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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by 박삼영
2022-05-09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5-11.하나님을 닮은 인간성경에서 사람을 말할 때 하나님을 예로 들고, 하나님을 말할 때는 사람을 예로 든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들 때 당신의 형상(chellem)대로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뜻이다. 물론 겉모습보다는 속사람, 인간의 인격과 성품의 정체성과 수준이 하나님을 닮았다는 말이다. 라틴어 이마고(imago)가 이 형상을 번역한 말인데, 그렇다고 이미지를 닮았다는 정도의 말이 아니다. 굳이 돌려 말하자면 ‘이데아’라는 말이 더 가까울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은 사람을 당신의 수준처럼 매우 높여 주셔서 마치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듯이 말씀하셨다. 사실 사람이 그 정도는 아닌 줄 우리가 다 알지만, 성경은 사람을 높여도 너무 높여 하나님을 닮았다고 한다.반면에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할 때 사람과 같이 생겼다고 한다.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사람의 모습을 하신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의 마므레 상수리나무가 있는 곳에 살 때 찾아온 방문자가 하나님이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신 대표적인 모습이다. 구약만이 아니라 신약의 복음서에 나오는 ‘인자’라는 표현은 결정적이다. 예수님이 스스로를 가리켜 말씀하신 그 인자는 곧 사람의 아들(Son of Man)이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종래에는 이 인자를 가리켜 예수님의 인성을 말한다고 가르치는 해프닝이 있었다. 소위 예수님은 완전한 하나님이시고 완전한 인간이신데 신성을 나타낼 때는 하나님의 아들(Son of God)이라 하고, 인성을 나타낼 때는 인자(Son of Man)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얼핏 들으면 맞는 것 같지만, 사실은 틀렸다.예수께서 자신을 인자로 소개하는 것은 구약 전체를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지만, 특히 다니엘 7:13을 인용하신 말씀이다. 거기에 인자라는 말이 나온다. “인자 같은 이가 하늘 구름을 타고 온다”고 했다. 정확히 말하면 다니엘의 인자는 부정관사(a)를 써서 “한 사람의 아들(A Son of Man) 같은 이”가 하늘에서 구름을 타고 온다는 예언적 표현이었다. 물론 다니엘이 예언할 때만 해도 인자(키바르 에노쉬)가 정확히 누군지는 아직 몰랐다. 다만 누군가 앞으로 나타날 “어떤(a) 사람의 아들”을 가리키는데, 그 말씀이 다니엘의 메시아 예언이라는 맥락에서 보면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키는 것은 자명하다.[1]그런데, 신약에서 예수께서 자신을 가리켜 “인자”라 하신 것은 바로 다니엘의 인자에 대한 예언을 이어받아 인자를 자신과 동일시하신 말씀이다. “다니엘이 말한 인자가 바로 나다!”라는 뜻으로 정관사(the)를 붙여 그 인자(The Son of Man)라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께서 스스로를 인자라고 하신 것은 자신이 사람이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구름타고 오신 하나님이라 말한 셈이다. 인자는 바로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냥 대충 아무나 사람의 아들이라고 사용한 예는 성경에 없고, 오직 예수님만 인자라는 칭호를 사용하셨다. 이런 점에서 인자는 매우 특별한 용어로 성경이 말하는 인자란 역설적으로 예수님의 인성을 강조한 말이라기보다 예수님의 신성을 강조한 말이다. 이것을 소위 ‘인자 기독론’이라고 한다.비슷한 말이 또 있다. “주의 종”이란 말인데, 한국에서 목사들이 대충 자기를 주의 종이라고 사용할 때가 많다. 자기가 주님을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사야서의 맥락에서 보면, ‘주의 종’은 메시아요 구원자를 뜻한다. 이런 용어의 맥락을 모르고 자기 스스로나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이 말을 사용한다면, 이는 스스로를 엄청 높인 것이다. 자기가 메시아라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다. 하지만 이단이 아닌 이상 누가 자기를 메시아라고 높이려고 이 말을 사용하겠는가. 그냥 무슨 말인 줄도 모르고 사용하다 굳어버린 언어습관일 것이다. 특히 목사들에게 이런 칭호를 사용하는 것은 조심할 필요가 있다.하나님과 인간은 성경적으로나 신학적으로 나란히 간다. 하나님이 인간을 그렇게 높여 주셨다.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제네바를 중심으로 개혁교회와 신학을 주도한 장 칼뱅은 자신의 ‘기독교 강요’ 제1권 제1장 제1항에서 다음과 같은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우리가 가진 것의 모든 지혜, 곧 참되고 건전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Dei cognitione et nostri)으로 구성되어 있다.” 소위 하나님과 인간에 대한 이중 지식(Duplex Cognitio)은 서로 여러 줄로 연결되어 있기에 어느 쪽이 먼저며 어느 쪽이 다른 쪽을 만들어내는지 구별하기 어렵다고 덧붙인다. 생각해 보면 인간은 자기가 의지하며 살아가는 바로 그 하나님을 생각하지 않고는 누구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없다는 것인데, 피조세계의 모든 것이 그렇지만 더더욱 우리 인간의 존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왔기 스스로 자기 충족적인 독립된 존재가 될 수 없다. 인간의 모든 삶은 모든 것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말이다. 심지어 우리가 우리 자신의 죄악을 생각할 때조차도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일들을 생각하도록 되어있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을 아는 지식은 우리를 일깨워서 하나님을 찾고 우리를 이끌어 하나님을 발견하도록 해준다. 그런 이유로 칼뱅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 없이는 우리 자신을 바로 알 수 없다”고 했다.고대의 헬라 철학자 크세노파네스(Xenophanes)가 인간이든 동물이든 저마다 신의 형상을 문화상대성으로 묘사한다고 말한 점은 흥미롭다. 그에 따르면, 에티오피아인은 신을 들창코에 검은 피부로 그릴 터이고, 트라키아인은 신을 푸른 눈에 빨강머리로 표현할 것이다. 어느 문화든지 신의 형상을 묘사할 때 자기네 모습을 투사한다는 것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소나 말이나 사자에게 손이 있어 그 손으로 인간이 하듯이 그림을 그리거나 조각을 할 수 있다면, 말은 말의 형상으로 소는 소의 형상으로 사자는 사자의 형상으로 각자 신들에게 자신의 형상을 부여해서 그릴 것이라고 했다. 신을 확대된 인간의 기능과 능력을 부여해서 묘사하는 헬라의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을 비판한 것 치고는 제법 맹랑한 주장이 아닐 수 없지만, 매우 음미해 볼 만하다.그러면 왜 성경은 하나님을 사람으로, 사람을 하나님으로 나란히 표현했을까? 한마디로, 둘 사이의 인격적 소통을 위해 우리 인간을 높여 주신 것이다. 우리 피조물을 창조주와 비슷하게, 아니 나란히 고양된 위치로 높여 주셨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으로 여기진 않으셨다. 인격적 동질성은 있지만 인간의 피조물성은 여전히 두셨다. 인간은 하나님은 분명 아니지만, 혹시 하나님과 같은? 하고 생각하는 존재이다. 카를 바르트가 말한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인간은 인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고 하나님과 맘먹을 수 있는 동등한 수준도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이란 말은 하나님이란 말이 아니고, 인격적인 피조물로 특별한 대우를 받은 증거가 분명하다.인간은 에이전트인가 왕인가?그런데 최초의 인간을 비롯해서 이후의 모든 인간은 하나님이 자기 인간을 높여 주신 걸 모르고 살아간다. 인간은 원래부터 하나님과 엇비슷한 줄 알고 스스로를 과대포장한다. 인간은 수준과 지위에서 하나님과 맞먹으려 하고 하나님과 어깨를 나란히 하려 든다. 그러다 종종 하나님과 맞장을 뜨려고 애쓰는 실정이다. 아담이 그랬고 이후의 모든 인간이 계속 그랬다. 빌립보서 2장의 본문을 “그리스도 찬송시”라고 하는데, 이건 단순한 예수의 칭송만이 아니라 아담의 빗나간 자기인식의 심연을 전제하고 쓰였다. 예수님에 대해 말하는 내용은 단순히 십자가 사건의 주인공으로서의 예수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아담 이래로 구약의 모든 인간이 보여준 삶을 전제로 예수의 차별성을 드높이는 말씀이다.첫 사람 아담부터 모든 세대의 인간은 자신을 불러 높여 주신 하나님을 넘어서려는 반역을 저질렀다. 하나님은 인간을 동등한 수준의 지위와 높이를 부여하셨는데, 그래도 그는 여전히 피조물의 신분을 벗어난 건 아니었다. 그런데 인간은 하나님과 똑같아지길 원해서 손을 내뻗고 하나님의 소유에 해당하는 지위와 신분을 자기 것으로 움켜쥐고 말았는데, 바로 자기 인식의 그릇된 파행이 빚은 참사였다. 하나님이 자기를 높여 주셨다는 말은 하나님에 걸맞은 임무를 행하도록 하나님과 동등하게 대우해 주셨다는 뜻이고, 실제로는 동등한 것은 결코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데도 인간 피조물이 창조의 주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해 버렸다.바울은 빌립보서에서 아담의 타락을 암시하고 그 전제로 글을 썼다. 하나님과 동등하지 않지만 하나님이 비슷하게 높여주신 그 동등됨을 취해 버린 아담과 달리, 예수 그리스도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하여 반역이 아니라 순종을, 높아지는 것이 아니라 낮아지셨다는 것을 말한다. 아담이란 말은 사람이란 뜻이다. 원래는 ‘붉은 것’(adamah)이란 말로 땅의 흙을 가리켰으나 사람이 그 흙에서 창조했기 때문에 아담이라 했다. 원래 지구나 땅은 에레츠(eretz)라 하지만, 표피의 흙은 아다마라고 불렀다. 라틴어 사람의 기원도 흙이라는 휴무스(humus)에서 왔다. 거기서 영어 휴먼(human)이 나왔다. 다 흙을 뜻한다. 그런데 히브리어로 흙은 또 있다. 이쉬(ishi)라는 말인데 성경에서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다. 창세기 2장에서 인간은 남자와 여자로 구분되어 사용되었는데, 거기서 남성형 흙 이쉬와 또 거기에 여성형 어미가 붙은 이쉬-하(ishi-ha)가 나온다. 여자는 남자 이쉬에 여성형 어미 하(ha)를 붙여 이솨라 했다.그런데 히브리어 하(ha)는 여성형 어미뿐 아니라 방향격조사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은 그 의미를 더 분명히 밝혀 주는 단서가 된다. 다시 말해 여자가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에서 방향격조사가 붙으면 여자는 남자로부터 나왔다는 뜻이 되고, 그 방형의 의미로 여겨지는 남자로부터 또는 남자를 지향한다(intention)고 해도 잘 맞아떨어진다. 이런 남자와 여자의 어원적 형태는 고대 독일어를 거쳐 오늘날까지 독일어나 영어에 남아 있다. 고대 독일어에서 방향을 뜻하는 ‘보’(wo, 영어로는 where)가 남자(Man)에 붙어 여자(Woman, 이 경우는 접두어다)로 쓰였고, 이는 영어에도 그대로 남아 있다. 하여튼 사람과 관련된 모든 단어가 흙에서 나왔다는 걸 보여주는 이런 어원적 관련성은 매우 흥미롭고도 주목할 만하다. 흙이란 인간의 재질적인 기원을 보여주는데, 지구의 땅이나 우주의 별을 비롯해서 실바람에도 흔적 없이 날아가 버리는 먼지까지 다양하다. 시편은 이런 흙을 우리말로 번역할 때 ‘티끌’이라는 고상한 시적 언어로 번역했지만, 인간이 먼지와 같이 하찮은 존재라는 의미에는 변함이 없다.이런 먼지와 같은 피조물 사람을 하나님은 속절없이 높여 주셨다. 인간 스스로조차 정말 자기가 높은 줄 알고 살아갈 만큼 높여 주셨다. 그는 그 영광스런 고양된 위치를 감사하며 자기소임을 깨닫고 살아가야 할 터인데 그렇지 못하고 빗나가고 말았다. 인간은 자기에게 주어진 지위와 신분, 권한과 영광이 자기 스스로 만들어낸 것인 양 손에 움켜쥐며 살아갈 뿐 아니라 더 적극적인 탐욕을 발휘하여 확장하고 증대하려고 무슨 일이든 벌이느라 여념이 없다. 거창하게 역사나 문화속의 인류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나 자신으로서 인간 개인과 가정의 관계 속에서 양보나 배려가 아닌 갈등과 투쟁에 휘말리는 우리 모습을 말한다.빌립보서 2장은 이런 아담적 인간됨의 기원을 전제로 그 아담과는 정반대로 다른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얼마나 스스로를 낮추고 내주며 겸손하게 메시아로서 임무를 수행했는가를 칭송하는 시를 소개한다. 일명 “그리스도 찬송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본질이 같으신 분인데 (이 말은 그냥 하나님이라는 뜻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하여 군주처럼 군림하지 않고 종으로 성육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종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소명에 순종하여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의 비천함까지 내려가셨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다 실패했던 아담과 다르게 예수는 자신을 다 비우시고 내주심으로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회복하셨다. 우리는 남보다 더 낮은 자리로 스스로 자청해서 내려가기가 힘들어서 못하고, 그래서 십자가를 보기는 보아도 짊어지기가 그토록 힘든데 이런 십자가를 겸손하게 지신 예수님의 마음을 한번 품어 보라고 바울은 자신의 통찰을 나눈다.자, 보라. 예수께서 순종하신 결과가 어떻게 나타났는가? 그분은 주(kyrios)로 높임 받고 모든 피조세계의 모든 존재가 무릎 꿇어 절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왕 중의 왕의 보좌를 회복했다. 낮아짐으로 다스리는 권위를 회복하였다. 여기 낮아짐의 비밀이 있다. 우리는 낮아지고 싶어도 낮아진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런데 하나님이신 예수께서는 그걸 행하셨다는 것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하나님은 스스로 완전하시고 부요하시기 때문에 뭘 더 채울 수 있는 분이 아니니까 그 어떤 제약도 없이 영원하시고 무한하셔서 쉽게 낮아질 수 있는 반면에 인간은 부족하고 제한적이고 결핍의 존재이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떤 법칙적인 걸 말하기보다 바로 예수의 기독론적인 특성이다. 하나님은 스스로 자꾸만 뭔가를 더 채워야 배가 부르고 만족하며 안도하지 않으시고, 반대로 인간은 물질이 더 많아져야 하고, 권세가 더 높아져야 하며, 명예가 더 커져야 한다고 여긴다. 그러면서도 인간은 막상 그것들을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인간의 만족은 아주 일시적이고 상대적이라 계속해서 더 가지고 채우려고 할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절대적으로 다른 존재방식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 스스로를 내주며 비우실 수 있다면,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스스로를 더 채우려고 안달을 한다. 이렇게 아담(인간)의 움켜쥠에 비교해서 비움(케노시스)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접근하는 신학을 ‘아담-기독론’이라고 한다.인간은 왜 이기적인가? 심지어 루터의 표현대로 죄인이며 동시에 의인인 성도의 모임 교회조차도 때때로 이기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피조물의 존재방식 때문이다. 비록 인간이나 교회의 이기성을 정당화할 수 없을지라도, 하나님과 인간의 존재방식을 아는 것은 아주 중요하다. 인간은 아담 이후로 쭉 이렇게 살아 왔다. 그가 왕이나 제사장이나 장군이든지, 학자나 농부나 엔지니어든지, 누구나 이렇게 살아 왔다. 인간은 자기중심적이며 이기적인 동기로 살아 왔다. 그가 나이가 많은 노인이든지, 청년이든지 어린애든지, 여자든지 남자든지, 누구나 마찬가지로 그렇게 살아 왔다. 나를 내세우고, 나를 주장하고, 나를 채우며 살아가는 인간의 문제는 어느 한 시대나 어느 한 문화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인간 이기성의 해독제로 5절을 제시한다. “너희는 먼저 이 마음을 품으라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다.” 인간이 개인이나 공동체적으로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해독하려면 스스로를 비우고 내주고 희생하신 예수를 품을 때, 길이 열린다.모든 문학이나 철학이나 심리학이나 교육학이나 신화나 신학이 이와 관련된 인간의 문제를 다룬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모두가 ‘나!’라고 하는 자기중심성에서 시작되는데, 성경의 기원을 모르면 결코 해결되지 않는다. 인간은 피조물이면서 하나님 흉내를 내는 유일한 존재다. 그럴 만한 이유도 있다. 하나님이 그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셨고, 자연과 세상을 맡기셨다. 온 세상과 그 안의 다른 피조물들을 다스리라고 명하셨다. 그러니까 인간도 어떤 점에서는 하나님처럼 왕이다. 왕 노릇한다. 하지만,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타락한 왕은 원래 있어야 할 인간의 자리가 아니다. 이제 내려와야 한다. 바울은 그만 멈추라고 말하며, 비우라고 한다. 그냥 안 되니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한다.빗나간 왕의 소명하나님은 우리 모든 인간을 왕으로 부르셨다. 인간은 모두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있다. 맞다. 아담은 왕이었다. 하나님은 그에게 다스리고 정복하라는 권세를 주셨다. 물론 여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 원래는 왕이라 해서 무턱대고 군림하면서 다스리는 존재가 아닌데, 아담 이래로 인간은 그렇게 받아들였다. 인간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자기 마음대로 지배하라는 말이 결코 아니다.구약에서 왕이라는 말은 멜레크(melek)인데, 보냄을 받은 메신저 말레크(malek)와도 비슷하다. 왕을 뜻하는 또 다른 말 쇼페타(shopeta)는 복수 쇼페팀(shopetim)으로 구약 사사기의 제목으로 사용되었는데, 재판관들이란 뜻이다. 사사들은 왕처럼 재판을 하거나 재판해서 판결을 내리는 일로 백성들을 이끄는 왕이다. 그런데 재판관이나 왕은 어떻게 재판을 하냐면, 백성에게 귀 기울여 잘 듣는다. 피해자가 억울한 일이 없는지, 공평한지, 정의로운지, 이런 기준으로 판단해야 했다. 왕은 백성이나 지배하는 대상이 억울하지 않도록 문제를 풀어 주거나 해결해 주어야 했다. 그런 왕을 올바른 왕 또는 재판관이라 했다. 여기서 올바르다는 왕의 기준은 다른 말로 의롭다거나 정의롭다고 하는데, 히브리어로는 째다카(tzedaqa), 미슈파트(mishpat)이다. 재판은 정의롭고 공평하게 해야 한다. 왕은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으로 다스려야 하기 때문이다.처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세상을 지배하고 다스리라고 하셨을 때, 세상의 다른 피조물의 이름도 지어 주고 보호하고 섬기라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의를 본받아서 의롭게 다스리라는 말이다. 세상을 보호하고 가꾸며 이끌라는 말이다. 이것이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소명이다. 다른 말로 왕의 소명이다. 그런데 아담 이래 어떻게 되었는가? 왕으로서 인간은 다른 인간과 세상에 대해 완력을 사용하고 유린하며 정복하는 방향으로 달려갔다. 실제로 모든 왕을 보면, 저마다 무력을 키워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약탈하고 제국을 만들겠다고 난리를 피우지 않는가?성경이나 세상의 역사가 다 똑같다. 처음부터 빗나간 세상이 되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아담처럼 에덴에서 부름 받는 것이 아니라 이제 거꾸로 세상에서 부름 받는다. 우리는 이미 세계-내-존재로 살다가 새로운 삶으로 부름을 받는다. 낙원이라는 에덴 정원에도 뱀이 있었지만, 우리의 세상이라는 정원에도 뱀은 있다. 우리도 아담처럼 왕으로 부름을 받지만 의로운 왕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 교만이라는 자기중심성의 뱀이 우리를 노리고 있기에 이 세상은 아름답지만 소명을 순종하기엔 위험하다.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쉽지 않다.우리나라 사람들은 자기경험을 내세우는 고집이 강하다. 자기주장이 센 편이다. 특히 이런 성향은 한국 남자들이 운전할 때 네비게이션을 따르지 않는 걸로 나타난다. 자기 생각과 판단을 따른다. “내 생각에는 이 길이 맞다.” “내가 보기에는 그냥 가도 된다.” 때로는 교통규칙 위반도 서슴지 않지만, 그렇다고 생각보다 죄의식은 가지지 않는다. 그 대신 “내 판단이 신호등만 못하랴.” 적반하장에 뻔뻔스럽다고 말할 수 있지만, 문제를 삼는 쪽이 깐깐하 것이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여긴다. 비록 교통법규 준수율이 OECD 국가에서 특히 많이 떨어지긴 하지만, 그들은 결코 법을 어기며 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아의식이 강해서 스스로 판단할 뿐이다. 그렇다고 중앙선을 가로질러 가거나 인도로 차를 몰고 가면서 내 찻길이라고 우기는 서쪽 이웃나라에 비하면 선진 교통문화라 여기지만, 여전히 “내 생각에는 괜찮지!” 싶은 곳은 어디든지 유턴이나 파킹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내 생각에는”(In my opinion)이란 말은 토론할 때 주로 사용하는 의견 개진의 관용어다. “너는 그렇게 생각하냐?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이런 표현을 할 때 사용하는 논리적인 겸손을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걸 교회에서 회의할 때도 습관적으로 사용한다. 이를 테면, 목사나 장로가 당회나 제직회에서 이런 말투를 사용한다고 한번 생각해 보면 어떨까? 그러면 자기 생각을 드러낼 수는 있지만, 성경이 중심이 되거나 하나님의 뜻이 중심이 되는 안건은 없어지고 인간중심의 모임이 되고 말 것이다. 물론 교회에서 말할 때는 “내 생각에는”이라고 말하기보다 “성경을 보니까” 이런 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인간이 자기 생각을 앞세우는 이 새로운 전통은 데카르트 이후에 보편화되었다. 이전까지는 “전통에 따르면” “교회에 의하면” 하는 말을 했지만, 데카르트는 새로운 삼단논법을 제시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는 데카르트가 인간의 자기 생각이 자기 존재를 결정한다는 의심의 방법론에 대한 명제다. 무엇이든지 회의를 하고 모든 것을 의심해야 된다는 것이다. 가령 2+3=5라는 수학은 내가 있든 없든 상관없이 맞는 답이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이런 수학에서도 모든 것을 속일 수 있는 악마가 있을지 모르니 의심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며, 의심하고 있는 자기 자신의 존재만큼은 그대로 있다는 걸 확인한다. 결국 생각하는 자기 자신만 남더라는 이 말은, 잘 살펴보면 자기중심성을 강화시킨 명제에 지나지 않는다. 안 그래도 주관적인 인간을 지극히 주관적으로 만들어버렸다.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주관과 객관으로 구분해서 생각하는 문화가 더 뿌리 깊게 정착했다. 서양이나 동양이나 마찬가지다. 이제 인간은 주객 대립의 도식을 통해서 세상을 바라보는 게 전부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생겼는가? 이원론이 여기서 도식화하고, 하나님이 사고의 전제에서 사라졌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가 주체 곧 주인이 된다고 여긴다. 주관이냐 객관이냐를 따지는 것이 전부고, 하나님이 원하시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의로운 기준을 따라가야 한다는 생각을 갈수록 할 수 없게 되었다. 내가 제일 잘나간다는 주체성만 강화되었다.우리끼리 누구의 생각이 맞느냐고 시비하는 대신,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 생각하는 것은 이제 인간의 안중에서 멀어졌다. 교회에서조차 하나님의 말씀이 매사의 중심을 좌우하는 위치에서 사라지는 대신 “내 생각에는” 한다면, 누가 하나님의 생각을 대신 할 수 있을까? 자꾸만 자기중심성만 강조하고, 이기성만 강화시키는 방향으로 가고 말뿐이다. 이제 여기서 멈춰야 한다. 판단을 멈추고, 내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봐야 한다. 원래 세상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돌아가게 되어 있으니 그걸 인정해야 한다. 나만 바꾸면 된다. 내 생각을 리셋하면 된다. 그러기 위해, 바로 자기를 내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신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한다. ‘코기토’하지 말고, 의심하지 말고, 나의 존재가 교회와 세상을 위해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아담과 같은 존재인 우리는 “내 생각”을 주장한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을 생각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소유나 명예나 권위를 취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성부 하나님의 뜻을 존중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대신 세상을 취하고 하나님과 겨루어 왕 노릇까지도 주장하는 삶에 익숙하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은 예수님을 하나님과 동등 되신 분으로 소개한다. 예수께서는 스스로를 비우시고 내려오시고 낮아지셨다. 스스로 인간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시고 십자가의 고난과 부끄러움의 자리까지 나아가셨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 죄인이 되셔서 죄인이 치러야 할 죄의 값을 치르는 자리까지 낮아지셨다는 말이다. 하나님이시기에 가능한 일이지만, 바울은 여기서 매우 특이한 동사를 사용한다. 바로 둘째 아담 예수를 첫째 아담에 비하여 그의 성육신을 소개하면서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문장에 사용된 ‘취한다’는 동사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 취한다는 동사, 하르파그모스(harpagmos)는 신약성경에 단 한번 나오는 용어로 훔친다(plunder) 또는 강탈한다(robbery)는 말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것을 훔쳐 세상에 죄가 들어왔지만, 예수께선 아담과 달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음으로써 세상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문제는 우리가 여전히 아담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소유를 탐내고 취하고 훔친다는 점이다. 심지어 교회조차도 때로는 어리석은 이중적 신분을 가장해서 하나님의 소유인 세상을 스스로 재단하고 잘라내고 훔친다. 교회가 십자가의 길을 걷어가지 못하는 모습은 바로 세상을 훔친 증거가 아니고 무엇이랴. 특히 한국 교회는 아담의 전형적인 후예로 자신들을 부르시고 높여준 진정한 영광의 주인에게 순종하기는커녕 창조의 주인이며 구원의 왕을 대신해서 왕 노릇하고 스스로 주인 행세를 하거나 구원의 결정권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해서 세상의 왕처럼 군림하는 모든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 교회는 스스로의 이기심과 탐욕을 감추기 위해 세상을 정죄하므로 정당화하고 하나님이 맡겨 주신 세상을 훔치지만, 이제 예수의 마음을 품음으로써 자기 자리를 회복해야 할 것이다.회개하고 공동체의 연합을 회복하라이제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훔치는 행위를 멈추고 돌이켜야 한다. 그걸 다른 말로 하면 회개다. 회개라는 헬라어 메타노이아(meta+noia)는 문자 그대로라면, 아는 것을 넘어간다 또는 바꾼다는 뜻입니다. 명사 노에오(noeo)는 철학에서 많이 쓰이기도 하는데, 정보를 안다기보다 깊이 의식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회개는 행위의 변화를 가져오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한다. 구약에 나오는 히브리어 슈브(shoov)도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회개와 관련해서 출애굽이라는 말 엑소더스(Exodus)라는 말을 살펴보는 것은 흥미롭다. 이 말도 엑스(ex)와 호도스(hodos)가 붙은 합성어로 길을 나온다(out of way)는 뜻이다. 노예로 이집트에서 살던 중에 그 삶의 길을 나온다는 뜻이다. 이게 구원 아닌가? 살아가던 옛길을 벗어나서 돌이키는 회개라는 말과 같다. 그런데 회개 한번으로 우리의 삶이 다 바뀌지는 않는다. 계속해서 해야 하고, 매일같이 해야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기 위해 매일 매 순간 우리를 돌이켜야 한다. 예수와 하나가 된 것을 확인하고 또 확인해야 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스스로를 부정했다. 그렇게 자기의 길로부터 벗어났다. 이는 예수와 성부 하나님과의 친밀한 연합을 통해 가능했다. 그걸 가능하게 도우시는 성령님은 비밀의 덤이다.보통 삼위일체 교리가 모든 교리 중에 가장 어렵다고 생각하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동방 교부 다메섹의 요한이 찾아낸 헬라어 신학 용어 페리코레시스(Perichoresis)라는 말을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 말은 문자적으로 순환(rotation)이란 말로 페리(peri, 둥근, around)와 코레인(chorein, 여지를 만드는, to make room)의 합성어다. 다메섹의 요한은 페리콜레시스를 삼위 하나님의 상호순환, 상호내재, 상호침투의 관계를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했다. 삼위일체의 공동체성을 이만큼 잘 표현하는 말도 없다. 페리코레시스라는 용어야말로 삼위일체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테르툴리아누스이후 삼위일체를 숫자 개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강했다. 안 좋은 접근 방법이다.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위격이 숫자적으로 하나의 본질이나 신성을 가진다고 설명하는 것은 좋지 않다. 마치 입체를 평면에서 다루는 것과 같다. 3과 1을 평면에서 3이 1이 되고, 1이 3이 된다는 모순을 반복할 뿐이다. 모순과 비합리성은 1(하나)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1은 숫자 하나가 아니고 세 위격이 함께 연합해서 가지는 공동체성을 의미한다. 서로 분리되지 않고 내재된 연합이며, 서로 통일을 이루는 공동체다.페리코레시스는 삼위 하나님이 공동체를 이룬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상호순환성을 뜻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유일성을 지나치게 강조해서 공동체적 의미를 간과한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창조할 당시부터 공동체적 연합의 사역을 펼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공동체적 형상으로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했다. “우리의 형상대로” 만드셨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인간존재 속에서 이런 본성과 속성을 봐야 한다. 마치 앙리 마티스의 ‘윤무’에서 무희들이 손을 잡고 하나의 춤을 추는 모습처럼, 우리 사람에게도 삼위 하나님의 공동체적 속성이 들어 있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는 말이란 그런 뜻이다.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모든 인간은 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교회나 세상도 다 공동체적 연합의 본질을 가진다.예수께서는 이를 가르치셨고 몸소 실천적인 삶을 통해 보여주셨다. 요한복음에 보면 “나와 아버지는 하나다!” “나는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는 내 안에 계신다”고 하셨다. 우리는 이 예수를 품으면 된다. 우리는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아버지의 계획을 완성하셨다. 그러니 우리가 그 예수와 하나 되어야 한다. 연합되어야 한다. 예수를 우리 마음에 품고 살아야 한다. “커무니오 쿰 크리스도” 곧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란 말도 그래서 나왔다.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세례 때도, 성찬 때도, 예배 때마다…, 아니 우리 가정에서 공동체적 연합을 시도할 때마다 예수와의 연합을 경험한다. 우리의 삶은 예수와 연합된 삶이다.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기억하고 확인하라는 말이다.성경은 변함없이 우리에게 예수의 마음을 품으라고 도전한다. 그런데 이 편지는 바울이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쓴 편지다. 바울 자신이 그리스도를 본받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이 편지를 같이 쓴 디모데(이름은 바울과 디모데로 나오지만, 디모데가 썼을 것이다)나 또 동역자인 에바브로디도도 함께 그리스도를 본받는다고 한다. 그러면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예수를 본받으라고 도전한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것이 일어나야 한다.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마게도냐 환상을 보고 유럽으로 건너가 처음 세운 교회다. 바울은 회당이 없어서 여자들이 모여 있는 빨래터로 가서 복음을 전했고, 거기 있던 루디아가 자기 집으로 초청해서 교회가 생겼다. 이것이 초대교회의 원형이지만, 한 개인의 가정이 곧 교회가 되었다. 교회는 가정이고 가정의 확대다. 바울은 이런 가정교회를 경험하면서 또한 가정교회가 해야 할 일을 분명히 전하는데, 빌립보 교회로 에바브로디도를 보내면서 그를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라고 한다. 바로 환대(hospitality)하라는 것이다.바울은 로마서에서도 가이오에게 감사를 전하는데, 그 이유가 온 교회를 잘 돌봐줬기 때문이라 했다. 자기도 로마를 방문할 계획인데, 잠시 들러 기쁨을 나누고 후원을 얻어서 스페인에 갈 계획이니 재정적으로 후원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염치없는 행동이 아니다. 바울의 선교 계획과 가정교회 사이의 상호의무요 거룩한 계약이었다. 이것이 교회 공동체를 이루는 원동력이었다. 신약성경의 많은 부분이 이를 전제로 기록되었다. 바울은 고린도에 디모데를 보냈고, 로마에 뵈뵈를 보냈고, 교회는 그들을 환대했다. 예수님은 아예 복음서에서 제자들을 이 마을 저 마을로 보내시며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했다. 이것이 사도행전으로 이어져서 이집 저집이 제자들을 받아들여 복음을 가르치도록 했다(행 5:42).신앙의 출발점은 바로 이러한 수송성, 환대다. 사도행전 16장의 간수가 바울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접대했다. 우리도 교회와 함께 그리스도와 공동체적 연합을 경험해야 한다. 개인의 신앙이 교회와 연결된 것을 기억하고 연합을 적극적으로 경험할 때, 자기중심성과 이기성을 극복할 수 있다. 우리 생각이 교회로 열려 있고, 연결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예수를 마음에 품어야 한다. 예수와의 연합이 시작이다. 한 개인이 가정을 이루고 교회를 세워 가며 세상 속의 하나님 나라의 소명을 이루길 소망한다.[주]1. 김세윤의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자'(“The ’Son of Man’” as the Son of God, Eerdmans 1985)는 이 내용을 신학적으로 잘 정리했다.
예수그리스도의마음
아담과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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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대
인자
인자기독론
아담기독론
빌립보교회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
by 정갑신
2022-05-03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자녀들아, 너희 부모를 주 안에서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 에베소서 6:1-4.모두가 순종을 싫어한다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여러 일상 중에서도 가장 밀착해 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가 잘 모르고, 또 잘하지도 못하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곤 한다. 하지만 잘하지 않는 것은 잘 모른다는 거다. 진짜로 잘 안다면 무슨 대가를 치러서라도 하고야 만다. 따라서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다루는 오늘 본문을 다시 한 번 잘 살펴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들을 새겼으면 한다. 1절은 여러 가지로 질문하게 만드는 말씀인데, 여기서 끄집어 낸 다음 세 가지 새로운 질문에 답변하는 형식으로 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다.•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연령대는 언제인가?• 순종하라는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 부모에 대한 자녀의 순종 여부는 자녀의 문제인가 부모의 문제인가?이런 질문들에 대해 복음의 관점에서 어떻게 대답할 수 있는지, 우리의 삶의 경험에 비추어 함께 생각하면서 다뤄 보겠다. 첫 번째 질문―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제대로 들을 수 있는 연령대는 언제인가?―과 함께 생각해 볼 다른 질문들이 있다. 미취학 아가들이나 초등 어린이들에게 순종하라는 말을 지속해서 하는 건 정당한가? 순종의 의미를 이해하지도 못하는 아이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것은 감화나 감동이 아니라 세뇌가 아닐까? 사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게 순종하라는 말로만 가능한 것인가? 순종이 자발적 행동이라기보다 세뇌와 강요로 열매를 볼 수 있는 건가? 몇 살쯤 되어야 순종하라는 말을 해도 될 만큼 알아들을 수 있는 건가?질문을 거듭하며 순종을 생각할수록 부정적인 생각이 많아지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누구보다도 우리에게 순종을 강조하신 분은 정작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첫 단계부터 신약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은 순종을 강조하신다. 아담에게 처음 하신 말씀도 순종하라는 것이었고, 성경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교회에게도 복음의 순종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은 어린아이에게나 어른에게나 순종을 강조하신다. 물론 하나님께서도 우리더러 순종하라고 명령하신다고 해서 우리가 당연히 순종할 거라고 순진하게 생각하신 건 아닐 것이다. 우리가 제대로 순종하지 못할 걸 아시면서도 강조하신 게 분명하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무엇보다도 순종이란 것이 순종하겠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순종할 수 있게 은혜를 부어 주시겠다는 약속의 범주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종은 ‘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순종은 ‘되는’ 것이다.나 자신의 개인적인 인생에서 참 잘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라는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아버지를 찾아갔던 것이다. 그때 나는 용서가 되는 신비로운 은혜를 경험했다. 물론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길 떠나는 것부터가 은혜였다. 어쨌거나 순종하는 게 아니라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령대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누구든지 순종하라고 논리적으로 설득하고 이치적으로 납득이 되어서 순종하는 것이 아니다. 어리다고 순종이 안 되는 것이 아니다. 나이 많고 많이 배웠다고 순종이 다 되는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철들었다고 순종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순종이란 말과 더불어 항상 깔려 있는 말씀이 “주께 하듯 하라”이다. 순종은 결국 믿음과 은혜의 이야기이다. 순종은 윤리도덕의 이야기가 아니다. 물론 윤리도덕을 포함하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복음과 은혜에 관한 이야기다.하나님께서 순종하라고 명령하시는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순종이 아름다운 열매를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순종은 그 대상이 독재적 선동가 같은 아주 사악한 자가 아닌 경우라면 대부분이 놀라운 삶의 열매를 맺는다. 예를 들어, 회사나 나라 자체가 불의와 불공정과 불법과 왜곡을 조장하고 추구한다면, 직원이나 국민은 회사와 나라에 충성할수록 불의에 기여하는 결과를 낳게 되는 셈이다. 이와 비슷한 주제를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가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에서 다뤘다.[1] 그는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불의하고 또한 그 불의를 가중시키는 어떤 사회 시스템을 무너뜨리고 해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개인도 도덕적이지는 않지만, 사회는 훨씬 더 부도덕하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마찬가지로 부모에게 순종할수록 복이 아니라 저주가 되고, 순종이 오히려 부도덕과 악행을 이루는 경우가 아주 없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특이한 케이스가 아니라면, 대체로 부모님에 대한 순종은 불순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축복이다. 권위자에 대해 불순종하는 것은 대체로 내 생각이 권위자의 판단보다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에 정상적인 권위자에 대한 그런 불순종은 결국 불순종한 자가 섣부르게 판단했다는 것으로 드러나곤 한다. 나 역시 젊은 2,30대 때, 나 스스로 꽤나 똑똑한 줄 알고 권위자에게 대들고 싸운 적도 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내 생각도 거기서 거기인 걸 알게 되곤 했다. 남는 것은 오로지 내가 불순종했다는 것만 남았다. 내가 섣불렀다는 사실만 남아 나 자신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나만 정의롭고, 나만 옳고, 내 생각이 더 명석하다고 확신에 가득 찼던 게 섣부르고 어색하고 유치하고 조급하기만 했다는 것을 뼈저리게 후회한 적도 있다. 내 생각대로 하건 권위자의 뜻을 따르건, 사실 큰 차이가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경우, 권위자의 뜻을 따르므로 공동체 전체를 돕는 것이 훨씬 더 나은 선택이라는 게 중론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어떤 습관이 있느냐면, 이 권위자는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도 내 성급한 행동을 합리화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더 나아가 하나님께서는 궁극적으로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진정한 순종의 본질을 보이셨다. 그런데 그 길이 어떤 길이었냐 하면 불법자들에게 넘겨지고 불의하고 억울하고 처참하게 죽임당하는 길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순종하셨다. 그리고 결국에는 예수님의 순종이 가져오는 그 영광스러운 결과를 가져왔는데, 결국 주님은 이 모든 혜택을 고스란히 우리에게 넘겨주셨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가신 그 길을 통해 임한 영광스런 혜택을 충분히 받은 자로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주님의 말씀 앞에 서야 한다. 주님은 우리에게 영원토록 잃지 않을 영원한 생명과 부요함을 다 주셨다. 그러고 나서 주님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더 이상 손해 볼 것도 없고 뭔가 더 바랄 것도 없을 만큼 전부를 다 내주신 주님을 기억함으로서만 순종할 가능성이 열린다는 말씀이다. 우리는 흔히 생각하기를, 그렇게 순종했다간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에 순종을 못한다. 그러나 주님 안에서 순종하는 것은 주님 안에서 우리가 모든 걸 받았기 때문에 이미 우리는 더 이상 망할 수 없는 자들이 되었다는 걸을 기억해야 한다. 이 복음을 확실히 믿는다면 우리는 순종할 수 있다.결국,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는 말씀은 주님을 향한 믿음의 이야기다. 주님을 믿지 않으면 순종할 수 없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면서 여러 그럴만한 이유를 가지고 있고 순종하지 못하는 나 자신을 잊어버리려고 하는데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게 되면 순종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다 제거하고 넘어갈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부모에게 순종을 하지 못하는 이유는 부모의 상태나 말이 순종할 만한 상태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상태나 내 생각이 훨씬 더 낫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물론 모든 상황에서 육신의 부모를 믿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도무지 용납할 수 없는 부모의 말을 믿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순종하려면 무엇보다 나에게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만큼 다 주신 후에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을 믿어야만 한다. 현실은 우리 주변을 돌아볼 때 훨씬 더 순종할 수 없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순종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에, 순종할 만한데도 불구하고 순종하지 않는 경우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러니 순종에 대해 자기합리화를 해서는 안 된다. 순종하려면 무엇보다도 주님이 내게 행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그것이 내가 부모에게 순종하는 모든 결과의 보증이 된다. 내가 순종하면 어떤 결과가 오게 된다는 것을 미리 짐작하며 순종하지 말고, 오늘 나의 순종의 결과는 오직 주님이시라는 생각을 해야 한다. 주님이 내 모든 순종의 보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칠 때 비록 그들이 순종하라는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연령이라고 해도, 이런 순종의 비밀을 지혜롭게 가르칠 수 있는 은혜를 구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내 감정과 고집을 내려놓고 주님의 말씀으로 가르치는 법을 배워야 한다(4절). 그렇지 않을 때 우리가 자녀를 노엽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우리나라에서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에 대해 답답한 심정을 가진 사람이 많지만, 자녀는 자녀대로 자기 부모와 대화도 안 되어 자기네 생각과 고민을 이해받지 못해 아픔을 느끼며 부모와 깊은 괴리감을 만들어 지내는 경우가 많다. 이는 부모에 의해 거듭해서 노여움이 쌓여 생겨난 결과다. 가장 가깝고 믿고 의지하는 부모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 경우도 흔하다. 자녀마다 이런 상처와 노여움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게 표출되는데, 어떤 자녀는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억누르며 참고 살다가 청소년기에 폭발하거나 빗나가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어른이 되어서도 생각과 역할을 제대로 못하게 될 수 있다. 또 어떤 자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겪는 고통스런 갈등을 이기지 못하고 반발하느라 일탈을 시도하여 가출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가정에서 부모에게서 편애를 상처를 입거나 성차별을 받으며 자랐다거나 구박받고 자랄 때 자녀는 노여움을 경험하는 것이다. 특히나 자기가 분명히 잘못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부당하게 야단을 맞거나 매를 맞는다면 비록 성경이 부모에게 매로 훈육하고 징계할 것을 가르친다고 하더라도 자녀는 노여움을 타는 게 정상이다. 아무리 부모라 해도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행한다고 혼자서만 믿으며 자녀에게 상처만 준다면 그 도가 지나칠 때 자녀는 사무친 분노와 슬픔이 쌓여갈 것이다. 하지만, 부모가 자녀를 일방적으로 사랑하기보다 대화하며 소통의 창구를 유지하되 주의 교양과 훈계의 축으로 붙들고 양육하는 것이 필요하다.바울은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는 권고를 훈계하기 전에 말했는데, 왜냐하면 부모가 자녀를 노엽게 하면 자녀가 낙심하기 때문이다. 또 자녀가 그렇게 낙심하면 기가 꺾이고 용기가 꺾이고 의욕을 상실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가르쳐야 한다는 말은 그냥 성경을 가르치라는 말과는 좀 다른 말이다. 여기서 교훈이란 부모로서 내가 먼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보니 이런 걸 깨닫게 되었더라는 결과를 가지고 가르치라는 뜻이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부모는 신앙생활을 잘하는데 자녀는 탈선하고 가출하는 경우라면 부모가 무턱대고 자녀에게 신앙과 성경을 강요하는 방식으로 신앙교육을 시켰을 가능성이 아주 높다는 사실이다. 그러면 자녀는 그런 부모의 가르침을 가르침으로 받기보다 강요와 억압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반발심만 더 커질 수가 있다. 오히려 부모가 먼저 삶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일 필요가 있으며, 자신도 행하지 못하는 것을 가르치려 들면 안 된다. 살다 보면 어느 한 순간 자녀가 자라는 걸 보게 되는데, 짧은 기간 우리에게 맡겨 주신 선물인 우리 자녀를 마음 다해 양육하되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한다. 순종, 말이냐 행동이냐?두 번째 질문―순종하라는 말은 누가 누구에게 할 수 있는 말인가?―에 대해 살펴보자. 자녀에게 순종의 비밀을 가르칠 필요가 있다는 건 이해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할아버지 할머니도 아니고 부모가 앞뒤도 못 가리고 순종의 의미도 제대로 알기 어려운 어린 자녀를 앉혀 놓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모습은 자칫 유치해 보일 수 있다. 그렇다고 아이가 더 컸을 때는 순종을 가르치는 게 가능한가? 그럼 청소년이라면 어떤가? 청소년 자녀에게 순종하라고 요구하는 건 더 서글프게 또 안쓰럽게 보일 수 있다. 안 되는 걸 억지로 되게 하려는 것 같고, 안 될 걸 뻔히 알면서 되게끔 하려는 몸부림 같게도 보인다. 그러면, 부모가 다 큰 청년이나 장년 자녀를 앞에 두고 순종하라고 가르치는 건 어떤가?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그건 부모 자신이 자기 인생을 얼마나 제대로 살지 못했는가를 스스로 선포하는 행위나 마찬가지다. 어떻게 살았기에 그 나이가 되도록 다 큰 자녀에게 순종을 요구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건 순종에 대한 가르침이나 요구라기보다는 구걸 같이 느껴진다.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순종을 말로 가르치기보다 자녀가 순종할 수 있도록 행동과 삶으로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고, 그렇게 말하는 이들의 말에 훨씬 더 공감하게 된다. 그런 말만으로도 책임이 느껴지지만, 실제로는 말보다 행동이 훨씬 더 어렵기 때문에 종종 말만큼이나 행동이 미치지 못할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런 이유로 말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기회가 주어지면 행동으로 보여주겠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경우도 흔치 않게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런 행동조차도 말과 함께 유보한다면 훨씬 더 위험에 빠지고 말기 때문에 말하고 책임 있게 행동하는 자연스러운 정상성을 회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또 옳은 일이라 생각한다. 평생 말만 남발하는 핫바지 빈대떡 신사가 아니라면 대개의 경우에 먼저 말하는 것은 책임질 일을 스스로 공론화하는 것으로 어떻게 보면 스스로 손해를 자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적당한 때에 행동과 삶으로 보이자고 생각하는 것은 아직은 아무것도 드러나지도 않았고 그래서 누군가가 내 책임을 거론할 근거도 없기 때문에 훨씬 더 안전한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냥 유보하고 실행을 멀리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우리의 교묘함을 인정해야 한다.이런 의미에서 나는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인이 자기는 말이 앞서는 사람을 더 신뢰한다고 말한 것에 공감이 된다. 물론 우리는 “무릇 군자는 말은 어눌하려고 애쓰고 행동은 민첩해야 한다”는 공자의 말에 길들여져 있는 게 사실이다. 제발 그런 교훈에 맞추어 살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공자의 이 말이 모든 상황에서 진리가 아니라는 걸 절실히 느낀다. 오히려 그 일본 경영인의 생각처럼 말을 앞세우는 자는 책임질 일을 만들어 놓은 셈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되는 말을 아끼는 사람보다는 책임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생각에 공감한다. 물론 나 자신이 말이 앞서는 사람이기 때문에 자기를 변호하기 위한 자기합리화일 수도 있다. 또 다른 더 근본적인 이유도 있다. 하나님이야말로 말이 앞서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항상 먼저 약속하신 후에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방식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오셨다. 하나님은 언제든지 이렇게 저렇게 하겠다고 먼저 말씀을 하신다. 그리고 그 말씀대로 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의 별명 중 하나가 “말씀하신 대로 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말씀부터 하신다. 이를 테면 말을 앞세우신다. 하나님은 먼저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의 허물과 잘못에 대해 노여움이 불같이 일어나 하나님께서 앞에서 하신 약속을 지키지 않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반드시 그 약속을 지키시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가 어릴 때부터 청소년기를 지나 청장년이 되고, 심지어 노년에 이를 때까지도 우리 아버지로서 하나님에게 순종하라고 거듭 거듭 가르치시는데, 심지어 강요하기도 하신다. 왜 그런가? 그렇게 가르치고 강요하셔도 충분히 괜찮을 만큼 우리가 마땅히 순종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친히 보이실 것이기 때문이고,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크고 위대한 복인지를 너무나도 잘 아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버지 하나님을 따를 때 순종할 충분한 이유를 생각하며 따르는 것처럼, 우리가 자녀에게 순종을 말할 때도 자녀가 순종할 수 있도록 순종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보일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자녀가 순종을 잘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동원해서 도와줘야 할 것이다. 따라서 1절 말씀은 자녀를 향해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그게 마땅하다고 명하는 말씀이지만 그것을 자녀에게 말하고 가르쳐야 하는 사람은 부모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부모는 자녀에게 그렇게 말함으로 자신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야만 하고, 그렇게 말했기 때문에 자기가 먼저 그렇게 행동해야만 한다. 부모가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부모의 부모이신 하나님은 이미 충분히 보여주셨고 풍성하게 행하셨고 또 행하실 것이다. 그리고 부모가 그렇게 하고자 한다면 부모의 삶을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바꾸어 가실 게 분명하다. 그래서 마태복음 11:29에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하셨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주님은 자기에게 와서 배우라고 요청하실 수 있는 존재시며 또 그렇게 행하실 분이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부모로서 자녀인 우리를 향해 자기에게 순종하라고 가르치신다. 자신에게 배우라고 요청하신다. 자신을 따르라고 강요하신다. 왜 그런가? 그렇게 요청하실 수 있는 근거는 바로 예수님이 그렇게 사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 요청을 따를 때 얼마나 위대한 영광을 보게 될 것인지를 아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우리에게 그런 자기 자신을 따르라고 하셨다. 왜 그런가? 따르고자 할 때, 우리도 우리 자녀에게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순종을 배울 곳은 오직 부모의 품뿐이다. 물론 나 같은 사람처럼 이미 육신의 아버지의 품안에서 순종을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경우도 무수히 많을 것이다. 하지만 괜찮다. 지금부터 시작하면 된다. 주님은 우리를 이렇게 격려하신다. “괜찮아, 지금부터 시작하면 돼!” “괜찮아, 아직 늦지 않았어!” 우리의 참 아버지는 영원토록 변함없이 우리 앞에서 여전히 기다리신다. 우리가 따르기만 하면, 그때가 언제일지라도 벌떡 일어나 도와주실 준비를 하시고 항상 우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니 짝퉁 아버지에게서 못 배웠어도 참 아버지에게서 배우면 되니까 조금도 아쉬워할 필요가 없다.순종은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상대방의 조건을 넘어서는 행동이다. 물론 이때 우리에게는 “내 경우는 달라, 내 경우는 특수해”라고 생각하며 말하는 각자의 사정이나 상황이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자녀가 부모에게 행하는 순종은 부모에 대한 행동이기 이전에 순종하라고 명하신 하나님에 대한 행동이다. 우리의 부모에 대한 순종은 그 자체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의 부모를 주신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언제나 일정하시고 한결 같으시다. 그러므로 우리의 순종 역시 그래야 하고, 우리가 진실로 하나님을 상대로 순종한다면 그럴 수밖에 없이 조건을 뛰어넘어야 한다.그런 의미에서 순종하라는 말은 부모가 자녀에게 해야 하는 말이지만 동시에 자녀가 자기 자신에게 해야 하는 말이기도 하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아도 될 만한 충분한 이유를 찾는다면 아마도 끝도 없이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그런 이유를 찾아서 순종하지 않더라도 잘 살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경우에 그 사람은 순종하라는 말씀에 순종하지 않은 자가 되는 것이다.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말로 그 상황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순종의 여지가 있다는 걸 생각하지 않은 변명자가 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에 하나님을 믿기보다 자신의 판단을 믿은 자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보다 자기 현실과 자기 생각과 자기 관심과 동행한 자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무지 순종할 수 없는 상황인지에 대해 속단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그 물음은 내 상한 마음에게 묻지 말고 하나님께 묻고,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공동체나 권위자에게 물어야 한다. 불순종의 핑계와 책임이는 바로 세 번째 질문과 연관된다. 자녀가 부모에게 순종하느냐 마느냐의 여부는 자녀의 문제인가, 부모의 문제인가? 소위 순종이란 누구의 책임인가? 우리는 종종 책임을 져야 하는 상황이 되면 자동적으로 핑계거리를 찾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순종해야 돼?” “이런 부모에게도 순종해야 하는 거야?” 이런 한탄스러운 질문을 해야만 하는 상황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질문에는 근거가 희박한 어떤 전제가 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나에게는 부모만큼의 문제가 있지는 않아.” “누구라도 이해해 줄 수 없는 내 부모에 비해 나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어.” “나는 내 부모보다 옳고 정당해.” 이런 전제들이다. 물론 이런 전제들이 맞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떤 시점이나 어떤 관점에서 맞는다고 다 맞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다고 해도 내 부모가 어떤 시대, 어떤 환경, 어떤 상황 속에서 그런 삶을 형성해 왔는지에 대한 사려 깊은 생각이 생략되지 않았는가? 부모가 처했던 사회적, 가정적 환경의 희생양이었을 수 있다는 생각이 생략된 게 아닐까? 그와 동시에 지금 부모를 판단하고 있는 내가 부모 시대나 부모의 상황에 있었더라면 과연 나는 어떻게 했을까를 생각하지 않은 것은 아닌가? 우리가 스스로를 정직하게 비추어 보며 부모의 상황에 직면해 보는 것이 생략된 것은 아닐까? 우리가 순종의 문제를 생각할 때 다양한 상황을 보다 입체적으로 숙고할 필요가 있다. 부모도 나도, 우리는 모두 시대와 상황의 산물이다. 시대와 상황에 적응하고 저항하고 그 시대 상황에 스며들어 순응하기도 하고 반항하기도 하는 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우리 모두가 다 피해자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모두가 피해자라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 그래서 우리가 문제를 제대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시대와 상황에 책임을 전가하기보다 모든 시대와 상황을 넘어서시는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는지를 귀 기울여야 한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요청은 수천 년 간 동일하게 유효했던 영원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하나님은 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 그 명령에 “그렇게 하면 하는 일이 잘되고 땅에서도 장수할 거라”는 보상의 약속까지 걸어 놓으셨을 정도다. 문제는 우리 쪽이다. 우리는 혹독하고 지독한 현실을 핑계 대며 그런 현실이 우리로 하여금 부모에게 순종하지 못하게 한다고 얼마든지 말할 수 있고, 그런 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께 어디까지 순종하셨는지를 생각한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고 명하신 예수는 아버지께 순종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지셨다. 그리고 그 십자가의 극단적인 고통 가운데서도 육신의 모친 마리아를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셨다. 우리에게 그런 모습의 순종을 앞장서서 보이시며 “나를 따르라!”고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새로운 마음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피조물이 된 것은 바로 주님 덕분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주님과 함께 그가 가신 길 위에 함께 서 있도록 초대 받았다. 주님은 틀림없이 우리가 그 길을 따라 가는 동안 형언할 수 없는 신비한 복과 영광과 만족과 평화의 선물을 얻게 하실 것이다.[주]1. 라인홀드 니버, 도덕적 인간과 비도덕적 사회, 문예출판사, 2017. 원제: Moral Man and Immoral Society: A Study of Ethics and Politics, New York, 1932.
순종
예수의순종
불순종의핑계와책임
부모에게순종하라
주의교훈과양육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by 정갑신
2022-05-02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나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 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보양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니라. 이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 5:21-33.최근 영국 성공회에서 전통적인 교회의 역할과 존재 방식을 반성하는 운동이 일어나 전 세계적으로 말없이 퍼져가는 중이다. 급변하는 세계에서 교회가 자기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말씀에 비추어 본래의 모습으로 회복하기 위해 답을 찾는 시도다. ‘과연, 교회는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구원의 공동체로서, 세상에서 회복된 모습으로 존재하는가? 교회는 개개인 성도들이, 또한 가정이, 그리고 지역교회가 연합된 공동체로서 충실한 모습으로 서 있는가? 아니면, 구태의연한 모습으로 변색되고 탈색되어 방치된 자전거처럼 홀로 낡아가든지 부유하듯 떠다니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적절한 답을 찾으려는 것이다. 교회는 스스로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는 예수님께서 회복하여 있게 하신 그 자리에서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는 것일까? 교회의 현 상황을 비판적으로 성찰하는 가운데 제기한 이런 질문에 대하여, 영국 성공회는 “교회의 새로운 표현”(fresh expressions of church)으로 대답하려 하는 중이다. 이를 위해 마이클 모이나와 롭 피모디는 ‘리프레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1] 예수님은 당신이 용서받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당신이 자유를 누리도록, 당신이 풍성한 삶을 경험하도록, 당신이 본래 창조된 목적대로 평화와 안식, 충만함 등 모든 것을 누리도록, 당신이 죄로 인해 사망에 이르지 않도록 죽으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을 본향으로 인도하시려고 죽으셨습니다. … 그런데 많은 이들이 바로 여기서 이야기를 멈춥니다. 다시 말해, 복음의 이야기는 끝나고 당신의 이야기만 남는 것입니다(복음이 오직 당신의 이야기만을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복음이 당신을 넘어 온 세상의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이야기라는 것에 대해서는 정말 관심이 없습니다_인용자 주). 이것이 정말 복음의 참 모습일까요? 어딘가에서 복음의 본질을 놓친 것은 아닐까요? 바로 당신이 복음의 본질을 놓친 사람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의 구원 이야기가 당신으로 시작해서 당신으로 끝나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나님은 더 큰 그림을 그리고 계시지 않을까요? 그리고 함께 그 그림을 그리자고 하나님께서 당신을 초대하신다면 어떻게 반응하시겠습니까?이 ‘교회의 새로운 표현’ 운동은 영국 성공회 캔터베리 대주교였고 존경받는 영성 신학자로 유명한 로완 윌리엄스(Rowan Williams)의 지원과 격려로 훨씬 바람직한 깊이와 균형을 갖춘 운동으로 발전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의 멘토인 로완 윌리엄스 자신이 영국 국교회(Church of England) 역사상 최초로 비잉글랜드 출신 캔터베리 대주교였다는 점은 매우 상징적이다. 전 세계 성공회의 최고위 성직자로서 램버스 회의(10년마다 열리는 주교회의)를 소집하고 주례하는 캔터베리 대주교는 관례적으로 잉글랜드 출신만 선출했지만, 그는 잉글랜드 사람들이 무시하는 웨일즈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미 그 자신의 역사와 삶을 통해 그와 영국 성공회는 아름다운 복음의 돌파를 경험했던 것이다. 한 가지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새롭고 아름다운 영적 운동이 대형 교회에서 시작된 게 아니라 몇몇 가정이 중심이 된 작은 공동체들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한 핵심이고, 오늘날 교회가 복음의 아름다움을 회복하고 극대화할 수 있는 매우 의미심장한 출발점이다. 그런 면에서 리프레시 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성도들 자신과 교회의 본분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결국 이런 질문을 통해 우리는 아내와 남편 혹은 건강한 아내 역할과 남편 역할로 시작되고 유지되고 성장하는 각 가정에서 제대로 된 복음적인 역동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돌아보게 된다.피차 복종하라에베소서 5:21-33 말씀은 복음 공동체의 가장 근본적이고 현실적인 관계를 이루는 아내와 남편에 대한 가르침이다. 두 사람의 관계로 시작하여 세상의 모든 관계로 확장된다. 두 사람이 복음에 의해 회복되고 복음에 의해 변화되며 복음에 의해 유지될 때 교회를 통해 세상에 그 아름다운 변혁의 삶을 보여줄 수 있다. 그리고 교회가 세상에서 이뤄지는 모든 관계의 중심이기 때문에 아내와 남편의 관계도 결국 교회의 문제다. 따라서 본문은 가정 공동체를 이루는 당사자들이 서로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로 대해야 할지를 밝혀 주는 전체에 대한 전제 또는 최종 결론에 해당된다.21절은 “피차 복종하라”고 먼저 운을 뗀다. 성경은 놀랍게도 복종의 힘과 비밀을 말한다. 여기서 복종은 물론 부담스런 말이다. 이 단어는 비현실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결국 둘 사이에 그게 안 되면 평화는 영원히 날아간다. 아내가 남편에게, 자녀가 부모에게 복종하는 것이 당연했던 고대의 문화적 관습을 뒤집어 남편도 아내에게, 부모도 자녀에게 복종하라고 ‘피차’라는 말을 집어넣은 것은 완전히 혁명적이다. “당신은 왜 맨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당신이 잘 좀 해봐. 내가 이런 말 좀 안 하게.” “야! 언제까지 이렇게 게을러터지게 살 거야? 넌, 네 미래가 걱정되지도 않니? 언제까지 네 인생을 이렇게 엄마 아빠가 속 터지게 생각해야 하는 거냐, 응?” “제발, 간섭 좀 그만하고 냅둬요. 내 인생 내가 알아서 살게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며 살고 싶단 말예요.” 부부 사이와 부모와 자녀 사이에 상처만 남게 되는 아주 흔한 대화다. 이런 대화가 번번이 반복되는 이유는 ‘피차 복종’이 없기 때문이다.‘피차 복종’이 없는 이유는 뭘까? 최소한 나는 너보다 옳고, 나는 너에게 이런 말 할 자격이 있다고 피차 확신하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할 만큼 나보다 더 옳다고 여기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옳으면 내가 더 옳지 너는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너한테 그런 말 들을 만큼 잘못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피차 복종의 관계에서는 최소한 마음 밑바탕에 이런 생각이 깔려 있다. ‘나도 내 생각이 정말 맞는 건지 잘 모르겠으니까, 나한테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해줄래?’ ‘글쎄, 내가 당신한테 무슨 말이라도 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다시 말해, 상대가 나보다 더 옳을 수 있고 나도 상대만큼 틀릴 수 있다는 생각이 기본 바탕이 된 상태에서 서로를 향할 때 가능하다. ‘피차 복종’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성경에 단서가 있다. 에베소서 본문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에서 말하듯이, 우리는 예수님을 진실로 경외할 때만 피차 복종할 수 있다. 왜 그런가?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바로 그런 복종을 온전히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충분히 완전하신 분이시지만 자기 자신이 모든 걸 책임지려하지 않고 아버지께 온전히 맡기신 것이다. 아버지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사랑이다. 하나님께 온전히 맡긴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전적으로 믿고 따른다는 뜻이다. 예수님이 그걸 보여주시고 우리는 그 예수님을 통해서 그걸 보고 배운다. 예수님은 가장 처참한 형태의 죽음의 시간까지 전적으로 아버지 말씀을 따라 맡기셨고, 이것이 결국 예수님 자신을 포함하여 모두에게 위대한 승리를 가져오게 했다. 이 비밀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진실로 내가 사랑하고 존경하고 전적으로 신뢰하며 경외하는 자를 따르고, 자연스럽게 그를 흉내 내게 되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진실로 경외한다면 가정에서 피차 복종하는 삶을 살게 된다. 하지만 예수님을 경외한다고 하면서도 가정에서 여전히 군림하고 통제하려 한다면 그것은 모순이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내가 말하지 않으면 누가 이런 말 해주겠어?” 이런 종류의 말도 결국은 별 영양가 없는 통제욕구일 뿐이다.우리가 피차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존재론적인 이유이고 또 하나는 목적론적인 이유다. 첫째, 존재론적으로 우리는 피차 복종하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났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게 우리 존재의 터전이다.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의 터전 위에 제대로 세워질 때, 있게 하신 자리에 제대로 설 때, 우리 존재의 자리인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을 때, 진실로 자유롭고 풍성한 삶을 경험한다. 따라서 자발적으로 피차 복종하는 것을 꺼려하고 자존심 상해하며 부끄럽게 생각하는 것은 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 아니라 스스로 하나님이 되고 스스로 세상의 주인이 되려는 죄의 본성이다. 삼위 하나님 안에서 복음으로 회복된 자는 누구 위에 군림하고 누구에게 명령함으로 얻는 만족을 매우 부담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하게 된다. 둘째, 피차 복종의 존재론적인 이유와 함께 목적론적인 이유도 분명히 있다. 우리는 진정한 자유와 평화를 누리며, 서로에 대한 환대와 용서와 사랑의 샬롬을 얻기 위해 피차 복종한다. “난 그 인간한테 이젠 더 이상 말 안 해. 그냥 못 본 척하고 지나가는 게 속 편해.” 세월이 가면서 부부지간에 이런 식으로 말한다면 피차 복종이 아닌 피차 포기를 하는 거다. 피차 복종의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얼굴은 마음을 열고 나누는 예의바르고 솔직한 대화다. 예수님은 성부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솔직한 대화를 나누셨다. 따라서 부부는 서로 할 수 있는 한 조금씩이라도 건강한 대화법을 배우는 게 중요하다. 바울은 32절에서 피차 복종의 비밀을 이렇게 말한다.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남편과 아내의 관계와 태도에 대해 쭉 말씀하다가 갑자기 그것이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비밀이라고 말씀한다. 일차적으로는 남편이신 예수님이 아내인 교회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주셨기 때문이고, 아내인 교회는 남편이신 예수님의 말씀을 목숨처럼 여길 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을 지킬 수 있다는 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교회를 자기 몸이라고 하셨지 가정을 자기 몸이라고 하시지 않았다. 남편과 아내는 그리스도가 교회에게 하시듯 또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사랑과 존경의 방식으로 피차 복종함으로 교회가 되는 거다. 부부는 예수님과 교회의 관계처럼 내 생명을 기꺼이 내줌으로 그의 생명을 살리고, 살아난 생명은 그 감격으로 자기 생명을 기꺼이 바침으로 서로를 살리고, 더 나아가 이웃과 세상을 살리는 비밀을 알고 실행하는 교회가 되는 거다. 세상은 바로 그 힘이 목마르게 필요하다. 가정과 교회와 세상이 불가분리의 관계로 네트워크를 이루는 거다.인도의 불가촉천민 달리트(dalit)가 사는 마을이 있다. 이들은 정부가 아무리 땅을 할당해 주어도 사회 문화적으로 달리트는 땅을 가질 수 없다는 뿌리 깊은 편견 때문에 실제로 자기 땅에 농사짓는 일을 상상조차 못한다. 그래서 벽돌공장에서 벽돌을 굽고, 날품팔이하고, 카펫을 만들어 팔며 하루 한두 끼 겨우 먹으며 산다. 그런데 이 불가촉천민 바로 옆 마을에는 브라만, 크샤트리아, 바이샤, 수드라로 구성된 카스트 축에 끼지 못하는 하층민 OBC(Other Backward Cast)가 산다. 이들은 자기들도 최하층이면서 자기들보다 조금 더 아래로 여겨지는 달리트에 대해 엄청난 우월감을 가지고서 그들을 핍박한다. 이웃지간에 어차피 흐르는 강물을 같이 써야 하는데도, OBC는 달리트는 땅과 강물을 소유할 수 없다는 전통적인 사회문화적 관습에 따른 편견을 내세우면서 달리트가 강에서 물고기를 잡지 못하도록 한다. 한번은 달리트 마을에서 한 사람이 몰래 물고기를 잡다가 OBC 사람들에게 발각되었는데, OBC 사람들이 몰려와서 그의 집을 다 태워버렸다. 달리트는 저항조차 못하고 당할 뿐이었으며, 정부에 고발을 해도 도무지 해결될 기미가 없다. 달리트에게는 쓰레기 버릴 땅도 없어 쓰레기더미에 묻혀 살고, 아이가 아파도 병원에 갈 돈도 없어 수많은 아이들이 병명조차 모른 채 죽어나간다. 인도 정부는 카스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지만 사회문화적 습관이 헌법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작동되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오직 피차 복종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있어야 어느 정도의 변화가 시작될 수 있지만 그조차도 불가능한 것이, 힌두교는 이 부당하고 서글픈 습관을 고치기는커녕 더 강력하게 유지시키고 있고, 윤회를 꿈꾸는 불교에도 그런 습관을 개선할 에너지가 없기 때문이다. 오직 천지만물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위해 사랑으로 복종하심으로 우리 안에서 피차 복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이 변화를 도모할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선교사가 들어간 인도의 한 마을은 OBC 마을과 달리트 마을 사람들이 공동으로 학교를 짓는 중이다. 달리트가 손댄 물은 절대 마시지 않던 OBC 마을 사람들도 이젠 공동 우물을 파고 같이 사용한다고 한다. 그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피차 복종의 복음을 깨달아 더욱 놀라운 변화를 계속 만들어 가길 기도한다.33절을 보자. “남편은 각각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자기 몸 사랑하듯 사랑해야 한다. 아내는 남편을 존경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벌써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말부터 피곤하고 무겁게 느낀다. 맞는 말인 줄은 알지만 결국은 순종하는 게 불가능한 명령이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예수님과 그 사랑을 깨닫고 경외하는 게 선행되어야 한다. 그래야 아내를 내 몸 이상으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되고, 남편을 마음껏 존경하지 않을 수 없는 거다. 예수님을 지극히 경외할 때 우린 무엇보다 자신이 누군지를 알게 된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시면 안 될 만큼 내 죄가 얼마나 극심하다는 걸 깨닫게 되면, 내가 그토록 주장하고 싶어 하는 의와 공로는 나에게나 자랑할 만한 것이지 타인에게는 피곤하고 쓸모없는 잡다한 쓰레기와 누더기에 불과한지를 알게 된다. 그럴 때 비로소 상대의 존귀함이 보이기 시작한다. 아내의 눈에 남편을 존경해야 할 이유들이 보이고, 남편의 눈에 아내가 존경스럽고 사랑스럽게 보인다.사실 우리 모두는 본래부터 배우자에게 사랑과 존경을 받을 자격이 충분하다. 그런 방식으로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사랑과 존경의 교환이 일어나고 마음 깊은 평화가 경험되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향해 사랑으로 복종하고 아내는 남편을 향해 복종으로 사랑하는 거다. 그 평화가 넘치게 될 때 가정 안에 마음의 여백 곧 여유로운 마음의 공간이 커져 간다. 그리고 그 공간에 이웃의 어려움과 세상의 이슈들을 초대해서 더 현실적으로 책임질 수 있는 실천들을 감당할 힘이 일어나게 되는 거다.아내의 복종먼저 아내에게는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은 잘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에게 “잘해야 돼!”라고 강요함으로 김을 빼는 것처럼 들린다. 당시의 모든 아내는 복종을 요구받기도 전에 복종해야 하는 문화에 길들여져 있었고, 이미 복종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의 압력과 습관 속에서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라 대다수 아내는 별 생각 없이 혹은 어쩔 수 없이 남편에게 복종했을 거고, 독립적 존재의식이 있는 자매는 노예처럼 남편에게 일방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삶에 불만을 품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자신의 운명 때문에 비탄해 했을 거다. 그래서 혹 도망치는 아내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세상에 ‘복음’이 들어왔다. 복음은 아내만 남편에게 복종할 게 아니라 남편도 아내에게 사랑으로 복종하라고 가르쳤다. 여자도 남자 못지않게 교회 일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심지어 인류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인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모두 여자였다는 엄청난 사실을 증언했다. 더 나아가, 여자와 남자, 종과 주인, 빈자와 부자의 구분보다 그를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쳤다.그러니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이 교회로 몰리는 게 당연했다. 물론 그만큼 문제가 생길 여지도 많다. 왜냐하면 복음은 위대하지만 위대한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는 너무나 불완전하고 자기중심적으로 왜곡되어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무리 위대해도 자유를 얻은 사람은 자기가 얻어 누리는 자유를 타인도 누리게 하려고 애쓰기보다는 자기 자유를 더 확장하려는 욕심으로 타인의 자유를 억압하기 마련이다. 받은 선물이 다른 사람에게 흘러가도록 하지 않고 자신만의 권리가 되도록 묶어 두는 죄의 본능이 워낙 강하다. 선물이 권리가 되는 모든 곳에서는 썩은 냄새가 나고 세상은 환멸로 덮인다. 마찬가지로 교회로 몰려드는 여인들도 복음이 주는 신세계의 영광을 누리게 되자, 그 선물을 권리로 바꾸어 자유를 말하면서 무질서한 혼란이 빚어지곤 했다. 에베소 교회가 대표적이다. 그 교회 안에는 예수님을 앞세워 은연중 남편으로부터 독립하려 하거나 남편의 권위를 업신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 같다. 하지만 그런 분위기는 남편으로 하여금 복음과 교회를 적대적으로 느끼게 할 뿐이다. 결코 복음적이고 선교적인 삶이 아니다. 바울은 복음전도에 방해가 되는 그런 선동적 분위기를 억제할 필요를 느끼고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권면을 해야 했을지 모른다. 다시 말해, 상황적인 권면과 명령이었던 거다. 예를 들어,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여자는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했다. 이것은 만고불편의 원칙이 아니라 당시 고린도 교회 안에서 있었던 어떤 무질서한 상황과 관련이 있다. 자기권리 의식이 과격하게 고양된 자매끼리 어떤 싸움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있고, 그 싸움이 크게 번질 수도 있어서 교회에서 잠잠하라고 절제하고 자중하라고 강하게 권면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에베소 교회 아내에게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권하는 말도 그 시대에서는 최선의 상황적 말씀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시대가 바뀌면 완전히 폐기해야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우리 시대에 비추어 보다 적절하게 성경 전체의 문맥에 따라 해석해야만 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바울이 우리 시대로 들어와 우리 시대의 아내들에게 말한다면, 아내들이여 남편을 너무 무시하지 말고 사람대접 좀 해라! 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을까 생각할 수도 있겠다. 변수와 상수가 있다. 복종하라는 말씀은 모든 시대에 문자 그대로 적용해야 할 말이라기보다는 시대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는 변수 같은 말씀이다. 하지만 변수를 지켜 주는 상수가 있다. 바로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이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주께 하듯 하라. 이 말씀은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 적절한 영원토록 유효한 말씀이다. 그런데 주께 하듯 하라는 말씀은 남편에게 복종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거라는 절대적인 조건에 관한 말씀이라기보다는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명령을 기꺼이 수행할 수 있으려면 주께 하듯 하면 된다는 순종의 비밀에 관한 말씀이다. 종종 하는 말이지만, 나는 사람을 믿을 수 없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시고 그를 향한 계획을 가지시고 그 사람을 끝내 합당한 길로 인도하시며 그에게 은혜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은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믿음으로, 주님이 그 사람을 믿는 방식으로 그를 대할 수 있다.마찬가지로, 현실 속의 아내는 현실 속의 남편에게 온전히 마음을 다 실어 복종할 수가 없다. 지독하게 이기적이고, 자기 밖에 모르고, 자기 고집 꺾을 줄 모르고, 사는 모습은 구질구질하면서도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 똑똑한 줄 아는 남편의 꼴을 볼 때, 무시하고 싶은 마음을 도무지 접을 수가 없다. 하지만 주님 앞에 제대로 서서 주님을 확실히 믿으면 좀 달라지기 시작한다. 주님을 확실히 믿을 때 맺는 열매는 그 남편이나 나나 별 차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 거다. 나에게 임한 주님의 은혜가 남편에게도 동일하게 임했다는 사실을 각성하는 거다. 주님이 남편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고, 남편이 진실로 변화를 시작할 수 있으려면 내가 남편에게 복종하기 이전에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신 주님께 복종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거다. 그 과정에서 내 눈에 남편이 어떻게 보이든지 예수님은 그 남편을 여전히 붙들고 이끌어 가시는 중이라는 걸 깨닫고 주님 말씀에 의지해서 남편을 향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나는 남편이 아니라 주님을 상대하는 거다.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아니라 주님께 복종하는 거다. 남편을 존경하는 게 아니라 주님을 존경하는 거다. 그렇게 되면 주님께서 어느 순간 나에게 남편을 존경하게 하시고 기꺼이 기쁨으로 복종하게 하신다. 복음이 어느새 내 마음의 몸집과 맷집을 그렇게 키우신 거다. 성경은 아내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하셨다. 다른 남편에게 복종하면 안 된다. 다른 남편에게 복종하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텔레비전을 보다가 현빈 같은 연예인에게 감동해서 박수치고 소리치는 것까지는 애교로 봐줄 수 있겠지만, 내 남편처럼 꼴 보기 싫은 모습들이 하나도 없는 어떤 이상적인 남자를 날마다 꿈꾸고 그 기준으로 자꾸 자기 남편을 바라보면 절대로 자기 남편을 존경할 수 없다. 내 남편과는 다르게 친절하게 들어주는 남자, 내 남편과는 다르게 따뜻하게 말하고 한 없이 관대해 보이는 남자, 내 남편과는 다르게 겸손하고 아내 귀한 줄 아는 남자를 상상하고 기대할 수는 있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런 비현실적인 남자는 세상에 없다. 그런 그림을 마음에 담은 채 매번 남편을 상대하는 한 아내들은 절대, 결코, 영원히 자기 남편에게 건강한 방식으로 복종하는 게 불가능하다. 아내 마음에서 어엿이 괜찮은 남편도 평생 지질한 남편이 된다. 하지만 예수님 사랑이 진실로 깨달아지고 그 사랑의 강렬한 빛 앞에서 내 존재의 누추함과 비루함이 확연히 깨달아지면 내 남편의 소중한 면모들이 드러나기 시작하면서 자발적 순종이 가능해지기 시작한다. 아내가 남편을 무시하지 않고 남편에게 자발적으로 복종해야 하는 이유는 남편이 곧 아내 자신이기 때문이다. 23절을 보자.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됨과 같음이나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성경은 명백히 남편이 아내의 머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말은 군림하고 호령하고 통제하고 지배한다는 의미에서의 머리가 아니라 몸에 붙어 몸과 뗄 수 없게 연합된 의미에서의 머리라는 뜻이다. 머리는 몸에게 명령하기보다는 몸을 배려하고, 몸이 행함으로 몸과 머리 모두에게 유익한 것에 대해 몸과 대화하고 몸에게 권면한다. 몸에게 명령만 하는 머리는 일중독자다. 그런 머리는 결국 몸을 망가뜨려 머리 자신도 상하게 만든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시다. 하지만 명령하고 통제하고 군림하는 머리가 아니라 자기를 자발적인 사랑으로 목숨까지 내주셔서 그 사랑이 움직이게 하고 그 은혜의 감격이 몸을 역동적으로 활동하게 하는 머리시다. 머리는 몸 위에 있기보다 몸과 함께 있다. 그것을 고린도전서 11:3은 이렇게 표현했다. “각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요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그리스도의 머리는 하나님이시라.” 여자의 머리는 남자다. 그런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머리가 하나님이신 것과 같다. 그럼,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머리시기 때문에 예수님 위에 군림하시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자신을 내주시는 사랑으로 완전히 연합하신다는 면에서 머리와 몸의 관계를 설명하는 거다.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하신 게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복종하셨다. 그렇게 해도 될 만큼 아버지 사랑이 순결하고 풍성하고 아름답고 겸손하시기 때문이다. 사랑과 복종은 너무나 아름답게 결합되어 있다.이 지극히 아름다운 사랑과 복종의 관계가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로 나타난다. 교회는 억지로 명령에 불복종하면 큰일 나기 때문에 예수님께 복종하는 공동체가 아니다. 자기를 내주시는 예수님의 사랑에 겨워 더 내드리지 못하는 걸 안타까워하고, 더 순종하지 못하는 것을 한탄하며, 자발적으로 기꺼이 행복하게 순종하는 예수님의 신부다. 성경은 남편과 아내의 관계가 그래야 한다고 하신다. 물론 그렇게 해야 한다는 이유만으로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예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날마다 새롭게 기억함으로, 그 은혜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감으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께 순종하다보니 어느새 조금씩 남편과 그런 아름다운 연합의 관계를 이루어가게 될 거라는 말씀이다. 시간이 필요하다. 버티고 견디는 시간이 필요하다. 회복의 시간은 어느새 찾아온다. 남편의 복종아내가 남편에게 또한 남편이 아내에게 어떻게 하는 것이 복음적인 태도인가 하는 문제를 다룰 때 아내들에게 요청하는 건 석 절에 불과하지만, 남편들에게 요청하는 건 무려 일곱 절이나 된다. 아내들에게는 단지 복종하라, 복종해야 할 이유는 이거다 말한다. 반면에 남편들에게는 아내를 사랑하라는 명령과 더불어 그렇게 사랑해야 하는 이유, 아내를 사랑하는 방식과 범위, 그리고 아내를 사랑하는 삶이 주는 은혜까지 세세하게 다룬다. 25절은 “남편들아”하고 시작하는 말씀은 한 사람의 남편인 입장에서 적잖이 부담스럽다. 정직해야 할 텐데 과연 제대로 정직할 수 있을까 하는 마음이 앞선다. 이 말씀을 주신 상황은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이 대단히 어색하고 낯선 시대였다. 게다가 복음적으로 사랑하라는 말은 좀 더 힘들고 버거운 명령이었을 게 분명하다. 반면에 우리 시대는 상대적으로 아내 사랑이라는 주제가 낯선 주제는 아니다. 물론 아내를 제대로 사랑하느냐의 문제는 여전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 시대에 아내 사랑을 말한다면, 그 사랑이 어떤 사랑이냐를 물어야 한다. 어떤 조건과 상태의 사랑이냐? 누가 나에게 아내를 사랑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즉시 사랑한다고 말할 거다. 사실이다. 하지만 아내가 내 대답에 전적으로 동의할 것인지는 의문이다. 아마도 아내는 내 생각과 다를 가능성이 많다.아내로부터 종종 지적당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난 아내가 아프면 싫다. 하지만 아내가 아파서 싫은 건지 아내가 아프면 나에게 맞춰줄 수 없기 때문에 싫은 건지는 구분하기 어렵다. 난 아내가 풀 죽어 있으면 싫다. 아내가 염려되어서 싫은 건지, 아내가 내 기분에 안 맞추어도 되는 권리를 가졌기 때문에 싫은 건지는 알기 어렵다. 거의 드문 일이지만 일 년에 한두 차례 내가 출근할 때 아내가 마중 나오지 않거나 퇴근할 때 아내가 반기지 않으면 마음이 상한다. 아내가 밥 차려줄 생각 안 하고 자기 일에 몰두하고 있으면 대견해 보이기보다 불편하고 서운해진다. 아내가 웃을 때가 좋고, 나를 환대해 줄 때가 좋고, 아내가 나를 인정해 줄 때가 좋다. 아니 그럴 때만 좋다. 결국 아내가 내 중심으로 움직이지 않는 모든 상황을 싫어하는 거다. 내가 매우 이기적이라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러고도 내가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건지 의심스럽다. 아내가 매우 정상적인 경우에도 이 정도면 부정적인 문제가 있는 아내들은 어떠하겠는가?그런데 25절은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면서 “예수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기를 내주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한다. 내 이기적인 본능을 완전히 거스르는 말씀이다. 아내를 사랑하는 게 성장 배경이나 기질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쉽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게 쉽고 어려움은 남편에게 달려있는 건 아니다. 남편이 아무리 성격이 좋고 인품이 뛰어나도 아내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면, 인내하고 견딜 수는 있어도 사랑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아내가 남편이 기대하고 원하는 수준으로 변화된다는 것 역시 기대하기 어렵다. 더구나 아내가 남편의 기대 수준에 맞추어 주기 때문에 사랑하는 거라면 엄밀한 의미에서 그건 사랑이라기보다는 아내의 변화와 높아진 수준에 대한 반응이라고 할 수 있다. 굳이 상대적으로 비교하자면, 모든 사회, 경제, 문화의 측면에서 아내들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했던 시대에 남편들보다는 아내들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이런 가치전복적인 말씀을 주신 것은 가히 엄청난 혁명이 틀림없다.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딘다”고 말한다. 여기서 말하는 ‘모든 것’에는 아내의 변화 여부나 아내가 남편의 기대 수준에 맞느냐의 여부에 대한 조건적인 요소란 없다. 아내가 변하지 않았어도 아내의 수준이 남편이 생각하는 것에 미치지 않아도 사랑하는 게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거다. 오늘 내 감정이나 내 상황보다 무조건적 약속에 따른 사랑이다.세계 최고 수준의 성공회 신학자이자 저명한 기독교윤리학자 스텐리 하우어워스(Stanley Hauerwas)는 비폭력 기독교 평화주의, 공공 윤리, 정치신학 분야에서 탁월한 책들을 남겼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앤은 일생 동안 매우 심각한 조울증 환자였다. 앤의 어머니는 결벽증 같은 정신병 증상과 결과를 통제하려는 집착이 강했는데, 앤은 그런 어머니에 대한 저항으로 결국 어머니도 포기했고 어머니가 강요하는 교회도 버렸다. 어머니의 그런 증세는 바람피우는 자기 남편과도 무관하지 않았는데 그녀는 결국 심장병으로 죽게 되어 바람피운 남편에 대한 복수를 완성했다. 그리고 앤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직후부터 미쳤고, 어머니에 대한 분노로 자기 남편 스텐리를 상대했다. 매일 늦게 자고 아주 늦게 일어났고 하나뿐인 아들은 방치했다. 남편이 잘해 주려 하면 할수록 분노로 대응했다.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면서 예술가에게는 자유가 필요하다는 말로 다른 남자와의 성관계를 고집했고 환시와 환청을 반복했다. 남편 스텐리의 동료 교수에게까지 엄청나게 집착하면서 스토킹을 했다. 그 동료 교수가 너무 힘들어서 스텐리에게 힘들다고 하소연할 정도였다. 아내는 아무것도 책임지지 않으면서, 모든 책임을 남편에게 떠넘기고 남편 핑계만 댔다. 스텐리 자신도 조울증에 걸릴 지경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아내를 돕다 닳아버렸습니다. 조울증 환자인 아내와 살면서 미칠 듯이 고독했습니다.” 그의 아내는 결국 사망했다. 하지만 스텐리는 끝까지 아내 곁을 지켰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예수와 함께 하루하루를 견디며 버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가 그토록 참혹한 부부관계 속에서도 최고의 신학자로 섬길 수 있었던 비밀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내가 신학자로 성숙해 갈수록 모르는 게 너무 많다는 것을 깨달아 갑니다. 나는 극단적인 고통을 통해, 단지 한 명의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중일 뿐입니다.” 그는 예수님 앞에 담백하게 선 자의 모습이고, 그 모습이 그를 끝내 지켜주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물론 스텐리 하우어워스의 사례는 매우 특수하지만 남편들이 자기 아내를 바라볼 때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다소 자기로서는 견디기 어려운 면들이 엿보일 수도 있다. 영 맘에 들지 않는 습관이나 도무지 맞추기 어려워 포기하고 만 기질이 있을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런 아내를 예수께서 자기 몸을 내주어 교회를 사랑하신 것 같이 사랑하라고 하신다. 수행 불가능한 명령이다. 이 말씀은 아내들에게 주어졌던 말씀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까지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가 하는 사랑의 수준에 대한 요청이 아니라 사랑할 만한 조건이 없는 아내도 사랑할 수 있는 비밀에 관한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남편들에게는 오직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자신을 내주신 사랑을 깨닫고 그 길을 따름으로만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견디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는 방식으로 사랑할 가능성이 생긴다고 말씀하는 거다.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남편들은 대개 마음이 중요하다는 식으로 본인의 어색함이나 하기 싫은 행동을 변명하기 쉽다. 밥 한 끼 먹고 어디 같이 놀러가는 걸로 관계회복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내들은 대개 훨씬 더 사소한 면들을 필요로 하는 것 같다. 무엇보다, 잘 들어주는 거다. 남편들이 가장 하기 어려워하는 거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려면 힘들어도 아내에게 맞추어야 한다. 그게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신 방식이다. 예수님은 교회를 물로 씻고 말씀으로 깨끗하게 해서 거룩하게 하셨다. 자기 손에 물을 묻혔고 자기 몸에서 피가 쏟아지기까지 그렇게 하셨다. 티나 주름 잡힌 것 없이 거룩하고 흠 없게 하시려고 자기를 죽음에 내주셨다. 말씀으로 깨끗하게 한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세례를 말한다. 세례는 죽음이다. 교회가 예수님의 죽음을 통해 자기 죽음을 통과하게 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어 생명력 가득한 삶을 살게 하신 거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남편들에게도 자기죽음을 불사하는 사랑만이 아내로 하여금 자기죽음을 통과하게 하여 새신랑의 새신부로 살게 하는 여정이 되는 거라고 말씀하시는 셈이다. 우리는 죽음의 순간이 코앞에 있어 그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에야 비로소 쉽게 상처받고 삐지고 원한을 품고 의심과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히던 심령이 성령께서 이끄시는 여유와 관대함으로 바뀐다. 어차피 죽을 그날의 죽음을 당겨와 오늘 죽으라는 거다.이 사실이 남편들로 하여금 자기 아내를 자기 자신처럼 사랑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다. 예수님은 교회가 예뻐서, 맘에 들어서, 사랑할 만한 조건을 충분히 갖춰서 사랑하신 게 아니다. 교회는 그야말로 허물투성이, 상처투성이, 연약함투성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런 문제들에 개의치 않으시고 그냥 사랑하신다. 교회의 어떠함이 사랑 여부를 결정하게 하지 않으시고 예수님 자신의 충만한 사랑이 모든 조건을 넘어 사랑하게 하는 유일한 조건이 되게 하신다. 남편들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그런 사랑의 대상인 교회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다. 동시에 이렇게 생각하면 좋을 것 같다. 남자들은 대개 성공, 영광, 승리, 인정받음, 명예 같은 주제들에 대해 여자들보다 상대적으로 훨씬 더 민감하다. 여자보다 강하다는 의식 때문에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승자 원칙에 뿌리 깊게 길들여졌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일들은 사실 진정한 성공, 진정한 영광, 진정한 승리, 진정한 인정받음, 진정한 명예를 위한 최고의 조치였다는 것을 알아야 하다. 따라서 남자들은 두 번만 방향을 바꾸면 된다. 자기가 늘 구하던 그것들의 진짜 원형을 구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면 된다. 그리고 그것들을 추구하는 열망의 수혜자를 자기로부터 아내로 돌리면 된다. 추구하던 것을 계속 추구하되 진짜를 추구하고, 자신을 향하던 방향을 아내를 향해 바꾸기만 하면 되는 거다.이를 위해 아주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예수님은 분명히 남편들에게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동시에 자기 몸을 사랑하듯이 아내를 사랑하라고 하신다(28-29절). 그렇다면 이 말씀은 남편들이 자기 몸 사랑하는 수준은 예수님이 교회를 사랑하는 수준과 같다는 거다. 남편들의 속내를 꼬집은 말씀이다. 그러니까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할 때 예수께서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사랑하라는 말씀을 순식간에 명확하게 깨닫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그냥 자기 몸 돌보듯이 아내를 돌보면 된다. 그런데 이게 말은 쉬워도 막상 실천하려면 어렵다. 생각하는 것과 사는 것은 완전히 딴판이다. 목사들이 특히 조심해야 한다. 나도 말로는 언제 죽어도 후회 없다고 말할 때가 있는데 그게 어느 정도는 사실이고 또 스스로는 먹고 마시는 것에 별 관심이 없기 때문에 거짓을 말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일단 밥 먹는 시간이 지나면 무척 힘들어 한다. 밥 먹기 한참 전에도 뭘 먹을까 하는 게 큰 관심사다. 무엇보다 일단 몸에 좋다고 하는 건 어느새 나도 모르게 무척 열심히 꾸준히 먹는다. 다른 좋은 습관을 위해 발휘하는 의지보다는 몸을 위해서 발휘하는 의지가 훨씬 더 강하고 지속적이다. 따라서 남편들이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일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방향을 트는 것보다는 훨씬 더 간단하다.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맞추는 일이 이미 일상이 되었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진심으로 더 깊이 제대로 사랑하는 게 어렵다. 반면에 남편들은 자기 몸 위하는 것처럼만 하면 된다.그런데 실제로 아내가 남편 자신의 몸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둘이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었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수님 몸으로 연결된 한 몸이다(30절). 따라서 모든 남편은 태초의 고백을 회복해야 한다. 태초에 아담은 잠에서 깨어 이전에는 없던 존재 곧 하와가 자기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이렇게 고백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이쉬(남자)에서 취했으니 이샤(여자)라 하리라”(창 2:23). 곧 ‘너와 나는 한 몸이로구나, 너는 곧 나로구나, 내가 곧 너 안에, 너는 곧 내 안에 있는 것이로구나!’라는 고백이었다. 그것은 아내의 존재에 대한 고백인 동시에 자기존재에 대한 고백이었다. 다시 말해, 내 아내를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건 곧 나 자신을 누구로 생각하느냐 하는 고백과 같다. 그 고백을 회복하면 모든 게 쉬워진다. 하지만 남자는 어느새 하나님의 사랑에서 떠나면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모든 결과를 자신이 통제하려는 죄의 본능을 따랐다. 그것은 아내들도 마찬가지다. 그에 따라 통제하고 조정하는 존재가 되려고 힘을 갈망하게 됐다. 오직 힘의 논리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태어나 그 세상에 익숙하게 길들여진 것이다. 그래서 나보다 약한 존재를 사랑과 돌봄의 대상이 아니라 내 힘 아래 복종해야 할 존재로 여겼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죄의 본능을 거스르고 하나님 본래의 질서를 회복하는 복음으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다. 가장 강한 자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낮추신 복음의 질서에 우리 자신을 맞출 때만 우리는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샬롬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남자를 태생적인 근력에 있어서 여자보다 더 강하게 만드셨다. 그에 따라 남자가 여자 위에 군림하려고 할 여지가 많다는 걸 미리 아셨다. 여자가 남자에게가 아니라 남자가 여자에게 맞추라는 거였다.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자시 앞에 오게 하고 엎드리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가 아니다. 오히려 강한 자가 자기 환경을 떠나서 약한 자에게로 가야 한다. 자기 집 곧 자기가 마음껏 군림하고 자기 방식이 통하는 모든 환경, 자기를 옳다고 인정해 주는 모든 공간, 자기 생각과 습관을 확립해 준 공간을 홀연히 떠나서 아내에게로 가야 하는 거다. 그래야만 비로소 공평한 상호 존중과 피차 복종이 가능하기 때문이다.물론 요즘에는 적지 않은 가정 안에서 아내가 더 강자처럼 보일 때도 있다. 어떤 경우에도 대원칙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맞추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교회다. 힘 있는 자가 발언의 수위를 낮추고, 연약한 자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포기하는 곳이다. 그리고 그 실행 에너지가 바로 가정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가정에서 습관이 잘못 든 사
피차복종
아내의복종
남편의복종
리프레시운동
교회와가정
있게 하신 자리
by 정갑신
2022-05-01
[공동체, 그 회복을 위하여]• 있게 하신 자리_정갑신가정 공동체의 회복_정갑신• 나는 ‘피차 복종’의 자리에 있는가?• 나는 ‘변명을 덮는 순종’의 자리에 있는가?포용 공동체의 회복_박삼영• “그리스도를 본받아 왕의 자리에서 내려오라” • 교회는 어떻게 세상을 포용할 수 있는가?공감 공동체의 회복_권성찬• 교회는 세상에서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 • 교회는 세상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생명 공동체의 회복_정민영• 세상은 교회로부터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 • 어떤 교회라야 세상이 생명을 기대할 수 있는가?5월 한 달 동안 매주 이어질 위의 글들은 2021년 1월 예수향남교회 제1차 ‘열린 말씀 집회’의 설교를 간추린 것입니다. 삶과 역사의 모든 문제는 결국 믿음의 문제입니다. 너를 불신하는 나를 믿느냐, 너의 생각도 옳을 수 있지만 내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느냐, 내 생각보다 너의 생각이 더 옳다고 믿느냐, ‘나’를 믿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절망을 믿느냐에 따라 우리의 선택과 결정, 그리고 결과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믿음의 강도는 믿음의 대상에 대하여 얼마나 제대로 알고 있느냐가 결정하고, 그 믿음이 어떤 강도냐에 따라 무엇이든지 시도하거나 참을 수도 있고, 반대로 매사를 불안하게 느끼며 아무것도 못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믿음의 근본이 중요한데, 그것은 믿음의 대상에 관한 것이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믿느냐(나 혹은 너 혹은 현실의 어떤 것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나’를 믿느냐) 하나님을 믿느냐로 갈라집니다. 사람들은 대개 ‘나’만 믿을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할 때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믿기보다 하나님을 믿을 만하다고 판단하는 ‘나’를 믿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상황에서 하나님이 믿을 만하지 못하다고 판단될 때 쉽게 좌절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각자가 ‘나’만 믿습니다. 따라서 서로를 믿지 못합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해, 우리가 과연 각자의 ‘나’를 믿으며 사는가 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실제로 보다 근원적으로 파고들면, 우리는 자신을 믿지 못하거나 자신이 믿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걸 알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너’에 대한 믿음의 여부를 판단해야 하는 ‘나’를 못 믿으니, ‘너’도 믿을 수 없는 게 당연합니다. 결국 우리 삶에서는, ‘너’도 ‘나’도 믿음의 대상이 아닌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믿음이 없다면 어떤 작은 실제적인 행동이라는 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도 우리는 매일 매일 그럭저럭 살아갑니다. 따라서 우리는 결국 어떤 ‘막연한 우연’을 믿음의 대상으로 삼아 ‘방치된 인생’을 살아가는 중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우연’에는 어떤 목적과 의미와 일관된 뜻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나와 너, 그리고 현실을 믿을 수 없는 상태에서 목적과 의미와 뜻을 갖지 못하는 ‘우연’에 인생을 맡기는 게 합당치 않다고 판단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믿을 만하다고 판단될 때만 믿었던 게 분명한 삶에서 벗어나, 그래서 결국 ‘나’를 믿고 살았던 삶에서 벗어나, 아직 한 번도 시도해 보지 않았던 삶에, ‘하나님’을 믿는 삶에 자신을 던져볼 만하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믿음이 우리를 찾아와 인격적으로 만나 주시는 하나님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하나님의 은혜와 신비를 이런 이성적 사고의 과정을 통해 설명하려고 시도해 보는 중이라는 걸 말씀드립니다.) ‘어떤 대상을 믿느냐 하는 믿음’이 모든 선택과 결정을 결정하여 우리의 삶을 형성한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이 친히 빚으시는 삶이라는, 새롭고 낯설고 두렵고 영광스런 그림에 자신을 던져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이 하시는 말씀과 그의 뜻에 더 압도적인 무게를 둔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현실과 상황에 대한 나의 모든 판단보다 하나님 말씀의 판단에 비교할 수 없는 우월성이 있다는 걸 전제하는 것입니다. 그 때, 말씀의 판단을 따른 결과를 두고 고민하고 씨름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깊고 오묘하신 뜻을 발견하는 신자의 영광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따를 수 없고, 따르지 않으면 여전히 ‘나’의 판단 안에만 갇혀 있게 될 것입니다. 어떤 새로움도 경험하지 못한 채, 또 다시 믿을 수 없는 ‘나’에게로 되돌아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고 보면,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것은 결국 신학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소위 무신론이라고 부르는 것은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를 믿겠다는 신학적 판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나와 너와 세상이 결국 믿음의 대상일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신학적 판단입니다. 그리고 그 판단에서 삶의 모든 결과물이 나옵니다. 독일이 만든 최초의 히틀러 관련 영화 ‘다운폴’(Downfall)은 히틀러의 마지막 10일의 행적과 심리를 다룹니다. 소련이 베를린을 침공하여 드디어 독일의 몰락이 임박한 순간, 히틀러와 그의 참모들은 베를린 시민들을 대피시키느냐 마느냐로 옥신각신하며 격렬한 논쟁을 벌였습니다. 이 때 히틀러의 신학적 판단이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베를린 시민들의 안전을 생각할 때가 아니라 장렬하게 함께 죽는 것이 더 낫다는 판단이었습니다. 전쟁 초기에 독일 국민의 명예와 안전과 영광에 열변을 토하던 그의 중심이 처음부터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이 명징하게 드러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는 다윈의 적자생존론을 신봉하고 괴테와 바그너와 니체에 심취하면서 우월한 종족의 보존 열망에 심취하는 동안, 자기 안에서 심각한 신학적 왜곡을 일으킵니다. 그에 따라 탁월성을 지니지 못하는 모든 종족은 소멸해도 괜찮다는 사이비적 환상에 사로잡혀 수많은 고귀한 생명들을 이유 없이 희생시켰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히틀러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는 문제였습니다. 당대 교회가 시대와 시대정신을 복음적으로 제대로 해석하고 선포하지 못한 것에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고 해야 합니다. 사람과 삶과 역사에 대한 교회의 복음적 해석과 그것을 좇는 개개인의 신학적 판단이 모든 상황의 희비를 가르는 문제였던 것입니다.이것은 가정과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이나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일차적으로 개인의 지식이나 경험, 혹은 기질과 습관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 뒤에서는 나와 하나님 사이 어딘가에 자리하고 있는 신학적 판단이 작동합니다. 그리고 작동하는 신학적 판단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죄와 배제의 정신이 가정과 교회를 지배할 수도 있고, 헤아림과 포용의 영혼이 지배할 수도 있습니다. 율법적인 고집으로 무장된 신학적 판단에 지속적으로 노출되었느냐 아니면 복음적인 균형이 잡힌 신학적 판단이 내면에 스며들었느냐에 따라, 가정과 교회를 감싸는 분위기와 문제 해결 방식과 이후의 모든 결과는 달라집니다. 우리가 어떤 신학적 판단을 지속적으로 고민하고 나누느냐에 따라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과 역사가 달라지는 것입니다. 결국, 복음적인 신학적 판단을 열망하고 추구하는 교회의 정신이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교회가 매사에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단지, 교회가 말씀에 근거한 건강한 복음적 신학에 기초하여 가정과 연결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입니다.전염병의 대유행과 같은 상황도 유사합니다. 그것은 일단 전염병의 문제지만, 전염병이라는 현상에 대한 이해와 전염병의 확산에 대응하는 방식과 태도는 결국 신학의 문제입니다. 자연과 사람에 대한 신학적 성찰이 어떠하냐에 따라 전염병을 인식하고 다루는 태도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일에 건강한 신학적 판단이 부재하거나 어떤 왜곡이 생긴다면 같은 교회에 다니는 성도들 안에서도 전염병에 관한 이슈들을 다루는 방식이 달라지기 때문에, 생각보다 심각한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작게는 부부가 서로를 바라보고 상대하는 방식, 부모가 자녀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서로가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우리 삶의 행복과 불행의 상당 부분을 결정하곤 하는데, 그 모든 방식 역시 교회가 말씀을 해석하고 풀어내고 선언하는 신학적 해석과 판단에 달려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엡 1:23)이라고 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 존재합니다. 교회의 시작과 끝이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정치나 정치적 판단이 아니라 그리스도께 기대어야 합니다. 권력과 친하려 하면 안 됩니다. 경제 논리로 돌아가면 안 됩니다. 습관과 전통의 논리를 들이대도 안 됩니다. 독재적인 목회자 일인의 목소리나 스스로 주인 행세하려는 소수의 리더십의 독재적 결정으로 돌아가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는 오직 예수님의 몸이라는 기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머리이신 예수님으로부터 듣고, 듣는 말씀에 따라 움직이는 예수님의 몸이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교회가 신학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가정을 위해서도 교회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있습니다. 그 몸이 우리에게 오신 형식은 말씀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요 1:14). 따라서 교회는 말씀을 통해 예수님과 동행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몸이 되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통치를 받습니다. 결국 교회에서 사람의 욕망으로부터 독립한 말씀이 건강한 방식으로 흥왕해야만, 그 말씀의 샘물로 가정이 살고, 그 가정이 또 교회를 살리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세상도 그 샘물에 적셔진 성도들의 삶과 시대의 정신을 통해 생명을 얻고, 세상은 또 교회가 필요로 하는 모든 자원을 교회로 흘려보냅니다. 세상과 가정은 그렇게 교회를 통해 연결됩니다. 교회는 각 가정을 하나님의 질서에 따라 온전히 세워, 그 가정들이 세상을 제대로 만나 ‘있게 하신 자리에 서게 하는’ 허브라고 할 수 있습니다.어느 가정에서든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저희 가정에서도 종종 일어납니다. 장로님 한 분이 석류 한 박스를 보내 주셨습니다. 며칠 후 생식으로 아침 식사를 하려던 차에 아내에게 석류가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으로, 손에 빨간 물이 드는 것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석류 씨를 일일이 발라 접시를 상에 올렸습니다. 하지만 아내의 반응은 즉각적이고 냉정했습니다. “별로 먹고 싶지 않아!” “아… 그래? 알겠어….” 순간 실망했지만 내색도 못한 체하며, 고마워하는 칭찬에 대한 기대를 쓸쓸히 접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는 동안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서운함이 올라왔습니다. 대개, 서운함이 마음 어느 구석에 자리를 잡으면, 그것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더라도 언행심사에 일정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래서 별것 아닌 일에도 마음을 애매하게 만들고, 주고받는 말에 은근슬쩍 묻어나옵니다. 그리고 적절한 표현으로 잘 다루어지지 않는 한, 반드시 폭탄으로 터지게 마련입니다. 따라서 그 즉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고, 동시에 마태복음 말씀 한 구절이 떠올랐습니다.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데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마 11:16-17).사실, 이 말씀에 대해서는 두 종류의 해석이 있습니다. 전통적인 해석과 문맥에 따른 해석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이 말씀을 “이 세대가 아주 냉담해서 아무리 애를 쓰고 말씀을 전해도 반응이 없다”고 해석해 왔습니다. 이런 해석을 따른다면, 사랑의 섬김에 냉담한 반응을 보인 아내를 정죄하고 서운해 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정당해집니다. 아내는 피리를 불어도 춤추지 않는 악한 심령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하지만 문맥을 제대로 따르면 이 말씀은 더 이상 그렇게 해석되지 않습니다. 피리를 불었으면 불었지 꼭 거기에 장단을 맞춰 줘야만 하는 건가? 왜 다른 사람이 반드시 내 뜻에 장단을 맞춰야만 한다고 기대하는 것인가! 이러한 해석입니다. 피리를 분다면 그냥 자기가 좋아서 부는 것으로 충분하고, 슬퍼서 운다면 슬픔을 울음으로 표현한 것으로 충분하지 왜 다른 사람이 거기에 장단을 맞춰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석해야만 이어지는 말씀과도 자연스럽게 연결될 수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례 요한의 금식과 근검한 삶에 대해서는 귀신들려 미쳤다고 했습니다. 동시에 세리들과 어울리며 식사 교제를 나누는 예수님에 대해서는 먹고 마시기를 탐하는 부패한 종교인이라고 비난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것이 바로 패역하고 부패한 세대의 특징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상대방의 말과 행동을 그의 마음과 뜻에 따라 이해하지 않고, 내가 생각하고 의도하고 기대하는 얄팍하고 고집스럽고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마음을 따라 판단하려는 것이 바로 타락하고 악한 세대의 속성이라는 겁니다. 따라서 ‘석류를 깠으면 깠지, 굳이 내가 깐 석류를 아내가 먹어야만 한다고 생각하면 안 되는 거야. 내가 아내를 생각해서 석류를 까서 바친 것만으로 이미 내 마음은 완성된 거야’라고 생각할 수 있다면, 오히려 묻지도 않고 준비해서 아내에게 먹으라고 요구했던 것이 미안한 일이 되는 거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에 대한 바른 이해는 가정에 평화와 행복을 가져옵니다. 말씀이 우리 안에 어떤 이해로 흐르느냐에 따라 우리 안에 신학이 형성되고, 그 신학에 따라 삶의 결과가 달라지는 것입니다.위험한 말을 정직히 한다면, 교회는 종종 가정 파괴의 주범이 되곤 했습니다. 경건과 헌신에 대한 교회의 해석이 성경적 해석 대신 전통적인 문화적 범주에 갇힌 것이었기 때문에, 소위 ‘교회 중심’이라는 이념을 통해 가정을 황폐하게 만들고 교회만 비정상적으로 비대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성경에 복음을 위해 부모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씀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성경 전체의 문맥을 따라 읽는다면 성경은 동시에 부모를 공경하고 형제를 사랑하라고도 했습니다. 아내를 목숨 바쳐 사랑하라고 했고, 남편에게 범사에 복종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의미들을 통전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때만 가정이 성경적인 가정이 되고, 가정이 왜 교회인지를 알게 되고, 그에 따라 가정에서 미움과 서러움과 분노와 원망의 샘이 그치고 사랑과 용서와 평화의 샘이 솟을 수 있습니다. 부모형제를 미워하라는 말씀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지 말라는 것이지 미워하라는 말이 아닌 것을 우리 양심이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히브리어 문법에는 비교급이 없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세상에 있는 그 어떤 것도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면 안 된다는 것을 미워하라고 표현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묵상할 때는 문맥을 따라 읽는 것을 넘어, 성경 전체의 흐름과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하나님에 대한 명확한 이해가 모든 성경 읽기의 큰 기반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기반이란 대략 이런 것입니다. 오늘 내가 묵상 속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오늘의 하나님이실 뿐 아니라 나의 내일로부터 오신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오늘 내가 묵상하는 중 내리게 되는 결정은 나의 내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내미시는 손길일 수 있다. 나를 여기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은 나의 내일에도 ‘인도하실’ 하나님이시다. 인도하신 하나님과 인도하실 하나님은 같은 하나님이시다. 그 하나님을 향한 신뢰와 감사가 오늘 나를 끌어가야 한다. 그리고 오늘 내 앞에 있는 말씀은 나의 어제와 내일을 연결하여, 나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는 동시에 인도하실 하나님과 동행하게 하는 능력이다. 더불어 내가 오늘 하나님과 그의 말씀 앞에 있다고 하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나를 얼마나 신실하게 인도해 오셨는가 하는 간증이면서, 동시에 하나님께서 나를 신실하게 인도하실 것이라는 약속이다. 오늘 나는 간증과 약속을 담은 자로 말씀 앞에 선다. 그것이 바로 오늘 말씀 앞에 서 있는 나의 자리가 지니는 메시지다. 비교적 최근에 출간된 ‘내일의 교회’라는 책에는 노르웨이의 감옥 이야기가 나옵니다.[1] 그것이 현실적으로 존재해야만 한다면 그 존재목적을 합당하게 성취해야 한다는 면에서, 노르웨이의 그 감옥은 세상에서 가장 바람직한 감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옥은 현실적으로 교화 공간이라기보다는 형벌 공간입니다. 그래서 가해자에 대한 피해자의 복수의 원칙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복수에 근거에 형벌 공간에서는 본질적으로 교화가 불가능합니다. 이 때문에 노르웨이는 교도소 제도를 바꾸었습니다. 그에 따라 복수의 원칙을 용서와 화해와 사랑의 정치학으로 바꾼 감옥을 만든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범으로 운영하게 된 감옥의 공간은 연립주택 같은 생활공간이고, 수감자들은 일상의 생활인처럼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다만 공간적으로만 섬으로 분리되어 있는데, 육지에서 섬으로 연결하는 페리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수감자입니다. 이 감옥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상호신뢰의 회복입니다. 삶의 긍정적인 경험을 통해 용서와 화해와 사랑을 깨닫게 하고, 이를 위해 서로 환대하고 화해하고 사랑하는 교화를 지향하는 겁니다. 이에 따라 그 감옥 수감자들은 세상과 단절된 상태에서 분노와 후회로 시간을 보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연스럽게 상호신뢰의 분위기 속에서 사회생활을 하던 중 다시 세상으로 복귀하는 겁니다. 따라서 이 교도소 출소자의 재범 비율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교도소 운동을 가능하게 만든 사회적 신뢰의 정서는 이미 1796년 한스 닐센 헤우게(Hans Nielsen Hauge)에 의한 말씀운동 복음운동으로 시작되었습니다.[2] 말씀에 대한 한 개인의 진실된 헌신이 결국 결국은 사회구조적인 문제 해결 방식에까지 스며들게 되는 것입니다.대립의 감정과 정치적 야망의 찌꺼기들 대신 맑은 샘물 같은 말씀이 교회공동체 안에서 흐르는 걸 볼 수 있다면 더 이상 바랄게 없겠습니다. 그 샘물을 통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격려를 받을 것인지, 또 얼마나 많은 가정들이 일어나고, 교회가 얼마나 더 새롭게 될 것인지, 그리고 말씀을 좇는 성도들의 일상을 통해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정서가 흐를 것인지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런 기대 속에서 ‘가정과 교회, 교회와 세상’이라는 주제를 함께 생각하고, 그 고민의 기반 위에서 우리 각자의 내면과 가정과 교회를 들여다보려는 이유입니다. 그래서 결국, 교회가 우리 각 가정과 성도의 삶을 통해 맑은 샘물을 세상으로 흘려보내고, 세상을 윤택하게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주]1. 이 책은 조니 베이커(Jonny Baker)를 비롯해 영국교회선교회(CMS)의 훈련과 리프레시 운동을 이끌고 있는 13명의 저자가 “이 세상을 어떻게 바꾸어 하나님 나라를 실현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그 답을 찾아가는 에세이 모음집이다. 원제 “Future Present”(현존하는 미래)가 암시하듯이, 이 책은 마땅히 이루어질 미래의 하나님 나라의 그림을 상상하고, 그 상상으로 가기 위해 현재 어떤 행동을 필요로 하는가를 고민하면서, 실천적으로 세상에 표현하고 선포하는 동안 비로소 세상이 변화된다는 입장에서, 혁신적인 교회운동과 말씀운동을 전개한다. 조니 베이커 외, 김준철 옮김, 내일의 교회, 성공회 브랜든선교연구소, 2020.2. 로렌 커닝햄, 제니스 로저스, 열방을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책(The Book That Transforms Nations)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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팀 켈러: “분립하고 개척하십시오”
by 고상섭
2022-04-26
팀 켈러 목사는 리디머 교회에서 은퇴하면서 이 대형 교회를 다섯 교회로 분립했다. 최근 미국의 한 매체와 가진 인터뷰에서 팀 켈러 목사는 대형 교회는 목회적 돌봄을 하기에는 구조적 한계가 있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그는 교회의 개척과 분립을 강조했다. 대형 교회를 여러 개의 작은 교회들로 나누면 지역사회와 더 밀접한 관계를 맺게 되고 그 역동성이 강화된다고 그는 말했다. 실제로 팀 켈러 목사가 리디머 교회에서 사역할 당시에도 ‘교회 개척 운동’은 이 교회의 다섯 가지 집중 사역 중 하나였다. 팀 켈러 목사는 교회 개척이야말로 잠자는 교회를 깨우고 교회의 역동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책이라고 설명한다. ‘센터처치’에서도 그는 교회의 역동성 회복을 위해서는 교회를 분립하고 개척하는 것이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보다 더욱 효과적이라고 말한다. 전도 프로그램이 아니라 전도적 교회를 세우라! 전도를 중시하지 않는 교회는 없다. 그래서 많은 교회들이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며, 또 전도 프로그램을 통해 더러 부흥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부흥의 실상을 면밀히 살펴보면, 믿지 않는 사람들이 회심하는 경우보다 기존 교회에서 수평 이동을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역사가 있고 부흥한 교회들은, 좋은 전도 프로그램을 도입하더라도, 새롭게 시작한 교회들만큼 비신자들을 품지는 못한다. 미국 교회에 대한 여러 연구 결과를 보면, 새로 시작된 교회의 교인은 삼분의 일 내지 삼분의 이가 이전까지는 교회 다니지 않던 사람들이다. 이에 비해 10-15년이 넘은 교회에 등록하는 교인의 80-90퍼센트는 이전에 다른 교회에 다니던 사람들이다. 왜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일까? 교회는 개척하고 시간이 지날수록 강력한 내부적, 제도적 구심력이 생긴다. 이는 교회의 자원과 에너지의 대부분이 교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을 향하지 않고 교회 내부 곧 교인들과 교회 중심부 사람들의 관심사에 집중하게 됨을 의미한다. (물론 이러한 현상은 자연스럽기도 하고 바람직한 일면도 있다.) 그래서 오래된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그 지역에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는 집단의 영향을 더 많이 받는다. 대체로 그들은 지역에서 새롭게 부상하는 집단(새로운 계층, 새로운 세대 등)에 그다지 열려 있지 않으며 지도자의 자리를 내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교회는 지역사회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는 안정과 존경을 내세울 수 있는 교회가 된다. 이것은 30년이 넘은 대부분의 교회에서 왜 교인 수가 감소하는지를 잘 설명해 주기도 한다. 오래된 교회들은 필연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오래된 주민들의 필요와 감수성에 초점 맞추어야 한다. 이는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나 새로운 계층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기회의 박탈 또는 상실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일은 지속된다. 이와 반대로 새로운 교회들은 반드시 존중하거나 고수해야 할 조직적인 전통이 없다. 일반적으로 그들은 새로 시작하는 비신자들이 신앙의 발을 내딛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수십 년 째 몸담은 교인들이 없는 이런 교회에서는 새로운 그리스도인들과 새로운 교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표현할 수 있고, 그만큼 전도에도 훨씬 유연한다. 결국 한 도시 전체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유일한 방법은 새로운 교회의 숫자를 확실하게 늘리는 것이다. 리디머 교회를 다섯 개의 교회로 나눈 이유도 교인 수 4,000명의 대형 교회 하나보다 교인 수 400명 되는 10개의 교회가 훨씬 더 역동적이고 전도에 효과적이며 지역사회의 필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팀 켈러 목사는 말했다. 교인 4,000명인 한 교회와 400명의 10개의 교회가 각각 1년이 지난 후 교인 수를 비교하면 어떻게 될까? 작은 10개의 교회에서 교인 수가 훨씬 더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교회를 분립하거나 개척하는 것이 교회를 먼저 부흥시켜서 나누는 것보다 더 좋은 대안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교회 개척은 교회를 더 건강한 부흥으로 이끈다! 개별 교회만을 바라보면 한 교회에서 전도 프로그램을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만 전체 도시에서 그리스도인의 숫자가 늘어나려면 더 많은 교회 개척과 분립이 훨씬 더 좋은 대안이 된다. 또한 팀 켈러 목사는 교회 개척과 분립이 기존 교회를 건강하게 갱신하는 방법도 된다고 강조한다. 교회를 건강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세미나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을 배우고 도입하지만, 교회가 갱신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곧 교회를 나누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질문한다. “그러면 이 도시의 기존 교회들은 어떻게 됩니까? 먼저 한 교회가 부흥하고 그 부흥으로 교회가 개척되고 분립되어야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답은 새로운 교회를 세우는 것이야말로 기존 교회를 갱신하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새롭게 개척된 교회들은 전체 교회의 몸에 새로운 생각들을 불러일으킨다. 개척된 교회는 혁신을 일으킬 자유가 있고 도시 안에 있는 전체 교회를 위한 연구개발(R&D) 센터가 된다. 많은 오래된 교회들은 특정한 방식을 채택할 때 “기존에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지만, 새로운 교회는 새로운 접근법을 다양하고 쉽게 적용할 수 있다. 또 새롭게 개척된 교회들은 새롭고 창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을 도시에 일으킨다. 그들은 모험심을 가지고 다양한 사역들에 도전하는 경향이 있고, 이것은 도시 전체 교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기존의 100명의 한 교회가 10년 동안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고 정체되었다면, 그 교회에 다시 부흥의 파도가 새롭게 일어나기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며 많은 에너지가 투입되어야 한다. 그러나 100명의 교회에서 50명을 새로운 교회로 개척하면, 새롭게 개척된 교회는 개척 교회의 새로운 역동을 일으킬 수 있고, 기존의 교회도 50명이 되면서 더욱 역동성을 회복할 수도 있다. 아들 교회가 너무 잘해서 어머니 교회가 아들 교회의 영향력, 자원, 열정, 비전을 통해서 오히려 갱신되기도 한다. 새 교회를 개척하기 위해 교인들이 떠나는 것은 물론 고통이 수반되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어머니 교회는 이를 통해 높은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또한 결과적으로 기존의 리더십이 떠난 자리에 새로운 지도자들과 열정적인 구성원들이 유입되기 때문에 이전보다 더욱 역동적인 교회로 변모할 가능성이 높아진다. 새 교회를 개척한 것은 어머니 교회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어머니 교회 자체의 건강성도 더욱 높아지는 것이다. 또 하나의 교회가 아닌 새롭게 개척된 많은 교회들은 지도자들의 특색과 은사가 다르기 때문에 도시 안에 있는 다양한 사람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리디머 교회는 그 지도력을 백인 미국인 한 명에게 맡기지 않고 다섯 교회로 나누어 각 교회를 중국인, 한국인, 영국인, 레바논인 등의 담임목사들이 이끌도록 했다. 때문에 이 교회는 신학의 뿌리는 동일하지만 더욱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적 관점과 경험과 지혜를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고 팀 켈러 목사는 말했다. 결국 오늘날 교회가 건강을 되찾고 비신자를 그리스도인으로 만드는 길은 교회의 분립과 개척이다. 한 교회가 부흥해서 개척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교회를 분립하고 개척할 때 교회의 건강이 더욱 회복된다는 팀 켈러의 통찰력은 새롭고 신선할 뿐 아니라 당장 실천할 수 있는 아이디어이다. 오늘날 교회를 개척하는 것은 힘든 일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개인이 교회를 개척하기가 힘든 시대라는 말에 가깝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교회 개척은 기존의 교회가 새로운 교회를 분립을 통해 개척하는 방식이 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 교회의 건강성과 역동성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면, 팀 켈러 목사의 조언을 따라 지금 당장 교회를 분립하고 개척하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감사하게도 대형 교회 중심의 한국 교회 지형에 바람직한 신호들이 나오고 있다. 최근 출석 교인 2만이 넘는 수도권의 한 대형 교회가 29개의 교회로 분립했다. 하나님께서 교회 개척과 분립을 통해 이 시대에 한국 교회 안에 또 다른 부흥의 역사를 일으켜 주시기를 기도 드린다.
분립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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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2-3)
by Tim Keller
2022-04-23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이며, 앞으로 이어질 글은 “갱신의 길”과 “갱신을 위한 능력”입니다. [2-1] 쇠퇴하는 신앙 왜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는가? 계몽 프로젝트의 실패 [2-2] 쇠퇴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2-3] 복음주의의 쇠퇴 왜 쇠퇴는 역전될 수 있는가복음주의의 쇠퇴이제 우리는 왜 백인 미국인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 종교가 다른 종교 집단을 따라 함께 쇠퇴했는지 알 수 있는 위치에 왔다.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는 사회 연구에서 너무 얽혀 있어 가장 많이 쇠퇴한 것이 근본주의 교회인지, 아니면 보수 개신교 전반에 걸친 것인지 알 수 없다. 두 번째 경우가 더 정확한 게 아닐까 추측하는데, 그런 상황을 초래한 몇 가지 이유는 다음과 같다.1. 미국에서 개종이 필요한 전통적 사고방식을 가진 미국인이 점차 줄어들고 있으며, 전반적으로 보수 개신교인은 고도로 세속적이고 문화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다가가려고 하지 않는다. 전통적으로 미국의 문화 기관은 기독교를 공언하든 않든 간에 인격적 하나님, 내세, 그리고 절대적 도덕에 대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을 배출했다. 따라서 복음 전도와 교회 성장을 위한 기독교의 전략은 전도 대상자가 최소한 이러한 전통적인 “배경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전제 하에 이뤄졌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점점 줄어들고 있고, 일반적으로 보수 개신교는 세속적인 사람들을 어떻게 전도해야 하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2.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가릴 것 없이 적지 않은 교회와 지도자가 영적 또는 성적 학대를 저질렀다. 복음주의자는 역사적으로 유명 목사가 주도하는 강단과 느슨한 네트워크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책임감의 결여는 많은 유명 복음주의 목사와 교회의 붕괴로 이어졌다. 그리고 #우리 교회도 그래요(#ChurchToo) 운동은 여성에 대한 목사와 교회 지도자의 만연한 성적 비행을 폭로했다. 성보완주의(complementarian) 교회 지도자도 성평등주의(egalitarian) 교회 지도자도 모두 다 유죄이다. 3. 특히 정치 세력화한 보수 교회가 국가의 절반을 마비시켰다. 양극화된 환경에서 백인 복음주의자가 특정 정당 및 대통령 후보와 강력하게 동일시함으로 그들이 지향하는 정치 강령에 반대하는 나머지 50퍼센트로부터 적대적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복음주의자가 소외시킨 50퍼센트는 더 젊고 민족 구성이 다양하다. 그런데 적지 않은 근본주의자가 이것을 패배가 아니라 승리로 여긴다. 내가 생각하기에, 많은 보수 개신교인이 도널드 트럼프에게 투표했지만 근본주의 그리스도인과 비교할 때 그들의 열정이나 지지도는 훨씬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었든, 보수 종교를 우파 정치와 동일시하는 것은 이제 대중의 마음에 매우 강하게 자리 잡았고, 그런 현실은 기독교를 향한 대중의 마음을 닫게 만든다. 4. 근본주의든 복음주의이든 보수 교회는 여전히 인종 문제로 힘들어 한다. 과거에 보수 백인 복음주의자는 (1) 원래부터 노예제를 지지했고, (2) 짐 크로우(Jim Crow) 시대에는 침묵했고, (3) 인권 운동을 크게 거부했으며, (4) 학교와 신학교를 통합하는 데 가장 느렸다. 오늘날 대다수의 백인 복음주의자와 근본주의자는 여전히 인종차별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구조적 불의나 조직적 인종차별을 부정함으로써 진보주의의 과잉에 대응하고 있다.5. 근본주의는 반지성운동이며, 근본주의가 아닌 복음주의자는 실용주의를 지향하는 경향이 있다. 로마가톨릭은 대중에게 인기 있는 종교이면서 동시에 강력한 지식층 계급을 양성해 왔다. 근본주의의 대체적으로 반지성적 태도는 오늘날 대학의 진보적인 과잉에 놀란 보수 그리스도인 사이에서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런 현실은 일반적으로 보수 개신교가 대학 교육을 받을 수 있는 능력이 거의 없고 미국 문화를 신학적으로 반영하는 능력이 거의 없도록 만든다. 복음주의자가 문화적 “포로”―성경적 믿음과 미국 문화 사이의 차이를 보는 능력의 결여―상태에 머무는 이유는 주로 복음주의적 학문이 부족하기 때문이다.6. 보수 개신교인은 세속 문화와 관련된 모델이 부족하다. 기독교 신앙과 실천이 지배적이라는 가정 하에서, 복음주의는 “기독교 국가”(Christendom) 문화의 두드러진 부분이었다. 이런 점이 바뀌었기 때문에 이제 복음주의자는 그들이 더 큰 사회와 어떻게 연결점을 만들지 정의하기 위한 “공적 신학”(public theology)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많은 근본주의자가 단순히 정부 정책을 통한 기독교 국가 재건을 꿈꾼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세상 문화와 아예 담을 쌓고 교회를 세우기 원한다. 오늘날 근본주의자로부터 비롯한 보수 개신교인과 복음주의자 사이를 가장 많이 갈라놓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왜 쇠퇴는 역전될 수 있는가다음 글에서는 교회 갱신을 위한 계획을 스케치할 것이다. 그러나 이 글을 마치면서 “우리에게 얼마나 희망이 남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건 당연하다. 장애물이 엄청나다. 그럼에도 희망이 가능하다고 확신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갱신을 말할 수 있는 이유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1. 세속주의의 한계. 미국에서 나타나는 세속주의의 능력과 성장의 많은 징후에도 불구하고, 철학으로서 세속주의는 공동체를 형성하고 개인에게 의미와 정체성과 만족을 주는 데에 있어도 또한 고통을 직면하는 능력에 있어서도 심각한 한계를 보여 왔다. 예측: 미래에는 세속주의가 지금처럼 설득력 있는 종교의 대안으로 부각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2. 세계 기독교의 능력. 서양 이외 지역에서 기독교는 지금도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이 복음주의와 오순절이다. 미래 기독교의 지도자와 신학자는 다민족이 될 것이며, 이런 현실은 과거에 복음주의를 주로 백인 현상(white phenomenon)으로 치부했던 세속 사람들에게 믿음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 줄 것이다. 3. 종교 인구 통계. 일반적으로 종교가 많을수록 자녀를 더 많이 낳는다. 이런 사회적 사실은 문화와 계층 전반에 걸쳐 적용된다. 이것이 일부 사회 과학자가 세계의 세속 인구가 21세기 중반에 이르면 “천정을 치고” 줄어들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하는 이유이다.4. 선택된 종교의 전복적 성취. 주류 개신교, 로마가톨릭 및 기타 종교는 유전된다. 여러분은 말 그대로 특정 종교 안으로 “태어나며” 가족 때문에 그 종교를 믿는다. 젊을수록 스스로 선택하지 않은 길을 가고 싶어 하지 않기 때문에 모태 신자에 의존하는 교회는 현대 사회에서 더 빠르게 쇠퇴한다. 복음주의 신앙은 현대 문화가 가진 이런 면에 잘 적응한다. 왜냐하면 복음주의는 참으로 스스로 선택하는 종교 즉 회심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복음주의는 현대 문화가 가진 개인주의를 역행한다. 우리가 자유롭게 그리스도를 따르기로 선택할 때, 우리는 또한 나 자신의 지혜에 따라 생활하는 것을 포기하고 대신 예수님의 지혜로운 권위에 굴복하기로 기꺼이 선택하기 때문이다. 5. 신앙의 번역가능성. 기독교는 정통 이슬람교나 유대교와 달리 신약성경에 레위기가 없다. 음식, 의복 및 기타 일상 활동에 대한 세부 규정이 지정되지 않아 그리스도인은 주변 사회와 얼마든지 완전하게 통합될 수 있다. “문화적 다양성은 기독교 신앙 안으로 구축되었다. … 사도행전 15장은 새로 믿게 된 이방 그리스도인이 굳이 유대 문화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 개종자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헬라 방식을 만들어나갔다. … 그 누구도 기독교 신앙을 독점하지 않는다. 파키스탄에서 튀니지, 모로코까지 알 수 있는 ‘이슬람 문화’가 있는 것과 달리, 그런 식의 ‘기독교 문화’라는 것은 없다.”[17] 간단하게 말해서, 기독교는 새로운 문화 또는 상황 속으로의 번역될 가능성(translatability)이 매우 높으며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여전히 강력한 능력으로 존재할 수 있다.[18] 6. 예수님의 약속. 체스터턴이 쓴 ‘영원한 사람’에는 “기독교 신앙의 다섯 차례 죽음”에 대한 장이 있다. 여기서 그는 정통 기독교가 심각하게 도전받았던 시대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3세기에 있었던 그리스도의 신성과 관련한 아리우스 논쟁, 유럽 계몽주의 시대 볼테르와 회의주의의 등장, 다윈과 과학주의의 부상 등이 그 때이다. 그러나 이런 위기를 만난 기독교는 언제나 더 강해졌고 오히려 더 성장했다. 체스터턴은 특유의 비틀기 화법으로 다음과 같이 결론짓는다. “적어도 다섯 차례에 걸쳐 … 기독교 신앙은 어느 모로 보나 개들에게 굴복한 듯 했다. 하지만 매번 예외 없이 정작 죽은 것은 개였다.”[19] 예수님은 “내가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약속이다. 이 약속에 만료일이 있다고 믿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주]17. Andrew F. Wall, “The Expansion of Christianity: An interview with Andrew Walls” Christian Century, August 2-9, 2000, 792.18. 특히 Sanneh’s chapter, “Translatability in Islam and Christianity, with Special Reference to Africa,” in Translating the Message: The Missionary Impact on Culture(Orbis, 1987), 211ff.18. G. K. Chesterton, The Everlasting Man. Canon Press, 2021, 279.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2-The Decline of Evangelic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개신교
복음주의와근본주의
미국복음주의
복음주의의쇠퇴
번역가능성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2-2)
by Tim Keller
2022-04-22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이며, 앞으로 이어질 글은 “갱신의 길”과 “갱신을 위한 능력”입니다. [2-1] 쇠퇴하는 신앙 왜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는가? 계몽 프로젝트의 실패 [2-2]쇠퇴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2-3] 복음주의의 쇠퇴 왜 쇠퇴는 역전될 수 있는가쇠퇴하는 복음주의지난 몇 년 동안 복음주의의 영향력에 엄청난 관심이 주어졌다. 그 이유의 하나는 현재 복음주의가 미국 종교계에서 가장 큰 단일 범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80퍼센트 이상의 백인 복음주의자가 2016년 도널드 트럼프와 새로운 우익 포퓰리즘 및 민족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이런 요인들이 복음주의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킨 주된 이유였다. 일부 상충되는 통계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조차 복음주의가 쇠퇴하고 있다는 데에 대부분의 전문가가 동의한다.[9] 한편, 복음주의 안에는 여러 분파가 있다. 학자와 사회과학자가 복음주의의 실제 정의를 놓고 논쟁하는 것처럼, 주도권을 쥐기 위한 복음주의 내 싸움은 살벌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모든 것이 혼란을 야기한다.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실제로 복음주의는 지금 어떤 위기에 직면해 있는가? 그리고 복음주의에 과연 희망이 있는가? 복음주의란 무엇인가?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겉으로 보기만큼 쉽지 않다.복음주의 신학한편 데이비드 베빙턴(David Bebbington)이 열거한 복음주의 신학의 기준 (지금은 베빙턴 포 (Bebbington Four) 또는 베빙턴 사변형(Quadrilateral)이라고도 불림)을 충족하는 개인이나 그룹은 복음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다.[10] 복음주의의 네 가지 특징은 (1) 믿음과 실천의 유일하고 최고의 규범으로서 성경이 가지는 완전한 권위, (2) 성령으로 거듭남의 필요성, (3)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을 통한 하나님과의 화해, (4) 말과 행동으로 복음을 전할 책임이다. 이 네 가지가 복음주의자를 주류 개신교, 가톨릭, 정교회 그리스도인과 구별한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표지(marks)와 더불어, 복음주의자는 다른 모든 그리스도인과 함께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신성, 그리고 사도신경 및 니케아 신경에 대한 믿음을 공유한다. 복음주의 사회학그러나 이러한 교리적 또는 신학적 신념 외에도 모든 교파에는 사회학적 “위치”가 있기 마련이다. 즉, 복음주의가 특정한 역사적 사건의 산물이라는 것이다. 18세기와 19세기 초 대각성 운동, 남북전쟁과 노예제도 논란, 주류 교단의 복음주의자 축출, 20세기 중반의 시민권 운동, 그리고 20세기 후반 기독교 우파의 부상 등, 지난 세기 동안 미국 그리스도인 사이에서는 다양한 사회적 특징 즉 문화적 태도와 관습이 생겨났는데, 이는 미국만이 가지는 독특함이다. 즉, 동일한 복음주의 신학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다른 사회적 맥락에 살고 있는 외국의 복음주의자가 전혀 공유하지 않는 것이다.[11] 따라서 복음주의를 논할 때에는 신학과 사회학이라는 “두 가지 주소”(addresses)를 인식하는 것이 중요한 사항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된다. 앞서 살펴본 네 가지 신학적 특징의 틀 내에서도 내가 복음주의의 여섯 가지 사회적 특징(social marks)이라고 부르는 것은 더 강할 수도 있고 또는 더 약할 수도 있다(아래 내용 참조). “근본주의”라는 용어는 과거에 이러한 사회적 특징을 특히 더 강하게 유지하는 사람들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었다. 여섯 가지 사회적 특징은 다음과 같다.• 도덕주의 대 너그러운 참여―행동 규범에 대한 엄격한 준수. 독선의 결과로 사실상 가장 중요한 일차적 가치로 바뀐 이차적 교리. 모든 것이 전적으로 선하거나 아니면 악하다는 생각은 결과적으로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정죄하는 습관. 분리주의와 종파주의. 인내, 겸손, 희망, 또는 반대 의견을 관용으로 받아들일 능력 자체가 없음. • 개인주의 대 사회 개혁―우리 각자는 다 전적으로 개인 선택의 결과라는 믿음. 문화가 어떻게 우리를 형성하는지에 대해서도 또는 조직적 또는 제도적 악의 세력에 대해서도 거의 아는 게 없음. • 이원론 대 삶 전체에 대한 비전―문화와 성경적 믿음을 대립시킴. 적대적 인수를 추구하거나 아니면 일과 삶에서 기독교 신앙을 아예 차단함. 신앙이 세속적 영역에서 일하는 방식을 어떻게 형성하고 그것이 사회에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음. • 반지성주의 대 학문―전문가에 대한 불신, 교육에 반감을 갖는 역속물주의(reverse snobbism). 대부분 사람에게 “상식”으로 여겨지는 학문적 성취 또는 연구 결과에 대한 불신. 학문 자체에 대한 불신. 과학에 대한 회의론. 다른 관점에 대한 존중 거부. 성경 원문에서 저자가 의도한 의미와 그것을 분별하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을 무시. 성경 해석에서 얕은 “상식적” 접근으로 일관.• 반제도주의 대 책임주의―전통적 제도에 대한 불신. 유명 목사 및 브랜드를 중심으로 하는 플랫폼 및 네트워크를 사용하여 빠르게 성장하지만 책임감이 낮음. 권위주의로 흐를 경향이 큼.• 토착화 대 문화적 반성―대중적이고 전통적인 미국 문화와 기독교를 결합한 형태. 두 가지 특징: (a) 젠더 과장-미국 문화를 “성역화”하는 근본주의 경향으로 인해 비성경적 젠더 고정 관념(특히 1950년대 젠더 고정 관념)에 빠져 있음, 예를 들어, 여성 모독 또는 학대 은폐로 이어지는 율법주의 경향. (b) 민족주의-미국 역사와 사회의 어두운 면에 대한 반성을 거부하고 다민족으로 나아갈 미래에 대한 두려움을 표현하는 “하나님과 미국”의 강조. (c) 인종차별-종종 노골적으로, 그게 아닌 경우에도 최소한 인종적 그리고 문화적 불감증에 함몰되어 있음. 복음주의와 근본주의역사적으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 사이에는 구별이 있었다.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은 여기에 관해 중요한 책을 저술했다. 1930-50년대, 칼 헨리(Carl Henry)와 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이 주도한 “신복음주의 운동”이 북부 백인 복음주의자에게 진지한 성경 연구, 더 깊은 지적 사고, 그리고 사회적 책임을 불러일으키려고 시도했다.[12] 그들은 역사적 정통 개신교 신앙에 충실하려고 애썼지만, 그러가 그 결과는 도리어 반지성주의, 미국 문화와의 결합, 분파주의, 종파주의, 율법주의와 2차 및 3차 교리에 대한 강조, 그리고 경건주의와 개인주의의 강조로 연결되었고, 결국 그 모든 요소가 어우러져서 사회 개혁과 문화 참여의 필요성에 대한 거부로 이어졌다. 바로 이런 복음주의가 1940년대 중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약 한 세대 동안 번성했다. 그 후에, 특히 1979년에 설립된 도덕 다수당(Moral Majority)의 등장과 함께 근본주의가 복귀하기 시작했다.[13] 근본주의는 모든 보수적 개신교와 동일하지 않다. 신학적 표지에 있어서는 확실히 정통적이며, 비록 그 특징에서 더 보수적인 형식(예를 들어, 형벌 대속 및 믿음에 의한 법의학적 칭의)을 띈다고 해도 대체적으로 도덕주의, 반지성주의, 등의 사회적 특징이 결여된 교회와 신자들이 많다. 언론이나 대중의 의식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정확한 구분을 여기에서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지금까지 개괄한 역사와 사회적 특성의 영향에서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노력하는 많은 교회가 있다. 이들 중 일부는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등과 같은 역사적 신앙을 고백하는 교회이다. 또한 반계몽주의(obscurantism), 거친 수사, 개인주의, 율법주의, 그리고 근본주의의 분리주의에 반대하는 복음주의 지도자의 지도를 받는 교회들도 있다. ‘베빙턴 포’로 대표되는 신학적 특징에 대한 강조와 “근본주의자”라는 경멸적 단어 사용의 회피는 이제 근본주의자가 아닌 보수적 개신교도와 근본주의자를 구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복음주의 또는 보수적 개신교를 정의하는 배타적인 방법으로 ‘베빙턴 포’를 강조할 때 중요한 차이점이 사라지고 숨어버린다. 크리스틴 코베스 뒤 메즈(Kristin Kobes Du Mez)는 미국 복음주의자가 사회학적 특징과 역사를 무시하고 단지 교리로 스스로 정의하기를 선호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주장은 타당하다. 사실 그렇게 할 때 복음주의는 매우 거대해 보인다. 그런 복음주의는 “인종적으로도 다양하고 세계적인 운동으로 보인다.”[14] 그러나 메즈의 지적에 따르면, 백인 미국 복음주의자가 아무리 자신들의 신학적 특징을 다른 그룹과 공유하더라도, 그들이 가진 사회학은 필연적으로 신학적 특징이 강조되고 표현되는 방식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희생적인 봉사를 요구하는 사람들을 배제하며 성경 속 군사적 은유를 강조할 것인가? 구속사의 모든 전환점―창조, 타락, 구속, 재림―을 과연 동등하게 파악하고 가르치는가?[15] 따라서 제대로 된 정의와 식별을 위해 단지 신학적 특징만을 독점해서 사용할 때, 보수적 개신교 내의 많은 중요한 차이점이 쉽게 가려지는 위험이 있다. 그러나 “근본주의”라는 단어는 차이점을 가리는 데에도 사용할 수 있다. 근본주의자를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가장 흔한 사전적 정의이다. 제임스 패커는 이런 식의 정의가 어떻게 성경에 대한 역사적 복음주의의 접근을 미묘하게 제거할 수 있는지를 능숙하게 보여주었다.[16] 묵시적 예언 문헌과 관련해서조차도 문자 그대로 해석하고 역사적, 문화적 맥락을 분별하려는 노력을 아예 무시하는 근본주의 사고방식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은 예수님이 문자 그대로 육체적으로 죽음에서 부활했음을 강조하는 복음서 저자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부활까지도 얼마든지 상징적으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로도 쓰일 수 있다. 패커가 보여주는 방식은 복음주의자가 본문의 자연스러운 의미 즉 저자가 원래의 맥락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찾는 모습이다. 우리는 본문에 문자적 의미나 상징적 의미를 강제로 주입해서도 안 되며, 무엇보다 성경 저자의 말을 있는 그대로 들으려고 노력해야 한다. 따라서 근본주의를 “성서적 문자주의”로 정의하는 것은 주류 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이 보수적인 개신교 모두를 다 근본주의자로 묘사할 수 있는 방법이 된다.보수 개신교 내에서 근본주의와 복음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근본주의자와 진보주의자 모두 다 허용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우파와 좌파는 모두 다 내가 지금 여기서 근본주의자와 보수 개신교인을 구분하는 것과 비슷하게 평범한 복음주의 신자와 “엘리트” 복음주의자를 구분하려고 노력했다. 이것은 물론 “진짜 엘리트”의 신용을 떨어뜨리는 방법이다. 그러나 나는 개인적으로 복음주의 신학을 견지하고 보수 교리를 추구하지만, 사회학적으로 볼 때에는 근본주의와 거리가 먼 블루칼라 교회를 목회했을 뿐 아니라 그와 비슷한 많은 노동계급 교회를 봐왔다.최근 팟캐스트 시리즈 “마즈힐의 흥망성쇠”는 주요한 복음주의 거대 교회의 붕괴를 추적했다. 온라인 논평에서 보수 청취자는 비판이 너무 “자유주의적”이라고 불평했고, 교회의 폭발로까지 이어진 결정적인 결점은 대부분 리더십의 실패라고 말했다. 그들은 마즈힐이 분명하게 드러낸, 교회 파괴의 주범인 권위주의를 야기한 근본주의의 사회적 특징을 무시한다. 스펙트럼의 다른 쪽 끝에서, 마즈힐 사례 연구를 바라보는 진보주의자는 성경적 권위와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필요성이라는 신학적 특징을 가진 교회는 불가피하게 이단과 같은 단체가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진보주의자는 종종 마즈힐을 해치는 사회적 특성이 신학보다 역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 같은 신학을 가졌다고 해도 다른 나라의 복음주의자는 (심지어 미국 내 많은 사람들조차) 결코 동일한 사회적 특성을 나타내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 또한 자신들의 사회 역사를 극복하도록 돕기 위해 성경의 진리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요약―진보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특성을 특정 신학에 뿌리를 둔 믿음이 가져다주는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본다. 따라서 진보주의자가 아닌 보수적인 개신교는 모두가 다 근본주의자이거나 앞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근본주의 그리스도인은 사회적 특성을 특정 신학에 뿌리를 둔 믿음이 가져다주는 당연하고 필연적인 결과로 본다. 따라서 근본주의자가 아닌 보수 개신교인은 모두가 다 진보주의자이거나 앞으로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수주의자는 사회적 특징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반면, 진보주의자는 신학과 사회를 아예 병합하려고 한다. 어느 쪽이든, 근본주의가 아닌 이상 복음주의나 보수 개신교라는 개념 자체는 사라지게 된다. 그러면 이 중요한 구분에 대해 어떻게 말해야 할까? 나는 우리 모두가 사용할, 완전히 새로운 용어를 제안할 마음은 없다. 그러나 이 글에서 다양한 범주를 설명하기 위해 ‘베빙턴 포’가 보수 개신교를 설명하고 있고, 그 안에는 스펙트럼 상 근본주의와 복음주의가 있다고 말할 것이다. 근본주의자는 앞에서 이미 살펴본 여섯 가지 사회적 특성이 강한 사람들이다. 복음주의자 (그리고 그 용어를 받아들이지 않는 다른 보수 개신교인)는 반대로 사회적 특성이 약하다. 나는 이 그룹을 구분하는 명확한 선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상태와 미래를 이해하려면 이 둘 사이의 차이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또한 복음주의를 정의하기 위해서는 신학적 특징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전 세계의 복음주의 그리스도인과 함께 사역해 왔으며, 우리가 서로를 가족으로 포용하고 협력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은 다름 아니라 서로 공유하는 신학적 특징이다. 그건 기본이다! 은혜와 회심의 경험, 그리스도 희생의 충분성에 대한 깨달음, 살아 있는 성경 말씀이 가진 능력에 대한 지식, 이 모든 것이 문화적이고 사회적 차이까지 넘어 우리를 하나로 묶는다. 그러나 일단 함께 사역하기 시작하면 사회 문화적 차이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것을, 종종 그 차이가 사역까지 방해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우리는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노력한다. 왜냐하면 문화적 차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 가장 근본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2-2): 왜 복음주의의 쇠퇴는 역전될 수 있는가로 이어집니다 [주]09. Ryan Burge에 의하면 교회에 가지도 않으면서 여론 조사에 자신을 “복음주의자”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은 사람들이 점점 더 자신의 정치관을 기반으로 종교를 선택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복음주의자의 수를 부풀리고 그 운동이 실제보다 더 회복력 있고 영적으로 건강하다는 잘못된 인상을 줄 수 있다. Ryan Burge의 “Think US Evangelicals are dying out? Well, define evangelicalism…,” The Conversation, Jan 21, 2021.10. D.W. Bebbington, Evangelicalism in Modern Britain: A History from the 1730s to 1980s, Routledge, 1989.11. 각 시대에 대한 출처로 다음을 참조하라: Harry S. Stout, “What Made the Great Awakening Great?” in H.Carter and L.Porter. eds, Turning Points in the Histor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erdmans, 2017; Nathan O. Hatch, The Democratization of American Christianity, Yale, 1989; Mark A. Noll, The Civil War as a Theological Crisis, University of North Carolina, 2006; Mark A. Noll, God and Race in American Politics, Princeton, 2008; Luke E. Harlow, “The Civil War and the Making of Conservative American Evangelicalism” in H.Carter and L.Porter. eds, Turning Points in the Histor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erdmans, 2017; George Marsden, “The Rise of Fundamentalism” in H.Carter and L.Porter. eds Turning Points in the History of American Evangelicalism, Eerdmans, 2017; Lydia Bean, The Politics of Evangelical Identity: Local Churches and Partisan Divides in the United States and Canada, Princeton University Press, 2014.12. Carl FH Henry가 지은 The Uneasy Conscience of Modern Fundamentalism(Eerdmans, 1947)을 참조하라. 헨리가 그의 책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을 요구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역사가들은 “신복음주의”의 초기 지지자는 여전히 시민 운동(Civil Rights)에 대해 대체로 회의적이며 미국 사회를 비판하는 데 소극적이었음을 지적한다. 13. 적지 않은 복음주의 비평가는 신복음주의의 창시자들(Henry, Ockenga, Graham)이 리더십을 행사하던 기간 중에 1980-90년대에 찾아온 근본주의 부활의 씨앗이 뿌려졌다고 말한다.14. Kristen Kobes Du Mez, Jesus and John Wayne: How White Evangelicals Corrupted a Faith and Fractured a Nation (W.W.Norton, 2021, 5)15. Kristen Kobes Du Mez, Jesus and John Wayne: How White Evangelicals Corrupted a Faith and Fractured a Nation, W.W.Norton, 2021, 5-7. 더불어 M. Noll, D.W.Bebbington, G.M.Marsden, Evangelicals: Who They Have Been. Are Now. And Could Be, Eerdmans, 2019, 123-187에 등장하는 베빙턴 정의에 관한 토론이 담긴 “Roundtable”을 참고하라. 16. 근본주의에 대한 좋은 개요와 더불어 역사적 복음주의와의 구별은 Packer, Fundamentalism and The Word of God, IVP, 1958의 처음 두 장에서 다루어진다. 복음주의 비평가(및 지지자)에 대한 패커의 언급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졌지만, 여전히 그의 주장은 유효하고 오늘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필요하다. 특히 102ff를 참조하라.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2-The Decline of Evangelic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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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2-1)
by Tim Keller
2022-04-21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두 번째입니다. 첫 번째 “주류 교회의 쇠퇴”이며, 앞으로 이어질 글은 “갱신의 길”과 “갱신을 위한 능력”입니다. [2-1] 쇠퇴하는 신앙 왜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는가? 계몽 프로젝트의 실패 [2-2] 쇠퇴하는 복음주의 복음주의란 무엇인가? 복음주의와 근본주의[2-3] 복음주의의 쇠퇴 왜 쇠퇴는 역전될 수 있는가리디머 도시 사역(Redeemer City to City)으로 섬길 수 있어 큰 영광이다. 각 나라 교회 지도자들이 교회를 개척하고 또 그들 나라에 있는 국제화된 대도시에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을 주려는 이 사역을 섬긴다 함은 곧 내가 동역하는 많은 지도자들이 비서구 그리스도인임을 의미한다. 그리고 지난 3년 동안 이 형제자매들에게서 자주 들었던 질문이 있다. “미국 복음주의는 이제 그 정신을 잃었습니까?”당신이 지금 미국 교회 상황을 보면서 고민하고 있다면, 미국 밖에 있는 형제자매들을 우리가 어떻게 바라봐야 할 것인지도 깊이 고민해야 한다!현재 미국 교회 상황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 시리즈 두 번째인 이번 글에서는 나는 먼저 쇠퇴에 이르게 된 요인을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마지막 두 부분에서 갱신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한 몇 가지 아이디어를 제시할 것이다. 쇠퇴하는 신앙작년 가을에 쓴 1부에서 나는 수세기 동안 미국에서 가장 크고 문화적으로 지배적인 종교 그룹이었던 주류 개신교(mainline Protestantism)가 1960년대 후반과 1970년대 초반에 어떻게 급격히 쇠퇴했는지 설명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주류 개신교는 가장 큰 종교 범주이자 문화적으로 가장 막강한 영향을 행사했다. 그리고 그 뒤를 로마가톨릭과 복음주의가 따랐다.그러나 20세기 마지막 4분기에 주류 개신교는 복음주의에 그 자리를 완전히 내주었다. 복음주의는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근본주의와 거리를 두면서 성장을 거듭했다. 주류 교회의 자유주의 신학과 정치는 여전히 전통적 가치에서 벗어나지 않은 다수의 보수적 미국인을 품지 못했고, 그 결과 수많은 사람들이 주류 교회를 떠나 복음주의 교회로 몰려들었다. 21세기의 첫 십 년에 이르자 미국인의 약 30퍼센트가 자신을 “거듭난” 복음주의자라고 고백하게 된다.[1] 그러나 2007년부터 복음주의 자체도 쇠퇴하기 시작했다. 모든 징후는 앞으로 몇 년 동안 전례 없이 많은 젊은 미국인이 교단을 불문하고 모든 교회와 제도적 종교를 떠날 것을 가리키고 있다. 하지만 중요한 질문은 그 이유이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생기고 있는가?왜 신앙이 전반적으로 쇠퇴하고 있는가? 배경-엘리트의 세속화유럽에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그리고 북미에서는 1960년대 이후에 들어 세속화는 일반 대중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실상 “세속화”라는 과정은 이미 수세기 동안 서구 사회에서, 주로 고학력 엘리트 사이에서 진행되어 왔다. 16세기, 17세기, 그리고 18세기에 있었던 유럽의 각종 유혈 종교 전쟁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의(common) 교회나 종교적 믿음이 필요 없는 사회를 만드는 기초를 모색하도록 만들었다.[2] 이러한 “계몽 프로젝트”는 종교를 대신해서 중립적이고 객관적인 인간의 논리만을 사용하여 인간이 처한 상황을 설명하고 도덕적 가치에 도달하려는 시도였다. 세속화에는 크게 다음 두 가지 기본 특징이 있다.종교의 사사화(privatization;私事化) 강요. 오로지 과학과 기술만이 인간 문제를 이해하고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으로 간주된다. 종교에 기반을 둔 신념과 가치는 진지한 공개 담론에서 절대 사용해서는 안 된다(단, 경구처럼 쓰이는, 화폐에도 찍혀 있는 “우리는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는 말은 제외). 이런 추세는 종교를 사회와 무관하게 보이도록 만들었다.급진적 개인주의. 종교에서 이성으로의 이동은 사회의 가장 중요한 구성 요소가 공동체에서 개인으로 바뀌도록 만들었다. 서구는 자신의 도덕적 선택을 자유롭게 결정하는 해방된 자아에 대한 견해를 발전시켰다. 이런 추세는 자연스럽게 종교적 규범을 자아에 대한 위협으로 보이게 만든다. 전경-대중의 세속화오늘날 현대 문화를 주도하는 자아에 대한 치료적 관점(therapeutic view of the self)은[3] 시장 개념을 일체의 관계에 적용하는 거래에 기반하고 비용과 이익을 따지는 개인주의를 유발한다. 유발 레빈(Yuval Levin)은 점점 더 증가하는 사회적 불신이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 정치 지도자, 군대, 대학, 그리고 가족까지도 약화시킨다고 주장한다.[4] 이런 추세는 자연스럽게 종교의 침식을 가져온다.[5] 문화와 교회의 정치적 양극화. 사람들은 정치와 같은 종교 대용품을 찾는다. 두 미국 정당은 거의 획일적인 좌파 그룹과 우파 그룹으로 바뀌었다. 주류 교회는 좌파와, 복음주의파는 우파와 견고하게 연결되어 더 넓은 문화적 맥락에서 교회의 신뢰성을 약화시켰다. 하버드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Robert Putnam)이 이러한 현상을 잘 설명하고 있다.[6]성 혁명. 성적 표현이야말로 진정한 정체성의 핵심이라는 믿음에서 시작된 성혁명은 곧 기독교 성윤리는 심리적으로 건강하지 않고 억압적인 것일 뿐 아니라, 불합리한 것(그러니까 그 누구도 지킬 수 없는 이상주의라는 것이다)으로 완전히 낙인찍혔다는 의미이다. 고등교육 및 소셜미디어의 성장. 1940년에는 고작해야 인구의 4퍼센트만이 학사학위를 받았다. 그러나 오늘은 그 수치가 무려 33퍼센트를 넘는다. 세속화가 지식계급에서 시작되었고, 이제 지식사회(academy)는 사회 전반에서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7] 계몽 프로젝트의 실패계몽주의의 개인주의가 초래한 결과는? 심각한 고립, 외로움, 아노미, 그리고 불안 및 우울증에 이르게 된 인간 공동체 전체―기관, 이웃 및 가족―의 쇠락이다. 이 모든 건 결코 한 번에 일어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문화 자본”(cultural capital)으로 남아 있는 동안에는 “엘리트”의 대부분은 세속적이더라도 인구 대다수는 교회에 갔기 때문에 수세기 동안 서구 문화에 사회통합(unity)을 제공할 수 있었다. 사실상 오늘날에도 서구 세속주의의 주요 가치는 다 기독교에서 파생되었다.[8] 그러나 교회에 가는 인구의 비율이 감소하고 급진적 개인주의가 서구 사회에 만연하면서, 세속적 인간 이성에 기초한 계몽주의 비전이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사회통합을 가져오지 못했다. 서구 사회 일반이, 특히 미국 사회는 심각하게 양극화되고 파편화되었으며, 모두가 자신만의 삶의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채택하게 되었다.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복음주의의 쇠퇴(2-2): 쇠퇴하는 복음주의로 이어집니다 [주]01. 한편 2007년부터 2021년까지 “무교”(종교가 없거나 선호 종교도 없는 사람들)가 16퍼센트에서 29퍼센트로 증가한 반면, 복음주의 개신교는 30퍼센트에서 24퍼센트로, 로마가톨릭은 24퍼센트에서 21퍼센트로 떨어졌고, 같은 기간 주류 개신교인 비율도 22퍼센트에서 16퍼센트로 하락했다. Gregory A. Smith를 참고할 것. “미국 성인 10명 중 약 3명이 현재 종교적으로 아무 곳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 2021년 12월 14일, Pew Research Center, https://www.pewforum.org/2021/12/14/about-three-in -10-us-adults-are-now-religiously-unaffiliated/를 참조하라. Ryan Burge가 쓴 The Nones: Where They Came Rrom, Who They Are, Where They Are, Fortress, 2021도 참조하라. Burge는 1972년부터 사용된 일반사회조사를 사용했다. 02. 세속화에 대한 가장 포괄적인 설명은 Charles Taylor가 쓴 A Secular Age(Harvard, 2007)를 참조하라. 03. Philip Rieff가 The Triumph of The Therapeutic에서 썼듯이, 초기 문화는 항상 사회의 규범과 기대에 맞게 개인이 자아를 조정하려 했다. 그러나 치료적 관점에 따르면 사회는 이제 개인이 스스로 설정한 규범을 수용하고 채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04. Yuval Levin, A Time to Build: From Family and Community to Congress and Campus, How Recommitting to our Institutions Can Revive American Dream, Basic Books, 2020. 05. 다음 목록은 Ross Douthat의 Bad Religion: How We Becamed Nation of Heretics (Free Press, 2013) 및 그의 최근 온라인 강의 일부를 기초로 했다. 06. In American Grace: How Religion Divides and Unites Us(Simon and Schuster, 2010) 07. Christopher Lasch, The Revolt of the Elites and the Betrayal of Democracy, revised ed. W. W. Norton, 1996. 08. Tom Holland, Dominion: How the Christian Revolution Remade the World, Basic Books, 2019.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2-The Decline of Evangelicalism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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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의쇠퇴
팀 켈러가 중국 그리스도인에게서 배운 것
by Tim Keller
2022-04-20
세속화된 우리 서구 사회가 기독교 신앙 및 관습에 점점 더 거부감을 드러내고 있어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우려하고 있다. 박해받고 있다는 생각일 들 때도 있다. 나는 결코 과거 기독교 국가라고까지 불리던 나라에서 그리스도인이 현재 직면한 역풍을 축소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우리에게 지금 꼭 필요한 객관적인 관점을 얻으려면, 폭력까지 동반한 훨씬 더 극심한 반기독교 정서가 있는 국가에 사는 신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핍박을 지금 아시아 여러 지역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겪고 있다. 그들은 참으로 우리 주님의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삶에서 배우고 있다.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마태복음 5:11-12)예수님의 이 중요한 말씀을 아시아의 형제자매들처럼 겪고 있는 서구 그리스도인은 거의 없다. 특히 중국 그리스도인은 최근 몇 년 동안 예수님의 이 약속에 더 간절하게 의지해야 했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적어도 네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1. ‘모욕을 당할 때 복이 있다.’“만약에(if) 사람들이 너희를 모욕한다면 너희에게 복이 있다”가 아니다. 모든 팔복은 그리스도인의 특징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심령이 가난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의에 주리고 목말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핍박과 관련한 부분은 팔복의 마지막이다. 다름 아니라,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박해를 받는다는 게 예수님의 생각이다. 당신이 기독교의 가르침에 따라 일관되게 살고 있다면, 당신은 어떤 형태로든 손실과 반발, 반대를 경험할 것이다. (이 해석을 확인하려면 디모데후서 3:12를 보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2. ‘예수님 때문에’ 핍박받는다면 복되다.“나 때문”이 아니다. 베드로 사도는 베드로전서 4:15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했다. “여러분 가운데에 아무도 살인자나 도둑이나 악을 행하는 자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서 고난을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간섭하는 자”로 번역된 단어는 놀라운 그리스어 단어이다.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람이나 무뚝뚝하다는 뜻이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말하는 바는, 당신이 기독교 신앙을 눈치 없이, 무모하고 거칠고 둔감하게, 또는 문화적으로 부적절한 방식으로 이야기하여 반대하는 사람들을 만나는 경우에는 핍박받는다고 말하지 말라는 것이다. “나는 지금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 아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 때문에 박해를 받고 있다. 자진해서 밉살스러운 사람이 되는 이에게 축복의 약속은 적용되지 않는다. 3.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으면 아버지를 찬양하게 된다.다음은 당신이 받는 박해가 예수님을 위한 것인지 자신을 위한 것인지를 판단하는 한 가지 방법이다.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 데 없어 다만 밖에 버려져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겨지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13-16)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삶과 믿음 때문에 박해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당신의 삶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할 것이다. 어떤 비그리스도인은 적개심에 차서 반응할 것이고, 또 어떤 이들은 당신에게 매력을 느끼고 당신의 간증에 설득될 것이다. 나는 이것이야말로 우리 자신을 시험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로 인해 믿음을 찾거나 우리를 통해 예수님께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거의 또는 전혀 없이, 모든 이가 단지 핍박만 한다면, 그건 예수님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너무 무모해서일 것이다. 한 번도 박해를 받은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건 믿음에 관해서 타협하거나 침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일어나고 있다면, 즉 박해를 받지만 또한 간증이 열매를 맺는다면 당신은 지금 아주 좋은 상황에 있는 것이다. 사랑 없이 말하는 진리는 반대를 부를 뿐이다. 또한 진실을 말하지 않는 사랑은 비겁하다. 서구 교회에 대해 가장 걱정되는 것 중 하나는 우리 그리스도인이 엄청난 핍박을 받지도 않고 또 그렇다고 그리 매력 있는 존재도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저 우리가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4. 예수님을 생각하며 묵상함으로 축복의 약속을 체험할 수 있다.마지막으로, 예수님을 위해 핍박받는 경우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복을 어떻게 얻을까?그 축복은 놀라운 약속이다. 축복은 다름 아니라 성령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당신에게 임하실 것을 의미한다. 그 축복은 성령님의 성품이 당신의 삶 속에서 만들어지며, 그것이 당신을 특별한 방식으로 형성할 것을 의미한다. 그 축복은 또한 ‘박해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오히려 ‘박해 때문에’ 당신을 통해 예수님에게 매력을 느끼는 사람이 생겨남을 의미한다. 핍박과 관련하여 수동적인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 박해의 때에 능동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여 필요한 기쁨과 사랑과 용기를 달라고 간구하라. 그렇게 하는 한 가지 방법은 다음과 같이 예수님을 생각하면 깊이 묵상하는 것이다. 빌립보서 2장은 예수께서 “자신을 영광을 비우셨다”고 말한다. 킹제임스 성경은 이 구절을 예수께서 아버지와 동등하시지만 “자신을 비천하게” 하셨다고 번역한다. 그에게는 영광이 있었고 또한 존귀함이 있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었지만 거절당했다. 예수님은 자발적으로 수치와 굴욕을 당했다. 십자가형은 단순히 사람을 처형하는 수단이 아니었다. 그것은 의도적으로 로마가 내놓을 수 있는 가장 굴욕적이고 수치스러운 죽음이었다. 십자가의 죽음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이었다. 예수님은 당신과 내가 수치스럽게 죽지 않도록 가장 수치스러운 방법으로 죽으셨다. 그렇기에 이제 우리는 영원히 지속되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우리의 이름은 하늘에,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수치와 치욕을 받으셨기에 우리는 영원히 존귀와 영광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다.이제 당신의 평판에 약간의 타격이 가해지고 조금 박해를 받았다고 해도, 예수님이 당신을 위해 하신 일을 안다면, 당신에게 궁극적인 영예를 주시기 위해 예수님이 궁극적인 수치를 취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이제 그 정도의 수치는 견딜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다. 예수님의 수치를 묵상할 때, 그로 인해 받게 되는 축복으로 인해 우리는 우리에게 가해지는 약간의 수치를 얼마든지 견딜 수 있다. 이것은 냉정한 메시지이다. 그러나 보라. 그 결과는 기쁨이다. 예수님께서는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말씀하신다. 왜?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그 소망을 바라보라. 결코 멸망하지 않을 이름이 당신에게 있음을 기억하라. 결코 시들지 않을 명예와 영광이 당신에게 있다는 것을 깨달으라. ‘광야의 믿음: 중국 교회로부터 듣는 권면’에 담긴 간증과 성찰을 관통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런 기쁨이다. 굳게 서라2020년 초에 중국 가정교회 그리스도인 수천 명이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 모였을 때, 나는 이 기쁨을 직접 목격했다. 박해가 커지는 가운데 복음의 소망으로 서로를 격려하기 위해 모인 가운데, 그들의 고향 곳곳에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다. 그러나 그들은 두려움 대신 담대한 희망을 가지고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의 고향이 결코 멸망하지 않는 하늘에 있는 도성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 형제자매들의 간증에서 힘을 얻자. 우리가 비록 시련을 겪어도 더욱 굳건히 서도록 힘을 내자. 편집자 주: 이 글은 ‘광야의 믿음: 중국 교회로부터 듣는 권면’(Kirkdale Press, 2022년 4월)에 수록된 팀 켈러의 추천사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간추린 것이다. Faith in the Wilderness: Words of Exhortation from the Chinese Church(광야의 믿음: 중국 교회로부터 듣는 권면)HANNAH NATION & SIMON LIU 엮음 “우리 공동체의 부흥을 원한다면, 부흥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배워야 한다.”서구 그리스도인에게 고난과 박해의 경험은 아주 먼 이야기이다. 반면에 중국 그리스도인에게 박해는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일상적인 측면이다. 서양 그리스도인이 중국 가정교회로 옮겨진다면, 고난은 설교와 대화의 단골 주제가 될 것이다. 중국 공산당의 수십 년에 걸친 박해와 고난에 대한 풍부한 신학으로 인해 중국 가정교회 운동은 세계 교회에 신학적으로 많은 기여를 했다.‘광야의 믿음: 중국 교회로부터 듣는 권면’의 편집자 한나 네이션과 시몬 루는 서방 세계가 중국 교회에서 얻을 수 있는 통찰을 한데 모았다. 중국 그리스도인의 이 권면의 편지는 흑암 가운데 빛나는 복음의 실체, 곧 우리 소망의 터전이 되는 복음의 진수를 독자들에게 일깨워 줄 것이다. 독자들은 중국 그리스도인의 증언으로 더 큰 확신과 격려를 받고 성장할 것이다.LEXHAM PRESS. 168 PP. 원제: What Tim Keller Learned from Chinese Christians 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고난
핍박
팔복
중국교회
기독교핍박
광야신학
팀켈러
중국기독교
중국가정교회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3)
by Tim Keller
2022-03-24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입니다. [1-1]• 서론• 마지막 번성• 주류 교단의 쇠퇴[1-2]• 미국 주류 교단에 대한 비판들 켈리의 사회학적 비판 메이첸의 신학적 비판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1-3]•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 결론2부 “복음주의의 쇠퇴”, 3부 “갱신의 길”, 그리고 4부 “갱신을 위한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리프먼의 말이 맞았다. 상대주의적이고 세속적인 세계관이 기독교/계몽주의적 관점을 대신했지만, 대공황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거대한 공동의 적 때문에 도덕적 가치에 대한 오래된 합의는 일시적이나마 유지되었다. 이러한 위기는 단지 가족과 지역 사회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자기희생을 요구했으며, 필연적으로 현대 문화가 선호하는 치료요법(therapeutic) 및 개인주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훌륭하고 도덕적인 삶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한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동의가 있었다. 나라 사랑, 성적 순결, 성실, 검소와 관용, 겸손과 권위에 대한 존경, 가족과 관계에 대한 희생적 충성 등등, 실제 행동에는 많은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러한 가치를 믿었다. 그러나 196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위기가 가져다준 생존의 도전은 추억이 되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서 진실을 찾으라는 문화의 지시를 따르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미국 사회는 분열되기 시작했고 그 분열은 지금까지도 여전하다.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주도한 최초의 시민운동(Civil Rights movement)은 (리프먼이 조언한 대로) 더 높은 도덕률을 지향했다. “킹의 지도력과 연설이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한 것은 도덕법이 우주에 새겨져 있다는 그의 근본적인 확신 때문이었다.”[25_위 책, 65.] 그러나 1968년 킹이 암살당할 당시에는 이미 전혀 다른 세력이 활동하고 있었다. 여성, 게이 및 기타 소수자를 위한 모든 “인권” 운동은 킹의 운동 방식(예를 들어, 저항 및 행동)을 모델로 삼았지만, 지향하는 철학적 틀은 완전히 달랐다. 정체성 정치(Identity politics)는 객관적인 도덕 질서가 아니라 자신이 속한 그룹의 독특한 인식과 경험에 근거해서 해석한 정의에 대한 주장이다. 개인주의는 나라 사랑, 가족 유대에 대한 충성, 권위에 대한 존중과 같은 전통적인 가치를 잠식해 나갔다. 그리고 이런 집단들 중 특히 성적 권리를 요구하는 집단이 가진 도덕성에 대한 신념은 전통적인 서구의 개신교 윤리와는 달라도 완전히 달랐다. 이제 이 나라는 전쟁 상태라 불러도 과언이 아닌 파벌로 분열되기 시작했다.왜 그런가? 문화계 저명인사들 중 그 누구도 리프먼과 마틴 루터 킹처럼 더 차원 높은 법 또는 성경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개신교 조직은 아예 그럴 수 있는 능력 자체를 포기했다. 사회적 관습에 관한 모든 사람의 합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세속적이고 실용적이며 상식적인 추론이 답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그런 가정이 실패했을 때, 도덕적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는 항소할 수 있는 법원이나 그 어떤 근거도 없었다. 누군가가 “당신이 지금 하는 일은 잘못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느끼기 때문입니다”라고 말하면서 불의를 외친다고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여보세요, 나는 전혀 잘못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왜 이 문제에 관한 당신의 느낌이 더 중요시되어야 합니까? 무슨 권리로 당신의 느낌을 지금 내게 강요합니까?”라고 받아쳐야 할까? 우리 사회는 종교와 자연법과 같은 도덕적 가치에 대한 공유 기반을 모두 포기했다. 따라서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수단도, 또 옳고 그름을 놓고 토론할 근거도 이제는 없다. 리프먼이 주장했듯, 과거 그 어떤 사회도 이런 통합의 시도를 한 적이 없고, 그는 그런 통합이 가능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국가가 분열되기 시작하면서 주류 개신교가 나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교회는 덜 직선적인,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자유주의적 결론에 도달하려는 이들을 잃기 시작했다. 정치적 보수주의자도 잃었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켈리와 메이첸이 지적했듯이 자유주의 그리스도인의 자녀들조차도 교회에서 실질적인 유용성을 발견할 수 없었기에, 교회는 점점 더 쇠퇴해 갔다. 아이러니하게도, 니버는 세속주의의 증가가 개인주의를 향한 미국의 오랜 충동을 더 증가시킬 것이라고 보았다. 종교가 쇠퇴하고 세속주의가 성장함에 따라 이기심이 급속히 커졌다.[26_종교가 과거에 어떻게 미국식 개인주의를 조절할 수 있었는지, 그러나 종교가 그 조정 능력을 어떻게 상실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책 볼 것. Robert Bellah, et al, Habits of the Heart: Individualism and Commitment in American Life,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2007.] 니버는 사람들이 부와 성(sexuality)을 단지 좋은 선물이 아니라 정체성을 만드는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현대 문화가 조장하는 “자기 영광”(self-glorification)을 강조했다. 그는 세속적 자유주의(인간 이성의 신격화)와 파시즘(인종과 토양의 신격화), 그리고 사회주의(국가의 신격화)라는 우상숭배에 대해 말했다.[27_Reinhold Niebuhr, “The Christian Church in a Secular Age”, in Robert McAfee Brown, ed. The Essential Reinhold Niebuhr: Selected Essays and Addresses, Yale University Press, 1986.] 그러나 마즈던이 덧붙인 것처럼, 니버가 주장한 “인간 조건에 관한 훈계는 환영받을 수 있지만, 그가 주장하는 일반화된 기독교는 그 자신이 스스로 식별한 대부분의 세속화 경향에 도전하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28_Marsden, xxvi.] 주류 개신교는 더 이상 급진적인 개종, 초월적인 하나님과의 만남, 마음을 새롭게 하는 사랑을 말하지 않게 되었다. 주류 개신교는 윤리와 정치에 관한 것이며, 세속주의를 도전하기에는 이미 너무도 많은 세속주의 사고를 개신교 속에 받아들였다. 결론우리로 하여금 실용적 상식과 과학적 이성이 통일된 도덕적 합의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도록 만든 20세기 중반의 모든 인물은 완전히 틀렸음이 판명되었다.[29_우리는 원조 계몽사상가들 역시 틀렸음이 입증되었다고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래서 현대 사상가들은 “계몽의 프로젝트는 실패했다”고 주장한다. (Alasdair MacIntyre, After Virtue, Whose Justice? Which Rationality?, Three Rival Versions of Moral Inquiry, 그리고 보다 최근의 이에 대한 더 분명한 논의는 Patrick Deneen’s Why Liberalism Failed 볼 것. 원조 계몽 ‘프로젝트’는 통합된 사회를 위한 도덕적 기초를 발견하기 위해서 전통과 종교로부터 분리된 이성의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었다. 미국 사회에서 권위와 지식의 현 위기는 옛 자유주의(계종주의/진보적 개신교의 합의점)가 언론의 자유, 개인의 권리, 가치중립성이라는 기본 개념을 거부하는 진보적 “후계 이데올로기”(successor ideology)에 의해서 거부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개의 대중 철학에 대한 분명한 대안이 현재로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가톨릭사상과 개혁주의 프로테스트사상, 이 둘 자연법과 종교를 공공 영역에 재도입하면서도, 신념의 다양성과 양심의 자유를 허용하는 사회 모델들에 기초를 제공하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마즈던은 그의 책의 마지막 장에서 주류 개신교, 종교적 우파, 현 세속 진보주의 모두 종교를 다른 관점들에 대한 열린 자세와 조합하는 어떤 능력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ian) 옵션을 제안한다. Marsden, Twilight, “Conclusion: Toward a more Inclusive Pluralism,” 151-178 볼 것.] 양극화 현상이 심화된 사회 속에서 인간의 본성이 무엇이며 인간의 번영은 어떤 모습인가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견해에 조차 의견이 분분하다. 이제는 더 이상 누구나 인정하는 “미국적 가치” 또는 통합된 “미국적 이야기”는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비록 비공식이었으나 한때 미국의 종교였던 주류 개신교의 쇠퇴는 이런 미국 사회 붕괴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었다. 주류 개신교는 문화 세속화로 가는 길을 (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닦았고, 그 결과 자신이 조장했던 세속화 물결의 희생자가 되었다.켈리, 메이첸, 그리고 마즈던의 정당한 비판에 비추어 볼 때, 그렇다고 나는 진보적 주류 개신교가 미국 교회를 위한 길이 될 수 있다고도 보지 않는다. 그렇다고 내가 지금 주류 교회에서 사역하는, 진정한 믿음으로 땀 흘리는 모든 이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주류 개신교의 전반적인 계획은 실패했다. 오늘날 가톨릭과 복음주의(곧 발표할 “복음주의의 쇠퇴” 참조) 내 신뢰를 잃게 하는 수많은 실패에 비추어 볼 때, 적지 않은 사람들이 단순히 주류의 연장선상에 불과한 진보 기독교가 최선의 대안이라는 생각을 다시 키우고 있다. 그러나 주류 기독교의 근본적인 전제는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 백 년 전, 주류 기독교는 서구의 세속 문화에 과도하게 적응했고, 오늘날에도 그런 모습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류 기독교는 우리 사회를 향해 그 어떤 대안을 제시하거나 반박도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쇄신으로 가는 미국 교회의 길도 될 수 없다.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1부 끝. 2부-복음주의의 쇠퇴로 이어집니다.]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1-The Decline of the Mainlin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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