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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2)
by Tim Keller
2022-03-23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입니다. [1-1]• 서론• 마지막 번성• 주류 교단의 쇠퇴[1-2]• 미국 주류 교단에 대한 비판들 켈리의 사회학적 비판 메이첸의 신학적 비판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1-3]•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 결론2부 “복음주의의 쇠퇴”, 3부 “갱신의 길”, 그리고 4부 “갱신을 위한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미국 주류 교회에 대한 비판들켈리의 사회학적 비판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종교의 매력은 ‘가장 큰 차원의 의미’를 제공하는 것이라고 켈리는 썼다. 이것은 이웃을 돕거나 좋은 일에 자원하는 것과 같이, 규모 면에서는 작지만 진정성을 가진 의미를 말하는 게 아니다. 가장 큰 차원의 의미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감과 희망을 가지고 고통과 죽음에 직면할 수 있게 하며, 또한 장기적인 공동선을 추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할 수 있도록 한다. 그 모든 게 가능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내가 “우주적 목적”의 일부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 결과를 낳기에 적합한 것으로 보이는 가장 큰 의미는 종교가 제공하고 또한 종교적으로 검증된 것”뿐이다.[5_Ibid, 43-44.] 켈리는 보수 교회는 계속해서 하나님의 실재, 예수님 부활의 진리, 내적 변화를 위한 성령의 능력, 죄 용서를 위한 예수님 죽음의 효능, 궁극적인 하나님 나라의 도래와 같이, 주로 영적 필요와 초자연적인 “최대 규모”의 우주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었다고 주장했다. 반면에 자유주의 주류 교회는 현대의 세속 사상에 깊이 적응했다. 그들은 기적, 성령으로 거듭남, 예수님의 육체적 부활, 성경의 신뢰성과 같은 개념을 거부했다. 그들은 “상대주의…미지근함…개인주의…”와 같이 켈리가 “사회적 약화의 증거”(Evidences of Social Weakness)라고 규정한 가치를 채택했다. 달리 말해 이런 현상은 점점 약해지는 공동체의 특징이고, 그 결과 하나님 안에서의 믿음, 의미, 용서, 사랑, 영적 성장을 공유하는 삶과 같은 전통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중심으로 더 이상 강력하게 결합할 수 없게 되었다.[6_Ibid, 84-85.] 주류 교회는 자아에 대한 치료요법적(therapeutic) 견해를 채택하고, 성과 돈의 사용에 관한 전통적인 기독교의 윤리적 제한을 포기했다. 켈리는 강력한 종교 단체를 위해서 “최소한의 최대”(Minimal Maxims)라는 개념을 제안했다. 신앙에 관해서 진지한 사람들은: 1. 신앙(faith)을 다른 신념/충성/관행과 혼동하지 않는다. 신앙을 이런 것들과 구분하지도 않고 무분별하게 섞지도 않는다. 또한 전혀 그렇지 않은데도 신앙이 마치 이런 것들과 비슷한 것처럼 여기거나, 동등한 가치를 가졌다고 보거나, 또는 상호 양립이 가능한 것처럼 위장하지도 않는다. 2. 신앙 조직으로부터 승인받은 사람들에게 높은 요구를 하며 … 또한 완전히 헌신하지 않은 사람들을 조직에 포함시키거나 조직 안에서 계속 활동하도록 허용하지 않는다. 3.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가 표준이나 믿음 또는 행동에서 잘못하는 경우, 그것을 동의하거나 격려하지 않으며, 함께 탐닉하지도 않는다. 4. 그것[당신의 신앙]에 대해 침묵하지 않고, 변명하지도 않으며. 또한 신앙이 삶에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않는다고, 신앙 여부는 중요한 게 아니라고 다른 사람이 함부로 말하도록 허용하지도 않는다.[7_위 책, 121.] 그렇다면 주류 교회의 ‘사명’(mission)은 무엇이었나? 켈리는 주류 교단이 사람들을 믿음으로 인도한 다음 그들을 믿음 안에서 세우는 데 초점을 맞추는 대신, 거의 전적으로 정치적 대의에만 집중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또한 그리스도인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이 되고, 이웃을 돌보고, 보다 정의로운 사회를 위해 일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라는 단순한 소명, 즉 교회가 지난 수세기 동안 해왔던 바로 그 소명을 무시했다. 그 대신 주류 교회는 그들 자신을, 달리 말해서 기독교 자체를 특정 정당 또는 특정 사회 정책과 동일시했다. 교회만이 할 수 있는 독특한 일은 내팽개쳐지고 자유주의 정당이 잘하는 일이 이제는 현대 교단의 본업으로 여겨지게 되었다. 정치적 그리고 신학적으로 자유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켈리는 스스로를 정치 조직으로 전환하는 교회는 계속해서 쇠퇴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그리고 지금 돌이켜보면 민주당과 함께 주류 교회가 저지른 잘못을 반복하지 말라는, 즉 공화당에 동조하지 말라는 보수 교회를 향한 경고가 분명히 있었다. 켈리의 이런 경고는 모든 면에서 거의 완전히 무시되었다. 그는 좌파로부터 심한 비판을 받았고, 그런 그를 보면서 약간의 악의적인 기쁨마저 느꼈을 보수 그리스도인 또한 그의 경고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결과 지금 이 글을 읽는 독자 대부분은 켈리에 대해 거의 들어본 적이 없을 것이다.메이첸의 신학적 비판켈리가 글을 쓰기 50년 전에 주류 교회를 향한 전혀 다른 종류의 비판이 출판되었다. 1923년, 그레샴 메이첸(J. Gresham Machen)은 뉴욕의 주요 출판사(Macmillan)를 통해서 ‘기독교와 자유주의’(Christianity and Liberalism)를 출간했다. 프린스턴 신학교의 신약학 교수인 메이첸이 그 글을 썼을 때만 해도 아직까지 수치적 그리고 제도적 쇠퇴가 시작하기 전이었다. 그러니까 50년 후 켈리가 관찰한 것과 비슷한, 사회학적 관점에서 볼 때 당시까지만 해도 분석할 만한 가치가 있는 어떤 숫자의 감소나 손실이 없었다. 그럼에도 메이첸은 주류 개신교를 표적으로 삼아 글을 썼다. 현대 세계에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주류 개신교가 종교적인 신념과 믿음을 버리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역사 속에서 항상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던 가장 위대한 구원 종교가 지금 완전히 다양한 형태의 종교적 신념과 싸우고 있다. 그런데 이는 더 파괴적일 뿐이다. … 왜냐하면 이 종교가 여전히 전통적인 기독교 용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 겉으로 드러나는 것은 단지 다양한 형태의 운동이다, 그 운동의 뿌리는 … 자연주의에 있다. 자연주의는 기독교의 기원과 관련하여 (일반적인 자연 과정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을 그 기원에 포함하는 것을 부인한다.[8_J. Gresham Machen, Christianity and Liberalism, New Edition, Eerdmans, 2009, 2.]개신교는 현대 과학이 그리스도의 동정녀 탄생, 그리스도의 선재와 성육신, 십자가에서의 속죄, 그리고 육체 부활과 같은 역사적으로 유지되는 기독교 신앙의 모든 주요 교리로 요약되는 기독교의 “특수한 것들”(particularities)에 반대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에 대해 메이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유주의 신학자는 종교의 일반 원칙 중 일부를 구출해 내려고(rescue) 노력한다. 그런 과정에서 기독교의 ‘특수한 것들’은 단지 일시적인 상징으로 치부되며, 대신 종교의 일반 원칙이 ‘기독교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간주된다.”[9_위 책, 5.]메이첸의 진단은 켈리의 진단보다 훨씬 더 냉소적이다. 메이첸은 이렇게 주장했다. 초자연적이지 않은 기독교를 창조하려는 자유주의의 시도는 “기독교를 기독교로 특징짓는 모든 것에 대한 사실상의 포기를 의미한다. 그렇기에 그 뒤에 남은 것은 본질적으로 기독교가 등장하기 전부터 이 세상에 있었던, 뭐라고 딱 정의하기 힘든 종교적 열망의 한 유형에 불과하다”[10_위 책, 6.] 자유주의에 의해 변경된 것은 단순한 ‘수정’ 내지 업데이트가 아니다. 그들은 기독교를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바꾸어버림으로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 만들었다.인류 역사를 통틀어 더 높은 차원의 삶을 갈망하고 더 높은 수준에서 삶을 고양시키는, 다양한 종류의 영감을 주는 이야기로 가득한 종교가 없었던 적은 없다. 이런 종교가 추구하는 것은 다양한 윤리적 실천, 종교적 준수 및 의식의 변화를 통한 자기 구원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전혀 다른 종교였고 또 전혀 다른 종교이다. 기독교는 우리 힘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 안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구원은 오로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삶,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그리고 승천을 통해서만 이룰 수 있다는 것이다. 메이첸은 이러한 사건이 실제로 일어났다는 역사성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기독교에게 남은 게 무엇이든, 그것은 한낱 행위로 인한 의의 종교, 즉 수많은 다른 종교 중 하나로 재창조되는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똑바로 알고 있었다. 그런 시도는 결국 기독교를 다른 모든 종교와 구별 짓는, 기독교를 기독교로 만드는 핵심을 제거함을 의미한다. 구원에 관한 장에서 메이첸은 이렇게 말한다. 기독교 신앙이 진리(즉,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에 근거한다면, 그리스도인을 구원하는 것은 믿음 자체가 아니라 믿음의 대상이다. …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성품으로 하나님의 은총을 얻으려는 노력의 중단을 의미한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단순하게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드린 희생을 받아들인다. 그런 믿음의 결과는 새 생명과 모든 선행이다. 그러나 구원 자체는 하나님의 절대적으로 거저 주시는 선물이다. … 자유주의 교회에 만연한 믿음의 개념은 매우 다르다. … 현대 자유주의에 따르면 … 구원은 그리스도의 명령에 대한 우리 자신의 순종으로 얻어지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한 가르침은 율법주의의 승화된 형태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희생이 아닌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순종 여부가 하나님이 우리를 받아주시는가 아닌가의 근거가 된다.[11_위 책. 120-121.]이미 언급했듯이 메이첸은 아직 수치적 또는 제도적 쇠퇴의 징후가 전혀 없을 때 이 글을 썼다. 그리고 그의 비판에는 그러한 쇠퇴에 대한 예측이 전혀 포함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출석 숫자 또는 헌금의 변화와 관계없이 메이첸은 기독교 안에서 나타나는 여러 변화가 교회의 실제 삶과 사명에 치명적이라고 믿었다.[12_위 책, 150-151. 이 책 끝에서 메이첸은 미래에 교회가 어떻게 될지 전혀 모르겠다고 인정했다. 메이첸은 2세기에 이교사상이 교회 안으로 침투해 들어온 역사(이 싸움에서는 교부들에 의해 승리를 거두었다)와 중세교회의 타락을 지목한다. 메이첸은 몇 가지를 고려해 보면 교회들의 신학에 매우 큰 변화가 예상될 것이라고 암시는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는 추측하지 않았다.]여러 면에서 (아주 큰 관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주류 기독교의 쇠퇴에 대한 켈리의 분석이 메이첸의 분석과 일치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메이첸은 교회가 기독교 신앙의 중심이 되는 것들(main things)을 포기하고 있다고 말했다. 켈리는 거기에 동의한다. 켈리는 사회학적으로 사람들을 “가장 큰 의미”에 연결하는 것에 대해 말했고, 메이첸은 신학적으로 사람들을 하나님과 살아 숨 쉬는 관계에서 연결하는 것에 대해 말했다.교회는 세속 조직이 훨씬 더 잘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점점 더 사회봉사 기관 또는 정치적 로비 단체가 되어갔다. 그런 교회가 쇠퇴한 것도 당연하다. 주류 교회는 세속 문화와 단체가 줄 수 없는 무엇을 주는 능력을 점점 상실해 갔다. 그 결과 세상이 주지 못하는 것은 이제 교회도 줄 수 없게 되었다.[13_메이첸에게 공평하게 말하자면, 켈리와는 달리, 메이첸은 교회가 역사적 교리를 폐기하는 것은 비현실적이고 제도적 교회의 자멸을 초래할 선택일 뿐만 아니라 잘못된 것이라고 믿었다. 그것은 배신이었고, 그 이유만으로도 반대해야 하는 것이다.] 포용과 정의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길은 다양하다. 굳이 그런 목표 때문에 일요일 아침에 일찍 일어나 교회에 가야 할까?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그러나 수십 년이 지나도록 명확하지 않은 주류 쇠퇴의 마지막 이유가 있다. 역사학자 조지 마즈던(George Marsden)은 ‘미국 계몽주의의 황혼’(The Twilight of the American Enlightenment)에서 개신교 주류가 세속 세계가 추구하는, 본질적으로 불안정한 도덕적 합의와 동맹을 맺었다고 주장한다. 그 합의가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주류 개신교도 따라 미끄러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군사 및 경제 강국으로 부상했다. 미국의 인구 또한 소득과 은행 계좌와 마찬가지로 빠르게 증가했다. 이 모든 것은 “미국적 가치”의 승리처럼 보였다. 마치 미국이 공유하는 도덕 표준 속에는 통일성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는 현재의 ‘문화 전쟁’과 같은 것이 없었다. 도덕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겉보기에 통일되고 낙관적이었던 1950년대에도 우리에겐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강한 의심의 기류가 어떤 형태로든 우리 속에 숨어 있었다고 마즈던은 기록한다. 저명한 지식인들은 물질주의와 대중문화가 미국인들을 순응주의자로 만들고, 거대한 기계 안에서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전락시킨다고 비난했다.[14_마즈던은 이 문제는 ‘미국 계몽주의의 황혼’의 제1장에서 다루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전례 없는 번영이 미국인들을 “경제 기계 안에서 움직이는 톱니바퀴”로, 다시 말하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하는 인격이 제거된 존재로 바꾸어 놓았다고 확신했다. “고도로 조직화된 상업 사회와 소비주의”가 우리의 “진정한 인간성”을 갉아먹고 있었다(42). 에리히 프롬(Eric Fromm), 윌리엄 화이트(William Whyte)를 비롯한 여러 저자들은 인간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순응주의의 해독제는 개인의 자유, 곧 진정한 인간, 스스로 결정하는 인간, 그리고 스스로 충족하는 인간을 주장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31).] 당시 많은 대중 지식인들이 찾은 대답은 최대한 개인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함으로 진정성 있고 자기 결정적이며 스스로 충족하는 사람이 될 것으로 보았다.[15_위 책, 86쪽. 그 시대에 가장 유명했던 대중 지성인들 거운데 다수는 철학자가 아니라, Gordon Allport, Carl Rogers, B.F. Skinner, Erving Goffman, Rollo May 같은 심리학자였다. 이들 사이에 차이점이 많이 있지만, 이들은 기본 사상을 공유했는데,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 전통, 곧 사람은 비합리적 죄책감, 공포, 전통적 공동체와 권위의 통제로부터 벗어나는 만큼 성숙하고 건강해진다는 사상이 그것이다. 이러한 기본 사상에 이들은 농후한, 특히나 미국적인, 낙관주의, 곧 인간 존재는 그러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완전한 자유가 주어지면 스스로를 더 나은 존재로 형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할 것이라는 사상을 첨가했다.] 그러나 자유는 문자 그대로, 점점 더 자신이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을 의미하는 ‘자율성’으로 정의되어 갔다. 역사적으로 인간이 추구하는 성취와 의미는 자신의 행복을 찾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자아보다 집단의 공동선을 더 중요시하는 관계와 역할을 통해 가족과 공동체의 행복을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그러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데이비드 리스먼(David Riesman)의 ‘고독한 군중’(The Lonely Crowd) 같은 베스트셀러 책들이 꾸준히 쏟아져 나왔고, 이런 책은 하나같이 가족이나 지역의 ‘하위 공동체’가 자신의 가치와 목적을 지시하지 못하도록, 미국인은 보다 더 진정성 있고 자기 결정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는 도덕적 처방을 버리고, 스스로 나 자신의 도덕적 처방을 발견할 때에만 완전한 사람이 된다는 주장이었다.[16_See Marsden, chapter 2, “Freedom in the Lonely Crowd”, 21-42.] “자유”라는 용어는 거의 전적으로 ‘부정적인’ 용어가 되어 갔다. 그러니까 무엇인가로부터 벗어날 때에만 자유가 자유라는 것이다. 그러나 마즈던은 이렇게 묻는다. “우리를 구속하는(restrictive) 전통이나 기대치에서 벗어났다고 치자, 그럼 인간 번영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하는 기준은 무엇으로 대체되었는가?”[17_위 책, 42.]사실상 미국에서 경종을 울린 유일한 주요 문화계 인물은 저명한 작가이자 저널리스트인 월터 리프먼(Walter Lippmann)이었다.[18_이 맥락에서 리프먼이 메이첸의 기독교와 자유주의를 높게 평가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게 좋을 것 같다. 또한 많은 존경을 받는 문학자이지만 미국 지성계에서는 실제로 주목 받는 인물이 아니었던 C. S. 루이스는 1943년에 The Abolition of Man을 썼는데, 이 책에서 그는 리프먼의 비판뿐 아니라 알리시데어 매킨토시와 후대의 찰스 테일러의 비판까지도 예견했다. 이들은 모두 세속 사회는 그 도덕적 이상들을 위한 적접한 기초나 원천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고 주장했다. 이 비판을 최근에는 Christian Smith가 Atheist Overreach(Oxford, 2018)에서 탁월하게 다시 거론했다. 스미스는 전통이든 계시든 자연법이든 이런 것 안에 있는 기초 없이는, 무신론자/세속주의자들은 왜 한 묶음의 의 도덕 감정들이 또 다른 묶음의 도덕 감정들보다 우선하는지 합리적인 이유를 제시할 수 없으며, 중대한 희생을 수반할 때조차도 도덕원칙들을 따르는 실제적인 동기를 제시할 수도 없다고 설명한다. 이 논증의 또 다른 고전적 제시는 다음을 볼 것. Arthur Allen Leff “Unspeakable Ethics, Unnatural Law” Duke Law Journal, December, 1979.]리프먼은 세속적 자유주의 체제의 중심에 있었던 비종교적 유대인이었다. 그러나 1955년에 그는 자신의 동료들을 실망시킨 마지막 책, ‘공공철학 에세이’(Essays in the Public Philosophy)를 썼다. “리프먼이 동료로부터 이단 취급까지 받으며 욕을 먹은 이유는 전통적(inherited) 원칙에 기초해 대중적 합의를 구축해 온 그의 자유주의 동료들이 전통적 원칙을 파괴했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그 전통 위에서 뭔가를 쌓고 있다는 리프먼의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19_위 책, 44.] 리프먼은 진보적인 미국 가치(그것을 완전히 실행하든 아니든), 즉 모든 사람의 평등한 존엄성, 양심, 사상 및 표현의 자유, 동의에 의한 정부, 과학과 이성에 대한 신뢰 등등이 과학의 결과(deliverance)가 아니라고 비난했다. 원래 이러한 미국의 사상은 초월적 도덕 표준, 즉 우리 모두가 진심으로 인정할 수 있는 더 높은 “보편적 질서”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이었다. 유신론자가 아닌 리프먼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전통에 더 많은 비중을 두었다. 그러나 그는 객관적인 도덕 질서, 달리 말해서 문화 또는 개인의 사적 감정에 의해 결코 만들어질 수 없는 일련의 기준을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한, 공적이고 공유 가능한 사회 질서에 대한 기반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좋은 것, 옳은 것, 참된 것이 개인의 ‘발명’이고 ‘선택’에 달리게 된다면, 우리는 예의(civility)라는 전통에서 벗어나게 된다.” [20_Marsden, 47에서 인용.] 그가 의미하는 바는, 여태 아무도 그런 기반 위에서 사회적 공동생활을 만들려고 시도한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떤 법은 정의롭지만 어떤 법은 부당하다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다수결로? 그렇다면 다수가 소수를 박해하고 심지어 파괴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는 독일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21_See Marsden, chapter 3, “Enlightenment’s End? Building Without Foundations”, 43-67.]우리가 원래 가졌던 “미국적 가치”가 성경의 가르침이라고 믿는 그리스도인과, 고대인처럼 “자연법”을 믿었던 계몽주의 사상가 사이의 합의에서 비롯되었다는 리프먼의 말은 옳다. 그건 다름 아니라, 인간의 이성과 성찰을 통해 식별할 수 있는 우주의 초월적이고 도덕적인 질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55년, 미국의 현대 자유주의 기득권은 이런 리프먼에게 경악했다. 그의 책은 부정적 평가를 받았고, 하나님과 자연법에 대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이 위험하고 완전히 불필요하다는 주장이 뒤를 이었다. 신념을 테스트하는 데에는 “비독단적, 상대주의적, 실용주의적” 방식이 가장 사랑받았다. 우리의 가치는 인간에게 가장 유익하고 대부분의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드는, “우리 모두가 다 알고 있는” 것에 달려 있다는 주장이다. 그런 주장은 결코 하나님과 우주 질서에 그 뿌리를 두지 않는다. 흥미롭게도 주류 기독교의 중요한 대중 지식인 라인홀트 니버(Reinhold Niebuhr)조차도 리프먼의 책을 거부했다.[22_위 책, 53.]니버는 메이첸의 예측대로 신앙을 세속 과학에 적용했다. 현대 개신교 신자인 “우리”는 더 이상 “동정녀 탄생을 믿지 않으며, 그리스도의 육체적 부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리는 … 자연 질서를 파괴하는 ‘기적’이 계시적 사건의 사실성을 증명한다고 믿지 않는다”라고 그는 썼다.[23_위 책, 118.] 성경에는 현대의 세속 사람들이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있고, 그래서 자유주의 개신교도는 그것을 거부했다. 즉 진리의 기준은 초자연적 계시가 아니라 세속적 실천 이성이었다. 성경은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결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세속적이고 현대적 관점은 성경 내용 중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한다. 그래서 니버는 종교나 자연법으로 돌아가라는 리프먼의 요청이 잘못되었고 불필요하다는 다른 비평가들과 의견을 같이 했다. 합리적인 사람은 민주주의, 인권, 개인의 자유에 대한 헌신이야말로 가장 합리적이라는 데에 기꺼이 동의한다. 그러나 마즈던이 묻는 것처럼 (그리고 메이첸이 수십 년 전에 주장한 바와 같이) 당시 교회는 도대체 무슨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는가? 그런 전략의 가장 큰 아이러니는 이것이다. 니버는 자신의 입장을 기독교 유산이 가진 공적 역할을 보존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지만, 신앙의 주관화는 신앙을 전적으로 선택적 대상이며 없어도 되는 것으로 만들었다. … 신학을 무시하고 니버가 제안하는 인간 한계라는 관점에서 기독교를 단지 심오한 통찰력의 한 방편으로만 바라보게 만들었다.[24_위 책, 119.]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3):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로 이어집니다.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1-The Decline of the Mainlin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의성장과쇠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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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1)
by Tim Keller
2022-03-22
이 글은 미국 교회의 쇠퇴 원인을 성찰하고 그 미래를 전망하는 팀 켈러 목사의 4부작 중 첫 번째입니다. [1-1]• 서론• 마지막 번성• 주류 교단의 쇠퇴[1-2]• 미국 주류 교단에 대한 비판들 켈리의 사회학적 비판 메이첸의 신학적 비판 마즈던의 문화적 비평[1-3]• 주류 개신교의 쇠퇴: 미국 사회의 분열과 문화적 통합의 종말• 결론2부 “복음주의의 쇠퇴”, 3부 “갱신의 길”, 그리고 4부 “갱신을 위한 능력”으로 이어집니다. 서론미국 그리스도인에게 이보다 더 긴급한 질문은 없다:지금 미국 교회는 무엇이 잘못되었고, 어떻게 해야 전도와 사역을 새롭게 할 수 있을까? 지금 미국 교회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데에 거의 대부분이 동의한다. 교회 내부에서 볼 때, 그 어느 때보다 양극화와 갈등이 심화되어 있고, 미국 교회의 모든 교파(factions)가 (그 이유는 서로 달리 보지만) 지금 교회가 심각한 곤경에 처해 있다는 데 동의한다. 교회 바깥에서 볼 때, 숫자와 제도(institution)와 영향력 면에서 쇠퇴를 거듭하는 교회를 바라보면서 언론인과 사회학자, 다른 여러 분야의 학자들이 기뻐하거나 또는 한탄한다. 미국 교회가 앞으로 나아갈 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스펙트럼의 한쪽 끝에는 단지 자신과 신학이 다르다는 이유로 수년 동안 대부분의 기독교를 다 배교자라고 비난해 온, 매우 보수적인 성향을 지향하는 그리스도인이 있다.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부패한 제도적 교회를 되돌릴 방법은 전무하다고 그들은 확신하고 있다. 또 다른 한쪽 끝에는 전 세계적인 추세로 볼 때 다음 세대에는 종교가 아예 사라질 것이라는 큰 희망을 가진, 가장 세속적인 사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순하다. 교회가 그냥 텅텅 비는 것이다. 이런 극단의 두 가지 경우 다 실현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셜 미디어는 이런 의견이 실제보다 더 널리 퍼져 있는 것처럼 부풀릴 뿐 아니라 아주 설득력 있는 것처럼 포장한다. 그에 따라 이런 극단의 의견은 실제로 더 널리 퍼지기 마련이다. 그러나 세계 기독교 교회는 (이슬람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빠르게 성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인구통계학자와 사회학자는 일반적인 종교 특히 기독교가 심지어 서구에서조차 별 중요하지 않은 세력으로 사라질 것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이런 의견이 사실이라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무엇일까? 어떻게 해야 무엇이 잘못되었고 바른 갱신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회가 바로 이해할 수 있을까?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그 시작에 해당하는 미국 교회의 쇠퇴에 대한 이야기부터 하는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번 시리즈에서 나는 두 개의 글을 쓸 것이며, 그 다음에는 앞으로 가능한 경로를 그려 보기 위해 또 다른 글 두 편을 쓸 것이다. 마지막 번성1차 세계대전 이후에 미국 교회는 강하고 번영하는 것처럼 보였다. 1952년, 무려 75퍼센트에 이르는 미국인이 종교가 삶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응답했다. 1957년에는 80퍼센트 이상이 종교가 “오늘날의 문제에 답할 수 있다”고 말했다. 1950년대에 들어서면서 교회 등록 비율은 55퍼센트에서 69퍼센트로 급증했다.[1_Robert D. Putnam and David E. Campbell, American Grace: How Religion Divides and Unites Us, Simon and Schuster, 2010, 87.] 1950년에서 1960년 사이에 미국 인구는 1억 5,000만 명에서 1억 8,000만 명으로 늘어났으며, 이는 전후 “베이비 붐”에 힘입은 기록적 성장이었다. 1950년대 후반에는 전체 미국인의 거의 절반이 정기적으로 교회에 출석했다. 이는 미국 역사상 가장 높은 비율이었다.[2_See Robert Ellwood, The Fifties Spiritual Marketplace: American Religion in a Decade of Conflict, Rutgers U. Press, 1997.] 이와 같은 종교적 급증의 또 다른 주목할 만한 특징은 그것이 얼마나 널리 퍼졌는가이다. 계급과 인종, 지역과 교파를 초월해서 종교는 번성했던 것 같다. 로마가톨릭은 마침내 노동계급이나 소수민족 교회를 뛰어넘어 문화적 주류에 진입한 것처럼 보였다. 미국 가톨릭의 풀턴 신(Fulton Sheen) 대주교는 라디오와 텔레비전으로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교회는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목사가 이끄는 민권운동의 큰 사회적 변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그 중심에 서 있었다. 보수적인 백인 개신교인 빌리 그레이엄의 유례없는 성공적 사역은 그 시대를 특징짓는 또 하나의 중요한 현상이다. 근본주의와 구별되는 조직과 지도자로 구성된 새로운 동맹의 일원이었던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운동을 기존 기독교와 구분하여 “복음주의”라고 불렀다. 그 가운데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감리교, 루터교, 성공회, 장로교, 미국 침례교, 그리고 연합 그리스도 교회(회중) 교단으로 구성된 주류 개신교였다. 그들의 건물은 거의 모든 역사적 도심의 중심을 차지했고, 그들이 설립한 학교와 기관은 최고의 명성을 얻었으며, 거기로 쏟아지는 기부금은 실로 엄청났다. 주류 교단의 쇠퇴그러나 겉보기에도 높은 이런 성장은 거의 즉각적으로 주류 교단에서 시작된 전례 없는 교회 쇠퇴로 이어졌다. 1960년대 중반 340만 명으로 정점을 찍었던 성공회는 1990년대 초 240만 명으로 감소했고, 2019년에는 그 숫자가 160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1965년에 425만 명이었던 주류 장로교회의 교인은 2000년에는 250만 명, 2020년에는 125만 명으로 줄었다. 다른 주류 교단도 이와 유사한 급격한 하락을 보였다. 1970년대 중반에 이르러, 과거에 결코 일어나지 않았던 일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미국 역사상 처음으로 대부분의 주류 교회 그룹이 성장을 멈추고 축소되기 시작했다. … 축소되는 교단의 대부분이 식민지 시대 이후 계속해서 성장을 누려왔었다. … 그러나 방향이 감소로 바뀌었고, 두 세기는 성장과 감소라는 전혀 상반된 추세로 특징지어졌다.”[3_Dean Kelley, 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 A Study in Sociology of Religion with a new Preface, Mercer University Press, 1996, 1.]지금 인용한 말은 딘 켈리(Dean Kelley)가 1972년에 쓴 폭탄과도 같은 책 ‘왜 보수 교회는 성장하고 있는가’(Why Conservative Churches Are Growing)에 적힌 내용이다. 켈리는 미국교회협의회(National Council of Churches) 즉 주류 개신교 협의회에서 활동한 법률 학자였다. 그는 결코 보수적이지 않았다. 그는 공립학교에서 하는 기도에 반대하는 로비활동을 했으며 ACLU(The American Civil Liberties Union, 미국시민자유연맹) 이사회의 일원이었다. 그러나 주류 교회에 대한 켈리의 비판은 맹렬했다.쇠퇴의 초기 몇 년 동안 켈리가 주로 들었던 기독교 주류 인사들의 변명은 “사람들이 더 이상 종교적이지 않다”는 불평이었다. 거기에 대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모든 종교 단체가 축소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주류 개신교 교단이 이런 역경이 일시적이길 바라며 어떻게든 이겨내고 살아남으려 애쓰고 있지만, 그에 반해 남침례회, 하나님의 성회, 하나님의 교회, 오순절과 성결교, 복음주의, 몰몬… 여호와의 증인, 제칠일 안식일 예수 재림교인, 흑인 이슬람교도 및 많은 소규모 교단 등은 오히려 더 활력이 넘친다.[4_위 책, 20-21.] 미국 교회의 쇠퇴와 갱신: 주류 교회의 쇠퇴(1-2): 미국 주류 교단에 대한 비판들로 이어집니다. 원제: The Decline and Renewal of the American Church: Part 1-The Decline of the Mainline출처: quarterly.gospelinlife.com번역: 무제
미국교회의성장과쇠퇴
미국교회사
미국주류교단
자유주의신학
기술이 모임을 대체할 수는 없다: 항상 교회에 모여야 하는...
by Tony Payne
2022-02-20
여기 호주 시드니에 사는 나는 지금 스크린 앞에 앉아서 다른 지역에서 다른 스크린을 보고 있을 당신과 함께하고 있다. 나는 우리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바란다. 비록 지리상으로 또 시간상으로도 서로 떨어져 있지만, 우리가 화면 속 단어를 통해 앞으로 몇 분 동안 함께 만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생각해 보면 이건 기적이다. 내가 이 글을 잘 쓴다면, 당신은 내 생각과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노트북 안에서 팬이 부드럽게 윙윙거리며 돌아가는 소리 외에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을 수도 있다. 비동기식으로든(책에서 또는 지금처럼 기사를 통해서), 또는 동기식으로든(줌 회의 또는 전화 통화를 통해서), 우리는 물리적으로 공간을 공유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서로 연결하고, 의사소통하고, 관계를 맺을 수 있다. 떨어짐, 부분적인 기쁨봉화가 발명된 이후 사람은 쉬지 않고 연결해 왔다. 말이나 이미지를 통해 자신의 생각과 마음, 그리고 성격까지도 다른 장소, 심지어 다른 시간으로까지 투사할 수 있는 놀라운 능력을 하나님은 우리에게 허락하셨다. 신약성경 기자들은 이 축복을 잘 활용했다. 그들은 멀리 떨어져서도 사랑과 그리움을 전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편지가 가르침과 격려와 훈계를 전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음을 알았다. 요한이서나 요한삼서 같은 작은 서신서는 흥미로운 연구 사례이다. 이 두 편지에서 요한은 그의 백성이 “진리 안에서 살아가는”(요이 1:4, 요삼 1:3) 것을 보면서 기뻐하고, 또 그렇게 계속 살아가라고 격려하고 권고한다. 그러나 두 경우 모두 할 말이 많이 남았지만 요한은 직접 만나서 하는 게 훨씬 더 좋겠다고 결론짓는다. 내가 여러분에게 쓸 말이 많지만, 그것을 종이와 먹으로 써 보내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에게 가서, 얼굴을 마주보고 말하여, 우리의 기쁨을 넘치게 하는 것입니다(요이 1:12; 요삼 1:13-14도 참조).믿음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는 소식을 들을 때 참 기쁨이 있고, 또한 그런 형제를 격려하는 글을 쓰는 데에도 기쁨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부분적인 기쁨이다. 그 기쁨은 서로 대면할 때 느낄 성취감을 기대하는 기쁨이다. 기술: 관계에 축복인가 저주인가? 물리적 함께함(physical presence)이 갖는 우월성은 너무나 명백해서 그것을 주장하는 것조차 이상해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식당에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저녁을 먹는 것보다, 그 사람과 문자 메시지 하는 것을 더 좋아할 만큼 변태적인 사람이 과연 있을까? 어머니와 따뜻한 포옹과 여유로운 대화를 나누는 기쁨을 포기하고 대신 전화 통화를 선택할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더 큰 기쁨보다 더 작은 기쁨을 선택하는 데서는 아주 오랜 경력을 가진, 꽤나 이상하고 비뚤어진 피조물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큰 가능성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더 작고 미천한 현실을 선호함으로 큰 가능성 자체를 왜곡하고 망친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했듯이 이러한 역동성은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라는 가상 세계와 관련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적 순간 속에서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 물리적 함께함의 즐거움을 과소평가하고 가상 세계의 이점을 과장하는 불안한 트렌드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기에 더 매혹적이며 빠르게 진행되는 가상의 흐름에 너무 빠진 우리는 물리적 친교가 주는 견고한 기반에 대한 맛을 잃기 시작했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신 다른 많은 선물과 마찬가지로 가상세계라는 축복도 남용하게 되면 결국 짐이 되고 저주가 된다. 이 짧은 글에서 이런 일이 왜 또는 어떻게 일어났는지 탐구하는 게 목적이 아니지만, 나는 간단하게나마 물리적인 교회 모임의 중요성과 관련된 한 가지 중요한 신학적 궤적을 언급하려고 한다. 자아의 고립다른 여러 학자와 더불어 칼 트루먼(Carl Trueman)이 최근에 문서화한 것처럼, 현대 서구 문화의 기이한 측면 중 하나는 우리 자신과 정체성을 심리화(psychologizing)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창조주와 주님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지속적이고 또 거침없이 거부해 온 서구 사회는 결국 스스로를 오로지 자기 자신에게로만, 그래서 내면의 삶을 도덕성과 정체성과 자아의 근원으로 바라보도록 만들었다. 따라서 내 감정과 생각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로 나 자신을 정의하는 문화에서 가상 세계가 매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하나님과 하나님이 창조하신 질서로부터 소외된다는 것은 창조된 자아가 가지는 육체적 곧 물리적 본성에 대한 일종의 반역이다. 그리고 이 반역은 기능 장애로 이어진다. 왜냐하면 물리적 본성이야말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리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데에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로서 창조주인 하나님뿐만 아니라, 다른 피조물과도 관계를 맺도록 만들어졌다. 우리가 육체적 존재인 것은 다 이런 창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함이다. 녹스(D. B. Knox)는 이렇게 말한다. 관계가 가져다주는 물리적, 정신적, 정서적, 영적 모든 쾌락과 더불어 관계의 목적까지 달성하도록, 우리의 몸은 참으로 놀랍게 만들어졌다. 눈, 얼굴, 그리고 뇌의 언어 구조는 우리가 내면을 서로에게 표현하도록 설계되었다(The Everlasting God, 52).이 점은 특히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재창조하실 때 이루시는 구속의 관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뿐만 아니라 서로와의 관계에서도 올바르게 회복된다.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제 함께 떡을 떼고, 거룩한 입맞춤으로 서로 인사하고, 심지어 결혼할 수도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갈라놓은 적의의 벽을 허물기 전까지, 그 모든 일은 차마 상상도 할 수 없었다(엡 2:14).함께 모인 교회복음이 주는 놀라운 화해 때문에 교회가, 그러니까 하나님의 백성의 모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함께 누리는 새 삶의 두드러진 특징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은 우리를 함께 이끄신다. 말씀을 함께 배우며(행 2:42), 그리스도를 기념하여 함께 먹고 마시며(고전 11:23-26), 기도와 노래로 함께 소리를 높인다(엡 5:18-19). 그리고 덕을 끼치고, 위로하고, 격려하는 말로 사랑의 예언을 한다(고전 14:1-3). 이 모든 것이 다 피조물이 마땅히 행할 활동이며, 이런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우리에게는 서로라는 피조물의 존재가 필요하다.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는 히브리서 10:24 말씀 뒤에 이런 생각이 숨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다. 서신서 많은 부분에서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의 성취가 물리적 지상의 성전과 제사장직을 통한 옛 언약에서부터 영원하고 영적인 구속이라는 그리스도의 새 언약으로의 이동을 포함한다고 강조한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심에 다가갈 수 있게 되었다(히 9:14; 10:19-22; 12:18-24).히브리서의 저자는 물리적 성전과 제사장직의 사라짐이 독자들로 하여금 굳이 더 이상 물리적으로 함께 모일 필요가 없다는 사실로 받아들일까 염려한 걸까? 너무 앞서 간 추측을 해서도 안 되겠지만, 히브리서 저자가 취한 권고의 형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온전한 믿음으로 지성소에 가까이 가라고 권고한 후에 그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서로 마음을 써서 사랑과 선한 일을 하도록 격려합시다. 어떤 사람들의 습관처럼, 우리는 모이기를 그만하지 말고, 서로 격려하여 그 날이 가까워 오는 것을 볼수록, 더욱 힘써 모입시다(히 10:24-25).‘격려하는 것’은 ‘모이기를 그만하는 것’과 대조된다. 격려하는 것은 만나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필수적인 활동이다. 또한 격려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면서 사랑과 선행을 서로 북돋우는 수단이 된다. 우리를 공격하는 육신의 소욕을 포함하여 우리 몸에 여전히 존재하는 연약함과 죄를 고려할 때, 우리는 다른 지체와 정기적으로 모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우리는 자신이 전부를 동원해서 서로 가르치고 격려하고 독려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교제 가운데 함께 모일 때 몸으로 하는 다양한 활동은 바로 이러한 목적을 지향한다. 그 모든 활동은 그리스도를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만, 특히 사랑과 선행으로 서로를 세워줌으로 우리는 피조물인 서로를 위할 수 있다. 물리적 또는 가상적?모임이 가지는 이런 중요한 측면은 가상 모임을 위해 실제 모임을 무시할 때 현저하게 줄어들거나 어떤 경우에는 완전히 사라져버린다. 예를 들어, 다른 성도와 나란히 앉아 설교를 듣는 것이 주는 가치와 경험은 설교집을 읽거나 유튜브에서 설교를 시청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건 단지 목소리와 몸짓, 또는 물리적 존재라는 측면 때문만이 아니라, 청취자로 전락한 우리가 설교자와 아예 다른 장소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아래 함께 앉아 그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가르침과 격려를 함께 들을 때, 내 옆에 있는 당신이라는 존재는 다름 아니라 내 경청의 일부가 된다. 마찬가지로 찬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 격려하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한다(엡 5:21-22, 골 3:15-16). 그리스도를 기쁘게 찬양하는 것은 어디에서나 할 수 있지만, 함께 모일 때 우리는 비로소 서로를 향해서도 찬양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우리는 한마음으로 주님께 멜로디를 만들 수 있게 된다. 함께 이야기하고 말씀으로 서로 격려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함께할 때, 우리는 훨씬 더 풍부한 참여를 즐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주변 사람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보고 들을 수 있는 더 많은 기회를 갖게 된다. 어려움을 겪거나 기쁠 때, 마음이 아프거나 외로울 때, 첫 모임이어서 어색해할 때,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다 제대로 감지할 수 있다. 그럼으로 적극적으로 서로 사랑할 수 있고,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는 말을 할 수 있게 된다. 다시 함께 모이는 기쁨이메일이나 페이스북 게시물 또는 지금 읽고 있는 글을 통해서도 이러한 다양한 목표를 달성할 수 있을까? 어느 정도는 그렇다. 그리고 그것도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러나 가상현실이 주는 축복과 가능성 때문에 우리가 진짜로 느끼는 물리적 교제가 주는 기쁨과 혜택에서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결과가 될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난 18개월 동안 여기 시드니에서 사는 우리의 현실이었다. 교회는 물리적 모임을 금지하는 여러 달의 폐쇄와 각종 제한을 받았다. 2020년 3월 이후, 주일 예배의 절반 정도는 집에 틀어박힌 채, 다양한 형태의 가상 연결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서로를 격려해야만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런 자비하심에도 물론 깊이 감사한다(때로는 그 자비하심이 더 크기를 바랐지만).그러나 지금 우리가 경험하는 기쁨은 실제로 얼굴을 대하고 만나는 교제의 기쁨이다. 나는 우리가 서로라는 물리적 존재를 계속 소중히 여기길 바란다. 가상현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그건 결코 진짜 만남에 비길 수 없다. 가상현실로 인해 우리의 주의가 흐트러지거나 방향이 바뀌지 않기를 바란다. 원제: Technology Cannot Replace Presence: Why the Church Will Always Gath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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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10장
집사에 관한 다섯 가지 질문
by Matt Smethurst
2022-02-13
집사라는 주제는 그다지 흥미롭지 않다. 집사라는 말만 들어도 어떤 강렬한 감정이 올라오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을 것이다.어떤 사람들에게 “집사”는 향수 같은 걸 불러일으키며, 어린 시절 교회를 생각나게 할지도 모르겠다. 이 단어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교회를 세우기 위해서 수고한 종들의 사랑스런 얼굴이 눈에 선할 때 그럴 것이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집사는 고통스러운 단어이다. 특히 목회자들에게 이런 경우가 꽤 많다. 교회의 가장 모범적인 종이 되라고 부르심 받은 집사들 때문에 정작 교회 사역이 얼마나 많이 방해받고 해를 입었던가? 오늘날 교회 생활의 비극 중 하나는 성경에 나오는 집사가 무엇이고, 또 무엇이 아닌지에 대한 관심의 부족이다. 성경은 덮어버린 채, 이 주제를 관습과 전통에 따라 판단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교회가 적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따라서 집사와 관련한 많은 잘못된 통념이 있다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여기 집사와 관련한 가장 중요한 질문을 (그리고 대답을) 소개한다. 1. 가장 흔히 간과되는 집사의 책임은 무엇인가?“충격 흡수자”로서의 역할이다. 사도행전 6장의 일곱 집사는 단지 음식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치된 게 아니다. 음식도 문제이기는 했지만, 가장 심각한 건 아니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교회의 일치에 대한 갑작스러운 위협이었다.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기까지 하시면서 이루려고 했던 바로 그 일치를 깨뜨릴 위협이 되는 균열에 직면해 있었다. 복음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이루는 연합이 세상의 모든 차이를 뛰어넘는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오해해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이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위임하지 않은 것은, 이 문제가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진짜 중요했기 때문이었다(3-4절). 사도들은 서둘러 피상적인 해결책을 제시하고 계속 나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에 그들이 선택한 것은 지속적인 해결책과 영구적인 교회 직분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일곱 집사가 직면한 불화의 근본 문제를 감안할 때, 집사는 교회 내에서 충격파가 더 이상 울려 퍼지지 않도록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를 수 있다. 논쟁 벌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결코 좋은 집사가 될 수 없다. 그런 사람은 집사라면 당연히 완화시켜야 할 교회의 두통거리를 오히려 더 복잡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최고의 집사는 사업 관리자나 재주꾼 그 이상이다. 그들은 세밀하게 조정된 “충돌 레이더”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드라마보다 해결책을 더 좋아하고, 창의적이고 건설적인 방식으로 교회 전체의 조화를 촉진한다. 2. 집사는 장로와 “평행” 관계인가? 아니다. 집사 직분은 장로 직분에 “보고해야” 한다. 디모데전서 3장에서 바울이 먼저 장로들(딤전 3:1-7)에게 훈계를 하고 바로 다음에 집사들(딤전 3:8-12)에게 주의를 기울인 사실을 놓치지 말라. 이 부분을 읽으면 마치 바울은 우리가 두 직분 사이의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 심지어는 논리적인 순서조차 놓치지 않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이 부분이 구조는 집사들이 그들이 지지하는 장로들과 짝을 이루며, 그들에게 종속됨을 암시한다. 이 관계는 집사(복수형)가 언급된 다른 구절에서도 마찬가지로 암시된다. 그리스도 예수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한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빌 1:1).집사의 목적은 장로의 우선순위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그렇기에 이런 구절 때문에 집사가 법안을 통과시켜야 하는 별도의 권력 집단이거나 또는 교회법 제정에 있어서 두 번째 집단으로 기능한다고 잘못 이해되기도 한다. 마크 데버(Mark Dever)는 다음과 같은 유용한 예를 보여 준다. 장로들이 “차를 몰고 피츠버그로 갑시다”라고 말하는 경우에 “무슨 소리에요? 필라델피아로 가야 합니다”라고 말하는 게 집사들의 몫이 아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아마 이 차 엔진이 피츠버그까지 못 갈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생각해보시지요.” 이런 제안은 매우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집사의 임무는 장로들이 설정한 목적지를 지원하는 것이다. 교회의 장로라고 해서 오류가 없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을 교회 질서(governance)의 지침으로 삼는 한, 집사는 장로들의 모든 결정에 잠재적인 “견제”(check)를 부과하는 장로의 보호자로 제시되고 있지 않다. 건강한 교회에서 경건한 집사는 경건한 장로의 비전과 감독을 실행하는 역할을 하지, 결코 그 반대가 될 수 없다. 3. (경건함 외에) 유능한 집사를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수세기 동안 집사의 일은 주로 유형적 필요, 특히 가난하고 취약한 사람들을 돌보는 데 초점이 맞춰져 왔다. 참으로 그들의 사역에는 구제(mercy)가 포함된다. 그러나 집사가 가진 역할의 더 큰 원칙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집사의 사역 속에는 장로들의 주된 책임을 산만하게 하고 탈선시키는 모든 위협을 처리하는 사명이 들어 있다. 집사는 실질적인 필요 사항을 파악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충족시키기 위해 솔선수범하는 데에 능숙해야 한다. 그러나 최고의 집사는 현재의 문제에만 반응하지 않는다. 그들은 미래를 내다볼 수 있어야 한다. 장로들의 사역과 말씀이 교회 속에 뿌리를 내리는 데 잠재적인 방해 요소에 대하여 창의적인 해결책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적 집사는 쿼터백 보호라는 역할을 맡은 풋볼의 라인맨과 비슷하다. 라인맨은 거의 주목받지 못하고 또한 제대로 인정받지도 못하지만, 그들 없이 쿼터백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집사의 수고는 말씀의 사역을 수호하고 발전시키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유능한 집사가 없으면 장로들은 끊임없이 산만함을 겪을 것이고, 실제적인 요구가 쇄도할 때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나가떨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목회자여, 미래의 집사를 찾을 때 경건한 신자를 찾되 보이지 않는 곳에서(칭찬 들으려 하지 않음), 자기 비용으로(희생함), 요청받지 않고도(문제 해결을 위해서 솔선수범함) 앞장서서 교회의 필요를 보고 채우는 사람을 찾도록 하라. 집사 후보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 표시 중에는 단순히 다투는 경향뿐 아니라, 무질서하거나 신뢰할 수 없는 경향도 포함된다. 정기적으로 실수를 하거나, 제때 이메일 답장을 하지 않거나, 해야 할 일을 항상 일일이 알려줘야 하는 사람은 결코 집사 직분에 적합하지 않다. 집사는 권위를 탐내지 않아야 하고, 굳이 돌보아 줄 필요가 없는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어야 한다. 산만한 목회자와 사역이 탈선한 교회를 내게 보여 달라. 그럼 그 교회가 왜 그런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 내가 바로 보여 주겠다. 그건 유능한 집사가 그 교회에 없기 때문이다. 4. 교회의 선교와 집사는 무슨 관련이 있는가? 최근 몇 년 동안 교회의 “사회적 행동”이라는 역할을 중심으로 많은 논의가 이루어졌다. 교회의 사명은 복음을 전파하는 것과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것, 이 두 가지가 결합된 어떤 것인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무엇인가? 이것은 중요한 주제이며, 그 결과는 중요한 구분에 달려 있다. 예를 들어, “교회”가 단지 어떤 기관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개인을 의미하는지 여부와 같이 것이다. 내 생각에 집사 사역(diaconal ministry)의 오랜 특징에 더 주의를 기울인다면 이 문제와 관련한 많은 혼란이 완화될 것이다. 성경은 교회의 중심 사명이 세계의 빈곤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은혜를 전파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의 주인을 선포하여 제자 삼는 것이다(마 28:18-20). 그러나 그렇다고 이것이 결코 교회의 사업이 전적으로 “영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은 아니다. 이 전체 말씀의 요점은 가장 절실한 사람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에 세우신 공식적인 직분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집사 사역은 봉사 사역 이상이지만 또한 동시에 그 이하도 아니다.나는 때때로 “단순히 복음 전파”만을 원하는 교회와 “문화 변혁”을 원하는 교회 사이에서 아이러니한 유사성을 감지한다. 하나는 복음 선포에만 집중하고 사회사업에 반대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복음 선포 대신 사회사업을 옹호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런 두 교회 다 하나의 공통점이 있는데, 바로 집사에 대해 취약한 견해를 갖고 있다는 점이다. “복음만을 전파하라”에 올인한 교회에서는 집사의 봉사 사역을 중요하지 않게 취급할 수도 있다. 반대로, “문화를 변화시켜라”에 올인한 교회에서는 봉사 사역 자체가 전체 교회가 감당해야 할 사역이기에 특별히 집사의 사역으로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전자의 경우 복음 전파라는 교회의 사명이 집사의 역할을 경시하게 되고, 후자의 경우에는 집사의 소명이 아예 교회 전체의 사명이 되어버린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제자를 삼는 데 전념하는 교회라면 영적인 선교를 촉진하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사회적” 직분인 집사의 역할을 축소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다. 사도행전 6장에서 사도들이 전파하고 기도하는 그들의 주된 소명을 등한히 하였더라면 애초에 복음은 전파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일곱 집사가 과부의 필요를 채워 주지 않았는데도 복음이 전파되었을까? 그렇지 않다. 아마도 이러한 역사적인 교회 사례 중 일부를 더 확고하게 하고 교회의 사명에 대한 토론을 진행한다면, 그 대화가 보다 더 발전적으로 나아갈 것이다. 이러한 관심사를 결합하는 총체적 사역, 즉 복음 선포와 복음 실증(demonstration)은 최신 유행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 역사를 통틀어 항상 있어 왔던 일이다. 봉사 사역(집사)은 항상 말씀 사역(목회)을 섬겨 왔다.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교회가 나누지 못하게 하라.5. 충성스러운 집사에게 성경이 약속하는 한 가지는 무엇인가? 디모데전서 3:8-12에서 집사의 자격을 간략히 설명한 후에 바울은 마지막으로 한 가지 말을 하려고 한다. 그는 마음이 허약한 사람은 결코 집사를 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집사 사역의 많은 부분이 감사할 수 없는 일이다. 무대 위에서 조명을 받는 작업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뒤에서 수고하는 작업이다. 그렇다면 지치고 낙담하는 가운데 집사를 유지하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약속이다.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딤전 3:13).충성하는 집사는 시간이 흐를수록 존경과 담대함이라는 두 가지 선물을 점점 더 많이 받을 것이다. 첫 번째는 교회를 통해서 수평적으로 온다. 또 다른 하나는 하나님으로부터 수직으로 내려온다. 집사 직분의 ‘하향’ 형태를 고려할 때, 존경이라는 약속은 특히 더 아름답다. 그렇지 않은가? 집사 직분으로의 부름이 화려하지는 않지만, 그 상은 영광스러울 것이다. 당신이 출석하는 교회에서 집사들이 존경받는가? 당신이 그들의 헌신에 얼마나 감사하는지, 집사들이 제대로 알고 있는가? 잠시 시간을 내어 집사들을 격려하라. 전화를 걸고, 선물 카드를 보내라. 그들의 자녀를 돌보겠다고 제안하라. 이메일을 보내라. 그들이 올린 돛에 바람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일을 하라(잠 15:23). 당신이 주는 모든 격려는 다 양 떼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 글은 Crossway.org와 Matt Smethurst의 ‘집사: 그들은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굳건하게 하는가’(Deacons: How They Serve and Strengthen the Church)에서 간추린 것입니다. 원제: 5 Questions About Deac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집사직분
집사의사역
건강한교회와집사
장로와집사의관계
집사에관한오해
성경적집사직분
집사에 관한 다섯 가지 잘못된 통념
by Matt Smethurst
2022-02-06
당신이 가지고 있는 성경은 집사에 관해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 (의외의 말이지 않은가?)성경이 비록 집사에 관해 많은 말을 하고 있지 않을지라도, 집사 직분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을 성경적으로 판단하는 데에는 그 내용이 전혀 부족하지 않다. 우리 주변에는 하나님께서 이 직분에 대해 가지시는 고귀한 비전에 미치지 못하는 몇 가지의 잘못된 통념이 있는 것 같다.여기서는 집사에 관한 다섯 가지 잘못된 통념을 살펴보고자 한다.1. 집사는 장로의 예비 단계다“교회에서 자네를 집사로 세우려고 한다고 들었네. 얼마나 있다가 장로로 세울 것 같나?” 피트는 교회에서 이런 질문을 듣는 것이 익숙하다. 불편하지도 않다. 오히려 그런 말을 들으면 그는 약간 우쭐해졌다.시계를 과거로 돌려 4세기 중세 시대로 가 보자. 당시 집사는 성직자 수습생으로 분류되어 성직자의 역할을 담당했다. 성직으로 가는 관문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로마가톨릭 교회에 여전히 남아 있으며, 이와는 좀 다르지만, 성공회에서도 많이 볼 수 있는 제도이다.) 일부 저교회파 교회는 이를 일부 차용하여 자신들에 맞게 적용하고 있다. 장로가 되기 위한 예비 단계 같은 것 말이다. 물론 이러한 집사들이 다 장로가 되기는 한다. 그러나 그들이 장로의 자격을 충족하는지는 생각해 볼 문제이다(딤전 3:1-7, 딛 1:5-9).집사와 장로의 자격 요건은 비슷해 보이지만 엄연히 다르다. 집사는 장로의 보조가 아니다. 이 둘은 세우는 목적이 서로 다르며, 많은 경우 서로 다른 은사를 가지고 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은 가르치는 능력이 부족해서 장로로서는 맞지 않을 수 있지만 훌륭한 집사가 될 수는 있다(딤전 3:2; 딛 1:9).피트 집사가 목회 사역을 추구해도 되는가? 물론이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목회 사역을 하기 위해 중간 단계로서 집사가 된 것은 아니다. 모든 목회 사역자는 먼저는 주의 종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모든 주의 종이 목회 사역자로 부르심 받지는 않는다. 집사를 단순히 어떤 직분으로 넘어가기 위한 징검다리로 생각하기에는 그 자체가 너무나 영광스럽고 중요한 직분이다.2. 집사는 회계 처리 프로그램의 명수이거나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어야 한다“고치는 것을 정말 잘하시네요. 집사 하셔도 되겠어요.” 빌 목사는 닉이 있어서 참 좋다. 닉은 성공한 일반 건설업자이다. 닉이 소유한 연장은 작은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연장들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을 것이다. 지난 3년간 겨울에 교회 온수기가 고장 날 때마다 빌 목사는 어떻게 했겠는가? 닉을 불렀다. 찌는 듯한 6월의 토요일, 공조 시스템이 덜덜거리자 그는 또 어떻게 했겠는가? 닉을 불렀다.닉은 정말 이상적인 집사감이지 않은가? 하지만 단정하기엔 이르다. 나는 아직 그가 성숙한 신자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건물 관리에 관해서 훤히 꿰고 있다고 집사가 될 수는 없다. 그가 성경도 그렇게 훤히 꿰고 있을까? 한편 재정 상태가 매우 엉망인 한 교회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 교회는 적자에 직면해 있으면서도 내년 수입을 위한 별다른 대책이 없다. 이런 경우 사람들은 ‘스티브를 집사로 세우면 어떨까?’하고 생각하게 된다. 스티브는 재무 설계사이다. 그가 주중 아침에 하는 일은 딱 정해져 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커피를 내리고 그날의 뉴스를 확인한 다음에 빠르게 샤워를 하고 직장으로 향한다. 주일이면 교인들은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와 재정적인 조언을 구하곤 한다. 경제 감각만큼은 교회에서 스티브를 따라올 사람이 없다.스티브는 정말 이상적인 집사감이지 않은가? 다시 말하지만, 단정 짓기엔 아직 이르다. 나는 그가 성숙한 신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스프레드시트를 잘 다루는 것은, 매우 유용한 기술이지만, 하나님의 집에서 직분을 맡기 위한 자격이 될 수는 없다(딤전 3:15).3. 집사는 실무 지식이 있는 경영자여야 한다“고대 언어와 성도들을 축복해 주는 것에 대해서는 신학교에서 배울 수 있지만, 경영 기술은 배울 수 없다. 이 교회에 정말 필요한 것은 업무 감각이 있고 결단력 있는 집사들이다.”찰스는 30년간 파인힐커뮤니티 교회를 섬겨 왔으며 집사가 된 지는 거의 20년이 되었다. 이 교회에 다니기 시작할 즈음에 그는 그의 지하실에서 회사를 하나 시작했다. 자력으로 회사를 일궈 지금은 시내에 있는 고층 빌딩에 회사가 자리하고 있다. 자수성가한 그의 이력을 그 분야에서 모르는 사람은 없다. 찰스는 수십 명의 직원과 수십 년간 축적된 실무 지식을 가진 경영자가 되었다.찰스는 정말 이상적인 집사감이지 않은가? 한 번 더 말하지만, 이를 단정하기에는 이르다. 그가 성숙한 신자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나는 말하지 않았다. 실무 경영진의 경험은 굉장한 자산이지만 영적 직분에 적합하다는 표시가 될 수는 없다.4. 집사는 목사가 늘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감독해야 한다“만약 집사들이 목사님 말씀에 ‘예’라고만 대답해야 한다면 집사가 무슨 필요가 있나요? 나는 당연히 팀 목사님에게 내 생각을 말할 거예요. 제가 안 하면 누가 하겠어요? 그래야 목사님이 계속 겸손할 수 있는 거라고요. 잘난 척하는 목사님은 사양합니다.”필 집사는 반대의견을 내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다. 그의 반대는 대부분 통한다. 그렇다고 필 집사가 팀 목사의 삶을 힘들게 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목사가 항상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기 스스로 반대자의 역할을 떠맡았다. 필 집사는 교회를 혁신하고자 하는 목사의 열망을 감지할 수 있지만, 사실 그는 교회가 변화되는 것을 그리 원하지는 않는다.바로 지난주의 일이다. 팀 목사는 직분자 훈련을 시작할 생각에 잔뜩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목사는 ‘바로 그거야!’ 하며 생각을 굳혔다. 직분자 훈련을 위한 자금 마련을 위해 오래된 두 개의 교회 프로그램을 끝내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어김없이 필 집사는 목사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와 말한다. “목사님, 어떤 성도들이 이런 말을 하던데요.” 그의 신중한 듯한 태도 속에는 언제나 자신의 불만 사항이 숨겨져 있다. (이런 사안은 필 집사가 관여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팀 목사는 알아야 한다.)필의 태도가 이상적인 집사의 모습은 아니라는 것에 모두가 동의할 거라고 본다.5. 집사는 교회 운영자다“제일 침례교회에 오신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우리 교회는 말씀은 목사님이 전하고 교회 운영은 집사들이 도맡아 합니다. (진지하게 말씀드리건대, 여러분이 여기서 정말로 중요한 일을 하고 싶다면, 집사들을 설득해야 합니다).”스티브는 몇몇 조직의 이사로 있다. 그렇지만 제일 교회의 집사로 섬기는 것보다 더 즐거운 일은 없다. 그는 성도들을 사랑하며 교회가 앞으로 오래도록 건재할 수 있도록 많은 신경을 쓰고 있다. 스티브는 목사가 영적인 일을 주도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 목사 집무실에 진열해 놓은 논문을 보면, 어찌 되었건 목사가 영적인 일에 통달한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러나 그 외의 일을 감독하는 것은 집사의 몫 아닌가?이런 식으로 집사 직분에 접근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언젠가 목사인 친구가 나에게 그의 교회가 고수하고 있는 집사와 장로에 대한 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해 준 적이 있다.장로와 집사는 기본적으로 하는 일이 다르다. 가령, 장로는 ‘영적인’ 일을 담당하고 집사는 ‘물질적인’ 일을 담당한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등한 권위를 갖는데, 이것이 실질적으로 무슨 의미인가 하면, 집사는 장로가 담당하는 영적인 일을 좌지우지할 수 없고, 장로는 집사가 주도하는 실제적인 일에 주도권을 잡으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로가 다른 영역에 속했음을 알고 서로의 직분을 존중해야 한다.만약 집사가 전체 회중을 이끄는 목자 역할을 하거나 교회의 직원들과 위원들을 관리하는 이사로 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집사의 역할과는 거리가 멀어진다. 더욱이 집사가 목사나 장로에 대해 균형추 같은 역할, 즉 제2의 입법부가 되어 당회의 결정을 점검하고 재검토하는 일을 하려 한다면 이것은 선을 넘는 것이다.십자가의 종당신의 교회 집사들의 역할이 잘못된 방향으로 부풀려 있거나 혹 너무 축소되어 있지는 않은가? 이 둘의 양극단을 피할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 바로 성경이 집사에 대해 의도한 목적으로, 성경이 말하는 집사 고유의 역할로 돌아가는 것이다.집사는 교회의 영적인 일의 관리 감독자가 아니다. 목사가 어떤 일에 대해 허락을 구해야 하는 이사도 아니다. 집사는 십자가의 종이다.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신 비전을 함께 실행하도록 부름 받은 청지기인 것이다. 이들은 마치 특수부대원처럼, 보이지 않는 임무를 위해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인내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이들이다.이러한 신실한 집사들을 세우시는 하나님, 감사합니다.이 글은 Crossway.org와 Matt Smethurst의 ‘집사: 그들은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굳건하게 하는가’(Deacons: How They Serve and Strengthen the Church)에서 간추린 것입니다. 2월 13에 “집사에 관한 다섯 가지 질문”이 이어집니다. 원제: 5 Myths About Deac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교회
청지기
집사의역할
십자가의종
집사직에대한통념
팀 켈러_적대적 문화 속에서
by 고상섭
2022-01-29
팀 켈러 목사는 2021년 12월 25일과 2022년 1월 15일 두 번에 걸쳐 미국 기독교 잡지 ‘월드’(World)와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의 주요 내용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신앙의 배경과 회심 경험, 도시 목회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첫 번째 인터뷰에 이어, 두 번째 인터뷰에서는 오늘의 문화와 정치적 상황, 그리고 교회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회에 적대적인 문화 속에서 복음 전하기 팀 켈러는 오늘날 공공 영역에서 복음과 교회에 적대적인 문화가 팽배해졌다고 말한다. 계몽주의 이후의 인간의 이성이 판단의 기준이 된 사회 변화도 요인이 되었지만, 더 심각한 문제는 교회 자체가 스스로 세상에 적대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것이라 분석한다. 팀 켈러는 다섯 가지 교회의 대안을 제시했다. 첫째, 먼저 말과 삶이 다른 모순적 삶을 회개해야 한다. 둘째,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 셋째, 타인에게 말을 할 때 겸손하게 말해야 한다. 비판적이거나 거칠게 사람을 대하지 말아야 한다. 넷째. 그리스도인이라면 믿음을 숨기지 말고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한다. 다섯째, 믿음으로 인한 박해가 있다면 그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팀 켈러가 제시하는 문화적 대응은 결국 복음이 적용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복음은 우리가 행위로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은혜로 구원받았음을 말한다. 은혜로 구원 받았다는 말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 중에서도 나보다 더 윤리적으로 탁월한 사람들도 많다는 뜻이다. 행위로 구원받았다면 자랑할 수 있지만, 은혜로 받은 구원은 자랑할 수 없다. 빌립보서 2:3의 말씀처럼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그 겸손은 대인관계 속에서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자신의 모습을 회개하는 삶과 내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삶, 그리고 사람들에게 친절한 방식으로 대화하고 다다가는 것, 이 모두는 복음의 적용이다.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한다. 하나님의 정의에 순종하라 성경을 읽으면 하나님의 마음은 고아와 과부 같이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을 향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팀 켈러는 성경을 연구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정의, 곧 마땅히 그들이 누려야 할 것을 누리게 하여 세상을 공평하게 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런 관점은 정치적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교회 안에서도 저항이 많았다. 그러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처럼 누군가를 섬기고 돕기 위해서는 자신의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희생해야 한다. 자신을 희생하고 싶지 않을 만큼만 돕는 것은 복음적 삶이 아니다. ‘팀 켈러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도 자신도 쓸 것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을 도와줄 수 있느냐는 질문에 팀 켈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말을 빌려 이렇게 대답했다. “누굴 도움 힘이 없다는 말은 내 삶의 한 귀퉁이를 잘라내는 부담을 지면서까지 누군가를 도와줄 자신이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사랑이란 괴로움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복음이 그렇게 가르치기 때문에 남들에게 베풀어야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그러지 않고서야 서로 짐을 지라는 명령에 순종할 수 있겠는가? 남이 진 무거운 짐에 대한 의무감 없이, 괴로움을 겪지 않고 감당할 만할 때만 나누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아무런 부담을 지지 않고 이웃의 아픔을 공유하는 게 가능하겠는가?”팀 켈러는 적당한 헌신으로만 살아가려는 사람들에게 부자가 될 수는 있지만 사치를 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기 시작하면서 본인 스스로도 뉴욕의 필요와 아픔이 보이기 시작했다고 고백했다. 결국 정의를 위한 사역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아픔이나 불평등한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가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복음과 세상의 다리 놓기 “오늘날 교회는 대위임령을 성취하는 데 실패했다. 오늘날 세속 문화에 어떻게 복음적인 방식으로 다가가야 할지에 대한 길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팀 켈러는 오늘날 문화 속에서 교회가 길을 잃었다고 말한다. 세속 문화 속에서 복음을 전달하는 방식을 찾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위임령이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 것이다. 복음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전해야 할 무엇은 변하지 않지만, 변치 않는 복음을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에 대해서는 심각한 고민이 필요하다. 팀 켈러는 오늘날 미국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멀어진 이유 중 하나는 정치적으로 편향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라 분석한다. 제임스 헌터도 ‘기독교는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는가’에서 미국 보수 기독교의 가장 큰 단점은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초점을 오직 정치에 두는 것이라 말했다. 정치가 변하면 세상이 변한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세상의 변화의 중심에는 문화가 있다. 팀 켈러는 복음으로 변화된 사람들의 삶을 통해 먼저 세상 문화 속으로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리디머 교회도 전도지를 나눠 주는 방식으로 전도한 것이 아니라 복음으로 변화된 한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대화를 통해 교회로 인도한 것이다. 또한 팀 켈러는 설교를 할 때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을 모두 고려해서 설교해야 한다고 말한다. 대각성전도집회 때만 믿지 않는 사람을 초대하는 것이 아니라 평소의 설교를 통해서 믿는 신자들 중에 “믿지 않는 내 친구가 들었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질 때 전도가 자연스럽게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을 위해 리디머 교회는 “누군가 엿듣고 있는 것처럼 말하기”(speak as if you’re being overheard)의 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어떤 대화를 하더라도 ‘신자들끼리의 대화가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내 이야기를 엿듣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를 미리 고려하는 것이다. 이 방식은 교회 전체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를 생각하는 문화를 만들었고 실재로 많은 비신자들이 리디머로 오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 싶어 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자신이 누구인지에 대한 정체성이 명확하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업적이나 외모 또는 학력 등으로 자신을 증명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복음의 정체성은 자신은 죄인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자녀로 존귀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게 한다. 복음은 우리를 겸손하면서도 담대하게 하기 때문이다. 인터뷰의 마지막에 “어떤 사람으로 후대에 기억되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에 팀 켈러는 자신의 자녀와 손주들에게 자신이 말한 설교대로 살아가기를 애쓰는 사람이었다고 기억되기를, 그리고 그 자녀들이 그 복음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다. 그리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에는 아무런 의미를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것은 후대에 사람들에 의해 판단이 이루어질 것이다.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앙겔라 메르켈은 사람들이 “그녀는 노력했다”라고 기억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말도 소박하고 의미 있는 말이지만 팀 켈러의 말은 복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더 선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 3:12).
탈기독교문화
상황화
교회와정의
복음과문화
누군가엿듣고있는것처럼말하기
팀 켈러_도시의 목자, 도시의 교회
by 고상섭
2022-01-28
팀 켈러 목사는 최근 미국 기독교 격주간지 ‘월드’(World)와 인터뷰를 했다. 그의 인터뷰는 이 매거진에 2021년 12월 25일, 2022년 1월 15일, 두 번에 걸쳐 실렸다. 인터뷰의 주요 내용을 두 번에 걸쳐 소개한다. 첫 인터뷰는 팀 켈러가 신앙을 가지게 된 계기, 버지니아 웨스트호프웰 교회의 사역, 뉴욕 리디머 교회의 사역 순서로 이루어졌다. 부르심, 그리고 과거의 경험 릭 워렌은 은사와 관련해서 설명하면서 “하나님은 우리의 과거를 낭비하지 않으신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의미 없는 과거일지라도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시는 분이시며 과거의 상처마저도 별처럼 빛나게 바꾸시는 분이시다. 팀 켈러는 회심하기 전에 정통 루터회교를 다녔는데 거기서 만난 첫 번째 목회자는 전통적 보수 신앙을 가르쳤고 입만 열면 지옥에 떨어질 위험성과 대단한 믿음을 가져야 할 이유를 역설했다. 두 번째 목회자는 사회운동가 출신의 젊은 목회자였는데, 그는 하나님은 인간의 권리를 지키고 억압받는 사람들을 해방하시는 분이라고 설명했다. 이런 양 극단의 목회자를 만나면서 팀 켈러는 지적 회의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고 점점 신앙과 멀어져 갔다. 이렇게 회의주의자가 된 그를 예수께로 인도한 사람이 바로 C. S. 루이스였다. 그는 루이스의 책을 통해 회심을 했고 지성적 확신과 더불어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회의주의자들이 많은 뉴욕에서 루이스처럼 기독교 변증을 통해 많은 젊은이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의 과거의 경험을 낭비하지 않고 사용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팀 켈러는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뉴욕에 와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아마도 자신의 과거의 경험이 하나님의 손에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의 다양한 경험들은 때로는 아픈 기억이 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을 낭비하지 않으시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가신다. 고전적 복음의 현대적 적용 뉴욕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이 리디머 교회로 오는 이유는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팀 켈러는 고전적 복음을 전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전적 복음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은 고전적 복음을 싫어할 것이라는 편견을 팀 켈러가 깬 것이다. 왜 오늘의 젊은이들은 고전적 복음에 열광하는 것일까? 오늘의 사회는 능력주의 사회다. 어린 시절부터 학원 강사에게서, 학교 선생님에게서, 심지어 부모님에게서까지 더 많이 노력해야 한다는 소리를, 또 그래야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다는 소리를 끊임없이 듣는다. 도태될 것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경쟁에 승리해야 하는 시대를 살아가기 때문에 누구하나 힘들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러나 복음은 내가 무엇을 함으로써 성취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나를 위해 행하신 일을 믿는 것이다. 팀 켈러는 복음을 “좋은 충고가 아니라 좋은 소식”이라 정의하면서, 내가 무엇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예수께서 행하신 것을 믿는 것이라고 말한다. 은혜의 복음이 능력주의 사회 속에서 경쟁에 지쳐 있는 젊은이들에게 참된 자유와 위로를 안겨 준다는 것이다. 진리는 시대를 뛰어넘어 사람들의 영혼을 파고드는 힘이 있다. 가장 현대적인 시대에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은 언제나 고전적인 복음이다.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향한 설교 리디머 교회에 많은 비신자들이 참여하는데 어떻게 신자들과 비신자들을 동시에 사로잡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팀 켈러는 복음의 적용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신자를 위해서 깊이 있는 설교를 하면 비신자가 어렵고 비신자를 위해 쉽게 설교하면 신자가 지루해진다는 편견을 깨고 두 종류의 사람 모두를 사로잡을 수 있는 것은 복음과 복음의 적용이라 말한다. 신자나 비신자 모두 인간으로서 겪는 삶의 문제를 가지고 있다. 직장과 가정과 사회 속에서 당면하는 수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식으로 복음이 제시되어야 한다. 복음을 통해 신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비신자들이 들을 때, 복음이 성경에 갇혀 있는 진리가 아닌 오늘의 삶에서 역사하는 진리임을 알게 되고, 또 자신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을 때 어떤 삶을 살지에 대한 모델을 볼 수 있게 된다. 바울서신을 보면 복음을 설명하고 다양한 삶의 문제를 복음으로 적용하듯이 오늘날 다양한 삶의 문제들을 복음으로 해결할 때 다양한 방식으로 복음을 접할 수 있고 신자와 비신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게 된다. 또 삶의 변화를 위해 마음속에 있는 사랑의 순서를 재조정하는 것으로 우상을 드러내 주는 것은 신자와 비신자 모두에게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해주고, 또 그리스도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의 설교가 주로 비신자를 위한 전도에 초점 맞춘다면 신자들은 결국 시들시들해진다. 또한 우리의 설교가 신자들을 위해 교육에 초점 맞춘다면 비신자들이 지루해하고 혼란스러워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의 예배와 설교가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높이는 것에 목표를 둘 때, 우리는 신자들과 비신자들 모두를 도전하며 교육할 수 있게 된다(센터처치, 642쪽).더 기도하라 마지막으로 다시 돌아가면 좀 더 다르게 했을 사역은 어떤 것인가라는 질문에, 팀 켈러는 절대적으로 더 기도했을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어떤 것보다 기도를 더 중요시하고 더 기도했어야 했다고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다시 돌아가서 목회를 한다면 다른 어떤 사역을 하는 것보다 더 기도했을 것이라는 팀 켈러의 말은 기도의 중요성을 웅변한다. 팀 켈러의 ‘기도’에서도 존 오웬의 말을 인용해서 기도를 강조한다. 목회자는 교인들을 모아 예배당을 채우고, 성찬 예식을 인도하고, 대중이 원하는 것을 채워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진면목은 은밀한 가운데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느냐에 달려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팀 켈러의 인터뷰를 보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느낀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통해, 고전적 복음을 바르게 선포하고 그 복음을 적용하는 것과 기도의 중요성에 대해 배우게 된다. 두번째 인터뷰: 팀 켈러_적대적 문화 속에서 ▶
도시목회
도시교회
팀켈러의회심
목회자의기도
고전적복음
교회와젊은이
1퍼센트, 그 두 가지 진실
by David Mathis
2022-01-19
그리스도인 대부분은 깨어 있는 시간의 기껏해야 1퍼센트를 공예배에 쓴다.계산법은 이렇다. 매일 밤 당신이 약 7시간(대부분의 성인에게 필요한 최소 수면시간)을 잔다고 하고, 당신이 참석하는 주일 예배 시간이 약 75분일 때(당신이 주일마다 충실하게 예배에 참석했을 경우), 일주일에 깨어 있는 시간은 120시간이니, 당신이 예배를 위해 쓰는 시간은 대략 1퍼센트가 된다.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1퍼센트만 매주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에 사용한다는 사실에 당신도 나처럼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놀라울 정도로 낮은 비율이다(특히 교회 생활이 기본적으로 주일 오전에 한정되어 있다고 우리가 가정한다면 더욱 그렇다). 한주간의 남은 시간 동안 우리가 무엇에 목숨을 걸고 얼마나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지는 말할 것도 없다.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2020년에 평균적인 미국인은 하루에 거의 8시간을 뉴미디어나 기성 미디어에 시간을 보냈다. 일주일에 50시간 이상을 각종 영상물을 보는 데 썼다는 것이다.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시간은 우리가 깨어 있는 시간의 아주 작은 조각에 불과하다. 이제 삶은 점점 덜 집중되고 덜 생산적인 노동으로 채워지고 있으며, 디바이스들을 통해 콘텐츠를 점점 더 많이 소비하는 것으로 채워지고 있다. 우리가 공예배라 부르는 이 놀랍도록 작고 절대적으로 중요한 1퍼센트에 대해 기억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단 한 시간 첫째, 매주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가 우리의 교회 생활에서 얼마나 작은 부분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일아침이 우리에게 주는 인상이 교회란 무엇인가에 대한 우리에 인식에 매우 큰 영향을 끼치긴 하지만(아래에서 살펴보겠지만, 이런 개념을 가지는 데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교회 된다는 것’(being the church)은 단지 매주 60-75분짜리 주간 이벤트가 아님을 깨닫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우리가 교회가 되는 것이 우리가 모일 때만이 아니다.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지역사회로 흩어져 있을 때도 우리는 교회이다. 깨어 있을 때도, 자고 있을 때도, 일주일 168시간 모두 우리는 교회다. 현대인의 삶의 슬픈 단면, 곧 자동차가 퍼뜨려 놓은, 서로 섞이지 않고 각자 따로 사는 모습은 우리로 하여금 교회를 일주일 내내, 평생 동안 펼쳐지는 삶이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 일어나는 이벤트로 생각하게 만든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는 24시간, 7일, 365일 모두 그리스도의 지체다. 교회는 일주일에 한 번 드리는 예배가 아니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다. 예배당에서만이 아니라 거리에서나 지역사회 어디에서나 매일 섬김과 사랑과 예배의 삶을 살라는 명을 받은 사람들이 곧 교회다. ‘교회 된다는 것’은 한 주간의 삶 전체가 아니라 단지 한 번의 모임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축복하고 서로에게 축복을 받을 수 있을까? 언제 우리의 소중한 신약성경의 ‘서로’를 실천할 수 있을까? 예배 전후에 나누는 짧은 시간으로는 사도들이 우리에게 그려 준 우리의 삶을 함께하는 그림에는 비참하도록 불충분할 것이다. 1퍼센트 이상교회 된다는 것은 단 1퍼센트의 이벤트로는 이루어 낼 수 없는 ‘서로들’ 곧 서로 영접하는 것(롬 15:7), 서로 사귀는 것(요일 1 :7, 11-12; 요이 5), 서로 돌아보는 것(고전 12:25), 서로 선을 행하는 것(살전 5:15), 서로 격려하고 덕을 세우는 것(롬 14:19, 살전 4:18; 5:11), 서로 존경하기를 먼저 하는 것(롬 12:10)을 포함한다.새 언약 안에 있는 사람들이 매일 실천하는 이러한 ‘서로들’은 갈등이나 관계의 고통으로 인해 삶이 가장 힘들 때 더욱 선명하게 빛난다. 서로 용납하는 것(엡 4:2, 골 3:13), 서로 친절히 대하는 것(엡 4:32),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는 것(엡 5:21), 서로 거짓말하지 않는 것(골 3:9), 서로 비판하지 않는 것(롬 14:13), 서로 비방하거나 원망하지 않는 것(약 4:11; 5:9)이 그것이다.서로 조화롭고 화목하게 살기 위해서는 1퍼센트 이상의 삶을 드려야 한다(막 9:50, 롬 12:16, 15:5). 가장 중요한 최고의 ‘서로’를 실천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34-35; 15:12, 17; 롬 12:10; 13:8; 살전 3:12; 4:9; 벧전 1:22, 요일 3:11, 23, 4:7), 곧 서로의 짐을 져 주고(갈 6:2) 서로 섬김으로써(갈 5:17) 사랑하는 것이 그것이다. 착각 하나가 오늘날 점점 널리 퍼지고 있다. 한 주간 모두 교회 되어 살아가는 경험도 관점도 빈곤한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잘못된 생각, 곧 교회에서 섬기고 선을 행하는 주된 방법은 주일 아침에 “앞에 서서” 사회를 보거나, 찬양을 하거나, 성경을 읽거나, 기도를 하거나, 설교를 하거나, 헌금위원을 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그것이다. 이런 생각은 168시간 모두 교회 된다는 것에 대한 빈곤한 이해를 드러낼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을 목자와 교사로 삼으셔서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셨다(엡 4:11-12). 우리의 온 몸으로 하라고 명하신 “봉사의 일”은 한 사람이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는 30분짜리 메시지가 아니다. 성도들이 거실에서, 커피숍에서, 마당에서, 직장에서 서로 함께하고 그리스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시간 이제, 1퍼센트의 중요성을 맥락 속에 넣는 것과 함께 나란히, 우리는 또한 공예배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우리에게는 “한 주간에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습관”이라고 강조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예배는 한 주간 모두를 교회로 사는 삶에서 “일주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시간”이라고 책임회피성 발언을 할 수도 있다.물론, 개인의 삶에 주어진 한 주간의 시간 중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이 무엇이라고 누가 감히 하나님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희생의 사랑을 행하라고 우리를 부르실 때, 하나님은 그 시간을 우리가 드리는 공예배보다 더욱 중요하고 더 영으로 드리는 예배로 여기실 것이다. 진심으로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이도록 하자. 그렇지만 여전히 우리는 이것이 우리가 교회로서 주일마다 예수님을 경배하기 위해 모이는 것만큼 가장 중요한 시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공예배가 우리의 가장 중요한 한 주간의 습관이요 기쁨을 얻기 위한 싸움에서 가장 위대한 무기 중 하나일 수 있는 이유는, 공예배는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혜의 공급의 세 가지 필수 원칙, 곧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그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의 귀를 여는 것(기도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의 몸에 속하는 것(성도의 교제 안에서)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예배에서 우리는 예배에의 부름에서, 말씀을 읽고 가르칠 때, 신실한 복음의 설교에서, 성찬의 말씀에서, 세상에 빛으로 보냄 받는 파송 명령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듣는다.’ 공예배에서 우리는 죄 고백, 찬양, 감사, 낭송, 청원기도, 믿음으로 성찬의 떡과 포도주를 받음으로써 ‘하나님께 반응한다.’ 그리고 공예배에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함께’ 한다. 하나님은 각자 고립된 개인으로 살아가고 예배하라고 우리를 만들지 않으셨다. 개인 성경묵상도 개인 기도도 영광스러운 선물이며 꼭 필요한 것이다. 소홀히 하거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우리의 뇌가 다른 것들, 곧 서로 경쟁하는 다른 내용들로 넘쳐나는 이 정보화 시대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 개인의 영적 습관은 공동체 안에서 함께 누리는 하나님과의 꾸준한 친교의 맥락 안에서 비로소 번성하는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친교를 위한 리듬으로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이다. 한 시간과 한 주의 모든 시간공예배는 매주 168시간 가운데 단 한 시간이며 이것은 깨어 있는 시간 동안 교회로서 살아가는 시간 중 1퍼센트에 불과하다. 그러나 우리의 공예배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경건한 기쁨으로 응답하기 위해 함께 모이는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시간이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사실이 긴장 관계에 있다고 느낄지 모르지만, 결국은 그렇지 않다. 이 둘은 쌍둥이다. 대적이 아니라 친구다. 교회 안에서 규칙적이고 의미 있는 헌신은 한 주간 모두 우리가 교회로서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변화시키고, 또한 우리가 교회로서 깨어 있는 120시간을 살아가는 방식이 1퍼센트의 예배의 헌신을 구체화한다. 매주 함께 예수님을 진정으로 신실하게 예배하는 교회는 매시간 교회로서 살아갈 준비가 더욱 더 되어 있고, 한 주간 모두 교회로서 사는 교회는 매주일 가장 감미로운 예배를 함께 즐긴다. 원제: Two Truths about the One Percen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서은성
공예배
예배와봉사
교회론
교회가된다는것
예배와섬김
교회생활
다함께 신앙을 고백한다는 것
by Kai SoltauㆍMatthew Short
2022-01-09
“우리는 하나의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인 교회를 믿습니다.”오스트리아 빈에서 개척한 지 얼마 안 되는 우리 교회는 예배드릴 때 이렇게 니케아신경을 낭송한다. 이런 옛 신앙고백들을 암송하는 전통이 낯설거나 아니면 구식으로 보이는 복음주의자들도 많이 있겠지만, 우리 교회는 주일마다 신조들과 신앙고백들과 교리문답들(신앙고백들로 통칭하겠다)을 낭송한다. 탈교회, 탈기독교 현상이 뚜렷한 이 유럽 국가에서, 이처럼 신앙고백이 교회생활의 중심 리듬이 되어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예배의 “규정적 원리”(regulative principle)는 몇 가지 입장에 따라 그 의미하는 바에 차이가 있으며, 우리는 자신이 속한 교단이나 전통의 가르치는 그 원리를 들어 보았을 것이다. 교회로서 우리는 성경이 공예배(corporate worship)에서 지켜야 하는 요소들을 규정한다고 확신한다. 동시에 우리는 그 요소들이 취하는 형식은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보통 우리는 매주 같은 예배모범을 따라 예배를 드린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송축하고, 우리에게 구주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그리스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공급하심을 찬양하고, 마지막으로 하나님 안에서의 새로운 삶의 방식을 숙고한다. 우리는 신앙고백들을 사용하는 이유는 성경을 잘 요약한 이러한 내용들을 고백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교회(the church)는 “하나이며 거룩하고, 보편적이고, 사도적이다”라고 할 때, 우리는 ‘우리’ 교회도 거기에 포함해서 그렇게 고백한다. 우리 교회는 ‘거룩하다.’ 곧 우리 교회는 우리 교회보다 큰, 보편 교회의 일부이다. 그리고 우리 교회는 ‘사도적이다.’ 곧 우리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을 따른다. 이렇게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성도들이 신앙고백에 따라 생각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이 역사적 신앙고백들이 우리 교회가 고백하는 신앙고백이 되기를 기도한다. 거룩한 교회_세상과 구별되는 교회 복음주의자들은 거룩함(holiness)을 점진적 성화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거룩함은 교회의 구별된 특징이다. 교회는 세상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세상과는 다르다는 의미다. 보편 교회로서의 교회도 지역 교회로서의 교회도 그렇다. 하나님을 떠난 시대에 하나님께 헌신하는 교회그리스도인은 낯선 곳에서 살아가는 나그네다.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불러내시어 우상숭배의 삶을 버리고 당신의 거룩한 백성이 되라 하셨다(벧전 1:13-21; 살전 1:9-10). 이곳 유럽에서 기독교의 원칙과 덕목은 더 이상 규범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은 이것을 규범에서 벗어난 것으로 취급한다. 현대 유럽 문화에서,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것을 믿는 것은 멍청함의 극치요, 성삼위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자기모순이며, 우리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살고 있다고 인식하는 것은 희망사항일 뿐이다. 현실이 이와 같기 때문에 우리는 주일마다 더욱 더 이러한 고백을 해야 한다. 신앙고백들은 세상이 비정상 취급하는 것을 정상이라고 시공을 초월하여 고백하고 증언하는 기독교의 자기표현이다. 그래서 우리는, 공예배에서 언약의 하나님을 예배할 때, 우리가 세상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하나님의 진리 편에 서 있다고 하나님께 고백한다. 세상은 우리의 고백을 혐오스럽게 바라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우리의 고백에서 어떤 매력도 알아본다. 거짓의 시대에 진리를 확신하는 교회 악마 스크루테이프는 조카에게 보내는 편지에 “모든 인간은 그들이 행세하는 대로 변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썼다. 칭찬에 대한 욕망 때문에, 우리 인간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가면을 쓴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더 이상 그 가면과 우리 얼굴을 구분할 수 없게 된다. 세상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중에서도 동료압력(peer pressure)이 가장 거물급 유혹 책략이다. 그렇다면 근본 진리들을 다함께 고백함으로써 어떻게 우리는 세상의 악이 우리 마음속에서 정상으로 탈바꿈하지 못하도록 더 잘 물리칠 수 있게 되는 것일까? 우리 성도들이 세상에 나갈 때, 살아 있는 성도들은 영원히 살 것이지만 죽은 사람들에게는 죄의 책임이 없다는 거짓 교리에 오염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교회에서 10명, 20명, 50명, 또는 500명의 성도들 앞에 서서 “예수님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다시 오신다”라고 다함께 고백할 때 우리는 세상의 교리를 물리치는 증언에 동참하게 된다. 우리는 그냥 그런 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진리를 증언하고 그래서 진리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분열에 맞서 다함께 하나 되는 교회 세상에서 사람들은 코로나19나 정치 같은 다양한 주제들을 두고 의견과 입장이 분열되어 있지만, 우리는 힘써 하나됨을 유지한다는 교회 언약(church covenant)에 서약했다. 주일마다 우리의 신앙을 한목소리로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이 하나됨을 우리 마음에 뚜렷이 새긴다. 기독교 신앙의 핵심 진리들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반기독교 문화가 득세하는 사회 속에서 하나님 나라의 제사장으로서 우리의 독특성을 되새긴다. 우리는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구별됨을 보여 주며, 동시에 교회 안에서는 자비와 하나됨을 나타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따른다. ‘우리 교회 밖, 다른 교회의 그리스도인과도 “하나” 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보편 교회_하나님 백성들이 함께하는 교회 신앙고백들은 또한 우리 모두가 보편교회의 구성원이라고, 곧 그리스도의 온전한 신부로서 우리는 하나라고 가르친다. “보편 교회”(catholic church), 이 용어는 약 주후 107년에 안티오키아의 이그나티오스의 편지에서 처음으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기독교 2000년 역사 속에서 이 용어는 점점 그 인기를 잃었다. 우리는 ‘가톨릭’이라는 용어 대신에 “유니버설”(universal)이라는 용어를 선호함으로써 프로테스탄트로서의 우리를 로마가톨릭과 구분하는 경향이 있지만, 이런 타협은 다소 유감스럽다. 원래 “가톨릭”이 사용된 역사를 보자면, 이 용어는 ‘보편’을 뜻하기도 하지만 전체(wholeness), 함께함(togetherness)의 의미도 담고 있다. 이것은 어떤 중요한 사안들에서 우리가 서로 동의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우리의 전체 신앙고백에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도 우리는 하나라는 의미이다. 구원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구원받은 모든 무리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되어 있다. 겸손히 헌신하는 교회 우리가 신앙의 근본들을 정기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을 힘써 낮추겠다는 것이기도 하다. 빈 같은 국제도시에서, 우리 교회는 새로운 신자가 교회를 찾을 때 발견하게 되는 첫 번째 참된 교회는 아니다. 우리가 이 도시의 유일한 개척교회도 아니다. 우리는 다른 목회자들과 교회개척자들도 알고 있고, 우리가 동의하지 않는 것들이 그들에게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시간을 정해 두고서 그들의 사역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가, 예를 들어, 사도신경을 함께 고백하는 것은 곧 복음 안에서 그들과 하나됨을 고백하는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믿는다면, 교회생활의 매우 많은 것들이 쉬워질 것이다. 우리 교회에서 받은 세례가 아니라면 그런 세례는 다 무효일 것이니, 어떤 사람에게 어떤 세례를 어디서 받았는지 물어 볼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우리 교회 외에 다른 교회는 모두 거짓 교회일 터이니, 다른 교회를 굳이 분별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교회들과 개척교회들은, 특히 탈기독교 상황에서, 그들보다 앞서 사역한 사람들의 수고를 인정해야 한다. 주님이 모세를 감추셨다면, 주님의 목적들은 단지 한 사람 또는 한 교회보다 클 뿐이다. 역사에 뿌리 내린 교회 보편 교회의 일부로서 우리는 우리의 교리를 형성하는 2000년 교회 역사의 혜택을 누리고 있다. 감사하게도, 이러한 역사가 맺은 많은 열매가 신앙고백들 안에 표현되어 있다. 과오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면, 보편 교회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현장에 있는 교회들에서 교리교육을 강화함으로써 복음을 수호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갈 1:8-9). 간단히 말해서, 교회가 성도들을 교리로 교육하지 않는다면, 성도들을 오래된 이단들, 포장을 바꾼 새로운 이단들에 넘어가도록 내버려 두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신앙고백들에는 내주하는 성령의 지혜로 성경을 해석한 사람들의 지혜의 정수(精髓)가 들어 있다. 아타나시우스, 나지안주의 그레고리, 아우구스티누스, 마르틴 루터, 토머스 크랜머, 웨스트민스터 신학자들, 앤드류 풀러, 존 브로더스 등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이 그들이다. 21세기 신자세례파(Credobaptist[스스로 신앙을 고백한 성인에게 세례를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파로 유아 세례에 반대한다])라면 이 지혜의 사람들 중에서 동의할 수 없는 점들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만, 이들과 더불어 우리는 시간의 시험을 통과한 성경적 진리들을 고백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사용함으로써 우리는 우리 문화 안에서 기독교의 증인으로서 우리의 신용을 쌓는다. 빈에 터를 잡은 신생 개척교회로써 우리는 전 세계 형제자매들이 갖지 못했을 수도 있는 엄청난 자유를 누리기도 한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세계 다른 지역에서 누리는 만큼의 종교자유와 정교분리를 누리지 못하는 상황에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오스트리아에서는 어떤 종교단체가 컬트(cults; ‘사교집단’)나 섹트(sects; ‘폐쇄적 종파’)로 규정되면 불법 단체가 된다. 이것은 신생 종교단체(church innovations)에 대한 문화적 반감이 이 나라에 널리 퍼져 있음을 보여 준다. 국가 교회(state church)에 소속되어 있지 않는 자유 교회들이 최근(2003년)에 종교 단체로 인정받았지만, 오스트리아 국민 다수는 이러한 종교 모임들을 여전히 신생 종교단체 아니면 사교집단 비슷한 것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17세기까지 올라가는 신앙고백을 가진 교회를 어떻게 이렇게 부를 수 있다는 것인가? 이것이 바로 우리가 오스트리아에 교회를 개척하면서 1689년 제2차 런던 신앙고백(1689 Baptist Confession of Faith)을 공포하고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 성도의 교제 가운데 용기를 얻는 교회 주일마다 빈에서 예배드리는 우리 교회는 많지 않는 성도들의 무리일 수 있다. 그리고 이 도시에는 성경을 믿지 않고 고백신앙을 갖고 있지 않은 많은 성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을 고백할 때 우리는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형제자매들과 나란히 함께 동일한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배 중에 신앙고백을 낭송하는 시간이 되면 우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는 이제 전 세계 모든 시간 속에 있는 성도들과 함께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비록 작고 보잘 것 없는 교회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신앙고백을 시작함으로써 큰 용기를 얻는다. 사도 교회_성경에 기초한 교회 역사적 신앙고백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낭송하며 교리문답을 배우는 것은 곧 신약과 구약의 진리에 닻을 내리고 있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모세는 이스라엘에게 다음세대를 가르치라고 명한다(신 6:4-9). 신약에서 초대 교회는 “사도들의 가르침에 몰두했다”(행 2:42). 역사적 신앙고백들을 우리의 교회생활에 통합함으로써, 우리는 교회(the church)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주님께서 그리고 주의 사도들이 가르친 대로 받고, 지키고, 물려주어야 하다는 우리의 믿음을 표현한다. 진리를 물려주라는 명령을 따르는 교회 역사적 전통들을 통해 내려온 우리의 신앙을 고백함으로써,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에 “마음을 다하고”(신 6:5), 하나님의 진리를 “자녀에게 (그리고 우리 자신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신 6:7), 그럼으로써 사도들의 가르침(행 2:42)에 몰두하는 교회가 되고자 한다. 여기에 우리는 다음과 같이 한 가지를 더할 수 있을 것이다. 에베소서 4:11-14에서 말씀하는 바와 같이, 각 교회의 “목자-교사들”에게는 신령한 진리를 교인들, 곧 그 “자녀들”에게 전수해야 하는 특별한 책임이 있다. 기본 진리들 안에서 제자로 훈련받는 교회 “똑같은 옛 신앙고백”을 계속 고백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결국 기계적인 고백이 되고 말 것이라며 반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주일마다 우리가 참으로 믿는 것이 무엇인지 되새긴다는 것은 곧 축복임을 우리는 경험을 통해서 확신하게 되었다. 우리는 “그래, 이것이 바로 내가 믿는 거야, 그렇지?”하고 자신을 점검할 수도 있고, “내가 정말 이것을 믿고 있을까? 내 삶과 행동은 내가 바로 전에 함께 고백한 것을 진정으로 반영하고 있을까?”하고 갑작스럽게 자신에게 도전을 줄 수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에서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라고 물을 때 우리는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라고 대답한다. 얼마나 위대한 진리인가! 이 진리를 얼마나 더 고백해야 이만하면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까? 또 사도신경의 두 번째 행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를 깊이 생각해 보라. 이 고백을 할 때면 나는 ‘이번 주에 나는 그 외아들 그리스도를 얼마나 사모하고 또 얼마나 그리스도의 주되심 아래 살았는지 되돌아보게 된다. 권위에 복종하는 교회 우리는 종교개혁의 후예들이 “사역자의 권위” 곧 초대 교회가 “신앙 규칙”이라고 불렀던 것을 대부분 잊어버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이 권위는 [성경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권위는 로마가톨릭교회가 독점한다는] 성경에 대한 “교회의 권위”와는 대조된다, 사역자의 권위는 성경을 이해할 수 있는 통찰이나 요약, 해석의 열쇠를 마련해 준다. 이러한 것들은 물론 성경 자체에서 비롯되지만, 모든 신학은 결국 성경의 진리를 체계화하고 종합하기 위한 범주들을 만들어 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인성과 인성의 통일성을 함축하는] 위격의 연합(hypostatic union), [첫 창조에서 인류의 머리인 아담과 새 창조에서 구속받은 인류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함축하는] 언약의 대표성(federal headship) 같은 신학 개념들을 우리가 사용할 이유는 없다. 신앙고백들은 성령의 영감으로 된 것이 아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계시를 바르게 나타내는 신앙고백들에는 권위가 있다. 이 사실은 신앙고백들은 성경에 불필요한 것들을 덧붙인 것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없애 준다. 오히려, 많은 신앙고백들은 성경과 동등한 위치에 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심오한 성경적 깊이를 가진다. 진리 안에서 강해지는 교회 주일 설교에서 가르칠 만한 아주 간결한 진리의 공식 같은 것을 찾으려 할 때가 있다. 이번 주일에 에베소서 4장 11-16을 설교하려 한다고 치자. 설교자는 성도가 장성한 분량까지 이르러 그리스도 앞에 영광스럽게 나타나도록 어떻게 우리가 서로를 “사랑 안에서 세워 나가도록” 부름 받았는지 설명할 것이다. 그리고 설교자는 이 가르침을 거의 300년이나 된 이 교리문답으로 보충하여 설명할 것이다. “가시적 교회가 무엇입니까?” “가시적 교회란 모든 시대와 장소를 막론하고 신앙을 고백하는 신자들이 있고, 참된 복음이 설교되고, 세례와 성찬이 바르게 시행되는 모임입니다.” (1693년 발표된 벤자민 키치 교리문답 제105 문답니다.) 결론 모든 지역 교회는 언덕 위에 서 있는 거룩한 도성이 되어야 한다. 시공을 초월하여 성도들과 하나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의 가르침에 터를 잡아야 한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우리가 정체불명의 신앙고백들, 편협한 성경주의, 연표에 기댄 속물근성(chronological snobbery[이전 시대의 사상이나 학문보다 현 시대의 것이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에 오염되는 것을 막아 준다. 역사적 신앙고백들, 신조들, 그리고 교리문답들은 교회가 그 신앙고백의 정체성을 지킬 수 있는 방편들 중 하나일 뿐이지만, 우리는 이것들이 핵심이 되는 방편이라고 확신한다. 원제: Confessing the Faith: The Place of Confessions in Church Life출처: www.9marks.org번역: 서은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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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일치
교리문답
믿음, 소망, 그리고 천국의 향기: 무엇이 사랑을 가장 위...
by Haddon Anderson
2022-01-02
2021년, 그리스도인은 무엇으로 알려졌던가? 무엇이 교회의 특징이 되었던가?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라고 제자들에게 명하셨다. 우리는 비신자들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은 사람으로 구별하여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우리는 비신자들이 교회를 하나님 나라의 전초기지로, 새 하늘과 새 땅을 미리 보여주는 존재로 알아봐 주기를 바란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비신자들이 그리스도인 개개인이나 지역 교회들을 바라볼 때, 거기서 세 가지 핵심 교리, 곧 믿음과 소망,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을 발견하기를 바란다. 복음이 만들어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 충만한 사람, 영원한 생명의 소망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차고 넘치는 사람이다. 실제로, 바울 서신과 베드로 서신, 그리고 히브리서 곳곳에 있는 아홉 개의 본문에서 우리는 이 기독교 은혜 트리오(trio of Christian graces)를 확인할 수 있다(고전 13:13; 갈 5:5-6; 엡 4:2-5; 골 1:4-5; 살전 1:3; 5:8; 히 6:10-12; 10:22-24; 벧전 1:21-22).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서 신약 시대의 성도들에게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느냐고 묻는다면, 우리는 같은 대답을 반복해서 듣게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넘치는 삶을 살아가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 중의 제일 고린도전서 13:13은 이 트리오를 강조하는 가장 잘 알려진 구절이다. 바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바울의 이 주장은 중요한 질문을 제기한다. 왜 사랑이 세 가지 은혜 중 “제일”일까? 결국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엡 2:8), 그리스도와 그의 약속에 대한 믿음에 기초하여 신자로서 계속 성장한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간절한 마음으로 그리스도의 재림을 고대할 때 소망은 우리를 기쁨으로 채우고, 고난을 인내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롬 12:12). 그러나 바울은 이 거룩한 세 가지 중에서도 사랑이 가장 높은 위치에 있다고 말한다. 왜 사랑이 제일일까? 고린도전서 13:13을 세 가지 문맥에서 살펴봄으로써 이 질문에 답해 보자. 우리는 먼저 이 바울 서신서 전체를 큰 맥락으로 하여 시작할 것이고, 그 다음에는 고린도전서 12-14장에 초점을 맞추어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볼 것이며, 그리고 마지막으로 근접 맥락인 고린도전서 13:8-13에 집중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마음이 감동되어 우리가 서로 사랑하게 되고, 또한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이웃이 사랑으로 가득 차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이름을 세상에 널리 전하게 되기를 바란다.믿음과 소망은 사랑을 낳는다바울 서신들에서 우리는 믿음과 소망이 사랑을 낳는다고 말하는 여러 구절을 볼 수 있다. 갈라디아서 5:6은 믿음과 사랑을 이렇게 연결 짓는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을 수 있지만, 의롭게 하는 믿음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믿음은 항상 다른 사람을 향한 사랑을 통하여 일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우리는 주변 사람들에게 무관심하게 지내도 된다? 아니다.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에 믿음이 생기게 하시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그 믿음을 통하여 셀 수 없이 많은 사랑을 행하게 하려 하심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있는 소망은 우리로 하여금 서로 사랑하게 한다. 골로새서 1:4-5에서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으로 말미암음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바울은 골로새 그리스도인들이 하늘에서 영광스러운 소망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동료 신자를 사랑했다고 말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면전에서 영원을 보내게 될 것임을 알았고, 이러한 소망으로 인해 시간과 소유물은 물론 심지어 목숨까지도 내어놓을 정도로 동료 신자를 섬길 수 있었다. 믿음과 소망은, 어떤 의미에서, 더 큰 목적을 위한 수단이다. 더 큰 목적이 빠진 믿음과 소망은 불완전하다. 믿음과 소망은 우리를 변화시켜 우리 삶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닮은 사랑으로 넘쳐나게 한다. 사랑은 교회를 세운다이제 우리는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는 바울의 말이 들어 있는 고린도전서의 문맥으로 초점을 좁힐 것이다. 고린도전서 12-14장에서 바울은 신령한 은사들에 대해 고린도 교회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 교회 안에 있는 다양한 은사와 우리가 “기적의 은사”라고 부르는 은사의 사용과 같은 문제를 정리해 나가는 바울의 가장 큰 관심거리는 그 모든 것이 다 교회를 세우는 데에 쓰여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함께 모일 때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누구나 이 목적을 깊이 새기고 있어야 한다.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함께 하나님을 섬기는 그리스도인이 교회의 나머지 지체들을 세우지 않으면서도 신령한 은사를 행사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사를 받은 사람들이 영광을 차지하고 교회의 덕은 세우지 않는,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그런 은사들이 넘쳐나는 교회는 원하지 않으신다. 그렇다면 열매 맺지 않는 종교 활동과 교회를 북돋우는 섬김을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이다.이 서신의 앞 부분에서 바울은 “사랑은 덕을 세운다”(고전 8:1)고 썼다. 고린도전서 12-14장의 문맥에서, 사랑에 관한 바울의 유명한 말이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교회를 세우는 은사와 “소리 나는 징이나 울리는 꽹과리”(고전 13:1)에 불과한 은사를 구분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다. “지식을 초월하는”(엡 3:19) 사랑으로 교회를 사랑하시기에 예수님은 당신의 몸인 교회의 지체들이 서로 세워주기를 바라신다.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믿음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소망으로도 안 된다. 사랑이 있어야 한다. 사랑은 영원토록 제일이다사랑이 기독교 은혜 트리오 가운데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는 이유는 고린도전서 13장 후반부에 나온다. 13:8-13에서 바울은 예언과 방언과 지식 같은 신령한 은사들은 지금 이 세상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고 말 것이라고 말한다. 반면에 바울은 13절에서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세 가지 은혜는 영원한 것이기에 은사들보다 더 귀하다는 것이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도 우리는 계속해서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에 대한 믿음을 가질 것이며, 소망을 가지고 미래를 계속 고대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새로운 피조물의 삶은 사랑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시작해서 우리를 통해 흐르는 사랑으로 특징지어질 것이다(요일 4:16).1738년에 조나단 에드워즈는 “천국은 사랑의 세계”(Heaven Is a World of Love)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그는 천국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바로 이런 사실 때문에 천국은 사랑의 세계가 되는 것입니다. 태양이 빛의 샘인 것처럼 하나님은 사랑의 샘이십니다. 그러므로 맑은 날 반구 중앙에 위치한 태양이 세상을 빛으로 채우는 것처럼, 하늘에 계신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는 사랑으로 하늘을 가득 채우십니다”(Works, 8:369). 더 나아가 그는 이렇게 덧붙인다. “성도들이 하나님과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넘치듯, 하늘에서는 사랑이 모두의 마음에서 왕 노릇할 것입니다”(8:373).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는 순수한 사랑으로 가득 찬 세상에서 영원을 보낼 소망을 가지고 기뻐한다. 그리고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이 점점 더 사랑으로 가득 찰수록, 우리는 현재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반영하고, 교회는 천국의 전초기지로서의 소명을 수행하게 된다. 우리의 삶과 교회는 하나님과 서로를 사랑할 때 천국의 달콤한 향기를 퍼뜨린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원제: Faith, Hope, and Heaven on Earth: What Makes Love the Greatest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고린도전서13장
사랑
믿음소망사랑
하나님사랑
이웃사랑
대계명
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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