버트 번스(Robert Burns)는 1700년대 후반에 한 스코틀랜드 노인이 올드 랭 사인을 부르는 걸 듣고는 그대로 옮겨 적었다고 말한 바 있다. 번스가 가사를 고친 흔적이 있지만, 번스의 말은 대체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여겨진다.“올드 랭 사인”이 감동을 주는 이유는 뭘까? 이 노래는 새해맞이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오히려 이 노래는 옛 친구에 대한 것이다. 이 노래는 마음 속에 소중히 간직한 어릴 적 친구와 함께 스코틀랜드의 언덕을 뛰놀고, 돌이 많은 강가에서 수영했던 소중한 시간을 회상하고 있다.오래된 우정의 소중함새해는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좋은 시간이고, 연말은 지나간 것들을 묵상하기에 좋은 시간이다. 다음에 더 잘하기 위해 교훈을 얻자는 식의 묵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우리에게 주신 것들, 그리고 앞으로 주어지지 않을 것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묵상을 할 필요가 있다.옛 우정이란 그런 종류의 보물이다. 긴 여름날을 함께 보냈고 밤이 깊도록 대화를 나누던 옛 동무들, 신나는 모험도 큰 어려움도 함께 겪었다. 함께 웃으며 기뻐했고, 함께 울면서 앉아있기도 했던 친구들, 젊은 날의 비밀을 털어놓을 수 있던 그 친구들처럼 소중한 선물은 우리 인생에서 그리 많지 않다.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우리의 선택이라기보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만나게 된 이들이었다. 많은 경우 그들은 우리 옆집, 바로 윗집, 같은 공동주택으로 이사를 왔고, 같은 교회를 다니기 시작한다거나, 내 옆 사물함이나 작업대를 쓰는 이들이었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서로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을 때, 공통된 관심사가 있을 때, 그리고 사람이 혼자 있는 것이 좋지 않다는 무언가 깊은 교감(삼하 1:26; 요 15:14–15)으로 인해 우리는 서로 친구가 되었고, 그 우정은 로맨틱한 사랑보다 나았다. 때로는 다투며 아주 가까운 이들만이 줄 수 있는 상처를 서로에게 주곤 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의 공격 앞에서는 서로의 마음을 지켜주었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었다. 오래된 친구를 잊지 말라우리가 예부터 알고 지내는 이들, 특히 참되고, 정결하고, 아름다우며, 탁월한 것을 보고 사랑할 수 있게끔 도와준 이들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들을 계속 기억하고 존경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 영혼에 지워지지 않는 흔적을 남겼고, 여전히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이 주신 좋은 친구이자 은혜로운 선물이기에(약 1:17)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현함이 마땅하다. 새로운 삶의 장(章)을 시작할 때 우리는 지나간 장에서 만난 존귀한 이들을 기억해야 한다. 너무 늦기 전에, 소중한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거나, 전화를 하거나, 이메일을 쓰거나, 아니면 옛날처럼 손편지를 써서 그가 당신에게 소중한 존재였음을, 그리고 여전히 소중한 존재임을 다시 말해줘야 할 때가 지금인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그렇게 하지 못했다면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그 친구의 연락처를 잃어버렸다면, 옛날의 소중한 순간들에 대한 아름답고도 서정적인 추억들을 나눌 수 있는 누군가에게 그 옛 친구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를 말해주는 것도 좋겠다.지난 세월이 준 선물들을 기리며, 당신에게 주는 새해 선물로 아래에 ‘올드 랭 사인’의 가사를 약간의 도움말과 함께 적었다. 번스가 받아쓴 것을 아름다운 스코틀랜드 방언으로 읽은 것도 들어보라. 그것을 아름다운 노래로 부른 것도 있다.새해의 시작을 기뻐하며 축배를 들 때, 오래전부터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보여주신 인자하심에 대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감사의 잔을 들라. 1절오래된 친구를 어찌 잊고그를 어찌 떠올리지 않으리오래된 벗을 어찌 잊을까그리고 그 오랜 옛 시절도후렴지나버린 옛 시절을 위해, 친구여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우리 이제 우정의 잔을 드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2절자넨 자네 잔을 사고나도 내 잔을 살테니우리 이제 우정의 잔을 드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3절우리 둘은 언덕을 누볐고아름다운 데이지 꽃도 꺾곤 했지너무나 돌아다녀 발이 아팠네아주 오래전 그날 이후4절우리 둘은 강에서 노를 저었네아침부터 저녁까지허나 우리 사이의 넓은 바다는 큰 소리로 울부짖었네아주 오래전 그날 이후5절내 진실한 벗이여, 여기 손이 있네내게도 자네 손을 주게나우리 이제 깊은 석별의 정을 나누세지나간 옛 시절을 위해원제: Auld Lang Syne: In Gratitude of Old Friends출처: www.desiringgod.org 번역: 이정훈
근현대교회
올드랭사인
오래된
친구
우정
소중함
잊지말라
번스
스코트랜드방언
삶 속의 불신자 구원 플랜
by Jon D. Payne
2019-12-27
전도는 단순한 과제나 방법이 아닌 생활 방식이다. 프로젝트나 시스템이 아닌 삶의 방식이다.전도를 이런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성경적일 뿐만 아니라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는 우리의 관점과 이해도를 넓혀준다. 설득력이나 변증법에 대한 기술이 부족하더라도 전도에 대한 시선이 이러하다면, 누구라도 영혼을 전도하는데 있어서 자유로울 수 있다. 또한 전도에 대한 열망도 생길 수 있다. 전도에 대한 이런 접근 방식은 그리스도의 증인다운 삶의 방식이며, 신자의 독특한 은사와 능력, 지위 등을 통하여 부르심에 맞게 전도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또한 삶 속에 있는 모든 어려움과 변화조차도 친구와 이웃을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향하게 하는 기회로 생각할 수 있게 만든다. 모든 기독교인은 이렇게 전도해야 한다. 참된 증인으로서 기독교인의 삶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모두에게 주어진 의무이다(마 5:13-16). 스펄젼 목사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다. “진정한 신자의 가장 중요한 의무는 영혼을 구원하는 것이다.” 길 건너편에 있는 사람이든, 다른 나라에 사는 사람이든 기독교인은 전도라는 커다란 사명을 받았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마 28:18-20 참조).영혼을 구하는 전도는 기독교인의 핵심 중 핵심이다. 그러나 전도에 대한 우리의 열정이 항상 충만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정직하다면 교회를 다니지 않는 직장 동료, 가족 그리고 친구에게 복음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이다. 이웃의 영원한 생명보다 스포츠 경기의 점수나 휘발유 가격에 신경을 더 쓰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더욱이, 믿지 않는 자들을 위한 우리의 기도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안다면, 왜 우리의 삶과 교회에서조차 복음이 빈혈 상태에 빠져있는지 바로 알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혼을 구원하려는 열의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열심히 기도하며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 있어서 결코 양보해서는 안 된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노력하는 복음적인 생활 양식을 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놀랍도록 평범한성경에서 전도 사례의 대부분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사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놀라운 기록이 담겨있다. 서신서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사도들의 용기 있는 기록이 이곳저곳에 담겨있으며, 복음에 대하여 적대적인 환경에서도 유대인과 이방인을 전도하는 모습이 들어있다.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전도에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는 성경의 강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때때로 우리도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아예 복음을 전하지 말까하는 고민을 할 정도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의 전도활동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교훈도 많지만, 그들이 감당한 독특한 사역과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일반적인 전도사역은 분명하게 구별되어야 한다. 길거리나 시장 광장에서 전도하지 못해서 죄책감을 느끼는 것보다는(이런 전도에 특별히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따로 있다) 평상시 삶에서 자연스럽게 복음이 흘러나오는 전도가 내게 주어진 전도의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복음의 증인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정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며 성실히 살아가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하나님은 절대 주권자이며 바로 그 주권에 따라 우리 각 사람을 그가 원하는 곳에 지금 있도록 했다(시 115:3; 행 17:26-27). 당신은 다른 곳에 있고 싶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당신이 있는 그곳이 바로 하나님이 원하는 곳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잠 16:9; 롬 8:28 참조).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가 있는 그 현장에서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을 발휘하여 삶을 변화시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우리가 불신자들을 전도하는 데에 필요한 특정한 위치에 지금 우리를 두셨다. 사랑하는 성도여, 하나님의 주권은 지금 당신을 특정한 공동체에 데려다 놓았고 특정 이웃을 만날 수 있는 집에 살게 하셨다. 그는 또한 당신에게 독특한 직업을 주었다. 왜? 당신이 평범한 삶의 과정을 통해 주위 사람들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방문 전도나 특별한 봉사 같은 보다 전략적인 복음 전파 활동이 있다. 그러나 가장 효과적인 복음 전파의 방법으로 입증된 것은 평범한 삶 속에서 말과 행동으로 일관된 증인의 삶을 사는 것이다. 사무실에서 믿지 않는 동료와 복음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고, 교회에 가지 않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구원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 자녀의 축구 경기에서 옆에 있는 부모에게 복음을 전하고, 젊은 어머니들과 어떻게 복음으로 육아를 할지 토론하고, 위기에 처해서 조언을 구하는 믿지 않는 가족과의 대화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런 사례를 통해 우리는 복음은 어떤 특정한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방식임을 알려준다. 지금 이 글을 쓰는 동안 내게 있었던 행복한 방해는 내가 지금 말하고자 하는 요점을 제대로 보여준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친구가 방문하도록 하셨고, 우리는 복음에 관해 따뜻하고 솔직한 대화를 나눴다. 이런 종류의 전도는 기독교 잡지 표지에 등장할 정도로 대단한 일은 결코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 세계 수많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통해서 지금도 수많은 영혼을 인도하고 있다. 영혼을 구원하는 것은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나 발생하는 놀라울 정도로 평범한 일이다. 삶을 통한 전도는 무엇보다도 그리스도를 소중히 여기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들도 그분을 알았으면 하고 바란다. 문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예상치 못한 전도의 기회를 우리가 제대로 식별하고, 그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할 의지와 준비가 되어 있는가의 여부이다. 우리에게 이런 준비가 부족하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기도하는 것에서 부족하기 때문일 것이다.끊임없이 기도하기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꾸준하고 간절한 기도는 꾸준한 전도의 원동력이다. 기도 없이는 전도의 열기가 식기 마련이고, 죽음을 향해가는 비참한 영혼의 상태에 관해 무관심해진다. 그러나 불신자들을 위해 정기적으로 기도할 때, 그 영혼을 향한 열정이 점화된다. 기도는 열정의 연료가 된다. 기도는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사랑과 동정심을 키운다. 기도할수록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 더 의지하게 되고 영적으로 죽은 자를 깨울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확신도 함께 커진다. 기도를 통해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우리지만 죄인들에게 초자연적으로 새로운 마음으로 주시고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는”(행 26:18; 겔 36:26; 엡 2:4-5; 골2:13 참조) 이는 오로지 성령님이라는 사실을 다시금 상기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마음을 찢는 간절한 마음으로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매일 매일의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또한 우리는 잃어버린 영혼을 위한 간구와 더불어 우리의 육체적 건강과 행복을 위한 끝없는 탄원이 포함된 기도 모임을 활발히 가져야 한다. 영혼을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간절한 기도는 양보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기도야말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려는 우리가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의지하려는 겸손한 존재라는 사실을 증명한다. 양보하지 않는 신실함복음이 없는 전도는 글이 없는 책이다. 그러나 오늘날 전도라는 이름으로 이뤄지는 많은 행위가 복음 속에 당연히 담겨야 할 진리를 사라지게 하고 있다. 고작해야 개인적인 자기 이야기 또는 예수를 통해 세속적인 성취를 이루려는 인간 중심의 호소는 결국 복음을 하나님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로 축소 시킨다. 그러나 사람들이 들어야 할 것은 우리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이다. 19세기 중반 고전인 ‘영혼을 구하는 자들에게 하는 말’(Words to Winners of Souls)에서 호래티우스 보너(Horatius Bonar)는 이렇게 썼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의견이 아니다. 그들에게는 진리가 필요하다. [중략] 종교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복음은 문학도 과학도 아니다. 복음은 하나님이 그의 독생자 아들을 통해 거저 주시는 사랑에 대한 지식이다.”그러므로 올바르고 효과적인 전도의 핵심은 성경의 진리이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함과 그분의 율법이 요구하는 의로움에 관한 교리(레 11:45; 갈 3:10-11), 타락한 인류, 비참하고 처참한 인간의 상태(롬 5:12; 엡 2:1-3),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 율법의 요구 사항을 완벽하게 충족시킴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해 인간이 되어 이 땅에 온 하나님의 아들(요 3:16; 롬 5:18-19), 십자가의 죽음으로 이룬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충족(시 22; 요일 4:9-10), 셋째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남(롬 4:22-25),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믿음을 통해 은혜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고자 하는 것임을 알려주어야 한다(고후 5:19; 엡 2:8-9).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사람이 하늘의 영광으로 인도될 것이며, 여전히 그들의 죄 안에 있는 사람은 사탄과 그를 추종하는 천사들과 함께 지옥에 던져질 심판에 대해 명확하게 알려주어야 한다(마 25:31-46). 이것이 바로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복음이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롬 8:1). 확실히, 전도는 위협적일 수 있다. 친구와 지인들에게 믿지 않는 사람이 마주하게 될 영원한 심판에 대해 말하는 것은 불편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전도를 하나의 수행 과제, 이벤트 또는 방법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한 삶 속에서 그분의 신실한 약속에 순종하고 기쁨으로 반응하는 모습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게 될 때 기도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리스도인 삶의 모습이 드러날 것이다. 이러한 모습으로 전도를 바라본다면 전도에 대한 우리의 부담감은 훨씬 적어질 것이다. 그리스도인이여, 가장 소중한 복음에 대해 우리가 어찌 마냥 침묵하고만 있겠는가? 출처: www.ligonier.org원제: Winning the Souls of Unbelievers 번역: 무제
교회사역
불신자
스펄젼
호래티우스
진리
전도
의미 있는 크리스마스 전통 캐롤 10선
by Keith Getty
2019-12-22
해마다 12월 말이 다가오면 의미없이 크리스마스 장식 하나를 꺼내 놓았다가 시간이 지나면 내년을 맞기 위해 그냥 청소하고 정리해 버리는 일이 반복된다.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단지 선물을 사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진정으로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크리스마스 전통 캐롤을 함께 부르면서 가장 근본적이지만 아마도 놀랍게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첫 번 크리스마스 날 밤 황량한 세계가 구함 받기를 간절히 원하는 소망가운데 한 아기가 태어난다. 하지만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눕기 전에 그의 기이한 이야기가 이미 노래로 전해졌다. 마리아는 ‘마리아의 송가’에서 이 아기에 대해 노래했다(눅 1:46-51). 사가랴는 ‘사가랴의 찬가’에서 이를 노래했다(눅 1:68-79). 그리고 아기가 탄생하던 날 밤, 들판의 목자들 위로 펼쳐진 하늘은 여러 천사들의 합창 무대가 되었다.우리는 모두 노래하도록 창조되었고 찬양하도록 명함을 받았다. 그래서 가장 오래된 크리스마스 전통이 캐롤이라는 사실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다. 여러 크리스마스 행사가 있더라도 시대를 초월한 10개의 캐롤 찬송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들이다.1. ‘천사 찬송하기를’‘천사 찬송하기를’(Hark! The Herald Angels Sing)은 찰스 웨슬리(Charles Wesley)가 작사하여 1739년 감리교 찬송가에 포함시킨 곡이다. 신학적인 메시지가 풍부한 이 고전은 후에 펠릭스 멘델스존(Felix Mendelssohn)의 곡이 붙여졌다. 이 찬송은 원래 ‘하늘까지 울리는 찬송’(Hark, How All the Welkin Rings)으로 시작하지만, 조지 휫필드(George Whitefield)가 지금 우리에게 잘 알려진 ‘천사 찬송하기를’로 바꿨다.2. ‘오랫동안 기다리던’‘오랫동안 기다리던’(Come, Thou Long Expected Jesus)은 1745년 찰스 웨슬리가 펴낸 18가지 크리스마스 노래에 수록되었다. 이 노래는 수세기동안 기다리고 갈망하며 울면서 기다린 구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궁극적으로 해결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옛날 임금 다윗성에 낮은 마구 있더니 어머니가 갓난아기 구유 안에 뉘었네 어머니는 마리아 그 아기는 예수라”3. ‘참 반가운 신도여’‘참 반가운 신도여’(O Come, All Ye Faithful is a Christmas)는 경배를 촉구하는 노래로 존 프랜시스 웨이드(John Francis Wade)가 작사했을 가능성이 크다. 그가 작사한 라틴어 원본(Adeste Fidelis)은 100년 동안 걸작으로 남아 있다가 프레드릭 오클레이(Frederick Oakeley)가 영어로 번역하여 지금까지 불려지고 있다. 이 곡은 회중 찬양과 아카펠라로 불러도 아름다운 찬송이다.4. ‘춥디춥던 겨울’‘춥디춥던 겨울’(In the Bleak Midwinter)은 구스타브 홀스트(Gustav Holst)가 작곡한 애처로운 멜로디 때문에 가장 기억에 남는 독창적인 캐롤이다. 1872년 처음으로 크리스티나 로제티의 가사가 등장했다. 마지막 절의 내용은 이렇게 된다.“이 비천한 몸이 무얼 드릴까 내가 목자라면 내 양을 드리리동방박사라면 예물 드리리 나의 드릴 한 가지 나의 마음”5. ‘기쁘다 구주 오셨네’‘기쁘다 구주 오셨네’(Joy to the World)는 영어 찬송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아이작 왓츠(Isaac Watts)가 작사한 곡으로 영혼을 일깨우는 승리의 찬가와 같다. 이 곡은 1719년에 처음 선보였을 때는 크리스마스 캐롤이 아니었다.6. ‘곧 오소서 임마누엘’‘곧 오소서 임마누엘(O Come, O Come Emmanuel)은 중세 라틴 찬송으로 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해마다 12월이면 부르는 교송(주로 행렬 때 움직이면서 반복적으로 부르는 쉽고 간단한 노래-역주) 중의 하나이다. 중세시대 외진 수도원 벽에서 울리는 이 찬송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상상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이 곡은 영국 목회자이며 음악가인 존 메이슨 니일(John Mason Neale)이 발견하여 1851년 영어로 세상에 선보였다. 7. ‘기쁨이 시작됐네’‘기쁨이 시작됐네’(Joy Has Dawned)는 스튜어트 타운엔드와 필자가 2004년에 작사 작곡한 곡이다. 스튜어트는 다른 크리스마스 찬송에 나오지 않는 동방박사의 선물과 같은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담고 싶어했다. 그래서 이곡은 교회에서 크리스마스 전통 음악을 들으며 자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멜로디로 만들어졌다.8. ‘천사들의 노래가’‘천사들의 노래가’(Angels We Have Heard On High)는 가장 즐거운 노래이며, 후렴구가 잘 짜여진 곡 중 하나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는 이 곡은 부를 수록 영혼이 새롭게 되는 느낌을 받도록 작곡되었다. 9. ‘오 베들레헴 작은 골’‘오 베들레헴 작은 골’(O Little Town of Bethlehem)는 필라델피아의 필립 브룩스(Phillips Brooks) 목사가 베들레헴을 방문했을 때 받은 영감을 가사로 쓰고, 예배 인도자였던 루이스 렌드너(Lewis Redner)가 이에 멜로디를 붙인 곡이다. 이 곡은 처음에 주일학교 교사 6명과 36명의 아이들에 의해 불려졌다. 10. ‘옛적 임금 다윗 성에’‘옛적 임금 다윗 성에’(Once in Royal David’s City)는 이 10개의 크리스마스 캐롤 중 가장 적게 알려졌을 수 있지만, 그 메시지와 악곡은 잊지 말아야 하는 곡이다. 아이리쉬 목사 사모였던 세실 프란시스 알렉산더(Cecil Frances Alexander)가 1848년 아이들을 위해 이 캐롤을 펴냈다.이 10개의 캐롤은 다른 여러 곡들과 함께 춥디추운 겨울 이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나눌 것을 생각하게 하는 보화이다. 베들레헴 작은 마을 다윗 성에 소망이 솟아났으며 우리 모두 하늘의 승리에 함께 기뻐하게 한다.“엎드려 절하세 엎드려 절하세 구세주 났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Christmas Carols Everyone Should Know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캐롤
구스타브
아이작
스튜어트
찰스
츠빙글리에 대한 특종 아홉 가지
by Joe Carter
2019-12-17
2019년은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가 스위스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500주년이 되는 해다. 티모시 조지(Timothy George)는 종교개혁이 일어난 시점을 밝히는 데 있어서 루터가 95개 논제를 게시한 1517년 10월 31일 못지않게 1519년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설명했다.그처럼 커다란 영향을 끼친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에 관해 당신이 알아야 할 아홉 가지 사실이 있다.1. 츠빙글리는 존 칼빈(John Calvin)이 등장하기 전까지 스위스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종교개혁자다. 그가 스위스에서 일으킨 신앙의 혁명은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가 독일에서 일으킨 운동에 비견할 만한 의미를 지닌다. 츠빙글리 자신은 이렇게 기록했다. “나는 이 지역에서 누구도 루터를 알지 못했던 1516년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했다. [중략] 그때는 나도 루터의 이름을 들어 보기 전이었다. 그 이후로도 최소한 2년 동안은 그의 이름을 들어 보지 못했으니, 나는 분명 루터의 가르침에 따라 설교한 게 아니다. 오직 성경을 따라 설교했을 뿐이다.”2. 츠빙글리는 오늘날 스위스 동부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1484년 1월 1일에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최고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던 그는 1504년 빈대학교(University of Vienna)에서 학사 학위를 받고, 1506년에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졸업 후에는 로마가톨릭의 사제직을 수여 받아 글라루스에 있던 그의 모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거기서 그는 헬라어를 독학하며 원문으로 된 신약성경의 긴 본문들을 암송해 나갔다.3. ‘크리스천히스토리’(Christian History) 매거진에 의하면, 사제들조차 성경에 익숙하지 않았던 시대에 츠빙글리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라틴어역 신약성경을 구입했다. 그 이후로 말씀에 완전히 사로잡히게 되었다. 스티븐 로손(Steven Lawson)은 루터가 선포한 메시지와 동일한 메시지를 츠빙글리가 먼저 설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츠빙글리는 1523년에 ‘67개 논제’(Sixty-seven Theses)를 기록했는데, 거기서 그는 금식 강요, 성직자의 독신, 연옥과 미사, 사제에 의한 중보 등 중세 교회의 온갖 미신을 비판했다. 그리고 자신이 사제였음에도 안나 라인하르트(Anna Reinhard)라는 과부와 결혼했다. 이때는 루터가 수녀 출신인 카타리나 폰 보라(Katharina von Bora)와 결혼하기 일 년 전이다. 로손에 의하면, 이 모든 일은 츠빙글리가 루터에 대해 알기 전에 일어났다.4. 종교개혁의 가장 큰 특징은 성경적인 설교를 회복한 데 있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크게 기여를 했는데, 바로 성경의 각 권을 설교하는 혁명적인 접근을 선보였던 것이다. 1519년에 마태복음을 설교하기 시작하면서 그는 ‘렉시오 콘티누아’(lectio continua)라고 알려진 방법을 적용했다. 마태복음 이후로는 사도행전, 디모데전후서, 갈라디아서, 베드로전후서, 히브리서, 요한복음, 바울 서신에 대한 강해설교를 진행했고, 그 다음에는 구약성경으로 가서 시편과 오경, 역사서에 관한 설교를 이어갔다.5. 츠빙글리는 루터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났다. 비슷한 시기에 태어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점도 많았지만, 개신교 종교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역할을 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츠빙글리는 루터에 대해 “로마의 수퇘지를 멸절시킨 헤라클레스”라고 격찬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였다. “그대야말로 이 싸움을 위해 주님이 기름 부으신 진짜 다윗과 같다. 하늘의 군장으로 무장한 참된 용사로다.” 그러나 루터는 츠빙글리를 높게 평가한 적이 없다. 오히려 그에 대해 “마귀에 속한” 자라고 여기며 “벌레가 파먹은 열매”와 같다고 비난했다. 이런 두 사람의 견해 차이를 좁히기 위해 1529년에 마르부르크 회담이 열렸다. 여기서 두 개혁자는 15개의 신앙 조항 가운데 14개에 대해서는 동의하게 되었지만, 성찬에 관해서는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했다. 이때는 츠빙글리도 루터가 자신을 “당나귀 같이” 취급한다며 격분했다. 두 사람은 화해에 이르지 못했다.6. 숀 마이클 루카스(Sean Michael Lucas)가 언급했듯이, “루터파와 개혁파 진영을 갈라놓은 가장 중요한 차이는 성찬에 있다. 이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렇게 서로 갈라지게 된 원인은, “이것은 내 몸이니라”(마 26:26)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루터와 츠빙글리가 각각 달리 해석했기 때문이다. 루터는 그 말씀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성찬에는 예수님의 몸이 실재하게 된다고 주장했다. 츠빙글리의 견해는 그와 달랐다. 루카스의 설명을 빌리면, 츠빙글리는 “교회가 예수님의 몸이라고 믿었다. 교회가 떡과 잔을 나눌 때, 교회가 예수님 자신의 몸으로 구현되는 신비로운 변화가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중략] 그 변화는 떡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는 게 츠빙글리의 생각이었다. 따라서 그에게 있어 ‘이것은 내 몸이니라’에서의 ‘이니라’에 해당하는 술어는, 교회가 떡을 받을 때 일어나는 사건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이었다.” 트레빈 왁스(Trevin Wax)는 이렇게 부연한다.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가 성찬에 관하여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한 결과, 지난 5백 년간 개신교의 정치와 신앙에는 균열의 여파가 지속되어 왔다.”7. 츠빙글리는 성경의 가르침이 인생의 모든 영역에 적용된다고 확신하며, 복음은 개인적 구원 이상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이 문화의 모든 요소를 변화시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개혁 운동도 시민이 참여하는 행정 기관을 통해 진전되기를 바랐다. 리곤 던컨(Ligon Duncan)이 말했듯이, “츠빙글리는 카이퍼와 같이 일종의 변혁주의자로 불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영역에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신뢰했다. 즉 개인이나 교회의 생활뿐 아니라 만사에 미치는 그분의 통치를 확신했다. 그래서 복음의 진전을 위해 정치, 경제, 군사, 동맹 문제 등에 지속적으로 참여했다.”8. 1531년 취리히에서는 로마가톨릭 관할에 있는 스위스 지역에서 개혁파 설교를 할 수 있는 권한을 얻기 위해 가톨릭교회에 압력을 가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에 가톨릭교회가 반발하며 카펠 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이 전쟁에서 츠빙글리는 전사한다. 츠빙글리의 사위이자 목회 후계자인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츠빙글리가 전장에서 부상을 입은 채로 발견되었다는 내용과 함께 다음과 같은 사실을 기록했다. 어느 사제가 베푼 마지막 종교 의식을 츠빙글리가 거절하자 적군의 대장이 “칼을 뽑아서 츠빙글리를 그 자리에서 찔러 죽였다.” 이때 적군은 츠빙글리의 머리를 베고 몸을 난도질했다. 그의 유골이 유물로 사용되지 못하도록 시체를 태우고 돼지 창자와 섞어 놓기까지 했다. 이후 루터는 ‘탁상담화’(Tabletalk)에서 츠빙글리가 지옥에 갔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나는 츠빙글리가 구원받을 수 있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그 반대의 결과가 나타나지 않았을까 염려스럽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누구든지 자신을 부인하면 저주를 받게 되리라고 경고하셨기 때문이다.”9. 츠빙글리의 신학은 가끔씩 ‘츠빙글리주의’라고 불리는데, 주로 스위스 내에서 그 세력을 형성했다. 개신교 종교개혁을 일으킨 주요 인물 중 한 명이었음에도, 츠빙글리는 루터나 칼빈, 불링거에 비해 가려져 있다. 그러나 성찬에 대한 견해라든가 성구집이 아닌 성경을 그대로 설교한 그의 전통은 오늘날까지 많은 교파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존 페인(John B. Payne)은 이렇게 말한다. “츠빙글리는 개혁주의 전통의 선구자였다. 그 전통은 스위스와 독일 남부를 넘어 프랑스 위그노들과 네덜란드, 잉글랜드, 스코틀랜드에 걸쳐 있는 회중주의자들, 장로교인들, 그리고 대서양 건너 뉴잉글랜드에 있던 회중주의자들과 중부 식민지의 장로교회와 화란과 독일 개혁교회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경로를 통해 확장되었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Ulrich Zwingli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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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펠
카톨릭교회
존칼빈
교회 개척에 필요한 진짜 목회자
by Matt McCullough
2019-12-13
교회 개척자로서 처음 평가받을 때, 사람들은 나에게 사업가 유형이라 생각하는지 물었다. 나는 그렇게 질문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눈썹을 추켜올리며 “당신은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합니까?”라고 묻는다. 그 당시 나는 오랜 시간 동안 계속하고 있는 학위 과정 외에 다른 일을 시작해 본 것이 없었다. 큰 대학교에서 몇 과목을 맡아 가르치고 있었을 뿐이다.나는 읽고 쓰는 것을 좋아했으며, 내가 선택한 영역에서 가르치는 일로 매우 행복해하고 있었다.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학생들을 가르치기만 했다. 전형적인 교회 개척자가 어떤 모습이든지 나는 거기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하지만 내 직업적인 배경을 고려할 때 “당신은 스스로를 사업가라고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의 의미가 이해되었다. 질문을 한 사람들은 교회 개척에 필요한 것은 목회적 상황에 필요한 자질이 아니라 사업가적 기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그 생각은 적절한가? 교회 개척자가 사업가이어야 하는가?다소 도움이 되는 용어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업가’의 의미가 무엇인지에 달려있다. 옥스퍼드 사전은 사업가를 “이윤을 얻을 목적으로 재정적 위험을 감수하며 사업을 시작하는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는 사업가를 “제한된 자원을 넘어 기회”를 추구하는 사람으로 본다.이 정의들은 사업적 상황에 기초한 것이어서 지역 교회 상황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교회 개척과 사업 활동을 왜 사업과 연계시키는지 알 수는 있게 한다. 교회 개척자는 처음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중요한 기회라고 여기는 곳에서, 기존의 교회들 사이에 있는 어떤 틈을 보고 개척한다. 제한된 자원에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투입하여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것에 익숙해져야 한다. 교회 개척자로서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내가 잘하는 것만 하고 다른 것은 전문가들이 처리하는 식으로 일할 수 없다. 부분적으로 맡은 역할만 하면 나머지는 시스템에 의하여 착착 진행되는 것을 기대할 수 없다. 계획을 세우고, 큰 그림을 볼 수 있어야 하며, 목표에 이르기 위하여 무엇이 필요한지 알고 있어야 한다. 계속되는 상황 변화에 민첩하게 대응해야 하며, 매일 일어나는 사소한 과제들을 다루어야 한다. 여전히 불충분한 용어이러한 모든 것을 고려해 볼 때, 나는 사업가적인 자질을 갖추지 못했음에도 교회를 개척하여 지금까지 잘 인도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나 혼자서 이 모든 것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혼자서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다. 목회자는 주변에 좋은 협력자들이 있어야 한다. 많은 수의 장로들은 좋은 협력자이다. 나 자신의 경험과 직관만으로는 부족하기에 동역자들이 있는 것이며, 그들이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이다.나의 경험은 교회 개척과는 관련 없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교회 개척에 사업가의 경험이 가장 필요한 것은 더욱 아니다. 사업가적인 자질은 성경이 말하는 목회자의 자질에는 없는 내용이다. 물론 사업가적인 자질이 교회 개척의 상황에 도움이 될 수는 있겠지만, 꼭 필요한 필수 요소는 아니다. 교회 개척을 하면서 사업가가 될 수는 없다. 목회자가 아니라면 교회 개척을 하지 말아야 한다.사실, ‘교회 개척’이라는 말 자체가 약간 부적절한 면이 있다. 그 용어는 시간의 흐름을 표현한 말이지 존재론적 진술이 아니기 때문이다. 교회 개척은 공동체로 모이는 일이다. 교회는 모인 사람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사람이 필요하다. 성도를 돌보며 복음적인 삶을 살도록 조언하고 양육할 목회자가 필요하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과 같이 국경을 넘어 새 교회를 시작하기 위해 이곳저곳으로 다녀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 일을 위하여 당신을 부르셨을 수 있다. 바울이 여러 곳을 다녔다고 해도 그가 우선적으로 한 일은 자신이 세운 교회를 위해 목회자를 확보하는 일이었다(행 14:23; 딛 1:5). 그리고 직접 했든지, 서신으로 했든지 목회를 하는 목회자로서 역할에 충실했다.두 가지 질문만일 당신이 교회 개척을 하고자 하는 이유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것이 좋기 때문이거나 사업가적인 직관 때문이라면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교회 개척은 그 나름의 위험이 따른다. 당신이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있지 않다면, 그로 인해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이 사역을 시작하기 전에 고려해야 하는 두 가지 질문이 있다. 1. 당신은 교회를 왜 개척하고 싶은가?사업가는 틈새시장의 기회를 노린다. 그들은 고객의 필요와 욕구를 인식하고 어떻게 채울 것인가를 생각해 낸다. 어떤 사업가에게는 어떤 틈새가 있는가? 하는 것보다 틈새가 있다는 사실 자체가 중요하다. 사업가는 “제품ㆍ서비스ㆍ산업ㆍ시장과는 무관하게 원시적인 욕구”에 이끌린다고 Forbes.com에서는 말한다. 그들은 특정 제품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미지의 공간에서 무언가 시작하는 기회를 좋아할 뿐이다.교회 개척을 그러한 동기로 한다면 건강한 교회 개척을 할 수 없다. 교회 개척자는 지역 교회에 대한 사랑과 사람들을 복음으로 인도하는 일에 이끌려야만 한다. 교회를 개척하는 동기가 새로운 모험에 대한 설렘이라면, 당신은 아마도 평범하고 오랜 시간이 요구되는 교회 사역, 그리고 목회 사역의 본질적인 것들로 인하여 힘들어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 개척에 마음이 있다면 사람들의 삶에 대해 구체적으로 깊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사람들은 오랫동안 변화를 보이지 않을 수도 있다. 당신의 조언을 듣고도 순종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고 성도를 돌보는 것은 건강한 교회의 목회 사역이다. 목회자의 인내를 통해 사람들의 삶에서 열매가 맺히도록 하는 사역이다. 2. 새로운 교회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인가?사업가는 틈새시장에서 기회를 노린다고 했다. 그들은 아직 없는 제품을 개발하여 제공한다. 교회 개척에서도 그것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제공하고 싶은 틈새시장과 제품을 어떻게 인지하는지에 주의해야 한다.교회 개척은 특정 지역에 기존 교회보다 더 건강한 교회가 필요한 이유가 있을 때에 바람직하다. ‘건강한 교회’라는 의미는 매주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기 위해 모인다는 뜻이다. 그것은 삶을 함께 나누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먼저 배운 사람이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주위를 돌아보며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는 믿음의 공동체를 말한다. 건강한 교회는 언제 어디서나 서로 나누는 모습을 특징으로 한다. 당신이 발견하여 채우고 싶은 틈새가 일반적으로 ‘건강한 지역 교회’보다 더 특별하다면(어떤 혁신적인 사역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아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지 않은 것들을 강조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교회를 세우려는 목표가 근처 교회와 다르지 않다면 불화를 일으킬 위험이 있다.당신은 상품이 아니다자신을 기존 시장에는 없는 고유한 ‘상품’으로, 수요는 있으나 아직 공급되지 않은 ‘제품’으로 여길 수 있다. 온라인 옥스퍼드 사전은 사업가에 대한 하위 범주의 정의를 “예능 산업의 촉진자”라고 말한다. 교회 개척자도 사업가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할 때 그 의미의 미묘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다. 교회 개척이 성공하려면 카리스마 넘치는 성격을 가진 리더가 교회에 필요하다고 믿을 수 있다. 만일 홍보하려는 제품이 당신 자신이라면 실패하는 시나리오를 시작하는 것이다. 당신이 실패하면 아무도 탓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당신 때문에 교회가 도약하고 성장한다면 당신은 성경적 공동체가 아닌 다른 것을 기반으로 한 공동체를 세우게 될 것이다. 이러한 교회 개척은 하나님을 위하여서가 아니라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다.교회 개척의 성공을 인정받는 것은 이익도 손해도 없는 게임이다. 신실한 교회 개척자가 되려면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요 3:30)라고 말한 세례 요한의 고백에 동의해야만 한다. 완전하게 그리스도를 향해야만 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Church Plants Need Shepherds, Not Entrepreneurs번역: 정은심
교회개척
목회자
협력자
틈새시장
사업
십자군 전쟁이 남긴 교훈
by Robert Godfrey
2019-12-03
성경은 잘못 사용되면, 위험한 책으로 바뀔 수 있다. 지난 교회 역사를 보면, 성경을 오해해서 야기된 수많은 문제들을 확인할 수 있다. 거짓된 교리가 형성되었는가 하면 율법주의적인 관례들이 생겨났고 그릇된 방향으로 인생이 치닫는 경우가 수도 없이 발생했다. 그중 가장 논란이 되는 예가 있다면, 아마도 십자군 전쟁이 아닐까 싶다. 이는 중세 유럽인들이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내세우며 중동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일련의 전쟁을 의미한다.누군가는 기독교인들이 그 대의를 위해서라면 칼을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다음과 같은 구절들을 들어 그러한 생각을 정당화하려고 할지 모르겠다.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시 72:11). “내게 구하라 내가 이방 나라를 네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 끝까지 이르리로다 네가 철장으로 그들을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시 2:8-9). “주의 오른쪽에 계신 주께서 그의 노하시는 날에 왕들을 쳐서 깨뜨리실 것이라 뭇 나라를 심판하여 시체로 가득하게 하시고 여러 나라의 머리를 쳐서 깨뜨리시며”(시 110:5-6).혹 기독교의 이름을 빙자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해 이런 구절들을 사용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각 본문의 진정한 의미를 놓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모든 내용은 하나님 나라가 영적으로 확장되는 역사와 그 역사의 마지막 날에 있을 최후 심판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오히려 비폭력적인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한다.“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롬 12:14).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롬 12:17-19).“마귀의 간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입으라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1-12).“우리가 육신으로 행하나 육신에 따라 싸우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3-5).십자군 운동은 11세기 유럽에서 일어나 최소한 16세기까지 그 정신이 지속되었다. 이 전쟁을 이끈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이교도의 손에서 되찾는다는 명목 하에, 1096년으로부터 1229년까지 최소 다섯 차례를 원정길에 오르게 된다. 당시 십자군을 선동했던 인물들은, 원래 중동이나 북아프리카의 땅이 기독교 인구가 차지하던 지역이었는데 7-8세기에 이르러 이슬람 세력이 정복하게 된 역사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실제로 632년 마호메트가 죽은 지 6년 만에 이슬람 군대는 예루살렘을 차지했다. 이후로도 이슬람 군대는 남쪽에서부터 올라가기 시작해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까지 진격했는데, 이러한 북진은 732년에 프랑스 푸아티에까지 이르렀다. 그렇게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은 841년에 로마의 성 베드로 성당을 약탈했고, 15세기부터 17세기에는 군비를 다시 갖추어 동방에서부터 유럽을 공격해 들어왔다. 그 결과 1451년에는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고, 이후에는 비엔나까지 그 세력을 확장한다.이처럼 이슬람 세력이 어떻게 그 시작부터 단기간에 힘을 모아 성공적인 확장을 이룰 수 있었는지는 미스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도대체 그 무엇이 유럽으로 하여금 중동에 있는 이슬람 국가들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게 했는지도 하나의 의문처럼 여겨질 수 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에게 장악된 지 이미 4백 년도 넘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 배경을 알아보면 다음과 같다. 11세기 말, 정확한 사실인지 알기 어려운 어떤 소식이 유럽 사회에 퍼지게 된다. 바로 예루살렘에 성지 순례를 가는 기독교인들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은둔자 베드로(Peter the Hermit)는 자신이 환상을 보았다고 하며, 그리스도가 예루살렘에 있는 성묘교회(the Church of the Holy Sepulcher)에 나타나셔서 그 거룩한 성에서 이교도를 쫓아내라는 사명을 기독교인들에게 주셨다고 말했다. 게다가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도 이슬람 세력을 견제할 수 있도록 유럽에 도움을 요청한 상황이었다.그러다가 1095년에 열린 공의회에서 교황 우르바누스 2세가 그곳에 모인 성직자들에게 설교를 하며 십자군을 일으켜야 한다는 생각을 촉발시킨다. 이미 예루살렘을 장악했을 뿐 아니라 계속해서 기독교인을 정복하고 있는 무슬림과 싸우기 위해 전쟁을 선포하게 된 것이다.“나는 이 사안과 관련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심정으로 권하노니, 이는 내가 아니라 주님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여러분에게 명하시는 바이다. 이제부터 기사와 보병, 부자와 빈자를 가리지 말고 모든 계층의 사람들을 설득하고 어떤 포고를 내려서라도 더 늦기 전에 그 거룩한 땅에서 악한 인종을 쫓아내도록 하라. 나는 여기에 있는 여러분만이 아니라, 이 자리에 없는 자들에게도 뜻을 전한다. 이는 그리스도의 명령이니, 바로 이 전쟁에 참여하라. 그리하여 육지에서든 바다에서든 혹은 이교도와 싸우는 전장에서든 그 어떠한 결말로 생을 마감하게 되더라도, 나는 하나님께 받은 은총을 따라 그들에게 면죄를 선언하노라.만일 전능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는 이 백성,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빛나는 이 백성이 악마한테 정복당해 능욕당하고 타락하여 노예로 전락한다면, 그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여러분과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들을 여러분이 돕지 않는다면, 얼마나 많은 죄책을 주님이 여러분에게 물으시겠는가!그동안 신자끼리 무가치한 싸움을 일삼아 온 자들아, 이제 개전되어 승리로 마치게 될 이 전쟁, 저 불신자를 몰아내는 이 고귀한 전쟁에 참여하라! 지금까지 약탈자로 살았던 자들아, 그리스도의 군사가 되어라! 돈 몇 푼을 위해 일했던 자들아, 이 영원한 상급을 받으라!”이처럼 우르바누스는 기독교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대적을 죽이기 위해 칼을 뽑으라고 명령했다. 그것이 영적 의무이자, 영적 보상을 위한 일이라고 선언했다. 이 설교는 교회 역사상 기독교의 관심사를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쟁을 선포한 최초의 경우일 것이다. 우르바누스는 십자군에 참여해서 목숨을 잃은 자들에게 면죄를 약속했지만, 이후 등장한 교황들은 전쟁에 참여하기만 하면 면죄를 누리게 된다고 약속했다. 이처럼 기독교는 거대한 군대로 변모하고 있었다.그렇게 해서 일어난 첫 번째 전쟁은 놀랍게도 성공적인 성과를 거뒀다. 1096년에 출군된 유럽의 군대가 1099년에 이르러 예루살렘을 탈환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예루살렘 왕국(The Latin Kingdom of Jerusalem)이 그해에 세워져 1187년까지 존속하게 되었다. 또 그와 함께 다른 십자군 도시들도 건설되었다. 하지만 이 성공에 따른 폐해는 그야말로 막대했다. 전쟁으로 인해 수십만 명이 죽었으며, 십자군이 예루살렘에서 자행한 끔찍한 대학살은 이슬람 사람들의 뇌리에 남아 기독교에 대한 평판이 그후로도 회복되지 않았다.1189년에서 1192년에 걸쳐서는 세 번째 십자군 전쟁이 진행되었는데, 그에 앞서 빼앗긴 예루살렘을 다시 찾는 데 목표를 두었다. 이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1세, 프랑스 왕인 필리프 2세, 그리고 (사자의 심장을 지녔다고 일컬어진) 잉글랜드의 국왕 리처드 1세처럼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력한 왕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모두 이슬람 세계의 지도자였던 살라딘과 전쟁을 벌였다. 바로 이 십자군을 배경으로 하여 (존 왕자와 싸운 로빈 후드 이야기를 비롯한) 여러 가지 낭만적인 설화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네 번째 십자군 전쟁은 1200년에서 1204년 동안에 일어났는데, 이는 유독 결과가 안 좋았던 전쟁으로 기억된다. 당시에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려 진군했다. 거기서 비잔틴 제국의 왕좌를 둘러싸고 경쟁자들 간에 싸움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1204년에 십자군은 동방 기독교를 대표하는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을 침략하게 된다. 이에 엄청난 파괴 행위가 뒤따랐다. 위대한 예술과 문학 작품이 손실되었고, 십자군이 약탈한 수많은 유물이 배에 실려 서유럽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특히 베니스에서는 오늘날까지도 그 물건들이 발견되고 있다. 이 전쟁을 통해 유럽인들은 콘스탄티노플 라틴 제국(the Latin Empire of Constantinople)을 세워 1204년에서 1261년까지 군림하게 되었으며, 교황은 로마에 종속된 라틴 교구를 그곳에 창설하였다. 이런 사건은 동방 정교회를 격분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결국 비잔틴 제국은 1261년에 다시 회복되었지만, 이 십자군 전쟁의 여파에서 완전히 헤어나지를 못했다.다섯 번째 십자가 전쟁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했다. 그는 기독교인, 유대인, 이슬람교인 모두에게 예루살렘에 올 수 있는 권한을 약속함으로써 그 성지에 대한 통치권을 거머쥐게 된다. 이로써 기독교인은 1229년부터 1244년에 걸쳐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게 되었지만, 교황 그레고리 4세는 프리드리히가 이교도와 타협했다는 이유로 그를 파문에 처한다.이후로는 프랑스의 루이 9세가 1248년과 1270년에 각각 십자군 전쟁을 일으키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매우 경건한 마음을 지녔던 그는 군대를 지휘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리더였다. 결국 루이 9세는 1270년에 이집트에서 사망하게 되었고, 로마 교회는 그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이는 십자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성인의 반열에 오른 예였다.이와 같이 십자군은 예루살렘에 대한 기독교의 통치권을 영구적으로 쟁취하는 일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그 대신, 여러 가지 결과들을 남기게 되었다. 가령 유럽 교회에 대한 교황의 권위와 영향력이 확대되었다. 또 비잔틴 제국은 반대로 쇠약해져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될 때까지 계속해서 이슬람 세력에 영토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가장 심각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 결과는, 기독교와 서구 세계에 대한 폭력적 이미지가 이슬람 사람들의 의식 속에 각인되었다는 것이다.사실 여기에는 모종의 아이러니가 있다. 분명 처음에는 이슬람 세력이 기독교의 영토를 침략하며 전쟁을 일으켰다. 그때 그들은 이후에 일어난 십자군만큼이나 잔인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역사에서 십자군이 사라진 이후에도, 그들은 서구 기독교를 상대로 여러 차례 난폭한 전쟁을 벌였다. 그런데도 오늘날까지 많은 무슬림들은 여전히 기독교를 폭력적인 종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면서 기독교가 국가와 분리되지 않은 체제를 과거에 갖추었던 것처럼, 자신들도 유럽에서 정교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신념을 내비치고 있다.이러한 십자군의 역사가 기독교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 남기는 교훈이 있다. 바로 이 전쟁으로 인해 그리스도의 영광에 얼마나 큰 손실이 가게 되었는지를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십자군’(Crusade)이라는 용어는 십자군 전쟁이 시작된 지 한 세기 후에 등장했는데, 이는 ‘십자가의 길’을 의미하는 프랑스어로부터 유래한 말이었다. 그렇게 보면 십자군은, 자신을 대적하는 원수를 품기 위해 십자가에서 생명을 쏟으신 분, 그리하여 세상의 불의를 몸소 감당하시며 평화를 이루신 분,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과 얼마나 상반되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인으로서 그분의 대의를 널리 추구하되, 언제나 폭력이 아니라 사랑과 자기희생을 동반한 진리를 통하여 그리해야 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Crusades번역: 장성우
역사
중세교회
십자군전쟁
이슬람
폭력
사랑
자기희생
진리
교회에서 시편으로 찬양하라
by Keith Getty • David Robertson
2019-12-02
시편을 떠올릴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지 읽는 것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특히 교회 모임에서 시편을 노래해야 한다. 사실, 3천 년 동안 시편은 하나님의 사람들에게 노래책이었다.여기 오늘날 교회에서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 왜 중요한가에 대한 10가지 이유가 있다.1. 성경에서 말한다가장 강력하고 훌륭한 이유이다. 우리가 시편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게 된다면, 성경에 대한 우리의 헌신도 의심을 가지게 될 것이다.2. 시편은 하나님의 말씀이다시편의 기자는 성령이시다. 시편은 순수한 성경이다. 작년에 시편에 집중하면서 가진 기쁨 중 하나는 아내와 성경을 읽으며 보낸 시간들이었다. 또한 내 어린 딸이 집안을 뛰어다니며 시편 8편과 139편을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 있어서 기뻤다.3. 시편은 예수님이 부르시던 노래이다예수님이 소년이었을 때 시편의 전부는 아니지만 많은 부분을 배우고 외웠을 것이다. 시편은 성경의 노래책이다. 시편은 예수님의 삶의 사운드트랙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당신의 삶의 사운드트랙이 될 수 있다.4. 시편은 하나님의 ‘진짜’ 모습을 우리에게 더 많이 보여 준다현대인들이 ‘진정한 예배’를 갈망함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트렌드를 따라가기만 한다면, 우리는 교회 리더들의 편견 혹은 그들이 따르는 운동에 굴복하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현대 예배의 오직 3프로만 영원을 언급한다. 그리고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하나님의 성품은 거의 언급하지 않는다. 반면 시편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심판과 분노를 노래할 때 당혹감에 놀라게 한다. 또한 시편은 훨씬 더 크고, 아름답고, 놀랄 만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우리에게 보이기도 한다.5. 시편은 기독론이다그리스도의 삶을 이야기할 때 신약이 얼마나 자주 시편을 인용하는지를 보라.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어떤 기분을 느끼셨는지 알기 원하는가? 시편 22편을 읽으라.6. 시편은 인간 감정의 깊이와 넓이를 이야기한다시편은 신학과 감정, 정의와 복음주의, 개인과 공동체의 완벽한 균형을 이룬다. 한 젊은 여성이 내게 와서 우리가 그녀를 우울하게 만들었기에 우리 교회에 왔다고 말했다. “당신을 우울하게 만드는 교회”는 현대 사회에서 최고의 광고 슬로건은 아니겠지만, 나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했다. 그녀는 우울증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고 때때로 우리는 그녀가 우울증을 표현할 수 있는 노래를 불러 감정을 표출하도록 하였다.현대적인 예배는 공적인 감정을 크게 강조하는 반면, 교회는 종종 인간 감정의 경험을 크게 생략하여 줄이기도 한다.7. 시편은 가정 예배를 변화시킨다시편은 당신의 개인과 가정 예배를 변화시킬 것이다. 수년 전에,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이후로 얼마 되지 않았을 즈음, 나는 스코틀랜드의 산악지대인 테인에 있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다. 우리가 식사를 마쳤을 때,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는 책을 볼 거야.” 책이라고? 무슨 뜻이지? 나는 곧 알아차렸다. 누군가 성경과 시편을 가지고 들어왔다. 우리는 성경을 읽었고, 성경을 기도했고, 성경을 노래했다.나에게는 매우 감동적인 경험이었고, 왜 이 가족이 강하고 신실한 그리스도의 가족인지에 대한 통찰력을 얻었다. 그 이후로, 시편은 우리 가족의 DNA가 되었다. 나는 적어도 매일 시편을 한 편씩 읽거나 노래했다. 이제 작고 빨간 시편 책은 내 생활 공간의 어디에나 있다. 2011년, 내가 병원에서 혼수상태에 빠져 있을 때, 우리 가족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몰랐다. 나는 큰 고통 가운데 있었고, 매일 밤 가족들은 내 옆에 앉아 시편으로 기도했다. 컨설턴트인 나의 친구는 시편 91편을 내 침상 벽에 붙여 놓기도 했다. 그것들이 나를 지탱했었다. 8. 시편은 교회 구성원들을 연합시킬 것이다현대의 교회는 “예배 전쟁”과 다른 배경에서 온 사람들 혹은 교회에 아무런 배경이 없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시편은 모든 기독교계를 하나로 연합시킨다. 또한 시편은 모든 세대를 통합시키는 “전근대적”이면서도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특성을 지닌다.9. 시편은 교회에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무엇을 노래하느냐가 회중을 정의한다. 우리는 자신이 부르는 것을 외우게 된다. 만약 시편을 노래하면 회중은 그들의 생각과 마음속에 어마어마한 성경을 간직하게 될 것이다. 지난밤 우리 교회는 시편 8편, Getty 버전을 불렀다. (또한 시편 25편과 107편의 일부분을 불렀다.) 아름다웠다. 몇몇 성도들은 우리 교회의 장점이 시편을 노래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무랄 것 없이 바른 정통파 신자가 빈정대듯이 말했다. “왜 시편을 노래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왜 안 되는가? 나는 왜 모든 복음주의 교회가 시편을 노래하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길 원한다면, 진리의 성령이 직접 영감을 준 노래책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10. 시편은 선교적이다시편은 오늘날의 복음 전도를 위한 최고의 책이다. 몇 년 전, 한 히피 중년이 우리 교회에 왔다. 그는 “데이브, 시편은 너무 좋아. 특히 단선율 음악 말이야. 팔레스타인의 3천 년 된 역사적인 말을 노래하다니, 멋지다!” 시편은 모든 민족의 마음을 말할 수 있는 감정이 담긴 시이다.교회에서 시편을 노래하라그러면 어떻게 교회를 개선할 수 있을까?시편을 노래하는 운동은 예배의 차세대 혁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노래로 교회를 교육하고 고무시키고자 할 때, 우리는 다시 돌아가는 데 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 시편은 우리가 가진 가장 오래되고 가장 성경적인 노래이다.우리가 시편을 다시 되찾아 올 수 있는 5가지 방법이 있다.1. 집에서 매일 시편을 읽으라. 우리는 3년 전부터 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큰 변화를 가져왔다. 당신이 매일 헌신적으로 주님을 생각하고, 기도하고, 노래하도록 돕는 데 팀 켈러의 “묵상”(The Songs of Jesus)을 추천한다.2. 당신의 집을 시편의 노래로 채우라. 시편으로 당신의 정신, 마음, 입술, 상상, 그리고 영혼을 채우도록 하라.3. 모든 주일 예배에서 시편을 읽으라. 만약 예배 형식이 없다면, 예배의 부름으로 시편을 사용하고 또한 전교회가 시편을 읽음으로 화답하도록 하라.4. 시편으로 기도하라. 당신의 기도를 시편으로 채우라.5. 시편을 노래하라. 현대적인 시편 찬송뿐만 아니라, 시편으로 영감을 받은 더 오래된 찬송가도 부르라.시편 기자는 “주의 말씀을 내 마음에 두었나이다”(시 119:11)라고 말한다. 우리는 시편을 노래함으로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둘 수 있다. 그리고 시편을 노래함으로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세상과 천사들에게 선포할 수 있다. 더 이상 무엇을 망설이고 있는가?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10 Reasons Your Church Should Sing Psalms번역: 송유희
영성
예배
시편
노래
기도
기독론
감정
가정예배
여러번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에 관해
by Kyle Schwahn
2019-11-29
지금 사역하는 교회에서 목회한 지 12년이 넘었다. 주일 오전에는 항상 1부와 2부 예배를 따로 드렸는데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여유가 없었다. 아니, 깊이 생각을 해 본 적이 ‘있긴 했지만,’ 별문제 없다고 결론 내렸다. 예배를 그런 식으로 드리는 것은 내게 있어 교회 성장의 표지이자 수단이었다. 주일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것은 목회에 있어 더 큰 성공을 의미한다고 믿었다. 두 번에 나눠 드리는 주일예배는 목회를 ‘성공’으로 인도해 주는 길이기도 했다. 심지어 어느 스탭 회의에서는 주일 오전 3부 예배를 추가해야 할지를 놓고 토론했던 기억이 난다. 교인 수가 늘고 있었다는 건 표면적인 이유였다. 진짜 이유는 예배 횟수를 늘리면 교인이 더 늘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그 회의에서 누군가 “사람들은 예배 시간의 선택 범위가 넓은 교회를 선호할 겁니다”라고 얘기했던 것이 기억난다.내가 섬기는 교회는 여전히 주일예배를 2회에 나눠 드리고 있다. 전 교인들이 한 번에 한자리에 모이기에는 교회 건물이 그리 크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우리 교회가 하나이므로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리는 것은 어떨지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보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바꾸고자 하는 것일까?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교회는 전체 예배를 한 번만 드려야 한다고 생각하게 한 것일까?주일예배에 대한 우리의 교회론적 인식들이 바뀌게 된 이유 두 가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1.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 때문이다지난주 주일에 캐롤(Carol)이 성경의 한 부분을 읽고 기도했다. 그때 많은 성도가 그녀의 열정과 확신에 감동을 받았다. 캐롤의 기도는 복음을 기반으로 했고 우리의 마음을 찬송으로, 죄의 고백으로,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죄 용서하심을 받아들임으로 이끌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에서 그려 냈듯이, 캐롤의 기도가 우리의 기도가 되었고 우리 모두 “아멘”(고전 14:16)으로 화답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모두가’ “아멘”이라 한 것은 아니었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를 들었기 때문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과 한마음으로 기도한 것이다. 우리 교인들의 반만 캐롤의 기도로 인한 영적 유익을 누렸다. 캐롤의 이야기가 사소하고 단편적인 예처럼 들릴 수도 있겠지만, 신약은 한 몸에 속한 신자들은 각자 옆의 지체들을 위해 자신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보자.회중이 함께 부르는 찬송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 안에 복음이 풍성히 거하게 하고 우리가 사랑하는 진리들을 가르치기도 하기 때문에(골 3:16),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서로 화답하며 마음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권면했다(엡 5:19–20). 교회는 성도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좋은 것들을 나눔으로써 진정한 교제를 누리게 된다(행 2:42; 몬 6). 교회는 안수함으로 장로와 집사를 선택하고 세운다(행 6; 딤전 5). 교인들은 덕을 세우고 권면하며 위로하는 예언의 말을 서로에게 줄 수 있다(고전 14:3). 형제자매들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 그리고 인내를 가질 것을 격려한다(히 10:24–25). 교인들은 서로의 영혼을 살펴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주의한다(히 3:12–13).마지막으로, 회심과 교인됨에 성례가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인식할 때(바비 제이미슨(Bobby Jamieson)이 쓴 ‘회중을 향해 고백하는 신앙’[Going Public]을 보라), 성도들은 새 회심자가 그들과 한 몸 안으로 세례를 받아 그들의 보살핌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또한 교인들은 십자가와 자기 자신의 마음을 바라볼 뿐 아니라 성찬 테이블이 상징하는 바 그리스도의 몸의 남은 부분을 바라보며 성찬에 참예하게 될 것이다. 잠시 멈추고, 간단한 질문 몇 가지를 던지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된 책임들은 모두 교인됨에 관한 것들인데 이를 그리스도의 몸의 반에 대해서만 수행해도 되는 것인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기도를 교인 중 일부만 듣고 회개와 기쁨을 누려도 되는가? 옆 지체들이 드리는 찬송과 감사를 양 떼의 일부만 듣고 격려를 받아도 되는가? 한 헌신된 성도가 옆 지체를 위해 기도해 주고, 권면해 주고, 함께 교제하고, 때론 그들의 상태를 상세히 살피고자 할 때, 이를 일부 형제나 자매들만 누려도 되는가? 예언의 말에 대한 당신의 견해를 막론하고, 격려와 세움을 위해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을 교인들의 반만 들어도 되는가? 새신자가 세례를 받을 때 그를 보살펴 줄 교인들의 반만 세례식을 볼 수 있도록 막는 것이 옳은가? 2. 성만찬의 본질 때문이다위에서 언급한 책임들을 우리 교회가 이해하기 시작할 즈음, 나는 40주에 걸쳐 고린도전서를 설교했다. 고린도전서를 읽으면 교인들의 하나됨과 서로를 향한 실천적 사랑이 증진될 것을 알긴 했지만, 주일에 여러 번 예배를 드리는 것에 대한 내 견해에 고린도전서가 결정타를 날릴 줄은 모르고 있었다. K.O. 펀치는 바울이 성만찬의 속성과 실제를 다루는 고린도전서 10–11장에 이르렀을 때 나왔다. 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말하길, 성찬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참여함(10:16)이라고 했다. 하지만 동시에 성찬은 그것에 참여하는 이들의 연합도 의미하는데,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10:17)이기 때문이다. 11장에 이르자 이 주제는 더욱 강렬해졌다. 이 장에서 바울은 교회의 모임을 다섯 번에 걸쳐 언급한다(17, 18, 20, 33, 34절). 더 놀라운 것은 11장에서 바울의 가르침은 성만찬의 본질 자체보다 성만찬을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해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모일 때 ‘교회에’ 모였다고 했다(11:18). 10장에서도 바울이 보여주듯, 성만찬은 각 지역 회중을 이어주는 무형의 끈의 유형적 표식이다. 바울은 분쟁이나 불공평이 교회 안에 있다면 그들은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11:20)라고까지 말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인들은 성찬을 분별하고, 성찬을 보살피고, 심지어는 성찬을 기다리기까지 해야 한다. 마치 그 성례에 지역 교회의 경계를 설정해 주는 능력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나는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한 하나됨이 교인들의 반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이 옳은가? 한 성찬에 참여하는 것이 ‘교회에’ 모이는 것이라면, 우리 교회가 1부와 2부로 나뉘어 성찬을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성찬을 할 때마다 주위를 돌아보고 서로를 보살펴야 한다고 가르치는데, 주님의 양들이 양 떼의 반만 돌아보는 것이 합당한가? 주일 오전예배를 여러 번에 나눠 드리는 모든 교회는 고린도전서의 텍스트를 읽고 그것이 시사하는 바에 대해 숙고해야 한다. 결론방법론에는 신학이 담기기 마련이다. 신학적으로 얘기하자면, 내 목회의 대부분의 기간 동안 나는 지역교회의 예배 모임에 관해 고찰해 본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이젠 모든 것이 바뀌었다. 한 교회의 교인됨의 본질과 성만찬의 속성을 이해하기 시작하자, 한 교회 안에서 모두 모여 한 번의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임을 확신하게 되었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wo Reasons a Church Shouldn’t Have Multiple Gatherings번역: 이정훈
교회생활
성만찬
캐롤
주일예배
제이미슨
회심
교인됨
그때 초대교회가 그랬듯
by Matt Ryman
2019-11-19
세계사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들 중의 하나가 마태복음 16장에 기록되어 있다. 그 배경은 12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한동안 따르며,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것을 듣고 그분의 기적을 보았을 무렵이다. 마침내 예수님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두 개의 매우 중요한 질문을 하실 시간이 다가왔다.예수님이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으로 들어가셨을 때, 제자들에게 물었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그들이 말했다.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물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3-16).이 상황은 세상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베드로는 엄청난 고백을 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생각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12명의 제자들을 대표하여 말하고 있었다. 이 순간의 중요도는 예수님이 그들의 고백에 대해 반응하신 방식을 살펴보면 알 수 있다. 첫째, 예수님은 자신이 진정으로 누구인지를 그들에게 알게 한 이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다(17절). 둘째, 예수님은 교회에 대해 매우 중요한 것을 이야기하셨다(18절). 셋째, 마태는 예수님이 그때부터 자신의 죽음과 부활을 예언하기 시작했다고 말한다(21절).우리는 크리스천으로서 제자들이 믿은 것을 믿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믿은 바대로, 예수님은 그리스도이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우리 크리스천들도 그렇게 믿는다. 예수님은 미리 예언한 대로, 죽으시고 장례되었으며, 죽음에서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그리고 우리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하나님과 화해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죗값을 지불하셨다. 예수님의 이러한 예언과 그것이 그대로 일어난 일은 크리스천으로서 우리 삶의 중심축이 되어 왔다. 하지만 마태복음 16장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교회에 대해 말씀하신 다른 예언도 우리 삶의 중심이 되어야 했음을 알 필요가 있다. 예수님의 반응, 특히 두 번째 부분으로 돌아가 보자. 제자들을 대신하여 베드로가 말한 고백에 대해, 예수님은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라고 말씀하셨다. 이 진술은 예수님이 자신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예언하신 말씀만큼 중요한 예언이었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그 순간까지 해 오고 있던 것이며, 바로 예수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하고 계실 일이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이것을 알고 적용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무엇이 교회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복잡하다. 왜냐하면 신약 성경에서 “교회”(헬라어로 에클레시아)라는 단어가 사용된 방식 때문이다.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부름받은 사람들”이라는 의미이다. 그것은 보통 공공장소나 집회에 모인 시민들의 모임을 말할 때 사용되었다. 이는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하셨을 때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준다. 이는 예수님이 믿는 자들의 모임을 세우시겠다는 의미였다. 신약 성경의 나머지에서 “교회”라는 단어가 사용된 방식은 예수님의 교회가 정말로 모임들 중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신약 성경의 어느 곳에서는 “교회”라는 말이 이 땅 위의 모든 크리스천들을 의미하며, 다른 곳에서는 특정 지역의 크리스천들의 모임을 말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 이 사실 때문에 우리는 보편적 교회와 지역 교회를 구분한다. 그리고 보편적 교회는 지역 교회들로 구성된다.우리가 지역 교회에 속하지 않고도 보편적 교회에 속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은 축구 선수가 지역 축구팀에는 속해 있지 않지만 국가 축구 연맹에는 속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나는 지역 교회에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이해한다. 사실, 특히 나는 목회자이기 때문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것을 매우 슬프게 생각한다. 하지만 지역 교회에서 사람들이 상처를 입는다고 해서, 예수님이 사람들을 지역 교회에 모이게 하여 그분의 보편적 교회를 세우고 계시는 사실이 바뀌지는 않는다. 크리스천들에 의해 하나님의 명령이 대다수 지켜질 수 있는 곳은 오직 지역 교회의 상황 안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지역 교회의 상황에서 안수받은 지도자들에게 순종하고(히 13:17), 서로를 가르치며(롬 12:16), 예배드리러 모이고(히 10:25), 헌금을 드리며(고전 16:1-3), 서로의 짐을 지고(갈 6:2), 서로 화답함으로 찬송하며(엡 5:19), 주의 만찬에 함께 참여한다. 사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선교 여행은 단순히 복음 전도에 관한 것만은 아니었다. 사도 바울과 그의 동역자들은 복음을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 삼고, 모든 모임을 위해 지도자를 임명하는 일도 했다(행 14:21-23). 선교 여행은 교회 개척의 여정이었다. 사도들은 보편적 교회를 세우시겠다는 예수님의 계획에 전 세계적으로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을 지역 교회로 모이게 하는 일이 포함된다고 이해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으로 지역 교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보면 보편적 교회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우리는 초대 교회 크리스천들의 인도를 받아서 우리의 시간과 재능 및 보화를 지역 교회와 전 세계에서 교회를 개척하는 일에 투자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섬기던 지역 교회를 떠나야 하는 날이 오면, 우리의 최우선 과제는 가능한 빨리 다른 교회를 찾는 것이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는 또한 자녀들에게 지역 교회의 가치를 가르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와 여러 국가에서 교회 개척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이 그분의 교회를 누가 세우겠다고 하셨는지를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것을 할 것이라고 하지 않으셨다. 그분이 그것을 하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어느 누구도 그리고 그 무엇도 그분이 그 과제를 완성하시는 것을 멈추지 못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예수님은 그분의 교회를 세우고 계시며, 지옥의 문들이 그것을 대항하지 못할 것이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Supporting the Church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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