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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소통을 갈망하자
by Abigail Dodds
2021-06-28
“그녀랑 얘기하는 건 즐거워요. 항상 서로 통하는 느낌이거든요.”“나는 그녀의 인스타 계정이 정말 마음에 들어요. 재미도 있고 통하는 느낌이거든요.”“그녀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이에요. 선생님의 이야기는 정말로 나랑 통하는 거 같거든요.”다른 여성을 칭찬하고 싶다면, 그녀를 “공감하고 소통하는 사람”이라고 불러라. 서로 좋은 관계로 소통하는 것은 바로 당신이 원하는 바이다. 대화하는 사람과 연결점을 찾아내는 것은 그 방법이다. 앞에 있는 사람과 갈등 또는 어떤 환경에서 서로의 공감 부분을 찾아내는 것이기도 하다. 대등한 관계를 형성한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자신을 포장하면서 ‘척’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다양한 기술을 통해 그럴듯한 가짜 정보가 범람하는 디지털 세계에서 서로 통한다는 것은 하나의 해독제와도 같다. 보여 주는 완벽한 이미지의 커튼을 젖히고, 너무나도 평범한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세탁거리가 있고, 재수 없는 날이 있으며, 나의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농담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소통은 고작해야 가려진 모습을 보이는 정도이다. 관계를 맺는 하나의 시작점 정도의 역할을 할 뿐이다. 소통한다는 것은 자칫 나의 죄를 최소화하겠다는 의미가 되거나, 나의 죄를 다른 사람과도 연결하고 싶은 갈망을 만들기도 한다. 공유하는 소통의 위험한 측면“아이들에게 소리를 친다고요? 아, 다행이네요. 같이 웃어봅시다. 우리는 정말로 비슷하네요.”“당신도 다른 사람에게 와인을 따라주면서 각자 원하는 것을 먹으라고 말한다고요? 나도 그래요. 난 정말로 식당에 가면 모두가 다 똑같은 거 먹어야 하는 거 싫거든요. 하하하. 정말로 우리는 통하네요.” “아, 당신도 넷플릭스를 나흘 밤 꼬박 계속 본다고요? 그러니까 당신도 도저히 멈출 수가 없다고요. 나도 그래요. 우리 정말로 비슷하네요.”이런 식으로 다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은 우리가 각자의 죄를 충분히 느낄 수 있도록 커튼을 젖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서로가 회개와 회복을 향해서 걸어가는 것과도 관계가 없다. “좋지 않았던 시간”을 공유하는 것도 주의 깊게 잘 선별해야 한다. 그것이 때로는 웃음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은 잠깐일 뿐이다. 자신에게 좋지 않았던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은 다른 사람이 나를 더 좋아하게 만들기 위함이지, 반성하고 부끄럽게 하려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서로가 공유하는 소통의 위력이다. 우리는 나처럼 문제가 많은, 또 나랑 같은 방식으로 죄를 지은 다른 사람들과, 때로는 멀리 떨어진 사람들과도 소통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실제로 내게 죄를 지은 사람, 또는 내가 죄를 지은 사람과 진짜로 연결되는 것은 싫어한다.그건 실제 삶에서 조금도 재미있지 않다.그리스도 안에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기하나님 안에서 희망을 찾는 크리스천 여성이나, 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데에 별 관심이 없는 크리스천 여성은 다른 사람들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소통한다. 우리는 누구나 다 서로 고백하고 또 나눠야 한다는 마음의 압박과 유혹이 있다. 그런 투명한 공유와 소통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나눔과 소통은 우리가 주님께 가도록 이끌 때만 그렇다. 우리의 죄가 얼마나 흔하고 또 예상 가능한지를 놓고 크게 웃기 위해서가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죄에서 구했기 때문에 가능해진 거룩함 속에서 우리는 서로 모여야 한다(갈 1:4; 딛 2:11-14). 궁극적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그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서로와 연결된다.. 우리 속의 깊은 신앙은 단지 서로 간에 공통된 죄 또는 표면적으로 소통하는 자매의 수준에서 벗어나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즉 그리스도의 핏값으로 우리를 죄에서 구속해서 자매로 만든 그 아버지 안에서 소통해야 한다. 그렇다. 거룩한 여자도 웃을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심각한 죄를 놓고는 웃지 않는다. 우리는 앞으로 닥칠 일 때문에 웃는다. 이미 이뤄진 일 때문에도 웃고, 우리 자신을 보면서 웃는다. 우리는 또한 우리 속 깨끗한 양심을 보면서 웃는다. 바울은 아주 흥미로운 방식으로 교회와 소통했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대해서 투명했고 자신을 죄인 중의 괴수라고 불렀다(딤전 1:15). 그러나 그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그리스도를 닮는 것처럼 나를 닮으라고 말하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고전 11:1). 우리는 겸손을 우리의 모자란 부분에 집중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바울은 전혀 다른 방식을 보여 준다. 겸손은 우리의 죄성이 가득한 방식을 버리고 예수님의 거룩한 방식을 쫓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정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도 바울처럼 우리 속에서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젊은 자들을 향해서 “나를 닮아라, 내가 그리스도를 닮은 것처럼”이라고 소리쳐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 삶에 가장 지대하고 지속적인 영향을 끼친 남자 또는 여자를 생각할 때, 그것은 그들의 탁월한 유머 감각도 아니고, 나와 연결되는 이야기 때문도 아니었다. 많은 경우에 나는 그들의 경험과 연결할 수 없었다. 나치 수용소에서도 누렸다는 베씨 텐 붐(Betsy ten Boom)의 자족을 나와 전혀 연결할 수 없었다. 엘리자베스 엘리엇(Elisabeth Elliot)이 자기 남편을 죽인 살인범을 전도했다는 이야기와도 연결할 수 없었다. 심지어 더 이상 텔레비전을 안 본다는 존 파이퍼 목사의 이야기와도 나는 연결할 수 없었다. 나는 또한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언제나 기꺼이 아기를 돌봐주는 내 엄마와도 연결할 수 없다. 또한 늘 진지한 내 친구와도 연결할 수 없다. 이런 “전형성(typicality)”의 부족,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과 즉각적으로 연결되지 않는 나의 특징은 사람들이 말하는 정상적이고 보통인 상태가 되고 싶은 갈망에서 한 걸음 떨어져 더 큰 갈망을 갖게 했다. 하나님의 시각에서 볼 때 전형적인 삶이라고 할 수 있는, 하나님이 힘을 주실 때만 가능한 거룩한 삶을 살고 싶은 그런 갈망을 말이다. 많은 사람은 이런 구분 또는 다름을 통해서 내가 그리스도에게로 가도록 했다. 그리스도는 자비로운 대제사장이고 가장 강력한 방식으로 우리와 소통하는 분이다. 그는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었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누구나 짓는 죄악에서 우리가 벗어나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범상치 않고, 즐거움이 가득한 거룩함으로 가는 길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다. 자매들이여, 우리 이제 그를 따라가자. 원제: When Being ‘Relatable’ Does Damag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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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라
by Thomas Brewer
2021-06-27
혼잣말하는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킨 적이 있는가? 그건 좀 부끄러운 일이다. 왜냐고? 내 자신이 노출된 것 같은 느낌은 당황스럽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누군가가 우연히 벌거벗은 나를 본 거 같은 느낌과도 비슷할 것이다. 다른 사람이 거의 볼 수 없는 우리의 내적 삶이 갑자기 공개된 것과도 비슷하다. 그렇기에 우리가 혼잣말을 하다가 들키는 경우는, 보통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곳이라고 확신하던 장소일 때가 대부분이다. 예를 들어, 나의 경우 휴게실에 아무도 없다고 생각할 때 이렇게 중얼거리곤 한다. “아이고, 하루에 커피 두 잔 이상 안 마시겠다고 약속했는데 말이야.”물론 혼잣말하는 게 카타르시스를 주기도 하고 때로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도 도움을 준다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렇기에 다른 사람이 혼잣말하는 것을 본다고 그렇게 놀라지도 않는다. 누구나 다 살면서 마음속에서 대화를 나누는 것은 자연스러우니까. 혼잣말은 단지 그런 생각이 밖으로 드러난 것일 뿐이다. 우리는 이미 오늘 하루 중에 몇 번이나 이런 말을 중얼거렸는지도 모른다. “일어나야 할 시간이데.” 또는 “가게에 가야 하는데…. 아니야, 그냥 집에 있을래.”우리는 마음속에서 이런저런 생각의 저울질을 한다. 마음속에서 논쟁을 하기도 한다. 어떤 생각을 하면서는 혼자 재미있어 하기도 한다. 현실적으로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대화가 세상 밖으로 나오는 경우는 별로 없다. 대부분은 그냥 우리 마음속에서 묻힌다. 우리 모두는 다 각자가 스스로에게 하나의 독립된 세상이다. 나는 가끔 사탄을 만난 하와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오갔는지가 궁금하다. 우리는 단지 상상만 할 뿐이다. 물론 하와의 생각을 정확하게 알 길은 없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 3:6). 이런 구절이 있음에도 우리는 그녀가 사탄의 말을 듣고 생각했을 구체적인 내밀한 마음속 대화를 알 길은 없다. 하와는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저 과일 정말로 맛있어 보이네.”, “저건 나를 지혜롭게 할 것이 확실해.”, “이 사탄의 말을 믿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우리는 아담과 하와가 잘못된 결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은 속았다. 아담과 하와가 한 마음속 대화는 치명적인 실수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있으면서도 사탄에게 귀를 기울였고, 결과적으로나 의도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했다. 사탄은 그들의 마음속에 자기기만을 심어 넣었다. 사탄과 대화하던 어느 순간에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에게 거짓말을 하는 법을 배웠다. 자기기만은 자주 접하지 못하는 주제이다. 스탠포드 철학 사전(Stanford Encyclopedia of Philosophy’s, SEP)은 여기에 관해서 이렇게 소개한다.자기기만은 용어의 정의와 전형적인(paradigmatic) 사례를 포함해 사실상 모든 측면에서 철학자들 간 논쟁의 문제이다. 최소한의 의미만 부여할 경우, 자기기만은 어떤 동기로 인해 압도적인 반대 증거에도 불구하고 거짓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럼에도 어떤 측면에서는 마치 진실을 알고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다.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살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좋은 것만 주었지 나쁜 것은 하나도 주지 않았다. 사탄과 이야기할 때, 그 두 사람은 사탄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사탄과의 대화를 보면, 그들은 진짜 진리가 뭔지에 관해서 희미하게나마 인식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SEP는 계속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그러나 자기기만이 개인적으로나 또는 집단적으로 자기 지식(self-knowledge)을 얻는 데에 장애물의 역할을 하는 한, 그것은 단지 철학적으로 흥미롭게 다룰 문제 그 이상이 된다. 자기기만은 실존적 우려를 자아내는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되는 경우, 자기기만은 우리가 자신에 대해서 또 타인과 세상에 대해서 얼마든지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다는 현저한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얼마든지 스스로에게도 이방인이 될 수 있고, 또한 인간에게 중요한 도덕적 책임(moral engagements)이라는 본질에도 눈을 감고 살 수 있게 된다.인간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 거짓말하는 건 사탄만이 아니다. 우리도 거짓말쟁이다. 남들에게만 거짓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거짓말을 한다. 이 사실은 SEP가 설명했듯이, 우리가 얼마든지 스스로에 대해서 왜곡된 생각을 가지고 살 수 있음을 ‘시사’한다. 정말로 우리는 잘 속는다. 우리가 실재(reality)라고 생각하는 게 실재가 아닐 수 있다. 우리의 마음은 연기와 거울로 가득한, 재미있는 곳이다. 그렇기에 절망감에 빠져 예레미야가 이렇게 말한 것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렘 17:9).시편 15편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1절). 그리고는 대답한다.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2절). 이 짧은 문답은 바로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문제를 다룬다. 누가 하나님의 면전에 나갈 수 있을까? 아담과 하와 같지 않은 사람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스스로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는 자이다.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그는 하나님께 순종했고 그의 마음에 진실만을 말했다. 그건 그 자신이 바로 진리였기 때문이다. 그럼 마음에서 나오는(from hearts) 진리를 말하는 것 뿐 아니라, 마음에서도(in hearts) 진리를 말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진리를 말하는 길을 따라 예수님을 쫓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세 가지를 생각해보자. 진리를 알라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하려면 먼저 우리가 진리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예수님은 성경을 알았고 또 공부하면서 자랐다. 공생애 사역 내내 말씀을 인용했고, 희망을 가지고 말씀을 끝까지 의지했다. 우리도 말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나에 대해서, 또 가족과 교회 그리고 직장에 관해서도 비관적인 태도를 갖기 쉽다. “나는 결코 바뀔 수가 없어. 하나님이 이렇게 화를 못 참도록 만드셨는데, 뭐.”, “이 직장은 정말로 구제불능이야, 정말로 개판이야.”, “이놈의 교회에는 위선자만 가득 차있네.” 이 모든 게 다 거짓말이다. 이런 모든 생각들, 우리가 표현하지 않고 마음에만 품고 있는 모든 생각들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짚어주는 성경 구절이 있다. 먼저 화를 못 참는 성격과 관련해서, 인내는 성령의 열매이고 또 하나님은 우리가 더 거룩해지길 원하신다는 것이 진리이다(갈 5:22; 히 12:10). 나와 별 관계없어 보이는 직장과 관련해서는, 우리는 다 주를 위해서 일하는 존재이기에 어떤 일도 나와 관계없는 일은 없다는 것이 진리이다(골 3:23-24). 교회 안 위선과 관련해서는, 교회도 죄인이 모이는 곳이지만 교회는 여전히 거룩하고 우리가 그리스도를 머리로 모시고 그리스도를 닮으려고 자라는 곳이라는 게 진리이다(고전 5:1-2; 엡 4). 예수님은 제자들이 진리 안에서 성화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진리가 무엇인지 알게 될 때, 그 진리는 당신이 스스로에게 말하는 거짓말을 물리치는 항생제가 될 것이다. 진리를 믿으라마음속에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결국 진리를 믿는다는 것이다. 마음속에서 거짓말이 들릴 때, 그래서 그 거짓말을 믿고 싶은 유혹을 느낄 때, 능동적으로 거짓말을 버리고 진리를 선택해야 한다. 이건 쉬운 일이 아니다. 공생애를 앞둔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거짓말을 앞에 놓고 반복해서 진리를 택하고 또 택했다(마 4).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억했고, 그 말씀을 믿겠다고 선택했다. 내가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은 비관적인 생각이 들 때, 우리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과는 달리 죄인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믿겠다고 선택하는 과정은 결코 쉽지 않다. 우리는 죄를 지으면서도 진리를 믿겠다는 선택을 해야 한다. 예를 들어서, 논쟁이 과열되다 보면 우리는 마음속에서는 내가 지금 상대편에게, 그게 배우자이든 아니면 직장 동료, 친구이든, 죄를 지은 것을 알면서도 내가 지금 확실하게 옳다고 믿고 싶은 유혹을 받게 된다. 이런 상황을 만나면, 무엇이 진리인지를 마음속에서 먼저 인정해야 한다. “상대의 동기가 뭔지 내가 미리 어림잡아서 가정하는 죄를 지었어.”, “너무 거칠게 반응하는 죄를 지었어.” 상대에게 정직해지고 치유 과정을 구하기 전에,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 진리를 행하라마음속에 있는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우리가 알고 믿는 그 진리가 말과 삶으로 드러날 때에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마음에 죄가 없었기에 아예 죄 자체가 없는 분이었다. 그의 마음속에 있는 진리는 자연스럽게 그의 말과 행동으로 드러났다. 야고보가 진리를 듣기만 하지 말고 행하라(약 1:22-25)고 했을 때, 나는 그가 진리를 행하는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있었다고 추측한다. 예를 들어, 에베소서 4장 32절은 이렇게 말한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이 간단한 권고의 말씀은 한 가지 진리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하나님이 우리를 용서하셨다. 그렇기에 우리가 삶에서 그 진리를 실천하면서 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한다. 한편으로, 우리가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전혀 다른 일을 하게 된다. 예를 들어, 도저히 희망이 없는 위선자가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거짓말을 믿게 되면, 우리는 그 거짓말에 근거해서 행동한다. 쉽게 잡담에 휩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게 된다. 그리고 결국에 믿음을 떠나게 된다.그러나 그와 반대로 지금과 같은 세대에서는 죄인들이 모이는 곳이 교회라는 진리를 믿게 되면, 우리는 사람들의 죄성을 보면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 우리 각자가 다 거룩한 나라이며 지금 함께 새 예루살렘으로 향하고 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믿기만 한다면, 미래를 바라보며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벧전 1:5; 계 21). 포기하면 안 된다. 서로를 세워주어야 한다. 우리는 우리 속에서 계속 진리를 드러내야 한다. 마음속 거짓말을 멈추고 그 대신 언제나 진리만을 말하게 되는 그날을 소망한다. 이 세상을 살면서 마음속에서 무엇이 맞고 틀린지, 무엇이 진리이고 아닌지를 놓고 갈등하지 않는 삶은 상상하기 힘들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 마음으로도 오로지 진리만을 말했고 또 지금도 여전히 진리만을 말하는 바로 그 예수님처럼, 우리도 변화될 그날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고전 15:51-52). 원제: Speak the Truth in Your Heart출처: www.ligonier.org번역: 무제
영성
영적성장
혼잣말
마음
거짓말
진리
자기기만
에덴동산
선악과
거짓말쟁이
십대가 부모에게 원하는 것: 상담자의 관점
by Leia Joseph
2021-06-26
지난 17년 간 나는 십대를 위한 음악 교사와 상담자로 사역했다. 내가 가르친 학생들은 모든 십대가 겪는 일반적인 문제(불안, 사회적 압력, 부모와의 갈등, 정체성 및 소속에 대한 질문)뿐 아니라 좀 더 심각한 문제(학대, 자해, 정신 질환, 왕따)까지 겪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십대를 가장 크게 도울 수 있다거나 또는 방해할 수 있는 한 가지 중요한 주제는 그들이 부모로부터 받는 사랑과 지원에 대해서 어떻게 느끼는가 하는 문제이다. 다음 여섯 가지 원칙은 내가 그 과정에서 배운 교훈들이다. 1. 관계를 유지해야 하지만, 절친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하나님은 우리를 관계적 존재로 창조하셨다. 즉 기질에 관계없이 모든 자녀는 부모가 자신들을 알아주기 원한다. 내가 상담한 많은 학생들은 부모와의 건전한 관계를 원한다. 그러나 십대는 그게 쉽지 않다. 고등학교 시기는 어린 시절에서 성인으로 옮겨가는 시간이다. 동시에 호르몬이 폭발하고, 뇌의 전두엽 피질(시간 관리, 올바른 판단, 조직, 충동 제어, 목표 설정 및 장기적 결과 이해를 담당함)이 여전히 발달하는 시간이다. 또 이 시기의 부모와 청소년들은 모두 다 새로운 상황 속에서 새로운 역할 정립을 탐색하는 때이기도 하다. 이 기간 동안에는 무엇보다 자녀 양육에 기본이 되는 상담 원칙을 추가해야 한다. 많은 질문을 하면서도 신체 언어와 기분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폭발하는 호르몬을 기억하라). 때때로 그냥 곁에서 들어주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아야 하며, 그러다가 기회가 되면 대화를 나누어야 한다.당신 집의 십대가 언제 가장 말을 많이 하는가? 그 패턴을 확인하고 그 시간대에 대화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보자. 예를 들어, 아이가 주로 밤에 이야기를 한다면, 그때 함께 초콜릿 칩 쿠키를 만드는 것도 한 방법이다. 십대 시절은 자녀가 굳이 표현하지 않더라도 그 어느 때보다 부모를 필요로 하는 시기임을 명심하라. 그들이 원할 때 부모가 대화를 들어줄 위치에 있어야 하는 중요한 시기인 것이다. 그들이 마음을 열 때 조용히 경청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이 부모에게서 원하는 건 절친의 모습이 아니다. 그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은 부모다운 모습이다.그리고 그들에게 필요한 건, 그들이 열 살 때의 부모가 아니다. 그래서 부모들은 그들의 삶에서 은혜를 찾아내고 그로 인해 기뻐하며 자녀를 격려하고 응원하는지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그들에게 필요한 건 어린애 대하듯 잔소리하는 부모가 아니다. 도리어 자녀가 실패하도록 언제까지 그냥 내버려 둬야 할 지 현명하게 판단할 수 있도록, 또 그들의 문제에 부딪쳐 스스로 해결할 수 있도록 언제까지 그냥 놔둬야 하는지 알 수 있도록, 지혜를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그들이 천천히 둥지를 떠날 준비를 하도록 인내를 갖고 기도하며 준비시켜야 하는 것이다. 2. 자녀로 인해 당신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도록 하라우리는 모두 다 의무와 기쁨이 얼마나 대조적인지 알고 있다. 십대들은 보통 부모가 자신들을 사랑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거기에 그치지 말고 당신이 자녀로 인해 얼마나 기뻐하는지를 그들이 알도록 하라. 식료품 가게에 가거나 저녁 식사를 할 때 그들이 곁에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지를 표현하도록 하라.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녀와 함께 취미나 관심사를 나누는 것은 매우 좋은 방법이다. 서로 좋아하는 활동을 함께 하는 것처럼 부모와 자식 간에 유대감을 깊게 만드는 것은 없다. 3. 기술 변화에 주목하라고등학교 시절 좋은 추억을 가진 부모는 자연스럽게 자녀들도 자신과 비슷한 경험을 하길 원한다. 그러나 당신이 기억하는 학창 시절 기억과 지금 아이들의 기억은 많이 다르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의 학창 시절엔 스마트 폰, 이메일, 인터넷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 모든 상황은 결코 같을 수가 없다. 과거에 대화하고 싶을 때 필요한 건 전화였다. 부모는 다른 방에서 전화를 들고 내가 하는 말을 다 들을 수도 있었다. 이렇듯 직접 만나거나 손편지를 쓰는 거 외에 서로 소통하는 방법은 전화가 유일했다. 그러나 세상이 완전히 달라졌다. 오늘날 아이들은 부모가 자는 시간에 얼마든지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인터넷 기술이 세상을 어떻게 바꿨는지 살펴보라. 부모가 그런 세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면 자녀들과 제대로 이야기하는 건 불가능하다. 자녀들이 섹스팅과 사이버 대화를 어떻게 부모와 이야기할 수 있겠는가? 자녀가 사용하는 기술을 이해해야만 그들에게 닥친 거대한 유혹이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또한 대학으로 떠나고 난 이후에도 계속 자녀가 자신의 시간과 관심을 바른 곳에 쓸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는 다음 몇 가지를 지금부터 시작해야 한다. 자녀가 전자기기를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을 지정하든지, 특정 기술(예를 들어, Covenant Eyes)을 사용해서 자녀들이 어떤 프로를 보는지 감시를 하든지, 그리고 자녀들 스스로 이겨낼 수 없는 놀라운 테크놀로지에 대해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도록 부모로서 적극적으로 개입해야만 한다. 자녀들의 전두엽 피질이 지금도 계속 발달하고 있는 상태임을 기억하며 말이다.현대 기술은 십대의 삶의 전반에 걸쳐 영향을 미친다. 그것을 아예 제거하거나 금지하는 건 바람직한 해결책이 아니다. 대신, 그 기술을 배워라. 그래서 자녀가 현대 기술을 악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선을 위한 토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4. 성공과 더불어서 실패도 예상하라십대는 자신들의 가장 열렬한 팬이 부모이길 원한다. 그리고 부모인 당신은 그들이 진짜로 엄청난 스타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알아야 하는 것은 그들이 진짜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당신의 자녀도 당신과 똑같이 타락한 세상에서 살아가는 죄인이다. 당신이 바라는대로 그들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 수도 있겠지만, 그들은 또한 얼마든지 나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죄인이 될 수 있다. 자녀들이 실패하게 놔두라. 그리고 실패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라. 무슨 일만 생기면 득달같이 달려가 해결해주는, 그런 캥거루와 같은 부모(helicopter-parenting mentality)가 되지 않도록 유의하라. 대부분의 성공은 언제나 과거의 실수로부터 배운 뒤 얻는 결과물이다. 자녀가 지은 죄에 관해서 변명할 필요도, 또 그런 죄 때문에 충격을 받을 필요도 없다. 고군분투하며 살아가려는 의지를 가진 십대들에게 가장 큰 장애물은 그것을 보고 안절부절하면서 힘들어하는 부모의 모습이다. 십대 자녀를 지금 당신이 싸우고 있는 그 죄와의 전투 현장으로 초대해보라. 그리고 그들에게 그 죄와 싸워나가는 부모들의 모습을 보게 하라. 그래서 자녀들이 죄를 짓지 않기를 그토록 바라는 이유가 다름 아닌, 그 죄가 궁극적으로 아이들을 멸망시킬 거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임을 깨닫게 하라. 자녀들에게 그들이 겪고 있는 갈등이 얼마나 힘든 지 부모들도 알고 있음을 인식시키라. 그리고 부모인 당신도 아이들과 다르지 않은 싸움을 하고 있음을 보여주라. 5. 자녀에게 신경쓰라, 그러나 다른 일도 잊으면 안 된다십대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곁에 누군가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자기 때문에 중요한 만남까지 취소하는 부모의 모습을 통해서 그들은 사랑과 안전감을 느끼게 된다. 십대는 자랄수록 점점 독립적이 되는데, 어느 순간 자신이 부모에게 있어서 세상 전부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은 또한 부모의 삶에서 자신들 보다 더 중요한 게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런 자각은 그들에게 말할 수 없는 부담과 비행(vice)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당신은 그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당신 속에 주신 열정을 탐구하고, 스스로의 안녕을 돌보고, 당신이 섬길 주님을 찾아야 한다. 자녀도 자녀지만 당신 자신을 위한 삶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6. 하나님의 계획은 당신의 꿈보다 더 빛난다는 사실을 믿으라당신은 세상의 그 무엇보다 자녀를 사랑하고, 그들을 위해서 죽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좋은 부모가 항상 좋은 자녀를 가지는 건 아니다. 부모의 온갖 사랑에도 불구하고 자녀는 얼마든지 부모를 밀어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당신보다 자녀를 더 사랑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자녀를 위한 사랑과 기도를 쉬지 말아야 한다. 내가 전에 다니던 교회의 목사님께서 자주 하신 말씀이 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은 있다.” 당신의 자녀가 죄에 사로잡힌 상태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아직 이야기가 끝난 건 아니다. 바로 오늘 그들을 더 사랑하고 돌보아야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당신이 차마 상상도 할 수 없는 놀라운 이야기를 하나님이 당신의 자녀를 통해 쓰실 수 있도록, 하나님을 더 신뢰하라. 원제: What Teens Need from Parents: A Counselor’s Perspectiv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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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저지르는 중상모략과 가십은 사촌지간
by Jeff Robinson
2021-06-24
조셉 스토웰(Joseph Stowell)이 중상모략(slander)과 가십을 ‘재앙적인 사촌’이라고 부른 것처럼 서로의 관계를 파괴하고 또 그 어떤 영적 질병보다 심각한 교회 분열을 일으키는 것은 없다. 아담의 후예들이 얼마나 가십을 사랑하는가!오래되고 진부한 어떤 표현은 이 죄가 주로 여성의 영역에 속한다고 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남자들도 하나 다를 게 없다. “이봐, 요즘 오랜 친구 짐에 관한 얘기 들었어?”라며 대화를 시작할 때 솔깃해하는 사람들을 생각해보라. 이런 식의 말은 사람들의 주의를 끌기 마련이다. 죄인이 특히 좋아하는 것이 더러운 것이기에 가십은 죄인들의 마음을 더 강하게 끌어당긴다. 우리는 특히 사회적, 경제적, 교육적인 측면에서 나보다 나아 보이는 사람, 또는 유명인 계층에서 일어나는 가십을 즐긴다. 그뿐 아니라, 나보다 아래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과 관련한 가십도 전혀 싫어할 수 없다. 그들에 대한 나쁜 소식을 듣고 또 전파하기를 즐긴다. 돈 헨리(Don Henley)는 그의 1982년 히트 곡 “더러운 세탁물(Dirty Laundry)”에서 이 사실을 입증했다. 주류 뉴스 매체의 황색 저널리즘을 비판하는 가사지만, 헨리의 말은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더러운 작은 비밀, 더러운 작은 거짓말모든 사람의 파이 조각에는 더럽고 작은 내 손가락이 들어있다.우리는 당신을 잘게 잘게 자르고 싶어한다. 우리는 더러운 세탁물을 좋아해솔로몬은 영감을 받아 이렇게 표현했다.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잠 18:8).우리는 다른 사람들 이야기를 좋아하기에 가십은 매력적이다. 매튜 미첼(Matthew C. Mitchell)이 지적했듯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가십도 하나의 이야기이다. 단지 당사자는 모르게 그 뒤에서 은밀하게 들려주는 나쁜 이야기이다. 가십은 관계를 망치고 친한 친구조차 분리하는 속삭임이라고 성경은 말한다.“패역한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말쟁이는 친한 벗을 이간하느니라”(잠 16:28).친구에 대한 가십을 들을 때, 그것은 당신의 마음에 의심을 심고 의심의 장벽을 올린다. 또한 어떤 친구가 다른 사람에 대해 당신 앞에서 가십을 전한다면, 이 친구가 나에 대해서도 이런 식으로 이야기할지 모른다는 의문이 당신 맘속에 싹틀 것이다. 결국 가십은 신뢰를 파괴하고 관계 내에서 냉소주의를 불러일으킨다. 가십은 말 그대로 서로를 죽이는 말이다.전도서의 저자조차도 인간은 죄인이기에 살다보면 언젠가는 그 누구도 예외없이 다른 사람에 관해서 가십을 전하는 존재라고, 지나가듯이 언급한다. 그리고 저자는 당신도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화가 났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또한 사람들이 하는 모든 말에 네 마음을 두지 말라 그리하면 네 종이 너를 저주하는 것을 듣지 아니하리라 너도 가끔 사람을 저주하였다는 것을 네 마음도 알고 있느니라”(전 7:21–22).가십은 중상모략과는 좀 다른데, 주로 별생각 없는 잡담 수준에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중상모략은 그 정도에서 훨씬 더 심각하다. 중상모략중상모략은 어떤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정보를 공개적이고 의도적으로 공유하는 것이다. 그것은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그리고 해당되는 사람에게까지 해를 끼치기 때문에 삼중으로 죄를 짓는 셈이다.중상모략은 성경에서 수십 번 언급된다. 중상모략도 가십의 일종이다. 다른 사람의 인격을 더럽힐 의도로 해로운 정보를 전달하는 행위이다. 저널리즘에서는 “미리 계산된 악의”라고 부른다. 즉, 다른 사람의 평판을 해칠 목적으로 진실일 수도 있지만 얼마든지 거짓일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한 짓이 바로 하나님에 대한 중상모략이었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창 3:4-5).사탄은 사실이 아닌 이야기를 통해서 하나님을 중상모략했다. 마귀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고 싶어 하고(하나님은 죽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만 사탄은 죽지 않을 거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이 모든 권능과 좋은 것을 자기만 가지고 싶어 하는 이기적인 신으로(인간도 얼마든지 하나님만큼 위대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그 비밀을 알려주지 않을 거라고 한다) 묘사한다.중상모략은 종종 죄인의 시기심에서 흘러나온다. 악마에 대한 헬라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비방하는 자”이다. 야고보서 4장 11-12절은 중상모략을 이렇게 날카롭게 기소한다. “형제들아 서로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관이로다 입법자와 재판관은 오직 한 분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이기에 이웃을 판단하느냐.”중상모략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 사이의 교제를 깨뜨리고, 왕의 법(십계명에 요약된 도덕법)을 어기는 사악한 죄이다. 우리가 다른 신자에 대해 거짓을 말할 때, 우리는 그 사람뿐 아니라 사실상 하나님의 율법에 관해서도 틀린 말을 하는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그렇게 함으로써 중상모략자가 자신을 율법보다 더 위에 있는 판사로 삼고 있다고 주장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근거로 판단하는 대신 그 중상모략자는 자신의 생각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자기 사랑, 자기 자랑중상모략과 가십의 핵심은 무엇인가? 자기애와 자기 자랑이 섞여서 만들어내는 나르시즘이다. 중상모략과 가십을 퍼뜨릴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무너뜨리고 나 자신을 올리려고 한다. 스토웰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훼손하면서까지 자신을 멋있게 보이고 싶어하도록 만드는 몇 가지 자기중심적 충동을 다음과 같이 나열한다. - 호기심. 호기심 때문에 우리는 뉴스를 듣는다. 다른 사람을 무너뜨리지 않는 한, 호기심은 좋은 것이다. 디모데전서 5장 13절은 바쁜 사람과 가십을 연결한다. 이런 경우에 호기심이 문제되지 않는다. 솔로몬은 중상모략자는 전혀 신뢰할 수 없다고 말한다.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잠 11:13).- 관심의 중심이 되고자 하는 욕구. 다른 사람이 관심 갖는 누군가에 대한 특종을 가지고 있는 경우, 내가 가진 바로 그 정보 때문에 나는 관심의 중심이 될 수 있다.- 자신을 높일 수 있는 기회. 윌 듀란트(Will Durant)가 말했듯이 “다른 사람에 대해서 나쁜 말을 하는 건 자신을 칭찬하는 부정직한 방법이다.”- 쓴뿌리. 악의적인 말은 종종 쓴뿌리(원한) 때문에 생긴다. 내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에 대한 끔찍한 정보를 퍼뜨린 동료가 있었다. 애초부터 사장 자리에 가고 싶어했던 건 그 동료였는데, 그 사장이 들어왔고 그는 그 꿈이 좌절되었다. 그 동료는 사장을 향해 복수처럼 보이는 행동을 자주 했다. 그는 자신의 행동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어리석은 인간으로 보이는 지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이처럼 중상모략은 사람을 장님으로 만들어간다. 이 중상모략이 얼마나 나쁜 일인가? 내가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이 참석하던 가정 교회를 같이 다니던, 존경받던 한 부인이 동네 부잣집 남자와 바람을 피운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건 말 그대로 완전히 엉터리 중상모략이었지만, 그 여자의 남편은 그 소문을 믿었고 결국 자살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에베소 교회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엡 4:31). 중상모략과 가십은 교회를 죽이고, 결혼을 망치고, 또 우정을 파괴한다. 변화된 혀마태복음 12장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내뱉은 모든 죄악된 말과 관련해서 심판하겠다고 경고했다. 그 누구도 예외없이 우리 모두가 다 가십과 중상모략을 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할 때, 이 말씀은 우리를 두렵게 한다. 이 상황과 관련해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있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이 우리의 이런 죄까지 용서하기 위해서 죽으셨기 때문이다. 주님은 죄를 짓게 하는 손을 자르고 죄를 짓는 눈을 뽑으라고 말씀하셨다. 그런 예수님이기에 얼마든지 우리를 향해 중상모략하고 가십을 일삼는 혀를 뽑으라고 말씀하실 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내주하시는 영이 계시고, 그로 인해 가십과 중상모략을 죽일 큰 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우리 삶에서 이 ‘재앙적인 사촌’을 은혜롭게 잘라내도록, 하나님께 간구하자. 편집자 주:이 글은 저자가 TGC에서 새로 출간한 그의 책 ‘혀 길들이기: 복음은 어떻게 우리의 말을 바꾸는가(Taming the Tongue: How the Gospel Transforms Our Talk)’에서 발췌한 글이다.원제: Communication’s Two Catastrophic Cousins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중상모략
가십
이웃비방
성령의능력
말의힘
전도서
잠언
비방하는자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대마초를 피워도 될까
by Kevin J. Vanhoozer
2021-06-21
대마초와 복음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약사였던 내 아버지는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인생을 망치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1960년대와 70년대, 나는 심심풀이로라도 대마초를 건드리는 것은 나를 파멸로 이끌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자랐다. 결과적으로, 나는 많은 미국인들에게 새로운 표준이 되어 가는 상황, 즉 오락 목적으로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이미 합법화 되었거나 되어가고 있는 지금 현실에 대해 사실상 개인적인 지식이 거의 없다. 오락 목적의 합법적인 대마초 사용이 기독교인의 윤리와 삶에 과연 어울리는 걸까? 예수님은 나의 멍에가 쉽다고 했지만(마 11:30), 대마초를 한 모금 빠는 것이 아직까지는 더 쉽다. 목사는 이 문제에 관해서 어떻게 말해야 할까? 십자가를 지고 가는 제자들이 대마초를 피워도 되는 걸까? 내가 사는 일리노이에서는 오락 목적으로 대마초를 피우는 것이 이미 합법화가 되었다. 그리고 다른 예닐곱 주에서도 합법화가 되었다. 주 산하 카운티와 동네들은 오락 목적으로 대마초를 파는 것을 허용해야 하는가 여부를 놓고 양분되어 있다(의료 목적의 대마초는 별개의 문제다). THC(대마에서 얻어지는 향정신성 화학물질)는 이제 구운 음식, 음료, 그리고 연기 흡입을 통해서 섭취가 가능해졌다(시카고에 본부를 둔 크레스코연구소(Cresco Lab)는 500가지 이상의 대마초 제품을 생산한다). 대마초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판매 세금과 라이센스 로얄티를 통해서 매출 증대를 바라기 때문이고, 또 대마초를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로 인해 건강 서비스에 발생할 수 있는 비용과 더불어 중독자 및 정신병 전력이 있는 사람들이 유발할지 모르는 전례없는 개인적 및 사회적 비용에 대해 걱정한다. 성경은 대마초라는 주제에 관해서 침묵한다(술취함에 대해서는 아니다). 대마는 에덴동산에서 얻을 수 있는 열매가 아니었다. 그리고 요한복음 6장 10절 속에 대마초에 관한 내용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영리하긴 하지만 잘못된 것이다. “그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영어 성경에는 잔디가 grass로 표현되었다. grass는 대마초를 의미하는 단어이기도 하다-역자 주)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잡초의 기준이 되는 원칙’(the normative principle of weedship)이라고 부르는 것, 즉 성경이 명백하게 금지하지 않는 것은 얼마든지 해도 된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피해야 한다. 파이프 속 마약: 누구나 알아야 하는 것오락 목적의 대마초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1970년대에 대마초가 합법화된 네덜란드의 사례를 들곤 한다. 네덜란드는 그 이후 범죄가 만연해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사회가 붕괴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대마초 합법화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적절하게만 사용하면 대마가 알콜이나 담배보다 더 안전하다고 주장한다. 대마초 합법화의 득과 실에 관한 공공 정책의 관점을 볼 수 있는 좋은 책은 ‘대마초 합법화: 모두가 알아야 할 것’(Marijuana Legalization: What Everyone Needs to Know)이다. 일부 사용자는 감각적 경험에 대한 인식이 높아졌다고 보고했지만, 연구에 따르면 대마초 사용이 가져다주는 가장 직접적인 효과는 어느 정도의 인지 장애와 수행 기능 판단 장애라고 결론을 내렸다. 위에서 언급한 책은 이렇게 서술한다. “대마초는 언어 및 작업 기억, 주의력 및 정신 운동 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다.”대마초가 뇌에 미치는 단기 및 장기 영향에 관한 가장 좋은 자료 중 하나는 ‘약물 남용에 관한 국립연구소’(National Institute on Drug Abuse) 속 대마초에 관한 페이지다. 거기에 따르면 대용량의 대마초를 상습적으로 사용하는 사람은 삶에서 느끼는 만족도가 낮을 가능성이 높고 정신 및 신체 건강은 악화되고 또한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한다. 미국소아과학회(American Academy of Pediatrics)에 따르면 십대와 청소년이 대마초를 사용하면 다음과 같은 결과가 일어난다. “단기 기억력이 떨어지고 집중력, 주의력 및 문제 해결 능력이 떨어진다 … 운동 제어, 조정, 판단, 반응 시간 및 추적 능력에도 변화가 있는 것이 관찰되었다.”바로 이런 모든 이유 때문에 국가안전위원회(“우리의 사명은 안전”)는 고용주가 안전 문제가 예민한 작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라면, 근무하지 않을 때에도 대마초 사용을 금지하도록 권장하고 있다. 일리노이주에서 모든 약국은 “대마초 섭취가 인식과 운전을 방해할 수 있으며, 대마초는 성인만이 사용해야 하고, 대마초는 습관성을 유발할 수 있다. 또한 임산부나 모유 수유 중인 여성은 사용해서는 안된다”라는 경고문을 게시해야 한다. 미국 최대 의사 협회인 미국의료협회(American Medical Association)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믿고 있다. “대마초는 위험한 약물이고 당연히 심각한 공중 보건 문제의 원인이 된다.”개신교인의 놀이 윤리?지금까지 말한 내용에 대부분 찬성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락 목적의 대마초 사용을 어떻게 봐야 할지에 대해서는 생각이 다 다르다. 그러므로 한정형용사(qualifying adjective)인 ‘오락 목적의’(recreational)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개신교인은 이미 직업 윤리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더 향상된 놀이 윤리(play ethic)다. 대마초를 책임감 있게 사용하고자 하는 성인 그리스도인, 즉 자신의 집에서 은밀하게 적절한 정도로 피우겠다는 사람에게 목회자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비록 불법이 아니더라도 대마초 흡연은 여전히 부도덕한 일이라고만 주장하는 것은 문제의 핵심을 모르는 소리다. 게다가 2018년 6월 갤럽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 65퍼센트가 대마초 흡연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없다고 대답했다. 수면 아래에 숨은 진짜 질문은 대마초를 통해 얻고자 하는 효과, 그러니까 불안감 감소, 황홀감 체험, 창의력 향상 등을 과연 가치 있는 것으로 볼 것인가 아니면 해로운 것으로 볼 것인가의 문제다. 특히 오락 목적의 대마초 사용이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과 과연 어울리는 것인가(빌 3:20)?‘레크리에이션’(Re-creation)의 원래 의미는 영적으로 새롭게 되는 과정을 가리킨다. 즉 영적인 회복 또는 영혼의 소생을 의미한다. 그러나 오늘날 이 말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긴장을 풀거나 즐기기 위해서 하는 일을 의미한다. 레크리에이션은 여가 활동이다. 여가는 ‘자유로운’ 시간이다. 이 시간은 혼자 보낼 수도 또는 함께 보낼 수도 있다. 두 경우 다, 영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뭔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요세프 파이퍼(Josef Pieper)는 여가를 세상의 현실을 인식하는 능력을 육성하는 데 필요한 지성의 태도와 영혼의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는 또한 여가는 문화의 기초라고도 말했다. 그렇다면 대마초 사용이라는 여가가 만들어내는 문화란 어떤 것일까? 대마초 사용과 관련이 있는 언어가 거기에 대한 힌트를 제공한다.대마초와 대마초가 일으키는 효과를 표현하는 단어는 수백 개가 넘는다. ‘망각’, 대마초는 기억을 잃게 한다. ‘후디니’(Houdini, 다양한 탈출 마술로 특히 유명한 미국의 마술사-역자 주), 현실에서 탈출하도록 한다. 그리고 ‘돌처럼 굳어버린’(stoned), 취해서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도록 한다. 더 게을러진 몸과 마음에서 파생되는 행동들과 결과로 규정되는, 점점 더 돌처럼 되어가는 문화와 그리스도가 도대체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 제자들을 위한 충고두 가지 성경적으로 검토할 것이 있다. (1) 합법적인 것과 편리한 것의 대비, 그리고 (2) 경계할 것을 상기시킴 – 목회자가 오락 목적으로 대마초를 사용하는 문제에 관해서 옳고 그르냐의 도덕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것보다 지혜로운가 어리석은가의 제자도의 입장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필요한 정보를 주는 것.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고전 6:12). 바로 이것이다. 바울은 아마도 여기서 당시 방탕한 고린도인의 슬로건이라고 할 수 있는 어떤 한정형용사를 인용하는 것 같다. 바울은 지금 우리가 몸으로 하는 어떤 행동도 다 기독교인의 복음 전파와 관련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바울은 이어서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뜻을 더 명확하게 했다. “모든 것이 내게 가하나 내가 무엇에든지 얽매이지 아니하리라 …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고전 6:12; 10:23).성령 충만은 자기 절제로 이어진다(갈 5:22-23). 그에 반해, 황홀감에 빠지면 절제력이 사라진다. 술을 마시는 것과 대마초를 피우는 것의 차이에 주목하라. 식사 시간에 곁들이는 한 잔의 와인은 사람을 취하게 하지 않는다. 그에 반해 비록 오락 목적이라고 해도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결국 황홀감에 빠지기 위해서다. 두 번째 고려할 점은 그 근거를 항상 깨어서 경계를 늦추지 말라는 예수님의 명령에서 가져왔다는 것이다(막 13:32-37). C. S. 루이스는 자신의 회심을 깨어남으로 묘사했다. 우리는 제자도를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 항상 깨어있도록 만드는 프로젝트라고 묘사할 수 있다. 복음을 지닌 천국 시민권자로서 언제 어디서나 거기에 걸맞는 삶을 사는 특권과 책임에 깨어있어야 한다. 루이스의 ‘은의자’(The Silver Chair)에서 질(Jill)과 유스터스(Eustace) 및 퍼들글럼(Puddleglum)에게 그린 레이디가 던진 주문과 마찬가지로, 대마초는 세상을 명확하게 인식하는 우리의 능력을 흐리게 하고 제자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우리의 긴급함을 둔화시킨다. 깨어남은 구약에서도 중요한 주제 중 하나다. “그 때에 내가 예루살렘에서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 마음속에 스스로 이르기를 여호와께서는 복도 내리지 아니하시며 화도 내리지 아니하시리라 하는 자를 등불로 두루 찾아 벌하리니”(습 1:12). “찌꺼기 같이 가라앉아서”(complacent)의 히브리어는 문자적으로 “와인 찌꺼기의 농축”을 의미한다. 대마초를 한 모금만 빨아도 비슷한 효과가 일어난다. 현대 문화는 일반적으로 대마초 사용자를 불행하긴 하지만 해가 되지는 않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돌처럼 굳은’(stoned), ‘취한’(baked) 및 ‘무뎌진’(blunted)은 모두 수동적 동사로, 마약에 취해서 무기력해진 상태를 보여주는 단어다. 제자가 성자이면서 동시에 게으름뱅이일 수 있을까? 오락용 대마초는 나태해지는 가장 최신의 방법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단순한 게으름이 아니라 아예 깨어있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을 만큼 심각한 죄악의 상태다. ‘기독교 교리에 관하여’(On Christian Doctrine)에서 사용하는 것과 즐기는 것의 차이점을 설명한 어거스틴(Augustine)의 말은 오락용 대마초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 자체로 즐길 수 있는 대상, 사랑받을 수 있는 대상은 오로지 삼위 하나님뿐이다. 대마초를 피워서 황홀경을 느끼겠다는 사람은 우리가 누리고 즐겨야 할 가장 높은 하나님 그분 외에 단지 창조물을 사용하여 뭔가를 즐기겠다는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문화는 오락용 대마초는 말할 것도 없고 레크리에이션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다. 레크리에이션을 일이 주는 억압과 대비함으로써 우상화시키려는 유혹이 있는 동시에 그 시간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단지 ‘쉬는’ 시간으로 간주함으로 경시하려는 유혹도 같이 존재한다. 선한 청지기 정신은 일하는 방식에서만이 아니라 쉬는 방식에도 적용된다. 대마초를 피우는 것은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다. 제자는 시간과 에너지 사용에 있어서 지혜로운 청지기가 되어야 한다. 레크리에이션 시간을 어떻게 보내는가도 우리를 영적으로 다듬어가는 과정이다. 지혜로운 제자라면 꼭 기억해야 할 말씀이 있다. “깨어 있으라”(막 13:37).원제: Should Followers of Christ Use Recreational Marijuana?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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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절제
기도하지 못하게 만드는 네 가지 거짓말
by Scott Hubbard
2021-06-20
시간을 따로 정해서 기도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기도가 아닌 다른 일을 해야 할 이유가 최소 한 개 이상 머리에 떠오른다. 어떤 이유들은 나름 타당해 보이기도 한다. “좀 더 자야지” 또는 “할 일이 너무 많잖아.” 설득력은 좀 떨어지지만 다른 이유들도 많다. “그 경기를 누가 이겼을까?” 또는 “이메일부터 확인해야지.” 기도하려고 하면 이런 이유들이 치고 들어온다는 것을 나는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이유들을 몽땅 묶어서 뭐라고 부를지, 그 이름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바로 거짓말이다. 물론 이런 이유들이 항상 거짓말인 것은 아니다. 잠을 생각해보자. 잠을 자지 않고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고, 우리는 무릎 꿇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만큼이나 베개를 베고 자면서도 하나님을 경외할 수 있다(시 127:1-2). 그러나 문제는 이런 이유들이 기도하려고 할 때면 어김없이 치고 들어와서 기도 시간을 망친다면, 그것들도 거짓말이 될 수 있다. 우리로 하여금 육신을 죽이고, 지옥을 물리치며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기도를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참으로 편리한 속임수가 될 수 있다.이런 거짓말을 싸고 있는 가면을 벗기고 그 진짜 민낯을 보게 되면 우리는 이런 거짓말을 결코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게 하는 네 가지 거짓말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예수님이 그런 거짓말을 얼마나 낱낱이 드러냈는지도 살펴보자.‘기도할 시간이 없어’우리의 기도를 막는 많은 거짓말 중에서도 특히 이 똑똑한 한 줄의 말은 종종 진짜같이 그럴듯해 보인다. “시간이 없어”라는 이 말은 단지 수학적인 시간 계산으로만 볼 때 극히 단순한 사실처럼 들린다. “24시간 밖에 없는 내 하루는 이미 꽉 찼어, 그러니까 기도는 내일 해도 돼”라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결코 그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나병환자를 치료하고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그를 둘러싼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예수님께 조금이라도 더 다가가려고 난리를 피우는 사람들 때문에(눅 5:1)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졌다. “예수의 소문이 더욱 퍼지매 수많은 무리가 말씀도 듣고 자기 병도 고침을 받고자 하여 모여 오되”(눅 5:15). 예수님의 사역은 성공적이었고 자연스럽게 많은 무리들이 몰려왔다. 단지 치료를 받으려는 것뿐 아니라, 그들은 “말씀을 들으려고도” 몰려왔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말씀을 사모하는 상황에서, 예수님도 기도를 건너 뛰고 이 잃어버린 양들을 구하기 위해 말씀을 좀 더 가르치는 것은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그러데 그 다음 구절을 보자. “예수는 물러가사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니라”(눅 5:16). 예수님의 매일매일 스케줄은 결코 가장 크게 소리를 지르는 다급한 일에 좌우되지 않았다. 어떤 중요한 일이 생겼을 때 개인적으로 하나님과 소통하는 시간보다 그 일을 더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와 달리, 예수님은 그런 거짓말에 결코 속지 않았다. 기도에 전심을 쏟기로 결심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수없이 찾아드는 차선의 선택지들을 향해서 “노”라고 말할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한다. 순종하는 자세로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이라면 자족하는 마음은 아버지를 향한 의존으로, 피상적인 바쁨은 진정한 생산성으로, 그리고 긴급한 일이 만들어내는 마음속 혼란은 성령님의 지배하심으로 바꾸어야 한다. ‘기도는 노력하는 만큼의 효과가 없어’이런 거짓말을 다른 사람들이 다 들을 정도로 소리내서 말할 만큼 용감한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기도가 효과가 없기 때문에 굳이 기도방에 들어가지 않는 사람이 우리 중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 중 많은 이는 과거에 집중해서 아주 오랜 기간 동안 기도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단지 더 커진 혼란, 도리어 우리의 의지력은 약해지고 돌아오는 결과도 미약하기 짝이 없기에 더 이상 기도하고 싶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이 거짓말에는 반쪽이지만 진실이 담겨 있다. 예수님이 경고하신대로, 기도는 끈질긴 노력을 필요로 한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눅 18:1) 한다고 가르쳤다. 사람이라면 기도를 하면서도 낙심하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비유에 나오는 과부처럼(눅 18:1-8), 기도하는 사람은 구하나 받지 못하고, 찾으나 찾지 못하고, 또 두드리나 안에서 부터 잠긴 문은 열리지 않을 것 같은(마 7:7) 그런 시간도 통과하는 것이다.그러나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우리의 기도하는 모든 노력이 다 허사라는 거짓말을 깨어부순다. 진실되고 믿음에 찬 모든 간구는 응답을 받게 되어 있고, 모든 찾는 자는 찾을 것이고 두드리는 모든 문은 더 이상 지체되지 않는다는 희망으로 채워진 채 언젠가는 열리게 되어 있다(마 7:8). 우리의 아버지는 기도 속에 갈등하는 우리 모두를 어떻게 해야 ‘좋은 것들’(마 7:11)로 채울지 잘 알고 있다. 가장 좋은 선물은 다름 아닌 하나님의 선하심이다. 만약에 우리가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조금이라도 더 깊이 엿볼 수 있게 된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을 하나로 모으는 시간, 육신의 정욕을 부인하는 시간, 그리고 머리를 숙이는 이 모든 기도의 시간은 그 자체로 가치가 있다. 기도가 그냥 허공을 때리는 것만 같은 날이면 C.S. 루이스의 다음 조언을 기억하도록 하자. “소위 말하는 ‘종교적 의무’를 수행할 때 우리는 마치 물이 없는 땅에 수로를 파는 것과 같다. 그리고 마침내 물이 터져나올 때, 우리는 물이 거기에 있었음을 알게 된다”(시편사색). 기도하는 어떤 날에는 그냥 땅을 파고 또 파면서 비를 기다리고만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우리는 물을 마신다. 그러나 땅을 파지 않고는 물을 마실 수 없다.‘기도 안 해도 오늘 하루 넉넉하게 감당할 수 있어’조금 전 살펴본 거짓말처럼 이런 말을 소리내서 하는 기독교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은 단지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 수백 가지의 삶의 모습을 통해서 이 말을 하고 있다. 깊은 단잠에서 일어나 아침을 든든히 먹고 뉴스까지 챙겨서 읽는데도 기도만 하지 않고 하루를 시작한다고 생각해보자. 그것은 결국 이렇게 외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 “나는 아침식사, 깊은 여덟 시간의 숙면, 그리고 적절한 정보가 없이는 하루를 시작할 수 없어, 그러나 기도 없이는 얼마든지 이 하루를 잘 살 수 있지.”이 거짓말이 가진 위력은 우리 자신의 경험에서 충분히 드러난다. 우리 중 대부분은 사실 기도하지 않고도 큰 사고 없이 하루를 잘 마무리한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기도하지 않은 날에도 놀라울 정도로 일이 잘 풀리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하나님을 향해서는 곁눈질도 하지 않으면서 월급을 받고, 아이를 양육하고 또 좋은 성적을 얻을 수 있다. 이런 실용주의적 삶의 양태가 가능한 것은 우리가 주님의 엄중한 말씀을 잊었기 때문이다.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요 15:5). 기도를 통해 예수님을 의지하지 않고서는(요 15:7), 우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기도가 없이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 어떤 것도, 우리의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기도하지 않고 노력해서 얻는 결과가 놀라울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결과가 하나님의 눈에는 영적으로 빵점(spiritual zero)일 뿐이다. 우리는 단지 침몰하는 배 위에 집을 짓고 있는 것이다.“금방 지나가는”(요1 2:17)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게 목표라면, 기도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하루를 잘 보낼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목표가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천사들이 감탄해서 박수치게 하며, 또한 영원 세세토록 칭찬을 받는 것이라면, 기도는 숨을 쉬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아’이것이 왜 거짓말인지를 드러내기 전에 우리는 먼저 회개하지 않은 죄는 하나님의 귀를 막아 우리의 기도가 들리지 않게 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편 저자는 이렇게 말했다.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그런 경우라면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듣지 않아”라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라, 가슴 아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회개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다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 많은 사람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부재를 느끼곤 한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타락한 세상에서 싸우고 있으며, 또한 안으로는 육신의 정욕 그리고 밖으로는 사탄에게 둘러싸여서 너무도 자주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시 65:2)인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는 이 특권의 가치를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왜 기도하는 특권이 우리의 것인가? 왜냐하면 예수님이 새로운 언약의 세대에 맞춰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요 16:26).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 천국 문을 두드린다면, 우리 이름을 근거로 기도를 들어달라고 한다면, 우리 자신의 공로에 힘입어 기도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을 근거로 기도하지 않는다. 대신 예수님, 하나님이 사랑하는 아들,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온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요 16:27; 17:3,6). 우리가 그의 안에 거하기만 한다면,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 있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하나님의 귀에 조금도 멀지 않은 것처럼, 우리의 목소리도 하나님에게서 결코 멀지 않다(요 16:28; 히 4:14-16). 종종 하나님이 너무도 멀리 있는 것처럼 느껴지곤 한다. 우리의 신음 소리를 듣기에는 하나님이 너무나도 멀리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우리는 고요함 속에서 몇 달, 아니 몇 년을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도 있다. 그리고 우리를 유혹하는 자는 우리 귀에 하나님 아버지의 귀가 우리에게 완전히 닫혀있다고 속삭인다. 그러나 그런 때조차도, 우리는 미가 선지자처럼 말할 수 있다. “오직 나는 여호와를 우러러보며 나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나니 나의 하나님이 나에게 귀를 기울이시리로다”(미 7:7).“하나님은 나의 기도를 들으신다”라는 마술과 같은 말 앞에서 이 모든 거짓말은 사라진다. 정말로 하나님이 그의 귀를 우리의 소원을 향해 열고 있고, 또 그의 어깨를 우리의 짐을 향해 기울이고 있고 또한 그의 빛나는 얼굴이 우리의 찬양을 향해 있다면, 이 세상 그 어떤 장애도 우리를 그로부터 떼어놓을 수는 없다. 분주함, 어려움, 그리고 자만심은 우리에게 기도가 아닌 다른 것을 하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나의 하나님, 내게 만족을 주며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있는 영광의 하나님, 당신은 내 기도를 들으십니다. 내가 그래서 기도합니다.”원제: Four Lies That Keep Us from Prayer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기도
거짓말
기도응답
C.S.루이스
선하심
천국문
시편사색
하나님 말씀을 듣는 자세
by Marshall Segal
2021-06-13
성경을 읽는 습관을 던져 버리는 법은 수백 가지가 넘는다. 그리고 그것이 무엇 때문이든, 하나같이 엄청나게 심각한 결과를 초래한다. 예수님은 예화를 통해서 우리가 만나는 이런 위험에 관해서 경고했다. 씨 뿌리는 예화를 들을 때면 우리는 자신을 좋은 땅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잠시 멈추고 어쩌면 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는 땅, 말라서 시드는 땅, 또는 가시덤불이 가득한 땅이라고 생각해보는 것은 어떨까? 우리 대부분은 자신이 베드로라 생각하지 가롯 유다는 물론 바리새인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누구나 자신에게 안전하고 보다 축복을 주는 쪽으로 스스로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이 씨 뿌리는 비유가 건강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주기보다는 안도감과 자신감을 불어넣는 것으로 사용되는 것은 전혀 이상하지 않다. 오, 하나님, 나는 다른 이들과 달라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어떤 경각심이나 기대감을 일깨우지 않고 단지 위로만 준다면, 우리는 지금 예수님이 전하는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 하고만 있을 때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너희가 어떻게 들을까 스스로 삼가라”(눅 8:18). 다른 말로 하면, 네가 좋은 땅이라고 간주하지 말고 네가 지금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받고 있는지 주의깊게 관찰하라는 말이다. 쉬지 말고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내 마음밭이 계속해서 촉촉하게 젖어 있도록, 말씀의 뿌리가 더 깊이 내리도록, 그리고 내 주변을 둘러싼 유혹과 방심에서 나를 보호해 달라고. 나를 지켜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해야 한다.천국과 지옥이 달려 있는 상황에서, 기쁨과 비극이 교차하는 상황에서, 그리고 눈앞에만이 아니라 우리 속에까지 장애물이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떻게 들어야 할지 우리는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이 말은 무엇인가?토양의 종류를 고려하기 전에, 먼저 우리가 다루고 있는 씨가 어떤 종류의 씨인지부터 알아야 한다. 진짜 씨가 그렇듯이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씨는 종종 주목을 받지 못하고 사라진다. 그러나 토양이 아닌 씨가 이 비유의 진짜 핵심이다. 아무리 비옥한 토양이라고 해도 씨를 심지 않으면 아무 것도 자라게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씨는 이 지구상에 있는 다른 어떤 씨와도 다른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비유를 시작한다.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눅 8:11). 우리의 마음밭이 어떤지 테스트 하는 첫 번째 방법은 바로 이 여섯 단어가 우리 마음에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를 보는 것이다. 애초에 말씀을 통해서 이 은하계를 창조한 하나님의 말씀인 이 씨를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굳이 우리가 열매를 맺으려고 바둥거릴 필요가 뭐가 있겠는가? 선포되는 복음과 기록된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바로 우리가 지금 말씀 속에 계신 하나님 그분 자체를 듣고 있다는 인식을 명확히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살전 2:13).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 3:16-17).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지혜와 상상에서 나온 것이다. 모든 문장, 구절, 그리고 성경 속 각권은 다 생명의 창조자, 알파와 오메가, 그리고 이 땅과 하늘의 주님의 마음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하나님의 손을 먼저 거치지 않고 우리 손에 들어온 성경 속 구절은 단 하나도 없다.겸손: 가장 큰 위협을 물리치기그러면 이런 씨를 담기 위해서 우리는 어떤 땅이 되어야 할까? 하나님의 말씀을 열 때 우리는 하나님을 향해서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할까? 다른 어떤 것보다도 다음 세 가지가 필요하다. 겸손, 복종 그리고 기도다.겸손이 가장 먼저다. 이 세상에 교만보다 우리의 마음밭에 독이 되는 것은 없다. 매일 성경을 읽는 데 바쁜 것은 그리 큰 위협이 아니다. 그러나 자기 확신은 그렇다. 며칠 동안 밥 먹는 것을 까먹는 사람은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몸이 음식을 달라고 외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며칠이 아니라 때로는 몇 주에 걸쳐 우리가 가장 필요로 하는 말씀을 잊고 살 때, 우리의 영혼은 뭐라고 외치는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홀로 보내고 싶은 욕구에 불을 붙이는 강력한 방법 중 하나는, 바로 우리 속에 남아있는 교만과 대적하고 그 교만을 없애는 것이다. 우리는 다윗 왕처럼 기도해야 한다. “하나님이여 나를 살피사 내 마음을 아시며 나를 시험하사 내 뜻을 아옵소서 내게 무슨 악한 행위가 있나 보시고 나를 영원한 길로 인도하소서”(시 139:23-24).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씨는 겸손함이 가득한 땅에서 자라는 것을 좋아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했다.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 66:2). 주님의 율법을 기뻐하는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손에 들고 이해하고 또 그 속에서 기뻐할 자격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은 말씀을 손에 들고 이해하고 또 기뻐하며 순종하는 하나하나가 은혜가 주는 선물임을 너무 잘 알고 있다. 그런 사람은 이렇게 기도한다. “내 눈을 열어서 주의 율법에서 놀라운 것을 보게 하소서”(시 119:18).복종: 하나님의 권위를 기쁘게 받아들이기겸손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즐거운 복종으로 이어진다. 성경이 정말로 전능하고, 거룩하며 공정한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 말씀이 가져다주는 두렵고도 놀라운 결과를 그 말씀을 듣는 우리가 과연 감당할 수 있을까? 말씀은 좀 더 나은 삶, 더 나은 생산성, 그리고 성공적인 인생에 관한 조언이 아니다. 우리의 영적 건강을 증진하는 데 필요한 제안도 아니다. 말씀은 하나님의 놀라운 약속에 관한 것이며 또한 어떤 경우에도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명령에 관한 것이다. 이 말씀은 권위가 있다. 그리고 최소한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오늘날 점점 더 인기를 잃어가고 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권위있는 말씀이 인기가 더 사라지도록 하는 명령을 우리에게 내리고 있다. 바로 복종이다. 그 누구도 다른 이가 자신에 관해서 자기가 인정하지 않는 완전한 권위를 갖고 있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라도 최소한 한 발 정도는 안전한 문 밖에 빼놓고, 그래서 심지어 하나님이라도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을 시킬 때는 도망갈 여지를 갖고 있는, 그 정도로만 ‘헌신’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경은 죄의 씨를 뿌리면서 위로를 받고, 용서를 받으면서 거룩을 포기하고 또 고통과 희생없이 기쁨을 얻는 식의 반쪽짜리 헌신을 할 여지를 조금도 허락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고 또 최소화하거나 피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 자신을 무시하고 소홀히 하며, 최소화하고 피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신 18:19). 이런 죄악은 도둑질, 간통, 또는 살인보다 더 중한 죄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무시하는 것은 사실상 다른 모든 죄를 더 사악하게 만드는 죄악이다. 그러나 즐겁게 성경에 복종하는 것은 바로 즐거운 마음으로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기마지막으로 겸손과 복종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도록 한다. 성경에서 가장 긴 장은 한마디로 조금 불편할 정도로 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기도문이다. 시편 119편은 이렇게 노래한다."내가 주의 법도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며 주의 길들에 주의하며주의 율례들을 즐거워하며 주의 말씀을 잊지 아니하리이다"(시 119:15–16).성경을 읽을 때 어떤 기도를 해야할지 모르겠다면, 바로 이 시편이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어떻게 해야 잘 들을 수 있을지에 관해서, 우리는 119편에서 다음 일곱 가지 기도 방법을 찾을 수 있다. 1. 하나님, 내 마음이 당신을 향해 커지게 하소서"내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하소서"(시 119:36)."주께서 내 마음을 넓히시면 내가 주의 계명들의 길로 달려가리이다"(시 119:32).2. 지금 읽는 것을 이해하도록 도우소서"나에게 주의 법도들의 길을 깨닫게 하여 주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이한 일들을 작은 소리로 읊조리리이다"(시 119:27)."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시119:73; 시 119:125, 144, 169).3. 당신의 말씀을 지키는 데 게으르지 않게 하소서 "내 소유는 이것이니 곧 주의 법도들을 지킨 것이니이다"(시 119:56)."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 주께서 명령하사 주의 법도를 잘 지키게 하셨나이다"(시 119:2, 4).4. 내 인생의 길에 당신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 119:105)."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시 119:130).5. 슬픔 중에 있는 나를 강건케 하소서"나의 영혼이 눌림으로 말미암아 녹사오니 주의 말씀대로 나를 세우소서"(시 119:28).6. 모든 종류의 방해로부터 나를 지키소서"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주의 길에서 나를 살아나게 하소서"(시 119:37).7. 당신의 약속을 지키소서"주의 말씀대로 나를 붙들어 살게 하시고 내 소망이 부끄럽지 않게 하소서"(시 119:116)."주의 말씀이 심히 순수하므로 주의 종이 이를 사랑하나이다"(시 119:140).간절한 마음으로 말씀 앞으로 나아가라예수님은 말씀하셨다.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눅 8:15). 하나님은 우리의 영혼이 날로 더 좋은 토양이 되어 그의 말씀을 겸손과 복종 그리고 기도를 통해서 더 잘 받을 수 있기를 바라신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이 베뢰아인들과 같이 믿음으로 충만하기를 원하신다. “베뢰아에 있는 사람들은…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행 17:11).존 파이퍼(John Piper)는 이렇게 말했다. “매일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 그것은 매일 성경 속에서 사는 것이다. 성경으로 호흡하라. 월요일에서 수요일까지 그 호흡을 참으려고 하지 마라. 매일 호흡해야 한다.” (“뿌려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말씀을 받는 놀라움을 체험하라. 겸손으로 말씀 앞에서 기쁘게 복종하라. 그리고 더 큰 깨달음과 기쁨을 달라고 기도하라. 어떻게 말씀을 들어야 할지 주의를 기울이라. 그리고 한 페이지, 한 페이지 펼쳐지는 성경 말씀 속에서 인생을 살아가라.원제: Take Care How You Hear: How to Receive God’s Word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무제
영성
묵상과기도
비유
씨
말씀
겸손
복종
기도
존파이퍼
깨달음
가정 폭력을 당하는 친구를 돕는 방법
by Darby Strickland
2021-06-09
나는 학대받는 결혼 생활에 시달리는 이들을 돕고 싶어 하는 사람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눈다. 그들 중 상당수는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모르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힘든 이를 진심으로 돕고 싶어한다. 성경은 약자를 돌보고 또 억압받는 자를 인도하고 보호하라고 명령하지만(시 82:1-4; 잠 31:9; 103:6; 히 13:3), 피해자를 돕는 것은 쉽지 않다. 어떤 희생자의 경우 자신이 학대 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에는 두려움으로 인해 모든 것을 숨기고 싶어함으로써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기도 한다. 세 가지 출발점상황이 불확실할 때 타인의 삶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쉽지 않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가정 폭력이 종종 위험 그 자체를 의미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상황은 결코 쉽지 않다. 이런 연약한 영혼들과 함께 걷는 것은 인내와 더불어 온화한 끈기를 필요로 한다. 학대 당하는 여인을 만나서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많은 실수를 저질렀다.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에 압도된 나는 대답을 하면서도 제대로 생각하지 못했고, 또한 내 대답이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도 고려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는 그런 실수로부터 배웠고 내가 배운 이 지식을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 그래서 약한 친구를 돌보는 방법을 많은 사람들이 알기를 바란다.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 영역에서 당신이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명령함으로써 상대의 선택권을 빼앗지 않는 것 - 상대가 받는 학대를 최소화하지 않고 단지 상대방이 하는 이야기를 경청하는 것- 가정 폭력 피해 경험이 있는 다른 사람들과 연결하는 것 이것은 기본이며 혼란스러울 때 다시 돌아가야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자, 친구를 돕는 여덟 가지 제안을 살펴보자. 1. 걱정하는 마음을 부드럽게 나누고 인내하라학대가 의심되면 친구에게 접근할 때는 최대한 예민해야 한다. 그녀에 대한 당신의 걱정을 털어놓아야 한다. “정말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 같아 걱정이 돼요”라고 말할 수도 있다. 상대가 학대에 대해 이야기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도 괜찮다. 방어적인 태도를 취할 수도 있고 당신을 믿는 것이 두렵거나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부드러운 접근을 통해서 상대가 준비가 되면 그때부터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 너무 강하게 접근하거나 학대에 관해서 너무 성급하게 말하면, 상대는 말을 하고 싶다가도 당신에게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 2. 믿으라학대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상당한 용기를 필요로 한다. 피해자는 학대를 과소평가하거나 은폐하려는 경향이 있기 마련이다. 특히 학대하는 가해자의 사회적 평판이 좋은 경우에 피해자의 말을 100퍼센트 믿는 것이 힘들 수도 있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상대방 이야기의 세부 사항까지 확인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피해자가 처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을 때에는 당신의 불신이나 의심을 충족시키기 위한 질문 대신 다음과 같은 질문을 통해 더 많이 말하도록 유도하라. - 예전에도 그런 비슷한 일이 있었나요?- 그 일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씀해 주시겠어요?- 배우자가 곁에 있으면 두려웠던 때가 전에도 또 있었나요? 피해자는 때로는 일관성이 없으며 중언부언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트라우마의 영향이므로 상대방이 말하는 방식 때문에 그 말의 내용 자체를 의심하는 오류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3. 피해자는 지금도 감시당하고 있을 수도 있음을 기억하라많은 경우, 피해자의 대화와 위치가 전자 기기로 모니터링된다. 가해자가 피해자의 이메일과 문자 그리고 모든 대화 내용을 다 보고 있다고 가정하라. 따라서 이렇게 부드럽게 경고를 주는 것도 좋다. “통제(또는 분노)에 어려움을 겪는 남자의 경우, 배우자의 의사 소통을 감시하는 것은 아주 흔해요. 그러니까 우리 지금 조금 더 조심해서 대화해요.”4. 가해자의 인격이 아닌 행동을 비난하라가해자에 대한 비판이 인격 자체가 아니라 학대 행위에 초점을 맞추도록 주의를 기울이라. 이런 식으로 말하면 된다. “그런 걸 당신에게 던져서 충격을 주다니, 정말로 그 사람이 잘못했네요.”“그 인간, 정말 너무 이기적이에요” 또는 “아니, 어떻게 그런 괴물하고 같이 살아요?”처럼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가해자의 전반적인 인격을 비판하는 경우, 피해자가 오히려 가해자를 변호하도록 만들 수도 있다. 가해자를 직접적으로 공격하지 말고, 그의 행동과 동기를 정확하게 짚어서 비난하라. 그렇게 함으로써 피해자는 그 행동 속 죄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좀 더 상황에 대한 명확한 판단을 하게 될 것이다. 5. 학대를 변명하지 말라어떤 경우에도 학대 행위를 변명해서는 안 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행동을 음주, 마약 또는 스트레스와 같은 것 때문이라고 변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학대에는 그 어떤 변명도 용납되지 않는다. 학대는 어떤 경우에도 잘못된 일이고, 그 어떤 변명도 허용될 수 없다. 나는 종종 피해자들에게 다음 두 가지는 사실일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다. “가해자는 중독되어 있고 그래서 학대적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모든 중독자가 다 그런 식의 가해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가해와 학대는 언제나 당사자의 선택입니다.” 6. 무엇을 어떻게 하라고 지시하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라피해자의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구출하겠다는 망상에 빠지면 안 된다. 내 경험상, 당신은 분명히 그런 유혹을 받을 것이다. 억압을 목격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억압을 받고 있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가 피해자의 모든 선택을 통제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피해자는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은 누구나 다 자신의 선택이 가져다 준 결과를 책임지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지 말라. “이것이 바로 당신이 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 대신 피해자와 몇 가지 가능성을 놓고 브레인스토밍을 하고 나서 이렇게 말하라. “자, 그러면 다음 단계는 뭐가 되어야 할까요?”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당신을 막는 것은 무엇입니까?” “어떻게 하는 게 가능할 것 같나요?”피해자가 다음 단계를 생각하도록 돕는 것은 달리 말해 그녀가 하나님의 도움으로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음을 믿고 있다는 신호다. 시간을 내어 피해자가 뭔가를 하도록 도와주되, 아주 간단한 변화를 결정하는 데만도 몇 달이 걸릴 수 있음을 명심하라. 그리고 그녀가 그 목표를 달성하는 데 줄 수 있는 도움이 무엇인지 살펴보라. 7. 피해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나눌 때 충분히 지지하라피해자가 법정, 경찰, 변호사 또는 교회 지도자에게 가야 할 수도 있다. 그것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동행하거나 다른 이를 소개해주어야 한다. 교회에서 모임을 갖는 경우, 거기에 참석하는 목사나 장로에게 그들의 위치가 피해자에게 위협적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을 미리 상기시켜야 한다. 무엇보다 그 모임 안에 피해자를 지지하고 그녀로 하여금 편안하게 이야기하도록 하는 사람이 꼭 참석하도록 준비하라. 8. 전문가 집단과 연결시키라학대는 큰 문제다. 피해자는 많은 지원과 지혜가 필요하다.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당신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큰 위험에 피해자가 노출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당신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수 있다. 가정피해를 다루는 전문가와 연결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피해가 발생하기 전에 예방 차원에서라도 이런 조치는 필요하다. 가정폭력을 신고하는 24시간 긴급 핫라인 1366(한국여성긴급전화)을 기억하라. 이러한 항목을 염두에 두면 내가 과거에 저지른 실수를 피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전문가는 아니지만 당신의 역할은 매우 중요하다. 당신은 피해자와 함께 걷고, 함께 기도하고, 약한 자를 도우시는 예수님을 상기시킴으로써 친구를 크게 축복할 수 있다(눅 4:18). 그녀를 전문 상담 기관 또는 교회 지원 센터 및 지역 사회 단체에 연결시켜 준 이후에도 계속해서 복음의 생명을 주는 방식으로 도우라. 두 가지 추가 원리첫 번째로, 때때로 피해자가 자신을 보호할 준비가 전혀 되어있지 않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그런 경우라면 피해자가 처한 위험을 부드럽게 상기시키고 그녀의 안전을 지켜줄 사람과 연결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가 원하지 않는 조치를 강요해서는 안 된다. 폭력적인 상황을 한 번 떠났다가 다시 돌아가는 것은 더 위험한 일이다. 피해자가 가해자와의 신체적 접촉을 피하고 의사 소통을 거의 하지 않아도 되는 등의 안전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취할 준비가 갖춰지면, 그때에는 도망쳐야 한다. 나는 내가 쓴 책, ‘이것이 학대인가: 가정폭력을 식별하고 피해자를 돕는 성경적 가이드(Is It Abuse? A Biblical Guide to Identifying Domestic Abuse and Helping Victims)’에 이런 부분에 관해서 상세하게 기술했다. 심지어 예수님도 위험을 피해서 도망쳤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야 한다(마 2:13–14; 요 8:58–59; 11:53–54). 그리고 그것은 바울도 다르지 않았다(행 9:22–25; 14:5–7; 17:8-10,14). 피해자와 아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하도록 계획을 세우고 조치를 취하는 것, 바로 그 자체가 지혜다. 두 번째로, 어머니가 아동 학대를 폭로하면 당국에 바로 신고해야 한다. 그러나 신고가 접수되고 나면 그 사실이 알려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피해자가 더 큰 위험에 빠질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즉시 전문가의 도움과 안내를 받아야 한다. 기다려서는 안 된다! 본격적인 조사를 시작하기 전에 피해자와 자녀의 안전을 도와줄 사람을 연결시켜야 한다. 이 글은 저자의 책, ‘이것이 학대인가: 가정폭력을 식별하고 피해자를 돕는 성경적 가이드(Is It Abuse? A Biblical Guide to Identifying Domestic Abuse and Helping Victims)’에서 허락을 받고 발췌한 것이다. 원제: 8 Ways to Help a Friend When You Suspect Domestic Abuse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가정
결혼
가정폭력
가정폭력대처법
공감
학대
트라우마
감시
전문가
성경적가이드
비판적 우정은 가능하다
by James Eglinton
2021-06-07
작년에 있었던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의 죽음으로 인해 한 가지 대화가 촉발되었다. 그것은 삶과 세상에 대한 관점이 전혀 다른 사람들 간의 우정이 가진 가치에 대한 것이다. 진보주의자였던 긴즈버그는 법조계 경력 내내 동료 판사인 안토닌 스칼리아(Antonin Scalia)와 오랜 우정을 유지했다. 그런데 스칼리아는 이데올로기적인 면에서 긴즈버그와 더 이상 다를 수 없을 정도로 상반된 사람이었다. 그들의 우정은 가족으로까지 확장되어 때때로 함께 새해를 축하하는 파티를 열기도 했다. 기념비적인 사진이 하나 있는데, 스칼리아와 긴즈버그 가족이 인도에서 휴가를 보내는 중에 이 두 사람이 함께 즐겁게 코끼리를 타고 있는 모습이다. 친구란 모름지기 나와 같은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 이 두 사람의 우정은 실로 놀라움 그 자체다. 최근 몇 년 동안 그들이 보여준 ‘이상한 커플’ 우정은 적지 않은 논평 기사와 라디오 쇼, 심지어 오페라의 주제로까지 등장했다. 그들이 보여준 반문화적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는 이상한 우정은 많은 이로 하여금 이런 질문들을 던지도록 만들었다. 왜 저들은 저런 우정을 유지하는 것일까? 저들의 우정은 도대체 어떤 것일까? 친구로 만나는 동안에는 서로의 차이점에 눈을 감기로 한 건가, 아니면 오히려 그 차이점 때문에 우정이 더 커진 건가? 아니, 저 두 사람에게 우정이라는 것은 도대체 어떤 의미였던 걸까? 나도 이념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친구로 둬야 하나? 이런 질문은 그리스도인과 관련이 있다. 과연 우리도 이런 우정을 소중히 여겨야 할까? 이상한 커플이런 질문에 답하기 위해 우리는 기독교인이자 급진적 회의론자였던, 20세기의 위대한 기독교 신학자 중 한 명인 헤르만 바빙크(Herman Bavinck)와 나중에 이슬람으로 개종한 자유주의 회의론자이자 그의 평생 친구였던 흐리스티안 스눅 후르흐론녀(Christiaan Snouck Hurgronje) 사이의 비슷한 흥미로운 우정을 생각해보자. 그들이 살았던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의 네덜란드 상황을 생각할 때, 당시 저명 인사였던 이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을 놓고 이상한 커플이라고 불러도 하나도 이상하지 않다. 바빙크와 스눅은 1870년대 라이덴대학교에서 학생으로 처음 만났고 두 사람 다 목사의 아들이었다. 이런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삶에는 조금도 비슷한 점이 없었다. 스눅의 아버지는 주류 네덜란드 개혁 교회의 목사였는데, 그는 조강지처를 버린 혐의로 목사직에서 물러났고 젊은 여성(스눅의 어머니)과 함께 런던으로 피신한 사람이었다. 부모의 성을 다 사용한(double-barreled) 스눅 후르흐론녀 가족은 네덜란드 귀족층이었다. 흐리스티안은 나름 고귀한 젊은 귀족이었지만, 남들이 보기에 의심스러운 가계도를 배경에 깔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바빙크는 보잘 것 없는 집안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얀은 아주 작고, 보수적인 기독교 개혁 교회의 목사였고 목수의 아들이었다.학생 때 친구가 된 헤르만과 흐리스티안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커지는 차이에도 불구하고 남은 생애 동안 긴밀한 연락을 유지했다. 물론 둘이 함께 코끼리를 타는 사진은 없다. 그러나 그들은 평생 동안 편지를 교환하며 개인적인 아픔을 나누고, 신앙과 정치 문제를 놓고 서로를 설득하고, 또한 서로의 글을 읽고 비평하며, 삶이 주는 기쁨과 투쟁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우리는 그 두 사람의 우정을 만날 수 있다. 그들의 편지가 보여주는 것은 기독교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믿음을 가진 깊은 사상가 또는 친구들이 나누는 풍부하고 솔직한 우정의 창이다.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하고만 우정을 나누고 같은 목소리를 내는 방(echo chambers)에서만 만나 서로를 격려하는 것을 우정이라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문화 속에서, 이 두 사람이 나눈 우정은 우리로 하여금 우정의 본질에 대해 기독교적으로 생각하도록 유도한다. 실용적 출발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고 권위있는 대학인 라이덴대학 주변의 문화는 귀족층 아들들에 의해 지배되었다. 1870년대 전형적인 라이덴 학생은 부모의 성을 다 사용하였고 또한 귀족 출신이었다. 또한 서로가 혈통이나 결혼으로 맺어진 관계가 많았다. 원칙적으로 스눅은 그런 환경에 속했지만 바빙크는 그렇지 않았다. 하지만 이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들이 외부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빙크의 가족 배경은 충분히 고급스럽지 않았고, 스눅의 가족은 아버지의 스캔들로 오염된 상태였다. 게다가 이 두 사람은 교수들이 가르치는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바빙크는 교리와 삶에서 정통에 전념한 반면, 급진적 회의주의자인 스눅은 교수들이 가르치는 대담하고 간편한 비정통에 대해 오히려 의심했다. 각각 다른 이유로 두 사람 다 외부인이었지만 바빙크와 스눅이 단지 그 이유만으로 친구가 된 것은 아니다. 라이덴대학에서 신학적으로 보수적인 학생이 바빙크 혼자가 아니었고 또한 스눅은 스눅대로 자기와 맞는 다른 자유주의 귀족 그룹과 친하게 지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이 특별한 우정을 키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 것일까? 라이덴에서 처음 2년 동안 학생들은 전공 공부를 본격적으로 하기 전에 공통 과정을 수강해야 했다. 그 기간에 바빙크와 스눅은 처음으로 교양 과정 중 하나인 아랍어 수업을 통해 유대감을 형성하게 된다. 그들의 우정은 연구 파트너가 되었을 때 시작되었고, 그들이 서로에게 깊은 우정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했다는 결심을 굳힌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 분명해졌다. 1878년, 두 사람은 같은 시험에 응시했다. 바빙크는 우등상을 받았지만 스눅은 단지 통과한 수준이었다. 바빙크는 이런 결과에 심각한 불의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담당 교수가 스눅에 대한 개인적 혐오가 작용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바빙크는 그 교수가 주는 학위를 거부했고 그 결과는 그에게 주어진 우등상의 취소였다. 스눅은 바빙크에게 이렇게 썼다. “당신이 보여준 우정은 내게 상장에 적힌 글과는 비교가 안 되는, 무한한 가치다.” 학교를 졸업할 때가 되어서 그들의 우정은 말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깊어졌다. 다른 방향시간이 흐름에 따라 바빙크과 스눅이 걷는 길은 완연히 달라졌다. 바빙크는 저명한 신학자가 되었고, 그가 구축한 독특한 브랜드는 정통을 중시하는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기독교의 경건을 사회 곳곳에 적용시키는 것이었다. 스눅은 이슬람 연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메카로 여행을 떠났는데, 그러는 중에 무슬림 전용 도시에 들어가기 위해서라도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스눅은 메카 순례 기간 동안 메카의 첫 번째 사진을 찍었고 그것을 책으로 출간했는데, 그 책은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가져다주었다. 그는 지금 인도네시아가 된 땅에서 수년 동안 살았고, 그곳에서 압달 가파르(Abd al-Ghaffar)라는 이름으로 무슬림 아내와 결혼했으며 또한 무슬림 자녀를 낳았다. 그리고 나중에 네덜란드로 돌아와 자유주의적 네덜란드 정체성을 되찾고는 네덜란드 여자와 다시 결혼했다. 그는 의심할 여지없이 그의 세대에서 가장 유명한 동양학자였고, 당시 그의 신학자 친구였던 바빙크보다 훨씬 더 유명한 인사였다. (물론 이제는 그 명성이 바뀌었다.) 신념과 삶에서의 이런 놀라운 차이에도 불구하고, 바빙크와 스눅은 평생 동안 직접 만나서든 또는 편지로든 접촉을 유지했다. 편지를 보면 두 사람 모두 ‘비판적인 우정’을 소중히 여겼고,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들하고만 어울릴 때 그 결과는 무디어진 통찰력이라는 데 생각을 같이 했다. 진정 예리한 사상가라면 믿을 수 있는 친한 친구, 그러면서도 자신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가정(assumptions)은 공유하지 않는, 그런 친구가 필요하다고 그들은 믿었다. 바빙크는 한때 그들의 우정을 “친구지만 동시에 적”이라는 말로 묘사하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정기적으로 서로의 글을 읽고 토론했다. 이슬람, 세속화, 성경의 권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기독교 신앙의 진리 주장에 대해서 그들이 서로 나눈 글을 보면 어떻게 달라도 이렇게까지 다를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다. 또한 내가 ‘바빙크: 비판적 전기(Bavinck: A Critical Biography)’에서도 썼듯이, 바빙크는 메카와 인도네시아에서 스눅이 이중적 이슬람 생활을 했던 것을 전혀 몰랐던 것 같다. 예를 들어, 그는 스눅이 메카에 들어가기 위해 무슬림이 됐다는 사실도 몰랐고, 또한 무슬림 십대 여자와의 결혼에 대해서는 스눅이 바빙크에게 거짓말을 한 게 사실인 거 같다. 이런 사실을 고려할 때 그들의 우정이 지속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들의 우정은 계속되었다. 바빙크가 쓴 ‘계시의 철학’(Philosophy of Revelation)은 회의론자를 타겟으로 한 변증론 책인데, 100퍼센트는 아니더라도 부분적으로는 스눅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여겨진다. 그리고 이 책을 놓고 나중에 그들이 토론한 내용을 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눅은 바빙크의 주장에 설득된 것 같지는 않다. 시간이 흐를수록 두 사람 사이의 간격은 더 커질 뿐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들은 끝까지 ‘비판적인 우정’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바빙크가 사망하기 전날 스눅은 친구의 아내인 요한나 바빙크 쉬퍼(Johanna Bavinck-Schippers)에게 친구의 임종을 앞두고 가진 마지막 방문에 관해서 이렇게 썼다. “나는 아직도 마지막 방문이 준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낙담이 크지만 배움도 있었습니다. 나는 경건함을 빼고 나의 좋은 친구를 기억할 다른 말이 없습니다. 우리가 서로를 알았던 1874년 부터 1921까지의 시간 내내 말입니다.”그러한 우정에는 확실히 흥미로운 점이 있다. 바빙크와 스눅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신학적이고 사회적으로 동일한 질문을 던지지만, 그들은 완전히 다른 전제와 관점에서 그 질문을 던진다. 그런 상황에서도 과연 하나님을 아는 게 가능할까? 그렇다면 어떻게 가능할까? 종교는 단순히 인간 문화의 문제인가(스눅), 아니면 더 높은 것을 가리키는 어떤 실제(바빙크)일까? 그들의 평생을 통해서 살펴볼 때, 그들의 우정은 두 가지 동기를 공유한 두 사상가 사이의 정직하고도 매우 긴 대화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동기는 상대방을 설득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방으로부터 배우려는 마음이다. 비록 한 세기가 지났지만, 그들이 남긴 교훈은 여전히 유익하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사랑하는, 통찰력 넘치고 날카로운 신학자 바빙크를 만드는 데 그의 친구가 한 역할은 결코 적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날 이런 우정을 만나는 것은 쉽지 않다. 같은 코끼리를 타고 있는 라이벌 판사를 만나는 게 드문 것처럼 말이다. 원제: Why Befriend Your Opponents? Bavinck on ‘Critical’ Friendship출처: www.thegospelcoalition.org번역: 무제
생활
관계
헤르만바빙크
개혁주의신학
이상한커플
라이덴대학
스눅흐리스티안
계시의철학
비판적우정
사랑하기 힘겨운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까
by Marshall Segal
2021-05-24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다. 죄가 우리 각자를 가만두지 않기 때문이다. 성숙한 사람도 예외가 아니다. 죄는 사랑을 좌절시키고 엉망진창으로 만들려 한다. 그래서 친구 관계나 결혼 생활 또는 자녀 양육이나 교회 사역처럼, 그 사랑이 더욱 깊고 꾸준히 자리해야 하는 상황일수록 죄에 따른 결과도 더욱 깊고 고통스럽게 찾아온다.우리가 지나온 세월만 잠시 돌아봐도, 자신의 마음이나 소중한 관계 속에서 무엇이 바뀌지 않았고 또 무엇이 발전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지 평소보다 더 깊이 알 수 있다. 그래서 끈질기게 지속되는 죄의 패턴이나 내면에서 끝나지 않은 투쟁의 기운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늘 그렇듯 자신의 약점은 마냥 약하게만 느껴질 수 있고 회복되지 않은 상처 또한 그대로 볼 수가 있다. 그리하여 실망이나 좌절을 느끼게 되면, 또다시 낙천적인 생각을 품고 새로운 결심을 하면서 마음을 달랠 수 있지만, 삶이 이내 무너지고 다시금 상처를 받는 순간 그 효과는 사라지고 만다.이처럼 우리는 사랑하기 어려운 존재로 살아간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우리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랑하기 어려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는 사명을 안고 살아간다. 그런데 이 사랑의 씨름이 쉽게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에 우리 스스로는 당황할지 몰라도 하나님은 그렇지 않다. 그분의 능력도 우리의 씨름 가운데 소멸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분은 가장 힘겨운 관계를 통해 우리 안에서 가장 중요한 일을 행하실 때가 많다.다루기 어려운 관계를 푸는 비결바울은 신자들 사이에도 다루기 어려운 관계가 있으며 그 관계에서 골치 아프고 복잡한 문제들이 야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예를 들어 로마서 14-15장에서 그는 믿음이 약한 자를 사랑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음이 강한 자를 향해 약한 자를 사랑하라고 교훈한다. 또 믿음이 약한 자가 강한 자를 사랑하는 게 어렵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믿음이 약한 자를 향해서도 강한 자를 사랑하라고 권고한다.세워진 지 얼마 안 되는 로마의 그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무엇을 먹고 또 무엇을 먹지 말아야 하는지와 같은 민감한 이슈로 인해 성도 간에 긴장감이 돌고 있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여 특정한 음식을 먹지 않는 이들이 있었는가 하면, 그리스도를 경외하여 자유롭게 그 음식을 먹는 이들도 있었다(롬 14:6). 그러나 양자 모두,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하기는 힘들어했다. 오히려 서로를 업신여기며(롬 14:3) 비판하려고 했다(롬 14:13).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도전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자]”(롬 14:19). 그는 부차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를 칭찬해 주고, 중대한 일을 두고는 서로 간에 더 깊고 커다란 화평을 열심히 이뤄야 한다고 말했다.여기서 특별히 관심을 둬야 하는 문제는 ‘어떻게’ 그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가이다. 바꿔 말하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교회 안에서 경험하는 그 어렵고 민감한 관계 속에서 인내할 수 있는가를 물어야 한다. 바울은 여러 번에 걸쳐 그에 대한 답변으로 ‘소망’을 언급한다(롬 15:4, 12, 13). 그러면서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는 그분을 따르지 않는 자와 달리 어려운 관계 속에서도 인내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설명한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에게는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한 다음과 같은 메시지로 단락을 마무리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바로 그 하나님 안에 있는 참된 소망이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제공한다.소망이 가져다주는 변화그렇다면 소망은 어려운 관계 속에서 어떠한 변화를 일으키는가? 바울은 편지의 전반부에서 화평과 즐거움과 믿음을 다름 아닌 소망과 연결시키며, 그 각각의 관계가 어떠한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 5:1-2).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고 전능하신 만유의 하나님과 화평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 화평은 소망을 가져다주는데, 그 소망이 진짜라면 우리는 누구보다도 즐거워하고 누구보다도 사랑하며 인내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우리가 진정으로 믿는 바가 무엇인지는 우리가 죽었을 때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현재부터 그날에 이르는 세월 가운데 특별히 고통스럽고 감당하기 쉽지 않은 시간 속에서 진가를 드러내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실제로 나타나 죄가 발붙일 수 없는 세상이 수십 년 안에 도래하리라고 믿는다면, 어떻게 마음속에 쓴 뿌리를 두고 몇 주 혹은 몇 달 동안이나 키워 갈 수 있겠는가? 또 하나님이 우리와 화목하려고 자기 아들을 내주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누군가를 사랑하기 어렵다고 포기할 수 있겠는가? 나아가 하나님을 적대하며 우리 안에 품었던 죄악된 동기를 그분이 용서하셨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어떻게 자기 연민과 타인에 대한 분노로 속을 끓일 수 있겠는가? 우리가 사랑 가운데 인내하는 일을 어렵다고 느낄 수 있는 만큼이나, 실은 우리 각자가 사랑받기 어려운 존재였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오히려 버림받기 쉬운 존재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사랑하셨다(지금도 물론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에겐 어마어마한 소망이 있다. 사랑받기 어려웠던 우리의 상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로막기는커녕, 그 깊이와 한계를 알 수 없는 사랑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는 배경이 되어 주었다(롬 5:8).소망이 없는 사람은 인생의 항해를 전진시키는 돛과 풍파에 흔들리지 않도록 중심을 잡아 주는 밸러스트, 그리고 항로를 주장하는 키와 마침내는 항구에 정박할 수 있게끔 붙들어 주는 닻을 모두 상실한 배와 같다. 그래서 인간관계에서 실망과 갈등과 자기 연민 따위로 폭풍우를 맞게 되면, 그저 휘청거리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둔다. 그리고 그 소망이 진짜라면, 사랑으로 씨름하는 관계 속에 쌓인 죄악의 담벼락은 서서히 침식되다 못해 결국에는 무너진다.시련이 이루어 내는 소망그렇다면 바울은 어떻게 말을 이어가는가?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노라]”(롬 5:3). 이 환난에는 당연히 우리가 겪는 어려운 관계, 망가진 관계, 다투는 관계가 다 포함된다. 여기서 우리는 환난을 제공하는 상황이나 상대를 그저 참고 견디는 게 아니라 그 환난 가운데 도리어 즐거워한다. 왜 그런가?“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롬 5:3-5).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환난은 인내를 이루어 낸다. 여기서 인내는 신실한 자세로 환난을 견딜 수 있게 해 주는 능력을 말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솟아나는 능력을 말한다. 열심히 운동할 때 찾아오는 고통을 통해 육체의 인내력이 자라듯,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사랑할 때 찾아오는 고통을 통해 영혼의 인내력이 자란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다른 데 비할 수 없는 유익을 가져다준다(딤전 4:8). 바로 이 인내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 아들의 형상을 서서히 본받게 하신다. 그리하여 우리의 마음은 더욱 친밀하고도 광범위하게 그분의 마음을 닮아가게 된다. 또한 그분 안에 있는 우리의 소망이 자라갈수록,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현실에 대한 우리의 확신도 깊어진다(롬 8:18).따라서 어려운 인간관계는 우리를 그리스도와 같이 변화시킬 뿐 아니라 그러한 변화를 통해 우리의 믿음도 증진시킨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분의 백성이며 그분과 같이 영원히 살게 되리라는 믿음을 끌어올려 준다. 이런 식으로 어려운 관계는 우리의 신앙이 진짜라는 사실을 드러내게 된다. 그렇기에 우리의 인생에서 만나는 사랑하기 어려운 사람을 생각하며 불평하고 싶은 마음이 들수록, 하나님은 그 사람을 우리에게서 거두지 않으신다. 오히려 우리 믿음의 진정성을 마음속 깊이 확인할 수 있도록 그 사람을 사용하신다. 이처럼 타인을 사랑할 때 어쩔 수 없이 겪게 되는 스트레스와 마찰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여실히 드러내며 그분을 향한 우리의 사랑도 더욱 뜨겁게 만들어 준다.소망의 샘을 충전하라어쩌면 우리 중에는 인간관계에서 이미 탈진한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소망의 샘이 말라 누군가를 사랑하기엔 지쳐 버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바울이 우리를 위해 남긴 기도와 격려를 그에게 전달해 주고 싶다.“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바로 이 소망의 하나님께 우리의 진정한 소망이 있다. 그분이 없는 어떠한 미래도 우리는 원하지 않고 바라지도 않는다. 우리가 그분 안에 있는 소망을 품을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 속에 계시기 때문이다. 바로 이 하나님이 주시는 소망은 모든 상황에서 우리에게 만족을 주고 화평하기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에게 평강을 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속적으로 소망의 하나님께 간구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흘러넘칠 때까지 그 샘을 채워 달라고 말이다. 그리하면 즐거움과 화평이 솟아나고 생명력이 가득한 사랑을 공급받게 된다.물론 우리 모두 다 사랑하다가 지칠 때가 있다. 인간관계의 갈등이 가파른 언덕처럼 눈앞을 가로막을 때면, 그 언덕을 오르다 숨이 차기도 한다. 정곡을 찌르는 비난이라도 들으면, 그 불시의 습격으로 쓰러지기도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미안하다’고 말해야 할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이처럼 먼 미래가 아닌, 바로 이 순간의 사랑을 위해 힘겹게 싸워야 하는 게 우리의 인생이다. 그러니 사랑하기 힘겨운 사람을 사랑할 때, 우리 곁에 있는 소망을, 아니 우리 곁에 계신 그분을 붙들도록 하자.원제: How to Love the Hard to Love출처: www.desiringgod.org번역: 장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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