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rean Edition
한국어
UNITED STATES
AFRICA
عربي
AUSTRALIA
BRASIL
CANADA
正體中文
简体中文
ESPAÑOL
فارسی
FRANÇAIS
ITALIA
NEDERLANDS
SHQIP
SLOVENSKÝ
후원
하기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시리즈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리뷰
서평
새로 나온 책
뉴시티교리문답
뉴스
국내
국제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검색
사이트 내 전체검색
검색어 필수
검색
추천 검색어
마음
여성
배움
성경
신앙과일
크리스찬
전체메뉴
01
ARTICLES
아티클
성경과 신학
그리스도인의 삶
교회
신앙과 일
예술과 문화
이슈
선교
목회
02
VIDEOS
비디오
설교
강의
클리닉
Q&A
특집
바이블 가이드
읽어주는아티클
목양토크
3분 묵상
03
SERIES
시리즈
04
CONTACT
콘택트
CTC코리아
목회데이터연구소
공동체성경읽기
한국로잔위원회
특강 플랫폼
더워드
05
QT
큐티
아침 8시 매일 큐티
와플터치 & 큐티
06
REVIEWS
도서
서평
새로 나온 책
07
The New City Catechism
뉴시티교리문답
08
NEWS
뉴스
국내
국제
09
ABOUT
소개
복음과도시
이사회
스태프
TGC
CTC
문의처
10
GIVE
후원
ARTICLES
교회
연도별
SELECT CONCAT(YEAR(wr_4)) ym FROM g5_write_articles where wr_4 <= '2025' GROUP BY ym order by wr_4 desc
2024
2023
2022
2021
2020
2019
2018
날짜순
조회순
이름순
정하신 ‘그날’까지 견뎌내려면
by Eric Landry
2019-11-15
브라운 목사는 이십 년이 넘는 목회 기간 동안 교회가 겪어 온 풍파를 한번 돌아보았다. 언젠가는 예배 방식에 대한 견해 차이로 성도 간에 불화가 일어나기도 했다. 또 사역 현장에 최신 기술을 도입하여 이전에 없던 파장이 교회 안에 발생하기도 했다. 그리고 부정한 잘못을 저지른 사역자들로 인해 큰 폐해가 일어나 이로부터 회복하는 데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교회에 새로 온 한 가정을 통해 공동체에 왜곡된 가르침이 퍼지면서 야기된 악한 영향은 그야말로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맞게 된 뜻밖의 문제였다.스미스 부부는 어떤 사역자라도 꿈꿀 만한 그런 가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친절했을 뿐 아니라, 경건한 자녀들을 키우며 흔들림 없는 결혼 생활을 하고 있었고, 교회 사역에도 언제나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교회에 온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남편은 주일 학교 교사가 되기로 자원했고, 부인은 육아실에서 봉사하겠다고 신청했으며, 청소년이었던 자녀들은 예배팀에 들어가 섬기게 되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었다. 다름 아닌 이혼과 재혼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그 부부가 왜곡된 관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혼 후에 재혼을 하는 일은 신자에게 결코 허용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그런 종류의 결혼은, 어떤 이혼 사유를 막론하고 ‘간음’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특히 남편 스미스는 교회 안에서 그와 같은 견해를 계속 주장했는데, 이 모습을 지켜보며 염려하던 일부 교인들이 브라운 목사에게 상황을 보고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예배 후에든 그 중간에든 스미스가 다른 부부에게 접근하여 마치 그들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하며 결혼 생활이 어떠냐고 묻곤 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 부부가 재혼한 관계이면, 그들에게 이혼을 하라고 권하면서 간음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에 결코 그분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스미스의 이러한 행동은 실제로 몇몇 사람들의 삶에 신앙의 위기를 초래했고, 이에 브라운 목사는 그를 만나야겠다고 결심했다.결국 두 사람이 만나게 되자, 스미스가 브라운 목사를 향해 자신이 이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들과 똑같다며 비난을 했다. 사실 스미스는 과거의 여러 교회에서 쫓겨난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결코 진리를 대변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록 브라운 목사는 스미스 부부를 쫓아내진 않았지만, 그들의 견해가 공동체의 화평을 깨뜨리고 교회의 가르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리고 교회 안에 그런 견해를 더 이상 퍼뜨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 결과 긴장 어린 몇 주의 시간이 흘렀고, 결국 스미스 부부는 교회에서 섬기던 일을 그만두고, 자신들의 견해에 공감하는 몇몇 지체들을 데리고 나가 가정 교회를 세웠다.안타깝게도 이런 일은 교회 안에서 여러 차례에 걸쳐 다양한 방식으로 일어날 수 있다. 목회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수고에 더하여 이 적대적인 세상 문화 속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생존할 수 있도록 그들을 무장시켜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교회 안에 들어온 거짓된 가르침에 대항하며 싸울 수밖에 없다. 간혹 그 가르침이 복음의 핵심을 위협하지 않을 때에도 교회의 화평과 순결은 그로 인해 흔들릴 수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 17장 22-23절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셨듯이, 그리고 에베소서 4장 1-3절에서 바울이 설명하였듯이, 평안의 매는 줄로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함에도, 그릇된 가르침의 타격을 받으면 교회는 동요하다 분열을 겪게 되기도 한다.물론 우리는 잘못된 가르침이 야기하는 위협에 겁을 먹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교회의 문을 단단히 지켜야 한다. 왜냐하면 기회만 있으면 몰래 들어와 무엇인가를 노략질하려는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교회 안에서도 양 떼를 해치는 이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교회의 리더들은 그런 문제가 들이닥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파수꾼보다 더욱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주의 사항이 있다. 화평과 순결이라는 두 가지 가치를 서로 대립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평을 지키는 데 너무 치중하여 교리적 순결성을 소홀히 여길 수 있고, 또 순결을 지키는 데 너무 몰두하여 성도들을 의심과 불안의 눈초리로만 살필 수 있다.그렇다면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까? 우리는 교회에 침입하는 모든 적군을 막아 내기는 힘들 수 있다. 그러나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미치는 피해를 예방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사항을 실천하며 도움을 얻을 수 있다.첫째로, 사역자이든 일반 성도이든 교회에서 리더의 자리를 맡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높은 기대치를 유지해야 한다. 바울은 교회에서 지도자를 세울 때 반드시 고려해야 할 기준이 무엇인지를 디모데와 디도에게 각각 알려 주었다. 곧 장로나 집사는 올바른 신학과 경건한 성품을 지녀야 할 뿐 아니라 세상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딤전 3:1-7; 딛 1:5-9). 그렇다면 우리가 섬기는 교회는, 과연 중직자 후보로 거명된 사람들에 대해 성경이 제시한 요건을 충족시키고 있는지 분명히 확인하고 있는가? 슬픈 현실이지만, 많은 교회에서는 성공적인 사업가라든가 유력한 인사 또는 교회에 상당한 액수의 후원금을 기부하거나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하며, 성경이 제시한 자격 요건은 무시하기도 한다. 분명 교회는 그와 같은 세상의 기대치가 아니라, 성경이 제시하는 기대치에 맞는 리더십을 요구해야 한다.둘째로, 문제의 여지를 남겨서는 안 된다. 목회자는 성도들을 가르치기 위해 폭넓은 독서를 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올바른 신학으로 구성된 영적 양식을 꾸준히 제공하려면, 그 다양한 책들 중에서도 청중이 곁길로 빠지지 않도록 붙들어 줄 수 있는 작가와 저서를 규칙적으로 인용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고 표준적인 견해에서 벗어난 문헌이나 학자로부터 신학적인 설명을 굳이 취하는 일은 청중에게 혼란만 야기할 뿐이다. 한번 교회 도서관에 들어가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를 보라. 또 교육관 탁자 위에 널려 있는 책들도 검토해 보라. 과연 그 자료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정통적인 신학을 떠올리게 만드는가? 아니면 급진적인 신학을 소개하며 그릇되고 낯선 사상으로 그들을 이끄는가? 목회자는 세상의 주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검증되고 신뢰할 수 있는 진리를 교인들이 배울 수 있도록 영향력을 발휘해야 한다.셋째로, 모든 사역은 주일 설교의 메시지와 조화를 이루는 선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목회자는 평신도 리더들과 정기적으로 만나서 주간 모임이라든가 성경 공부 수업이 지난 주일 예배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각 소그룹이 교회의 전체 사역과는 동떨어진 그들만의 모임으로 바뀌기 쉽다. 그러면 그 모임의 리더가 사역자들보다 더 큰 목소리를 내어 교회 안에 그릇된 가르침이 소개될 수 있는 빌미를 주게 된다. 이런 위험성은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모임을 인도하며 가르치는 리더만이 아니라 그 모임에서 사용할 교재까지도 신중하게 선별함으로써 어느 정도 예방할 수 있다. 또 이 외에도 소그룹 리더들과 성경 공부 교사들이 서로 훈련하고 기도하며 격려할 수 있도록 정기적인 모임을 가져야 한다. 이때 목회자는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이 가르치는 내용이 주일 설교의 대척점이 아니라 연장선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맞는지를 확인시켜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목사와 장로와 집사 그리고 일반 리더들이 모두 하나님이 각자에게 은사를 주어 섬기게 하신 사역 현장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에만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사랑 안에서 자랄 수 있다(엡 4:16).넷째로, 교회를 지키고자 하는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가르침이 교회 안에 들어오게 된 사실을 발견하면, 그 문제를 직면해서 다뤄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가상의 공간에서 익명성을 띠고 타인과 소통하며 서로에게 끔찍한 말까지 서슴없이 내뱉으면서도 정작 ‘상대를 대면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a nonconfrontational age)를 살고 있다. 이런 시대에 누군가를 만나 어려운 대화를 나누는 일은, 그저 사람들을 ‘친절하게’ 대하려는 성향을 가진 이들에게는 정말 피하고 싶은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신앙의 지혜를 갖춘 성도라든가 인생의 선배가 되는 지체들이라면, 혹 공동체의 화평과 순결을 깨뜨릴 만한 자들이 있을 경우 그들에게 다가가 인격적으로 훈계하고 권면하는 일을 해야 한다.이에 대해 앞서 소개한 브라운 목사의 사례가 좋은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단호하면서도 부드럽게 교회의 입장이 어떠한지를 스미스에게 설명했다. 상황이 저절로 나아지기를 바라면서도 문제를 결코 간과하지 않았다. 또한 스미스를 공개적으로 질책하거나 교회에서 쫓아내며 그 문제에 지나치게 반응하지도 않았다.교회에서는 언제나 오류에 빠진 사람들이 사역을 할 수 있기에 우리는 공동체의 화평과 순결을 지키기 위해 늘 힘써야 한다. 특별히 직분을 맡은 자들이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교회를 지키기 위해 힘써야겠지만, 실은 교회 안에 있는 모든 이들이 베뢰아 사람들처럼 그들이 배운 가르침을 확인하며(행 17:1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살전 5:21). 하나님은 그와 같은 우리의 노력을 통해 건강한 교회를 세우신다. 또 그 안에서 우리는 매주일 예배를 드리며 그분이 우리를 돌보실 뿐 아니라 설교 사역을 통해 직접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일반적으로 교회의 화평과 순결을 위해 힘쓰는 일은 그리 매력적인 일이 아니다. 그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는, 늘 수고롭게 돌아보며 한결같은 성품을 지녀야만 하기 때문이다. 가끔씩은 절망하며 포기하고 싶은 때도 찾아온다. 그럴 때면 기억해야 한다. 비록 교회의 화평과 순결이 언제든 깨지기 쉬운 상태처럼 보일지라도, 그 모습을 지키려는 우리의 노력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장래의 소망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약속된 날이 다가오고 있다. 새 예루살렘의 성문이 닫힐 필요 없는 날, 하나님의 백성이 아무 위험에도 노출되지 않는 날, 그날이 다가오고 있다(계 21:25-27). 그날에 예수님은 순결하고 흠 없는 신부로 교회를 맞이하실 것이다(엡 5:27).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하신 때 바로 그날이 도래하리라는 확신을 가슴에 품고, 오늘도 교회가 화평하고 순결하도록 우리는 힘을 다해 수고한다.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lse Teaching and the Peace and Purity of the Church번역: 장성우
교회사역
화평
순결
가르침
성품
리더
기대치
주일설교
브라운
예배는 주님과 세상을 향한 사랑 증거
by David P. Barry
2019-11-11
돌보는 사람 없이 방치된 유아원에 들어가는 사람은 누구라도, 혼란의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압도적인 느낌을 받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고, 싸우며, 장난감을 던지고, 이것을 하다가 저것을 하는 등 유아원은 온통 난장판 같을 수 있다. 노는 시간 혹은 “자유 놀이” 시간은 아이들의 발달을 위해 비구조적일 필요가 있다. 그러니 이러한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돌보는 성인이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이 아이들이 하지 않아야 할 것들을 하고 있는 무질서를 적절하게 정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우리는 시끄러운 유아원은 용납할 수 있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그러한 무질서가 불쾌한 태도로 여겨질 수 있다. 우리는 무질서한 졸업식이나 결혼식을 적합하다고 여기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졸업식이나 결혼식에서는 모두가 한결같이 집중할 수 있어야 하는데, 시끄럽고 혼란스러우면 집중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예배드릴 때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유아실의 혼란스런 이미지는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예배를 묘사하는 모습과 흡사하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문제는 찬송시도 아니고 가르치는 말씀도 아니었다. 각 사람이 자신이 적합하다고 생각한 대로 예배드린 것이 문제였다. 그 분위기는 신자들이 성장하거나 불신자들이 복음을 이해하는 것을 저해하는 결과를 낳았다.이 본문의 처음과 마지막 절을 비교하면, 우리는 신자들을 성장하지 못하게 막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명령(26절)은 그 다음에 따라오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40절)는 명령과 나란히 간다. 변화는 주님을 흠모하는 형제자매들과 함께하는 부산물이다. ‘자유로운 예배’의 개념은 각 개인이 인도되는 대로 참여하는 예배로, 예배가 연합을 구현해야 한다는 깊은 현실을 놓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예배는 우리를 지켜보는 세상에 다루기 힘든 개인들을 한 가족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이 예수님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예배에 질서가 없다면, 외부에서 관찰하는 사람은 우리가 원래 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을 질서 없이 행하고 있다고 합리적으로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기독교적 사랑에 대하여 가르친 후 바로 다음 장에서 예배를 드릴 때 품위 있고 질서 있게 드리며 모든 것을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 가르치고 있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참되며 복음적인 사랑을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시기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고전 13:4-5)라고 묘사한 후에, “사랑을 추구”(14:1)하는 데 힘쓰라고 촉구하고, 이어서 바른 예배에 대해 묘사한다. 다시 말하면, 그는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방식으로 예배를 드리라고 가르친다. 따라서 무질서한 예배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은 사랑하지 않는 방식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예배의 품위는 지켜도 되고 안 지켜도 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도덕적으로 요구되는 것이다. 바울이 이 특정 단어를 사용한 다른 두 번의 경우는 그가 도덕적 행위에 관하여 말할 때이다(롬 13:13; 살전 4:12).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함께 모이게 하였음을 보여 주거나 아니면 그것이 거짓임을 보여 주거나 둘 중 하나일 것이다. 결국, “하나님은 무질서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다]”(살전 14:33)라는 사실을 보여 주어야 할 것이다.고린도에서의 혼란스런 예배는 교회 내에서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복음 전파를 저해했다. 불신자들이 진리를 이해할 수 있는 것조차 막았다. 어느 부모든지 극심하게 혼란스런 유아원에 자기 아이를 두고 떠나지 않을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이 말하며 질서를 따르지 않는 무질서한 예배에 불신자들이 올지를 염려하며 이와 유사한 주장을 한다. 그는 “믿지 않는 자들이 와서 너희를 미쳤다 하지 아니하겠느냐”(23절)라고 결론을 내린다.처음에, 우리는 이에 반대하는 주장을 하고 싶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령이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키지 않는 한, 그가 예배에 공감하지 못하거나 복음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단순히 불신자가 ‘비영적’인 상태에 놓이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예배에서 사랑이 없는 것을 인지하게 되는, 더 중요한 차원의 문제이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락방에서 하신 말씀이 아닌가?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우리의 예배는 하나님과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사랑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영역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가 되게 해 주시기를 하나님께 간구한 예수님의 기도에서 명백하게 드러난다(요 17:11, 21-23). 예배의 모든 부분은 우리가 서로 연합하고 있음을 반영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예수님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셨고, 사셨으며, 이를 완성하기 위해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이 우리가 그분의 제자임을 보여줄 것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은 두 가지 상반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의 예배가 연합성보다 개별성을 반영하게 되면, 우리를 바라보는 세상에게 예수님이 사람들을 함께 모으신다는 사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바울이 사용한 용어를 사용하면, 고전 14:16)가 모여서 예배드리는 성도들이 그리스도를 하나같이 고백하고, 하나같이 노래하며, 하나같이 기도하는 것을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그리스도가 전파하신 말씀 가운데 그들에게 언급하시는 것처럼 그들의 기도 속에서도 연합됨을 잘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외부자가 예배의 단일성을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서로 다른 사람들을 모아 거룩한 목적과 거룩한 사랑으로 연합시키시는 모습을 외부자가 볼 수 있어야 한다. 바울은 “사랑은 언제까지나 떨어지지 아니하되”(고전 13:8)라고 상기시킨 후에, 계속해서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11절)고 말한다.다음번에 예배드리는 장소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명령을 기억하라.출처: www.ligonier.org원제: Orderly Worship as a Witness to the World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주님
사랑
증거
바울
기독교적사랑
대명령
자유로운예배
거짓 선생에 관한 놀라운 진실
by David Mathis
2019-11-05
거짓 선생의 가르침을 들은 적이 있는가? 이 질문은 굳이 던질 필요도 없다. 누구나 다 들으니까. 문제는 ‘과연 그 메시지를 듣고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분별할 수 있는가’이다. 텔레비전, 라디오, 팟캐스트, 뉴스 등을 보고 듣거나 또는 다른 누군가와 깊은 교제를 나누게 될 때 지금 현대 사회에서는 누구라도 예외 없이 거짓 가르침에 쉽게 노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신이 거짓 목소리를 아예 분별하지 못한다면, 그건 당신이 거짓에 노출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당신이 아예 거기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를 통틀어 대중에게 영향을 미치는 데에는 언제나 엄청난 에너지와 노력이 필요했다. 말씀을 손으로 필사했거나 말씀을 전파하는 선생들은 걷거나 말을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땐 자동차도, 비행기도 또 인쇄기술이나 웹사이트 또는 페이스북도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 모든 거짓 선생들은 다 트위터 계정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거짓 가르침을 전파하기가 훨씬 쉬워진 지금 세상에서 어떻게 해야 수많은 거짓 선생들 중에서 참된 선생을 분별할 수 있을까? 거짓 선생들이 일어난다거짓 가르침은 존재할 가능성이 있는 게 아니라, 확실하게 우리 주변에 있다는 사실을 먼저 인지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 들리는 잘못된 가르침에 놀랄 필요가 없다. 예수님과 사도들은 거짓 선생들이 무수히 생길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장담할 정도였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했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을 미혹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막 13:22-23; 혹은 마 24:24).마찬가지로 바울은 에베소 교회 장로들에게 경고했고(행 20:29-31), 또 그의 제자 디모데에게도(딤후 4:3-4) 거짓 선생들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말했다(딤전 4:1과 딤후 3:1-6). 우리가 이런 부분에 여전히 의구심을 가진다면, 이런 경고에는 베드로까지 가세해서 그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벧후 2:1).자, 거짓 선생들이 이미 교회 역사를 통해서 숱하게 생겼다는 사실에 놀랄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그건 지금 우리 시대에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들의 교리와 삶을 자세히 보라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의 말씀에서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아주 놀라운 사실은 거짓 선생들의 삶이 그들의 거짓 가르침을 증명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가르침에서만 거짓이 아니라, 삶에서도 거짓이다. 교리적인 오류 아래에는 비록 매우 교묘하고 속기 쉽지만 언제나 윤리적인 타협이 숨어있다. 그런 타협은 보통 하룻밤 사이에 밖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드러나는 데에는 시간이 걸린다. 그러나 반드시 나오게 되어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15-20에서 우리에게 대비할 것을 알려주셨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느니라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눅 6:43–44도 참조).예수님은 두 번이나 반복해서 말씀했고, 우리는 그걸 놓치면 안 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처음에 보면 예수님의 경고가 명확하고 단순한 것 같지만, 우리가 다 알고 있다시피 나무는 하룻밤 사이에 열매를 맺지 않는다. 그러나 결국에는 열매가 드러나기 마련이다. 윤리적인 타협도 마찬가지이다. 개인적인 방에서 속삭임으로 시작한 것이 조만간 지붕 위에서 외치는 소리로 바뀔 수 있다(눅 12:3). 그렇기에 바울은 지도자들에게 그들이 지도하는 사람들과 그들의 가르침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그들의 삶에 대해서도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행 20:28; 딤전 4:16). 의심의 여지없이 단번에 거짓 선생을 알아볼 수는 없다. 그들의 개인적인 삶을 가까이에서 살펴볼 수 없는 경우에, 또 교리적 타락이 행동을 통해서 공개적으로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 그들이 바른 선생인지 거짓 선생인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시간이 말해 줄 것이다. 그들의 열매로 알게 될 것이다. 그들이 이룬 사역의 양과 숫자의 열매가 아니라 사역의 특징과 인내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서 드러나는 열매로 알게 될 것이다.돈, 성, 그리고 권력이 주는 매력거짓 가르침의 열매에 대한 예수님의 경고가 새삼 어떻게 확장되는가라는 측면에서, 베드로후서 2장을 특히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짓 가르침에 관해서는 거의 이야기하지 않은 베드로가 타락한 삶에 관해서는 긴 설명을 하고 있다. 1절과 3절에서 ‘멸망하게 할 이단’과 ‘지어낸 말’이라는 용어를 통해 잘못된 가르침에 대해 일반적인 언급을 하고 더 이상 그 문제를 다루지 않는다. 나머지 모든 구절은 다 삶에 관해서이다. 핵심적인 내용으로 다음 세 가지를 요약할 수 있는데, 이 세 가지는 모두 다 가르침이 아닌 성품과 행동에 대한 것이다. • 교만 또는 주관하는 이를 멸시함(10절) – 1절,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12-13절과 18절).• 정욕, 보통 성적인 죄를 의미함 – 2절, “여럿이 그들의 호색하는 것을 따르리니”(10, 12-14 그리고 19절).• 탐욕, 보통 돈과 물질적인 취득을 바람 – 3절,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14-15절). 베드로는 반복해서 탐욕, 정욕, 교만, 즉 다른 말로 하면 돈과 섹스 그리고 권력을 묘사한다. 역사를 통틀어서 볼 때, 거짓 선생들의 공통점은 그릇된 어떤 특정 교리가 아니라 지금 말한 세 가지 영역 중 어딘가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도덕적 타락이다.이 세 가지를 다른 방향에서 보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거짓 선생들이 저지르는 오류는 자신에게 짓는 죄, 타인에게 짓는 죄 그리고 하나님을 향해서 짓는 죄라는 것이다. 탐욕으로 인해 그들은 양 떼를 물질적 필요를 위해 필요한 존재로 전락시킨다. 정욕으로 인해 그들은 성적 범죄를 저지른다. 베드로후서 2장에서 말하듯이 간음, 간통 또는 동성애를 통해서이다. 교만으로 인해서, 그들은 “주관하는 이를 무시한다”(벧후 2:10), 그리고 더 큰 권위, 이 세상 모든 권위를 다스리는 하나님을 무시한다.모든 거짓을 다 공부할 수는 없다거짓 가르침이 단지 그들이 말하고 쓰는 게 아니라 삶에 관한 것이라면, 오늘날 교회는 어떻게 그런 거짓 가르침을 분별하고 폭로할 수 있을까? 온라인이나 큰 집회를 통해서 설교를 듣는 건 어렵지 않지만, 그들이 개인적으로 어떻게 사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지 않은가? 거짓 가르침에 대한 가장 좋은 방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알고 말씀대로 살고 또 말씀을 즐거워하는 지역교회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지역교회의 리더가 거짓 가르침에 대해서 책임지도록 하는 것이다. 먼 곳에 있는 지도자가 나를 돕는 것은 힘들겠지만, 내가 다니는 지역교회 지도자라면 훨씬 더 현실적이고 확실하게 나를 도울 수 있다. 우리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책임을 져야 한다.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높게 평가해서 일반 그리스도인과 전혀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목사는 성도들과 함께 있어야 한다. 목자는 양과 똑같이 냄새를 맡을 수 있어야 한다. 목자도 다름 아닌 양무리 사이에서 살고 생활하는 존재이지 무리에서 떨어진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 자신도 똑같은 양이라는 사실을 먼저 자각한 목사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그런 자각 이후에 자신을 리더이자 선생으로 인식하는 목사가 되어야 한다. 우리에게는 위대한 사역을 일궈낸 지도자라는 명성보다 천국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적힌다는 사실에 더 기뻐하는 그런 목사가 필요하다(눅 10:20). 예수님이 그의 교회를 지키신다그러나 그걸 알고 있는가? 우리는 거짓 가르침에 대항한 좋은 시스템을 가질 수도 있고 또 지도자의 삶과 교리를 제대로 검증하기 위한 시스템도 얼마든지 갖출 수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라도 인간이 만든 이상, 절대 완전한 시스템이 없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사실이 거짓 가르침에 대한 말씀 중에서도 절정에 해당하는 베드로후서 2:9이 제공하는 달콤한 확신이다. “주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실 줄 아시고.”가르침이 아무리 왜곡되어도, 비윤리적인 지도자 때문에 아무리 교회가 부끄러움을 당해도, 우리 주변이 아무리 어둡게 느껴져도, 복음을 지키고 또 복음에 따른 가치있는 삶을 사는 게 아무리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우리에게는 이 지속적인 위대한 희망이 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주님께서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신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은 가장 위대하고 진실한 선생이실 뿐 아니라, 우리를 죄로부터 구하고 또 우리 영혼을 파괴하는 잘못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주시는 가장 위대한 구원자이다. 교회가 아무리 소수가 되어도, 우리가 아무리 무력하게 느껴져도, 진정한 가르침과 진정한 삶의 모델이 되신 바로 그분은 우리 삶과 영혼을 지켜주신다. 하나님이 노아를 지켜주셨듯이(벧후 2:5) 또 롯을 구하셨듯이(벧후 2:7), 주님되신 예수님은 그의 경건한 백성을 거짓된 삶을 사는 거짓된 선생의 거짓된 가르침으로부터 지켜주신다. 원제: The Surprising Truth About False Teachers 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연관 주제 함께 읽기 ▶ 이리 식별법 ▶ 이리를 조심하라: 거짓 교사의 세 가지 징후▶ 그래도 목사를 포기하지 말아야 할 때
근현대교회
거짓선생
놀라운진실
교리
삶
돈
성
권력
매력
베드로후서2장
고난받는 이에게 결코 해서는 안될 말들
by Gavin Ortlund
2019-11-01
성경의 모든 다양한 인물들 중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화나게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헤롯은 선지자의 머리를 베었고, 유다는 스승을 배신했지만, 엘리바스와 빌닷과 소발은 성경 구절로 친구 욥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욥이 실제로 잃은 것들에 대해서는 욥기 1-2장에 간단하게 나오지만, 그 다음에 나오는 친구들과의 대화는 35장에 걸쳐서 계속 이어진다. 나는 어느 것이 욥을 더 괴롭게 했을까 생각해 본다. 처음에 겪은 상실의 고통일까 아니면 나중에 이어지는 위로하러 온 친구들의 추궁일까? 욥의 위로자들의 문제는 그들이 이단자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들이 말하는 것의 대부분은 사실이다. 하지만 욥과 대화를 할 때 지배적으로 사용한 그들의 도덕적 세계관이 문제이다. 그리고 고난의 원인을 죄에서 거슬러 올라가며 추론하는 방식으로 찾아내도록 욥에게 강요하는 점이 문제이다.욥의 친구들을 비판하기 쉽지만 솔직해 보자. 우리는 모두 그들과 같을 수 있다. 사실, 욥과 같이 고난을 받고 있는 사람이 우리 앞에 있으면, 복음을 지지하던 우리의 마음도 마치 리트머스 시험지로 테스트하듯이 반응한다. 우리가 은혜를 믿든지 인과응보의 신념을 가지고 있든지 상관없이 말이다. 고난은, 우리가 현실의 문제를 바라보며 평소 적용해 온 신학을 겉으로 드러나게 한다. 고난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에는 특별히 네 가지 방식으로 조언하는 일을 삼가야 한다. 이 네 가지 방식은, 욥의 친구들처럼,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식으로 이미 잿더미에 앉아 있는 이들의 머리 위에 불이 붙은 석탄을 붓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1. 처음부터 하나님의 주권을 언급함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며]”(롬 8:28), 하나님은 악을 선으로 사용하실 수 있다(창 50:20)고 가르친다. 하지만, 성경적이라고 하여 그것을 언급하는 것이 고난당하고 있는 사람의 상황에 항상 알맞거나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요셉은 고난을 당하고 여러 해가 지나고 나서야 하나님이 그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셨다고 말했다. 그가 고난을 당하고 있는 중이 아니었다. 요셉의 분노와 좌절감을 상상해 보라. 그의 형들이 우물가에 모여 용기를 북돋우며 “걱정하지 마라. 하나님은 이것을 선을 위해 사용하신다”라고 소리치는 말을 음침한 우물 바닥에서 듣고 있을 요셉의 마음 상태가 어떠했을까를 짐작해 보라. 이와 유사하게 바울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가르친 후에 얼마 안 되어,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라고 조언한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기 전에,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일을 확실히 실천해 보자.2.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이 사용하신 이야기로 시작함 다른 사람의 경험을 우리 자신의 경험과 연관시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안목으로 세계를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성숙을 나타내는 한 가지 표지는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보려 하지 않고 진실함으로 다른 사람의 상황과 처지를 알기 원하는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두 가지 이유로, 고난을 겪는 사람과 함께할 때 중요하다. 첫 번째로, 각 사람의 이야기는 모두 다 다르다. 우리 집이 불타서 무너져 내린 후에 하나님이 더 좋은 집을 주셨을 수도 있고, 친구의 배신으로 우리가 더 좋은 결과를 얻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타락하고 혼동스런 세상에서, 당신이 고난받은 후 경험한 그런 좋은 일이 현재 고난당하고 있는 당신의 친구에게는 죽을 때까지 전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떤 슬픔은 천국에 갈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에게 “네가 이 일로 즐거워하게 될 거야”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정말로 친구의 현재 상황이나 미래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 두 번째로, 우리의 이야기가 유사하더라도, 고난당하고 있는 친구가 그 이야기를 지금 당장 들어야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 친구의 이야기가 나의 것과 유사하여, 이야기해 주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면, “내 이야기를 나누는 일이 나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것인가 아니면 친구가 원하는 것인가?”라고 스스로 질문해 볼 필요가 있다. 최소한, 나의 이야기와 비교하기 전에, 나의 이야기와 미세하게 다른 점을 인지하며 친구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경청해야 한다. 3. 고난을 초래한 잘못을 최소화함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우리에게는 인과응보적으로 접근하려는 본능이 있다. 우리는 “그들이 좋은 의미로 그렇게 했을 거야” 혹은 “그것이 그렇게 나쁘겠어?” 아니면 “글쎄, 모든 갈등에는 양쪽에 잘못이 있는 거지”와 같은 말을 한다. 하지만 진실은 누군가가 정말로 좋은 의미로 그렇게 한 것인지 우리는 모른다는 점이다. 그들이 좋은 의미로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우리는 그것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는지 모른다. 어쩌면 그렇게 나빴을 수도 있다. 그리고 잘못이 항상 양쪽에 똑같은 비중으로 있는 것은 아니다. 때로 잘못의 비중이 80/20, 때로 100/0처럼 일방적일 수도 있다. 그것이 욥과 그의 친구들에 대한 하나님의 판결인 듯하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과 함께 앉아 있을 때, 그들에게 고난을 초래한 사람들의 죄를 최소화하지 말라. 변명하거나 얼버무리지 않고 사악함을 정직하게 알아차리는 것은 그들의 고통을 인식하고 가볍게 해 주는 생수와 같은 역할을 할 것이다. 4.위로와 자비를 무시한 채 품성 형성을 강조함신약 성경이 고난에 대해 강조하는 것이 있다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경건한 품성을 만들어 내기 위해 그것을 사용한다는 점이다(참조, 롬 5:3-5; 약 1:2-4). 그러나, 누군가가 고난을 겪고 있는 중일 때에는, 아마도 이 점을 강조할 때가 아닐 것이다. 신뢰 관계가 세워지지 않았을 때에는 특히 그러하다. 이 점이 언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면, 위로와 자비의 말과 함께 균형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극심한 고난의 경우, 아예 어떤 말도 하지 말거나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좋을 수 있다. 이것은 우리가 실행하기 쉽지 않은 부분이다. 엘리바스가 본능적으로 “누가 참고 말하지 아니하겠느냐”(욥 4:2)라고 하듯이, 우리도 뭔가를 말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아파하고 있는 친구는 아마도 우리의 해석이나 견해보다는 우리의 사랑과 그냥 옆에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필요할 것이다. 그들의 고통을 풀어 주거나 혹은 이해해 보려고 시도하는 것보다, 고통 중에 있는 그들과 그냥 함께 있어 주는 것이 훨씬 더 도움이 된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그 어둠에 속으로 들어가 보라. 거기에서 그 순간에, 그 공간에서, 그 고통을 그들과 함께 견디어 보라. 아슬란의 눈물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고난에 대해 예수님처럼 될 수 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이렇게 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생의 삶에서 우리를 고난으로부터 보호하지도 않으시고, 우리 삶에 어둠이 내려앉을 때 기분을 좋게 하는 말을 하지도 않으신다. 단지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이 오면 우리와 함께 하겠다고 약속하신다. 사실 우리는 우리의 마음이 상했을 때 예수님을 가장 진실하게 발견한다.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 하시고”(시 34:18).“상심한 자들을 고치시며”(시 147:3).“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사 61:1).C.S. 루이스의 나이아 연대기 시리즈 2편인 ‘마법사의 조카’(The Magician’s Nephew)에 디고리라는 한 소년이 아슬란을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그의 어머니는 아프고, 그는 아슬란의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만, 두려워한다. 루이스는 그 장면을 감동적으로 묘사한다.“그때까지 그는 사자의 커다란 앞발과 그 위에 난 거대한 발톱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 그는 절망에 빠진 채 사자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가 본 광경은 그의 평생 그 어떤 것 못지않게 그를 놀라게 했다. 굽혀진 사자의 몸과 황갈색의 얼굴은 그의 얼굴 가까이에 있었고 놀랍게도 사자의 눈에는 반짝이는 큰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 눈물이 자신의 것에 비하면 너무 크고 눈부셔서, 디고리는 순간적으로 사자가 자기 어머니에 대해서 틀림없이 자신보다 더 슬퍼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아슬란이 말했다. “내 아들아, 내 아들아, 내가 알아. 슬픔은 위대한 거야. 이 땅에서는 너와 나만 아직 그것을 알고 있단다. 우리 서로에게 잘 하자.” “내가 알아”라는 말 속에 얼마나 많은 위로의 말이 함축되어 있는지. 그리스도는 큰 고난을 받았으므로, 고난을 받고 있는 자들을 공감하신다. 그는 불의의 재앙에 시달린 궁극적 욥이며, 형제들에 의해 배신을 당한 궁극적 요셉이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짊어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정의의 심판을 온전히 받아들였으며, 지옥과 버림받음의 깊은 속으로 가라앉으셨다. 누구도 이보다 더 큰 고난을 받지 않았고, 받을 수 없었다. 그러한 깊은 사랑은 고통의 순간에 우리의 필요를 채울 수 있다. 욥의 친구들과 같지 않고, 예수님과 같이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을 우리가 공감할 수 있기를 소망한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How Not to Help a Sufferer번역: 정은심
교회생활
고난
욥
위로
자비
눈물
주권
공감
종교 개혁,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
by John Piper
2019-10-22
근본적으로 개신교의 종교 개혁은 죽음과 죄의 상태에 있는 우리가 얼마나 무력한 존재인지에 대해 로마 가톨릭교회와 벌인 논쟁이다. 종교 개혁자들은 우리를 죽음의 상태에서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오직 은혜’이고 우리의 형벌을 대신 받고 우리를 위한 완전함을 이루실 수 있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뿐이라 믿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고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졌다는 이 두 가지 기적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선물이었다. 우리 중 누구도 결코 그것에 대해 공로를 주장하거나 그것을 자신의 능력으로 얻어낼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이 ‘솔리 데오 글로리아(soli Deo Gloria),’ 다시 말해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에서 완결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1. 하나님의 영광이란 무엇인가?‘거룩’의 기본 의미는 평범한 것으로부터의 “구별”이다. 그 정의를 모든 평범한 것들로부터 무한히 “구별”된 하나님께 적용해 보면, 하나님은 무한히 “독특한,” 말하자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하고 가장 완벽한 다이아몬드 같은 분이심을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을 관통하는 지배적인 본질은, 이렇게 무한히 귀할 뿐 아니라 무한히 순수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독특성이 피조계를 통해, 또한 역사 및 구속 안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으로서 퍼져 나간다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의 본질적 가치와 아름다움과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가는 것’이다. 필자가 하나님의 “셀 수 없는 완전함”이 지닌 아름다움이 밝게 퍼져 나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이 하나님의 권능의 영광과(살후 1:9) 하나님의 은혜의 영광(엡 1:6)을 말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은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다이아몬드를 구성하는 면들이다. 하나님이 자신의 속성들 중 하나라도 잃으신다면 그분의 영광은 감소하는 것이다. 사실, 그렇게 되면 그분은 더 이상 하나님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 말할 때, 나는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과는 다른, 즉 하나님이 가지고 있는 어떤 것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 ‘자신’의 가치, 아름다움, 위대함이 밖으로 밝게 퍼져 나와 그분이 구속하신 백성들이 그것을 영적으로 목도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 2. 왜 하나님의 영광이 모든 것의 목적이 되어야 하는가?하나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이 영원 전부터 있었던 하나님의 계획이었다. 이것이 모든 피조계, 역사, 그리고 구속을 향한 그분의 목적과 디자인이었다. 하나님의 영광은 그분의 창조하심, 만물을 붙들고 다스리심, 그리고 구원하심을 통해 드러난다.시편 기자의 고백인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가 보여주듯 하나님의 영광은 창조의 목적으로부터 시작되었다. 피조물들 자체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사야는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사 43:6–7)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에 적용된다. “모든 일을 그의 뜻의 결정대로 일하시는 이의 계획을 따라 [중략]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1–1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롬 11:36). 그렇게도 광활한, 아무도 살지 않는 은하(銀河)들이 셀 수도 없이 존재하는 이 우주에서 점 하나처럼 작은 지구에만 사람이 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우주가 사람이나 피조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주기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이 광대한 우주를 보며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대한 분인지를 조금이나마 느끼게 하고자 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광대하심을 완전히 느끼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나님은 경건치 못한 ‘솔리 데오 글로리아’들을 창조하셨고, 붙들고 다스리실 뿐 아니라, 그들을 의롭다 칭해 주신다. 3. 하나님은 의롭다 칭함 받은 그분의 백성들을 통해 어떻게 가장 충만하게 영광을 받으시는가?나는 기독교 희락주의자다. 나는 ‘하나님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할 때 하나님은 그분이 의롭다 칭하신 백성들로부터 최고의 영광을 받으신다’고 믿는다. 또한, 웨스트민스터 교리 문답이라는 종교 개혁 신앙의 위대한 요약본을 만든 목사와 신학자들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썼을 때 내 생각과 똑같은 것을 표현한 것이라 믿는다. 그들은 우리의 목적이 그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라고만 하지 않고, 그분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라 했다. 또한 그들은 영화롭게 함과 즐거워함이 독립된 두 목적이 아닌 하나의 목적임을 명시했다. 그들은 바울이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빌 1:21)라고 한 말의 의미를 깊이 고찰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최상의 아름다움과 가치가 가장 밝게 빛날 수 있는 길은 바울이 그리스도 안에서 최고의 만족을 누리는 것이었다. 심지어 고통 중에서도,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것이 죽음이라고 해도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당신의 영광 안에서 무한한 만족을 누리길 바라셨다. 우리가 행복해지는 것이 온 피조계의 궁극적 목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무한히 영광스러운 하나님, 온 우주의 궁극적 가치이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지극한 기쁨이 되실 때에 우리는 비로소 그분이 우리의 최고의 보화가 되심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4. 하나님이 모든 영광을 받으신다면, 우리도 영화롭게 될 것인가?우리가 “솔리 데오 글로리아(하나님께만 영광을)”라고 말할 때 우리가 의미하는 바는 사람이 영광의 조각을 조금이라도 누릴 때 그 영광은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아 궁극적으로 만물의 원천이요 목적인 하나님의 영광만을 향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성경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될 것이라고 놀랍도록 분명하게 말한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8).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 3:2).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롬 8:30).우리를 당신의 영광으로 영화롭게 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왜 그토록 확고한가? 이유는 간단하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기쁨, 즉 하나님이신 그분의 기쁨이 우리 안에 있어 우리의 기쁨도 충만케 되도록 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그분의 목적이라 말씀하셨기 때문이다(요 15:11; 17:13). 하지만 747 점보제트기 엔진을 자그마한 스마트카(Smart Car: 독일제 2인승 극소형 자동차-역주)에 장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나님의 기쁨이라는 화산(火山)을 아직 영화롭게 되지 못한 내 영혼의 찻잔에 담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한히 영광스러운 기쁨은 영화롭지 못한 사람들 안에 담을 수 없다. 우리는 영화롭게 ‘될 것이다.’ 그것만이 우리가 하나님 안에서 가장 만족하여 하나님 한 분만이 우리 안에서 최고의 영광을 받으실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다(요 17:24–26).나는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예수님께 이끌리어 믿음으로 그분을 영접하길 바란다. 우리가 지금껏 얼마나 죄인 된 모습이었든, 그를 믿는 우리 모두는 이제 어떠한 인간적인 공로도 아닌 ‘오직 믿음의 방편을 통해,’ 다른 어떤 희생이나 의를 근거로 삼는 것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하나님의 호의를 누릴 자격이 없지만 ‘오직 은혜’로 의롭다 칭하심을 받았고, 마침내 하나님 한 분만을 우리 삶의 최고의 보화로 즐거워하게 될 그 날, 그리하여 모든 영광이 궁극적으로 하나님 한 분께만 속한다는 것을 드러내게 될 그 날을 고대하는 것이다. 출처: www.9marks.org 원제: The Reformation and the Glory of God번역: 이정훈
역사
종교개혁
하나님의영광
목적
의롭다
솔리데오글로리아
기독교희락주의자
#의롭다칭함
교회 개척을 망치는 5가지 위험 요소
by Phil Newton
2019-10-18
당신 안에 잠복하고 있는 위험 요소를 알아차리기 전에는 교회 개척을 하지 마라.왜 새로운 교회가 요청되는 이때에 위험 요소부터 거론할까? 그 이유는,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가 단지 개척 사역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경건한 삶을 사는 데 실패했을 경우, 그리하여 그 사역을 잘 마무리하지도 않고 그리스도를 다시 영화롭게 하기 위한 걸음을 떼지도 않고 머뭇거릴 경우, 그로부터 주어지는 슬픔이 말할 수 없이 크기 때문이다.물론 어느 목회 사역에나 위험 요소는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그 위험성은 자신만의 계획을 가지고 스스로의 생각을 의지하며 특별한 지인들을 곁에 두기 쉬운 교회 개척자들에게서 더 크게 나타난다. 새로운 사역을 시작하며 사람들을 모아 그룹을 짓고 세부적인 일까지 함께 하며 교회를 세우고 확장시키는 현장에는 늘 그런 위험 요소가 잠복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교회 개척은 위대한 일이면서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개척을 잘하기 위해서는, 서로가 격려하고 충고하며 사역의 과정에서 책임감을 잃지 않도록 붙들어 주는 자세가 필요하다. 따라서 교회 개척자라면, 자신의 사역을 무너뜨리고 인생을 몰락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 위험 요소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워야 한다.1. 교만듣는 사람마다 칭찬하는 설교, 열기가 식지 않는 선교, 타인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상담, 그리고 새로운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비전 제시 등 그 모든 활동은 목회 사역에 엄청난 유익을 주면서도 교만에 빠져들게 하는 원인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고 설교를 형편없이 하거나 전심을 기울이지도 않고 선교에 동참하거나 아무런 비전도 없이 목회를 지속할 수 있을까? 당연히 그럴 수는 없다. 여기서 요점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설교나 상담을 성공적으로 하였다면, 그 이유는 당연히 하나님이 그 사역에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이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경고한다.“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 16:18).“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약 4:6).교회를 개척한 사람의 마음은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교만에 특별히 취약한 상태에 있다. 그 결과, 스스로의 영광을 위해 힘써 투쟁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자신이 사역을 얼마나 잘하든, 이 고백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눅 17:10).우리는 오직 십자가만을 자랑해야 한다. 우리의 죄악이 너무도 막대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그 값을 치르기 위해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언제나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 십자가가 크게 보이는 삶에는 교만이 발붙일 곳이 없다.2. 권력32년 전 교회를 개척했을 때, 나는 수많은 잘못을 저질렀다. 대개 그 문제들은 너무나 큰 권력이 나에게만 집중되었기 때문에 발생했다. 당시 우리 교회에는 행정 조직이나 당회와 같은 공식적인 의사 결정 모임이 전혀 없었다. 그저 어떤 일을 수행할 때나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나 혼자서 그 모든 과정을 주관했다. 그래서 나는 우리 교회의 모든 일은 내 머릿속에 있다는 농담을 하곤 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게 농담이 아니라 사실이었다.권력이 넘치면, 이런 생각이 유혹으로 찾아올 수 있다. ‘나는 내가 원할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내가 원하는 일을 다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교회가 마치 나를 섬기며 나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존재한다는 비뚤어진 개념을 갖게 된다. 그러다 결국에는 자멸에 이르는 길을 간다.이러한 모습은 진정한 권력을 지녔으면서도 이기적인 목적을 위해 그 권력을 사용하지 않으신 예수님과 얼마나 다른지 모른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벧전 5:2-3).교회에서 권력은 흔히 담임 목사에게로 집중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경건한 장로들 여럿이 모여 그 문제를 점검해야 한다. 또한 담임 목사는 그와 같은 장로들의 조언을 경청하고 그들이 지혜를 모아 전달하는 뜻에 복종할 뿐 아니라 하나님이 그 교회를 돌보라고 세우신 장로들을 겸손한 태도로 섬겨야 한다.3. 책임 의식의 결여큰 권력은 책임 의식의 결여를 가져온다. 즉 스스로 책임을 질 만한 목회 구조가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담임 목사의 동기나 행동의 결과를 지켜보고 있는 장로들의 심사를 거치지 않고도 독단적으로 의사 결정을 내리는 일을 하게 된다. 그 결과 전혀 통제받지 않는 생활을 할 수 있다.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하나님께 쓰임받는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은 실패에 노출되어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결과가 어떠한지 여러 소식을 통해 자주 접한다. 그들은 오직 자기 명예에 대해서만 책임 의식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머지않아 넘어지고 만다.왜 우리는 흔히 심각한 책임 의식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여기는 것일까?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먼저는 죄악으로 기울어지는 우리의 성향에 대해서는 너무 적게 생각하기 때문이고, 다음으로는 죄악에 저항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교회를 개척하여 나름대로 하나님 나라에 기여했다는 성취감을 느끼면서 다른 이들이 빠지는 함정에 자신은 걸려들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런데 그게 바로 사탄의 전략이다. 우리 모두는 철저한 죄인이다. 오직 은혜로만 살 수 있다. 따라서 신앙인으로 올바로 행하고 목사로 제대로 지도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조력자로 두신 모든 사람의 손길이 필요하다. 그리하여 경건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자신의 약점을 대면하며 정직하게 인정하는 책임 의식을 갖춰야만 이 길에서 미끄러지지 않을 수 있다.4. 이상주의마음에 큰 뜻을 품고 교회를 개척한 목사가 교회 개척에 관한 신학교 수업을 듣고, 교회 개척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읽으며, 교회 개척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깊은 감명까지 받게 된다면,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까? 바로 이상주의에 빠지게 된다. 이는 매우 당연한 결과이다.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만일 여기저기서 제안하는 A, B, C의 사역을 하게 된다면, X, Y, Z의 결과가 나타나겠지.’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은 누군가가 교회 개척으로 성공했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고생이나 실패를 하게 됐다는 이야기는 별로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하려는 사역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생각만을 한다. 또 어쩌면 자신이 관심을 갖는 몇 가지 분야에 대해서는 박식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회 개척이란, 목회 사역이다. 따라서 목회 세계가 어떠한지를 알지 못하고 이상적인 생각만 가지고 개척하게 된다면, 뜻밖의 결과를 맞이하게 된다.내가 기억하는 어떤 유능한 청년이 있다. 그는 신학교에서 교회 개척에 대한 마음을 품게 되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 갖가지 이상적인 생각을 하며 사람이 많이 모이는 지역으로 가서 교회를 개척했다. 그러나 스스로 무덤을 판 격이 되고 말았다. 이내 탈진해서 그만두게 되었으니 말이다. 만일 그가 개척하기 전에 다른 교회에 가서 일정 기간만이라도 사역하며 훈련을 받았다면, 교회 개척에 대한 이상주의를 버리고 사역을 지속할 수 있었을 것이다.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도 서서히 사역을 익혀 가도록 제자들을 훈련하셨다. 바울도 동일한 방법을 따랐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9장에서) 열두 명을 파송하신 후에 (누가복음 10장에서) 다시 칠십 명을 파송하셨다. 그리고 그 칠십 명이 돌아와 귀신들을 쫓아냈던 일로 한껏 들떠 있을 때, 마치 세상을 정복한 듯한 그 마음을 이렇게 가라앉히셨다.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눅 10:20). 우리도 이상주의를 경계해야 한다.5. 분주사역은 많은 에너지를 요구한다. 더군다나 교회 개척은 모든 일을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기에 더욱 힘들다. 교회 개척자는 모임을 조직하고 계획을 세워 장소를 모색해야 할 뿐 아니라 그 자리를 청소하며 예배를 준비하고 설교와 상담과 심방 등 지속되는 목양으로 쓰러지기 직전까지 일을 해야 한다. 이는 교회 개척과 목회 사역에 수반되는 일상생활이다.또 교회 개척자는 자신을 도와줄 아무 사역팀도 갖추지 못할 수 있다. 그저 자신과 대화하기 원하는 새로운 사람들만 곁에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많은 시간을 심방하고 연락하는 데 사용하게 된다. 그리고 주일 예배를 준비하는 과정에 아직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매주 긴장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체력만 허락된다면, 그야말로 하루 24시간을 교회 사역에 쏟을 것이다.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결국 주님과 가족과 교회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도 잘못을 범하게 된다. 만일 교회 개척자가 다섯 사람을 더 심방하기 위해서 가정을 돌보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또한 더 많은 모임을 구성하고 소그룹을 인도하려다가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은 소홀히 하게 된다면? 그리고 열 명의 방문자를 교회에 정착시키기 위해 그들과 함께 커피를 마시면서 정작 기존의 성도를 목양하는 일에는 관심을 잃게 된다면? 더 나아가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이 참석할 수 있는 모든 컨퍼런스와 미팅을 찾아다니면서도 정작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추구해야 할 신앙의 성장은 이루지 못한다면?물론 교회를 개척한 목사는 힘을 다해 오랜 시간 일해야 한다. 하지만 그 에너지를 기반으로 삼아 교회를 세우려 한다면, 교회는 흔들리는 토대 위에 서게 된다. 열심히 노력하며 부지런히 수고하되 모든 일이 주님의 사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니 다른 이들도 사역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고, 또한 그 사역이 확장될 수 있도록 그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더불어 계획을 세울 때는, 우리 자신의 마음과 곁에 있는 가족 그리고 우리에게 맡겨진 양 떼를 반드시 살펴야 한다.우리는 우리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없다. 결코 그런 마음으로 애쓰지 말기를 바란다. 그 대신 오직 하나님만 이루실 수 있는 사역을 성취하기 위해 그분의 은혜를 의지하며, 날마다 지혜롭게 계획을 세우고 현명하게 일하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5 Dangers That Can Wreck Church Plants (and Planters)번역: 장성우
교회개척
교만
권력
책임의식
이상주의
분주
축복 기도의 목적
by Aaron L. Garriott
2019-10-14
영화가 끝날 때 보면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다. 영화가 끝나면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이 올라올 때까지 앉아 있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교통 체증을 피하려고 영화관을 일찍 떠나는 사람들도 있다. 많은 교회들이 영화관과 같이 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려고 노력하며, ‘중요한 부분’이 끝나면 편할 때 떠나도 되는 교회 문화를 인정하는 상황 속에서, 이러한 모습은 놀랄 만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예배가 끝나지 않았는데 일찍 떠나게 되면, 영적인 영양실조의 상태에 놓인다. 왜냐하면 예배의 정점인 축복받는 기회를 놓치게 되기 때문이다. "축도를 말하는 것인가? 목회자가 손을 들고 드리는 마감 ‘기도’ 말이다. 그것은 영화 끝에 올라오는 자막과 같은 것 아닌가?" 만일 이런 생각이 든다면, 아마도 우리가 축도의 특성과 목적을, 가장 좋게 말해서, 하나님의 특별한 이별 인사쯤으로 잘못 이해했을 가능성이 크다. 역사적으로 축도는 교회 예배의 가장 핵심 요소였다. 초대 교회에서 중세를 거치고, 청교도들을 거쳐 종교 개혁자들에 이르기까지, 목회자가 손을 들고 회중에게 축복을 선언하는 것이 예전적 전통이었다. 축도는 탄원 기도와 함께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로 예배 의식의 양 끝을 세우는 전통이었다. 이 관행은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공적 예배의 모범에 성문화되어, 목사는 “엄숙한 축복으로 회중을 해산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 관행은 어디에서 왔고 어떤 목적이 있는가?하나님은 레위 지파의 제사장직을 출범시킨 후에 아론과 그의 아들을 축복함으로 이 절차를 시작하셨다.“아론과 그의 아들들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지니라 하라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민 6:23-27).이러한 선언으로, 새로 형성된 회중은 소유물을 가지고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전에 주님이 그들에게 그것을 약속하셨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성경에 나타난 가장 초기의 사례에서 보면, 축복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말씀이며, 목사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말씀이고, 신앙을 지탱하고 강화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첫째, 축복 기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좋은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수단을 통해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났다는 사실을 확증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는 기도나 찬가와는 다르다. 기도나 찬가는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인 반면, 축복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기도와 찬가가 북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축복 기도는 남쪽 방향을 향하고 있다. 둘 다 크리스천의 경건 생활에 중요한 요소이지만, 교회의 예배에서는 구분되어야 한다. 존 오웬(John Owen)은 아론의 축복 기도에 대해 논하면서, “제사장에게 이르는 이 말은 제대로 된 기도는 아니었지만, 권위를 가진 축복 기도였고,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복을 내리려 제정하신 하나의 표시였다”라고 말한다. 역사적으로 축도할 때 눈을 뜨고 손을 펴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선언을 받는 식의 자세로 하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축복 기도를 선언하는 사람이 양손을 든 자세로 해야 한다는 사실은 아론(레 9:22)과 그리스도(눅 24:50)의 예에서 살펴볼 수 있다. 둘째, 축복 기도는 하나님 말씀을 설교하거나 가르칠 수 있는 자격이 맡겨진 사람에 의해 선언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사역은 주로 아론의 후손에게 주어졌다(대하 30:27; 히 5:1-5). 신약성경에서 이 책무는 장로로 임명받은 사람들에게 맡겨졌다. 따라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축복 기도를 선언하는 권위는 (올바른 상황과 올바른 형식으로) 목회직에 근거를 두고 있다. 임명받은 장로들은 위임받은 권위로, 이미 사실인 것, 즉 그분은 그들의 하나님이며 그들은 그분의 백성이라는 사실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선언한다. 하지만 이것이 그 회중에게 이미 사실이라면, 그들은 왜 그 축복 기도를 받아야 하는가?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며, 기도의 형식을 담아 축복을 선언하는 세 번째 목적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을 강화하기 위함이다. 이는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있고 우리에게 복을 내린다고 확증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믿음으로 받아져야 한다. 주님은 축복의 선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그 축복의 말씀은 목회자들의 선언을 통해 우리 머리 위에 내려 주심으로 전달된다. 즉, 축복 기도는 하나님의 복 주심이 그분의 백성들에게 전달되는 방편이고 형식이다. 주님은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목회자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복 주심을 실질적으로 선언하는 것이다. 존 칼빈(John Calvin)은 아론의 축복에서 제사장은 “불분명한 속삭임으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 기도의 형태로 크게 소리를 내어 선언하도록 명함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설교했고, 백성들은 그것을 믿음으로 이해했다고 알고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계속해서 축복을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제사장들에게 두어, 그들이 그것을 그분의 선한 뜻과 그때부터 진행되는 구원에 대한 약속으로 매일 제시할 수 있다”라고 했다. 그러면 축복 기도는 믿음으로 이해되고 감사와 확증으로 받아지는 것이다.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우리는 약속으로 보증된 곳을 기다리고 있다(요 14:3; 엡 1:14). 우리 지친 순례자들은 항해하는 중에 우리를 밀어 줄 바람이 불도록 정기적으로 이러한 선언이 필요하다. 아름답게도, 아론의 축복 기도는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들과 함께 거하시며(계 21:3) 그분의 이름이 우리 위에 놓이는(계 14:1) 곳에서 완전해진 새 언약으로 절정에 이른다. 정기적인 선언을 통해 우리는 복되고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가 영원히 우리의 운명임을 기억하게 된다. 그리고 나서 그리스도는 그의 신부에게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실 것이며, 우리는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우리의] 이마에 있[을 것이다]”(계 22:4). 출처: www.ligonier.org원제: The Benediction of God번역: 정은심
영성
예배
축복기도
목적
축도
하나님
레위지파
존칼빈
아론
웨스트민스터총회
신비주의 속으로
by Peter A. Lillback
2019-10-08
14세기에 꽃을 피운 신비주의는 지금까지도 교회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신비주의는 인간의 영혼이 이 땅에 있는 동안에도 얼마든지 하나님이라는 존재와 개인적으로 또 즉각적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신비주의는 무엇보다 특별한 체험을 통해 수준 높은 영적 상태에 도달함으로 하나님에 대한 직접적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한다. 그렇다고 신비주의가 기독교에만 있는 건 아니다. 세계 도처에 흩어진 각종 종교와 철학 속에서도 신비주의를 발견할 수 있다. 기독교 신비주의는 그 기반을 성경에 두고 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디오니소스 위서(Pseudo-Dionysius)를 쓴 저자와 8세기에 디오니소스 위서를 번역한 요하네스 스코투스 에리우게나(John Scotus Erigena)와 같은 신플라톤주의(Neoplatonic philosophy)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다. 신비주의의 전성기였던 14세기는 도미니크회 소속 신학자인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 요한네스 타울러(Johannes Tauler) 그리고 하인리히 수소(Heinrich Suso)와 같은 신비주의 신학자들을 배출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에 나온 신비주의 저서, ‘독일 신학’(Theologica Germanica)이 마르틴 루터에게까지 어느 정도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다. 네덜란드의 신비주의자인 게르하르트 그루테(Gerhart Groote)는 공동생활형제단(Brothers of the Common Life)을 세웠는데, 그 단체가 종교 개혁의 선구자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영국의 신비주의자 중에는 여성인 노리치의 줄리언(Julian of Norwich)이 있다. 그녀와의 동시대 여성 신비주의자로는 또 시에나의 캐더린(Catherline of Siena)과 아빌라의 테레사(Teresa of Avila)등이 있다.원인들교회사의 이면에는 “마술적”이라고 부를 수 있는 비현실적인 특징이 존재했는데, 그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비정통적인 전통이다. 바로 이런 배경에서 기독교 신비주의가 출현했다. 금욕주의, 성례적 미신주의, 성경의 알레고리적 해석 등이 바로 여기에 포함된다.기독교 신비주의의 시초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금욕주의이다. 금욕주의는 물리적 세계를 극단적으로 거부하는 사상인데, 다른 기독교 신비주의와 마찬가지로 신플라톤주의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두 번째로, 미신주의는 그레코-로만(Greco-Roman)에 뿌리를 둔 신비 종교의 영향 속에서 발전하였으며, 미트라(Mithras)와 이시스(Isis)를 섬기는 사교(Cult)가 여기에 해당한다. 이런 사교들은 특별한 의식(rituals)을 통해서 신비적이고 마술적인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강조함으로 사실상 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믿음은 결국 성례, 순교자의 성물, 교회의 영웅들 등에 대한 기독교적 관점에까지 그 손길을 뻗쳤다. 세 번째로, 알레고리적 성경 해석은 성경을 4중으로 해석해야 한다는 믿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스도 중심의 역사적인 관점 대신, 성경에는 비밀스러운 의미가 숨어 있다는, 그리고 그것은 형이상학적이며, 또 종말론적인 지식이라는 주장이다.그럼 특별한 체험을 통해 의식을 새로운 단계로 나아가게 하려는 욕망을 부추긴 원인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성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베드로후서 1장 4절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들을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로 만들었다고 말씀한다. 글의 전체 맥락에서 벗어나서 이 구절을 읽을 때, 얼마든지 지나치게 영적으로 해석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다. 또한 변화산에서의 변화 사건(마 17:1-13), 바울의 삼층천 경험에 대한 묘사(고후 12:2), 계시록에 나오는 요한의 환상 등을 잘못 해석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성경적 기독교 신앙을 비기독교 신앙, 이교의 신비적 체험 및 철학 등과 혼합하는 위험에 빠진다. 또 하나 잊지 말아야 할 맥락은, 기독교 신비주의가 출현한 시대가 중세라는 사실이다. 당시에 만연하던 페스트와 그에 따른 높은 사망률, 이단 박해, 십자군 전쟁과 부유한 교회 등은 신비주의를 더 부추기는 요인이 되었다. 왜 그랬을까? 기독교 신비주의는 위압적이고, 적대적이며, 또 무엇보다 혼란스런 세상에서 한발 벗어나도록 하는 “도피처”(retreat)를 제공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는 주관적이고 내적인 체험을 강조함으로 외부 세계로부터 아예 벗어나게 하거나 또는 외부 세계를 아예 무시하도록 만들었다.훈련과 기법세속을 떠나 수도원 생활을 하는 수도원 운동은 14세기까지도 그 영향력이 줄지 않았다. 이런 수도원 운동이 확산되면서 수도원은 수행자들에게 명상과 같은 엄격한 경건 생활을 강조함으로 신비적인 체험을 더 증진시킬 수 있도록 했다. 예를 들어, 신비주의자들은 종종 금식과 순례를 행했고,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급진적인 형태로 극단적 금식, 수면 금지, 자기 태형 등을 시행했다. 종교적 황홀경을 추구했던 신비주의자들은 정상적인 정신 활동(primacy of the mind)을 거부하고, 끊임없이 반복하는 기도를 통해 정신을 비우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다.신비주의는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알기 위해 종종 다음의 두 가지 방식을 취했는데, 첫 번째는 하나님의 ‘아니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이고, 두 번째는 하나님의 ‘그러하심’을 통해 하나님을 이해하려는 시도였다. 두 방식 모두 다 본질적으로 사색, 명상을 통한 방식이었고, 그 어떤 것도 성경 말씀에 기초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 자신의 내적이고 비이성적인 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찾으려 했기에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알려는 행위는 종종 가설에 그쳤고, 더욱이 성경 말씀에 기반을 두지 않았기에 문제를 일으킬 가능성이 적지 않았다. 신학자들14세기 신비주의자들은 신비주의에 대하여 자신들만의 고유한 접근법을 갖고 있었다. 동방의 그레고리 팔라마스(Gregory Palamas)는 하나님을 찾는 방법으로 기도를 통한 내적 잠잠함(withdrawal)을 주장했다. 그는 아타나시우스(Athanasius)가 말한 금언을 참고했다. “하나님은 인간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도 하나님이 될 수 있다.” 이 금언 속에는 범신론(pantheism)과는 다른, 인간 신성화의 형태가 담겨있다고 팔라마스는 주장했다. 한마디로, 팔라마스의 주장은 하나님은 하나님으로 그대로 계시고, 인간이 하나님의 신적 에너지에 동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는 특별한 자세를 취하고 신비한 문장을 암송하는 등, 여러 신비주의적 수행 형태를 발전시켰다.반면, 마이스터 에크하르트(Meister Eckhart)가 생각한 하나님에 대한 즉각적인 지식관에 의하면, 인간은 처음부터 신성을 가질 수 있는 존재였다.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영혼의 불꽃”(spark of the soul)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믿었다. 그 불꽃은 인간으로 하여금 얼마든지 영원한 진리를 명상하게 함으로 그 결과, 인간의 “영혼 속 하나님의 탄생”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에크하르트는 자아와 이 세상을 포기할 때에만 이런 신성을 소유하는 게 가능하다고 말했다. 하나님과의 연합이 이루어진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생명과 그 신적 본성이 주는 영광을 체험하게 되고, 그 연합을 통해서 영혼은 신적 본성에 참여하여 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지식은 차마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오로지 신적 연합을 통해서만 이해할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는 주장했다. “황홀한 체험”(beatific vision)은 언제나 아주 짧았고, 영원한 상태가 되어야만 비로소 영구적으로 지속될 수 있다고 에크하르트는 주장했다. 교황은 나중에 이런 에크하르트의 범신론적 주장을 정죄하였다.중세 신비주의의 유산신비주의 신학은 중세기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았고, 오히려 그 이후에도 교회 역사를 통해서 끊임없이 다시 나타났다. 로욜라의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Loyola), 오시그의 카스파르 슈벵크펠트(Caspar Schwenkfeld von Ossig), 그리고 일부 영국 청교도들도 신비주의적 주장에 동참했다.신비주의는 다양한 개신교 전통 속에서도 찾을 수 있을 뿐 아니라, 개신교는 종종 신비적인 체험에 대해서 개방적인 모습을 취하기까지 했다. 경건주의, 퀘이커, 오순절 운동, 은사주의 운동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슐라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는 종교적 체험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오토(Rudolf Otto),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제임스(William James), 유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Martin Buber), 프랑스 철학자 피에르 떼이야르 드 샤르댕(Pierre Teilhard de Chardin) 등이 주도하는 20세기의 신비주의는 종교적, 철학적 경계를 뛰어넘는 양상을 보였다. 이들은 하나같이 14세기 기독교 신비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위험에 대비한 안전장치기독교인이라면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 신비적인 체험에 자리를 내어 주도록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된다. 말씀만이 우리에게 계시된 유일한 진리이며, 누군가가, 설혹 그가 14세기 사람이든지 아니면 오늘날의 사람이든지, 어떤 개인적인 체험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려 한다면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의심해야 한다. 마음을 “비우고” 무아지경 속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마음과 뜻과 생각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가르침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전인격을 통해 예배를 받으시는 존재이다. 과도함, 범신론, 인신 공양적 미신주의, 범신론 그리고 그 외의 여러 신비주의가 내포하고 있는 위험성으로부터 우리를 지켜줄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가르친 성령과 말씀 간의 도저히 끊을 수 없는 연결성, 말씀과 성례의 성경적 결합, 그리고 겸손한 순종과 믿음 안에서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길 외에는 없다. 우리 자신을 포함해서 인간의 타락한 품성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 거짓 가르침이기에, 성경은 영을 시험하라고 경고한다. 구원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감정, 선택, 사상과 환상은 결코 구원으로 이어질 수 없다. 모든 진리와 지혜는 오로지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선물이기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자 한다면 우리의 삶은 언제나 그리스도 중심적이어야 하고, 오로지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만 기초를 두어야 한다.그러므로 성경적 기독교, 특별히 종교 개혁적 의미에 근거해서 신앙을 회복한다는 것은 무절제한 신비적인 체험을 거부하고, 오로지 성령님의 능력을 통한 그리스도의 정경적 계시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인간의 본성이 타락했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내적 충동을 영적 안내자로 삼는 대신, 오로지 말씀과 성령님을 겸손하게 의지하는 훈련에 매진해야 한다. 묵상은 오로지 성경만을 바탕으로 이뤄져야 한다. 어떤 특별한 체험을 찾고자 한다면, 역사 속에서 하나님이 이미 행하시고 또 말씀으로 기록된 특별한 이적들을 참고하면 된다. 하나님을 알고 싶다면, 하나님에 대해서 알려 주는 성경을 알아야 하고(요 5:46), 사랑하는 아버지께 기도해야 하며, 예배와 성례에 참여해야 한다.마음과 목숨과 힘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눅 10:27), 예수님이 주신 큰 계명을 마음에 품을 뿐 아니라, 인간의 마음과 감정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된 말씀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로 인해 “내적으로” 변화되지 않고서는, 결코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할 수 없음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한다. 출처: www.ligonier.org원제: Into the Mystic번역: 무제
역사
중세교회
신비주의
수도원
원인
위험성
신학자
유산
개척교회 목사들의 인내심 배우기
by Jim Essian
2019-10-04
누군가 낙심은 목회 사역의 ‘직업 재해’라고 했는데, 맞는 말이다. 월요일이 특히 그렇다. 재미있게도 “삼위일체(Trinity)”라고 이름 지어진 공원에서,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다윗이 했던 식으로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라고 부르짖으며 낙심의 기도를 적어 내려가고 있었다. 포트워스(Forth Worth) 시내에 교회를 개척한 지 3년째 되던 때였다. 가까운 친구들이었던 핵심 멤버들이 교회를 떠나 버렸고, 아무리 노력해도 열매를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사역을 과연 계속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신장 결석, 대상 포진이 올 것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모르고 있었고, 그 고통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나는 몇몇 어려운 교회 권징을 다루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미 모든 것이 안정된 교회로 옮겨 가서 사역을 좀 더 “쉽게” 해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던 차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러한 낙심 속에서 나를 만나 주셨다. 그날 내가 적었던 일기의 내용은 이렇다. “하나님이 내게 이 교회를 개척하라고 부르셨을 때 그분은 내가 그저 멋있게 성공한 목회자가 되도록, 전혀 실패하지 않도록 계획하신 것이 아니다. 내가 하나님을 좀 더 필요로 하도록 하기 위해 나를 부르신 것이다. 고통과 낙심을 없애 달라고 기도하지 말자. 나를 당신 안으로 계속 밀어 넣으시는 그분의 은혜 안에서 기뻐하자.” 그날 이후로 나는 한곳에 정주하며 인내하고 오래 참는, 장기간의 목회에 내 자신을 드렸다. 인내를 위한 힘골로새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바울은 이상한 기도를 드린다.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인내할 수 있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의 영광의 힘을 따라 [중략]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중략]”(골 1:11). 그런데 정말 그런가? 우리가 참을 수 있기 위해서 정말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는 말인가? 바울은 ‘그렇다’고 답한다. 경건한 인내에는 하나님의 힘이 필요하다. 교회 개척의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흔히, 젊은 사역자들은 단기적으로 자신들이 해낼 수 있는 일을 과대평가하고 장기적으로 이룰 수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고들 한다. 내 생각에는 이것이야말로 사역에서 배워야 하는 가장 중요하고도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아닌가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성령이 주시는 오래 참음의 열매를 맺으며 나아간다(갈 5:22). 우리에게 인내가 없어 계속 회개해야 한다고 해도, 교회 개척자로서 우리들은 성령께서 오래 참음을 우리 안에 이루어 가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내게 교회를 개척하라고 주셨던 그 큰 확신을 기억한다. 하지만 ‘내 자신’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던 하나님의 음성만큼이나 분명했던 내 아내의 경고도 잊지 않고 있다. 정말이지, ‘인내’가 필요했다. 핵심 멤버가 채워지길, 출석 인원이 획기적으로 늘어나길, 그리하여 우리의 첫 교회가 당당한 모습으로 시작될 수 있도록 기다리던 순간들을 잊을 수 없다. 다윗은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시 27:14)라고 말한다. 오래 참음은 강력한 덕이다. 당신이 하든 하지 않든,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당신이 사역하고 있는 그 도시를 덮을 것이다(합 2:14). 하나님이 그분의 목적을 성취하시는 데 당신의 도움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므로, 걱정이라는 단어를 온 우주의 주권자이신 하나님께 쓰는 것이 적당한지는 모르겠지만, 하나님의 가장 큰 걱정은 당신이 더욱 예수를 닮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서 이루실 것이다(롬 8:29). 인내는 그 과정에서 반드시 자라야 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어쨌든, 바울이 심고 아볼로가 물을 주었으나 오직 하나님만 자라게 하실 수 있다면, 당신 역시 하나님께서 그리 하시도록 기다려야 한다. 그러므로 교회를 개척하는 목사들은 최소한 다음의 세 가지 면에서 인내를 배워야 한다. 1. 당신이 섬기는 성도들성도들이 죄로부터, 소비주의에 찌든 삶으로부터 벗어나 그리스도를 더욱 사랑하는 모습으로 자라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든다. ‘내 자신’도 성장하기까지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성도들은 곧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양 무리라는 사실을 망각한 채(벧전 5:2) 사람들에 대해 실망해 버리는 일은 매우 쉽다. 그러나 목회자는 오래 참음으로써 성도들을 섬기는 것이고, 예수님 역시 그들에게 향해 오래 참으신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리더들을 세우는 일에 있어서도 인내가 필요하다. 돕는 손길이 너무나 아쉬운 때이므로 어떻게든 빨리 리더를 세우고 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그러나 인내하라. 경솔하게 리더를 세운 후 뒷수습을 하는 것이 훨씬 어렵고 손이 많이 가는 일이다. 감사하게도 나는 사역 초기에 이것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배움을 가지고 라이언(Ryan)이라는 이름의 성도와 함께 아주 천천히 나아갔다. 자원봉사자로 시작한 라이언은 리더가 되었고, 그 후 스탭, 동료 장로가 되더니, 결국에는 교회 개척자가 되었다. 이 모든 일에 6년이 걸렸고, 라이언은 우리 교회로부터 10마일 떨어진 곳에 건강한 교회를 개척했다. 이제 나도 사역을 나눌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이다. 당신은 리더들의 성장이 느리면 힘들어하고 항상 모든 것을 빨리 진행시키려 하는 사역자인가? 오래 참으라.2. 당신의 비전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비전을 구축하려는 교회 개척자들을 봤다. 그렇게 하지 말라. 나는 내가 개척하는 교회의 성도들은 대부분 예전에 운동 꽤나 했던 그리 똑똑치 못한 사람들, 다시 말해 나 같은 사람들일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개척한 교회에 대학생들과 예술가들을 많이 보내 주셨다. 성령께서는 은사로 힘을 얻고, 복음의 열정으로 불이 지펴졌으며, 각자의 경험으로 단단해진 사람들을 심으신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당신이 생각하고 원하는 것 이상으로 당신의 교회를 이루어 간다. 우리 같은 목회자들은 사람을 상대하므로, 우리의 모든 소망과 교회를 위한 모든 계획은 오래 참음의 흔적을 지녀야 한다. 개척 3년 차에 접어들었을 때, 또 하나의 교회를 개척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좌절했던 적이 있다. 에드 스텟처(Ed Stetzer)는 우리의 교회 개척이 계속 재생산하는 개척이 되어야 한다고 했지만, 재생산은 커녕 짝짓기도 할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계속 기도하고 비전을 가꾸어 갔을 때, 하나님께서는 결국 지금의 자리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교회를 개척할 수 있게 해주셨다. 내 안에 오래 참음이라는 열매를 6년에 걸쳐 기르신 하나님의 역사였다. 3. 당신 자신골프를 칠 때면 ‘난 골프 잘 못쳐. 그러니 좌절할 필요도 없지’라는 생각을 꼭 하곤 한다. 마찬가지로 당신 역시 교회 개척에 재능이 없을 수 있다. 그러나 좌절하지는 말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포기하시지 않기 때문이다. 때로는 불을 통해, 때로는 복을 통해, 예수님은 당신을 진흙으로 만든 그분의 그릇으로 빚어 가신다. 예수님은 목사인 ‘당신’을 오래 참으신다(딤전 1:16).인내하는 가운데 힘을 다해 당신의 설교를 준비하라. 자신의 리더십을 위해서도 인내하고 끊임없이 배우라. 또한 당신의 성품을 위해서도 인내하며 죄와의 전투를 멈추지 말라. 복음은 우리를 자유케 하여 인내하게 하고 힘을 다해 일하게 한다. 복음의 은혜는 바울로 하여금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게 하였다(고전 15:10). 만일 백 명쯤 되는 사람들에게 나에 대해 물어본다면 “오래 참음”이라는 말이 그리 많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확신하는 것은, 오래 참음의 훈련이 주는 가장 달콤하고도 멋진 열매는 바로 코람 데오(coram Deo), 즉 하나님의 얼굴 앞에 있는 것이다. 목회자여, 이 모든 일 가운데 주를 바라고 기다려라. 강하고 담대하라. 주를 바라는 자들은 수치를 당하지 않기 때문이다(시 25:3).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원제: 3 Ways Church Planting Will Test Your Patience번역: 이정훈
교회개척
인내심
오래참음
성도
비전
코람데오
목사
초대교회의 차별 대우 해결법
by Kent Butterfield
2019-09-24
초대교회 당시에도 사회적으로 부유하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보다 더 좋은 대우를 받곤 했다. 야고보 사도는 그런 문제가 일어나는 상황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약 2:1-4).그리고 이렇게 말씀했다.“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약 2:8-9).차별 대우에 대한 초대교회의 해결책흥미롭게도 예수님이 부르신 열두 사도 중 네 명은 어부였고 한 명은 세리였으며, 나머지는 제자로 부름 받기 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려져 있지 않다. 어쨌든 주님은 그처럼 ‘교육 받지 못한’ 제자들을 부르셔서 온 세상에 교회를 세울 촉매제와 같은 일꾼으로 사용하셨다. 제자들의 사역은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성령의 역사,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메시지로 이루어졌다.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된 교회가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거쳐 로마 제국 전역으로 확장되는 아름다운 과정을 그리고 있다.그런데 그 시작 과정에서 교회를 거의 분열시킬 뻔했던 한 가지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공동체는 깊은 상처를 받게 된다. 바로 불공평하게 사람들을 섬기는 차별 대우의 문제가 발생했던 것이다. 이 문제로 인해 사도행전 6장에 기록된 내용처럼 헬라파 과부가 교회에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는다.“그 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매일의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하니”(행 6:1).당시 헬라파 성도들을 경시하는 태도가 의도적으로 발생하진 않았겠지만, 히브리파 과부들은 교회에서 많은 관심을 받는 데 비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헬라파 과부들은 그렇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러한 차별 대우가 교회 안에서 발생하자, 결과적으로 소외되는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문제에 대해 당시 교회가 취한 해결책은, 믿음이 충만한 사람 일곱을 선택하여 그 소외된 과부들의 필요를 돌보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래서 그 일곱 사람에게는 오늘날의 집사와 같은 직분이 주어져 가난하고 아픈 사람들을 섬기며 하나님의 권속들을 돌보고 다음으로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그 손길이 미치도록 했다(갈 6:10).모든 사람이 지닌 가치교회는 모든 사람을 받아 주는 주님이 세우신 공동체이다. 거기서 우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최우선적으로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받는다(막 12:30). 바로 이 주님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형제와 이웃을 향한 사랑이 흘러나오게 된다(요일 4:21). 하나님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으신다. 은혜 언약 안에서 누구도 편애하지 않으신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다른 사람들을 평가할까?우리는 누군가에 대해 성급히 판단하며, 그 사람의 가치를 속으로 가늠한다. 보통 재능이 많은 교사라든가 돈이 많은 교인 또는 아이들이나 지인들을 많이 데리고 나올 수 있는 젊은 가정이 교회에서 높은 가치를 지닌 부류로 평가된다. 그러나 시간을 투자해서 돌봐야 할 뿐 아니라 훈련도 많이 요구되는 사람들은 교회에서 즉각적으로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교회 안에 계신 나이든 과부나 홀아비를 한번 생각해 보라. 그들은 교회를 위해 가장 열심히 기도하거나 방문자들을 가장 따뜻하게 맞이하는 역할을 한다. 혹 70세가 넘도록 평생 주님을 따르며 그분의 영광을 위해 살아온 성도가 있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향해 어떠한 복과 변함없는 사랑을 베푸시는지를 강력하게 보여 주는 산 증인이 된다. 교회에 출석하는 아이들 가운데 신앙이 없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둔 경우에는 그와 같이 연로하지만 성숙한 신자의 모습을 보며 자라게 되는 것이다. 또 결혼하지 않은 지체들은 새로운 방문자의 친구가 되어 주거나 노인들을 섬기거나 혹은 시간을 내어 선교라든가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섬김은 그리스도의 몸이 성장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그리스도로 한 몸 이룬 지체로마서 12장은 우리가 저마다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지만, 모두가 그리스도의 한 몸을 이루는 지체들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니 손이 눈을 경멸하거나 귀가 발을 무시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를테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관에 박힌 보석들 같이 모두가 다 소중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사람이 왔을 때 그가 무엇인가 탁월한 일을 하여 교회 성장에 유익을 주리라고 판단하면 편애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또는 성공한 사업가라든가 학력이나 배경이 좋은 사람을 선호하고 훌륭하게 여기기도 한다.그러나 천국에도 과연 그런 편애가 있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혹 21세기에 살던 성도가 고대 사회에서 단조로운 생활을 하다가 온 성도를 만난다면, 그와의 사귐을 꺼리게 될까?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런 행동은 천국에 전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잘못된 행동을 지금 교회 안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따라 새롭게 빚어진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들의 지위나 배경이나 경력과 상관없이 모든 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는 우리의 소명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지상에서 사역하실 때 이스라엘의 모든 지역을 찾아다니셨다. 그분은 신자와 불신자 모두를 대상으로 일하셨다. 그리고 그 모든 자들에 대해 깊은 긍휼과 자비를 베푸셨다. 한 마디로, 사람들을 결코 차별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시지 않기 때문이다(갈 2:6).그 결과 우리 모두 하나님의 가족이 된 것이다. 이처럼 그분은 자신의 참 백성인 우리 각자를 진정으로 사랑하신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교회에 온 사람들을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 또 믿음의 가정에 속한 사람들을 편애하지 않고 사랑해야 하지 않겠는가?출처: www.ligonier.org원제: Favoritism in the Church번역: 장성우
역사
초대교회
차별
대우
가치
지체
은사
가족
헬라파
사랑
처음
이전
21
페이지
22
페이지
23
페이지
열린
24
페이지
25
페이지
다음
맨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