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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수의 절실함, 그리고 기쁨
by 김돈영
2021-12-08
“띠링, 띠링, 띠링∼ 부릉”시동 거는 소리가 시원하다 못해 묵직하고 든든하기까지 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편하고 긴장된 마음으로 운전을 했는데 말이다. 요즘 많은 사람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있다. 바로 요소수다. 경유 차에 넣어서 배기가스를 분해하는 역할을 한다. 보통은 요소수의 존재 자체도 몰랐으나 소위 ‘요소수 대란’을 통하여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다. 품귀 현상으로 돈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요소수를 좀 전에 가득 넣었다. 차량 계기판에 요소수 부족을 알리는 불이 들어와서 긴장하고 있었는데, 가득 채우고 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평안함마저 든다. 아니 날아갈 것 같다. 정말 기쁘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씁쓸한 마음이 든다.가는 곳마다 품절이라 구하기 어려운 요소수를 얻은 기쁨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로 느끼지 못할 것이다. 시동 걸 때마다 알람이 들어오고, 계기판에 있는 경고등을 보면서 언제 멈출지 모르는 차를 운전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말해 절박함이 없이는 절대로 맛볼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것이다. 씁쓸한 첫 번째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귀한 요소수를 얻은 기쁨, 그러면 구원의 기쁨은?”이라는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구원의 기쁨’, 물론 누구도 구원의 기쁨이 없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질문을 듣는다면 멈칫할 것이다. 그 기쁨을 삶에서 누리고 있는가? 지금도 느끼고 있는가? 그만큼 구원의 기쁨은 현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며, 안개와 같이 뿌옇고 추상적인 것이 되어 버렸다는 방증이 아닐까 싶다.왜 구원의 기쁨이 없는가? 왜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가? 아니다. 이 질문이 더 와닿을 것 같다. 요소수에서는 왜 기쁨을 느끼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차가 멈출 수 있었는데 큰 문제가 해결되었다.’ 혹은 ‘구할 수 없는 귀한 것을 구했다.’ 앞에 던진 질문에도 답은 비슷할 것이다. 사실 이러한 대답은 결국 절박함, 절실함이라는 말로 귀결된다. 절실하게 원하는 것을 얻었기에 기쁜 것이다.그렇다면 구원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우리는 절실함이 없다는 말이 된다.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 ‘영원한 생명을 주신 구원의 은혜는 세상 무엇보다 귀한 것이다’라는 사실에 반응하지 않는 것이다. 그게 귀하고 중요한 것인지 모르기에 절실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말이다.현실적인 질문을 해 보자. “당신에게 구원은 없다”라는 말을 듣는다면 어떤 마음이 드는가? 물론 사람은 누구도 그런 말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그게 사실일 리도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선언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가정을 해 보자. 그 말이 사실이라고 말이다. 어떤 마음이 드는가?큰일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마치 계기판에 요소수 경고등이 들어온 것처럼 불안한 마음이 드는가? 아니면 당장 변하는 것이 없기에, 지금과 별다를 것 없으니 그냥 ‘그러려니’ 하는가?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피부로 느껴지지 않기 때문에, 나에게 와닿지 않기 때문에 절실함이 덜한 것이다. 결국은 구원이 현재 나의 삶에 별로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말일 것이다. 구원이 삶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 그것은 또한 성경을 믿지 않는 것이다.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창 2:17)라고 말씀하신 약속과 그것을 어긴 첫 사람의 죄를 믿지 않는 것이다. 죄로 인해 영원한 죽음에 놓인다는 사실을 믿지 않기에 긴장감이 없는 것이다. 경고등을 보는 듯한 떨림이 없는 것이다. 마음에 긴장과 떨림이 없기에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라는 말씀에 기쁨이 없는 것이다. 죄를 모르고, 죽을 처지에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데 구원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말이다.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여전히 같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사는 것이다. 죽으면 하나님 나라에 갈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예배와 찬양을 하고, 성경을 읽고 기도하지만, 그것이 삶에 투영되지 않는 것이다. 믿는 것이라 착각하며 사는 것이다. 야고보는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약 1:22)라고 말씀한다. ‘이만하면 잘 믿고 있어’라고 자신을 속이며 살기에 구원이 삶에 별로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이다.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으로 앓는 여자가 예수의 뒤로 와서 그 겉옷 가를 만지니…”(마 9:20).마태복음에는 혈루증을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장면이 나온다.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짐으로 그의 병이 나은 이야기다. 같은 내용을 다루는 마가복음에서는 이 여인의 상황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막 5:26) 12년이나 병을 앓고 있는 여인은 치료를 위해 많은 애를 썼다. 실력 좋다는 의사를 찾아다닌 것은 물론이고 병을 치료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을 것이다. 때문에 재산은 모두 소진되었다. 성경은 모두 허비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다. 병으로 인해 그는 고립된 삶을 살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있는 병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몸에 유출병이 있으면 그 유출병으로 말미암아 부정한 자라”(레 15:2), 레위기는 유출병 곧 혈루증 환자는 부정한 사람이라고 말씀한다. 그가 누웠던 자리는 물론이고 앉았던 자리나 옷, 그릇, 만진 물건 등 혈루증 환자가 접촉한 모든 것은 부정한 것이 되었다. 코로나19 양성 판정을 받은 사람이 지나간 모든 곳을 소독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런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섞여서 일반적인 생활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 있는 사실이다. 사람이 없는 외곽에 살며, 가족과도 떨어져 혼자서 지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 있는 여인이 예수님의 소문을 들었다. 소문을 들었다고 인파를 헤집고 예수님 앞에 가는 일은 ‘그냥 한번’ 해 볼 수 있을 만큼 만만한 일이 아니다. 사람들 앞에 서는 일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물며 사람들과 접촉하며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는 것은 더 큰 용기와 결단, 엄청난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인 것이다. 만일 출근 시간에 코로나19 확진자가 지하철을 이용하겠다고 인파를 뚫고 지나간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일이 일어날 것이다. 신약시대 사람들이나 현재 우리나 별로 다를 게 없다. 비슷한 일이 일어날 것이다. 예상되는 현실적인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결단해야 한다. 생각한 대로 일이 진행되어 병이 낫는다면 정말 좋은 결말, 해피엔딩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그야말로 대혼란이 일어난다. 요즘처럼 미디어가 발달한 시대라면 “오늘 예수님이 지나는 경로에 있었던 사람들은 혈루증 여인과 접촉이 의심되니 지금 즉시 몸을 씻고 저녁까지 격리하시기 바랍니다”라는 문자가 전송될지도 모른다. 그것으로만 끝날지 아니면 무언가 더 있을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예수님이 병을 고칠 수 있다는데 한번 가 볼까? 나으면 좋은데, 안 나아도 어쩔 수 없지 뭐!” 하는 생각으로 가볍게 움직일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이다. ‘반드시 낫는다’는 확신이 없으면 이런 여러 가지 문제를 제쳐 두고 움직일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께 올인’하지 않는다면 안 되는 일이다. 그렇지 않으면 답이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오직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다른 길이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그런데 우리의 삶은 그것을 증명하고 있는가?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혈루증 여인은 다른 모든 문제를 ‘나중에’라는 곳, 차순위로 보냈다. 눈에 보이는 우선순위를 향해 나아간 것이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높은 벽을 넘게 했고,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현실의 상황에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뚫을 수 있게 했다. 실패할 경우 돌아올 모든 결과를 뛰어넘어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한마디로 ‘절실함’으로 행동했다는 것이다. 절실함, 다르게 말하면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믿음이다. 그 믿음이 그를 이끈 것이고, 앞만 보고 가게 한 것이다. 기쁨을 가져다준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말이다.우리는 어떤가? 정말로 구원이 없으면 안 되는가? 그런 절실함이 있는가? 요소수가 떨어지면 차를 움직일 수 없다는 절실함, 예수님만이 오랜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절실함 말이다. 그 절실함으로 인해 눈에 보이는 장애물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그것을 찾았을 때 진정한 기쁨을 느끼며 평안을 누리는 그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우리에게 진짜 믿음이 있다면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한다. 우선과 차선의 구분이 명확해야 한다는 말이다. 급하게 생각되는 그 무엇도 절실함보다 앞설 수 없다는 분명한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이다. 절실한 것을 가장 먼저 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한 가지 더 씁쓸한 것은 많은 사람이 요소수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경유차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도 요소수가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평소에 신경도 쓰지 않았던 요소수를 알게 된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요소수로 인해 난리가 났기 때문이다. 다르게 말하면 요소수가 절실하게 필요한 사람들이 요소수를 찾기 위해 헤집고 다녔기 때문이다. 절실한 사람들의 행동으로 인해 관심도 없던 사람들마저도 궁금해 하고 관심을 쏟게 된 것이다.우리는 전도를 위해 많은 힘을 쓴다. 금전적인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과 인력 등 동원할 수 있는 많은 에너지를 쏟는다. 그런데 그렇게 많은 활동에 절실함은 얼마나 들어 있는가? 노방전도를 하거나 집을 방문하며 전도하는 일, 교회로 초청하는 일 등 다양한 방법으로 전도를 한다. 그 안에 얼마나 절실함이 있는가 말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많은 전도 활동을 해 왔지만, 교회 밖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복음은 소위 ‘그들만의 리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얼마나 중요한지 별로 관심이 없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의 어떤 활동 중 하나로 혹은 사람들을 귀찮게 하는 행동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요소수를 찾는 사람들의 행동은 다른 이들에게 보이기 위한 어떤 ‘행동’이 아니다. 그것이 없으면 정말로 차가 멈출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절실함이고 ‘진심’이다. 진심으로 했던 행동, 그 진심이 사람들에게 전해진 것이다. 자세히는 모르지만 뭔가 중요한 일이고 꼭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보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관심을 보이고 함께 안타까워한 것이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러한 절실함, 복음을 대하는 진심이 부족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내게 있는 것을 진심으로 귀하게 여기지 않기에, 전하는 것을 보는 사람도 그렇게 귀하게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닌지, 구원의 소식을 스스로 기뻐하지 않기에 그것을 전달받는 사람 역시 크게 기쁜 일로 여기지 않는 것은 아닌지, 복음이 없는 이들을 진심으로 안타까워하지 않기에 그들도 그 마음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질문해 봐야 할 문제다. 절실함, 진심, 믿음, 이 말들이 서로 다르게 들리지 않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모두 한 의미로 여기며 행동할 때 참다운 삶이 될 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스스로 속이는 사람이 아니라 온전한 믿음으로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 말이다. 우리는 해마다 성탄의 기쁨을 나눈다. 우리에게 죄와 죽음과 구원이라는 지식과 믿음이 있다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성탄의 의미가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많은 이가 즐거워하는 날, 왠지 들뜨고 설레는 날, 선물이 오가는 기분 좋은 날이 아니라 떨어져 가는 요소수로 인해 마음 졸이던 것이 해결된 기쁨,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의 시간이 될 것이다. 무엇을 주고도 구할 수 없는 것을 얻은 기쁨으로 가득할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위해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는 시간이 될 것이다. 우리가 그렇게 느낄 때 비로소 절실한 마음, 진심이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도 전해질 것이다. 성탄의 소식이 지금 나에게 가장 절실한 것임을 느끼는 시간, 진심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시간이 되어야겠다. 거창하게 누구를 위해서 나누는 시간이 아니라 그저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기뻐하는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기쁨이 흘러넘치기를 바란다.
절실함
구원
기쁨
전도
혈루증여인
성탄의기쁨
알아 두면 좋은 크리스마스 전통 9가지
by Joe Carter
2021-12-05
크리스마스는 세계에서 가장 널리 공유하는 경축일이자 다양하게 실천하는 관습이다. 크리스마스 전통에 대해 알아 두면 좋은 9가지를 정리했다. 1. 크리스마스트리상록수를 집 안에 들여 놓고 장식하는 전통은 1500년대 독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초의 크리스마스트리는 ‘아담과 하와의 축제’에서 공연된 연극에 등장하는 “낙원의 나무들”에서 이름을 따서 “낙원”이라고 불렸다. 에드윈(Edwin)과 제니퍼 우드럽 타이트(Jennifer Woodruff Tait)의 설명에 따르면, 이 나무에는 성찬을 상징하는 둥글고 얇은 과자들이 매달려 있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독일의 크리스마스트리를 장식하는 쿠키 장식으로 발전했다.2. 크리스마스 조명전설에 따르면 독일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크리스마스트리를 집에 가져온 최초의 사람이자(사실이 아니다), 조명들로 장식한 최초의 사람이기도 하다(이것도 사실이 아닐 것이다). 루터와 관련 있다는 이야기는 이렇다. 어느 한겨울 밤, 집으로 걸어가던 루터가 전나무와 그 주위에 빛나는 별의 아름다움에 압도되었다. 그 장엄한 광경을 가족들과 나누고 싶었던 루터는 나무를 집으로 가져와 별처럼 빛나는 긴 양초로 장식했다. 이로써 현대 크리스마스트리에 장식 조명이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이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는 역사적 증거는 없다.)3. 지팡이 사탕민간전승에 따르면 크리스마스 지팡이 사탕은 1670년 독일에서 시작되었다. 쾰른 대성당의 한 성가대 지휘자가 예배 중에 아이들을 정숙하게 하려고 사탕을 나누어 주었다. 그는 사탕 제조업자에게 아기 예수를 방문한 목자들을 상징하는 의미에서 사탕 막대기 끝을 목자들의 지팡이처럼 구부려 달라고 요청했다. 미국 인디애나의 사탕 제조업자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사역, 죽음의 여러 상징을 통합하여 지팡이 사탕을 만들었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다.4. 크리스마스카드상업용 크리스마스카드는 1843년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바빠서 편지 쓸 시간이 없었던 헨리 콜 경(Sir Henry Cole)은 예술가 친구에게 그림과 간단한 인사말이 있는 카드를 디자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예술가 존 캘코트 호슬리(John Callcott Horsley)는 카드 1,000장을 인쇄하여 런던의 펠릭스 서머리 트레져 하우스(Felix Summerly's Treasure House)에서 1실링에 판매하였다. 미국인들은 줄곧 영국에서 크리스마스카드를 수입해 오다가, 1875년에 “미국 크리스마스카드의 아버지” 루이스 프랑(Louis Prang)이라는 독일인 이민자가 미국에서 최초의 상업용 크리스마스카드를 제작했다.5. 크리스마스 양말 주머니“크리스마스 전날 밤이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유명한 시 “성 니콜라스의 방문”(A Visit from St. Nicholas, 1823)에는 크리스마스트리에 대한 언급은 없고 양말 주머니가 나온다. 이것은 1800년대 내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양말 주머니가 크리스마스를 상징하는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1883년 12월에 <뉴욕 타임스>에 실린 기사에서는 “수년간 양말 주머니가 크리스마스와 너무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양말 주머니가 없는 크리스마스는 부적절하고 불충분하게 경축되는 것처럼 보인다”고 말했다. 양말 주머니와는 대조적으로 “뿌리도 없고 생명도 없는 시체처럼 보이는 독일의 크리스마스트리는 결코 그날을 기념할 가치가 없다”라고 논평했다. 양말 주머니를 걸어 놓는 전통이 실제로 어떻게 생겨났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이와 관련한 민간 설화가 있다. 산타클로스가 어떤 가난한 가족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가족은 자존심이 강해서 남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홀아비가 된 지 얼마 안 되는 아버지는 세 딸의 결혼지참금을 마련 할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산타클로스는 굴뚝 밑으로 금화 세 닢을 던졌고, 벽난로에 말리려고 걸어 둔 세 딸의 양말 속으로 떨어졌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산타클로스가 금으로 된 공 세 개를 주었고, 그래서 오렌지나 귤을 넣어 주기도 한다는 것.)6. 에그노그에그노그(eggnog)는 우유, 크림, 설탕, 거품 낸 계란에 술(브랜디, 코냑, 럼주, 셰리주, 위스키)과 때로는 계피나 육두구 같은 향신료를 넣어 만든 음료이다. 음식 역사가들은 이것이 중세 초기 영국의 포셋(posset, 우유가 섞인 뜨거운 맥주 같은 음료)에서 유래했다고 믿는다. 미국 식민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던 우유와 계란 덕분에 에그노그는 인기 있는 크리스마스 음료가 되었다.7. 크리스마스 캐럴14세기부터 캐럴은 대중적인 종교 노래의 한 형태로 간주되었다. 종교개혁 이후에 크리스마스 캐럴이 대중화되기 시작했지만, 19세기에 크리스마스 노래 악보들이 출판되면서 일반 장르가 되었다. 예를 들어, 1833년 영국인 변호사 윌리엄 샌디스(William Sandys)는 ‘크리스마스 캐럴: 고대와 현대’를 출판했는데, 여기에 “하나님께서 안식과 기쁨을 주시네(God Rest Ye Merry, Gentlemen)”와 “저 들 밖에 한밤중에” “천사 찬송하기를” 같은 곡들이 실려 있었다. 또한 영국 빅토리아 시대에는 가정집을 방문하여 노래하는 전통(wassailing, 우리나라의 “새벽송”)이 크리스마스에 채택되어 “캐롤링”(caroling)과 동의어가 되었다.8. 대림절 달력중세 시대 대림절은 성탄절에 오신 그리스도의 초림과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었다. 오늘날 대림절은 크리스마스까지 4주간 이어지는데, 대림절 달력 대부분이 12월 1일에 시작하여 크리스마스 전까지 24일의 기간이다. 대림절 달력의 전통은 19세기 중반에 독일 개신교인들이 대문에 분필로 표시하거나 촛불을 켜 두고 크리스마스까지 날짜를 세던 관습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대림절 달력을 최초로 인쇄한 사람은 1900년대 초 독일인 게랄드 랑(Gerald Lang)이다. 랑이 어렸을 때 그의 어머니는 쿠키 24개를 상자 뚜껑에 매달아 두고서 대림절 기간 동안 하루에 하나씩 먹게 했다고 한다. 1908년에 랑은 이것을 자신의 대림절 달력 모델로 사용했다.9. 크리스마스 선물 라이언 리브스(Ryan Reeves)는 짧은 영상에서 크리스마스에 주고받는 선물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라이언 리브스_크리스마스 선물의 역사▶원제: 9 Things You Should Know About Christmas Traditio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김은혜
크리스마스전통
크리스마스트리
크리스마스카드
크리스마스선물
대림절
좋은 부모는 자기 치유에서 시작된다
by 최창국
2021-12-03
모든 부모는 자녀가 잘되기를 바라고 행복하기를 바란다. 자녀가 좋은 배우자를 만나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지 않을 부모는 없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자녀가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부모의 영향을 받아 선택한다. 자녀의 배우자 선택뿐 아니라 자녀의 건강도 부모의 삶과 깊이 연결되어 있다. 자녀의 건강과 행복과 불행도 부모의 삶과 비례한다. 많은 연구에 따르면, 폭력이나 학대가 있는 집안에서 자라난 아이는 사랑으로 가득한 가정에서 자라난 아이보다 안타깝게도 건강하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높다. 좋은 부모와 자녀 건강의 상관 관계 하버드 대학교 연구원들이 건강한 남자 126명을 선정하여 그들이 부모에 대해 어떤 감정을 갖고 있는지 묻는 설문조사를 했다. 그리고 35년 뒤에 그 남자들의 건강기록부를 검토했다. 결과는 놀라웠다.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지 않다고 느끼는 사람 중 91퍼센트가 관상동맥질환, 고혈압, 십이지장궤양, 알코올중독 같은 심각한 질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어머니와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밝힌 사람 중에서는 45퍼센트만이 이와 같은 진단을 받았다. 연구 참가자 가운데 아버지와 관계가 좋지 않다고 보고한 이들 중 82퍼센트가 질병을 앓고 있었다. 이에 비해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50퍼센트만이 질병을 잃고 있었다. 어머니와 아버지와의 관계가 모두 친밀하지도 따뜻하지도 않다고 평가한 남자들도 질병을 앓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반면 부모 모두와 친밀하고 따뜻한 관계를 유지한다고 응답한 남자는 47퍼센트만이 질병을 잃고 있었다. 어머니,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자란 자녀 대부분이 훗날 질병에 노출되었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제공해 준다. 고도로 건강한 사람은 행복한 부모 곁에서 자랐을 가능성이 높다. 자녀의 건강은 부모의 행복한 삶과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다. 부모가 자녀에 주어야 할 최고의 선물은 부부가 행복하게 사는 것이다. 이런 말이 있다. “아버지가 자녀를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그들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것이다.” 자녀가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하는 말과 행동으로부터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나온 말이기도 하다. 자녀는 대체로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상처를 더 많이 받는다. 자녀는 모든 면에서 부모를 닮는다. 부모는 자녀의 미래의 모습이고, 자녀는 부모의 과거와 현재의 모습이다. 또한 한 인간의 삶은 자녀뿐 아니라 반드시 주위에 있는 사람에게도 영향을 끼친다. 이것을 아는 사람은 자녀와 이웃을 가꾸기 이전에 먼저 자신을 바로 세우기를 힘쓴다. 자기를 바로잡는 것이야말로 자기를 고스란히 닮을 자녀를 바르게 가꾸는 길이다. 나아가 그것이 세상을 바로잡는 시작임을 알기 때문이다.모두가 좋은 부모 되기를 소망한다. 하지만 쉽지 않다. 상처가 많은 부모는 좋은 부모 되기가 더 쉽지 않다. 심지어 부모의 상처는 자녀에게 대물림된다. 좋은 부모의 시작은 자기 치유다. 좋은 부모의 시작은 자신의 어린 시절에 받은 상처의 치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자기 상처의 치유 없이는 좋은 부모가 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부모에게서 입은 상처를 보듬고 위로하는 것이야말로 자녀에게 부모로서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일이다. 마음에 상처가 가득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부모가 되려고 힘써도 자꾸만 자녀에게 상처를 주게 된다. 역으로, 마음이 건강한 부모는 좋은 부모가 되려고 많이 애쓰지 않아도 자녀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좋은 부모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부모 자신이 먼저 행복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부모가 어린 시절에 받은 ‘내면 아이’를 치료하는 것이다. 좋은 부모의 시작과 자기 치유 부모로서 자신의 내면 아이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부모가 비춰 준 왜곡된 거울을 깨뜨리는 작업부터 해야 한다(비벌리 엔젤, <좋은 부모의 시작은 자기 치유다>, 244-88). 예를 들면, 부모에게 방치당하거나 유기당한 일이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어린 시절에 방치나 유기를 당한 경험이 있는 부모는 공격 및 분노 지수가 다른 사람에 비해 높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부모는 먼저 분노 표출의 건전한 방법을 배워야 하며, 자신의 가치와 사랑스러움에 대해 일깨움을 받아야 한다. 부모가 과잉보호했거나 부모와 정서적으로 과도하게 밀착된 삶을 살았다면, 삶 속에서 거부당하는 것에 대한 만성적인 불안과 두려움이 다른 사람에 비해 더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부모는 자신의 부모로부터 정서적 근친상간을 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정서적 근친상간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자신이 부모로부터 정서적으로 분화되어야 할 시기에 분화되지 못한 희생자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부모가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부터 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자신의 성격과 가치관과 태도를 만들어 왔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과도하게 인정받으려고 하는 태도를 버려야 한다. 먼저 이런 부모는 자신이 스스로 자유롭게 선택하고 행동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기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 특히 자신의 경계선을 누가 침범했다는 생각이 들 때에는 자신의 생각이나 의견을 조용히, 명확하게 표현하는 것을 실천해야 한다. 지나치게 비판적인 부모나 수치심을 주는 부모, 완벽주의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 즉 부모는 수치심 지수가 다른 사람에 비해 강하게 나타날 수 있다. 이런 부모는 자신의 내면에 깊이 내재되어 있는 수치심을 다른 사람에게 투사하고 그들에게 분노함으로써 자신의 수치심을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다. 이런 부모가 알아야 할 것은 분노는 자신의 수치심을 알려 주는 중요한 신호라는 것이다. 특히 갑자기 터져 나오는 분노나 격한 분노에 휩싸일 때는 자신의 무의식에 깊이 도사리고 있는 수치심이 외부로 표출되는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수치심이 밖으로 표출되기도 하지만, 내면화되는 경우도 있다. 수치심이 내면화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감정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기 비난으로 가득하게 된다. 이런 부모라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 자신을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것을 의식적으로 삼가야 한다. 또한 비난과 판단하기를 좋아하고 완벽주의 성향이 있는 사람들을 피하고, 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해주고 좋아해 주는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는 것이 좋다. 특히 이런 부모는 사랑을 기꺼이 주고받는 일에 훈련이 필요하다. 누군가 자신에게 좋은 말을 해 주거나 좋은 일을 해 주면 부담을 갖거나 거부하지 말고 그대로 받고 기뻐하는 훈련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좋은 부모를 위한 영적 공동체가정은 하나님이 세우신 가장 중요한 공동체다. 건강한 교회가 건강한 가정을 만들기보다는 건강한 가정이 건강한 교회를 만든다. 이 원리를 간과할 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중요한 공동체인 가정을 돌보는 사역에 소홀하기 쉽다. 교회가 건강한 가정에 대해 힘쓸 때다. 가정이 건강해야 교회 공동체가 건강할 수 있다. 교회는 건강한 가정의 시작은 부모의 치유로부터 시작한다는 원리를 배울 필요가 있다. 교회는 “좋은 부모는 자기 치유에서 시작된다”라는 원리와 지혜를 복음으로 해석해 낼 수 있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인간의 상처를 유발하는 수평적 문제와 수직적 관계가 서로 어떻게 연관되는지 구체적으로 해석해 내고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댄 알렌더·트렘퍼 롱맨 3세, <감정, 영혼의 외침>, 50). 교회가 가정의 중요한 사역자인 부모에 대한 관심, 특히 부모의 상처에 대한 관심과 이해를 간과할 때 결국은 그들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가지고 하나님과 씨름할 수 있는 문을 닫아 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다. 교회는 좋은 부모는 자신의 상처를 깨닫고 자신의 상처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 성령께서 공급하시는 힘을 경험할 수 있도록 돕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는 건강한 부모와 건강하지 못한 부모의 차이는 상처가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상처에 대한 태도와 상처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는 것을 현명하게 지도해야 한다. 교회는 부모가 자신의 상처를 건강하게 치유할 때 더 좋은 부모가 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그 상처를 다룰 줄 아는 대안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시편 기자가 “저녁과 아침과 정오에 내가 근심하여 탄식하리니 여호와께서 내 소리를 들으시리로다”(시 55:17)라고 자신의 상처를 하나님 앞에 솔직하게 토설한 것처럼, 자신의 상처를 온전히 드러내며 간구하는 방법을 알려 주어야 하며, 자신의 상처를 바르게 인식하는 방법도 마련해 주어야 한다. 부모는 자신의 상처에 대한 인식 없이 하나님께 공급하시는 힘을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상처는 무의식의 그림자로 남아 있어서 인식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다. 교회는 부모가 자신의 상처를 바르게 보도록 도와야 한다. 우리가 몸이 아프다고 느낄 때 의사를 찾듯이, 마음의 상처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기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상처 입은 부모가 나아 올 때 그들에게 좋은 부모가 되는 지혜와 방법을 제공할 수 있는 영적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좋은부모
자녀양육
내면아이
가정폭력
건강한가정
가정사역
영혼의상처
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
by 정현구
2021-11-28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과 하나님 나라]①기도, 타인을 향한 자비의 실천ⓩ주기도문, 하나님 나라를 구하는 기도③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구약의 메시지④하나님의 다스림을 구하라: 신약의 메시지기도를 보면 그 종교가 보인다 기도 없는 종교는 없다. 어떤 종교든 그 나름의 기도를 통해 구하는 것을 추구한다. 따라서 기도를 들여다보면, 기도가 구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내용을 보면, 그 종교를 알 수 있다. 기도가 해탈을 구하면, 그 종교는 현실도피의 종교다. 세속의 복을 구하면 그 종교는 기복의 종교다. 기도를 보면 그 종교의 수준이 보이고, 기도의 내용을 보면 그 종교가 무엇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예수님이 나시고 사셨던 그 땅, 1세기의 팔레스타인은 역사의 모순이 응집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래서 그 땅의 유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 많이 기도했다. 그들은 시편으로 기도문을 만들어 기도했다. 가족이 죽으면 시신을 묻고 ‘카디쉬’ 기도문으로 메시아의 도래를 기원하는 종말론적 기도를 드렸다. 유대교 공동기도문 ‘아미다’에는 18가지 축복기도가 나열되어 있다. 유대인들의 이러한 기도들에는 유대교의 특징을 이루는 기도도 있었지만, 자연히 로마의 압제로부터의 해방, 곧 이스라엘 민족의 구원을 구하는 기도도 많았다. 유대인들이 다들 그렇게 저마다 열심히 기도하고 있던 어느 날, 한 사람이 유대 광야에 혜성처럼 나타나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막 1:4). 세례 요한이었다. 당시 근동의 많은 종교들은 그리스로마 신화와 관련된 종교들이었고, 도덕적으로 굉장히 문란했다. 이방인들 중에 그래서 소수이기는 했으나 비교적 건실한 유대교로 개종하려는 이들이 있었다. 그들은 유대교로 개종할 때 세례를 받기도 했다. 이런 면에서 세례는 이방인들을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세례 요한은 유대인을 향하여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이 광야의 외침이 고난의 시대를 살아가던 유대인들에게 큰 울림과 찔림이 되었던 것 같다. 많은 유대인이 요한을 따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미 그들에게는 여러 기도문들이 있었지만, 요한은 그들에게 또 하나의 기도문을 가르쳤던 것 같다. 요한의 일부 제자들이 요한이 헤롯에게 참수를 당한 후에 예수님이 제자가 되었고, 그들은 예수님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청한다.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치신다. 예수님의 가르치신 ‘기도의 방법’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어 기도의 방법을 깊이 가르치신다(눅 11:5-13). 한밤중에 어떤 사람에게 친구가 찾아왔다. 먼 길을 걸어 친구의 집에 밤늦게야 도착한 그는 도중에 제대로 먹지도 못했다. 주인은 그렇게 찾아온 친구를 그냥 재울 수 없어 음식을 준비하려고 한다. 그러나 집에 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주인은 찾아온 친구를 먹이려고 떡을 구하러 집을 나선다. 야심한 시각, 다들 잠들었을 시간임에도 그는 이웃집 문을 두드린다. “여보게, 문 좀 열어 주게. 지금 멀리서 친구가 찾아왔는데 떡 세 덩이만 빌려주게나.”“우리 가족이 지금 자려고 누웠는데 이렇게 나를 귀찮게 하는가.”아닌 밤중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이웃 사람은 성가시다. 그래도 밖에서 계속 문을 두드린다. 결국 이웃은 그에게 떡을 내어 준다. 예수님은 기도의 내용, 곧 주기도문을 가르쳐 주시고서는 바로 이어서 이 비유를 들어 기도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그런데 익히 아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흔하게 간과하고 오해하는 것이 있다. 오해는, 강청하고 떼를 쓰면 원하는 것을 얻는다는 해석이다. 우리는 기도하면, 그것도 ‘강청하면’ 구하는 바가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고 기대하기 쉽다. 하지만 기도는 그런 것이 아니다. 금방 응답되는 기도는 사실 드물다. 대부분의 기도는 응답받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니 하늘에서 요술을 부리듯 금방 기적적인 응답을 주실 것이라 우리는 생각한다. 하지만 기도의 메커니즘은 상당히 복잡하다. 관계의 그물망 안에서 누군가의 마음이 감동되고 그 사람이 자기의 의지를 따라는 행동하는데, 그것이 나에게 기도 응답이 되는 것이다. 내가 맺고 있는 이러한 수많은 관계의 그물과 아무런 상관없이, 하늘에서 선물이 떨어지듯이 기도가 응답되는 것이 아니다. 기도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우리가 간과하는 것은, 그래서 역시 오해하는 것은 이웃의 문을 두드린 친구가 누구를 위해 그렇게 했느냐는 것이다. 그는 자기나 자기 가족을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온종일 굶주린 친구, 곤란에 처한 이웃을 위해 그렇게 했던 것이다. 여행을 하다가 밤늦게 도착한 친구는 사실 어렵고 기도가 필요한, 세상을 살아가는 수많은 사람을 상징한다고 말할 수 있다. 생명의 양식이 필요한 보편 인류를 의미한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람들을 향한 이타적 마음, 그들을 먹이려는 애타는 마음이, 그리고 그 실천이 곧 기도라고 주님은 가르치신다. 비유로 기도하는 법을 가르쳐 주신 다음에 바로 이어, 주님은 역시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말씀을 하신다.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 11:9) 이 세 가지 명령형 동사의 나열은 점층적 강조법일 수도 있지만, 기도 방법의 다양성을 말해 주기도 한다. 구하는 것은 입으로 한다. 입으로 필요한 것을 간구하는 것이 기도다. 보통 우리는 교회당에서 눈을 감고 입으로 구하는 기도만을 기도의 범주에 넣는다. 그러나 주님은 이어서 ‘찾으라’ 하신다. 찾는다는 것은 현실 문제의 해답을 찾기 위해 발로 뛰어다는 것이다. 곧 실천, 행동, 노력 역시 동일하게 기도인 것이다. 찾는 것은 발로 하는 기도다. 눈을 감고 입으로 구하는 것만이 기도가 아니다. 입으로 하는 기도를 마치고 일어나서 현실에서 기도의 마음으로 걸어 다니며 해결을 구하는 것도 기도다. 그 다음은 두드리는 기도다. 두드린다는 것은 일차적으로 행동을 말하는 것이지만, 이 행동은 응답에 대한 기다림을 포함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기도 응답이 더디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이루어질 것을 믿고 기다리는 것을 의미한다. 대부분의 기도는 빨리 응답되지 않는다. 그런 응답되지 않는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기다림과 인대가 필요하다. 기다리는 것도 기도다. 기도는 새벽 기도회에 나가서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부르짖는 것부터, 하나님이 기도에 응답해 주실 것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노력을 하는 것,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상당한 기간 기다리는 것까지를 총체적으로 포함한다.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은 ‘응답받는 기도 1, 2, 3 단계’ 같은 그런 특별한 것이 아니다. 기도는 기본적으로 타자를 위한 사랑의 실천이요, 입으로만이 아닌 발로도 드리는 것이며, 열리지 않을 것만 같은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기도는 온 몸으로, 온 삶으로 드리는 것이다. 제자들은 예수님께 기도의 공식 같은 것을 기대했을 터이지만, 예수님은 그런 것은 전혀 말씀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오히려 이렇게 기도하는 바른 자세와 마음가짐을 가르쳐 주셨다. 이 글은 ‘하나님 나라 복음’(새물결플러스)에 실린 정현구 목사의 “주기도문에 나타난 하나님 나라 복음”의 일부를 출판사의 허락을 받아 다시 엮은 것입니다.
기도
주기도문
세례요한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
기도응답
이웃
마음속 우상을 진단하는 세 가지 테스트
by Matthew Miller
2021-11-25
연로한 사도 요한은 첫 번째 서신 끝에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고 썼다. 그보다 앞서 바울은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썼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골 3:5). 구약 시대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향해 경고한 것이 가마에서 만든 은과 금의 우상이었다면(사 37:19), 신약의 기자들이 경고하는 우상은 또 다른 종류, 곧 마음이 빚어낸 사상과 집착이라는 우상이다. 요즘에는 교회가 이 두 번째 우상을 “마음의 우상”이라고 부르고 있다. 과연 하나님이 우리 마음의 가장 깊은 애정과 갈망의 대상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 지금 우리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가? 그 “다른 것”이 그 자체로 악일 필요는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을 섬길 것인지 돈을 섬길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돈 그 자체가 나빠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바울도 말했듯, 모든 악의 뿌리가 “돈을 향한 사랑”이라는 점이다(마 6:21-24; 딤전 6:10). 따라서 타락한 마음은 돈, 성취, 로맨스, 애국, 가족, 숭고한 사업 등 겉으로 볼 때 마냥 선하기만 한 것들을 변질시켜 주님에 대한 순수한 헌신에서 멀어지게 하는 위험한 우상으로 만들고, 우리로 하여금 영적 간음을 저지르게 한다. 그 결과 따라오는 모든 위험과 불행은 말할 필요도 없다. 마음에 우상이 있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것을 미루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일단 우상이 있는지 여부를 먼저 알아야 하며, 거기에는 영적 진단이 필요하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마음의 우상이 있는지 여부를 드러내는 세 가지 증상을 소개하고자 한다. 행여 당신의 삶에 이 세 가지 증상이 있다면, 당장 긴급조치를 취해야 한다. 마음 속 우상 여부를 드러내는 첫 번째 증상은 별 다른 생각을 할 게 없을 때, 무언가에 관한 생각이 계속해서 떠오르는 경우이다. 그것은 마치 마음 한구석에 접착제처럼 붙어서 지속적인 관심을 요구한다. 그것은 무엇이라도 될 수 있다. 내가 응원하는 팀의 다음 경기 승리, 결혼, 긴급한 직장 문제, 자녀 문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당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지나친 관심 등등이다. 이러한 것이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다면, 약간의 주의를 기울이는 것으로 충분한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상당한 주의가 필요할 수도 있다. 직장에서 내일 있을 발표 준비, 자녀의 복지 문제, 국가적 문제나 대의에 투신하고 싶다 등등, 이런 모든 생각이 어떤 집착의 형태를 가지고 한 방향으로 집중적으로 흘러간다면, 게다가 한동안 그런 생각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마음 안에 서서히 어떤 우상이 자라고 있다는 신호이다. 두 번째 증상은 그것을 얻기 위해 현명하지 못한 조치까지 취하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다. 데이트해서는 안 되는 사람과 데이트를 하거나, 관계의 선을 넘어서는 안 되는 사람임을 알면서도 그 선을 넘는 경우이다. 현명하지 못한 곳에 투자를 하거나, 월급에서 노후 연금으로 빠지는 부분은 십일조에서 빼는 경우도 여기에 해당한다. 이력서에 거짓말을 하거나 분기 보고서를 “아주 조금” 과장하거나 왜곡할 수도 있다. 무척 소중한 우정임에도 불구하고 당신이 중요하게 여기는 대의에 별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 하나로 친구를 멀리할 수도 있다. 또한 자녀의 스포츠 행사를 비롯해 가족과의 이런저런 일정 때문에 주일 예배를 소홀히 할 수도 있다. 이런 마음의 우상에는 특징이 있다. 당신이 현명했다면 결코 하지 않았을 일을 하게 할 뿐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것을 합리화하고 변명하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이게 내가 그마나 결혼할 유일한 기회에요.” “이 투자만 성공하면 나중에 지금 못 한 헌금 몇 배는 할 수 있어요.” “세 시간만 내 맘대로 하게 놔둬요. 그럼 더 좋은 부모가 될께요.” “내 아이가 주일에 교회 간다고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으면 팀원들이 얼마나 실망하겠어요? 그게 전도에 도움이 되겠어요?” 아무리 좋은 것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위해 현명하지 못한 조치를 취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면, 그건 이미 마음에 우상이 자리 잡았다는 신호이다. 세 번째 증상은 그것을 얻지 못해서 느끼는 괴로움이 당연하다고, 그렇기에 그 괴로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져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누군가가 당신이 가장 원하는 그것이 없어도 얼마든지 만족과 평화를 누릴 수 있다고 제안하더라도, 당신은 그런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냥 짜증만 낼 것이다. 그런 제안을 하는 것 자체에 화를 낼 것이다. 그런 제안을 무시하며 당신 마음은 이렇게 말한다. “지금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안다면 저런 소리를 할 리가 없지.”결혼을 우상으로 만든 독신자는 복음이 주는 위로를 말하는 사람을 속으로 멸시한다. 돈을 우상으로 만든, 경제적 궁핍에 시달리는 부부는 예산 범위 안에서 생활하는 법을 배우는 교육 등을 무시하고 지금 자신들은 얼마든지 불평할 자격이 있다고 느낀다. 성과를 우상으로 만든 운동선수나 직장인의 경우에는 상실감이나 좌절의 고통을 느낄 때 그것을 배움의 기회로 삼으려 하지 않는다. 이들은 바울의 이 말을 무시한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빌 4:11). 대신 어떤 때는 스스로를 극한의 단계까지 다그치거나 또는 그냥 포기해 버린다.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누릴 수 있는 기쁨과 만족을 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갖지 못해 생기는 괴로움을 더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마음에 우상이 자리 잡았다는 강한 징후이다. 자, 당신은 과연 어떤가? 별 생각 안 하고 있을 때 계속해서 떠오르는 무언가가 있는가? 그것 때문에 바르지 못한 조치를 취하는 것까지 고려하는가? 아니면, 이미 그런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갖지 못해서 생긴 괴로움을 알면서도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가? 오히려 못 가졌으니까 괴로운 게 당연하다고 느끼는가? 그렇다면 친애하는 친구여, 나는 당신이 다음 세 가지를 하도록 강력히 권하고 싶다.첫째로, 그것에 관해서 주님께 정직하게 털어놓으라. 그 우상을 주님께 고백하면 주님께서 당신을 용서하시고 당신에게 팔을 벌리실 것이라 믿으라. 둘째로, 이 우상이 어떻게 당신을 속이고 있는지 주님께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지금 당신이 있는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자녀라면 당연히 누려야 할 기쁨과 만족을 그 우상이 어떻게 앗아가고 있는지 보여 달라고 기도하라. 셋째로, 당신이 원하는 그것, 그러니까 결혼, 성과, 가족의 안녕, 조국의 안녕, 사업의 발전 등등을 향한 욕망이 꿈쩍도 하지 않고 버티고 있을 때, 그러니까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을 향한 갈망보다 더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인지를 보여 달라고 간구하라. 하나님의 목표는 당신의 마음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당신을 먼저 성화시키고 그런 다음 진짜를 통해 만족을 누리도록 하는 것임을 깨달으라. 마음의 우상은 우리를 ‘천로역정’ 두 번째 책에 나오는 “쓰레기 갈퀴를 든 남자”처럼 만든다. 이 환상에서 한 남자는 “손에 오물 갈퀴를 들고 아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아래에 널린 무가치한 것에 온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 동안, 그 사람 위에는 왕관을 들고 있는 사람이 서 있었다. 왕관이냐, 오물 갈퀴냐? 그것은 계속되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은 위를 향해 주목하기는커녕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오로지 갈퀴로 짚과 잔가지들, 바닥의 먼지만 열심히 긁어 모았다.” 이 얼마나 비극적인 일인가! 이게 바로 마음의 우상에게 사로잡힌 사람의 비참한 모습이다. 집착에 빠지고, 노예로 살고, 무엇보다 훨씬 더 나은 것을 거부하는 인생이다.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요일 5:21).원제: Three Tests for Diagnosing Idols of the Heart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예배
우상숭배
요한일서
우상의실체
천로역정
진정한갈망
사도요한
마음의우상
괴로움
거룩한 습관은 우리를 다시 정상 궤도에 올릴 수 있다
by Darryl Dash
2021-11-23
2020년이 끝났을 때 사람들이 얼마나 기뻐했는지 기억하는가? 2021년이 끝나 가는 지금, 그런 설렘은 이제 순진하게만 보인다. 팬데믹은 사라지지 않는다. 양극화는 여전히 높고, 사람들은 피곤하다. 많은 교회가 정상 회복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지만, 몇몇 보고서에 따르면 사임할 준비를 하는 목회자가 적지 않다. 장기 계획이 차질을 빚는 걸 즐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팬데믹이 계속되는 이 상황이 가져다준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될 것이다. 혼란스러운 계절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와는 상관없이, 혼란은 정상 궤도로 돌아가 지속가능하고 건강하며 또한 경건하게 생활하는 데 도움이 되는 습관을 재조정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나태 vs. 열심우리에게는 중단이 필요했다. 팬데믹 이전에도 우리는 경건한 습관을 잘 지키지 못했으니 그렇다. 조지 거쓰리(George Guthrie)는 ‘삶을 위한 성경 읽기’(Read the Bible for Life, 성서유니온 역간)에서 이렇게 썼다. “나는 지나치게 경계하거나 비판적이고 싶지 않다. 또 설교를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솔직하게 말하겠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성경 읽기에 관해 대단히 큰 걱정을 하고 있는데, 당신도 그 걱정을 나눠야 한다. 다시 강조하지만, 제대로 읽기는 고사하고, 그리스도인이 성경을 읽지 않는다.”목사로서 나는 또 다른 걱정스러운 경향을 발견했다. 과거에는 그래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교인들이 있었다. 그러나 점점 더 드문드문 예배에 참석한다. 특히 젊은 세대가 더 그렇다. 예전에는 거의 매주 예배에 참석했지만, 이제는 한 달에 한두 번 참석하는 사람들이 많다.성경을 읽거나 예배를 위해 꾸준히 모이는 데 어려움을 겪는다면, 기도 같은 다른 경건한 습관은 물어볼 필요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이 세속 문화의 흐름에 맞서 저항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우리는 생활 속에서 경건한 습관을 들이는 법을 아예 배운 적이 없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까? 시도하다가 실패하고, 그러면 낙심하고 포기한다. 한껏 열정을 품은 채 헬스장에 등록했다가 2월에 바로 그만두는 것과 비슷하다.새 출발팬데믹은 우리의 삶을 혼란에 빠뜨렸고, 어떤 추세를 부추겼을 수도 있다. 그러나 팬데믹은 또한 동시에 다시 시작하게 함으로써 우리 삶 속에 새롭고 경건한 습관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주기도 한다.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와튼 스쿨의 행동과학자 케이티 밀크먼(Katy Milkman)에 따르면, 생일이나 새해 같은 새 출발은 변화에 대한 동기를 높일 수 있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런 날은 뭔가 새롭게 시작하는 느낌을 주고, 실패를 과거로 보내게 하며, 미래에 대한 낙관적인 생각을 높여 주기 때문이다. 밀크먼은 그의 책 ‘변하는 법’(How to Change)에서 “변화 추구를 고려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시기는 새 출발 이후이다”라고 썼다. 언젠가는 팬데믹이 끝날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시작에 직면할 때 은혜의 길로 인도하는 데 도움이 될 새로운 습관을 우리는 지금부터 삶 속에서 쌓아 가야 한다. 습관에 관한 간략한 신학습관을 성경 어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지 궁금할 수도 있다. 언뜻 보면 습관에 대해 이야기하는 구절이 많지 않은 것 같다. 사실 이 단어는 딱 한 번 나오는데, 그것도 부정적인 의미이다. 함께 모이지 않는 나쁜 습관을 키운 어떤 사람들이 있다는 구절이 그것이다(히 10:24-25).이 구절의 의미: 우리는 함께 모이는 좋은 습관을 만들어야 한다.하지만 조금만 자세히 보면 습관은 성경 어디에나 나온다. 시편 1편은 밤낮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으며, 우리에게 아침과 저녁뿐만 아니라 하루 종일 하나님의 율법을 생각하라고 권한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 7:7). 예수님의 이 말씀은 또 어떤가? 각 동사(구하다, 찾다, 두드리다)는 현재 명령형이다. 계속 구하라. 계속 찾으라. 계속 두드려라. 곧, 기도하는 습관을 들여라. 성경은 우리가 삶에서 키워 가야 하는 많은 습관, 곧 일상이 되는 규칙적인 실천을 권장한다. 제대로 성장하려면 경건한 습관이 필요한 것이다. 동시에, 습관이 중요하지만 이게 핵심은 아니다. 바리새인보다 습관을 더 잘 연마한 사람은 없었지만, 그들은 습관의 궁극적인 목표가 되어야 하는 하나님을 놓치고 있었다. 습관 그 자체가 저절로 우리를 성숙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습관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숙시키시고 우리를 당신께로 이끄시는 수단이다. 습관을 만드는 8가지 조언오늘 당장 경건한 습관을 어떻게 키우기 시작할지, 여기 몇 가지 아이디어가 있다.1.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라. 습관을 만드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우리 자신을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명령을 규칙적으로 실천하기 위해서는 성령의 도움에 의지해야 한다.2.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라. 우리는 스스로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변화하기를 원하신다. 당신이 하나님을 추구할 때 함께 걸어갈 사람들을 교회에서 찾으라. 3. 중단을 활용하라. 중단이 일상에 초래하는 불편이 적지 않지만, 새로운 행동 패턴을 형성하고 또한 팬데믹이 종식될 때를 대비할 수 있는 좋은 기회도 제공하기 때문이다. 4. 핵심이 되는 습관을 선택하라. 규칙적으로 말씀 읽고, 기도하며,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5. 작게 시작하라. 당장에 큰 목표를 이룰 수는 없다. 작지만 현실적인 습관을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루에 성경 열 장씩 읽겠다고 하지 말라. 한 장부터 읽으라. 한 시간 기도 대신 5분으로 시작하라. 6. 그때그때 새롭게 시작하는 습관을 들이라. 한 번 실패했다고 포기하지 말라. 주일 예배에 빠졌다고, 성경을 하루 읽지 않았다고, 포기하면 안 된다.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면서 다시 시작하라. 7. 계속 새로운 것을 실험하고, 실패해도 포기하지 말라. 실수를 인정하자. 안 되는 방식에서 배우라. 호기심을 유지하라. 실망감을 기도로 주님께 가져가서 은혜를 구하라. 8. 발전이 없어 보여도 계속하라. 오랫동안 유지하는 작은 습관이 지속적인 변화를 이끌어 낸다. 코로나라고 하는 중단을 낭비하지 말라. 영적으로 연약한 상태에 안주하지 말라. 믿음을 강화하는 경건한 습관을 기르라. 성령의 도움을 구하라. 오늘 시작하라. 원제: Godly Habits Can Get Us Back on Track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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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심
습관
낙관론
성경읽기
게으름을 깨고 열심의 불꽃으로 타오르다
by Marshall Segal
2021-11-21
지금 시대에 열심(Earnestness)은 워낙 드물기에 그 가치가 더 인정받고 있다. 화면 스크롤링과 대충 읽기로 대표되는 이 시대는 대체로 우리를 더 가볍고 피상적이며 유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진지함에 점점 더 강한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 우리 마음은 너무 쉽게 지친다. 그러나 극히 소수가 되어 버린 그 밝은 삶은 이런 영적 안개를 뚫고, 무척이나 많은 사람들에겐 이제 희미해져 버린 현실 속에서조차 환히 빛나고 있다. 그들의 말과 우선순위 그리고 그들이 보여 주는 반응은 그리스도께서 그들로 하여금 완전한 헌신을 하도록 만드셨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드러낸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신음하고 변명할 때 희생하고 섬기기를 좋아한다. 역경에 직면했을 때조차도 그들은 더 강하고, 갈등 속에서도 더 친절하며, 고통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보다 오히려 더 즐거워 보인다. 그들은 스트레스와 산만함조차 뚫지 못하는 초점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그들에게 끌리는 이유는(종종 그런 그들이 두렵기도 하지만), 삶에서 진정으로 중요한 것, 감각의 표면 아래에 존재하는 진짜 세계, 그리고 영혼을 위한 영적 전쟁을 그들이 상기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들과 함께하는 시간은 더 많이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우리를 자극한다. 이런 성도들에게는 많은 공통점이 있지만, 그 중 하나가 고린도후서 8:7의 말씀대로 열심에서 뛰어나다는 사실이다. 열심에 게으른그리스도인의 열심은 하나님을 향해 가지는 안정되고 기쁨으로 가득한 집중(intensity)이다. 히브리서 6:11-12을 보자.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함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열심은 영적 둔함, 게으름, 무관심, 안일함의 반대이다. 모든 신자가 그렇듯, 열심인 사람도 예외없이 의심과 갈등, 그리고 낙심의 계절을 겪는다. 그러나 그런 때에 조차도(아니, 특히 그런 때에 더) 믿음의 불꽃은 생각보다 더 뜨겁고 밝게 타오른다. 이런 영적인 불이 또 어디에서 언급되었을까? 사도 바울은 이렇게 권고한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롬 12:11). 그 구절만으로도 진지한 반성과 기도가 필요하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열심에서 나태해짐을 느끼는가? 얼마나 자주 영적 불타오름을 느끼는가? 그리고 우리 중 많은 이가 얼마나 쉽게 지속적인 나태함에 익숙해져 버렸는가? 한때 가지고 있었던 열심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가?둔감함이라는 참호가 믿음을 위해 매일 싸움을 벌이는 현장이 될 때가 많다. 매일 아침 찾아오는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마찬가지로, 우리 각자에게는 다가올 날을 위한 새로운 깨어있음이 필요하다.불붙은 죄인들열심이라는 이 단어(그리스어 spoudei)는 고린도후서 7-8장에서 가장 자주(네 번) 나타난다. 이 두 장에서 사도는 죄에 대한 경건한 근심과 불경건한 근심 사이의 치명적인 차이점을 설명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고후 7:10).고린도 사람들은 바울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파멸시키려 했던 이들을 징계하는 일에 등한시했다. 그래서 이전에 고통스러운 편지(고후 2:2 참조)를 썼을 때, 바울은 진심을 담아서 그들을 근심하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경건한 근심, 회개하는 근심, 희망에 찬 근심, 그리고 구원에 이르는 근심을 경험하기 원했다. 그건 많은 사람들, 심지어 무신론자들도 종종 죄의 결과에 대해 느끼는 천박하고 자기중심적인 그런 근심이 아니다. 그럼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이 죄에 직면했을 때, 그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기를 원했을까?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 7:12).바울은 교인들이 하나님 앞에 설 준비를 할 때, 그들의 눈에서 그분을 향한 간절함을 보기 원한다고 말한다. 그 편지로 인해 그들 속에서 영적인 불이 타오르는 것을 보길 바란다. 그래서인지 고린도 사람들은 쉽게 근심했다. 바울도 그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고후 7:11). 그들은 자신의 죄를 대면했을 때 그것을 인정하고 회개했을 뿐만 아니라, 신선하고 냉정하며 거기에 능동적인 현실감으로 충만했다. 하나님 앞에서 가지는 진지한 확신은 하나님을 향한 진지한 헌신과 더불어 다른 사람들을 향한 진지한 사랑까지 낳는다. 자, 기억해야 할 점은 이러한 깨어있음과 열심이 다름 아니라 바울이 어렵게 전했던 말이 씨앗이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순간에는 불쾌하게 느낄 수 있겠지만, 우리에게 책망은 종종 더 큰 영적 온전함과 활력으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초대이다. 그러나 너무도 자주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져 초대를 놓치고, 그 초대로 인해 경험할 지도 모르는 뜨거움 마저 잃어버리곤 한다. 열심 안에서 자라나기열심이 부족했던 고린도 성도들이 시간이 감에 따라 점점 더 그 열심이 커졌다는 것은, 아무리 영적으로 더디다고 느껴질지라도 우리도 간절하게 바랄 때 성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열심을 다하는 것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이 단어는 베드로후서 1:3-8에 다시 나온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등등.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모든 열심 위에 너희의 믿음과 덕을 더하라.” 이 구절에서 베드로는 열심에 대해 다른 것과 어떻게 구별되는지 보여준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향한 더 높은 수준의 우선순위와 함께, 더 확고한 기반 위에서 지속적으로 생활하고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차마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풍성한 자원까지도 활용하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 열심의 토대첫째,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더 견고한 기초 위에서 생활하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수준으로까지 안전하고 안정된 삶을 산다. 베드로는 이렇게 말했다. “하나님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벧후 1:3-4). 과연 이러한 열심을 불러일으키는 확신이 무엇인지 유의하자. - 하나님 자신이 우리를 그의 영광과 탁월함 가운데로 부르셨다.- 하나님은 그의 귀하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모두 주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적 성품에 참여하게 하셨다.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이제 우리 안에 거하시고 우리로 하여금 당신을 닮아가도록 하신다. - 하나님은 우리를 세상의 부패함에서 건져내셨다.이런 현실에 대한 적극적인 깨어있음은 우리 영혼 속에서 중심점(gravity)을 만들어낼 뿐 아니라 자유함을 준다. 영혼 속 중심점과 자유는 상황에 의해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도록 각 사람 아래에 단단한 기초를 형성한다. 그 결과 견고하게 고정된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더 분명하게 보게 되고, 사랑 안에서 더 단호하게 행동할 수 있게 된다. 열심을 추구하는 과정의 일부는 우리 발아래 놓인 땅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다. 우리는 정말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앞에 두신 반석 위에서 삶과 사역을 세워가고 있는가? 우리는 정말로 아침마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현실에 대한 바른 발판을 찾고 있는가? 아니면 전혀 다른 세상 것에 몰두하고 있는가?열심의 방향안전과 안정 외에도 영혼에게는 방향이 필요하다. 열심을 다한다고 할 때, 그 열심은 다 어디로 가는 걸까? 많은 사람들이 아예 고갈될 때까지 방해받지 않은 열정으로 열심히 일하지만, 그들의 모든 방향은 잘못되어 있다. 그러나 기쁨으로 가득 찬 경건한 열심의 경우에는, 그 모든 노력이 하늘의 우선순위와 일치되어 있다.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벧후 1:5–8).열심을 내는 사람은 그들이 자기 자신을 소진시키는 시간을 주로 사용하고 있는 영역 때문에라도 세상 사람들과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들은 세상적인 것보다 영적인 관심사와 기회에 전념하며, 그렇게 하는 것을 즐긴다. 열심을 내는 사람은 세상과 사랑에 빠지지 않기 때문에(딤후 4:10), 아무리 절박하게 느껴진다고 해도 결국에는 순식간에 지나가버릴 세상일에 최선의 에너지를 쏟아 붓는 것을 거부한다. 그들은 은을 찾듯이 진리를 추구한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갈망과 충동을 통제하기를 원한다. 달성할 수 있는 세상 모든 것보다 경건을 더 소중히 여긴다. 조금 사랑하는 것으로 결코 만족하지 않고, 사랑이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빌 1:9) 되기를 원한다. 열심의 우물믿음과 확고함 그리고 거룩함과 사랑에 대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지라도, 결코 자신의 힘을 의지하지 않는다. 그들은 주님이 주시는 힘과 은혜 안에서 견디기 때문에 그 누구보다도 더 오래 짐을 지고 갈 수 있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벧후 1:3). 생명과 경건에 관해서 우리는 스스로 무력하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우리가 이 말씀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마음과 관계라는 측면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양의 기능 장애를 우리는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과제를 우리 자신에게 맡기지 않으셨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당신을 영화롭게 하는 방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는 데에 있어서 절대적으로 무능력한 우리로부터 아무것도 취하지 않으시면서,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신다. 열심을 내는 사람들은 바로 이 우물 옆에 집을 짓는다. 그들은 하늘의 힘, 지혜, 용기, 사랑의 보고를 쓰는 방법이 기도 밖에 없음을 잘 안다. 그들은 그래서 하나님의 소중하고 위대하고 구체적인 약속으로부터 끊임없이 그 능력을 이끌어낸다. 하나님의 능력 때문에 강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 능력이 없이 자신들이 한 없이 약하다는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노력을 다하라아는 사람들 중에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누구인가? 누구의 삶이 지속적으로 주변에 가득한 세속성을 뚫고 초자연적인 특성으로 빛나고 있는가? 누구의 말과 행동이 긴급함과 인내, 야망과 겸손, 그리고 배고픔과 만족으로 특징지어 지는가? 누구와 나누는 대화가 당신으로 하여금 더 기도하고 더 사랑하고 더 성장하도록 자극하는가?그런 성도들을 연구하고, 친구가 되고, 또 본받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 그들의 삶은 천박하고 산만한 시대에 귀중한 간증이자 깨달음(reminder)이며, 그런 이들과의 우정은 무엇보다 매우 소중하다. 게으름을 부릴 때 느끼는 편안함을 거부하라. 열심을 내는 데에 그 누구보다 앞선 사람이 되도록, 그런 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다. 원제: Disrupt Your Dullness: Rekindling the Flame of Earnestness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열심
게으름
영적나태
고린도교회
깨어있음
자기연민
초자연적
트라우마를 겪는 아이들을 돕는 법
by Justin Holcomb • Lindsey Holcomb
2021-11-16
우리 주변에는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어린이들이 있다. 트라우마는 육체적, 성적, 심리적인 학대, 왕따,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인종차별의 경험, 심각한 질병 등의 충격적인 경험이 어린이들에게 남긴 부정적인 흔적이다.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Substance Abuse And Mental Health Services Administrations, SAMHS)에 따르면 “트라우마는 신체적, 정신적인 고통스러운 경험, 생명을 위협당하는 직간접적인 경험들을 단회적으로, 또는 반복하여 경험할 때 발생한다. 이는 개인의 정서적, 신체적, 사회적, 정서적, 영적인 웰빙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Concept of Trauma,’ 7). 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반응하는 부모나 양육자가 꼭 필요하다. 어린이들이 홀로 있다고 느끼지 않고, 그들이 사랑 받고 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또한 어린이들이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도록 격려해주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부모나 양육자는 이와 같은 방법으로 어린이들이 트라우마에서 치유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과 하나님의 마음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의 치유는 하나님이 그들의 고통을 알고 계시며, 이해하시며 돌보신다는 것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끝이 있다는 사실을 어린이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그리하여 어린이들이 트라우마에 대한 두려움으로 미래를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평안이 있는 미래를 꿈꿀 수 있게 해야 한다. 어린이들이 트라우마로 인하여 얼마나 끔찍한 고통을 받고 있는지 안다면 우리는 그들을 적극적으로 도와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분명하게 말해주고, 그들을 보호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어린이들을 얼마나 사랑하시고 돌보시는지 진정으로 아는 사람은 어린이들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돌보며, 그들이 언제나 평안을 누리며 소망을 가질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만약 어린이들이 가정과 교회를 통하여 트라우마를 치유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의 보고서’(SAMHS) 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한 개인에게 트라우마로 남을 수 있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나 경험은 그에 대한 공동체의 반응에 따라서 다른 결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런 충격적인 사건의 상황을 온전하게 이해해주고, 스스로 이겨낼 수 있도록 옆에서 끊임없이 도와주는 공동체는 개인에게 치유와 회복의 길을 열어줄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회피하고, 트라우마의 아픔을 간과하는 공동체는 개인에게 치유의 길을 가로막으며, 더 큰 트라우마를 안겨줄 수도 있다. 때로는 고통 당하는 사람들을 도우려는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큰 트라우마를 안기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트라우마와 정의에 대한 전략, ‘약물 중독과 정신 건강 서비스 관리국’(SAMHS)의 트라우마 이해와 트라우마 중심의 접근법 안내책자, 17).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을 돌보는 실제적인 방법사실 어린이들마다 각자에게 맞는 다양한 도움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그들을 돌보는 부모나 양육자에게 필요한 일반적인, 그러나 실제적인 도움을 제시하려고 한다. 여기서 제시되는 방법들은 충격적인 사건으로부터 벗어나서 어린이들이 이미 안전한 환경에 있을 때에 적용할 수 있는 방법들이다.▶ 어린이들을 안심시키고, 그들이 지금 안전한 곳에 있음을 확인시켜야 한다. 어린이들이 가정에 있을 때에나, 학교에 있을 때에나 당신이 그들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는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매일 어린이들이 학교에 갈 때 함께 걸어간다든지, 집에 있을 때에도 항상 어린이들 곁에 있어준다든지, 밖에서 놀 때에도 계속해서 그들을 지켜보고 있다든지, 어린이들이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지켜보고 있고, 스쿨 버스에서 내릴 때에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어린이들이 안정을 되찾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린이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끊임없이 당신이 그들을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최선을 다하여서 그들을 돌봐주어야 한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사랑을 표현해야 한다(안아주기, 함께 시간을 보내기).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 이후에 찾아오는 굉장히 낯설고 어려운 감정들을 어린이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어린이들이 죄책감을 느끼지 않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을 함부로 판단하지 말고 매우 조심스럽게 그들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래서 어린이들이 자신이 경험하고 느끼는 감정들을 스스로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내면에 있는 그 감정들을 표현할 수 있도록 적절한 단어를 제시해주는 것도 도움이 될 수 있다. 또한 말하거나, 쓰거나, 놀이나 음악으로 그런 감정들을 표현하게 하는 것도 좋다. 어린이들이 느끼는 감정들을 무시하거나, 어린이들의 고통들을 가볍게 여기면서 쉽게 극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 어린이들과 함께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는 대제사장이 계시기 때문이다(히 4:14-16).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치유, 위로를 구하며 정의를 회복시켜달라고 구해야 한다. 이런 기도를 통하여서 트라우마로 인한 슬픔과 상실이 치유되며, 우리의 기도를 듣고 도우시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소망과 자신감을 발견할 수 있다. ▶ 어린이들에게 필요하다면 전문적인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전문적인 상담가, 아동 돌봄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도 있다. 정신과 전문의, 치유회복 전문가, 학교 전문 상담가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다. ▶ 만약 어린이들이 학대를 받았거나, 학대가 의심된다면 경찰이나 적절한 기관에 신고를 하여서 전문적인 조사를 의뢰할 필요도 있다. ▶ 어린이가 매우 흥분되어 있거나, 강한 분노를 표출할 때에는 침착하게 대응해야 한다. 어린이들에게 맞대어서 분노하지 말고, 도리어 차분한 목소리로 당신이 그들의 감정을 이해하고 있음을 알려주어야 한다. 어린이들이 당신에게 분노한 것이라고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어린이들은 당신의 반응에 따라서 자포자기할 수도 있고, 다시 용기를 얻을 수도 있다. 그렇기에 당신의 침착한 대응이 어린이들을 트라우마로부터 보호할 수 있다.▶ 가능한 때가 되면 다시 일상의 삶을 회복하여야 한다. 매일 정해진 시간에 식사하고, 학교에 가고, 주말에는 다양한 활동을 하며, 규칙적으로 잠을 자는 일상의 삶을 회복해야 한다. 어린이들과 일관되게 일상의 삶을 지속하며, 특별한 일이 있을 때에는 그들에게 미리 알려주는 것이 좋다. ▶ 어린이들이 스스로 자신의 행동을 결정할 수 있게 하는 것도 좋다. 물론 나이와 상황에 맞추어서 결정권을 부여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입을 옷을 선택하거나, 먹을 음식을 결정하도록 할 수 있다. ▶ 어린이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가르쳐야 한다. 만약 그들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믿음이 있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반드시 구원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어린이들을 매우 소중하게 여기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을 선택하셔서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주셨다. 이 구원의 확신은 트라우마를 겪는 어린이들에게 큰 위로가 된다. 왜냐하면 구원의 확신은 자신이 트라우마의 피해자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땅에서는 그들의 상처와 고통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확신은 그들에게 남겨진 상처가 언젠가 때가 되면 사라질 것임을 깨닫게 한다. ▶ 때로는 분노를 느끼게 하는 것도 좋다. 죄를 향한 하나님의 분노는 정당하다. 바로 그 하나님의 분노가 필요할 수도 있다. 데이비드 폴리슨(David Powlison)은 이렇게 말하였다. “분노는 악한 것에 대한 정의롭고, 선하고, 적절하고, 아름답고, 공정한 유일한 반응이다. 또한 그 분노는 악의 피해자를 위한 사랑의 반응이다”(“Anger, Part 1: Understanding Anger,” The Journal of Biblical Counseling 14:1 [1995], 40). 하나님의 사람도 당연히 거룩한 분노를 표출할 수 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엡 4:26). 어린이들이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였을 때에는 하나님께서 악한 자들에 대하여 분노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좋다. ▶ 어린이들에게 희망을 제시해야 한다. 이는 그저 긍정적인 생각을 품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희망은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신뢰에서 비롯된다. 하나님께서 과거에도 신실하게 우리를 사랑하셨듯이, 앞으로도 변함이 없이 우리를 사랑하실 것을 알기에 우리는 희망을 품을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바로 그 부활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할 수 있다. 당신이 트라우마로 인하여 고통당하고 있는 어린이를 돌보고 있든지, 아니면 그런 어린이를 돌보는 자를 돕고 있든지, 우리는 그들에게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약속으로 격려해야 한다.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올바르게 되돌려 놓으실 것이다. 그때까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고통 당하는 자들을 위로하고, 돌보고, 그들에게 소망을 불어넣는 것이다. 그리고 온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시고, 사랑하시는 그 어린이들과 함께 인내하면서 이 땅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에게 맡기신 소명이다. 원제: How to Help Children Who’ve Experienced Traum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박광영
가정
양육
돌봄
분노
회복
트라우마
약물중독
인종차별
정신건강
데이비드폴리슨
중년 여성에게 드리는 5가지 권면
by Shelley Madueme
2021-11-15
몇 달 전, 8살 난 아들이 내 머리를 보더니 늙어 보이지 않으려면 염색 좀 해야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상당히 큰 충격을 받았지만, 아이들이 창피해하지 않도록 염색을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받아들였다. 이것도 부모로서 해야 할 일 아니던가?40대에 들어서면서 나는 부쩍 나 자신이 늙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에 띄게 흰머리도 늘고(나를 보는 사람마다 그 얘기를 빼놓지 않았다) 팔자 주름도 선명해졌으며, 아침에 일어나면 이따금 내 눈은 나인지 몰라보게 부어 있기도 했다. 이러한 변화에 대처하는 방법은 세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노화의 징후와 싸우든지,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그냥 내버려 두든지 아니면 변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에 맞게 나를 돌보는 법을 배우든지 말이다.나는 세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여성은 중년이 되어도 여전히 25살처럼 보여야 한다는, 말도 안 되는 부담을 느낀다. 흰머리가 보이면 염색을 한다. 얼굴에 주름이라도 눈에 띄면 영양 크림에 기능성 화장품, 보톡스 주사, 시술까지도 마다하지 않는다. 체형 변화에는 또 어떤가? 여기에는 사회의 전반적인 산업이 다 뛰어든다. 다소 불편할 수 있는 이러한 현실에 대해 누군가는 단순한 허영심이 문제라고 단정할지도 모르지만 이와 관련하여 우리는 폭넓게 대화할 필요가 있다.중년 여성들이 겪는 폐경 전후 증후군이나 갱년기와 같은 신체적인 변화 외에도, 대부분의 중년은 자신의 정체성이나 노후, 실존적인 질문 그리고 유산과 같은 문제를 생각하기 마련이다. 몸이 점점 쇠약해지면서 죽음에 대해 더욱 뚜렷하게 인식하게 되기도 한다(주변에 40대 이상 된 사람에게 잘못된 자세로 잠을 자면 어떻게 되는지 한번 물어보라).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몸에 일어나는 변화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변화에 맞춰 몸을 잘 돌볼 것이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주님을 뵐 때까지 우리 자신의 삶을 청지기로서 어떻게 관리할 것이냐이다.자, 그럼 어떻게 하면 젊음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며 여성에게 새로운 압박과 압력을 주는 이 시대, 사회적 역할이 역동적으로 변화하는 지금 시대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중년의 삶을 잘 헤쳐 나갈 수 있을까?간단하게 답을 할 수는 없겠지만, 안정적으로 대처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다섯 가지의 권면 사항을 소개하고자 한다.1. 말씀과 교회로 시선을 돌리라중년의 시간을 잘 보내기 위한 특별하고 새로운 기술이나 중재안은 없다. 다만 복음은 여전히 우리 모든 삶의 기초임을 기억하자.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중년 여성에게 말씀과 교회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필요하다.중년에 대한 사회상은 과거에 비해 달라졌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 따라서 인생의 어느 시기에나 적용할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나타나신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우리를 부르신 목적, 즉 마음과 목숨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우리 자신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마 12:30-21)을 다시금 마음에 새기게 된다.어느덧 커버린 자녀와 연로한 부모님을 돌보느라 이리저리 치이는 중년 여성을 배려하여 교회가 실제로 할 수 있는 활동도 있을 것이다. 이들 중에는 정말 심각한 상황에 부닥친 이들도 있기 때문에 교회는 적절한 도움을 주어야 한다. 전화 심방을 통해 그들이 처한 어려움을 놓고 함께 기도해 줄 수도 있으며, 중년 여성을 위한 식사 만찬을 준비할 수도 있고, 비슷한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연결해 주어서 자신만 겪는 어려움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2. 지혜롭게 행하라우리가 분명히 인식해야 할 것은 노화가 일어나는 우리 몸을 돌보는 것과 노화의 징후들을 감추는 데 급급한 것은 다르다는 사실이다. 이 둘은 정말 한 끗 차이다.여기서 어떤 것은 괜찮다는 식으로 목록을 만드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는 어려움 가운데 있는 그들과 여전히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붙잡을 수 있도록 격려해야 한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지, 비현실적인 젊음의 기준에 맞추는 것이 아니지 않는가.노화를 겪는 우리 몸을 잘 관리하기 위해 우리가 실제적인 방법을 탐색할 때 어디까지 가능한가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왜 그 방법을 사용하려고 하는지도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로 주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전 6:20). 때로는 주위의 신실한 여 성도들을 관찰하며 그들이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준을 자신의 삶에 맞게 적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3.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감을 찾으라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주 안에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 노화의 징후를 보인다고 해서 하나님의 관심 대상에서 멀어지지 않는다. 세상의 눈으로는 우리가 점점 가치가 없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에 힘을 낼 수 있다(골 3:3). 기대와 좌절을 오가며 힘겨워하는 우리의 자매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정체성을 재정립하고, 위의 것을 찾으며(골 3:1-2), 준비된 상을 받기 위해 그들 앞에 놓인 달음질을 잘 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어야 한다(고전 9:24).하나님의 말씀이 세상의 소리보다 더 크게 들리도록 우리는 이 메시지를 한 번에 그치지 말고 듣고 또 들어야 할 것이다.4. 무엇이 진리인지 기억하라우리 주변의 거짓 이미지는 우리를 끊임없이 공격한다. 그 이미지들은 제공한 자들이 자신들의 목적에 맞게 거르고 수정한 것으로 우리 주변 곳곳에 깔려 있다. 소셜미디어는 물론이고 심지어 우리 교회들의 웹사이트에서도 발견할 수 있으니 말이다.따라서 우리가 보는 것이 항상 실제는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광고를 목적으로 전문가의 손길을 거친 수정된 어떤 모습을 본래 우리 모습과 비교하는 것을 멈춰야 한다. 대부분의 사람이 이 사실을 인지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잊어버리는 듯하다.5. 관계에 시간을 쏟으라우리는 또한 개인적인 교제가 갖는 중요성을 다시금 주목해야 한다. 가상의 공간이나 먼 거리에서 이루어지는 관계도 유익할 수 있지만, 성도가 서로 만나 나누는 교제에는 특별히 통하는 뭔가가 있다. 실생활에서 성도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는 것은 서로 사랑하고 섬김으로써 복음이 실제가 되게 하는 행위이다.우리는 친구가 필요하다. 아무도 우리를 돌아보지 않는다고 느낄 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자신의 정체성을 찾도록 애정을 담아 우리에게 권면해 줄 수 있는 친구 말이다. 기복이 심한 중년의 시기를 보낼 때,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고 격려해 줄 사람이 우리에게는 필요하다.우리의 피부가 매끈하든지 주름이 자글대든지 우리의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중년이라는 풍랑이 다 지나가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실 주님을 신뢰하자(히 12:1-3; 빌 1:6).원제: 5 Encouragements for Women in midlif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염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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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음,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
by 김형익
2021-11-12
우리는 승리주의적 사고 체계로 기독교와 복음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삶을 규정하고 재단하기가 너무 쉽다. 승리주의적 사고에서 그리스도인의 표는 성공하는 것이고 1등이 되는 것이다.하지만 이런 사고 체계는 성경이 가르치는 복음에 부합하지 않으며 온전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설명해주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는 무엇일까?초기 교회의 아비투스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허용한 313년의 밀라노 칙령 이전까지의 초기 교회는 무엇을 그리스도인의 표로 여겼을까? 앨런 크라이더(Alan Kreider)는 그의 책 『초기교회와 인내의 발효』에서 끈기 있는 인내(참음)의 발효가 초기 교회 성장의 주요 동력이 되었다고 말한다. 심지어 이 참음의 덕은 복음 증거라는 대전제 아래서 전략적으로 행해진 수단이 아니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 대해서 적대적이거나 호의적이지 않았던 세상 앞에 보여준 기독교 고유의 경이로운 삶의 특징이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믿는 바를 따라 행하고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했고 그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는 참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원형경기장에서 죽임을 당하면서도 적대적 불신 세상 앞에 참음의 덕 즉 ‘아비투스’를 보여주었다.아비투스(habitus)는 라틴어에서 파생한 단어로, 프랑스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가 사회학적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 이 용어는 후천적인 배움을 통해서 무의식 중에 또는 위기의 순간에 반사적으로 반응하게 되는 행동 양식을 의미한다. 한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에게 아비투스가 형성되면, 아비투스는 바깥 세계에 그들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특징이 된다. 참음의 아비투스는 오늘날 번영신학의 틀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복음의 역설을 보여준다. 초기 교회는 신약성경이 많은 곳에서 참음(인내)을 믿음의 동의어로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했다(마 10:22; 24:13; 막 13:13; 눅 8:15; 21:19; 롬 8:25; 딤후 2:12; 히 10:36; 12:1; 계 13:10; 14:12 등). 신약의 저자들과 함께 초기 기독교는 참음 곧 인내를 믿음의 본질이라고 이해했다. 256년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주교였던 키프리아누스(Thascius Caecilius Cyprianus)가 쓴 글이 이것을 잘 보여준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말이 아닌 행동의 철학자들이다. 우리는 우리의 지혜를 우리의 옷이 아닌 진리를 통해 드러낸다. 우리는 덕을 그것에 대한 (말의) 자랑이 아니라 실천을 통해서 알아본다. 우리는 위대한 일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살아낸다. …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종과 예배자로서 영적 경의를 지니고 우리가 하늘의 가르침을 통해 배운 인내를 보여 주자. 그 덕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과 공통점을 갖는다.” 실제로, 참음의 아비투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의 말 보다, 삶과 삶의 방식으로써 기독교와 복음을 세상 앞에 보여주는 표가 되었다.고대 로마 사회가 대개 참음에 대해 싫어도 참을 수밖에 없는 형편에 있는 하층민들이나 희생자들의 태도라고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초기 기독교가 참음을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로 여겼다는 점은 마케팅의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실상은 달랐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참음의 아비투스는 박해의 상황 속에서도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였다. 게다가 복음을 믿고 세례를 받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기독교의 기본 교리를 배우는 것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따라 사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강도 높은 훈련을 통해 세례를 주기 전까지 그들의 삶 속에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가 형성되었는지를 시험한 뒤에야 비로소 세례를 베풀었다. 아비투스의 교육에는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니 기독교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해서 세례를 받기까지는 적어도 3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참음의 아비투스를 배움으로써 시작되었다. 참음은 초기 그리스도인의 독특한 아비투스였다. 바울이 말하는 사도됨의 아비투스바울은 1년 6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들여 고린도 교회를 세웠다(행 18:1-12). 하지만 슬프게도 바울이 고린도를 떠난 후, 거짓 교사들이 들이닥쳤고 고린도 사람들은 그들의 거짓 가르침에 미혹되어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게 되었다. “거짓 교사들과 달리, 바울은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고 고생하며 살고 있지 않은가? 바울이 주님이 함께 하시는 참 사도라면 저렇게 고생하며 살 수 있겠는가?” 바울은 자신이 거짓 교사들에 비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를 말함으로써, 자기가 보기와는 달리 매우 훌륭한 사람의 외적 조건을 갖추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의 참됨을 입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나는 너희가 보는 대로, 여전히 가는 곳마다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고, 나는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람이지만 너희가 반드시 알아야만 할 것은 내가 전한 복음은 유일한 진짜 복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내가 ‘모든 참음’으로 이 고난의 삶을 견디고 있다는 사실이 내가 참 사도임을 증명하는 표적이다.”바울이 자신의 사도성을 증명하기 위해서 ‘참음’을 말했다는 것은 참을성이 없는 현대인들에게는 의아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사도의 표가 된 것은 내가 너희 가운데서 모든 참음과 표적과 기사와 능력을 행한 것이라”(고후 12:12). 이 구절에서 ‘모든 참음’이 사도의 표적을 의미하는지, 아니면 ‘모든 참음’의 태도로 사도의 표적들을 행했다는 뜻인지는 논란이 있다. 나는 ‘모든 참음’이 바울이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됨의 표적이었다는 칼빈의 해석에 동의한다. 표적과 기사와 능력 행함이야 누구나 당연하게 예상하고 동의할 수 있는 사도의 외적 표적들일 수 있었기에, 사도는 거짓 교사들에게 미혹을 당하여 외적 표적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고린도 사람들에게 이런 방식으로 말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여기서 그가 정말 말하고 싶었던 사도의 표적은 ‘모든 참음’이었다. 그는 고린도 사람들이 주는 모욕을 견뎠다. 그는 또 사방으로 욱여쌈과 답답한 일, 박해, 거꾸러뜨림을 참았다(고후 4:8-9). 바울은 고린도후서 6장(4-10절)과 11장(23-29절)에서 자신이 참고 견뎌야 했던 일들의 목록을 말한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연민의 함정에 빠졌다는 증거가 아니다. 도리어 복음의 역설을 통해 복음을 입증하려고 하는 바울의 방식을 보여준다. 바울은 단지 고린도 교회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을 넘어, 자신의 영적 자녀들이 복음의 본질을 알고 그 본질에 합당한 삶을 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참음’을 사도의 표라고 말한 것이다. 1세기 고린도교회에 가만히 들어왔던 거짓 교사들은 ‘외모로 자랑하는 자들’이었다(고후 5:12). 고린도 사람들에게 거짓 교사들이 자랑하는 외적 조건들은 그들이 전하는 가르침이 참된 복음이라고 믿게 하는 설득력 있는 조건들이 되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메시지)의 영광스러운 본질은 역설적이게도 복음을 담지하고 그 복음을 전하는 메신저의 별 볼일 없음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려는 사도의 아비투스는 모든 참음이었던 것이다.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우리는 참을성 없는 시대를 살고 있다. 유튜브를 1.5배속 또는 2배속으로 돌려보는 시대이다. 우리에게서 멀지 않은 근대선교역사만 보더라도 윌리엄 캐리(William Carey)나 아도니람 저드슨(Adoniram Judson) 같은 선교사들이 한 사람의 영혼을 얻기 위해 얼마나 오랜 시간을 기다려야 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다리지 않는다. 원하기만 하면 초고속으로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는 시대를 경험하고 살아간다. 목사들은 경쟁 사회에서 더 빠른 속도로 성장의 성과를 보여주어야 한다는 압력을 받는다. 1970년대 교회성장의 물결을 타고 메가처치들이 등장하며 수많은 교회들이 교회성장이라는 지상 목표를 내세우면서, 한국 기독교에서 참음의 아비투스는 사라지고 말았다. 지금, 21세기 한국 기독교의 아비투스는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으로 그리스도인됨을 바깥 세상에게 경이롭게 보여주고 있는가? 성공과 1등이 됨으로써 그리스도인됨을 증명하려는 유아적 승리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우리가 잃어버린 기독교의 아비투스인 참음을 회복해야 하지 않을까? ‘모든 참음’을 통해 복음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초기 그리스도인의 아비투스인 참음, 즉 인내의 발효가 초기 기독교의 성장 동력이었다는 앨런 크라이더의 말을 우리는 좀 더 진지하게 들을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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