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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성례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by Tiago Oliveira
2021-12-19
복음주의자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의 후예다. 우리는 구원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믿는다. 다른 무엇보다도, 저 개혁자들은 세례와 성찬을 구원의 도구로 잘못 해석한 가톨릭교회의 성례전을 거부했다.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구원의 도구로서 성례를 거부했다고 해서 성례가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주 예수께서 하나님의 백성이 예배를 위해 모일 때 지키도록 성례를 제정하셨다고 믿는다. 성례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의 표시요 또한 성도들 사이 연합의 표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성례가 사람들을 정말로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이러한 확신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 1.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다.성례는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더 나아가, 불신자들이 믿음에 이르고(롬 10:13-17), 그리스도인이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요 17:17)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교회가 예배를 위해 모일 때 말씀은 기도와 설교, 성경 낭독과 찬송, 그리고 세례와 주의 만찬을 통해 우리 모임의 한가운데 자리한다. 따라서 성례는 눈에 보이는 말씀이다.우리 주 예수께서 세례(마 28:18-20)와 주의 만찬(눅 22:14-20; 고전 11:23-30) 둘 다 제정하셨다. 이 둘은 그리스도의 교회를 바로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의 일부이다. 주님은 당신의 교회에 세례와 주의 만찬을 행하라고 명하셨다. 이 둘은 우리의 성화를 위한 수단으로 매우 유익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과 마찬가지로, 성례는 그 자체에 신비한 힘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2. 성례는 그리스도와 우리의 연합, 그리고 우리 사이의 연합을 가리킨다.성례는 복음의 가시적 표지다. 이게 무슨 뜻인가? 설명하겠다.세례에서, 우리는 복음이 회개한 죄인의 물에 잠길 때 표현되는 것을 본다. 세례를 통해 그들의 죄는 “씻겨 나간다”(행 22:16). 세례는 이제 세례 받은 이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음을 선포한다(골 2:11-12; 참조. 롬 6:3-4).성찬에서, 우리는 지역 교회가 한 몸으로서 떡과 잔을 함께 나눌 때 복음이 묘사되는 것을 본다(고전 10:16-17).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당신의 백성을 대신하여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몸을 기억하고, 또 새 언약을 세우기 위해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를 기억하는 식사다. 이러한 상징들은 추상적이지 않다. 이것들은 보이지 않는 진리, 곧 구원과 중생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가시적으로 보여 준다. 이런 까닭에 그리스도께서 교회에 이런 상징을 주신 것이다. 성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표상이 보이지 않는 실재와 일치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성례는 또한 이미 변화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것이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다. 세례를 받았을 때, 우리는 회개(행 2:38; 참조. 롬 6:3-4)와 중생 모두와 일체감을 느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되었음을 느낀 것이다(요 3:5-7, 롬 6:4). 더 나아가 우리는 하나님께만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헌신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다. 후자의 헌신은 주의 만찬을 통해 구체화된다. 지역 교회는 이러한 주의 만찬의 자리에 함께 모여 주 예수의 죽음을 기억하고 주님이 다시 오실 날을 고대한다(고전 11:23-26).고린도전서 11장은 주의 만찬에 합당하게 참여하기 위해서는 자기점검이 필요하다고 분명하게 말한다(고전 11:28). 자기점검을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한다.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어떠한가? 그리고 동료 신자들과의 관계는 어떠한가?주의 만찬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하신 일을 기억하고, 우리 삶을 하나님께 다시 헌신하라고 촉구한다. 이러한 자기점검은 우리를 회개로 이끈다. 변화는 성례의 본질적인 부분이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3. 성례에는 정말로 의미하는 바가 있다.마지막으로, 성경이 성례에 대해 말하는 방식을 보면 성례가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게 된다. 그의 첫 번째 편지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이는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하나님을 향한 선한 양심의 간구니라”(벧전 3:21; 참조. 롬 6:3-4, 골 2:11-12). 구원하는 것은 물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하나님께 올리는 호소라는 점에 유의하라. 하지만 세례가 “구원”한다고 말할 수 있다는 점은 중요하다. 조금 전 말한, 세례가 구원에 필요하지 않다는 점과 연관해서 그럼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결혼하는 부부에 비유할 수 있다. 남자와 여자가 그냥 모여서 사적인 상호 합의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증인 앞에서 선서하는 공개 의식은 눈에 보이는 계약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것을 바꾼다. 결혼식에서 남자와 여자는 공개 서약에 따라 남편과 아내로 선언된다. 마찬가지로 세례를 받을 때, 그 사람은 공개적으로 신앙고백을 하고, 교회는 그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한다. 세례 받은 사람은 이제 새로운 삶, 새로운 정체성, 새로운 충성을 시작한다. 이제 그는 새로운 사람들에 속한다. 주의 만찬에 관해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이렇게 질문한다.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고전 10:16-17, 참조. 요 6:53-58).잔과 떡은 눈에 보이는 물질적 상징이다. 그러나 지역 교회의 성도들이 이 둘을 취할 때, 이 둘은 더 많은 것을 의미하게 된다. 이 둘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친교를 나누고, 또 다른 성도와 친교를 나누는 수단이 된다. 그래서 바울은 나중에 “너희가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고전 10:21)라고 말한 것이다. 우리가 주의 만찬에 올바르게 참여할 때, 하나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진정한 교통(communion)이 이루어진다. 우리가 올바르게 참여하지 않을 때, 우리는 사실 다른 어떤 것과 교통하는 것이다. 물론 세례를 위한 물, 성찬을 위한 떡 한 덩이, 포도주 한 잔에 신비한 같은 속성은 없다. 성경 말씀이 유익하다고 믿어야 하는 것처럼, 성례도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믿고 받아야 한다. 다시 말한다. 그렇다. 성례는 정말로 사람을 변화시킨다. 그러나 믿음이 먼저다. 원제: Yes, The Ordinances Really Do Change People출처: www.9marks.org번역: 무제
성례
주의만찬
새언약
세례
성찬
연합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라”
by 이인호
2021-12-01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온 땅에 충만하고, 땅을 정복하며,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명령하셨다. 이 명령을 충실하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흩어져야 한다. 사방으로 땅 끝까지 퍼져 나가 온 땅의 온전한 주인으로서 동식물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을 다스려야 한다. 그런데 우리가 흩어지지 않고 불순한 의도로 모여서 또 다시 바벨탑을 쌓는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마도 지구의 모든 시스템이 교란될 것이고 땅과 바다와 하늘의 생태계가 무너지고 말 것이다. 유럽연합(EU)은 대기업, 특히 애플이나 구글, 삼성 같은 글로벌 기업을 더욱 더 강력하게 규제한다. 이들에게는 중소기업보다 상대적으로 더 까다로운 잣대를 적용한다. 재무적 규제뿐 아니라 환경, 노동자 인권, 부정부패 등 비재무적 규제들에 대한 법적 기준을 엄격히 적용하여 더 많은 사회적 책임을 지라고 압박한다. 이는 대기업의 독점과 전횡을 견제하여 중소기업과의 불균형을 해소하기 위한 조치로 볼 수 있으며, 결국 이를 통해 기업 생태계를 조절하려는 것이다. 하물며 세상의 조직과 권세도 대기업의 무분별한 시장 잠식과 독과점의 전횡을 견제하여 자연과 인간을 포함한 지구 생태계의 균형과 보존을 유지하려고 이렇게 노력하는데…. 하나님께서는 모든 피조물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인 우리에게 더 중요한 생태계를 보호하라 하신다. 바벨탑의 욕망과 시도를 또 다시 금하신다. 한국 교회의 기형적 생태계대형 교회(Mega Church)를 이야기할 때면 우리는 으레 미국 교회부터 떠올리고 거론한다. 미국 교회가 대형 교회라는 현상의 진원지임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실을 보면 다른 사실이 보인다. 미국의 교회 현황을 조사한 통계 자료들을 살펴보면(출처: Outreach magazine and Lifeway Research(annual report 2017); 리뷰아카이브(2016.8); 메가처치, 한국 교회의 자화상(2016)), 미국의 개신교인은 약 1억 5,000만 명이며, 1만 명 이상 모이는 대형 교회는 37곳, 대형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수는 약 66만 명이다. 그런데 한국의 개신교인은 약 960만 명인데, 1만 명 이상 모이는 대형 교회는 23곳, 그리고 대형 교회 교인 수는 약 150만 명이다. 미국에 비해 개신교 인구가 절대적으로 적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대형 교회 비율이 미국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무엇보다도 우리나라 개신교인의 수가 미국 교회의 15분의 1 수준에 불과하면서도 대형 교회에 출석하는 교인 수에서는 한국이 2.3배 이상 높다는 사실에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미국의 경우 100명 당 약 0.4명이 대형 교회에 출석하고 있으나, 한국은 100명 당 약 15.3명이 출석하고 있다. 이로써 우리는 상대적으로 한국 개신교인이 미국 개신교인에 비해 5배 정도 대형 교회를 선호한다는 합리적 결론에 이르게 된다.이와 같이,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의 핵심은 교회 생태계의 파괴이다. 오늘 한국 교회가 직면한 어려움과 위기는 곧 더 늦기 전에 이렇게 망가진 교회 생태계를 복원하라 명하시는 하나님의 메시지이다.그렇다고 해서 대형 교회는 무조건 잘못되었고 소형 교회는 무조건 옳다는 이분법적 사고와 흑백 논리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된다.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 이어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신 사건이 나온다. “우리의 이름을 내어 걸고 흩어짐을 면하자!”(창 11:4)고 했던 인간의 의도를 막으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불러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창 12:2)고 말씀하신다. 바벨탑을 쌓겠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금지하셨던 것을 아브라함에게는 고스란히 허락하신 것이다.하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시며 그를 복의 근원으로 삼으셨다는 사실이다. 그 복은 바벨탑을 쌓는 복이 아니다. 열방과 함께 나누며 생태계를 회복하는 복이다.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죽어 가는 것들을 살리는 복이다. 그들도 복을 누리게 하는 복이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이다. 결국 아브라함이 받은 복은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명 곧 전체 생태계를 살리는 것이었다.하나님의 요청과 우리의 사명그렇다면, 이 땅에서의 창대함과 성공, 성도 수와 교회 부흥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더 이상 자기입증이 필요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입증된 자들인데 목회를 통해 무엇을 입증한단 말인가? 1만 명, 2만 명 모이는 교회를 세웠다고 해서 그 교회가 목회자의 것인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의 자리를 찬탈하는 도적일 뿐이다. 교회 부흥이 자기입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그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까? 물론 지상명령 성취의 도구로서 교회는 부흥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정말 목적이라면 지상명령 성취를 위한 더 효율적인 방법은 나 홀로 성장하는 것이 아니다. 작은 교회의 성도들을 흡수해서 성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더 이상 전도와 교회 개척이 제국주의적 확장을 위한 자기 세력의 도구가 되어서는 안 된다. 대형 교회는 만에 하나라도 자기 세를 불리려는 도구로 교회를 개척하려 해서는 안 된다. 건강한 대형 교회와 작은 교회의 동거와 연합을 강조하는 블로거 칼 베이터스가 수사적으로(예로 든 수치가 절대적 수치가 아니라는 의미) 말했듯이, 성도 5,000명 대형 교회 하나로 성장하는 것보다 성도 100명씩의 50개 교회가 교회 생태계를 훨씬 더 건강하게 할 것이다(Karl Vaters, “Advantages of Having 50 Churches of 100 Instead of 1 Church of 5,000” Christianity Today Blog PIVOT 2017.7.20). 건강한 묘목과도 같은 작은 교회들을 곳곳에, 동네마다 마을마다 도시마다 산간벽지와 도서벽지마다) 개척하여 교회 생태계를 온전히 회복하고 하나님 나라 전체를 확장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요 목적이다. ‘내 교회’ ‘우리 교회’가 아니라 ‘모두의 교회’ ‘만민이 기도하는 교회’ 되어 함께 성장할 때에 지상명령 성취는 더욱 힘차게 일어날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비로소 작은 교회들이 살아날 것이고, 교회 생태계가 회복될 것이며, 지상명령 성취는 앞당겨질 것이다.이 글은 ‘복음만이 모든 것을 바꾼다’(스티븐 엄 엮음, 두란노)에 실린 이인호 목사의 “한국에서 진행되는 복음·도시·운동”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대형교회
소형교회
작은교회
교회개척
자기입증
생태계
지상명령
바벨탑
‘여기서’ 예수 냄새 내는 교회
by 정갑신
2021-11-20
교회 이름 짓기의 설렘 교회를 개척하면서 누릴 수 있는 특권 중 설레고 두드러진 일이 이름 정하기다. 잉태의 희열 가운데 태아를 마음에 담고 태명을 정하여 불러 주려는 부모의 설렘과 같다. 나는 화성시의 타 지역에 있는 외가에 어릴 때부터 드나든 기억이 있어 발안이라는 이름을 오래 전부터 기억하고 있었다. 개척지에 도착한 후에야 발안이 향남에 속한 동네라는 사실을 알게 되어 매우 편안하고 반가웠다. 그런데 발안의 영문 표기는 ‘Baran’(바란)이었다. 히브리어로 ‘광야’이다. 그에 따라, 발안 혹은 바란과 조화를 이룰 만한 이름이 무엇일까를 연신 고민한 끝에 ‘바란하늘’이라는 이름을 억지로 만들었다. 바란하늘교회, 파란하늘교회라는 느낌을 주는 동시에 광야의 하늘, 곧 광야에서도 하늘을 본다는 의미를 설명할 수 있는 이름이었다. 김진홍 목사의 ‘바닥에서 살아도 하늘을 본다’(한알의밀알)라는 책 제목이 떠오른 탓이었을까? 제법 의미가 담긴 이름으로 여겨졌다. 최종으로 이름을 결정할 자리는 은혜의동산교회에서 파송받게 될 개척 멤버들과 함께 모인 자리였다. 창신교회에서 개척 멤버로 참여할 분들과 함께 식탁교제를 나누는 시간이었는데, 나는 그 자리에서 교회 이름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의견을 개진하였다. 모인 성도들 대다수는 생경한 이름이라는 표정을 지었으나 별다른 이견도 없었다. 일단은 처음 듣는 이름이라 어색해 하는 거라고만 생각하였다. 그런데 모임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미 그 지역에 살고 있는 은혜의동산교회 성도 한 분이 말을 흘렸다. “목사님, 여기가 향남읍 발안리예요. 이왕이면 ‘리’보다는 ‘읍’ 이름이 들어가면 좀 더 비전이 있어 보이지 않을까요?” 그의 말이 마음에서 맴돌았다. 얇은 귀 탓인지 갑자기 ‘향남’이라는 이름이 마음에서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개척 멤버들에게 이름을 공모하는 과정을 밟았다면 더 좋았겠지만, 개척 날짜를 단 몇 주 앞둔 터라 처음 모인 어색한 이들 사이에서 의사결정을 하는 과정이 부담스러웠다. 더구나 후보 이름을 제출했다가 채택되지 않는다면, 그들은 개척도 하기 전에 거절감부터 느낄 가능성이 있었다. 자신이 제출한 이름을 거절당한 끝에, 정해진 교회 이름을 달가워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었다. 고민 끝에, 예수님이 머리 되시는 교회를 꿈꾸는 마당에 과감하게 예수님의 이름을 전면에 내세우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예수님의 향기가 난다’는 이중의 의미를 담아 ‘예수향남교회’로 정한 것이다. 다음 모임에서, 고민했다는 엄살과 함께 조심스럽게 이름을 제출했을 때 참석자들의 반응은 모두 호의적이었다. 예수향남교회. 많은 이들이 이 이름이 참 좋다고 한다. 어감과 의미가 좋고 느낌도 따뜻하다고 한다.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이름마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 같아 기쁘다. 더구나 예수향남교회는 태생부터 분립 개척과 유사한 본질을 지녔으므로, 향후 분립 개척을 할 때마다 예수 이름에 동네 이름을 붙이면 자연스러운 연대감이 느껴질 것 같다는 기대도 생겼다. 실제로 2016년 1월 첫 주에 첫 번째 분립 개척한 교회는 ‘예수평화교회’다. 예수의 이름으로 평택과 화성을 아우르는 교회라는 뜻이다. 언젠가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서 내가 분립 개척하게 된다면 화성과 평택 중간쯤에 두 도시를 아우르는 예수화평교회를 세우리라 생각하며 마음에 담은 이름이었는데, 개척하는 목사가 그 이름을 요구했던 거다. 그리고 2017년 수원 호매실 지역에 세워진 두 번째 분립 개척 교회 이름 역시 ‘예수호매실교회’다. 교회가 시작되고 교회와 복음의 본질에 천착케 하시는 성령의 강렬한 이끄심을 느낄 때마다 나는 이 이름이 참 좋다. 예수님이 머리이신, 예수님이 주인이신, 예수님이 대답이신, 예수님이 전부이신 예수향남교회, 고마운 이름이다. 나라의 교회 될 생각 말고 지역의 가족이 되라개척 교회의 사명을 위해 기도하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내면에 이런 감동을 주셨다. “한국 교회를 생각하지 말라. 조국 교회 운운하지 말라. 다만, 너와 더불어 시작하는 교회가 심긴 그곳을 위해 기도하고 그곳에서 그들과 함께 있으라.”하나님은 교회로 하여금 교회가 속한 지역에서 지역의 주민들과 더불어 진실된 사귐의 공동체가 되게 하신다. 사귐은 안으로의 사귐뿐 아니라 밖으로의 사귐이어야 한다. 지역의 결핍과 필요에 영적으로뿐 아니라 실제적으로 응답할 수 있는 사귐과 책임의 공동체여야 한다. 교회는 대한민국의 모든 영혼을 향하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마을 혹은 그 동네 혹은 그 작은 도시의 교회여야 하고, 그 지역 사람들이 그 교회와 소통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하고, 교회와 지역이 서로에게 기꺼이 즐거움으로 상호 접촉하고 상호 참여할 수 있는 지역의 가족이어야 한다. 교회는 그곳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사역에 참여해야 한다. 이미 그곳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일을 하고 계신 하나님이 어디서 무엇을 행하고 계신지를 묻고, 하나님의 대답을 따라 그 사역을 향한 하나님의 초대에 기꺼이 참여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귀 기울여야 하고 귀 기울임에 답하시는 하나님의 대답에 다시 대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신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이해해야 하겠는가? 일차적으로 하나님께서 만물 각각에게 주신 존재 의미와 목적이, 다시 말하면 남자에게, 여자에게, 가정에게, 자녀에게, 서로의 관계에게, 학교에게, 문화적 표현들에게, 사회구조적 질서에게 주신 모든 존재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이 목적하신 뜻에 합당하도록 회복되고 충만해지도록 일하시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 일들은 교회 안팎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이다. 따라서 교회가 진실로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면, 그 형태와 규모의 차이는 있겠으나, 모든 교회는 예배, 선교, 가정, 교육, 복지, 문화, 사회 이슈에 이르기까지 삶의 전 영역에서 명백한 복음적 대안을 향한 하나님의 이끄심에 대답하도록 자신을 내어드릴 준비를 해야 한다. 교회는 하나님의 사역을 위한 충만, 곧 완성을 향해 드려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여기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글은 정갑신 목사의 '대답하는 공동체'(아르카, 2018)의 일부 내용을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교회
교회세우기
교회개척
지역교회
예수향남교회
복음적대안
광야
공동체
교회이름
분립개척
줄리어스 김의 믿음 안의 ‘형들’
by Julius Kim
2021-11-18
오늘 이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은 나를 그들의 어께 위해 세워 준 형들 덕분이다. 지나온 53년의 내 인생에서 내가 했던 말과 행동은 나를 가르치고 사랑해 준 지혜롭고 경건한 여러 형들에게서 거의 전부 비롯되었다. 그러니 지금 나누려는 PCA(미국장로교) 교단의 미래에 대한 나의 짧은 생각들은 나에게 영향을 끼치고 그들의 어깨를 내어준 형들에게서 빌려 온 것임을 알아주길 바란다. 여기서 ‘형’이라는 단어는 사회 계층이나 나이 차이 이상의 것을 표현한다. 특히 유교적 세계관에서는 형과 동생 사이에 일어나는 깊은 애정, 신뢰, 헌신, 희생, 가르침 모두를 의미한다. 러셀 무어(Russell Moore)는 존 스토트(John Stott)를 기리는 최근 글에서 스토트가 사역을 하면서 겪은 문화적 도전에 어떻게 접근했는지를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스토트는 교리와 선교 모두에서 진실성(integrity)을 강조했다. 이런 이유에서 스토트는 성경이 ‘둘 중 하나’라 한 것을 ‘둘 다’라고 하는 것을 거부했다. 여호와와 바알, 하나님과 맘몬, 예수와 가이사 둘 다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또 성경이 ‘둘 다’라고 한 것을 ‘둘 중 하나’라고 하는 것도 거부했다. 은혜와 진리, 해석과 적용, 전도와 정의,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 책임과 자비, 확신과 존중, 지성과 감성, 교단에 뿌리를 두는 자세와 글로벌하게 연결되는 자세, 여기서 우리는 ‘둘 다’여야 한다. 다양한 이슈와 아이디어가 우리를 사방팔방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바로 지금, 이러한 접근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바람직한 균형을 잡아 준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다시피 이것은 상당한 지혜를, 여러 형님들의 지혜와 균형을 요구한다. 사실은, 내가 주장하는 지혜는 우리 모두의 지혜다. 우리는 서로의 지혜가 필요하다. 여기서 미리 언급할 것은 우리가 PCA의 미래를 구상할 때, 브라이언 채플(Bryan Chapell)이 정확하게 말했듯이, 우리는 다음과 같은 우리 교단의 근본적인 정체성과 사명에 충실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 무오한(inerrant) 성경은 신앙과 삶의 유일하고 정확한(infallible) 규범이며,•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는 참되며, • 지상 명령은 우리 교회의 소명이다.이것에 더하여,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다가가서 가르쳐야 하는 것은 막중한 책임이요 특권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지역사회에서 전도와 제자훈련은 필수적이다. 이것이 바로 나의 앞을 걸어간, 나에게 어깨를 내어 준 이들에게 내가 빚진 이유다. 우리 앞에 놓인 과제는 막중하고 두렵지만, 우리에게 가르쳐 줄 것이 많은 디도서 2장의 우리 ‘형’들의 은사 덕분에, 우리의 미래는 밝다. 나는 우리에게 많은 희망이 있다고 믿는다. 이제 PCA의 미래에 대한 내 생각에 영향과 도움을 준 두 형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 형, 돈 카슨 돈 카슨은 내가 박사과정에 있을 때 지도교수들 중 한 분이었을 뿐 아니라, 지역 교회의 목자들이 양들을 잘 먹이고 보호하려면 얼마나 성경적, 역사적, 세계적이어야 하는지 가르쳐 주신 분이다. 카슨 박사는 신약성경의 세심한 학문적 업적과 가르침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들은 전도와 세계 교회에 대한 그의 열정도 알고 있다. 특히 주석과 성경 신학 분야에서 학자로서 쌓은 성과와 더불어, 그는 국내외를 순회하며 특정 단체를 확장하는 일에서 그치지 않고 복음 중심의 ‘운동’을 육성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들였다. 편향적 이슈를 조장하는 편협한 조직이 아닌, 복음 중심의 글로벌 운동을 육성하는 아이디어는 탐구할 가치가 있다. TGC의 글로벌 비전에 대해 카슨 박사는 이렇게 말했다.우리 TGC는 해외 그룹들이 미국의 통제를 받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것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다. 일종의 새로운 전 세계 선교라는 식으로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지 않고, 효과적이고 서로를 격려하는 친교를 전 세계에 이루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그가 한 말을 눈여겨보자. 여기서도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그는 일종의 미국 교구가 세계 교회에 권위를 행사한다는 식의 생각이 아니라, 목회자와 지도자로서 우리의 소명에는 같은 생각을 가진 전 세계 교회들과 목회자들이 함께하는 동역이 포함된다고 주장했다. 미국 기독교가 아니라 세계 기독교를 촉진하도록 부름 받았다는 것을 우리가 겸손하게 인정할 때 많은 혜택과 축복이 온다는 것을 그는 알았던 것 같다는 생각이다. 통계에 익숙한 우리 같은 사람들이 볼 때, 지난 100년은 “교회”의 구성 요소에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시기였다. 세계 기독교의 지도가 바뀌었다. 예를 들어, 1900년이 시작되든 시점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90퍼센트가 미국과 유럽에 거주했고 10퍼센트만 비서구권(Global South와 Global East)에 살았다. 그러나 100년이 지난 2000년에는 세계 기독교 인구의 단 30퍼센트만이 미국과 유럽에 살았고, 거의 70퍼센트는 비서구권에 거주하게 되었다. 나이지리아의 성공회 인구가 영국과 미국의 성공회 인구를 합한 것보다 더 많다. 공산 국가 중국의 기독교 인구가 유럽 전체 기독교 인구보다 많다. 바로 이런 변화 때문에 크리스토퍼 라이트(Christopher Wright) 같은 선교학자들은 현실(real) 기독교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우리의 기본 전제를 버려야 하며, 우리 안에 있는 잠재적 맹목성을 재고하고 서구 기독교가 문화적 우상숭배에 감염되어 있음을 인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TGC 설립자인 돈 카슨과 팀 켈러(Tim Keller)는, 개혁주의 유산 안에 있는 역사적, 고백적 기독교의 중심을 회복한다는 그들의 목표에 더하여, 복음 중심적이고 복음 주도적인 사역 운동을 통해 공동선을 추구하는 대항문화적 교회들에 속해 있는 같은 생각을 가진 목회자들의 연합을 이루고자 했다. 그리고 이 사역에는 반종교의 위험과 종교의 위험으로부터 양 떼를 보호하는 것도 포함된다. 목자로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항상 “삼가고” 또 “온 양 떼를” 잘 보살피라는 사명을 받았다. 성령은 우리를 양 떼 가운데에 감독으로 세우셔서 “사나운 이리들”을 막게 하셨다(행 20:28-29). 우리는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기도하신 하나됨을 추구하면서,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유 1:3)는 부름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됨을 위해서 순결을 희생할 수는 없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다양한 위험 수준을 볼 수 있는 관점을 유지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요즘 이런 말을 많이 듣고 있다. “( )가 기독교 교회에 큰 위협이다.” 우리는 이 빈 칸을 인종차별, 성차별, 여성우월주의, 근본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전통주의, 실용주의, 개인주의, 또 모든 것을 망라하는 놀라운 단어 ‘깨어있음’(wokeness, 또는 ‘사회정의각성운동’)로 채울 수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이런 이념들의 위험성을 좌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이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에 대한 실제적이고 현재적인 위협이다. 깨어 있는 목자로서 우리는 양 떼를 삼키려고 위협하는 이리를 경계해야 한다. 그러나 또한 더 넓은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이것들 하나하나의 위치를 조심스럽게 살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이러한 광범위한 현상이 전 세계적으로 어떻게 나타나며 어떻게 옛 철학들에 연결되어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가 직면한 문제가 우리만의 문제가 아님을 알게 될 것이다. 전 세계의 그리고 지난 세대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우리만 독특하게 겪는 것일 수도 있는 위협들에 어떻게 하면 가장 잘 대처할 수 있는지 가르쳐 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위협들은 그저 새 부대에 들어 있는 묵은 포도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트랜스젠더 혁명 뒤에 있는 더 큰 위협을 알면 도움이 될 것이다. 칼 투르먼(Carl Trueman)이 잘 설명했듯이, 트랜스젠더 혁명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에 대한 이 세상의 신념들을 뒷받침하고 있는 자기표출적 개인주의(expressive individualism)의 자연스러운 부산물이다. 따라서 시야를 넓히면 그 증상만 치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양 떼의 영적 건강을 실제로 위협하는 질병을 진단할 수 있다. 신학적 중증도 분류 더 크고 넓게 생각하면 목자로서 중요한 기능 가운데 하나인 신학적 중증도 분류(triage)를 실시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환자의 의학적 응급 상황, 우리의 경우에는 영적 응급 상황에 대한 우선순위를 매기는 법을 지혜롭게 분별하는 것이다. 병원의 응급실이나 전장의 최전선에서 의료진은 먼저 어떤 환자를 가장 먼저 돌봐야 할지 결정해야 한다. 다른 위협보다 더 위험한 위협이 있으므로, 긴급성 판단은 현명한 절차를 반드시 따라야 한다. 나는 이것을 2005년에 앨버트 몰러(Al Mohler)에게서 배웠는데, 그는 생사에 영향을 미치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는 지혜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기 위해서 이 의학적 비유를 썼다. 그는 신학적 긴급성을 세 단계로 분류했다.• 1 단계는 기독교 신앙에 핵심적이고 필수적인 제1 순위 교리를 포함하는데, 삼위일체, 그리스도의 완전한 신성 및 인성, 이신칭의, 성경의 권위 같은 것들이다. • 2 단계, 또는 제2 순위 교리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중대한 경계선들을 설정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몰러는 세례의 의미와 방식, 목회 사역에서 여성의 역할 등이 여기에 포함된다고 했다. 흥미롭게도 이러한 것들이 교회의 신념과 실천의 틀을 형성할 신자들 사이에 가장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킨다. • 3단계, 또는 제3 순위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동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지만 여전히 친교를 유지하는 것들이다. 종말론 논쟁 같은 것들이다. 여기서 나는 몰러의 분류에 대한 장단점을 논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비유에는 허점이 있고 미묘한 뉘앙스를 더 많이 고려해야 한다는 점을 나는 누구보다도 먼저 인정한다. 이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는 적어도 다음 세 가지를 말하려 하는 것이다. 1. 목자로서 우리의 임무 중 하나는 목회 우선순위라고도 알려진 이 신학적 중증도 분류라는 어려운 일을 하는 것이다. 2. 이러한 중증도 분류는 더 폭넓은 관점에서 세계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을 바라볼 때 현 사회 문제들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 고려하는 것을, 그리고 3. 이 지혜를 우리만의 특별한 양 떼를 먹이고 지키는 데 적용하는 것을 포함한다. 크게 생각하라, 작게 생각하라 다시 말하면, 우리는 크게 생각하고 작게 생각해야 한다. 크게 생각한다는 것은 위를 보아야 하고 또 아래를 보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즉, 하나님께서 교회에 하시는 일을 보려면 우리는 글로벌한 시각으로 그리고 역사적 시각으로 보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관점으로 북미 교회가 당면한 몇 가지 문제를 보도록 도울 것이라 믿는다. 하지만 또한 우리는 작게 생각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성경과 우리의 동역 목자들의 집단적 지혜의 도움을 받아 우리의 특별한 양 떼에게 진짜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지 분별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가 우리나 우리 양 떼에게 무엇이 문제인지 아닌지 훈련하고 왜곡하게 해서는 안 된다. TGC 블로그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끊임없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소셜 미디어 공간에서 벗어나라. 온라인에서 가장 크게 지르는 소리의 볼륨을 줄여라. 그리고 여러분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을 보살피는 최선의 길이 어떤 것인지 주의하여 분별하라.” 현명한 조언이다. 둘째 형, 팀 켈러 돈 카슨의 지혜와 더불어, 나는 TGC의 또 다른 설립자인 팀 켈러에게서 배울 수 있는 크나큰 축복을 누렸다. 켈러 목사가 어떻게 설교와 출판 사역을 통해 셀 수 없이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만, 지금은 이 세대에 도움이 되는 그의 통찰에 대해 몇 가지를 나누려고 한다. 2017년 켈러 목사는 총회에서 우리 교단에서 발견되는 세 주요 분파, 소위 교리주의, 경건주의, 문화주의가 가하는 다양한 충격들을 상기시키는 연설을 했다. 미국의 개혁주의 교회들의 역사에 대한 조지 마즈든(George Marsden)의 이해에 영향을 받은 켈러 목사는 2010년 쓴 글에서 이런 갈등들을 지적했다. 교리주의자들은 우리 가운데 “정체를 숨긴 자유주의자”가 있고 일부 교회의 사회적 참여 강조가 필시 교리적 타협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항상 걱정한다. 사회 정의(문화주의) 분파에 속한 사람들은 우리 교단에 문화적 반동으로 기우는 사람들이 있으며, 사회 참여에 대한 공포증으로 인해, 과거에 보수파들이 (가령 노예제도를 두고) 그랬던 것처럼, 불의에 눈을 감고 있다고 걱정한다. 경건주의 분파는 전도의 열정이 부족한 것을 큰 죄로 여기고 다른 분파들의 영적인 생명력을 의심한다. 이렇게 문제가 발생하고, 억눌린 에너지(공포와 좌절)가 터져 나온다. 각 분파가 저마다 중요한 성경적 통찰을 제시하기는 하지만, 그들에게는 각자 고유한 약점이 있다. 각 분파에 대한 비판은 대체로 정확하다. 켈러 목사는 이렇게 말한다.교리주의 분파는 그 순수함을 버리고 교만과 독선을 낳을 수 있다.…경건주의 분파는 매우 실용적이고 결과에 신경을 쓰며, 징계나 신학적 논쟁 과정에 들어가는 것을 거부한다…문화주의 분파는 현대 학문에 지나치게 매료되고 있다. [더불어 그에 상응하여 정통 신학의 침식을 초래하고 있다.] 이 문제를 거론하는 이유는? 이 분석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갈등의 대부분은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이러한 충격들에 기인한다. 솔직한 대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지금 상황을 더 복잡하고, 솔직히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 장로교 시스템에서 솔직한 대화가 우선순위에서 밀린다는 것이다. 오히려 소셜 미디어에서 우리 대화를 우리가 정치화하고 있는 듯하다. 이것은 지혜롭지 못하며, 이렇게 하면 서로에 대한 신뢰를 쌓지 못하게 된다. 우리는 서로에게서 더욱 더 멀어지고 있다.켈러 목사는 한 교회가 이 분파들 중 하나를 제거하려고 할 때, 또는 한 분파가 너무 낙심하여 교회를 떠나려 할 때, 그 교회는 한 두 세대 안에 젊은 지도자들이 그 떨어져 나간 가지에 관심을 갖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나는 켈러가 바르게 지적했다고 생각하다. 켈러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한다. 리차드 러브레이스(Richard Lovelace)는 교리주의자들은 믿음을 전파하는 일보다 (이단적인 “감염”에 맞서서) 믿음을 수호하는 일을 더 잘하는, 백혈구와 같은 존재라고 말하곤 했다. 경건주의자들과 개혁주의자들은 그들의 실용주의 때문에 믿음을 전파하는 일을 더 잘하지만, 종종 교리에 대한 무관심이나 쇠퇴에 문을 열어 준다는 점에서 적혈구와 같다. 적혈구보다 백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백혈병이고, 백혈구보다 적혈구가 지나치게 많은 상태가 에이즈이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우리는 서로에게 편할 수는 없지만 함께 있으면 훨씬 더 견고하고 활력이 넘친다.다른 말로 하면, 우리 모두 더 나은 형들이 되어야 한다. 각 분파는 그 약점을 보완하기 위해 다른 분파를 필요로 한다. 각 분파에는 저마다 사각지대가 있다. 다시, 켈러 목사의 말이 도움이 된다. 우리는 서로가 필요하다. 분열을 일으키고 있는 주제가 인종차별이건 섹슈얼리티이건 상관없이, 우리의 신앙고백을 포기해서도 안 되며, 서로를 포기해서도 안 된다.인종차별과 섹슈얼리티 문제에 대한 작금의 대화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지극히 중요한 문제이며 따라서 우리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켈러 목사가 정당하게 제안한 바와 같이, 온라인에서 논쟁하거나 교회 재판부에 회부하기 전에 필요한 시간을 내어 차이점을 논의하고 서로에게 배워야 한다.지난 16개월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나는 인정한다. 이 시대에 목사로 산다는 것은 지극히 어렵다. 그러나 PCA를 이토록 위대하게 만드는 것, 곧 믿음과 삶을 위한 유일한 규범으로써 무오한 성경에 충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웨스트민스터신앙고백의 대요리문답과 소요리문답에 요약된 위대한 개혁주의 교리에 진실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 지상명령을 완수하겠다는 우리를 하나로 묶는 약속에 계속 초점을 맞춘다면, PCA의 미래는 밝다.그러므로 우리가 성실성을 가지고서 우리를 PCA 되게 하는 일에 전념하듯이, 우리는 또한 요한복음 17장에서 예수님이 당신의 대제사장적 기도에서 간구하시는 하나됨을 위해 분투해야 하다. 하지만 이 성실성과 이 하나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해야만 이루어질 수 있다.우리는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은혜로 말미암아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 주신 위대한 구원을 겸손하게 인정해야 한다. 이 위대한 복음은 우리가 서로를 위해 희생할 때 우리가 하는 일에 지속해서 생기를 불어넣어 줄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 성실성과 하나됨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서로 앞에서 겸손할 때만 가능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서로를 위해 목숨을 버리고 서로의 어깨 위에 서야 한다.그리스도의 어깨 위에 서라 이런 희생적인 사랑은 어떤 모습일까? 나의 또 다른 형인 브라이언 채플은 그의 책 ‘서로를 위해’(Each for the Other)에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두 형제가 강변 모래 둑에서 놀기로 했다. 우리 마을은 이 강에 의지해서 상업을 하기 때문에 준설선이 정기적으로 강바닥에서 모래를 긁어내어 강 옆에 쌓아 큰 언덕을 만든다. 아이들에게는 이 모래 산더미에서 노는 것보다 더 재밌는 것도 없지만, 그만큼 위험한 것도 없다. 준설선이 강바닥에서 훑어낸 젖은 모래는 강변에 버려진다. 이 모래 더미는 겉만 단단하게 건조되는데 종종 모래에서 빠져나간 물이 그 속에 동굴을 만든다. 아이들이 이런 보이지 않는 빈 공간이 있는 모래 언덕을 오르면 그 표면이 쉽게 동굴 안으로 무너져 내린다. 언덕 위의 모래가 빠르게 빈 공간을 채우고, 아이는 패인 구멍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두 형제가 그 큰 모래 언덕으로 질주했을 때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났다. 형제가 저녁시간이 되어도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과 이웃들은 수색에 나섰다. 그들은 동생을 찾았다. 머리와 어깨만 모래더미 위에 남아 있었다. 몸에 가해진 모래의 압력 때문에 정신을 잃은 채 있었다. 수색하던 사람들이 미친 듯이 모래를 파내기 시작했다. 허리까지 모래를 치우자 동생의 의식이 돌아왔다. “형은 어디 있니?” 그를 구한 사람들이 큰 소리로 물었다. 동생은 대답했다. “제가 지금 형 어깨 위에 서 있어요.” 형이 자기 목숨을 희생하여 동생을 안전하게 떠받쳤던 것이다. 우리를 형제요 자매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신(히 2:11) 분도 그렇게 하셨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목숨을 희생하여 방종과 자기중심의 죄에서 우리를 풀어 주셨고, 그로 인해 우리는 예수님의 의로우신 어깨 위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 영원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이제 예수님은 교회의 평화와 순결과 일치를 추구하라 우리를 부르신다. 서로의 어깨 위에 서는 법을 배우라 부르신다. 나는 PCA의 미래를 이렇게 그린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굳게 잡고 서로를 붙잡아 주며 그리스도의 은혜로 힘을 얻어 모두가 갈망하는 성실과 겸손과 일치를 이루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의 큰 형이신 예수님과 그의 희생을 생각할 때, 나의 기도와 소망은 우리가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우리의 형이신 예수님을 따라 서로를 어깨에 세우는 것이다. 우리의 목숨을 내놓아야 할지라도. 원제: Julius Kim’s Older Brothers (‘Hyungs’ 형) in the Fait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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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 Swindell • Michael Swindell
2021-11-17
지난 10년 동안 함께한 사역 기간 중 우리 부부는 다섯 군데 도시에서의 삶을 경험하였고 다섯 곳의 다른 교회의 일원이 되기도 하였다. 각 교회에서 우리는 소그룹 모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으며 종종 소그룹을 인도하기도 하였다.사역지를 옮길 때마다, 나(Ann)는 활력이 있고 생명력을 주는 소그룹 모임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우정과 동료애를 갈망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하였다. 나는 의미 있는 우정을 갈구하였기에 종종 공동체를 필요로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다가가기보다는 소그룹의 친구들과 함께 모이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었다.나의 이런 나쁜 성향은 우정이라는 것을 얻기까지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에 이것을 몰래 숨기고 싶은 욕구 때문이었다.나(Michael)는 우리 교회의 소그룹을 인도하는 목회자이며, 우리 팀은 내향적이면서도 외향적인 분위기를 끌어내기 위해 사역한다(행 2:42~47 참조). 이런 유형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것은 단시간에 만들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우리 소그룹 안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는 교인으로 사는 동시에 그 소그룹 외부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 선교적 시선을 가지는 것을 목표로 할 때 작은 변화들이 모여 큰 결실을 거둘 수 있다.여기 사랑이 넘치는 소그룹과 선교적 사역의 문화를 키울 수 있는 네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1. 함께 사역하는 방법을 택하라우리 교회는 건강한 소그룹 모임을 위한 네 가지 핵심 실천 활동을 장려한다: 성경 공부, 기도, 서로를 돌보는 것, 그리고 어떤 형태로든 외부를 향한 봉사와 선교 활동이 그것이다. 각 그룹의 필요성과 시기에 따라 이 네 가지 요소는 각각 끊임없이 반복되지만, 예배 지향의 목표는 항상 최우선이다.이것은 어떻게 시행하는 것일까? 어떤 그룹에는, 그것은 성도 중에서 재정적이거나 영적인 지원이 필요한 누군가를 돕는 것일 것이다. 다른 그룹에는 그들의 삶 가운데 있는 불신자들과 복음을 나눌 기회를 위해 함께 기도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현재 소그룹은 지역 주립대학에 대한 봉사활동을 추진하기로 했고, 우리는 이번 시즌에 도움이 될 최선의 방법을 위해 캠퍼스 사역의 리더들과 협의 중이다.각 그룹이 어떻게 외부 활동을 택하든 간에, 우리의 소그룹 사역 훈련은 자신의 그룹이 그들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다. 우리가 서로를 격려하고 도전하듯, 우리는 더 넓은 의미의 교회와 공동체에 축복이 되도록 부르심을 받았다.2. 새로운 구성원들에게 (최대한) 당신의 그룹을 개방하라우리가 몇 년 전 세인트루이스에 살 적에 우리는 한 교회를 석 달간 방문했다. 그 기간, 우리는 여러 사람에게 그들의 소그룹 모임에 참여할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그러나 매번 안된다는 대답을 들어야 했다. 그들의 그룹은 이미 꽉 찼거나, 적절한 시기가 아니라거나, 아이들을 돌봐줄 여유 공간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Ann)는 마음에 상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충격을 받았던 것을 기억한다.우리는 그 교회에 등록하지 않았는데, 큰 이유는 우리가 있을 곳이 아니라고 느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교회 자체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클은 신학교에 있었고, 어느 교회의 네다섯 개 소그룹이 우리를 막았다는 이유로 교회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었다.그러나 나는 기독교의 영향력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그런 거절에서 다시 살아나지 못할 것을 알기에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공동체가 필요했지만 그로부터 배제된 경험을 당한 사람들은 그 교회뿐만 아니라 아마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도 멀어지게 될 것이다.소그룹의 참여 인원에 지속적인 변화가 있다면 그룹 내에서 신뢰와 친밀감을 쌓는다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성장과 동질감을 위해서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가 다른 사람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방하지 않는다면 이런 이기주의적 성향은 소그룹을 파벌화 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소그룹 구성원들이 (주먹을 움켜쥐지 않고) 두 손을 벌리고 소그룹을 붙들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깊은 우정과 권유할 기회에 감사해야 하며, 동시에 다른 구성원들도 자신만큼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그룹 멤버들이 소그룹을 필요로 하는 새로운 사람들을 위해 눈과 귀를 열어 두라는 권면을 받을 때 이는 교회의 사명을 최전선에서 지키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제자 삼는 일을 수행할 제자들을 모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이다.우리의 소그룹에서 우리는 자신을 다른 사람들로부터 차단하려 하지 않고 나그네를 하나님의 가족으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엡 2:19).3. 선교사 가족을 선정하여 기도하고 후원하라소규모 모임의 시선을 외부로 향하도록 유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역을 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의 마음을 맞추는 것이다. 우리 교회는 여러 선교사를 지원하고, 선교사 가족을 ‘입양’함으로써, 소그룹이 육체적으로는 함께 하지 못하지만, 더 큰 그리스도의 몸의 일부인 다른 사람들에게 집중할 수 있다.기도와 재정적 지원 그리고 격려의 선물이나 편지를 보내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그룹이나 개 교회뿐만 아니라 전 세계 어느 곳에서나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우리의 지역 가까이에서나 세계 어느 곳에서든 복음 전파의 사명을 위해 사역하는 사람들이나 그들이 섬기는 사람들의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하여 좀 더 주의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다.4. 소그룹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는 예배에 참석하게 하라소그룹의 모든 구성원이 반드시 교회의 등록 교인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배 참석이 교회의 멤버가 되기 위한 조건으로 요구된다면 그 분위기는 구성원 모두가 회중의 일원으로 예배에 참석하는 경험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우리 교회에서 교인들은 유년 주일학교에서 봉사를 하든 주차 봉사 위원이든 안내위원이든 부서 활동에 참여할 것을 권면한다. 어떤 이들은 청년부에서 멘토로 봉사하고, 어떤 이들은 교회의 조경 작업에 기쁘게 참여한다.이러한 부서에서의 활동들은 주로 사람들이 가진 관심사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다른 성도들과의 다양한 교류의 기회가 생길 수 있다. 서로 다른 소그룹의 구성원들이 아마 같은 부서가 아니라면 접해보지 못할 기회를 얻어 성도들 간 다른 사람들을 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단지 개별적인 소그룹뿐만이 아니라 교회와 전반적으로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준다.소그룹은 친밀감과 우정의 특별한 기회를 제공하면서 교회 생활을 풍부하고 의미 있게 하는 측면을 제공한다. 조금만 노력하면 언제든 다른 사람이 그리스도의 몸으로 들어오는 것을 환영하는 외향적인 신앙인으로서의 문화도 키울 수 있다.원제: Keep Your Small Group Facing Outward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장명근
교회
교회생활
소그룹
공동체
동역
예배
봉사
열린마음
친밀감
등록교인
학대를 신고하고 증언하는 일, 그것은 성경적이다
by Jennifer Greenberg
2021-11-13
믿었던 목사들이 배신을 하고 거짓말을 할 때, 나는 익사하는 느낌이었다. 공황 상태와 슬픔이 섞인 그런 느낌말이다.20대 초반, 내가 다니던 교회 지도자들이 텍사스 주법을 준수했고, 나의 아버지와 다른 아동 학대자들까지도 다 신고했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출판사와 공동으로 내가 겪은 일에 관한 책을 편집하면서 우리는 과거에 들은 모든 것에 관해서 팩트 첵크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목사, 가족, 그리고 친구들을 인터뷰했고, 그래서 나의 아버지가 성적 학대를 저질렀고 폭력적이었으며, 따라서 결코 아이들을 가까이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고도 그들 중 그 누구도 아버지를 한 번도 신고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실 일부 교회 지도자들은 어머니가 성적 학대 때문에 이혼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버지를 신고하는 대신 모든 증거를 다 깔아뭉갰고, 그 결과 내 동생들로 하여금 말이 아버지지, 그 끔찍한 ‘포식자’와 함께 살도록 내버려 둔 결과를 초래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당시 담임 목사에게 있는 그대로 나의 배신감을 토로했다. 그들이 신고하지 않았기에, 학대가 계속되었고 더 많은 어린이가 피해를 입었다. 피해자 중 일부는 자살 충동을 느꼈고, 또한 일부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잃었다. 그럼에도 여전히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을 보고, 나는 다른 교회 지도자들을 향한 경고와 더불어 공개적으로 성적 학대에 관한 진실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침내 듣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마침내 미국장로교(PCA) 노회는 조사에 착수했다. 약 15명의 목회자가 아버지에 대한 신고를 게을리하여 텍사스 주법을 실제로 위반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가 저지른 범죄와 악행을 설명하는, 양탄자 깔개 아래 숨어있던 수십 년 된 이메일이 밖으로 드러났다. 기도에 대한 뒤늦은 응답이라고 해야 할까? 무려 삼십 년 넘게 우리 가족을 공포에 떨게 한 그 남자를 마침내 한 목사가 경찰에 신고했다.그리고 나는 정통장로교회(OPC: The Orthodox Presbyterian Church)로부터 편지를 하나 받았다. 제니퍼에게, 2020년 4월, 귀하에 관한 모임을 열었고 우리는 다른 사람에 대한 근거 없는 공개적인 비난을 중단하라고 당신에게 두 번 이상 경고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퍼 그린버그, 당신은 제9계명을 반복적으로 범한 죄에 대한 충분한 증거를 바탕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습니다. …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그가 주신 권위로 우리는 당신이 교회의 성례전으로부터 무기한 자격 정지되었음을 선언합니다. … 제니퍼, 당신은 지금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을 수 있는 큰 위험에 처해 있습니다.아무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보호하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가정에서 논쟁의 여지가 되어서는 말이 안 된다 나에 대한 유죄 판결은 다른 장로들에 의해 부정행위로 간주되어 취소되었지만, 오히려 당회는 내게 더 많은 혐의를 제기했다. 그러나 경찰 보고서, 법원 기록 및 열 명의 다른 피해자 증언을 포함하여 내 주장의 모든 세부 사항을 확인하는 증거 목록을 작성한 후에야 나에 대한 모든 혐의가 취하되었다.나는 다른 OPC 교회로 옮겼고, 그곳에서 다정한 상담과 보살핌을 받았다. 그러나 내가 다녔던 교회의 담임 목사는 우리 노회 전체에 나를 거짓말쟁이이자 가짜 성 학대 생존자라고 비난하는 이메일을 퍼뜨렸다.성경에는 악에 대한 정의로운 보고로 가득 차 있는데도, 내 경험은 그렇게 독특한 게 아니다. 성범죄를 당한 많은 생존자가 교회에서 진리를 말할 때, 오히려 반대와 질책에 직면한다. 말씀 속에서 몇 가지 예를 연구함으로써, 우리가 그들의 용기 있는 고백을 단지 가십이나 중상이라고 간주하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무엇보다 그런 고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책임감 있게 처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아비가일: ‘내 남편은 사악한 바보이다’사무엘상 25장에는 다윗이 아비가일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아비가일은 나발이라는 “음란하고 비열한” 남자와 결혼했다(3절, NIV). 나발이 다윗을 조롱한 후, 다윗은 나발과 그 집안의 모든 남자를 죽이려고 계획했다(22절).이 장에는 세 가지 사건이 등장한다. 첫째, 다윗의 부하들은 나발이 다윗에 대해 말한 “모든 말을 전했다”(12절, NIV). 다음으로 나발의 신하들은 그 사건을 아비가일에게 보고했다(14절). 마지막으로, 아비가일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다.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5절).아비가일이 남편에 대해 진실을 말한 것이 잘못된 일일까? 그녀가 한 일이 험담, 중상모략 또는 불순종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오히려 정반대로, 성경(하나님)은 그녀를 “총명하다”(3절)고 칭찬한다. 다윗도 그녀의 “지혜”(33절)를 칭찬하고 축복했으며, 결국 그녀와 결혼했다.바울: ‘알렉산더를 조심하라’디모데후서 4장 14-15절을 보자.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고하고 있다.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알렉산더가 바울에게 어떤 해를 입혔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그는 거짓 가르침을 퍼뜨림으로써 복음을 “강하게 반대”했을 것이다. 어쩌면 심지어 바울을 반기독교 또는 반유대주의자로 당국에 신고했을 수도 있다. 아무튼, 바울은 알렉산더를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경험과 현명한 분별력을 바탕으로 그는 디모데를 보호하려고 노력했다.요한: ‘내가 그를 불러내리라’요한삼서 1장 9-10절에서 사도는 이렇게 경고한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그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도다.”요한은 디오드레베가 특히 “악의적이고 말도 안 되는 소문을 퍼뜨리고”라며 신자들에 대한 교회 징계를 무기로 했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말한다. 마치 경고 편지를 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지, 요한은 직접 방문해서는, “그가 하고 있는 일에 주의를 환기시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그는 기다리지 않았다. 가능한 한 빨리 다른 사람들에게 긴급하게 경고했다.의로운 보고의 여섯 가지 표시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모두 다 학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강하게 말했다. 결코 학대를 비밀로 하거나 닫힌 문 뒤에서 속삭이지 않았다. 그들은 직접 목격하고 겪었던 학대에 대해 공개적으로 증언했다.그들의 증언 속에는 다음 여섯 가지의 핵심 요소가 들어있다. 1. 신실함그들은 진실이 창피하거나 괴로울 때에도 정직했다. 그것이 교회 브랜드의 손상이나, 학대자의 명성 악화에 관해서 걱정하지 않았다.2. 공적 책임그들의 보고는 비공개가 아니었다. 영적이든 언어적이든 육체적이든 간에 하나님은 학대를 우리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할 죄로 여기신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5장 20절과 일치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 나머지 사람들로 두려워하게 하라.” 다른 사람들은 스스로가 죄에 빠지는 것을 피할 뿐 아니라,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도록 바른 경고를 받게 된다. 3. 위급성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다칠 때까지 기다리지 않았다. 오히려 위험한 사람의 잘못을 입증하기 위해 개인적인 경험까지 사용했다. 사도 요한은 일종의 재판이나 교회 징계를 염두에 둔 것 같지만, 재판이 끝날 때까지는 고사하고, 자신이 목격한 것을 증언하기 위해 그 자리에 도착할 때까지도 기다리지 않았다. 그는 서신서를 통해서 미리 경고했다. 4. 보호아비가일이 나발의 무모함에서 가정을 보호한 것처럼, 바울은 알렉산더로부터 디모데와 교회를 보호했고, 요한은 디오드레베로부터 가이오와 교회를 보호했다. 마찬가지로 학대자 또는 거짓 교사를 만났을 때, 우리는 다른 교인들, 특히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참조, 마 18:10).5. 정의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복수심이나 교활함 또는 술수에 빠지지 않았다. 그들은 정당하게 정의를 구했다. 나발이 갑자기 죽자 다윗은 기뻐하며 말했다. “여호와께서 나발의 악행을 그의 머리에 돌리셨도다”(삼상 25:39). 같은 정신으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딤후 4:14)라고 말했다. 요한은 디오드레베의 죄를 직접 대면하겠다고 약속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것은 교회 징계를 의미할 수 있으며, 범죄나 신체적 위험이 있는 경우 당국에 신고하는 것일 수 있다.6. 사랑아비가일, 바울, 요한은 사랑으로 말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 하나님의 백성에 대한 사랑이 그것이다. 요한복음 13장 35절에서 예수님은 말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그에 반해 요한은 학대를 계속하는 사람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 1:11).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죄를 보고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를 저지르는 바로 그 사람이다(겔 18:20). 우리가 진실을 보고함으로 신자들 사이의 화평과 연합을 증진시킨다. 학대자들은 입으로야 얼마든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들의 행동은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따라서 결코 예수의 이름으로 학대자를 보호할 수 없다. 오히려 열매라고는 찾을 수 없는 그들의 어두움의 행실을 거부하고, 그들이 저지르는 악행을 빛 가운데에 훤히 드러나게 해야 한다(엡 5:11).원제: Reporting Abuse Shouldn’t Be Controversial. It’s Biblical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교회
교회사역
학대
성범죄
배신감
정통장로교회
유죄판결
아비가일
공적책임
정의
교회 갈등, 과연 해결이 가능할까?
by Jon Bloom
2021-11-10
이십 대의 기독교 여성으로 이루어진 어느 작은 그룹의 예는 지금 내가 냉소주의와 관련해서 느끼는 많은 유혹을 물리치는 데 도움이 되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겠다.지난 몇 년 동안 나는 미국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발생한 어마어마한 양의 정치적이고, 이념적이며, 문화적인 신랄한 비판, 리더십의 실패, 교회의 분열, 민족적 긴장, 그리고 관계의 붕괴를 보면서 크게 낙담했다. 그게 다 그냥 미디어 알고리즘과 무책임한 기독교인의 클릭 유도로 생긴 거라고, 그렇기에 다 과장된 거라고 말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런 분열의 현장을 바로 옆에서 목격한 사람이다. 오늘날 눈에 보이는 모든 곳에서 기독교적 분열의 증거를 발견할 수 있을 정도이다. 내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내가 사랑하는 세 교회는 모두 지난 몇 년 동안 하나같이 파괴적인 내부 갈등을 겪었다. 신학적으로는 아무런 이견이 없을 뿐 더러 여러 해 동안 함께 예배해 온 그리스도인들이 더 이상 서로에 대해 인내하지 않는다. 수년에 걸쳐 만들어진 관계가 순식간에 깨진다.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는 결코 예전처럼 관계를 회복할 수 없게 만드는, 불신의 흉터 자국을 남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엄청 많은 일이 벌어지는 건 분명하다. 아주 복잡한 역사적, 사회적, 문화적, 정치적 문제 꺼리에다 리더십과 영적 전쟁과 관련한 각종 이슈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분열이라는 전염병에 영향을 미치는 건 분명하다. 우리는 결코 이런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은 실제 발생하는 현실이며, 많은 사람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친다.그러나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문제에 대한 분석과 토론을 하는 중에 아이러니하게도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거나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저히 값으로 매길 수 없는 기독교의 하나됨(harmony)을 키우거나 또는 반대로 파괴적인 기독교의 불협화음을 일으키는 문제와 관련해서 가장 큰 인과 요인은, 신약 성경이 다른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하는, 바로 사랑이다. 극단적일 정도로 단순한, 주님의 해결책사랑이라는, 내 말을 웃어넘기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복잡한 문제로 격렬한 논쟁이 있을 때 항상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는 정도는 나도 알고 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다 해결됩니다!” 그리고 그런 외침이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런 종류의 진술은 너무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로 들린다. 왜냐하면 우리는 서로 사랑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복잡한 문제에 직면했을 때, 문제를 서로가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보고 있을 때, 간단한 해결책이 없을 때, 그래서 깊어진 갈등과 긴장 가운데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서로를 참고 견디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느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의미이고, 그게 어떤 모습인지를 바로 아는 것이다. 그렇기에 신약의 사랑은 결코 환원주의처럼 단순하지 않다. 물론 근본적이라는 면에서는 단순하다. 하지만 여기에는 큰 차이가 있다.내 몸 같은 이웃비틀즈의 노래 제목인 “All you need is love”는 순진하고 단순한 이상주의이다. 누구나 다 사랑이 최고의 미덕이라는 것을 직관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은 맞는 것 같다. 그러나 그 진술은 개념적으로 공허하고 또 일관성도 없다.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천할 때 어떤 모습인지, 비용이 얼마인지, 아무런 언급이 없다. 결과적으로, 복잡한 문제를 둘러싼 갈등 해소는 말할 것도 없고, 이 문장이 바꾸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비틀즈의 이 가사를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마 22:39)라는 예수님의 위대한 명령과 한번 비교해보라. 차이가 보이는가? 예수님의 명령은 근본적으로 단순하지만, 사실 전혀 단순하지 않다. 이 명령을 접한 모든 사람이 기본 원칙을 즉시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매우 단순하다. 사랑은 우리의 가장 핵심 가치여야 하며, 다른 사람과 관련하여 우리의 모든 동기를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전혀 단순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 명령은 우리가 갖는 모든 관계에 대한 포괄적인 방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기서 파생하는 적용은 끝이 없다.“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는 기능적으로 강력하다. 어떤 특정한 상황에서도 사랑의 모습과 그 대가에 대해 최소한 어느 정도까지는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관계와 상황 그리고 문제의 복잡성을 제거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진지하게 추구할 수만 있다면, 지금 미국 복음주의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을 아예 들불로 번지게 만드는 죄의 불꽃을 끄는 데에 효과적일 수 있다.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그리고 신약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례와 설명)이 가진 능력은 지난 이 천년 동안 셀 수 없이 많은 성도들에 의해 실현되었으며, 셀 수 없이 많은 방법으로 세상을 변화시켰다. 자, 내가 처음에 언급한 이십 대 여성의 작은 그룹 이야기로 돌아가자. 내게 그들은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실천하는 모습이다. 사랑을 거리로 들고나가기나는 이 젊은 여성들 대부분 알고 있다.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통해서 그들은 라틴 아메리카 국가의 주요 도시에서 수천 명의 거리 어린이가 겪고 있는 곤경에 대해 깊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몇 년 전, 약간의 경험을 쌓고 검소하게 생활하기에 충분할 정도의 재정적 지원만 받은 그들은 남미의 도시로 이사하여 거리에서 만나는 어린이와 청년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학대, 유기, 심각한 빈곤, 중독 또는 부모의 죽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부양해야 하는 아이들이었다. 움막과 다리 아래에서 그리고 건물 출입구에서 잠을 자는 그들은 음식을 찾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아이들이었다. 거리는 그렇게 취약한 아이들에게 잔인하고 무자비한 곳이다. 그들 중 많은 이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 부드러운 마음은 굳어지고 불신감으로 차게 된다. 위험과 절망은 타락을 더 악화시킨다. 그러나 이 여성들은 그런 아이들을 사랑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을 사랑하려고 노력했다(물론 그 사랑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내가 이 점을 강조하길 원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지금도 그들을 사랑하고 있다.그들은 아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의사에게 데려가고, 화학 물질 중독을 앓는 많은 이들을 치료 센터로 데리고 왔다. 또한 출산과 그 너머의 두려운 여정을 앞에 둔 임신한 어린 소녀들과 함께 길을 걸었다. 공원에서 아이들과 우노를 연주하고 케이크와 파티로 생일을 축하했다. 이런 경험은 아이들 중 상당수가 접한 적이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주님께서 기회를 주시는 경우에, 예수님을 나누고, 함께 기도하고, 성경을 공부하고, 좋은 교회를 연결시켜 주었다. 그 결과, 지금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왜냐하면 그들이 우리를 사랑하기에’끈질기고, 확고하며, 또한 신실하고, 희생적인 예수님의 사랑으로 완고하기 이를 데 없는 거리의 아이들을 사랑한 여성들은 이제 그들의 신뢰를 얻었고, 이제 이 수백 명의 거리 아이들이 이들에게 사랑을 되돌려주고 있다. 아이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이 여성들을 돌보고 있다. 그리고 물론 거리에서 이런 소문이 빠르게 퍼지면서 점점 더 많은 아이들이 이 여성들을 찾고 있으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소박한 사역 센터를 제공하셨다. 정부 관리들 또한 그들의 사역을 그토록 효과적으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들을 찾고 있다. 정부 센터에도 다양한 자원과 프로그램이 있는데, 왜 거리 아이들이 굳이 이 여성들에게 가는지 정부 관리들은 알고 싶어한다. 아이들의 대답은 이것이다. “이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하거든요.”이 여성들은 결코 인정받는 전문가가 아니며 오랜 경험이나 풍부한 자원 또는 박사 과정 프로그램을 이수하지도 않았다. 공식적인 신학 훈련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야말로 아이들을 더 희망적이고 생산적인 미래로 전환하는 데 매우 효과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왕국의 관점에서 볼 때, 그들은 내가 아는 그 누구보다도 변화된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많은 제자를 삼고 있다. 게다가 매우 소홀하게 취급받고 역사적으로도 접근하기 어려운 그룹에서 말이다. 왜냐고? 아이들에게 물어보라. 그들이 이유를 알려줄 것이다. “아줌마들은 우리를 사랑한다니까요.”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들에게는 소중한 영혼이다. 사랑의 희생을 살아내기 그렇다면 지금 이 여성들은 오늘날 미국에서 유행하는 기독교 분열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 답은 이것이다. 그들은 기독교적 사랑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한 예이다. 그러나 그들을 지금 우리가 겪는 상황과 비교하기에는 적절하지 않은 게 아닌가? 상황적으로는 그렇기도 하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여성들의 이야기에 대한 나의 보고서는 간결하기 때문에 실제보다 더 이상적으로 들릴 수도 있다. 물론 현실은 어렵다. 때로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열심히 살아야 하고, 말 그대로 피땀 흘리며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저분하다. 등을 돌리거나 사라지는 아이들이 왜 없겠는가? 아이들은 여전히 중독에 빠지고 강간당한다. 그리고 죽는 아이들도 생긴다. 게다가 이 여성들도 실수를 저지른다. 그래서 오해를 받고 때로는 욕을 먹으며 종종 신체적인 위험에 처하기도 한다. 시도 때도 없이 스스로가 부족하다고 느끼고 또 외로움과 혼란 그리고 슬픔과 향수병에 시달린다. 행여 지금 제대로 사역하는 게 아니라는 불확실성에 고통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 모두가 다 자기 자신이 죄인임을 잘 알고 있다. 이런 모든 상황에 관계없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을 진지하고 의도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힘들 뿐 아니라 여러 가지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다. 우리도 이 여성들과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산 제사”(롬 12:1)가 된다는 의미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런 종류의 사랑은 다른 어떤 것에서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변혁적(transformational)이다. 분열과 갈등이 차고 넘치는, 이 복잡한 상황에서 우리가 가장 먼저 검토해야 할 것은 과연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명령에 우리가 진지하게 순종하고 있는지 여부이다. 우리가 지금 경험하고 있는 원한과 분열 그리고 관계의 붕괴는 로마서 12-15장, 고린도전서 13장, 에베소서 4장 또는 요한일서 3장처럼 보이지 않는다. 더불어서 거리에서 만나는 부상당한 이웃에 대한 문맥상 동등함에도 우리가 지금 의미 있는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해야 한다.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사랑에 따르는 댓가는 결코 적지 않다. 사랑의 결핍은 관계의 파국을 만들고, 예수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까지 왜곡한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 13:35). 그리고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요 15:12)라고 말씀하셨을 때, 예수님은 우리의 생각보다 훨씬 더 높은 “이웃 사랑”의 기준을 세우셨다. 때때로 쓰레기가 날아가고 불화의 소리가 요란할 때, 어려운 상황에서조차 예수님처럼 단순하게 사랑을 실천하는 성도들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들을 통해 나 자신에 관한 새로운 관점뿐 아니라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기억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은 냉소주의에 대한 축복받은 해독제가 될 수 있다. 그 해독제가 지금 내게는 바로 이 놀라운 젊은 여성들의 모습이다. 그들이 고통받는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려고 애쓰는 것을 볼 때, 나는 그들로부터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 원제: Can Anything Mend Our Conflict?: How Cynicism Dies in a Divided Church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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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영성이란 무엇인가?
by David Strain
2021-11-07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우리가 이제 막 검토하기 시작한 것처럼, 그리스도인 삶의 구조를 형성하는 건축학적 원리 중 하나이다. 이 글에서 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우리의 영성에 미치는 몇 가지 의미를 강조하고자 한다. 확실히 영성이라는 말은 오늘날 사람들에게 매력적이다. 일반적으로 이 영성이라는 단어에서 떠오르는 것은 주관적인 영적 경험 내지 정신적 또는 정서적 웰빙이다. 그렇다보니 우리는 영성을 동양의 명상 및 마음챙김과 같은 수행과 쉽게 연결시킨다. 그러나 참된 기독교 영성은 그런 사고 방식과 공통점이 거의 없다. 무엇보다 가장 근본적인 차이점은 영성의 중심이 무엇인가, 즉 영성이 추구하는 대상 내지 초점(focal point)과 관련이 있다. 오늘날 문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영성 모델에서 초점은 언제나 자아이다. 우리는 체험하기 위해, 그러니까 영성이 약속하는 웰빙 감각을 위해 영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진정한 기독교 영성에서는 체험이 비록 현재적이고 생생하고 풍부할 뿐 아니라 실제적이기까지 하지만, 그건 결코 목표가 아니며 동시에 자아도 초점이 아니다. 기독교 영성의 초점은 성령에 의해 그리스도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이다. 그분을 알고 그분을 기뻐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가 된다. 그렇기에 기독교 영성에서도 자아에 대한 생각이 차지하는 부분이 있다고 해도, 그건 매우 작을 수밖에 없다. 영성에 대한 이런 기독교적 관점은 우리가 하나님을 진정으로 알게 될 때에만 우리 자신을 진정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한다. 일단 영성을 정의할 필요가 있겠다. 성경적 훈련을 통해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느끼는 깊은 교감이 점점 더 커지도록 추구하는 것, 나는 “영성”을 이렇게 정의하겠다. 그러니까 이런 나의 주장에 따르면, 그리스도와의 연합 교리야말로 하나님과의 모든 교제, 그리고 그 교제가 깊어질 수 있도록 돕는 모든 은혜의 훈련과 습관의 핵심이 된다는 것이다. 연합은 교제로 이끈다요한복음 14장 1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다른 보혜사, 그가 진리의 영이라고 부른 이를 주시도록 간구하겠다고 약속하셨다. “다른 보혜사”라는 구절은 같은 종류의 또 다른 돕는 이를 의미한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신 후 아버지께로 떠나셨지만, 그분은 당신과 같은 성품을 가진 다른 조력자를 보내겠다고 하신다. 이 조력자는 제자들과 함께 거하시고, 동시에 그들 안에서 거하실 성령이시다. 그러나 18-19절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의 연결이 생각보다 훨씬 더 심오하다는 사실을 보게 된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지금은 떠나지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시 오실 것이다. 이 구절은 부활이나 세상 끝날에 있을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언급이 아니다. 이것은 성령의 오심에 대한 것이다. 그리스도와 성령 사이에 존재하는 연합은 그 영이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임재를 느끼도록 만든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우리에게 오시고, 또 우리 안에 거하신다. 예수님께서 “내가 살아 있고 너희도 살아 있겠음이라.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19-20)라고 말씀하셨다. 그는 지금 성령으로 인한 권능의 결과를 말씀하고 계신다. 성령 안에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한다. 예수님은 20절에서 그 연합의 경이로움을 볼 수 있도록 도우셨다.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과 아버지는 하나이다. 복되신 삼위일체의 교통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는 연합과 친교가 있다. 삼위일체의 세 번째 위격이신 그 영은 아버지와 하나이신 그리스도와의 바로 그 연합과 친교를 우리에게 전달하고 또 중재하신다. 성령의 사역은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안에 계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경험하고, 또 누리도록 돕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 1장 3절에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목적을 서술한 바로 그 내용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요한이 전한 복음을 믿게 될 때 사도적 교회(Apostolic church)와 교제함으로 누리는 충만한 영광은 무엇인가? 단지 성도 간의 사귐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버지 그리고 아들과 사귐을 가진다는 것이다. 그 범위와 영광은 실로 놀랍다. 복음을 믿어 성령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실 때,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 즉 성부, 성자, 성령과의 교통함 속으로 휩쓸려 들어간다. 에베소서 2장 18절을 살펴보자.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 안에 우리를 심으시며,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지금 체험적인 기독교, 느낄 수 있는 기독교를 위해 호소하고 있다. 나는 지금 느낄 수 있는 그리스도를 위해 간청하고 있다. 그리스도와의 더 깊은 교통을 통해 우리의 영혼이 더 풍성해지도록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성령께서 항상 하시는 일이다. 기독교인은 결코 합리주의자가 아니다. 기독교인은 초자연주의자이다. 우리는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그리스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와 진정한 의사 소통과 친교, 그리고 교제를 불러 일으키시는 성령을 믿는다. 이런 사실이 우리를 불편하게 만든다면, 게다가 우리의 신학이 단지 교리와 실천으로만 만족하고 하나님과의 영적 친밀감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면, 그건 우리가 아직 회심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연합, 교제, 그리고 은혜라는 일반 도구그럼 어떻게 해야 삼위일체 하나님과의 친교라는, 깊은 경험과 이해의 단계로 성장할 수 있을까? 그건 예상치 못한 감기처럼 갑자기 닥치는 걸까? 초능력자만이 알 수 있는 으스스하고 무섭기도 한 주문, 일종의 두 번째 축복이라고 불리는 그런 걸까? 아니면 또 다른 스펙트럼의 다른 끝에서 하나님과의 깊어지는 교제, 그러니까 일종의 어떤 기술을 적용해서 얻어내는 결과일까? 아니, 과연 영적 경험이라는 게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일가? 몇 개의 양초와 적절한 미학적 주문으로 올바른 분위기만 만들어내면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는 걸까?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54는 이렇게 묻는다.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방편은 무엇인가?” 대교리문답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설명하고 나서 이제 우리의 질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얻은 혜택을 우리가 과연 어떻게 누리는가 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제 우리는 “그분 안에” 있는데 어떻게 그분과 교통하는가? 교리 문답의 대답을 들어보자. “그리스도께서 자기 중보의 혜택을 그 몸된 교회에 전달하시는 외적 또는 일반적인 방편은 그의 모든 규례인데, 특별히 말씀과 성례 및 기도이다. 이 모든 것은 택함을 입은 자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데 유효하다.”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제정하신 모든 의식, 모든 훈련과 관행은 외적이며 또한 일상적인 수단이다. 그런 다음 그로부터 파생된 세 가지 중심이 되는 기본 수단을 나열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성례, 그리고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당신의 유익을 전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더 나아가기 전에, 은혜의 수단은 크게 두 가지 범주로 나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누리는 은혜와 함께(corporate) 누리는 은혜이다. 엄밀히 말해서, 그것은 두 개의 분리된 훈련 세트가 아니라 동일한 세 가지 수단인 말씀, 성례, 그리고 기도를 다른 방식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과 기도는 공적으로(그리고 사적으로) 사용도록, 그리고 세례와 성찬식은 함께 사용하도록 정하셨는데, 부지런함과 믿음으로 그 명령을 잘 수행함으로 주님과의 더 깊은 친교를 통해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사실을 더 풍성하게 누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예수님에 대한 더 깊은 체험을 갈망한다면, 삶에서 그리스도의 임재를 더 많이 느끼기를 원한다면, 굳이 특별한 집회에 참석할 필요가 없다. 어떤 영적 카타르시스나 또는 흔히들 말하는 두 번째 축복을 받을 필요가 없다. 함께 드리는 예배에 참석하면 된다. 매주 풍성한 말씀의 꼴을 먹으면 된다. 또한 집에서 성경을 펴서 그 진리를 마셔야 한다. 성령의 역사를 위해 마음에서부터 하나님께 부르짖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성찬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형제 자매들과 함께 떡과 포도주를 나누는 그 시간을 소중히 여겨야 한다. 그러한 방법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고, 우리의 죄를 죽이고, 우리 마음을 위로하고, 우리가 참으로 그분 안에 있으며 그분이 우리 안에 계시다는 확신을 심화시키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 모두가 믿음과 기대를 가지고 주님께서 허락하신 은혜의 수단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갈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셔서 그리스도와 더 연합하여 그분의 크신 이름을 찬양하는 그 영광을, 우리 중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누릴 수 있기를 간구한다. 원제: What Is Real Spirituality?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영성추구
그리스도와의연합
세속적영성
삼위일체
보혜사
웨스트민스터대교리문답
성찬식
사도적교회
종교 개혁의 기반이 된 루터의 중요한 세 가지 발견
by Jim Davis
2021-11-02
10월 31일은 마틴 루터가 95개 논제를 공개한 지 504주년이 되는 날이다. 루터가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을 수 있도록 그가 발견한 것은 정확히 무엇이었을까? 그가 어떤 깨달음을 얻었기에 서방 세계를 향해 로마 가톨릭의 숨막히는 권위를 깨뜨리고, 성경을 보통 사람들도 읽을 수 있는 언어로 번역하여 유럽 전역에서 글을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을 높이고, 또 수천 개의 새로운 기독교 교파를 탄생시키는 과정을 일궈낼 수 있었을까?루터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살았다. 로마 가톨릭은 인간의 행위를 통해 복수심에 불타는 하나님을 달랠 수 있다고 가르쳤지만 결국 그 두려움을 더 증가시킬 뿐이었다. 그의 말을 빌리자면, “교황 제도 아래서는 죄책감이 우리를 떠날 때까지 수고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수고를 다하여도 그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루터 자신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자신이 전혀 하나님께 합당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여러 차례 우울증에 빠져들 때마다 “복음이 왜 좋은 소식인가?”라고 질문하기 시작했다. 그 질문은 그가 종교 개혁의 발판을 놓게 하는 발견으로 이어졌다.조나단 리네보(Jonathan Linebaugh)는 곧 출간될 그의 책 ‘십자가의 말씀’(The Word of the Cross)에서 루터의 대답을 세 부분으로 설명한다.1. 하나님의 약속루터가 후기 중세 로마 가톨릭 전통을 이해한 것처럼, 사제가 “당신을 사죄합니다”(te absolvo)라고 할 때 그 말은 이미 받은 용서의 상태를 확증하는 것뿐이다. 회개한 죄인은 용서받았고 사제의 선언은 그 현실을 확증한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그 사실이 너무 궁금했다. ‘그렇다면 실제로 내 죄를 사하는 것은 무엇인가?’루터는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고, 말씀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도래하게 하실 것도 알았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간 존재를 의롭다고 하시지 않을까? 우리의 행위로 의를 획득할 수 있는 게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의를 약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시겠다고 인간 존재에게 말씀해 주시지 않을까? 물론 그렇게 하신다.의가 우리의 행위와는 별개로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이 새로운 이해(또는 오히려 옛 이해의 재발견)는 루터가 그리스도인의 삶을 이해하는 방식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루터는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는 것은 믿음으로 하나님을 공경함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는 것이며, 믿음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 ‘당신의 말씀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고 말했다. 2. 율법과 복음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기능적으로 동일한 것이며, 다만 구속 역사에서 다른 부분을 담당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고 배웠다. 이스라엘은 율법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졌지만 교회는 복음에 순종함으로써 받아들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루터는 율법과 복음이 별개의 것임을 올바르게 이해하게 되었다.그는 율법의 기능을 새롭게 이해하고 이중적인 기능으로 설명했다. 그의 이해에 의하면, 첫째, 율법은 우리 죄의 결과를 보여 준다. 갈라디아서 주석에서 루터는 타락한 인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 ‘자기의’라는 괴물, 목이 뻣뻣한 짐승은 큰 도끼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큰 도끼입니다.” 율법의 두 번째 기능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루터는 “율법이 당신을 절망에 빠뜨릴 때, 법이 당신을 조금 더 나아가게 하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팔 안으로 곧장 들어가게 하십시오.”라고 말했다.그리고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위업을 성취하시고 우리가 받아야 할 저주를 짊어지신 것이다. 우리를 율법에서 해방시키는 것은 복음의 약속을 믿는 믿음이다. 그러면 이 자유의 약속은 우리에게 어떻게 적용되는가?3.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것은 루터의 획기적인 세 가지 발견 중 가장 잘 알려진 부분이다. 수년 동안 그는 바울이 로마인들에게 쓴 편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 1:16-17).루터는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것은 나쁜 일이라고 배웠다. 즉 하나님이 불의한 사람들을 벌하시는 방식이라고 말이다. 당시 교회가 사용하고 있던 불가타 라틴어 성경은 의롭게 됨이 하나님의 선언에 의해서 단번에 되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처럼 이해하게 했다. 이것은 결국 교회가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좋은 것으로 보지 못하게 막는 결과를 낳았다. 대신, 그것은 고행과 연옥과 같은 교리에 자리를 내주었다.그러나 원어인 헬라어에서 “의”(righteousness)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하게 된 루터는 그것이 바울이 말하는 것과 전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칭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의를 우리에게 즉시 전가시켜 주는 하나님의 선언이다. 복음의 약속을 믿는 순간 하나님은 우리를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루터는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리스도께서 장자의 명분으로 이 두 가지 특권[왕권과 사제직]을 얻으신 것과 같이, 그를 믿는 모든 사람에게도 그것을 나누어 주십니다”라고 했다. 루터는 이것을 “행복한 교환”이라고 불렀다.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의를 주신 대신 그 대가로 그는 하나님의 진노를 받았다.로마 가톨릭 교회는 사람들이 의로운 것과 불의한 두 가지 다른 상태 사이를 오가는 것으로 이해했다. 하지만 루터는 이 두 가지 상태가 서로 겹쳐진다고 보았고, 그 겹치는 공간에서 크리스천은 의인임과 동시에 죄인으로(simil iustus et peccator) 살아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결과: 좋은 소식루터는 이러한 발견을 스스로 이렇게 묘사했다.그때 나는 하나님의 공의는 은혜와 순전한 자비를 통해 믿음으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의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제서야 나는 다시 태어나 낙원의 열린 문을 통과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루터가 발견한 것은 복음이 참으로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이다. 그는 처음으로 자유를 경험했다. 충분히 알려지고 완전히 받아들여졌다는 느낌을 받을 때의 그런 자유를 말이다. 그것은 보장과 확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을 가져다주는 자유이다.원제: What Was Martin Luther’s Breakthrough?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정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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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전가
주일과 주일 사이: 은혜로 사는 삶
by Raymond Johnson
2021-10-31
예배가 시작되기 전 십 분의 여유를 가지고 데이비드는 그가 평소에 앉는 오른쪽 상단 발코니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는 최근 아내와 이혼한 친구, 댄을 올려다보았다. 댄의 이혼 과정은 쉽지 않았고, 장로들이 조용히 뒤에서 기도를 통해 그를 돕는 와중에서조차 댄의 아내가 저지르는 불륜 소식이 교인들 사이에서 퍼져나갔다. 댄을 보면서 데이비드는 짧게 기도했다. “아버지, 댄이 요즘 얼마나 힘든 하루를 보내는지 제가 상상할 순 없지만, 어제 아침에 주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자비롭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계시다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당신이 우리의 연약함을 느끼고 있음을 댄이 알게 해주십시오. 이 끔찍한 고통의 시간 동안에도 당신이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가까이 있다는 것을 댄이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예배로의 부름과 함께 예배가 시작되었다. 데이비드는 시편 95편 1절을 생각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 노래하며 우리의 구원의 반석을 향하여 즐거이 외치자.” 솔직히 그는 찬양할 마음도 또 구원의 반석에 있다는 느낌도 들지 않았다. 지난 주는 유달리 힘들었다. 경영진 앞에서 했던 프레젠테이션도 형편없었고, 지금 그에게 주어진 일이 맞지 않을 수 있다는 말까지 회사 내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담임목사가 “우리 구원의 반석”이라는 말씀을 읽을 때, 그는 그 말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에게는 반석이 필요했고, 어릴 때부터 들어온 구원의 말씀은 점점 더 귀중해졌다. 강단에서 목사님이 외쳤다. “구원은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며,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없는 일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대신하신 것입니다.” “하나님, 지금 난 아무것도 못 할 거 같아요.”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바로 그 때 예배를 시작하는 찬송, “주 사랑하는 자, 다 찬송할 때에”가 흘러나왔다. 찬송은 “하나님의 아름다운 도성 시온을 향한 행진”을 묘사하고 있었다. 이것은 데이비드가 어렸을 때부터 가장 좋아했던 찬송 중 하나였으며, “저 밝고도 묘한 시온성 향하여 가세, 내 주의 찬란한 성에 찬송하며 올라가세”라는 가사는 그가 지난주에 직면했었던 또는 아마도 이번 주에 또 직면하게 될 일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이, 그로 하여금 오로지 주 예수님만을 기억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님은 이 지상에서 걸었고 또한 완벽하게 살았으며, 나를 대신하여 죽고 또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승리의 부활을 했다. 서서히 마음이 성경 말씀에 집중되었고, 마침내 기도할 때 그는 마음을 하나님께 쏟아 놓기 시작했다.목사님과 함께 기도하기 시작할 때 구절 하나가 떠올랐다. “백성들이여, 항상 그를 신뢰하라. 그 앞에 마음을 쏟아놓으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이시다.” 데이비드는 기도로 하나님께 마음을 쏟아 놓기 시작했다. 자신을 비방했던 친구 마이클을 같이 욕했던 것을 기억했다. 하나님께 마이클을 용서해 달라고 간구했다. 데이비드는 또한 직장에서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위해 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천천히, 자신의 죄를 하나씩 언급할 때마다 그의 마음은 무거워졌지만 동시에 더 위로를 받았다. 기도할수록 죄는 끝도 없이 떠올랐다. 죄가 더 많이 생각날수록, 영혼에 대한 걱정도 같이 커져갔다. 하나님의 용서를 약속하는 목사님의 말을 듣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 나는 적어도 이생에서는 희망이 없어. 나는 죄를 멈출 수 없는 존재니까.” 설교는 로마서 5장 1-11절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해하기 힘든 구절이었지만,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시련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은혜 안에 서는 것이 무엇인지 목사님의 설명을 들으며 마음에 서서히 하나님에 대한 확신이 생겼다. “하나님께서 지금 내 안에 무엇인가를 세우신다”고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힘들고 직장에서 겪는 모든 것이 다 싫지만 주님께서는 결코 시련을 낭비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음을 알아. 그분은 분명 그 모든 것을 사용하여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더 거룩하게 만드실 거야. 오, 주여!”월요일월요일 아침 일찍 일어난 데이비드는 운동을 했다. 조깅을 하면서 성경 말씀을 들었다. 출근하고도 사무실 사람들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일에 집중하기가 어려울 게 뻔했다. 지난주에 일어난 일 때문에 회사 사람 모두가 다 그를 반대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것은 아침 성경 읽기 팟캐스트가 그에게 준 구절이었다. “아버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렵지만 오늘 제가 겪을 모든 일에 아버지께서 저를 도와주시기를 간구합니다.” 데이비드는 기도했다. 사무실에 들어갔을 때, 반대편 복도에서 걸어오는 상사를 보았다. 그의 마음은 무너졌고 두려움이 그를 덮쳤다. 그런데 갑자기 찬송이 떠올랐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그는 심호흡을 하고 상사를 향해서 걸어갔다. 상사는 앞으로 함께 일을 잘 만들어보자며 그에게 인사했다. 데이비드는 순간 생각했다. “이 직업은 내게 끔찍해. 내가 하는 건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어.” 갑자기 드는 이런 생각이 그를 슬픔으로 몰아넣었다. 삼 주 전 부목사님은 성령의 권능에 의지해서 우리가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진리를 전하는 것에 관한 설교를 했다. “아버지, 저는 지금 정말 두렵고 끔찍합니다. 인생이 무너질까 걱정이 됩니다. 그러면 저는 혼자가 될 것이고, 어찌할 바를 모를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데이비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하나님께서 그의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지난 주, 가장 친한 친구인 제임스가 과거의 고통이 매일 그에게 영향을 미칠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상기시켰었다. 미처 나쁜 생각이 마음을 장악해서 그를 절망의 길로 보내기 전에, 단지 더 많이 말하고, 더 많이 기도하고, 단순히 성경의 진리를 적용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를 바로 잡는데 도움이 되었다.수요일시간이 지날수록 하루하루가 조금씩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일상이 그로 하여금 영적으로 그리고 직장에서 정상 궤도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수요일 밤, 주중 성경공부가 끝난 후, 그는 교회에서 온 제임스와 함께 주간 만찬을 가졌다. 이 시간은 데이비드가 일주일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인데, 항상 주님에 대해 이야기하고 서로를 격려했기 때문이다. 웃고 산책을 하고 또 먹는 사이에 데이비드를 짓누르던 외로움이 조금씩 그를 떠나갔다. 금요일금요일 묵상 시간 동안, 데이비드는 온라인을 통해 예정된 예배 순서를 보았고 성찬식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순간 그는 마이클을 중상모략한 것에 대해 하나님께 용서를 구했지만, 아직 그와 개인적으로 화해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이래 가지고는 결코 선한 양심으로 성찬식에 참여할 수 없음을 느꼈다. 데이비드는 마이클에게 만나자는 문자를 보냈다. 산상 수훈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읽은 후 그는 용기를 내어 주님의 명령을 지키겠다고 결심했다. 마이클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순간적으로는 굴욕적이었지만, 그가 받은 용서와 화해는 결국 그의 영혼에 생명을 공급했다. 토요일토요일, 그는 전날 마이클과 나눈 대화를 회상했고, 과거에 마이클의 세례를 목격했을 때 느꼈던 기쁨, 그리고 그의 신앙고백을 통해 자신과 마이클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정한 형제임을 깨닫고 행복했던 순간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그 기억은 데이비드로 하여금 그가 다른 모든 교인들과 함께 나누고 있는 평화의 띠 안에서 성령의 일치를 생각나게 했으며, 앞으로 다른 형제자매를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영적인 선을 행하겠다는 결심을 하도록 이끌었다. 다시 주일주일이 돌아왔을 때 데이비드는 항상 앉는 오른쪽 상단 발코니에 있었다. 예배가 시작되었고 따뜻한 친숙함이 그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는 기초가 무엇인지를 다시금 상기시켜 주었다. 데이비드는 약 육 개월 동안 예배에 빠지지 않았다. 그의 삶은 이 교회에서 일하는 사람들뿐 아니라 복음의 사업과도 연결되어 있었다. 평일뿐 아니라 매주일, 목사님은 그에게 “평범한 은혜로 사는 삶”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이 말씀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순전히 예측 가능한 90분은 지루함의 정반대였다. 성경 말씀과 성도의 찬양, 그리고 목사님의 설교는 그의 마음 그리고 모든 성도의 마음을 변화시켰다. “난 정말 말씀과 교회가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가 없어.” 데이비드는 생각했다. 원제: Between Sundays: Life in the Means of Grace출처: www.9marks.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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